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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이매봉은 일백수십 살씩이나 먹은 노인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징그럽게 느껴졌다.

꼭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본 것같은 기분이다.

정나미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왜 왔는지를 물었다.

노삼이 말했다.

[옥황빙서를 얻을 목적으로 왔다. 설마 너도 옥황빙서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매봉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세상은 옥황빙서로 완전히 뒤집어졌군요. 은거했던 사람들도 다시 뛰쳐나와서 죽기나 하고...]

노이가 말했다.

[우리는 다르다. 다른 놈들은 진양진인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그에게서 옥황빙서를 빼앗을 것이다.]

이매봉은 말을 돌렸다.

[한데 당신들은 형제예요? 어쩜 그렇게 닮았죠?]

노대는 코웃음을 쳤고 노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는 사람보는 눈이 있구나. 우리는 형제는 아니지만 꼭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땐 정말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었다. 우리 사부도 우리와 꼭 닮았었지.]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핏줄도 섞이지 않았는데 사부나 제자들이 모두 닮다니... 믿을 수 없군요.]

노이가 말했다.

[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는 자기와 닮은 우리를 찾기 위해 꽤 고생을 했으니까.]

이매봉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신들 사부는 왜 그렇게 했죠?]

노삼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 버릇없는 것아! 지금까지 잘 대답했더니 별 시시콜콜한 걸 다 묻는구나!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우리가 언제 너를 죽이겠느냐?]

이매봉은 슬그머니 웃었다.

바보는 바보라도 뭔가 규칙이 있는 바보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이매봉이 간절하게 말하자 노삼이 뿌르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키우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자기와 얼굴이라도 닮아야 정도 빨리 들고 사랑스러운 게 당연하지. 제자들도 사부와 얼굴이 닮았으니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쉬운 노릇이고.]

[호호호호!]

이매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너무 단순한 이유다.

벼란간 노삼이 이매봉에게 덥쳐들면서 소리쳤다.

[! 그럼 이만 죽어라!]

노삼의 손가락이 갈구리처럼 변해서 이매봉의 목을 죄여왔다.

이매봉은 바람처럼 물러서면서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한가지만 더! 한가지만 더 물을께요.]

[에잇!]

노삼이 손을 중간에서 거둬들이고 화난다는 듯이 발로 눈을 걷어찼다.

노대가 얼굴을 굳히고 부채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매봉은 재빨리 말했다.

[이 근처에 동굴이 있다고 하셨죠? 그 동굴은 어디에 있죠?]

노이가 말했다.

[동쪽에 있는 절벽 중간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진양진인의 냄새가 동쪽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노이와 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눈을 번쩍 치켜뜨고 물었다.

[너는 진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이냐?]

이매봉이 말했다.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향기 같기도 한 냄새가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걸요.]

이매봉은 소매 속에서 일매향이 들어있는 작은 병의 마개를 살짝 열어서 동쪽으로 은밀히 쏘았다.

이매봉이 동쪽을 등지고 섰기 때문에 일매향 병이 날아가는 모습은 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노대!]

노삼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노대는 벌써 동쪽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이매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애와 스무고개 놀이를 지겹게 하고난 것같네.]

한데, 이매봉의 앞으로 새까만 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노이가 검으로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이매봉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두 자루의 장검이 쥐어지며 노이의 검을 튕겨냈다.

타탕!

치이익!

노이의 검에 닿은 장검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매봉의 왼쪽 소매자락이 조금 베어지며 색이 바랬다.

역한 냄새가 풍긴다.

노이의 검은 독검(毒劒)이다.

노이는 이미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아무소리없이 검으로 순식간에 서른 여섯 번을 베어왔다.

눈앞이 온통 노이의 독검으로 시꺼멓게 되는 것 같았다.

이매봉은 서른 다섯 번을 막아내고 서른 여섯 번째는 검의 힘이 말린 듯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아앗!]

노이가 독검을 거두고 동쪽 절벽가에 우뚝 섰다.

이매봉이 푸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이는 노대를 부르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매봉은 벼랑 위로 뛰어올라왔다.

돌아보니 그녀의 겉옷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있다.

이매봉이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엉망이야! 젠장! 앞으론 금선탈각(金蟬脫殼)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도무지 숙녀가 쓸 수법이 아니야.]

경장 차림이 된 이매봉은 동쪽 절벽을 천천히 내려가며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코가 개보다 더 예민한 노대는 이매봉이 던진 일매향 병을 찾아갔을 것이다.

먼저 동굴을 찾아야 한다.

현천록을 진양진인인줄 알고 뒤쫓는 귀찮은 늙은이들과 또 마주친다는 건 일단은 짜증나는 일이다.

만나고 나면 조금 그 상황을 즐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x x x

 

[내가 얼마나 잤는가?]

진양진인은 가만히 눈을 뜨고 물었다.

현천록은 지하를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를 두 마리 건져올려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시간 정도 됐을겁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자네의 양의신공으로 내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네.]

현천록은 누워있는 진양진인의 단중에 오른손 장심을 붙였다.

그리고 진양진인이 말하는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현천록의 오른손을 통해서 순수한 선천지기가 진양진인의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양진인은 배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그 기운을 끌어들여 기해혈을 바로잡았다.

이각 정도 걸려서 기해혈을 바로 잡고 났을 때 현천록이 맥이 팍 풀려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직은 공력이 부족해서 그렇네. 하지만 아주 큰 일을 했네. 허허허! 기해혈을 바로 잡자면 스무날을 걸릴 것이라 생각했건만... 양의신공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게.]

현천록이 물었다.

[도장이나 내가 똑같은 양의신공을 익혔는데도 왜 내 공력이 바위를 뚫고 가는 것 처럼 힘들게 도장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길이 뒤집어졌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 근본이 바로 잡혔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자네가 도와주면 금방 바로 잡을 수도 있네.]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사이에 진양진인도 구슬 땀을 흘리며 자기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현천록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아예 진기요상(眞氣療傷)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해혈이 회복된 이상 더디긴 해도 조금씩 노력하면 공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더구나 현천록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선천지기를 일부 받아들였으니 내력이 더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진양진인은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자기가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천록은 힘을 보충하고나서 다시 진양진인을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그 힘이 배는 강했다.

진양진인은 자기의 회복된 힘과 현천록의 힘을 합하여 단숨에 열 일곱 개의 대혈을 회복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써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는 삼백육십여 혈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현천록도 진양진인도 완전히 땀으로 흠벅 젖어버렸다.

진양진인은 온 몸이 솜뭉치처럼 축 쳐져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현천록은 완전히 탈진했지만 오히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몸 안은 텅비어버린 것 같은 데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기운들은 모공으로 들어와 길을 찾고 모여드는 것처럼 현천록의 기해혈로 응집되었다.

현천록은 기해혈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전신이 힘으로 가득찬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가득 든 것 같기도 하며 불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도 맑아지고 피로는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천록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무엇이든지 간에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리 춤에 찌르고 있던 백금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도 백금퉁소에 새겨진 용이 희미하게 빛난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퉁소를 불었다.

맑고 그윽한 음율이 암흑의 동굴 속으로 퍼져나갔다.

구슬픈 가락의 애상곡이었지만 슬픈 느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만 가득했다.

애상곡은 세 번을 연거푸 연주되었지만 그때마다 그 느낌이 달랐다.

처음에는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이었고 두 번째는 웅장하고 엄숙했으며 세 번째는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세 번의 연주 모두 원래의 애상곡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마치 아기를 달려는 듯하군.]

세 번째 애상곡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을 차린 진양진인이 말했다.

[애상곡은 언제 배웠는가?]

[도장이 부는 걸 보고 흉내를 내봤을 뿐입니다.]

현천록은 퉁소에서 입을 떼면서 말했다.

진양진인이 실소했다.

[음율을 단번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당년의 왕산악이라 해도 마찬가질 걸세.]

진양진인의 음성은 이제 기운이 있었다.

현천록은 그 음성 만으로 이제 그가 몸을 다 치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현천록이 말했다.

[애상곡 외에 다른 곡은 없습니까?]

진양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배울 수 있다면 한 번 배워보게. 아예 이소곡(離騷曲)이나 광릉산(廣陵散)을 가르쳐줌세.]

진양진인은 말을 마치자 마자 자기의 퉁소를 꺼내서 불었다.

이소곡이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진양진인의 곡이 끝나자마자 퉁소에 입을 대었다.

진양진인이 부른 곡과 똑같은 곡이 흘러나왔다.

완급과 호흡마저 완전히 동일했다.

진양진인은 한방 맞은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진양진인은 이소곡을 부르며 음이 아주 높은 세 소절은 빼고 부르지 않았다.

현천록이 그전부터 이소곡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천록은 완전히 자기와 똑같이 연주하고 있었다.

아니, 음이 오히려 더 고아한 것 같다.

현천록의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다시 퉁소를 입에 대고 광릉산을 불었다.

광릉산은 위진(魏晋)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분인 완적(阮籍)이 만든 것으로 그 이후에 곡이 끊어 졌다고 알려져 있다.

진양진인은 젊었을 때 남쪽에 갔다가 어느 낡은 도관의 천장에 광릉산의 악보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배웠다.

광릉산이야말로 당금의 세상에서는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진양진인이었다.

광릉산의 곡은 길기도 길거니와 온갖 현란한 기교와 은밀한 수법이 들어있어 십년을 배운다 해도 이루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그가 지금의 중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광릉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자기가 연주하지 않은 광릉산을 듣는 홍복을 누리게 되었다.

현천록은 너무 자연스럽게 누에가 실을 뽑는 것처럼 퉁소로 광릉산을 뽑아내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자기의 퉁소를 꺾어버렸다.

파각!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 못됐지만 퉁소로는 천하제일을 자부했더니... 허허... 말짱 헛된 오만이었구나.]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곡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광릉산은 아주 좋은 곡이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마 다시는 듣지 못할 걸세. 자네같은 사람이 또 있기도 어렵고 노도는 결코 연주하지 않을 테니까. 광릉산을 알아주는 사람은 또 한 분이 있네만 이제 그분도 더 듣지는 못하게 돼군.]

진양진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자넨 귀재(鬼才)네 귀재. 내가 평생 처음 만나는 기재일세.]

번쩍!

진양진인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현천록의 목에 닿아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든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금석을 무베듯 하던 시퍼런 장검이 목을 시리게 한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같은 기재가 무공을 익힌다면 십 년 래에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자네 발밑에 무릎을 꿇어야 할 걸세. 아마 다른 고수들이 자넬 발견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걸세. 죽여서 싹을 제거하든가 제자로 키워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하겠지.]

현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장께선 어느 쪽입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느 쪽은 어느 쪽이겠나? 그냥 자네와 난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일세. ! 이 검은 줄 수 없으니 그 퉁소로 따라하게.]

진양진인은 훌쩍 물러나며 검을 춤을 추듯이 휘둘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현천록의 눈에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 질 뿐이었다.

착각!

삽시간에 검광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 되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다 보았으면 어디 한 번 해보게.]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두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직 제 느낌으로는 확연하게 다 잡지 못했으니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싸늘하게 웃고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검광이 순식간에 눈을 부시게 한다.

현천록은 눈을 감고 진양진인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다.

처음보다 훨씬 확연하게 진양진인이 느껴졌다.

베고 찌르고, 걷는가 하면 치고 찍는 모두 동작이 하나의 선을 이룬 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 두가지의 수법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한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알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이제 하나 하나 따로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현천록의 말대로 열 두가지 동작을 따로 따로 펼쳐보였다.

현천록은 느낀 대로 머리 속에서 열 두 개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머리와 꼬리가 없었다.

어떤 것이든 머리가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꼬리가 될 수 있었다.

현천록은 머리 속으로 곰곰히 더듬어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대단한 검법이군요. 이런 검법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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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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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아! 청구단서!

 

 

 

석 달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드디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이 되긴 했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고 한 달 새 눈도 내리지 않았다.

막비강은 삼경이 조금 안된 시간에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지하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막비강은 마음을 놓았다.

헌데 영롱탑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은 지난번에 들렀었던 조씨부인의 농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농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짧은 석 달간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무공은 석 달 전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농가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에 탄 집의 잔해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집의 일가족이 흉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것일까?)

불탄 폐허를 돌아보는 막비강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졌다. 조씨부인의 집이 타버린 것이 아무래도 자신 때문일 것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던 막비강은 유해(遺骸)나마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잔해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깨진 항아리와 불탄 가재도구들만 발견될 뿐 사람의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그가 신녀비로 잔해의 여기 저기를 찔러 보고 있을 때였다.

반짝!

갑자기 한 줄기 금광이 번뜩했다.

막비강이 얼른 흙을 파보니 자신이 이 집을 떠날 때 장연아에게 맡겼던 호로와 강장이 나왔다. 이 물건들의 발견만으로 막비강은 큰 위안을 얻었다.

(유해가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모두 무사히 피한 모양이다. 여길 떠나면서 호로와 강장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므로 여기 묻어 두고 갔을 것이다.)

 

막비강은 곧 강변으로 달려가 강장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이어 호로에 묻은 흙도 닦으려는데 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밝은 달빛이 호로에 비치었다. 그러자 돌연 호로 표면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한 폭의 산경(山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막비강은 호로의 그 문양이 청구단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이 일대의 경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았다. 다만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탑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막비강은 다시 주위의 경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영롱탑이 아리나 영롱탑의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호로를 다시 찾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일년이 걸려도 헛수고를 할 뻔했구나.]

그는 기뻐하며 호로 안에 든 찌꺼기를 모두 쏟았다. 그러자 호로 속에서 찌꺼기들과 함께 종이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쪽지를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임은 갔구나! 임 가신 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베갯머리에 엎드려 무사함을 믿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만나길 기도했지만 천첩의 뜻이 아직도 통하지 않았구나.>

 

파리 머리보다 작게 쓴 글씨는 여자의 필적임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굴까? 장연아라면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숙하게 임이니 천첩이니 하는 글을 쓸 까닭이 없는데....)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 조씨부인이 썼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이 호로 속에 이런 걸 넣어 두었을까?)

막비강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 글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로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찬 뒤 영롱탑 아래쪽의 경지하로 달려갔다.

 

***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정월 대보름날 밤 삼경이다. 한 겨울이라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막비강은 물 가 높은 바위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영롱탑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곧 영롱탑의 그림자 끝 부분이 가르키는 곳이 물 속 깊은 곳에 놓인 하나의 거석(巨石)임을 발견했다. 집채만한 크기인 그 바위는 물 속 아주 깊은 곳에 놓여있었지만 경지하의 물이 워낙 맑아 물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호로에서 떠오른 산수화에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비급은 영롱탑 꼭대기가 아니라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친 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청구상인이 후세 사람들을 농락할 의도가 없다면 청구단서는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자리한 물 속 거석 밑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풍덩!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한 막비강은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거석이 있는 곳으로 잠수했다.

거석이 놓인 곳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 거의 십여 장을 잠수하여 귀가 멍멍해지고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무렵 막비강은 가까스로 거석에 도착했다. 만일 막비강이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남달리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면 거석이 놓인 곳까지 잠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석은 마치 강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단단히 박혀있었다.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흔들어 보았지만 거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거석을 흔들어 보던 막비강은 숨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허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다 있군!]

막비강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물가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나처럼 비밀을 알아내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력이 충만함을 느낀 막비강은 움찔 놀라며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막비강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오봉도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막비강이 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고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상대방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천하오기 중 오봉도인이었다.

이에 막비강은 다시 급히 물 속으로 잠수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거석을 흔들어 보았다.

우두둑!

그러자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거석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시 숨이 목 아래까지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비강은 별 수 없이 또 수면으로 부상했다.

오봉도인은 재차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막비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너는 과연 거기서 비급을 찾고 있었구나. 빈도는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청구단서를 찾으면 즉시 갖고 나오너라. 함께 연구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자는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비급을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해 좋은 말로 막비강에게 제안했다.

오봉도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막비강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요사한 도사야! 내가 그런 수작에 걸려들 것 같으냐? 청구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찾아낸다면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멀리 헤엄쳐 가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무공 실력을 잘 아는지라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청구단서는 도가(道家)의 비급이라 배움이 얕은 후배로서는 얻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도장께서 지도해 주신다니 저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봉도인은 막비강이 순진하여 자신이 말에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총명하고 영리하여 천면신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네가 비급만 찾아 나오면 빈도는 최선을 다해 널 지도해 주겠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비강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거석을 밀어보았다.

쏴아!

다음 순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거석이 벌렁 뒤집혀졌다. 헌데 거석이 넘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수직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물이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을 막고 있던 거석은 물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다.

콰아아아!

거석이 뒤집히자 텅 비어있던 동굴 속으로 물이 와락 밀려들어간다. 삽시에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막비강의 몸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혼비백산한 막비강은 비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다급히 호흡을 멈추어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 했다.

그 상태로 막비강은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린 채 아래로 떨어졌다.

 

***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처음에는 그를 아래로 하락시키더니 다시 옆으로 백 장 가량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막비강은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낀 거석(巨石) 아래쪽에 도착하게 했다. 그는 얼른 거석을 붙잡고 일 장 가량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막비강이 나온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요행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 어떻게 밖으로 다시 나가지?)

그는 깜깜한 주위를 둘러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막비강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동굴 바닥은 고른 편이었다. 조그만 돌 조각을 사람 손으로 이어 붙여 마치 비늘같이 만들어졌는데 끝없이 길게 뻗어있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돌연 앞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지만 막비강은 기쁘기보단 긴장이 앞섰다.

(저것은 밖에서 흘러드는 빛일까? 아니면 어떤 짐승의 눈빛일까?)

그는 긴장하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한동안 그 빛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은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막비강은 용기를 내어 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석벽(石壁)에 하나의 옥합(玉盒)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막비강이 어둠 속에서 본 빛은 그 미끄러운 옥합의 표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츠으으!

막비강이 석벽에 박힌 옥합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갑자기 빛이 증가되어 주위를 백주(白晝)처럼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이 옥합은 야광옥(夜光玉)이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옥을 깍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합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야광옥합(夜光玉盒) 속에 동이족의 무학비전인 청구단서가 들어 있으니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리라.>

 

[! 이것이 바로 청구단서구나!]

막비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옥합을 바닥 위에 내려놓고 큰절을 올렸다.

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과연 한 통의 편지와 붉은 표지를 지닌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세 권의 책자 겉면에는 각각 신공결(神功訣), 연형결(鍊形訣), 초혼결(招魂訣)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막비강은 비급들 보다 먼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도는 본시 동방(東方) 청구(靑丘) 출신이다. 우리 동이족이 잃어버린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으려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명을 마치게 되었도다. 하지만 창세삼보를 찾는 일은 동방국인(東方國人)이 할 일이므로 중원인인 그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이에 그 내막을 여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우혈한천(牛穴寒泉) 위로 올라가 최소 일 년 이상 일체의 중단없이 청구절학을 연마하라. 일단 연공을 시작하면 기초가 잡힐 때까지 쉬지 말아야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혈 근처에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 형성된 영천석유(靈泉石乳)와 일 년 동안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다. 또 야광주는 비급을 읽을 수 있게 빛을 발산해줄 것이니 무공을 연마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으면 비급을 다시 야광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후세의 인연을 기다려라.>

 

막비강은 야광옥합에 적힌 글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그냥 거짓말로 추명염왕 등을 속인 것이었는데 우혈이 정말 청구단서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막비강은 비록 우혈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동굴이 우혈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상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급을 품속에 넣은 후 옥합을 들고 야광주의 광망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

 

얼마 가량 걸었을까? 전면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천면신룡!]

막비강은 이런 지하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차가운 한기가 솟구치는 연못가에 서있던 그 사람은 야광옥합을 손에 든 막비강을 발견하고는 다가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괴상한 야광옥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청구단서를 취득한 모양이구나. 당장 그걸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추명염왕! 저자가 죽지를 않았구나!)

야광옥합의 빛을 빌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상대방은 추명염왕이었다.

헌데 석달 사이 그자의 얼굴은 아주 추악하고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누런 털이 길게 자란데다 눈에서는 연신 녹광(綠光)이 번뜩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한다.

그러나 막비강은 지난 석달 간 자신의 무공도 장족의 발전을 보였음을 떠올리고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이건 빈 옥합일 뿐인데 무엇이 볼 게 있다고 그러느냐?]

[빈 옥합이라고? 네놈이 감히 노부를 속이려 드느냐?]

[이런 마당에서 당신을 속일 필요가 뭐 있느냐?]

추명염왕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청구단서는 어디 있느냐?]

막비강은 술술 말을 이었다.

[소면호가 탈취해 갔다. 그자는 청구단서 세 권을 모두 자기가 갖고 내게는 이 빈 옥합만 주더니 발길질로 나를 물 속에 처넣었다. 당신은 내 몸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막비강의 말을 곧이 들은 추명염왕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소면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노부가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가 만약 청구단서의 절학을 연성한다면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 노부는 그놈을 때려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막비강은 뻔히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여길 들어왔느냐?]

추명염왕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막비강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추명염왕은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그 어린 녀석이 알고 있지.]

[어린 녀석이라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지금은 도대체 몇 일이냐?]

[정월 보름날 아니면 정월 열엿새 아침일 것이다.]

추명염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그럼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다면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먹었느냐?]

막비강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히죽 웃었다.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추명염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들 못 먹겠느냐? 얼마 후 노부는 너도 잡아먹을 것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라고?]

추명염왕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웃었다.

[석 달 전 나이가 너와 비슷한 녀석이 소면호와 삼촌정, 그리고 노부를 데리고 네놈을 찾는다면서 이곳 우혈에 왔었다. 그런데 소면호가 방심한 노부와 삼촌정을 갑자기 공격하여 이 수직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물 속에 떨어져 죽음은 면했다.]

막비강은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 선배님도 이곳에 계시겠군요.]

그러자 추명염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이간질하려고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다고 그가 너를 구해 줄 것 같으냐? 사실대로 말해 주겠는데 그는 이미 내게 잡아먹혔다.]

막비강은 흠칫 놀랐으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노부가 너를 잡아먹을 때가 되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추명염왕은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세상이치다. 그러니 내가 몇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자는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한천이 있는데 시체를 그 한천에 담가 두면 상하지 않는다. 원래 한천에는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시체가 여러 구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걸 사이좋게 나누어 먹다가 나중엔 그 마저도 떨어지자 서로 다투게 되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삼촌정이 버릇없이 굴기에 노부는 그놈을 죽여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놈이 나타났구나.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 살려 두겠지만....]

막비강은 추명염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어라!]

추명염왕의 말을 듣던 막비강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일장을 격출했다. 그는 끔찍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이 일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 네놈이!]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감히 먼저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또한 그의 공력이 이렇게 심후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한 가운데 일장을 맞받아 냈다.

!

[커헉!]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명염왕은 우반신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받아랏!]

막비강은 일초가 성공하자 자신이 생겨 옥합을 바닥에 던져놓고 쌍장을 교차하여 쉴새없이 연달아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퍼펑!

추명염왕은 몇 장을 맞받아 낸 후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훨씬 심후함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호기가 격발하여 장력을 발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잠깐은 무슨 잠깐이냐? 나는 오늘 금릉 개방의 네 분 노개와 삼촌정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겠다.]

퍼펑!

막비강은 고함과 함께 쌍장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냈다.

[아이쿠!]

첨벙!

추명염왕은 연달아 몇 바퀴 곤두박질하더니 그대로 차가운 한천(寒泉)에 빠져 버렸다.

막비강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염왕이니 황천에 가야 마땅하다. 그래도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는 추명염왕이 밖으로 나올 것이 염려되어 한천 끝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의 추악한 시체는 수면에서 몇 바퀴 맴돌더니 천천히 물 속으로 잠겼다.

막비강은 자기가 십 성의 공력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추명염왕이 당해내지 못하고 한천에 빠져 죽자 의외였다. 추명염왕이 일장에 네 명의 노개를 격살했던 일로 미루어 자기의 무예는 이미 일류고수에 못지 않음을 알았다.

[잘 하면 지금 실력으로 막고천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자를 일장에 죽이는 것은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막비강은 비록 자신이 추명염왕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지만 천하오기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기 중의 누구라도 원수 막고천을 도우면 원수를 갚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는 청구절학을 연마한 후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옥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청구상인이 말한 양식이 있다는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한 쪽 벽에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석혈(石穴)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았다.

구멍 안쪽은 넓이가 여덟 자 가량 되는 자그마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이 석실에는 식량은커녕 돌 조각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밀실 한 곁에 우윳빛의 액체가 조금 고인 샘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청구상인이 말한 영천석유였다.

그러나 그것뿐, 석실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본래 여러 가지 약재를 알고 있는지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그 식량이란 것이....)

그는 즉시 한천의 맞은편 벽쪽으로 가서 야명주로 비춰 보았다. 과연 흙이 엉겨붙은 그곳에는 희세의 영약인 하수오(河首烏)가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 이런 희세의 영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니...!)

그는 청구상인이 말한 식량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곳에 나 있는 하수오들은 모두 수백 년 묵은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희세의 영약들인 것이다. 대충 양을 따져보니 일 년 동안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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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신녀문의 폐허. 달빛 아래 신비롭고

북쪽의 높은 절벽 쪽으로 가는 세 여자. 운신장이 앞장서는데 호리병을 들고 있다. 호리병이 밝게 빛나서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 그 뒤를 이진진과 진삼낭이 따라간다. 진삼낭이 이진진의 팔을 잡아 부축하고

진삼낭; (기회를 봐서 진진이에게 내 본명과 청풍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한다.) 곁눈질로 이진진을 보며 생각하고

진삼낭; (지금도 무림맹은 나와 청풍이를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니...) 생각할 때

운신장;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우리 신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인물은 천마(天魔)란다.] 절벽 쪽으로 가며 주변의 폐허를 돌아보고

이진진; [술법의 종가로 알려진 신녀문을 이렇게 만들다니...] [천마라는 인물은 정말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이에요.]

운신장; [대단했지. 대단하고 말고...]

운신장; [마교의 중시조(中始祖)인 천마는 고금제일마로 불리는 인물로 그의 적수는 오직 두분뿐이었단다.]

운신장; [무성동(武聖洞)이란 문파의 시조 천지무성(天地武聖)과 우리 신녀문의 문주셨던 던 무산신녀(巫山神女)가 그분들이었다.]

운신장; [하지만 천지무성과 무산신녀님은 천마보다 한 세대 전의 인물들이라 직접적인 위협이 되진 않았다.]

운신장; [대신 우리 신녀문에 전해지는 한 가지 보물은 언제든지 천마와 그의 후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운신장; [그래서 천마는 그 보물을 없애려 했지만...] [고금제일마라는 그자의 능력으로도 그 보물을 훼손할 수가 없었다.]

운신장; [어쩔 수 없이 천마는 그 보물을 빼앗아 금제를 걸어버렸다.] [신녀문의 후손이 결코 손에 넣지 못하도록...]

이진진; [대체 어떤 보물이기에 고금제일마인 천마조차 두려워한 건가요?]

운신장; [혼천경(混天鏡)이라는 보패(寶牌;영적인 힘을 지닌 보물)란다.]

이진진; [혼천경...]

운신장; [혼천경은 인간의 혼백을 담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 신녀문의 역대 문주님들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당신의 평생 수련의 결과를 혼천경에 옮겨놓곤 하셨다.]

이진진; [평생 수련의 결과를 옮겨 놓으셨다면...] 놀라고

운신장; [후손들은 언제든지 그 능력을 혼천경에서 꺼내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일초무학이었더라도 단번에 천마에 필적하는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돌아보며 웃고

이진진; [과연 천마가 두려워할만 했어요.]

운신장; [그래서 천마는 혼천경을 빼앗아 이곳에 가둬버렸단다.] 멈춰서며 앞을 보고. 앞에는 절벽이 있는데 절벽 아래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헌데

츠츠츠! 동굴 입구가 칙칙한 빛의 장벽으로 막혀있다. 동굴 전체를 빛이 꽉 메우고 있는 모습.

이진진; [동굴... 동굴이 질감이 느껴지는 빛으로 가득 차있어요.] 놀라고

운신장; [천마의 술법인 금천마장(禁天魔障)이란 것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가까이 와봐라.]

이진진; [...] 다가가고

운신장;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거라.] 츠으! 호리병을 들어서 그 빛으로 동굴 안쪽을 비추고. 직후

[!] 눈 치뜨며 놀라는 이진진. 진삼낭도 뒤에서 놀라고

! 동굴 안쪽, 마치 젤리같은 것으로 들어차 있는 상태인데 그 젤리같은 것들 속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떠있다. 운신장과 복장이 비슷한 여자들인데 수영을 하거나 무중력 상태에 떠있는 것같은데 물론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두 안쪽으로 날아 들어가는 자세다.

이진진; [동굴 안쪽에... 선녀같은 분들이 여럿 떠있어요.]

운신장; [금천마장을 뚫고 들어가 혼천경을 꺼내오려다가 실패한 본문의 선조들이시란다.] 한숨 쉬고

[!] 눈 치뜨는 이진진

멀리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 빛을 발한다.

이진진; [동굴 깊은 곳에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어요.] 손을 이마에 대고 보고

운신장; [잘 보렴! 저것이 혼천경이란다.] ! 호리병으로 빛을 더 강하게 내어 동굴 안쪽을 비추고. 그러자

크로즈 업 되는 그 물체. 돌로 깎아 만든 단상이 있고 그 위에 거울이 하나 떠있다. 직경이 20센티 정도되는 구리거울인데 표면이 아주 매끈해서 빛이 난다.

이진진; (저게 혼천경...) 흥분하고

운신장; [혼천경은 우리 신녀문의 모든 것이란다.] [혼천경에 본문의 모든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따로 비급을 만들거나 하지 않지 않았었지.]

운신장; [그러다가 혼천경이 천마가 펼친 술법에 갇혀버리자 대부분의 절기가 절전되고 말았다.] 한숨

이진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운신장; [겨우 구전(口傳)으로 몇 가지 술법과 무공이 전해졌었지만...]

<그나마도 역대 문주님들께서 혼천경을 꺼내려고 금천마장에 뛰어들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절전되고 말았지.> 동굴 안쪽에 떠있는 여자들을 배경으로 운신장의 말

운신장; [자연스럽게 제자들도 줄어들고...] [나의 대에 이르러서는 신녀문의 제자는 통틀어도 백 명이 채 안되게 되었단다.]

운신장; [그 적은 숫자로는 신녀문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졌으며...]

운신장; [문주 격인 나도 무림맹에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진삼낭; (그래서 이 넓은 신녀문이 폐허처럼 버려졌구나.)

운신장; [오늘 밤 너를 찾아왔던 분은 아마도 저 안에 갇혀계신 전대 문주님들 중 한분이셨을 게다.] 동굴 안쪽의 여자들을 보고

이진진; [혼천경을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는 것인지요?] 진지하게

진삼낭; (진진이 너 설마...) 걱정

운신장; [무공으로는 절대 금천마장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단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혼백에 가해지는 압력이 급증하기 때문이란다.]

운신장; [오직 천마의 혼백에 필적하는 지순한 혼백과 정기를 지닌 사람만이 금천마장의 압력을 견딜 수가 있단다.] 이진진을 지긋이 보며

이진진; [혹시 제가...]

운신장; [너는 몸이 약한 대신 정기가 강력한 신약정강(身弱精强)의 체질이란다.] 끄덕

운신장; [내가 아는 한 오직 너만이 금천마장의 금제를 깨트릴 수가 있단다.] 이진진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지듯이 바라보고

[!] 침 꿀꺽 삼키는 이진진. 그 뒤에서 진삼낭은 걱정스럽게 보고 있고

 

#140>

<-태산(泰山)> 웅장한 산. 그 산중턱에 자리한 성채

<-무림맹(武林盟)> 그 성채를 크로즈 업. <신마유희>등 다른 작품의 무림맹 형상. 때는 낮이고

무림맹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계곡.

그리 깊지 않은 계곡 안쪽에는 정원이 가꿔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건물 한 채와 정자 한 채가 있고.

정자 안에는 여러 명이 있다. 안락의자에 앉은 섭장천. 많이 늙었다. 섭장천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는 늙은 의원. <신마유희>에 나온 진무륜 캐릭터. 두 사람 앞쪽에는 장세명이 앉아서 보고를 하는 중이다. 한쪽에는 쌍뇌신로가 앉아서 부채를 부치고 있다. 쌍뇌신로도 많이 늙었고

섭장천; [삼월 삼짓날이라...] 중얼거리는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주 섭장천>

장세명; [절기상 화기(和氣)가 맹동(萌動)하는 계절이니 화촉(華燭)을 밝히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섭장천; [택일은 잘 했네만...] [무려 일곱 달이나 기다리라고 하는 걸 보면 벽장주가 딸을 어지간히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장세명; [벽장주로서도 처음 자식을 품에서 놓아 보내는 것이니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고

섭장천; [그 심정 이해가 가네.] 한숨 쉬고

쌍뇌신로; (벽초천이 딸의 출가를 늦추는 게 과연 아쉬움 때문일지...) 부채를 부치며 생각하고

쌍뇌신로; (이런 저런 경로로 들리는 벽소소에 대한 안좋은 소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맹주의 집안일이니 노부가 뭐라 할 수도 없는 일...)

쌍뇌신로; (그저 벽소소라는 계집이 소문만큼 막 되어 먹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장세명과 섭장천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 걸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고. 그때

! 섭장천 손목에서 손을 떼는 진무륜

섭장천; [어떤가 진의원?] 웃으며 진무륜을 돌아보고

섭장천; [근래 상태가 더 안 좋아졌겠지?] 웃으며 소매를 내리고

진무륜; [탕제에 기력을 보충하는 약을 더 첨가해야겠습니다.] 손을 소매로 닦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섭장천 전담의원 진무륜>

섭장천; [부질없는 일일세. 말라가는 고목에 비료 많이 준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니...] 허탈하게 웃고

섭장천; [이미 팔순을 넘긴 나이야.] [살만큼 살기도 했으니 애써 수명을 늘리고 싶진 않구먼.]

진무륜; [하늘이 내린 목숨이니 살 수 있을 만큼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좀 무뚝뚝하게 말하고

진무륜; [게다가 춘삼월이 오면 손주며느리도 보셔야하니 기운을 차리셔야합니다.]

섭장천; [손주며느리...]

섭장천; [하긴 죽을 때 죽더라도 노부의 대가 이어지는 걸 보고 죽어야겠지.]

진무륜; [사람은... 특히 노인은 죽는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안되는 법입니다.]

섭장천; [허허 주의함세.]

쌍뇌신로; (진의원도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쌍뇌신뢰; (비록 친 딸은 아니더라도 양녀가 악인에게 납치되어 무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걸 보면...)

쌍뇌신로; (저 정도 자제력을 지녔으니 황제의 어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었겠지.) 생각하는데

[조부님!]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일제히 돌아보는 사람들

위진천; [황금전장에서 택일(擇日)을 받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활발하게 걸어오는 청년. 아주 화려한 복장에 보검을 허리에 찼다. 다른 작품의 위진천 캐릭터. 이 작품에서는 삽장천의 조카손자.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소맹주 신검공자(神劍公子) 위진천(威振天)>

장세명; [어서 오시오 소맹주.] 일어나며 포권하고. 진무륜과 쌍뇌신로는 앉은 채로 고개만 좀 까닥인다.

위진천;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총관!] 마주 포권하며 정자로 들어오고

장세명; [노고랄 게 있겠소이까?] [오랜만에 태산을 떠나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지요.]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권하며

위진천;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의자에 앉으며 웃고

위진천; [기분은 어떠십니까 조부님?]

섭장천; [기분은 매우 좋구나. 드디어 네 혼처와 혼례 날짜가 정해져서...] 웃고

위진천; [소손이 오랜만에 효도를 한 것같아 기쁩니다.] 웃고. 이어

위진천; [그래 신부 댁에서는 언제로 택일을 해서 보냈습니까?] 옆에 서있는 장세명에게 묻고

장세명; [내년 삼월삼짓날을 원하고 있습니다.]

위진천; [삼월삼짓날...] [반년도 넘게 남았군요.]

장세명; [벽소저의 미모를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으시겠습니다.] 웃고

위진천; [그것도 있지만... 조부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리는 것 같아 조급해집니다.] 다시 섭장천을 보고

섭장천; [그러고 보면 진천이만큼 노부를 챙기는 사람도 없구먼.] 흐뭇하게 웃고

위진천;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겸손하게 웃고

그런 위진천을 지긋이 보는 쌍뇌신로

쌍뇌신로; (천하제일행운아!) (이것이 무림인들이 소맹주 위진천을 질시해서 부르는 말이다.) 생각하고

쌍뇌신로; (맹주의 유일한 혈육이던 섭아연은 마교의 소교주 용무린과 정분이 나서 무림맹을 등졌다.)

쌍뇌신로; (섭아연은 용무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실종되었고... 섭아연 자신은 미쳐버렸다.)

쌍뇌신로; (어쩔 수 없이 맹주는 조카딸의 아들, 즉 무()태상 섭패천의 외손자인 위진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쌍뇌신로; (맹주 집안의 불행 덕분으로 곧 무림맹의 주인이 될 행운아...) 섭장천에게 뭐라 말하며 웃는 위진천을 보며 생각하고

<늘 밝은 표정이지만 언뜻 언뜻 엿보이는 어두운 그늘이 마음이 걸린다.> 야릇한 표정으로 웃으며 곁눈질로 쌍뇌신로를 보는 위진천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쌍뇌신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늘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노부의 노파심 때문일까?)

<아무쪼록 노부의 근심이 헛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정자의 모습 배경으로 쌍뇌신로의 생각 나레이션

 

#141>

<-반년후> 살인상단의 비밀거점. 늪지로 둘러싸인

동굴 입구. 여러 명이 나와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파면살주, 귀파파, 천살로, 독검사랑, 몇 명의 복면인등이다.

삐이! 늪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너머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고. 그러자

귀파파; [도착하셨구먼.] 눈 번뜩이고. 이어

철컹! 벽에 붙은 레버를 하나 급히 위로 올리는 복면인. 그러자

촤아! 늪지 속에 숨어있던 철교가 올라오고. 그 철교 위를 뱀장어같은 것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니다가

첨벙! 첨벙! 꿈틀대며 다시 늪으로 뛰어드는 뱀장어같은 것들. 이어

휘익! 안개를 뚫고 철교 위를 걸어오는 세 여자. 소수마녀와 도마녀, 검마녀다. 세 여자가 나타나자.

[단주!] [어서 오시게.] [단주님을 뵙습니다.] 일제히 인사하는 사람들. 파면살주와 귀파파, 천살로는 고개만 좀 숙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권한다.

소수마녀; [부단주님! 귀파파! 천살로!] 다가오며 대충 포권하고

소수마녀;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어요.] 철교를 완전히 건너와서 동굴 입구에 멈춰서고. 도마녀, 검마녀도 멈춰서고

끼릭! 레버를 다시 내리는 복면인

촤아! 쿠쿠쿠! 철교가 다시 늪 아래로 사라지고

파면살주; [노고랄 게 있겠는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소수마녀.; [제가 맡긴 자의 성취가 놀랍다지요?] 동굴 안으로 앞장서서 들어가며

파면살주; [천명 가까운 자객을 길러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소수마녀와 함께 동굴을 지나면서 대화. 소수마녀의 뒤로는 귀파파와 천살로가 따르고 그 뒤를 독검사랑, 도마녀, 검마녀가 따라온다.

파면살주; [그놈은 불과 반년 만에 지옥십관을 거의 다 통과했는데...] [심지어 같은 조의 놈들까지 단 한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게 이끌고 있어.]

소수마녀; [제법이로군요.]

파면살주; [만일 혼자였다면 한 두 달 전에 지옥십관을 돌파했을 걸세.]

소수마녀; [지금은 어느 관문에 도전중인가요?]

파면살주; [단주에게 연락을 한 사이에 두 개의 관문을 더 돌파해서 현재 제구관(第九關)에 이르렀네.]

소수마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군요.]

파면살주; [천경실(千鏡室)로 가세.] 앞장서고. 앞쪽에 동굴이 끝나고 있다. 그곳을 지키던 복면인들이 인사하고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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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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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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