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무협소설'에 해당되는 글 187건

  1. 2020.04.18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2
  2. 2020.04.18 [환골탈태] 제 12장 마두속출
  3. 2020.04.17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1
  4. 2020.04.17 [환골탈태] 제 11장 벽화 속의 비밀
  5. 2020.04.16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3 1
  6. 2020.04.16 [환골탈태] 제 10장 가짜 의성이 준 기연
  7. 2020.04.15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2 1
  8. 2020.04.15 [환골탈태] 제 9장 동분서주
  9. 2020.04.14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1
  10. 2020.04.14 [환골탈태] 제 8장 무덤에서의 하룻밤 1
  11. 2020.04.13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12. 2020.04.12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13. 2020.04.11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1
  14. 2020.04.11 [환골탈태] 제 7장 석관 속에서 벌어진 일 2
  15.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16.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1
  17. 2020.04.10 [환골탈태] 제 6장 암호랑이라 불리는 여인
  18.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19.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1
  20. 2020.04.09 [환골탈태] 제 5장 비석을 찾아서
  21. 2020.04.08 [환골탈태] 제 4장 금강옥액의 기연
  22. 2020.04.07 [전설신검] 제 20장 난감한 관계 2
  23. 2020.04.07 [금포염왕] 제 20장 어둠 속의 눈동자 2
  24. 2020.04.07 [환골탈태] 제 3장 신세의 비밀
  25. 2020.04.06 [금포염왕] 제 20장 어둠 속의 눈동자 1
728x90

제 5장

 

         피로 물들다 (2)

 

--- 더 많이 알고 싶다.

 

이것은 현천록이 생사탄을 나오기 전에 보초에게 했던 말이다.

어쩌다보니 생사탄과 구장심조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진양진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은 그 의문들은 의문들이고 일단은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은 배워야 뒤에 변신할 수 있다.

현천록은 머지않아 자신도 먼저 생사탄에 들게 되었던 사람들처럼 생사탄과 구장심조의 궁극적인 비밀을 캐기 위해서 세상을 떠돌게 될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지고, 당장은 인생이 회색으로 변하지 않게 마음 속에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진양진인이 시키는 대로 그의 장검을 가지고 현천록은 동굴 입구를 무너뜨려 막았다.

구장심조는 무공과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을 더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검의 힘을 빌리지 못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동굴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시간 정도 노력해서 동굴은 입구에서 삼장여 깊이까지 완전히 내려앉았다.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소리도 밖에서 생기는 어떤 소리도 그 깊이를 뚫고 오가지는 못한다.

입구가 막히고 모닥불이 꺼지자 동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자기 손가락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에게 자기를 안고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도록 시켰다.

그들이 숨은 동굴은 금릉 현무호 동쪽의 자금산 이름모를 골짜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동굴 속을 걷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무질서한 돌뿌리들과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 그리고 움푹꺼진 웅덩이와 벼랑들이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징그러운 벌레나 독충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뒷발에 중심을 두고 앞발로 더듬게. 그리고 천천히 중심을 이동시키며 나아가야 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현천록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앞을 막은 바위를 가볍게 타고 넘었다.

진양진인의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자네는 몸이 아주 가볍군.]

현천록은 암흑 속에서 실풋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가둔후에 도망쳐온 일곱째 장군묵과 현천록이 똑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기절초풍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것을.

현천록이 말했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눈을 감게. 시각이란 참으로 번다한 것이네. 사람의 감각은 아주 특이해서 가장 분명한 것 같은 것이 실은 가장 둔한 것이라네.]

현천록은 그의 말에 어떤 현기(玄機)가 깃들어있음을 느꼈다.

즉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감으나 뜨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눈보다는 귀가 더 정확하네, 귀보다는 코가 더 확실하고, 그보다 더 정확한 건 바로 감각을 넘어서서 느끼는 것이라네. 실상 속된 경지를 벗어나려면 오감에 의지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지.]

진양진인은 노래를 읊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 하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여 내 속에 받아들이네. 내가 나의 존재함을 껍질 밖에 알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내게 그들이 있음을 알려오네.

 

현천록이 말했다.

[물 냄새가 나는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주 총명하군. 그럼 이제 자네 코앞에 있는 튀어나온 바위를 조심하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은 채 동굴 속에서 삼리는 족히 걸었다.

거리는 겨우 삼리정도지만 그 어려움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진인이 말하는 대로 눈을 감고 그렇게 걷고 있는 동안, 현천록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였다.

암흑 속의 모든 상황이 마치 자기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점점 감각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진양진인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현천록은 물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곳으로 암흑을 헤치며 걸어갔다.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이 주위를 느낄 때마다 참기 힘든 미묘한 흥분이 일어난다.

그것은 기쁨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류의 희열이었고 맺혀 있던 무엇이 풀어지는 해방감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속 벼랑을 뛰어 넘어 좀 더 아래로 내려간 현천록은 마침내 물가에 도착했다.

멈추어 섰지만 솔직하게 말해 더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굴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두 팔에 들리운 상태에서 손가락 두 개로 현천록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현천록은 물이 어둠보다는 밝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물은 희게 보였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해서 들어왔고 진양진인이 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그 동굴이 범상한 동굴이 아님을 알았다.

동굴 속에 있는 물은 물이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물이었다.

물은 작은 강을 이루고 소리없이 흐른다.

강의 폭은 이십 장 정도고 깊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아무 소리도 없는 중에 그 엄청난 물이 발 앞에서 흐른다는 사실이, 그것을 느낀다는 사실이 현천록에서 숨이 막히는 어떤 희열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서 장엄함이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감각을 향수(享受)할 뿐이지만 마음은 무심에 가까워져 있고 발은 뿌리를 내린 듯이 굳건해져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지하의 강물처럼 시간도 조용히 흘러갔다.

현천록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진양진인을 내려놓았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넨 자네 감각을 해방시켜주었네. 지금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곧 보이지 않는 감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될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이건 무공인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초상감각(超常感覺)이지. 상승무공을 익히는 기틀일 뿐이네.]

[초상감각...]

[이 감각을 얻는 자는 상승무공을 빨리 익힐 수 있으나 익히지 못하는 자는 백년을 수련해도 상승무공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지. 노도가 자네 자질을 잠시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는데... 자넨 아주 특이하군.]

현천록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특이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가 달한 그 정도의 초상감각에 이르려 하면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삼년은 수양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일세. 그것도 무공을 상당히 지닌 상태에서! 한데 자네는 불과 한 시간 남짓 사이에 그런 경지에 달했으니... 아주 놀랍네.]

현천록이 웃었다.

[그렇게 칭찬할 것 없습니다. 도장과 내기를 했으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요.]

진양진인은 빈말이 아니었지만 현천록이 그렇게 말하자 그게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했다.

화제를 돌렸다.

[우리를 쫓는 그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네. 동굴을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일세.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어떤 방법을 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노도는 그의 손에 중상을 입었네. 노도의 공력이 전적으로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찢어발긴 시체가 되었겠지.]

얼굴에서 쓴 웃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양의신공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로 노도가 살 수 있는 것은 스무날 남짓하네. 상처가 너무 엄중하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오직 양의신공을 익힌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손을 벗어나는 방법인가요?]

진양진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멀쩡할 때도 하지 못했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기적을 꿈꿀 수 있겠는가?]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들을 벽돌처럼 재단하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노도는 원래 옛 친구와 활몽루에서 만나기로 했었네. 한데 그가 오지 않고 마왕같은 그가 왔었지.]

진양진인의 아주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같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는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 무당파의 창허진인이었던 분이지. 이제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니 그대로 말해주겠네. 창허진인은 본파에서만 전해오는 이름으로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

진양진인은 자기가 윗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창허진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허진인이 무당파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옛날이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는데, 무공을 배우기에는 이미 근골이 굳어있어서 적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가장 기본적인 무공부터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가 놀랄만큼 빨랐다.

빨리 배웠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펼칠 수 있었고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이 더해져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모두 장삼봉 조사 이후로 최고의 인재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창허진인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무당파의 모든 무공을 다 익히도록 했다.

창허진인은 존장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익히면 익힐수록 진전이 더욱 빨라졌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서 당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인 장문인의 무공을 뛰어 넘었고,

다시 이년이 지났을 때는 장문인을 삼초 이내에 패배시킬 정도의 무서운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년 쯤 무당파내에서 제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첫 번째 소문은 좋은 소문으로 창허진인이 벌써 신선이 되었거나 아니면 이전부터 신선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당에 들어온 지 오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무공을 그처럼 빨리 익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추측이 그 소문의 근거였다.

장문인이나 장로들도 이 말에는 관심을 보였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나 두 번째 소문은 달랐다.

창허진인이 장경각(藏經閣)에 숨겨져 있던 마공(魔功)들을 익힌다는 소문이었다.

무당의 장경각에는 무당파의 고수들이 마두들을 제압했을 때 빼앗아 봉인해놓은 마공비급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무당의 제자로 무당의 무공을 자기에게 허용된 이상으로 익히는 것은 다만 징계를 받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발견되는 즉시 죽임을 당한 후에 파문된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장문인은 무당의 이십칠대인 광화도장(光華道長)이었다.

의혹을 그대로 묻어둘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리자 광화도장은 먼저 강호에 흩어져 있던 모든 제자들을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당산으로 소집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전 제자들 앞에서 심판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2

 

            마두속출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지독한 거지들이 귀신을 본 듯이 놀라 달아나다니...!)

막비강은 어리둥절하여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인물은 백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헌데 야위기가 가죽이 뼈만 감싼 것 같았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선 전광(電光) 같은 광망(光茫)이 번뜩였다. 흡사 무덤에서 방금 뛰쳐나온 강시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 사악한 무공을 익힌 자다!)

막비강은 비록 이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백포노인은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아, 아까 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냐?]

막비강은 비록 사실대로 말해도 상대방이 금방 찾아낼 수는 없다 여기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가자!]

[그곳은 개방의 총단인데...!]

[흐흐흐! 그깟 거지 떼 따위가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

파팟!

백포노인은 음침한 웃음을 터뜨리며 막비강의 팔을 움켜잡더니 쏜살같이 대석비곡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섯 거지는 얼마 도주하지 못했을 때 뒤쪽에서 세찬 파공성이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포노인이 막비강을 팔을 잡아끌고 이미 삼 장 밖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호면개 도금은 타구봉을 휘둘러 나머지 네 노개와 동시에 걸음을 멈춘 후 물었다.

[추명염왕(追命閻王) () 선배님은 무슨 일로 저희들을 추격하십니까?]

(이자가 흑도팔흉(黑道八凶) 중의 추명염왕!)

백의괴인에게 손목이 잡혀 있던 막비강은 깜짝 놀랐다.

 

추명염왕 곽여해(郭餘海)!

 

그자는 흑도에서도 악명이 높은 살인마들인 팔흉(八凶) 중 한 명이었다.

팔흉은 육요(六妖), 칠절(七絶)에게는 다소 손색이 있으나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호면개 도금이 개방 방주라 하지만 추명염왕 같은 거마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흐흐! 본좌가 쫓아온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느냐?]

추명염왕은 음산하게 내뱉음과 동시에 일장을 격출했다.

다섯 명의 거지도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타구봉을 휘둘러 반격했다.

[!]

추명염왕은 재차 일장을 뻗어냈다. 그러자 다섯 명의 거지는 비틀거리며 각자 세 걸음씩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호면개 도금의 함성을 신호로 다섯 사람은 전력을 다해 또 타구봉을 휘둘렀다.

[네놈들은 죽음을 자초하고 있구나!]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내려놓고 쌍장을 동시에 휘둘러 냈다.

퍼펑!

[으악!]

[커억!]

다음 순간 다섯 명의 거지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지더니 꼼짝하지 않았다. 한 때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불리던 개방의 수뇌 다섯이 추명염왕의 일초를 받지도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다.

(... 무서운 자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흘흘흘! 독하다, 독해! 과연 추명염왕이란 명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난데없이 뇌성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막비강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난쟁이가 한 쪽에 서 있었다. 키는 채 넉 자가 못되지만 양팔이 땅까지 늘어져 있고 눈빛이 아주 음침한 노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악하고 음독한 인상이었다.

막비강은 그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추명염왕은 몸을 돌리며 음랭하게 웃었다.

[흐흐흐! () 난쟁아, 너도 이 일에 끼여들 생각이냐?]

[청구단서는 무림의 지보(至寶)인데 얻으려는 사람이 노부 한 명뿐인 줄 아느냐?]

난쟁이는 말하며 옆의 바위를 흘깃 바라보았다.

[흐하하하! 과연 천이통(天耳通) 삼촌정(三寸釘)의 이목은 놀랍소!]

화라락!

다음 순간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바위 뒤에서 날아 나왔다. 그자는 도포를 의젓하게 걸치고 등에 불진을 짊어진 노인이었다. 차림은 분명 출가인이지만 그 얄팍한 입술과 족제비 같은 눈빛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 누군가 했더니 소면호(笑面虎) 고금(古今) 영감이었군!]

그자를 본 추명염왕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내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두 분은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오. 나 고()가도 이번 일에 한몫 껴야겠소.]

소면호 고금이라 불린 도인은 포권을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삼촌정 정발(丁發)!

소면호 고금(古今)!

 

그자들도 모두 추명염왕과 함께 흑도팔흉에 드는 거마들이었다.

소면호가 끼여들자 추명염왕은 얼굴을 굳히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 고 영감, 아마 너는 이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소면호의 웃던 얼굴이 일변하여 음침하게 변했다.

[추명염왕, 너는 이제 염라대왕(閻羅大王)이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우선 정 난쟁이와 합세하여 너부터 황천으로 보낸 다음 대책을 강구하겠다.]

추명염왕은 상대방이 연합하여 덤비겠다고 말하자 흠칫 놀랐다.

[이리 와라!]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쳐 막비강을 잡아갔다.

[어딜!]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치며 재빨리 덮쳐 와 추명염왕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도리 없이 전력을 다해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소면호! 너는 정말 노부와 싸울 생각이냐?]

[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이때 난쟁이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고 영감의 말이 옳다. 우리는 합세하여 먼저 그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책을 강구하자.]

막비강은 그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비급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싸움질부터 먼저 하다니... 이 틈에 빨리 도주해야지.)

화라라락!

그는 세 사람이 서로 대치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게 섰거라!]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도주하자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솟구쳤다.

이때 난쟁이 삼촌정이 또 일장을 격출하여 추명염왕을 제지시켰다.

추명염왕은 추격을 제지당하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난쟁아, 너의 이 행위는 무슨 뜻이냐?]

난쟁이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저 어린 녀석과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려는 것을 모르는 줄 아느냐?]

[비급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대비석 밑에 있다.]

난쟁이 삼촌정의 말에 추명염왕은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럼 우리는 먼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비급부터 찾아낸 다음 누구의 소유가 될지 결정짓자.]

[그건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려면 어린 녀석을 잡아야 한다. 비급이 숨겨진 정확한 장소를 아는 사람은 저 어린 녀석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빨리 추격하자.]

합의를 본 세 마두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막비강은 사오십 장 가량 달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추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잡으려는 목적이 정확한 장소로 안내해 달라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비급을 찾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다.

초조해진 막비강은 마침 길옆에 울창한 도림(桃林)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추명염왕은 도림 근처까지 추격하여 걸음을 멈추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녀석아, 좋게 말할 때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이 도림을 몽땅 태워 버리...!]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파라락!

갑자기 뒤쪽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추명염왕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난쟁이 삼촌정과 소면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전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놈들도 비급이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마 비석을 산산조각 내서라도 찾아내려 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추명염왕은 더 이상 막비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즉시 삼촌정과 소면호의 뒤를 쫓아갔다.

 

막비강은 도림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천만이었구나!)

그는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비급을 탐내는 흉도들의 무공이 점차 고강한 인물들만 나타나는지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일년 이상을 고생하여 가까스로 대비석의 소재지를 알아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려 하니... 게다가 나 때문에 개방의 다섯 고인들이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자책하던 막비강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시신을 수습해주다가 그들의 절학이 담긴 비급을 얻었던 일이다.

(만약 천하의 기문절학을 모두 수집한다면 내 스스로 절세무공을 창안하지 못할 것도 없다. 타구봉법은 비록 천하무적의 절예는 아니지만 독특한 면이 있는 무공이다. 게다가 개방의 다섯 거지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 시체라도 안장해 주어야겠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티구봉법이 적힌 비급을 얻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곧 도림 밖으로 나가 다섯 거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어 그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금릉삼로 중 청풍개 범개선은 아직 체온이 식지 않았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잘 하면 살릴 수 있겠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에게서 배운 응급치료법을 이용하여 범개선의 전신 혈도를 안마해 주었다.

약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범개선은 호흡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고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범개선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막비강임을 알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고맙네. 수고스럽지만 내 주머니 속에서 약을 좀 꺼내 주게.]

막비강은 상대방의 주머니를 뒤져 몇 가지 환약을 꺼내어 범개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약을 골라 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안마를 계속했다.

또 일각 가량 지나자 범개선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자기의 동문들이 모두 죽었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네 말대로 우리 개방은 결국 참화를 입었구나. 그런데 그 마두는 어딜 갔느냐?]

[그들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범개선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했다.

[그 악랄한 마두가 달려갔다면 이제 우리 개방은 완전히 끝장났구나.]

그는 여기까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막비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추명염왕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느냐?]

막비강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그의 말을 듣더니 만면에 희색을 가득 머금었다.

[그 세 명의 마두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야 될 텐데... 아이야, 방주의 몸에 우리 개방의 절기인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의 비급이 있다. 노부가 방주를 대신하여 네게 기증할 테니 장래에 우리 개방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범개선이 살아있는 마당에 낼름 개방의 비급을 받기가 염치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귀방의 제자가 아니니 개방의 절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범개선은 막비강이 개방 절기가 실린 비급들을 사양하자 한층 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네가 개방의 제자든 아니든 상관없다. 노부는 어차피 추명염왕의 독장(毒掌)을 맞아 앞으로 이삼 일밖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막비강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호면개 도금의 시체 곁으로 가서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꺼내고 허리춤에서 방주의 신물(信物)을 끌러 범개선 옆으로 돌아왔다.

[이삼 일의 시간이면 충분하니 선배님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범개선은 만면에 곤혹의 빛을 가득 머금었다.

[네게 영지옥액(靈芝玉液)이라도 있단 말이냐?]

[아닙니다. 후배에게는 백독을 쫓을 수 있는 천오주가 있습니다.]

범개선은 눈을 번뜩 뜨며 급히 물었다.

[어디 있느냐?]

[후배가 선배님을 업고 천오주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막비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범개선을 등에 업은 후 곧장 소지품을 숨겨 두었던 무덤으로 달려갔다.

 

***

 

그러나 막비강이 무덤에 도착하여 파헤쳐 보니 소지품을 싼 보따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놀람과 조급함을 금치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 좀도둑의 소행이지? 잡히기만 하면 다리뼈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

그가 막 말을 끝냈을 때였다.

[? 좀도둑이 어째?]

휘릭!

돌연 앙칼진 외침과 함께 무덤 옆의 소나무 위에서 누군가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열 여섯 살 가량 된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소녀는 왼손에 조그만 보따리를 든 채 오른손으로 막비강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저분한 녀석아, 너의 낡아빠진 물건들 여기 모두 있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내 다리뼈를 분질러 놓는지 두고 보겠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어린 소녀인지라 웃으며 사정했다.

[착한 누님, 빨리 사람을 살려야 하니 구슬을 주시오. 나는 좀도둑의 소행인 줄만 알았지 누님이 장난으로 그랬는지 모르고 실언을 했소.]

소녀는 막비강이 누님이라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너의 이런 물건은 귀신이나 가지려 할 것이다. 나는 빨리 가서 싸움 구경을 해야겠다.]

보따리를 막비강의 발 앞에 던져 준 소녀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듯이 뛰어갔다.

막비강이 잠시 멍청히 서 있다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상대방은 이미 사오십 장 밖에 나가 있었다.

(이상한 아이로군!)

막비강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 보따리에서 천오주를 꺼내어 범개선의 심장 위에 올려 독을 뽑았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범개선은 체내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오주를 막비강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너는 이런 보주가 있으면서 왜 휴대해 다니지 않느냐?]

막비강은 비급을 찾으려 개방에 들어가 신분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이곳에 숨겨 두고 역용 변장한 경과를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총명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막비강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후 말했다.

[아까 그 여자아이는 싸움을 구경한다면서 대석비곡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아 정말 흉마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우리도 빨리 가서 결과를 알아봅시다.]

[그럼세!]

범개선은 즉시 막비강과 함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석비곡을 향해 질주했다.

 

[... 이럴 수가!]

얼마후 대석비곡에 도착한 범개선과 막비강은 놀라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넓은 석비곡 안은 개방 제자들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골통이 박살나 형상조차 구별할 수 없었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음을 발출하고 있었다.

범개선은 지니고 있는 약물로 이삼십 명의 제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제하여 물어 본 결과 추명염왕과 다른 두 사람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 다음 추명염왕 등 세 사람이 서로 혈전을 벌였는데 최후에 어떤 노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 했다.

막비강이 개방 제자에게 급히 물었다.

[그들은 혹시 비석 밑에서 무슨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소?]

개방 제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더니 모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범개선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제자들을 매장하게 하고 자기는 막비강과 함께 비석 근처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막비강의 시선은 가장 석실의 석벽에 새겨진 한 수의 시구(詩句)에 꽂혔다. 그것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된 시였다.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경지하(傾脂河) 강변의 깨진 비석을 쓰다듬는구나. 영롱한 모습은 신산의 교묘함을 빼앗으니 계수나무 아래서 늦음을 후회 마라!>

 

막비강은 입 속으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더니 돌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어디엔가 경지하라 불리는 강이 있는 게 아닐까?]

범개선이 옆에서 말을 받았다.

[있네. 소흥부(紹興府) 남쪽 약야계(約野溪) 부근에 있는 강이라네. 전설에 의하면 서시(西施)가 목욕물을 그 강에 버려 강물에도 지분(脂粉) 향기를 풍긴다더군. 석벽의 이 조각은 경지하의 경치와 흡사하고 강변에 영롱탑(玲瓏塔)이라는 탑이 있는데, 그럼 이 시구에는 깊은 뜻이 내포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후배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범개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보물을 획득할 의향이 없네. 그러나 자네가 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신쇄골이 되어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네.]

[한 권의 비급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니 선배님께선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후배는 이 벽화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막비강은 신녀비와 강장을 꺼내어 조각의 그림을 긁어냈다.

헌데 그가 벽화를 절반 가량 긁어냈을 때였다.

[흐흐흐! 선인의 유적을 훼손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밖에서 난데없이 차가운 고함 소리가 전해 왔다.

막비강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추명염왕이 석실 입구에 서 있었다.

추명염왕은 절반 가량 파손된 벽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비급은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나도 모른다.]

[노부도 네가 비급이 숨겨져 있는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조각을 파손하느냐?]

[남이야 조각을 파손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감히 본 염왕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네놈은 분근착골(分筋錯骨) 맛을 좀 보아야겠구나.]

막비강도 지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 노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왜 내게 비급의 행방을 묻느냐?]

막비강은 자신이 거지의 모습에서 원래의 용모로 돌아온 것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흐흐흐! 노부는 불에 타 재가 되어도 네놈을 알아볼 수 있다. 하물며 네놈의 목소리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기까지 하다. 그러니 헛수작 말고 순순히 노부의 물음에 대답해라!]

추명염왕은 흉흉한 표정으로 천천히 막비강에게 다가섰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받아랏, 노마!]

피유웅!

돌연 석실 밖에서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짧은 단전(短箭) 하나가 세찬 파공성을 대동한 채 추명염왕을 향해 날아왔다.

막비강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강장을 뻗음과 동시에 신녀비를 휘둘러댔다.

[받아랏, 노마!]

범개선도 개방 제자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쌍장을 동시에 격출했다.

[이 연놈들이...!]

추명염왕은 비록 절학을 지녔지만 강장과 신녀비, 그리고 단전이 동시에 엄습해 오자 감히 소홀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양어깨를 비틀며 몸을 풍차처럼 한바퀴 돌렸다.

!

그러자 밖에서 날아온 단전이 막비강의 강장과 부딪쳐 요란한 음향을 발출했다.

막비강은 그 틈에 수중의 신녀비로 검기를 형성하여 추명염왕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슬쩍 그의 공세를 피해낸 뒤 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린 녀석아, 우선 저 어린 계집년부터 수습한 후 다시 찾아오겠다.]

막비강은 석동 밖에서 들려 온 음성이 바로 자기의 물건을 훔쳤던 소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어딜 가느냐 노마?]

그는 그 소녀의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피독지보(避毒之寶)가 없는 한 추명염왕의 독장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위이잉!

그가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염라장법 중의 절초인 참호양망(斬虎揚茫) 초식을 펼쳐내었다. 그러자 한 줄기 강맹한 바람이 석동 안의 돌 조각을 휘날리며 밖으로 뻗어 나가 눈도 뜰 수 없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5

 

              피로 물들다. (1)

 

 

 

이매봉은 양피지로 묶인 얇은 비급을 넘겨보았다.

겨우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글씨가 작기는 하지만 한번 읽으면서 그녀는 비급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다 기억했다.

[휴우! 그럼 그렇지! 역시 별 것 아니었어! 금강불괴를 깨뜨리는 것보다도 훨씬 쉽잖아.]

이매봉은 어깨에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려면 한 번 쯤은 실험을 해봐야겠지.]

이매봉은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여 한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정말 키가 작은 소인(小人)이 무릎을 꿇고 않아있었다.

얼핏보아서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정교한 밀랍인형 처럼 보였다.

앉아있는 키는 한자가 조금 안되니 선다한들 한 자 반이나 될까말까할 정도다.

그러나 여타 난쟁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란다.

어느 하나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작지 않고 사지는 비례를 잘 이루고 있었으며 오관이 반듯하여 멀쩡한 사람이 그대로 작게 비쳐보이는 것 같과 마찬가지였다.

얼굴로 짐작해볼 때 소인의 나이는 스물 다섯 쯤 된 것 같다.

이매봉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상관숭(上官崇)! 그렇지 않아?]

소인이 말했다.

[속하 상관숭은 오직 명에 따를 뿐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합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었다.

[멍청이! 그럼 조용히 따라와.]

상관숭은 나직히 존명을 외쳤다.

키가 보통사람과 똑같다면 상당한 미남자 소릴 들었을 얼굴이다.

이매봉이 창밖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일단 그녀석을 찾아야겠어.]

 

x x x

 

인시(寅時)가 지나면서 현무호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은밀히 호변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묘시(卯時)가 되면서는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살기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계명사를 힐끗힐끗 살피는가 하면 어떤 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수공을 펼치기도 했다.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호수 면에 어리는 물안개는 현무호를 용왕의 수정궁(水晶宮)처럼 보이게 했다.

땅은 아직 어둡지만 하늘이 먼저 밝아 온다.

그리고 부지런한 잡새들이 모이를 찾아 나는 소리가 들린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도 어언 삼백 여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한데 어느 순간,

 

--- 파앙!

 

어디서 터져나온 소리 때문인지 대기(大氣)가 문풍지처럼 진동했다.

아주 먼곳에서 들려온 폭죽소리 같기도 하고 바로 곁에서 터져나온 큰 소리 같기도 했다.

 

---파앙!

 

이미 경직되어버린 고막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저기닷!]

누군가가 소리치며 몸을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하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곳에서 신기루처럼 한 채의 누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활몽루!

사라졌던 활몽루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휘휘휙!

휙휙!

군웅들이 병기를 뽑아들고 활몽루를 향해서 날아갔다.

번득이는 검광과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번쩍! 번쩍!

활몽루에서 한 거인이 허공을 밟고 걸어나왔다.

[미천한 것들!]

활몽루와 함께 사라졌던 일곱째 장군묵이었다.

[목을 바쳐라!]

장군묵은 고함치며 검을 휘두르는 자의 머리를 낭아봉으로 날려버렸다.

퍼억!

그자의 머리는 산산조각나서 흩어졌다.

[옥황빙서(玉皇聘書)를 내놔라!]

한 노인이 장군묵의 등에 일장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벌써 장군묵의 왼손에 있는 낭아봉은 노인의 배와 가슴을 찢어발기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를 끝으로 노인의 시체는 현무호로 떨어져 버렸다.

장군묵은 평지를 밟듯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갔고, 다시 옥황빙서를 외치는 자가 창으로 장군묵의 목을 찔렀다.

장군묵은 사방은 물론이고 아래 위까지 몰려드는 군웅들로 인해 포위당했다.

[버러지같은 놈들!]

장군묵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창으로 그를 찔렀던 자는 두 개의 낭아봉에 찢어져 형체도 남기지 못했다.

참혹한 모습에 군웅들은 치를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군묵을 공격했다.

장풍과 검광이 풍우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장군묵은 한줄기 바람처럼 군웅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의 찢어진 살점들을 가득 물고 있는 낭아봉이 춤을 추고, 그가 스쳐간 곳에는 찢어져 버린 시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낭아봉에 죽는 자들은 공포 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비명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장군묵을 보고 질렀다.

죽은 자들의 피를 뒤집어쓴 거인 장군묵은 그 자체로 지옥에서 도망쳐나온 악귀같았다.

살신(殺神)이었다.

공포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옥황빙서를 외치며 달려들던 자들은 콩튀듯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군묵은 이미 그들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달아나는 자들부터 쫓아가 몸을 짓이겨 죽였다.

! !

[으아아아아!]

도망치면서 공포에 질려 고함치는 자들, 하지만 그 고함소리가 끝나는 순간에 그들의 목숨도 끝나고 있었다.

일각도 채 지나기 전에 현무호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삼백여 시체들이 호수와 호변에 흩어져 있고 호수 물은 그들의 붉은 피가 흘러들고 있었다.

 

x x x

 

[소협은 능히 자기를 지킬 만한 무공을 지녔는가?]

진양진인이 속을 뻔히 짐작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없습니다.]

다시 진양진인이 말했다.

[바람보다 빨리 달아날 수는 있는가?]

현천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진양진인이 빙그레 웃었다.

[소협은 오늘 정오가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네.]

진양진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흥미진진한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활몽루를 보았다면 노도가 궁여지책으로 그곳에 가둔 마왕(魔王)도 봤을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창허진인은 도장의 윗 어른이 아닌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부 나이가 일백하고도 서른 두 살이네. 무당에 노도보다 더한 선배가 어디있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신선이 된 장삼봉 진인은 도장의 후배입니까?]

진양진인은 일순 말이 막혔다.

(이놈이 정말 만만찮구나. 은근히 내 욕을 하다니.)

진양진인은 다시 한 번 웃고 말했다.

[장삼봉조사께선 승천하시고 속세를 계시지 않으니 선배라고 할 수도 없네. 하여간 그자는 마왕이랄 수 있네. 여러 곳의 무공을 훔쳐 배웠으며 또한 나이를 짐작할 수없지. 더구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쯤으로 아는 자네.]

현천록이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내가 만든 결계를 깨뜨리고 다시 뛰쳐나올 것이네. 집요하게 노부를 찾아올텐데 자네를 그냥 둘 리가 없지. 노부와 함께 낭아봉에 찢겨 죽고 말걸세.]

그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자네가 노도를 낚았으나 먹고싶은 어떤 요리도 하기 전에 우린 함께 죽는단 말이네. 노도야 살 만큼 살았으니 죽는게 뭐가 아쉽겠나만 자네는 허허허... 조금 억울하겠군.]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진양진인이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결국 자네가 노도를 데려온 건 실수였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간에 결과는 이처럼 끔찍하게 나타날 테니까.]

현천록이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었다. 진양진인의 말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진양진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우린 완전히 그 마왕의 손을 벗어날 수도 있네. 자네가 노도한테 묻고 싶은 건 그 후에 다시 의논하면 되지.]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 그럼 내기를 하나 하도록 합시다.]

진양진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역시 어리다.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철없는 소리만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노도가 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들어주마.)

진양진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떤 내기인가? 우린 시간이 없네.]

현천록이 말했다.

[먼저 도장이 생각한 방법대로 한 번 해봅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데 걸겠습니다.]

진양진인은 껄껄 웃었다.

[노도가 이만큼 살았지만 자네처럼 명랑한 소년은 처음이네. 하지만 자네는 노도를 너무 모르고 있군. 노도는 계책을 생각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실패하고나면 그때는 내 방법을 쓰도록 하지요.]

진양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건은 어떤지 한 번 들어보세.]

현천록이 웃으며 물었다.

[분명히 자신있겠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고 말했다.

[노도가 입밖에 낸 건 모두 자신있는 것들 뿐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이길 경우에는 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장이 나을때까지 돌봐주겠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가 이길 경우에는?]

[내가 묻는 말이 어떤 것이든간에 무조건 대답해주십시오.]

진양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실룩거렸다.

현천록이 말했다.

[어쩌면 도장의 금기(禁忌)를 깨야하는 대답도 있을 것입니다.]

현천록의 눈이 그래도 과연 내기를 하겠느냐는 듯이 바라본다.

진양진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도 없군. 노도는 오직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좋네.]

[맹세하십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진양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노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맹세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도장의 계책을 말해보십시오.]

진양진인이 자기 옆에 끌려져 있는 장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네. 자네가 내 지시에 아주 잘 따라 주어야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따라야겠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저 입구부터 무너뜨리게!]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1

 

            벽화 속의 비밀

 

 

 

(방주라고?)

막비강은 들려온 함성만으로도 이번에 나타난 인물의 내공이 매우 정순함을 깨닫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새로 등장한 인물 역시 전신에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였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구렛나루가 양쪽 뺨을 덮고 있어 아주 위맹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비록 이 인물의 나이가 금릉삼로보다 이삼십 살 가량 적어 보였으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삼로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삼엄했다.

이 중년거지는 어깨에 여덟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개방의 방주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당금 강남개방의 방주인 호면개(虎面丐) 도금(都金)이로구나!)

막비강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내심 긴장했다.

위맹한 인상의 중년거지가 바로 개방의 정통을 이어받은 강남개방의 방주 호면개 도금이었다.

호면개 도금은 강남개방의 제일대 방주였던 적족신개(赤足神丐)의 제자였다. 적족신개는 궁가방의 개파조사인 궁신 여불초의 사제였다. 그러면서도 개방의 방주로 지명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적족신개는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해 버렸다. 그 때문에 구결(口訣)로만 전해지던 개방의 숱한 진산절기가 실전되어 개방이 당금의 처지로 조락하는 이유가 되었다.

상대가 개방 방주임을 알아본 막비강은 암암리에 일신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악전고투에 대비했다.

그때 호면개 도금도 두 눈에서 살벌한 광망을 발산하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철 호법, 당신들은 무슨 일로 싸움을 하게 되었소?]

이어 그는 한쪽 옆에 시립해있는 철 호법에게 물었다.

[이 소악적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방주님!]

철 호법은 타구봉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개방 방주 도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비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의 어리고 무지한 점을 생각해 놓아줄 테니 돌아가거라!]

과연 일방의 방주다운 도량이다. 전후 사정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쓸데 없는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내심 감탄한 막비강은 손을 맞잡아 도금에게 공수의 예를 올렸다.

[방주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어 그는 곡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때 도금이 막비강을 불러 세웠다.

[본 방주가 한마디 분부해 두겠는데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만약 다시 찾아오면 네놈의 다리뼈를 분질러 놓겠다!]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리고 곡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청구단서를 취득하여 절세의 무공을 연성해야 하므로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보통 희세기진(稀世奇珍)은 심산유곡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고 또 거대한 비석은 개방의 분타 소재지가 된 것이다.

개방은 그들의 소굴 지하에 이런 비급이 숨겨져 있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막비강은 비록 알고 있지만 어느 구석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막비강 혼자 힘으로 거지 떼들을 모두 내쫓고 자세히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곡을 나선 막비강은 높이 솟아있는 석촉대(石燭臺)를 바라보며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 수법을 써야겠다.)

곧 그의 모습은 대석비곡 입구에서 사라졌다.

 

***

 

막비강은 금릉의 시장통에서 남루한 의삼과 자루, 향촉(香燭), 지전(紙錢) 등을 샀다. 그리고는 새벽무렵의 어둠을 틈타 금릉성에서 나와 황량한 공동묘지로 향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그는 남산의성 악불령의 역용환을 사용하여 전신의 피부색을 바꾸고 머리도 흐트려 지저분하게 분장했다.

그리고 약물을 먹어 목소리까지 변하게 한 뒤에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새로 만든 무덤 앞에 강장, 신녀비, 호로, 진주, 은자 등을 옷에 싸서 깊이 파묻었다.

아침이 되자 막비강은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덤 앞에 향촉에 불을 붙이고 지전을 태우며 한동안 우는 척했다. 그런 후에 해가 중천에 뜨자 무덤을 떠나 몹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묘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거지보다 더 더럽게 분장한 막비강은 어떤 부호가 사는 집 대문 옆에 깨진 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영락없이 하인들이 보고 불쌍히 여겨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주길 기다리는 거지의 행색이었다.

헌데 오래지 않아 그의 등뒤에서 음침한 일갈이 들렸다.

[어린 녀석아, 누가 너더러 이곳에서 걸식을 하라더냐?]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한 사람은 중년거지였다.

그는 거지들의 규칙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모른 체했다.

[집안에 갑자기 변고가 생겨 며칠씩이나 밥을 굶었소. 당장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누가 시켜야지 걸식을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중년거지는 이마를 찡그렸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군! 그래, 향주(香主)에게 인사는 했느냐?]

[향주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향주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면 밥을 얻으러 다니지 못한다.]

중년 거지의 말에 막비강은 눈을 부라리며 항의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놈이 어디 대고 토악질이냐?]

중년거지가 눈을 부라리며 막비강의 뺨을 후려쳤다.

막비강은 따귀를 한 대 얻어맞자 즉시 울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내가 내 밥을 얻어먹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립니까?]

그러자 약이 오른 중년거지는 세게 발길질을 하여 막비강을 바닥에 넘어지게 한 후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절을 해라.]

두 사람이 울고 욕지거리를 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했다.

중년거지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또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땅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와 함께 향주에게 가자.]

[매를 맞으러 가잔 말이냐? 구경하는 여러분이 평을 해보십시오. 나는....]

!

막비강은 또 중년거지의 발길에 엉덩이를 차였다.

비록 이것은 그가 자초한 고육지계(苦肉之計)이지만 중년거지가 지나치게 흉악하여 막비강은 화가 치밀었다. 분노한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중년거지를 노려보았다.

중년거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그래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느냐?]

[왜 너를 따라간단 말이냐?]

[이놈이 끝내 기어올라! 오냐! 내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중년거지가 주먹을 휘두를 때 막비강도 지지 않고 머리로 힘껏 상대방을 받아 갔다.

곧 두 사람은 한데 얽혀 싸움질을 했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고수들과 달리 그저 주먹질 발길질만 하는 저자거리의 치졸한 싸움질이었다.

막비강의 머리에 들이받힌 중년거지는 독이 올라 두 주먹으로 그의 등을 마치 북 치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갑자기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중년거지는 그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 놀랐다. 한 명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거나 먹어라!]

막비강은 그 틈을 이용하여 머리로 중년거지를 받아 쓰러뜨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중년거지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일어나더니 나타난 노개를 향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제자가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놈이 난폭해서... 보셨겠지만 그놈은 제자를 이런 꼴로 만들었습니다.]

노개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고 냉랭히 말했다.

[! 홍삼(洪三), 너는 가는 곳마다 일을 저지르는구나. 빨리 분타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노개는 홍삼을 쫓아 보낸 후 곧 막비강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노개의 발걸음은 늙은이 답지 않게 날렵했다.

[아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어라!]

노개가 따라붙으며 말하자 막비강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내 뒤를 쫓아오는 겁니까?]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노대(何老大)라 부릅니다.]

[너는 나의 문하가 되고 싶지 않느냐?]

[할아버지는 누구죠?]

[나는 개방의 금릉삼로 중 범개선(范開先)이라고 한다.]

노개는 바로 어제 막비강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한 바 있는 금릉삼로 중 범씨 성의 늙은 거지였다. 그의 별호는 청풍개(淸風丐)로서 금릉삼로의 우두머리였다.

청풍개 범개선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본방의 절기를 전수하여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거야말로 막비강이 바라던 전개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할아버지를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즉시 청풍개 범개선 앞에 큰절을 올렸다.

범개선은 포대에서 만두를 꺼내어 막비강에게 나누어주며 신세와 집안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막비강이 적당히 둘러대자 범개선은 정말인 줄 알고 그를 대석비곡으로 데려갔다.

 

개방 방주 호면개 도금과 금릉삼로의 다른 두 노개는 범개선이 한 명의 어린 거지를 데리고 들어오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 다음 어린 거지의 근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양이(楊二)라 불리는 중년거지에게 막비강을 데려가 개방의 제반 의식과 규칙 등을 가르치게 했다.

막비강은 양이를 따라 방중의 선배 거지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 도중 비석 아래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원래 이 대비석은 산봉의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라 비석 밑 부분이 모두 암석이며 구멍은커녕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이런 곳엔 도저히 비급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틀림없이 비석 밑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구단서를 찾을 수 있는 열쇠인 종이쪽지가 단호의 뚜껑 속에 그토록 은밀히 숨겨져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이에게 하루종일 개방의 제반 의식을 배웠다. 하지만 고의로 우둔한 사람처럼 이것을 배우면 저것을 잊고 저것을 배우면 이것을 잊은 척했다.

화가 치민 양이는 혼자 나직이 투덜거렸다.

[범 장로께선 크게 실망하시겠구나. 네놈은 근골만 좋았지 기억력은 형편없으니 이래 가지고 무슨 무예를 배우겠느냐?]

 

* * *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자 곡내의 거지들이 분분히 밖으로 나갔다.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하고 양이에게 물었다.

[밤에도 동냥을 하러 나갑니까?]

[모르면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있어라.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칭 곡능천이라는 어린 망종을 잡기 위해 매복해야 한다.]

양이가 핀잔을 주었다.

[방주님도 어제 이곳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애송이 놈이 혈검산장에서 용모파기를 돌려 찾고 있는 망나니 아들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아시고 포박하라 명을 내리신 것이다!]

막비강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의 계획도 고명하지만 나의 계책은 더욱 고명하다.)

그는 양이가 나가자 큰 포대를 두 장 끌어다 이불 대신 덮고 대비석의 큰 구멍 구석에 웅크리고 자는 척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덮여 대석비곡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석 밑의 석동도 비록 양면으로 맞뚫려 있지만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때가 되었군!)

막비강은 살며시 포대자루를 젖히고 일어나 전신의 공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물이 희미하여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주먹만한 돌을 주워 석벽과 지면을 가볍게 두드려 속이 빈 곳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는 한 칸의 석실을 모두 두드려 본 다음 석벽에 몸을 바짝 붙여 다른 석실에 가서 수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석면을 거의 모두 두드려 보았지만 속이 빈 현상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곰곰이 비급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돌연, 그는 이 비석 중앙의 큰 석동 우측 벽에 한 폭의 거대한 벽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곳의 좌측 벽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노인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노인의 눈은 맞은편 벽화에 새겨져 있는 둥근 달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고개를 숙여 지면만 조사하느라 벽화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청구비급이 혹시 그 벽화의 둥근 달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자기의 추리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 급히 벽화가 새겨진 석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맞은편 벽에 그려진 둥근 달 부분을 두드려 보았다.

한동안 벽을 두드린 그는 여전히 실망을 금치 못했다. 벽화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막비강은 실망하며 벽화에서 물러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

난데없이 석동 밖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휘이잉!

막비강이 흠칫하는 순간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왔다.

파파팟!

막비강은 내심 크게 놀라며 급히 몸을 비틀어 석동 밖으로 날아 나왔다. 이어 양발을 힘껏 굴러 비교적 작은 비석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애송이놈! 어디로 달아나느냐?]

콰아아아!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광풍이 휘감아 왔다.

막비강은 쌍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켜 상대방의 장세를 봉쇄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음향이 울려 퍼지며 맞은편 비석 뒤에서 한 명의 거지가 뒤로 주르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바로 철 호법이었다.

[어엇!]

철 호법은 막비강의 강맹한 장력에 진탕되어 뒤로 후퇴하다가 허공을 밟아 비석 아래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쐐애액!

그때 또 몇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솟구쳐 최상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뒷산으로 질주해 갔다.

[어린 녀석아, 걸음을 멈추어라!]

헌데 막비강이 몸을 솟구쳤을 때 하나의 인영이 고함을 지르며 앞을 막아섰다.

[나를 막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

외마디 경악의 비명과 함께 그 사람은 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단 일장에 그 사람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낸 막비강은 곧장 뒷산을 향해 도주했다.

그러자 개방 방주 도금을 비롯한 금릉삼로, 철 호법 등 다섯 거지들은 일제히 그를 추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린 녀석아,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으니 걸음을 멈추어라!]

그러나 막비강은 그들의 고함을 들은 체도 않고 계속 신법을 전개했다.

도금과 네 명의 노개들도 경공신법이 대단하고 또 이곳 지리를 잘 아는지라 쌍방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 이런!)

막비강은 전력을 다해 도주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 전면의 삼 장 거리는 높이가 백 장이 넘는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콰아아아!

그 절벽 아래로는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흐하하하! 네놈은 독 안에 든 쥐다!]

막비강이 걸음을 멈추자 다섯 명의 노개는 눈 깜빡할 사이에 가까이 추격하여 그의 일 장 거리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삼로 중 고죽개 학검성이 수중의 타구봉을 휘두르며 노성을 질렀다.

[어린놈아, 나는 오늘 네놈을 양자강의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막비강은 이런 상황에서 다섯 명의 노개를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말해 우선 이들과의 충돌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옆으로 피하며 고함을 질렀다.

[할말이 있으니 잠깐 손을 멈추시오!]

학검성은 자신의 일격이 빗나가자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청풍개 범개선이 얼른 나서 제지시켰다.

[우선 그가 누구며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범개선은 막비강을 제자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또 다른 노개들보다 마음이 인자하여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검성의 행동을 제지시킨 것이다.

개방 방주인 호면개 도금도 범개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우선 이 어린 녀석의 신분부터 알아봅시다.]

호면개 도금은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린 녀석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막비강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나는 그제 귀방의 분타를 찾아갔었던 곡능천입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뭐라고? 네놈이 바로 곡능천, 아니 막비강이라고?]

[그렇습니다.]

[막비강은 얼굴이....]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제가 역용술로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그가 손바닥에 양잿물 가루를 발라 얼굴을 문지르자 곧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섯 명의 노개는 막비강의 정교한 역용술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호면개 도금이 다시 물었다.

[네가 변장을 하여 본방의 본거지에 잠입한 의도는 무엇이냐?]

[그것은 청구상인께서 남기신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고 경악과 격동의 빛을 금치 못했다.

[청구단서는 강호의 인물이면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무림기보인데 그것을 어찌하여 우리들 개방의 중지에 와서 찾느냐?]

[그 비급은 거대한 비석 밑에 있습니다. 거대한 비석이란 귀방의 분타가 위치한 그 비석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도 거대한 비석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거주하는 분타의 비석 밑에 그런 비급이 숨겨져 있다고 단정했느냐?]

[방주께서도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나는 이미 대강남북에 산재해 있는 비교적 큰 비석은 모두 파헤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청구단서는 고사하고 종이쪽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호면개 도금은 이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그럼 근래 일어난 비석 도굴 사건이 모두 네 소행이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점만 보아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으므로 머지않아 이 소식이 강호에 퍼지고 그러면 귀방은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 테니 빨리 돌아가셔서 대책이나 상의하십시오.]

막비강의 말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죄가 없으나 구슬을 지닌 것이 죄가 된다더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듣고 있던 학검성이 타구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이놈! 쓸데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우리에게 화를 전가시키지 마라! 우리는 대석비곡에 수십 년을 거주했지만 비급따위는 보지 못했다.]

호면개 도금은 학검성의 이 말이 대석비곡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 역시 막비강을 죽이진 않더라도 생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타구봉을 휘두르며 막비강을 공격했다.

그러자 나머지 노개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범개선은 비록 마음이 비교적 자상했지만 방주가 출수한 이상 그도 자연히 수수방관을 할 수 없었다.

[이 염치없는 늙은이들이...!]

막비강은 다섯 거지가 합공을 가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노성을 지르며 쌍장으로 단숨에 십여 장을 격출했다. 격노한 나머지 출수했는지라 그의 장세의 강맹하기가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개방의 타구봉법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방주인 호면개 도금이 펼쳐내니 그 위력은 더욱 강맹하여 막비강으로서도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점차 막비강은 낭떠러지 쪽으로 밀려갔다. 낭떠러지의 높이는 백 장이 넘고 그 밑은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며 괴석이 즐비하여 떨어지면 목숨이 열 개라도 뼈를 찾기 어려울 실정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손을 멈추어라!]

돌연 낭떠러지 옆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쏴아아아!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장풍이 다섯 명의 노개에게 휘감아 갔다.

[!]

[... 당신은...!]

다섯 명의 노개는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경악의 함성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사력을 다해 왔던 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4장 천록여의 (3)

 

 

 

삼경이 넘은 시각에 계명사는 초파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향유가 든 연화등(蓮花燈)들이 줄지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었다.

승려들은 활몽루가 사라진 앞에서 무릎이 얼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한 여름철 개구리떼가 왕왕 거리는 것처럼 불경을 목청 껏 읊어댄다.

그리고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섞여 들려오는 찌르레기 소리처럼 가날픈 퉁소소리가 현무호 호반에 흐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계명사 상공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노오옴!!!

 

중들이 놀라 목탁을 집어던지고 엎드린다.

[부처님께서 노하셨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내 빛도 사라지고 고함소리도 정적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호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중들도 보고 행여 부처님을 볼세라 밤늦게 달려왔던 열성신도들도 눈을 말똥말똥하며 보았다.

늙은 도사는 개구쟁이가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호수에 약간 큰 퐁당소리를 내며 빼지고 말았다.

중생들의 시선과 늙고 젊은 중들의 시선이 계명사 주지 과우(寡雨)대사에게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과우대사는 억지로 뚱뚱한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 불조께서 임하신 이 뜻을 누가 감히 알리오!]

제자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입가로 찬물을 흘려 넣어 준다.

과우대사는 속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슨 징조냐고 자기에게 물으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석가모니는 입이 없었다고 적혀있지 않으니 말할 수 있었겠지만 대웅전 법당속의 부처는 만들 때 잘못 만들었는지 칠십 년 동안 지켜봤지만 한 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과우대사는 내심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동정하기도 하지만 이럴 땐 난감하기만 하다.

금도금을 입혀놨으니 아무리 말 잘하던 입이었다 해도 어디 벙긋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욕을 해도 그만 절을 해도 그만 그저 한결같이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도리밖에.

 

***

 

계명사의 요란하던 벼락 법회는 연화등이 하나하나 꺼져가면서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삘릴리...!

호반에 흐르는 퉁소소리가 야반 삼경의 그윽한 정취를 더하고, 물가로 밀려온 달이 하늘 비좁음을 아쉬워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정자에는 자기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흰옷을 입은 소년이 백룡이 아로새겨진 백금퉁소를 입에 물었고, 백금퉁소는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애절한 곡을 꼬리에 달고 있다.

추웃!

진양진인은 정자 앞의 물가에서 일어났다.

옷이 흠뻑 젖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두 손을 휘저으며 겨우 정자로 걸어갔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버렸는지 진기가 안정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동서남북도 거의 가릴 수가 없다.

진양진인은 귀에 익숙한 퉁소소리에 이끌려 정자까지 와서는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

퉁소소리가 그치고 진양진인의 머리 옆에 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진양진인은 지쳐버려 누군지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제발 노도를 그냥 내버려두게. 제발... ]

[하하하! 도장(道長)은 내 소리에 걸려든 물고기입니다.]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진양진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 죽었을 중상을 입고 차가운 호수 물속에 한 참이나 있었으니 그의 노구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인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나마 숨이라도 끊이지 않고 쉴 수 있는 형편이다.

진양진인은 실오라기만큼만 진기를 모아도 방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해혈은 텅빈 표주박같아서 어떤 기운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한데 몸이 공중에 들렸다.

(노도의 질긴 목숨이 기어코 오늘의 액겁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진양진인은 왠지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를 두 손으로 안아든 백의소년이 정자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고 싶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진양진인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노도는 매 매우 춥다네.]

[곧 불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진양진인은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꼬끼오! 꼬끼오!

---왕왕왕! 왕왕왕!

 

새벽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진양진인을 깨웠다.

타탁! 타탁!

장작 타는 소리와 매운 연기 내음이 함께 몰려온다.

눈은 떴지만 노곤하여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천장은 낮고 입구는 좁은 동굴 속이다.

연기가 앞으로 잘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타오른다.

진양진인은 공기가 뒤로 흐르는 것을 보고 그 동굴이 꽤 깊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른 숨소리가 모닥불 맞은 편에서 들린다.

진양진인은 암암리에 양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억지로 기혈을 통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진양진인은 모닥불 건너편의 숨소리를 다시 확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온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력이 정심하지는 않구나. 범을 피했는가 했더니 겨우 개구리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되다니...)

그는 마음으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다 곱혔다가 펼쳐진 후 다시 네 개가 곱혔다.

진양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뒤엉킨 기혈을 뚫지 못한다면 남이 애써 죽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 수 있는 건 스무 나흘에 불과하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동료를 찾아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자가 깨어나면 상황이 또 어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살아온 일백삼십여 년의 세월을 통해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본 백의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철인련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환우회(寰宇會) 사람인가?]

잠든 줄 알았는데 즉시 대답이 들려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진양진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음성에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느꼈다.

다시 말했다.

[노도는 육십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니 아는 것이 별반 없네. 어떤 것을 물으려 하는가?]

모닥불 건너편에 있던 소년이 진양진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흰 비단옷을 입었고 붉은 색 띠를 둘러 머리를 묶은 소년이다.

소년이 말했다.

[저는 현무호에 놀러 나왔다가 도장께서 퉁소를 부는 것도 봤고 활몽루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양진인은 말했다.

[퉁소는 소협도 불지 않았는가? 노도는 정신이 희미한 중에도 소협의 퉁소 소리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하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제가 꾸민 천록여의(天祿如意)의 첫 번째 제물입니다.]

진양진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천록여의라... 뜻하는 대로의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협의 이름이 천록이고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소년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번째 뜻이 맞습니다. 제 이름이 바로 현천록이고 도장께선 제 낚시에 걸려던 물고기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 낚시가 퉁소고 미끼는 애상곡이었는가?]

진양진인은 의식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저는 이제 도장의 애상곡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활몽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군요.]

진양진인이 차분한 눈으로 현천록을 응시했다.

현천록의 눈은 맑고 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진양진인은 스스로 위엄을 갖추어 현천록을 압도하고자 했지만 현천록의 마음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보면 볼수록 혼란스러워 졌다.

처음에는 이런 짐작 저런 짐작 다해보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진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창허진인을 활몽루에 가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퉁소로 내가 불던 애상곡을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력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철인련맹의 늙은이들이라면 내력을 감추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들도 있다지만 나이로 봐서 철인련맹의 철인(哲人)일 리도 없다. 환우회에서 무공이 없는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내가 무당의 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이렇듯 대하는 걸 보면 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조차 없다.

한데 그의 갑자기 머리 속으로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0

 

          가짜 의성(醫聖)이 준 기연

 

 

 

보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동안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으로부터 제대로 된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을 전수 받아 내공의 기초를 튼튼하게 이루게 되었다. 역시 혼자 깨우치는 것과 좋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실 소리장도 강용이 주고 간 기공입문법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이 본래 명칭인데 이것은 도가에서 오래 전에 실전한 비전 중의 비전이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깊이 깨우치면 모든 심마(心魔)를 물리치고 번뇌(煩惱)를 소멸하여 다른 무공의 습득을 몇 배 빠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문도가의 비전이라 소리장도 강용같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에게는 전혀 쓰임이 없다. 애초에 태청정명운기법의 이치를 깨우칠 바탕이 못 되기 때문이다.

강용은 이 절세의 비전을 오래 전에 얻어 지니고 있었음에도 거의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용은 막비강의 환심을 사려고 남산의성 악불령의 약전과 함께 준 것인데 이번에는 비급도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깨우친 막비강은 시야가 확 트여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했던 무학의 이론을 단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남산의성은 막비강이 예상보다 빨리 내공심법의 기초를 확립하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각가지 의술과 해독술, 그리고 기문진법과 약물로 용모와 음성을 바꾸는 방법등도 가르쳐 주었다.

소리장도 강용이 막비강에게 주었던 역용환도 사실 남산의성의 것이었다. 그자는 훔친 것으로 생색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막비강과 남산의성 악불령 사이에 사제지간의 명분은 없다.

하지만 악불령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깨우치는 막비강의 빼어난 자질과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아! 지금까지의 네 무공도 보통 고수에게는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제 기연으로 태청정명운기법까지 깨우쳤으니 장래 너의 무공방면의 성취는 누구보다도 빠른 진보가 있을 것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노부는 강용이 무덤을 도굴하다 죽는 것을 구경하러 가야겠으니 이만 헤어지자꾸나. 대신 네게 백독(白毒)을 피할 수 있는 천오주(天蜈珠)를 한 알 주겠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자.]

막비강은 헤어지는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자기 혼자 단독으로 청구단서를 찾아야 하므로 할 수 없이 남산의성 악불령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다시 가을이 되었다.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본의 아니게 뛰쳐나와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어언 일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일년 동안 막비강은 세상에 알려진 큰 묘비라면 거의 모두 찾아가 파헤쳤다. 심지어는 장안(長安) 대안탑(大雁塔) 옆의 고비(古碑), 낙양(洛陽) 망산(邙山)의 황릉(皇陵) 등 파헤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헛수고만 했으며 비급은커녕 비급 닮은 것도 없었다.

그는 내심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혹시 큰 비석이란 어떤 곳의 지명이 아닐까?)

만약 큰 비석이란 것이 실제 비석이 아니라 어딘가의 지명이라면 막비강은 지난 일년의 세월을 괜히 무덤만 파헤치며 보낸 결과가 된다.

그나마 그는 일년 동안 쉬지 않고 무예를 연마하여 내공, 장력, 검법 등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산간에서 지냈기 때문에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남긴 은자와 진주를 사용하지 않고 절약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

 

낙양에서 가장 큰 주루인 회빈루(會賓樓)는 오늘도 많은 주객들로 왁자하니 시끄러웠다.

이 회빈루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 약관이 안된 미목이 청수하며 붉은 경장을 입은 소년이 홀로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들어 보시오! 나는 이번에 표물을 강남에 호송하고 오던 도중에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을 들었소.]

문득 한쪽 자리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음성이 말했다.

[무슨 소식인지 말해 보시오.]

다른 사람이 재촉하자 처음에 말을 연 사람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세 가주들이 얼마 전 갑자기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더군요.]

[그래, 비급은 찾았답니까?]

[찾았으면야 무슨 말이 있겠소? 그들은 조상의 유골까지 휘적이며 보름간 소란을 피웠는데 결국 어떤 노인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한마디하니 다시 무덤을 원상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더군요.]

[핫하하...!]

주객들은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일이 비록 괴이하지만 근래 이 주위에서 발생한 일보다는 이상하지 않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소?]

[낙양에서 멀지 않은 북망산 일대에 있는 오래된 무덤의 묘비 중 비교적 큰 묘비는 모두 파헤쳐져 있었소.]

[묘비를 훔쳐 팔아 돈을 벌려는 좀도둑의 소행인가 보군.]

[아니오. 흔적으로 보아 그 묘비들은 넘어뜨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세워 두었소. 아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을 것이오.]

[이건 정말 이상하군요.]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 사람은 장사임이 분명하오. 고묘의 묘비는 무게가 적어도 이삼천 근이 되어 한 사람이 그것을 넘어뜨리기도 힘들 텐데 다시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혹시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태평성대에 갑자기 이런 기이한 일이 발생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큰 비석, 대묘비라! 그렇지! 금릉(金陵) 묘화문(妙化門) 밖의 대석비곡(大石碑谷)에 있는 비석은 무게가 십만 근도 넘는데 그자가 왜 그 비석은 파헤치지 않지요?]

순간 주루 구석 자리에 앉아 자작하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번뜩 떴다.

(오호라, 그런 곳에 또 큰 비석이 있었구나! 가르쳐 줘서 고맙소!)

그때 옆 좌석에 앉은 강호 인물 중 한사람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육 형(陸兄)은 허풍을 그만 떠시오! 세상에 그렇게 무거운 비석이 어디 있소?]

[나는 금릉 사람인데 왜 모르겠소?]

처음 말한 사람이 즉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비석은 높이가 십 장이 넘고 넓이는 삼사 장이 되며 두께만도 일 장 가량이나 되오. 그 외에 석향로(石香爐)와 석촉대(石燭臺)도 있는데 그 높이가 이층집 가량이나 되오.]

[웃기지 마시오! 그런 큰 비석이 어디 있단 말이오!]

[못 믿겠으면 직접 가 보면 알 게 아니오. 전설에 의하면 큰 비석은 송나라 때 유백온(劉伯溫)이 우수선(宇手善)의 반란이 두려워 태조(太祖)에게 상소하여 비석으로 진압시켜 나라를 평온하게 하자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조각을 끝낸 후 그 비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옮길 수가 없어 지금도 묘화문과 기린문(麒鱗門) 사이의 계곡에 세워 두어 금릉의 고적(古蹟)이 된 것이오.]

(거짓말은 아닌 듯하구나!)

자작자음하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막비강이었다.

그는 그토록 큰 비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곧 계산을 하고 주루에서 나와 곧장 금릉으로 향했다.

 

***

 

열흘 후, 낙양을 떠난 막비강은 금릉에 도착하여 예의 거대한 비석이 있다는 대석비곡을 찾아갔다.

과연 그곳의 비석은 들은 바대로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높이가 무려 십 장이 넘는 그 비석은 밑 부분이 아직 땅속의 산석(山石)과 맞붙어 있는데 바위와 붙어있는 비석 아랫부분에는 몇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는 구멍마다 남루한 행색의 거지 떼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개방(丐幇)의 화자(化子;거지)들이었다.

우글거리는 거지떼를 본 막비강은 난감해졌다.

(이래서야 뭘 찾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군!)

잠시 궁리를 하던 그는 곧 한 웅큼의 은자를 꺼내 들고 거지 떼에게로 다가갔다.

[이 은자를 당신들에게 줄 테니 이곳을 내게 사흘간만 빌려주시오.]

[뭐야?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와서 남의 기업을 가로채려느냐?]

그러자 돌연 거지들 중 인상이 험악한 놈이 구멍 속에서 뛰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다짜고짜 욕이 날아오자 막비강도 불끈 화가 치밀었다.

[당신들을 강제로 쫓아내려는 게 아니오! 생각이 있으면 사흘간만 빌려주고 싫으면 그만이지 왜 욕을 하시오?]

하지만 흉악한 인상의 거지는 더욱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 갈보 새끼야! 내가 네놈에게 욕을 해서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여길 빌리고 싶으면 니 에미 구멍부터 먼저 나한테 빌려다오!]

그자의 원색적인 욕지거리에 다른 거지들이 왁자하니 웃는다.

순간 막비강은 왈칵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납치 당해 몸을 더럽힌 것을 아는 그인지라 이같은 욕은 참을 수 없는 심한 것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어이쿠! 나 죽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자의 뺨은 당장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터진 입안에선 피와 부러진 이빨이 흘러나온다.

[저놈이 사람을 팬다!]

[치도곤을 내라!]

순간 구멍 속의 거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며 아우성을 쳤다.

(! 귀찮게 되었군!)

막비강은 삽시에 수많은 거지 떼에게 에워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개방의 거지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었다.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방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 방파였다. 하지만 오십 년 전, 개방은 내분으로 인해 남북(南北)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장문인 승계에 불만을 품은 궁신(窮神) 여불초(餘不草)라는 자가 개방의 무리 대부분을 이끌고 강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궁가방(窮家幇)이란 방파를 연 것이다.

그후 강북의 궁가방은 나날이 성세가 불어나 지금은 지난 날의 개방을 대신하여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반면 강남에 남은 정통 개방은 날로 조락하여 이제는 하오문 잡배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방은 여전히 휘하에 수십만 명의 방도를 지닌 거대방파다. 그들과 원한을 맺어 버리면 두고두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막비강이 꺼리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이럴 때는 일단 토끼고 보는 거다!)

파앗!

막비강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거지 떼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저 후레자식이 달아난다!]

[갈보 새끼를 잡아라!]

그런 막비강을 거지들이 아우성 치며 따라왔다.

하지만 그자들의 경공술로 막비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막비강은 삽시에 거지 떼를 떨쳐 버리고 곡구(谷口)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헌데 그가 막 곡구 근처에 서있는 돌로 깍은 거대한 향로(香爐)를 지날 때였다.

[되돌아가라!]

돌연 향로 위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흑영이 득달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한 줄기 강맹한 잠경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급히 일장을 마주쳤다.

퍼펑!

일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급습한 자는 막비강의 강력한 장력에 의해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가더니 허공에서 한바퀴 맴돈 후 바닥에 내려섰다.

그자 역시 거지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이 매우 음독하고 흉폭한 인상이었다. 허리에는 여섯 개의 마대를 차고 있어 그자의 개방에서의 지위가 호법(護法)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년 거지가 막비강을 막아선 사이에 수백명의 거지떼가 그의 뒤에 이르렀다.

[사문(四門)에 용호풍운진(龍虎風雲陣)을 펼쳐라!]

육결(六結)의 마대를 지닌 중년 거지는 뱁새눈을 부릅뜨며 막비강 뒤쪽의 거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거지떼들은 그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게 움직여 막비강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포진이 끝나자 중년의 거지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방의 총타(總舵)에 쳐들어 와 난동을 부리다니! 그렇게 자신 있으면 본 호법의 일초를 더 받아내어 보아라!]

막비강은 방금 전 비록 총망중이었지만 오성(五成) 가량의 공력을 사용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일 장 가량밖에 밀려나지 않자 상대방의 공력도 약하지 않음을 알았다.

게다가 굳이 개방과 적대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지라 막비강은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나는 개방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다만 이 대석비곡을 빌려 몇 명의 친구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이미 귀방의 분타가 되어 있더군요. 아까 귀방의 분이 먼저 욕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출수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귀하는 나를 너무 곤경에 빠뜨리지 마시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막비강이 정중하게 말하자 중년 거지도 안색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의 이름은 곡능천이라고 합니다.]

[곡능천? 이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중년 거지는 이마를 찡그리며 갸웃했다. 개방의 정보력은 아주 빼어나 어지간한 무림인의 신상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약관도 안된 나이에 개방의 호법인 자신을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지닌 젊은 고수의 이름은 언 듯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거지가 얼른 말했다.

[() 호법! 아마도 이 애송이가 혈검산장에서 도망쳐 나온 개 망나니 막비강일 것입니다. 저 놈을 생포하여 막장주에게 인계하면 필시 후한 보상을 줄 것입니다.]

철 호법이라 불린 중년 거지는 막비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아! 너는 사실 혈검산장의 둘째 아들 막비강인데 곡능천이라는 가명을 지어 남의 이목을 속이고 있지?]

철 호법의 말에 막비강은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내 성은 곡가요. 그리고 막비강이 누군지 전혀 모르오.]

철 호법이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네 사부는 누구냐?]

[내게는 사부가 없소.]

[그럼 네 부친은 누구냐?]

그자의 질문에 막비강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지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핫하하....]

거지 떼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한 놈이 조롱을 했다.

[이놈은 이제 보니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잡종이었구나. 그렇다면 아까 내가 한 말이 맞았잖아! 아랫도리를 아무 놈한테나 내돌리는 갈보의 새끼였어!]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자는 바로 그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흉악한 인상의 거지였다.

그자가 또 자신의 어머니를 갈보 운운하자 막비강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그 주둥이 닥치지 않으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그러자 철 호법이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린 녀석아, 여러 말 마라! 네가 본방이 포진한 용호풍운진을 뚫고 나간다면 순순히 놓아주겠다. 하지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타구봉(打狗棒)으로 백 대를 갈긴 다음 너의 부친에게 데려가겠다.]

[좋다. 얼마든지 덤벼 봐라!]

[야앗!]

철 호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타구봉을 휘둘러 왔다. 그러자 사면팔방에서도 무수한 지팡이 그림자가 막비강을 공격해 왔다. 개방이 자랑하는 용호풍운진이 펼쳐진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막비강은 날아드는 타구봉들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비록 겉보기에는 진세가 화려하고 기세등등했지만 정작 타구봉을 휘두르는 자들의 공력은 보잘 것 없어 위협이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휘익!

난무하는 타구봉들을 피해낸 막비강은 다음 순간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을 쭉 뽑아 올려 옆에 선 거대한 석촉대(石燭臺)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의 이같은 경신술에 거지떼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하하! 이걸로 진을 통과한 것으로 합시다.]

호탕하게 외친 막비강은 즉시 석촉대를 뛰어내려 곡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서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이없이 막비강을 놓친 철 호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부득 갈며 뒤쫓아왔다. 다른 거지들도 들개 떼처럼 아우성을 치며 그자의 뒤를 따라온다.

[! 개떼가 따로 없군!]

막비강은 냉소하며 곡구를 향해 줄달음쳤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에 막 세 명의 늙은 거지가 꾸부정한 몸을 이끌고 곡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막비강은 급히 외치며 그 세 늙은 거지의 머리 위를 단숨에 뛰어넘으려 했다.

[쯧쯧! 버릇없는 아해로다! 존장의 머리를 타넘으려 들다니...!]

하지만 혀차는 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인영이 선뜻 막비강 앞으로 날아올랐다.

[비키시오!]

막비강은 다급히 외치며 일장을 후려쳤고 그 인영도 즉시 마주 손을 내밀었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일며 막비강은 온몸이 진탕함을 느끼고 지면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막비강을 저지한 것은 곡구로 들어서던 세 늙은 거지 중 가장 키가 크지만 대신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늙은 거지였다.

막비강을 막아선 세 늙은 거지들이 모두 일곱 개의 포대를 메고 있다.

막비강은 그들이 바로 개방의 장로급 거지들임을 알아보고는 내심 긴장했다.

[흘흘! 우리 금릉삼로(金陵三老)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면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애송아.]

막비강을 가로막은 깡마른 노개가 앞으로 나서며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 비루먹은 늙은이들이 금릉삼로라니...!)

금릉삼로라는 이름에 막비강은 흠칫했다. 그들이 강남개방의 최고원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숫자만 많고 절정고수가 없는 개방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들 금릉삼로는 개방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노개들인 것이다.

상대방이 금릉삼로라는 사실에 내심 긴장했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자칭 삼로 중 한사람이라 하면서 차륜전(車輪戰)의 비열한 수단으로 어린 나를 제압할 생각이오?]

깡마른 거지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나 고죽개(骷竹丐) 학검성(鶴劍城)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스스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으니 상황이 다르다. 대신 우리 세 노화자는 절대 네게 부상을 입히지 않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지 마라!]

고죽개 학검성이란 늙은 거지의 말에 막비강도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겠소.]

학검성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거만한 녀석이구나. 큰소리치지 말고 먼저 손을 써봐라! 노부 앞을 무사히 지나가면 노부가 진 걸로 하겠다!]

이에 막비강은 늙은 거지를 덮쳐 가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하오.]

학검성은 상대방이 갑자기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자 내심 흠칫 놀랐다. 해치지 않고 어떻게 막비강을 제압한단 말인가?

[교활한 녀석 같으니!]

학검성은 눈을 부라리며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그러자 막비강은 어깨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돌연 뚱딴지같은 함성을 질렀다.

[!]

학검성이 어리둥절하여 손을 멈추며 물었다.

[너는 방금 뭐라고 말했느냐?]

쌍방의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지라 절대 정신을 분산시켜선 안 된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옆을 재빨리 통과하며 히히 웃었다.

[코는 제일 미끄러운 곳이라 쉽게 잡히지 않소이다.]

학검성은 몸을 돌려 막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어린 녀석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잘못 하면 오늘 본방이 창피를 당하겠구나.)

꾀를 써서 학검성을 통과한 막비강은 또 다른 늙은 거지 앞에 도착했다. 금릉삼로 중에 가장 풍채가 좋고 인상도 좋은 노개였다.

[죄를 범하겠소이다!]

!

막비강은 외마디 고함과 함께 오른손을 뻗어내는 척하다 갑자기 그 뒤쪽에서 왼손을 불쑥 밀어냈다.

이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일신 무공이 학검성보다 훨씬 고강했다. 그래서 막비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비강이 허초(虛招) 뒤에 실초(實招)를 숨기는 수단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바람에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엉겁결에 막비강의 왼손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지도 못했다.

! !

늙은 거지는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비틀거리며 일 장 밖으로 밀려나갔다.

[이 교활한 애송이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을 통과한 막비강을 뒤에서 덮쳐 왔다.

풍채 좋은 늙은 거지 옆을 지나치던 막비강은 갑자기 등 뒤에서 강맹한 경풍이 뻗어옴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격하려는 늙은 거지를 향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당신은 나를 통과시켜주고도 계속 공격을 하는 겁니까?]

[너는 노부가 미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기습을 했으니 통과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은 지금껏 준비하지 않고 뭐 했소?]

막비강의 그 말에 늙은 거지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범 형(范兄)! 통과시키시오. 그 망나니를 나 지당개(地堂丐) 이건영(李建英)이 혼내 주겠소!]

금릉삼로중 마지막 한 사람인 땅딸막한 늙은 거지가 나서며 말했다. 키가 작은 데가 살이 쪄서 온몸이 둥글 둥글한 이 노인의 눈빛은 새파란 빛을 띠고 있다.

(개방은 용독(用毒)에도 뛰어나다더니 이 늙은 거지는 독공(毒功)을 익혔구나!)

막비강은 지당개 이건영이란 땅딸보 거지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서 그가 일종의 독공을 연마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데다가 남산의성 악불령이 준 천오주도 갖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음독한 독을 쓴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혼내진 말게!]

범씨 성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물러서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은연중에 막비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그런 범씨 성의 노개에게 호감이 갔으나 내색하지 않고 오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당신은 아무 걱정말고 갖고 있는 재주를 다 펼쳐보시오! 내 얼마든지 상대해주겠소!]

막비강의 광오한 말에 지당개 이건영의 파란 눈빛에 살기가 더해졌다.

[애송이 놈! 스스로 자초한 화니 노부를 탓하지 말아라!]

지당개는 말하면서 양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의 열 손가락이 모두 검프르게 변해있었다.

(독공이다!)

겉으로는 큰 소리를 쳤지만 막비강은 내심 긴장했다. 독공은 처음 상대해보는 때문이다.

장내에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비강과 지당개 이건영은 서로를 노려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칫 먼저 움직였다가는 상대방의 격렬한 반격을 받을까 꺼려해서였다.

헌데 그 일촉즉발이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이장로!]

화라락!

한소리 호통과 함께 계곡 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어왔다.

[방주(幇主)를 뵙소!]

나타난 인물의 뇌성 같은 고함 소리를 들은 거지들은 즉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접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4장

 

                    천록여의 (2)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검을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을 때의 충격도 이처럼 크지는 않았다.

도깨비 장난을 본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장난의 깊숙한 곳에 자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다.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진정되지 않았다.

활몽루가 사라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생사탄이 연상되었다.

현천록은 일곱째인 장군묵도 자기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삼년이나 기다려서 진양진인을 만나려 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활몽루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뒤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계명사의 중들이 활몽루가 사라졌음을 보고 꿇어앉아 염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염불을 왼다.

현천록은 그 자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중들과 맞닥뜨리면 아직 자기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시비에 말려들 것만 같아서다.

시간은 이경하고도 반은 지났을 것이다.

현천록은 낙엽처럼 날아올라 대웅전 지붕 위에 내려섰다.

활몽루만큼은 아니지만 대웅전의 지붕에서 보는 현무호의 밤도 아주 아름다웠다.

한데 대웅전의 지붕에는 현천록보다 먼저 와있는 선객이 있었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중이었다.

현천록보다 더 작은 키에 몸은 민간에 팔리는 나한상(羅漢像)처럼 둥글고 납작한데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도무지 나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오십을 넘은 듯도 하지만 탱탱한 살 때문에 주름살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중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현천록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시주도 활몽루가 사라지는 걸 봤는가?]

불가에 비전되어 온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고절한 무공이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웃고 있는 중의 입안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의 혜광심어가 다시 들려왔다.

[노납은 진양이란 도사를 만나러 왔네. 하지만 무슨 연고인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으니 다시 열 때까지 이 근처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현천록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스님께서 진양진인이 만나기로 했다는 분이시군요.]

중이 이빨 없는 입속을 들어내 보이며 웃는다.

[말이 좋아 만나는 것이지. 그냥 한판 싸워 삼년 전에 맺지 못한 승부를 가르면 되지.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먼. 진양 그 소코같은 도사가 노납을 포기할 리 없는데.]

그때 계명사의 승려가 현천록과 중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사람이 있다!]

중이 껄껄 웃었다.

[잠시 피하세나.]

스윽!

중은 허깨비처럼 다가와 현천록의 손을 잡고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불을 머금은 종이풍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 같은 신법이다.

[자금산(紫金山)에 가면 먹을 만한 풀뿌리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고 있네. 이것도 삼세의 인연이니 함께 가지 않겠나?]

중이 계명사를 벗어나며 말했다.

현천록은 중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저는 잠시 들려야 할 데가 있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시면 찾아가도록 하지요.]

중은 현천록이 자기의 손을 놓고도 공중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떠있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하! 대단한 시주였군. 나는 포두화상(葡頭和尙)일세. 영곡사(靈谷寺)에 와서 날 찾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중은 뚱뚱한 몸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금산을 향해서 날아가버렸다.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

 

현천록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성문을 날아넘고 태평북로(太平北路)의 번화가로 들어갔다.

삼경이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아직도 불을 훤하게 밝혀두고 있는 점포들이 있다.

현천록은 악기(樂器)를 파는 점포를 찾아 들어갔다.

점포에는 각양각색의 퉁소와 피리, 앵금, 거문고, 비파, 소고(小鼓) 등이 여기 저기 놓여있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점원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지요?]

점원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말했다.

[한냥입니다.]

현천록은 점원이 자기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는 걸 알고 속으로 웃었다.

장사라면 진작 이골이 난 현천록이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내려놓고 조잡하긴 하지만 벽옥을 깎아 만든 퉁소를 들고 물었다.

[이건 얼맙니까?]

점원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스무냥입니다. 하지만 공자님께 어울리는 물건이라곤 할 수가 없군요.]

점원의 눈이 은근 슬쩍 한쪽 구석에 있는 퉁소를 향했다.

백금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얇게 뽑아 무겁지 않은 퉁소였다.

[삼백오십 냥입니다. 저희 가게에서 최고의 물건일 뿐 아니라 금릉에서는 이만한 물건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게는 겨우 두냥닷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주시오.]

현천록은 손을 내밀었다.

점원이 무명수건으로 백금퉁소를 닦은 후에 내주었다.

백금퉁소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입에 대고 불어보았다.

[! !]

하지만 바람소리만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점원이 의자를 내와서 앉게 하며 말했다.

[공자님께선 아직 퉁소를 배우지 않으셨군요. 헤헤... 소리를 내려면...]

점원은 대나무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입을 대는 위치부터 가르쳐 주었다.

 

---부우!

 

대나무 퉁소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천록은 점원이 했던 것과 똑같이 흉내냈다.

백금이 흐느끼는 듯 맑고 청아한 소리가 퉁소를 잡은 손 끝에 잔떨림을 남기며 울려나왔다.

점원이 뜻밖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천록은 손가락을 움직여 구멍을 막고 열고 하면서 소리를 변화시켜보았다.

여덟 개의 소리와 각각의 반음이 한 번씩 울리고 나서, 현천록의 백금퉁소에서는 너무도 애절하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따금씩 고개를 약간씩 아래위로 움직이며 퉁소를 불고, 소성(簫聲)은 태평북로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점원은 숨을 죽이고 현천록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도 악기를 매매하는 상인인 만큼 음()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천록의 퉁소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소인은 애상곡(愛傷曲)을 공자님처럼 연주하시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귀가 열리고 가슴에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듯 하군요.]

한데 백금소를 부는 현천록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점원이 놀라며 땅에 엎드렸다.

[아이쿠! 신선님! 천상의 선재동자께서 강림하셨군요.]

현천록은 허공에서 몸을 바르게 폈다.

애절한 퉁소소리는 계속되고, 현천록은 신선이 승천하는 것처럼 밤하늘로 올라갔다.

 

x x x

 

붉은 안개가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며 낮게 흐른다.

쌔액! 쌔액!

암흑의 동굴 속에는 상처 입은 야수의 것인듯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

동굴 앞에 꿇어 앉은 여인의 무릎에는 벌써 피멍이 들었다.

[... 이제... 됐다! ... 계속... ... 말하라.]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탁한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 나왔다.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주님께선 정말 그런 무공이나 문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죽지 않는 몸을 지녔다면 무공의 끝에 달한 것이 아니냐면서...]

[허억! ! ... 결국 묻고 시 싶은 건... 그거 였...구만.]

[그렇사옵니다.]

동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죽지... 않는 인간... ...부도... 만난...적이 있다. 허억! ! 내 몸을 망가뜨린 바로 그 자였지.]

여인이 흠칫하며 머리를 숙였다.

[허어어억!]

동굴 속의 괴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온화한 미풍같은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는 그 이후에 쭉 그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얼마 전에야 겨우 실마리를 잡게 되었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여인이 절하며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노부가 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각, 중간에 내 말을 끊지 말고 들었다가 한마디도 빠뜨림없이 공주에게 전해줘라.]

여인이 가만히 엎드렸다.

괴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사(不死)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자들은 특이한 상황을 만나게 되어 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지.

이건 무공의 높낮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노부는 일찍이 천하의 모든 무공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고금의 무공에 통달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자의 손에 어이없이 패해서 불구가 되고 말았지.

내 목숨을 연장시켜 가는 것은 능력이지만 이 능력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마침내는 다하고 말 것이다.

노부는 아직도 그자나 또 다른 자들이 어떻게 불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들도 모를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자들은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을 꿈꾸는 자들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쩌다가 그자들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그럴 수야 없겠지만 몹시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들이 장주(莊周: 장자)의 숨은 비법을 우연히 알아버린 것일 수도 있고, 하늘과 수명과 같이 했다는 고대 현인들의 법을 얻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 자들을 없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멸시켜 버릴 수는 있다.

어째든 그들도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그 존재의 고리를 끊어주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이 심장을 찔렸을 때 죽고 마는 것처럼 그들도 소멸하고 말겠지.

죽지 않는 자들, 그들이 언제부터 무림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무림의 이단자이자 이방인이기도 한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러나 노부가 다시 나서는 날에는 무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겠다.]

동굴 속에서 책 한권이 천천히 날아나왔다.

[가져가서 공주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요사스런 방사(方士)나 술사(術士)의 무리들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라. 공주가 내가 적은 방법대로 한다면 어떤 자라 할지라도 능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여인이 책을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아주 지친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정작 공주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철인련맹(哲人聯盟)이다. 그자들이야 말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여인이 절을 하고 일어섰다.

[끄아아아아악!!]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는 인간의 비명이 다시금 동굴 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짙은 혈무(血霧)가 소용돌이치며 비명과 함께 춤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9

 

             동분서주

 

 

 

헌원여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막비강은 다시 비석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히 각지로 비석을 찾아다니면서도 틈틈이 헌원여호의 십팔초 도법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비강이 하남성 동쪽 끝에 자리한 청양(淸陽)이란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청양현 교외의 관도를 지나다가 꼬불꼬불한 오솔길 끝에 큰 무덤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다.

명문가의 무덤인지 주위로 수천평의 묘역(墓域)이 잘 가꾸어진 무덤이다. 무덤을 에워싼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들 하나 하나가 아람드리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이 아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덤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높이가 무려 삼 장이 넘고 넓이는 여덟 자 가량이나 되었다. 그것은 막비강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비석보다도 컸다.

(! 정말 큰 비석이구나!)

막비강이 내심 기뻐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황원현고위무대장군봉만호남궁공지묘(皇元顯考威武大將軍封萬戶南宮公之墓)>

 

무덤의 주인은 낭궁(南宮)성을 지닌 이 지방 출신 고위무장의 것이었다.

막비강은 이 비석 밑이야말로 무예비급을 숨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라 단정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늘 갖고 다니던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숱한 비석을 파헤치며 그의 땅 파는 재주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비석 밑을 완전히 파헤쳐 비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석 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석 자 가량 더 팠지만 여전히 낡은 종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비석을 보았지만 이 비석이 제일 큰데... 이것말고도 더 큰 비석이 어딘가에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 자만 더 파볼 요량으로 다시 또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 간악한 도적놈!]

꽈릉!

등뒤에서 난데없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등 뒤에서 한 줄기 경풍이 노도처럼 엄습했다.

돌연한 기습에 막비강은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일 장 가량 피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리며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누구요?]

위기를 모면한 막비강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르고 아주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 눈에서 분노의 안광을 발산하며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은 자신의 일장이 빗나가자 더욱 더 노하여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애송이 도적놈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누가 감히 너더러 우리 선조의 묘비를 훔쳐오라고 시키더냐?]

막비강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노인장, 고정하십시오. 저는 결코 묘비를 훔치는 도둑이 아닙니다.]

[노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느냐? 훔칠 생각이 없다면 왜 묘비를 쓰러뜨렸느냐?]

[... 그것은 소문에 거대한 비석 밑에는 육령지(肉靈芝)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기에 이런 짓을 했으니 노인장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육령지가 어째?]

붉은 얼굴의 노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다, 그는 문득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막비강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하! 이제 보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혈검산장에서 아비의 보물을 훔쳐 도망친 망나니 녀석! 네놈을 잡아 혈검산장으로 끌고 가겠다.]

막비강은 노인이 한 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노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노인장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석을 쓰러뜨린 건 사실이니 원래대로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혈검산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혈검산장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는지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대담하게 이름을 바꾸어 노부를 속이려 들어?]

막비강의 변명에도 노인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네 아비가 무림의 여러 문파에 너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두루 보내 체포를 부탁했다! 용모파기에 적힌 대로라면 네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단호(丹壺;붉은 호리병)가 네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패륜아인 증거다.]

막비강은 막고천이 자신의 용모파기를 무림에 뿌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노인장께서 믿지 않으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제 이름은 곡능천이며 이 호로는 가친께서 술을 사서 담아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선 단호라 말씀하시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주둥아리 닥쳐라! 네놈은 혈검산장의 패륜아 막비강이 분명하다.]

[노인장은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곡능천이 막비강으로 변하고 호로가 단호로 변하다니 노인장께선 혹시 술을 많이 잡수신 것이 아닙니까?]

막비강의 비아냥에 노인은 화가 치밀어 그렇지 않아도 붉은 얼굴이 자색으로 변했다.

[네놈이 막비강이든 곡능천이든 상관없이 오늘 네놈을 때려죽이지 못하면 노부 남궁수방(南宮秀方)은 이곳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겠다.]

(남궁수방!)

막비강은 노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늙은이가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중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셋째 가주인 적면화룡(赤面火龍) 남궁수방이었다니...!)

본래 무림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오대세가다.

사천당문(四川唐門), 하북팽가(河北彭家), 진주언가(秦州諺家), 남천뢰가(南天雷家), 그리고 하남의 토호(土豪)인 남궁세가가 바로 오대세가다.

 

적면화룡 남궁수방!

 

이 인물이 바로 하남(河南) 남궁세가의 셋째 가주다.

그리고 막비강은 몰랐으나 그가 파헤친 비석은 바로 남궁일족 선조의 묘비였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하남 일대의 큰 토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덤의 주인이 일찌기 비옥한 하남 땅에 많은 땅을 사놓았던 덕분이다.

(! 재수 없게 걸렸군!)

막비강은 지금의 자기 실력으로는 절대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제일이지!)

화라락!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허리를 비틀어 묘역 밖을 향해 전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채 묘역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였다.

[흐하하! 어디를 가느냐, 어린 도적놈아!]

맞은편에서 한 줄기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명 얼굴의 푸른 노인이 쏘아 왔다.

(저자는...!)

막비강은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 푸른 얼굴의 인물이 남궁세가의 둘째 가주인 청면수라(靑面修羅) 남궁중방(南宮仲方)임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하여 급히 방향을 돌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동백나무 숲 속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핫하하! 이놈아, 너는 스스로 육임대진(六任大陣)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

남궁수방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고 경물이 사라지며 운무(雲霧)가 확 피어올랐다.

(아차! 진 속에 빠졌구나!)

막비강은 자신이 기문진에 빠졌음을 알고 실색했다. 이 동백나무 숲에는 도굴꾼들을 사로잡기 위해 진법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남궁수방의 흉험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네 아비 막고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 때려죽였다. 노부는 네놈을 진식 속에서 배를 곯아 반쯤 죽도록 만든 다음 꽁꽁 묶어 네 아비에게 보내겠다.]

막비강은 동백나무 숲 속에서 방향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어빠진 노적아!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수방이 냉랭히 대꾸했다.

[어린 녀석이 어른도 몰라보다니, 노부는 우선 네놈을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때려 두 번 다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겠다.]

막비강이 재차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였다.

[아이야, 그와 말다툼하지 마라! 노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

돌연 귓전에 생소한 음성이 전해 왔다. 그 음성은 너무나 가늘어 모깃소리 같았지만 똑똑히 들렸다.

막비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근에 고인이 숨어 있음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며 고의로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중방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나를 보자 자진해서 진 속으로 뛰어든 그 어리석은 놈은 도대체 누구냐?]

[형님은 놈이 막고천의 망나니 둘째 아들놈임을 모릅니까?]

[! 그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말이냐?]

[그 되먹지 않은 놈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거 참 이상하구나. 내가 듣기로 막고천의 둘째 아들은 본래 병약하여 병아리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무게가 삼천 근이 넘는 우리 조상님의 비석을 넘어뜨릴 수 있었느냐?]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하지만 소제는 그 놈이 막비강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나 지니고 있는 붉은 호리병이 막고천이 보내온 용모파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사나흘 배를 곯려 놓은 뒤에 사로잡아 확인합시다.]

막비강이 상대방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을 때였다.

[아이야, 내가 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라. 앞으로 세 걸음... 우측으로 돌아 여덟 걸음... 좌측으로 돌아 한걸음... 앞으로 반걸음... 다시 좌측으로 돌아 열 걸음....]

귓전에 아까 그 모깃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막비강은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득 눈앞이 탁 트이며 이미 동백나무 숲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면전에는 육순 남짓한 의원 차림의 노인이 오른손에 약초를 캐는 호미를 들고 막비강을 향해 빙긋이 웃고 서 있었다.

[! 빨리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막비강의 반응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비강은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그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의원 차림을 한 이 노인의 걸음걸이는 바람 같아 막비강은 달려야지만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약 반시간 가량 따라가자 노인은 녹음이 짙은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밀림 안에 들어서더니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어린것이 제법 날래구나.]

막비강은 이 노인이 구출해 주지 않았다면 혈검산장으로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아는지라 얼른 큰절을 했다.

[선배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으면 후배 곡능천은....]

노인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을 가로챘다.

[아이야, 네 이름은 정말 곡능천이냐?]

막비강은 은인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급히 또 포권의 예를 올렸다.

[후배의 본명은 막비강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변고를 당해 곡능천이라 이름을 고쳐 강호를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혈검산장 금사혈검 막고천의 자식이 틀림없구나.]

막비강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곤혹의 빛을 띠며 물었다.

[너희 집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느냐? 그리고 네 부친 막고천은 무엇 때문에 사면팔방으로 사람을 풀어 너의 행방을 수색케 하고 있느냐?]

[이 일은 관계가 너무 중대하므로 당돌한 요청입니다만 노선배님의 존함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의 성은 악()가고...!]

순간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무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한 분 기인을 떠올리고 얼른 말을 받았다.

[혹시 남산의성(南山醫聖) 악불령(岳不靈) 노선배님이 아니십니까?]

막비강의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감히 의성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다만 몇 가지 약초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남산의성 악불령!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최고의 신의(神醫). 그의 재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백골에 살을 붙일 지경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또한 그는 의술뿐만 아니라 기문둔갑의 재주와 무공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강호칠절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다.

막비강은 급히 포권을 했다.

[후배가 미처 몰라 뵙고 실례했습니다. 사실 집안의 변고는 입을 열기 부끄럽습니다. 막고천은 후배의 생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집을 나온 것입니다.]

남산의성 악불령이 놀라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너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느냐?]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눈물을 글썽이며 처연한 표정을 짓자 얼른 또 말을 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노부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 묻겠는데 네가 남궁세가 조상의 묘비를 파헤친 의도는 무엇이냐?]

막비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육령지를 찾아 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불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이야,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육령지는 심산유곡에 들어가 찾아야지 어찌 남의 조상의 묘혈(墓穴)을 파헤쳐 얻으려 하느냐?]

악불령의 말에 막비강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악불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년의 무성(武聖) 청구상인께서는 자신의 청구단서를 지기(地氣)가 서린 한곳 용혈(龍穴)에 묻어 두었다는구나.]

(이분은 내가 비석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막비강이 부끄러워할 때 악불령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너의 무예로는 남궁세가의 세 가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도운다면 그들도 너를 어떻게 못할 테니 이 기회에 그것을 꺼내 오너라. 그러면 우리 두 사람에게 피차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후배는 노선배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노부는 우선 네게 몇 가지 진법과 내공의 입문공부를 가르쳐 주겠다. 그런 다음 보름 후 달 없는 밤에 다시 그곳에 가서 무덤을 파헤치자.]

막비강은 악불령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자 황급히 큰절을 했다.

비록 막비강이 강호의 일류고수들인 염라철장과 무협제원등의 무공을 연마하긴 했지만 제대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해 그 위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초식과 달리 내공심법은 이끌어주는 스승이 없으면 큰 성취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막비강이 절을 하려 하자 악불령은 담담히 웃으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노부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큰절까지 할 필요 없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와 환약이 든 봉투를 꺼내 막비강에게 주었다.

[노부가 보니 너의 자질이 뛰어난지라 내공심법 뿐만 아니라 특별히 노부의 진보약학(陣譜藥學)까지도 전수해 주겠다. 이 책자엔 노부가 연구하여 얻은 학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보름 동안 빌려줄 테니 열심히 보도록 해라.]

두 권의 책을 건네준 악불령은 이어 여러 알의 환약이 든 봉투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 약환은 역용환(易容丸)인데 각종 색깔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알을 사용하면 약효가 보름간 지속된다. 사용할 땐 물 속에 풀어 피부에 발라라. 그리고 원래 면목을 회복하려면 양잿물에 씻으면 된다.]

막비강은 두 손으로 환약도 받아 품속에 넣고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지금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보름 후 후배는 어디서 노선배님을 기다릴까요?]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그 책자들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악불령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 교활한 가짜놈 같으니...!]

난데없이 나직한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코웃음 소리를 들은 악불령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뽑아 올려 십여 장 밖의 고목 위로 덮쳐 갔다.

와지직!

일순 무성한 나뭇가지가 강맹한 장력에 부러지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으며 악불령은 나무줄기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과연 강호칠절 중 한 분답구나!)

막비강은 의성 악불령의 고절한 무공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악불령은 상대방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듯 나무줄기 위에서 한바퀴 맴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막비강이 놀라고 있을 때 또 다른 방향에서 냉소 소리가 전해 왔다.

[!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노적 같으니...!]

악불령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방면의 고인인지 모습을 나타내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

[오냐! 원한다면 나타나 주마!]

냉랭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예리한 파공성을 대동한 채 쏘아 왔다.

[! 당신은...!]

화라라락!

악불령은 안색이 일변하더니 황급히 숲 속으로 도주해 들어갔다. 그는 얼마나 급했던지 약초 캐는 호미까지 팽개쳐 두고 도망쳤다.

막비강은 잠시 머뭇거리다 허리를 굽혀 그 호미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이야, 잠깐 기다려라!]

화락!

말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그 사람은 고희의 나이에 인자한 용모를 지닌 갈포(葛布) 노인이었다.

노인은 막비강을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너는 속았다. 하지만 노부는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 가짜 악불령은 어디로 도망쳤느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노선배님께선 왜 그를 가짜라 하십니까?]

[그것은 노부가 바로 악불령이기 때문이다.]

[예에? 선배님이 남산의성이시라구요?]

막비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자의 이름은 강용(江庸)이고 별명은 소리장도(笑裏藏刀). 한 달 전 노부가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노부의 채약 도구인 뇌강서(雷鋼鋤)와 약물감별필록(藥物鑑別筆綠)을 사취해 갔다. 노부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 헤맸는데 여기서 또 놓치고 말았구나.]

나타난 노인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막비강은 강용이란 자가 도주할 때의 낭패한 모습으로 미루어 면전의 노인이 진짜 악불령이라 단정하고 강용이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악불령에게 돌려주었다.

[악 선배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은 이것입니까?]

악불령은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를 받아 뒤적여 보더니 가벼운 탄식을 했다.

[너는 매우 정직하구나. 이 두꺼운 약전(藥典)은 노부의 물건이다. 그러나 이 기공입문법(氣功入門法)은 강용의 물건이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노부는 여기서 보름만 머물며 네게 기공입문공부를 전수해 주겠다. 네 의사는 어떠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언일 따름입니다!]

막비강은 얼른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강용을 만나게 된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악불령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노부의 약초 캐는 호미를 사취해 간 것은 이제 보니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고 소문난 위왕묘(魏王墓)를 도굴하기 위해서였구나.]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위왕묘를 파는 데 왜 선배님의 약초 캐는 호미가 필요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파지 못합니까?]

[위왕묘는 사방이 한철(寒鐵)로 뒤덮여져 있기 때문에 보통의 도구로는 이가 먹히지 않는다! 오직 노부의 뇌강서만이 한철의 극성이라 도굴이 가능하지. 물론 간장(干將) 막야(莫耶)같은 보검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많은 시간과 진력을 소모해야 한다. 위왕묘를 도굴하려면 노부의 뇌강서가 제일 적격이지. 하지만 위왕묘에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믿지 못할 소문이다.]

[청구단서가 위왕묘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진 노부도 모른다.]

악불령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너도 생각해 봐라. 청구상인이 죽은 지는 채 백년도 되지 않는다. 반면 위왕은 삼국시대의 효웅 조조(曹操)를 칭하는 게 아니냐? 두 사람의 시대가 천년 넘게 차이가 나는데 위왕묘 안에 청구단서가 있을 리 있겠느냐?]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막비강도 고개를 끄떡였다.

[강용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진 모르겠지만 기관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는 위왕묘에 들어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단서가 비석 밑에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이 비급은 그가 절예를 연성하고 피맺힌 원수를 갚는 데 중대한 관계가 있는지라 악불령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4

 

             天祿如意

 

 

객실의 창으로는 별빛이 쏟아지고,

침대 곁에 가져다 놓은 화로(火爐)에서 파란 연기가 실날처럼 피어올라간다.

(이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하면 즉시 죽여 버려야지.)

이매봉은 손가락 끝에 은밀히 공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죽기는 죽을까?)

장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잘 들지가 않는다.

그리고 일곱째라는 장군묵도 마음에 걸린다.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변신을 한다더니 겨우 거울이나 보는 거였나? 이 밤중에 설마 사내 녀석이 단장하고 나가는 건 아닐 테고... 아니, 혹시 모르지. 기녀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매봉은 취해서 잠든 척하며 현천록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고, 정확하게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눈을 보면서 나직하지만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천록이다. 나는 열다섯이고 아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시를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이매봉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속으로 잘도 변신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현천록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봉은 가소로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서 비밀을 탐지해내고 하는 것도 바로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깔깔 웃고 말했다.

[!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웃겨! 네가 뭔데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래? 황제한테도 그런 힘은 없어.]

현천록이 슬며시 웃었다.

[다 들었어요?]

이매봉이 침대에 가부좌를 하고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뀐다.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소릴 누가 못들어.]

현천록이 말했다.

[내 말은 진짠 걸요.]

이매봉이 고개를 약간 돌려 흘겨보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현천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변신만 하면 뭐든 안될까요?]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놈의 변신! 변신! 변신! 병신같은 녀석! 네가 뭐 손오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현천록이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으음! 변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변신은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해요.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겠지만.]

이매봉은 기가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아! 이녀석 아예 날 상대로 사기칠려고 작정을 했군. 그럼 증거를 한 번 보여 봐!]

현천록이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곧 알게 되겠죠.]

[뭐야! 벌써 허풍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야?]

이매봉이 이죽거렸다.

[급해할 것 없어요. 사람이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법이니까요.]

현천록은 천연덕스럽고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어딜 가?]

현천록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함께 자요?]

이매봉이 멍하니 있다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함부로 말하면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현천록은 잘 자라 하곤 문을 닫았다.

 

X X X

 

현무호(玄武湖)는 금릉성의 열세 개 성문 중 현무문 밖에 있는 큰 호수다.

호수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으며, 그 섬들은 모두 교각과 토담으로 호수 밖 땅과 이어져 있고, 섬마다 정자와 누각이 서있어 현무호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달빛은 교교하고 달빛을 받은 눈은 은세계를 호숫가에 펼쳐놓는다.

하늘은 달과 별과 무수한 영웅들의 운명을 담고, 호수는 하늘을 담고 땅 위에 펼쳐져 있다.

성벽 위를 오가는 한 쌍의 파수꾼들 머리 위로 잠들지 못한 밤새들이 나는데,

삘릴리...!

엷은 선으로 하늘을 가둔 호수 위로는 끊일 듯 이어지며 애절한 퉁소 소리가 흐른다.

사람은 고적하여 머리를 떨구고 고향을 생각하며, 소리에 취한 노루 한 마리가 모가지를 길게 뽑아 달을 본다.

별똥별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가로 사라지고, 나직한 사람의 한숨소리는 애꿎은 이의 가슴에 떨어진다.

퉁소소리 끊인 곳에 고루의 북소리가 이경(二更)을 알리고, 밤바람이 언 눈을 쓸어 은가루를 뿌린다.

계명사(鷄鳴寺) 활몽루(豁蒙樓)는 현무호를 보기에 제일 좋은 곳, 사람 있어 좋고 현무호가 있어 아름답다.

현천록은 호반을 거닐며 퉁소소리를 듣다가 취한 듯 끌려 계명사로 왔다.

활몽루는 잘 보이건만 들려오던 퉁소소리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귀청을 얼릴 듯하다.

계명사의 문은 닫힌 지 오래지만 현천록은 활몽루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음률은 모르지만 이 퉁소소리는 너무도 그의 심금(心琴)을 울려 놓았다.

현천록은 흰색 담장을 날아 넘었다.

계명사의 승려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나 다니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눈 위를 걸으며 활몽루로 향했다.

활몽루에서 언뜻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청하는 손님은 오지 않고 청하지 않은 손님만 왔구만.]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현천록은 좀 더 다가가 불당의 그늘에서 누각 위를 보았다.

어깨에는 붉은 수실이 날리는 보검을 메고 머리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퉁소로 막 올라온 듯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사가 가리키는 인물은 현천록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오늘 낮부터 알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커다란 낭아봉에 삐죽삐죽 돋아있는 강철이빨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바로 생사탄의 일곱 번째라는 칠척거인 장군묵이다.

장군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코도사! 당신은 불과 사흘을 기다렸지만 나는 삼년을 기다렸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늙은 도사가 호통을 쳤다.

장군묵이 웃으며 말했다.

[도사! 도사와 나는 인연이 없지 않소. 하나 그 인연을 말하기 전에 도사는 좀 너그러움을 지녀야겠소.]

늙은 도사가 흉폭한 살광을 발하며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노도에게 망발을 하다니! 네놈 사조라도 노도앞에선 고개를 숙일 텐데...]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도사! 잘 들으시오. 도사에게는 내가 불청객이겠지만 내게는 도사가 삼년을 기다린 손님이오. 손님이 너무 무례한 건 아니오?]

현천록은 장군묵을 발견한 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낮에 만나본 장군묵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저런 모습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아주 멸시하는데 저 도사에 대해서는 꽤 참을성을 발휘하는구나. 저 도사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서 일까?)

늙은 도사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노도는 여기서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냥 간다면 몰라도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네놈은 목을 두고 가야 할 것이다.]

장군묵이 도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당에서 삼백년 내 최고수라 불렸던 진양진인(眞陽眞人)이 이토록 답답한 놈일 줄이야.]

진양진인이라 불린 늙은 도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육십년 만에 노도를 알아보는 자를 만났군.]

장군묵이 말했다.

[나는 소코도사 당신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삼년을 기다렸지. 쓸데없는 생각말고 순순히 대답해주시오.]

늙은 도사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 가운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가 튕겼다.

쌔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어나며 푸른 빛줄기가 장군묵의 왼쪽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살짝 치켜들어 막으며 냉소했다.

[오행지(五行指) 중에서 청목지(靑木指). 백금지(白金指)와 적화지(赤火指)도 함께 펼쳐야지.]

진양진인이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떻게 오행지를 알고 있느냐?]

장군묵이 껄껄 웃었다.

[오행지가 뭐 대단하다고 놀라? 태극혜검(太極慧劒)이나 자하천강신공(紫霞天罡神功) 쯤 된다면 몰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군묵이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의 턱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당신이 본파에서 전설로 전해오는 창허진인(蒼虛眞人)은 아... 아니겠지?]

장군묵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사한텐 안된 일이지만 옛날엔 그렇게도 불린 적이 있지.]

진양진인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대 제자 진양이 존장을 뵙습니다.]

장군묵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절이나 받자고 찾은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무당을 떠났으니 내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지.]

진양진인이 떨면서 말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진인께서 아직 세상에 계신 줄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도사가 살아있는 줄 알아도 마찬가지일 텐데.]

진양진인이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묵이 말했다.

[아직 도사가 만나기로 한 친구는 오지 않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 오늘이 정한 날의 마지막 날입니다. 반드시 날이 새기 전에 올 것입니다.]

장군묵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삼년 전에 나는 도사를 처음 보았소. 그리고 그 중놈과 약속하는 것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도사를 붙잡고 물어볼 수가 없었지. 빌어먹을! 나도 쫓기는 중이었으니까.]

진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하문하십시오.]

장군묵이 불쑥 물었다.

[도사는 지난 한 갑자 동안 어디에 있었소?]

진양진인의 잔등이 가늘게 떨렸다.

떨면서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것만은... 제자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흔들면서 말했다.

[도사가 무당 출신만 아니라면 벌써 머리가 터져 뇌수를 뿌렸을 걸?]

진양진인이 더욱 웅크리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제자는 맹세에 묶인 몸인지라...]

장군묵의 눈이 불길을 토할 것 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살기가 지나쳐서 유형화된 것이었다.

진양진인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장군묵이 입을 열고 느린 어조로 말했다.

[삼년전에 나는 도사가 펼친 수법을 보았다. 그건 결코 내가 알고 있는 무당의 수법이 아니었지. 무당의 수법이라면 모두 알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무당의 수법일 수도 없고. 더구나 내가 알기로는 현 무림에서 그런 수법을 쓰는 문파나 방회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묵이 말했다.

[그때 도사는 오늘 만나기로 한 중과 대결하면서 무공도 아니고 진법(陳法)도 아닌 요상한 수법을 펼쳤었지. 난 그 수법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도사가 어디서 그 수법을 배웠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바로 그 순간, 진양진인이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현천록의 눈에는 활몽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장군묵이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바로 이 수법이었지!]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에서 활몽루가 아지랑이로 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8

 

     무덤에서의 하룻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비강은 나직한 떨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몸 아래 무언가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나직이 떨며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내가 헌원여호 아주머니와...!)

막비강은 문득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 질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손바닥 가득히 뭉클하는 살덩이가 만져졌다.

눈을 뜬 막비강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막비강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헌원여호의 한쪽 가슴을 누른 것이다

[...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막비강은 더듬거리며 급히 헌원여호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헌원여호의 벌려 세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된 막비강은 다음 순간 숨이 콱 막히는 충격을 받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무렵 어느덧 날이 밝아 고묘 입구로 밝은 햇살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 넓지 못한 석관 속인지라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 위에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석관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누워있는 헌원여호의 자세는 실로 뇌쇄적이었다.

저고리는 벗겨져 있고 치마는 허리춤까지 걷혀 올라가 있었다.

석관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헌원여호는 석관 속에 반듯하게 눕고 자신의 몸 위에 막비강을 태운 자세로 잠이 들었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한 아름이 넘는 육중한 허벅지는 비스듬히 벌려 세워져 있었다.

벌려 세워진 허벅지 중심부에는 막비강이 헌원여호에게 동정을 바치고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되었다는 증거가 보였다.

(안 돼!)

막비강은 실색을 하며 급히 석관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허리를 잡아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막비강이 놀라 내려다보니 헌원여호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막비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아주머니!]

막비강이 어찌할 줄 몰라 더듬거리려는데 헌원여호가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분면색마의 마수에 떨어져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네게 입은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겠구나!]

헌원여호는 암호랑이라는 무림의 평판과 달리 너무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견마지로를...!]

말하던 헌원여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막비강이 울상을 지으며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리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

(요 색골 꼬마가...!)

헌원여호는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본래 그녀는 사내를 버러지처럼 아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정 내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의 부친 사해신존 헌원궁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옛말을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사해신존은 숱한 여자를 사랑하여 여러 명의 자식들을 낳았었다.

헌원여호도 사해신존이 칠순이 넘어 손녀 같은 어린 시녀를 건드려 낳은 자식이었다.

시녀였던 어머니의 비천한 신분이 어린 헌원여호에게 큰 상처를 주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의 성격이 비뚤어진 것은 철이 들기도 전에 당한 난행(亂行) 때문이었다.

유달리 조숙한 그녀를 배다른 오라버니가 욕정의 제물로 삼아 버린 것이다.

 

헌원여호는 어렸을 때도 성장이 빨랐다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물론 체격만 컸지 그녀는 여전히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였다.

헌데 그런 그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복 오빠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헌원여호의 이복오빠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아주 살갑게 대했다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이런 저런 장난감이나 소품들도 자주 선물해주었다.

대신 툭하면 끌어안기도 하고 몸의 여기저기를 만지기도 했다.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어린 헌원여호는 이복 오빠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가급적 그녀를 이복오빠와 단 둘이 있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녀출신인 헌원여호의 어머니는 본처처럼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다

늙은 남편의 시중을 비롯하여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딸을 혼자 두는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봄날 마침내 사단이 벌어졌다.

늘 다정하던 이복오빠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그녀를 유린한 것이다.

그렇게 헌원여호는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순결을 잃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이복오빠에게....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헌원여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이 그녀로 하여금 사내라면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만일 다른 사내가 자신의 몸에 야심을 품었다면 그 즉시 상대의 눈알을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순진무구한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그녀는 더 이상 강호에 알려진 그 무서운 암호랑이가 아니었다.

 

헌원여호는 간밤의 경험이 막비강으로서는 처음임을 모를 리 없었다.

치욕스런 첫 경험으로 그녀 자신이 어떤 상처를 입었던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막비강이 혹여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근심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억눌러 왔던 열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 어차피 이 아이에게 허락한 몸...!)

이미 막비강을 한차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겠구나!]

헌원여호는 발그레 상기된 표정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미끈한 두 다리를 들어올렸다.

(허억!)

순간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 사이에 헌원여호는 벌려 쳐든 자신의 다리를 석관의 양쪽 모서리에 걸쳤다.

헌원여호도 다시금 흥분되어 숨을 할딱이며 막비강을 재촉했다.

드넓은 대지같은 헌원여호의 몸에 엎드린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막비강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그는 혼자였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고 헌원여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의복은 대충 입혀진 상태였는데 머리맡에 한 권의 비단책자가 놓여 있었다.

 

<헌원십팔해(軒轅十八解)>

 

고색이 창연한 그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헌원여호 가문의 비전무공 중 하나인 헌원도법(軒轅刀法)의 비급이었다

헌원여호는 하룻밤 인연의 표시로 자신의 절기가 담긴 그것을 막비강에게 남긴 것이다.

 

<널 잊지 않으마!>

 

표지 안쪽에는 그 같은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저도 아주머니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막비강은 비급을 꼭 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간밤의 일이 흡사 일장춘몽처럼 여겨졌다

막비강은 뜻밖의 상황에서 어엿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https://www.fanmurim.com/

 

판무림

판타지, 무협 장르 전문 남성향 웹소설 플랫폼

www.fanmurim.com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현천록은 장군묵의 손에서 빠져나와 일장 밖에 내려섰다. 공중에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장군묵이 현천록에게 말했다.

[무공을 익혀라. !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을 상대하는데는 무공이 제일이다. 인간이란 것들은 그저 무공만 강하면 죽어드는 것들이니까.]

소녀가 검을 든 손을 흔들었다.

차라락!

갑자기 그녀의 손에 있던 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군묵이 말했다.

[저 수법은 어검술이다. 멀리 있는 적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을 자기 옷속에 숨겨서 보관하기에도 편리하지. 저런 걸 익혀놓으면 괜찮을 게야.]

소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녀의 어검술을 알아본 사람도 지금까지 없었는데 거인이 대충보고 알아차리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 내가 단단히 홀렸군. 당신들 사형제인가 본데, ! 난 이제 싸우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관두자고.]

그녀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이봐! 감정갖지 마. 뭐 복수하겠다면 언제든지 받아주기는 하겠지만.]

현천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마음 없어요.]

소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현천록이 한걸음 물러섰다.

소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찌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찔러도 소용없잖아.]

장군묵이 코웃음쳤다.

[! 하찮은 인간이.]

소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봐요! 자꾸 날더러 하찮다고 하는데 당신은 하찮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뭐죠? ?]

[!]

장군묵은 코웃음을 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가 깔깔 웃었다.

[그봐요. 자기도 대답하지 못하면서. 꼬마야 그렇지 않아?]

현천록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한테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나도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소녀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 속을 들켜버렸네. 할 수 없지. 그럼 우리 친구할까? 친구사이엔 비밀도 조금씩은 나누잖아.]

현천록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생각하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옆에 와서 말했다.

[난 이매봉(李梅鳳)이야. 넌 현천록이지? 아니 미장이라고 했던가?]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을 잡고 끌며 말했다.

[저 여자는 무시해라. 아주 간살스러워서 가까이 하면 골치아픈 일만 생길게다.]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은 무공을 어떻게 익혔어요?]

장군묵이 말했다.

[? 난 하하하! 처음에 무당파에 들어갔지. 무당파에 들어가서 칠년쯤 있으니까 더 배울게 없어지더군. 가르쳐 주는 건 그대로 배우고 가르쳐 주지 않는 건 훔쳐배웠지. 그 다음에 공동파에 가서 삼년을 있었고, 다시 화산파에서 오년을 배웠지. 공동파 놈들과 화산파 놈들은 내가 배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정도 배우고 나니까 더 배울 필요가 없어서 그만두고 그때부턴 온전해지려고 세상을 계속 여행하고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지.]

현천록이 말했다.

[말씀해주시겠어요?]

장군묵과 현천록이 강변을 따라 걷고, 이매봉이 현천록의 옆에서 다정한 사이처럼 나란히 걷는다.

장군묵은 철저히 그녀를 무시하며 말했다.

[보초님은 옛날에 고향인 천축(天竺)의 무공을 배우셨고, 첫째와 둘째, 셋째는 원래부터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넷째는 혼자 연구해서 자기 무공을 몇 가지 만들었고 다섯째는 아예 무공을 배우지 않았지. 여섯째는 뒤늦게 남의 제자노릇을 해서 지금은 한 문파의 장문인 소릴 듣고 있고, 여덟째는 뭐하는지 모르겠다. 싸돌아 다니는 건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까. 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겠지. 난 이제 가마.]

나란히 걷던 장군묵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버렸다.

바람에 갈대가 날리고 장강 물이 흔들리지만 그 못지 않게 이매봉의 눈도 흔들렸다.

소매 속에서 주먹이 가볍게 쥐어졌다.

현천록은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매봉이 현천록의 손을 잡더니 손등을 꼬집었다.

[아야!]

현천록이 비명을 질렀다.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현천록이 탄식하며 말했다.

[난 사람도 아니예요.]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날 속이려고 어림도 없어. 너나 그 거인녀석이나 다 비밀이 아주 많은 문파에 속해있는 사형제지간이겠지. 너무 신비한 척 하지 말라구.]

현천록은 개구쟁이처럼 혀를 쏙 내밀었다.

시간이란 강은 넓고 넓어서 슬픔도 기쁨도 아주 빨리 쓸어가 버린다.

흘러가는 시간 속의 일들은 붙잡고 있으면 있는 만큼 고통만 커진다.

현천록은 어리지만 보낼 건 빨리 보내고 다가오는 것들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x x x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꽤 유명한 객점인 선인루(仙人樓)에 들어갔다.

이매봉이 혀를 차며 말했다.

[! 너 정말 사기꾼이지. 변신의 천재야! 모습은 바꾸지도 않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는 건 정말 여자들도 하기 힘든 고급스런 기술인데 말이야.]

현천록은 점소이가 안내하는 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속엔 원래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죠.]

이매봉이 맞은 편에 앉으며 웃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나?]

[난 항상 변신을 꿈꿨어요.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그런 꿈을 꿨으니까요.]

현천록이 담담하게 말한다.

이매봉은 가짢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뭘하겠다는 건데?]

[변신을 하겠어요. 아는 것만으로도 변신은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변신을 하겠어요.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도록.]

[얼씨구.]

이매봉이 코방귀를 뀐다.

[너같은 녀석은 정말 처음이야. 아주 웃겨.]

현천록이 말했다.

[난 원래 낙천적이었어요. 한데 다른 일이 조금 있었다고 낙천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건 옳지 않죠. 지금보다 좀 더 낙천적으로 즐겁게 살겠어요.]

[누가 말려?]

[매봉누님 말씀이 맞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즐겁기만 하면 되는 거죠. 나 이전에도 도둑놈들이 있었고 사기꾼들도 있고 강도도 있었을 테니까 도둑이나 강도가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죠.]

[누님? 큭큭!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 하겠지?]

이매봉이 기가막힌 듯 소리를 낮추고 웃었다.

현천록은 진지하게 말했다.

[강도, 사기꾼, 도둑, 거지, 학자.... 난 뭐든 다하겠어요. 뭐든 다 되어보고, 즐겁게 살겠어요.]

[왜 여자도 한 번 되어보지 그래?]

이매봉이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말리화(茉莉花) 차를 마시며 빈정거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푸웁!

이매봉의 입에서 차가 뿜어져 나왔다.

현천록은 자기가 알고 있는 요리란 요리는 모두 주문했다.

선인루의 주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는 돈 많은 공자라고 미리 지레짐작을 하고는 원하는대로 술과 요리를 갖다 주었다.

덕분에 이매봉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현천록은 처음 마시는 술에 얼굴이 붉어지고 조금 알딸딸해진 상태가 되었다.

[어떤 게 재미있을까요?]

이매봉이 약간 혀가 꼬인 음성으로 말했다.

[놀려주기, 때려주기, 골탕먹이기, 빼앗기, 속이기, 만들기, 배우기, 이기기, 죽이기, 지배하기, 애보기, 훔쳐보기, 뒤통수치기, 함정에 빠뜨리기. 물건사기, 보석감상하기, 꽃키우기, 닭잡아 먹기, 정의로운 척하기, 뽐내기..... 뭐 헤아릴 수도 없지. 남자라면 또 다른 것도 좀 있을 테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 그게 다 재미있는거야.]

[이제 계산해요.]

현천록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매봉이 따라 일어섰다.

몸이 조금 비틀거렸다.

[숙박비도 같이 계산해. 오늘은 너무 마셨어.]

이매봉이 현천록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주인이 잽싸게 주문표들 들고 와서 얼만지를 말해준다.

현천록은 이매봉에게 고개를 돌렸다.

[헤헤...]

주인이 이매봉을 보며 손을 비빈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뭐야! 돈도 없이 먹고 마셨단 말이야?]

현천록이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잖아요.]

이매봉이 골치아픈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하는 수없지. 이걸로 계산해.]

소매 속에서 분홍색 주머니가 나왔다.

현천록이 주머니를 열자 그 속에서 콩알만한 주보(珠寶)들과 금원보(金圓寶)가 보였다.

금원보 하나로 값을 치르고 현천록은 이매봉을 끌다시피하며 삼층의 객실로 올라갔다.

이매봉이 눈을 감은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설마 처음 변신한다는 게 채화음적(菜花淫賊) 따위는 아니겠지? 하여간 틈을 좀 보여 약간은 가까워져야겠어. 이 녀석도 이 녀석이지만 배후가 더 궁금하단 말이야. 장군묵인가 하는 녀석만 해도 도무지 추측할 수 없는 놈이었는데 그녀석이 겨우 일곱째라니.)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인데 몸이 푹신한 침상에 눕혀졌다.

그리고 현천록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첫 번째 변신을 하자.]

이매봉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녀석이 정말 채화음적으로...!)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판무림을 방문하시면 더 많은 와룡강의 작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fanmurim.com/

 

판무림

판타지, 무협 장르 전문 남성향 웹소설 플랫폼

www.fanmurim.com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1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파릇파릇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찰사자의 눈빛에 동추겸은 반쯤 얼어버렸다.

혈도를 제압당하고 양 팔의 뼈가 어긋낫지만 살기어린 순찰사자의 눈앞에서는 그걸 다 잊어버릴 정도다.

신화병기점의 일꾼들이 모두 눈밭에 엎드리고 있고,

순찰사자는 길길이 뛰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동추겸! 이 미친 놈아! 네 놈이 쇠를 다루는 재주만 없었어도, 아니 회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 놓지만 않으셨어도 네 모가지가 백 번은 짤렸을 거다.]

동추겸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입안이 모두 터져서 양쪽 뺨이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순찰사자가 고함쳤다.

[당장 벗어! 어디서 순찰사자의 옷을 주워입고 감히!]

동추겸은 어긋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토끼가죽 옷의 단추를 벗긴다.

순찰사자라고는 하지만 키가 훤칠한 처녀아이일 뿐이다.

동추겸은 속으로 재수가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머리 속으로 뭔가 불길한 생각이 확 지나갔다.

여태까지 너무 맞아서 얼떨떨했기 때문에 생각지 못했다.

(가짜 순찰사자는? 그리고 금은동철석의 오보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동추겸의 손발이 와들와들 떨기시작했다.

너무 끔직한 결과가 연상이 된다.

동추겸은 그대로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순찰사자가 앙칼지게 고함쳤다.

[웬놈이냐!]

순간, 피웃! 소리와 함께 예리한 물건이 바람을 가르며 순찰사자를 향해서 날아오고 왔다.

[!]

순찰사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왼손을 뻗었다.

빳빳하게 펼쳐진 종이 순찰사자의 손에서 부르르 떨렸다.

순찰사자가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대리석바닥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두 개나 생겨났다. 모두가 자로 잰 듯이 한치깊이였다.

순찰사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종이의 제일 왼쪽에 칙()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순찰사자가 즉시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순찰당 소속 제 삼순찰사자 조림(趙琳)이 칙서를 받듭니다.]

순찰사자가 마당을 향해서 또 고함쳤다.

[모두 엎드리지 않고 뭘하느냐! 정말 죽고 싶으냐?]

순찰사자 조림은 서쪽을 향해서 세 번 절한 후에 칙서를 소리높혀 읽었다.

[순찰사자 조림은 본 회주를 대신하여 칙서를 큰소리로 읽도록 하라.]

순찰사자 조림은 자기가 읽고 또 절하며 말했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또 읽기 시작했다.

[먼저 짧은 시간에 오보를 갖춘 동추겸의 공로를 높이 치하한다. 동추겸은 이 순간부터 순찰사자로 승진한다. 하지만 근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곳 금릉으로 제한한다.]

동추겸이 감격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순찰사자 조림은 계속 읽었다.

[동추겸의 선물은 잘 받았다. 그러나 오보가 지금의 것으로는 부족하니 몇 년의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다시 증량하도록 하라. 그리고 순찰사자는 동추겸에게 순찰사자로서 익혀야 할 무공을 전수해줄 것을 명한다.]

순찰사자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동추겸은 현천록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분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이 동추겸의 눈이 옳았다. 아마도 그분은 아직까지 아무도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우리 회주님이신게 틀림없다! 나는 회주님의 모습을 대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순찰사자 조림이 동추겸의 어깨뼈를 다시 맞추어 주었다.

뚜둑! 소리가 나며 뼈가 제 자리를 찾는다.

조림이 말했다.

[동순찰! 축하합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조림의 음성이 조금 여자다워졌다.

동추겸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잘 좀 지도해 주십시오.]

조림이 말했다.

[회주님께서는 나이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상승 무공을 익히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 회의 최고 요직인 순찰에는 아직 스물 다섯을 넘긴 사람이 없어요. 한데 동순찰은.....]

[소인은 마흔 세 살입니다.]

[더구나 동순찰은 한 꺼번에 다섯 단계나 승진했어요. 솔직히 회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신 건지 전 알 수가 없군요.]

조림이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동추겸은 황홀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조림이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와요. 순찰사자의 무공을 가르쳐 드리죠.]

 

X X X

 

현천록은 금릉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십리 가량 날아갔다.

금릉을 돌아흐르는 장강 물이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눈을 이고 서서 바람을 따라 집단으로 군무를 추는 갈대들, 그리고 그 위를 날며 먹이를 찾는 겨울 철새들의 요란한 날개짓들.

해가 서산에 잠길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땅과 하늘 사이의 모든 것들은 잠들 때를 준비 하는 듯하다.

현천록은 심한 기갈(飢渴)을 느꼈다.

품 속을 뒤져보니 생사탄에서 가져왔던 사과 한알 밖엔 먹을 게 없다.

갑자기 뒤에서 웃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신같은 꼬마네. 쫓아오느라고 애를 먹었어.]

돌아보니 신화병기점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있다.

사각! 사각!

소녀가 갈대를 해치고 다가오며 말했다.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렀을까? 전설적인 경공인 어풍비행(御風飛行)을 다 사용하고 말이야.]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난 무림인이 아닌 걸요. 무공도 배우지 못했어요.]

소녀가 현천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런 말하면 누가 믿을 것 같애? 깜찍한 녀석. 속이는게 아예 버릇이 되어버렸구나. 나도 처음 만났다면 꼼짝없이 속았을걸?]

현천록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인데.....]

소녀가 말했다.

[넌 눈이 반짝반짝하는게 잘 속이게도 생겼어. 혹시 거짓말할때는 콧구멍이 벌렁거리진 않아?]

현천록이 말했다.

[가슴이 벌렁거려요.]

소녀가 깔깔 웃고 말했다.

[! 이제 나한테는 뭘 줄거야?]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본 사람 몫도 반은 된다는 말을 알고 있겠지?]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사과를 내밀었다.

[다 가져요. 까짓 전 좀 굶죠.]

소녀가 황금빛 사과를 받아들고 또 웃는다.

[하하하하! 이 시침떼기 녀석! 좋아 이건 일단 받아놓지. 내가 말하는게 이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녀석이!]

웃는 모습이 아주 소탈하고 아름답다.

현천록은 넋을 잃고 홀린 듯이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서있었다.

!

이마에 불통이 튀겼다.

[어린 녀석이 아주 색골이네. 엉큼하게 쳐다보기는.]

소녀가 코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서며 핀잔을 준다.

현천록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정말 예뻐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뻐요.]

소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 짜식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무림인이 되는 건 아주 재미있을 것 같군요.]

[?]

소녀가 눈이 동그라지며 말했다.

[넌 그럼 정말 무공을 배우지 않은거니?]

현천록은 호주머니를 터는 시늉을 했다. 무공은 쥐뿔만큼도 배운 적이 없다는 몸짓이다.

소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럼 아까 펼쳤던 어풍비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건 그냥 제 몸이 가벼워져서.....]

[한번 시험해보면 다 알게 되겠지.]

소녀가 말하면서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번쩍!

어느 틈에 뽑아들었는지 한자루의 검이 소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검은 순식간에 현천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검날이 현천록의 등으로 삐죽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소녀를 보고 있었다.

가슴이 꽉 막혀 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녀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생글거리며 웃던 얼굴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위엄과 살기로 가득찬 얼굴이었다.

현천록의 가슴이 떨려왔다.

소녀가 현천록의 가슴을 발로 차서 몸을 밀어냈다.

쓔욱!

다시 검이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뒤로 밀려나서 오른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검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당연히 흘러야할 피가 나지 않았다.

소녀가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검결을 지어 현천록을 겨누며 말했다.

[요사스런 수법이군. 배교(拜敎)냐 아니면 마교(魔敎)?]

현천록은 손을 옷 밑으로 넣어서 상처를 만졌다.

하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생사탄에서 보초가 하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산 것에 좀 더 가깝다.

 

갑자기 슬픔이 콱 밀려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분신이 아니라면 한곳 쯤은 틈이 있겠지?]

소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순간 그녀의 검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검은 가느다란 아지랑이같은 기운을 뿜어냈고, 그것들은 엃히고 설키면서 그물처럼 되어 현천록을 애워쌌다.

한 자루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망(劍鋩)이다.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 소리없이 베어진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우리 막내에 손대느냐?]

천둥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검은 그림자가 현천록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파파파파파팟!

땅이 진동하고 푸른 불꽃이 수없이 작렬했다.

멍하니 서있는 현천록의 앞에 칠척거인이 서있었다.

양 손에는 각기 하나씩의 굵은 낭아봉(狼牙棒)을 들었고 허리에는 긴 채찍을 허리띠 대신 두르고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런 거한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나타날 때까진 기척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누구도 피하지 못한 검망을 깨뜨려버리기도 했다.

소녀는 경각심을 돋우면서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낭아봉을 쓰는 고수가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군요. 역시 세상은 넓어요.]

칠척거인은 그 큰 몸에도 불구하고 아주 균형이 잘 잡혀있고 이글거리는 눈은 불을 토할 듯하다. 갑옷만 갖춰 입는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칠척거인이 소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소녀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사람같지 않군요. 귀하는 그 녀석의 아버지인가요 형인가요?]

칠척거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는 감히 물을 자격이 없다. 다시 한 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했다가는 보초님의 명을 거역하는 한이 있어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칠척거인은 돌아서서 현천록의 어깨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장! 반갑구나! 나는 일곱째인 장군묵(張君墨)이다. 네가 태어나는 걸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켜봤다.]

[날 내려줘요.]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군묵이 말했다.

[세상은 짜증나는 곳이다. 네가 순조롭게 살아가려면 최소한 삼십년, 길면 백년은 지나야 할게다. 하하하하!]

현천록은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기쁘지 않아요.]

장군묵이 말했다.

[난 다른 형제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특히 보초님과는.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우리를 집적거리는 건 질색이다. 너도 인간들이 감히 너를 범하지 못하게 해라. 우리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하하하하하!]

장군묵은 소녀를 돌아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 하찮은 것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판무림을 방문하시면 와룡강의 더 많은 작품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fanmurim.com/

 

판무림

판타지, 무협 장르 전문 남성향 웹소설 플랫폼

www.fanmurim.com

 

 

3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 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현천록은 금릉으로 돌아왔다.

바람에 떠밀리다시피하여 성문을 들어서서 발이 이끄는대로 걸어서 신화병기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하는 말들을 들으니 정말 세월이 변한 것 같다. 겨우 삼년이 흘렀을 뿐인데.

병기점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점포를 보고 있다.

신화병기점에서 새로 사람을 고용한 적은 현천록이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공자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서른이 막 넘었을 듯한 점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현천록은 그 점원의 손에 들려 있는 주판을 보았다. 항상 그의 손때가 묻었던 주판인데 이제 주인이 바뀌어져 있었다.

현천록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손님이 아닙니다.]

점원이 눈치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오늘 오신다던 그분이신 모양이군요. 제가 주인어른께 즉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현천록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어른? 언제부터 노야를 주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됐지?]

현천록은 팔짱을 끼고 병기점 안을 휘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에 있던 물건들도 보이지만 전혀 보지 못한 새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에 있던 것과는 아주 달라 보였다.

적어도 현천록의 눈에는.

현천록은 짧고 뭉퉁하게 생긴 칼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잡이가 말모양으로 생긴 꽤나 멋을 부린 칼이었다.

[이건 누구 솜씨일까? 노야께서 용케도 이런 물건을 내놓으셨네. 그래도 쇠는 아주 좋아. 극상품인걸. 차라리 녹여서 장아저씨가 새로 만들게 했으면 보기드문 신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텐데.]

그때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대 여섯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모양이다.

아주 뚱뚱한 중년인이 겉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있는 좌우에 몇 명의 젊은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소식을 전하러 갔던 점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어른! 바로 그분입니다.]

중년인은 점포로 들어서자 마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순찰사자(巡察使者)님을 뵙습니다.]

따라온 네 명의 젊은이들도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현천록은 얼떨떨해져서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중년인이 흠칫하자 젊은이들 중에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름을 묻고 계십니다.]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소인은 신화병기점의 점주인 동추겸(董追謙)입니다. 강호의 친구들은 칠지한(七指漢)이라 불러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현천록은 놀라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당신이 신화병기점의 주인이라구요? 그럼 노야께서는 어디 계시죠?]

중년인이 아주 당황하며 말했다.

[.... 사자님! 그 그전의 주인에 대해서는 소인 잘 모릅니다. ...소인은 다만 삼년 전에 이곳 신화병기점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현천록이 젊은이들에게도 물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젊은이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납작하게 엎드리며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칠지한 동추겸이 현천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인이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자님께서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현천록은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아는 곳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 혼란스럽다.

[일어나세요. 전 여러분이 말하는 사자가 아닙니다.]

!

칠지한 동추겸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차라리 소인에게 자결을 명해주십시오.]

동추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현천록은 기가막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늘 자기가 앉곤 했던 자리에 앉았다.

가만 있자니 장부를 살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노야나 이곳 신화병기점의 식구들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현천록은 발 옆에 있는 서궤를 열었다.

한달에 한 번씩 책으로 엮이는 장부는 모두 그곳에 차곡차곡 들어있다. 아니 그전에는 그랬었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서궤를 열자 더욱 긴장하며 가늘게 떨었다.

서궤가 텅비어 있었다.

[여기 있던 장부들은 다 어디갔지요?]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추겸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소인이 사자께서 내전으로 방문하실 줄 알고 안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화병기점도 나만큼이나 신고(辛苦)를 겪었구나. 하여간 이 사람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알아보고 빨리 여기를 떠나자. 차라리 밖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 소문을 들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마음이 정해지자 현천록은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전으로 모두 다 모아주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추겸이 쩔쩔 매면서 대답하고, 네 장점과 점원이 서둘러 달려갔다.

현천록은 동추겸과 함께 민노야가 정성껏 가꾸었던 동백나무 정원을 가로 질러 안으로 갔다.

동백나무들은 근년에 잘 다듬어지지 않았는지 거친 모습이지만 붉은 꽃봉우리를 눈 속에 드러내는 것도 있었다.

세월이 흐른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변한 것은 없다.

현천록은 매일 같이 오가던 길을 걸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회가 새롭건만 사람들이 옛 사람이 아니라는 건 쓸쓸한 비애를 자아내게 한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너무도 익숙한 걸음으로 내전을 향하자 더욱 두려워하며 오히려 그의 뒤를 따랐다.

민노야가 주무시던 전각 앞의 마당에는 낯 선 사람들이 칠십여명 가량 석상처럼 서있다.

현천록은 민노야가 새벽마다 식솔들을 점검하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며 전각 앞의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쇠를 다루는 장인들, 가죽을 다루는 장인들, 그리고 금과 은을 다루고 정교한 세공을 하는 장인들이 구별을 지어 서있다.

현천록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지만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었다.

동추겸에게 물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동추겸이 대답했다.

[소인이 제일 먼저 왔고 뒤이어 장인들과 일꾼들이 왔습니다.]

[그때 뭐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아주 급하게 떠났던 것 같았습니다. 두 달만 지나면 꼭 그때가 되는데 불씨도 남아있었고 의복도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천록은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뿐 그들이 어떤 변을 당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저절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

억지로 웃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하하하! 이제 됐습니다. !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을 할까요? 준비해주세요.]

동추겸이 그제서야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그럼 이들은 일단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동추겸은 사람들을 흩고 난 다음에 현천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민노야가 앉던 자리 앞에 장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비단으로 싼 네모난 물건이 보였다.

크기는 가로세로너비가 모두 한자쯤 되는 것 같았다.

장부의 형식이 달랐다. 모두 새 장부고 이전에 그가 작성했던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현천록은 더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충 훑어보는 척하며 슬쩍 앞으로 밀었다.

동추겸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장부를 더 밀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당겨 놓았다.

현천록은 이게 뭐냐는 듯이 동추겸을 보았다.

동추겸이 겸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자님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소인이 준비한 것입니다. 약소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현천록은 계속 동추겸의 얼굴을 주시했다.

동추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회주님께 바칠 물건을 소홀히 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사자님께서 출발하실 때.....]

그제서야 현천록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동추겸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가져 오세요. 지금 가야겠습니다.]

동추겸이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현천록은 웃음이 터져나오려 하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어떤 상황도 비극으로만 가득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뇌물이겠지. 회주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세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현천록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죽이려고 들겠지?]

그때 동추겸이 손바닥만한 곽()을 두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자단으로 감싼 곽인데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손가락 모습을 본따 만든 작은 병들이 앙증맞게 들어있었다.

동추겸은 아주 조심스럽게 현천록의 앞에 곽을 놓았다.

한데 크기에 비해서 아주 둔중한 소리가 났다.

쿠웅!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것처럼 탁자가 약간 삐꺽거렸다.

[지난 삼년 동안 모은 금은동철석의 정화(精華)입니다.]

현천록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낼뻔했다. 다행히 손이 빨라 재빨리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동추겸은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회주님께서 각지의 금속을 보내주셔서 돌봐주신 덕분에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추겸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자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현천록에겐 다른 의미였다.

점포에서 보았던 말모양의 손잡이를 한 짧은 칼의 비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극상품의 철이 너무 쓸데없이 낭비되었던 이유를.

현천록은 오보(五寶:금은동철석의 정화)가 든 곽을 보면서 속으로 침을 삼켰다.

신화병기점에서 자란 현천록이기에 장인들로부터 오보에 대한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오보를 직접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쇠를 다루고 금을 다루는 사람들은 만대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욕심이 왈칵 일었다.

자기만 입을 꾹 다물고 꿀꺽해버리면 그냥 자기 것이 되어버릴 물건이다.

심장이 약간 빨리 뛰기 시작한다.

[좋은 물건입니다.]

동추겸이 기뻐하며 말했다.

[사자께선 역시 보물을 보실 줄 아는 눈을 가지셨군요. 회주님께서 천하의 보물을 두루 구하시지만 사실 이만한 보물은 또 구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사용된 금과 은, 구리와 철, 그리고 돌은 아마도 산을 몇 개 쌓고 남았을 것입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동점주께선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동추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얼굴이지만 감히 현천록의 앞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추겸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소 소인을 벌하지 않는 것만해도 무상의 영광입니다. 하 하온데 대가라 하오시면....]

현천록은 속으로 웃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사자는 아니지만 장사꾼이오. 장사꾼은 속이는 게 능사지만 난 물건을 속이진 않으니까 당신은 임자를 잘 만난 셈이오. 내가 당신한테 속이는 건 정황만 속이고 물건은 속이지 않으니까 용서해주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추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현천록은 사실을 말했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공이 너무 커서 사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것으로 들렸다.

현천록이 또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따로 없군요. 하지만 이 토끼털 옷은 꽤 따뜻합니다.]

동추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동추겸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께서 순찰사자가 되셨음을 속하들이 앙축합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아차했다.

일이 잘못되려니까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회주가 순찰사자를 임명할 때는 토끼털옷을 준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닫기는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토끼털옷을 벗어서 동추겸에게 줘버렸다.

혹시 몸에 걸칠 만 한게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동추겸이 토끼털 옷을 꼭 움켜쥔 손으로 붉은 비단으로 싸인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님!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습니까? 마침 속하가 준비한 선물도 바로 옷입니다.]

현천록은 붉은 비단을 풀어서 상자 속에 든 옷을 꺼냈다.

상자 속에는 아주 화려한 흰비단옷과 물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잠사(天蠶絲)로 짠 홍색 머리띠가 들어있었다.

그 홍색 머리띠는 만져보고 나서야 겨우 천잠사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감히 몸에 걸칠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천록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러면 당신이 너무 손해보는 것 아닙니까?]

동추겸이 황급히 손을 저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시늉을 한다.

옷은 현천록에게 꼭 맞았다.

홍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나자 어느 모로 보아도 현천록은 귀티나는 미소년으로 보였다.

동추겸은 입었던 옷 위에 토끼가죽옷을 걸치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 적입니다! 적이 침입을...]

[!]

동추겸이 고함쳤다.

[모두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동추겸은 현천록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으악!]

[! 아이구!]

여러 가지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현천록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민노야가 앉아있던 그 자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소인배구나. 버릇도 고치지 못하고 재물을 보고 욕심내서 속였으니 참나.....]

동추겸이 빠져나간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도망쳐야 할텐데..... ]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동추겸! 이 찢어죽일 놈아! 감히 사자가 왕림했는데도 거들먹거리기만 해? 어디 내손에 한 번 죽어봐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다.

동추겸의 호통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네 이년! 무슨 개뼈다귀같은 소리냐! 너야 말로 이옷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도 똑같은 사자의 신분이거늘. 감히 이곳에서 횡패를 부리려하다니!]

[호호호호! 네놈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사자가 입는 옷을 함부로 걸치다니! 너같은 놈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현천록은 쳐들어 왔다는 적이 실은 적이 아니라 진짜 사자라는 걸 알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속은 줄 알면 사자보다도 동추겸이 더 길길이 뛸게 틀림없다.

현천록은 계면쩍게 웃었다.

[역시 나쁜 일에는 금방 번잡함이 생기는군.]

바로 그때 현천록의 바로 옆에서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아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그의 옆에는 열일곱여덟 살 쯤 된 소녀가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서있었다.

분냄새와 소녀 특유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찌른다.

현천록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푸른 비단옷을 입었는데 아주 고운 얼굴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입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었다.

[솜씨가 아주 좋던데. 자연스럽게 속이고 자연스럽게 빼앗고, 자연스럽게 따돌리고.....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어.]

소녀의 음성은 정말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맑고 듣기 좋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다 봤어요?]

[그럼 숨긴 게 있기나 하니? 발가벗기 까지 한 주제에.]

소녀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현천록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얼버무렸다.

[바른 행동은 아니었죠. 하지만 전 상인이었으니.... ]

소녀가 현천록의 어깨를 탁 치면서 호쾌하게 말했다.

[상인이면 어떻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면 어때?]

[?]

현천록이 뜻밖이라는 듯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키는 현천록과 비슷하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현천록이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소녀가 말했다.

[세상엔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벌써 장사꾼도 많이 있었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도 많았단 말이야. 네가 그 무리들 중에 잠시 끼어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한테 당할 놈이면 어차피 다른 놈에게 당하게 돼있어. 이런 걸로 자기 변명하느라면 세상이 너무 피곤해져.]

현천록은 자기 이마를 철석 치면서 말했다.

[절묘한 말이군요.]

비명소리가 가까워진다.

소녀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추겸 그 멍청이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 어쩌면 매일 죽는 놈 중에 너 한녀석 더 보태져도 별로 다를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전 도망가야겠습니다.]

[글쎄.....]

소녀가 생글생글 웃는다.

순간 현천록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두 팔을 활짝 펴고 새처럼 활개짓을 했다.

휘이익!

그의 몸이 정말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어느 새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천록은 정말 자기의 몸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몸처럼 아무런 무게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몸을 내맡게 순식간에 십 여 채의 지붕을 넘어갔다.

소녀가 입으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무공을 아는 녀석이었네.]

소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현천록!]

멀리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판무림을 방문하시면 더 많은 와룡강 작품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fanmurim.com/

 

판무림

판타지, 무협 장르 전문 남성향 웹소설 플랫폼

www.fanmurim.com

 

7

 

       석관 속에서 벌어진 일      

 

 

 

(과연 백도제일고수의 딸답구나!)

막비강은 소문으로만 듣던 헌원여호의 위풍에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색쌍요(花色雙妖)! 너희 연놈들이 더 이상 세상의 선량한 남녀를 망치지 못하도록 해주마!]

그때 장내의 헌원여호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하며 두 간부간녀에게로 다가섰다.

(저자들이 화색쌍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분면색마(粉面色魔) 관지(關志)!

 도화요희(桃花妖姬) 전옥교(全玉嬌)!

 

이것이 두 탕부탕녀의 이름이었다.

그자들은 한 사부를 모신 사형제간이며 또한 사실상의 부부이기도 했다

음탕한 방중술(房中術)과 채보술(採補術)로 악명을 떨친 쾌활문(快活門)이라는 문파가 그들의 사문이다.

또한 그자들은 중원육요(中原六妖)에 드는 절정고수들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무협제원이나 염라철장에 필적하는 고수들인 것이다.

만일 막비강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뛰어들었다면 응징을 하기는커녕 그들의 수중에 떨어져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원래 그자들의 실력으로는 단신으로 헌원여호와 충분히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둘 다 심한 중상을 입어 운신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실 헌원여호는 일찍이 청련사에 침입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단신으로는 화색쌍요를 확실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한 것이다.

막비강이 본 두 야행인 중 두 번째 야행인의 정체가 바로 헌원여호 헌원빙이었던 것이다.

[죽어랏! 네놈에게 몸을 망친 여자들을 대신해서 응징을 내린다!]

번쩍!

헌원여호는 중상을 입어 기식이 엄엄한 도화요희는 제껴 두고 먼저 분면색마에게 호치도를 휘둘렀다.

[악독한 계집!]

분면색마는 욕지거리를 해대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일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헌원여호는 더욱 사납게 칼을 휘둘렀다.

분면색마도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살수를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마침내 분면색마는 한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자의 몸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으으! 네년이...!]

분면색마는 절망의 표정으로 헌원여호와 그녀의 호치도를 올려다보았다.

[단칼에 죽여 주는 것을 감사해라!]

헌원여호는 냉혹한 표정으로 웃으며 호치도를 높이 쳐들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돌연 헌원여호의 당당한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으음!]

이어 갑자기 헌원여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헌원 아주머니가 왜 저러지?)

돌연한 상황에 막비강은 어리둥절했다.

[으하하하! 네년이 제 꾀에 빠졌구나!]

순간 그때까지 죽을상이던 분면색마가 갑자기 득의의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흐흐! 어떠냐, 헌원 계집년아. 환락쾌활분(歡樂快活粉)의 효과가?]

[흐윽! ... 네놈이 언제 최음제를...!]

헌원여호가 분노와 절망에 찬 음성으로 신음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삽시에 장작불처럼 달아올랐다

지독한 최음제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흐흐! 궁금하다면 가르쳐 주지! 본좌의 묘약은 바로 저 황촉(黃燭)에 뿌려져 있었다!]

(! 그래서 비구니들이 모두 최음독에 중독당한 거였구나!)

분면색마의 말에 막비강도 확연히 깨달았다

분면색마는 황촉에 최음독분을 섞은 채 비구니들을 불러들여 그녀들을 색욕의 노예로 만든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헌원여호는 무방비 상태로 독연기를 들이마셨으며 게다가 거푸 내공을 사용한 탓에 독기가 급속도로 온몸에 퍼져 버린 것이다.

[... 이 간악한...!]

헌원여호는 이를 갈았으나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그런 그녀를 분면색마는 거칠게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헌원여호는 무력하게 넘어졌고, 그 바람에 치마가 걷혀 새하얀 허벅지가 일부 드러났다

육척이 넘는 체격에 어울리게 그녀의 허벅지는 한 아름이 넘어 보일 정도로 투실투실하다.

[흐흐! 감히 본 신선의 몸에 상처를 냈겠다!]

드러난 헌원여호의 흐드러진 허벅지를 훑어보며 분면색마는 잔혹하게 키득거렸다.

[네년을 매음굴에 팔아버리겠다! 흐흐흐! 위명이 쟁쟁한 헌원여호께서 창녀가 되어 아무 놈에게나 가랑이를 벌리고 몸을 판다면 강호의 화젯거리가 되겠지?]

분면색마는 간악하게 웃으며 헌원여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헌원여호는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푸들푸들 떨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분면색마는 입맛을 다셨다.

[흐흐! 매음굴에 팔아넘기기 전에 우선 본좌가 일차 맛을 봐야겠다!]

그자는 만일에 대비하여 헌원여호의 혈도를 찍으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악적! 물러서랏!]

쐐액! 콰차창!

돌연 창문이 하나 왕창 부서지며 작은 그림자가 득달처럼 날아들었다

막비강이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다.

막비강은 자신이 결코 쌍요 같은 고수들의 적수가 못됨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무지막지한 살수를 휘둘렀다.

쐐애액!

그의 등에 짊어져 있던 곡괭이가 풍차처럼 분면색마에게 날아갔다.

[!]

분면색마가 깜짝 놀라 급히 물러서려는 순간 막비강은 이미 그의 지척으로 육박하며 장풍을 무찔러 내고 있었다.

분면색마도 다급히 장을 내밀어 막비강의 장풍을 맞받아쳤다.

퍼펑!

폭음이 일며 분면색마의 몸이 휘청했다

창졸간인지라 공력의 삼 할도 못 쓴데다가 호치도에 당한 옆구리의 상처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

그는 온몸이 쩌르르 울려 대여섯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일갑자 가까운 내공을 얻었다 해도 아직은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것이다.

[허허! 요 쥐방울만한 것이 감히...!]

상대가 누군지를 발견한 분면색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토했다.

[흐흐! 스스로 염라전에 뛰어들었으니 본좌를 야속하다 말아라!]

분면색마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막비강에게 다가들었다.

(우라질! 역시 육요의 이름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막비강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분면색마의 공력에 압도당해 찬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내공을 일으켜 분면색마와 맞설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사형! 그 귀여운 놈을 죽이진 말아요!]

한옆에서 상처를 추스르고 있던 도화요희가 다급히 외쳤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고 있던 그녀는 상대가 몸은 어른 같지만 얼굴은 아직 치기 어린 소년임을 알아보자 음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 망할 것아! 이런 지경에도 너란 년은...!]

분면색마는 화가 나서 도화요희 쪽을 돌아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그때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헌원여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녀의 호치도가 일섬 도광을 폭출했다.

[조심... 사형!]

[!]

[가자!]

세 마디의 서로 다른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분면색마는 갑자기 가해진 일격에 맞아 또다시 어깨에서 피분수를 뿜었다.

그자가 비틀하며 몸을 세웠을 때 이미 장내에는 헌원여호와 막비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헌원여호는 사력을 다해 분면색마에게 일격을 가한 뒤 막비강의 손목을 잡아채며 객당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서랏!]

분면색마가 이를 갈며 뛰쳐나갔으나 헌원여호의 모습은 이미 야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응봉현 교외에 자리한 공동묘지.

어두운 야음 아래 수많은 고분들이 음산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쐐액!

문득 야음을 가르며 한 줄기 인영이 유성처럼 고묘군 사이로 떨어졌다.

[흐윽!]

떨어져 내린 인영은 곧 괴로운 신음을 발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선배님! 정신차리십시오!]

그 인영에 이끌려 함께 바닥에 나뒹군 소년이 실색하며 외쳤다

그들은 바로 청련사를 탈출한 막비강과 헌원여호였다.

막비강과 함께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려온 헌원여호는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녀의 상세를 살피던 막비강은 다급해졌다

헌원여호의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겁고 연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때문이다.

(큰일났다! 어떻게 최음제의 해약을 구하지?)

막비강은 솥 안에 빠진 개미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두 사람이 날아온 쪽에서 분노에 가득 찬 장소성이 들리지 않는가?

(쌍요다!)

막비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장소성의 주인은 바로 분면색마였던 것이다.

(여기 있다간 잡히고 만다!)

막비강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한 몸이야 어떻게 숨는다 해도 헌원여호가 분면색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일대기인인 그녀가 분면색마 같은 색마에게 능욕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급히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의 시야에 하나의 커다란 고묘가 들어왔다.

(우선 저기로 숨고 보자!)

막비강은 급히 헌원여호를 들쳐업고 고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해야 했다

고묘 안은 휑뎅그렁하여 몸을 숨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한 듯 고묘 안에는 깨진 도자기 파편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묘실 가운데에는 큼직한 석관(石棺)이 하나 휑뎅그렁하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 뚜껑도 열려진 채 깨져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 봐야겠다!)

막비강은 급히 돌아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의 귓전으로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늦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분면색마가 지척까지 들이닥쳤음을 안 막비강은 도리 없이 헌원여호를 안고 뚜껑도 없는 석관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석관은 속이 깊고 넓어 둘이 들어갔음에도 공간이 넉넉했다.

막비강은 헌원여호를 바닥에 누이고 자신은 그 위에 엉거주춤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비록 위급한 지경이지만 감히 몸을 완전히 밀착할 용기는 없어서 두 손으로 헌원여호의 동체 옆의 바닥을 짚어 버틴 것이다.

그래도 하체가 서로 맞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막비강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헌원여호의 튼실하면서도 보드라운 하체의 감촉이 막비강의 숨을 가쁘게 만든다.

헌원여호의 체격은 정말 당당해서 지난 반년 사이 쑥쑥 자란 막비강보다도 오히려 한 뼘 가량이나 더 컸다

그래서 막비강의 얼굴은 헌원여호의 가슴에 겨우 닿을 뿐이다.

막비강이 숨은 직후 인영이 번득하며 고묘 입구에 분면색마가 날아 내렸다

그자는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음!]

막비강의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가 열에 들뜬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가?

(큰일났다!)

막비강은 질겁했다

두 팔은 바닥을 짚고 있어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이 없다

이에 다급한 김에 막비강을 고개를 빼들고는 자신의 입술로 헌원여호의 입술을 그대로 덮어 눌러 신음 소리를 막았다.

[흐흐흐! 거기 숨어 있었느냐?]

하지만 분면색마가 눈을 번뜩이며 성큼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석관이 비록 제법 깊지만 뚜껑이 없는 상태이므로 그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그대로 들키고 말 지경이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후다다닥!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다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근처에서 도굴을 하던 도굴꾼들이 분면색마의 웃음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교활한...!]

막 석관 속을 들여다보려던 분면색마는 분노의 일성과 함께 석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그자가 누군가를 쫓아가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휴우! 정말 위험했다!]

막비강은 비로소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헌원여호의 몸에서 일어서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헌원여호의 팔다리가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이 질겁하는 사이 그녀의 미끈한 지체는 그를 마구 휘감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을 토해내는 그녀의 옥용은 숯불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의 몸을 휘감은 헌원여호의 온몸이 물결치듯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막히게 조여대는 사지,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의 살이 마치 솜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의 하체 일부가 맹렬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양물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보통 어른들을 오히려 압도할 정도로 장대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 그의 남성이 헌원여호의 자극으로 난생처음 극한까지 자라난 것이다

헌원여호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섬섬옥수는 막비강의 하의를 더듬어 벗겨 내렸다.

막비강은 이내 자신의 불덩이 같은 일부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는 것을 느꼈다.

이미 헌원여호의 치마는 허리춤으로 걷어올려져 허연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막비강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수컷의 본능에 따랐다.

뜨거운 신음과 함께 헌원여호의 우람한 팔다리가 막비강을 으스러뜨릴 듯이 휘감았다.

두 남녀의 육체는 한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채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에 매달리며 본능이 시키는 대로 허리를 굴렸다

막비강의 허리가 어색하게 들썩일 때마다 헌원여호의 입에서는 죽는 듯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차갑고 비좁은 석관(石棺) 속은 어느덧 뜨거운 열락의 낙원으로 변해 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현천록은 숲의 나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름답고 태고의 신비마저 간직한 듯한 숲이지만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벌도 없고 나비도 없고 벌레도 없다.

보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어요?]

[?]

현천록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반문하며 보초를 보았다.

보초의 눈은 측은한 빛을 담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됐느냐고 물었어요. 덕분에 이곳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이 얼떨떨하며 말했다.

[전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걸요. 아무 것도.]

보초가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인다.

[‘그 무공은 아주 특이하죠.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마주치고 나면 특별히 익히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깊숙히 파고들어 버려요.]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전 아무 무공도 모릅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배우지 못한걸요.]

보초가 풋! 하고 웃었다.

꼭 바보라고 놀리는 웃음같다.

현천록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보초가 물었다.

[미장! 아마도 사람과 물건을 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겠지요?]

[조금. 하지만 별 것 아니었어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현천록은 사과를 손바닥에서 슬슬 돌리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어요. 저도 잘 모르니까. 한데 어느 봄 날이었어요. 검을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생긴 검은 요렇게 요렇게 쓰면 좋겠구나!’하고요. 그 후에는 뭘보든지 즉시 그에 알맞는 용도가 저절로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뿐만 아니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으니까 저런 걸 가지면 잘 어울리겠구나. 또 저 사람은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게되었죠.]

보초가 말했다.

[그게 다 그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힌 것 같군요. 누구도 미장 만큼 신지가 트이진 않았거든요.]

[대체 제가 어떤 무공을 익혔다는 거죠?]

보초가 손짓을 해서 현천록을 자기 앞에 앉도록 했다.

[구장심조(九贓心照)라 불리는 무공이지요. 바로 이분께서 처음에 만드셨어요.]

보초의 손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툭 건드린다.

[하하.....]

현천록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듣고 있는 자기도 이상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그냥 자기의 감정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다.

얼핏 보니 보초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져 있다.

현천록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구장심조는 이분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분은 만들었다고 말하지도 못하셨죠. 당신의 자질로는 결코 구장심조같은 절대적인 현공(玄功)을 창안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구장심조는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다가 이분을 통해서 나타난거나 다름없죠. 아주 특이한 무공이니까요.]

현천록은 곰곰히 생각하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창안이 아니라 발견했다고 해야겠군요. 어떻게 특이하다는거죠?]

보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는 사실 온전하지 못한 무공이죠. 구장심조가 온전했다면 이곳 생사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분께서는 구장심조를 알게된 후에 직접 익히셨고, 그 때문에 생사탄이 만들어졌어요.]

현천록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보초의 흩어지는 듯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구장심조가 완전해지면 지금과는 또 다르겠죠. 하여간 구장심조는 온전하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익히게 된 사람은 이곳 생사탄에 들게 되죠.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된다고 할까요? 생사탄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 사이에 만들어진 또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실제로는 삶과 더 많이 겹쳐져 있어요.]

[생사탄의 힘이 이끌려 오게 된다구요? 그럼 저도 제발로 여기까지 온건가요?]

현천록은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를 익히고 나서 칠년이 지나게 되면 대체로 첫장에 막히게 되죠. 그때 보통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게되죠. 기도 끊어지고 심장도 멎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기가 돌게되고 심장도 뛰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몸에 한꺼풀의 껍질이 생기게 되요. 그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생사탄으로 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생사탄 밖에서 구장심조의 두 번째 장을 만나게 될테니까. 하여간 이건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되니 걱정할 건 없어요. 미장이 여기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나서 삼년동안 껍질 속에서 영글어갔던 거죠.]

현천록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삼년이라구요? 제가 정말 삼년이나 잠을 잤단 말이예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라웠어요. 아직 어느 누구도 삼년 만에 껍질을 깨진 못했거든요. 구장심조를 아주 깊이, 우리 중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익혔다는 증거죠.]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은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걸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자라겠지요.]

보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이제 생사탄 밖을 벗어나지 못해요. 미장이 아직 어려 보이지만 바깥바람을 쐬면 금방 자라는 것처럼, 나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금방 늙고 말겠죠.]

보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여자는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하잖아요.]

현천록이 물었다.

[밖에 나가면 난 그전과 똑같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수는 있습니까?]

보초가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사탄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을 볼 수는 있어요. 다만 그들이 우리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볼 수가 없겠지요.]

현천록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 속으로 자기를 질책했다.

(말도 안돼. 내가 정말 이 말들을 믿고 있는걸까? 머리도 아프지 않은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보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분이 익히셨던 구장심조공은 미장 당신과 비슷한 정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뭔가가 더 있었죠. 이분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구장심조를 익히고 또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이분의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세상과 동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이곳 생사탄도 원래는 그냥 바다로 통하는 거친 여울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분이 여기에 사셨다는 것 때문에 이곳 전체가 세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현천록은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재미있군요.]

보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분께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너무 슬픈 일이었죠. 결국 이분은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외롭게 계시다가 함께 있을 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죠.]

현천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게 바로 구장심조공이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겠군요.]

보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맞아요. 이분은 전부터 아끼던 물건들을 세상으로 보냈어요. 구장심조공을 새겨서요. 그 물건들은 어떤 계기로든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보였고 구장심조공을 자기도 모르게 익히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은 이곳 생사탄으로 왔고, 물건들은 다른 세속의 물건들과 뒤섞여 지금도 흘러다니고 있죠.]

보초가 고운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얼굴이 검어서 이빨이 모두 하얀 보석같이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 물건들이 생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는지 여기에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졌으니까요.]

현천록이 물었다.

[그 물건들은 어떤 종류죠?]

[모두 아홉가지예요. 오죽편(烏竹片)이 있고 백설부(白雪符)가 있으며 또 현현도(玄玄刀)와 무극검(無極劒), 자룡배(紫龍杯)와 비취호(翡翠壺), 녹절장(綠節杖)과 청송포(靑松袍),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심환(墨心環)이 있군요.]

[그것들에는 다 구장심조공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현천록이 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요. 대부분 구장심조공이 조금씩 기록되어 있지만 묵심환에는 이분이 자기의 공력을 나누어 담아 놓았지요. 그 때문에 그걸 얻는 사람은 저절로 구장심조공을 얻게 되죠. 내가 말한 순서대로 물건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이 백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묵심환을 내보냈다고 해요. 발견하고 손가락에 끼기만 하면 머지않아 이곳 생사탄으로 오게 될거라 생각했다죠.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까지 묵심환 때문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다른 여덟가지 물건 때문에 오게 됐죠. 한데 미장! 갑자기 얼굴색이 왜 그래요?]

현천록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보초가 근심어린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마지못한 듯 머뭇거리며 자기의 왼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 비밀이죠. 아무도 몰라요.]

현천록이 푸념하며 말했다.

보초가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린 입도 눈만큼이나 동그랗다.

[세상에..... ]

현천록의 왼손 중지에서 거무튀튀한 가락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나무가 자라나듯이....!

[묵심환! 묵심환이군요.]

[병기점에서 심부름하다가 암기들 속에 섞여 있는 걸 발견했었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거짓말 한다고 핀잔만 들었죠. 정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눈에도 안 보일 때가 많더라구요.]

현천록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보초가 묵심환을 만져보며 말했다.

[미장의 구장심조공이 특별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놀라워요.]

 

x x x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뭘하죠?]

[모두가 일을 하고 있어요. 길을 찾고 있는 거죠.]

[어떤 길?]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럴려면 미완성인 구장심조공을 완성해야 하고, 지금의 동료들은 그 나머지 비결이 세상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여기서 나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땅과 바람과 비와 햇살 사이에 그 비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요.]

[완성한다는 게 어떤거죠?]

[아홉번을 넘어서야해요. 아홉겹 속에 숨어있는 마음과 자연의 습리를 밖으로 끌어 내야하니까요. 미장 당신은 겨우 한겹을 벗은 것 뿐이죠. 지겹도록 살게 되겠죠. 여덟 겹을 더 벗게 될 때까진.]

[여덟 겹을 벗고 나면.....?]

[그땐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도 사람이 되진 않았어요. 구장심조 속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큰 힘과 진리가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요. 사람이 되면 너무 유한해서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죽고 말테니까요.]

[아홉겹을 벗은 사람도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한 사람만 아홉겹을 벗어도 생사탄은 사라지겠죠. 또 다른 생사탄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이분의 생사탄은 사라져요.]

[한겹 한겹 벗을 때 마다 어떻게 다른가요?]

[처음에는 육신의 무게를 잃어버리게 되요. 깃털보다 가벼워져서 바람에 몸을 실을 수가 있을 정도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런 건 저절로 알게 되요. 미리 안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뭘해야 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해요. 무엇이든지. 미장은 아직 젊잖아요.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시간이 있어요.]

[꼭 불노불사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호호호! 신선 비슷하긴 하지만 실패작이죠.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심해요. 어쩌면 이 생사탄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는 몽환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걸요. 여기서의 시간은 긴듯해도 실제로는 찰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그냥 백일몽을 꾼 것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구장심조공을 익힌 사람의 마음이 지어낸 곳이니 어련할까요?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미장!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볼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은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 다음은?]

[변신(變身)을 하겠어요.]

[엉뚱하군요.]

 

X X X

 

뺨이 수축되어 팽팽해질 정도로 날씨가 차갑다.

눈발이 섞여있는 바람이 성긴 베옷 속으로 스며들어 가까스로 짜낸 체온을 휩쓸어가버린다.

하얀 눈들은 산과 들과 숲을 덮고 있고, 이제 금방 생긴 발자국도 조금씩 소리없이 덮어간다.

현천록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본 첫 모습이었다.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고 이빨이 시리다.

눈은 세상을 덮은 것만으로 모자라서 이제 사람까지 덮어버릴 요양으로 진눈개비 재주를 부린다.

마음 속의 생사탄에서 자기가 빠져 나왔는지, 생사탄 속에 있던 마음이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진 않지만 생사탄은 문만 열만 볼 수 있는 방안의 침상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영원히 멀어지지 않을 것 같다.

생사탄에서 나올 때 보초가 준 고급스런 토끼가죽 옷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

열두살이던 몸이 세상을 대하면서 갑자기 커져서 몸에 걸쳤던 옷이 찢어지진 않았지만 꽉 끼인다.

하얀 눈밭에서 발가벗고 토끼가죽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눈과 흰 토끼가죽 옷을 입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분간하기 힘들게 되었다.

현천록은 가슴을 활짝 펴고 차가운 바람을 깊이 들이켰다.

들여 마신 바람은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가슴이 확 트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검은 얼굴의 미녀가 살고 있고

 

 

 

새로 생긴 무덤은 굶주린 짐승들에 의해 금방 파헤쳐진다.

그래서 상주(喪主)들은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흙이 굳어지고 띠가 자랄 때까지 무덤을 지키기도 한다.

시체 썩는 냄새는 땅속에서 땅속으로 퍼져 나가고, 영민한 여우나 들개들이 그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다.

눈은 모든 추악함을 덮고 땅은 온갖 더러움을 덮어 자신과 동화시켜 버리지만, 밤은 종종 그 속에서 신비를 잉태하기도 한다.

 

--- 여기 피지도 못한 소년 죽어가니 들을 이가 없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노라.

 

급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묘비에 쓰여진 이상한 글은 아주 보기드문 명필의 솜씨다.

밤은 신비를 잉태했으나 신음은 묘비가 하도록 했다.

묘비는 꺾이고 무덤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밤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그 무엇과 함께 사라져 갔다.

 

X X X

 

아주 어두웠다.

시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그의 눈으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입안에서 맴도는 반벙어리의 소리인양 귀바퀴를 맴돌고 있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나른하게 늘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둥둥 떠서 허공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 같기도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바람없는 무저갱 속을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미치는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해서, 다시금 자신을 자각하게 된 이 순간 직전까지의 모든 일들을 머리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정말 처음으로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혼자있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처음부터 무한히 그곳에 있었던 성도 싶고 무심코 걷다가 낯선 곳에서 갑자기 정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들과 더불어 기억들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머리가 띵해오며 천지가 지금 보이는 암흑과 똑같은 색으로 변했을 때까지.

[막 부화하려고 해요. 조심해서 지켜 보세요. 이런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무엇인가 빠져버린 것 처럼 흩어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도 저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어요. 물론 그때는 아주 오래 전이겠죠. 사실 그동안 이런 일은 너무 드물었어요.]

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웅얼거리던 소리들 마저 없어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오직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나른하게 정적 속을 퍼져 나가고 그의 귀에 까지 스며든다.

아니, 그 소리는 그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백 칠십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그때부터 제일 가까웠던 건 이백 사십년 전이었어요. 나도 다시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모두 단절되어 버리는가 했거든요.]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그 음성이 갖는 부드러운 마력때문인지 아니면 의문자체가 그의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듯 하면서도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보세요. 빛이 나죠? 저 빛이 점점 더 강해지다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가 진짜예요. ! 벌써 강해지는군요. 언제보아도 감탄스런 빛이죠. 너무 아름다워요. 북쪽의 극지에 갔을 때 본 극광보다 더 아름다워요. 모두 잘봐 두세요. 다시 이 빛을 구경하려면 이제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음성이 갑자기 격해졌다.

[정점! 이럴 수가! 벌써 빛의 정점에 달했어요. 우린 생각보다 운이 더 좋아요. 좀더 일찍 보게 되겠군요. 이제 곧 저 빛이 사라지고 암흑처럼 깜깜해질 거예요. 하지만 어둠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모두가 이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어요....... 암흑.... 암흑이군요.]

그는 몸이 두 개로 나뉘는 것 같은 이상감각을 느꼈다.

무거운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내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깃털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가벼워 바람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고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귓전으로 떨리는 음성이 흩어지며 지나갔지만 더 이상 머리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의식이 공중을 부유하는 꿈같은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속에서 치민 갑갑함에 발을 쭈욱 뻗으며 몸을 뒤척였다.

순간 강렬한 빛이 눈의 조리개를 콱 수축시켰다.

[탄생했습니다. ! 여러분. 새로운 동료입니다. 아직 이 세상과 일에 익숙치 않을 테니 어디 있으나 항상 여러분이 돌봐주기 바랍니다. 이 새로운 친구의 이름은.....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모습이니까 우린 미장(未長)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이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 제각기 바쁠테니까 인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세요. 그림자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이내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가 빛에 적응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상한 빛들이 천장을 스며들어온 빛에 의해 점점 작아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타서 없어지는 유성처럼 밝게 빛나며 사라져갔다.

! 그리고 그곳에는 공간이었다.

[미장! 활짝 웃어요. 여기서는 당연히 그래야 돼요.]

그의 앞에 불쑥 뭔가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곤륜노(崑崙奴: 흑인)처럼 새까만데 눈은 커다란 보석처럼 반짝이고 가냘픈 입술이 짙은 자주빛을 띄고 있는 여자였다.

젊은지 어린건지 구별하기 애매모호한 나이같고 얼굴의 윤곽은 마치 새기다 만 다듬어지지 않은 목각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날카롭고 선명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궁장을 했는데, 귀밑머리를 살짝 겉어 올리는 새까만 손에 하얀 손톱이 값비싼 장식품인양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흰옷과 아주 잘 어울린다.

오똑한 콧날이 그의 코에 맞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

그는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저는 현천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가냘픈 입술이 약간 샐쭉였다.

[먼저 웃어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요. 처음일 테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죠.]

현천록은 여자의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꽃향기같기도 하고 사탕을 금방 먹었을 때 사라지지 않은 냄새같기도 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소리가 깨어져 들려온다.

[당신 이름은 미장이예요. 그리고 나는 보초(步哨)라고 하죠. 여기는 생사탄(生死灘)이라 불리는데 나나 미장같은 사람들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곳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내가 태어났던 옛날만 해도 정말 거친 바닷가의 여울이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고 바다는 멀리 물러나 가버렸으니까요.]

현천록은 입술을 달짝여 말했다.

[전 죽은 것입니까 아니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보초가 흰 소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여긴 생사탄이라고... 따라서 미장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았어요. 미장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죠. 이제 그만 일어나요. 미장!]

현천록은 보초의 손길을 따라 일어나 앉았다.

천장이 눈에 확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빛이 천장의 한가운데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람 몸에 물에 젖은 종이를 붙였다가 마른 후에 떼어낸 것 같은 물체가 있었다.

약간 섬뜩하게 보인다.

현천록은 그것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제 이름은 현천록입니다. 천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보초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미장이죠. 그리고 우리들 중의 막내이기도 하고.]

[이건 당신네 문파의 전통입니까?]

현천록의 말을 들은 보초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호호호! 아휴~ 우스워!]

현천록은 자기가 다시 어떤 문파에 잡혀 왔다고 생각했다.

고독마검이란 노인도, 그리고 풍허객도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 엉뚱한 짓들을 벌였었다.

보초라는 이상한 여자가 있는 이곳도 잠시 본 대로라면 풍허객과 그 의도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 문파의 이상한 의식들이 더 우습게 느껴집니다.]

보초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따라와요. 보여주지 않을 수 없군요. 하긴 그럴만도 하죠.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오해들을 하곤 하니까.]

 

현천록은 빛이 나는 천장을 가진 둥글고 큰 방을 빠져나와 보초를 따라 걸었다.

복사뼈 만한 크기의 희고 검은 자갈들이 가지런히 깔려있는 길을 걸어 푸른 하늘이 바다처럼 맑게 보이는 숲에 이르렀다.

참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가문비나무가 서있는 그런 숲이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가지들이 구불구불했다.

단 한 번도 손보지 않은 자연목들이 분명했다.

[여기는 우리들의 무덤, 말하자면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어요.]

보초는 참나무 한그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현천록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게 장난 같았다.

[무덤은 어디 있죠?]

[전체가 무덤이지요. 이분도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답니다.]

옹이진 늙은 참나무를 만지는 보초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다.

현천록은 감회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 지금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보초가 말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굴참나무가 되는 날이 오겠죠.]

현천록은 보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슬퍼 마세요. 전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당신 이야기만큼 이상한 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한데 왜 하필이면 모두 나무가 되는 거죠?]

보초는 현천록이 잡은 손을 끌면서 우거진 숲속 굵은 가지들 밑으로 점점 깊이 걸어갔다.

[하필이면이 아닙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어요.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천록은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힐끗 보초의 옆모습을 살폈다.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상한 매력이 그 얼굴에서 흐른다.

피부는 까맣지만 너무도 맑은 것 같다.

[하지만 다들 나무가 되길 원하더군요. 나도 이제는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보초가 밝게 웃으며 현천록을 보았다.

현천록은 마주 씨익 웃었다.

적당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잘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웃음이다.

보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천지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또 우리 뜻에도 맞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은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죠.]

현천록은 손가락으로 십장 밖에 서있는 한그루의 자그마한 과일나무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나무는 아주 작군요. 제 키만한데요.]

보초가 현천록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린 저분께 인사하러 왔어요. 불평을 하려거든 저분께 실컷 해요.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니까.]

현천록은 긴가민가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초가 귀엽다는 듯이 현천록의 뺨을 톡! 건드리고 앞서 걸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황금빛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작은 나무의 밑둥만은 이 숲속의 여느 나무 못지않게 굵었다.

하지만 이내 붓끝처럼 뾰족하게 올라와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과나무 앞에서 보초가 말했다.

[생사탄을 만든 분이고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끈 분이기도 하며 가장 먼저 나무가 되신 분이기도 하지요.]

현천록은 나무의 신비함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잎을 하나 가져도 될까요?]

보초가 사과를 하나 따서 현천록에게 내밀었다.

사과냄새가 폐부까지 스며든다.

[고마워요.]

현천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는 걸요.]

보초가 옆의 풀밭에 앉으며 말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6

 

            암호랑이라 불리는 여인

 

 

 

(!)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그는 지금 한 칸 객당의 처마 밑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객당의 사방 창문은 두터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천이 조금 갈라진 곳으로 불빛이 흘러 나오며 객당 안의 정경이 막비강의 눈에 들어왔다.

헌데 굵은 황촉의 불꽃이 너울거리고 있는 객당 안에서는 차마 듣기 민망한 교성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 저런 천인공노할...!)

막비강은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나 하마터면 매달린 처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널찍한 객당의 바닥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 볼 난잡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들이었다.

비구니들은 나이가 천차만별로 십오륙 세의 어린 소녀가 있는가 하면 사십대의 원숙한 중년비구니도 있었다.

그녀들은 아마도 이곳 청련사의 비구니들인 모양이었다.

비구니들은 회색 가사를 훌훌 벗어버린 채 몸을 비틀며 거친 숨을 토하고 있었다.

(바득! 겉으로만 절이었지 사실은 창녀들의 소굴이었구나!)

막비강은 여승들의 치태를 보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현장을 떠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고것들...!]

문득 객당 안에서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막비강은 움찔 놀라 시선을 옮겼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객당 바닥 한구석에서 그는 천만 뜻밖의 광경을 본 것이다.

중년의 비구니와 어린 비구니를 사내도 여자도 아닌 아닌 자가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상체는 분명 여자인데 하체는 사내인 기괴한 자였다.

믿기지 않는 장면에 막비강은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비구니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모두 미약에 중독되었다!)

막비강은 비구니들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흐려져 있는 것을 알아보았.

(악독한 놈! 저놈이 여자로 위장하고 이 절에 유숙하며 비구니들에게 미약을 썼구나!)

비로소 사정을 이해한 막비강이 분노에 몸을 떨 때였다.

[호호호! 재미가 좋군요, 사형!]

삐꺽!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새로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실내로 들어선 것은 한 명의 미소부였다

풍만한 몸매에 요염한 용모를 지닌 삼십대 중반의 그 여인은 얇은 나삼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는 한 명 소년이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잠옷을 입은 그 소년은 막비강 나이 또래였다.

막비강은 나타난 여인이 바로 자신이 처음 보았던 야행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흐흐! 누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소?]

두 비구니를 농락하던 사내가 고개만 돌린 채 여인을 돌아보았다.

[! 너무 불공평해요! 사형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재미를 보고...! 다음번에는 중들이 사는 절에서 자자구요!]

여인은 안고 온 소년을 바닥에 누이며 눈을 흘겼다.

[흐흐! 좋도록 해라! 사매가 밤새 몇 명의 땡중을 파계시키는지 지켜보는 것도 각별히 재미있겠지!]

사내는 음탕하게 웃었다.

미소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납치해 온 소년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헌데 그녀의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때였다.

콰쾅!

갑자기 한 쪽 창문이 박살나며 한 줄기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지 않는가?

[죽어랏! 요망한 것들!]

번쩍!

날아든 인영은 앙칼지게 외치며 벼락같은 섬광을 두 탕부탕녀에게로 휘몰아쳐 냈다.

[!]

[!]

한창 열락에 빠져 있던 두 남녀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유린하던 제물들을 팽개치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하지만 암습자의 무공은 실로 신쾌한 것이었다.

스팟! 후두둑!

[!]

[!]

피가 확 번지며 두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소년을 농락하던 요부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가슴까지 쩍 갈라져 나뒹굴었고

비구니들을 유린하던 사내는 옆구리에서 피분수를 흘리며 물러섰다

요부는 왼쪽 가슴이 거의 두 쪽이 나 자칫했으면 심장이 쪼개질 뻔한 중상이었다.

[... 너는!]

[헌원여호(軒轅女虎)!]

나타난 암습자를 본 두 탕부탕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헌원여호라면 강호칠절 중에 드는 고수이신데...! 그분이 나타났단 말인가?)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해 고개를 쭉 빼밀고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실내에는 피투성이가 된 두 탕부탕녀 앞에 한 명 여인이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삼십오륙 세 정도, 여자의 몸인데도 키가 육 척(六尺)에 가깝고 체격이 딱 벌어져 한눈에 봐도 일대여걸의 풍모가 풍기는 여인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반면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 얼굴도 대단한 미모로 보는 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했다.

다만 눈썹이 사내처럼 짙고, 눈꼬리가 홱 올라갔으며, 입술의 모양이 단호하고 냉막하여 절로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여호(女虎)라는 별호가 실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수중에는 호랑이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날이 돋은 육중한 호치도(虎齒刀)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방금 두 탕부탕녀를 휩쓸어 버린 것이 바로 그 칼이었다.

(여자가 저토록 무지막지한 중병기를 쓰다니...!)

막비강은 절로 질려 숨을 죽였다.

 

 헌원여호(軒轅女虎) 헌원빙(軒轅氷)!

 

이것이 바로 무림의 암호랑이로 불리는 이 여걸의 이름이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녀는 정파백도의 유수한 고수들인 강호칠절 중 일인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대단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사해무련(四海武聯)>

 

당금 강호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세력들인 사패천 중 남패천(南覇天) 사해무련이 그녀의 출신인 것이다.

사해신존(四海神尊) 헌원궁(軒轅弓)이란 영웅이 육십 년 전에 창건한 사해무련은 사패천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다

무림인들은 사해무련을 공공연히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부를 정도다.

서패천 혈검산장, 동패천 유가총림(儒家叢林), 북패천 북산검호각(北山劍豪閣)등이 비록 사해무련과 함께 사패천으로 꼽히지만 실제 전력을 비교하면 사해무련에 비해 많은 손색이 있다

사실상 장강 이남의 무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남패천 사해무련인 것이다.

그 사해무련의 창건자 사해신존 헌원궁이 헌원여호 헌원빙의 생부다. 또한 당대 사해무련의 방주인 사해용왕(四海龍王) 헌원척(軒轅拓)은 헌원빙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다.

정파무림 제일고수로 추앙받는 사해신존의 진전을 이었기에 헌원빙은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호칠절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거라.]

붉은 장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등을 보인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물어보자고 해도 갑자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마구 떠오르는 대로 이번엔 당신이 개대신이냐고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때 중년인이 불쑥 말했다.

[내 제자가 되어 검법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

현천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갑작스런 말씀이군요.]

[하하하하하!]

중년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거지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디있느냐?]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이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다.

하지만 네모난 눈에서는 광채가 어려있고 얼굴빛도 어둠속이지만 붉은 기운이 흐른다.

큼직한 얼굴에 낙천적인 웃음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어울려 정말 대장부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소생은 대협을 처음봅니다. 한데 어찌 함부로....]

중년인이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다.

[어린 녀석이 억지문자는..... 집어치워라. 애들은 애들 말을 해야지.]

현천록은 조금 머슥해졌다.

장사를 하면서 상대를 추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너무 깊이 박혀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를 납치해온 장본인에게 조차 그렇게 말하는 건 확실히 너무하다.

[억지문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의례하는 말입니다.]

현천록은 마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하하하!]

마주 앉은 중년인이 파안대소를 했다.

[나는 풍허객(風虛客)이라고 한다. 낮에 네가 어떤 영감을 상대하는 걸 보고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지.]

현천록의 눈이 동그라졌다.

[풍허객? 풍허객이었어요?]

하마터면 도둑이 아니고 풍허객이냐고 말할 뻔했다.

현천록이 풍허객을 직접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며서 풍허객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어왔다.

풍허객은 원래 화산파(華山派)의 차대 장문인으로까지 지목되었던 기재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화산파에서 파문을 당했다.

화산파를 나온 후, 소문에 의하면 화산에서 배운 검을 버리고 독자적인 장법을 하나 창안했다고도 하며, 전설적인 고수로 알려진 삼절오악(三絶五嶽)과도 겨루었다는 말이 있다.

그때는 또 장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무림의 골치덩어리로 알려져 있는 풍허객에 대한 크고 작은 소문은 항상 끊이지 않고 전설처럼 흘러다닌다.

그리고 진짠지 아닌지 모르고 전설을 더욱 전설같이 만들어 버리는게 풍허객의 또 다른 별명이 허풍객(虛風客)이란 사실이다.

현천록은 호기심에 반들거리는 눈으로 풍허객을 보았다.

[호오! 이놈봐라! 마치 내게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 하하하하! 이놈아! 장사꾼이라 쉽게 믿지 못하고 나를 감정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허풍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눈을 하는거냐?]

풍허객이 껄껄웃었다.

현천록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석하군요. 대협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내게 엉뚱한 소릴 하면 볼기짝을 때려놓을 테다.]

현천록의 말이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낼듯하자 풍허객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현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전 대협께서 탐낼 정도의 위인이 못됩니다.]

풍허객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현천록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민정후(玟情候)영감이 벌써 손을 썼나? 그 영감은 벌써 삼십년 동안 제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 아닌 것 같은데..... ]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노야께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풍허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민영감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군.]

현천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노야에게 허락을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신화병기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데 갑자기 풍허객이 소리를 꽥 질렀다.

[민영감! 아직도 보고만 있을 거요?]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아이구 깜짝이야!]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손이 아래로 툭 쳐졌다.

풍허객이 쳐다보고 있는 나무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비추어 보였다.

현천록은 그가 민노야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야!]

현천록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민노야가 가볍게 소매를 저었다.

현천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풍허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민영감은 확실히 나를 알고 있는구려!]

민노야의 키는 다리가 길어서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훨씬 커보인다.

노인답지 않게 몸도 꼿꼿하고 키도 클 뿐만 아니라 하얀 수염이 아주 위엄있다.

현천록은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면 언젠가는 민노야처럼 수염을 기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민노야가 풍허객의 앞으로 다가오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말썽꾸러기인 풍허객을 어찌 모르겠나?]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호탕하게 살 뿐이오. 그동안 잘 있었소? 어째 좋아보이지는 않소.]

[악겁이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었는데 어찌 좋아보일 수 있겠나?]

[하하하하! 쓸데 없이 머리 굳어지는 소릴랑 맙시다. 골치아파서 뚜껑열리면 당신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풍허객은 다가오는 민노야를 보면서도 아주 친한 벗을 맞이하듯이 자연스럽게 대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민노야는 더 다가와서 풍허객과 세자 정도의 거리에 마주 섰다.

그제서야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 어떤 미묘한 긴장이 현천록에게도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현천록의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민노야가 하얀 눈썹 밑은 새까만 눈을 빛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 아이를 탐내는 건 풍허객으로선가 아니면 자네의 다른 신분으로선가?]

풍허객은 재미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거야 원~ 쩝쩝! 무림은 영감을 잘 모르는데 영감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노부의 말에 답해주게.]

민노야는 풍허객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한다.

풍허객은 수박밭을 털다가 걸린 개구쟁이같이 시큼털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꺼요?]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는 신룡(神龍)같은 인물이네. 구름 속에 숨은 신룡같은 숲 속에 숨은 바람같아서 흔적은 있어도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지. 삼절오악이 자네의 분탕질에 한숨만 쉬고 가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하하하하!]

풍허객이 숲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현천록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리가 떨려오고 속이 미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다.

내공이 깃든 웃음소리다.

신화병기점의 손님들도 웃을때는 억지로 공력을 끌어올려 과시하곤 했지만 풍허객의 웃음소리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미미한 정도였었다.

현천록은 들은 말이 있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단났다. 웃음소리로 내장을 뒤집어 죽이기도 한다는데 .....)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풍허객은 갑자기 웃었던 것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알면 됐소. 하지만 영감도 저 아이에게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무림에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걸?]

풍허객은 자기 말이 옳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하긴 영감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만도 하지.]

민노야의 눈썹 아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무슨 근거로 쓸데없는 소릴 하는가?]

풍허객은 느긋하게 바위에 기대면서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무공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소. 후후후. 영감이라면 저 아이가 보기드문 인재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또 천하 고수들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영감이 가르친다면 최소한 십오년 후에는 무림을 주름잡을 인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소?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민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자넨 노부를 과하게 평가했네.]

풍허객이 냉소하며 또 말했다.

[둘째, 삼십년 전에 무림을 떠난 영감이 내게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이오. 나를 주목하고 있는 놈들은 대체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거든. 후후. 영감이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제자로도 삼지 않는다면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결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민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옳은 말로도 들릴 수 있겠군.]

풍허객은 팔짱을 끼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민노야는 현천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 대해 많이 아는게 불만이라면 내게 대해 말해줄 수 있네. 그리고 노부는 저 아이에게 양심에 부끄러울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애석하게도 자네의 고심한 분석은 아무 소용없네.]

풍허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껄껄! 영감! 서로 더 이상 잡담은 그만두고 내게 넘기시오. 영감한테 신세 한 번 진 걸로 달아놓겠소.]

현천록은 조금 우습기도 어이없기도 했다.

신화병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종의 신분도 아니다.

의식주를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민노야가 길러준 은혜는 있지만 지금까지 밥값을 못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건네질 그런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한데도 오늘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영감은 물건을 팔면서 죽이니 살리니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훔쳐와서 민노야한테 넘기라니 말라니 하고 있다.

현천록은 지금까지 물건을 넘기고 말고 하는 주체였지 그 대상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열 두 살이면 밤마다 열 두가지 꿈을 꾸지만 한 번도 그런 꿈은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영 거래가 자기 통제를 벗어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시 풍허객의 말에 끼어들었다.

[두분께선 더 이상 언쟁하지 마십시오. 주인어른, 그리고 풍대협님! 두 분은 지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장사를 궂이 하시려고 하는 중입니다.]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전을 각오하고 있지. 그런데 왜 남는게 없단 말이냐? 이기면 너를 얻게 되는데.]

민노야가 빙그레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삼십년 전의 노부를 보는 것 같네.]

풍허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있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당금 강호에는 존재하지 않소.]

이야기가 또 현천록을 젖혀두고 이어진다.

현천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풍대협님!]

풍허객이 현천록의 이마를 툭치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일에 낄 것 없다.]

현천록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저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지 주고 받거나 팔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민노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 말이 옳네.]

풍허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말을 처음에 들었다면 조금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요런 영악한 녀석이니 내 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팔 하나쯤은 주더라도 될 성하지 않소?]

목소리가 아주 기백에 넘친다.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 너를 강탈하려는 도적을 만났구나.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현천록은 우물쭈물했다.

[....저는.....]

노야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하려하니까 물건을 지키는 건 주인이나 주인의 하수인이 하는 일이니까 노야를 주인으로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하니 무림의 말썽꾸러기라는 풍허객을 상대로 만만하지가 않다.

현천록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풍허객에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삼아서 대협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풍허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를 제자 삼아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왜 저를 제자로 삼으려하십니까?]

[왜냐고? 하하하하! 그건 저 영감이나 아까 그 삿갓 쓴 늙은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지.]

풍허객은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대협의 제가가 되지 않겠다면 죽이시겠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하하! 내가 죽이기 전에 그 늙은이가 죽일 걸?]

현천록은 민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그 노인도 풍대협과 똑같은 이유에서입니까?]

민노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말했다.

[그 늙은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민노야가 조용하게 말했다.

[고독마검(孤獨魔劒) 불이태(不二台)!]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고독마검 불이태요. 저 아이는 이미 불이태의 표적이 되었으니 내가 아니면 민영감 당신도 쉽게 지킬 수 없을거요.]

현천록은 이야기가 이정도까지 나와서야 오늘의 일들이 대충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까 그 노인이 고독마검 불이태구나. 그 사람은 세외로 나간지 팔십년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었네. 어쨌든 고독마검이나 풍허객, 두사람 다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최소한 날 죽이진 않겠다.)

현천록은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걱정 따위가 없는 낙천적인 소년이었지만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되자 그 만큼 더 느긋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야께서 천하에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기인이라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다. 고독마검이나 풍허객보다 내게는 그 사실이 더 충격적이구나.)

그때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네.]

풍허객이 민노야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물러서시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네. 나는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걸세.]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얘야. 도적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냈느냐?]

현천록은 문득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달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의 등이 활처럼 휘어져 머리가 땅에 세차게 부딪혔다.

민노야와 풍허객이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라 잡아줄 수가 없었다.

!

둔탁한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풍허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민노야와 풍허객은 동시에 현천록을 잡았다.

그러나 머리가 이미 깨진상태였다.

민노야의 손가락이 현천록의 머리 속으로 쑥 들어갔다.

피가 샘처럼 쏟아진다.

두 사람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현천록의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자살을 하다니! 이런 심약한 놈이었소?]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네. 다만 자네도 이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뿐.]

풍허객이 냉소하며 말했다.

[내게 책임을 따지겠다면 언제든지 좋소. 영감과 한 번 싸워주겠소.]

민노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멀쩡하던 현천록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져 죽다니.

암습을 받았거나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또 평소에 간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민노야는 탄식을 하면서 한 손을 휘둘러 땅을 팠다.

우우웅!

푸악!

민노야의 특이한 산수(散手)의 수법에 따라 땅에는 길죽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풍허객은 수직으로 솟아올라서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고,

민노야는 현천록을 묻은 후에 그곳을 떠났다.

자라면 언젠가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무수한 씨앗들이 그러하듯이, 큰 나무는커녕 싹도 튀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인간의 씨앗들도 많은 법이다.

현천록도 그런 씨앗에 속해버리고 말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

 

                  목숨을 거래하다. (1)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은 금릉(金陵)에 사는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다.

크기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꼬마라 할지라도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어느 누구도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화병기점은 낡은 중고 철검부터 시작해서 옛날 검이나 도를 모방한 물건들, 그리고 특이한 주문품에 이르기까지 무기라면 없는 것이 없다.

만약에 없다면 신화병기점 내에 있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서라도 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화병기점의 병기들 품질은 그저 그렇다.

그저 그렇다는 말은 살 때는 최소한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쓸 때는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병기를 구하기 위해서 금릉에 들린다면 몇 군데 병기점을 들려본 후에 한 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신화병기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병기들은 최소한 살 때는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천록(玄天祿)은 이런 천화병기점에서 밖으로 잘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다.

병기점의 주인인 민노야(玟老爺)의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현천록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한 사람의 몫을 충분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이며 신화병기점의 점원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현천록의 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크다. 그 점만 제외하고 나면 그가 다른아이들 보다 특별히 달라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무림인들 사이에 아주 잘 알려져있다. 그것은 그가 물건을 볼 줄 아는 특별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감별안은 다른 아이는 고사하고 어른들에게 조차 없다.

현천록의 그런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것은 그가 아홉 살 때인 삼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병기점 안에서 잡심부름을 하면서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던 현천록은 어느날 담당점원이 자리를 비운 한 시간 만에 진열되어 있는 병기들 중에서 삼분지 일을 팔아버렸다.

담당점원이 돌아와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자를 보고는 깜짝에 깜짝을 몇 번 곱한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현천록은 세 살 때 신화병기점에 들어오면서 본 이후 실로 육년 만에 주인인 민노야를 만나게 되었다.

민노야는 그를 묵묵히 보다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으로 일하라고 했고, 그 이후에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의 새로운 신화(神話)가 만들어지며 현천록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누구라도 현천록이 추천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만져본다면 결코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군가는 현천록은 병기와 사람의 인연을 잘 볼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고, 그 위에다 어떤 물건들의 특징이든간에 단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즐거워하며 손님들에게도 그 즐거움을 나누어주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기도 하다.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비밀기관이 점포 내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아직 신화병기점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린 자는 없지만 그 이유를 신화병기점에 다 돌릴 수는 없다.

신화병기점의 병기는 완벽하게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지 몰라도 그 병기를 팔고 있는 열두살짜리 꼬마는 항상 손님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나이도 어린 그가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작은 주판을 허리춤에 차고 혼자 점포를 지키지만 주인인 민노야는 걱정도 않는다.

 

어쨌든 현천록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이었고, 그 때문에 간단한 글과 회계를 배우기도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현천록에게 장사를 잘 한다는 것보다 더 뿌듯한 기쁨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기가 글을 가슴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 돈을 가득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종종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남이 모르는 두근거리는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현천록은 간단한 글을 배웠지만 점점 더 많이 알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는 것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기가 배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한가지를 배우고 한가지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그의 하루는 아주 보람되고 알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무엇을 배울 때 마다 자기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신한다고 믿고 있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존재와 무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고, 모르던 현천록에서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된 현천록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항상 변신(變身)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손님의 발길 만큼의 매상은 항상 오르는 것이기에 장사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뿐 그다지 염려하지는 않는다.

민노야는 현천록의 수완을 높이 사서 그에게 상당한 돈을 준적도 있다. 그러나 현천록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을 신화병기점에서 해결할 뿐만 아니라, 현천록에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나이지만 그가 배우고 익히는 것들은 결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언젠가는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 바로 변신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있다.

그런 생각은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즐겁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죽립(竹笠)을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린 흰 수염의 노인이 점포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의 마음 속은 항상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거웠다.

현천록은 명랑한 목소리로 죽립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협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진열되어있는 이천 종에 가까운 병기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죽립노인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병기를 살피던 죽립노인의 눈과 노인을 살피던 현천록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은 일 순간에 칼날처럼 번득이며 현천록의 눈을 파고 드는 듯했다.

현천록은 병기점을 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죽립노인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죽립노인에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공포같은 것이 있었다.

현천록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이 자기 평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느낌은 대체로 그에게 있어선 틀림없었다.

삼년 전에 정식 점원이 되는 날도 바로 이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세월 때문인지 오늘보다는 조금 약했었다.

현천록은 숨을 천천히 들여쉬면서 말했다.

[노대협께선 병기를 고르시는 것은 아닌 듯 하군요.]

죽립노인이 아주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병기를 볼 줄 안다는 아이 현천록이냐?]

현천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죽립노인이 말했다.

[내게 맞는 병기를 골라라. 네가 권하는 병기면 어떤 것이든지 다 사도록 하겠다.]

노인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다른 손님들과 진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아래로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쓰며 말했다.

[저희 가게엔 노대협께 권해드릴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

죽립노인의 눈이 다시 번개불처럼 번득였다.

현천록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냐?]

노인의 음성이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노인이 흑도의 유명한 고수일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노대협께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물건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길이는 넉자세치, 너비는 두치반, 두께는 삼푼이고 무게는 두근반인 장검이 있다면 제가 권해드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희에겐 그런 물건이 없고 노대협께선 벌써 가지고 계시는군요.]

죽립노인은 한손으로 죽립을 슬쩍 만지면서 말했다.

[그럼 노부가 내 검을 네게 팔고 난 후에 다시 산다면 어떻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파셨다가 다시 사신다면 보통은 두 배로 값을 치뤄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즉 노대협의 경우에는 송구스럽지만 칠백배의 돈을 내야 됩니다. 그래도 하시겠는지요?]

스르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날이 검갑에서 뽑혀 나왔다. 보통의 검보다 한자 가량이나 길고 한치는 더 넓은 아주 특이한 장검이다.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겠다.]

노인은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서릿발같은 한기가 현천록의 목을 파고들었다.

현천록이 담담히 말했다.

[검은 만년한철로 만들었으니 보기드문 보검입니다. 하지만 길이와 너비가 범상한 검들과는 달라서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검을 쓰는 방법도 함께 얻지 못한다면 이 검은 오히려 가진 사람을 해치는 화근이 되기 쉽습니다.]

노인은 냉소하며 말했다.

[충분한 이유가 못된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만약에 노대협께서 이 검을 제게 파신 후에 그냥 가버리신다면 저희 병기점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 검을 녹여서 다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는 검으로서가 아니라 만년한철 한 덩어리에 해당하게 되겠지요.]

노인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노대협께서 이런 명검을 다시 구하시려고 한다면 만년한철 한 덩어리의 값보다 최소한 일천배는 더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제가 칠백배를 받고 다시 팔겠다는 것은 아주 싼 값에 제공하겠다는 저희 주인님의 의지가 이미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컥!

노인은 흰무지개가 서린 명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현천록에게 불쑥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라. 칠백배다.]

현천록은 두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사백육십냥을 드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노부는 한푼도 받지 않고 팔겠다. 나중에 다시 사러오마.]

[!]

순간 현천록은 말문이 콱 막혔다.

노인이 말했다.

[보름 후에 오겠다. 그때 되사도록 하지.]

무림의 기인들이 하는 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

(당했다!)

현천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검을 팔면서 땡전한푼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 노인이 되사러 올 때 역시 땡전한푼 받을 수가 없다.

칠백배를 버는 것은 이런 계산 앞에선 한심한 노릇이다.

현천록은 자기가 보름동안 꼼짝없이 그 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신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에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에구! 검을 그냥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읽지 못했다니.)

입맛이 쓰다.

빨리 읽었으면 보관료라도 비싸게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현천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인의 모습은 벌써 십여장 밖에 있었다.

그리고 현천록의 귀로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파고 들었다.

[노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어기는 사람은 시체가 되도록 해주기도 하는 사람이지.]

깨끗하게 한 방 먹었다고 인정한 현천록은 마음에서 툴툴 털어버리고 웃었다.

[내 속에는 내가 되길 원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아직 시체는 없는데. 하하하.]

하지만 점원은 크게 웃어서는 안된다.

 

현천록은 저녁이 되어 결산을 하고 난 후에 내원에 들어가 민노야에게 보고하며 그 사실을 알렸다.

민노야는 탁자 앞에 앉은 채 자기 손으로 그 검을 뽑아서 검날을 만져보며 말했다.

[보검이군. 금석을 무처럼 자를 수 있는 검이야. 네 목이 베어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새파란 검날에 민노야의 옆얼굴과 촛불이 함께 일렁이며 비친다.

현천록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노야! 이런 보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전설상의 오대명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보검인지....]

민노야가 말했다.

[오래된 검은 아니다. 기껏해야 일백오십년, 단 한 사람만이 사용했고 아주 많은 피를 흘렸다.]

현천록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그 노인은 일백오십살이 넘었단 말씀입니까?]

민노야가 말했다.

[그렇겠지.]

현천록은 아주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일백오십살이면 강태공이 살았다는 나인데도 아직 정정했군요. 신선이 되지 않고도 그 만큼 살 수 있어요?]

민노야가 곱게 가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지는 광활하고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지. 무슨 일이든 다 있는게 세상이니라.]

현천록이 불쑥 물었다.

[한데 그 노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검을 맡기고 이런 기행을 하는 걸까요?]

검의 날은 너무도 깨끗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다. 마치 쇠가 아닌 유리같다.

뱀가죽을 감아놓은 손잡이에 상아를 깎아붙여 놓은 고독(孤獨)이란 글자가 특이할 뿐이다.

민노야는 검을 내려 놓았다.

그의 얼굴 색이 밝지 못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져 현천록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주제넘게 너무 많이 물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현천록은 자기가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 잘못 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겐 왕왕 성가신 법이니까.

[그만 물러가거라!]

한마디 가볍게 던진 후, 현천록의 대답을 찾는지 민노야는 깊은 사숙에 빠져들어 움직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 ! !

태앵~ !

아직도 병기창에서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천록은 그 소리가 자기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진 채 벗겨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죄도 지은게 없는데 왠지 가슴이 조금씩 조여드는 괴상한 기분이다.

! 한 번, 아주 오래전에 갑자기 덮친 개에 물리기 직전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현천록은 혹시 또 개가 어디 숨어있다가 덮쳐들지나 않을까 싶어서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걸었다.

헌데 현천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민노야가 정성들여 가꾼 동백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반짝!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하얀 손바닥 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천지가 캄캄해오면서 깊은 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 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5

 

        비석을 찾아서

 

 

 

[내가 이번에도 죽지 않았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는 이미 자기가 토해낸 선혈과 호로가 있을 뿐 이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위! 개돼지 같은 놈! 네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를 때려 피를 토하게 했으렸다? 후일 네놈에게서 이 빚을 이자까지 합쳐 받아내고 말겠다.]

막비강은 금색 호로를 집어 허리춤에 매었다.

(이위 그 흉악한 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빨리 여기를 떠나자!)

그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바닥에 쓰러진 네 구의 시체와 서로 팔이 얽혀 마주 선 채 죽은 두 노인이 생각났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냥 갈 수는 없지!)

그는 다시 동굴이 있는 절벽 앞으로 돌아갔다.

현장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두 노인은 서로의 팔을 부여잡은 채 서 있을 뿐 몸에는 아무런 상처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분들은 대체 누구일까?)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하여 두 노인의 몸을 뒤져보았다.

먼저 염라철장의 허리춤에 가죽끈으로 매달린 큼직한 쇳조각 하나가 눈에 띠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바닥 모양으로 정교하게 주조된 강장(鋼掌)이었는데 상당히 컸다. 보통 어른 손바닥의 두 배정도 넓이에 길이도 세 배 가까이 된다. 또한 다섯 손가락 끝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있다.

막비강은 이 강장을 이리 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슨 상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강장의 손등 쪽에 다섯 개의 구멍이 파여 있어 손가락을 끼워보니 딱 맡는다. 이 강장은 손가락을 끼워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강장을 손에 끼고 장법을 펼치면 그 위력이 몇 배로 무서워질 것이다.

강장을 살펴보던 막비강의 마음은 이내 크게 격동되었다. 왜냐하면 강장의 형태가 금색 호로와 함께 품안에 들어 있었던 종이의 표식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이분 선배님께서 금색 호로를 내 품속에 넣어 주셨구나!)

막비강은 이위의 말투에서 호로 속에 담겨 있던 즙액이 바로 천고의 영약 금강옥액이었음을 확인했었다. 자연히 그것을 자신의 품에 넣어 준 염라철장에게 호감이 일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선배님의 은혜로 금강옥액을 먹어 병약한 체질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 은덕을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절을 올린 그는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기로 결심하고 염라철장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문득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막비강의 손에 닿았다.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서는 한 권의 책자와 상당량의 은자가 나왔다.

 

<염라장경(閻羅掌經)>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

막비강이 흥분하여 서둘러 책자를 펼쳐 보니 한 면에 장법(掌法)의 도식(圖式)이 하나씩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이 장법의 변화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막비강은 꿈에도 그리던 무공비급을 얻자 뛸 듯이 기뻤다. 그는 한시바삐 이 현묘한 장법이 수록된 책자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더욱 시급히 알고 싶은 것은 이 노인의 신분과 내력이었다. 해서 책자의 맨 끝장까지 뒤적여 보니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내 능력이 모자라 당한 일초(一招)의 원한은 참을 수 있지만 아내와 자식을 빼앗긴 울분은 잊을 수 없다! 막가 짐승을 다시 만나면 기필코 복수하겠다.>

 

이것은 비록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막비강에게는 마치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막가 짐승이라면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분 노인이 진짜 나의 부친이란 말인가?)

그는 생각을 굴리며 염라철장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용모는 비록 인자하게 생겼지만 아무리 보아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막비강은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관계를 추측할 수 없는지라 우선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저에겐 비록 생모는 한 분뿐이지만 의붓어머니는 다섯 분이나 더 계십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정말 저의 부친이시라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는 기도를 끝낸 후 책자를 품속에 넣고 강장은 자기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황씨 형제의 강추를 하나 집어 구덩이를 판 다음 염라철장의 시체를 매장해 주었다.

막비강은 무덤 앞에 무림선배염라철장지묘(武林先輩閻羅鐵掌之墓)라는 묘비를 세워 주고 큰절을 올렸다.

다음으로 그는 무협제원의 몸을 수색했다. 막비강은 곧 무협제원의 품에서 예리한 단검 한 자루와 그의 독문 무공이 수록된 비급 신녀원공보(神女猿公譜), 그리고 몇 알의 진주와 은자 꾸러미를 얻었다.

신녀비(神女匕)라는 검명이 새겨진 예리한 비수는 금석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였다. 무협제원은 이 신녀비를 무협의 어느 석실에서 얻었었다.

무협제원이 발견한 그 석실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죽은 거대한 원숭이의 골격과 그 원숭이의 골격을 끌어안고 죽은 가냘픈 여자의 시신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전설 속의 절세고수들인 월녀(越女)와 원공(猿公)이 아닌가 싶었지만 배움이 짧은 무협제원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신녀비와 함께 발견된 신녀원공보의 전반부가 썩어 문드러 져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신녀원공보가 온전한 상태에서 발견되었고 월녀와 원공의 독문내공심법까지 얻었다면 무협제원은 거의 천하무적이 되어 강호에 크나큰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막비강은 신녀원공보 뒷면에서 무협제원의 이름도 알아내고 그를 매장한 후 무림선배무협제원지묘(武林先輩巫峽啼猿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막비강이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고 나니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자연히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배도 매우 고팠다.

그는 나머지 네 구의 시체는 대충 매장한 다음 수림 속에 들어가 산과일로 배를 채웠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가을은 더욱 깊어져 웅이산은 온통 붉고 노란 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추의 어느 저녁,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짙게 번져 만산홍엽으로 변한 웅이산을 더욱 붉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얍! 차핫!]

문득 저녁의 적막을 깨고 맑은 소년의 함성이 웅이산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웅이산의 깊은 곳에 자리한 후미진 계곡 안쪽에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소년이 오른손에는 커다란 강장을 끼고 왼손엔 예리한 단검을 든 채 마치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뛰며 양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록 체격은 다 자란 어느 어른처럼 건장하지만 얼굴에는 아직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이다.

이 소년은 물론 기연으로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강호칠절과 중원육요 중에 드는 두 무림 고수의 비급을 얻은 막비강이었다.

그가 무공을 연마한 지는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한 대신 남달리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무공을 연마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지났음에도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무공을 거의 다 파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보통 사람이 일갑자 동안 수련한 것에 해당되는 심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내공이나 무공초식은 어느덧 무림 일류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지금의 그에게 모자라는 것은 실전 경험뿐이었다.

휙휙! 파파팟!

막비강이 날고 뛸 때마다 칼날 같은 경기가 사방으로 무지개처럼 뻗쳐 나가곤 했다.

[하하하! 이젠 염라장경과 신녀원공보의 무공이 모두 내것이 되었다!]

막비강은 돌연 병기를 철회하며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는 드디어 염라철장의 십팔초 염라장법(閻羅掌法)과 무협제원의 절기인 신원탈백소, 칠십이로 신녀검법(神女法)을 모두 수련해낸 것이다.

염라철장의 염라장법도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는 무공이지만 그 현묘함에 있어서는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에 미치지 못한다.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은 무협제원이 얻은 반쪽의 신녀원공보에 남아있던 두 가지 무공이다. 둘 다 음공과 검법으로는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무공들이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운용할 수 있는 내공부분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협제원도 두 가지 무공을 본래 위력의 삼할 가량 밖에 발휘하지 못했었다.

만일 무협제원이 월녀와 원공의 내공심법마저 얻었다면 무림은 원숭이와 인간의 잡종을 천하제일인으로 모셨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은 막비강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적합한 내공심법을 얻지 못한 관계로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의 정수를 터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론과 초식상으로만 완전히 이해했을 뿐이었다.

무공 수련을 마친 막비강은 곧 자신이 만든 염라철장 곡강의 무덤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자를 보우하여 하루빨리 절예를 연성하게 해주십시오. 소자는 절예만 연성하면 막고천 그 악적을 찾아가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를 고난 속에서 구출해 내겠습니다.]

그는 어느덧 염라철장 곡강을 자신의 생부로 여기게 된 것이다.

늘 자신을 냉대하고 구박하기만 하던 금사혈검 막고천과 무림 최고의 보물인 금강옥액도 서슴지 않고 자신에게 먹여준 염라철장, 둘 중 누가 더 자신의 부친에 가까운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막고천이 자신의 생모를 생부 염라철장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은 악적으로 믿기에 이른 것이다.

막고천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부인 염라철장에서 빼앗을 것이라면 전후의 사정이 들어맞는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다른 남자의 자식이기에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생모인 한경파를 강간하는 짓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 용서 못해! 반드시 내 손으로 그 악적을 죽이고 어머니를 구해내고 말겠어!)

막비강은 막고천에게 농락당하던 어머니의 무참한 모습을 떠올리며 새삼 결의를 다졌다

당장이라도 혈검산장에 달려가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막비강 자신이 잘 안다.

분하고 조급하더라도 참아야만 한다.

(아버님과 무협제원의 무공은 이제 대충 연마했다. 이제 그만 여길 떠나야 한다!)

막비강은 떠날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정이 든 이곳을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해서 하룻밤만 더 염라철장의 무덤을 지키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 *

 

다음날 아침.

짹짹짹짹...!

자신의 처소로 삼은 커다란 고목의 가지 위에 누워 자던 막비강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에 눈을 떴다.

[뭐야?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새 떼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아직 해도 뜨지 않고 동녘 하늘만 약간 뿌옇게 밝아 오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것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떠드는구나!]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하려 할 때였다.

[거기 있는 게 누구냐?]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전해 왔다.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비강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놀라움, 분노, 미움 등이 일순 그의 전신 혈맥을 파열시킬 것만 같았다.

(... 막가 악적이다!)

막비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금 들려 온 음성은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지 말아요! 제발! 비강이가 보고 있어요!]

막고천의 시커먼 몸 아래 깔려 바둥대며 애원하던 어머니가 떠올라 막비강의 몸 속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만든다.

생각 같아선 당장 숲 밖으로 뛰쳐나가 막고천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울분을 참고 나뭇가지 사이로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위 등 혈검산장의 무사 십여 명이 막비강이 만든 무덤 앞에 까마귀 떼처럼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법 중후한 용모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얄팍한 초로의 사내였다. 

 

 금사혈검 막고천!

 

허리춤에 마치 뱀 모양을 한 한 자루의 사형괴검(蛇形怪劍)을 걸고 있는 금포장한! 그자가 바로 당금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이었다.

[장주께선 무슨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외당 당주인 학가맹(學家盟)이란 자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막고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분명 이 숲 속에서 그 어린 잡종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럴 리 없습니다. 속하는 그날 그놈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이 일대를 여러 번 수색했습니다만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학가맹의 말에 이위도 얼른 덧붙였다.

[놈은 저의 흉맹한 일장을 맞았는데 죽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혹시 다른 무림 고수가 이 근처에 은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막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있든 없든 우리는 이 부근을 샅샅이 수색해 보자.]

막비강은 막고천 일행의 대화를 듣고 더욱 노화가 치밀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막고천이 이미 자신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 그날 돌아가신 염라철장께서 내 생부셨구나!)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막고천을 사로잡아 진상을 추궁하고 싶었다.

그는 혈검산장에서의 버러지같은 생활을 떠올리면서 진저리를 쳤다. 만약 생부인 염라철장이 그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그는 멋도 모르고 도적을 부친으로 모실 뻔했다.

막비강은 염라철장과 막고천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막고천이 그의 집안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그의 생부에게서 모친을 빼앗아 갔을 리 만무하다.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할까, 아니면 도주를 해야 하나?)

짧은 시간, 상반된 생각이 그의 뇌리에서 수백 번의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자신이 아직 막고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하지만 복수는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수림에서 빠져 나와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 * *

 

막비강은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염라철장이 남긴 은자로 베옷 몇 벌과 곡괭이를 사고 밥도 배불리 먹었다.

그런 다음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입고 있던 작고 낡은 옷을 벗어 불에 태우고 염라철장의 유서와 호로 뚜껑에서 나온 쪽지를 땀에 젖지 않게 초를 녹여 쌌다.

허름한 베옷을 입고 머리까지 산발하니 허리춤에 찬 금색 호로만 아니면 막비강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누가 봐도 지금의 그는 산골에서 막 자란 무지렁이 소년이다.

막비강은 계곡 물에 자기의 변한 모습을 비춰 보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염라철장께서 나를 낳아주신 생부인 게 확실하니 이제 성을 막()씨에서 곡()씨로 고쳐야만 한다. 기왕이면 이름도 곡능천(曲凌天)으로 고쳐서 막고천, 그 악적을 놀려주어야겠다!)

능천이란 즉 하늘을 능멸(凌蔑)한다는 뜻이다. 막비강이 곡능천이라고 개명한 것은 높은 하늘(高天)이란 광오한 이름을 지닌 막고천을 놀려주기 위해서였다.

산골 소년의 모습으로 변장한 막비강은 그날부터 산속에서 마른나무를 주워 근처 도회지로 지고 내려와 팔아 밥을 사먹었다. 물론 그가 나무를 주워다 파는 것은 호구지책 때문이 아니었다.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

 

바로 호로에서 얻은 쪽지에 적힌 대로 큰 비석이 어디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고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이르면 몇 시진이고 검법과 장법을 연마했다.

 

* * *

 

그렇게 생활하는 동안 반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렀다. 어느덧 겨울도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막비강의 나이도 이제 열 일곱살이 되었다. 건장해진 몸 뿐만 아니라 나이로서도 어엿한 청년이 된 것이다.

그동안 막비강은 하남성 일대의 무수한 마을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큰 비석을 찾았다. 하지만 의심을 받을 것이 염려되어 사람들에게 큰 비석이 있는 곳을 직접 묻지는 못하고 혼자서 비석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낙양(洛陽)에서 멀지 않은 응봉현(應峯懸)을 지날 때였다.

(히야! 정말 큰 비석이다!)

막비강의 눈이 확 떠지는 일이 벌어졌다. 한 채 웅장한 절의 담벽을 따라 걷던 그의 눈에 담장 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비석의 상층부가 들어온 것이다.

일 장 높이의 담장 밖에서 비석의 윗부분이 보이는 정도라면 그 비석은 적어도 이 장 높이는 넉넉히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막비강이 지난 몇 달 동안 본 여러 비석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청련사(靑蓮寺)>

 

담장으로 둘러친 그곳은 절이었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청련사는 비구니들만 기거하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얼씬할 수 없는 곳인지라 도저히 접근할 수단이 없었다.

(별수 없지! 밤에 월담을 기도하는 수밖에!)

막비강은 한시라도 빨리 비석을 파보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날 밤, 몸에 꼭 끼는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막비강은 청련사의 긴 담장들 중 가장 한적한 곳을 골라 월담을 했다.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비구니들에게 음심을 품고 침입한 음적으로 몰릴 지경이라 충분히 주위를 살핀 뒤 담을 넘었다.

이미 삼경이 넘은 늦은 시간인 탓에 절 안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막비강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비석이 있는 절의 후원으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 비석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제발 이번에는 허탕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막비강은 내심 기원하며 준비한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려 했다.

헌데 그가 막 첫번째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파라라락!

돌연 머리 위로 무언가 휙 하니 타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크!)

막비강은 기겁하며 급히 몸을 웅크렸다.

쏴아!

그러면서도 흘깃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밤하늘로 한 줄기 날렵한 인영이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상하군! 나말고도 비구니들만 사는 이 절에 용무가 있는 사람이 있었나?)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나간 야행인은 너무 빨라 여자인지 남자인지 미처 분간할 틈이 없었다. 다만 그자가 허리춤에 무언가를 끼고 있음을 언뜻 발견했을 뿐이었다.

(야심한 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에 침입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막비강의 마음에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막비강은 다시 비석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헌데 막비강이 다시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스악!

또 하나의 인영이 청련사의 담장을 날아 넘어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가지 않는가?

(이건 또 뭐야?)

막비강은 급히 몸을 숙이면서도 재빨리 그 야행인의 모습을 살폈다.

언뜻 긴 치맛자락이 날리고 일진의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다. 이로 미루어 두 번째 야행인은 여인임이 분명했다.

(야행인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막비강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비석을 파보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 상태였다.

(따라가 보자!)

마침내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야행인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몸을 날리는 순간 청련사의 가장 깊은 객사 쪽에서 언뜻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막비강은 즉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4

 

           금강옥액의 기연

 

 

(확실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 많았어!)

옛날 일을 떠올린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이를 악물었다.

돌이켜보니 막고천이 보인 행태들 중에는 도저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어머니 한경파를 겁탈하곤 했다.

아니 일부러 막비강이 있는 곳에서만 한경파를 농락하는 것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인 이래 한경파는 막비강을 데리고 자지 않았다.

언제 또 막고천이 들이닥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고천의 만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모자지간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 들이닥친 막고천이 완력을 써서 겁탈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 빨리 나가!]

막고천이 자신을 강간하기 시작하면 한경파는 아들에게 그렇게 악을 써서 쫓아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막비강도 막고천이 어머니를 올라타면 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어머니를 농락하는 막고천의 음험한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숨죽인 오열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막고천을 밀쳐내고 싶지만 그럴 힘이 유달리 허약한 막비강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글에 적힌 대로 혈검산장에는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막비강은 염라철장이 남긴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가 비록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는 어둡긴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는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염라철장의 글은 막비강의 마음 깊이 사무쳤다.

본래 금사혈검 막고천에게는 한 명의 본처 외에도 다섯 명의 첩이 있었다.

막비강을 낳아준 생모 한경파는 그 일처오첩(一妻五妾)중 셋째였다.

막고천의 본처는 당숙경(唐淑瓊)이라는 거만하고 기승스러운 여자로 막고천과의 사이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본처 당숙경 외에 다섯 명의 첩은 각기 한 명씩의 자식만을 두었을 뿐인데 특이하게도 한경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딸이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자식들 중 나이순으로 따지면 넷째지만 아들로서는 둘째다.

첩에게서 난 자식들이라도 딸이면 그래도 예쁜지 막고천도 다른 첩의 자식들은 제법 귀여워한다. 안고 다니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쪽쪽 입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아들인 막비강만은 늘 흰눈으로 보며 못 살게 굴었다.

아비가 그러니 집안의 다른 인간들이 막비강을 좋게 대해줄 리 없다.

막비강은 어릴 때부터 막고천의 본처가 낳은 자식들에게 온갖 경멸과 수모를 받으며 자랐다. 또한 혈검산장의 식솔들에게서도 첩의 자식이라고 업수히 여김을 받았으며, 심지어 낳아준 모친 한경파까지도 그에게 매우 냉담했다.

한경파는 원래 차가운 성격이기도 했으나 어느날 밤 자신이 막고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막비강에게 보인 이후로는 찬바람마저 쌩쌩 돌았다.

원망과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막비강을 노려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막비강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생모마저 냉대하는데 누가 막비강을 귀히 여겨주겠는가?

이런 냉랭하고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막비강은 항상 외롭게 지냈으며 심지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을 원망까지도 했다.

어릴 때부터 혈검산장에서 냉대를 받고 자란 것이 원인이 되어 막비강은 어둡고 말이 없는 소년으로 자란 것이다.

 

막비강은 서로 팔이 엉킨 채 마주 서있는 두 노인이 깨어나면 전후 사정을 물어 보기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두 노인은 깨어날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갑다.

해서 막비강은 햇볕을 쬐기 위해 양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츠츠츠!

그는 금강옥액이 들었던 호로의 표면에서 무지갯빛 같은 보광이 발산하는 것을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슨 그림 같은데...!]

그는 호로의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호로에서 뻗치는 황금빛 서광은 흡사 아름다운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햇살에 비추자 산수화 같은 경물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는 호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다시 닫아 두었던 호로의 뚜껑을 뽑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우직!

헌데 그 순간 쇠로 만들어진 호로의 뚜껑이 그대로 우그러드는 것이 아닌가?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막비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손 힘이 전보다 수십 배 강해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훌륭한 세공품을 망쳤네!]

막비강은 아쉬워하며 뚜껑을 바로 펴려 했다.

본래 그 뚜껑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막비강은 그것을 편다는 것이 이번에도 너무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빠직!

뚜껑은 펴지기는커녕 그대로 두 조각으로 뽀개지고 말았다.

[... 이런!]

당황하던 막비강은 다음 순간 흠칫 놀랐다.

펄럭!

뽀개진 뚜껑 속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종이는 또 뭐지?)

그는 의아해하며 그 종이를 주워 펼쳐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너무 작아 보통 사람이라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옥액으로 시력이 수십 배로 증폭된 막비강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는 무학지보(武學之寶)로써 거대한 비석(碑石) 밑에 숨겨져 있다. 오직 인연이 닿는 자만이 얻으리라!>

 

[... 청구단서! 이것은 청구단서의 장보도(藏寶圖)로구나!]

글을 읽은 막비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어쨌든 그도 무가인 혈검산장에서 자란 탓에 청구단서와 금강옥액의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마신 이 호로 속의 즙액이 바로 금강옥액이 아닐까?)

막비강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어 새삼 호로를 들여다보았다.

(청구단서를 얻어 그 안의 신공절학을 익히면 내 일신에 얽힌 비밀을 푸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막비강은 매우 기뻐하며 염라철장의 유서인 종이쪽지와 호로에서 나온 종이를 같이 접어 품속에 간직하였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그가 철이 들 때부터 열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헌데 이제 무림 최고의 비전인 청구단서를 찾을 단서를 쥐게 되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아직까지 미동인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 두 분 어른은 선 채로 죽은 것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두 노인을 살펴보았다.

막비강이 다가가 노인들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두 노인의 얼굴빛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얼굴빛과 똑같았다. 그리고 콧김을 살펴보아도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겼구나!]

막비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는 아직 열 여섯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

(... 달아나자!)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쳐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거기 섰거라!]

갑자기 등뒤에서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히익!]

고함소리를 들은 막비강은 죽은 사람이 강시로 변해 쫓아오는 줄 알고 더욱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화라락!

하지만 소리를 지른 그 사람의 신법은 쾌첩하기 짝이 없어 단숨에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막아 섰다.

[소장주! 진정하시오! 속하외다!]

막비강을 가로막아선 자가 급히 막비강을 안심시켰다. 그자는 얼굴의 절반이 시커먼 구레나룻에 덮인 건장한 장한이었다.

[! 이 아저씨였군요!]

상대방을 알아본 막비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자는 바로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한 명인 규염장(糾髥掌) 이위(李衛)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위도 처음에는 막비강을 못 알아봤었다. 가냘프던 그의 체격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건장한 청년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장해진 몸과 달리 막비강의 아직 순진하고 치기가 어린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추격하는 동안에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소장주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막비강의 몸이 건장해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께선 소장주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찾고 계십니다. 무사하시니 다행...!]

그렇게 말하던 이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두 눈에서 기이한 광망을 발산했다. 그는 비로소 막비강이 들고 있는 이상한 호로를 발견한 것이다.

[소장주는 그것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이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금강옥액은 황금빛 서기가 서린 호로에 담겨 있다!

 

그런 강호의 전설을 떠올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위의 내심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것이 왜 내 수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위의 태도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변했다.

[흐흐! 어린 잡종아, 어서 그것을 내놓아라! 오늘이 바로 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다. 만약 그 금강옥액을 내게 준다면 통쾌하게 죽여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막비강은 이위가 흉흉한 기세로 다가서며 말하자 겁이 와락 났다.

[... 그만둬요!]

그는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하하! 어딜 가느냐?]

하지만 막비강이 미처 다섯 걸음도 도망치지 못했을 때 이위의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산악 같은 경기가 등뒤로 엄습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막비강이 그것을 피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퍼펑!

[아악!]

막비강은 등판에 강력한 장력을 얻어맞고 선혈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위는 일장으로 막비강을 기절시킨 후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보물을 지닌 것이 죄니 나를 탓하지 마라! 금강옥액은 마땅히 나 같은 영웅이 마셔서 공력을 증강시켜야지 옳다.]

그는 서둘러 막비강의 손에서 금색 호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호로 안에 금강옥액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호로를 들어 보며 이위는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우라질! 그냥 빈 호로가 아닌가? 이제 산장으로 돌아가서 장주에게 뭐라고 말하지?)

화가 난 그자는 막비강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염병할 놈! 빈 호로는 네놈에게 돌려줄 테니 함께 땅속에 묻혀라!]

이위는 자신이 소장주를 살해한 것이 발각될까 염려되었고, 또 호로 속이 텅 비어 자기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지라 호로를 막비강 곁에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질풍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헌데 이위가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막비강의 몸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사실 막비강은 죽은 게 아니었다. 비록 금강불괴지신은 못되었으나 금강옥액은 그의 온몸을 무쇠처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상태가 아닌가?

이위의 장력이 바위를 부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막비강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단지 일시간의 충격으로 기혈이 막혔던 것인데 이위가 떠나면서 허리를 걷어차 준 덕분에 막혔던 기혈이 확 뚫려 버리기까지 했다.

외부의 타격에 반응하여 임독이맥 주위에 몰려 있던 금강옥액의 약력은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통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일컬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옳으리라.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0

 

               난감한 관계

 

 

정신을 차린 직후 고현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리한 통증이 느껴지는 하체를 뜨겁고 단단한 이물질이 범하고 있다.

그와 함께 왼쪽 젖가슴에서도 통증과 함께 찌릿찌릿한 쾌감이 번지고 있다.

(흐윽!)

눈을 뜬 고현경은 진저리를 쳤다.

어떤 사내가 자신의 몸에 올라탄 채 발작적인 몸부림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려 보이는 그 사내는 입으로 자신의 왼쪽 젖꼭지를 문 채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죽일...)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현경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고현경은 당장 그자의 목을 부러트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젖꼭지를 물고 있던 사내가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부릅뜬 것으로 보아 절정이 임박한 것 같았다.

부르르!

헌데 그 자의 목을 부러트리려던 고현경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황홀경에 빠져 헐떡이는 소년의 얼굴이 너무도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 사형?)

고현경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이 풀린 채 필사적인 몸짓을 하는 소년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사형이고 사촌오빠인 고창룡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어린 시절의 사형이 날 범하고 있다니...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고현경은 소년 시절의 고창룡이 자신을 범하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 사이에도 소년의 빈약한 아랫도리는 고현경의 가랑이 사이에서 발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범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고창룡의 어린 시절을 빼닮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고현경의 몸도 열기에 휩싸였다.

서로의 몸이 결합된 부분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또한 소년이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몸짓에 따라 찌릿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치달린다.

죄송... 죄송해요 사고!”

그때 소년이 비명같이 흐느끼며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현경은 소년의 몸짓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렸다.

원래대로라면 하지 못하게 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하체가 저절로 물결을 일으켜 소년의 행위에 동조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하체를 밀어붙이는 순간 고현경도 절정에 이르렀다.

머릿속에서 오색 불꽃이 터지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뜨거운 분출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고현경은 생생하게 느꼈다.

(임신... 임신할지도 몰라!)

고현경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싫지가 않았다.

싫기는커녕 짝사랑했던 사형을 닮은 소년과 한 몸이 된 채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환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작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절정을 느끼기를 반복했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존재할 줄을 그녀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윽고 소년이 헐떡이며 그녀의 몸 위에 널부러졌다.

끝이 없을 것같던 환희가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소년은 얼굴을 고현경의 가슴에 부비며 가빠진 숨을 골랐다.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년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숨을 고르던 고검추는 기겁했다.

고현경의 손이 자신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고검추의 눈에 고현경이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내 양정이 주입된 덕분에 정신을 차리셨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의 얼굴에서 열기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고검추의 양기가 두 번 거푸 주입되자 고현경을 욕화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탕음마고가 만족하고 잠이 든 것이다.

"너는... 누구냐?"

고현경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분노보다는 체념이 실린 음성이다.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었는데 이 어린 소년에게 죄를 물어봐야 돌이킬 수 없다.

하물며 자신은 소년과 함께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절정을 맛보기까지 했다.

"... 죄송합니다!"

고검추는 사색이 되어 고현경의 몸에서 일어났다.

고검추가 떨어지는 순간 고현경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결합되어있던 부분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되었구나.)

고현경은 치마를 내려 맨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고!”

고현경의 몸에서 떨어진 고검추는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 사고?"

몸을 일으키던 고현경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비로소 고검추가 절정의 순간 자신을 사고라 불렀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 사형을 빼닮은 아이가 나를 사고라고 불렀다는 것은...!)

고현경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몸을 차지한 이 소년이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름... 이름이 뭐냐?”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 앉은 고현경은 자신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 소질의 이름은 고검추라 합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찾아뵈라고 하셔셔 찾아왔다가 그만..."

무릎을 꿇고 있던 고검추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 네가 사형의 아들이란 말이냐?"

고검추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고현경은 고검추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러 사고를 찾아왔습니다."

고검추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현경을 올려다보았다.

"...!"

신음을 토하는 고현경의 옥용이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짝 사랑하던 사형의 아들이 십칠 년 만에 자신을 찾아왔다.

사형에게 아들이 있음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헌데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은 사형의 아들과 관계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물며 사형은 고현경 자신의 사촌 오빠다.

, 고현경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카에게 처녀를 바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그저 기막힐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쌀은 익어 밥이 되었고 나무는 깎여서 배가 되어버린 형국이니...

"정말... 정말 다행이로구나. 사형께 유복자가 있었다니..."

그녀는 복잡한 심정을 억지로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고검추는 고현경의 말에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당사저가 말없이 호천무맹을 떠났었다. 그렇다면 사형의 아내가 당사저였단 말인가?)

고현경은 옛일을 회상하며 심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동문수학했던 당혜선도 대사형 고창룡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현경보다 세 살 위였던 당혜선은 십자검존 종극이 거둔 네 명의 제자들 중 셋째였다.

 

-철사자 고창룡!

-옥기린(玉麒麟) 종무(種武)!

-날수비연 당혜선!

-철봉황 고현경!

 

이들이 십자검존의 제자들로 하나같이 빼어난 자질을 지녀서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라 불리기도 했다.

무맹사신재의 둘째인 옥기린 종무는 십자검존 종극의 조카이기도 했다.

하지만 종극은 인중용봉(人中龍鳳)으로 불리는 빼어난 사형과 사매들에게 묻혀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자는 오래 전에 호천무맹을 떠나 본가인 십자검막(十字劒幕)으로 돌아간 상태다.

(이 아이의 나이로 미루어보면 당사저는 호천무맹을 떠날 무렵 이미 임신하고 있었겠구나.)

고현경은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고검추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고검추는 당혜선의 아들일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분부라면... 당혜선이란 분이 네 어머니겠구나."

고현경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소질의 생모는 아니고 길러 주신 양모이십니다."

"!"

고검추의 대답에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고검추는 고현경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한 후 투신한 일, 죽어가는 천면음마를 만났던 일 등등을...

"사신각주! 그놈이 감히 당사저를 시해했단 말이지?"

고검추의 이야기를 들은 고현경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결은 절로 일렁이고 두 눈에서는 시퍼런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고검추는 입술을 깨문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던 양모 당혜선의 무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검추의 그 모습을 본 고현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진정해라 추아야. 당사저의 원수는 반드시 내 손으로 갚아줄 테니..."

그녀는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흐윽!"

고검추는 고현경의 품에 안기는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한 달 사이에 겪은 일들은 아직 어린 소년인 고검추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도 어찌 어찌 견뎌왔는데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친인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가엾은 것...)

고현경은 오열하는 고검추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고검추가 그동안 겪었을 두려움과 분노, 막막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어느덧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범한 일 따위는 별일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고검추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고검추는 사랑했던 사형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기이기 때문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0

 

               어둠 속의 눈동자 (2)

 

 

삼십 장 정도 더 들어갔을 때 동굴이 갑자기 높아지고 넓어졌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마치 광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등을 펴고 심주은을 추켜올려 업으면서 임청우는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맥이 미미하게 뛰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어.”

심주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중...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임청우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주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청우의 분노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들어선 지하광장은 높이 오장에 너비는 십 장 정도 되는 곳인데 임청우 등이 나온 것과 비슷한 동굴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중과 노파가 따라 들어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굴이 많아서 자신들이 어느 동굴로 숨었을지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광장을 가로 질러 맞은편에 있는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일단은 곧 추격해올 추적자들로부터 숨는 것이 급선무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길 봐!”

임청우의 등에 업혀있는 심주은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더듬거렸다.

츠으으!

임청우가 들어가려던 동굴에서 오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동굴 안쪽에서 파란 불덩어리 두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잡으며 말했다.

아까 동굴 초입에서 만났던 그 괴물이다.”

바로 그 순간 파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껌벅껌벅하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발길을 그 동굴을 향해 돌렸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 그쪽으로 가지마.”

겁에 질린 심주은이 임청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는 의연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죽음 가운데서 생을 찾을 수 있는 법이야.”

물론 심주은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했지만 심주은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서도 어떻게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임청우는 심주은이 아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으!

임청우가 동굴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파란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임청우는 걸음을 빨리하여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과는 달리 제법 커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 !

동굴 안쪽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이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임청우는 하마터면 발을 헛딛을 뻔했다. 동굴 바닥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그 연못 주변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한 겨울의 고드름처럼 가득 늘어져 있다.

파란 눈동자 네 개가 종유석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괴물이 두 마리인가?)

임청우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실소했다.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연못물에 비친 그림자였던 것이다.

임청우는 동굴 벽 쪽에 붙어서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들의 언저리를 잡고 연못을 지나갔다.

하지만 연못을 건넜을 때 그곳에 있던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어디선가 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임청우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예상을 깨고 눈동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유소기가 그 할망구를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동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설사 그렇다 해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자네 편이 되어줄 수 없으니까.”

묵궁 진패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하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지금 죽을 수는 없네.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네.”

, 그 이유 때문에 유소기가 우리를 기만하고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는 것을 묵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네.”

 

임청우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보니 바위에 두 사람이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소기...! 검주 유소기가 여기까지 들어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에 업힌 심주은도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유소기와 나는 지독한 악연으로 맺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동굴 속에서 그를 만난다면 정말 살아나기는 글렀겠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말을 주고받는 인물들은 칠절 중 지존수(至尊手) 사마명과 묵궁(墨弓) 진패선이었다.

물론 그들을 본 적이 없는 임청우로서는 두 사람이 그 이름도 쟁쟁한 무림칠절중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때 묵궁 진패선이 일어서며 말했다.

만용으로 귀중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부모의 복수보다는 지나치게 유소기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네.”

지존수 사마명은 아픈 곳을 찔린 사람모양 입을 열지 못했다.

진패선은 묵궁을 앞세우고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마명은 무명지가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패선, 자네는 모를 걸세. 난 유소기가 처음부터 싫었네. 기회만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걸세.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고...”

독백을 마친 사마명도 곧 일어나 진패선이 사라진 쪽으로 가버렸다.

임청우가 있는 곳은 아마도 그들이 먼저 지나온 길인 듯 했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저 사람도 아마 유소기와 같은 칠절 중의 한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동료인 유소기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칠절이란 존재가 무림에서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구나.)

안의 도적은 막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유소기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감이 들었다.

그때 심주은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차라리 그들을 만나는 게 나아. 유소기를 만나면 살아날 방법이 없어.”

심주은이 말하는 그들이란 물론 중과 노파다.

그녀로서는 임청우가 그 파란 눈을 좇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임청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피하려다 만나는 경우도 있어. 특히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는...”

심주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떻게 된 게 임청우의 말에는 반박할 말도 없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임청우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난 그 파란 눈이 무섭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츠으으!

다시 그들 앞에 파란 눈이 나타났다.

임청우는 검을 굳게 잡고 다가가며 속으로 말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병()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윤즉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만 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알고 나면 두려움이란 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임청우는 파란 눈을 따라서 걸어갔고, 심주은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

 

임청우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파란 눈을 따라 가느라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란 눈은 갈래진 동굴을 여러 개 지나서 그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놓았다.

그곳은 유황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동굴 속에 안개처럼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부글부글!

작은 온천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있다.

온천이다!”

임청우는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어떤 의서에서 온천이 사람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심주은의 내상을 치료하는 데에 이 온천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츠으!

그때 파란 눈동자가 온천위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내 사르르 빛을 잃고 온천으로 가라앉았다.

임청우는 사라지는 눈동자 뒤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눈동자는 실로 눈동자만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갑자기 온천에서 깡마른 손이 하나 솟아나와 임청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

임청우는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발목을 잡고 있는 깡마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임청우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었던 청강사자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다.

!

청강사자검이 그 손목을 베어버렸다.

순간 임청우의 발목을 잡고 있던 깡마른 손과 베어진 손목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수증기 속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임청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현실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괴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추춧!

온천의 물이 약간 솟구치면서 갑자기 물을 밟고 귀신같은 몰골의 노파가 나타났다.

말라붙은 젖가슴과 듬성듬성한 체모... 깡마른 몸은 해골에다 껍질을 씌워 놓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노파는 파랗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임청우를 바라보았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한걸음 물러섰다.

...”

등에 업힌 심주은은 그만 혼절해버린 뒤였다.

당신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임청우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임청우는 노파가 귀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노파가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화악!

내민 노파의 손에서 강한 흡입력이 쏟아져 나와 임청우를 끌어당겼다.

임청우는 공력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의 공력은 삼괴 중 철선동시의 공력을 온전히 흡수한 후에도 더욱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의 임청우의 공력은 살아있을 때의 철선동시보다도 삼할 이상 고강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내공에 있어서 임청우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데...

슈욱!

임청우는 마치 마차에 끌려가는 강아지나 다름없이 벌거벗은 괴노파의 손으로 딸려갔다.

(... 정말 귀신이란 말인가?)

임청우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노파의 모습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도 없으니 두려움이 왈칵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끌려갔을 때 임청우는 전력을 다해서 청강사자검을 던졌다.

파웃!

푸른빛이 뿌연 수증기 속을 가르며 번갯불처럼 노파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성공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노파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화악!

노파는 임청우의 좌측으로 돌아서 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 요물!”

추악한 얼굴에 몸서리치며 임청우는 주먹으로 노파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나 주먹에 와닿는 느낌은 마치 솜뭉치를 두드린 듯한 것이었다.

(안돼!)

임청우가 대경실색하여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노파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임청우는 이내 천지가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득해지는 그의 귓전으로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심주은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3

 

            신세의 비밀

 

 

 

[낄낄낄! 지난 십 년 동안 발바닥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못 찾겠더니만... 정작 만나려니까 이렇게 쉽게 만나는구나 곡가야!]

무협제원은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클클!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네가 지니고 있는 보물까지 취득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자의 말에 염라철장은 내심 흠칫했으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넌 오늘도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원숭이놈! 하물며 내게는 네게 줄 보물 따위도 없다.]

[크크!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아느냐?]

무협제원은 야수같이 눈을 희번덕이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용문(龍門) 천불동(千佛洞)의 어느 석실에서 청구이보 중 하나인 금강옥액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 순순히 금강옥액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버리겠다.]

무협제원의 말에 염라철장은 이를 부득 갈았다.

[금강옥액이 내 몸에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 해도 네놈에게 주어 무림에 해를 끼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카카카카...!]

그러자 무협제원은 갑자기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징그러워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사실 그것은 보통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신원탈백소(神猿奪魄笑)!

 

바로 웃음소리로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무협제원의 독문마공인 것이다.

[으핫하하...!]

염라철장도 황급히 내공을 극한까지 돋우어 앙천광소를 터뜨려 상대방의 징그러운 괴소에 맞섰다.

[킬킬킬!]

하지만 무협제원의 징그러운 괴소는 염라철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눌리지 않고 점점 더 높아만 갔다.

(... 이놈의 내공이 십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염라철장은 무협제원의 괴소에 내장이 온통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이지러졌다.

음공으로는 무협제원을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염라철장은 웃음을 멈추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무협제원! 음공으로는 쉽게 승부가 나지 않으니 그만 중지하자.]

무협제원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주둥아리 닥쳐라!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 네 놈을 붙잡을 수 없게 될 터! 오늘 기필코 승부를 내고 말겠다.]

염라철장도 침중하게 외쳤다.

[열흘 후 황산 시신봉에서 보자!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헛소리말고 내 초식이나 받아봐라!]

꽈르르릉!

무협제원은 염라철장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긴 팔을 맹렬히 휘둘러 왔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긴 그자의 팔이 휘둘러지자 광풍이 휘몰아치며 두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염라철장을 휩쓸어왔다.

[오냐! 끝장을 내자!]

좋게 끝나기는 틀렸음을 깨달은 염라철장도 즉시 진기를 극한까지 돋우어 양 손바닥을 밖으로 뒤집었다.

퍼퍼펑! 꽈르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모래 기둥이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치솟았다.

우두둑! 콰득!

직후 두 사람의 네 팔이 그대로 얽혀 버렸다.

원래 무협제원의 진력은 내향성(內向性)이고 염라철장의 진력은 외향성(外向性)이다. 그 때문에 일단 피차의 팔이 한데 얽히자 어느 쪽도 감히 먼저 공격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상대방의 내공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와 내장을 박살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 수없이 두 사람은 서로 맞붙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내공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두 숙적은 마치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주 팔짱을 낀 채 꼼짝 않고 서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시진 남짓이 지났을 때였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동굴 안에 누워 있던 소년 막비강이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자신이 석동 안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음을 발견하고 만면에 곤혹의 빛을 머금었다.

그는 석동 입구에서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헌데 그때 그는 자신의 품속이 묵직함을 느꼈다.

(품속에 무엇이 들었지?)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곧 그의 손에는 하나의 술 호로와 종이쪽지가 쥐어졌다.

(이게 다 뭘까?)

막비강은 호로와 종이 조각을 번갈아 보며 갸웃했다.

그러다가 그것을 든 채 석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 시체!]

헌데 석동 밖으로 나서던 막비강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 질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동 입구 주위에는 선혈로 물들어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운 네 구의 시체와 두 명의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노인이 서로 팔이 엉킨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으!]

막비강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모두 죽었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막비강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들은 다 누구지? 왜 이런 곳에서 죽어 있는 건가?)

막비강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여섯 사람 중 염라철장이 자신을 납치해 온 장본인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이 호로는 또 누가 내 품속에 넣어 준 걸까?)

그는 고개를 숙여 호로를 내려다보았다.

츠으으!

그의 수중에 들린 호로는 마침 떠오른 햇살을 받아서 눈부신 금광을 발산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크기가 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로가 왜 이렇게 무겁지?)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마치 쇳덩이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열어 보자!)

막비강은 호기심에 꼭 닫혀 있는 호로의 뚜껑을 뽑아 보았다.

순간 호로 안에서 한 줄기 기이한 향기가 흘러 나와 코를 찔렀다.

[! 향기 좋다!]

막비강은 코를 킁킁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호로 속에는 수정같이 맑은 즙액(汁液)이 절반 가량 담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아주 향기롭고 달콤하였다.

꼬르륵!

그러자 그의 뱃속에서 식충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 보면 어제 저녁 이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막비강이다.

[뭔지 모르지만 독은 아니겠지!]

배고픔과 갈증을 참지 못한 그는 호로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내용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호로 속에 든 반병의 즙액은 삽시에 그의 목구멍을 타넘어 들어갔다.

 

금강옥액!

 

뼈를 무쇠보다도 강인하게 만들어 주고 백독이 불침하게 해준다는 희대의 영약 금강옥액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끄억!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막비강은 아무것도 모르고 배를 두드렸다. 겨우 반병의 즙액을 마신 것에 불과했지만 왠지 배가 든든했다. 마치 한 상 잘 차린 성찬을 포식한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즙액이 뱃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부터 왠지 온몸이 스멀스멀 더워지는 것이 아닌가?

[! 왜 갑자기 이렇게 더워지지?]

막비강은 헉헉대며 상체를 벗어부쳤다.

옷을 벗어버리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우르르!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더니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게 독이었구나!]

막비강은 불속에 던져진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떼굴떼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한번 치솟은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내부를 휩쓸고 다녔다.

[아아악!]

막비강은 내장이 온통 숯덩이가 되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까마득히 정신을 잃었다.

츠츠츠! 푸시시!

정신을 잃은 막비강의 온몸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검푸른 연기가 그의 전신 팔만 사천 모공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검푸른 연기에 노출된 주위의 초목들이 삽시에 시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바로 막비강의 몸속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타들어가며 내는 독장(毒瘴)이었던 것이다.

금강옥액!

바로 이 희세 영약의 조화인 것이다.

 

본래 금강옥액을 복용하면 온몸의 노폐물이 연소되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 즉 원영지체(元瓔之體)가 된다.

그리 되면 온몸의 경락이 막힘없이 뚫려 아무리 오랫동안 내공을 써도 지치지 않으며, 피부와 골격이 더할 수 없이 강인해져서 어떤 외부의 타격에도 상처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비강은 금강옥액의 효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강옥액의 효능을 극대화시키려면 복용 즉시 운공을 하거나 내가고수가 추궁과혈로 도와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막비강은 그 같은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막비강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한 가지 사악한 술법(術法)에 노출되어 원영지기(元瓔之氣)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남달리 허약해진 것이며, 나이 이십을 채우지 못하고 요절할 운명이었다.

그런 이유로 막비강은 희세 영약 금강옥액으로도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은 되지 못했다.

대신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손상되었던 원영지기가 금강옥액으로 대체되어 타고난 고질(痼疾)은 완쾌되기에 이르렀다.

금강옥액의 효능은 비단 고질을 치료해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두둑! 우둑!

기절한 막비강의 전신 골격이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닌가?

여리고 병약하던 막비강의 몸은 순식간에 튼튼하고 강건하게 변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본래 나이보다 두 세 살 어리게 보이던 그의 체격이 삽시에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건장해진 것이다.

투둑! 투둑!

막비강이 걸친 의복이 여기저기 뜯어져 나갔다. 가냘프던 소년의 몸이 갑자기 어른처럼 자라나 꽉 끼어 버린 때문이었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휴우! 내가 죽지 않다니...!]

막비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막비강은 왠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을 느꼈다.

(이상하네! 내가 마신 것은 분명 독이었을 텐데 어째서 몸이 이리 가뿐한 것일까?)

막비강은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찌직!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는 대로 바짓가랑이가 북 찢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내 몸이...!]

비로소 자신의 몸이 삽시간에 커 버린 것을 알아챈 막비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인한 근육으로 뭉쳐진 팔다리, 한 뼘 넘게 껑충 커 버린 키, 게다가 한번 발을 구르면 머리끝이 구름에까지라도 닿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온몸을 살피며 어리둥절해하던 막비강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찢어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전과는 사뭇 다른 무엇이 털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흡사 담장에 매달려 있던 다 자란 수세미 같은 크기의 검붉은 살덩이였다.

(... 내 찌찌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막비강은 멍하니 자신의 남성의 상징을 내려다보았다. 이완되었음에도 무려 다섯 치가 넘는 그것은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살덩이 위쪽의 불두덩에도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었다. 금강옥액은 병약한 소년에 불과하던 막비강을 삽시에 충분히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탈바꿈시켜 버린 것이다.

[쑥스럽네! 뭔가 가릴 게 있어야겠어!]

막비강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시야로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염라철장이 금강옥액의 호로와 함께 그의 품에 넣어 준 쪽지였다.

(뭐라고 글이 씌어져 있는 것 같은데...!)

시력이 몇 배로 좋아진 막비강은 쪽지 위에 급히 갈겨쓴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 쪽지 위에는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급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들아! 네가 생부(生父)로 알고 있는 자는 진짜 네 아비가 아니다. 하지만 너의 모친은 너를 낳아 준 생모가 틀림없다.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지금껏 만나지도 못했으니 나의 운명이 기구하기도 하구나.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으면 전포(田袍)를 찾아가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보아라. 그러나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선 절대 안 된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리고 쪽지의 맨 끝에는 손바닥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 무슨 소린가? 설마 이 글이 내게 남겨진 것이란 말인가?)

쪽지에 적힌 글은 막비강의 잔잔한 마음에 세찬 파문을 일으키게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는 한동안 망연자실하여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뇌리로 숱한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드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철이 들었을 무렵 부친인 금사혈검 막고천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일이다.

아비라면 당연히 아들이 자라 무공을 익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헌데 막고천은 무공을 가르쳐주는 것은 고사하고 격하게 화를 내며 두 번 다시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막비강도 겁에 질려 그 이후로는 아버지 막고천에게 일체 무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싶은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호원무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며 나름대로 독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막고천에게 들키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그날 죽도록 얻어맞아 몇날 며칠을 자리보전 해야만 했다.

막고천은 어째서 아들인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공을 배우려 하자 무섭게 치도곤을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여 그는 모친인 한경파(韓瓊芭)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역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칠뿐이었다.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한경파는 평소에도 막비강을 차갑게 대했다. 친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한경파에게서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지닌 자상한 구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막비강을 볼 때마다 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화를 내거나 무시하곤 했다.

(설마 내가 불미스러운 관계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란 말인가? 아니면 어머니는 날 태중에 지닌 채 지금의 부친에게 개가(改嫁)를 했든지 강제로 납치당해 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막비강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와함께 염라철장이 남긴 글이 사실일 것같은 생각이 정점 강해졌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0

 

          어둠 속의 눈동자 (1)

 

 

동굴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너구리같은 작은 짐승의 굴인 것 같았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을 뽑아 앞쪽으로 세운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야생 짐승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짐승의 똥이 많이 있으면 어쩌지? )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푹신한 곳에 부딪혔다. 앞서 들어가던 임청우가 멈추는 바람에 그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만 것이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임청우의 엉덩이에 박았던 얼굴을 급히 떼며 심주은은 눈을 부라렸다.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킨 임청우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에 짐승이 있다. 맹수인지도 모르겠어.”

동굴 안쪽에서 파란 빛을 내뿜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임청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 동굴 안에는 무언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런 때에...)

임청우의 어깨 너머로 눈동자들을 본 심주은은 초조와 긴장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던 귀를 찢을 듯하던 휘파람 소리도 어느덧 뚝 그쳤다. 노파와 중이 동굴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그런데도 앞쪽에 무언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뒷덜미에 칼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급해진 심주은은 전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찔러버려! 찔려서 죽여 버려!”

심주은의 재촉을 받은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으로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난다고 한다.

임청우는 노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안쪽에 있는 것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혹 호랑이라 하더라도 무섭지는 않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는 공력이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가공한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기걸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안쪽에 있는 짐승을 죽이더라도 소리는 내지 말아야 한다.)

들키지 않으려면 눈앞에 있는 시퍼런 눈동자를 지닌 괴물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야한다.

결심을 한 임청우는 온 정신을 청강사자검에 모아서 앞으로 내질렀다.

번쩍!

푸른빛이 뇌전처럼 두 개의 눈동자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한데 검봉(劍鋒;검의 끝)이 찌르는 순간 눈동자들은 깜빡하더니 사라져버렸다.

좁은 동굴 안이라 무언가 움직였다면 공기의 요동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청강사자검을 아래위로 내저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귀신?)

섬뜩한 전율이 임청우의 머리끝에서 일어나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그놈을 찾았는가?”

늙은 노파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눈에 띄는 게 없소.”

사내의 음성이 이어졌다. 기걸승중 중의 목소리다.

그 놈의 새끼가 둘째의 몸뚱이를 완전히 부셔 놨어. 잡아서 모가지를 끊어버려야 속이 풀리겠어.”

으으으..."

노파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아마도 노파가 상처 입은 거지를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임청우는 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신처럼 사라진 눈동자 따위는 밖에 있는 잔혹한 노파와 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심주은도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중이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저께서 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구려.”

만리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 멀리 있으면 쉽게 맡을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 있으면 잘 파악하기 어려운 게지.”

노파의 음성이 이어졌다.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봐, 아가씨를 잡아간 그놈의 무공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니 조심하고...”

대답대신 꽝! 하는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중이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장력으로 쓰러뜨렸던 것이다.

중은 만리향의 향기가 남아있는 일대의 나무들과 바위들을 모조리 부셔버릴 심산인 것같았다.

! 콰드드!

중의 양손을 갈쿠리같이 오그리고 한 번씩 내저을 때마다 시뻘건 강기가 회오리치면서 뻗어나가 나무와 바위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 사람이 손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꽝 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은 등쪽에서 찬바람이 확 이는 것을 느꼈다.

빨리 들어가!”

심주은은 임청우를 떠밀면서 급히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다!”

노파가 소리치며 동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땅에 닿을 듯 낮게 날아서 그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다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움직이지마! 숨도 쉬지마.”

그러나 임청우는 검을 들고 앞으로 한 바퀴 구른 다음에 입구쪽으로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는 심주은의 두 발 사이에 들어갔다.

날아 들어오는 노파를 베기 위해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스스!

갑자기 심주은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무스름한 바위벽으로 변해버렸다.

임청우는 심주은이 기이한 술법을 쓰는 것을 몇 번 목격하기는 했지만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의 몸이 석벽으로 변해버리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임청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데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노파는 수평으로 날아 들어오다가 심주은의 등에 머리를 부딪히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리향의 향기가 동굴 안에 가득하건만 석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 심주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직선으로 뚫린 굴이라 어디 숨을 만한 데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기어야 할 정도로 낮은 곳이니 천장에 붙을 수도 없다.

심주은이 동굴 속에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어진 노파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셋째, 네가 들어와 봐라! 이 안에 숨어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요.”

중은 몸을 기괴하게 구부리더니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꾸물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가 옆으로 비켜서자 중이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막다른 석벽에 다다랐다.

바로 이곳이군요.”

중은 심주은의 등에 손바닥을 붙이면서 말했다.

안이 비어있습니다.”

부우웅!

말하는 중의 손바닥이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공력으로 석벽을 부셔버릴 심산이었다.

헌데 중의 손바닥이 막 심주은의 등을 때리려고 할 때였다.

안돼!”

!

임청우가 대갈일성을 발하며 청강사자검으로 중의 배를 찔렀다.

!”

중은 황급히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고 물러섰다. 그의 승포자락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수 있는 것은 유가술(愉加術)을 익힌 덕분이다. 이 유가술을 펼치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비단결보다도 더 질기고 부드러워 어떤 예리한 병기로도 상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그의 몸이 석벽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검이기에...)

중이 경악할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에 서있던 석벽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중이 귀신에 홀린 듯이 어리둥절 하자 그자의 뒤에서 노파가 떠밀면서 소리쳤다.

환술이다! 놈을 잡아!”

 

***

 

임청우는 심주은을 등에 업고 무작정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임청우가 중의 배에 청강사자검을 찔러 넣은 직후 심주은은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었다.

이에 임청우는 급히 심주은을 안고 동굴 안쪽으로 피한 것이다.

(언젠가는 저 중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살수를 휘두르다니...)

임청우는 분노하고 있었다. 심주은이 중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청우의 오해였다.

심주은은 노파가 날아 들어오면서 등을 머리로 받았을 때 이미 심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임청우와 자기의 목숨이 자신이 펼치고 있는 환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었었다.

그러다가 중이 등에 손바닥을 댄 직후 피를 토하며 쓰러졌었다.

임청우가 중에 의해 심주은이 내상을 입은 것으로 오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굴은 상당히 좁다.

뒤쪽에서 검이나 도, 아니면 장력이라도 날아온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앞으로 무작정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쉬익!

중과 노파는 땅에 닿을 듯 말듯 낮게 날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견딜 수 있겠어?”

...”

심주은의 대답은 견딜 수 있겠다는 건지 못 견디겠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도망 가보았자 막다른 곳만 나올 뿐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그녀를 내려놓고 눕게 한 다음에 자기도 반듯하게 누웠다.

청강사자검의 검광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옷자락 아래로 검을 감추었다.

중과 노파가 자기의 위로 날아가려 할 때 아래에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중과 노파도 쉽사리 자신들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휘릭!

한데 앞서서 날아오던 중이 갑자기 임청우에게서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냐?”

하마터면 중에게 부딪힐 뻔한 노파가 소리쳐 물었다.

피 냄새요. 아마 놈이 앞에 있는 모양이오.”

중은 신중하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을 찔렀던 검에서 피를 닦아내지 않았을 뿐인데 중은 그 피 냄새를 맡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노파가 소리쳤다.

통채로 날려버려!”

그랬다가는 동굴이 무너질 것이오. 너무 깊이 들어왔소.”

중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황금으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자도 임청우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워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주인께서 우리가 떠나올 때 주신 혈승(血蠅)이 있소.”

중은 금합(金盒)을 열면서 말했다. 금합 속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시뻘건 파리 수십 마리가 들어있었다.

혈승은 만리향을 싫어하니 소저껜 아무 해가 없을 것이오.”

혈승이란 피를 빠는 파리를 말한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독충으로 떼를 지어 날면서 스치는 것은 무엇이거나 뼈를 남기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심주은은 중의 말에 크게 놀라 자신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급히 전음으로 임청우에게 말했다.

나를 끌어 당겨서 몸 위에 올려! 어서!”

그러나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혈승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옷자락 소리는 중과 노파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청우는 자기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이 혈승이란 말을 하자 자기는 왜 품속에 있는 독중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혈린사 척포를 생각하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이 그로 하여금 그같은 생각을 일깨워 준 셈이었다.

임청우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여 품에서 몽선도를 꺼냈다.

중은 금합 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승들을 주문을 외워 깨웠다.

혈승들이 한 마리 두 마리 깨어나며 왱왱소리가 조용한 동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몽선도에서 척포가 머리를 내민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척포의 머리에 달려있는 황금빛 뿔이 금합과 같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가랏!”

중은 척포의 뿔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혈승들을 날려 보냈다.

! !

혈승들은 구름떼처럼 날아올랐으나 척포를 향해 가지는 않았다. 비록 미물이기는 하지만 천적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척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쏴아아!

척포의 입에서 하얀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혈승들은 소리없이 녹아내렸다.

심지어 중이 들고 있던 금합까지도 척포의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중은 괴성을 지르며 금합을 던져버리고 뒤로 몸을 날렸다.

으앗!”

노파도 뒤로 튕겨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임청우는 재빨리 일어서서 심주은을 업고 동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이전버튼 1 2 3 4 5 ··· 8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