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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닭 쫓는 노인

 

 

백남빈은 배가 고플 때 외에는 조사동을 나가지 않았다.

나가 보았자 강미루도 없고 흑왕도 없는데 새소리만 듣기는 싫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백 조사의 사자검결과 진룡 사부의 검결만을 외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어 나머지 십일 인의 사조들의 검결도 모두 외우기로 하였다.

 

한번 몰두하여 깊이 빠지자 세상의 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사조들의 검결을 외우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혹시 틀린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자검결은 본래 그 뜻이 애매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읽어도 읽어도 쉽게 외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이것저것 뒤죽박죽되어 버리곤 했다.

다른 사조들의 검결 역시 이백조사의 사자검결에서 파생한 탓에 비슷한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이백과 진룡의 검결만을 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백남빈은 먼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검결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암송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거듭거듭 확인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찾아먹고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다시 새로운 검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암기가 확실히 되어갈 수록 각각의 검결들 사이에 무언가 서로를 구분 짓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열세 개의 검결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독립성이 뚜렷하여 전혀 섞일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백남빈이 조사동에서 검결을 외느라고 쳐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큰비가 몇 번이나 왔다.

겨울이지만 창평곡은 눈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큰비가 여러 번 왔다는 것은 큰 눈이 자주 왔다는 말이 된다.

며칠 전 그는 열세 개의 검결을 전혀 헷갈리지 않고 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의 점검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

 

이날도 백남빈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요기를 하기 위해 조사동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평곡에 들어 온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미루가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미루가 떠나고도 수십일은 족히 흘렀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녹지를 지나치는데 그날따라 겨울 장마에 무너진 오두막이 그의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한데 풀색과는 전혀 다른 남색 천이 사각으로 접혀져 빗물을 튕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전에 입었다가 미루에게 준 남색상의였다.

백남빈은 그것을 힐끗 보았다.

전에도 몇 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색상의 속에 어떤 각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른 날에는 옷자락이 부풀어서 알 수 없었던 것이 옷감이 비에 젖어 달라붙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루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했었는데... . 남색상의... 뭐였더라?)

백남빈은 그 사이 강미루의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가가서 접혀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속에 다른 것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확 펼쳤다.

펄럭!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갑자기 기름종이에 싸여진 한권의 책이 옷자락 속에서 빠져나와 앞쪽으로 날아갔다.

백남빈의 몸이 일렁이는 순간 땅으로 떨어지던 책은 그의 손에 빨리듯이 들어갔다. 녹지의 물이 그 정도로 깊은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다.

 

<八陣圖解>

 

표지에 적힌 그같은 제목이 백남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미루가 한 말은 이 책을 찾으라는 거였구나. 그녀는 창평곡을 들고 날 수 있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나 몰래 감추고 있었고...)

백남빈은 비로소 강미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자신들의 집안은 원수나 다름없다.

그 때문의 두 사람의 사랑은 오직 이곳 창평곡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강미루는 창평곡을 나가기 싫었고 팔진도해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강미루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백남빈은 팔진도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강미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바닷가의 정월 바람은 차갑기도 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이 푸른 바다색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도처에서는 패권다툼이 일어나고 무황성과 신랑성의 격돌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산산맥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바닷가는 세상의 혼란과 상관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사별의 슬픔은 목이 메고

생이별은 항상 가슴 쓰리네.

강남은 풍토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조차 없구나.

친구(;이백)가 내 꿈에 찾아오니

나를 오래도록 생각함일세.

평소의 혼이 아닌 듯하여 두려우나

길이 멀어 알 수가 없네.

그대의 혼이 올 때 풍림(楓林) 푸르더니

돌아갈 때 관문(關門) 요새(要塞) 어둡구려.

그대는 지금 유배되었건만

어찌 날개 얻어 여기 왔는고.

지는 달이 내 집 들보 비추는데

그대 얼굴 아닌가 의심하였노라.

물은 깊고 파도 거치니

부디 교룡(鮫龍)에게 잡히지 말게.

 

바닷가를 따라 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낭송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녹색의 장검을 어깨에 둘러맨 청년이 산길에 쌓인 눈을 밟고 걸어오면서 책을 펴든 채 읽고 있었다.

청년은 창평곡을 나선 백남빈이었다.

무황성으로 가는 일은 급했었지만 자신이 알려야 할 소식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야심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증빙물(證憑物)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양부의 명령이므로 무황성으로 가서 군명(軍命)을 완수해야겠지만 거들떠보기나 할지 몰랐다.

자연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밤 꿈에 강미루가 보여 울적했었다.

그래서 창평곡을 나설 때 갖고 나온 여러 권의 시집 중 하나를 뒤적이자 두보가 이백을 꿈에 보고 지은 시가 있었다.

그 정이 흡사 자신이 강미루를 그리워하는 심정 같은지라 길을 걸으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의 심금(心琴)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길 옆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상투를 튼 노인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 떨어지는 소리에 백남빈이 고개를 돌릴 때 노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는데 노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이어 노인은 다시 고개를 낮추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동에 백남빈은 어리둥절했다.

백남빈이 갸웃하며 다시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고수였구나!)

백남빈은 노인의 유령같은 신법에 놀라고도 감탄했다.

노인은 백남빈이 무슨 소리라도 낼까 싶어 주의를 주면서 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백남빈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끄는데로 따라갔다.

길 옆 숲속의 커다란 나무들을 몇 개 지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백남빈의 귀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지키고 서있다가 저 나무사이에서 작은 짐승이 뛰쳐나올 때 크게 소리 한번만 질러주게. 그러면 내 평생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백남빈의 소매를 잡고 있는 노인의 입술이 옴찔거리며 전음술(傳音術)을 펼친 것이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지라 백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까닥였다가 드니 상투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 외에 다른 무공은 평범한 백남빈에게는 부럽게만 느껴지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부러움이 일어 노인이 서있었던 곳을 한 번 더 쳐다볼 때였다.

!

갑자기 앞쪽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노란 그림자가 휙 뛰쳐나왔다.

백남빈은 소리를 질려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사사삭!

노란 그림자는 쏜살처럼 백남빈의 옆을 스쳐 다른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앞이 어른거리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바보같으니... !"

욕을 하면서 땅에 침을 탁 뱉은 노인은 백남빈을 한번 노려본 후 노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노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백남빈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품속에 집어넣고 노인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은 따로 신법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창평곡에서 내공과 외공을 깊이 쌓게 된 후로 몸이 강해지고 가벼워져서 바람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를 오리쯤 달려가니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말라버린 가시덤불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백남빈이 자기를 쫓아 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도 고수였을 줄은 몰랐구만."

"아닙니다. 저는 무황성의 일개 무사에 불과 합니다."

백남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빈정거렸다.

". 언제부터 무황성에서 그대같은 절세고수를 일개 무사로 두기 시작했을꼬?"

백남빈은 오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결이 전혀 흩트려 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걸 보고 백남빈이 실력을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육정풍(陸靖風)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아무튼 그딴 것은 조금 있다가 따지자. 지금은 바쁘니까."

노인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다시 가시덤불 쪽을 돌아보았다.

백남빈은 육정풍이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는 않아서 육정풍이란 노인과 함께 가시덤불 쪽을 살펴보았다.

무성한 가시덤불 맞은편에는 노란색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닭인 듯 한데 노란 깃털이 선명하며 부리가 강철같이 야무지고 새빨간 벼슬이 멋있어 보였다.

그 노란 산닭의 뒤는 절벽이었다.

(왜 이 노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지 알겠다. 만약 덤불을 건드리기만 하면 닭은 절벽으로 뛰어 내리고 말겠지.)

백남빈은 노란 산닭이 맘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닭도 백남빈과 육정풍을 쳐다보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척 오만해 보이는 자태였다.

"! 네놈도 저 황계(黃鷄)를 탐내고 있구나.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육정풍이 백남빈에게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저놈은 내가 장백산(長白山)에서 발견하여 여기까지 몰아온 거야. 비록 아직 내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내 것이나 다름 없다구."

"어째서 별 것 아닌 산닭 한 마리를 이천 리 넘게 쫓으면서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백남빈의 물음에 육정풍이 눈을 부라리며 얼굴표정을 무섭게 했다.

"별것 아니라고? 저 황계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놈!"

백남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열네 살에 무황성 등천제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양부의 영향으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를 무식한 놈으로 취급하자 백남빈은 영 기분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황계라는 이름의 산닭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저놈의 황계를 내가 잡아버려야지. 이 영감이 얼마나 애걸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계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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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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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처절한 일막

 

 

청포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반월도(半月刀)가 꽂혀 있다.

또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난 오른쪽 손목에 특이한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무쇠로 만든 팔찌인데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는 징기스칸의 상징이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교숙하를 납치한 장본인인 철목풍이었다.

그 계집이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겠군!”

철목풍은 포대붕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음침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라!”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에 찬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는 장차 대원제국의 가한(可汗;황제)이 될 존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

철목풍은 음산하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두두두!

그러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대과벽쪽으로 달려왔다.

그 말들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명씩 타고 있는데 맨 앞쪽에서 달려오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양쪽 손목이 함께 묶인 채 질질 끌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의복이 갈가리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분노와 안도감을 함께 느끼며 포대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래선 안돼지!”

꽈르릉!

하지만 철목풍이 음험하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철목풍! 네놈이...!”

포대붕은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휘릭!

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로 지면으로 내려서야했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은 장내에 이르러 멈춰 섰다.

그 즉시 선두의 장한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으으으!”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그 여인은 바로 포대붕 자신의 아내인 교숙하였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아도 교숙하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같았다.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데려온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웃었다.

죽일 놈!”

포대붕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라!”

휘익!

포대붕은 안고 있던 금발소녀 철산산을 철목풍에게 던졌다.

으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철목풍은 날아든 철산산을 두 팔로 받아 안으며 득의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자신의 두 팔에 안긴 철산산을 내려다보는 철목풍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찢어 죽일...!”

헌데 아내 곁으로 내려선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교숙하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교숙하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쳐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교숙하의 아랫도리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오는 도중에 알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하의가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숙하는 이미 수많은 사내들에게 짓밟힌 상태였다.

으으으...”

아내의 상태를 살펴보며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징기스칸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속을 지킬 줄 알았다!”

포대붕은 아내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급히 풀며 철목풍을 향해 이를 갈았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철목풍은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뭐라고?”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철목풍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철산산의 얼굴을 살펴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교숙하의 허옇게 들어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교숙하를 유린하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하여간 불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이 짐승만도 못한...!”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 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포대붕에게 있어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 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으으음!”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해주자 교숙하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안심하시오 부인. 내가 왔소!”

아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부르르!

정신을 차린 교숙하는 눈을 부릅뜨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 당하던 와중에서도 잊지 않았던 남편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교숙하의 가슴을 메운 것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숱한 사내들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떠오른 때문이다.

!”

직후 교숙하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혓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교숙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문 것이었다.

... 부인!”

포대붕은 기겁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교숙하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런!”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푸들푸들 떨었다.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보고 있던 철목풍이 혀를 찼다.

... 뭐라고?”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같지 않게 보이는 그였다.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네 마누라의 꿀단지를 가장 먼저 맛본 건 바로 나였다. 내게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의 몸 아래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죽인다!”

쐐애애액!

철부를 뽑아든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가 대지를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커억!”

콰당탕!

하지만 다음 순간 피를 뿌리며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 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로 덤빈 결과 철목풍의 단 일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교숙하가 당한 무참한 일들을 떠벌린 것이다.

크으... ... 짐승만도 못한 놈!”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포대붕은 가슴의 혈도 몇 곳이 파괴되는 바람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다. 포대붕!”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집이 딸을 납치한 네놈을 어떻게 처단할지 궁금하구나!”

철목풍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

철목풍은 두 눈을 야릇하게 번득이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네놈 설마!”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마라!”

포대붕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혈도가 짚인 상태인 그가 철산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포대붕은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미 한 마리 짐승으로 변한 철목풍의 귀에 포대붕의 애원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철목풍은 철산산의 속옷도 거침없이 벗겨버렸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소녀의 교구는 말 그대로 황홀한 것이었다.

철목풍 주변에서 철산산의 알몸을 들여다보는 장한들의 눈이 짐승의 그것같이 번들거린다.

흐흐흐 기가 막히군.”

철산산을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놓은 철목풍의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우리 공주님의 꿀단지를 구경해볼까?”

철목풍은 극한의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산산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죽일 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악을 쓰던 포대붕은 선혈을 울컥 토해내고는 축 늘어졌다. 눈앞에서 어린 주인이 철목풍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기혈이 뒤집혀 기절한 것이다.

흐흐... 곧 달단여왕이란 오만한 네 어미도 본좌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목풍은 황금색의 춘초로 덮인 철산산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며 도착척인 흥분에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만 하지! 보기에 흉하니...!”

돌연 철목풍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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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1)

 

 

산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보이는 곳에 주점(酒店)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점 앞에 내 놓은 의자와 식탁에는 다섯 명의 손님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임청우는 길가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주인을 찾았다.

음식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건네 준 후에 다가왔다. 육십이 넘은 노인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이다.

임청우는 삶은 돼지고기와 만두, 그리고 술을 주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없이 눈이 옆 자리로 계속 돌아가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행과 함께 앉아있던 옆 자리 사람이 그런 임청우가 못마땅한지 음식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놓고 먹기 시작했다.

!

다행히 주인이 음식을 빨리 가져왔다.

?”

헌데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보았다. 식탁에 놓인 것은 그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한 그릇의 미음이었던 것이다.

급체에 걸려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네. 먼저 그것을 먹고 나면 주문한 것을 가져다주겠네.”

늙은 주인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을 굶은 후이니 기름진 음식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미음부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임청우는 주인의 성심에 감동하며 미음 그릇을 들고 한입에 마셔버렸다. 미음은 이미 식어있어서 먹기도 쉬었다.

한데 미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임청우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있던 다섯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차! 했다.

에워싼 사람들은 검을 멘 세 명의 중년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임청우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청우는 혈도가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이란 참으로 경우가 없구나. 낯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보기만 하면 뺏으려 드니...)

임청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연이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을 멘 중년인들 중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본인는 화산파(華山派)의 상승칠검(常勝七劒)중 오검(五劒) 척광태(擲光太)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내 사제로 육검(六劒) 마진산(馬晉山)과 칠검(七劒) 동호복(董毫福)이다.”

임청우는 농산을 내려와 소림사니 무당파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미음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상승삼검의 맞은편에 서있던 두 청년 중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만상보(萬商堡)의 진가형제(眞價兄弟). 소형제는 그 칼을 우리에게 팔 생각이 없는가?”

만상보는 무림인들 중에서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와, 상인들 중에서 야심이 큰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은 중원 천하에 발을 뻗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고팔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생명을 팔고 사는가 하면 무림의 온갖 기보(奇寶)와 신병이기(神兵異器), 무공비급(武功秘級)을 거래하기도 했다.

진가형제는 만상보의 수천 명 상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들로 실제에 있어서는 무림인들이 그들을 진가형제(眞假兄弟)라고 불렀다.

그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

상승오검 척광태가 검을 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진가형제!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이자는 마면혈도의 칼을 지니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형제가 가고 나면 혈도를 혼자서 차지하겠다는 것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소리친 자는 음식을 임청우가 보지 못하도록 돌려놓고 먹던 청년이었다.

진가형제중 형쪽인 그자는 임청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그 칼을 우리에게 팔기만 하면 자네의 목숨은 우리가 지켜주겠네.”

한데 그자는 손바닥이 뜨끔함을 느끼며 황급히 임청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던 무쌍층층공과 용조수가 합쳐진 공력, 즉 용조층층공이 은연중에 발동하여 그자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그 공력의 대단함은 감히 자기들 진가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자는 즉시 아우의 소매를 끌면서 은밀히 말했다.

가자, 이번 장사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하는 것 같다.”

“...?”

진가형제의 아우쪽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두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주점의 뒤로 돌아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척광태 등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가형제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눈앞의 소년에게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척광태는 아무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쩌면 혈도의 주인인 마면혈도가 주위에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척광태의 시력과 청력으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청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음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이 어떻게 마면혈도의 성명병기인 혈도를 가지고 있을까?)

척광태가 은근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임청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슷!

마치 안개가 이는 듯 하더니 임청우 곁에 서있는 동호복의 뒤에 황색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척광태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며 소리쳤다.

사제! 피해라!”

 

한 인간의 생명은 전우주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어느 누군가가 판결의 취지문에 써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우주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생명은 전혀 고귀할 것도 없는 다른 어떤 사실들 앞에 맥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 말은 너무 고매해서 사람에게서조차 멀리 떠올라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승칠검의 다섯 째 척광태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동호복은 외침을 듣는 순간에 움찔했지만 죽음의 손길로부터 피하지는 못했다.

미친 마귀의 눈빛을 한 그 황색 가사의 중()은 합장하듯이 손바닥을 모았고, 두 개의 동발(銅鉢)이 합쳐지듯 그 손바닥이 합쳐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던 동호복의 머리는 압착기에 눌린 계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척광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엔 불신과 공포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직후 척광태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

묘한 콧소리와 함께 척광태의 시체 뒤에 한 명의 노파(老婆)가 나타났다.

손에는 금방 사용되었을 법한 가는 천잠사를 감고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것 같은 노파다.

그렇지만 결코 곱게 늙지는 못했다.

세파가 스쳐가며 만든 주름살일랑은 차치하고라도 얼굴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근육들이 남아있는 것은 노파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긴장이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임청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상승칠검중 육검 마진산이 죽는 모습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엔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차르르륵!

문득 임청우의 눈앞에 한 폭의 족자(簇子)가 펼쳐졌다.

비단폭이 스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족자 뒤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거지가 서있다.

거지가 임청우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거지의 눈빛은 종이를 태울 만큼 강렬하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임청우는 단지 보았다고 했을 뿐인데...

으하하하!”

그 즉시 거지의 살벌한 눈빛이 가시면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킬킬킬!”

거의 동시라 할만큼 노파와 중도 덩달아서 웃었다.

삼인의 웃는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임청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공력이 뛰어난 고수들의 웃음소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뒤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 신체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노파가 웃음을 뚝 그치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있느냐?”

임청우도 즉시 되물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거지가 큰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늙은이가 이걸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분명히 여기서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분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임청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체에 걸릴까봐 미음부터 내주었던 주점 주인을 생각하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끈 치솟는 무엇이 있었다.

네놈이 감히 흥정하려는 건가?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

날카롭고도 높은 소리의 음성으로 노파가 말했다.

임청우는 이 순간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는 그가 숲속에서 불과 얼마 전에 본 황의소녀였다.

그리고, 높고 낮은 휘파람 소리의 주인들이 바로 이들 세 명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한데 이들이 왜 엉뚱하게 자기를 닦달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끊어놓기까지 하는가?

황의소녀를 쫓기만 한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닦달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그러해야할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아왔기에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선 미워하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청우의 속에서는 빙산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던 자들이 이젠 한갓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 중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소저를 이놈은 봤다고 하니 어쩌면 이놈과 소저는 아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면서 중을 쳐다보았다.

중이 근처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이 근처에 계신 줄 알고 있소이다.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소.”

중이 임청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반반하군.”

하지만 그 반반한 임청우의 목에는 어느 새 노파의 천잠사가 감겨져 있다. 살짝 힘주어 당기기만 하면 무처럼 성둥 베어지고 말 터이다.

임청우의 입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이 있으면...”

나지막하고 탁한 음성이지만 폭발할 듯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은 세 사람의 이목을 그에게 끌었다.

임청우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노파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슴이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는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릇됨을 용납하지 않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천지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것은 우협 장백승을 은연중에 닮아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걸승(妓乞僧), 즉 기녀 차림의 노파와 거지 중은 그제서야 임청우의 면목을 바로 대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몰골이지만 한 자루의 보검과 보도를 가지고 있다.

청강사자검(靑鋼獅子劒)!”

거지가 먼저 임청우의 검을 알아보고 경악하며 주춤 물러섰다.

! 휘익!

노파와 중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장 밖으로 피했다.

... 넌 우협 장백승과 어떤 관계냐?”

임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무엇이건 벨 것 같은 검기가 청강사자검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만 가자! 만리향(萬里香)으로 봐서 소저는 아직 종남산(終南山)을 벗어나진 않았다.”

노파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지며 거지와 중에게 말했다. 그 음성에서만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거지와 중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임청우는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책속에 매장 당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덜컹!

길가 주점의 좌측 숲에 있던 굵은 나무 한 그루의 껍질이 열리더니 황의소녀가 튀어나왔다.

슈우우웅!

소녀는 임청우의 곁을 스치면서 그를 나꿔채 숲으로 달려갔다.

임청우는 순간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꼼짝없이 소녀에게 끌려 허공을 날아갔다.

황의소녀가 날아가는 곳은 노파 일행이 간곳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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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색마와 비구니

 

 

() 늙은이는 물론이고 고검추의 행방도 묘연해졌습니다.”

삼십살객(三十殺客) 정팔(鄭八)은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녀곡에 초혼전을 남겼었던 그자는 사신각의 삼십살객중 한명이다.

사신각에서의 직급은 청부살인을 성공한 회수로 정해진다.

열 번 성공한 자는 십살객(十殺客), 백 번 성공한 자는 백살객(百殺客)으로 불리는 식이다.

백살객은 사신각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된다.

정팔이란 자가 삼십살객으로 불리는 것은 삼십 번 이상의 청부 살인을 완수했다는 의미다.

서른 살 남짓인 정팔은 근래 들어 사신각 내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객 중 한명이다.

대 늙은이는 몰라도 고가놈은 이미 기련산을 빠져나갔다고 봐야겠군.”

사신각주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신각주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기련산 동쪽 산록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다.

그자는 기련산에 나타난 대씨 성의 무시무시한 고수를 피해 기련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신각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팔을 비롯하여 몇몇 자객들로 하여금 팽가촌 일대를 감시하게 했었다.

하지만 고검추의 행방은 묘연해져 기련산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정팔 너는 기련산에 남아서 팽가촌을 감시해라. 고가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본각이 철수했다 여기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존명!”

사신각주의 지시에 정팔은 고개를 조아린 후에 자리를 떴다.

고검추! 네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는 네놈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신분이 있으니...”

사신각주는 잘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쏴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서 있었다.

토지묘는 농사를 관장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휴우... 지독하게 퍼붓는구나."

문득 토지묘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토지묘 내부는 오랫동안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으며 칠이 벗겨진 토지신의 신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그 토지묘 문간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영준한 용모에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소년이다.

고검추... 바로 그였다.

이곳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이다.

기련산을 떠난 고검추는 한 달여 만에 이곳 신개령에 이르렀다.

이제 열흘 정도만 더 가면 호천무맹이 자리한 복우산(伏牛山)에 이를 수 있다.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의 유언대로 호천무맹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늦여름의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토지묘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개령까지 오는 동안 고검추는 태을강기를 꾸준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 십성에는 이르지 못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고검추는 태을강기와 함께 은발마희 옥여상이 남긴 혈전삼식도 틈틈이 연마했다.

덕분에 제일식 분뢰개벽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철봉황은 어떤 여인일까? 어머니는 왜 그녀를 찾아가라 하셨을까?)

토지묘 문간에 기대앉은 고검추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고검추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휘익!

멀리에서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토지묘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굴까? 이런 산중에...)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벌떡 일어섰다.

양모 당혜선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사신각의 자객들이 초혼전에 묻어있던 백일취를 맡고 추격해온 게 아닐까?)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고검추는 토지묘로 접근하고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기련산을 내려온 후 고검추는 초혼전을 불에 태워 백일취를 제거했었다.

하지만 백일취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백일취가 실수로 몸에 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 사이에 나타난 자는 토지묘에서 십여 장 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고검추가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 서글프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쓴 웃음을 지으며 문가에서 물러난 고검추는 낡은 신단 뒤쪽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었다.

쐐액! 후두둑!

그 직후 선풍과 빗물을 흩뿌리며 한 명의 인물이 토지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단 뒤쪽의 빈 공간에 몸을 숨긴 고검추는 신단에 나있는 틈으로 그 인물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헌데 사내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비구니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구니는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명공이 빚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는데 파르라니 깎은 머리 때문에 애잔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회색 승복은 빗물에 흠씬 젖어있다.

그 때문에 비구니답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흐흐흐... 이쯤이면 그 드센 계집도 못 쫓아오겠지?"

사내는 토지묘 밖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자는 어떤 여자에게 쫓기는 중인 듯 했다.

털썩!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구니를 토지묘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젖은 승복에 감싸인 비구니의 탄력 넘치는 육체가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흐흐흐... 암중이라니... 오늘은 즐거움이 배가 되겠군."

!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구니의 몸매를 훑어보던 사내는 굽혔던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사내가 날린 지력이 가슴에 파고들자 비구니는 한 차례 몸을 퍼덕인 후 눈을 떴다.

"흐윽!"

눈을 뜬 직후 비구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의 징그러운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표정을 본 비구니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깨달고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渾穴)만 풀렸을 뿐 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시주는 감히 호천무맹에 죄를 지을 작정인가요?"

비구니는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사내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호천무맹! 저 스님이 호천무맹의 문하란 말인가?)

신단 뒤에 숨어 있던 고검추는 크게 놀랐다.

호천무맹은 자신의 생부인 철사자 고창룡의 사문 아닌가?

헌데 그 호천무맹 소속의 여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검추가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호천무맹의 이름 따위로 본좌를 겁주려 해도 소용없다 자운(紫雲)!"

사내는 비구니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호천무맹이 심혈을 기울여 기르고 있는 호천십영(護天十英)의 일인이니 도룡곡(屠龍谷)이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도룡곡!"

자운이라 불린 비구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비구니는 호천무맹이 장래를 위해 육성중인 열명의 신진고수들중 한명이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역사에 해박하여 도룡곡이란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도룡곡은 청해(靑海)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던 문파였다.

도룡곡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실전적이고 악랄하여 정파보다도 사파 취급을 받았다.

비록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에 자리한 문파였으나 도룡곡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이 주축을 이룬 중원 무림인들에게 공격당해 멸망했다.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는 변황 무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때문이었다.

당시의 중원 무림은 서역 무림을 일통한 강대한 세력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호천무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중원 무림은 천신만고 끝에 서역 무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직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고 멸문한 것이다.

도룡곡은 청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 무림의 세력에 가장 먼저 제압당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해왔었다.

그것이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였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도룡곡 식솔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룡곡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완전히 제명당했다.

그 후 도룡곡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헌데 도룡곡이란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 설마 시주는..."

비구니 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그렇다. 본좌가 바로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鄧天河)."

사내는 비구니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윽!”

자신을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라 소개한 그자의 손이 뺨에 닿자 비구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나는 마루 밑에 숨어서 부모형제들이 너희들 호천무맹의 인간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등천하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인 채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혈채를 반드시 천배 만배로 갚고 말겠다고...!"

"... 아미타불!"

안색이 밀납처럼 변한 자운 비구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크크크... 이제 본좌가 왜 너를 납치해 왔는지 짐작이 가겠지?"

등천하는 음소를 흘리며 젖은 승복에 감싸인 자운 비구니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선 네년에게 극락구경을 시켜준 후 발가벗겨서 낙양 성문에 매달아 두겠다. 호천무맹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인 네년의 알몸을 가능한 많은 인간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 그러고 보니 근래 일어났던 본맹 산하 문파들의 겁탈 사건이 모두 시주의 짓이었군요."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몇 년 전부터 호천무맹 소속 문파의 아녀자들이 겁탈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문파 장문인들의 처첩이나 여자 제자, 딸들이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만 해도 서른 개가 넘는 문파와 가문의 여자들이 몸을 더럽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용모파기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인의 소행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범인이 여자들을 유린한 수법이 대동소이한 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정체불명인 범인에게는 천면음마(千面淫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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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등장

 

 

안탕산 일대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무렵처럼 어둑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겁게 깔린 먹장구름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

문득 한 줄기 기화(旗火), 즉 불꽃 신호가 안탕산의 깊은 산중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기화가 쏘아진 곳은 물이 마른 계곡이다.

그곳에 제왕성의 철위사 다섯 명이 모여 있다.

철위사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인데 두 명은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살피고 있으며 두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철위사는 빈 금속통을 든 채 허공을 보고 있다.

방금 전에 기화를 쏘아올린 것은 바로 그자였다.

허공에서는 어느덧 불꽃이 흩어지고 있다.

기화를 쏘아 올린 게 너희들이냐?”

휘익!

외침과 함께 누군가 계곡으로 날아 내려 철위사들은 급히 돌아보았다.

여기서도 일이 벌어진 것이냐?”

계곡에 내려서는 인물은 바로 제왕성의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휘익! !

궁무독과 함께 두 명의 동위사들도 현장에 내려섰다.

총관님!”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궁무독을 본 철위사들은 비로소 안도한 표정이 되며 급히 포권을 했다.

형제들이 또 흉수에게 변을 당했습니다.”

철위사들이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며 철위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철위사가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데 사인은 가슴에 난 사발만한 구멍이 었다.

마검칠식!”

이번에도 마검칠식에 당했습니다.”

궁무독을 따라온 두 명의 동위사가 급히 시체로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동위사들이 시체의 사인을 살피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틀림없습니다 총관님! 이 형제들을 죽인 무공은 천마의 구대절기중 마검칠식입니다.”

안탕산에 접어든 이래 벌써 스물세 명이나 당했습니다. 마검칠식을 쓰는 놈들이 우리 제왕성의 안탕산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위사들의 사인을 확인한 동위사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이제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 참사의 원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요신군이나 그자의 수하들이 본성에 적대하는 건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정하지 마라. 진짜 범인이 소요신군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이는 짓일 수도 있으니...”

궁무독은 냉정한 어조로 철위사와 동위사들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소요신군의 아들놈도 마검칠식을 구사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동위사 중 한명이 오만상을 쓰며 이의를 제기했다.

누명을 썼든 어쨌든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의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건 분명...”

불만을 토로하던 그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궁무독이 한손을 들어 자신의 말을 막으며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무독이 보고 있는 쪽에는 철쭉이나 찔레같은 키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데 거리는 십장 남짓이었다.

(총관님이 왜 저러시지?)

(저곳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철위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목 숲을 보았다.

찌릿! 찌릿!

하지만 동위사들은 몸을 마비시키는 것같은 살기를 느끼고 숨을 멈췄다.

! 스릉!

동위사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

그때 궁무독은 오른발을 관목 숲 쪽으로 내딛으며 오른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 스릉!

궁무독은 내민 오른발로 세차게 발을 구르며 발검을 했다.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흔한 검기조차 궁무독의 검에서는 내뻗치지 않았다.

스악!

궁무독은 발검한 검으로 앞쪽을 수평으로 그어내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검기도 내뻗치지 않는 궁무독의 이 일초는 무공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허세를 부리는 칼부림처럼 느껴졌다.

(뭘 하신 거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철위사들은 발검 했던 검을 거둬들인 궁무독이 다시 두 발을 모으며 서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서걱!

관목 숲이 일제히 같은 높이에서 잘려 나갔다.

좌우로 이장(二丈;6미터), 앞뒤로 일장(一丈)쯤인 반달형으로 관목 숲이 매끈하게 잘린 것이다.

!”

!”

동위사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철위사들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철위사들은 자신들의 외총관인 궁무독이 무공을 쓰는 것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퍼억! 푸스스!

그때 똑같은 높이로 갈라진 관목들의 잘려진 부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 가공!)

(족히 십장은 되는 거리를 두고 관목 숲을 무형의 검기로 베어버렸다.)

(과연 우리 제왕성의 총관다운 솜씨다.)

철위사들은 감탄과 흠모의 표정으로 궁무독을 보았다.

독검마유 궁무독은 몇 대째 제왕성을 섬겨온 충신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무독이 가문과 출신을 배경으로 제왕성의 총관이 되었다 여겨왔다.

하지만 사실 궁무독은 은위사나 금위사들에 못지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방금 전 소리없이 관목 숲을 베어버린 일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러나 검을 거둔 궁무독의 이마는 심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동위사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들 저러시지?)

(총관님 뿐 아니라 동위사들도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잖은가?)

철위사들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놀랍군. 마교의 몰영만안대법(沒影瞞眼大法)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가 당대에 존재할 줄이야.”

궁무독이 앞쪽을 노려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몰영만안대법!)

(그건 빛을 반사하거나 흘려보내서 상대방의 눈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교의 은신술 아닌가?)

(저곳에 누가 있단 말인가?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철위사들은 관목 숲이 반달형으로 갈라진 곳을 보며 놀라워했다.

 

<흐흐흐! 역시 만만치 않아!>

 

그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내의 음성인데 어디서 들리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독검마유 궁무독! 당신이 제왕성에서 총관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단지 운이 좋았거나 출신 배경 덕분이 아니라는 걸 방금 전의 일격으로 알게 되었다.>

 

츠으! 지이!

말소리와 함께 반달형으로 잘려나간 관목 숲 뒤쪽의 허공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같은 그 현상은 곧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 저기에 사람이 있다.”

무언가 움직인다.”

! 차창!

철위사들도 비로소 알아차리고 다급히 무기를 뽑아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다!>

 

!

음산한 외침과 함께 섬뜩한 섬광이 철위사 한명에게 날아들었다

!”

표적이 된 철위사는 다급히 칼을 들어 그 섬광을 막으려 했다.

콰창!

하지만 날아든 섬광에 닿는 순간 철위사의 칼은 유리처럼 깨졌다.

그 섬광은 마검칠식으로 발휘된 검기였던 것이다.

가강!

일거에 검을 깨트린 섬광은 철위사의 가슴으로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죽었다!)

철위사는 자기 가슴으로 파고 드는 차가운 섬광을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불쑥 내밀어진 누군가의 검이 철위사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섬광을 쳐냈다.

그 검의 주인은 물론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 감사합니다 총관님!”

스팟!

구사일생한 철위사는 뒤로 휙 날아 피하며 외쳤다.

스악!

철위사를 구한 궁무독은 몸을 홱 돌리며 허공에 대고 다시 검을 그었다.

이번에도 검에서 검기가 내뻗치는 흔적은 없었다.

 

<멸적살검(滅跡殺劍)!>

 

!

하지만 누군가의 긴장한 외침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두둑!

뒤이어 허공에서 피가 한줄기 확 뿌려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떤 자가 궁무독이 발휘한 기척 없는 검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베었다!”

그렇지!”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안도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휘청!

허공에서 사람의 흐릿한 형상이 휘청하고 있는데 그 형상의 어깨 쪽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다.

스악! !

철위사들이 환호할 때 동위사들은 이미 소리없이 쇄도하여 그 사람 형상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빠르고 격렬한 공격이다.

카캉! !

그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과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을 일으켰다.

파캉! !

하지만 그 직후 동위사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혀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역시 마검칠식에 당한 것이다.

“...!”

“...!”

스팟! 휘익!

무기가 부러진 동위사들은 벼락같이 뒤로 물러섰다.

스악!

물러서는 동위사들 뒤에서 궁무독이 다시 소리없이 검을 그어냈다.

다만 이번에는 수평으로 긋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그었는데 역시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크!>

 

!

아지랑이 같은 사람의 형상이 피를 허공에 뿌리면서 차가운 섬광을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그어 올렸다.

빠캉! 카앙!

궁무독이 발휘한 보이지 않는 검기가 그 섬광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검을 거둬들였다.

그만 합시다 궁총관! 오늘은 내가 진 것으로 할 테니...”

츠츠츠!

그 직후 젊은 사내의 음성과 함께 궁무독의 오장쯤 앞쪽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일신에 은박처럼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도 은박 재질에 눈 부위에만 구멍이 나있는 자루 모양의 복면을 쓰고 있다.

양손에는 같은 재질의 장갑을 끼었으며 발에 신은 신발도 같은 은박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자의 일신을 뒤덮고 있는 그 은박 재질의 천이 사람 눈에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 듯 했다.

무림에 나온 이래 본좌의 몸에 상처를 낸 건 궁총관이 처음이었소.”

말하는 복면인의 오른쪽 어깨에는 제법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궁무독이 두 번째로 그어낸 무형의 검기에 베어진 것이다.

마교의 인간이냐?”

철컥!

궁무독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렇소이다. 본좌는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막내인 검마(劍魔) 비무강(非无姜)이라고 하외다.”

복면인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마교!)

(구대마왕은 대대로 마교가 세상에 내보내는 최강의 고수들 호칭 아닌가?)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저자가 구대마왕의 일인이었구나.)

철위사들과 동위사들은 아연긴장하며 복면인, 검마를 노려보았다.

마교가 소요신군 강조를 비호하는 이유를 들어볼까?”

검마 비무강에게 걸어서 다가가는 궁무독의 두 눈이 차갑게 갈아 앉았다.

유감이지만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이다. 궁총관과 더 교분을 나누고 싶어도 혹시 정들까봐 겁이 나니...”

스스스!

검마 비무강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마음대로 오고가지는 못한다.”

! !

거의 동시에 궁무독은 칼집에 꽂았던 검을 다시 발검하여 허공을 종횡으로 긋고 갈랐다.

콰쾅! 투쾅!

그러자 검마가 서있던 곳 뒤쪽에서 두 번의 폭발이 일어난다. 궁무독이 발휘한 무형의 검기가 그 부분의 바닥을 박살낸 것이다.

 

<첫인사 치고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소이다. 기억해두리다. 흐흐흐!>

 

하지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마 비무강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놓쳤구나.)

동위사와 철위사들은 상황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말없이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 진 피 빚은 가급적 빨리 갚아드릴 테니 기대하시구려. 흐흐흐!>

 

검마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죽일 놈!”

서라!”

! 휘익!

분노한 동위사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쫓지 마라.”

궁무독이 그런 그들을 저지했다.

총관님!”

하지만 저놈 손에 스무명이 넘는 형제들이 당했는데...”

! 휘익!

동위사들은 분개하면서도 궁무독의 명령에 따라 도로 날아내렸다.

저자가 정말 구대마왕중 한명이라면 섣불리 상대해선 안된다.”

궁무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연락해서 반드시 네 명 이상이 조를 짜서 움직이라고 전하라. 일단 놈과 조우하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찾아내도록 시도하라 전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 !

동위사들은 복창한 후 왔던 길로 도로 날아갔다.

(마교의 최고 고수들인 구대마왕중 한 놈이 안탕산에 진을 치고 있다 이거지?)

날아가는 동위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두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요신군 강조! 점점 더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궁무독의 얼굴에는 어느덧 서릿발같은 살의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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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단지맹정(斷指盟情),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강미루는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녹지 옆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을 헤치고 흙을 조금 파내자 접혀진 남색 옷자락이 보였다.

강미루는 잘 접은 남색 옷을 두 손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백남빈의 머리 옆에 놓았다.

세상 모든 일이 바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남빈의 가슴과 코에 손을 대보니 형부의 말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가람이 보고 있음에 불구하고 백남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가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광평검법은 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형의 기운인 광평기(廣平氣)를 뿜어내어 상대방을 팔방(八方)에서 압박한다.

그런 후에야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상대방을 검으로 쓸어 베는 것이다.

일검을 교환할 때 신가람의 광평기는 팔방에서 백남빈을 압박하여 들어갔었다.

그러나 백남빈이 펼쳐낸 미녀각기검에는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자검결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가람의 광평기는 사자검으로 펼친 백남빈의 미녀각기검법에 휘말려 방향을 바뀌었고 검의 진로도 틀어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백남빈의 검에서 예리한 검기가 긴 나선형을 이루며 폭출되어 나왔다.

미녀각기검의 나선형 검기는 날아드는 동안 수없이 궤적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디로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같아서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백전노장답게 신가람은 순간적으로 둔형보(遁形步)를 펼쳐 땅에 스치듯이 하여 백남빈의 뒤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매자락은 백남빈의 나선형 검기에 베어져 허공으로 날렸다.

동시에 신가람이 둔형보를 펼치며 다시 내뿜은 광평기에 백남빈은 심맥을 다쳤던 것이다.

신가람이 수 십 종의 검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백남빈의 미녀각기검을 깨뜨릴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백남빈에게 패할 리야 없겠지만 일초에 그를 제압한 것은 다분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젊은 무사의 검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말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신가람의 눈에 강미루가 백남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들어왔다.

마음에서 살기가 꿈틀거렸으나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인물!"

강미루는 형부가 안타까워하며 백남빈을 높이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백남빈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서며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 형부는 영웅이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가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하여 강미루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부탁만은 꼭 들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는 강미루의 고집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치 강하다.

죽겠다고 결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신가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들어는 보자구나."

"이곳에는 설청묘라는 야생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늘 갖고 싶었지만 우리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답니다. 형부가 그 고양이를 잡아 주기만 하면 두말 않고 따라 가겠어요."

신가람은 창평곡을 쭉 훑어보았다.

잘해야 만평 남짓인 곳에 숨어 있을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이 귀여운 말괄량이 처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우리가 전에 있었다는 보금자리를 찾아가 보았으나 옮겨 버렸는지 눈에 뛰지 않았어요. 형부는 능력이 신선과 같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새인가 강미루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설청묘는 찾기가 어렵다. 잡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형부가 잡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올 리 없다. 그러면 저 사람은 그 사이에 정신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든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야 저 사람의 모습이 영영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눈물이 어리는 강미루였다.

신가람이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전에 있었다던 야생 고양이의 보금자리는 어디냐?"

미루는 북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 뒤에 있는 절벽 틈이었어요."

신가람은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숲으로 날아들어 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시위(示威)인 듯 했다.

 

신가람이 숲으로 떠나자 강미루는 즉시 백남빈을 품에 안았다.

사랑하는 임은 심하게 다쳐서 기절해 있는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스스로의 무능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녹지의 물을 생각해 냈다.

녹지로 달려가서 신발로 가득 물을 떠왔다.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자 물은 금방 우유빛으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물을 백남빈의 입을 벌리고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팔다리를 주물러 주자 백남빈이 마침내 눈을 떴다.

"당신, 아직 가지 않았군!"

강미루를 본 백남빈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열흘 전 백남빈이 한 청혼에 대한 답이 이제야 나왔다.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듯 했다.

"그 사람은?"

백남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강미루는 힘없이 북쪽 숲을 가리켰다.

"설청묘를 잡아달라고 했어요. 아마도 금방 잡아 오겠죠."

"미루, 우리 영원토록 잊지 맙시다."

백남빈은 격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제 가슴에 당신이 준 흔적이 남았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강미루는 가슴을 누르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백남빈은 그녀의 그 말에 죽음보다도 더 깊은 맹세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대의 형부를 따라 가시오. 언제고 반드시 대려장으로 찾아가서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하늘과 땅을 두고 피로서 맹세하오."

백남빈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사자검을 들어 강미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 첫마디를 잘라버렸다.

!”

순간 피가 튀고 강미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손을 마주 쥔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진심과 맹세가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신가람이었다.

그는 벌써 양손에 한 마리씩의 눈같이 흰 설청묘를 잡아 쥐고 기척도 없이 돌아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피로 물든 손을 놓고 일어섰다.

"소녀 강미루는 영원토록 당신만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신가람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보름 남짓 함께 지내면서 처제와 저 철령보의 청년무사 사이에서는 깊은 정이 생기고 말았다.

처제의 신세가 벌써부터 평탄하지는 않아보였다.

저 청년무사를 잊게 하는 방도는 가능한 빨리 멋진 사내를 찾아서 처제와 맺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진 밖에는 본장의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너를 찾아서 보름이 넘도록 돌아다니는 바람에 차질이 적지 않았다."

돌아서는 강미루의 손을 잡으며 백남빈이 품에서 하얀 옥패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강미루의 손에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표(情表)였다.

하지만 강미루는 살래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옥돌보다는 당신의 잘려진 손가락을 갖고 싶답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남빈의 피 묻은 손가락 한마디를 손수건에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남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우리가 떠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도록 해라."

신가람이 백남빈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백남빈은 그에게 악의를 품을 수 없었다. 신가람은 적인 자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법도를 갖고 대한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신가람은 그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많이 닮았어."

백남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알 수 없어 설핏 미소만 지었다.

강미루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골짜기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털어 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헤아리고 있던 백남빈이었다.

"삐이익!"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히히힝! 두두두!

흑왕이 옛 주인의 부름을 받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은 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서 흑왕의 등에 앉았다.

신가람 앞쪽에 앉혀진 강미루가 비명처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색상의(藍色上衣)! 남색상의를 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강미루의 말이 끝날 쯤 흑왕은 이미 동쪽 절벽까지 달려가있었다.

몇 번 흑왕의 모습이 바위들 틈에서 보였는데 다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미루는 신가람에게 이끌려 창평곡을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강미루가 떠나버린 창평곡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백남빈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가 떠나며 부르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꿈결인양 아스라히 맴돌고 있었다.

백남빈은 일어서서 동부를 향해 비칠비칠 걸어갔다.

잘려진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검의 전인이 된 후로 난 벌써 사랑하는 여인을 멀리 보내고 말았구나. 이것이 정말 사자검을 익힌 때문일까?)

정사초 사조의 한탄어린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자검의 전인의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도 나와 같이 사자검결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도 같은 신세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말 것이다!

 

백남빈은 조사동에 들어가서 여러 사조 앞에서 한바탕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 졌다.

감정이 풀어져 버린 듯, 어느새 낙천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가 되자면 마음을 다스리는데 백남빈해져야 한다.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툴툴 털어버리고 오직 호쾌한 마음으로 사자검을 휘둘렀다.

신가람과 대적하면서 백남빈의 검술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외고 있는 사자검결이야말로 절학 중의 절학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힘껏 뻗어도 그의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검기만이 폭출되어 미녀각기검의 방향을 따라 그물처럼 뻗어나갈 뿐이었다.

신가람과 대적할 때 미녀각기검이 광평기를 되돌려 놓지 못했더라면 백남빈 자신은 신가람의 검이 이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미녀각기검법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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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대과벽의 밤

 

 

내가 하루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이 원시천존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현음마모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이검한은 믿기지 않는 심정이 되었다.

자신이 철익신응을 만나 곤륜산에서 대과벽까지 날아온 것도,

누란왕후 흑요설에 의해 화룡단정은 먹은 것도,

화룡단정의 열기 덕분에 흑요설과 서역사천왕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현음마모의 거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 의도한 대로라는 것이다.

원시천존은 정말로 현음마모를 통해서 초연심결이 이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검한 자신에게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원시천존은 물론이고 현음마모 역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던 분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검한은 원시천존과 현음마모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현음마모가 초연심결을 깨우치기 위해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이 엿본 하늘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

현음마모는 그 초연심결을 이십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이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원시천존이 남긴 고금최강의 무공 대신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십여 년 동안 쓰지 않고 축적만 한 덕분에 그녀의 내공은 정심해질 대로 정심해졌다.

초절의 경지에 이른 그 내공 덕분에 현음마모의 수명은 보통 사람의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현음마모는 오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초연심결의 이치는 깨우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읽은 천기를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에 현음마모는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장생불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원시천존에게서 전수받은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응용하여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이라는 술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빙백불훼대법은 이름 그대로 강력한 냉기를 이용하여 혼백과 육신이 훼손되지 않게 보전해주는 술법이다.

현음마모는 빙백불훼대법은 써서 길고 긴 잠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현음진기를 수련할 때 사용했던 만년한옥도 그녀가 육신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장구한 세월을 거스른 현음마모가 다시 깨어나려면 태양같은 열기를 품고 있는 사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음마모가 원한 대로,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검한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본녀를 통해 네게 초연심결을 전하려 하신 이유를 알려주겠다.

너의 시대에는 악마의 화신이 등장할 것이며 그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을 반드시 깨우쳐야만 한다.

이것이 스승님이 네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내가 당신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고?”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이검한은 아연실색했다.

설마... 설마 내가 태양천자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이검한의 머리 속은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현음마모가 남긴 이글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비록 스스로를 어리석다 자조(自嘲)했지만 현음마모는 여자들 중에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여인이다.

심지어 천기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가 허튼 내용을 남겼을 리 없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을 것까지 알고 계셨던 분이니 내가 태양천자의 먼 후손이라는 암시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천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철이 든 이래로 처음 자신의 출생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검한이었다.

(장춘곡으로 돌아가는 대로 누나에게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이검한은 생각에 잠기며 현음마모가 남긴 비급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월동문 밖에서 한 쌍의 눈이 벽을 투과하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물론 그 눈의 주인은 현음마모였다.

 

현음마모는 이검한의 몸속에서 들끓는 화룡단정의 힘을 빌어 부활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현음마모는 화룡단정의 기운을 갈무리 하여 이검한의 단전에 넣어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음마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이검한에게 허락해야만 했다.

비록 빙백불훼대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지만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물며 그 소년은 자신이 사랑했던 정인의 먼 후손인 것이 분명한데...

정신을 차린 이검한과 얼굴을 맞댈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음마모는 이검한이 깨어나기 전에 종유동굴을 빠져나왔었다.

(볼수록 사형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다.)

두자가 넘은 두꺼운 석벽을 간단히 투과하여 이검한의 얼굴을 살펴보며 현음마모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저 아이의 앞날에 숱한 파란과 우여곡절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와줘서도 안되고 간섭해서도 안된다.)

현음마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축복은 종종 고난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정인의 후손인 소년이 걱정되어 자신의 손으로 고난을 해소시켜주다가는 소년에게 주어질 더 큰 축복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현음마모가 읽은 천기는 이검한을 지켜보기만 할 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복이 많은 아이이니 역경을 잘 헤쳐 나가며 성장할 것이다.)

현음마모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돌아섰다.

(빙백불훼대법으로 잠들어 있었던 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보자.)

걸음을 옮기는 그녀 앞에는 문이 아닌 석벽이 가로 막고 있다.

스윽!

하지만 현음마모의 몸은 그림자가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듯 석벽을 통과하여 난장판이 된 지하광장에 나타났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내가 맺고 있었던 인연은 모두 끊어졌을 것이다.)

유사신령의 시신이 잠겨있었던 공청석유의 연못을 지나며 현음마모는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천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장생불로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사연과 인간들은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음마모 자신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혼자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무섭고도 슬픈 일인가?

(세상을 둘러보다 지치면 저 아이를 찾아와 의지하면 되겠지. 비록 수십 세대가 지났겠지만 저 아이가 사형의 후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스윽!

벽으로 스며들어가며 이검한을 떠올리는 현음마모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 * *

 

밤이다.

서역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

동서로 삼천여리나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가 적막 속에 마치 한 마리 용처럼 누워 있다.

서쪽 지평선으로 갈아 앉고 있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뿌리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액!

문득 서북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인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모직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금발뿐만 아니라 마치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윤곽으로도 소녀가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금발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

장한은 먼 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여기로군!”

대과벽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흑의장한은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포대붕!

 

신력(神力)을 타고 난 그는 서역 일대에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진 역사(力士).

서역의 여러 부족들이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르며 경원하는 포대붕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교숙하(喬淑賀)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철목풍이라는 자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교숙하를 납치한 그자는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납치의 대상이 된 소녀는 다름 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포대붕은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 대한 애정과 근심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철목풍이란 자의 협박을 모른 척 한다면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숱한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결국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다.

 

-철산산(鐵珊珊)!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비록 원()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로부터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같은 인간이라 해도 징기스칸님의 핏줄인 산산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포대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아내만 구해내면 소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철목풍을 쳐죽일 것입니다!)

포대붕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할 때였다.

흐흐!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선택을 했구나 포대붕!”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 대 중반쯤의 장한인데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청포장한의 눈동자는 쉴 새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얄팍한 입술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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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임청우는 발에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듯이 질풍같이 대안탑을 달려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일 때는 발끝에 힘을 불끈 주자 순식간에 뛰어 넘어 버렸다.

마치 바람처럼 대안탑을 내려온 후에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 저 저...”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해댔다.

 

임청우는 담장을 뛰어넘고 메말라 버린 화원을 뛰어 넘으며 자은사를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지.”

대안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까지 들어온 임청우는 나무 뒤에 몸을 붙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십 리는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 데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숨도 가쁘지 않다.

그러나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뱃가죽은 등에 붙어 혹시 위장을 삭혀버리지나 않을 까 싶을 정도다.

허기로 인해서 눈알이 팽팽 돈다.

(잘못 왔구나 잘못 왔어. 인가(人家)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임청우는 속으로 후회하며 나무열매라도 어디 없는가 싶어 살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그의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듯 하더니 무언가 싸늘한 감촉이 목에 느껴졌다.

!”

임청우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우연히 익힌 용조층층공으로 인해 그의 몸은 아주 재빨랐다.

그러나 임청우가 한 걸음을 채 옮기기 전에 다시 뭔가가 번쩍 하더니 그의 목에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슷!

임청우의 눈앞에 한 사람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임청우의 목에 닿아있는 것은 그 중년인의 검이었다.

푸른색 장삼을 차려입은 중년인은 삼척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손가락질 하듯이 검으로 임청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임청우는 중년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협 장백승의 절대적인 위엄과는 또 다른 것이 중년인에게는 있었다.

임풍옥수(臨風玉樹)의 용모와 입가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 맑은 빛을 발하는 눈은 서글서글한 봉목(鳳目)이었다.

백금(白金)으로 만들어진 눈부신 보검은 입고 있는 청삼(靑衫)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번 보기만 한다면 어떤 여인이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내놔라!”

청삼인(靑衫人)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음성이 마치 연인(戀人)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다감(多情多感)하다.

임청우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혈도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청삼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미녀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릴 때마저도 아름다웠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임청우는 남자가 찌푸리는 눈살도 그처럼 황홀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속에도 은연중에 위엄이 있고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빼어난 기상이 있는 난초(蘭草) 같은 사람이었다.

!

백금으로 만들어진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혈도를 튕겨냈다.

혈도는 칼집에서 빠져나와 삼장 밖에 있는 바위 속에 깊이 박혔다.

내놔라!”

청삼인이 다시 말했다.

백금검은 어느새 다시 그의 목에 붙어있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청삼인이 노리는 것이 바로 몽선도라는 것을 알았다.

혈도를 지니고 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달라고 부탁을 하면 몰라도 막무가내로 뺏으려 드는 사람에게 몽선도를 내놓기는 싫었다.

해서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물러섰다.

무슨 말입니까? 제게 뭘 내놓으라는 말인지...?”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놔라. 대안탑에서부터 너를 쫓아왔다.”

청삼인은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가 능히 웃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검주(劍主) 유소기(劉蘇起) 대협 아니십니까?”

청삼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유소기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말라는 엄포로 들렸다.

청삼인은 일왕일협삼괴칠절 중 칠절의 우두머리이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기를 쓰고 피하려던 바로 그 검주 유소기였다.

임청우는 유소기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찾으시는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그 두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검주 유소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비록 남다른 데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그에게 몽선도를 넘겨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몽선도를 넘겨주었다면 혈도를 주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강시놈에게 속은 모양이구나.)

휘익!

유소기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즉시 몸을 날렸다.

조호이산지계(鳥虎移山之計)!

소년으로 하여금 혈도를 가지고 도망치게 하여 자신을 유인한 후 그 사이에 두 놈은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죽이고 물건을 찾아보지 않은 걸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남의 것을 억지로 뺏으려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청우는 유소기의 몸이 다시 번쩍하더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대하고 좋은 사람은 좋게 대하면 되는 일이다.”

검주 유소기는 임풍옥수 같은 용모와는 달리 임청우의 가슴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으로 새겨졌다.

다짜고짜 상대방을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강도(强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청우는 바위에 박힌 혈도를 뽑아서 다시 허리춤에 끼웠다. 혈도의 무게가 근 이십 근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무거운 줄을 몰랐다.

() 안으로 들어가서 뭐든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배가 고프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제 그만 가려고? 남을 속이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던데...”

갑자기 임청우의 뒤에서 맑고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

임청우는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천천히 돌아섰다.

혈도가 꽂혔던 바위의 위에서 머리에 화려한 금장식을 달고 있는 예쁜 소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의(黃衣)를 입은, 얼굴이 손바닥만한 소녀였다.

그러나 뽀얀 얼굴에 보석처럼 빛을 반짝이는 눈을 가졌으며, 짓궂게 웃음 짓는 두 볼에는 볼우물이 패여 있다.

나이는 임청우와 비슷하게 보였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임청우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소저야 말로 대단하군. 검주 유소기를 감쪽같이 속였어. 그도 소저가 그곳에 있는 줄은 몰랐을 테니...”

소녀가 처음부터 반말을 했기에 임청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소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나도 그를 속였어. 이번 한 번만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백 번도 더 속일 수 있겠지. 하지만 넌 벌을 받아야 해.”

임청우는 자신의 눈앞에 누런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짝!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틈에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뺨을 때리고 다시 바위위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귀신처럼 재빠른 솜씨였다.

임청우의 어머니도 그를 때릴 때 빨랐지만 소녀의 솜씨는 기척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빨랐다.

황의소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게 반말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어. 그 사람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뿐이지.”

임청우는 입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켰다.

자기 또래의 계집애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짐짓 대범한 척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버릇없는 것을 자랑하는 계집애는 또 처음 보겠군.”

황의소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바보같은 자식이 제 신분 천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말을 함부로 하네. 하는 짓이 귀여워 약간은 마음에 들었는데...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수밖에...)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빛냈다.

임청우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여기에 더 있다간 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질 나쁜 계집애를 또 건드려 놨으니 어떻게 나올지는 뒤를 짐작할 수 없다.

(모른 척하고 빨리 이 자리를 떠는 것이 상책이다.)

험험!”

임청우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소녀의 뒤를 가만히 보았다.

“...?”

황의소녀는 어리둥절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 누가...?)

(이때다!)

임청우는 있는 힘을 다해서 산아래를 향해 달렸다.

! !

(아이쿠!)

그러나 임청우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며 앞으로 넘어져 땅에 세차게 머리를 찧었다.

채 두 걸음도 떼지 못했다.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조이고 있다.

호호호! 네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러도 소용없어.”

황의소녀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실이 잡혀있었다. 임청우의 빰을 때릴 때 이미 그녀는 천잠사(天蠶絲)를 그의 발에 살짝 걸어 놓았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생각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잔머리를 굴리는 상대는 잔머리를 굴려서 상대할 수가 없다. 원래의 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높이가 오장인 나무라면 그 뿌리는 오십 장에 달한다. 이런 나무라면 바람이 불어도 가지만 흔들릴 뿐 뿌리를 뽑아 올리지는 못한다. 흔들면 흔들리는 데로 가만히 두지만 결코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임청우는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의연한 기세가 일어났다. 마치 천년 거목인양 무게가 있는 태도였다.

황의소녀가 변해버린 그의 기세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임청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황의소녀를 묵묵히 응시하던 임청우는 왼쪽 발에 묶여있는 천잠사를 풀어버렸다.

너 너...”

황의소녀가 화가 나서 입을 열었지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임청우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에게서는 마치 우협 장백승을 닮은 듯한 기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돌아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삐익! !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소리가 높은가 하면 다른 한 소리는 낮아서 마치 서로 화답하는 것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황의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무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따라서 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와의 일을 통해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하나이고 외물(外物)은 수천, 수만 가지로 그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데, 외물에 따라 나를 이리저리 흔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자신을 굳게 지키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버린 심정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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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보도를 얻다

 

 

(제 정신으로 날 보는 게 민망해서 몰래 떠나셨구나.)

고검추는 아쉽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옥여상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옥여상은 냉혹하고 도도하다고 알려진 마도무림의 여걸이다.

헌데 지난밤에는 어린 소년과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짓을 했다.

옥여상이 어째서 먼저 떠났는지 짐작하며 고검추는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북해에 가서 만년화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중략-

담세황은 교활하면서도 악독한 심보를 지닌 놈이다. 네가 고모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을 그놈에게 들키면 절대 안된다. 마천루의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포기한 것도 담세황이 눈치 챌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삼초(三招)의 무공은 남긴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만 있으면 담세황과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만 줄이거니와 고모의 모든 것은 영원히 네 것임을 잊지 말거라.>

 

옥여상의 글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그 글 아래쪽으로는 세 가지 초식이 적혀있었다.

혈전삼식(血戰三式)-!

섬뜩한 이름을 지닌 그 초식들은 옥여상이 스승인 구천마야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구천마야는 마도 무림의 전설적인 마인들은 구마(九魔)중 혈마(血魔)라는 인물의 후손이다.

혈마는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적이 죽거나 항복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혈마보다 객관적으로 강했던 인물들도 혈마와 싸우는 것을 꺼려했다.

혈마라는 이름은 싸우면 늘 피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전귀(戰鬼)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혈전삼식은 바로 그 싸움광인 혈마가 남긴 무공의 정수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혈전삼식으로 죽이지 못할 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혈전삼식은 초식이라기보다는 내공의 운용비결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내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을 쓰러트리는 수법이 혈전삼식인 것이다.

그 때문에 혈전삼식은 검법, 장법, 수법등 모든 무공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분뢰개벽(分雷開闢)

-천수낙백(千手落魄)

-무량철영(無量鐵影)

 

이것이 혈전삼식이다.

분뢰개벽은 공격 속도를 극대화시켜주는 운공비결이다.

분뢰개벽으로 시전되는 초식의 빠르기는 <번개를 나눈다(分雷)>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천수낙백은 펼치는 초식에 무수한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운공비결이다.

무량철영은 중압(重壓)의 비결이다.

무량철영으로 구사되는 초식은 산을 밀어버리고 집채만한 쇳덩이를 박살내는 파괴력을 지닌다. (... 대단하다.)

혈전삼식을 읽어본 고검추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고검추가 보기에도 혈전삼식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혈전삼식을 만드신 것만 봐도 고모님은 일대종사로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고검추는 새삼 옥여상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다.

옥여상이 무림인들에게 마녀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이해가 갔다.

(고모님...)

고검추는 옥여상이 글을 남긴 속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자락에 옥여상의 그윽한 살내음이 배어있는 게 느껴진다.

(제발 돌아가시지 마십시오. 그래야 검추가 고모님께 입은 하해 같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을 테니...)

고검추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옥여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옥여상의 속옷 자락를 얼굴에서 뗀 고검추는 옥여상이 남긴 마지막 물건을 살펴보았다.

두 번 접혀있는 손수건이 그것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제법 빛이 바랜 손수건에는 어지러운 도형(圖形)이 그러져 있었다.

장보도-!

그 손수건이야말로 사신검의 하나인 복마신검이 감추어진 장소를 표시해 놓은 장보도였다.

그 장보도를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아버지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복마신검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낸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신상에 얽힌 추문을 해결할 수 있을테니...)

고검추는 장보도를 살펴보며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어머니가 주신 것도 있었지.)

장보도를 살펴보던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이 준 나무상자를 떠올렸다.

납작한 나무 상자는 고검추가 누워있던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나무 상자 옆에는 천으로 감싼 초혼전도 놓여있다.

달칵!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상자 안에는 륜()이 하나 들어 있었다. 직경 반 자 정도 크기에 중앙에는 한 마리 붕조(鵬鳥)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륜이다.

붕조의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데 눈 부위에 타는 듯 붉은 구슬이 박혀있어서 더욱 더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의 출신이 붕조를 상징으로 삼는 가문일까?)

륜에 새겨진 붕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검추는 염두를 굴렸다.

그 륜이야말로 자신의 외가가 어딘지 밝혀줄 유일한 단서인 것이다.

(아름다운 보석이다. 병기라기보다는 의식에 사용한 제기가 아닐까.)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붕조의 눈에 박힌 붉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철컹!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저 둥그스름하기만 하던 륜의 외곽으로 톱니바퀴 형태의 칼날들이 여섯 개 튀어나왔다.

그 칼날들은 종이처럼 얇았으며 얼굴이 비칠 정도로 새파란 윤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고검추는 칼날들에서 번지는 으스스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한눈에 그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들이 무쇠도 흙 베듯 하는 날카로움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훌륭한 물건이다. 이걸 사용하는 방법만 알면 유용한 호신수단이 되겠다.)

고검추는 눈을 빛내며 륜에 박혀있는 붉은 구슬을 다시 한 번 눌렀다.

기이잉! 철컥!

그러자 튀어나와있던 칼날들이 다시 륜 안쪽으로 사라졌다.

(칼날을 수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시간 날 때마다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고검추는 륜을 다시 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젠 떠날 때다.)

고검추는 륜을 넣은 나무상자에 이어 옥여상이 남긴 장보도와 편지, 헌월태을경을 챙겨 품속에 갈무리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고검추는 일어나 석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 깔린 마른 풀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들어왔다.

(고모님과 보낸 지난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은발마희 옥여상을 떠올린 고검추는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어 그는 양모 당혜선을 떠올렸다.

사신각주에게 무참히 고문당한 후 청룡탄으로 투신한 당혜선을 생각하자 고검추의 눈 꼬리가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편히 잠 드십시오 어머니! 사신각주는 소자의 손으로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습니다.)

고검추는 눈을 감고 합장하며 맹세했다.

양모에 대한 추모까지 마친 고검추는 동굴 입구로 갔다.

등나무 넝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젖혀 동굴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동굴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동쪽 산 능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탁탁!

주변을 살피며 고검추는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곧 고검추의 모습은 계곡에서 사라졌다.

고검추를 어린 소년에서 어엿한 사내로 만들어준 동굴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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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충 고른 게 신검(神劍)

 

 

간장과 막야는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부부 장인의 이름이다.

()나라 왕 합려(闔閭)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인 그들 부부에게 보검을 만들게 한 후 다른 사람에게 더 뛰어난 보검을 만들어 줄까봐 남편인 간장을 살해했었다.

다행히 아내인 막야는 구사일생했으며 아들인 미간척(眉間尺)으로 하여금 복수를 하게 했다는 야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부부는 마지막으로 만든 한 쌍의 보검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었다.

자웅쌍검(雌雄雙劍)으로 불리는 두 자루의 보검 중 웅검(雄劍), 즉 남편 검이 간장이다.

 

검을 뽑아서 살펴보세요.”

그럼 실례를...”

스릉!

진상파의 권유에 강유는 천천히 간장을 칼집에서 뽑았다.

!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유리처럼 반짝이는 검신(劍身)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 가운데에는 옛날 글자들이 문양처럼 길게 새겨져 있다.

끼이!

간장의 검신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자 섬전초가 겁에 질려 웅크렸다.

간장은 날카로울 뿐 아니라 척사(斥邪)의 힘까지 지니고 있어서 영물인 섬전초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예기(銳氣)! 검신이 칼집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다.)

스릉!

강유는 극도로 긴장하며 간장의 검신을 완전히 칼집에서 뽑았다.

간장의 검신이 드러나자 밀실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검광(劍光)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혼절할 것이다.

그만큼 간장이 뿜어내는 검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간장은 지금은 잊혀진 고대(古代)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신검이랍니다. 그 때문인지 만들어진 후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지요.”

진상파는 두려움에 떠는 섬전초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강유는 칼집에서 완전히 뽑아낸 간장의 검신을 얼굴 앞에 세운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리같은 검신을 들여다보는 강유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번 시험해보세요.”

진상파가 한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유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무기를 정비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강철제 탁자 위에 무기를 고치는 데 쓰는 도구들과 수리중인 병장기들이 놓여있다.

탁자 옆에는 커다란 모루도 하나 놓여있다. 강철제인 그 모루는 높이가 네 자 가량이나 되고 길이는 다섯 자가 넘는다.

(저 모루가 시험 대상으로 적당하겠군.)

모루로 다가간 강유는 두 손으로 쥔 간장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성둥!

그러자 마치 오이가 잘리듯 모루의 앞 부분이 간단히 잘라졌다.

!

잘려진 모루 앞부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 경이로운 예리함이로군요. 슬쩍 그은 것만으로도 강철로 만들어진 모루를 잘라버리다니...”

강유는 매끈하게 잘린 강철모루의 단면을 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간장의 날카로움에는 어떤 호신강기라도 종이처럼 베어진답니다. 제왕성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 유용할 테니 사용하도록 하세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스릉!

진상파가 권유했지만 강유는 간장을 다시 칼집에 꽂았다.

춘추오대신검중 하나인 간장은 선물로 받기에는 너무 과한 보물입니다. 소저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강유는 칼집에 꽂은 간장을 원래 위치에 걸었다.

(둔한 사람...)

강유가 간장을 원위치 시키는 걸 보며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염치와 분수를 아는 강유의 심성을 확인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자웅쌍검인 간장과 막야는 부부의 금슬과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금릉의 황금성에는 자검(雌劍), 즉 아내쪽의 검인 막야가 있다.

진상파는 비록 검법을 익히진 않았지만 막야를 가까이 두고 아껴왔었다.

간장과 막야의 전설에 감명을 받는 그녀는 언제고 자신의 짝이 될 사람을 만나면 웅검인 간장을 줄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간장을 줄만한 상대를 만난 것인데...

눈치 없는 그 인간은 간장을 거절했다.

간장이 부담되신다면 다른 검으로 하나 가져가세요.”

진상파는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이 곳에 있는 검들은 모두 전설적인 보검들인데...”

강유는 난감해졌다. 그게 어떤 검이든 황금성의 무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호신을 위해서라도 검이 필요할 테니 사양하지 마세요.”

진상파가 새침한 표정이 되어 재차 권했다.

강유는 진상파가 왜 마음이 상했는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끝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염치없지만...”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가치가 떨어지는 검으로 한 자루 고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간장에 의해 잘려진 모루 옆의 강철제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수선 도구들과 함께 망가지거나 낡은 병장기들이 쌓여있다.

(망가진 도검 중 하나를 가져가면 그나마 부담이 덜하겠군.)

강유는 탁자로 다가갔다.

(혹시...)

철문 밖에서 보고 있던 철관음의 눈이 번뜩 이채로 빛났다.

“...!”

섬전초를 품에 안고 있는 진상파도 유심히 강유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철컹! 철컹!

두 여자가 심상치 않은 눈길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탁자 위의 병장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도끼, 극등의 병장기들은 열 자루가 넘는데 대부분 녹이 슬었거나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사용해본 적이 없는 무기들은 제외하고...)

강유는 무기들 중 창, 도끼, 극등은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자 대여섯 자루의 칼과 검들만 남았다.

(이것들 중에서 한 자루를 가져가면 되겠지.)

강유는 분류된 칼과 검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먼저 집어 들었다.

금은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검인데 손잡이에도 몇 개의 보석이 박혀있다.

푸스스!

하지만 검신을 칼집에서 뽑는 순간 검붉은 녹이 함께 빠져나와 흩어진다.

(이건 도저히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로군.)

검붉게 녹이 쓸었을 뿐 아니라 이빨까지 빠진 검신을 확인한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꾸밈으로 보아 역사적으로는 이름이 높았겠지만 실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려한 보검을 내려놓은 강유는 다른 도검들을 살펴보았다.

나머지 칼과 검들도 대부분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도저히 실전에서는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 도검들에게는 수선 대상이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헌데 난감해하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꾸밈새가 화려한 칼과 검들 사이에 칼집도 없는 검이 한 자루 섞여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검의 형태를 한 쇳덩이였다.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인 모습인데 먹칠을 한 듯 검은 색이고 표면도 우둘투둘하다.

(이 검...)

덜커덕!

강유는 다른 칼과 검들 사이에서 그 검은색의 검, 쇳덩이를 집어 들었다.

“...!”

“...!”

순간 섬전초를 안은 진상파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철관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강유는 두 여자의 심상치 않은 반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겁다.)

쇳덩이같은 검을 집어든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길이가 네 자 남짓인 그 검의 무게는 무려 열관(38kg) 이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고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무게인 것이다.

(대체 재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겁단 말인가? 같은 분량의 납보다도 몇 배 더 무거운 것같은데...)

강유는 놀라면서도 두 손으로 검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체가 한 덩이로 되어있는 형태의 이 검은 만들다 만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끝은 뾰족하고 손잡이 위의 호수(護手), 즉 검격(劍格)까지 삐져나와 있어서 일단 검의 모습은 갖추고 있다.

다만 검의 날이 아주 투박해서 무엇을 베거나 자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하시겠어요?”

쇳덩이같은 검을 살펴보는 강유에게 진상파가 말을 건넸다.

이 검... 아니 쇳덩이에도 사연이 있겠습니다.”

강유는 두 손으로 검을 든 채 살펴보며 물었다.

이름은 극맹인데... 극맹(劇猛;몹시 사나움)으로도 쓰고 극맹(劇孟;전설 속의 협객)으로도 쓴답니다.”

진상파는 대답하며 탁자로 가서 그곳에 쌓여있는 여러 권의 낡은 책들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극맹(劇猛)과 극맹(劇孟)... 둘 다 무서운 이름이로군요.”

미완의 검이며 완성시켜줄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진상파는 낡은 책을 들고 다시 강유에게 돌아왔다.

완성되지 않은 탓에 제 몫을 못하므로 불출검(不出劍)이라고도 불리는 그 검에 대한 내력은 이 책에 적혀있어요. 시간 나실 때 읽어보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탁자에서 가져온 낡은 책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책 표지에는 <劒經>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맙습니다.”

강유는 불출검 극맹을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검경(劍經)이라는 제목의 그 책을 받았다.

이제 불출검 극맹의 주인은 강소협이에요. 아무쪼록 귀하게 대해주시기 바라겠어요.”

책을 건네준 진상파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출검 극맹... 아무래도 난 지나치게 중요한 물건을 선물로 받은 것같구나.)

진상파의 사뭇 진지한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 강유였다.

 

* * *

 

밤은 더 깊어졌다.

밤늦도록 소란스럽던 황금성 개봉분점 주변의 번화가도 이제는 한산해져 있다.

고독모모는 장원의 중앙에 자리한 인공호수 가의 정자에 앉아있었다.

흔들!

문득 고독모모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 전체가 한번 휘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기가 어지럽구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고독모모의의 미간이 모아졌다.

(깊은 사연과 은원이 서린 물건이 이곳을 떠나려 한다.)

고독모모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물건이 세상으로 나가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뒤바꿀 것처럼 격한 요동을 한 번 일어나겠지.)

늙었어도 곱던 고독모모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 * *

 

진상파와 철관음은 복도 끝의 철문 앞에 서있었다.

철문 안쪽은 다듬지 않은 비밀통로인데 지금까지의 복도와 달리 불빛이 전혀 없다.

그 밀로를 십리쯤 가면 개봉성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 속의 낡은 사당이 나올 것이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던 강유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강유는 튼튼한 칼집에 넣은 불출검 극맹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너무 무거워서 허리에 차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상파와 철관음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강유는 곧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 두 여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버렸네.)

진상파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불과 사흘 남짓 함께 있었을 뿐인데 저 사람이 안 보이자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소리없는 한숨이 진상파의 입가로 흘렀다.

끼이...

영물답게 주인의 상심한 마음을 알아차린 섬전초가 올려다보며 위로한다.

그만 닫아.”

섬전초에게 들킨 마음을 숨기려고 진상파는 짐짓 차갑게 철관음에게 지시했다.

예 아가씨!”

철컹! 그그긍!

철관음은 육중한 철문을 서둘러 닫았다.

(지금까지의 나는 황금성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고 백만 명이 넘는 식솔들을 보살피기 위해 철저하게 이성적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진상파는 철관음에 의해 닫히는 철문을 보면서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그 결과 여자로서의 감정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마(心魔)가 스며든 것같구나.)

강유를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진상파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요?”

철컹!

그 사이에 철문을 완전히 닫은 철관음이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불출검 극맹의 비밀이 밝혀지면 세상이 피바람에 잠길 우려도 있는데... 유출될 것을 대비하여 일부러 망가진 병기들에 섞어 방치한 그것을 용케 찾아낼 줄은 몰랐어요.”

무공을 익혀야겠어.”

철관음의 우려 섞인 말에 진상파는 엉뚱한 대답을 하며 돌아섰다.

... 무공을 말인가요?”

철관음은 흥분에 휩싸인 표정이 되어 진상파를 따라갔다.

지금까지는 황금성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수리(數理)와 학문을 배우느라 무공을 수련할 여유가 없었어. 그 때문에 지난 며칠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고...”

저희들 백팔금차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철관음은 송구한 표정이 되었다.

언니가 미안해할 거 없어. 몸 하나 스스로 지킬 능력을 기르지 못한 내 탓도 있으니...”

아가씨께서 무공을 익히시면 무림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입니다. 자질과 지혜로는 천하제일이시고 태어나신 직후 벌모세수(伐貌洗髓)를 받으셔서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어 있으시기까지 하잖아요.”

흥분한 철관음이 평소와 달리 수다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진상파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영약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내공은 단시일 내에 극한까지 쌓으실 수 있으며 본성이 사들인 무공비급 중에는 절세적인 것도 부지기수... 늦어도 몇 달 안에 아가씨는 신주이십팔숙중 어지간한 인간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되실 거예요.”

기왕 무공을 익힐 거라면 만인부당(萬人不當)의 경지를 노려야겠지.”

진상파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렴요! 머잖아 우리 황금성은 부()뿐 아니라 무()로도 천하제일 소리를 듣게 되겠어요.”

철관음은 자기 일인 듯 기뻐했다.

진상파가 무공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자질로는 세상에 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철관음이다.

지금까지는 학문을 닦는 데만 열중하던 진상파가 무공을 수련하면 무림의 정세는 일거에 뒤집힐 것이다.

(언니는 몰라. 내가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

진상파는 철관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난 두 번 다시 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강유를 떠올리며 가슴이 거칠게 뛰어노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진상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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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최초의 패배

 

 

백남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녹지 옆에 서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넓은 얼굴, 크지 않은 것이 없는 오관(五管)...

대려장의 신비고수 신가람의 풍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범인(凡人)과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태산이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남빈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지금의 나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인물이다.)

강미루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신가람을 보면서 백남빈은 자신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마치 산이 움직여서 다가오는 듯하다.

강미루가 틈만 나면 자기 형부를 자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윽고 신가람과 함께 돌아온 강미루가 백남빈의 팔을 잡으며 뭐라 말하지만 백남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아는 어떤 분과 닮았구나."

신가람이 온화한 음성으로 백남빈에게 말했다.

어투와 달리 백남빈을 천천히 살펴보는 신가람의 눈에는 깊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백남빈의 모습은 신가람이 하늘 아래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며 또 존경하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은 신가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가람은 백남빈이 그저 철령보의 일개 무사인 줄로만 알고 있다.

신가람의 우호적인 말과 태도에도 백남빈은 미소만 슬쩍 지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와 상관없이 그를 적이라 생각하는 백남빈이었다.

"내 처제 미루에게 불손했던 점은 당사자인 미루가 원치 않으니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려장의 무사들을 상하게 한 책임은 져야 한다. 검을 들어라."

신가람은 느릿느릿 말을 하면서도 전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을 백남빈은 그때서야 보았다.

분명 명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보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검은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에 가려져 빛을 잃고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형부, 먼저 공격한 건 우리예요. 그러니 그를 탓할 수 없어요."

강미루가 팔을 벌려 백남빈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백남빈에게도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형부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백남빈은 강미루를 보지 않고 그녀 너머의 신가람에게 말했다.

신랑성의 침공은 시작되었습니까?”

신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산(陰山)과 백석산(白石山) 쪽의 장성이 돌파 당해서 무황성 분타들 중 묘아장(猫牙莊)과 양화보(兩華堡)가 신랑성에 떨어졌다."

신가람은 시종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몇 마디 말 속에는 격변하는 정세가 함축되어 있었다.

묘아장과 양화보는 철령보만큼이나 중요한 북방의 거점이다.

만리장성 바로 안쪽에 자리한 그 두 곳이 신랑성에 떨어졌다면 사태는 실로 엄중하다.

그 일대의 명나라 수비군도 와해되었을 게 분명하니 토곤이 결심만 하면 오이라트의 십만 기마대가 무인지경으로 중원에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나마 철령보는 신랑성의 요인들을 잡고 있어서 공격을 면한 상태다.”

신가람이 호의를 베풀 듯이 철령보의 사정도 이야기 해주었다.

자신들의 부성주와 토곤의 둘째 아들이 잡혀있으니 신랑성으로서도 철령보에는 쉽사리 도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빨리 도망쳐요!"

안도하는 백남빈의 귀에 강미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남빈은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루, 내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같소? 나도 명색이 무사요. 욕되게 하지 마시오."

하지만 강미루의 말은 아예 애걸조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형부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제발..."

백남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사자검을 힘껏 잡으며 신가람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비록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지라도 도망치지는 않겠소."

과연 인물이라 할 만하군. 그래야 네가 닮은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지.”

신가람이 백남빈의 사나이다움에 감탄을 표시했다.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감정이었다.

"앞으로 때를 잘 만난다면 능히 영웅(英雄)이 될 수 있겠어."

신가람은 허리에서 자신의 기도에 비하면 볼품없게 보이는 보검을 천천히 뽑았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신가람으로서는 미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후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리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강미루는 한쪽 옆으로 물러서서 제발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가슴 졸일 뿐이었다.

백남빈은 천천히 검을 뽑는 신가람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자검결 중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라는 구절이었다.

놀랍게도 신가람의 발검(拔劍)하는 태도가 바로 그 검결에 부합했다.

백남빈은 신가람의 몸 어디에도 검을 갖다 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막막해졌다.

그러면서도 백남빈의 몸은 자신이 만든 검초, 미녀각기검을 펼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공수를 겸비한 단 일초의 검식 미녀각기검만이 지금의 백남빈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허어...”.

신가람의 짙은 눈썹 끝이 약간 올라갔다. 천하의 무학종사(武學宗師)라고 자부할 수 있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기식(起式)이었기 때문이다.

베려는 것도 아니고 찌르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신가람에게는 백남빈의 몸이 검극(劍極;검의 끝 부분)에 다 가려져 버리는 듯이 느껴졌다.

게다가 백남빈의 윤기 있는 음성과 맑게 빛나는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승의 내공을 지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철령보의 일개 무사가 뜻밖에도 검술을 깊이 체득한 고수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당금 강호의 인물 중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남빈은 여러 가지로 신가람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대사형(大師兄)을 보는 듯해서 놀랐었다.

이어 백남빈의 의연한 태도에 놀랐고, 기이한 검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신가람은 검을 수평으로 뉘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그의 독문절기 광평검법(廣平劍法)의 기식(起式)이었다.

(이게 무슨...)

백남빈은 당혹감과 섬뜩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세하게 보면 볼수록 시선이 신가람의 몸에서 벗어나 자꾸만 옆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일부러 신가람를 보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 같았다.

미녀각기검으로 찌른다 하더라도 분명 신가람의 옆 쪽 허공을 찌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신가람이 검을 뽑는 순간 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이게 신가람이 지닌 무공의 무서움이다.

검을 든 적을 앞에 두고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죽여 달라고 목을 느리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나마 백남빈이 자꾸만 시선을 고쳐서 신가람을 향할 수 있는 것은 근본(根本)을 볼 수 있는 힘, 신명안(神明眼)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명안을 지닌 것조차 대사형을 닮았다.)

백남빈이 옆으로 흐르던 시선을 즉시즉시 수정해서 다시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신가람의 가슴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에게는 뛰어난 사형제들이 많지만 신명안을 지닌 인물은 오직 대사형뿐이었다.

(살려 둬야하나?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하나?)

신가람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맹렬하게 자라났다.

신명안까지 지닌 무서운 자질을 방치하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보면 볼수록 대사형을 닮아서 꺼려진다.

마음속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가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는 시시각각 짙어졌다.

백남빈도 자신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걸려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신가람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을 맞게 될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남빈은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웠다.

지금의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자검결뿐이다.

이전에 배운 삼재검법 따위는 신가람 같은 고수에게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이 마치 정지한 듯 지나며 백남빈의 머리에서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가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망부석 같았다.

반면 백남빈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신명안으로 흐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신가람을 보면서 그를 겨눈 사자검도 함께 움직인다.

(제발...)

옆에서 지켜보는 미루가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고 사는 긴박한 순간에 백남빈은 사자검결속에서 아지랭이같이 아른거리며 잡힐 듯 말듯한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신가람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의 머리에서 번개불같은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번쩍! 번쩍!

그는 그대로 미녀각기검을 펼쳐 고리같은 검기로 신가람을 공격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강미루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빡 했을 때 백남빈은 다시 사자검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있었고, 신가람은 그런 백남빈의 뒤쪽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팔락!

아무런 소리도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공중에서는 신가람의 동그랗게 잘려진 소매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풀 위에 내려앉을 때였다.

"훌륭하군. 훌륭해. 진정 멋진 검법이고 대단한 내공이었다. 족히 일갑자(一甲子) 수위는 되겠군. 내 일검을 받았으니 살려 주도록 하지."

몸을 휙 돌린 신가람은 강미루를 보면서 서늘해진 가슴을 숨기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의 일검(一劍)이 교환될 때 강미루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지 백남빈이 졌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강미루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백남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 처제.”

신가람이 다시 강미루를 재촉했다.

"형부, 그는 괜찮을까요?"

신가람의 태도에서 백남빈에 대한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 강미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지 그의 심맥(心脈)만을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무 이상 없을 것이다."

!‘

강미루는 비로소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무게를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신가람의 말은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다. 그의 말은 그게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다.

퍼억!

그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백남빈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달려가서 그를 안으려던 강미루는 멈칫했다.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면 형부가 혹시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백남빈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신가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떠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이 있어요."

신가람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태산같았지만 그것이 허락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강미루는 습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가람의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강미루 자신의 창평곡에서의 행복은 끝나버린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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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제일인의 제자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장의 두루마리와 비단으로 엮은 책 한 권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사라진 흑의여인이 남긴 물건이겠구나!)

이검한은 두 가지 물건 중 두루마리부터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두루마리는 천잠사같은 것으로 짜여 진 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촤락!

두루마리를 펼치자 한 장의 그림이 나타났다.

이게 뭐지? 폭포를 그린건가?”

이검한은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은 아주 기괴했다. 그저 시커먼 먹물 자욱이 아래위로 죽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폭포를 그린 그림 같기도 하지만 그냥 성의 없이 아래위로 여러 번 먹칠을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기(玄氣)가 숨겨져 있다!)

이검한은 그 기괴한 그림을 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폭포를 그린 듯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

이검한이 다시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폭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다면 이 그림이 한 번의 칠로 그려진 게 아니라 수많은 선이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점이었다.

수백 수천 번의 붓 칠 끝에 완성되었을 이 그림에는 오묘한 현기와 신묘함이 내포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잠시 끙끙거리며 그림을 살펴보던 이검한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리고는 흑의여인이 남긴 두 번째 물건인 비단으로 엮은 책을 집어 들었다.

... 이런...!”

하지만 책자를 집어 들려던 이검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푸스스스!

이검한의 손길이 닿자 그 책이 위쪽부터 재로 변해 부서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책은 거의 이천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비록 좋은 재질의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이긴 하지만 이천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견디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이검한이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법 두툼하던 책이 마지막 서너 장만 남은 상태였다.

 

<현음마경(玄陰魔經)>

 

비급의 표지가 부서지기 직전 그 같은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 있었던 것이 이검한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음마경! 그렇다면 설마 그 흑의여인이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자였던 상고시대의 여기인 현음마모(玄陰魔母)란 말인가?)

이검한은 경악하며 흑의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음마모!

 

그렇다. 이검한이 폭주하는 화룡단정의 열기를 식히는데 도움을 받은 흑의여인은 바로 현음마모였다.

이검한은 그 사실을 몇 장 남지 않은 비급의 잔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몇장 남지 않은 비급에는 한 가지 씩의 장법(掌法)과 심법(心法), 그리고 현음마모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현음마모라 불리던 불운한 계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는 아마도 입에 올리기에 민망한 죄를 내게 지었을 것이다.>

 

전자체로 적힌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현음마모는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육체가 이검한에게 희롱당할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는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던 듯했다.

 

<모두가 운명의 장난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이루지 못한 심원을 이루어 준다면 내게 진 빚을 갚는 것이 되리라. 그것은 이 글과 함께 있는 그림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 그림 속에는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한 절기 한 가지가 감추어져 있다. 나는 그 그림을 스승으로부터 하사 받은 후 오랜 세월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의 강호에는 마치 용 같고 신선같은 절세기인이 한 명 있었다.

그 기인은 난세로 인해 사라질 뻔한 상고시대의 무공들을 수습하고 정리하여 무림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종사였다.

 

-원시천존(元始天尊)!

 

고금오대고수의 첫째이며 사실상 고금제일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안배와 노력 덕분에 중원무림의 역사는 아득한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원시천존은 너무나도 오래 전의 인물이다.

무려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당금의 무림인들 대부분은 원시천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혹시 별호는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어떤 무공과 제자들을 남겼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검한은 원시천존을 존경하고 그의 경지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의 후계자다.

덕분에 일반 무림인들과 달리 이검한은 원시천존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다.

고독마야의 말에 의하면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말 그대로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역시 고금오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고독마야조차 감히 헤아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심오해도 윈시천존 역시 유한한 수명을 타고 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백 살도 오래 전에 넘겨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만한 인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원시천존 자신에 필적하는 기재가 아니면 온전히 깨우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원시천존 정도의 재능이 같은 시대에 또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원시천존은 차선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만은 못해도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 불리기에는 충분한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한 것이다.

, 남자 제자에게는 양강(陽强)한 절기를, 여자 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전수한 것이다.

 

-태양천자(太陽天子)!

-현음마모(玄陰魔母)!

 

그들이 바로 원시천존이 거둔 남녀 제자였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삼초지적(三招之敵)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스승의 슬하를 떠나 무림으로 나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씩 문파를 세웠다. 태양천자는 숭양무벌(崇陽武閥),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창건했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흑백(黑白)으로 나뉘는 무림판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동문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 성격 탓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의 관계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게 되었다.

호승심의 대상은 연인이라 해도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연인관계가 깨진 정도가 아니었다.

연마한 무공과 성격이 상극이었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천수를 다하고 우화등선하게 된 원시천존이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원시천존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게 두 가지의 물건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이것들이었다.

태극보정은 원시천존에 의해 세워진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를 상징하는 보물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시대의 성군 순()이 구주(九州)를 순행한 뒤 만들었다는 구정(九鼎) 중 하나였다.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구정은 그러나 주()왕조가 유목민족인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그 구정중 하나를 우연히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에 태극보정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징표로 삼았었다.

, 원시천존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태극보정을 물려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원시무맥의 종사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용도 없었다.

그에 반해 초연심결은 엄청난 유혹을 품고 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마지막 절기가 숨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마해내는 자는 제이(第二)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천존은 제자들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중 한 가지씩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보물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초연심결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실로 난제였기 때문이다.

오랜 고심 끝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태양천자는 태극보정을,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한 것이다.

태양천자는 고금최강의 무공을 얻는 것 보다는 존경하는 스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승의 상징인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모는 태양천자를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경지를 넘보다니...>

 

이어지는 현음마모의 글에서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을 놓고 벌인 암투에서 패배한 것은 본명이 종선인 현음마모였던 것이다.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으로 은거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원시천존이 창안한 최후의 절기 초연심결을 익히는 것 이상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연심결의 이치가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현음마모는 여자중에서는 고금최강으로 불렸던 천고기재다.

그런 현음마모건만 이십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연심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이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의 절기인 초연심결의 도해(圖解)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해야만 했던 시절에 무려 이십여 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은 어리석은 제자를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먼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스승님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과 종국에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초연심결을 보전하는 역할이나 감당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님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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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2)

 

 

쉭쉭!

임청우는 자신의 가슴에 올라앉아 얼굴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척포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으악!”

임청우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척포의 목을 움켜잡고 패대기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 배가 고파도 서로 잡아먹기 없다고 했는데...”

헌데 임청우가 바닥에 패대기쳐진 척포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치는 순간이었다.

!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며 기와가 와르르 쏟아졌다.

몸이 저절로 튀어 올라 무려 삼장이나 되는 천장에까지 솟구쳤던 것이다.

어이쿠!”

콰당탕!

임청우은 낭패한 몰골로 다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

마지막에 떨어지던 기와 한 장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간밤에 떨어진 청강검에 다쳤던 그 머리건만 기와만 산산조각 나고 머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임청우가 패대기쳤던 척포만이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화를 내며 코앞에서 쉭쉭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는 실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간밤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자기 때문에 철선동시가 죽은 것도, 우협 장백승이 왔다가 자신의 몸속에 든 색혈지독을 제거해주고 두 구의 시체를 태워버린 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마면혈도의 혈도(血刀)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氷魂鐵扇)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도 두구의 시체가 없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네가 먹었냐?”

임청우는 눈을 부라리며 척포에게 물었다.

하지만 척포는 고개를 저었다. 결코 먹지 않았다는 시늉이다.

꿈이었나 하고 생각해봐도 목이 없는 아미타여래의 불상이라든가, 반으로 잘려진 비로자나여래의 불상이 어젯밤의 일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군다나 등의 상처는 신통하게 아물었지만 한쪽에 떨어져 있는 철선동시의 왼팔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졸여졌다.

어디선가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연히 임청우의 눈이 사방을 살피게 되었다.

문득 바닥에서 누런빛이 비치는 곳이 두 군데나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밤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있던 곳이다.

(한데 나는 어째서 석가여래 앞에 놓여있었지? 이게 바로 부처님의 조화인가?)

임청우는 기이하게 생각하며 석가여래를 향해 합장한 후에 철선동시의 시체가 재가 되어 사라진 곳으로 갔다.

반짝이는 것은 녹아버린 누런 황금이었다.

옆에는 은도 함께 녹아있었다.

그리고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몽선도다!)

이미 몇 차례나 몽선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기에 임청우는 펼쳐보기도 전에 그것이 몽선도라고 생각했다.

쫘락!

펼쳐보니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지랑이가 아롱지는 듯한 꽃밭에서 신선으로 보이는 노인이 죽장을 짚은 채로 허리를 숙여 꽃을 구경하는 그림이다.

신선의 모습도 생생하고 꽃도 생생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신선 주위에는 아지랑이같은 것이 흐르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결같은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임청우는 황금과 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즉시 마면혈도가 있던 자리에 있는 양피지도 집어들었다.

그림은 두 개의 양피지가 이어진 것이었다.

마면혈도의 양피지에는 궁장을 한 절세가인(絶世佳人)이 그려져 있는데, 한 송이 부용꽃을 들고 고개를 젖힌 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나 그 표정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지 임청우는 호호호호! 하고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함께 얻었던 몽선도를 둘로 나누어 가질 때 여색을 밝히는 마면혈도는 주저 않고 절세가인을 택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단 한번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임청우는 여인의 미모에 넋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장의 그림을 함께 생각해 볼 때 꽃을 구경하는 노인을 보고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꾸르르르!

한동안 몽선도의 감상에 빠져있던 임청우의 뱃속에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극심한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보고 있던 두 장의 양피지를 함께 겹쳤다.

헌데 임청우가 도르르 만 양피지를 막 품으로 넣으려고 할 때였다.

휘익!

갑자기 척포가 날아올랐다.

임청우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척포는 말린 양피지의 가운데에 난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신기하게도 척포의 몸은 그리 길지 않은 양피지 속에 모두 들어가 꼬리도 머리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놈이 무슨 신통력을 부린 모양이다.)

임청우는 신기해하면서도 내심 꺼림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친구라고 하기는 하지만 척포는 성질이 급하고 흉악한 데가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을 품속에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찜찜하지 않을 수 없다.

척포! 당장 나와! 나오지 않으면 불에 태워버린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척포는 임청우의 으름장에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더욱 깊숙이 움추리며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척포는 우협 장백승이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시체를 삼매진화로 태워버릴 때에도 몽선도는 벌겋게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결코 불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영물인 척포가 생각할 때 그것은 예사 보물이 아닌 것이다.

척포는 몽선도를 집으로 삼는다면 자신의 위엄이 더욱 높아질 것같은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허영이 아닐 수도 있지만...

탁탁탁!

임청우는 바닥에 대고 몽선도를 두들겼다.

그래도 척포는 나오지 않았다.

배는 고파 죽을 지경인데, 그리고 무엇이나 살 수 있는 금과 은이 두 무더기나 눈앞에 있는 데도 척포와 말도 안되는 다툼을 벌이노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침내 임청우가 항복하고 말았다.

좋다! 내가 졌다. 하지만 만약에 내 몸에 긁힌 자국이라도 하나 내는 날에는 앞뒤로 끈을 꽁꽁 묶어 불속에 집어넣어 버릴 테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고집 부릴 때도 마찬가지고!”

척포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알았다는 시늉을 한다.

요놈!”

임청우는 잽싸게 머리를 잡고 끌어내려고 했지만 척포는 그보다 더 빨리 쏙 들어가 버렸다.

고집불통같으니...”

임청우는 투덜거리며 몽선도를 품속에 넣고 바닥에 녹아있는 금은을 챙겼다.

그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숙님! 틀림없다니까요. 어젯밤의 그 거지새끼가 탑 위에 올라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대로 뒀다간 대안탑이 거지 소굴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그 건방진 지객승이구나!)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막아섰던 젊은 지객승의 것이었다.

(여기 올라와서 부서진 향로와 불상을 물어내라고 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금 한 무더기는 남겨두고 가야겠다.)

임청우가 서둘러 금과 은이 녹아있는 곳으로 갈 때였다.

지덕(智德)! 네 녀석은 어찌 그리 입이 험하냐? 입을 깨끗이 함도 수도라는 것을 모르느냐?”

늙구수레한 목소리가 지객승을 꾸짖는 것이 들려왔다.

대저, 험한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가장 가까운 귀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험한 말을 내뱉는 것이 버릇이 되면 마음도 자연 거칠어지느니라. 그런고로 남을 꾸짖을 때도 엄한 말로 자신도 꾸짖는 말을 써야만 하지 함부로 그 행위를 비방하거나 욕설을 해서는 결코 아니 되느니라.”

노승의 준엄한 목소리에 지객승의 음성이 쑤욱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는 품속에 넣은 금과 은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띠를 졸라맨 후 우협 장백승이 준 청강검을 챙겨들었다.

그런 후에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마면혈도의 혈도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이 눈에 들어왔다.

(흉악한 병기(兵器)를 절에 남겨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가져가서 깊은 계곡이나 물 속에 던져버려야겠구나.)

휘익! !

임청우는 재빨리 달려가 빙혼철선을 소매 속에 넣고 혈도를 허리춤에 끼웠다.

그 직후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하며 자신의 발을 내다보았다.

틀림없이 자기의 발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빨라졌지?)

임청우가 철선과 혈도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순식간에 도달해 버렸던 것이다.

한쪽 발을 들어 발바닥을 보았지만 기름이 묻어있지도 않다.

다른 발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척포 때문에 놀랐을 때도 단번에 삼장이나 솟구쳐 머리를 천장에 박았었다.

어쩌면 간밤에 마면혈도가 일러주던 무쌍층층공의 구결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깊이 연구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육조(六祖)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저 말만 왼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지덕 너도 스스로 닦음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래에서 노승이 지객승에게 훈계하는 음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하나......!)

!

임청우는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휘이익!

귓가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발이 땅을 밟을수록 힘은 솟구치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휘이익!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치 날듯이 해서 내려갔다.

으앗! 귀신!”

지객승이 자기의 머리를 훌쩍 뛰어 넘어 내려가는 임청우를 보고 기겁해서 소리치며 엎드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수염이 허연 노승은 연신 아미타불을 중얼거리며 벽면을 더듬고 있었다. 이미 혼은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대략 일각의 시간이 지나서야 지객승은 고개를 들었다.

사숙이 염불을 외우며 벽을 더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이 빠져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눈치다.

지객승은 사숙의 소매를 끌면서 말했다.

사숙! 요괴는 이미 사라진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노납은 지금 남아있는 요괴들을 쫓았느니라.”

노승이 황망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지객승이 씨익 웃자 노승은 용기를 쥐어 짜내어 앞장 서서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이리로 와 보거라. 이제는 요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데 요괴가 분탕질을 쳤을까 싶어 그것이 걱정스럽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노승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헌데 노승을 따라 칠층에 올라온 지객승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 잘린 아미타부처님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사숙께선 벌써 득도하신 모양이구나. 올라와 보지도 않고 요괴들이 분탕질 친 것 까지 아시다니...)

지객승은 사숙의 다리가 후들거린 것은 이십장이 넘는 대안탑을 노구의 몸으로 올랐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리고 존경이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때 노승은 눈을 감은 채 아미타불을 외고 있었다.

(부처님...제발... 이 어리석은 중을 굽어 살피소서. 나이어린 사질(師姪)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만은 면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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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무공 전수

 

 

"내가 담세황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무림에 크나큰 화근(禍根)이 될 것이다."

옥여상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우리 마천루의 모든 절기를 연성해낸 담세황이 최강의 호신기공인 태을강기마저 얻는다면 그 누구도 놈의 폭주를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안색도 심각하게 변했다.

비로소 옥여상이 억지로 자신에게 처녀를 주려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옥여상의 말이 이어졌다.

"사로잡힐 경우 자결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담세황은 태을강기를 얻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내 시신을 욕보일 것이다. 그같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 그게..."

고검추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검추는 아직 여자를 알지 못한다.

사내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지만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뜻하지 않게 오늘 여자와 관계할 기회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선뜻 옥여상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은 양모가 원수에게 유린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런 처지에 여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옥여상의 제안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다.

자신이 옥여상관계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 깃들어있는 태을강기를 담세황이 차지할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옥여상의 말 대로 세상에 크나큰 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비록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고검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분부 따르겠습니다."

결국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고맙다 추아야."

내심 긴장하고 있던 옥여상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소녀밀법(素女密法)이라는 채음보양술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듣거라."

이어 그녀는 한 가지 구결을 고검추에게 들려주었다.

소녀밀법이라는 그 구결은 헌원태을경에 수록되어 있는 절기중 하나다.

옥여상이 들려주는 소녀밀법의 구결을 외우던 고검추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소녀밀법이란 것이 남녀가 관계하는 방법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일부는 소녀밀법을 듣는 과정에서 주책없이 반응을 보였다.

소녀밀법을 들려주는 옥여상의 얼굴도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고검추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자니 죽을 맛이다.

특히 자신의 설명이 시작되자 고검추의 일부가 즉시 반응을 보여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비록 좌도방문의 비결이지만 소녀밀법의 효과는 탁월하다.

그것을 익히면 이성의 정기를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누구보다 영특한 고검추다.

옥여상이 소녀밀법을 두 번 설명해준 것만으로 그 이치를 완전히 이해했다.

... 그만 말씀해주셔도 되겠습니다.”

고검추는 또 한 번 소녀밀법을 구술해주려는 옥여상에게 말했다.

"...!"

고검추가 소녀밀법을 이해한 것을 안 옥여상은 눈을 내리감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검추는 옥여상의 그같은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덧 고검추를 휘감고 있던 옥여상의 팔다리가 풀려있다.

...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옥여상이 가르쳐준 소녀밀법을 옥여상에게 사용했다.

"... 시작하겠습니다."

"... 오냐! ... 나도 준비가 되었다."

고검추는 소녀밀법의 흡자결(吸字訣)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옥여상도 소녀밀법의 발자결(發字訣)을 운용하여 고검추를 도와주었다.

우르르!

곧 옥여상의 내부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심맥 깊은 곳에서 거대한 암경이 출렁이며 결집되더니 고검추의 몸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연(奇緣)!

고검추는 실로 엄청난 기연을 만나고 있었다.

옥여상에게서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이어 받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리되면 세상 어떤 힘도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스으으! 스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자욱한 운무가 일어나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그들의 몸을 가렸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허억!”

고검추는 전신의 경맥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만감을 느끼며 소녀밀법의 시전을 중단했다.

옥여상의 몸속에서 떠돌고 있던 태을강기를 모두 흡수한 것이다.

마치 몸 안에 활화산이 하나 생겨 부글거리고 있는 것 같다.

만큼 태을강기의 힘은 강대하면서도 매우 유동적이다.

비록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흡수했지만 당장 사용하지는 못한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고검추가 엄청난 기연을 맞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금만 노력하면 태을강기를 완성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어떤 고수와 싸워도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고모님."

고검추는 그때까지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옥여상의 몸에서 일어났다.

헌데 떨어지려는 c의 허리를 옥여상의 두 손이 말없이 끌어당겼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전율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열풍이 동굴 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고검추는 심연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린 듯한 피곤함이 느껴졌다.

비록 몸을 피곤하지만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고검추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은 순진한 소년에서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된 것이다.

물론 고검추를 소년에서 사내로 만들어준 것은 은말마희 옥여상이다.

(그분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본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고검추는 눈을 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죄스럽고 어색해서 옥여상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든 척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 덧 아침이 되어 눈부신 햇살이 등나무 넝쿨 사이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옥여상의 모습은 석실 어디에서도 없었다.

고검추의 몸에는 옷이 단정하게 입혀져 있었다.

물론 옥여상이 입혀준 것이다.

(어딜 가셨을까?)

고검추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며 일어났다.

일어나 살펴보니 옆에 깔린 마른풀 위에는 점점이 검붉은 자극이 남아 있다.

옥여상의 몸에서 상당향의 출혈이 있었다는 증거다.

물론 옥여상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든 장본인은 고검추다.

(몸을 닦으려 밖으로 나가신 것일까?)

일어나 앉은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으로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잘 접은 손수건 한 장과 낡은 표지의 비급 한 권, 속옷을 찢어서 종이를 대신한 편지가 그것이었다.

낡은 표지의 비급은 문제의 헌원태을경이었다.

옥여상은 고검추가 태을강기를 수련할 수 있도록 헌원태을경을 남기고 간 것이다.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집어들어 대충 훑어보았다.

헌원태을경에는 태을강기 위에도 몇 가지 무공이 더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수비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절기들이라 나같은 일초무학은 이해하는 게 쉽지 않겠구나.)

헌원태을경을 한차례 훑어본 고검추의 감상이었다.

태을강기는 이미 완성 직전인 상태로 몸 속에 고여 있어서 수련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무공들은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쉽사리 그 이치를 깨우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을 두고 연구해봐야겠지.)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내려놓고 속옷을 찢어 만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상당히 크게 찢은 속옷 자락 위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들이 깨알같은 크기고 가득 적혀 있었다.

옥여상이 심후한 내공을 이용하여 천을 태우는 방식으로 글을 남긴 것이다.

 

<네가 깨어나면 떠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먼저 떠난다.>

 

섬세한 필체의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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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약(靈藥)을 물처럼 마시다.

 

 

원래 강유의 내공은 이십 년 정도 수위였다.

그리 대단하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이십 년 수위의 내공도 강유의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 년 동안 쉬지 않고 면벽수련을 해야 쌓을 수 있는 정도의 내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림에서는 일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고 오직 면벽수련만 육십 년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에는 몇 갑자의 내공을 지닌 고수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세 가지 경우다

 

첫째, 누군가에게서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내공을 이전 받는 것이다.

대개의 명문대파에서는 전대고수가 죽음이나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필생 내공을 후손들에게 전수해준다.

다만 개정대법은 효율이 낮아서 전수해주는 내공중 열에 하나도 흡수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선대가 이전해주는 약간의 내공이나마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명문대파들이 대대로 세력을 유지해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가 개정대법의 존재다.

 

두 번째는 내공의 증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만들어주는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이 있다.

특별한 무공을 수련하면 남들보다 몇 배, 심하면 몇 십 배 빠르게 내공이 늘어날 수 있다.

무림인들이 신공절기를 얻기 위해 목을 매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靈藥)의 힘을 비는 것이다.

공청석유(空靑石乳), 자부현청(紫府玄淸), 인형삼왕(人形蔘王),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화리내단(火鯉內丹), 금구내단(金龜內丹), 이무기와 용의 쓸개나 내단, 골수...

대자연의 기운과 세월의 힘이 만들어낸 이런 영약들을 복용하면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단순히 내공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영약을 얻는 것은 기연(奇緣)을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유는 어렸을 때부터 타복과 함께 안탕산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산삼이나 오래 묵은 하수오등을 캐서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된 강유의 내공이 이십 년 수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헌데 강유의 현재 내공 수위는 일갑자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단 시간 내에 어떻게 내공이 세 배 이상으로 증진할 수 있었을까?

원인은 강유의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그 주전자는 술이나 물 한 되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주전자에는 우윳빛의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진상파는 강유에게 그 주전자를 주며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되니 마시라고 했었다.

목도 마르고 해서 강유는 별 생각없이 주전자의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었다.

강유가 우윳빛의 액체를 물처럼 마시고 나자 진상파가 미소 지으면서 말했었다.

사실 그 주전자에 담겨있던 것은 공청석유였답니다.”

 

* * *

 

황금성 개봉분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칠 층짜리 탑이다.

장원의 정 중앙에 자리한 그 탑의 용도는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칠층탑의 맨 꼭대기 층에는 네 명의 백팔금차가 각 방향의 창가에 서서 장원 안팍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고한다.”

계단을 통해서 철관음이 칠층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단장님...”

네 방향을 감시하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고개만 옆으로 돌려 철관음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상황이냐?”

철관음은 장원의 정문쪽을 감시하고 있는 백팔금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예상하신 대로 제왕성의 인간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바글거리고 있습니다.”

석부용(石芙蓉)이라는 별호를 지닌 백팔금차가 시선을 장원 밖에 둔 채 대답했다.

철관음은 석부용 옆에 서서 장원의 정문 밖을 살펴보았다.

황금성 개봉분점은 번화가에 자리한 탓에 밤이 깊었음에도 주변이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다.

헌데 상점가의 골목골목마다 숨듯이 서서 장원쪽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물론 그자들은 제왕성 개봉분타 소속의 무사들이다.

간간히 철위사와 동위사들도 그자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눈에 띈다.

중상을 입었던 독두태보까지 잠깐 얼굴을 비춘 후 다시 모습을 숨겼습니다.”

석부용이 장원 정면의 객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두태보는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객잔에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강공자가 제왕성 인간들의 이목에 감지되지 않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철관음은 석부용이 가리키는 객잔을 보며 물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지 않을런지요?”

석부용이 철관음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철관음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두태보는 제왕성으로 지원을 요청했을 게 분명하다. 은위사나 금위사들까지 몰려오면 태상호법님이 계신다 해도 끝까지 강공자를 지켜줄 수는 없다.)

철관음의 미간이 모아졌다.

가능한 빨리 강유를 개봉지점 밖으로 탈출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 *

 

후우...”

강유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공청석유를 마신 후 거푸 삼주천(三周天) 운기조식을 한 후였다.

(실로 대단하구나.)

정신을 차린 강유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내상과 외상이 말끔히 나은 것은 물론이고 내공이 일갑자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증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몸속의 경맥과 혈도에는 미처 내공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막대한 잠경(潛勁)이 도사리고 있다.

한 되나 되는 공천석유를 물처럼 마신 결과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공청석유를 한 모금만 마시면 되살아난다.

무림인이라면 십 년 동안 면벽수련 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헌데 그 귀한 공청석유를 강유는 한 되 가량이나 물 마시듯 마셔버렸었다.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가득 들어있던 것이 공청석유라는 걸 알았다면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릉의 본점 뿐 아니라 황금성의 중요한 분점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절세의 영약들을 상비해두고 있다.

강유가 마신 공청석유도 황금성이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 구한 것이었다.

(돈이라면 구하지 못하는 게 없다더니만...)

새삼 황금의 힘에 놀라는 강유였다.

강유는 엉겁결에 마신 공청석유의 약효를 극히 일부만 내공으로 만든 상태다.

공청석유의 약효는 꾸준히 내공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강유의 몸은 어지간한 독에는 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공청석유의 약효는 무궁무진하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내공이 모자라서 패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유는 후유증이 심한 마검칠식도 무리없이 펼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공이 심후해진 데다가 경맥도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튼튼해졌기 때문이다.

(황금성의 성주를 구해준 대가를 좀 과하게 받은 느낌이 든다.)

강유가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연공관의 문 밖에서 누군가의 들리는 음성이 들렸다.

(진상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린 강유는 급히 만년한옥의 탁자에서 내려섰다.

! 들어오십시오.”

강유는 서둘러 책상 위에 준비되어 있는 새 옷을 상체에 걸치며 대답했다.

실례하겠어요.”

덜컹!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연공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 열어주는 철문 밖에는 진상파가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서있었다.

카아!

진상파의 품에 안긴 섬전초가 가자미눈으로 강유를 흘겨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밧줄 대신 보석이 박힌 화려한 목걸이를 차고 있는 그놈은 여전히 강유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터면 강유에 의해 산 채로 불에 구워져 야식이 될 뻔 했었다.

영물이니만큼 원한도 쉽게 잊지 않는 것이다.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했던 말과 달리 진상파는 연공관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철문 밖에 서서 물었다.

귀한 영약을 주신 덕분에 내상이 완치되었을 뿐 아니라 내공까지 몇 배로 증진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강소협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만분지일도 안되는 것이었으니 과례(過禮)는 거두어주세요.”

강유가 포권으로 사례(謝禮)하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겸양했다.

같이 가시면서 말씀 나누도록 하지요.”

이어 진상파는 옆으로 물러서며 함께 가기를 청했다.

...”

강유는 대답하며 연공관을 나섰다.

 

연공관 밖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등(油燈)이 밝혀져 있는 복도다.

지하에 나 있는 그 복도를 진상파가 앞장서서 걷고 강유가 따라갔다.

뒤쪽에서는 철관음이 철문을 닫은 후 따라온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희 개봉분점은 제왕성에 의해 물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예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조신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강유는 제왕성의 인간들이 황금성과 척을 지면서까지 개봉분점을 포위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느덧 제왕성의 목표는 진상파가 아니라 강유 자신이 되어버렸다.

무후 영청공주를 죽인 범인과 관련이 있는 자신을 반드시 잡으려 드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제가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폐라고 하실 것도 없어요. 비록 제왕성의 무력이 대단하긴 해도 대놓고 저희 황금성을 적대하진 못하니까요.”

강유가 미안해했지만 진상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돈의 힘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지.)

강유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상파가 결혼식 전날 밤에 야반도주하면서 혼담은 깨어졌다.

제왕성으로서는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그렇다고 황금성을 핍박하진 못한다.

비록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과 원수가 되면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제왕성의 진짜 고수들이 도착하면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 강소협의 신병을 확보하려들 가능성은 있어요. 강소협께서 서둘러 포위망을 빠져나가셔야만 하는 이유랍니다.”

혹시 이 밀로(密路)...?”

유사시에 개봉성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 만들어놓은 비밀통로랍니다.”

 

황금성이 개봉분점으로 삼고 있는 장원은 송나라, 정확히는 북송(北宋) 시절에 지어졌다.

한족(漢族)이 세운 그 어느 왕조보다 허약했던 북송은 수시로 외침(外侵)을 당했었다.

먼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시달렸고 뒤이어 흥기한 여진족의 금()나라에게는 황제가 잡혀가는 수모까지 당했었다.

나라의 힘을 믿을 수 없게 된 유력자들은 스스로 보신책을 마련하는데 골몰했다.

지하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대피시설을 마련하거나 개봉이 포위당할 경우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만든 것이다.

강유가 상처를 치료한 연공관과 지금 지나고 있는 복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밀통로일 뿐 아니라 이곳은 값나가는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수장고(守藏庫)이기도 해요.”

진상파는 복도에 일정 간격으로 달려있는 철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내상을 치료하던 연공관에는 무공비급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 저 철문들 안쪽에는 황금성이 벌어들인 재물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강유가 그 철문들을 보며 생각할 때였다.

여기에 잠깐 들렸다 가도록 해요. 강소협께 드릴 게 있어요.”

진상파는 어떤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철관음이 서둘러 다가와 철문을 열었다.

철문에는 <武庫>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고(武庫)... 병기고인가?)

덜컹!

강유가 생각할 때 철관음에 의해 철문이 열렸다.

연공관의 경우처럼 철문 안쪽은 그리 어둡지 않다.

(역시...)

진상파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족히 백 평은 됨직한 넓은 밀실에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 , , 철퇴, , 활 등등 각가지 형태의 무기들 뿐 아니라 갑옷과 투구, 방패등 호신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양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견문이 그리 넓다고 할 수 없는 강유가 보기에도 이 밀실에 보관되어 있는 무기들 중 평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짐작하셨겠지만 이곳에 수장되어 있는 병장기들은 무림인이라면 꿈에라도 얻기를 원하는 신병이기들이랍니다.”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시렁들 사이를 지나며 진상파가 말했다.

고대 이래로 화북(華北) 지방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화북 지방에서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만들어지거나 유입되었다.

그 병장기들 중에서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거나 위력이 뛰어난 것들은 대부분 황금성으로 흘러들어왔다.

신병이기들의 값을 제대로 쳐주는 곳은 황금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봉 뿐 아니라 낙양(洛陽), 서안(西安)등 오래 된 도시에 자리한 황금성 분점들은 대량의 신병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보관하고 있는 신병이기들의 양과 질에서는 화북지방의 분점들이 금릉에 자리한 황금성 본점을 압도한다.

소협의 검은 독두태보와 싸우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버렸지요?”

이윽고 진상파는 무고의 맨 안쪽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독두태보의 장력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제가 사용한 검법이 검에 무리를 준 탓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검을 대신할 무기를 드리고 싶으니 골라보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물러서며 권했다.

진상파와 강유의 앞쪽에는 무고 내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습기를 막기 위해 숯과 소금을 채워 넣은 두꺼운 벽체가 삼면의 벽뿐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 안쪽 벽에는 백여 자루의 무기들이 걸려있다.

또 벽 앞쪽에는 철제 탁자가 놓여있는데 그 위에는 낡은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한눈에 봐도 무공비급들이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은 특히 귀한 신병이기들이겠습니다.”

강유는 벽에 걸려있는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잘 보셨어요.”

진상파는 섬전초를 탁자에 내려놓고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 한 자루를 벽에서 떼어냈다. 칠보(七寶)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그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검이다.

이 검의 이름은 소협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진상파는 보검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칼집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보검의 손잡이에는 옛날 글씨체로 <干將>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간장(干將)!”

보검의 손잡이, 즉 검병(劍柄)에 새겨진 그 글을 판독한 강유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 혹시 이 검이...”

보검을 받아든 강유의 두 손이 흥분으로 벌벌 떨렸다.

검법을 익힌 처지다 보니 뛰어난 보검을 만나면 자제하기가 힘든 것이다.

춘추오대신검(春秋五大神劍)중 하나이며 또 다른 보검 막야(莫耶)와는 부부지간이기도 한 간장이랍니다.”

강유가 만난 이래 처음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상파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 속의 간장, 막야가 실제로 존재했군요.”

강유는 좀체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하며 보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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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삼녀삼심(三女三心)

 

 

퍼억!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에 떨어진 예이연의 모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피가 흐르기 시작해서 삽시에 주변 바닥이 붉게 변해 버렸다.

진룡은 검으로 땅을 가리킨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별을 가린 구름이 은하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위사들이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짓쳐 들어오지 못했다.

스스스스스...

고요한 중에도 진룡의 몸 주위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좌중은 진룡이 뿜어내는 그 살기에 압도당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으하하하!”

그러던 어느 순간 내공을 실은 엄청난 웃음소리와 함께 사자검이 대리석 바닥을 쳤다,

!

대리석 바닥에 검이 닫았다 싶은 순간 진룡의 몸은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사자검이 닿았던 대리석바닥은 푸석해져서 그의 검에 실린 공력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위사들은 그를 추격할 생각조차도 못했다.

 

***

 

궁궐을 빠져 나온 진룡은 미리 알아 두었던 예지운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그의 얼굴은 바람에 밀리는 눈물로 얼룩졌다.

 

달리면서 어느 정도 진정된 감정으로 예지운의 집으로 넘어 들어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달리면서 가장 큰 본채를 찾았다.

이윽고 그 건물에 도착해서 창문 밑에 몸을 낮추고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지운의 거처가 틀림없었다.

진룡은 거리낌 없이 방문으로 걸어가 덜컹 열었다.

피가 묻은 사자검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었고 살짝 베어진 그의 가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예지운이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런 자객에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린 검을 잡았다.

진룡은 저지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을 베고 오는 길이다."

자르듯이 내뱉자 예지운은 그제야 상대가 진룡임을 알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진룡도 파양호대전 때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떠는 것도 잠깐, 예지운은 진룡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코웃음을 쳤다.

"내 동생이 그렇게 약한 줄 아느냐? 아비에게 쫓겨난 어리석은 놈아! 자 오너라! 단칼에 죽여주마."

"산산은 어디에 있느냐?"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진룡이 물었다.

"그년은 내가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잡소리 말고 어서 덤벼라."

예지운의 거친 말에도 한번 크게 좌절을 겪은 진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바닥을 가리키고 있던 진룡의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크악!"

순간 예지운의 왼쪽 손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사자검은 언제 휘둘러졌는지 그자의 손목을 자르고 다시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진룡의 검공(劍功)에 예지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룡의 무위(武威)는 일 개 장군에 불과했던 그자로서는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올라가는 사자검을 보면서 예지운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예지운이 들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진룡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런 진룡이 거인처럼 느껴진 예지운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였다.

천천히 올라가 허공을 가리키던 검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예지운의 오른쪽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팍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지운의 짝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새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공포와 불행을 맛보게 해주겠다!"

진룡은 단호하게 내뱉으며 땅을 가리키고 있던 검을 다시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여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그들만의 공간을 부수며 들려왔다.

"... 오라버니?"

산산이었다.

 

털썩!

산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지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지운이 죽였다고 한 누이동생 산산이 문간에 서있었다.

"너는 살아 있었구나."

진룡은 산산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산은 물러서면서 물었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죽었나요?"

"아직 죽지 않았다. 쉽게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진룡은 인간 마음의 추악함을 경험한지라 어느 정도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리며 다시 예지운에게 돌아섰다.

"그를... 그를 죽이지 마셔요."

산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진룡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산산은 진룡의 옆을 지나 예지운에게로 달려가더니 잘려져 피가 흐르는 그의 손목을 치마자락으로 감싸고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진룡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산산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떨면서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 저는 이 사람의 아기를 가졌어요."

진룡이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낸 그 원수를 살려 주어야 한단 말이냐?"

가슴 속에서는 격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

"그자가 작은 이득을 위해 무거운 신의(信義)를 배반한 걸 아느냐?"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음을 아느냐?"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너를 능욕했음을 잊었단 말이냐?"

"잊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그를 살려주어야 한단 말이냐?"

역시 당연하다는 듯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진룡은 기가 막히고 맥이 탁 풀렸다.

예지운의 앞을 산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들어 올리던 검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옆에 있는 탁자를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파파파팍!

책과 찻주전자는 허공으로 튕겨 올랐고 탁자는 산산조각이 나며 주저앉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해 호흡마저 고르지 못하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며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이동생 산산이 예지운이 떨어뜨린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룡의 가슴을 찌른 그 검은 예이연이 낸 상처를 다시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산산이 찌른 검인지라 진룡의 내공에 막혀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진룡의 가슴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네가... 네가...!"

진룡의 말이 떨려나왔다.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정말 찌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겁에 질린 산산의 음성은 이미 진룡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

진룡은 용의 울음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뛰쳐나와서 방향을 분간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탈진하여 이름 모를 산속에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풀냄새가 진룡의 코를 자극했다.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 십 년을 산 것 만 같았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산화... 산화... 우리 산화를 데려 와야지."

진룡은 천근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

 

산에서 내려오다가 작은 마을이 있어 물어 보았더니 마을 이름은 백가촌(白家村)이지만 백()씨와 이()씨가 같이 살고 있다 한다.

금릉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훗날 이곳에서 백남빈 부자와 이탁이 태어났다.

 

***

 

밥도 넘어가지 않고 술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물로 목을 축이며 진룡은 터벅터벅 걸어 이틀 만에야 금릉에 다시 돌아왔다.

위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예귀비(藝貴妃)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 하였다.

그러나 금릉으로 들어오는 그를 범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그의 모습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산화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냉기가 확 감돌았다.

들보에 산화가 목을 매어 죽은 채 늘어져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산화는 진룡이 궁궐로 떠날 때 잠든 척 했으나, 사실은 떠나는 오라버니를 뒤에서 훔쳐보며 안녕을 고했었다.

오라버니가 떠나자 산화는 허리띠를 들보에 걸고 목을 맸다. 오빠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비록 어리지만 공주로서 예교(禮敎)를 배우고 자란 산화였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가 되살아난 이성(理性)은 더 이상 그녀가 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막내 누이는 죽었고 사랑했던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또 다른 누이 산산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진룡은 조카들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평곡에는 또 하나의 죽음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인 스승 정사초의 죽음이었다.

팔십이 세의 나이이니 살 만큼 산 그는 진룡이 돌아 온 직후 죽었다.

정사초는 죽기 전에 진룡에게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후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우리들 사자검의 전인은 세상에서 환영받는 이가 없구나. 너의 신세도 처량하다마는 네 사조들도 절세의 총명을 지니고도 세상에서 그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사자검의 전인은 마음이 세상을 앞서 가니 세상이 알아주기 어려운 때문이니라. 다 시대를 앞서 태어난 탓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슬픔이 너의 정신을 흐트릴까 두렵구나."

 

그 후 진룡은 창평곡에서 사자검을 익히고 시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살며 두 번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조들과 달리 사자검을 익혀도 세상을 구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서 전인을 구하여 사자검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인도 두지 않고 혼자서 창평곡에 쓸쓸하게 살다가 사자검을 녹지에 던진 후 죽었다.

그의 검결은 고독과 허무가 깊이 베여있고 염세(厭世)의 분위기를 절로 풍기게 된 것이다.

 

***

 

진룡의 애절한 사연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룡의 원수인 예지운은 그후로도 벼슬을 계속하여 몇 대에 걸쳐 부귀를 누렸던 것을 백남빈은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사자검의 전인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그 뜻이 꺾인단 말인가? 정말 정사초 사조의 말마따나 세상을 앞서 살아가는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백남빈은 탄식했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우측, 녹지의 동쪽 절벽 앞에 흰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난공불락의 절진으로 둘러쳐진 창평곡에 누군가가 들어 온 것이다.

히히히힝!

흑왕이 나타난 사람을 향해 길게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형부!"

강미루도 벌떡 일어나 뛰어가며 소리쳤다.

단번에 동쪽 절벽 아래까지 달려간 강미루는 그 인물의 품에 거리낌없이 안겼다.

흰 옷을 입은 그 인물은 바로 출신내력이 신비에 싸인 대려장의 제일고수이자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인 광평객 신가람이었다.

그가 마침내 보름 만에 미혼, 산백, 박령의 삼대절진을 뚫고 창평곡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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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사회생

 

 

종유동굴의 다른 곳과 달리 우윳빛 반석과 그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에는 얼음이 덮여 있지 않다.

극한의 냉기는 얼음조차 증발시켜버린다.

반석도 그렇지만 흑의여인의 몸은 너무 차가워 얼음이 쌓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이검한은 헐떡이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흑의여인이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한기의 근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흑의여인이 누워있는 우윳빛 반석에서도 살을 에는 냉기가 느껴지긴 한다. 아마도 한옥(寒玉)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우윳빛 반석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냉기도 흑의여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한기에 비하면 봄바람 정도로 느껴진다.

! !

이검한이 반석으로 다가감에 따라 공기 중에서 쇠가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난다. 극한의 냉기가 흑의여인의 몸 주변에 첩첩이 쌓여 있다가 요동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꺼운 얼음으로 덮어버린 막대한 양의 냉기는 바로 이 흑의여인의 그리 크지 않은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허억!”

마침내 반석 옆에 이른 이검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반석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끄으윽!”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 이검한은 마치 얼음물에 뛰어든 듯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흑의여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극음한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연마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흑의여인의 몸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몸 근처 일 장 안으로 접근만 해도 지독한 냉기에 침습당해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버린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한 이검한만은 예외였다. 그의 몸속에는 활화산의 용암같은 열기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치치!

이검한이 흑의여인을 끌어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확 일어난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처럼 변한 이검한의 몸과 얼음보다 몇 배 더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이 닿으면서 주변의 공기가 응결하는 것이다.

쿠오오오!

이검한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열기는 반석 주변의 얼음들도 녹였고 그에 따라 수증기는 폭발적으로 짙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 아래 깔린 흑의여인의 몸도 수증기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검은색의 옷이 흠씬 젖어 피부에 달라붙자 흑의여인의 뇌쇄적인 육체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다.

크으... ...!”

흑의여인을 끌어안은 이검한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여체를 끌어안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검한의 몸 속은 여전히 펄펄 끓는 기름을 마신 듯한 초고열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화룡단정의 가공할 열독은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을 잠깐 끌어안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열독을 어떻게든 밖으로 배출해내야만 한다.

이검한은 살기 위해, 내장이 익어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 쳤다.

푸시시시!

두 사람의 맨살이 부벼지면서 달군 쇳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은 것같은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일어난다.

츠츠츠!

그와 함께 일어난 수증기는 급격히 짙어져 이제는 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오랜 세월 차가운 냉기만 흐르던 종유동굴은 삽시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검한의 몸에 고여 있던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고열은 맞닿고 문질러지는 살갗을 통해 흑의여인의 몸속으로 노도같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증기는 점점 더 짙어져서 마침내 드넓은 종유동굴을 가득 메우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체같이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이검한의 몸이 요동칠 때마다 축 늘어져 있던 흑의여인의 몸도 움찔 움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심지어 흑의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미약하지만 숨결이 토해지기까지 했다.

부활(復活)!

그렇다! 흑의여인은 오랜 가사상태(假死狀態)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흑의여인은 한 가지 술법(術法)을 스스로에게 걸어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다. 엄청난 냉기를 일으켜서 육신 뿐 아니라 혼백까지 얼려 시간의 해()를 극복해온 것이다.

다만 이 술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흑의여인 스스로는 술법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것이다.

누군가 용암처럼 뜨거운 양기를 그녀의 몸에 주입해주어야만 술법이 소멸된다.

그리고 흑의여인이 필요로 하는 막강한 양기는 이검한의 몸에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이검한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문질러대는 살갗을 통해 주입되고 있는 그 순양지기가 흑의여인의 얼어붙어 있던 피를 덥히고 순환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두근 두근

마침내 오랫동안 활동을 멈췄던 흑의여인의 심장이 다시 깨어나 온몸으로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윽! !”

그걸 알 리 없는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얼음보다 차가운 몸뚱이를 끌어안고 펄펄 끓는 피를 식히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휴우!”

어느 순간 흑의여인은 긴 숨을 토하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직후 흑의여인의 아미가 약간 모아졌다.

허억! ! 끄윽!”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형...?)

소년의 얼굴이 자신의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어떤 사내를 닮아서 흑의여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흑의여인은 상대가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가 스스로 가사상태에 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사형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없다. 살아있다 해도 어린 소년의 모습일 리도 없고...)

흑의여인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천기(天機)를 믿고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을 펼친 보람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건너 뛴 후 다시 한 번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을 감은 흑의여인의 얼굴로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그녀의 무공은 천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천기를 읽고 미래를 내다본 결과 자신이 술법을 펼쳐 스스로를 재우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무사히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있었지만 흑의여인은 자신이 읽은 천기를 믿고 가사상태에 들어갔었다. 회한과 부끄러움만 남은 당시의 삶을 단 하루도 이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엮인 모든 인연이 소멸된 후에 다시 삶을 이어갈 생각으로 긴긴 잠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에 성공한 것인데...

깨어나 보니 아직 어린 소년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형을 닮은 이 아이에 의해 부활한 것도 운명이겠지. 하지만 차마 부끄러워 다시 깨어난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구나.)

흑의여인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 이검한에게 몸을 맡겼다.

끄윽! 누나... ... 미안해!”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육체에 열독을 토해내며 죄책감에 헐떡였다.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몸뚱이의 주인이 전모 냉약빙인 것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에게 가장 가까운 여인은 냉약빙이다.

화룡단정의 열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상대가 냉약빙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자신을 키워온 냉약빙에게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이검한은 화룡단정의 열독을 해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의여인의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냉약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녀석이 날 누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흑의여인은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몸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정작 이 어린 놈은 자신을 다른 여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게 그 여자가 누군지 물어보기는커녕 차마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 전 시대의 인간인 자신이 어린 소년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도 부끄러운 때문이다. 과연 이검한에 의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이 흑의여인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

 

(꿈이었을까?)

이검한은 우윳빛 반석 위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깜빡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껍게 뒤덮고 있던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얼음뿐만이 아니었다.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 위에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검한 자신의 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내장을 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가 완전히 갈아 앉아있다.

그렇다고 화룡단정의 약효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전을 살펴보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잠력이 도사리고 있다. 양강의 성질을 지닌 그 잠력은 물론 화룡단정을 몸이 흡수하며 생긴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룡단정의 기운은 몸 밖으로 발산되는 열기와 함께 소멸되었어야 했다. 이검한이 도중에 정신을 잃어 화룡단정의 약효를 흡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화룡단정의 기운은 거의 손실됨이 없이 단전 속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다. 마치 누군가 화룡단정의 효능을 모아서 단전에 넣어준 것 같은 상황이다.

(만년한옥(萬年寒玉)인 것같은 이 반석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누워있었는데...)

이검한은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어 자신이 누워있는 반석을 돌아보았다.

물론 반석 위에는 이검한 혼자 누워있다.

맨살에 닿는 반석은 매끈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갑다.

이검한이 짐작하는 대로 이 반석은 만년한옥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 냉기가 모여 이루어진 게 한옥이다.

그 한옥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아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는 만년한옥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만년한옥에는 동정호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냉기가 농축되어 있다.

당연히 만년한옥은 옥중의 옥으로 불리며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이검한이 누워있는 크기 정도의 만년한옥이라면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수 있다.

이검한은 하마터면 자신을 태워죽일 뻔한 화룡단정의 열기를 다스려준 게 만년한옥의 묘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 이 종유동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낼 단서가...

 

있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반듯하게 누워있던 몸을 조금 움직이자 등쪽에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급히 일어나 보니 그리 두껍지 않은 상자 하나가 반석 중앙에 놓여있다.

두께는 한 치, 폭은 한 자, 길이는 한자 반 쯤 되는 납작한 상자인데 재질은 순수한 황금이다.

그 황금상자는 그리 두껍지 않아서 등에 깔고 누워있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이 반석 위에 누워있었던 여인이 남긴 것이다.)

딸칵!

무릎을 꿇은 이검한은 흥분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검한 자신이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흑의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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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1)

 

 

여름의 짧은 밤이건만,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 지나가고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뎅뎅뎅!

자은사의 범종이 울리면서 승려들이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고 예불소리가 멀리멀리 퍼져갔다.

대안탑은 자은사를 굽어보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뚝 서있다.

헌데 대안탑 입구 근처의 대리석 바닥에는 심하게 우그러진 호리병이 뒹굴고 있다. 간밤에 칠층에서 떨어진 임청우의 호리병이었다.

휘이익!

문득 대안탑 앞으로 마치 신선이 하강하는 듯이 허공을 밟고 천천히 내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육척에 달하는 거구에 소매 자락이 넓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일신에서 풍기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기도는 마치 천신을 보는 듯했다.

각진 얼굴의 중심부에 자리한 각진 눈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하고 천천히 내려서는 전신에서 풍기는 가공할 기도는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바로 일왕일협삼괴칠절 중에서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천하의 기인 우협 장백승이었다.

우협 장백승은 어제 낮에 대안탑에 왔었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었다.

그러나 서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찾아본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대안탑이었다.

서안에서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숨을 곳이라고는 대안탑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대안탑을 찾아온 것이다.

휘릭!

우협 장백승은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대안탑 안으로 귀신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휘이잉!

잠시 후 대안탑 칠층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장백승이 올라왔다.

번쩍!

동시에 한줄기 홍광이 빛살같은 기세로 장백승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낱 미물이...”

장백승의 눈이 횃불같은 광채를 내쏘았다.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홍광이 기겁하며 뚝 떨어져 내리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백승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실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상들이 처참히 훼손되고 키 큰 향로가 두 쪽이 나서 뒹굴고 있다.

그 난장판 가운데 두 구의 시체와 한명의 소년이 한 덩이가 되어 누워 있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한 참상이건만 장백승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빛이 없다. 마치 원래부터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예상대로 여기에 있었군!”

장백승은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슬쩍 뻗었다.

!

고색창연한 청강(靑鋼) 보검이 한쪽 구석으로부터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뚜벅뚜벅!

장백승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가 임청우를 안아 올렸다.

쉬익!

그때 다시 홍광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임청우가 누워있던 바로 밑에서였다.

번쩍!

하지만 그 홍광은 이번에도 장백승의 눈빛을 받고는 찔끔하며 도망쳐버렸다.

쉬쉬쉬...

그래도 홍광은 장백승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홍광은 물론 간밤에 대안탑 밖으로 떨어졌던 척포였다.

천하 독물들의 제왕이며 뱀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금관혈린사 척포였지만 우협 장백승의 눈빛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장백승은 척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청우를 석가여래의 무릎 앞 단상에 내려놓았다.

인연이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억지로 맺을 수는 더욱 없는 일... 네 몸 속의 독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다음의 인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장백승은 사방이 웅웅 울리는 그 특유의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바닥에 임청우의 왼쪽가슴이 완전히 덮여버렸다.

그 사이에도 척포는 계속 장백승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는 마면혈도의 시체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철선동시 사이에서 장백승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백승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척포는 장백승의 등을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장백승의 몸에서 뿜어지는 장엄한 기도는 척포를 자꾸 주눅 들게 만든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독이 오를 데로 오른 척포는 쉬익! 하고 푸른 독기를 뿜었다.

화악!

푸르스름한 독무(毒霧가 피어오르며 장백승의 등 뒤로 몰려갔다.

푸스스!

그러나 장백승의 몸 두자 밖에 이른 독무는 태양에 녹는 안개처럼 사르르 사그라져버렸다.

척포가 독무를 내뿜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척포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사삭!

그놈은 빠르게 꽁무니를 흔들며 목이 잘려진 아미타여래가 있는 단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척포가 생각할 때 우협 장백승은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팔백 년 넘게 산 척포는 용이 되기 위해 천하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도(修道)해왔었다.

각 명산에 사는 갖가지 이물(異物) 괴물(怪物)을 만나보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 척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물론 척포에게도 두려운 대상은 있었다.

농산에서 수도할 때 만난 어떤 인간은 반 쯤 용이 된 척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인간 외에 다른 인간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던 척포다.

헌데 오늘 또 한명 척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간밤에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시 색혈지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터득한 덕분에 그의 몸속에 있던 색혈지독과 빙골산의 독기는 일제히 마면혈도의 몸으로 옮겨가 버렸었다.

임청우는 그후 무쌍층층공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도 흡수했었다.

이에 철선동시는 최후의 발악으로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에 주입했었다.

무쌍층층공과 용조수 공력은 융화되면서 용조층층공(龍爪層層功)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공력이 되었다.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한 덕분에 그 용조층층공이 단번에 육층통(六層通)에 이르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색혈지독에 의해 피가 굳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임청우의 몸은 충만한 공력에도 불구하고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의 상태를 살펴본 우협 장백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하니 저 두 놈이 죽어가면서 이 아이에게 공력을 주입해 주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돌아 본 후에 다시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런 공력은 저 두 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헤어진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공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백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자 머리 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임청우의 신발을 벗겨 낸 후 발가락을 툭 쳤다.

그러자 발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검붉은 피가 붕어 알처럼 송골송골 올라왔다. 도저히 피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진득한 농도다.

색혈지독이 임청우의 몸속 피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번쩍!

다음 순간 장백승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백광이 일어났다.

화악!

그 빛은 이내 임청우의 몸으로도 퍼져나갔다.

그러자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얼음이 녹듯이 축 쳐졌다.

츠츠츠!

이어 임청우의 칠공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장백승의 몸에서 일어난 강렬한 기운은 임청우의 몸에서 독연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백승은 극렬한 양강기공으로 색혈지독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다.

마침내 임청우의 피부가 원래의 색을 회복했다.

장백승은 임청우의 가슴에서 손을 떼면서 임청우의 얼굴을 슬쩍 쓰다듬었다.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장백승은 임청우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었다. 임청우의 얼굴에 옅긴 해도 검댕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

장백승의 손이 스쳐지나가면서 검댕이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이 일어나 머리 뒤로 떨어졌다.

짙은 검댕이 제거되자 관옥같이 희고도 붉으스레한 동안이 드러났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오관은 반듯하고 온화하면서도 곧은 심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년의 얼굴이다.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장백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뚫어지게 임청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장백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쪽인가? 조천영(趙千英)인가 아니면 유소기(劉蘇起)인가? 그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그 두 사람을 닮았으니... 게다가 이 아이의 근골은 노부가 세 번 째로 보는 놀라운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그 두 사람 중의 누군가의 자식이 틀림없을 듯한데...”

조천영은 일왕(一王)인 금포염왕의 이름이다.

장백승은 일찌기 금포염왕을 만났을 때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그리고 칠절의 우두머리인 검주 유소기를 보았을 때 훗날 언젠가는 금포염왕에 필적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놀라워했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두 사람을 모두 닮았으면서도 그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근골을 가진 임청우를 만난 것이다.

임청우의 근골의 뛰어남은 그가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알아본 바이지만 임청우의 얼굴마저 금포염왕과 검주 유소기를 닮았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장백승은 여기에는 무슨 알지 못할 어떤 연유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임청우의 아버지가 될 만한 자로 조천영과 유소기 외에는 더 꼽을 자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장백승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청강검을 임청우의 가슴에 놓아주었다.

네가 깨어나면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싶지만... 너를 구해준 것이 내 제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이만 떠난다.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장백승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고 있다.

문득 엇갈린 지붕으로 빠져나가려던 장백승이 손을 흔들었다.

휘익!

장백승의 소매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더니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향해 뻗어갔다.

장백승의 몸은 지붕 밖의 하늘로 사라져 버렸고 그가 떨친 뜨거운 경풍은 두 구의 시체에 이르렀다.

사르르르---

그러자 놀랍게도 두 마귀의 시체는 한 무더기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푸스스스!

시체들은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더니 마침내 재조차 남기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우협 장백승!

백전백패(百戰百敗), 만전만패(萬戰萬敗)의 대영웅 우협 장백승,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지만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그의 측량할 수 없는 가공할 무공의 한 측면이었다.

헌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신이 재가 되어 흩어진 자리에는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무쇠 토막이 하나씩 있었다.

!

두르고 있던 띠가 터지면서 두 개의 무쇠 토막은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펼쳐졌다.

환하게 펼쳐진 그것은 달아오른 얇은 철판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 철판 위에는 백색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있었다.

그 글자들은 철판이 식어감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식어버린 철판은 다시 도르르 말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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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성(覺醒)

 

 

개봉성 동문에서 삼십여 장쯤 떨어진 관도 중앙에는 두 명의 고수가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강유와 독두태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생긴 공터 주변에는 오가던 사람들과 철위사들이 빙 둘러서서 관전을 하고 있었다.

독두태보는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강유의 상태는 손 하나만 다친 독두태보와 비교할 수 없다.

입과 코로는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며 가슴 부분은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살갗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강유의 오른손에는 짧은 비수가 거꾸로 쥐어져 있다.

누가 봐도 강유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두태보는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공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들 저래?”

낸들 아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우더니 이제는 눈싸움만 하고 있구만.”

싸울 생각이 있기나 하는 걸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기키보다도 큰 강철 지팡이를 든 노파가 한 명 서있다.

곱게 늙은 백발의 그 노파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인 고독모모였다.

철관음과 백팔금차들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강유와 독두태보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먼.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독두태보로 하여금 선뜻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독두태보가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리기만 할 뿐 공격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을 보며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한가하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유는 어떤 상황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강유는 마검칠식을 익히고 있다.

독두태보의 몸은 금강불괴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합으로 증명되었듯이 독두태보의 몸이 제 아무리 단단해도 마검칠식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급소를 찔린다면 냉혈철심 사우처럼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독두태보는 섣불리 강유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중이다.

 

<이일대로(以逸代勞)... 한가로움으로 수고로움을 대신한다. 이것이 소요보법의 요체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두고 걸음을 옮기면서 강유는 아버지 소요신군의 말을 떠올렸다.

(이일대로... 소요보법의 요체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시선을 독두태보에게서 떼지 않으며 걷고 있지만 강유의 가슴은 벅찬 흥분으로 뛰놀고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으면서 지금까지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무공 비결들이 비로소 체화(體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다고 남보다 멀리 갈 수 있는 게 아니며 서두른다고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잘못 든 채 빠르게만 가면 돌아올 때 힘들고 서두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강유는 각성(覺醒)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강유는 소요보법을 그냥 배운 대로 구사했었다.

헌데 불현 듯 소요보법에 숨겨져 있는 현묘한 이치가 봇물 터지듯 강유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며칠 간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깨우치려 노력해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요보법의 요체를 깨우쳤을 뿐 아니라 저 늙은 대머리가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어떤 허점을 드러낼지도 눈에 들어온다.)

강유는 흥분을 갈아 앉히려 애쓰며 독두태보를 자세히 보았다.

독두태보는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왼손에 공력을 집중시킨 채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제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을 다친 탓에 독두태보의 몸의 균형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다. 오른쪽을 치는 척해서 균형을 더 흐트려 놓은 후 왼쪽을 공격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강유는 몸을 조금 숙이고 좌우로 흔들면서 독두태보에게 접근했다.

직접 다가가는 것은 아니고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원형을 그리던 행로의 폭을 점점 좁히는 방식이었다.

(선제공격... 아니 유인인가?)

그걸 알아본 고독모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파앗!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강유는 돌연 폭발적으로 쇄도하며 독두태보의 오른쪽 가슴을 비수로 찔러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분노한 독두태보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왼손으로 장력을 날렸다.

!

독두태보의 왼손에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일거에 해방되면서 강맹한 역도가 강유에게 밀려갔다.

!

순간 강유는 급정거했다가 돌진 방향을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틀어버렸다.

부악!

직진하던 강유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독두태보의 왼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은 강유의 왼쪽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그와 함께 독두태보의 왼쪽 허리가 그대로 강유에게 노출되었다. 오른쪽 가슴을 노리는 강유에게 반격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튼 결과다.

옳거니!”

고독모모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겼다!)

!

강유는 자세가 무너져 휘청거리는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그자의 허리를 비수로 강하게 그었다.

대주님!”

젊은 친구가 이겼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과 사람들이 놀라고 환호했다.

(그렇게 간단히 승부가 날 리가 있나?)

오직 한 사람 고독모모만은 하얀 눈썹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강유도 비수로 독두태보의 허리를 벤 직후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강유의 비수가 베는 순간 독두태보의 허리에서 쇳소리가 난 것이다.

(아차!)

독두태보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강유는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

오른쪽으로 몸의 균형이 무너졌던 독두태보가 기왕에 돌아간 몸을 더 빨리 돌리며 다친 오른손으로 강유의 가슴을 때린 것이다.

!”

수도(手刀)로 날린 독도태보의 오른손에 가슴을 맞은 강유는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이미 다쳤던 가슴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숨이 콱 막힌다.

저런...”

그렇지!”

강유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반면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퍼억!

이장쯤 날아간 강유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나뒹군 강유는 고개를 들며 대량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늑골이 몇 개 부러지고 심장이 일시적으로 정지하여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두태보의 오른손에 제대로 공력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유의 검이 깨진 파편이 여럿 박혔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두태보의 내공이 모두 주입된 수도에 맞았다면 강유의 몸은 동강 났을 것이다.

(... 자만했다!)

강유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애쓰며 자책했다.

독두태보의 반응과 약점은 정확히 간파했다.

문제는 독두태보의 몸에 도검이 불침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약점을 파악했어도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상대를 얕보는 경적(輕敵)과 자기중심적인 예단(豫斷)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강유는 또 몸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죽는 줄 알았군!)

독두태보도 식은땀을 흘리며 강유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일 강유의 비수가 마검칠식으로 휘둘러졌다면 독두태보는 허리가 끊어져 죽었을 것이다.

독두태보로서는 천만다행인 게 강유의 몸은 마검칠식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는 것은 여기까지다!”

화악!

독두태보는 더 이상의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강유의 목을 움켜쥐어왔다.

(이런...)

엉거주춤 일어서던 강유는 독두태보의 왼손이 벼락같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은 탓에 빠른 반응을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여지없이 독두태보의 손아귀에 목이 틀어잡힐 위기에 처했다.

덜컥!

하지만 그 직후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독두태보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끄윽...”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자세 그대로 벌벌 떠는 독두태보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강유는 놀라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강유는 비로소 독두태보가 공격을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제였는지 백발의 곱게 늙은 노파가 나타나 강철 지팡이 끝을 독두태보의 등에 대고 있었다.

백발노파는 물론 고독모모다.

지지지!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 끝에서 일어난 벼락이 독두태보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절세고수다! 흑백신귀에 못지않은...)

강유는 한눈에 고독모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이번에 제왕성은 우리 황금성에 너무 큰 무례를 범했다. 살려줄 테니 돌아가서 혈가람에게 전해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고...”

지지지!

준엄하게 말하는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에서 일어나는 벼락이 강해졌다.

끄윽!”

퍼억!

독두태보는 눈을 까뒤집고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이다.

성주가 신세를 졌구먼. 노신은 황금성에서 태상호법 노릇을 하고 있는 고독모모라고 하네.”

독두태보의 몸에서 강철 지팡이를 뗀 고독모모가 강유를 돌아보았다.

(황금성의 태상호법!)

소협 덕분에 본성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었어. 은혜 있지 않음세.”

놀라는 강유에게 고독모모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당황하며 마주 포권하던 강유는 옆을 돌아보았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다가오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며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원만하게 수습이 되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다가오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심장도 진상파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 * *

 

(다행히 내가 직접 나서서 강유를 구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귀면지존은 안도 아닌 안도를 했다.

그는 지금 개봉성 내에 자리한 어느 절의 칠층탑 꼭대기에 서있었다.

그 탑으로부터 수백 장 떨어진 개봉성 밖의 강유와 진상파 일행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강유는 여자면서도 키가 그와 비슷한 백팔금차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개봉성 동문쪽으로 오고 있었다.

(고독모모 덕분에 강유 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찜찜한 기분은 어째서인가?)

강유를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미간이 귀신 가면 속에서 찌푸려졌다.

(강유 놈의 실력으로는 제왕성의 철위사를 겨우 상대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헌데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의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칼질까지 했었다.)

강유가 독두태보를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귀면지존이었다.

(무공이라는 건 점수(漸修;점진적 수행)로 발전하는 것이지 저놈의 경우처럼 돈오(頓悟;별안간 깨달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귀면지존의 가슴 속에서는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강유 놈의 무공은 상궤를 벗어나 갑자기 몇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다. 그 원인이 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가면 속에서 귀면지존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강유 놈이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물건의 안전을 위해 뒤를 밟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이 과연 화로 진행될지 복으로 변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구나.)

스스스!

귀면지존의 모습은 곧 탑 위에서 사라졌다

 

***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삼경(三更)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지만 개봉의 번화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늦도록 인파가 끊이지 않는 번화가에 자리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이장(二丈)이 넘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송나라 시절 어떤 왕족이 막대한 재물을 투입해서 만든 장원이다.

수만 평 넓이인 장원 안에는 별세계가 꾸며져 있다.

여러 개의 정원뿐 아니라 상당히 큰 인공 호수까지 품고 있어 왕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 황금성 개봉지점 깊은 곳에는 돌과 강철로 지어진 육중한 건물이 한 채 서있다.

몇 명의 백팔금차가 지키고 있는 이 건물은 보물창고 겸 연공관이다.

 

* * *

 

연공관으로 사용되는 밀실은 어둑하다.

천장에 몇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을 뿐 불은 켜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책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밀실 사면의 벽에는 책과 죽간들로 채워진 책꽂이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과 죽간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나가면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무공비급들이다.

무공비급으로 가득 찬 책꽂이 외에도 밀실에는 책상과 함께 의자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밀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중앙에 놓인 넓직한 돌 탁자다.

우윳빛의 새하얀 돌 탁자는 사실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년한옥은 천고의 보물로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고 내공이 증진된다.

그 때문에 만년한옥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싸게 거래된다.

헌데 이 밀실에는 폭 네 자에 길이 일곱 자, 두께는 한자나 되는 거대한 만년한옥으로 만든 탁자가 있다.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보물이다.

“...”

만년한옥의 탁자 위에는 강유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슈우우! 슈우!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은 강유의 온몸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강유의 몸에는 놀랍게도 상처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냉혈철심 사우, 독두태보와 거푸 싸우면서 입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제 약간의 흉터로만 남아있다.

불과 몇 시진 만에 강유는 모든 내, 외상에서 완치된 것이다.

단순히 상처가 치유된 정도가 아니다.

강유는 내공도 비약적으로 증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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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마음을 모른 죄()

 

 

진룡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욕됨을 참고 억지웃음까지 웃어야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것같았다.

그때 짐은 안풍에 가지 말아야 했다.”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예이연의 목소리에 이어 걸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한림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성이 안풍을 얻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갔던 것인데... 만약 그 틈을 노려서 진우량이 안풍으로 공격해 왔었다면 짐은 꼼짝없이 그에게 천자의 관을 들어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사내는 바로 주원장이었다.

예이연이 주원장의 말을 받았다.

"진우량이 어리석었던 게지요. 그의 막료들중 인물이라 할만한 자는 없었으나 넷째 아들 진룡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군."

주원장이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진룡은 어리석은 아비가 내치는 바람에 강호의 떠돌이가 되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후 돌아와 파양호대전에는 참가했는데... 만약 신첩의 오라버니가 황상을 그리워하지 않고 진룡의 계책대로 싸웠다면 아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

예이연의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 듯 주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예이연이 조리있게 설명을 했다.

"진룡은 황상께서 작은 개미선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거선들의 진속에 같은 작은 개미선들을 포진시키라고 했사옵니다. 거선으로 폐하의 개미선들을 한쪽으로 몰아 붙친 후 작은 배들로 틈을 메꾸어 몰살시켜려고 하였지요."

"진우량의 자식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니... 진우량이 그 아들의 반만 되었어도 파양호대전은 쉽지 않았겠군."

주원장이 비로소 감탄하며 말했다.

"결국 오라버니가 폐하를 따르기로 작정함으로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예이연이 교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원장은 그녀를 힘주어 껴안아 주었다.

"그대 오라비의 공이 과연 적지 않군. 짐이 그의 벼슬을 더욱 높여 주도록 하지."

예이연은 주원장을 살짝 밀치고 그의 품을 빠져 나오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헌데 황제에게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그녀는 맞은편 창에 난 구멍으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예이연은 내색하지 않고 주원장에게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폐하! 청이 있사옵니다. 오늘 첩의 심신이 여의치 안사오니 침전을 옮겨 주셨으면 하옵니다."

"귀비가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군."

주원장의 허락을 들으며 예이연은 힐끗 창을 곁눈질했다.

 

진룡은 처마에 매달려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예이연이 자신을 져버렸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모든 탓을 예지운에게 돌리고 있었다.

진룡은 주원장이 아쉬워하며 방을 나가자마자 봉창을 밀치고 날아들어가 예이언 앞에 섰다.

()왕자님!”

몸매만으로도 진룡임을 알아본 예이연이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왜 이제야 왔어요? 당신은 내가 주원장 그 늙은 도적에게 수모를 겪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진룡은 매달리며 오열하는 예이연을 힘주어 안으며 목이 메었다.

"아무것도...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진룡의 말은 그녀가 어떻게 지냈던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예이연이 진룡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쓸어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당신 말을 새겨듣지 않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잡혀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인질이 되어 주원장에게 억류되어 있기로 하고 오라버니가 칼을 바꾸어 쥐었던 것이에요.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흑흑흑...!"

예이연이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진룡은 예지운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속내를 숨기며 예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 내 누이들과 조카들은 어디로 잡혀갔소?"

"그분들은 모두 잘 있어요. 제가 주원장에게 빌어서 모두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예이연의 그 말에 진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누이와 조카들의 안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함께 도망칩시다. 누이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오손도손 살아가도록 합시다."

진룡의 제안에 예이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제가 그냥 도망치면 오라버니가 주원장 손에 죽고 말 거예요. 미리 귀뜸이라도 해주어야하지 않겠어요?"

 

***

 

진룡은 예이연에게 사흘 후 도망칠 준비를 갖춘 후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그녀의 침실을 빠져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궁궐을 빠져 나오기 위해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을 때였다.

또 한 명의 백남빈한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진룡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걸어가는 그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막내누이 진산화(陣珊花)였다.

휘익!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소녀를 낚아챈 진룡은 궁궐 담장을 날아 넘은 후 미친 듯이 달렸다.

품안에 안겨있는 소녀는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릉 외곽 야산에 자리한 어느 무덤 앞에서 진룡은 소녀를 내려놓았다.

"! !"

넷째 오라버니인 줄 알아본 산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훌쩍거리기만 했다.

진룡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예이연은 누이와 조카들이 안전한 곳에서 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산화만은 궁궐에 있었단 말인가?)

 

한참을 울던 산화는 날이 밝을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자결했으며 세명의 올캐들은 무창이 떨어질 때함께 자결해버렸다.

큰언니 둘은 주원장의 군사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다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고 죽었다.

그녀와 바로 위의 언니 산산(珊珊)도 병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위험한 순간 예지운이 달려와서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산산과 산화는 예지운과 함께 금릉으로 왔다.

조카들은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릉으로 온 후 예지운은 본색을 드러내 산산을 겁탈했다.

산화도 겁탈하려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자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던져주어 버렸다.

지금 산산은 예지운의 첩이 되어 살고 있고 예지운의 부하들에게 윤간당한 산화는 예이연이 궁궐로 데리고 들어가 하녀로 쓰고 있었다.

공주(公主)의 처참한 신분하락이었다.

막내로 자란 산화는 어리고 겁이 많아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이날도 위사들의 밤참을 갖다 주기 위해서 가던 중 진룡이 발견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산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났을 땐 해가 높이 돋아 있었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산화는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미 어린 티가 하나도 없었다.

눈가의 주름살이 진룡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내막을 알게 된 진룡은 망연자실했다.

(그녀는... 그녀는 나를 속였구나. 나를 속였구나.)

정에는 약하지만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룡이다.

사흘 후 궁궐에서 만나자는 예이연의 약속이 사실은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애정도 믿음도 모두 분노로 바뀌었다.

 

***

 

진룡은 침묵으로 분노를 삭이면서 산화를 데리고 객점으로 갔다.

술과 만두를 시켜 먹은 후 사자검을 꺼내어 푸른 검신을 닦고 또 닦았다.

온 몸에서 살기가 돋아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산화는 지친 몸을 침상에 누이고 잠들었다.

고개를 들어 누이를 돌아보는 진룡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시 밤이 되었다.

진룡은 잠들어 있는 산산에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서 토닥거려 주고는 사자검을 들고 궁궐로 숨어들어갔다.

예이연의 침소까지 달려가는데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단숨에 날아들어가 휘장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깔깔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예이연과 시녀들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나가 있도록 해라."

시녀들을 내 보낸 예이연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했다.

"...! 다섯은 천정 안에 숨고, 둘은 침상 밑에 숨고 밖의 매화 숲에는 궁수(弓手)들을 숨겨 놓는 다면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할지라도 꼼짝 못할 거야."

예이연은 중얼거리며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진우량은 이길 가망이 없었어. 그리고 진룡은 재주는 있었지만 황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나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을 거야. 나는 황후가 되는 것을 바랐는데...

하여간 파양호대전에서 전향하길 잘 했어. 이겼어도 황제는 그의 형이 되고 그는 나 보고 무슨 곡에 가서 살자고 할 게 뻔했으니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진룡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이연이 허영과 사치심으로 가득 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다시 숨어들었을 때는 예이연을 보자마자 처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잔정이 그로 하여금 살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었다.

그랬는데 예이연의 속내를 엿보게 되자 남은 정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휘장을 헤치고 불쑥 그녀 앞에 나섰다.

"!"

예이연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마님! 무슨 일인가요?"

밖에서 시녀들이 황급히 묻는 소리에 예이연은"... 쥐가...!" 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애써 당황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룡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 왔어요."

"!"

진룡은 짧게 대답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이연이 덧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지금 떠나요. 당신이 와주어서 기뻐요."

진룡은 가만히 서있고 예이연은 한쪽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감싸며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녀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오른손에는 언젠지 모르게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당신, 왜 이러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예이연은 묵묵히 서있는 진룡을 재촉하는 척하며 오른손의 단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번쩍! 싸악!

밑에서 기습적으로 베어 올라오는 검은 피하기가 가장 어렵다.

진룡은 빠르게 물러섰으나 단검의 끝이 스치면서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죽엇!”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 예이연은 이를 악물며 다시 단검으로 진룡의 목을 노리고 찔렀다.

과연 미녀장군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는 신랄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 정도 손속은 대비하고 있는 진룡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객이다!”

두 번째 공격도 진룡이 간단히 피해버리자 예이연은 크게 소리치며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삐익! !

그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위사들이 몰려들었다.

스르릉!

진룡은 그제야 사자검을 뽑아들었다.

슈육!

검을 치켜들면서 내딛은 한걸음에 예이연을 따라잡았다.

번쩍!

그리고 예이연이 바닥에 발을 대기도 전에 비스듬히 목 왼쪽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베어버렸다.

위사들도 뛰어오면서 보았으나 실로 전광석화같은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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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연 아닌 기연

 

 

네 말대로 은원의 분간은 확실히 해야겠지?”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난 널 죽이는 대신 몸에 좋은 이걸 먹여줄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손에 든 화룡단정을 이검한의 얼굴 위에 대고 흔들었다.

(... 안돼!)

흑요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검한은 기겁했다.

의술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는 이검한인지라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먹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말아요! 난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

다급히 외치던 이검한의 눈이 치떠졌다. 흑요설이 말을 하느라 벌린 그의 입에 화룡단정을 밀어 넣은 때문이다.

주르르

화룡단정은 이검한의 타액과 닿는 즉시 녹아서 액체가 되었다.

그리고는 코가 막힌 탓에 입으로 밖에 숨을 쉴 수 없게 된 이검한의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크헉!”

다음 순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온 몸을 퍼덕거렸다. 액체가 된 화룡단정을 삼키자마자 뱃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마치 펄펄 끓는 쇳물을 삼킨 기분이다.

끄윽!”

이검한은 내장이 단번에 숯이 되어버리는 것같은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화악!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난 네놈에게 살수를 쓴 게 아니다. 그러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화룡단정의 열독이 이검한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에서 손을 떼었다.

파팟!

그리고는 그때까지 막혀있던 이검한의 마혈(痲穴)을 풀어주었다.

끄윽! !”

마혈이 풀린 이검한은 달궈진 가마 솥 안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몸부림쳤다. 내장이 익어 버리는 듯한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 제발... 살려줘요 왕후님!”

이검한은 엉금엉금 기어가 흑요설의 다리에 매달렸다. 오직 그녀만이 초열지옥에 빠진 것같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더러운 손을 어디에 대느냐?”

!

흑요설은 매몰차게 발길질을 해서 이검한을 떨쳐버렸다.

끄윽!”

콰당탕!

흑요설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이검한의 몸은 바닥에서 몇 바퀴 굴렀다.

제발... 제발 왕후님...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요!”

모질게 나뒹굴었던 이검한은 다시 흑요설을 향해 기어왔다.

정 참기 힘들면 바닥에 머리를 찧어라. 지금 네놈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

흑요설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이검한을 더 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몰라 서둘러 떠나려는 것이다.

호호호! 이제 시작이다. 세상에서 사내라는 족속은 나 흑요설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흑요설은 독기서린 웃음을 터트리며 밀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가지 말아요 왕후님! 살려 주세요 제발...!”

이검한은 멀어지는 흑요설에게 손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밀실을 나가려던 흑요설이 멈칫 멈춰 섰다.

(... 혹시...)

이검한은 엄청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이 헛된 것임은 이내 밝혀졌다.

흑요설이 밀실 입구에 멈춰선 것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물, 마화삼보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이 따위 구리조각에는 볼일이 없다!”

흑요설은 마화삼보중 마화경은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빠캉!

흑요설의 발에 차여서 삼장 쯤 날아간 마화경은 석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마화경에는 마화사원의 경천동지할 무공비결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마화사원의 무공들은 모두 양강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흑요설은 마화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놈은 제법 쓸모가 있겠구나!”

반면 마화신척을 본 흑요설은 눈을 반짝 빛냈다.

장차 사내놈들을 멸종시킬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마화신척을 집어 드는 흑요설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른다. 마화신척에 서려있는 강력한 화기로 사내들을 태워죽일 생각에 미리 흥분되는 흑요설이었다.

호호호! 그래도 네놈은 행복한줄 알아라. 사내놈들이 세상에서 멸절당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을 테니까!”

흑요설은 창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이검한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스슥!

직후 그녀의 모습은 꺼지듯이 밀실에서 사라졌다.

... 안돼요! 그냥 가면 안돼요 왕후님!”

이검한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호호호 나 흑요설이 간다! 기다리고 있거라 더러운 세상아!”

흑요설의 광기서린 웃음소리도 삽시에 까마득히 멀어졌다.

끄윽! ... 너무 해요! ... 날 죽게 만들고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용광로에 빠진 듯 지독한 열기에 휩싸인 채 이검한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은 화로에서 오랫동안 달궈진 쇳조각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푸스스! 화르르!

그와 함께 이검한이 입고 있는 옷가지에 불이 붙어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검한의 전신 모공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 결과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것은 옷가지뿐만이 아니었다.

이검한의 머리카락과 온몸의 털들도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오래지 않아서 이검한의 머리는 몽땅 타고 재가 되어 버렸다. 마치 중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콰득! 까드드득!

터럭과 옷가지를 태우는 연기에 덮인 채 이검한은 석실의 돌바닥을 양손으로 벅벅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삽시에 돌바닥을 긁어대는 손가락 끝이 터져 피로 범벅되고 있었다.

(... 이대로 죽고 마는 건가?)

이검한은 몸속에서 들끓는 엄청난 열기에 아득히 정신을 잃어가며 절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기가 강력한 영약인 화룡단정을 준비없이 복용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흑요설이라면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는 끔찍한 열기도 제어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요설은 이미 밀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흑요설이 가버린 이상 이검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헌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으으!

어디선가 한 가닥 서늘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이 한기는 아주 미미하여 설령 흑요설이라 해도 쉽사리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검한의 몸은 불덩이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극히 미세한 그 한기도 느낄 수가 있었다.

으으으!”

이검한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쇳물을 들이킨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중이다.

그래서 비록 미약한 한기지만 마치 가뭄 끝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 !”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열사의 사막을 헤매던 나그네가 물 냄새를 맡고 샘물을 찾아가듯이...

 

***

 

이검한이 감지한 미세한 한기는 밀실 후면의 석벽에 세로로 길게 나있는 틈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가는 균열은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의해 방금 전 생긴 것이었다.

(... 저 벽 안쪽에 내 몸의 열독(熱毒)을 치료해줄 무언가가 있다!)

이검한은 끔찍한 고열 때문에 시뻘개진 눈으로 석벽에 나있는 틈새를 노려보았다. 비몽사몽간에도 그 석벽 뒤쪽에 자신을 구해줄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 부서져라!”

이검한은 그 석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검한은 몸 속에서 들끓는 지독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석벽은 내공이 실리지 않은 이검한의 주먹질 정도에 부서질 리가 없다.

퍼석!

하지만 단단해 보이던 석벽은 이검한의 주먹이 후려치는 대로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석벽처럼 보였던 벽은 돌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흙벽 위에 회를 두텁게 발라서 석벽처럼 보였을 뿐이다.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그 벽이 갈라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회가 칠해진 흙벽은 두께가 두자가 넘었다.

그 정도 두께의 흙벽을 한 주먹에 무너트릴 힘이 지금의 이검한에게는 없다.

푸시시싯!

헌데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와 함께 흙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검한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후려친 주먹에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력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내공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 그 극양잠경(極陽潛勁)이 흙벽을 일거에 무너트린 것이다.

물론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이검한의 주먹질에서 강력한 극양잠경이 뿜어진 것은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이었다.

퍼석! 푸스스!

한 번 더 후려친 이검한의 주먹질에 흙벽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월동문 형태의 통로였다.

흑요설이 천여 년 동안 갇혀있던 밀실 후면에는 또 다른 밀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밀실을 연결하는 월동문은 회를 바른 두꺼운 흙벽으로 밀봉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

부서져 내리는 흙벽 안쪽으로부터 강력한 냉기(冷氣)가 쏟아져 나왔다.

쩌저정! 쩌적!

월동문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냉기는 얼마나 강력한지 흑요설이 갇혀있던 밀실 전체를 일거에 허연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냉기에 쏘이는 순간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얼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속에서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열기가 들끓고 있는 이검한에게는 그토록 강력한 냉기조차 그저 한 여름의 소나기같이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으으으...”

끓는 물이라도 단번에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뒤집어쓰자 혼미하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다.

이검한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무너진 흙벽 안쪽을 살펴보았다.

 

흙벽이 무너지며 드러난 월동문 안쪽도 한 칸의 밀실이다.

다만 그 밀실은 흑요설이 갇혀있던 앞쪽과 달리 천연의 종유동굴(鐘乳洞窟)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상당히 넓은 종유동굴인데 높은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서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순(石筍)들이 자라고 있다.

한데 이 종유동굴의 벽과 천장은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무언가 강력한 냉기를 품은 물체가 종유동굴 전체를 얼려버린 것이다.

크으! ... 저 여자로구나! 냉기의 근원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월동문 안쪽으로 들어선 이검한은 헐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종유동굴 중앙에는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盤石)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석자 쯤 되는 그 반석 위에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이 누워 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칠흑같이 검은 옷은 춘추전국시대에나 유행했음직한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나이가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그 여인은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서역에서 고금제일미인으로 불려온 누란왕후 흑요설이라 해도 이 흑의여인보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의여인에게는 그 빼어난 미모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일견하기에도 흑의여인이 세상 사내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여걸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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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3)

 

 

<이놈아, 잘 듣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마면혈도가 처량한 음성으로 전음입밀을 보낸다.

 

<성공한다면 살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우리 둘은 저 시체 놈의 밥이 될 것이다. 저 얼어 죽은 시체 놈은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걸 아주 좋아하니 죽어도 우린 도살 될 것이다.>

 

순간 임청우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잡아먹힌다는 것은 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전율이다.

 

<무쌍층층공은 정신을 온화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눈 꼬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밀실에서 문을 잠그고 편안하게 자리를 편 다음,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베개 높이는 두치 오푼으로 하여 반듯이 누워 눈을 막고 기를 가슴속에 넣어 닫아 버리고, 자그마한 털을 코위에 올려놓아도 떨어져 내리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삼백 호흡을 거듭하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없게 한다.>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도 나는 정신이 온화하다. 하지만 뒤의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득이 있겠는가? 당신이나 나나 죽게 될 것은 정한 이치 같은데...)

임청우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마면혈도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계속 들려준다.

 

<아침 저녁은 음양이 바뀌는 시간이니, 아침의 오경초(五更初)에 난기(暖氣)가 이르게 되고, 눈이 떠지는 것은 상생(相生)의 기가 오르는 것이며, 이름하여 양기가 동하고 음기가 소멸한다고 한다. 저녁의 일몰 후에는 냉기가 심하고 추위가 몸에 스며, 침실로 들어가 앉아, 잠을 자는 것을 하생의 기가 이른다고 하여 양기가 소멸하고 음기가 동한다고 한다. 오경초에는 난기가 이르고 해가 진 뒤로는 냉기가 이른다. 음양의 기는...>

 

마면혈도의 이마에 땀이 베인다.

그러나 그 땀은 금방 얼어붙어 얼음이 되어 버린다.

마면혈도의 음성은 가늘어지고 점점 떨려 발음이 온전하지 않다.

임청우는 차츰 마면혈도의 말에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면혈도가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음성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게다가 마면혈도의 무쌍층층공은 어떤 면에서는 불심연화지의 구결과도 비슷한 곳이 있기도 했다.

철선동시는 막바지 공격에 힘을 쏟고 있다. 밀랍같이 창백하던 그자의 얼굴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돋아나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되었다.

죽이려는 자는 죽이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죽어가는 자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하며 모든 힘을 그쪽으로 쏟고 있다.

마면혈도는 오직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운용하여 철선동시의 공력을 흡수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철선동시의 공력은 마면혈도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따라서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상, 마면혈도도 임청우의 생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단지 임청우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진기를 운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무쌍층층공을 최소한 사성(四成)까지 성취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임청우의 공력으로 흡수함으로써...

원래 무쌍층층공은 무림의 절정신공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면혈도는 태산(泰山)의 한 석실에서 우연히 그 비급을 얻어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무공을 따라가지 못해 칠성(七成)에 달한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만약에 팔성(八成)이 되기만 해도 그의 무공은 칠성일 때의 두 배가 되고, 구성(九成)이 되면 칠성의 네 배가 되는 것이니 무쌍층층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림사에 있어서 무쌍층층공을 팔성이상으로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무쌍층층공의 존재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얻은 사람이 무쌍층층공의 매력에 푹 빠진 때문이다.

무리하게 일성이라도 더 익히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십이성 다 익히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다가 늙어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면혈도가 무쌍층층공을 무림으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만약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익히기만 한다면 이미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철선동시의 공력은 꼼짝없이 임청우의 것으로 융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제발...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한 마디라도 알아듣고 진기를 움직여 봐라.)

마면혈도는 구결을 외우면서 속으로는 애원하고 있었다.

 

<...음양의 기는 이와 같이 번갈아 가며 출입을 걷듭하여 천지, 일월, 산천, 해하, 인축, 초목 등 일체 만물은 그 체내에서 대사를 거듭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그 일진일퇴함이 꼭 밤낮의 교대나 해수의 간만과 흡사하다. 이것이 천지순환의 도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며 임청우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이 괴물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성인(聖人)들의 말씀과 진배가 없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마면혈도가 읊는 구결에 심취되어 갔다.

무쌍층층공의 구결들은 그가 읽은 다른 책들, 그리고 불심연화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같으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어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깊이 심취한 만큼 마면혈도가 외는 구결은 한자도 빠짐없이 임청우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재워지고 있었다.

임청우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데 마면혈도의 음성은 급격히 가늘어지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졌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구결에 따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모아주기 만을 바라며 스스로 생각해도 그다지 가망 없는 일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미 그자의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공력으로 구사하는 전음입밀에 이어 배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을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펼치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임청우의 몸에 쌓였던 서리는 거의 사라지고 단지 얼굴과 피부만이 거무스름할 뿐인데...

 

<아침마다 오방(午方:남방(南方)을 말함)을 향하고, 두손을 무릎위에 놓고, 천천히 무릎 관절을 누르며, 입으로부터 탁기(濁氣)를 내뱉고... 현목(玄牧)의 문(), 천지(天地)의 근()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득 여기까지 들었을 때 임청우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속을 흘러 다니던 기이한 힘이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헌데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듣고 있는 동안 그 힘들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치 손을 갖다 대면 만져질 것같은 실체로 느껴졌다.

기분뿐이겠지만 자신의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것같기도 하다.

임청우는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느끼며 경이에 눈을 떴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웠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철선동시의 거친 공력은 자신의 몸을 거쳐서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의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듯이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철선동시의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아무 저항없이 통과하여 마면혈도의 몸에 그대로 이르렀다.

동시에 임청우의 몸속에 남아있던 빙골산의 독기와 색혈지독도 그 힘을 따라서 마면혈도의 몸으로 깡그리 옮겨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 임청우의 몸이 빈 대롱이 되어 들어온 물을 모두 다른 쪽 끝을 통해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청우의 내관(內觀:속을 봄)이 시작되면서 막혀있던 빈 대롱이 뻥 뚫리며 거침없이 물이 흘러가는 것과 똑 같았다.

 

<...이리하여 태화(太和)의 기가 기해(氣海)에 이르고 자연히 용천에 이르면 온몸이 흔들리고 두 다리도 오그라져 굽게 되고 자리에 앉으면 마디마디가 우두둑하고 소리가 나게 된다. 이것을 일층통(一層通)이라고 한다. 일층통에서 이층통으로 계속 연성하여 삼층통에서 오층통에 이르게 되면...,십이층통에 이르게 되면 마음 속에 허무함을 유지하고 유연(悠然)한 기도 갖추어져서 덕으로는 대자연과 합하고 도로는 천지와 융화되리니...>

 

마면혈도의 음성은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명도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질긴 말대가리... 이제야 겨우 죽었구나!)

마면혈도가 죽은 것을 확인한 철선동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몸 속의 독기를 임청우의 몸으로 옮기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임청우는 마면혈도가 전했던 구결을 다시 한번 천천히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속에 있던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이 철선동시의 통제를 벗어나 임청우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팔기경(八氣經)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수만 마리의 벌들이 여왕벌의 뒤를 쫓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

철선동시는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경략을 돌면서 그의 공력으로 융화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십이정경(十二正經)이란 수태음 폐경, 수양명 대장경, 족양명 위경, 족태음 비경, 수소음 심경, 수태양 소장경, 족태양 방광경, 족소음 신경, 수궐음 심포경, 수소양 삼초경, 족소양 담경, 족궐음 간경의 열 두가지 경략을 말하고,

팔기경(八奇經), 또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란 양교맥, 음교맥, 양유맥, 음유맥, 대맥, 충맥, 독맥, 임맥의 여덟 경략을 말한다.

순식간에 화선지에 엎질러진 먹물이 번져가는 기세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모든 경맥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리자 철선동시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지 못했다.

모든 공력으로 마면혈도를 공격했던 철선동시다.

헌데 그 공력들이 회수되지 못하고 그만 임청우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

마침내 모든 공력이 소진되어 버리자 철선동시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죽고 말았다.

임청우는 자신의 경맥을 따라서 도는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익히면서 내공이란 어떤 것인 가를 어렴풋이 알았던 것이다.

더우기 그의 몸속을 분탕질 치면서 돌아다니던 용조수의 공력이니 더욱 낯설지 않았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해 용조수 공력을 거침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버렸다.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용조수의 공력은 과연 대단한 것으로 임청우는 단숨에 무쌍층층공을 육층통(六層通)까지 익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공력은 무쌍층층공으로 운용되되, 그 속성은 용조수의 공력인지라 세상에 전혀 없는 엉뚱하고도 기이한 것이 되어버렸다.

뚜두둑! 뚜둑!

임청우의 몸에서 끊임없이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이 오그라들었다가 펴지는가 하면 몸이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 하나하나가 무쌍층층공의 일성 일성 터득해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면혈도가 몸을 자벌레처럼 구부릴 수 있었던 것도 무쌍층층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느 틈엔가 임청우의 등에 박혀있던 철선동시의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던 임청우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다가 잠잠해졌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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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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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강행돌파

 

 

대주님! 심상치가 않습니다.”

저희도 마차들을 저지하는데 가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서 보고 있던 동위사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기하라!”

하지만 독두태보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진정시키면서 폭주하는 마차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마부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헌데 그중 한 대의 마차를 모는 늙은 마부는 오히려 연신 고삐를 내리쳐 말들을 재촉하고 있는 게 독두태보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

독두태보는 눈을 부릅뜨며 몸을 날렸다.

대주님!”

왜 그러십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있던 동위사들도 깜짝 놀랄 때였다.

뒤에서 네 번째 마차에 진상파가 타고 있다.”

독두태보가 쏘아진 화살같이 날아가면서 외쳤다.

역시 대주님!”

단박에 표적을 찾아내셨다.”

두 명의 동위사들도 즉시 독두태보의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마부석에 전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던 강유는 언덕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독두태보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자신들이 탄 마차로 날아오는 게 들어왔다.

(과연 동위사대의 대주답구나. 단번에 이 마차를 골라내다니...)

강유는 눈을 번뜩이며 마부석에서 일어섰다.

... 공자! 일어서시면 위험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인장께서는 개봉성 동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십시오.”

휘익!

기겁하는 전노인에게 말하며 강유는 마차의 지붕으로 가볍게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에 독두태보는 어느덧 마차에서 오장(五丈;15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독두태보의 오장쯤 뒤에는 두 명의 동위사들도 날아오고 있다.

도중에 멈추면 절대 안됩니다!”

!

전노인에게 외치면서 강유는 추격해오는 독두태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면서...

이랴!”

철썩! 철썩!

강유의 지시를 받은 전노인은 전력으로 고삐를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주인의 재촉을 받은 두 필의 말은 거품을 물며 앞으로 달려간다.

 

날아오던 독두태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이 추격하던 마차의 지붕 위로 죽립을 쓴 자가 뛰어오르더니 다음 순간 발검을 하며 자신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강유!”

독두태보의 입에서 분노에 찬 노성이 터졌다. 맹렬히 날아오르는 바람에 죽립이 벗겨지며 강유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우의 수하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얼굴이다.

!

그 사이에 독두태보와의 거리를 단번에 일장 안쪽으로 좁힌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앞으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이 나선형으로 홱 뒤틀린다.

마검칠식!”

강유가 펼치는 검법의 정체를 알아본 독두태보는 경악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틈은 없었다.

독두태보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후려쳐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과 강철처럼 변한 독두태보의 손바닥이 접촉하며 벼락이 근처에 떨어진 듯한 굉음이 일어났다.

(당했다!)

직후 독두태보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강유가 내지른 검의 검극(劍極)에서 막는 게 불가능한 파괴력이 손바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유의 검을 막은 독두태보의 손바닥은 강철보다도 더 굳세다.

하지만 강유의 검극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힘은 독두태보의 그 손바닥을 두부처럼 짓뭉개려 한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빠캉! !

독두태보의 손바닥을 으스러트리려던 강유의 검이 돌연 유리처럼 깨지며 흩어졌다. 거푸 펼쳐진 마검칠식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검이 깨져버린 것이다.

검이 깨지면서 마검칠식의 파괴력도 안개같이 흩어진다.

크아!”

독두태보는 으스러지는 것을 면한 손바닥으로 독문의 장공(掌功)인 철장진살(鐵掌振煞)을 쏟아내었다.

!

집채만한 바위도 간단히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강유의 가슴에 작렬했다.

!”

후두둑!

가슴이 뭉개진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뿜어내며 뒤로 날아갔다.

콰당탕!

독두태보의 장력에 가슴을 강타당한 강유의 몸뚱이가 이장 쯤 날아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

독두태보 역시 허공에서 휘청하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내려서는 독두태보의 오른손에는 유리처럼 깨진 검의 파편이 여러 개 박혀있었다.

대주님!”

날아오던 동위사들이 그걸 보고 기겁을 했다.

(... 검이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게워내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의 손에는 손잡이만 남은 검의 잔해가 들려있었다.

죽일 놈!”

크아!”

! 스악!

두 명의 동위사가 강유에게 쇄도하며 장력을 날리고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발휘하는 장력은 천둥같고 검기는 번개같았다.

동위사들 개개인은 냉혈철심 사우보다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실력이 현격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다. 약간 약한 정도다.

그런 동위사 둘의 협공인지라 사우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흉험했다.

꽈앙! 쩍쩍!

장풍이 바닥을 박살내고 검기가 지면을 길게 가르며 골을 판다.

휘릭!

하지만 강유는 피를 토하면서도 이미 몇 장 밖으로 훌쩍 날아갔다가 내려서고 있었다.

소요보법!”

정말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놈이었구나.”

동위사들은 강유의 앞쪽으로 내려서며 이를 갈았다.

그들도 마침내 강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죽인다!”

()대주의 복수를 해주마.”

동위사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강유에게 다가섰다.

그자들 개개인의 실력이 사우보다 아주 아래는 아님을 알아본 강유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하물며 강유 자신은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다.

마검칠식을 펼친 후유증으로 경맥들이 뒤틀린 상태에서 독두태보의 강맹한 장력에 맞았다.

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놈은 내게 맡기고 너희들은 진상파의 신병을 확보하라.”

독두태보가 손바닥에 박힌 검의 파편을 뽑아내면서 다가왔다.

강유를 공격하려던 동위사들이 독두태보를 돌아보았다.

진상파가 개봉성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진다. 그 전에 따라잡아야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소이다.”

휘익! !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은 동위사들은 새처럼 날아올라 폭주하는 마차들을 추격해갔다.

어느덧 십여 대의 마차들은 개봉성 동문에 거의 이르러 있었다.

(진소저 말 대로 아슬아슬하구나. 일단 개봉성 안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제왕성의 인간들이 진소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텐데...)

강유는 성문을 지키던 관병들이 당황하며 마차들 앞에서 비켜서는 걸 곁눈질했다.

흐흐흐! 본좌가 실로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를 잡을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독두태보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이 되어 강유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요? 무후를 시해한 원수의 단서라니...”

강유는 소요보법을 펼쳐서 산책하듯 걸으며 독두태보에게 물었다.

십팔 년 전, 우리 제왕성의 안주인이시며 당금 황제의 고모 되시는 무후 영청공주께서 마검칠식에 변을 당하셨었다.”

마검칠식?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독두태보의 말에 대꾸하던 강유는 입을 다물었다.

 

<끄윽!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가 죽어가며 내뱉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필살일초라며 가르쳐주신 검법이 사실은 마교의 마공이었다. 게다가 제왕성의 안주인은 마검칠식에 죽었었고...)

어찌 된 내막인지 깨달은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요신군 강조는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필살일초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헌데 알고 보니 필살일초가 바로 마교의 저주받은 검법 마교칠식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강씨 집안이 제왕성과 철천지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흐흐흐! 무후님을 시해한 흉수와 관련 있는 네놈을 잡아가면 성주님께서 큰 상을 내리시겠지.”

독두태보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유가 마검칠식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 설명해도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데...

(상대는 지금의 내 실력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고수... 아무래도 오늘 좋게 끝나긴 힘들겠구나.)

독두태보와 대치한 강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두두두!

십여 대의 마차가 개봉성 동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성문 주변의 관병들과 사람들은 당황하며 급히 피했다.

끼럇!”

철석! 철썩!

전노인은 고삐를 연신 흔들어 말을 몰아붙였다.

앞선 마차들은 이미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진상파를 태운 전노인의 마차도 성문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되었다!)

전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실 때였다.

화악! !

돌연 마차의 앞뒤로 두 명의 사내가 날아 내렸다.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고 추격해온 동위사들이다.

으헉!”

! !

전노인이 기겁할 때 마차 앞쪽에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두 마리 말의 고삐를 하나씩 틀어쥐었다.

히히힝! 히힝!

콰드드!

엄청난 힘에 고삐가 잡힌 두 마리 말은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했다.

크왓!”

마차 뒤로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마차 후면의 기둥들을 움켜잡으며 버텼다.

콰드드! 드드드!

그 바람에 마차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으으으!”

동위사들이 달리던 말과 마차를 어렵지 않게 멈춰 세우자 전노인은 와들와들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생인지라 무림인들에게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아는 때문이다.

(간발의 차이였다. 마차가 성문 안으로 들어갔으면 관할과 규정에 까다로운 관병들이 개입해서 귀찮게 했을 것이다.)

앞쪽에서 말들의 고삐를 틀어쥔 동위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차는 개봉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수십 명의 관병들이 성문과 성문 위의 성루에서 지켜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제 아무리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황실과 각을 세울 수는 없다.

하물며 황실에 대한 영향력은 황금성이 제왕성보다 한 참 앞선다.

만일 진상파가 개봉성 안으로 들어갔다면 잡아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고삐를 잡은 자가 안도할 때 뒤쪽에서 마차를 잡아 세웠던 동위사가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갔다.

실례하겠소 진소저.”

덜컹!

그자는 거칠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창문이 닫혀있어서 어둑한 마차 안에는 진상파가 흐트러짐이 일체 보이지 않는 도도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카아!

진상파 대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섬전초가 이빨을 드러내며 앙칼지게 동위사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나오시겠소? 아니면 험한 대우를 받으시겠소?”

동위사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할 때였다.

죽이지는 마.”

진상파가 누군가에게 차갑게 말했다.

뭐요?”

!

동위사가 어리둥절할 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그자의 목을 뒤에서 움켜잡았다.

너무도 빠르고 또 강해서 동위사는 그 손을 피할 엄두도 벗어날 노력도 할 수가 없었다.

끄윽!”

우둑!

자신의 목뼈가 부러지려는 소리를 내는 것을 느끼며 동위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언제였는지 동위사 뒤에는 키가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의 여자가 나타나 그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이 거구의 미녀는 물론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진상파의 몸에서 풍기는 백리향의 냄새를 추적하여 개봉에 도착한 것이다.

죽일 놈! 감히 황금성의 성주님께 무례를 해? 아가씨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모가지를 부러트렸을 것이다.”

퍼억!

철관음은 기절한 동위사의 몸뚱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관음! 네년이 어떻게 여기에...!”

말고삐를 잡고 있던 동위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할 때였다.

! 콰직!

벼락 치듯 내리쳐진 철퇴(鐵槌)와 쇠몽둥이가 그자의 양쪽 어깨뼈를 박살내 버렸다.

크아아악!”

양쪽 어깨뼈가 자끈동 부러진 동위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 콰직!

그런 그자의 등을 한 쌍의 발이 세차게 내리밟았다.

황금성에 죄를 짓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성주님께 무례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각기 철퇴와 철장(鐵杖)을 든 육척 장신의 여자무사들이 좌우에서 동위사의 등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금색의 갑주로 무장한 그녀들은 물론 백팔금차들이다.

화악! 휘익!

뒤이어 십여 명의 백팔금차들이 허공에서 질풍같이 날아내려 마차를 에워쌌다.

... 백팔금차!”

양쪽 어깨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처박힌 동위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백팔금차 개개인의 능력은 제왕성의 은위사에 못지않다.

그 백팔금차들이 열명 넘게 나타난 것이다.

아주 늦지는 않았네.”

진상파가 마차 안의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채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왕성의 방해가 있어서 길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철관음이 고개를 숙였다.

고독할머니는?”

저희보다 먼저 도착하셔서 아가씨의 동행을 살피고 계십니다.”

애써 침착한 척 묻는 진상파의 질문에 철관음은 마차가 달려온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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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풍진세월(風塵歲月)

 

 

그후 노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짐작하건데 장사성이 그후로도 제법 오래 살아있었으니 노파가 마음을 바꾸어 먹었거나 오히려 장사성의 군사에게 죽었을 것이다.

천하를 떠돌면서 전쟁의 참상을 본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진룡이 보았던 것은 죽거나 상처 입고 신음하는 군사들의 고통이고 참상이었을 뿐이었다.

통곡하던 노파같이 전쟁의 추이(推移)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백성들마저도 그같이 고통 받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천하 전체가 전란에 신음하고 있음을 진룡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진룡은 알면 알수록 인간이 두려워졌다.

힘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를 원하며 싸우는 바람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눈물과 굶주림 속에서 하늘만 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도 힘을 가진다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각축을 벌일까?)

진룡은 파양호변을 거닐면서 끊임없이 자문했다.

"나는 전쟁이 싫다. 파리처럼 값없이 죽어가는 그 많은 인간들 중에는 이인(異人), 재사(才士)들도 끼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사(安史)의 난> 때 왕유(王維)가 귀머거리가 되었고 두보는 장안에 연금되는 신세가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밖에도 죽은 재사들이 어디 한 둘일까?

이토록 전쟁이 계속된다면, 재사는 모두 죽거나 심산에 은거하여 세상은 거친 무지랭이들만이 판을 치게 되어 황폐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진룡의 중얼거리는 말을 유심히 들은 노인이 있었으니 바로 사자검의 제십이대 전인 정사초(鄭詞樵)였다.

정사초는 진룡의 골격이 뛰어나고 문인의 기질이 있음을 높이 사서 그를 사자검의 제십삼대 전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미 세상에 흥미를 잃은 진룡인지라 스승인 정사초를 따라 창평곡으로 와서 검술을 익혔다.

그때까지 창평곡에서는 제이대 우승유로부터 스승이 제자에게 몇 가지의 검초를 가르치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사자검결이 너무도 오묘하여 말년에 가서야 겨우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전에 바탕이 될만한 검초를 가르친 것이다.

 

***

 

진룡이 창평곡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진우량은 신주(信州)에서 주원장의 군대에 패해 근거지인 무창(武昌)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삼년 후 진룡이 어느 정도 검술을 연마한 후 다시 세상에 나왔을 무렵 진우량은 세력을 회복하여 휘하의 군사가 육십만이 넘었다.

 

진룡이 창평곡을 나오기 얼마 전 장사성이 부장 여진을 보내 안풍(安豊)이란 곳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당시 안풍에는 주원장의 형식상 상관인 백련교 교주 한림아(韓林兒;한산동의 아들)가 심복인 유복통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안풍으로 가서 여진을 격퇴하고 한림아를 구했다.

진우량은 그 틈을 타 파양호 남쪽에 자리한 주원장의 군사거점 홍도(洪都)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잡느냐 못 잡느냐를 판가름할 건곤일척의 결전이 파양호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진룡은 의절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홍도로 가는 길목은 온통 진우량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왕자(王子)임을 알리자 앞을 가로 막는 사람은 없었으나 진룡은 군사들이 민간을 수탈하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도저히 그 혼자서는 말리지 못할 상황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홍도에 도착한 진룡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 무렵 진우량은 파양호 일대에 거대한 수군을 구축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대신 큰형 진선(陳善)을 만나 젊은 장수 예지운(睿芝雲)과 함께 병사를 논하고 작전을 세웠다.

예지운은 여동생 예이연(睿夷燕)과 함께 뛰어난 남매 장수였는바, 진룡은 예이연에게 한 눈에 반해 깊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

 

***

 

마침내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가 파양호에서 벌어졌다.

피아를 합쳐 무려 팔십만명의 군사가 동원된 파양호대전(鄱陽湖大戰)이 시작된 것이다.

헌데 전투는 진룡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진우량의 군대는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진룡이 신위를 발휘하기도 해서 주원장의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혼전 속에서 주원장도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긴 치열한 격전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진씨 부자가 그토록 신뢰했던 선봉장 예지운이 돌연 주원장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전세가 급변하여 진우량의 군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진우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살에 맞은 채 물에 빠져 죽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후 주원장은 진우량의 잔당을 토벌하여 호북성 일대를 평정했는데 이때 앞장 선 자가 바로 진우량의 가장 믿었던 부하 예지운이었다.

 

파양호대전에서 진룡은 뛰어난 검술로 적을 수없이 베고 큰형 진선을 구했다.

하지만 둘째형 진리(陳理)는 주원장 군대에 잡혀버렸고 셋째형 진충(陳忠)은 불타는 배와 함께 파양호에 가라앉은 후였다.

진룡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연인 예이연을 찾았다.

그러나 예이연의 함선은 깃발을 바꾸어 달고 오히려 그를 공격했다.

아수라장에서 큰형만을 구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진룡은 심한 허탈감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만약 자신이 세운 계책대로 전투가 진행되었더라면 주원장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지운의 배신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한스러울 뿐이었다.

 

진룡은 뒤쫓는 적을 베고 또 베면서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여산(廬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두 형제는 여산의 깊은 계곡에 숨어서 전군(全軍)이 다 파()했으며 아버지 또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과 함께 마음도 약해진 큰형 진선이 걱정하는 것은 무창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안위뿐이었다.

손에 들어올 뻔 했던 왕업(王業)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얼마 후 무창은 예지운이 이끄는 주원장의 군대에 함락 당했다.

자신의 가족들이 죽거나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진선은 상처가 도져 죽었다.

효자인 진선은 죽으면서도 부모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다.

진선은 죽기 직전 진룡에게 말했다. 형제 중 오직 진룡만이 살아남았으니 만약 왕업에 뜻이 있다면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재물을 찾아내어 군사를 일으키라고...

그 보물들은 무창의 어느 절에 숨겨져 있는데 진우량이 참배하려 갈 때마다 가져가서 숨긴 것이라 했다.

 

***

 

큰형을 여산에 묻은 진룡은 도처에 깔려 있는 주원장의 군사들을 피해 무창으로 갔다.

진우량이 무창에 세웠던 웅장하던 궁궐은 불타 없어졌고 남아 있는 가족도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예지운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무창을 공략한 선봉이 바로 배신자 예지운임을 들었다.

어머니는 진우량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결했으며, 형수들은 무창이 무너지던 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그리고 어린 조카들과 누이들은 주원장의 군사들에 의해 어디론지 끌려갔다고 했다.

 

***

 

진룡은 변복을 하여 신분을 감추고 명나라의 당시 도성이던 금릉(金陵) 응천부(應天府)로 갔다.

배신자 예지운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진룡은 자신의 가족이 당한 참사가 어쩌면 아버지가 일으킨 난으로 말미암은 인과응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예지운의 배신 때문이라고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끌려간 누이들과 조카들을 찾아야만 했다.

절망과 불행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진룡은 남의 불행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의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릉 응천부로 가는 길에 그가 본 것은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민초들의 모습이었다.

역설적으로 제왕들의 불운이 시작되자 민초들의 고통은 끝이 나는 듯 보였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도 이제 수습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여기저기서 활기찬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금릉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오가는 군사들의 무장(武裝)만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거리에는 검을 지닌 사람들의 수도 상당했다.

새로운 천하의 주인에게 한자리 얻기 위해서 기웃거리는 치들이리라.

 

***

 

금릉으로 들어온 진룡은 객점에 투숙한 후 사자검을 꺼내어 닦고 또 닦으면서 살기를 키웠다.

예지운은 주원장에게 공을 인정받아 광동행성우승(廣東行省右丞)이란 높은 벼슬을 하사받아 호사하고 있었다.

그의 집이 어딘지는 금릉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룡은 연인인 예이연의 소식이 궁금했다.

파양호대전 때 그녀의 함선이 자신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잘못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예이연에게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테고 배은망덕한 오라비 예지운같지는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객점의 사환을 불러 물어 보았다.

"혹시 진우량군에서 전향한 여장군 소식을 듣지 못했느냐?"

"미녀장군 말이죠? 그녀가 이곳 응천부에 왔을 때 정말 대단했죠."

"...!"

"아마 응천부 백성들 모두가 그 미녀장군을 보기위해 나갔을 겁니다. 제가 보아도 정말 예쁘더군요."

"그래 그 여장군은 지금 어찌 됐느냐?"

"주천자(朱天子)의 측실로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지요."

진룡은 사환의 말에 앞이 깜깜해졌다.

사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룡은 예지운이 출세를 위해 동생을 팔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호색한 주원장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예이연을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그리움이 밀려 왔다.

"먼저 그녀를 만나 저간의 사연을 들어 보고 누이들과 조카들의 행방도 물어보자. 어쩌면 그녀가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진룡은 그렇게 생각했다.

 

***

 

배신자 예지운을 찾아가는 것을 미룬 진룡은 야행(夜行)에 적합한 복장을 한 후 궁궐의 담을 넘었다.

무창에 있었던 아버지의 궁궐도 금릉의 궁궐을 본 따 지은 것이기에 구조가 낯설지 않았다.

대충 짐작으로 여인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숨어들어갔다.

곳곳에 내시와 위사들이 보였지만 절세고수인 진룡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순시를 도는 위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잠시 어느 지붕위에 엎드려 있을 때였다.

"호호호...!"

귀에 익은 여인의 웃음소리에 진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마 끝을 타고 봉창으로 접근하여 작은 구멍을 뚫었다.

방안에는 화려한 비단휘장이 휘감겨 있고 진기한 장식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귀비(貴妃)의 침실인 듯 했다.

금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의 뒷모습에 가려져 소매자락만 보이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호호호! 황상! 그 당시에는 무척 다급하셨던 모양이옵니다."

몽매에도 그리워한 예이연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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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녀와의 실랑이

 

 

으으으!”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눈 위에서 성숙한 여체의 비밀이 만개한 꽃처럼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란왕후 흑요설의 은밀한 부위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한 번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처럼...

(여자... 여자의 그 부분이 저렇게 생겼었구나.)

이검한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아직 여자를 모르는 이검한에게 흑요설이 자진해서 개방해 보인 사타구니 속의 관능적인 구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호호호! 순진한 척 해 봐야 소용없다!”

그런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은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네놈도 더러운 수컷임이 확인 되었으니 오늘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드드드!

흑요설이 오른손을 쳐들자 밀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린다. 무려 천년 수위인 막강한 공력이 운용되자 주변의 공기가 저절로 요동을 친 때문이다.

쩌저적! 푸스스!

밀실의 천장과 벽이 문풍지처럼 떨리고 먼지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천년 수위의 막강한 내공이 실려 있는 흑요설의 오른손이 내리쳐지면 이검한의 몸뚱이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으스러져 버릴 것이다.

잠깐... 잠깐만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낀 이검한은 다급히 외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다행히 흑요설은 벌렸던 다리를 다시 모은 자세였다.

... 왕후님이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잘 알아요. 남자들을 증오하시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구요.”

이검한은 흑요설을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왕후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죽이시면 안돼요.”

내가 널 죽이면 안된다고?”

이검한의 말에 흑요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냐! 내가 어째서 너만은 죽이면 안되는 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살았다!)

흑요설의 반응에 이검한은 일단 안도했다.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왕후님도 일국의 안주인이셨으니 은원(恩怨)의 분간은 확실하시겠지요?”

이검한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교활한 놈이...”

흑요설의 아름다운 두 눈이 치떠졌다. 이검한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때문이다.

내가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네놈이 일조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이검한을 노려보았다.

...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가 천붕랑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왕후님은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어야 했을 테고... 그때까지 살아계실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는 없었잖아요.”

이검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하아!”

흑요설은 기가 막혔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이 부활하는 데 이검한이 일조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얄밉지만 귀여운 구석도 있는 놈이다!)

겁에 질려 자신을 곁눈질로 살피는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잘 생기고 귀여운 사내아이다.

키가 흑요설 자신보다 커서 다 자란 성인인줄 알았는데 하는 행동과 말투에서 비로소 아직 어린 소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게다가 아직 철부지 애송이이기도 하고...)

흑요설은 갈등에 휩싸였다.

이검한의 말 대로 어쨌든 자신은 이검한에게 신세를 진 셈이 되었다. 이검한이 이 밀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끝내 한을 품고 마화적말강막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일국의 왕후였던 몸이다.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은 그녀의 자부심과 긍지가 용납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상대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다.

신세를 진 이 순진한 소년을 꼭 죽여야만 할까?

(...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냉혹하기만 했던 흑요설의 심사에 균열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이검한은 숨을 죽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만일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내게도 요 녀석같이 영특하고 늠름한 아들이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

흑요설의 마음속 균열은 점점 커져 어느덧 이검한에게 호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모든 여자는 늠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원한다.

그것은 흑요설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증오하여 말살하기로 맹세한 그녀였지만 본성은 보통의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평범한 여자로 살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을 낳고 정성을 다해 길렀을 것이다.

남에게 망설임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잘난 아들을 길러내는 것보다 더 뿌듯하고 행복한 일은 여자에게 없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 누워있는 이 소년이라면 모든 여자, 어머니들이 꿈꾸는 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에 비해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잘 생긴 얼굴은 한 눈에 봐도 영특하다.

이검한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만한 아들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튼실한 살덩이는 흑요설이 경험해본 어떤 사내의 것보다 우람할 것처럼 보이고...

(죽일...)

시선이 이검한의 아랫도리에 이르는 순간 흑요설의 눈 꼬리가 확 치켜 올라간다.

이검한의 아랫도리의 살덩이는 여전히 성이 나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금제일미인으로까지 여겨지는 절세미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이검한을 내려다보고 있다.

온몸의 체모가 사라진 탓에 사타구니 속까지 매끈하여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미녀중의 미녀인 흑요설의 알몸은 한창 양기가 뻗히는 나이인 이검한에게는 너무나 강한 자극이다.

그녀의 도자기처럼 희고 매끄러운 속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데워진다.

하물며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솟아난 한 쌍의 살덩이와 사타구니 사이의 목탁처럼 매끈하게 나있는 균열의 형상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애써 자제하려고 해도 이검한의 양물은 분기탱천하여 시들 줄을 모른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놈도 결국은 여자만 보면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의 알몸을 보고 극한까지 흥분해있는 이검한의 일부를 확인한 순간 갈등을 일으키던 그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 어째 느낌이 안 좋은데...)

부드러워지던 흑요설의 눈빛이 다시 서릿발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발견한 이검한은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이검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흑요설아! 흑요설아! 설마 짐승같은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어 짓밟혔던 치욕을 잊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약해지려던 마음을 추스렸다.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벗어나는 데 네놈의 신세를 진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사내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몸이다.”

애써 차갑게 말하며 흑요설은 다시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 놈이 사내로 태어난 것이나 원망해라! 명복은 빌어줄 테니...”

드드드!

흑요설의 오른손에서 일어나는 역도에 의해 밀실이 다시 지진이라도 만난 듯이 뒤흔들렸다.

이제 그녀의 손이 내려쳐지며 이검한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 살려주세요 왕후님!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했다.

(요놈이...)

이검한이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자 차갑게 식어가던 흑요설의 가슴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겁에 질려 눈물을 질질 짜는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은 흑요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되살렸다.

십삼 연합국의 공격을 받고 누란왕국이 멸망할 때의 기억이 그것이었다.

누란왕국을 침공한 십삼 연합국의 군사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었다.

특히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들에게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를 썼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도살당하며 비명을 지르던 누란왕국 소년들의 모습이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떠오르는 흑요설이었다.

(죽여야 한다! 이놈도 여자만 보면 짐승이 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모질게 마음을 먹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치켜든 오른손을 바르르 떨기만 할 뿐 이검한을 내려치지 못했다. 겁에 질려 우는 덩치만 큰 소년의 모습은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이래서는 안된다!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세상에서 사내들을 없이 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래도 흑요설은 선뜻 이검한에게 살수를 쓸 수가 없었다.

(뭐지?)

그렇게 갈등하던 중 흑요설은 이검한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를 감지하고 흠칫했다.

천여 년의 세월동안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던 터라 열기를 감지해낼 수 있는 흑요설의 감각은 세상 누구보다 예민하다.

품속에 무얼 숨기고 있는지 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리며 이검한에게 몸을 숙였다.

흑요설이 몸을 숙이자 아름다우면서 탄력이 넘치는 한 쌍의 살덩이가 이검한의 얼굴 위에 매달려 출렁거린다.

하지만 이검한에게는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신세였으므로...

흑요설의 섬섬옥수가 이검한의 옷 속으로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꺼낸 그녀의 손에는 오리알만한 구슬이 하나 들려있었다.

츠으! 츠으!

구슬에서는 노을같이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물론 그 구슬은 적린화룡이 죽으며 남긴 내단 화룡단정이었다.

화룡단정은 세상에 존재하는 영약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火氣)를 지니고 있다. 만일 남자가 화룡단정을 복용하면 절륜한 정력은 물론 무쇠라도 녹여버릴 수 있는 양강지기(陽强之氣)를 얻게 된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하려면 음기(陰氣)를 지닌 영약을 함께 복용해야만 한다. 화룡단정의 열독이 워낙 강한 때문이다.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복용하는 것은 펄펄 끓는 용암을 그냥 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걸 쓰면 되겠구나!)

한눈에 화룡단정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본 흑요설의 얼굴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검한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 드릴 게요. 마음에 드시면 그거 가지세요.”

화룡단정을 찾아낸 흑요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본 이검한은 급히 말했다.

화룡단정은 아깝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그걸 포기하고 살 수만 있다면 손해도 아니다.

물론 이검한은 흑요설의 생각을 잘못 짚었다.

귀한 물건이건 같지만 사양하마.”

흑요설은 배시시 웃으며 왼손으로 이검한의 코를 잡았다.

(설마...!)

코가 흑요설의 매끈한 손가락에 강하게 잡혀 숨을 입으로만 쉴 수밖에 없게 된 이검한은 불길한 예감에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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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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