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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무림칠절(武林七絶) (1)

 

 

우워어어어어!”

길고 웅혼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다. 그가 이리로 오고 있다.”

임청우는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빠르게 달리는 황의소녀의 향긋한 체향에 젖어 있다가 기겁하며 외쳤다.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멀리서 시작되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났다.

장차 금포염왕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되는 기린아 검주 유소기!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검법은, 검법은 배웠어?”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를 밟으며 달리던 황의소녀가 임청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대답이 없었다.

속은 것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든 황의소녀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그럼 뭘 배웠어?”

아직 아무 것도...”

하아...”

임청우의 대답이 황의소녀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

그 사이에 오십여 장 밖에 이른 유소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휘익!

황의소녀는 땅으로 뛰어내려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비정 냉혹한 성격의 유소기는 아마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드드드드!

한데 갑자기 숲이 흔들렸다.

콰콰콰쾅!

앞쪽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두 사람을 향해 쓰러졌다. 누군가 숲 속의 거목들을 일도양단하여 두 사람의 행로를 저지한 것이다.

!”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황의소녀는 몸을 굴려 근처의 바위 뒤로 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지만 피할 곳이라고는 그 바위뿐이었다.

쿠르르릉! 콰드드드!

거대한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지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엎드려!”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한다고 피한 바위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허리를 힘껏 채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직후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황의소녀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임청우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임청우는 키가 반자 정도 작아졌다.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임청우 자신도 몰랐다.

도망가!”

나무를 떠받친 채 임청우가 소리쳤다.

! !

임청우가 떠받치고 있는 나무 위로 또 다른 나무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임청우의 허리가 휘청이고 키는 점점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드러난 팔목과 얼굴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황의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청우는 사방에서 넘어온 나무들을 하나의 나무 위에 받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들보나 다름이 없었다.

임청우가 쓰러진다면 황의소녀는 물론이고 임청우 자신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바위 옆이기는 하지만 크지 않은 그 바위도 아마 박살나버릴 것이다.

황의소녀도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임청우의 곁에 서서 나무를 떠받쳤다.

어서 빠져나가!”

임청우는 비지땀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황의소녀는 힘겨운 얼굴로 살풋 웃어보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받쳤다.

임청우의 부담이 약간 줄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대책도 될 수 없었다.

황의소녀 역시 자신들이 결국에는 깔려 죽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군(刀君),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을 놓칠 뻔했네.”

나무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동산 밖에서 검주 유소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낭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실린 목소리다.

 

휘익!

유소기는 사방에서 가운데를 향해 촘촘히 쓰러져 거대한 노적(露積)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거목들 위에 내려섰다.

파라라랏!

그의 몸에 걸쳐진 청삼이 펄럭이며 바람소리를 냈다.

유소기의 십여 장 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거목 위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폭이 넓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코, 입과 귀, 모두가 큼직큼직한 사람이다. 완강한 턱은 그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 백의의 도객이 칠절 중 검주 유소기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가공할 고수 도군 지청천(池靑天), 바로 그였다.

도군은 유소기의 인사말에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달아나는 앞쪽의 나무들을 베어 가로막은 것은 바로 도군이었다.

그놈이 어수룩한 겉보기완 달리 아주 교활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굴리려 해도 굴릴 수가 없겠군.”

유소기는 쓰러진 나무들이 층층이 겹쳐 이룬 노적 형상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웃었다.

추릿!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소기는 검을 뽑았다.

백금검이 무지개같은 흰빛을 뿜었고,

쿠르르르! 콰콰쾅!

아름드리나무들이 토막토막 베어지며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쪽으로 굴러갔다.

촤아아아!

작은 나뭇가지들과 잎들은 유소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

도망쳤구나!”

갑자기 유소기의 표정이 변했다.

“...!”

좀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군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거목에 부딪혀 박살나버린 바위 곁에는 두 쌍의 발이 깊이 박혔던 흔적만 있을 뿐,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시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휘익!

유소기는 이를 부득 갈며 몸을 날렸다.

거목들이 토막 나서 굴러가는 쪽이었다.

도군도 말없이 몸을 날렸다.

 

퉁퉁퉁퉁!

수레바퀴 같이 굴러가는 거목의 잘린 토막들은 다른 나무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바위 위로 튀기도 하면서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황의소녀와 임청우는 그 나무토막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로 굵은 나무속을 파내고 그 안쪽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라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만한 구멍을 파내기엔 충분했다.

임청우가 두 손으로 나무를 바치고 있는 사이에 황의소녀는 혈도를 써서 재빨리 속을 파냈었다.

거대한 청동향로도 간단히 베었던 혈도다.

청동에 비하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나무를 파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압사(壓死)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헌데 유소기는 나무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잘라서 굴려버렸었다.

그 바람에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숨은 나무토막도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소기의 검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베었다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두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황의소녀가 나무 구멍 안쪽에 숨고 임청우는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입구를 등지고 서서 버티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 상태로 나무토막은 연신 회전하며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

아차하면 임청우의 몸이 통나무 밖으로 튕겨나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임청우는 팔과 다리에 힘을 한껏 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팍팍팍!

백광이 번득이며 통나무 토막들이 둘로 갈라졌다. 유소기가 비탈을 따라 날아 내려가면서 한꺼번에 십여 개씩의 통나무 토막들을 베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잎이나 가는 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다가 돌풍을 타고 올라갔을 리는 없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이 통나무 속에 숨었으리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백 여 개의 통나무가 다시 둘로 나눠지며 빠르게 비탈을 굴렀다.

통통통!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옆으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가 짧아진 통나무들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숨어있는 통나무가 베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은 머리위로 비스듬히 받치고 혈도는 몸 옆의 나무 벽에 밀어붙였다.

혹시 유소기의 검이 그들이 숨어있는 통나무를 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청강사자검과 혈도에 저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임청우는 자신의 옷자락이 통나무 밖으로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유소기는 백금검으로 굴러가는 통나무들을 자르다가 냉소를 머금었다. 굴러가는 통나무들 중 하나의 중간쯤에서 펄럭이는 임청우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휘익!

즉시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은 유소기는 허공에서 요자번신(鷂子翻身)의 수법으로 몸을 굴린 후 그 통나무 앞을 가로막았다.

!

마주 보고 있던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통나무가 갑자기 멈추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

황의소녀가 눈물을 찔끔 쏟으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통나무가 수직으로 홱 쳐들려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두 사람을 밖으로 쏟아냈다.

!”

엄마야!”

임청우는 바닥에 나뒹굴고 황의소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휘익! 터텅!

통나무를 한손으로 간단히 잡고 흔들어서 두 사람을 쏟아낸 유소기는 빈 통나무를 뒤로 던져버렸다.

(검주 유소기!)

(... 틀렸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눈앞에 서있는 임풍옥수같은 용모의 중년인 유소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텅 터터터텅!

그 사이에도 유소기 뒤쪽에서 나머지 통나무들이 요란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손을 젓자 수십 개의 통나무들은 간단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수만으로도 유소기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통나무들은 조금 더 굴러간 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임청우의 얼굴을 본 유소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옥같이 맑던 임청우의 얼굴이 불과 반나절 만에 검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황의소녀는 유소기의 추적을 따돌릴 목적으로 임청우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유소기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몽선도!”

하지만 유소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청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에게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대안탑에서 인()이 포함된 재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유소기는 검집으로 황의소녀를 가리켰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 예쁜 소녀가 화를 당하게 된다.”

황의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지도 않았음에도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뼛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임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큰 백의의 중년인이 그의 뒤에 칼을 뽑아든 채 서있었다. 도군이었다.

순간 임청우는 칠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굳이 뺏으려 하니 나는 죽어도 뺏기지 않겠다.)

임청우는 오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유소기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져가시오.”

임청우는 소리치며 두 개의 물건을 각기 동북쪽과 동남쪽을 향해서 던졌다.

임청우는 무공은 모르지만 공력만은 아주 높다.

! 피핑!

임청우가 힘을 다해 던진 두 개의 물건은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 파팟!

유소기와 도군의 몸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라 각기 하나의 물건을 쫓아갔다. 그들의 신속함은 먹이를 덮치는 표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임청우는 유소기와 도군이 몸을 날리자마자 황의소녀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얼굴 앞에서 찬바람이 이는 순간 임청우는 황의소녀를 힘껏 껴안으며 땅을 박차고 껑충 뛰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까마득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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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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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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