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6'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4.16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3 1
  2. 2020.04.16 [환골탈태] 제 10장 가짜 의성이 준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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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3)

 

 

 

삼경이 넘은 시각에 계명사는 초파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향유가 든 연화등(蓮花燈)들이 줄지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었다.

승려들은 활몽루가 사라진 앞에서 무릎이 얼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한 여름철 개구리떼가 왕왕 거리는 것처럼 불경을 목청 껏 읊어댄다.

그리고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섞여 들려오는 찌르레기 소리처럼 가날픈 퉁소소리가 현무호 호반에 흐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계명사 상공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노오옴!!!

 

중들이 놀라 목탁을 집어던지고 엎드린다.

[부처님께서 노하셨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내 빛도 사라지고 고함소리도 정적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호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중들도 보고 행여 부처님을 볼세라 밤늦게 달려왔던 열성신도들도 눈을 말똥말똥하며 보았다.

늙은 도사는 개구쟁이가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호수에 약간 큰 퐁당소리를 내며 빼지고 말았다.

중생들의 시선과 늙고 젊은 중들의 시선이 계명사 주지 과우(寡雨)대사에게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과우대사는 억지로 뚱뚱한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 불조께서 임하신 이 뜻을 누가 감히 알리오!]

제자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입가로 찬물을 흘려 넣어 준다.

과우대사는 속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슨 징조냐고 자기에게 물으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석가모니는 입이 없었다고 적혀있지 않으니 말할 수 있었겠지만 대웅전 법당속의 부처는 만들 때 잘못 만들었는지 칠십 년 동안 지켜봤지만 한 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과우대사는 내심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동정하기도 하지만 이럴 땐 난감하기만 하다.

금도금을 입혀놨으니 아무리 말 잘하던 입이었다 해도 어디 벙긋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욕을 해도 그만 절을 해도 그만 그저 한결같이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도리밖에.

 

***

 

계명사의 요란하던 벼락 법회는 연화등이 하나하나 꺼져가면서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삘릴리...!

호반에 흐르는 퉁소소리가 야반 삼경의 그윽한 정취를 더하고, 물가로 밀려온 달이 하늘 비좁음을 아쉬워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정자에는 자기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흰옷을 입은 소년이 백룡이 아로새겨진 백금퉁소를 입에 물었고, 백금퉁소는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애절한 곡을 꼬리에 달고 있다.

추웃!

진양진인은 정자 앞의 물가에서 일어났다.

옷이 흠뻑 젖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두 손을 휘저으며 겨우 정자로 걸어갔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버렸는지 진기가 안정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동서남북도 거의 가릴 수가 없다.

진양진인은 귀에 익숙한 퉁소소리에 이끌려 정자까지 와서는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

퉁소소리가 그치고 진양진인의 머리 옆에 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진양진인은 지쳐버려 누군지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제발 노도를 그냥 내버려두게. 제발... ]

[하하하! 도장(道長)은 내 소리에 걸려든 물고기입니다.]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진양진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 죽었을 중상을 입고 차가운 호수 물속에 한 참이나 있었으니 그의 노구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인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나마 숨이라도 끊이지 않고 쉴 수 있는 형편이다.

진양진인은 실오라기만큼만 진기를 모아도 방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해혈은 텅빈 표주박같아서 어떤 기운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한데 몸이 공중에 들렸다.

(노도의 질긴 목숨이 기어코 오늘의 액겁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진양진인은 왠지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를 두 손으로 안아든 백의소년이 정자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고 싶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진양진인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노도는 매 매우 춥다네.]

[곧 불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진양진인은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꼬끼오! 꼬끼오!

---왕왕왕! 왕왕왕!

 

새벽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진양진인을 깨웠다.

타탁! 타탁!

장작 타는 소리와 매운 연기 내음이 함께 몰려온다.

눈은 떴지만 노곤하여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천장은 낮고 입구는 좁은 동굴 속이다.

연기가 앞으로 잘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타오른다.

진양진인은 공기가 뒤로 흐르는 것을 보고 그 동굴이 꽤 깊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른 숨소리가 모닥불 맞은 편에서 들린다.

진양진인은 암암리에 양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억지로 기혈을 통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진양진인은 모닥불 건너편의 숨소리를 다시 확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온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력이 정심하지는 않구나. 범을 피했는가 했더니 겨우 개구리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되다니...)

그는 마음으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다 곱혔다가 펼쳐진 후 다시 네 개가 곱혔다.

진양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뒤엉킨 기혈을 뚫지 못한다면 남이 애써 죽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 수 있는 건 스무 나흘에 불과하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동료를 찾아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자가 깨어나면 상황이 또 어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살아온 일백삼십여 년의 세월을 통해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본 백의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철인련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환우회(寰宇會) 사람인가?]

잠든 줄 알았는데 즉시 대답이 들려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진양진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음성에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느꼈다.

다시 말했다.

[노도는 육십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니 아는 것이 별반 없네. 어떤 것을 물으려 하는가?]

모닥불 건너편에 있던 소년이 진양진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흰 비단옷을 입었고 붉은 색 띠를 둘러 머리를 묶은 소년이다.

소년이 말했다.

[저는 현무호에 놀러 나왔다가 도장께서 퉁소를 부는 것도 봤고 활몽루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양진인은 말했다.

[퉁소는 소협도 불지 않았는가? 노도는 정신이 희미한 중에도 소협의 퉁소 소리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하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제가 꾸민 천록여의(天祿如意)의 첫 번째 제물입니다.]

진양진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천록여의라... 뜻하는 대로의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협의 이름이 천록이고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소년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번째 뜻이 맞습니다. 제 이름이 바로 현천록이고 도장께선 제 낚시에 걸려던 물고기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 낚시가 퉁소고 미끼는 애상곡이었는가?]

진양진인은 의식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저는 이제 도장의 애상곡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활몽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군요.]

진양진인이 차분한 눈으로 현천록을 응시했다.

현천록의 눈은 맑고 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진양진인은 스스로 위엄을 갖추어 현천록을 압도하고자 했지만 현천록의 마음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보면 볼수록 혼란스러워 졌다.

처음에는 이런 짐작 저런 짐작 다해보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진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창허진인을 활몽루에 가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퉁소로 내가 불던 애상곡을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력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철인련맹의 늙은이들이라면 내력을 감추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들도 있다지만 나이로 봐서 철인련맹의 철인(哲人)일 리도 없다. 환우회에서 무공이 없는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내가 무당의 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이렇듯 대하는 걸 보면 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조차 없다.

한데 그의 갑자기 머리 속으로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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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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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짜 의성(醫聖)이 준 기연

 

 

 

보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동안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으로부터 제대로 된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을 전수 받아 내공의 기초를 튼튼하게 이루게 되었다. 역시 혼자 깨우치는 것과 좋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실 소리장도 강용이 주고 간 기공입문법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이 본래 명칭인데 이것은 도가에서 오래 전에 실전한 비전 중의 비전이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깊이 깨우치면 모든 심마(心魔)를 물리치고 번뇌(煩惱)를 소멸하여 다른 무공의 습득을 몇 배 빠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문도가의 비전이라 소리장도 강용같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에게는 전혀 쓰임이 없다. 애초에 태청정명운기법의 이치를 깨우칠 바탕이 못 되기 때문이다.

강용은 이 절세의 비전을 오래 전에 얻어 지니고 있었음에도 거의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용은 막비강의 환심을 사려고 남산의성 악불령의 약전과 함께 준 것인데 이번에는 비급도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깨우친 막비강은 시야가 확 트여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했던 무학의 이론을 단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남산의성은 막비강이 예상보다 빨리 내공심법의 기초를 확립하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각가지 의술과 해독술, 그리고 기문진법과 약물로 용모와 음성을 바꾸는 방법등도 가르쳐 주었다.

소리장도 강용이 막비강에게 주었던 역용환도 사실 남산의성의 것이었다. 그자는 훔친 것으로 생색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막비강과 남산의성 악불령 사이에 사제지간의 명분은 없다.

하지만 악불령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깨우치는 막비강의 빼어난 자질과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아! 지금까지의 네 무공도 보통 고수에게는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제 기연으로 태청정명운기법까지 깨우쳤으니 장래 너의 무공방면의 성취는 누구보다도 빠른 진보가 있을 것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노부는 강용이 무덤을 도굴하다 죽는 것을 구경하러 가야겠으니 이만 헤어지자꾸나. 대신 네게 백독(白毒)을 피할 수 있는 천오주(天蜈珠)를 한 알 주겠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자.]

막비강은 헤어지는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자기 혼자 단독으로 청구단서를 찾아야 하므로 할 수 없이 남산의성 악불령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다시 가을이 되었다.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본의 아니게 뛰쳐나와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어언 일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일년 동안 막비강은 세상에 알려진 큰 묘비라면 거의 모두 찾아가 파헤쳤다. 심지어는 장안(長安) 대안탑(大雁塔) 옆의 고비(古碑), 낙양(洛陽) 망산(邙山)의 황릉(皇陵) 등 파헤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헛수고만 했으며 비급은커녕 비급 닮은 것도 없었다.

그는 내심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혹시 큰 비석이란 어떤 곳의 지명이 아닐까?)

만약 큰 비석이란 것이 실제 비석이 아니라 어딘가의 지명이라면 막비강은 지난 일년의 세월을 괜히 무덤만 파헤치며 보낸 결과가 된다.

그나마 그는 일년 동안 쉬지 않고 무예를 연마하여 내공, 장력, 검법 등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산간에서 지냈기 때문에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남긴 은자와 진주를 사용하지 않고 절약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

 

낙양에서 가장 큰 주루인 회빈루(會賓樓)는 오늘도 많은 주객들로 왁자하니 시끄러웠다.

이 회빈루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 약관이 안된 미목이 청수하며 붉은 경장을 입은 소년이 홀로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들어 보시오! 나는 이번에 표물을 강남에 호송하고 오던 도중에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을 들었소.]

문득 한쪽 자리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음성이 말했다.

[무슨 소식인지 말해 보시오.]

다른 사람이 재촉하자 처음에 말을 연 사람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세 가주들이 얼마 전 갑자기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더군요.]

[그래, 비급은 찾았답니까?]

[찾았으면야 무슨 말이 있겠소? 그들은 조상의 유골까지 휘적이며 보름간 소란을 피웠는데 결국 어떤 노인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한마디하니 다시 무덤을 원상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더군요.]

[핫하하...!]

주객들은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일이 비록 괴이하지만 근래 이 주위에서 발생한 일보다는 이상하지 않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소?]

[낙양에서 멀지 않은 북망산 일대에 있는 오래된 무덤의 묘비 중 비교적 큰 묘비는 모두 파헤쳐져 있었소.]

[묘비를 훔쳐 팔아 돈을 벌려는 좀도둑의 소행인가 보군.]

[아니오. 흔적으로 보아 그 묘비들은 넘어뜨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세워 두었소. 아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을 것이오.]

[이건 정말 이상하군요.]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 사람은 장사임이 분명하오. 고묘의 묘비는 무게가 적어도 이삼천 근이 되어 한 사람이 그것을 넘어뜨리기도 힘들 텐데 다시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혹시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태평성대에 갑자기 이런 기이한 일이 발생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큰 비석, 대묘비라! 그렇지! 금릉(金陵) 묘화문(妙化門) 밖의 대석비곡(大石碑谷)에 있는 비석은 무게가 십만 근도 넘는데 그자가 왜 그 비석은 파헤치지 않지요?]

순간 주루 구석 자리에 앉아 자작하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번뜩 떴다.

(오호라, 그런 곳에 또 큰 비석이 있었구나! 가르쳐 줘서 고맙소!)

그때 옆 좌석에 앉은 강호 인물 중 한사람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육 형(陸兄)은 허풍을 그만 떠시오! 세상에 그렇게 무거운 비석이 어디 있소?]

[나는 금릉 사람인데 왜 모르겠소?]

처음 말한 사람이 즉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비석은 높이가 십 장이 넘고 넓이는 삼사 장이 되며 두께만도 일 장 가량이나 되오. 그 외에 석향로(石香爐)와 석촉대(石燭臺)도 있는데 그 높이가 이층집 가량이나 되오.]

[웃기지 마시오! 그런 큰 비석이 어디 있단 말이오!]

[못 믿겠으면 직접 가 보면 알 게 아니오. 전설에 의하면 큰 비석은 송나라 때 유백온(劉伯溫)이 우수선(宇手善)의 반란이 두려워 태조(太祖)에게 상소하여 비석으로 진압시켜 나라를 평온하게 하자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조각을 끝낸 후 그 비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옮길 수가 없어 지금도 묘화문과 기린문(麒鱗門) 사이의 계곡에 세워 두어 금릉의 고적(古蹟)이 된 것이오.]

(거짓말은 아닌 듯하구나!)

자작자음하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막비강이었다.

그는 그토록 큰 비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곧 계산을 하고 주루에서 나와 곧장 금릉으로 향했다.

 

***

 

열흘 후, 낙양을 떠난 막비강은 금릉에 도착하여 예의 거대한 비석이 있다는 대석비곡을 찾아갔다.

과연 그곳의 비석은 들은 바대로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높이가 무려 십 장이 넘는 그 비석은 밑 부분이 아직 땅속의 산석(山石)과 맞붙어 있는데 바위와 붙어있는 비석 아랫부분에는 몇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는 구멍마다 남루한 행색의 거지 떼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개방(丐幇)의 화자(化子;거지)들이었다.

우글거리는 거지떼를 본 막비강은 난감해졌다.

(이래서야 뭘 찾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군!)

잠시 궁리를 하던 그는 곧 한 웅큼의 은자를 꺼내 들고 거지 떼에게로 다가갔다.

[이 은자를 당신들에게 줄 테니 이곳을 내게 사흘간만 빌려주시오.]

[뭐야?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와서 남의 기업을 가로채려느냐?]

그러자 돌연 거지들 중 인상이 험악한 놈이 구멍 속에서 뛰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다짜고짜 욕이 날아오자 막비강도 불끈 화가 치밀었다.

[당신들을 강제로 쫓아내려는 게 아니오! 생각이 있으면 사흘간만 빌려주고 싫으면 그만이지 왜 욕을 하시오?]

하지만 흉악한 인상의 거지는 더욱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 갈보 새끼야! 내가 네놈에게 욕을 해서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여길 빌리고 싶으면 니 에미 구멍부터 먼저 나한테 빌려다오!]

그자의 원색적인 욕지거리에 다른 거지들이 왁자하니 웃는다.

순간 막비강은 왈칵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납치 당해 몸을 더럽힌 것을 아는 그인지라 이같은 욕은 참을 수 없는 심한 것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어이쿠! 나 죽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자의 뺨은 당장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터진 입안에선 피와 부러진 이빨이 흘러나온다.

[저놈이 사람을 팬다!]

[치도곤을 내라!]

순간 구멍 속의 거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며 아우성을 쳤다.

(! 귀찮게 되었군!)

막비강은 삽시에 수많은 거지 떼에게 에워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개방의 거지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었다.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방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 방파였다. 하지만 오십 년 전, 개방은 내분으로 인해 남북(南北)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장문인 승계에 불만을 품은 궁신(窮神) 여불초(餘不草)라는 자가 개방의 무리 대부분을 이끌고 강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궁가방(窮家幇)이란 방파를 연 것이다.

그후 강북의 궁가방은 나날이 성세가 불어나 지금은 지난 날의 개방을 대신하여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반면 강남에 남은 정통 개방은 날로 조락하여 이제는 하오문 잡배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방은 여전히 휘하에 수십만 명의 방도를 지닌 거대방파다. 그들과 원한을 맺어 버리면 두고두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막비강이 꺼리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이럴 때는 일단 토끼고 보는 거다!)

파앗!

막비강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거지 떼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저 후레자식이 달아난다!]

[갈보 새끼를 잡아라!]

그런 막비강을 거지들이 아우성 치며 따라왔다.

하지만 그자들의 경공술로 막비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막비강은 삽시에 거지 떼를 떨쳐 버리고 곡구(谷口)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헌데 그가 막 곡구 근처에 서있는 돌로 깍은 거대한 향로(香爐)를 지날 때였다.

[되돌아가라!]

돌연 향로 위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흑영이 득달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한 줄기 강맹한 잠경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급히 일장을 마주쳤다.

퍼펑!

일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급습한 자는 막비강의 강력한 장력에 의해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가더니 허공에서 한바퀴 맴돈 후 바닥에 내려섰다.

그자 역시 거지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이 매우 음독하고 흉폭한 인상이었다. 허리에는 여섯 개의 마대를 차고 있어 그자의 개방에서의 지위가 호법(護法)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년 거지가 막비강을 막아선 사이에 수백명의 거지떼가 그의 뒤에 이르렀다.

[사문(四門)에 용호풍운진(龍虎風雲陣)을 펼쳐라!]

육결(六結)의 마대를 지닌 중년 거지는 뱁새눈을 부릅뜨며 막비강 뒤쪽의 거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거지떼들은 그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게 움직여 막비강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포진이 끝나자 중년의 거지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방의 총타(總舵)에 쳐들어 와 난동을 부리다니! 그렇게 자신 있으면 본 호법의 일초를 더 받아내어 보아라!]

막비강은 방금 전 비록 총망중이었지만 오성(五成) 가량의 공력을 사용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일 장 가량밖에 밀려나지 않자 상대방의 공력도 약하지 않음을 알았다.

게다가 굳이 개방과 적대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지라 막비강은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나는 개방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다만 이 대석비곡을 빌려 몇 명의 친구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이미 귀방의 분타가 되어 있더군요. 아까 귀방의 분이 먼저 욕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출수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귀하는 나를 너무 곤경에 빠뜨리지 마시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막비강이 정중하게 말하자 중년 거지도 안색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의 이름은 곡능천이라고 합니다.]

[곡능천? 이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중년 거지는 이마를 찡그리며 갸웃했다. 개방의 정보력은 아주 빼어나 어지간한 무림인의 신상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약관도 안된 나이에 개방의 호법인 자신을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지닌 젊은 고수의 이름은 언 듯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거지가 얼른 말했다.

[() 호법! 아마도 이 애송이가 혈검산장에서 도망쳐 나온 개 망나니 막비강일 것입니다. 저 놈을 생포하여 막장주에게 인계하면 필시 후한 보상을 줄 것입니다.]

철 호법이라 불린 중년 거지는 막비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아! 너는 사실 혈검산장의 둘째 아들 막비강인데 곡능천이라는 가명을 지어 남의 이목을 속이고 있지?]

철 호법의 말에 막비강은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내 성은 곡가요. 그리고 막비강이 누군지 전혀 모르오.]

철 호법이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네 사부는 누구냐?]

[내게는 사부가 없소.]

[그럼 네 부친은 누구냐?]

그자의 질문에 막비강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지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핫하하....]

거지 떼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한 놈이 조롱을 했다.

[이놈은 이제 보니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잡종이었구나. 그렇다면 아까 내가 한 말이 맞았잖아! 아랫도리를 아무 놈한테나 내돌리는 갈보의 새끼였어!]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자는 바로 그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흉악한 인상의 거지였다.

그자가 또 자신의 어머니를 갈보 운운하자 막비강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그 주둥이 닥치지 않으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그러자 철 호법이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린 녀석아, 여러 말 마라! 네가 본방이 포진한 용호풍운진을 뚫고 나간다면 순순히 놓아주겠다. 하지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타구봉(打狗棒)으로 백 대를 갈긴 다음 너의 부친에게 데려가겠다.]

[좋다. 얼마든지 덤벼 봐라!]

[야앗!]

철 호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타구봉을 휘둘러 왔다. 그러자 사면팔방에서도 무수한 지팡이 그림자가 막비강을 공격해 왔다. 개방이 자랑하는 용호풍운진이 펼쳐진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막비강은 날아드는 타구봉들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비록 겉보기에는 진세가 화려하고 기세등등했지만 정작 타구봉을 휘두르는 자들의 공력은 보잘 것 없어 위협이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휘익!

난무하는 타구봉들을 피해낸 막비강은 다음 순간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을 쭉 뽑아 올려 옆에 선 거대한 석촉대(石燭臺)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의 이같은 경신술에 거지떼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하하! 이걸로 진을 통과한 것으로 합시다.]

호탕하게 외친 막비강은 즉시 석촉대를 뛰어내려 곡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서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이없이 막비강을 놓친 철 호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부득 갈며 뒤쫓아왔다. 다른 거지들도 들개 떼처럼 아우성을 치며 그자의 뒤를 따라온다.

[! 개떼가 따로 없군!]

막비강은 냉소하며 곡구를 향해 줄달음쳤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에 막 세 명의 늙은 거지가 꾸부정한 몸을 이끌고 곡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막비강은 급히 외치며 그 세 늙은 거지의 머리 위를 단숨에 뛰어넘으려 했다.

[쯧쯧! 버릇없는 아해로다! 존장의 머리를 타넘으려 들다니...!]

하지만 혀차는 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인영이 선뜻 막비강 앞으로 날아올랐다.

[비키시오!]

막비강은 다급히 외치며 일장을 후려쳤고 그 인영도 즉시 마주 손을 내밀었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일며 막비강은 온몸이 진탕함을 느끼고 지면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막비강을 저지한 것은 곡구로 들어서던 세 늙은 거지 중 가장 키가 크지만 대신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늙은 거지였다.

막비강을 막아선 세 늙은 거지들이 모두 일곱 개의 포대를 메고 있다.

막비강은 그들이 바로 개방의 장로급 거지들임을 알아보고는 내심 긴장했다.

[흘흘! 우리 금릉삼로(金陵三老)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면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애송아.]

막비강을 가로막은 깡마른 노개가 앞으로 나서며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 비루먹은 늙은이들이 금릉삼로라니...!)

금릉삼로라는 이름에 막비강은 흠칫했다. 그들이 강남개방의 최고원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숫자만 많고 절정고수가 없는 개방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들 금릉삼로는 개방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노개들인 것이다.

상대방이 금릉삼로라는 사실에 내심 긴장했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자칭 삼로 중 한사람이라 하면서 차륜전(車輪戰)의 비열한 수단으로 어린 나를 제압할 생각이오?]

깡마른 거지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나 고죽개(骷竹丐) 학검성(鶴劍城)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스스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으니 상황이 다르다. 대신 우리 세 노화자는 절대 네게 부상을 입히지 않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지 마라!]

고죽개 학검성이란 늙은 거지의 말에 막비강도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겠소.]

학검성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거만한 녀석이구나. 큰소리치지 말고 먼저 손을 써봐라! 노부 앞을 무사히 지나가면 노부가 진 걸로 하겠다!]

이에 막비강은 늙은 거지를 덮쳐 가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하오.]

학검성은 상대방이 갑자기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자 내심 흠칫 놀랐다. 해치지 않고 어떻게 막비강을 제압한단 말인가?

[교활한 녀석 같으니!]

학검성은 눈을 부라리며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그러자 막비강은 어깨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돌연 뚱딴지같은 함성을 질렀다.

[!]

학검성이 어리둥절하여 손을 멈추며 물었다.

[너는 방금 뭐라고 말했느냐?]

쌍방의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지라 절대 정신을 분산시켜선 안 된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옆을 재빨리 통과하며 히히 웃었다.

[코는 제일 미끄러운 곳이라 쉽게 잡히지 않소이다.]

학검성은 몸을 돌려 막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어린 녀석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잘못 하면 오늘 본방이 창피를 당하겠구나.)

꾀를 써서 학검성을 통과한 막비강은 또 다른 늙은 거지 앞에 도착했다. 금릉삼로 중에 가장 풍채가 좋고 인상도 좋은 노개였다.

[죄를 범하겠소이다!]

!

막비강은 외마디 고함과 함께 오른손을 뻗어내는 척하다 갑자기 그 뒤쪽에서 왼손을 불쑥 밀어냈다.

이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일신 무공이 학검성보다 훨씬 고강했다. 그래서 막비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비강이 허초(虛招) 뒤에 실초(實招)를 숨기는 수단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바람에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엉겁결에 막비강의 왼손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지도 못했다.

! !

늙은 거지는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비틀거리며 일 장 밖으로 밀려나갔다.

[이 교활한 애송이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을 통과한 막비강을 뒤에서 덮쳐 왔다.

풍채 좋은 늙은 거지 옆을 지나치던 막비강은 갑자기 등 뒤에서 강맹한 경풍이 뻗어옴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격하려는 늙은 거지를 향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당신은 나를 통과시켜주고도 계속 공격을 하는 겁니까?]

[너는 노부가 미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기습을 했으니 통과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은 지금껏 준비하지 않고 뭐 했소?]

막비강의 그 말에 늙은 거지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범 형(范兄)! 통과시키시오. 그 망나니를 나 지당개(地堂丐) 이건영(李建英)이 혼내 주겠소!]

금릉삼로중 마지막 한 사람인 땅딸막한 늙은 거지가 나서며 말했다. 키가 작은 데가 살이 쪄서 온몸이 둥글 둥글한 이 노인의 눈빛은 새파란 빛을 띠고 있다.

(개방은 용독(用毒)에도 뛰어나다더니 이 늙은 거지는 독공(毒功)을 익혔구나!)

막비강은 지당개 이건영이란 땅딸보 거지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서 그가 일종의 독공을 연마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데다가 남산의성 악불령이 준 천오주도 갖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음독한 독을 쓴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혼내진 말게!]

범씨 성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물러서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은연중에 막비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그런 범씨 성의 노개에게 호감이 갔으나 내색하지 않고 오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당신은 아무 걱정말고 갖고 있는 재주를 다 펼쳐보시오! 내 얼마든지 상대해주겠소!]

막비강의 광오한 말에 지당개 이건영의 파란 눈빛에 살기가 더해졌다.

[애송이 놈! 스스로 자초한 화니 노부를 탓하지 말아라!]

지당개는 말하면서 양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의 열 손가락이 모두 검프르게 변해있었다.

(독공이다!)

겉으로는 큰 소리를 쳤지만 막비강은 내심 긴장했다. 독공은 처음 상대해보는 때문이다.

장내에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비강과 지당개 이건영은 서로를 노려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칫 먼저 움직였다가는 상대방의 격렬한 반격을 받을까 꺼려해서였다.

헌데 그 일촉즉발이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이장로!]

화라락!

한소리 호통과 함께 계곡 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어왔다.

[방주(幇主)를 뵙소!]

나타난 인물의 뇌성 같은 고함 소리를 들은 거지들은 즉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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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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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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