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2

 

           우연한 납치극

 

 

 

종남산(終南山)!

 

중원의 오대도가성지(五大道家聖地) 중 하나인 종남산은 가을빛에 물들어 있다.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는 두둥실 구름이 몇 점 떠가고 있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은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종남산의 넉넉한 산록(山麓) 아래 펼쳐진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아름답게 율동하고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선인봉(仙人峯)을 병풍처럼 등지고 한 채의 웅장한 장원이 서 있다.

 

<혈검산장(血劍山張)>

 

성문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정문에는 금박이 화려한 편액이 걸려 있다. 붉게 칠해진 둥근 고리[]를 배경으로 쓰여진 글은 웅혼하고도 패도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이 장 높이의 위압적인 돌담 너머로는 수백 채의 전각 지붕이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추녀를 잇대고 있다.

이곳이 바로 강호에서 서패천(西覇天)으로 불리는 혈검산장이다.

본래 당금 무림에는 사패천(四覇天)이라 불리는 네 개의 강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혈검산장은 바로 그중 서패천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莫高天)!

 

그가 서패천 혈검산장의 당대 주인이다. 막고천이 한 자루 사형혈검(蛇形血劍)으로 펼치는 사형검법(蛇形劍法)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에는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막고천이 이끄는 혈검산장의 위세는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 중원의 서방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막고천의 탁월한 용인술(用人術)과 교묘한 심모원려(深謨遠慮)의 결과였다.

 

막고천은 석 자[三尺]의 검보다 세 치[三寸]의 혀가 더 무섭다!

 

그 같은 비아냥이 공공연히 무림에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놓고 막고천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 그의 막하에는 구름 같은 고수, 달인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일단 막고천의 눈 밖에 난 자는 늘 비참한 최후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때는 저녁 무렵이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혈검산장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하하하!]

[까르르!]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 펼쳐진 공터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었다.

질 좋은 비단옷을 입은 아이, 허름한 베옷을 입은 아이, 일견해도 신분이 다른 아이들이 함께 뒤섞여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야 신분의 고하는 큰 문제도 아닐 것이다.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선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는 우락부락한 장한 네 명이 무료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혈검산장의 무사들말고도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또 한 쌍 있었다.

[...!]

혈검산장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는 언제부터인가 초라한 몰골을 지닌 초로의 노인이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노인은 뛰어 노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길을 가다 지친 늙은 여행객으로 보인다. 혈검산장이 무사들도 노인의 그 같은 행색에 그를 별로 유의하지 않고 보아 넘겼다.

(틀림없다! 바로 저 아이다!)

하지만 고개를 움츠린 노인의 눈빛은 뜻밖에도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의 그 눈빛은 한 소년에게서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이 보고 있는 소년은 열 서너 살 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것이 한눈에도 귀한 신분의 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소년은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키도 작은 데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빈약한 것이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대로 쓰러질 듯이 보였다.

그 때문에 소년은 원래 나이보다도 한 참 어려 보인다. 사실 소년의 나이 올해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체질 때문에 두 세살 가량 어려 보이는 것이다.

[...!]

병약한 소년은 아이들이 뛰노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돌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신이 나서 겅중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는 소년의 눈에는 부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허약한 몸을 지녀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찬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상영(祥英)을 막고천, 그 짐승에게 빼앗긴 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 상영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바로 저 나이일 것이다!)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점점 형형해졌다. 사실은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때문에 잘 해야 열 네 살가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멀리서 소년의 병약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노인의 나무껍질 같이 메마른 안면에는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막고천! 그놈은 만삭인 상영을 납치해다가 짐승 같은 야욕을 채웠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병약한 것도 제 에미 뱃속에 들었을 때 에미가 난행을 당한 결과일 것이다!)

노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려졌다.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놈의 주위에는 지켜 주는 개들이 너무 많아 번번이 실패했었지! 이제 나도 복수는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피맺힌 한은 우리의 아들이 대신 갚아줄 것이다!)

노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옆구리에 찬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

 

호로(壺瀘)!

 

그것은 은은히 황금빛 서기가 나는 한 개의 호로병이었다. 사기로 구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호로병인데 가운데가 잘룩하여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찰 수가 있다.

그 호로병을 움켜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 핏줄이 불끈 돋았다.

(놈을 이길 만한 무공을 찾아 헤매던 노부는 천우신조로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마셔 무적 공력을 얻은 뒤 막고천 그 악적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이것은 저 아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이 뜨거운 부성애로 물들었다.

헌데 금강옥액이라니! 정녕 노인이 차고 있는 호로에 청구이보(靑丘二寶) 중 하나인 금강옥액이 들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인은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내 아들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금강신체(金剛神體)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네놈 막고천을 쳐죽이게 하리라!)

노인은 격동을 감추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노인의 깡마른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쐐액!

허공으로 튀어오른 노인은 질풍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혈검산장의 앞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저 늙은이가...!]

[... 무림인이었다!]

무료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질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파팟!

[! 왜 이래요!]

단번에 마당을 가로지른 노인은 바위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병아리처럼 낚아챘다.

쐐액!

소년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와 노인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비강(比强) 도련님!]

[둘째 도련님을 내려놔라!]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왔다.

 

막비강(莫比强)!

 

이것이 그 병색 짙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둘째 아들이었다.

[막고천이란 짐승에게 전해라! 나 곡강(曲姜)이 아들을 찾아간다고!]

화라락!

노인은 한 마리 천마처럼 단숨에 혈검산장 우측의 송림을 뛰어넘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경신술은 너무나 신쾌하여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마당 중간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 쫓아가자!]

[총관께도 알려라! 삼공자가 납치되었다고!]

한 명의 무사는 도로 장원 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나머지 셋은 이를 악물고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오래지 않아 혈검산장 안에서는 수많은 무사들이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아올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마당에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쐐애액!

병약한 소년 막비강을 겨드랑이에 낀 노인은 질풍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몇 개의 산과 개울이 순식간에 노인의 발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그새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너무 놀란 데다가 병약한 몸이 자신을 안고 날아가는 노인의 엄청난 속도를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가엾은 녀석!)

노인은 달리면서도 소년을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이 모두가 아비가 못나 네 에미를 막고천, 그 악적에게 빼앗긴 결과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강옥액을 먹고 아비가 추궁과혈로 경락을 뚫어 주면 넌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노인은 염두를 굴리면서도 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이미 백여 리를 달렸으나 노인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혈검산장의 세력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종남산이 자리한 섬서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노인의 발길은 늦춰질 줄 몰랐다. 노인은 밤이슬을 맞으며 다시 수십 개의 산과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다시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은 혈검산장이 자리하고 있는 섬서성을 벗어나 하남(河南)성 경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군!]

그제야 비로소 노인은 땀을 닦으며 걸음을 늦췄다. 그가 멈춰선 곳은 하남성의 서쪽 끝에 자리한 험준한 산맥 웅이산(熊耳山) 근처였다.

(몇 번이나 방향을 틀었으니 혈검산장의 무리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지나온 곳을 흘깃 돌아보며 숲을 나섰다. 웅이산은 너무 험하여 지금까지처럼 길 아닌 길로 달릴 수만도 없다. 무림인인 자신이야 괜잖지만 병약한 막비강에게 험한 산길은 무리인 것이다.

다행히 숲에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동서로 뻗쳐 있는 관도(官道)가 거대한 뱀처럼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이제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 아이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주면 된다!)

노인은 소년 막비강을 소중히 안고 관도로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돌연 뒤쪽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귀찮은 일을 피할 요량으로 길가로 물러서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

이내 네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자가 없는 것 같군!)

노인은 내심 안도하며 땅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 직후였다.

히히히힝!

[워워!]

돌연 그를 지나쳤던 네 필의 말이 급격히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은...!)

슬쩍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던 노인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두두두!

그를 스쳐 지났던 말들이 천천히 그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말들 위에는 일견하기에도 무림인들로 보이는 네 명이 올라탄 채 형형한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필의 말들 중 맨 앞쪽의 갈색 말 위에는 우람한 체격의 백의노인이 앉아 있다. 이 노인은 온몸이 백색 일색이었다. 머리도 희고 수염도 백설같이 희며 입고 있는 의복과 얼굴색도 분을 바른 듯이 하얬다.

츠으!

백면노인의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선 연신 남색(藍色) 광망(光茫)이 번뜩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백면노인 뒤쪽의 말에는 그와 정반대로 얼굴이 숯처럼 검은 흑면노인이 타고 있다. 그자는 뼈를 발라 놓은 듯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인데 입고 있는 의복도 먹물을 칠한 듯이 새까만 흑포였다. 만약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흰빛 마저 없었다면 그저 한 덩이의 숯을 말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으핫핫! 이게 누구요? 이제 보니 고명하신 염라철장(閻羅鐵掌) 곡 노사(曲老師)시로군!]

흑백의 두 노인 중 우람한 체격의 백면노인이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막비강을 납치한 노인, 염라철장 곡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 이런 때에 흑백쌍살을 만나게 되다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구나!)

 

흑백쌍살(黑白雙煞)!

 

흑백의 두 노인은 하락(河洛) 일대에서 악명이 높은 마두들로서 얼굴 색깔에 따라 각기 백면살(白面煞), 흑면살(黑面煞)이라 불린다.

사실 흑백쌍살이 제법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들이긴 해도 염라철장 곡강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부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염라철장 곡강 자신이 무림에서도 이름이 쟁쟁한 강호칠절(江湖七絶)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정파백도의 가장 뛰어난 일곱 기인을 일컬어 강호칠절이라 하는 바, 곡강은 불의와 사마외도를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써서 염라철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게 된 인물이다.

평소의 염라철장 곡강이었다면 흑백쌍살을 만났어도 코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틀렸다. 실로 십오 년 만에 되찾은 아들과 함께인 것이다. 도저히 남과 어울려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흐흐!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정말 기쁘기 그지없소.]

백면살이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염라철장도 도리 없이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흑백쌍살 형제분들이셨군. 보아하니 두 분은 지난날의 일장을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금 고하(高下)를 가늠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오늘은 노부가 급한 일이 있으니 열흘 후 황산(黃山) 시신봉(始信峯)에서 만나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염라철장은 평소의 불같은 성질을 누르며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며 보였다.

[그럴 필요 없소, 곡 노사!]

그러나 얼굴이 검은 노인, 흑면살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나 흑면살은 따로 날짜를 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오늘은 날씨도 시원하여 손속을 교환하기에 더없이 좋은데 열흘 후에 고생해 가며 험준한 황산을 올라갈 필요가 뭐 있겠소? 혹시 곡 대협은 황산에 명당 자리라도 잡아 두기라도 한 거요?]

흑면살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굴뚝에 빠진 쥐새끼 같은 놈이...!)

염라철장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당년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이 살성은 평소 흑백쌍살 같은 자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전의 형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은가? 그는 할 수 없이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소. 이해하시오!]

그의 말에 백면살은 염라철장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막비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곡 대협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인물인데 어찌하여 어린아이의 요혈을 찍어 데려가는 것이오? 설마 유괴한 아이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흑면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형님은 참 눈치도 없소. 저 어린놈은 아마도 곡 대협과 지금은 막고천의 첩이 되어있는 냉상영(冷祥英)이란 계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게요!]

[닥쳐라!]

순간 염라철장이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주둥아리를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염라철장의 일갈에 흑면살이 흉흉한 표정으로 대꾸하려 할 때였다.

[흐하하!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흑백쌍살 뒤에 있던 한 명의 중년 장한이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휘릭!

그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동시 어깨에서 길이가 세 자 가량 되는 강추(鋼錐)를 뽑아 휘저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곡 대협은 우리 형제를 안목에 두지도 않소?]

염라철장은 그자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얼굴은 생소한데 나 곡강이 언제 어디서 귀하에게 죄를 범했소?]

[시침떼지 마시오. 우리는 태호쌍걸(太湖雙傑) 황웅(黃雄), 황렬(黃烈) 형제요. 당신이 우리 형제의 사형인 무영서생(無影書生)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소?]

[! 당신들이 바로...!]

염라철장도 비로소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강퍅한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무영서생이란 작자는 한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간 담을 넘어 들어가 못된 짓을 하던 중에 내 손에 걸려 죽었지! 설마 그 패륜음적(悖倫淫賊)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겠지?]

그가 비웃음을 흘릴 때였다.

[바로 그렇다!]

투학!

사나운 함성과 함께 두 줄기 한광이 염라철장을 향해 엄습해 왔다. 황웅이 자신의 무기인 한 쌍의 강추를 느닷없이 무찔러낸 것이다.

염라철장도 황급히 오른손을 뻗어냈다. 창졸간에 취한 임기응변이었다.

카카캉!

맑은 음향이 일어나며 황웅의 강추 두 개가 서로 맞부딪쳐 버렸다. 염라철장이 내뿜은 암경에 휘말려 버린 결과였다.

[!]

황웅은 염라철장이 말하는 사이에 기습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손목이 울리는 격통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밀려나갔다. 염라철장의 공력이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무서운 늙은이!)

(과연 강호칠절의 일인답다!)

흑백쌍살과 황렬은 이 상황을 보고 내심 놀랐다.

[모두 함께 공격하자!]

콰릉!

백면살이 일갈하며 먼저 장력을 뽑아내 염라철장을 후려쳤다.

[우우우!]

화라락!

하지만 염라철장은 사나운 장소성을 터뜨리며 맹렬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 저 늙은이가!]

[달아나다니...!]

염라철장의 뜻밖의 행동에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라철장은 어느 누구와 싸우든 절대 등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사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 염라철장은 이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진 후였다.

[싸움을 피하는 것을 보니 부상이라도 당한 모양이다!]

[쫓아가자! 이 기회에 원한을 갚자!]

화라락! 쐐애애액!

백면살의 호통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다섯 사람은 쫓고 쫓기며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렸다.

(빌어먹을...!)

웅이산의 험한 산중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던 염라철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추격하는 네 사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네 사람과의 거리는 점차 단축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염라철장이 밤새 달린 탓이었다.

철인이 아닌 이상 밤새 천여 리를 달리고도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염라철장은 지금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떨쳐 버릴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결판을 낼 수밖에...!)

내심 결심한 그는 급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의 절벽 아래에 큼직한 동굴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화라라락!

염라철장은 눈을 번뜩이며 즉시 그 산동(山洞)으로 뛰어들었다.

[으하하! 스스로 독 안에 뛰어드는구나!]

뒤쪽에서 네 흉사(凶邪)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시간이 별로 없다! 혹시 모르니...!)

염라철장은 흘깃 밖을 돌아보며 급히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는 작은 종이에 총총히 몇 자 글을 적어 내려갔다.

글을 다 쓴 그는 그 종이를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색 호로와 함께 막비강의 품속에 쑤셔 넣어 주었다.

(부디 네가 그 글을 읽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저 네 놈의 생쥐가 내 적수는 못되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염라철장은 뜨거운 부성애가 담긴 눈으로 소년 막비강을 내려다보았다.

화라라락! 스스스스!

그때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추적자가 동굴 밖에 날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염라철장의 기습이 두려워 아무도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곡가야! 자라 새끼처럼 석동 안에 숨어서 기어 나오지 않겠다면 독연기를 불어넣어 어린놈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

백면살이 동굴 안을 향해 흉갈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헛소리 마라!]

푸학! 꽈르릉!

하나의 인영이 전광석화같이 석동 밖으로 튀어나오며 사나운 장력을 쏟아냈다. 물론 그는 염라철장이었다. 그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세찬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

[크악!]

퍼퍽! 콰드득!

이 흉맹무비한 장풍에 황씨 형제의 상체가 피모래로 흩어져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흑백쌍살은 그래도 고수답게 반응이 빨라 횡액을 면했으나 황씨 형제는 여지없이 참살을 모면하지 못한 것이다.

[죽어랏! 비겁한 놈들!]

염라철장은 여세를 몰아 급히 물러서는 흑백쌍살을 덮쳐 갔다.

꽈르릉!

염라철장의 쌍장이 검게 물들며 무시무시한 경풍의 소용돌이가 뻗쳐 나왔다. 그는 장기전으로 나가면 지친 자신이 불리함을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최강의 살수를 구사한 것이다.

[! 날뛰지 마라!]

[받아랏!]

흑백쌍살도 악을 쓰며 마주 장력을 내치며 염라철장의 장풍에 맞섰다. 하지만 염라철장이란 이름은 헛것이 아니었다.

파카카캉!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염라철장의 장풍은 마치 무쇠의 창날처럼 흑백쌍살의 장풍을 여지없이 꿰뚫고 들어갔다.

[... 안 돼!]

[케에엑!]

[으하하!]

퍼퍼펑! 콰쾅!

비명 소리와 살기 가득한 웃음소리, 그리고 무언가 으깨지는 듯한 둔중한 소성이 한꺼번에 일었다. 염라철장의 창날 같은 장력은 흑백쌍살의 가슴과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콰당탕! 퍼퍽!

머리가 박살난 백면살의 거구가 뇌수를 흩뿌리며 나뒹굴고, 뒤이어 가슴이 뭉개진 흑면살이 주르르 십여 걸음 밀려났다가 고꾸라졌다.

[으으음!]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한 염라철장도 안색이 창백해져서 비틀거렸다.

[흐흐흐! 네놈들 스스로 자초한 횡액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염라철장은 사방에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를 돌아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하여간 내 아들이 애비의 유서를 읽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로군!]

염라철장은 득의해하며 지친 몸을 석동 쪽으로 돌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카하하하항!]

돌연 멀지 않은 숲속에서 누군가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살기에 찬 원숭이가 우짖는 듯 귀에 거슬리고 섬뜩한 것이었다.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광소성! 혹시 그자란 말인가?)

막 동굴로 들어가려던 염라철장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는 그의 숙적인 한 명 흉한의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염라철장이 숨을 죽이며 긴장할 때였다.

[카카카! 어떤 망종이 새벽부터 지랄을 해서 본좌의 단잠을 깨우느냐?]

화라라락!

불쾌한 악취가 풍기며 허공에서 한 줄기 인영이 공 튕겨지듯 뚝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자는 온몸에 털이 숭숭 돋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이었다. 검붉은 털이 온몸을 뒤덮은 데다 두 팔이 무릎 아래까지 뻗쳐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

[! 네놈은!]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동시에 한걸음씩 물러섰다.

[염라철장 곡강!]

[무협제원(巫峽啼猿)!]

염라철장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나타난 자는 바로 그가 떠올렸던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무협제원!

 

이것이 그자의 이름이었다. 염라철장이 당금 정파백도의 절정고수들인 칠절(七絶)에 속한다면 무협제원은 흑도무림의 최고수들인 육요(六妖)에 드는 절정고수였다.

사실 그자는 인간의 어머니와 성성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이었다. 무협 근처의 산골 마을에 홀로 살던 여자를 수백 년 묵은 원숭이가 무산(巫山)에서 내려와 겁탈한 결과 무협제원이 태어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여자와 원숭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비정상적으로 팔이 긴 무협제원의 몰골을 보면 그가 원숭이의 자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숭이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사나운 성성이의 피를 이어받은 때문인지 무협제원은 맨손으로 황소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신력과 포악한 성격을 타고 났다. 거기에 더해 기연으로 어떤 상고기인의 비급을 얻어 일신에 고절한 무공까지 지니게 되었다.

무협제원은 이같은 자신의 힘과 무공을 믿고 무협 일대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었다. 그러다가 십년 전 염라철장과 시비가 붙어 그의 일장을 맞고 무협의 격랑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

 

           끈질긴 추적자(追跡者)(3)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거지는 두려움과 함께 의혹을 느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은 임청우는 관도를 벗어나 근처의 산으로 치달아 올라갔다.

가늘어지긴 했어도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임청우는 점점 더 험하고 외진 산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임청우가 상대해 주지도 않자 거지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거지는 수많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을 벴던 사람이었다.

죽을 위기도 수없이 넘겼으며 적의 간계에 빠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를 구해준 대장군(大將軍)을 보필하여 무수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적을 신중히 대하고 몸을 사리는 침착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인의 적이 자기를 유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거지는 임청우와의 거리를 좀 더 벌리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지는 문득 빗속을 흐르는 만리향의 향기를 맡았다.

만리향 향기는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거지는 임청우에게 온 정신을 다 쓰느라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소저!”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임청우를 쫓아가며 고함쳤다.

이놈! 우리 아가씨를 내려놔라!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감히 손대려하느냐?”

임청우는 내심 아차! 했다.

(저 거지가 결국 알아버렸구나. 내가 주은을 유괴해서 달아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구나. 빨리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숨어야 할 텐데...)

뒤를 돌아보니 거지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쫓아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따라오던 방금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청우는 가성(假聲)을 쓰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쫓아온다면 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거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송곳이 바닥에 꽂히듯 우뚝 멈추어 섰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 그분 소저를 죽인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겠다.”

멈춰선 거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를 쫓아오지만 않는다면 맹세코 이 여자를 죽이진 않겠다.”

임청우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를 올라가며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멈춰 섰던 거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다시 달려오며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어떤가? 나는 소저의 종이나 마찬가지이니 소저께서 욕을 당하더라도 내가 죽은 이후에야 당해야 할 게 아닌가?”

임청우는 거지의 충성심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의 위쪽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거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임청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소저께서 욕을 당하신다면 아마도 주인께선 내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이 늙은 거지를 죽이고 말 것이다.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소저를 구해내야 한다. 구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소저를 편안히 돌아가시게 라도 해야 한다.)

거지는 심주은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쐐액!

자기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거지는 맹렬히 도약해서 임청우를 덮쳐갔다.

카앗!”

단번에 거리를 오장까지 좁힌 거지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수 십 줄기의 주전이 빗속을 뚫고 날아갔다.

그 소리만도 무시무시하여 임청우는 도저히 자기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에 그는 심주은을 안은 채 곤두박질치듯이 앞쪽으로 납작 엎드렸다.

퍼퍼퍽! 퍼석!

거지가 뿜어낸 주전들은 임청우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앞쪽의 바위들을 뚫고 들어가거나 깨트렸다.

죽어라!”

그 사이에 다시 삼장쯤으로 거리를 좁힌 거지가 임청우에게 덮쳐들며 살수를 펼치려 했다.

콰르르르릉!

바로 그 순간 거지가 뿜어낸 주전에 격중된 바위 하나가 흔들리더니 임청우쪽으로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사태다!)

임청우는 경악하며 자기를 향해 굴러오는 큰 바위에 왼손을 갖다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덮쳐들고 있는 거지는 있다는 것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삼천 근이 넘는 큰 바위가 임청우의 손에 떠밀려 붕 떠오르며 그의 몸을 넘어갔다.

!”

그 바람에 거지는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며 바위를 밟고 다시 날아올라야만 했다.

쿠르르릉!

바위가 굴러가면서 다른 바위를 건드리고, 그 바위는 다시 다른 바위를 밀치면서 산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위로 올라가!”

이불에 쌓여 있던 심주은이 갑자기 임청우에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얍!”

임청우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껑충 날아올라 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

뒤쪽에서 거지가 벼락같이 고함을 치면서 두 대의 주전을 쏘아 보냈다.

왼손을 뒤로 휘둘러서 한대의 주전을 흩어버리는 순간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나머지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부터 두 대의 화살 중 거지가 정말 공력을 들인 것은 허벅지를 관통한 그것이었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임청우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나뒹굴 뻔했다.

으헤헤헤!”

공격이 성공하자 득의한 거지가 신룡처럼 솟구쳐 올라 임청우를 따라붙었다.

!

그리고는 임청우의 몸 옆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이불자락을 낚아챘다.

실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청우는 꼼짝도 못하고 심주은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불을 헤쳤다.

소저!”

임청우가 놀라 소리칠 때였다.

!”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심주은은 이불자락을 잡고 날아올라 펼쳐지는 이불로 앞을 가린 채 임청우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위를 굴려!”

그녀는 근처에 있는 큰 바위들을 향해서 장력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가 굳이 바위를 굴릴 것도 없었다.

쿠르르르릉!

이미 아래에서 시작되고 있던 산사태의 영향으로 흔들린 바위들은 산이 무너지듯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

거지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튀어오른 커다란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산사태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마치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듯, 땅이 진노하는 듯, 산사태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근처의 지형을 바꾸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심주은은 알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마저 놓아버린 채 임청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연의 힘은 어떤 인간에게라도 두려움과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임청우도 심신이 지진을 만나 흔들리는 것같이 놀랐다.

이름 없는 야산의 한 비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산사태가 이럴진데 하물며...

영원한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일백년 인생은 전광석화에 불과할 따름이고 무궁한 천지의 작용에 비한다면 인간의 역사(役事)란 그저 물결이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잠시 만들어놓는 파문과도 같은 것이리라.

 

***

 

쏴아아아!

완전히 지형이 변해버린 산비탈로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린다.

임청우는 젖은 이불을 끌어올려 심주은의 알몸을 감싸주었다.

심주은은 거지를 삼켜버린 산비탈을 바라보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기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를 죽여버렸어. 그를...”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임청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완전히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말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알기로는 임청우는 심성이 중후하고 착해서 결코 모진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산비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길을 따라서 눈을 돌리던 심주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피유우우웅!

퍼부어지는 빗줄기를 거스르며 땅에서부터 유성(流星) 하나가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신호용의 불꽃인 기화(旗火).

거지는 무시무시한 산사태에 휩쓸리고도 뛰어난 무공 덕분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 기화가 올라갔으니 그것을 발견한 노파와 중이 달려올 것이다.

심주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젖은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 옷들은 임청우가 그녀와 함께 이불속에 넣어 왔던 것이다.

옷을 걸친 심주은은 허둥대며 임청우의 손을 잡고 바위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삐이이! 삐익!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빗속을 뚫고 세찬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기와 승이 벌써 가까이 왔다.)

심주은의 다급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청우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걸쳐주었다.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피해야겠다. 다시 열이 나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어.”

임청우의 부드러운 말에 심주은은 감격하여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산의 반대쪽은 우거진 숲이었다.

비와 바람 속에서 나무들은 호곡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은 숲 속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달려갔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바람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삐이익! 삐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모든 소음을 뚫고 두 사람의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기걸승이 벌써 산을 넘어 숲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주은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몸에서 나는 만리향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고 말거야.”

동굴을 찾아야 할텐데...”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임청우가 미소를 지으며 심주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닥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일이야. 내가 동굴을 찾는 것은 지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주은은 총명한 소녀이지만 임청우처럼 도학(道學)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기가 뭐라고 해도 임청우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념하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체념한 심주은은 처연한 어조로 말할 때였다.

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돼.”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끌고 나아가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룬 것도 하늘이 정한 것이라면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럼 너는 이런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야하지 않겠어?”

! 난 그렇게는 못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인데 무조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말도 안돼.”

심주은은 자기가 처한 상황도 잊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무심코 남편이란 말을 내뱉고 나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 심주은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임청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삐이익!

그 사이에 휘파람 소리는 불과 백여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쩌억!

그 뒤를 이어 번갯불이 하늘을 동서로 길게 찢고 지나가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임청우는 앞쪽에 있는 큰 나무의 뒤에 가리워져 있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실로 천행이랄 수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와룡강 무협소설

 

               환골탈태 換骨奪胎

 

 

 

 

 

 

제 1장

 

              단서(丹書), 옥액(玉液)의 전설

 

 

 

단서(丹書)!

옥액(玉液)!

 

그 두 가지의 이름은 지난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강호무림에 숱한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한 권의 비급과 한 병의 신비한 영약!

붉은 표지의 비급(丹書)에는 천하무적의 신공절학이 수록되어 있으며,

옥같이 보배로운 물약(玉液)은 만독불침(萬毒不浸)과 금강불괴(金剛不壞)를 만들어 준다!

칼끝에 생명을 건 무림인들이 그 이름을 들을 때 입 안의 침이 마르고 혈관의 피가 들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

<금강옥액(金剛玉液)!>

 

숱한 인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가문, 문파를 파멸로 몰아넣은 무림의 이대기보! 이것들은 백년무림,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도 가장 강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한 명 기인이 남긴 것이다.

 

무성(武聖) 청구상인(靑丘上人)!

 

저 달마(達磨)와 장삼풍(張三豊)에 비견되어 무성이란 지고의 칭호로 불리는 일대기인! 그의 숱한 기행과 업적은 한 수레의 글로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거니와, 특이한 것은 그가 중원무림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구(靑丘)! 달리 근역(槿域), 동이(東夷)라고도 불리는 고려국(高麗國)이 그의 출신인 것이다.

비록 지금은 쇠락하여 자그마한 반도(半島)에 도사린 옹색한 민족이 되었으되, 아득한 상고시대 이래로 그들 동이족이 화북(華北)과 막북(漠北) 일대를 누천년간 지배했음은 잘 알려진 바다.

동이족은 무예를 숭상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살았던 위대한 정복민족이다. 중원의 숱한 병법과 병서, 무예가 바로 그들 동이족에게서 유래했다.

태공망(太公望), 노자(老子), 공자(孔子), 황석공(黃石公)이 모두 동이족의 가계(家系)를 잇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저술인 금해병서(金海兵書)를 얻기 위해 당태종 이세민(李世珉)이 온갖 책략과 술수를 다했음은 당서(唐書)에도 전하는 바다.

누천년을 내려온 동이족 전래 무맥의 최후 전승자! 그가 바로 청구상인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여 년 전, 청구상인은 동이족이 잃어버린 세 가지의 보물,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아 중원으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사해오호를 주유하며 숱한 기인명숙들과 조우하였는바, 누구도 청구상인의 수하에서 삼 초를 버티지 못하였다.

그렇게 일 갑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청구상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원 땅에 노구를 누이게 된다.

청구상인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곳이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청구상인이 자신의 고향인 청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그의 신공절학이 담긴 단서와 옥액도 중원의 어딘가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청구단서(靑丘丹書)를 찾아라! 천하를 얻게 되리라!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어라! 죽음조차 이길 수 있으리라!

 

강호무림이 발칵 뒤집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사, 흑백을 불문하고 모든 강호인들이 명산대천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단서와 옥액, 아니 그중 하나만 얻어도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대로, 문파는 문파대로 사력을 다해 청구상인의 유택(幽宅)을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 와중에 숱한 피보라가 일고 비극이 명멸했다. 누가 청구이보(靑丘二寶)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기만 하면 전무림인들이 그를 습격했다.

어떤 천하고수라도 전무림인을 상대로 싸워서야 살아날 수 없는 법! 수만 명의 생명이 억울하게 죽어 갔고 수백의 문파와 가문이 무림도상에서 지워졌다.

어떤 자는 이런 세태를 빌미로 평소의 원한을 갚기도 했다. 자신의 적이 청구이보를 얻었다는 소문만 흘리면 거의 틀림없이 그 적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음모와 살육의 광란(狂亂)!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며 중원무림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제서야 청구이보가 일으킨 미증유의 혈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숱한 희생과 유혈 끝에 강호인들도 이제는 청구이보에 대한 미련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언 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무림인들은 단서, 옥액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욕심과 집착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에...!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9

 

           불의의 사고

 

 

복우산의 서북쪽은 칼날을 세운 듯 험한 봉우리들이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다.

그 봉우리들 남쪽에 정파백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천무맹이 자리하고 있다.

때는 늦여름의 오후다.

음습한 비구름이 복우산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휘익!

험하기 이를 데 없는 복우산의 바위 봉우리들 사이를 나는 듯이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헝클어진 봉두난발에 다 헤어진 남루한 의복을 입었으나 눈빛만은 영기로 총총하게 빛나고 있는 소년...

바로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신개령에서 천면음마 등천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닷새 만에 복우산에 이르렀다.

열흘이 걸릴 것으로 예정했던 복우산까지 닷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화마의 경신술 덕분이었다.

탐화비록에 수록되어있는 축지성촌(縮地成寸)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실술이다.

완전히 연마하면 이름 그대로 축지법(縮地法)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게 축지성촌이다..

고검추는 복우산까지 오는 동안 꾸준히 축지성촌을 연마해왔다.

아직은 입문한 수준이지만 걷는 속도가 전과 비교했을 때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휘익! 파앗!

고검추는 복우산의 험준한 산봉우리들 사이를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치달렸다.

(거의 다 왔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호천무맹이다.)

바람처럼 달리던 고검추는 앞쪽에 거대한 병풍처럼 서있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오는 도중 심마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호천무맹은 그 봉우리를 등진 채 자리하고 있다.

고검추가 호천무맹의 앞쪽이 아니라 뒷쪽에 자리한 험한 봉우리로 접근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생부 철사자 고창룡은 호천무맹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물론 십칠 년 전 벌어진 그 치욕적인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개입된 듯한 심증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검추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아직은 자신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임을 떳떳이 밝힐 상황이 못 된다.

그래서 고검추는 은밀하게 호천무맹에 잠입하여 고현경을 만나려는 것이다.

헌데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고검추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흐윽... ... 틀렸는가?"

어디선가 여인의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와 고검추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이 산중에 웬 여인의 신음소리란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잠시 후 고검추는 높은 단애로 둘러싸인 은밀한 계곡에 이르렀다.

(!)

헌데 무심코 단애 아래를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눈을 치떴다.

그와 함께 그의 얼굴은 단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인 계곡 끝에는 그리 크지 않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높이가 오장쯤인 폭포 아래에는 원형의 연못이 형성되어 있다.

"... 으으! 도저히... 못 견디겠다."

지금 그 연못에는 한 여인이 허리까지 잠긴 채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 사고(師姑)!)

몸에 연신 물을 끼얹고 있는 그 여인을 본 고검추는 숨이 턱 막혔다.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아버지의 사매이며 사촌누이이기도 한 철봉황 고현경이었기 때문이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화에 시달리던 고현경은 복우산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연못으로 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촤아! !

고현경은 온몸 구석구석에 물을 끼얹으며 꿇어 오르는 욕화를 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도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흐윽... ... 이걸로는 안돼!"

마침내 고현경은 참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한계에 이르러 본능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몸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진 자극으로 인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부작용만 생길 뿐이다.

이제...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결국 고현경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이 되었다.

뜨거워진 몸을 식혀줄 가능성이 있는 마지막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눈이 풀린 고현경은 비틀거리며 연못 밖으로 나왔다.

(... 들키면 안된다!)

충격에 휩싸인 채 연못을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급히 근처 바위 뒤로 숨었다.

연못에서 나온 고현경은 연못가에 놓여있는 널찍한 바위 위에 무너지듯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민밍한 치태를 시작했다.

(... 보면 안된다!)

고검추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복우산으로 오는 동안 귀동냥을 통해서 자신의 생부 고창룡과 고현경이 단순한 동문이 아니라 사촌지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현경은 사고이기 전에 당고모(堂姑母;아버지의 사촌누이)인 집안 어른이다.

조카가 되어 당고모의 치태를 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걸 알면서도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사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익숙하구나.)

그와 함께 고검추는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비록 도도하고 냉철해서 고현경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젊은 여자다.

몸이 뜨거워져 견딜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럼 그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고현경의 손길이 능란하고 거리낌이 없는 데에는 그런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달구고 있는 욕정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 좋지 않다!)

철봉황 고현경의 치태를 훔쳐보는 고검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검추도 고현경의 상태를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완전히 잃을 줄은 몰랐다.

제발... 사형... 사형! 저 좀 어떻게...!”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고현경의 입에서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이 토해내는 것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고는 사촌오빠이기도 한 아버지를 짝사랑했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이 토해내는 신음을 통해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 고창룡을 연모했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에도 고현경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 저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

그걸 확인하고 다급해진 고검추는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고현경의 상태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서둘러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연못 근처에 이른 고검추는 숨이 콱 막혔다.

가까이에서 본 고현경의 치태가 너무도 민망하다.

고현경의 치태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되자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침착... 침착해야한다.)

고검추는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상의 속을 더듬었다.

다시 꺼낸 고검추의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 은제상자 안에는 수십 개의 은침(銀針)이 들어 있었다.

고검추가 복우산으로 오는 도중에 약방에 들려 구한 침이었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려면 그 은침을 정해진 순서대로 고현경의 혈도에 찔러야만 했다.

(... 우선 마혈을 찔러 진정을 시켜야만 제독술(除毒術)을 시전 할 수 있다.)

!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고현경의 가슴 근처에 자리한 마혈을 침으로 찔렀다.

!

하지만 고현경의 살갗에 닿는 순간 강력한 반진력이 고검추의 손가락 끝을 강타했다.

"!"

고검추는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 정말 강하신 분이다."

고검추는 그제서야 고현경이 은발마희 옥여상 못지않은 강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고검추는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이토록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고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윽... 사형!"

돌연 고현경이 와락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

고검추는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고현경은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뜨겁게 할딱거렸다.

"... 사형! 현경이를 제발... 빨리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악!"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아차...)

고검추는 당황했다.

고현경이 자신을 부친인 고창룡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부자지간이므로 고검추는 당연히 고창룡을 닮았다.

게다가 고현경은 끔찍한 욕화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그녀가 고검추를 고창룡으로 오인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 사고. 저는 선부가 아닙니다."

고검추는 당황하며 고현경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쥐고 있는 고현경의 손은 강철 족쇄같이 요지부동이었다.

"흐윽... ... 너무 하세요 사형!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현경이를 마다하시다니요."

그녀는 오열하며 고검추를 와락 끌어안았다.

(허억!)

얼떨결에 철봉황 고현경의 몸에 올라타게 된 고검추는 전율했다.

몸 아래 느껴지는 고현경의 알몸이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 어서... 제발 현경이를... 사형의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고현경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사지로 고검추를 휘감으며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고검추의 몸도 의지와 상관없이 달아올랐다.

"... 이러시면 안됩니다 사고!"

당황한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떨어지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강철같은 고현경의 팔 다리에 휘감겨 있어서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검추의 하의는 고현경의 손과 발에 의해 단번에 벗겨졌다.

순간 물기에 젖은 서늘한, 그러면서도 너무도 매끈하고 부드러운 고현경의 피부가 느껴졌다.

(... 안돼. 이분은 아버지의 동문 사매시다! 핏줄로는 당고모고...)

고검추는 이를 악물며 본능의 충동과 맞서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저항이었다.

고현경은 결국 고검추를 상대로 뜻을 이루었다.

쿠쿠쿵!

강제로 한 몸이 되는 순간 고검추의 귓전으로 천둥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 끝났다!)

고검추는 자신의 일부가 더 할 수 없이 뜨거운 늪으로 빨려 들어가며 절망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고검추는 동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첫 경험인 고현경도 고검추를 받아들이며 작살에 꿰뚤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고현경은 고검추를 부여안은 채 격렬한 요분질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려 고검추는 아득히 정신을 잃어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

 

               끈질긴 추적자(追跡者)(2)

 

 

임주은은 근 한 달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탁본을 옮겨 적었었다.

탁본의 글자들은 아주 작아서 알아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구결들을 옮겨 적자니 신경의 소모가 다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내공을 익힌 몸인지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헌데 오늘 밤 임청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더해 자신의 마음까지 울적해지면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덜컥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의원을 데리고 오겠어.”

임청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가지마.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마.”

임청우는 애원하는 심주은의 눈동자를 보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곁에 누웠다.

맞닿은 몸이 불같이 뜨거웠다.

심주은은 갑갑한 듯이 옷을 풀어헤쳤다. 이미 정신은 거의 잃어버린 듯했다.

헉헉!”

심주은은 고열에 신음하며 임청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거추장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쳐서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풋풋한 소녀의 살 냄새가 임청우의 코를 자극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꼭 끌어안은 채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이마를 불어서 식히고, 벌겋게 상기된 가슴을 후후 불어서 식혔다.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고열에 신음하던 심주은이 헛것이 보이는 듯 손을 휘저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부! 약속을 꼭 지키겠어요. 꼭이요.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진 않겠어요.”

사부를 소리쳐 부르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제발 날 잡아가지 마세요. ... 난 아버지를 위해 희생당하고 싶진 않아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난 나대로 살아가겠어요!”

고개를 연신 도리질하면서 심주은은 뱀처럼 임청우의 몸을 휘감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의 몸도 어느덧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 심주은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훅훅 불어서 몸을 식혀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였다.

이봐 친구! 몹시 급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천장에서 굵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임청우는 흠칫하며 심주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자기 몸으로 심주은의 알몸을 가려준 임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약을 가진 게 있소? 천궁과 당귀, 구기근 등이 들어있는...”

호오! 열을 내리는 약을 말하는군. 어디 보자... ()장로가 억지로 주다시피한 약이 어디 있기는 있을 텐데...”

말소리가 다시 천장에서 들려왔다.

한데, 자네 부인인가?”

임청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

대답대신 천장을 뚫고 무엇인가 임청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임청우는 왼손을 휘둘러 재빨리 그것을 나꿔챘다.

한 알의 단약이었다.

나 말인가? 하하하! 말하지 않겠네. 자네 부인을 훔쳐봤으니 복수하려고 할 게 뻔한데 내가 왜 말하겠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게. 내가 본 건 자네 부인의 얼굴 밖에는 없으니까. 하하하!”

그 인물은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력이 충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도 될 것같았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흔들면서 입을 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이를 악다물고 숨을 쌕쌕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아무리 입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임청우는 단약을 자신의 입안에 넣어 녹인 다음 심주은의 입술 속으로 침과 함께 흘려 넣어 주었다.

 

***

 

새벽이 되자 빗발이 가늘어졌다.

임청우는 곤히 잠든 심주은의 알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발그레한 심주은의 뺨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가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알몸으로 안겨들던 심주은의 모습이 가득했다.

품속에서 몽선도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척포... 넌 오래 살았으니 아는 게 많겠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마 알고 있겠지?”

척포가 고개를 내밀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하느냐는 듯이 다시 들어가 버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건달에 불과하다. 막연히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임청우는 생각에 잠겼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잠룡물용(潛龍勿用),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 했으니 지금의 나는 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러야 하는 잠룡과 같다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갈고 닦는데 힘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여색(女色)을 가장 경계해야 하고 중년에는 의욕(意慾)이 과한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욕심(慾心)이 많은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주은을 피치 못해 잠시 안았는데도 마음이 이다지도 흔들렸으니 그 말은 과연 옳다. 여색을 경계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가 없겠구나.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자고로 영웅의 무덤은 미녀의 가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임청우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귀를 쫑긋했다.

아이쿠! 스님! 지금 방마다 살펴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러시면 저희 집은 장사를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주인의 음성이었다. 벌써 일어나서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셋째, 그놈이 말이 많군 그래. 알아듣게 이야기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임청우의 귀에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든 노파의 것인데 여전히 낭랑한 느낌이 깃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이다!)

임청우는 벌떡 일어섰다.

귓구멍이 좁아서 그런 모양이오.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 것 같소.”

음산한 사내의 음성과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객점을 울렸다. 주인이 아마도 귀를 잘리거나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객점이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야한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품에 집어넣고 심주은 곁으로 달려갔다.

심주은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임청우는 옷가지와 함께 이불로 심주은을 둘둘 말아서 안아들었다.

이어 객점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임청우는 문득 그녀의 탁본에 생각이 미쳤다.

베개 밑을 들춘 임청우는 기름종이에 싸인 탁본과 책을 꺼내 품속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노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놈은 무조건 죽여 버려라!”

누님의 말씀대로 하겠소.”

늙은 거지의 대답이다.

 

새벽같이 객잔에 들이닥친 자들은 바로 심주은을 찾아다니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우두머리는 심주은으로부터 기()라고 불린 노파였다. 이 노파는 심주은처럼 한 가닥의 천잠사를 무기로 쓰는데 수법이 잔혹, 악랄하여 적의 목을 끊어버리는 데 명수였다.

두번째는 걸()이라는 거지로 술에 내공을 불어넣어 쏘아 보내는 주전신공(酒箭神功)을 달통한 자였다. 그의 주전신공은 특이하여 술은 완전한 화살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승()으로 세 사람 중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자였다. 수십 종의 괴이한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하나하나가 신병이기와도 같았다.

종남산의 첫 만남에서 기, , 승은 우협의 명성에 눌려 임청우를 포기하고 도망쳤었다.

그렇긴 하지만 세 사람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 무공에 있어서는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에 비해 그다지 뒤진다고 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휘익!

임청우는 이불로 감싼 심주은을 안고 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통해 객실을 뛰쳐나간 임청우는 단번에 맞은 편 건물 지붕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다른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빗속을 내달렸다.

배운 적이 없어서 임청우는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력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달한지라 임청우의 달음박질은 웬만한 고수가 펼치는 경신술보다도 오히려 빨랐다.

 

기걸승의 삼인은 심주은의 종적을 쫓아서 남양의 객점까지 왔었다.

사실 심주은의 몸에서는 만리향의 향기가 끊이지 않고 풍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만리향의 향기를 맡아왔던 세 사람이 심주은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원래 심주은의 몸에서 풍겨나는 만리향은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혹시 적에 의해 유괴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심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적이 심주은을 유괴해간다고 하더라도 만리향의 향기 때문에 금방 탄로가 나고 말 것이다.

한데, 그 만리향이 이제는 가출한 심주은에게로 그녀 아버지의 수하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걸승 세 사람은 만리향의 향기를 쫓아 객점에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을 윽박질러 찾아보려 하다가 주인이 반대하는 통에 그의 한쪽 고막을 터뜨리고 객점을 수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파는 몸을 훌쩍 날려 이층의 계단으로 올랐다.

이미 중은 객실의 방문들을 열어젖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밖에서부터 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놈이 도망쳤소. 쫓아갈 테니 여기 일은 누님이 알아서 해주시오.”

 

***

 

새벽이지만 성문은 벌써 열려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비 때문에 발이 묶여있던 상인들을 관부에서 배려한 것이다.

거지는 일찍 열린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임청우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임청우의 발걸음이 비록 빠르기는 했지만 일류고수인 거지가 볼 때에는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거지는 삽시에 임청우의 오장 뒤에까지 따라 붙으며 말했다.

흐흐흐... 성문을 나가는 순간이 네놈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임청우는 거지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거지는 자신의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가 임청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임청우가 심주은을 안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처럼 느긋하게 행동을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긴 해도 거지는 임청우가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쫙 벌렸다.

슈앙!

그러자 거지의 입에서 우유빛의 술 화살, 주전(酒箭)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와 임청우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임청우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듣는 즉시 왼손에 공력을 모아서 뒤로 휘둘렀다. 비록 공력을 발출할 수는 없지만 모으는 일은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다.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실린 임청우의 손이 휘둘러지면서 거지가 쏘아 보낸 주전은 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거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그의 주전을 맨손으로 막아낸 인물은 없었다.

거지의 주전은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보다 오히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어떤 놈이기에 저다지도 공력이 강하단 말인가?)

세치 두께의 철판도 거뜬히 뚫을 수 있는 주전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러 흩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거지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저토록 대단한 공력을 지닌 놈이 도망은 왜 간단 말인가?)

주전을 간단히 받아내는 가공할 공력을 가진 자가 경공술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

 

            끈질긴 추적자(追跡者)(1)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

타는 듯한 여름이 거의 끝이 날 무렵에서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이는 바람에도 부풀부풀 일어나던 땅거죽의 먼지는 쏟아지는 비에 흙탕물이 되어 씻겨 내려갔다.

갈라졌던 연못의 바닥은 물을 머금으며 조갯살처럼 불어올라 틈을 매웠다.

강렬한 햇빛에 시들다 못해 검게 타들어가던 나무들도 춤추듯이 가지를 너울대며 일어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상은 폭우 속에서 조용한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접경에 자리한 남양(南陽)을 거센 빗줄기가 난타하기 시작한 후로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성안의 백성들의 환호도 이제는 잠잠해졌으며, 관민이 모두 지붕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주루와 기루, 객점들이 열 지어 서있는 남양의 번화가에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손님은 그들의 집안에 충분하리만큼 있었기 때문이다.

()과 성() 사이를 넘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행인들이 모두 객점에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가뭄 끝에 홍수 진다더니... 이러다가 수재(水災)를 겪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남양의 번화가에 자리한 객점 이층 객실 창가에 서성이던 임청우가 걱정스런 듯이 입을 열었다.

거리를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새까맣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심심하면 내 일이나 도와줘.”

탁자에 앉아서 하얀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적어가던 심주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임청우는 탁자로 다가가서 탁본을 뜬 화선지를 펼쳐 들었다.

심주은이 탁본을 편히 볼 수 있게 해준 임청우는 눈을 다시 창문쪽으로 돌렸다.

비가 쏟아져도 너무 많이 쏟아진다.

이정도가 되면 이제 우()가 아니라 염려스러울 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일, 언제쯤 끝나지?”

임청우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심주은은 말 시키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제 이틀만 더 하면 끝날 거야.”

임청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종남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짜기를 나온 후 임청우와 심주은은 이곳 남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임청우가 대안탑에서 횡재(?)한 금과 은으로 객점의 가장 좋은 방에 투숙했다.

그후 한 달 동안 심주은은 음식까지 방으로 시켜 먹으면서 탁본해온 신녀문의 무공을 책으로 엮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탁본의 글씨들은 깨알보다는 크다고 할지라도 개미보다는 작았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일 뿐 아니라 물이라도 묻는 날에는 글씨가 흐려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땀에도 글씨가 손상될 수 있었다.

심주은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무공들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그러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단단한 책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를 덩달아서 두문불출하게 된 임청우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꾹 참고 오늘까지 견디어 왔다.

물론 그동안 임청우에게도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주은이 모르는 사이에 그는 용조층층공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불심연화지의 수련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무공은 아직까지는 무공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연화지는 이마 위에 있는 신정혈(神廷穴)에 공력을 쌓는 것인 만큼 다른 무공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비록 임청우의 공력이 상당히 늘었다고 하지만 불심연화지를 밖으로 발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성(三成) 이상의 성취를 필요로 한다.

또 용조층층공의 운용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순수한 내공일 뿐이다.

권법이나 장법 등의 무공과 연계되지 못한다면 용조층층공은 알 속에 있는 닭이나 마찬가지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저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청우의 공력이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임청우의 지금 공력은 철선동시의 죽기 전 공력보다 오히려 삼할 정도 더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임청우가 내공을 발출할 수 있는 무공을 단 한 가지도 익히지 못한 때문이었다.

진기가 실오라기만큼도 흩어지거나 빠져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몸속을 돌아다니기만 한 결과 임청우는 공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은 것이다.

 

생각하기와 탁본을 들여다보기, 그리고 옮겨 쓰기를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는 심주은을 바라보던 임청우는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동안 보고들은 견문으로만도 무공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된 그다.

임청우는 자기가 익힌 두 가지의 무공 모두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은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해서 알 수도 있을 것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

임청우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그가 지닌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는 순수한 내공일 뿐이고 다른 하나는 특이한 공력으로 특이하게 운용하는 수법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임청우는 다시 심주은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탁본을 뜨던 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간 그는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임청우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떠오르던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잡힐 듯 말 듯한 영감...

하지만 그것은 좀체 잡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이 확실하게 떠올라주기를 기다렸다.

심주은은 임청우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얼굴빛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들었나? )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계속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는 것이 주화입마에 든 증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내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심주은은 생각을 바꾸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식 가져 왔습니다.”

문 밖에서 점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식사를 가져다주는 점원이었다.

문 열렸어.”

심주은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면서 임청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덜컹 열리는 순간 임청우는 잡힐듯하던 빛이 일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안에 넣었던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향긋한 음식냄새와 함께 점원이 재주 좋게 몇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들고 들어와 탁자에 놓았다.

그제서야 심주은은 임청우의 표정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당황했다. 일생에 있어서 그같은 순간은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인데 그것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 그만두자 그만둬.”

임청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탁자로 걸어갔다.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누구에게 한 말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에 씻기듯이 영감은 사라져 버렸고 식탁위의 음식들도 임청우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심주은은 그런 임청우의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같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임청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

 

밤이 깊어갔다.

탁본을 옮겨 적던 심주은은 탁본과 책을 함께 싸서 둥글게 만 후에 침상의 베개 밑에 넣었다.

임청우는 마치 불가의 고승처럼 좌관(坐觀)을 하고 창가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지 않을 거야?”

심주은이 침상가에서 물었다.

임청우는 대답대신 일어나서 불을 껐다.

그의 잠 자리는 침상아래의 바닥이었다.

비록 억지 혼례를 올린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한 이불을 덮어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임청우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침상위의 베개를 하나 끌어내리며 바닥에 누웠다.

그때 부드러워서 비단결같은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여기서 자.”

심주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한 후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임청우는 그녀의 저의를 알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심주은은 등을 보인 채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지만...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못해. 심지어 황제(皇帝)조차도...”

황제조차 그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심주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심주은의 손이 그의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한데... 아버진 나를 황제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어. 황제는 이미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는데...”

심주은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진 기(), (), (), 그 세 사람 외에도 부하들을 많이 풀었을 거야. 하지만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

만약... 그들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죽여버리겠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심주은의 말이었지만 섬뜩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사연이 복잡하구나.)

임청우는 자신이 몰랐던 심주은의 면모를 엿본 기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한 사람을 찾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고, 천하를 제패할 마음도 있다고 하더니... 이젠 아버지가 황제에게 자기를 시집보내려 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심주은의 본심을 엿본 임청우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와 혼인을 한 것은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주은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 정신을 모아야할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틀림없이 마가 침입하게 될 텐데...)

걱정이 된 임청우는 심주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풍겨나는 위엄과 고귀한 자태로 보아 그녀의 신분이 아주 높다는 것은 익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심주은의 신분 따위는 임청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만물제동이라는 이치에 따라서 그는 만물의 같은 점을 중시하는 터이기 때문이다.

임주은은 임청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고 떨리는 거지? 몹시 추워.”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손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8

 

               거미줄에 걸린 봉황

 

 

-복우산(伏牛山)!

 

그 모습이 마치 엎드려 있는 소와 같다고 하여 복우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하남성의 명산이다.

복우산 동북방 오백여 리에는 저 유명한 중원 무림의 태두 소림사(少林寺)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중원 무림의 심장부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전부터 무림의 중심은 숭산에서 복우산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복우산에 중원 무림 최대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천무맹!

 

바로 그들이다.

비록 십칠 년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봉문하다시피 했으나 여전히 호천무맹이 중원 무림의 정점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구파일방등 전통의 명문들, 각기 독특한 절기를 발전시켜온 삼문육가(三門六家), 정파백도를 자처하는 천여 개의 문파들이 호천무맹에 속해있다.

구성인원 수로 따지자면 거의 백만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호천무맹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다.

그 방대한 조직의 심장부가 바로 이곳 복우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호천무맹은 변황 무림에 대항할 목적으로 세워졌었다.

삼십여 년 전 변황 무림은 서역 출신의 한 인물에 의해 일통되었었다.

 

-신월지존(新月至尊)!

 

회회교(回回敎;이슬람)가 배출한 최강의 무인이다.

신월지존이라는 별호는 회회교가 초승달, 즉 신월(新月)을 상징으로 삼는 데에서 생겼다.

사실 신월지존이 회회교 출신중 최강자이긴 했어도 서역 무림의 최강자는 아니었다. 사패천 중 한 세력이 서역을 기반으로 번성해왔기 때문이다.

사방무신 중 서호(西虎)의 후손들이 세운 태양성전(太陽聖殿)이 바로 그들이다.

무공만으로 평가하면 신월지존은 태양성전의 십대고수들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월지존이 서역 무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인물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었다.

 

-티무르(鐵木兒)!

 

제이(第二)의 징기즈칸을 자처했던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정복군주 티무르가 신월지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신월지존의 이름은 샤르흐이며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제국의 제이대 황제가 된다.

샤르흐는 티무르의 넷째 아들이라 제국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서역 무림을 지배하는 데 주력했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태양성전조차도 티무르제국과 충돌하는 데 부담을 느껴 샤르흐에게 복속했을 정도였다.

샤르흐는 서역 무림을 일통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신월동맹(新月同盟)!

 

회회교를 바탕으로 결성된 사상 최강의 세력이다.

회회교에 속한 거의 모든 무림 세력이 신월동맹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월동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중원 무림의 정복이었다.

샤르흐의 아버지 티무르는 서역과 천축은 물론 멀리 대식국까지 정복했었다.

그 티무르의 마지막 목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을 중원에서 몰아낸 명나라에 복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티무르는 넷째 아들 샤르흐를 전위로 세웠다.

본격적인 명나라 정벌에 앞서 신월동맹으로 하여금 먼저 중원 무림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중원 무림으로서는 명운이 걸린 일대위기였다.

이에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신월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통합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흑도, 백도, 녹림, 하오문 등의 이질적인 성격 때문에 파벌을 초월한 중원 무림의 결맹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같은 길을 걷던 정파백도의 문파들만으로 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호천무맹이었다.

호천무맹의 맹주는 십자검존 종극이란 인물이었다.

십자검존은 전설적인 검법의 명가 십자검막(十字劒幕)의 후예로 호천무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당시 십자검존 종극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다.

비록 초절한 검법을 지녔다지만 정파 무림인들을 영도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본래 호천무맹의 맹주로는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공인되던 소림사의 장로 철목신승(鐵木神僧)이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철목신승은 자신이 출가인임을 이유로 들어 맹주의 자리를 사양했다.

그리하여 십자검존 종극이 호천무맹의 맹주가 된 것이다.

십자검존의 영도 하에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의 공세를 막아내어 중원 무림의 위기를 해소했다.

덕분에 호천무맹은 중원 무림의 보루로 인정받았으며 맹주인 십자검존 종극도 중원제일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것이 삼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십칠 년 전 예의 그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을 좌절시키고 얻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다.

그 후 호천무맹은 거의 봉문하다시피 했다.

그 틈을 탄 사마외도의 세력들이 창궐하여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십칠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온갖 세력들로 인해 무림은 대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마천루가 마도 무림의 맹주로 부상했고 사신각이라는 암살조직이 횡행하며 살육을 일삼았다.

심지어 화류계의 기녀와 매춘부들까지 야화맹(夜花盟)이라는 조직을 이루어 자신들의 권익을 부르짖을 정도였다.

무림의 말세가 올 것일까?

뜻있는 강호인들은 도의와 명분이 상실된 무림의 실태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십칠 년의 기나긴 잠에 빠져 있던 호천무맹 내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철봉황이라는 여걸이 나타나 호천무맹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검존이 거둔 네 명의 제자 중 막내인 철봉황 고현경은 사실상 은퇴한 스승을 대신하여 호천무맹을 영도하고 있다.

먼저 철봉황 고현경은 정파백도의 젊은 인재들을 모아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란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총사(總士)가 되었다.

호천무무맹에 속한 문파와 가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철혈호천위의 전력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증강되고 있는 중이다.

천여 명의 일류고수들로 이루어졌다는 철혈호천위가 강호로 나오면 어떤 세력도 맞서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일개 여인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천무맹의 이같은 용틀임은 무림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일 호천무맹이 삼십여 년 전의 패기와 단결력을 회복한다면 그동안 무림을 농단하던 여타 세력들은 아침안개처럼 스러져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의 각 세력들은 숨을 죽인 채 호천무맹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호천무맹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존세력들이 사신각에 청탁하여 철봉황 고현경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았다.

호천무맹이라는 거인의 부활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

 

"흐윽! ...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여인의 신음소리가 그리 넓지 않은 석실을 울리고 있었다.

석실 내부는 몇 자루의 장검이 벽에 걸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어 투박해 보인다.

그 석실 가운데에 놓인 좌대 위에는 흑의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은 철봉황 고현경이었다.

철봉황 고현경은 지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은 구워진 가재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으며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에 흠씬 젖은 검은 옷에 휘감긴 탄력 넘치는 육체는 학질에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린다.

"흐으윽! ... 그때 천면음마란 놈이 무엇인가 수작을 부렸음이 분명하다."

고현경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천면음마의 저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고현경은 삼십여 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몰두해 왔었다.

그녀의 지난 삶 자체가 수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녀는 이성과 교제한 경험이 없다.

물론 고현경에게도 가슴이 설레였던 기억은 있었다.

자신보다 십여 살 연상인 동문의 사형을 남몰래 연모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사매 정도로만 여길 뿐 전혀 이성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현경은 가볍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그 사형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철사자 고창룡-!

그가 바로 고현경의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던 연모의 대상이었다.

사실 고창룡과 고현경은 사촌 남매 사이였다.

두 사람의 집안은 산서(山西)성의 명문가인 고가장(高家莊)이었는데 신월동맹의 중원 침공 때 멸문지화를 당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고검추는 당시 열다섯 살 소년이었고 고현경은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 계집아이였었다.

십자검존은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두 남매를 가엾이 여겨 함께 제자로 삼았었다.

물론 십자검존이 단순히 연민의 감정으로 두 남매를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고창룡과 고현경이 남자와 여자들 중에서 최고의 자질을 지닌 기재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두 남매의 자질에 감탄한 십자검존은 철사자와 철봉황이라는 별호를 직접 지어주었었다.

비록 사촌지간이었으나 고현경은 고창룡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유일한 피붙이이기도 해서 의지하다보니 고창룡은 어느덧 고현경에게 하늘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를 겁탈하고 자살을 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현경이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형언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날 이후로 고현경은 이성에 대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 채 무공수련에만 전념해왔다.

그 결과 그녀는 삼십대 중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우내팔강에 드는 고수가 되었다.

여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각고 연마한 성취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잃어 버렸던 본능의 유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탕음마고 때문이었다.

천면음마의 말대로 탕음마고는 고현경의 원영지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에 고현경의 육체는 부족해진 원영지기를 이성과의 교접으로 채우기를 간구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이...

"으음... 방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 간악한 말종에게 수작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고 척살했어야만 했다."

고현경은 도도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얼굴을 이지러뜨리며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정은 굶주림이나 갈증과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과의 교접을 갈구하는 욕정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다.

너무도 강렬한 욕정으로 인해 고현경의 이성이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불구덩에 빠지기라도 한 듯 뜨거워진 몸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던져 범해지고 싶은 충동이 고현경은 사로잡고 있었다.

(... 위험하다. 이러다가 사내라면 아무에게나 가랑이를 벌리는 탕녀가 될지도 모른다.)

고현경은 흩어지려는 이성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끝내 욕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자결해야한다. 나 자신과 사모님의 명예를 위해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도리 깊은 곳에서 치미는 욕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렬해질 뿐이었다.

"으음... 찬물이라도 뒤집어써야겠다."

고현경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좌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독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서 힘겹게 석실을 나섰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8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3)

 

 

바깥의 계곡도 어두웠지만 동굴 안쪽은 더욱 깜깜하다.

심주은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정말 칠흑같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대안탑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용조층층공을 몸속에 쌓게 된 이후로 어둠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임청우였다.

하지만 이 동굴의 짙은 어둠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내민 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로 십삼보, ()으로 육보, () 구보, () 삼보...”

앞서가는 심주은은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임청우는 혹시 어둠 속에서 심주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당겨지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심주은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임청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심주은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심주은이 문득 멈추어 섰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임청우의 손목을 잡아서 자기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내게서 떨어지면 안돼.”

임청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며 혼자 앞서 갈 때는 언제고 이제 다 온 듯하자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

하지만 그 직후 임청우는 발밑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원래 들이키던 숨을 가쁘게 빨아들였다.

끼에에엑!”

그 바람에 자기가 듣기에도 흉한 소리가 목구멍으로 터져 나왔다.

쐐액!

임청우의 몸이 돌덩이처럼 세차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심주은의 맥박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이번에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다 온 모양이야.”

심주은이 속삭였다.

휘청!

순간 두 사람은 몸은 공중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밑을 떠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주위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헌데 어둠이 그 빛에 밀려 물러가며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자신들 주변에 빙 둘러 서있는 것이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임청우는 긴장하며 그 그림자들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수십 겹으로 휘감고 있던 휘장이 걷혀지듯 어둠이 물러가며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자들이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람이다!)

이윽고 임청우는 자신과 심주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아직 모습은 완연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궁장차림을 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심주은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하며 낭낭한 음성으로 외쳤다.

소녀 심주은,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로서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조사이신 구천신녀(九天神女)님을 뵙습니다.”

임청우는 그녀가 절을 하자 덩달아 절을 했다.

그런데 심주은은 임청우가 절을 할 때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절을 받은 사람이 답례하는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일어서다니...

특별히 예의를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지만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가 완연히 밝아지며 아홉 여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진짜 사람이 아니라 아홉 개의 인형이었구나.)

임청우와 심주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었다.

아홉 개의 인형은 모두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배꽃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형들의 모습이 그 정도이니 그 인형의 원형이었던 여인은 얼마나 아름답고 요염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임청우와 심주은이 도착한 석실에는 그 아홉 개의 인형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의 중앙에는 임청우와 심주은이 내려온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형들의 뒤쪽 석벽에는 인형과 똑 같은 얼굴에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수 만 가지의 화려한 꽃들의 그림이 나무 모양을 한 세 개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임청우가 물었다.

설마 저 그림이 이 밖에 있는 계곡을 그린 것은 아니겠지?”

임청우가 물은 것은 믿기지 않아서였다.

세 개의 봉우리로 보아 벽에 그려진 풍경은 바로 이 동부 밖의 계곡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부 밖의 계곡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 늪지대 주변에 깔려 있을 뿐 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벽화에는 무수하게 많은 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해.”

심주은이 인형들의 새끼손가락들을 천잠사로 이어 묶으며 말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황하의 물이 조금씩 이 계곡으로 스며들어서 급기야는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원래 이곳에 있던 신녀문도 물에 잠겨 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남쪽의 무산으로 옮겨가야 했었다고 해.”

임청우가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물에 잠기기 전에 이 계곡에 신녀문이란 문파가 있었다면 이곳은 혹시...?”

신녀문의 조사동(祖師洞)이야. 폐쇄되고 난 후 여기 들어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야.”

천잠사로 아홉 인형들의 손가락을 각기 하나씩 묶은 심주은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르르르!

인형들은 손가락이 각기 조금씩 젖혀지면서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걸 확인한 심주은이 빠르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신녀들의 등을 봐. 보고서 외울 수 있는 한 많이 외우도록 해! 나중엔 아무리 사정해도 가르쳐 주지 않을 테니까.”

“...?”

임청우가 무슨 소린가 하는데 팔을 내린 인형들이 빙글 돌면서 등을 보였다.

스르르!

그리고 인형들이 걸치고 있던 궁장들이 어떤 힘에 의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궁장이 흘러내리고 백옥을 깎아 만든 인형들의 눈부신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백옥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의 등에는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이 음각되어있었다.

심주은은 서둘러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화선지와 먹물이 들어있는 대나무 연적을 꺼냈다.

그리고는 인형들의 등에 먹물을 바르고 탁본(濯本)을 뜨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홉 장의 탁본이 만들어졌고 그녀는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임청우는 가까이에 있는 인형의 등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글들이 심오한 무공구결과 신비한 이술(異術)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많이 안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알고 있었다.

하나를 알아도 바로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미 임청우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빼어난 무공구결이 숨 쉬고 있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의 구결은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의 공력도 구결을 운용하기만 하면 따라서 몸속을 돈다.

임청우는 배움이 일천하여 무학의 지고한 이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뭔가를 배우고 이룬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굳어지기 전에 그 위에 또 다른 것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당장은 버티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래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무너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르게 올린 탑보다 오래 견딜 리는 만무하다.

천년을 가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세우고 역사에 남을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임청우다.

섣불리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청우가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백옥 인형들의 흘러내렸던 옷들이 다시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종아리를 지나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둔부를 거슬러서 옷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입혀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탁본한 화선지들을 재빨리 말아서 기름종이로 몇 겹으로 감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의 볼일은 다 끝났어. 나를 꽉 잡아! 신녀들은 뒷모습이지만 알몸을 본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스르르르!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옷이 입혀진 신녀들이 돌아서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암흑천지로 변하며 임청우와 심주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파앗!

두 사람은 강렬한 빛에 눈을 가렸다.

동굴 밖의 태양빛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판처럼 네모난 대리석들이 깔려있는 넓은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임청우에게 심주은이 속삭였다.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곳이야. 한걸음이라도 잘못 떼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아서 나가지 못해.”

들어올 때 칠흑처럼 어두웠던 곳은 복잡한 동굴이 아니라 바둑판처럼 넓은 광장이었던 것이다.

입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문이 열리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는 동안에는 입구가 사라지도록 만들어진 기관인 듯 했다.

심주은은 다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네모난 대리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똑 같이 걸었다.

심주은이 걸음을 떼면 따라서 발을 들었고, 그녀가 발을 딛으면 따라서 한걸음 옮겼다.

꾸불꾸불 걸어가며 삼십 여 번의 방향을 바꾼 후에야 두 사람은 벽과 붙어있는 마지막 대리석을 밟을 수 있었다.

그그긍!

그 대리석을 밟는 순간에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사방이 캄캄해졌다.

덜컥!

두 사람의 앞쪽에 있던 벽이 밖으로 넘어가며 출구가 생겨났다.

그들이 처음에 들어왔던 곳이었다.

심주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간이 조마조마했네.”

?”

임청우가 앞장서서 출구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실 난 조사님들을 속였거든.”

심주은이 얄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조사동은 한번 열리면 백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열 수 있어. 그런데 조사동에 들어온 제자는 백옥 인형들의 등에 적혀있는 무공과 술법들을 일각(一刻) 동안만 볼 수 있어. 얼마를 기억했든지 일각이 지난 후에는 우리처럼 쫓겨 올라오고 말아.”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드드드!

동굴을 나선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내딛자 넘어졌던 암벽이 다시 올라가면서 원래의 환상신녀의 그림이 나타났다.

임청우가 돌아보니 문을 여는 고리가 숨겨져 있던 바위도 어느 새 원상대로 회복되어 고리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 동안에 신녀문의 최고의 무공과 술법들을 얼마나 익힐 수 있겠어? 고작해야 한, 두 가지가 끽이지!”

심주은은 암벽에 새겨진 환상신녀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사부님이 그 사실을 일러주었을 때 이미 작심하고 있었어. 아예 탁본을 떠서 나오기로 말이야. 이제 신녀문의 모든 무공과 술법들은 내 손 안에 있는 거야!”

자랑스럽게 말하는 심주은을 보며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왜 그렇게 가슴을 졸였는지 알만 했다.

그렇게 무공을 익혀서 어디에 쓸려고?”

임청우가 묻자 심주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림제패(武林制覇)!”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5

 

            혈황(血皇) 등장!

 

 

(... 무슨 망상이냐? 아들 뻘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에게...!)

이검한을 대상으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던 나유라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책했다.

(너무 오래 굶었구나! 나무 오래 굶었어!)

나유라는 부끄러운 망상을 억지로 떨쳐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의를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저 아이가 한 말을 믿어야만 하나? 내 몸이 흑혈맹호단의 아이들에게 더렵혀지기 전에 구했다는 말을...?)

얼마 전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는 나유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이지러졌다.

자신이 수족처럼 여기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유린당한 부분으로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전율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나유라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기절한 탓에 그 후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남편 아닌 외간 사내들의 손길이 몸에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나유라였다.

나유라는 아무래도 마음 속의 미심쩍은 부분을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자신의 몸은 더럽혀지기 전에 구원받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입술을 깨문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나신을 가리며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검한이라고 했느냐?”

이검한은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움찔했다.

비록 눈은 앞쪽을 보고 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을 등 뒤로 쏠려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나유라가 목욕을 마치고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유라의 음성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교가 계십니까 마마?”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린 이검한은 공손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네게 한 가지 확인해볼 일이 있다!”

나유라는 오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몸 위에 이검한의 적룡풍을 걸치고 있었다. 적룡풍 하나로 풍만한 나신을 감싼 그녀의 자태는 더할 수 없이 뇌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신에는 범접키 어려운 기품과 수백만 명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으로서의 위엄이 배어 있었다.

정말 내게 아무 일도 없었느냐?”

나유라는 형형한 눈으로 이검한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검한은 그녀의 그 싸늘하고도 찌르는 듯 강렬한 눈길에 움찔했다. 그렇기는 해도 나유라의 그같은 질문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 소생이 왜 거짓으로 아뢰겠습니까?”

이검한은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검한의 그같은 반응에 나유라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이검한을 추궁했다.

너를 낳아준 어머니의 정조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

그녀의 말에 이검한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머니...!

이검한은 지금껏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도 모르는 처지긴 해도 생모의 정조에 걸고 거짓 맹세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난감한데...)

이검한은 당황하는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즉답을 못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설마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게냐?”

이검한의 그같은 미심쩍은 태도에 나유라는 두 눈을 의혹으로 물들인 채 재차 추궁했다.

... 그게...”

이검한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을 꾸며내려고 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살았다!)

이검한의 두 눈이 갑자기 번뜩 빛났다.

스스스!

돌연 모래가 흐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 때문이다.

나유라도 움찔했다. 그녀 역시 누군가 녹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단 숨자!”

스윽!

누군가 녹원으로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린 나유라는 이검한에게 전음을 보내며 급히 한쪽에 서있는 고목 위로 날아올랐다. 그 고목은 키가 크고 가지와 잎사귀가 울창하여 아래쪽에서는 나무 위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휘릭!

이검한도 즉시 나유라의 뒤를 따라 그 고목 위로 날아올라갔다.

먼저 고목 위로 올라간 나유라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서 녹원 밖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 나유라 옆으로 내려서던 이검한은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순간적으로 훅 느껴지는 그윽한 살 냄새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때문이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검한은 이미 여체의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여자의 살내음을 맡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의 일부가 뜨거워진다.

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고목의 굵은 가지 위에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는 바람에 나유라의 오른쪽 다리는 거의 대부분 적룡풍 밖으로 드러나 있다.

종아리는 탄력이 넘치면서도 미끈하고 뽀얀 허벅지는 한 아름은 됨직하게 풍만하다.

두근!

나유라 옆쪽의 가지 위에 쪼그려 앉으며 곁눈질을 하던 이검한의 가슴이 세차게 뛴다.

적룡풍이 갈라진 사이로 오른쪽 다리가 거의 다 드러난 탓에 나유라의 사타구니 깊은 곳도 일부 엿보였기 때문이다.

흐드러진 한 쌍의 허벅지가 아래위로 엇갈리는 중심부의 둔덕은 황금빛 방초로 덮여있다.

하지만 나유라의 신경은 온통 녹원 밖을 향해 있는 상태인지라 자신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검한아! 이 가엾은 여자에게 딴 마음을 품기나 하고...!)

나유라의 도발적인 자태에 자기도 모르게 매혹되었던 이검한은 이내 자책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시야로 기이한 광경이 들어온 때문이다.

쿠쿠쿠쿠!

녹원 밖의 사막에 갑자기 불룩한 두둑이 생기더니 일직선으로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두더지가 땅속으로 길을 내며 다가오는 것처럼....

이검한보다 먼저 그 현상을 발견한 나유라가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써서 설명해주었다.

저것은 유사마부(流砂魔府)라는 신비문파의 독문무공인 토룡사행둔(土龍砂行遁)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사마부!)

나유라의 설명을 들은 이검한은 해연히 놀랐다. 그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품 속에 있는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을 어루만졌다.

(혹시 유사마부는 유사신령의 후손들이 세운 문파가 아닐까?)

이검한은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긴 두둑을 보며 염두를 굴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천 년도 전에 죽은 서역사천왕의 명맥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검한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쿠오오오!

돌연 모래가 허공으로 확 번지며 인간의 상반신이 모래 밖으로 불쑥 드러났다.

상반신을 모래 밖으로 드러낸 인물은 노인이었다. 음침하고 괴팍한 인상의 노인인데 늘 땅 속에서만 살아서인지 피부가 아주 창백했다.

노인은 양 손에 두더지 발 모양의 기형도구를 차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으로 모래를 파고 전진하는 듯했다.

오기는 제대로 찾아왔군!”

상반신을 밖으로 드러낸 노인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시력이 약한 듯 눈을 찡그리며 햇빛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부가 그 빌어먹을 놈보다 먼저 온 것일까?”

노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촤아!

이어 그는 하반신마저 완전히 모래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그렇지 않다. 본좌는 늙은이 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갑자기 호수 쪽에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 “...!”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이검한과 나유라는 동시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호수가에 한 명의 괴인이 굵은 고목을 등진 채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온통 시뻘건 피빛 천으로 휘감은...!

비단 옷의 색깔만 붉은 게 아니었다.

츠츠츠!

괴인의 몸 주위로는 핏빛의 안개같은 것이 칙칙하게 휘돌고 있었다.

나유라는 물론 이검한도 절정의 내가고수다. 그들보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은 서역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혈포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서운 고수다!)

이검한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괴인을 주시했다.

츠츠츠...

혈포인의 몸에서는 핏빛의 안개 뿐 아니라 섬뜩한 마기(魔氣)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 마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워지는 이검한과 나유라였다.

아연긴장한 두 사람은 숨을 멈추고 심장 박동도 극한까지 느리게 만들었다. 자칫 혈포인의 이목에 감지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때문이다.

혈포인보다 먼저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도 보기 드문 고수다. 단순히 내공만 따져도 노인은 이검한이나 나유라를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역시 혈포인이 흘려내는 음산한 기세에 주눅이 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자칭 혈황(血皇)이란 말종이냐?”

노인은 위축된 내심을 감추려는 듯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혈황!)

순간 이검한과 나유라는 경악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만큼 혈황이라는 이름은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신마풍운록 서열 이위(二位)!

 

혈황은 바로 저 신마풍운록에 고독마야 연남천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독천존, 유령마제, 태양신협등 사방무제(四方武帝)들보다도 앞 선 서열로 기록된 혈황은. 그러나 그의 신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

이름과 출신내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비밀에 쌓여있다.

누구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혈황이 신마풍운록의 서열이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했다.

혹자는 혈황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 했고 또 혹자는 그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 세력의 주인일 것으로 추측했다.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상 최강의 세력 마교(魔敎)의 당대 교주가 혈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혈황이 신마풍운록을 작성한 장본인일 거라는 말도 떠돌았다.

별 볼일 없는 어떤 인물이 자기만족을 위해 신마풍운록을 만들면서 자신에게 혈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서열이위로 올려놓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혈황은 신마풍운록에 이인자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혈황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혈황의 이름이 의외의 장소에서 거론된 것이다

 

(저자가 정말 고독할아버지에 이어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는 혈황일까?)

이검한은 필사적으로 흥분을 억누르며 혈포인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대단한 고수이긴 하다. 이모보다도 강해보이는 걸 보면...)

온몸이 칙칙한 피빛 노을에 뒤덮여 있는 혈포인을 살펴보며 이검한은 새삼 긴장했다.

고독마야와 누란왕후 흑요설, 현음마모를 제외한다면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을 능가하는 고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흐흐흐! 허세를 부릴 거 없다 지둔노조(地遁老祖)! 기왕 일찍 도착했으니 서로의 용무나 빨리 해결하면 되지 않겠느냐?”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이 음산한 음성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역시 저 노인의 지둔노조 유마조율(維魔朝律)이었구나!”

고목 위에 숨어서 보고 있던 나유라가 다시 전음입밀로 이검한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마마께서 아시는 사람입니까?”

이검한도 전음입밀을 써서 되물었다.

그렇다. 저 노괴는 당금의 서역무림에서 최강자들로 꼽히는 하토삼기(蝦土三奇)중 지둔노조다!”

나유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둔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8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2)

 

 

정신 차려! 이봐, 정신 차려!”

찰싹! 찰싹!

심주은은 임청우를 나무위로 끌어올려 놓고 뺨을 연신 때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데다가 늪 속에 잠겨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임청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주은은 손가락으로 임청우의 입과 코와 귀를 판 후에 가슴을 눌렀다.

몇 번 누르자 임청우의 입과 코로 진흙이 쿨럭쿨럭 흘러나왔다.

그러나 임청우는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뛰고 있던 맥박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임청우를 착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임청우와는 만난 지 채 하루도 안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이다.

하지만 충동적이긴 해도 혼례를 올렸으니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이윽고 결심을 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몸 위로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코를 입으로 물고 세게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임청우의 콧속에 들어차있던 진흙이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입안에 든 진흙을 뱉어내고 다시 임청우의 콧속에 든 진흙을 빨아내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자신이 임청우의 코를 물고 있긴 하지만 입맞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 사실에 심주은의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외간 사내와 살갗도 닿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코를 물고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런 게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자 차갑게 식어가던 임청우의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아오는 것같았다.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르길 얼마 후 푸! 소리와 함께 임청우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살아났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심주은은 진흙투성이의 몸으로 임청우에게 기댄 채 잠이 들고 말았다.

 

***

 

임청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방문이 없는 방 속에 누워있는 듯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하늘은 뿌옇게 보이기는 했지만 달도 없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것인가?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면 극락인가?)

임청우는 늪으로 떨어지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황의소녀 심주은을 생각하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을 생각해볼 때 자기보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임청우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뭔가가 자기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따뜻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심주은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지만 그래도 얼굴의 진흙은 깨끗이 닦아낸 모습이었다.

임청우는 한쪽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척포를 발견하고서야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계집애가 날 살렸겠구나.)

전후의 상황을 파악한 임청우는 감격하여 심주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 주변의 진흙이 떨어져 나가며 드러난 새하얀 볼...

새근새근 쉬는 듯 마는 듯 부드러운 숨결...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심주은의 입술로 가져갔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심주은의 입술을 만져보려고 하니 자기의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도저히 그런 손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얼굴을 심주은의 얼굴 앞으로 살며시 가져갔다.

심주은의 숨결이 볼을 스치면서 달콤하게 느껴졌다.

(... 안돼!)

심주은의 숨결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임청우는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임청우야! 임청우야! 네가 색마가 되려느냐?)

자신의 망령된 행위를 자책하며 임청우는 정좌를 하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분명 자기의 마음과 몸임에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심주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이해하지 못할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임청우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사는 인간의 중대사이지만 그 생사도 성인(聖人) 왕태(王駘)를 변하게 하지는 못하며, 또 비록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파멸의 동반자로 만드는 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풍랑을 만났을 때는 옛 성현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아야만 한다.

(왕태라는 분은 표면의 인상을 초월한 진실의 이치를 밝게 알아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모든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따른 것이라 여기고 변화의 근본에 있는 부동의 도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같은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장자(莊子) 내편(內篇) 중 덕충부(德充符)에는 여러 명의 불구자가 등장하는데 임청우가 생각하고 있는 왕태라는 사람도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발꿈치를 잘라서 걸을 수 없게 하는 월()이란 형벌이 있었다.

왕태라는 인물도 월형을 받은 죄인이었지만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공자와 함께 노나라를 양분할 정도였다.

왕태는 서있을 때도 특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앉아 있을 때도 특별한 논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텅 빈 머리로 왕태를 찾아갔던 사람이라도 충실한 마음을 갖고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왕태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성인이다. 나도 한 번 뵙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만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해도 스승으로 공경하고 싶을 정도이니 하물며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은 당연할 테지.

단지 노나라뿐만이 아니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을 정도다.>

 

또 말하기를,

 

<사물을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몸속에 있는 간과 쓸개의 사이라도 초나라와 월나라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같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곧 하나이다.

이와 같이 만물제동(萬物諸同)의 입장에 있는 자는 눈귀의 듣고 보는 쾌락에도 마음이 이끌리는 일 없이 자기의 마음을 그 덕에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 모두가 하나인 세계에서 놀게 하는 것이다.

왕태와 같은 인물이 만물을 볼 경우에는 그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개개의 사물이 상실되어가는 현상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발이 잘린 것쯤은 마치 흙덩이를 털어 버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분한다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 임청우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만물제동이라는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만물을 볼 경우에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그것의 세상에 융화하려는 점을 파악함으로써 만물제동의 이치에 이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심주은을 보니 이젠 그녀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만물제동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가만히 앉아 심주은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척포가 돌아와 그의 품속에 있는 몽선도 속으로 찾아들어갔다.

한데 피로에 지친 심주은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임청우는 계곡을 솥발처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이라 비록 희미하게 보였지만 마치 가지를 옆으로 벌리고 우뚝 서있는 전나무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틀림없었다.

세 개의 봉우리는 그 배치의 절묘함으로 인해서 번갈아가면서 계곡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계곡에는 하늘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모양으로 보이는 봉우리의 그림자 두개가 합해지면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그 신기한 자연의 조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바로 여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엉뚱한 곳만 찾았으니...”

감격한 듯한 심주은의 음성이 들렸다.

심주은은 깨어나자마자 임청우의 시선을 쫓다가 나무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이곳이 바로 자기가 찾으려던 그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

 

임청우와 심주은은 진창에 빠진 생쥐같은 몰골로 암벽 앞에 섰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절세가인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그림이 음각되어 있었다.

심주은은 버드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바위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열리며 원형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문고리야. 하지만 함부로 밀면 이렇게 되고 말지.”

심주은이 두 손바닥을 붙여 꼭 누르며 말했다. 납작하게 되어 버릴 것이라는 소리였다.

임청우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함부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심주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 문고리의 작동원리를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싶으면 직접 당겨보면 되잖아!”

대답이 궁해진 심주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볼 일이 없어.”

임청우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심주은은 그의 능청에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매섭게 도끼눈을 뜨고 한번 쏘아본 후에 천잠사의 한 쪽 끝을 고리에 묶었다.

(어디 내게 까불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한 번 혼나 보라구.)

심주은은 고리에 천잠사를 묶고 멀찍이 물러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 있으면 다쳐. 이리와!”

이어 심주은이 손짓하며 부르자 임청우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헌데 임청우가 막 그녀에게서 한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

심주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잠사를 힘껏 잡아당겼다.

원형의 고리가 앞으로 재껴지는 순간 신녀문의 상징이라는 환상신녀의 모습이 그려진 암벽 전체가 마치 벼락 치는 듯한 기세로 앞쪽을 향해 넘어졌다.

!

굉음과 함께 일어난 강한 바람이 임청우를 덮었다.

암벽은 임청우의 뒷머리를 거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임청우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경직되었다.

화악!

폭풍같은 바람이 등을 떠밀어 임청우를 심주은의 품에 안기게 한 후, 더욱 강하게 떠밀어 두 사람을 함께 일장여 거리까지 날려버렸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였는지라 심주은은 꼼짝 못하고 임청우를 안은 채 돌밭에 나뒹굴었다.

아야!”

임청우의 몸에 깔린 심주은이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가 등을 찌를 뿐 만 아니라 임청우의 몸이 내리누르니 견딜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높이 떴다가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임청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 짓눌리자 심주은은 심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형언하지 못할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임청우 역시 어떤 열기에 휩싸여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 보니 심주은은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새근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심주은은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임청우가 암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환상신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던 곳에는 월동문 모양을 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검주 유소기 등도 환상신녀의 형상이 남아있는 암벽 근처에 신녀문의 성지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암벽 바로 뒤에 입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4

 

                살려 보낸 여살성

 

 

한 바탕의 혈우성풍(血雨腥風)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이라트부의 무사들 중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다만 철목풍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자는 수하들이 이검한의 손에 몰살당하는 틈을 타 사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자가 이검한의 추격을 뿌리칠 가능성은 없다.

(이런...)

하지만 철목풍을 추격하려던 이검한은 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했던 첫 번째 청년의 시체를 밀어내고 또 다른 청년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 때문이다.

이검한으로서는 그 청년들이 나유라가 기른 심복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단지 달단여왕으로 보이는 여인을 능욕하는 색마들로 보일 뿐이다.

감히....”

쩌어어엉!

분노한 이검한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낭아검에서 시퍼런 검강이 쭉 내뻗어 네 청년의 몸뚱이를 휩쓸어버렸다.

퍼퍼퍽! 후두둑!

검강이 스치는 순간 네 명의 청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이 동강나 사방으로 쓰러져 버렸다.

흑혈맹호단의 청년들로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그 죽음이 차라리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제 정신이 돌아왔다면 자신들의 여왕을 능욕했다는 죄책감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 “....!”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이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이검한과 하후진진, 그리고 다섯 청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목욕을 한 달단여왕 나유라 뿐이었다.

이검한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의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하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저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이검한으로서는 이것이 두번째 살인이다.

첫 번째 살인에서 십여 명을 죽였는데 두 번째 살인에서는 무려 오십여 명이나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를 견디지 못해 최근에 연마해낸 낭아검법과 화염마강을 전력을 다해 시전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철목풍의 수하들이 몰살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태연하게 살인을 하다니... 이러다가 나란 놈은 전대미문의 살인귀가 되는 게 아닐까?))

이검한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죽어랏!”

!

독살스러운 외침과 함께 한 자루 비수가 벼락같이 이검한의 등을 찔렀다.

독수를 쓴 것은 물론 하후진진이었다.

하후진진은 처음에는 이검한의 무서운 신위에 압도당해 온몸이 얼어붙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하후진진의 가슴 속에서 독랄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극독이 발려진 비수로 이검한의 등을 찌른 것이다.

(죽였다!)

하후진진은 비수 끝에 닿는 묵직한 느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독비(毒匕)는 이검한의 등에 위치한 사혈(死穴)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하지만 하후진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회심의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자신의 독비가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조차 뚫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하후진진으로서는 이검한이 걸친 적룡풍이 도검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희세지보라는 것을 알 리 없다.

이검한은 적룡풍 덕분에 독비에 찔리고도 그저 움찔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 이럴 수가!”

하후진진은 얼굴을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이며 비칠 물러섰다.

이검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부르르!

돌아서는 이검한의 시선과 마주친 하후진진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쩌엉!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검한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불에 달궈진 시뻘건 부젓가락으로 머리 속이 휘저어지는 것같은 전율을 느낀 것이다.

사갈(蛇蝎)같은 심보를 지녔구나! 나이도 어린 계집이...!”

이검한은 무서운 눈으로 하후진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흐윽...!”

이검한의 일갈에 하후진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 낯선 소년이 내뱉은 한마디가 잘 벼려진 비수처럼 방심을 파고든 것이다.

인생이 가엾어서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혼은 좀 나야한다!”

이검한은 준엄하게 일갈하며 유령같이 하후진진 앞으로 다가왔다.

!

다음 순간 하후진진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호되게 뺨을 얻어맞았다.

!”

퍼억!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군 하후진진의 왼쪽 뺨이 삽시에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꺼져라!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네년의 그 악독한 심장을 뽑아내 으스러트려버릴 것이다!”

이검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후진진을 내려다보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하후진진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이 똑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치심과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다!”

하후진진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독기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러운 사내놈아! 오늘 나 하후진진에게 모욕을 준 대가는 언제고 갚고 말테니까!”

하후진진은 한 서린 저주가 실린 독설을 이검한에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검한은 하후진진이 퍼붓는 저주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에 이검한에게 저주를 퍼부은 하후진진의 모습은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장차 세상을 피로 씻을 여살성(女殺星)을 살려준 느낌이 든다!)

이검한은 사라지는 하후진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하후진진을 쫓아가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 악독한 계집이 오늘 내 손에 죽지 않은 것도 정해진 운명이겠지.)

쓴웃음을 지은 이검한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에게 다가갔다.

헌데 나유라에게 다가가던 이검한은 움찔하며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유라의 지금 모습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몸이 된 채 혼절해 있는 나유라의 풍만한 육체는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시신에서 뿜어진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한 걸음 늦었구나!)

가까이 다가가 나유라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던 이검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몸에 유린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유라의 무참한 자태를 본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한걸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일국의 여왕인 나유라의 고귀한 육체가 유린당한 것이다.

(이 비밀은 영원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검한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달단부의 결속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유라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혼절하여 그 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

(가엾은 여자다.)

이검한은 한숨을 쉬며 찢긴 옷가지를 주어모아 나유라의 몸에 칠갑이 되어 있는 피를 대충 닦아주었다.

피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에 나유라의 풍만한 알몸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하지만 이검한은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피에 젖은 그녀의 무참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크!)

그러다가 이검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움찔했다. 멀리 남동쪽 지평선으로 작은 점이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 점은 아마도 철산산과 포대붕일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자. 생모의 이런 무참한 모습을 보면 산산공주가 큰 충격을 받을 테니...!)

파천마도를 회수한 이검한은 적룡풍을 벗어 나유라의 나신을 감쌌다.

스읏!

그리고는 적룡풍에 싸인 나유라의 알몸을 두 팔로 안아들고 서쪽으로 질풍같이 몸을 날렸다.

삽시에 이검한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졌다.

지옥같은 참극이 벌어진 장내에도 어느덧 눈부신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녹원(綠園;오아시스)-!

망망한 사막 가운데 아담한 녹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도는 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을 작은 녹원이다.

녹원 가운데에는 맑은 물이 고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이라는 말이 어울릴 작은 크기의 호수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에서 피어오르는 실같은 아침 안개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찰박! 찰박!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물소리와 함께 능어같은 여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풍만한 여체다.

조심조심 호숫물로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덕분에 여인은 한층 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달단여왕 나유라!

호수에 가슴까지 몸을 담근 채 몸을 씻고 있는 금발의 여인은 물론 나유라였다.

(철목풍!)

찰박! 찰박!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풍만한 몸을 씻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순진하던 진진이를 저토록 악독하게 만들다니... 네놈의 죄는 열 번 죽어도 부족하다!)

나유라는 하후진진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딱히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핏덩이일 때부터 보아온 탓인지 하후진진이 그녀 자신의 친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철목풍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철목풍은 끔찍한 일을 겪은 하후진진을 위로하고 달래주기는커녕 복수심을 부추켜 사갈독심을 지닌 독한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말 신비한 아이다!)

철목풍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던 나유라는 흘깃 한쪽을 돌아보았다.

한쪽 호숫가에는 이검한이 나유라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녹원으로 나유라를 데려와 그녀로 하여금 목욕을 하게 해준 것이다.

(나이가 많아봐야 산산이 보다 두 세살 위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철목풍 조차 능가하는 내공을 지녔다니...!)

나유라는 이검한의 늠름한 뒷모습을 주시하며 숨결이 약간 더워졌다.

자신은 이검한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까지 적나라하게 보였었다. 아들뻘인 어린 소년에게 속살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릇한 설레임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나유라는 십 년 넘게 사내와 관계해 본적이 없었다.

철산산을 낳은 후 그녀는 산후조리를 잘못 해서 상당히 살이 쪘었다. 거의 백오십 근이나 나가 어지간한 사내들보다도 무거운 체중을 지녔었다.

원래 살집이 있고 키가 큰 데다가 살까지 디룩디룩 쪄버리자 남편인 철고륜은 질색하며 그녀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젊고 날씬한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돼지처럼 살이 찐 그녀를 본처라는 이유만으로 상대해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철고륜이 여전히 매력적이고 날씬한 하후란에게 빠져 버린 데에는 나유라가 한 때 비만한 뚱보였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그후 나유라는 무공 연마에 정진하여 다시 원래의 체형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한번 떠난 남편의 애정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드세고 도도한 나유라의 성격상 남편의 애정을 되찾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아양을 떠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여자로서의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절부터 독수공방을 해야만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육체적인 본능을 억눌러 오긴 했으나 물론 그녀가 완전히 석녀(石女)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부에는 쌓이고 쌓인 욕정이 폭발 직전의 수위로 쌓여 있었다.

가끔 뜨거워진 몸을 스스로 달래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손이나 이런 저런 민망한 도구를 이용한 부끄러운 시도는 오히려 갈증만 더 심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얄궂은 운명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이검한에게 모두 보이고 말았다.

그 때문일까?

왜곡된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나유라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귀엽고도 늠름한 저 소년이라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몸을 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8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1)

 

 

황의소녀 심주은도 임청우가 정신을 잃는 순간에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전적으로 임청우가 몸으로 받았기에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은 차렸으나 몸이 차가우면서도 끈적거리는 것에 잠겨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당연히 숨도 쉴 수가 없다.

(우리가 추락한 절벽 아래에 늪이 있었구나.)

심주은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달았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쪽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난 것도 아니다.

늪 속으로 얼마나 깊이 잠겨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우린 늪의 뻘 속에 깊이 잠겼을 것이다.)

심주은은 정신을 잃은 임청우를 한 팔로 껴안고 남은 팔과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빨리 늪의 표면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고 만다.)

죽음이란 말이 눈앞에 떠오르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임청우의 늘어진 몸 이외에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심주은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두려움과 공포로 심주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특하고 당돌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일 뿐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있어서 남과 다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의 공포 속에서 심주은은 오직 팔다리만을 허둥거렸다.

한데 어느 순간 임청우를 잡고 있는 팔 위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심주은의 팔을 타고 올라온 가늘고 긴 그 물체는 목을 지나 머리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심주은의 긴 머리카락을 가는 몸으로 휘감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은 그 물체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심주은과 임청우의 몸을 끌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놀라던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엇엔가 단단히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힘껏 당겼다.

슈우우욱!

심주은은 자신의 몸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추악!

어느 순간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

하아! 하아!”

마침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심주은은 시원한 공기와 함께 진흙마저도 들이마셨다.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든 가릴 게제가 아니었다.

막혔던 숨통을 틔운 심주은은 서둘러 임청우를 늪 밖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임청우의 얼굴에서 진흙을 벗겨 주었다.

얼굴에서 진흙이 제거되었음에도 임청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임청우는 왼손에 든 청강사자검은 죽어라 움켜쥐어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 걸고 있던 혈도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겨우 한숨 돌린 심주은은 자기의 머리카락이 늪지에 자라있는 키 작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알았다. 키는 작지만 둥치는 상당히 굵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어서 우산이나 버섯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대체 무엇이 내 머리카락을 끌고 올라와 나뭇가지에 걸었을까?)

심주은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이 걸려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헌데 그녀가 임청우를 끌어안고 나뭇가지에 올라갔을 때였다.

쉬쉭!

그 나뭇가지 위에 붉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녀를 향해 새빨간 혀를 내밀었다.

!”

!

심주은은 기겁하며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강력한 장력이 정통으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뱀은 끄떡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두개의 황금빛 뿔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 붉은 뱀의 정체를 알아본 심주은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질식사를 면했다 했더니 독물들의 제왕이라는 금관혈린사를 만나고... 난 참 운이 지독하게도 없구나.)

심주은은 소매 속에 있는 천잠사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며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천잠사는 어떤 보검에도 잘리지 않는 보물이다.

하지만 천잠사가 금관혈린사의 독에도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심주은 앞쪽에서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짐승은 바로 임청우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척포였다.

원래 척포는 겹쳐 말린 두 장의 몽선도를 집으로 삼아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 생긴 집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임청우가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져 늪 속에 처박혔으니 척포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화가 났지만 몽선도에서 빠져나온 후 심주은의 머리카락을 꼬리로 말아서 늪 밖으로 끌고 나왔던 것이다.

한 때 몸길이가 삼장에 이르렀던 영물인 척포인지라 심주은과 임청우를 끌고 올라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늪에 빠진 후 심주은이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 올라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늪의 표면에 작용하는 장력(張力)은 묽디묽은 아래쪽과 비할 바가 아닌 때문이다.

만일 척포가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심주은은 척포를 노려보았고 느닷없이 얻어맞아서 화가 난 척포도 심주은을 마주 노려보는 묘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주은도 여자인지라 뱀이란 생물은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고 싫었다.

하지만 물러서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에 심주은은 조금도 눈빛을 양보하지 않고 척포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늪에서 멀지 않은 절벽 근처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가 칠절에게 각기 흩어져서 임청우를 찾으라 명령하는 소리였다.

(위험해!)

풀쩍!

심주은은 임청우를 껴안은 채 다시 늪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주은의 몸은 이내 늪으로 잠겨 안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심주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금붙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쉬쉬!

척포는 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 저었다.

쏴아!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흰 안개를 내뿜었다.

츠츠츠!

척포가 뿜어낸 하얀 안개에 닿자 심주은의 머리카락에 달려있던 금붙이 장식은 얼음처럼 녹아서 늪에 잠겨들었다.

심주은은 척포가 자신을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알 리가 없다. 그저 늪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모든 신경을 돋우어 주변의 동정을 살치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녀는 곧 다급하게 들려오는 퉁소소리를 들었고 자신들 위쪽으로 유소기가 천리전음으로 말하며 날아가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턱까지 찬 심주은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숨 돌리려는데 유소기가 다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유소기는 지존수 사마명을 베려다가 도군의 중재로 검을 거두고 몽선도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뽀록!

심주은이 황급히 머리를 늪 속에 밀어 넣은 자리에 거품이 일어났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심주은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한갓 바램으로 끝나고 말았다.

요망한 것!”

유소기의 대노한 음성이 늪 속에까지 들려왔다.

심주은은 낙담했다.

(틀렸다. 이미 저자는 내가 숨는 것을 본 모양이다.)

늪 속에서 검을 맞고 죽기는 싫었다.

맑은 공기라도 한 번 더 숨 쉬고 죽고 싶었다.

촤아!

자포자기한 심주은은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번쩍!

순간 한줄기 백광이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래야 결코 피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죽었구나!)

심주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직후였다.

끼익!”

괴상한 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울렸다.

심주은은 자신이 베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다가 앗차! 싶었다.

유소기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닌 나무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금관혈린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황급히 늪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만 앞에서 날아오던 유소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화악!

유소기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벼락같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었다.

심주은은 임청우를 잡지 않은 왼손을 얼굴 앞에 세우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스스슷!

순간 그녀의 모습이 작은 바위처럼 변해버렸다.

환술(幻術)을 쓰다니... 신녀문의 제자인가?”

!

유소기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면서 발길질로 척포를 멀리 차날려 버림과 동시에 심주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올리며 말했다.

심주은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얼굴에 묻은 진흙 때문에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럼 구태여 나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겠다.)

그녀는 즉시 임청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며 두 발로 임청우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했다.

그래요. 나는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예요. 즉시 내 머리를 놓도록 하세요.”

유소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이대 제자... 그럼 정정(貞貞)보다 한 배분 아래인가? 한데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

유소기의 독백같은 말을 들은 심주은은 약간 당황했다. 정정은 그녀가 사부로 모신 여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소기가 사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심주은은 즉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초면인 분이 사문의 일을 물으면 내가 대답할 것 같아요?”

심주은은 당돌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유소기가 화를 내고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입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소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성미까지 정정을 빼닮았구나. 그래, 혹시 이 근처로 떨어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하나를 보지 못했느냐?”

내심 안도한 심주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아무도 살지 못해요. 이곳이 비록 늪이기는 하지만 저 절벽은 워낙 높아서 돌바닥에 떨어진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에요. 시체가 요행히 나무위에 걸쳐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늪은 바닥이 없어서 뭐든지 삼켜버리니까요.”

한데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유소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심주은을 약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주은은 잘못 대답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난 아직도 사흘 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해요.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요.”

유소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잠시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라.”

유소기가 잡아 올렸던 머리채를 내려놓자 심주은은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늪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늪 속에 잠겨있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댄 게 정말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유소기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몽선도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물건인가? 그토록 얻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깊은 늪 속에 잠기고 말다니... 금포염왕을 대적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잠시 후 유소기의 천리전음에 따라 모여든 칠절은 계곡 밖으로 나가버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7

 

               무림칠절(武林七絶) (2)

 

 

!”

휘릭!

유소기는 다급성을 지르며 뒤로 몸을 뒤집으며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으로 돌아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밑이 절벽이라는 것은 임청우가 던진 물건을 잡는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군 지청천도 폭넓은 칼에 무언가를 받아들고 벼랑 끝에 내려서고 있었다. 도군은 무공이 유소기보다는 조금 쳐져서 손이 아닌 칼로 물건을 받아낸 것이었다.

유소기는 손에 넣은 얇은 책을 펼쳐보았다. <일옹청풍일지>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찌직!

혹시나 싶어서 몇 장 넘기던 유소기는 책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영악한 놈!”

유소기는 이를 갈며 절벽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길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도군도 손에 든 장자(壯子)를 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삘릴리...

그때 그들의 뒤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퉁소소리가 들려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입에 퉁소를 물었으며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있는 중년인, 바로 칠절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소(神簫)였다.

놓쳤다.”

유소기가 돌아서면서 동료들에게 내뱉았다.

그가 서있는 곳으로 나머지 칠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진 벼랑 가에 둘러서서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비객 소도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어떻게 할 텐가?”

유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벽을 내려간다. 시체라도 뒤져서 찾아내도록 하자.”

유소기가 앞장서자 모두 그 뒤를 따라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내려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몽선도를 찾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

 

절벽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임청우는 죽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강적을 피하기 위해 절벽을 택했을 뿐 죽으려면 그 자리에서 죽었지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죽는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는 절벽에서 살아날 방법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황의소녀의 몸에서 나는 은근한 체향과 체온이 몸으로 전해온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내심 체념하며 소리쳐 물었다.

이름이 뭐야?”

황의소녀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반짝 뜨며 대답하고 물었다.

심주은(沈珠隱)! 네 이름은?”

슈앙!

임청우는 아래가 더욱 검어지는 것을 보면서 소리쳤다.

제기랄... 다 내려온 것 같다. 저승에서 가르쳐주마.”

그는 심주은이라는 이름의 황의소녀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였다.

!

끈적끈적한 풀 속으로 몸이 묻히는 것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임청우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약한 냄새...)

정신의 자락을 놓치면서도 임청우는 자신이 무언가 지독한 악취의 구덩이로 잠기는 것을 깨달았다.

 

***

 

계곡은 온통 검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땅에 기듯이 깔려있어 어깨높이에 달하는 것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이곳에서 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계곡이고 크지도 않은 숲이다.

바위들에는 이끼와 버섯, 이름 모를 기이한 풀들이 자라있어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주(劒主) 유소기를 비롯하여 도군(刀君), 신소(神簫), 뇌문신권(雷紊神拳), 지존수(至尊手), 비객(飛客), 묵궁(墨弓) 등의 칠절은 반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내려온 절벽 아래의 기이한 풍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융단처럼 땅을 덮고 있는 이런 곳에서 천길 절벽위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 계곡에서는 절벽 위에서는 보이던 반달마저도 보이지 않아 칠흑같이 어둡다.

칠절은 유소기의 신호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서 계곡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휘이익!

유소기는 바람을 몰고 나지막한 나무들을 밟고 달리면서 떨어진 흔적을 찾느라고 눈을 빛냈다.

그러나 위에서 떨어진 방향으로 봐서 그 근처가 분명할 것 같은 데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추락하는 도중 바람에 휘말려서 다른 쪽으로 떨어졌는가 보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기 위해 몸을 날릴 때였다.

부웅! 부웅!

갑자기 퉁소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렸다. 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신소, 찾았는가?”

유소기는 몸을 날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퉁소소리 보다 더 넓고 잔잔하게 계곡을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삭이는 듯이 낮은 음성이다.

바로 천리전음(千里傳音)이란 수법을 펼친 것이다.

부우우웅!

퉁소소리는 계곡의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소를 제외한 칠절들은 긴 그림자를 끌면서 일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신소 강상곡(姜想曲)은 굳은 얼굴로 퉁소를 입에서 뗐다.

무슨 일인가?”

가장 먼저 달려온 비객 소도성이 물었다.

신소 강상곡이 퉁소로 자신의 뒤쪽 암벽을 가리켰다.

어둠 속의 암벽은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높이 솟아 그들을 덮칠 듯이 보였다.

환상신녀(幻想神女)...!”

뒤이어 도착한 유소기가 암벽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자르듯이 내뱉었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며 어깨를 드러낸 절세미녀의 모습이 음각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버드나무가지를 들었으며 다른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있다.

지존수 사마명(司馬明)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신녀문(神女門)이 근처에 있단 말인가? 이 계곡에는 건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환상신녀의 모습이 이곳에 있는 한 신녀문은 이곳에 있다. 모두 의견을 말해보게. 신녀문과 충돌을 불사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날 것인지.”

유소기가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은... 신녀문과 부딪혀서는 안돼. 신녀문을 없애는 건 별 것 아니겠지만, 그 계집들 중 단 한명이라도 살아나간다면 무산(巫山)의 할망구를 무림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뇌문신권 방일휘(方一揮)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산의 할망구를 제거한 후라면 모를까 그전에는 신녀문을 건드려서는 골치만 아플 뿐이야.”

묵궁 진패선(陳覇善)이 뇌문신권 방일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때 지존수 사마명이 불쑥 말했다.

혹시 무산의 할망구가 늙어 죽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소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육지신녀(六指神女)는 신녀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다. 신녀문의 이술(異術)을 십중팔구는 익힌 그녀를 범상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

유소기의 말에도 지존수 사마명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근년에 신녀문의 제자가 무림에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신녀문은 제자를 택 해지 못해서 문을 닫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소 강상곡이 그런 지존수 사마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녀문을 없애버릴 심산이로군.”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다. 난 성결한 척하면서 온갖 잡술을 부리는 계집들을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우리 모두를 끌어들일 셈인가? 큰일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나?”

유소기가 지존수 사마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핫! 유소기, 너야말로 이곳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닌가?”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말했다.

모두들 생각 해보라구. 여기 어딘가에는 몽선도가 떨어져 있어. 몽선도라면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신녀문인가 하는 계집들이 겁이 나서 물러난다는 게 어디 말이라도 되는가?”

신소 강상곡과 비객 소도성, 뇌문신권 방일휘등이 일제히 불안한 시선을 유소기에게 보냈다.

유소기의 관옥같은 얼굴에 싸늘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살기(殺氣)였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하지만 유소기,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죽게 되면 네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는 힘들어질 걸?”

유소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이 어깨의 백금검을 잡아갔다.

화악!

유소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존수 사마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언제라도 발출할 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백금검의 검병(劒柄;검의 손잡이)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객 소도성도 신소 강상곡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었구나!)

지존수 사마명은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유소기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서면 그들도 동조하여 유소기의 독주를 견제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유소기는 자신들과 같은 칠절이기는 하지만 그 무공에 있어서는 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합공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유소기가 동료가 없음으로 인해 겪는 불편은 견딜 수 있지만 수모를 받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르르릉!

백금검이 차디찬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유소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존수 사마명의 이마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장내에 팽배했다.

신소 강상곡등은 손에 땀을 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졌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도군 지청천이 두 사람 사이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

이어 폭넓은 칼이 지존수 사마명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지존수 사마명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도군 지청천의 칼이 마치 만근의 무게로 그를 내리 눌렀다.

(으으으음...)

지존수 사마명은 내심 신음을 삼켰지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군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살려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과해라!”

문득 도군이 입을 열었다.

지존수 사마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마명 뿐 아니라 도군을 제외한 칠절 전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 그들은 머리가 약간 어찔 하는 것을 느꼈다.

도군이 입을 여는 것은 적과 상대할 때뿐이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한 것이었다.

도군의 목소리는 특이한 음공(音功)이 실려 있어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지존수 사마명은 지체없이 손을 쫙 펼쳤다.

열 개의 손가락이 오리발처럼 쫑긋해졌다.

파팟!

지존수 사마명이 이를 악무는 순간 그의 양쪽 손 무명지(無名指)가 각기 폭발하면서 떨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터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다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유소기가 검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몽선도를 찾는다. 만일 신녀문의 제자들과 부딪힌다면 가차없이 죽여라. 몽선도를 찾아내든 못 찾든 여기서 나가는 대로 무산의 육지신녀를 제거한다.”

유소기가 뒤돌아 걸어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지존수 사마명의 사과를 받은 대가로 그의 제안도 받아들인 것이다.

칠절의 우두머리로서 손가락 두 개를 날려버린 지존수 사마명의 무거운 사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도 가슴이 아프겠군. 처가(妻家)나 다름없는 신녀문을 제거하라고 했으니...)

앞서가는 유소기의 완강한 등을 보며 신소 강상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마명은 유소기의 살수를 피할 순 없겠어. 어리석은 친구같으니...)

고개를 떨군 채 지혈을 하는 지존수 사마명의 옆을 지나며 신소 강상곡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7

 

                 불길한 예언

 

 

"삼낭이는... 우리 도룡곡 등씨일족의 유일한 후손이니... 잘 돌봐주기 바란다."

천면음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이동생께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巨人)으로부터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을 보살펴주겠다 약속을 들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구나."

(내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이 될 것이다?)

천면음마의 뜬금없는 칭찬에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예지력(叡智力)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 괜한 소리라 여기지 말거라.”

고검추의 속내를 알아차린 천면음마가 고검추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아마도...”

말을 잇던 천면음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앞날이 보인 것일까?)

고검추는 천면음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내 죄다.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대신 치르겠구나.”

주르르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이 관련된 앞날을 본 모양인데... 대체 세 모녀가 무슨 일을 겪기에 저토록 비탄에 빠진 것일까?)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면음마가 앞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하물며 자신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중 등삼낭과 관련된 일이니...

맹세... 맹세를 해다오.”

천면음마는 눈물로 물든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맹세를 해주길 원하십니까?”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진 천면음마의 말이 고검추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해다오.”

천면음마는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만일 손이 몸에 붙어있었다면 고검추의 옷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고검추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양모 당혜선이 투신해버린 지금 등삼낭과 그녀의 딸들은 자신에게는 거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검추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찬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낭 아주머니는 제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또 옥경이와 옥령이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 피붙이인 듯 지켜주겠습니다.”

고검추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천면음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천면음마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지신명을 걸고... 삼낭이 모녀를 네가 거둬서 보살펴주겠다고 맹세해다오.”

필사적인 표정이 된 천면음마는 고검추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드리겠습니다. 삼낭 아주머니와 옥경이, 옥령이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보살펴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세 모녀를 거둬주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면음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내 정체는 숨겨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천면음마의 당부에 고검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공노할 색마인 천면음마가 자신들의 오라버니이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등삼낭 모녀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져보아라. 네게 줄 물건이 있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돌려 토지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겉옷을 돌아보았다.

그자는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기 전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겉옷을 벗어놨었다.

고검추는 천면음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겉옷을 끌어당겨 살펴보았다.

겉옷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탐화비록(貪花秘錄)

-도룡무보(屠龍武譜)

 

두 권의 비급 중 도룡무보는 도룡곡의 비전 비급이다.

도룡무보 안에는 하마터면 고검추를 죽일 뻔한 도룡삼첩장 등 도룡곡 등씨일족의 패도적인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구식으로 이루어진 도룡도법(屠龍刀法)이었다.

도룡구식(屠龍九式)이라고도 불리는 그 도법은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신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에 도룡구식을 완전히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룡구식을 완벽히 시전할 수 있다면 그는 도제(刀帝)라 불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탐화비록은 천면음마 등천하가 십여 년 전에 얻은 비급이다.

탐화비록을 남긴 인물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마인들로 인정받는 구마(九魔) 중 한 명이었다.

 

-화마(花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숱한 여자들을 농락한 전설적인 색마다.

그 때문에 화마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탐화색마(貪花色魔)라는 혐오스러운 별호로 더 자주 불린다.

화마는 평생 삼만 명 이상의 여자를 농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탁월한 재주덕분이었다.

먼저 화마는 절묘한 역용술을 지녔다.

그자의 역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한 걸음 옮길 때 세 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화마를 무슨 재주로 잡아서 죄를 묻는단 말인가?

변화막측한 역용술 외에도 화마는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경신술로만 따진다면 화마는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정도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을 주축으로 한 중원 무림에 공격당해 멸망했다.

다만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는 그 혈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등천하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했으며 다행히 도룡곡 비전의 도룡무보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등천하의 자질이 평범했다는 점이었다.

도룡무보에 수록된 절기들을 절정까지 연마하면 능히 독보천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뛰어나지 못한 등천하는 이십여 년을 고련했음에도 도룡무보 상의 절기를 채 삼할도 연성하지 못했다.

그 정도 성취로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등천하는 무공 수련을 포기한 채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그는 운중산(雲中山)의 어느 계곡에서 화마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마의 시신에서 탐화비록을 얻은 등천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비로소 무공이 약하더라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수단이란 것이 원수들의 아내와 딸, 여제자들을 겁탈하는 것이었다.

몇 년을 고련한 등천하는 마침내 화마의 수법을 대충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등천하는 자신도 모르게 화마의 음탕한 성격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자를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등천하는 강호의 아녀자들을 짓밟는 제이의 화마, 천면음마가 된 것이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탐화비록에 수록되어... 있다."

말을 잇는 천면음마 등천하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견디기... 힘들구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고검추는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 병아리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비록 상대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때문이지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을 보니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일각이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이 분을 위하는 길이다.)

고검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면음마의 심장 부위에 자신을 손바닥을 붙였다.

"... 고맙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지잉!

고검추는 얼굴을 돌리며 태을강기의 경기를 천면음마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퍼득!

사지가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둥이가 한 차례 세차게 경련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을강기의 강력한 잠경이 천면음마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이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고검추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면음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오공으로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는 천면음마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천면음마라는 이름으로 전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가엾은 인물의 최후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3

 

                구원의 손길

 

 

-흑혈맹호단(黑血猛虎團)!

 

나유라가 오이라트부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길러낸 달단부의 정예들이다.

달단부 최고의 용사들인 그들은 나유라의 총애 속에 영약과 무공비급을 마음껏 취해 수련해왔으며 그 결과 하나같이 일당백의 고수가 되었다.

나유라의 친위대격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은 그녀의 명령일하에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이었다.

나유라는 오이라트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을 수시로 오이라트부에 잠입시켜왔었다.

그 임무는 실로 위험한 것이라 열 명을 보내면 겨우 다섯 명이 살아 돌아올까 말까할 정도였다.

알몸으로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오이라트부 땅에 잠입했다가 실종된 흑혈맹호단 용사들 중 일부였다.

옳구나! 이런 때 쓸려고 저놈들을 살려두었었구나!”

철목풍이 하후진진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알몸으로 끌려온 것을 보는 순간 하후진진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진진아! ......!”

나유라도 바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녀 역시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크으! 용서하십시오 여왕님!”

... 속하들이 무능하여 이런 수모를 당하시게 했습니다.”

나유라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끌려온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분루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늘같은 자신들의 여왕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죄스러워 필사적으로 남성의 상징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들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지만 지금은 내공이 전폐되어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흐흐흐! 정말 기막힌 계획이다!”

철목풍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흑혈맹호단의 청년들과 나유라를 번갈아보았다.

호호호! 아버님은 제게 감사해야만 하실 거예요. 저 때문에 머잖아 달단부가 저절로 아버님의 손아귀에 굴러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하후진진도 청년들과 나유라를 보며 교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이 암캐의 부하들이 이 근처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때 그 자들은 보게 되겠죠. 평소 그렇게 도도하고 잘난 척했던 자신들의 여왕마마께서 스스로 기른 흑혈맹호단의 젊은 것들과 재미를 보며 교성을 질러대는 꼴을...!”

...그런!”

... 이 간악한...!”

듣고 있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진저리를 쳤다. 그들도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으하하! 절묘하구나 절묘해! 결국 여왕마마께서는 달단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흑혈맹호단을 만든 셈이 될 테니...!”

철목풍은 득의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 자는 분노와 충격으로 치를 떨고 있는 나유라를 쓸어 보며 느물거렸다.

여왕의 그 기막힌 치태를 보면 당신 부하들은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놈에게까지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소?”

철목풍의 그 말을 들은 나유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달단부는 사분오열 될 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달단부는 내 것이 되겠지.”

... 이 악독한 인간들...!”

나유라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철목풍의 말대로였다.

현재의 달단부는 나유라의 권위에 의지하여 결속이 유지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젊은 용사들과 야합을 하는 현장이 보여지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끝장일 것이다.

나유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테고 달단부의 위태롭던 결속은 일거에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분열된 달단부를 오이라트부가 집어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나유라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절박해진 나유라는 급기야 하후진진에게 애원까지 했다.

제발! 진진아! 이러지 말거라. 그래도 너 역시 달단부의 사람이 아니냐?”

물론 소용은 없었다.

내가 달단부의 사람이라고? 웃기지 마라! 내 아버지가 오이라트부의 용사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하후진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년의 남편은 가증스럽게도 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겁탈했다! 호호호! 이제 남편이 지은 죄의 대가까지도 나유라, 네년이 대신 치루어야만 한다!”

하후진진의 악에 바친 교갈에 나유라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나유라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날 깨끗하게 죽여 다오! 그래도 한 때 달단부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녀는 이미 대식국의 공주로서, 또 달단일족의 여왕으로서의 긍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아들이 이어받을 달단부가 사분오열되어 결국 오이라트부에 병탄당하는 일을 방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유라의 필사적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하후진진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작해라!!”

하후진진은 냉혹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을 끌고 온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각기 하나씩의 유리병을 꺼내들고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 죽어버리자 형제들!”

만수무강하십시오 여왕님!”

사태를 깨달은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비통하게 외치며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죽어버려야만 여신같은 존재인 나유라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한걸음 늦고 말았다.

어림없는 짓이지!”

파파팟!

청년들의 그같은 반응을 예견하고 있던 철목풍이 벼락같이 지풍(指風)을 날려 그들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린 것이다.

!”

크흑!”

청년들은 아혈이 짚혀 입을 딱 벌렸다.

어리석은 놈들이로군! 재미를 보게 해주겠다는데도 뒈지겠다고 날뛰다니...!”

클클! 그러게 말일세!”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음험하게 웃으며 다섯 청년의 벌어진 입에 유리병에 든 액체를 쏟아 부었다.

꺼억!” “끄윽!”

강제로 유리병의 액체를 들이킨 청년들의 몸에서는 즉시 반응이 나타났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온몸의 혈맥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애쓰던 그들의 남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용틀임을 해대었다.

으으으!” “크흐흐!”

어느덧 그들의 비통함으로 젖어있던 눈동자도 발정 난 짐승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번들거린다.

(흐윽!)

청년들의 야수같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나유라는 절망감으로 전율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청년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나유라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만이 자신들의 몸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식혀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호! 풀어줘라!”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하후진진이 다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커렁! 철컹!

그러자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막혔던 혈도와 팔 다리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크헝!” “크으으으!”

쇠사슬에서 풀려난 청년들은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일제히 나유라를 덮쳐갔다.

... 안돼! 정신차려라! 아악!”

나유라가 다급히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 찌직!

나유라를 덮친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옷을 찢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안돼! 안된다!”

나유라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인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옷이 야수로 변한 청년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가면서 나유라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허어... 기막히군!”

발가벗겨진 나유라의 모습을 본 철목풍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드러난 나유라의 나신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유라를 발가벗긴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라! 제발... 제발 정신 차려라!”

청년들에게 깔린 나유라는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울부짖음조차도 이내 청년들의 거친 숨소리에 묻혀버렸다.

달단부의 수백만 신민들이 여신처럼 떠받들던 나유라의 육체가 욕정에 눈이 뒤집힌 젊은 숫컷들의 손과 입에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악!”

그리하여 어느 순간 나유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축 늘어졌다.

마침내 그녀의 육체는 젊은 숫컷들 중 한명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호호! 아쉽구나. 네년의 이런 모습을 달단부의 모든 사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하후진진은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청년들에게 유린당하는 무참한 모습을 장면을 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은 그런 하후진진 옆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일 이검한에게 다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 자신이 먼저 나유라를 능욕했을 것이다.

헌데 그 직후였다.

!”

나유라의 육체를 가장 먼저 정복한 채 몸부림치던 청년이 돌연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푸학!

이어 청년의 목이 삐끗하더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으며 잘려진 목에서 피의 분수가 치솟아 나유라의 뽀얀 알몸 위로 흩뿌려진다.

터어엉!

직후 새파랗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나유라가 누워있는 바닥 옆의 바위에 반 넘게 박혔다.

칼날이 너무 새파래 거의 반투명하게까지 보이는 그 보도(寶刀)가 어디선가 날아와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한 청년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흐윽!”

돌연한 사태에 하후진진은 진저리를 치며 주춤 물러섯다.

... 네놈은!”

헌데 하후진진이 어찌된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쪽에서 철목풍의 경악에 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후진진의 시야로 현장에 있던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한쪽 모래 언덕 너머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의 손에 들린 칼날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 번쩍 광채를 일으킨다.

콰콰쾅! 퍼펑!

케엑!” “크억!”

직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여러 번의 단말마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죽일 놈들!”

쐐애애액!

아연실색하는 하후진진의 눈으로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한 명의 소년이 모래 언덕 너머에서 질풍같이 치솟아 올라 좌측으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타는 듯 붉은 피풍의를 몸에 두른 건장한 체격의 소년인데 그 소년이 덮쳐가는 쪽에는 새파랗게 질린 철목풍이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물론 이검한이었다.

그가 마침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 막아랏!”

철목풍은 좌측의 모래 언덕 쪽으로 달아나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미 한차례 충돌에서 이검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맛본 그자는 이검한이 나타나는 즉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웃!”

이놈! 죽어랏!”

화라락! 쏴아아아!

그 직후 철목풍이 달아나는 쪽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라 이검한을 짓쳐갔다.

오이라트부 최강의 정예들인 그들은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몽고의 대초원을 주유하면서 단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다.

바득! 주인을 잘못 만난 죄다!”

이검한은 살기 어린 일갈을 내지르며 벼락같이 양손을 동시에 흔들어냈다.

쩌어어엉! 꽈르르릉!

그러자 그의 왼손에는 톱날같은 날이 선 낭아신검이 들려 허공을 그었고, 오른손 장심으로부터는 시뻘건 섬광이 일어났다.

크아악!”

케에에엑!”

다음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수십 명이 일거에 몰살당하며 선혈이 난비했고 잘려진 육신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살이 타들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한다.

 

-낭아살륙검법(狼牙殺戮劒法)!

-화염마강(火焰魔罡)!

 

천붕랑왕과 마화존자의 무공이 천여 년 만에 시전된 것이다.

서역 무림사상 최강자들이라는 서역사천왕의 절기를 오이라트부의 졸개들 따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7

 

                 무림칠절(武林七絶) (1)

 

 

우워어어어어!”

길고 웅혼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다. 그가 이리로 오고 있다.”

임청우는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빠르게 달리는 황의소녀의 향긋한 체향에 젖어 있다가 기겁하며 외쳤다.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멀리서 시작되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났다.

장차 금포염왕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되는 기린아 검주 유소기!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검법은, 검법은 배웠어?”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를 밟으며 달리던 황의소녀가 임청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대답이 없었다.

속은 것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든 황의소녀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그럼 뭘 배웠어?”

아직 아무 것도...”

하아...”

임청우의 대답이 황의소녀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

그 사이에 오십여 장 밖에 이른 유소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휘익!

황의소녀는 땅으로 뛰어내려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비정 냉혹한 성격의 유소기는 아마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드드드드!

한데 갑자기 숲이 흔들렸다.

콰콰콰쾅!

앞쪽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두 사람을 향해 쓰러졌다. 누군가 숲 속의 거목들을 일도양단하여 두 사람의 행로를 저지한 것이다.

!”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황의소녀는 몸을 굴려 근처의 바위 뒤로 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지만 피할 곳이라고는 그 바위뿐이었다.

쿠르르릉! 콰드드드!

거대한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지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엎드려!”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한다고 피한 바위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허리를 힘껏 채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직후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황의소녀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임청우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임청우는 키가 반자 정도 작아졌다.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임청우 자신도 몰랐다.

도망가!”

나무를 떠받친 채 임청우가 소리쳤다.

! !

임청우가 떠받치고 있는 나무 위로 또 다른 나무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임청우의 허리가 휘청이고 키는 점점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드러난 팔목과 얼굴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황의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청우는 사방에서 넘어온 나무들을 하나의 나무 위에 받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들보나 다름이 없었다.

임청우가 쓰러진다면 황의소녀는 물론이고 임청우 자신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바위 옆이기는 하지만 크지 않은 그 바위도 아마 박살나버릴 것이다.

황의소녀도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임청우의 곁에 서서 나무를 떠받쳤다.

어서 빠져나가!”

임청우는 비지땀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황의소녀는 힘겨운 얼굴로 살풋 웃어보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받쳤다.

임청우의 부담이 약간 줄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대책도 될 수 없었다.

황의소녀 역시 자신들이 결국에는 깔려 죽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군(刀君),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을 놓칠 뻔했네.”

나무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동산 밖에서 검주 유소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낭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실린 목소리다.

 

휘익!

유소기는 사방에서 가운데를 향해 촘촘히 쓰러져 거대한 노적(露積)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거목들 위에 내려섰다.

파라라랏!

그의 몸에 걸쳐진 청삼이 펄럭이며 바람소리를 냈다.

유소기의 십여 장 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거목 위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폭이 넓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코, 입과 귀, 모두가 큼직큼직한 사람이다. 완강한 턱은 그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 백의의 도객이 칠절 중 검주 유소기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가공할 고수 도군 지청천(池靑天), 바로 그였다.

도군은 유소기의 인사말에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달아나는 앞쪽의 나무들을 베어 가로막은 것은 바로 도군이었다.

그놈이 어수룩한 겉보기완 달리 아주 교활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굴리려 해도 굴릴 수가 없겠군.”

유소기는 쓰러진 나무들이 층층이 겹쳐 이룬 노적 형상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웃었다.

추릿!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소기는 검을 뽑았다.

백금검이 무지개같은 흰빛을 뿜었고,

쿠르르르! 콰콰쾅!

아름드리나무들이 토막토막 베어지며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쪽으로 굴러갔다.

촤아아아!

작은 나뭇가지들과 잎들은 유소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

도망쳤구나!”

갑자기 유소기의 표정이 변했다.

“...!”

좀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군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거목에 부딪혀 박살나버린 바위 곁에는 두 쌍의 발이 깊이 박혔던 흔적만 있을 뿐,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시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휘익!

유소기는 이를 부득 갈며 몸을 날렸다.

거목들이 토막 나서 굴러가는 쪽이었다.

도군도 말없이 몸을 날렸다.

 

퉁퉁퉁퉁!

수레바퀴 같이 굴러가는 거목의 잘린 토막들은 다른 나무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바위 위로 튀기도 하면서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황의소녀와 임청우는 그 나무토막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로 굵은 나무속을 파내고 그 안쪽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라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만한 구멍을 파내기엔 충분했다.

임청우가 두 손으로 나무를 바치고 있는 사이에 황의소녀는 혈도를 써서 재빨리 속을 파냈었다.

거대한 청동향로도 간단히 베었던 혈도다.

청동에 비하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나무를 파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압사(壓死)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헌데 유소기는 나무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잘라서 굴려버렸었다.

그 바람에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숨은 나무토막도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소기의 검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베었다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두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황의소녀가 나무 구멍 안쪽에 숨고 임청우는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입구를 등지고 서서 버티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 상태로 나무토막은 연신 회전하며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

아차하면 임청우의 몸이 통나무 밖으로 튕겨나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임청우는 팔과 다리에 힘을 한껏 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팍팍팍!

백광이 번득이며 통나무 토막들이 둘로 갈라졌다. 유소기가 비탈을 따라 날아 내려가면서 한꺼번에 십여 개씩의 통나무 토막들을 베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잎이나 가는 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다가 돌풍을 타고 올라갔을 리는 없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이 통나무 속에 숨었으리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백 여 개의 통나무가 다시 둘로 나눠지며 빠르게 비탈을 굴렀다.

통통통!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옆으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가 짧아진 통나무들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숨어있는 통나무가 베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은 머리위로 비스듬히 받치고 혈도는 몸 옆의 나무 벽에 밀어붙였다.

혹시 유소기의 검이 그들이 숨어있는 통나무를 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청강사자검과 혈도에 저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임청우는 자신의 옷자락이 통나무 밖으로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유소기는 백금검으로 굴러가는 통나무들을 자르다가 냉소를 머금었다. 굴러가는 통나무들 중 하나의 중간쯤에서 펄럭이는 임청우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휘익!

즉시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은 유소기는 허공에서 요자번신(鷂子翻身)의 수법으로 몸을 굴린 후 그 통나무 앞을 가로막았다.

!

마주 보고 있던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통나무가 갑자기 멈추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

황의소녀가 눈물을 찔끔 쏟으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통나무가 수직으로 홱 쳐들려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두 사람을 밖으로 쏟아냈다.

!”

엄마야!”

임청우는 바닥에 나뒹굴고 황의소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휘익! 터텅!

통나무를 한손으로 간단히 잡고 흔들어서 두 사람을 쏟아낸 유소기는 빈 통나무를 뒤로 던져버렸다.

(검주 유소기!)

(... 틀렸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눈앞에 서있는 임풍옥수같은 용모의 중년인 유소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텅 터터터텅!

그 사이에도 유소기 뒤쪽에서 나머지 통나무들이 요란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손을 젓자 수십 개의 통나무들은 간단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수만으로도 유소기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통나무들은 조금 더 굴러간 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임청우의 얼굴을 본 유소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옥같이 맑던 임청우의 얼굴이 불과 반나절 만에 검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황의소녀는 유소기의 추적을 따돌릴 목적으로 임청우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유소기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몽선도!”

하지만 유소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청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에게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대안탑에서 인()이 포함된 재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유소기는 검집으로 황의소녀를 가리켰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 예쁜 소녀가 화를 당하게 된다.”

황의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지도 않았음에도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뼛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임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큰 백의의 중년인이 그의 뒤에 칼을 뽑아든 채 서있었다. 도군이었다.

순간 임청우는 칠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굳이 뺏으려 하니 나는 죽어도 뺏기지 않겠다.)

임청우는 오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유소기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져가시오.”

임청우는 소리치며 두 개의 물건을 각기 동북쪽과 동남쪽을 향해서 던졌다.

임청우는 무공은 모르지만 공력만은 아주 높다.

! 피핑!

임청우가 힘을 다해 던진 두 개의 물건은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 파팟!

유소기와 도군의 몸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라 각기 하나의 물건을 쫓아갔다. 그들의 신속함은 먹이를 덮치는 표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임청우는 유소기와 도군이 몸을 날리자마자 황의소녀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얼굴 앞에서 찬바람이 이는 순간 임청우는 황의소녀를 힘껏 껴안으며 땅을 박차고 껑충 뛰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까마득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6

 

                 색마의 신세한탄

 

 

"크크크... ... 동정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고검추의 어두운 표정을 본 천면음마는 체념한 듯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철봉황... 그 계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피에 섞어서 뿜어낸 탕음마고(蕩淫魔蠱)에 중독되었으니..."

이어 천면음마는 악에 바쳐 내뱉었다.

사실 그자가 준비한 진정한 암수는 철봉황에게 접근하여 탕음마고라는 지독한 최음제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천면음마는 이빨을 하나 빼서 생긴 빈틈에 최음제가 들어있는 은제 구슬을 끼워두고 있었다.

상대 못할 강적을 맞닥트릴 경우 최음제가 들어있는 그 은제 구슬을 깨트린 후 침에 섞어 분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철봉황의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맞는 순간 입속에 숨기고 있던 최음제 탕음마고를 피에 섞어 뿜어내게 되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베기 위해 쇄도하다가 탕음마고가 섞인 천면음마의 피를 일부 흡입한 것이다.

"... 철봉황! 그 여인이 철봉황이었습니까?"

천면음마의 말을 들은 고검추의 안색이 일변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고검추는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구해 토지묘를 떠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크크크... 그렇다. 그 계집이 호천무맹 최강의 무력집단인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의 총사(總士) 철봉황 고현경이다."

"!"

고검추는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머나먼 기련산으로부터 찾아온 여인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천면음마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그 계집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계집은 곧 탕음마고의 발작으로 희대의 탕녀가 될 테니..."

"... 무어라고요?"

고검추는 눈을 부릅떴다.

"클클클... 정파백도의 태두인 호천무맹의 신임 총사가 천하에 다시없을 음탕한 계집으로 변할 테니 볼만하지 않겠느냐?"

천면음마는 악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탕음마고!

 

남만 특산의 고독으로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여 생명의 근원인 원영지기(元嬰之氣)를 먹고 산다.

원영지기를 갈취당한 숙주는 격렬한 욕정을 일으켜 이성(異性)을 찾게 된다.

이성과 관계하여 상대의 정기를 흡수해야만 빼앗긴 원영지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분노의 표정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 악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는 철봉황 고현경이 아버지의 동문 사매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양모 당혜선이 그녀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한데 그런 철봉황 고현경이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에 중독 당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천면음마에게 살의가 일어나는 고검추였다.

"흐흐흐... 그 계집을 탕음마고에서 구하고 싶으냐?"

천면음마는 그런 고검추의 표정을 살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검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기도 쉽군."

고검추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들은 천면음마는 히죽 웃었다.

"본좌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다오. 그러면... 철봉황을 구할 방도를 가르쳐주마."

"말해 보시오."

고검추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면음마는 고검추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꾸했다.

"첫번째 조건은... 본좌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말에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봉황 고현경은 천면음마의 전신 경맥을 난자해 놓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피하고 난자하여 쉽사리 죽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천면음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것이다.

천면음마는 그 끔찍한 고통을 끝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나의 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천면음마는 고통으로 이지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피붙이가 있었습니까?"

고검추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기도 하고... 나같은 말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착한 누이동생이지.”

천면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숱한 여자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제에 제 누이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문 사매인 철봉황을 구하려면 천면음마와 거래를 해야만 한다.

영누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말씀해보시오.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고검추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천면음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자는 내심 고검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진 그자의 말이 고검추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내 누이의 이름은 등삼낭(鄧三娘)이고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 등삼낭!”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이 외쳤다.

“...!”

말을 이어가려던 천면음마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그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같다! 그렇다면...)

고검추는 팽가촌 촌장의 며느리인 등삼낭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네놈... 내 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냐?”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누이동생 분의 왼쪽 입 꼬리 쪽에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고검추는 등삼낭의 얼굴에 나있는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틀림없구나. 네놈은 내 누이와 아는 사이였어.”

천면음마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등삼낭 아주머니가 이 악명 높은 색마의 누이동생이었다니...)

고검추는 당혹과 함께 자신이 운명의 사슬같은 것에 엮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 지인의 오빠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고검추는 팽가촌의 촌장 팽유가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명문가가 청해의 도룡곡이었음을 깨달았다.

팽유가 등삼낭의 친가가 도룡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도룡곡이 전 무림에 공적으로 찍혔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가촌... 너는 기련산 팽가촌에서 산 적이 있겠구나.”

천면음마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검추라 하며 얼마 전까지 팽가촌에서 살았습니다.”

고검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전에 널 본 적이 있었겠지만... 마지막으로 팽가촌에 들른 게 삼 년 전이었으니 설령 널 보았다 해도 지금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말 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을 때...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종을 만나서 막내 누이가 살아있으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기련산 팽가촌의 촌장이 구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면음마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토지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듯이 말했다.

고검추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천면음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연을 만나 복수할 능력을 갖춘 나는... 우리 도룡곡의 멸망에 관여한 문파나 가문을 찾아다니며 계집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 생각해서 한 짓이었는데...”

천면음마의 눈 꼬리로 물기가 어렸다.

뒤늦게 삼낭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팽가촌을 찾아갔지만... 차마 부끄러워 삼낭이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주르르!

마침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가 누이동생인 걸 알고도 나서지 못한 건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고검추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천면음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강간해왔다.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았으며 비구니와 여자 도사들까지도 거리낌없이 강간했었다.

그런 처지에 차마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의 딸들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천면음마는 먼발치에서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이 낳은 딸들을 몇 번 훔쳐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누이동생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켰었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에게도 혈육을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구나.)

고검추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혈육은 끔찍하게 여기면서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거리낌없이 강간해온 천면음마의 행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해해주기도 힘들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2

 

             악독한 소녀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어머니의 원수!”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독기서린 교소를 터뜨렸다.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나유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혈이 찍히는 바람에 지금의 나유라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유라를 암습하여 쓰러트린 소녀는 원한과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크윽... 너는 누구냐?”

딸 뻘인 어린 소녀에게 젖가슴이 짓밟힌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에 찬 신음을 토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찌직!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저고리를 거칠게 좌우로 벌렸다. 고름이 뜯기며 벌어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금방 내린 눈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흐윽!”

헌데 나유라는 저고리가 벌어지는 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봉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자로 길게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진(眞眞)... 진진이로구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나있는 열십자의 흉터를 본 나유라는 전율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소녀는 그런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오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 년 전, 나유라의 남편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당한 것은 하후란이라는 여인이었다.

하후란은 대단한 미인으로 철고륜이 나유라와 결혼하기 전부터 총애하던 후궁이었다.

철고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온 하후란이지만 달단부의 안주인이 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달단부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뱃속에는 전 남편의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철고륜은 천산(天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하후란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미태에 반해 강제로 납치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본래 색탐이 심했던 철고륜은 하후란이 남의 아내이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 따위는 아랑곳 않고 욕심을 채웠다.

하후란이 워낙 빼어난 미녀였기에 철고륜은 얼마 후 대식국의 공주 나유라와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하후란을 총애했다.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된 후 반 년 만에 여자 아이를 낳았었다. 당연히 그 여아는 하후란 전남편의 딸이었다.

하지만 하후란의 미태에 푹 빠진 철고륜은 그 여자아이를 자신의 딸로 삼고 자신의 성씨인 철()씨까지 물려주었다.

 

-철진진(鐵眞眞)!

 

이것이 그 여아의 이름이었다.

비록 하후란의 전 남편 딸이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영특했던 철진진은 철고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철고륜은 도도한 본처 나유라의 몸에서 난 친 딸 철산산보다 오히려 양녀인 철진진을 더 귀여워할 정도였다.

헌데 오 년 전, 하후란과 철진진 모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철고륜이 하후란과 방사를 하던 도중 복상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하후란을 질시하던 다른 후궁들은 하후란이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녀가 철고륜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유라는 하후란을 형리(刑吏)들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하후란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저 단순히 고문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형리들은 그래도 한때 자신들의 왕의 후궁이었던 하후란을 돌아가며 능욕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녀가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하후란은 남편의 부하들에게 몸을 더럽힌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유라는 하후란을 욕보인 형리들을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하후란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버렸다.

하지만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하후란의 딸인 철진진이 오 년 만에 나유라 앞에 나타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나유라는 철진진이 형리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극이 일어날 당시 철진진의 나이는 불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형리들은 하후란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린 철진진을 발가벗겨 놓고 그녀의 여린 가슴을 비수로 갈랐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후란이 보는 앞에서 철진진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도 하후란은 끝내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자백을 해봐야 자신들 모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하후란은 형리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었다.

하후란이 자살한 후 형리들이 철진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후란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져 처형당하면서도 철진진의 처리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유라는 어린 철진진 역시 형리들에게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흐흐흐! 오 년 만에 모녀가 상봉한 소감이 어떻소? 비록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철목풍은 마혈이 찍힌 채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그녀가 던져준 장보도가 들려 있었다.

나유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신음을 토했다.

... 오 년 전 그때 진진이를 구해간 게 철목풍 네놈이었느냐?”

그녀의 물음에 철목풍 대신 철진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오년 간 양부(養父)의 슬하에 숨어서 네년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려왔다!”

철진진, 아니 하후진진은 철목풍의 양녀가 된 상태였다.

 

오 년 전, 철목풍은 철고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단부의 내정을 염탐하기 위해 은밀히 달단부에 잠입했었다.

그러다가 하후진진 모녀가 갇힌 뇌옥을 발견했으며 그 뇌옥의 어느 빈 감옥에서 죽어가던 하후진진을 구출한 것이다.

나유라가 예상했던 대로 형리들은 하후란을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하후진진까지 짓밟는 만행을 자행했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어린 몸으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하후진진은 기식이 엄엄했었다.

사실 하후란이 혀를 물고 자살한 것도 딸이 형리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육중한 몸 아래 깔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바둥거리는 어린 딸의 무참한 모습에 하후란은 하늘을 저주하며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하후란이 자살해버리자 형리들은 당황하여 하후진진을 뇌옥의 후미진 감옥에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후진진은 사경을 헤매던 중 철목풍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호호호! 구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우하사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후진진은 광기에 찬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나유라는 그런 하후진진을 처연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진아!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달단과 오이라트 양 부족의 갈등이 그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나유라의 말 대로였다.

달단부의 형리들이 자신들의 왕의 여자였던 하후란과 그녀의 딸 하후진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녀들이 오이라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달단부와 오이라트부 사이에 벌어졌던 수다한 격전은 두 부족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오이라트부와의 싸움에서 피붙이를 잃지 않은 달단부의 가정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형리들은 하후란과 하후진진 모녀를 욕보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너와 네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전부 내손으로 처단했단다. 아무쪼록 그때 벌어진 일이 내 본의가 아님을 알아다오!”

나유라는 애절한 음성으로 하후진진에게 애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런다고 네년을 동정해줄 줄 아느냐?”

하후진진은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나유라의 말을 막았다.

!”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모인 나유라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양녀인 하후진진의 침이 얼굴에 튀기자 나유라의 옥용은 굴욕과 회한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하후진진은 그런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바득! 네년 때문에 우리 모녀가 당했던 일을 네년도 경험하게 해주마!”

... 너 설마!”

순간 나유라는 아연실색하며 하후진진을 바라보았다.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목풍이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흐! 너희 모녀가 당한 일을 여왕도 경험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이 애비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철목풍은 나유라의 육감적인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쓸어보았다.

나유라는 철목풍이 하후진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을 깨닫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하후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사악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단순히 겁탈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계집을 너무 봐주는 것이지요!”

하후진진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만행을 당한 하후진진의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청을 들게 하면 이 암캐가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내와의 그 짓을 굶주려왔으니까요!”

하후진진은 작은 발로 나유라의 몸을 툭툭 걷어차며 사악하게 웃었다.

철목풍은 하후진진의 말에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노리개로 주지 않겠다면 여왕마마를 어찌 대접하려는 것이냐? 설마 여왕이 네 의모라고 봐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후진진은 광기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소녀가 쓰려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대원제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거예요!”

허어! 그러냐?”

아쉬워하던 철목풍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번득였다.

그놈들을 데려와라!”

하후진진은 뒤쪽의 사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예 공주님!”

사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이어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오이라트부 무사들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왕님!”

알몸으로 끌려오던 청년들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발견하고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청년들을 본 나유라의 안색도 하얗게 변했다.

청년들은 나유라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6

 

          억지 혼례식(婚禮式) (2)

 

 

신랑이 기가 막혀하는 가운데 혼례가 거행되었다.

비록 맑은 물 한잔과 수탉 한 마리만 탁자위에 올려놓고 맞절을 하는 간단한 혼례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혼례였다.

신랑측의 혼주(婚主)도 있었고 신부측의 혼주도 있었다.

자기의 몸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부려지고 일으켜지는 데야 임청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개방의 전대고수 부부가 주관한 거지같은 혼인이 끝났다.

첫날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식을 마친 후 할머니가 황의소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남자는 원래 밥통 같아서 뭣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단다. 네가 잘 가르쳐야 할 거야. 우린 근처 숲에서 자고 아침에 올 테니 그렇게 알아라.”

...”

할머니의 말에 황의소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범하고 뻔뻔스러운 데가 있는 소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노부부는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혈도가 찍힌 임청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장승처럼 서있을 뿐 옴쭉달쭉할 수도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렇게 벼락 치듯이 혼례를 올리게 될 줄은 꿈엔들 생각지 못했다.

아니 혼례라는 것 자체도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임청우인 것이다.

두 부부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장승처럼 서있는 그를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나를 때리면 아내를 때리는 천한 남자란 소리를 들을 것이고 도망친다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겠지? 우협의 제자도 우협같은 성인군자일 테니 결코 그런 말을 듣지 않겠지? 그랬다간 우협이란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임청우는 화가 나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사부님의 명성을 내가 해칠 수는 없다. 네 말대로 이미 억지로라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부부가 되었으니 너를 때리지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짓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게 나와 부부가 된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 주겠다.)

한데 황의소녀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져갔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내가 좀 엉뚱한 짓을 한 것은 인정해. 난 가끔 이러니까. 하지만, 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었어. 아버지의 부하들은 나를 잡아가려고 하고, 내가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한데... ”

소녀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걸승(妓乞僧)... 아버지의 충실한 개인 그들이 네가 우협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두 도망 가버리지 않았어? ... 이미 그때 결심했어. 너와 혼인하겠다고...”

임청우는 비로소 황의소녀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신과 혼례식을 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수하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과 부부가 된 것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긴 싫었어.”

당돌하면서도 거침없어 보였던 황의소녀였다.

한데 그녀가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임청우는 가슴이 찡해왔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동시에 단전에서 한줄기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막혀있던 혈도들이 순식간에 타통되어 버렸다.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소녀의 어깨에 얹었다.

“...!”

황의소녀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미안...”

임청우도 놀라 그녀의 어깨에서 급히 손을 뗐다.

... 어떻게 혈도를 풀었지?”

황의소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순간이 계속됐다.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이 소저, 아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 데, 그래도 성미는 여간 사나운 것 같지가 않다. 어머니처럼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만... 미리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어머니의 성격은 무시무시하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혼인을 올리게 된 황의소녀도 자기의 뺨을 때리는 둥, 그 성미에 있어서 결코 녹녹한 것 같지가 않다.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다시 농산에서의 괴로운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다.

임청우는 어느 책에선가 본 구절을 떠올리며 혼잣말 처럼 천천히 말했다.

똑똑한 남자는 나라를 세우고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망친다고 하던데...”

! 나라를 세우기나 하라구. 망치는 건 그 이후의 문제니까.”

황의소녀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이런 산속에서 꼬마들이 반역을 획책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침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깜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임청우가 막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슈우!

침실 안쪽에서 뭔가가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오척 단구에 뚱뚱한 몸을 한 중년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침실에는 거실과 연결된 방문 말고는 작은 창문 밖에 없었다.

임청우는 어떻게 뚱뚱한 중년인이 침실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데 뚱보 중년인은 당황하는 임청우를 보며 오히려 놀란 듯했다.

? 들은 것과는 다른데.”

사삭!

임청우는 번개처럼 자기의 얼굴을 더듬고 물러서는 손을 느꼈다.

임청우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뚱보 중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뭘 칠한 것도 아닌데...”

그때 임청우 뒤에서 황의소녀가 나서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혹시 칠절 중 비객(飛客)이라 불리는 소대협(蘇大俠)이 아니신가요?”

맞아, 내가 바로 비객 소도성(蘇道盛)이다. 넌 누구길래 어린 아이 주제에 날 알고 있는 것이냐?”

중년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키가 작고 뚱뚱해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인,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라는 칠절 중의 비객 소도성이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그 뚱뚱한 몸이 어떻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리가 길기가 하나 몸이 날렵해 보이기를 하나...

굴러다닌다면 믿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황의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천하제이(天下第二)의 경공술을 가지신 비객 소도성을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겠어요?”

하하핫! 내가, 이 비객 소도성이 천하에서 두번째라고? 그것 참 웃기는군. 그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있으니 한번 놀아보자구나. 그래 그럼 제일은 누구냐?”

소도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청우는 소도성이 말한 <>라는 소리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 너를 찾고 있는 검주 유소기지 누구겠나?”

그가 왜 나를 찾습니까?”

하하핫! 너는 그에게 볼일이 없겠지만 그는 아마도 단단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소도성이 임청우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검주 유소기의 임청우에 대한 볼일, 두 말할 것도 없이 몽선도를 뺏으려는 일이었다.

황의소녀가 다시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무림칠절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을 걸요?”

마면혈도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무비옹을 믿고 있는 모양이군.”

소도성이 가소롭다는 말했다.

황의소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보다 빠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 그는 바로 일왕(一王), 금포염왕이라구요.”

일왕... 그라면 나보다 빠를 수도 있겠지. 설마 일왕이 저 놈의 배후에 있단 말인가?”

소도성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빠르기로 유명한 비객이지만 감히 금포염왕보다 빠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마하니 일왕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죠?”

황의소녀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임청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다시는 우협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부라면 자기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임청우는 소도성에게 말했다.

칠절은 모두 강도를 일삼는 무리입니까?”

소도성의 눈이 번쩍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칠절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은가?”

만만치 않다는 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같이 들리는군요.”

소도성은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그만두자. 나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인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굳이 살인을 하고 싶진 않다.”

황의소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임청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칠절이 다 오는 모양이야. 어서 도망쳐야해. 만약에 검주 유소기와 도군(刀君), 신소(神簫) 등이 도착하면 도망칠 래야 칠 수도 없어.”

임청우의 몸이 움찔했다.

소도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도망치려고? 이 소도성 앞에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정확하게 맞췄어요.”

“...?”

그녀의 서슴없이 하는 말에 소도성이 긴가민가하는 순간이었다.

스스슷!

갑자기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몸이 안개에 휩싸인 듯이 흐릿해졌다.

내 앞에서 달아나겠다? 어림 반문어치도 없은 생각이지.”

소도성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유있게 웃었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번개처럼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날아나갔다.

으헉!”

스팟!

그러나 초가집을 뛰쳐나온 소도성은 채 삼장도 가지 못해 다급한 비명과 함께 더 빠르게 물러났다.

두 개의 나무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있는 눈에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실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황의소녀의 천잠사다.

으으...”

소도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빠른 속도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허리가 잘릴 뻔 했다.

공력이 높아 허리를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천잠사에 닿은 옷은 예리한 검에 베인 듯이 잘라져 버렸고 허리에도 붉게 금이 그어졌다.

놀람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여우같은 년!”

!

소도성이 발을 한번 구르는 순간 그의 뚱뚱한 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헌데 소도성이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슷!

천잠사가 감겨있는 나무 뒤에서 황의소녀와 임청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 도망가야 해! 비객 소도성을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일 순 없어. 금방 속은 줄 알고 돌아올 거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들 사이로 달렸다.

황의소녀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따라가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의 얼굴을 힐끗 보아도 그 검은 얼굴이 진지하게 보인다.

결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마... 경신술도 모른단 말인가? 우협의 제자가...)

어쩌면 우협의 제자이기에 경신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협이라면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일협으로서의 그 가공할 무공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 만전만패의 기인이 아니던가?

!

마음이 급해진 황의소녀는 자기보다 키가 큰 임청우의 허리를 끼고 날아올랐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5

 

             인과응보

 

 

철봉황의 살기 어린 교갈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네년도 저 암중처럼 만들어주마!"

파앗!

뜻밖에도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가 달아나기는커녕 철봉황을 덮쳐오는 게 아닌가?

그자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면음마는 절묘한 역용술과 함께 빼어난 경신술을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어떤 강적에게도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천면음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철봉황이 노렸는지는 몰라도 천면음마는 한쪽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런 몸 상태라면 달아난다고 해도 멀리가지 못하고 철봉황에게 따라잡힐 가능성이 높다.

달아나지 못한다면 먼저 철봉황을 공격하여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자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

대담하게 쇄도하는 천면음마를 향해 철봉황의 검이 벼락같이 그어졌다.

그녀의 이 일검은 빠르면서도 변화가 막측하여 천면음마가 막을 수도 피하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스슥!

헌데 쇄도하는 천면음마의 모습이 갑자기 네 개로 불어났다. 경신술과 보법을 이용한 속임수다.

스악!

철봉황은 흠칫 놀라면서도 그어냈던 검을 놀라운 속도로 회수한 후 비스듬히 내리쳤다.

그녀의 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반응에 네 명으로 불어났던 천면음마의 모습 중 세 개가 갈라졌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가 철봉황의 검을 피하며 쇄도해 들어왔다.

그것이 천면음마의 실체였다.

부악!

단번에 철봉황에게 접근한 천면음마는 오른손을 비스듬이 그었다.

강철 갈고리같이 변한 그자의 손가락에 스치면 금강불괴라 해도 상처가 날 것이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 철봉황은 도저히 천면음마의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순간 철봉황의 입에서 사나운 고함이 터졌다.

!

그러자 막 철봉황의 목을 손가락으로 그으려던 천면음마는 가슴을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휘청했다.

위기의 순간 철봉황은 소림사의 칠십이절기중 하나인 복마사자후(伏魔獅子吼)를 토해낸 것이다.

복마사자후는 일반적인 사자후와 달리 소리를 한 곳에 집중시켜 타격을 가하는 위력을 지녔다.

!”

!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강타당한 천면음마는 허공에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그자가 뿜어낸 패가 안개처럼 확 퍼진다.

!

철봉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쇄도하며 철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어냈다.

"케엑!"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번졌다.

퍼억! 털썩!

세 조각의 육괴가 바닥에 흩어졌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허벅지에서 잘린 채 나뒹군 것이다.

"...!"

헌데 철봉황의 안색도 일변하며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천면음마를 벤 직후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기증은 이내 사라져서 철봉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크크크! 네년은 이제 영원히 본좌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잘렸음에도 악에 바쳐 웃었다.

"헛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해라."

철봉황은 차갑게 일갈하며 검을 흔들었다.

퍼억!

케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두 팔도 성둥 잘려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 자는 두 팔과 두 다리는 모두 잘려나간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이다.

"간단히 죽이지는 않겠다. 지옥에 이르기 전까지 네놈이 그동안 저지른 죄과를 두고두고 참회해라."

스윽! !

철봉황은 얼음같은 표정으로 철검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퍼퍼퍽!

"케에엑!"

끔찍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전신 혈도에서 분수처럼 선혈이 치솟았다.

철봉황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로 그 자의 전신을 난자해 버린 것이다.

끄윽...”

결국 천면음마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혼절해버렸다.

철봉황은 그제야 분이 풀린 듯 검을 거두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휴우! 한 발 늦었구나."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훑어본 철봉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남녀 관계에는 문외한인 그녀였지만 자운 비구니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당혹한 심정이 되었다.

(자운사매의 몸에 파과의 흔적이 없는 게 의외로구나.)

자운 비구니의 몸위에서 출혈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유린당한 건 확실한데 피가 나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조신한 척 해왔지만 사실은 남 몰래 어떤 사내와 통정을 한 것일까? 아니다. 무공 수련 과정에서 처녀의 상징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으니 예단하지 말자.)

철봉황은 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찢어진 승복으로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대충 감쌌다.

"어쨌거나 오늘 일로 자운사매가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할 텐데..."

자운 비구니를 안아든 철봉황은 한숨을 쉬며 토지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쏴아아!

이내 그녀의 모습은 장대 같은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으으..."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토지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들어선 그 인물은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도룡삼첩장을 등에 맞고 순간적으로 혼절했었다.

사실 도룡곡의 비전 절기인 도룡삼첩장은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표적에 닿는 순간 세 번 연속 진동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방비하는 게 극히 어렵다.

막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연이어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고검추는 그 도룡삼첩장에 무방비 상태로 가격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잠시 격심한 고통을 느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고검추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을강기가 몸을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도룡삼첩장의 역도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태을강기가 즉각 반응하며 그 역도를 밀어내었다.

고검추의 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멀리 튕겨져 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룡삼첩장의 역도는 순간적으로 고검추의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고검추는 그 충격에 머리가 흔들려 잠시 혼절했던 것이다.

까무라쳤던 고검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알고 토지묘 밖으로 날아나가고 있었다.

고검추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자운 비구니를 구해간 여인이 바로 자신이 복우산으로 찾아가던 그 철봉황임을...

고검추는 그저 그녀가 대단한 기세를 지닌 여인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비록 정신을 차렸으나 고검추는 즉각 운신은 할 수 없었다.

도룡삼첩장에 당한 충격으로 인해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한 동안 쏟아지는 빗속에 누워 팔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려야만 했었다.

 

"...!"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참혹했다!

낭자한 선혈 속에 사지가 모두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뚱이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누워 있었다.

(... 끔찍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솜씨인 모양이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무참한 모습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헌데 그가 역겨운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할 때였다.

"으으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천면음마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천면음마가 살아있는 것을 알아차린 고검추는 갈등에 휩싸였다.

천면음마는 비구니조차 서슴없이 겁탈한 용서받지 못할 색마다.

그런 인간 말종에게 동정을 보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고검추는 이내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에게로 다가갔다.

상대가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라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으으으... ... 내가 죽어 저승에 온 것이냐?"

고검추가 다가가자 천면음마는 피에 젖은 눈을 치뜬 채 올려다보며 헐떡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자신의 도룡삼첩장에 격살되었다고 믿었던 고검추가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유령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고검추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면음마 옆에 앉았다.

(틀렸다. 이런 몸으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다.)

그는 천면음마의 난도질당한 몸을 내려다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팔 다리가 모두 잘린 것은 치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출혈이 심할 뿐 당장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기 때문이다.

치명상은 철봉황의 검기에 온몸의 경맥이 토막 쳐진 것이었다.

철봉황은 일격에 천면음마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혀서 천면음마가 고통 속에 죽어가게 만든 것이다.

천면음마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1

 

              달단족의 여왕

 

 

여명 무렵이다.

길고 길었던 사막의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뿌려대는 눈부신 햇빛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사막을 가로질러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바득! 산산이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라트(衛拉), 네놈들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 찬 표정인 채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화사한 비단옷 위에 두터운 피풍을 두른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金髮)이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로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인데 한 가지 흠이라면 인상이 지나치게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라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다보니 여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 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젊은 여인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완숙한 관능이 숨 쉬고 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을 막히게 만든다.

금발미부는 한 자루 활을 들고 있으며 등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다.

허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도 한 자루 차고 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섬전 같았다.

그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의 일신 무공은 결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은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였다.

산산!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

 

몽고의 양대 부족 중 하나인 달단(韃靼)부의 젊은 여왕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공주였다.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부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주들 중 한 명을 달단왕과 정략결혼 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나유라였다.

당시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질 수는 없었다.

비록 두 명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스무 살도 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질 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유라는 아들과 딸을 정성들여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헌데 오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이십대 후반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를 두고 한때 독살이라는 소문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라트부 출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라트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 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부를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부를 지배해왔으며 급기야 달단여왕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혈(鐵血)의 간담(肝膽)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딸인 철산산이 피납 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해 온 것이었다.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한 자루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누구냐?”

나유라는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랐다가 나유라 앞에 내려섰다. 음침하고 교활한 이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그렇다. 청포장한은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서 쫓겨 갔던 철목풍이었다.

철목풍은 장포 속의 가슴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 아닌 오이라트부의 신왕(新王)이다. 그자는 숙부인 전대 오이라트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이다.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도 했었다. 철목풍이 달단부와 오이라트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나유라는 그런 철목풍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스악!

그러면서 한 자루 철시(鐵矢)를 빠르게 활시위에 걸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유라는 신궁(神弓)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활 솜씨를 지녔다.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 것이니...!”

짝짝!

철목풍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뻑을 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쪽 사구(砂丘) 너머에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산산아!”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산이를 내놓아랏!”

쐐애애액!

활과 화살을 팽개친 나유라는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어딜!”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쳤다. 그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네놈이...”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으음!”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철목풍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여왕께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최근에 얻으신 장보도(藏寶圖) 말이오!”

철목풍의 말에 나유라는 움찔했다.

그자의 말대로 나유라는 얼마 전 한 장의 장보도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철목풍이 어떻게 알아낸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장보도라니?”

나유라는 내심의 동요를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철목풍은 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소!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쿠빌라이)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비로소 자신의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된다.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그러니 먼저 산산이를 이리 던져라!”

나유라는 차갑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지!”

나유라가 꺼낸 양피지를 본 철목풍은 두 눈을 탐욕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는 철목풍도 동의했다.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이어 철목풍은 뒤에 서있는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 보냈다.

산산아!”

!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산산아! 이제 안심... !”

헌데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금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것은 철산산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산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그 소녀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답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철산산과 달리 소녀는 아주 표독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소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

경악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이어 나유라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가짜 철산산이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6

 

                  억지 혼례식(婚禮式) (1)

 

 

일각 정도 걸었을 때 임청우는 멀리 보이던 불빛을 십장 밖에 두고 있었다.

불빛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따라 숲을 헤맬 때 이 집을 보았었다.

초가집으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청우는 초가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소리는 여전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음성인지 여자의 음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소리는 임청우가 가까이 가는 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당연히 황의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미 나쁜 계집애가 삐쳐서 어디론가 샜나 보다 생각하면서 임청우는 뒷걸음질로 초가집에서 물러섰다.

그에 따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장 정도 물러나도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다만 웅웅 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가까이 가면 작아지고 물러서면 커지는 말소리라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

하지만 용기를 낸 임청우는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다시 초가집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던 사람입니다.”

초가집 문 앞에 이른 임청우는 무게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

갑자기 문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임청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초가집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긴장한 임청우는 쓸 줄도 모르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이 순간에는 그쳐버렸다.

어둠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임청우는 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끌듯이 미끄러뜨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발에 느껴지는 거친 바닥이 자기가 살았던 농산의 모옥과 비슷했다.

임청우는 발끝으로 앞을 더듬으며 살쾡이처럼 소리없이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긴장은 실이 당겨지듯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몸은 자신의 무게를 잊어버렸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

임청우의 발이 각목을 더듬어 냈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의 다리라 생각하며 옆으로 돌았다.

그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임청우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그 푸른 그림자들은 흐느적거리며 날아올라 임청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덮쳐들었다.

카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유부의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임청우는 검을 뽑아 앞에 있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파앗!

청광이 일면서 푸른 그림자가 두 조각이 되었다.

위위위윙!

동시에 그것들은 임청우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

악귀의 울부짖음은 같은 괴성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푸른 그림자들은 다시 배로 늘어났다.

눈앞이 팽팽 돌며 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푸른 그림자들에 갑자기 눈과 입이 생겼다.

크아아!”

임청우가 놀라는 순간에 그것들은 임청우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으합!”

임청우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양손으로 푸른 그림자들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푸른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냄새가 났다.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는 검소한 거실인데 임청우는 그 가운데에 조각조각 찢어진 푸른 천 조각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나오시오.”

임청우는 내동댕이쳤던 검을 주워 칼집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 사람도 아니군.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임청우가 들어온 문의 반대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황의소녀가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임청우는 그녀를 응시하고 물었다.

갑자기 황의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투 제발 좀 쓰지 않을 수 없어? 속이 니글거리지도 않아?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그만 서로 편한 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내게 감히 존대말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 대신...”

“...”

억울하면 너도 나처럼 편하게 말해.”

황의소녀는 빠르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해도 크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까칠한 계집애가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했다.

황의소녀가 자신과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그녀가 싫지는 않다.

임청우도 딱딱한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고 싶다.

미인에게는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임청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황의소녀가 열어놓은 방문에서 농사꾼 차림의 늙은 부부가 나왔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고 온화해보였으며 할머니는 작은 키에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훗날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아이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임청우는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의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있었다.

과묵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천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고 탁자로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저건 우리 부부의 이불이지. 마련한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바꿀 때도 되었어. 그러니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단다.”

임청우는 문득 그 할머니가 자기가 만난 적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저 아이에게 다 들었단다. 네 얼굴이 검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올바르고 기상이 훌륭하니 용모에 그렇게 구애될 것은 없단다. 대장부는 그 행동으로 말하지 얼굴을 파는 것은 기생오라비나 하는 짓이란다.”

임청우는 어리둥절했다.

자기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다고는 할 수 없다. 씻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이 이미 우협 장백승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 황의소녀가 검게 변하는 약을 다시 발랐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며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다독거리며 또 말했다.

효자는 부모의 그릇된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다. 비록 한때는 불효소리를 듣더라도 훗날 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효란다.”

임청우는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

할머니, 대체 무슨...”

흠흠...”

임청우가 말을 하려는 순간 황의소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막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단다 얘야. 우리도 너와 같은 나이에 혼인을 했단다. 아무 말 말고 오늘 밤 여기서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혼례를 올려?)

임청우는 어리벙벙한 심정이 되어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할아버지가 주워 모은 푸른 천들을 받아서 한쪽에 있는 아궁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영감! 오늘이 길일이 맞죠?”

그렇소.”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임청우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혼례준비를 할 테니 너희들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황의소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그녀에게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의 침실은 자그만 했다. 하나의 침상과 밖의 것보다 약간 작은 탁자가 하나 있으며, 벽쪽으로는 낡은 옷장이 붙어있다.

황의소녀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임청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왜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지.”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지.”

“...”

지금 하도록 하겠어.”

황의소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임청우는 다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롱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의소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큰일!

임청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빛나자 황의소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협의 제자, 그리고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며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네가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우협의 제자가 아니라면 넌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은 목숨일 거야.”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더구나 소녀가 큰일을 해보자는 대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가 결심한 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지 않은가?

황의소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쫓기고 있어. 그들은 아버지의 부하들인데 나를 잡아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말거야. 한데, 난 무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임청우가 물었다.

황의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한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거야. 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네가 말하는 큰일인가?”

임청우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그 여자만 죽일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몇 달 동안 무림을 돌아본 바로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첫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너야.”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고 있다.

무림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청우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가...

황의소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아?”

임청우는 야심으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만 같은 눈이다.

한데 그 일과 혼례가 무슨 상관이 있나? 왜 그런 일로 사람을 우롱하려는 거야?”

임청우가 말머리를 돌렸다.

황의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건 거짓말은 약간 했지만 장난은 아니야. 어차피 여자는 시집을 가야해. 그렇다면 적당한 상대를 발견했을 때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나?”

임청우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황의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에게.”

임청우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다니. 난 너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맘대로 해라.”

황의소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벌써 부부싸움을 하느냐? 하지만 그건 침실에서 소리를 낮추고 해야지 방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되는 것이란다.”

임청우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소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말다툼 한번 했다고 여자를 버리고 떠날 셈이냐? 이 할머니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할머니는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리고 임청우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콰득!

너무도 신속하고 재빠른 솜씨에 임청우는 꼼짝 못하고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벌써 할머니가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임청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오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풀고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란다. 다시는 여자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녀는 임청우의 혈도를 다시 풀어줄 기세였다.

그때 황의소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풀어주지 말아요. 도망가고 말거예요.”

걱정 말거라. 우리 부부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우협의 제자란 말예요.”

!”

황의소녀의 외침에 할머니는 놀란 듯이 임청우를 다시 보았다.

임청우의 왼손에 들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 얼핏 보기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그 검을 보는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우협의 제자였구나. 우협께선 안녕하시냐? 만나거든 개방의 종가(宗家)부부가 안부하더라고 전해라.”

혈도를 풀어주면 절 버리고 도망 가버릴 거예요.”

황의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애야, 네 사부께선 우리 개방의 은인이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선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일단 혼례를 치르고 나면 풀어주고 사죄하마.”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4

 

                  하룻강아지의 용기

 

 

"흐흐흐 그렇다! 내가 바로 천면음마다.."

등천하는 두 눈을 광기로 번들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악명 높은 색마 천면음마임을 자인한 것이다.

... 그런...”

짐작은 했지만 자신을 납치해온 자가 천면음마라는 사실에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었다.

호천무맹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천면음마에게 사로잡혔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짐작이 간 것이다.

본좌는 호천무맹에 속한 문파의 계집들이라면 노소를 불문하고 해치워온 건 네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천하, 즉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희롱하며 음험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네년에게도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가슴을 터트릴 듯 움켜쥐며 낄낄거렸다.

"... 아미타불! 시주는 정녕 신불(神佛)의 심판이 두렵지 않나요?"

자운 비구니는 고통과 분노에 치를 떨며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흐흐흐... 본좌가 아니라 네년 자신의 처지나 걱정해라."

천면음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의 저고리를 움켜쥐었다.

"... 안돼요 악!"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천면음마가 그녀의 승복 저고리를 거침없이 찢어냈기 때문이다.

"흐흐흐... 기막힌 젖가슴이로군!"

저고리가 찢어지며 드러난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본 천면음마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아랫도리도 구경해볼까?”

이어 그자는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 치마로 손을 옮겼다.

"... 아미타불! 시주...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는 부처님을 모시는 비구니랍니다."

천면음마의 두 손이 자신의 치마 고름을 푸는 것을 느낀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어리석구나! 네년이 비구니라 날 더 미치게 한다는 걸 모르느냐?”

천면음마는 그녀의 애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치마를 벗겨 내렸다.

!”

자운 비구니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죽일 놈!)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는 것을 본 고검추는 치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여자를 강제로 농락하는 자들에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

헌데 바로 지척에서 보통 여자도 아니고 비구니가 유린당하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 천면음마를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검추는 잘 알고 있었다.

고검추 자신은 겨우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룻강아지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천면음마는 숱한 문파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여자들을 겁탈해온 희대의 색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검추 자신은 천면음마의 상대가 못 된다.

무작정 뛰쳐나가 공격해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겁탈하는 데 온 신경을 쏟을 때를...

 

"흐흐흐 비구니는 제법 오랜만이군."

천면음마는 두 눈이 벌개진 채 자운 비구니의 몸에 올라갔다.

한데 그자가 막 자운 비구니를 욕보이려는 순간이었다.

"죽일 놈!"

돌연 천면음마의 귓전으로 사나운 폭갈이 들려왔다.

콰창! 파앗!

동시에 토지묘의 신상이 부서지며 그 뒤에서 한 줄기 인영이 득달같이 뛰쳐나와 천면음마를 덮쳤다.

그 인영은 물론 고검추였다.

기회를 엿보던 그가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천면음마를 덮친 것이다.

고검추는 은발마희 옥여상에게서 구성의 태을강기를 전수받았으나 아직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연마한 혈전삼식의 제일식 분뢰개벽으로 천면음마를 공격했다.

꽈르르릉!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은은한 우뢰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줄기 역도가 일어나 천면음마를 후려쳐갔다.

"!"

!

막 자운 비구니를 유린하려던 천면음마는 기겁하면서도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고검추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신속한 반응이었다.

사실 단순히 경신술만이라면 천면음마는 사신각주나 옥면마성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직!

그 때문에 고검추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재빨리 옆으로 구른 천면음마의 몸 위를 지나쳐 토지며 입구쪽의 바닥을 박살냈다.

웬놈이냐?”

스팟!

고검추의 기습을 흘려보낸 천면음마는 바닥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내려섰다.

"!"

헌데 토지묘 입구쪽에 내려서던 천면음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기습한 자가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크크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군."

고검추를 일별한 천면음마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공격을 늦추면 안된다!)

!

일격이 실패했지만 고검추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천면음마에게 돌진해갔다.

반격의 기회를 주면 자신이 패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꽈르릉!

쇄도하며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다시 우레성이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분뢰개벽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천면음마에게 같은 수법이 두 번 씩이나 통할 리 없었다.

"크크크 귀여운 놈이로군!"

천면음마는 고검추가 덮쳐오는 것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순간 그 자의 모습이 꺼지듯이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공격 대상을 놓친 고검추는 기겁했다.

!

직후 고검추의 등판으로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미 뒤로 돌아간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등에 강력한 일장을 가한 것이다.

! 콰쾅!

헌데 맞은 것은 한번인데 충격이 연달아 두 번 더 고검추의 몸을 흔들었다.

"!"

고검추는 척주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퍼엉!

그와 함께 고검추의 몸은 토지묘 밖으로 튕겨나갔다.

철퍽!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간 고검추의 몸은 빗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팽개쳐갔다.

부르르!

세차게 나뒹군 고검추는 한 차례 몸을 떨고는 축 늘어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 시주!"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혼절했다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천면음마의 반격을 받고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을 보았던 것이다.

"흐흐흐! 도룡삼첩장(屠龍三捷掌)에 맞았으니 척추가 박살나 뒈졌겠지."

천면음마는 빗속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고검추를 내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자가 고검추를 친 장법은 일격으로 세 번의 충격을 반복해서 가하는 도룡곡 비전의 절기다.

내공을 순차적으로 토해내서 표적을 때리고 돌아오는 힘을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는 장법인 것이다.

그 때문에 가격당한 상대는 연이어 삼장을 얻어맞는 셈이 된다.

능력도 안되면서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낸 대가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천면음마는 방금 전의 일격으로 고검추를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시 자운 비구니를 향해 돌아섰다.

... 죽여라!”

자운 비구니는 자신의 알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악을 섰다.

이년아. 죽여줄 테니 너무 재촉하지는 마라.”

천면음마는 음험하게 웃으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왔다.

곧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렸다.

정말... 정말 아깝구나.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한 번 즐기고 버려야 하다니...”

천면음마는 혼절한 자운 비구니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바로 그때였다.

"... ... !”

천면음마의 등 뒤에서 천동치는 듯한 여인의 노갈이 들려왔다.

쩌억!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천면음마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

!

자운 비구니의 몸 위에 엎드려있던 천면음마는 대경실색하면서도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자의 이같은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쩌억!

바닥을 구르는 천면음마의 몸 위로 새파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피한 천면음마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토지묘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

헌데 놀랍게도 스치고 지나갔던 검기가 낫같이 홱 휘어지며 천면음마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 참마회선검강(斬魔廻旋劒罡)!"

천면음마의 입에서 경악에 찬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퍼억! 후두둑!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솟구쳤다.

천면음마는 궤적을 바꾼 검기를 피하지 못해서 왼쪽 허벅지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은 것이다.

콰당탕!

하마터면 허벅지의 뼈까지 베일 뻔한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화라락!

동시에 토지묘 안으로 날렵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인데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 흑의여인의 미모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대단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명공이 빚은 듯 단아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를 지녔지만 흑의여인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는 도도하고 오연하기 이를 데 없다.

조각같은 여인의 얼굴에는 서릿발같은 위엄이 깔려있어서 간담이 작은 사내라면 감히 마주 바라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헌데 아름다운 외모와 고고한 분위기에 비해 여인의 차림새는 질박할 정도로 평범하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질끈 묵었으며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상당히 오래 입었는지 빛이 바래있다.

여인은 어떤 치장도 하지 않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오른손에 비껴들고 있는 석 자 네 치의 투박해 보이는 장검뿐이다.

마치 전쟁의 여신이 인간 세상에 하강한 듯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다.

헌데 세차게 퍼붓는 폭우 속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은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의 몸에서 무형의 강기가 흘러나와 빗물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인의 내공은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 흑의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토지묘가 갑자기 비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 철봉황(鐵鳳凰)!"

흑의여인을 본 천면음마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헌데 철봉황이라면 고검추가 호천무맹을 찾아가서 만나려던 여인이 아닌가?

흑의여인, 즉 철봉황은 자운 비구니를 구하기 위해 천면음마를 추적해 왔을 것이다.

빠직!

토지묘 안에 내려서던 철봉황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폭사되었다.

자운 비구니가 발가벗은 채 혼절해 있는 발견한 때문이다.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천면음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0

 

              최초의 살인

 

 

(허억!)

막 철산산의 애처로운 육체를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일어났다.

... 네놈은...?”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 끝을 밟고 표연히 서있었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특이하게도 이 소년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타는 듯 붉은 색의 바람막이, 즉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피풍의가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그러자 드러나는 소년의 양쪽 허리춤에는 각기 칼과 검 한 자루씩이 꽂혀있다. 폭이 얇은 칼과 반대로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이다.

칼의 이름은 파천마도(破天魔刀)고 검의 이름은 낭아신검(狼牙神劍)이다.

이검한-!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대과벽 중간쯤에 숨겨져 있는 현음동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준 철익신응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과벽에서 곤륜산 남쪽에 자리한 장춘곡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된다.

가려면 못갈 것도 없지만 열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현음동천에 머물면서 서역사천왕의 무공을 연마하며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늘 밤 현음동천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라와 본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철목풍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철목풍은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모습에 방심하게 되었다.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보면 안되는 장면을 보다니...!”

철목풍은 이검한에게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죽어랏!”

그리고는 일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카카캉!

철목풍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잔양강살(殘陽罡煞)!”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인데 스치기만 해도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철목풍이 날린 잔양강살이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 저럴 수가...!”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의 몸이 그저 움찔했을 뿐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의 하나인 적룡풍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에 지금 이검한의 내공은 철목풍보다 두 배 이상 심후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철목풍이 구사한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는 이검한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다.

... 죽여랏!”

철목풍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이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자는 부하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자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 해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 판단되면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와아!”

죽여라!”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케에엑!” “크에엑!”

그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퉁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뒹군 장한들의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깨져있었다.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철목풍과 포대붕도 이검한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달아나야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에에엑!”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고 보자!”

피이이잉!

이어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께 철목풍의 몸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철목풍은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검한은 난생 처음 살인을 한 탓에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들자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헌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렸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이검한이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을 상대해본 후였다.

철목풍조차 이검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간단히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목풍에게 겁탈 당할 뻔한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알몸을 본 때문이다.

(누란왕후나 현음마모님과는 또 다르구나!)

중심부에 소담스러운 황금색 춘초(春草)가 덮여있는 철산산의 아랫도리를 훔쳐보며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인들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여 똑같을 수 없다.

하물며 이검한이 본 누란왕후 흑요설이나 현음마모의 알몸은 난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반면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 소녀다.

황금색 솜털로 덮여있는 철산산의 중심부를 본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검한이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비밀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현음마모의 몸을 오랫동안 품어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든다.

(다행히 수혈이 짚혀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검한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 보낸 이검한이건만 가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포대붕은 이검한이 철산산의 알몸에 손을 대자 아연긴장했었다.

하지만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포대붕이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포대붕의 아내인 교숙하의 무덤이었다. 철목풍에게 납치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인...

포대붕은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아내의 시신을 안장한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혈이 풀려 정신을 차린 철산산은 벽안을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철산산은 아버지뻘인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늠름해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뺨을 살짝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감사는 무슨...!”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자님!”

고개를 숙인 포대붕은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韃靼王府)의 큰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 분골쇄신으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그의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대붕의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포역사?”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호위도 대동하지 못하신 채 속하를 추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포대붕의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이 포대붕에게 물었다.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저쪽입니다!”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대붕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이검한의 그 신쾌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벌렸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보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천산산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어 미소를 지었다.

(산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소녀의 은밀한 설레임 속에 서역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5

 

               쫓기는 소녀 (2)

 

 

아람드리 나무가 즐비한 숲속을 황의소녀는 순식간에 십여 리나 달렸다.

숲속으로도 오솔길은 나있고, 두 갈래의 오솔길에 마주치게 되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황의소녀는 혈도를 짚은 채 겨드랑이에 끼고 왔던 임청우를 오른쪽 길 옆 숲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임청우는 장작처럼 뻣뻣하게 던져져 수풀 속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지만 이내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곁에 내려앉기도 했다.

잠시 후, 길게 바람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기걸승 세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 역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거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벌써 며칠 째 종남산에서 술래잡이라니...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데 막상 잡을 순 없고...”

노파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거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냐?”

그쪽으로 가기는 아마 갔을 거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린 역시 소저를 잡지 못할 거요. 아마도 소저에겐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어려서부터 장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 깊고 깊은 심처에서 그녀가 어떤 재주를 배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 재주도 없고 단지 우리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아직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소?”

거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파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그건 이상해. 더구나 소저의 몸에선 끊임없이 만리향 냄새가 풍기는데 말이야.”

문득 중이 입을 열었다.

소저는 주인을 닮았소. 도무지 그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질 않소.”

거지와 노파가 흠칫했다.

중이 계속 말했다.

우린 주인을 대하듯이 소저를 대해야 할 것 같소. 주인의 생각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명령만 충실히 수행하듯 소저의 생각을 예측할 필요 없이 무작정 쫓기만 하면 언젠가는 소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자기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쫓는다. 우린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주인이나 소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노파와 중은 만리향의 냄새가 흐르고 있는 왼쪽길로 주저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지는 오른쪽 길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그들을 뒤쫓아 갔다.

임청우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을 죽이려 하는 건가? 내가 책에서 보고 배운 건 모두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었단 말인가?)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듣기로는 노파 등의 주인이란 사람은 황의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락!

갑자기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임청우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임청우는 자신의 눈까풀이 무거워져 내려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혈도가 찍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청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숲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리고, 그 땅을 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눈앞에는 영롱한 두 개의 별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멍청이! 이제야 깨어났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임청우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영롱한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임청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푹 자고 난 덕분인지 몸이 아주 홀가분했다.

비록 미음 한 그릇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허기도 사라졌다.

몸이 편해진 탓인지 황의소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불쾌한 감정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확인하며 임청우는 물었다.

? 나를 이리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남을 잘 속이기 때문이야.”

황의소녀가 해실해실 웃으며 대답했다.

임청우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는 속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쓰륵쓰륵!

아래쪽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지가 기우뚱거린다.

그들이 있는 곳은 키가 이십 여장에 달하는 거목의 가지 위였다.

임청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속이 좁은 사람이나 여자와는 다툴 바가 못 된다 했다. 바람소리거니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공간에 가득한 바람만 느껴질 뿐 땅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려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우며 황의소녀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말을 던졌다.

임청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층층으로 얹혀진 가지들 중 하나를 내려왔을 때 위쪽에 있는 소녀가 또 던지듯이 말했다.

검주 유소기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내가 보기에 넌 유소기를 영원히 속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해. 또 유소기의 손아귀를 벗어날 만한 능력도 없고.”

휘익!

임청우가 손과 발을 멈추고 있는 앞으로 황의소녀가 나비가 날 듯 부드럽게 날아내려 왔다. 그녀가 내려선 가지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황의소녀는 임청우에게서 망설임을 읽고 말했다.

나도 쫓기고 있지만 사실 기걸승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들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들은 나도 어떻게 하지 못했어.”

임청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의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뱉었다.

나도 너 정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뭔가가 임청우의 양쪽 귀에 걸려있었다. 그의 발을 묶은 적이 있던 천잠사였다.

임청우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황의소녀가 돌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는 우악스럽게 황의소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난 죽을 고비라면 수백 번도 더 넘겼다. 우리 어머니조차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셨다. 그런 나를 죽고 사는 것으로 협박하려하다니...”

임청우의 손힘은 황의소녀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할 만큼이나 엄청났다.

그의 몸속에 있는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밖으로는 뿜어낼 수 없다하지만 고강한 공력임에는 분명한 때문이다.

우협의 제자가 여자나 괴롭히는 사람이야?”

황의소녀가 작지만 뾰족하게 소리쳤다.

순간 임청우는 뱀에 물리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청우에게 있어 마음속의 사부인 우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백번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황의소녀의 손목을 풀어준 임청우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지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임청우는 늘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발아래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임청우는 황의소녀가 기걸승 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리향의 향기를 높은 나무 위에서 바람에 실어 날려버리는 것이다.

기걸승이 어느 정도 높이 까지 솟아오르지 않고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되질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왜 이 근처에서만 맴도는 거지?”

임청우가 물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황의소녀는 화난 듯이 쏘아붙이며 나비처럼 날아서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협의 제자인 것 같은 이 녀석은 어떤 면에선 전혀 우협을 닮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이나 상하게 하는 짓 따윈 진짜 우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임청우도 묵묵히 황의소녀를 따라 나무를 내려갔다.

잘 들어! 너나 나나 여기 계속 있다간 다 죽어.”

이윽고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잠자코 내 뒤만 따라와.”

임청우는 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의소녀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쁘게 눈망울을 굴리며 숲속으로 유연한 물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만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

 

숲속을 헤맨 것도 두 시간 정도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그녀는 여전히 그 숲 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중요한 그 무엇을 찾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마침내 임청우가 물었다.

대체 찾고 있는 게 뭐야?”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황의소녀가 빠르게 말했다.

어두워서 쉽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찾아야 돼. 그곳만 찾을 수 있다면 넌 유소기에게서, 난 기걸승으로부터 쫓기지 않아도 될 거야.”

임청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이루려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전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이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포함된다면 우린 전혀 찾을 필요가 없지.”

임청우의 말에 황의소녀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임청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우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남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나도 좋아하진 않아.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해. 설혹 여기에 그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대현(大賢)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인다고 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은 또한 아주 현명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이나 아주 현명한 것이나 모두 일반에서 유리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없어 생기는 혼돈일 것이다.

이 순간에 황의소녀의 심정이 그랬다.

임청우가 어리석은 것인지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면, 남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고금에 걸친 불변의 진리 중 하나일 것이다.

 

쓰륵! 쓰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임청우가 앞장을 서고 황의소녀가 뒤따른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갔다. 그는 황의소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임청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경신술을 배우지 못했었다. 물론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바보같이... 경신법을 펼치면 금방 갈 텐데...)

황의소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면 되지 꼭 하늘 가린 곳이라야 돼? 허세는 혼자 다 부리면서...)

임청우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는 이미 알았다.

그녀는 임청우가 잘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임청우를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삿!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따라오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불빛을 향해 갔다.

비록 경신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몸속에는 용조층층공이란 공력이 숨 쉬고 있기에 그 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이전버튼 1 2 3 4 5 6 ··· 8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