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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 혼례식(婚禮式) (2)

 

 

신랑이 기가 막혀하는 가운데 혼례가 거행되었다.

비록 맑은 물 한잔과 수탉 한 마리만 탁자위에 올려놓고 맞절을 하는 간단한 혼례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혼례였다.

신랑측의 혼주(婚主)도 있었고 신부측의 혼주도 있었다.

자기의 몸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부려지고 일으켜지는 데야 임청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개방의 전대고수 부부가 주관한 거지같은 혼인이 끝났다.

첫날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식을 마친 후 할머니가 황의소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남자는 원래 밥통 같아서 뭣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단다. 네가 잘 가르쳐야 할 거야. 우린 근처 숲에서 자고 아침에 올 테니 그렇게 알아라.”

...”

할머니의 말에 황의소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범하고 뻔뻔스러운 데가 있는 소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노부부는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혈도가 찍힌 임청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장승처럼 서있을 뿐 옴쭉달쭉할 수도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렇게 벼락 치듯이 혼례를 올리게 될 줄은 꿈엔들 생각지 못했다.

아니 혼례라는 것 자체도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임청우인 것이다.

두 부부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장승처럼 서있는 그를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나를 때리면 아내를 때리는 천한 남자란 소리를 들을 것이고 도망친다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겠지? 우협의 제자도 우협같은 성인군자일 테니 결코 그런 말을 듣지 않겠지? 그랬다간 우협이란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임청우는 화가 나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사부님의 명성을 내가 해칠 수는 없다. 네 말대로 이미 억지로라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부부가 되었으니 너를 때리지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짓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게 나와 부부가 된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 주겠다.)

한데 황의소녀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져갔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내가 좀 엉뚱한 짓을 한 것은 인정해. 난 가끔 이러니까. 하지만, 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었어. 아버지의 부하들은 나를 잡아가려고 하고, 내가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한데... ”

소녀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걸승(妓乞僧)... 아버지의 충실한 개인 그들이 네가 우협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두 도망 가버리지 않았어? ... 이미 그때 결심했어. 너와 혼인하겠다고...”

임청우는 비로소 황의소녀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신과 혼례식을 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수하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과 부부가 된 것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긴 싫었어.”

당돌하면서도 거침없어 보였던 황의소녀였다.

한데 그녀가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임청우는 가슴이 찡해왔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동시에 단전에서 한줄기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막혀있던 혈도들이 순식간에 타통되어 버렸다.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소녀의 어깨에 얹었다.

“...!”

황의소녀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미안...”

임청우도 놀라 그녀의 어깨에서 급히 손을 뗐다.

... 어떻게 혈도를 풀었지?”

황의소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순간이 계속됐다.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이 소저, 아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 데, 그래도 성미는 여간 사나운 것 같지가 않다. 어머니처럼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만... 미리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어머니의 성격은 무시무시하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혼인을 올리게 된 황의소녀도 자기의 뺨을 때리는 둥, 그 성미에 있어서 결코 녹녹한 것 같지가 않다.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다시 농산에서의 괴로운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다.

임청우는 어느 책에선가 본 구절을 떠올리며 혼잣말 처럼 천천히 말했다.

똑똑한 남자는 나라를 세우고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망친다고 하던데...”

! 나라를 세우기나 하라구. 망치는 건 그 이후의 문제니까.”

황의소녀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이런 산속에서 꼬마들이 반역을 획책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침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깜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임청우가 막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슈우!

침실 안쪽에서 뭔가가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오척 단구에 뚱뚱한 몸을 한 중년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침실에는 거실과 연결된 방문 말고는 작은 창문 밖에 없었다.

임청우는 어떻게 뚱뚱한 중년인이 침실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데 뚱보 중년인은 당황하는 임청우를 보며 오히려 놀란 듯했다.

? 들은 것과는 다른데.”

사삭!

임청우는 번개처럼 자기의 얼굴을 더듬고 물러서는 손을 느꼈다.

임청우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뚱보 중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뭘 칠한 것도 아닌데...”

그때 임청우 뒤에서 황의소녀가 나서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혹시 칠절 중 비객(飛客)이라 불리는 소대협(蘇大俠)이 아니신가요?”

맞아, 내가 바로 비객 소도성(蘇道盛)이다. 넌 누구길래 어린 아이 주제에 날 알고 있는 것이냐?”

중년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키가 작고 뚱뚱해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인,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라는 칠절 중의 비객 소도성이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그 뚱뚱한 몸이 어떻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리가 길기가 하나 몸이 날렵해 보이기를 하나...

굴러다닌다면 믿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황의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천하제이(天下第二)의 경공술을 가지신 비객 소도성을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겠어요?”

하하핫! 내가, 이 비객 소도성이 천하에서 두번째라고? 그것 참 웃기는군. 그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있으니 한번 놀아보자구나. 그래 그럼 제일은 누구냐?”

소도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청우는 소도성이 말한 <>라는 소리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 너를 찾고 있는 검주 유소기지 누구겠나?”

그가 왜 나를 찾습니까?”

하하핫! 너는 그에게 볼일이 없겠지만 그는 아마도 단단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소도성이 임청우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검주 유소기의 임청우에 대한 볼일, 두 말할 것도 없이 몽선도를 뺏으려는 일이었다.

황의소녀가 다시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무림칠절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을 걸요?”

마면혈도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무비옹을 믿고 있는 모양이군.”

소도성이 가소롭다는 말했다.

황의소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보다 빠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 그는 바로 일왕(一王), 금포염왕이라구요.”

일왕... 그라면 나보다 빠를 수도 있겠지. 설마 일왕이 저 놈의 배후에 있단 말인가?”

소도성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빠르기로 유명한 비객이지만 감히 금포염왕보다 빠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마하니 일왕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죠?”

황의소녀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임청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다시는 우협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부라면 자기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임청우는 소도성에게 말했다.

칠절은 모두 강도를 일삼는 무리입니까?”

소도성의 눈이 번쩍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칠절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은가?”

만만치 않다는 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같이 들리는군요.”

소도성은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그만두자. 나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인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굳이 살인을 하고 싶진 않다.”

황의소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임청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칠절이 다 오는 모양이야. 어서 도망쳐야해. 만약에 검주 유소기와 도군(刀君), 신소(神簫) 등이 도착하면 도망칠 래야 칠 수도 없어.”

임청우의 몸이 움찔했다.

소도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도망치려고? 이 소도성 앞에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정확하게 맞췄어요.”

“...?”

그녀의 서슴없이 하는 말에 소도성이 긴가민가하는 순간이었다.

스스슷!

갑자기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몸이 안개에 휩싸인 듯이 흐릿해졌다.

내 앞에서 달아나겠다? 어림 반문어치도 없은 생각이지.”

소도성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유있게 웃었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번개처럼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날아나갔다.

으헉!”

스팟!

그러나 초가집을 뛰쳐나온 소도성은 채 삼장도 가지 못해 다급한 비명과 함께 더 빠르게 물러났다.

두 개의 나무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있는 눈에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실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황의소녀의 천잠사다.

으으...”

소도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빠른 속도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허리가 잘릴 뻔 했다.

공력이 높아 허리를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천잠사에 닿은 옷은 예리한 검에 베인 듯이 잘라져 버렸고 허리에도 붉게 금이 그어졌다.

놀람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여우같은 년!”

!

소도성이 발을 한번 구르는 순간 그의 뚱뚱한 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헌데 소도성이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슷!

천잠사가 감겨있는 나무 뒤에서 황의소녀와 임청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 도망가야 해! 비객 소도성을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일 순 없어. 금방 속은 줄 알고 돌아올 거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들 사이로 달렸다.

황의소녀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따라가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의 얼굴을 힐끗 보아도 그 검은 얼굴이 진지하게 보인다.

결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마... 경신술도 모른단 말인가? 우협의 제자가...)

어쩌면 우협의 제자이기에 경신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협이라면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일협으로서의 그 가공할 무공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 만전만패의 기인이 아니던가?

!

마음이 급해진 황의소녀는 자기보다 키가 큰 임청우의 허리를 끼고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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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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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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