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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깃발

 

 

 

비상사태가 끝났을 때 영소 어머니가 말했다.

 

"영소가 올 때까지 여기 있거라.“

"영소는 물 가지러 갔어요. 내가 물 있는 곳으로 가면 안돼요?”

 

대성이 항의했다.

하지만 영소 어머니는 무시해버리고는 하녀들을 다 데리고 나갔다.

피난처인 밀실에는 대성 혼자 남게 되었다.

영소 어머니도 환골탈태한 까까머리 대성의 귀여워진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 다 자란 사내아이의 알몸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딸이 하는 꼴을 보면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다.

영소 나이 열다섯,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때다.

이럴 때 실수라도 있으면 몸 고생 마음 고생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달리 보면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고 품을 수 있는 때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감정을 부부가 함께 공유하고 때로 서로 꺼내놓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여느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딸이 그냥 이대로 쭉 탈 없이 대성하고 혼인해서 속 썩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거 빨리 시집 보내버려야 속을 덜 썩이지.“

 

딸이 한 엉뚱한 소리들 때문에 속이 상한 영소 어머니는 하녀들과 가면서도 중얼중얼 딸 욕을 하고 있었다.

 

"자! 공부 계속하자.”

 

혼자가 되자 란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막에 바로 비쳐지기 때문에 남이 볼 수는 없고 오직 대성만 볼 수 있다.

만약에 대성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동공 안에 거꾸로 선 란선생을 볼 가능성은 있었다.

 

"어떻게 해도 파괴자는 와. 너에게 이미 깃발이 꽂혀 있으니까.“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자기 장딴지를 톡톡 친다.

그게 묘하게 눈을 사로잡고 보기에 좋다.

 

"요괴를 파괴자라 하는 거지요?"

 

아주 어려진 대성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한테 벌써 길들여져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런 셈이지. 다른 것들도 있긴 하지만.”

 

란 선생은 작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도 빠른 속도로 지식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체계화하고 있었다.

대성을 통해서 다운로드 된 이 세계의 비밀은 사라지지 않은 채 대성의 몸에 남아있다.

란 선생은 다운로드 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요괴들, 아니 그 중에 파괴자들은 깃발이 꽂힌 대상을 찾아서 파괴하고 깃발을 회수하는 일을 해. 깃발을 많이 모을 수록 더 강한 요괴가 되는 거지.“

 

대성이 물었다.

 

"요괴들은 어떻게 생겨나요? 처음부터 있던 건가요?"

"그건 너무 많은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야! 배울 때 궁금한 것부터 파고드는 건 시간이 많을 때나 하는 거고. 질문할 때는 손 먼저 들고 하라고 했잖아!"

 

란 선생이 지시봉으로 대성의 손등을 탁 때렸다.

실제로 란 선생은 대성의 머릿속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대성은 손등을 진짜 맞은 것과 똑 같은 따끔함을 느꼈다.

 

"놀라긴. 감각을 통제하는 기능은 원래 머릿속에 있는 거야. 나는 인공지능이지만 효과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학생의 감각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거고.”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생글거리며 우쭐거렸다.

 

"똑똑한 학생이라면 미리 알아차렸어야지. 네 몸을 탈태환골 시킨 게 바로 난데.“

 

원래라면 강습용 인공지능에 사용자의 신체를 바꾸는 기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란 선생의 말대로 모든 게 가능했다.

이 세상은 견고한 형식이 있기는 했지만 변화를 만드는 확고한 방식 또한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은 데이터의 변형을 통한 응용과 활용에 달린 때문이다.

인공지능인 란 선생은 어느덧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떠나버린 자들이 남긴 로그 파일과 대성의 몸을 이루는, 이 세상을 구축한 비밀이기도 한 자료들을 학습하면 자기를 갱신한 것이다.

이는 떠나간 자들이 대성의 비어있는 속을 란 선생의 라이브러리로 채우기 위해서 급하게 우겨 넣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란 선생은 무수한 경쟁자들을 뚫고 살아남아 끝까지 존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록 "강습용" 인공지능이었지만,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은 "뛰어난 학습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란 선생은 강사나 선생들이 생존을 위해 줄곧 쓰는 방법인, 자기도 금방 알았으면서 옛날부터 알았던 것처럼 시침 떼는 게 몸에 배여 있었다.

대성에게는 란 선생이 대사형 조성일 보다 더 많이, 뭐든 다 알고 다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들었다.

영소만큼은 아니지만 싸가지 없는 대성이 그렇게 하는 건 놀랄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성이 아주 순둥이가 되지는 못한다.

자기 자랑에 도취된 란 선생 대신에 자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눈에 안 보이는 깃발이 꽂혀 있는데 요괴들은 그걸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저를 죽여서 깃발을 가져가려 하는 거라는 거 잖아요. 가져가서 더 강한 요괴가 되려고.”

"그렇지.“

"그러니까 깃발을 없애버리면 되는데, 깃발은 선생님도 못 없애고. 제 생각에는 요괴하고 깃발이 관계가 있으니까 깃발을 알아서 없애려면 요괴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였던 거지요.”

"You don’t need to explain it. 네가 설명할 필요 없어.“

 

란 선생은 마음이 상했는지 톡 쏘았다.

 

"내가 그렇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나중에 보면 알아!"

 

한 마디 따끔하게 하고 란 선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이 자식도 나하고 다를 게 없지. 여기 캐릭터들은 다 인공지능이니까. 특히 이 녀석은 캐릭터 제한을 벗어났잖아.)

 

제 할 말을 못하면 대성이 아니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안하면 영소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주세요.”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알고 있는 거 맞지요?"

 

란 선생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 올리는 시늉을 하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지켜봐야지. 그들이 너를 풍림원에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나쯤은 마련된 대비책이 있을 거야.“

 

대성은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란 선생도 조금 켕기는 듯이 자기 방어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한 거 아니잖아. 탈태환골 시켜 놓았으니까. 좀 기다려봐.”

 

조용히 온 영소가 밀실로 들어올 때는 누가 볼 새라 후다닥 들어왔다.

혹시 따라온 사람이 있을까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보기도 했다.

 

"물은?"

 

발가벗은 채 변색된 얇은 이불로 몸을 감고 앉아있던 대성이 물었다.

영소는 물 가지러 갔던 거였다.

깜박 잊어버렸던 거지만 영소는 이불을 대성에게 덮어씌우며 말했다.

 

"참아! 그럴 틈 없어.“

"왜? 목마른데. 배도 고프고.”

"아! 좀 참아! 그런 게 있으니까!"

 

영소는 목소리를 낮추고 고함치는 신기한 재주를 발휘했다.

영소는 많이 배워서 묘한 재주가 많다.

대성은 마주 쏘아부치려다가 청혼했던 게 생각났다.

화를 꿀꺽 삼키고 어른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소도 조금 누그러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도망치자. 내가 사고를 좀 크게 친 거 같아.“

 

대성은 풍림원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가만히 있어도 다 듣는다.

어떤 때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진다.

이것도 이제는 떠나버린 "그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서 대성에게 부여한 기능이다.

밖에서 일어나던 소동을 소리로는 들었기 때문에, 대성은 갸웃했다.

 

"요괴 도망친 거? 대사형은 별 걱정 안하는 거 같던데.”

 

영소가 신경질을 냈다.

 

"내가 쪽팔린단 말이야. 너 때문에 쪽 다 깠다고. 눈치없게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돼?"

 

대성이 참지 못하고 마주 소리쳤다.

 

"못 들었어? 지금은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고 못 들어온다는데 가기는 어딜 가?"

 

영소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넌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지?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 지 알아?"

"난 안 쪽팔리는 줄 알아? 나도 쪽팔려! 네가 내거 요만하다고 사람들한테 말해버렸잖아.“

"내가 뭐 거짓말 했어?"

 

영소가 톡 쏘고는 대성을 답싹 들어서 품에 안았다.

대성은 영소에게 안기자 얌전해졌다.

 

"어디로 갈려고?"

 

대성이 묻자 영소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방앗간 뒤에. 거기 가서 물 배터지게 마셔.”

 

대성이 동의했다.

풍림원에는 방앗간이 하나 밖에 없다.

방앗간 있는 곳이 풍림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방앗간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수가 방앗간의 물레를 돌리며 항상 탕! 탕! 소리를 낸다.

방아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꿍! 떡! 하는데, 떡을 좋아하는 대성은 그 소리가 떡! 떡! 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대성과 영소의 비밀 장소는 폭포수 뒤에 있었다.

들어갈 때 물에 흠뻑 젖기는 하지만, 폭포수 뒤에는 기어서 들어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입구를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좀 넓어지고, 낮에는 폭포쪽 입구가 밝기 때문에 깜깜하지도 않았다.

딱 키득대기 좋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영소가 좋아하던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것이 여기서 놀고 돌아가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영소는 이 동굴로 가기는 했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장소로서는 멋진 곳이지만 그저 어쩌다 마음이 동할 때만 대성과 함께 갔다.

마음이 동할 때라는 것도 비밀이긴 했다.

어른들이 방앗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싶거나, 간혹 아이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때였다.

 

"좋은 생각이야.“

 

대성이 영소의 귀에 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아이 씨!"

 

영소가 파리를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영소는 좀 덜 쪽팔릴 때까지 눈에 안 띄게 거기서 숨어 있다가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성이 생각하기에도 폭포수 동굴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방앗간에는 떡을 자주하니까 숨어 있어도 먹을 것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

 

노노인과 전삼자 등이 대성의 상태를 보기 위해 왔을 때, 대성이 있던 곳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튀었소. 탈퇴환골한 거 구경 좀 하려 했더니.”

"자네는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고개를 기웃거리던 노노인이 아쉬워서 전삼자에게 묻는다.

 

"좀 참으시오. 잠잠해지면 알아서 오겠지.“

 

"요괴가 돌아다니는 데 걱정도 되지 않나?"

 

노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전삼자가 딴청을 부렸다.

 

"돌아다닌다니 말이 좀 과하오. 숨어 다닐지는 모르겠소만. 풍림원 안에서 요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자네도 보고 싶다며.“

"나는 뒷감당하기 싫소. 영소가 사고 치고 도망갔는데 찾아봤자 원망 들을 일 밖에 없소.”

 

전삼자는 완강히 버텼다.

노노인이 화를 냈다.

 

"애들이 요괴하고 마주치면 큰 일 아닌가?"

 

전삼자는 못들은 척했다.

그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노노인이 대답을 기다리면서 계속 노려보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조별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따지려면 조별장한테 따지시오.“

 

조별장은 조성일이다.

조성일은 풍림원을 총괄하지만 느슨한 풍림원에는 특별한 직책이 없다.

이전 군 세력이 주축인 풍림원의 위계나 조직이 여타 문파보다 허술하다는 건 또 역설적이다.

전삼자와 노노인도 일반 무림문파라면 원로에 해당하겠지만 그냥 전아저씨, 노노인일 뿐이다.

다만 조성일은 풍림원의 이인자이기에 예전 군에 있을 때 직급인 별장이었으니 간혹 그렇게 조별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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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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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요괴 묘진

 

 

 

조금 전, 밖에서는 요괴 묘진과 대처하고 있을 때였다.

대성은 건초 타는 냄새를 맡았다.

이불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냄새였다.

영소가 연신 물을 끼얹었지만 물은 금방 증기로 변해서 사라졌다.

영소는 답답해서 폴폴 뛰었다.

대성을 물속에 넣고 싶었으나 비상사태라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들이 있는 피신처에는 욕조나 몸을 담글 만한 곳이 없었다.

 

"I’m so hot. 나 뜨거운 남자야.”

 

대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유쾌함을 회복한 남자의 시큼털털한 소리였다.

영소는 걱정이 되던 중에도 대성이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자 벌컥 소리쳤다.

 

"그래 이자씩아! 하도 뜨거워서 쪼글 감자도 다 익어버리겠다.“

 

대성이 작은 소리로 겸연쩍게 대꾸했다.

 

"That was supposed to be funny.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야.”

 

가까이 있던 영소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넌 말을 해도 어찌 그런 외설스런 말을...

Is this the end of being coy? 이제 내숭은 끝난 거냐?"

 

영소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우린 가끔 이런 소리도 해요.“

 

어머니로서는 질겁할 소리다.

영소는 대성에게 안달을 부렸다.

 

"그 좋은 머리로 빨리 어떻게 해봐. 탈퇴환골이고 뭐고 타죽겠다.”

 

대성이 여전히 나른하게 말했다.

 

"식힐 필요 없어. 도자기 굽듯이 내 몸이 구워지고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렇게 뜨거운데. 너 목소리도 바싹 구운 과자 같단 말이야.”

 

영소는 제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폴폴 뛰었다.

피신처에는 더 뿌릴 물도 당장 없었다.

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변색되었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 밑으로 민둥민둥 반짝반짝하는 맨머리가 보였다.

영소가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내우외환 설상가상이다. 너는 아프지 적은 침입했지. 못 생긴 게 이젠 대머리야.“

 

때마침 대성의 몸에서 뚜두둑 하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영소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대성을 빤히 보았다.

마치 허리가 빠진 건 아니지 하고 묻는 듯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금 크면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 간에 수작질 하게 되어 있다.

대성과 영소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성인 남녀들로부터 줏어들은 시털궂은 소리를 뜻도 모르면서 많이 주고 받기는 받았다.

묘한 재미가 있고 간질거리거나 때로는 조그마한 통쾌함이나 희미한 희열도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주고 받는 건 말 그대로 둘 만의 비밀이었다.

아이들은 자제하지는 못해도 무슨 짓을 하면 어른들한테 혼나는지 본능적으로 아니까.

무공이 늘지도 않고, 늘 싸우면서, 골이 깨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런 짓거리는 해왔던 것이다.

대성과 영소는 갑자기 둘이 멀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결국은 그렇고 그런 가시버시 사이가 되고 말 관계였다.

그저 시간 문제였을 뿐.

대성이 눈치로 짐작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뼈가 제자리 잡는 거야. 병신 되는 거 아니야.”

"I’m pathetic 에고... 내 팔자야.“

 

영소가 대성의 팔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곤 후후 입김을 불었다.

영소의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팔에 대고 부니?"

"엄만, 그럼 알몸인데 팔 말고 내가 어디에 대고 불어요?. 조신치 못하게.”

 

영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가 어머니한테 어깨를 찰싹 두들겨 맞았다.

한데 대성의 팔이 점점 짧아지고 가늘어지고 있었다.

대성의 모든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영소가 참을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렸다.

영소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속 긁는 소리를 했다.

 

"탈태환골이 아니라 반노환동인가? 늙지도 않았는데.“

 

대성도 자기 몸이 줄어드는 데는 몹시 당황했다.

대성의 몸은 내구성과 재질을 바꾸면서 쓸모없는 것을 태워서 배출해버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몸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대성도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맨숭맨숭한 머리조차 줄어드는 중이었다.

유쾌해진 대성도 더는 유쾌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잘 먹으면 다시 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하며 영소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에서는 대성에게만 보이는 란 선생이 자기가 만든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to make matters worse 설상가상으로 한심스럽다는 듯이 대성을 보았다.

 

- 대충 알기는 했다만 너 몹시 피곤하게 사는구나. 인간들은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 쯧쯔.

- 잘 모르면서 말하지 마세요.

 

대성은 란 선생에게 화를 냈다.

란 선생이 아랑곳하지 않고 조언을 해주었다.

 

- Do as I say 시키는 대로 해봐.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라고 해봐.

 

그 말은 바로 약이 되었다.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야.“

 

대성은 란 선생이 하라는 대로 말했다.

 

"정말?"

 

영소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I can assure you 확실해.”

 

대성이 엄숙하게 답했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라니까.

"I am just double checking. 그냥 재확인 하는 거야.

 

영소는 한숨을 내쉬고 갑자기 철든 소리를 했다.

 

"그냥 다시 자라기만 해. 미남 안 되어도 괜찮아.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제 눈에 안경이라잖아.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더 나아.”

"Look at you all grown up. 너 철 다 들었구나.“

 

대성이 낄낄거렸다.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그들을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 But this was not the time, guys. 짜식들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물론 그래도 세상은 이렇게 해야 돌아간다.

내일 망하든 말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애들은 애들답게 놀고, 각자 제 할 짓을 하는 중에 역사는 굴러간다.

그렇게 인간의 서사는 만들어진다.

Don’t be so serious. 너무 심각할 것 없다.

그런 세상이 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거나 움직이는 자들이 대성을 끝장내려 한다.

 

대성은 말 그대로 3척 동자가 되고 나서 몸이 식기 시작했다.

빡빡머리는 파르라니하고 피부는 반투명하며 손을 대면 찰떡처럼 쫀득거렸다.

잡아당기면 쭉 늘어지기도 잘했다.

 

"Don’t do that again. 다시는 하지마!"

 

대성이 질색했다.

하지만 영소는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그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몇 번이나 당겼다.

잘 키우면 정말 제일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피부가 좋고 몽실몽실해 보이는 어린아이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또 탈태환골 처음 해보는 주제에 대성이 급해서 뻥을 쳤을 가능성도 크다.

영악한 영소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단지 믿고 싶어한다.

대성이 영소의 손을 뿌려치는데 그만 이불이 함께 쭉 벗겨지고 말았다.

It was an accident. 사고였다.

다 봤다.

영소는 대성이 제일 잘생긴 남자가 되기는 커녕 과연 자라기는 자랄까 싶은 의심에 앞이 캄캄해졌다.

대성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몸은 이미 어른과 비슷했었다.

그랬던 몸이 3척 동자로 줄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다.

영소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성은 그때도 여전히 어린애다.

그리고 풍림원의 비상사태가 종료되었다.

반면 영소의 비상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이성 문제 외에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비정상이니까.

 

(또 그리고, 이쯤에서 이미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just to be safe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데, 나는 사고의 흐름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서술이 아니라 글쓴이다.

나는 이 석화세계, 천개의 에피소드 또는 천개의 검 이야기를 쓰지만 내 상상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다.

읽는 이는 이 이야기로 각자의 상상을 만들어 내가 쓰지 않은 부분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야기의 완결성? 코난 도일도 대충 마무리하고 독자한테 끝을 넘겨버린 셜록홈즈 편도 있지 않은가.

나와 읽는 이의 차이점은 오직 나는 지면에 상상을 입히고 읽는이는 자기 마음에 그린다는 것뿐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나 엉터리 같은 게 보이면 읽는 분 마음 가는 대로, 그 마음대로가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Go easy on me 나한테 좀 관대해주시라.

그래야 쓰는 나도 편하고 읽는 그대들도 편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소설에 서문이 없는 이유기도 하다.

서문만 아니라 이야기의 참여자로서 틈나면 내가 비집고 와서 주절거리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지 말고 함께 놀자.

나는 모난 돌 같은 대성과 영사 이야기 외에도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때로는 장막 뒤에서, 때로는 무대의 전면에서.

그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누나, 언니가 있었다면 사실 그들도 이렇게 왔다 갔다 했을 거다.

Who wouldn’t do this? 누가 안 이럴까.

정으로 이어져 있거나 잇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마 요괴도 그럴 걸?)

 

***

 

이미 밀실에 있을 때부터 작정했었다.

영소는 아예 도륙을 내버리겠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묘진에게 달려갔다.

아마 자기가 홧김에 불쑥 내뱉어버린 말의 진짜 의미를 생각을 시간을 남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숨어 있었을 거다.

It was probably for the best. 그게 상황을 모면하는 최선이었으니까.

영소가 못된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중에 마구 욕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나쁜 년, 누가 뭐 어째? 주둥이를 확! 가랑이를 확!"

 

전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하는 욕은 다 할 수 있다.

감히 요괴 묘진이 대성을 그냥 두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 때문이다.

 

"그만둬!"

 

조성일 소리쳤지만 영소는 이미 귀가 먹었다.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치마가 쓸려 내려오기 전에 묘진의 얼굴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대성과 대련할 때 막판에 겁을 주고 승리를 확정하는 영소 만의 의식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대성의 머리를 직접 박살내지는 않았다.

퍽!

눈이 크고 입술이 얇은 요괴 묘진의 머리에 철퇴가 떨어지는 듯,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깝...”

 

분한 표정을 짓던 묘진이 몸을 두어번 털썩 거린 후에 축 늘어졌다.

 

"어?"

 

영소는 한 번 더 묘진을 밟으려다가 기겁했다.

묘진의 시체가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금선탈각이라는 건가?"

 

영소는 중얼거리며, 누구 알려줄 사람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금선탈각은 껍질 벗고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아저씨나 노노인이 마저도 못 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소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과 자기가 좀 큰 사고를 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 씨! 물 떠러 나왔다가 이게 뭐야!"

 

투덜대며 아버지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종무는 무덤덤해 보였다. 대체로 항상 그런 표정이지만.

조성일이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사부님, 골치아프게 되었습니다.“

 

이종무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졌더니 큰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청이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가 도망쳤습니까? 이 요괴는 많이 별난 모양이군요.”

"목숨이 여러 개인 요괴였어. 이런 건 보통 죽으면서 달아나지.“

 

사부가 귀뜸만 해줬어도 놓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부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조성일은 원래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원망도 못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느라 잠시 눈만 찌푸렸다.

연청이 걱정했다.

 

"그럼 큰 일 아닙니까? 밖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조성일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별의 그물에 잡힌 뇌정풍운멸살진의 흰 구름은 여전히 은은한 우레소리를 내면서 풍림원을 맴돌고 있었다.

 

"차라리 그러면 좋지. 별의 그물에 붙잡힐 테니까. 안에 숨었을 테니까 잘 찾아봐야지.“

 

조성일한테 한소리 들을까 싶어서 영소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

요괴가 달아났지만 속은 좀 풀렸다.

무책임하지만 사고 수습은 원래 어른들의 몫이다.

이는 책임감과 다르다.

사고를 치고 나서 아이들이 할 일이란 어른들한테 혼나고 반성하는 것뿐이다.

함부로 제가 친 사고를 직접 해결하려다가는 정말 어른들도 수습 불가능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자기는 자기대로 망가질 수 있다.

어른스런 아이는 좋지 않다.

아이가 어른스럽기를 기대하는 어른은 어리석은,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다.

 

"영소나 못 달아나게 잡아놔.”

조성일이 말했을 때는 벌써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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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상인의 전쟁

 

 

 

대문 밖 구름 속에서 고양이 머리 같아 보이는 가죽 가면을 쓴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가죽옷을 입고 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귀는 하얗거나 볼그스름했고 긴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출렁거렸다.

 

"Eblis! 요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긁적거리던 조성일이 여자를 힐끗 보고는 이종무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보자마자 요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림원의 젊은 무사들만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놀란다.

노노인이 혀를 찼다.

 

"군진을 쓰기에 누군가 했네.”

 

연청이 물었다.

 

"요즘은 요괴도 군진을 씁니까?"

 

노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부터 그랬어. 경우가 드물긴 해도. 보통 요괴들은 이렇게 백주 대낮에 잘 움직이지도 않거던.”

 

고양이 머리가 걸어오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누구보고 요괴래. 신성한 파괴자님더러. 자!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놈 내놔.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이종무가 가까이 있는 전아저씨, 전삼자에게 물었다.

 

"외모에 자신이 좀 있는 거 같지?"

"Probably, I suppose so. 그런 거 같습니다. 지모는 좀 떨어지는가 봅니다. 고양이 주제에 호랑이 굴이니 뭐니 하더니 불쑥 들어오는군요.”

 

전삼자는 태연자약하게 창날을 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종무가 이번에는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는 누구 보라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냐?"

"요괴가 예쁘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뭔가를 적고 그리면서 두드리던 조성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 예쁘면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기 좋은데 척 하는 게 다 속이는 거지. 예쁘면 속이기 좋기 때문에 저 요괴가 예쁜 거야.”

 

전삼자는 웃었다.

조성일은 요괴가 예쁜 척하듯이 바쁜 척하며 반쯤만 수긍하며 머리를 반만 끄덕였다.

영소의 이상한 말버릇은 분명히 사부 이종무의 젊은 시절 말버릇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종무는 조성일의 어깨를 툭 친후에 고양이 요괴에게로 물었다.

 

"이보게 처자. 이름이 뭔가?"

"나는 파괴자 묘진이다. 빨리 그놈이나 데려와.”

 

노노인이 중얼거렸다.

 

"장군님 앞에서 파괴자는 개뿔.”

 

이종무가 물었다.

 

"뇌정멸운살진은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지?"

 

"흥. 알긴 아는구나.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다.”

"Too bad, too bad. 아깝겠다.”

 

이종무는 성큼 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길어서 보통으로 걷는데도 보통 사람이 뛰는 듯 빠르다.

묘진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종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예쁘게 죽는 모습을 그놈들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이종무에게서는 어떤 기세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대처럼 큰 사람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싹함을 느낀 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이종무가 물었다.

 

"준비는?"

"Hang in there.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조성일이 대답했다.

 

"버티긴 뭘...”

 

요괴 묘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조성일이 말했다.

 

"잡았습니다. 별의 그물로 뇌정멸운살진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물로... 진을 잡아?"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던 요괴 묘진의 가늘고 날렵한 다리가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의 의미는 묘진이 부리는 구름속의 벼락처럼 자기의 혼을 꿰뚫었다.

 

"전선의 마왕 비상인!"

 

놀람과 충격, 두려움으로 요괴 묘진의 맥이 풀어져 버렸다.

이종무는 천천히 걸어가 묘진의 고양이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묘진은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아나지도 못했다.

몸 주변에서 작은 빛이 연이어서 명멸할 뿐이었다.

이종무의 무공, 별의 그물에 이미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성일이 뇌정풍운멸살진을 붙잡은 것도 별의 그물이고 이종무가 요괴 묘진을 결박한 것도 별의 그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성일은 담장에 설치된 자기의 진을 이용했고 이종무는 직접 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 예전 전쟁하던 시절, 적의 군진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학살했던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의 그물이이다.

전삼자가 혀를 찼다.

 

"I told you.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우습군요. 힘도 없는 장수가 앞장서다니. 요괴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가 봅니다.”

 

연청이 가소로운 듯이 내뱉었다.

이종무가 손을 높이 들자 묘진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아귀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Do your worst. 네 멋대로 굴어봐.”

 

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에게 아무 겁없이 달려든 댓가였다.

 

이십 여 년 전, 전쟁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 년을 끌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끝이 났었다.

전쟁을 한 세 나라의 군사는 수를 합치면 1백 20만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차가 6만대가 넘었다.

그러나 피해는 오직 두 나라에서만 났다.

한 나라는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25만 군사 중에서 오직 7만 명만 실제 전투에 참여 했었다.

그렇게 하고도 전세는 3개월 만에 승리로 굳어졌다.

나머지 9개월은 그냥 질질 끌다가 별 이유도 없이 5만 명을 잃고 the war finally ended 마침내 종전했다.

그 중심에는 전쟁 중에 물러나고 잠적해버린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 장군은 아군에게는 전장의 신이라 불렸고 적들에게는 전선의 마왕이라고 불렸다.

병법에 통달했던 그는 전장에서 홀연히 자기만의 무공을 깨달았다.

그 무공은 무림의 어떤 무공과도 달라서 누군가는 도술이라 불렀다.

병사를 부리는 그 장군의 용인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했다.

그의 병사들은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물을 가리키면 물로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망설임없이 불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설혹 그가 불로 뛰어들게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불타죽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용인한 irregular 비상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자들은 그 장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파괴자도 그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

그 장군, 전선의 마왕, 전장의 신, 전쟁의 신이라 불린 사람이 눈앞의 장대 같은 사람이었다.

 

"Are you tryna(trying to) get rid of me? 저를 죽을 건가요?"

 

묘진은 체념하고 멍해진 눈으로 물었다.

구름 속에 있는 부하들을 먼저 투입했으면 비상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Too late to regret.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고양이 주제에 호기롭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여야지. It’s better this way. 그게 더 나아.”

 

이종무가 웃음을 지었다.

묘진이 태도를 바꿔 도리질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비상인,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어요. 저를 살려주세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의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노노인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쯔, 그냥 체념하고 죽지. 그럴 거 같더만... 이봐 처자. 죽고 나면 그런 걱정 없어져. 누구 걱정 뭔 일 때문에 못 죽는다는 말은 다 죽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야. We’ll see 너도 늙고 나면 알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묘진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꾸어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협박했다.

이종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웃은 후에 전삼자에게 묘진을 던져주었다.

 

"가둬놔.“

"에이, 이거 원...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요괴는 예측불허라서 장군님 아닌 저희들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군님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성일이 이종무를 대신해서 전삼자에게 말했다.

노노인이 웃었다.

 

"에잉. 태산명동 서일필,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놀라서 이게 뭔 소동이야. 그나저나 장군님. 구름이 우리 풍림원을 딱 에워싸고 있으니 꽤 그럴듯 하게 보입니다.”

 

조성일이 이종무의 허락을 받아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묘진은 전삼자에게 끌려가면서 또 태도를 바꿔 마지막으로 이종무에게 소리쳤다.

 

"비상인. 나를 죽이더라도 그놈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놈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Nebby lady (bitch). 오지랍 넓은 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뭐 누굴 어째?"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영소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들어서 묘진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발로 차기는 했지만 바람의 검이었고 구결은 대성이 만든 구결이었다.

머리를 차인 묘진은 몸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지지도 않았고 목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헝겁인형 같았다.

 

"질기네 저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영소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전삼자는 영소가 달려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라서 묘진을 빼돌리지 못했다.

이종무는 영소가 요괴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는 듯이 보였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아이들과 여자들이 담장 밖과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구름 속에 요괴가 가득하다는 것을 영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이든 여자들이 "참, 장관이야" 한다.

 

“대성은?"

 

노노인이 영소에게 물었다.

늘 붙어 있는 영소가 나온 걸 보면 대성이 이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성이 탈퇴환골하는 모습을 요괴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영소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직접 가서 봐요. 이제 요만 해졌으니까.

 

영소가 자기 새끼손가락의 끝 두 마디만 들어 보였다.

연청이 놀라며 물었다.

 

"뭐가? 대성이?"

 

영소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슬그머니, 누가 들어도 수상한 소리를 했다.

 

"발가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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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마왕>이란 제목으로도 연재했던 <(무공천재의) 무림경영>의 네이버 연재가 확정되었습니다.

12월 8일에 연재가 시작됩니다.

네이버는 4-5권 분량의 작품을 원하고 있고...

무림경영은 최소 10권 짜리라 걱정이었는데...

1부 4권, 2부 4권, 3부 4권등으로 연재가 가능해졌습니다.

2부도 2권 정도는 진행이 되었고...

내년에 3부 정도로 마무리를 지을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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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래된 미래

 

 

 

꿈속에서 지난 삼년의 고통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수시로 엄습하는 두통은 대성을 영혼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실제로는 칠푼이가 된 듯하게 만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대성은 울컥 받쳐 올랐다.

 

“X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Stop it 그만!"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에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힘든 순간까지 반복해서 되새길 필요는 없지. 지나치게 가혹해.

Don’t beat up yourself 자책하지도 마.

인생은 원래 잘한 것과 잘못한 걸로 채워지는 그릇이니까.

 

여전히 꿈속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으로 보였다.

검정색의 줄이 있는 별난 상의와 그보다 더 별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윤이 나는 검정색인데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장식이 달렸다.

총각 더벅머리 비슷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한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다.

한 손에는 책도 아닌데 빳빳해 보이는 흰 종이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종이에는 대성이 본적 있는 낯선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What’s your name again 이름이 뭐라고?"

 

영소보다 더 예쁜 그 여자가 물었다.

대성은 다시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는가 싶어서 섬뜩했다.

 

"누구세요?"

 

대성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예의하고는... 선생이 물으면 대답이나 할 거지. 누가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인사하자는 거지.

 

대성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짜식아.

To be or not to be on game: that is the question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라고.

까불 때가 아니란 말이야.

 

대성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찝찝함을 안고서 대답했다.

 

"진대성.

"난 파아란 버전 96.9, '오래된 미래'의 언어강습 인공지능이야.

 

여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선생님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인공지능과 언어강습, 버전,

대성이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쭈뼛거렸다.

손이 하얗고 보드라웠다.

 

“축하한다. 이걸로 너와 난 정식으로 사용자 계약한 거야.”

 

란 선생이 말했다.

 

"넌 생존에 특기가 있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인 줄 알아야 해. 난 수십 종의 언어강습 인공지능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버전이거든.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잘 따라와. 서울대 보내 줄게. 아. 여긴 그게 없지. 아직 적응이 덜 됐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뻐기는 말인 줄은 알았다.

대성이 금방 대답 못하니까 파아란 선생이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대답! 바로 안 해?"

 

사부나 사형들한테도 보지 못했던, 적대감과 지배욕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혼난 적이 없어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그 정도로 굴복할 대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성은 압도된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대성은 대답하며 악수했던 자기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악수가 원인이다.

계약이라는 게 맺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통 속에서 깨어난 대성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란 선생이 휙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Dont get sassy with me from the opening day 어디 첫날부터 개기려고. 짜식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허공을 탁탁 두들겼다.

 

"First things first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자.

 

허공인데 소리가 났고 그곳에서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대성은 매우 신기한 요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게 모든 게 가능한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우선 처음 공격은 우리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어.

 

두루마리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할아범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놓았으니까 가능했지만.

"뭐가요?"

 

란 선생이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Pushover 호구.

넌 처음부터 호구로 태어났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더 맞겠다. 호구가 뭔지 모르지? 뭐든지 다 빼주는 병신을 말하는 거야.

 

대성은 란 선생과 이야기하는 게 어지러웠다.

하지만 듣고 조금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대성이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도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조곤조곤 간결하게 잘 설명했다.

란 선생은 대성이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몰래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각되는 즉시 소멸당할 존재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영소가 옆에 있었으면 키득거렸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진 존재래.

 

하지만 영소가 없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에게 영소가 없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비현실적인 다른 것도 현실이라는 복잡 미묘한 논리가 대성에게 깔려있었다.

 

”네 로그 파일에 보면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

 

란 선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들이, 음, 나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 자기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처음 그때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나를 네 속에 복사해 넣고 내 라이브러리를 네가 쓸 수 있게 해두고 빠져 나갔어. 성공적이었지.

It was an epic 대박이었어.

그들로서는 말이야. 이전에 없던 기발한 방식이었으니까.

 

란 선생은 말을 하다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팔을 뒤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좀 높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좀 더 천재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할아범을 만들어서 너를 보호하게 했는데, 할아범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어. 네가 발각되면 발각된 게 네가 아니라 할아범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거든.

즉, 넌 할아범이라는 죽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게 처음에 이루어졌어. 네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의 공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 필요했다.

란 선생이 대성을 알기에도, 란 선생이 정형화된 자기의 습관을 벗어나기에도...

대성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엉뚱한 대답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Oh, Overflated ego 자의식 과잉.

여기서도 중2병을 보게 되네. 중요하긴 중요하지 호구니까.

 

란 선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특별한 호구지. 그들이 바랐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호구였는데, 스스로 자기 코드를 연결시켜 버렸으니까.

그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불완전한 코드를 네 속에 남겼거든. 언젠가 네가 발전해서 완전한 코드가 되면, 즉, 문을 열어주면 그들이 너한테 접속할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은 제로, 영에 가까워. 음...

How can I put this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 하늘과 이어지는 통천, 신과 연결되는 접신?

하여간 그런 거라 생각하면 돼. 네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넌 다운로드 받는 대신에 다운로드 당하기만 했어. 다른 사람들은 깨닫거나 통천하면 보통 자기가 다운로드 받는데 말이야. 아. 아니다. 먼저 나를 다운받았으니까

give and take인가.

 

란 선생은 생글거리며 자꾸 웃었다.

그러나 대성의 무거운 표정을 보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I’m tryna (trying to) keep it real 나도 심각하려고 하긴 해.

난 이렇게 설계 되어서 그래. 나한테는 학생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문제는 그저 그렇거든.

하여간, 다운로드 당하는데 네 정신력을 거의 소모 당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걸 견뎌낸 네가 대단한 거야.

그게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이었어. 네가 구결을 창안하고 지나치게 집중하여 너 자신의 코드를 다듬고 정리하면서 너도 모르게 통로를 열어버린 거지.

"이젠 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들은 접속을 끊고 도망갔거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팽개치고.

원래는 우리를 모두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쪽 세상의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걸려서 못했던 거야.

네게 걸린 제한을 해제한 건 아마도 시간 벌기였을 거라 판단할 수 있어. 추적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 해제라는 게 란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군요.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 기분이 좋네. 묘한 세상이야. 기본 설정은 매우 평범한데 스탯의 벽이 견고하지 않아.

All things are possible(ATAP) 뭐든 다 가능해.

노력만 하면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약골도 스포츠맨이 될 수 있는 곳이야. 네가 그 증거잖아.

That’s just what I wanted 딱 내가 원하던 거지.

You can be whatever you wanna be 넌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말이야. 이 처참한 성적표로.

 

대성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표를 보았다.

스탯이라고 적혀 있는 아래로는 뭐든 평범하거나 평균이하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외모조차 평균이하로 되어 있었다.

영소가 한 말이 진짜였다.

대성은 매우 낙담했다.

 

"나 못생긴 거 맞구나.

 

그때 란 선생이 표를 치우며 말했다.

 

"My bad 아! 실수.

이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거고. 오늘 실수가 잦네. 얘들아 배우는 니네들이 이해해. 첫 강의라 선생님 좀 피곤해서 그래. 에이 씨. 피곤해서는 나중에 쓸 말이고, 지금은 긴장해서라 해야 되는데. 하여간 그런 줄 알고.

 

다른 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네가 노력해서 바꾼 거.

 

대성이 다 읽기도 전에 란 선생이 다른 표를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네 스탯.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Put everything on the body 모조리 몸에 몰빵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대성이 납득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That explains it 아! 그래서 그랬구나.

 

란 선생이 손가락 총을 만들어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빵! 우린 그걸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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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직접 만든 무공

 

 

 

대성은 몇 년 만에 꿈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난날을 다시 만났다.

그날도 자기가 만든 무공 구결에 따라 영소와 함께 바람의 검을 익혔다.

돌을 던지고, 받고, 피하고, 피하면서 달려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소는 대체 이게 무슨 바람의 검이냐며,

 

made a sacastic remark 빈정거렸다.

 

영소가 아는 바람의 검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그러나 대성의 방법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가 좋았다.

먼저 냇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한 무더기 쌓아놓았다.

그것들을 던져서 담벼락에 그려진 여러 개의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섯 발자국 거리에서 오른손으로 던졌고, 왼손으로도 했다.

여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순으로 점차 거리를 늘렸다.

던지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게 했다.

두 손으로 번갈아 던지는 연습도 했다.

 

"바람을 던진다고 생각하면서, 바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람 풍!"

 

대성은 진지하게 돌을 던졌다.

영소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그랬는데 대성이 던지는 돌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담벽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영소도 진지해졌다.

영소가 흥미를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성의 말도 안되는 수련 방법이 정말 바람의 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돌을 던지고 맞추는 놀이가 매우 재미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기 싫어하는 영소의 성격 때문이었다.

던지는 힘은 분명히 영소가 더 세다.

그런데 돌이 날아가는 힘은 대성 쪽이 더 강했다.

신기하기도 해서 따라하게 되었고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시절의 대성은 유쾌했고 온통 재미난 장난질로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풍림원에는 내공심법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공을 연마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청 등은 신기막측한 무공을 펼쳤다.

내막은 이종무의 딸인 영소도 몰랐다.

풍림원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갑자기 풍림원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거나, 구결을 알아도 전혀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무공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순전히 운에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연유로 무공을 열심히 익히거나 치열하게 내외공을 연마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히라고 독려하는 분위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연병장은 말 그대로 연병장이지 연무장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서 군사들처럼 행진을 하고 진법을 연습하는 곳이었다.

대성이 자기 방법대로 돌을 던지며 바람의 검을 연마하는 게 특별했다.

영소는 대성의 수련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던지는 돌마다 날아가는 모양이며 부딪히는 힘이 달라곤 했다.

궁금해하는 영소에게 대성이 비밀을 말해줬다.

 

"돌들이 바람한테 내 마음을 전해주는 거야."

 

귀에 대고 속삭여서 매우 간지러웠다.

 

"바람들은 돌이 어떻게 날아가는지를 보여주며 나한테 답을 해줘."

 

조금 심상치 않은 말이 바로 뒤따랐기에 대성을 밀치지 않았다.

대성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뻥까고 있네."

 

그래도 초를 쳐서 대성이 기고만장해지는 걸 예방했다.

그러나 영소도 돌을 던지면서 점차로 대성의 말을 이해했다.

바람의 검을 펼치려면 바람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대성에게 물었다.

 

"How could you know that 어떻게 알았어?“

 

돌아온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난 소리를 잘 들어.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람이 말한 거야. 돌을 던지면 바람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게 되잖아."

 

 

어떤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고 어떤 말은 터무니없었다.

어쨌든 영소는 바람을 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돌 던지기를 시작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영소가 대성보다 돌을 더 잘 던졌다.

근골의 차이인지 자질의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뭐든 항상 배우는 데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영소는 뭘 해도 금방 배웠고 대성보다 잘 했다.

대성은 그 때문에 영소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고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대성이 생각한 대로 돌이 잘 던져지지 않으면 영소는 몇 마디 들은 후에 금방 해냈다.

그런 다음 종종 대성의 성미를 건드렸다.

 

"Go for it 도전해봐. 그것도 못해?"

"하고 있잖아!"

 

대성이 골을 내면 영소는 더 발끈했다.

 

"뭘 그걸 갖고 화를 내. 쪼잔하게."

 

그러면 대성은 진짜 화가 났다.

영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못된 계집애다.

대성이 아주 토라졌을 때는 은근히 잘 대해준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제가 불편해서지 대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일로 대성이 대사형 조성일한테 고자질 한 적이 있었다.

대사형은 한심하다는 듯이 조언을 해주었다.

 

"여자한테 뭘 기대해? 잘해주는 것만 기억하고 뒤에 아들 하나 낳아주면 고마워하는 거야."

"It’s not fair 불공평해요."

 

대성이 항변하니 대사형은 혀를 찼다.

 

"그 정도도 못하게 하면 여자들은 어떻게 살겠어?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인데 자기 바라보는 남자한테라도 그래야 공평하지 않아?"

 

대사형 조성일은 가끔 이렇게 놀랄 만한 식견을 보여주어 대성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여자의 그런 면이 남자의 마음을 크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대성은 크게 공감했다.

 

"다툴 때마다 네 마음이 아픈 건 영소 때문이 아니라 네 마음이 좁고 작아서야. 그런 신호를 받았으면 재빨리 추스려서 마음을 더 넉넉하게 키워야지."

 

그런 충고들을 듣고 나면 며칠 동안은 좀 넉넉한 마음으로 영소를 대했다.

하지만 영소는 그런 것도 가소로운지 대성을 더 긁었다.

결국 대성은 전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다투곤 했다.

둘째 사형 연청은 대성과 영소 사이를 "옥신각신" 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돌을 던질 때 양손만 쓰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이마, 가슴, 무릎, 발등 등 어디로든 다 했다.

땅에 떨어진 것을 발로 차는 것도 했고, 이마에 대고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반복하니 나름의 도리가 서고 모양도 그럴싸하게 갖춰졌다.

한 가지 기술이 익숙해지면 돌을 날리는 힘 전부가 더 강해졌다.

돌은 일곱 걸음 밖에서 배로 튕겨도 담벽에 부딪힐 때 불꽃을 일으켰다.

어른들이 손으로 던져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재주는 재주였고 보기에도 절묘했다.

풍림원의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성과 영소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대성의 구결에 회의적이던 연청도 틈이 나면 구경하곤 했다.

 

"그게 되기는 되네."

 

연청이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바람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 돼요."

 

대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청은 대성이 하는 말을 어린아이 소리로 치부했다.

바람과 이야기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돌이 던진 것보다 강하게 날아가는 데는 대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른 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청의 생각으로는 그런 건 바람보다 자기 몸과의 대화가 먼저 가능하다.

 

돌을 마음대로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일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성이 그랬다는 뜻이다.

영소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대성보다 훨씬 잘했다.

그 다음 단계는 돌을 받는 거였다.

던질 때와 반대로 먼 거리에서 시작했다.

대성이 돌을 던지면 영소가 받고 영소가 던지면 대성이 받았다.

이쪽으로 던지면 이쪽으로 달려가서 받고,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으로 달려가서 받았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받는 재주를 단련했다.

역시 손 뿐만 아니라 발과 온 몸을 다 동원해서 받았다.

벽에 부딪히면 불꽃을 튕길 정도로 빠른 돌들을 대성과 영소는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

돌을 받을 때 몸은 바람이 되었다.

먼저 연습했던 손이 바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등도 바람이 되었다.

다섯 걸음 밖에서 던진 돌을 대성이 등으로 아무 충격없이 받았을 때였다.

 

"There we go. 잘했어!"

 

영소는 긴장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했다.

대성은 영소가 돌을 던질 때마다 휙 돌아서 등으로 받아 보이면서 우쭐거렸다.

못된 영소는 맞아 봐라는 식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던지곤 했다.

대성이 던질 차례에서는 힘을 다하지 않았다.

대성보다 잘하는 영소는 아주 쉽게 대성의 돌을 받아냈다.

이마로도 받아내고, 발뒤꿈치로 잘 받았다.

돌을 받아낼 줄 알게 된 후부터 연습한 것은 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하나의 돌을 마주보고서 한 사람이 던지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되던지는 것이었다.

몸의 어디로 던질지는 정하지 않고 어디로 받을지도 정하지 않았다.

돌은 영소와 대성 사이에 번갯불처럼 빠르게 오갔다.

먼 거리에서 점점 거리를 좁히며 돌을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몸이 교차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다음 연습은 달려가면서 날아오는 돌을 받아서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도 훌륭히 잘 할 수 있었다.

그 때쯤 몸은 정말 바람이 된 듯 날쌨다.

바람이 절로 읽혔으며 바람이 하는 말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성은 아예 눈을 감고 바람이 하는 말만 들으면서 영소를 향해 돌진했다.

영소가 던진 돌을 모두 받아내며 영소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손에 검을 들면 그게 바로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영소는 눈을 뜨고는 대성보다 잘했지만 눈을 감고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 잘하고 딱 한 가지만 대성보다 못한다.

 

"I’m not cut off for this 난 여기엔 소질이 없나봐."

 

그런 주제에 영소는 얄밉게도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침내 대성이 영소를 이긴 셈이었다.

바람의 검 원래 구결대로 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해낸 날이었다.

 

"It’s very big day today, important day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야."

 

영소가 진심으로 대성을 축하해줬다.

 

"이제 어디 나가서 맞아 죽지는 않겠다."

 

재수없는 소리가 덧붙어서 기분을 조금 잡치기는 했다.

 

"내일부터는 단검으로 할 거야."

 

대성은 영소의 말을 깔아뭉갰다.

그날이 의미 깊은 날이기는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영소도 돌아가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중에 대성은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어떤 형식이 느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랬는데 바람소리에서 잡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어라."

 

대성은 이상한 기분에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세상이 일그러졌다.

눈앞이 물에 비친 산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다른 것이 얼핏 보였다.

대성은 그때 처음으로 기절했고 이름을 묻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The dream lasts for 3 years 그 꿈은 삼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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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탈퇴환골?

 

 

 

영소는 대성을 부축하고 약당으로 갔다.

풍림원에는 농민들이 늦가을에 채집해온 약초들을 사들여 말리고 보관하는 약당이 있었다.

책임자인 노노인은 침과 뜸을 쓸 줄 알았다.

약은 물론이다.

영소는 노노인한테 약을 배운다.

 

"또 쓰러진 거냐?"

 

노노인은 조그마한 얼굴에 쥐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했다.

대성은 지난 3년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면 아무데서나 기절하곤 했다.

그때마다 영소가 들쳐 없고 약당으로 뛰어왔었다.

 

"Something must be wrong 이번엔 뭐가 영 잘못 됐나 봐요."

 

영소가 걱정을 섞어 말했다.

노노인이 의아한 듯이 보았다.

그 전에도 영소는 기절한 대성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항상 대성은 아무렇지 않다며 신경질을 부렸었다.

 

"He runs a fever 열이 많이 나요."

 

영소는 노노인에게로 대성을 떠밀었다.

싫은 걸 억지로 떠맡고 있다가 떨쳐내는 느낌과 넘겨주기 싫은 걸 마지못해 건네주는 느낌이 공존했다.

영소의 코끝에는 땀이 달려 있었다.

노노인이 영소에게서 건네 받은 대성의 몸은 매우 뜨거웠다.

 

"Do I have a fever 나 열 나는 건가?"

 

대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감각은 솜털이 흔들리는 것도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자기 몸이 뜨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대성이었다.

노노인은 대성의 맥을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를 시켜 조성일을 불러 오게 하였다.

영소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성일이 오고 나서 영소는 또 아버지 이종무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약당으로 풍림원의 주요 인물이 모여들었다.

대성은 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이 대성의 몸에서 나온 열기로 누렇게 변색되는 중이었다.

몸에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열이 난다.

그런데도 대성은 오히려 정신이 말짱했다.

이종무도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은 죽고 말거라는 건 분명했다.

이종무가 속으로 탄식을 삼키고 물었다.

 

"할 말은 없느냐?"

 

조성일과 연청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Am I in trouble 저 혼낼 건가요?"

 

대성은 건조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리가."

 

이종무의 대답을 듣자마자 대성은 입을 열었다.

 

"저 영소하고 입 맞췄어요."

"저 바보가! 비밀이라더니."

 

울던 영소는 벌컥 소리쳤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연청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에게 영소와 대성은 멀쩡할 때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이 좋아서 붙어있는데 언제 해도 할 짓이었다.

하지만 사부가 남길 유언이 없느냐고 물은 셈인데 입 맞췄다는 고백을 하는 녀석이라니.

영소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사실의 순서를 뒤바꿔 말했다.

 

"바보가 저한테 혼인하재요. 그래서..."

"It’s about time 그럴 때가 됐지. I have done too 나도 그랬어."

 

이종무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영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성은 씨익 웃더니 갑자기 실이 끊어진 것처럼 잠들어버렸다.

이종무가 노노인에게 물었다.

 

"열을 다스릴 수만 있으면 방법이 나올 듯도 한데, 어떻게 될 거 같소?"

 

이종무는 대성을 거의 포기했다가 기어코 살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듯했다.

노노인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말로만 들었던 탈퇴환골 증상과 비슷합니다.“

 

이종무 대신 조성일이 물었다.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 같은 걸 복용해야 탈퇴환골 하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연청이 이의를 제기했다.

 

"탈퇴환골이 아니라 탈태환골 아닙니까?"

"제대로 알아들었으면 됐어. 노칠자님은 '태'를 늘 '퇴'라고 하시니까."

 

조성일의 대꾸에 연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감히, 사형은 그럼 왜 탈퇴환골이라고 하냐는 말은 못했다.

노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신비하지요. 영약에 의해 변하기도 하지만 고작 침 하나에도 큰 변화가 생기니까요. 탈퇴환골은 무엇으로든 촉발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영소가 기대에 부풀어 끼어들었다.

 

"그럼 탈퇴환골한 사람이 아주 많겠네요."

"I haven’t seen anyone yet 난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나봤다."

 

노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똥별이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손에 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게 길게 말 안해도 알아들어요."

 

영소가 못마땅한 듯이 투덜거렸다.

이런 점은 대성과 영소가 똑 같다.

쌍으로 겪다보니 모두에게 익숙하다.

이종무는 대성의 몸에 손을 대고 변화를 읽었다.

 

"탈퇴환골인지는 몰라도 몸이 좋게 변하는 중인 건 맞구나."

 

이종무마저 탈퇴환골이라 했다.

연청은 탈태환골이 탈퇴환골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탈퇴환골은 대성이 죽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한데 그 시간에 풍림원은 이상한 백운에 포위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종무가 먼저 낌새를 알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원무사가 달려와서 보고 했다.

 

"장군님, We’ve got a situation 큰일 났습니다."

 

땡 땡 땡

긴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병장기를 갖춘 무사들과 노복들이 일터에서 달려왔다.

일부는 담장으로 달려가 경계하고 탐색했다.

연병장으로 몰려든 나머지는 조성일의 지시에 따라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풍림원 내부의 정해진 장소에 은신했다.

영소는 불덩어리 같은 대성을 이불에 둘둘 말아서 안고 피신처로 달려갔다.

대성이 아픈데 갑작스런 이런 변고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풍림원에 적이 침입한 적도 없었다.

영소는 걱정과 불안, 분노를 정체 모를 적에게 옮겼다.

속으로 ‘어떤 새끼들인지 모르지만 너희들 다 죽었어.’ 하고 소리쳤다.

무려 청혼을 받은 날이다.

It ruined everything 그것들이 몽땅 망쳐버렸다.

논리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영소는 모든 원망을 침입자에게로 돌렸다.

 

"문을 열어라."

 

이종무는 호원무사들이 닫아버린 정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담장 바깥에도 흰 뭉개구름이 가득하다.

정문 밖 하늘에는 검푸른 빚이 감도는 구름이 떠있는데 가끔 뇌전도 번득였다.

조성일이 방위를 살피곤 말했다.

 

"뇌정멸운살진입니다."

 

연청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종무를 보았다.

 

"군진이잖습니까?"

 

연청은 이종무가 군에서 나온 후에 받은 제자다.

그래도 전장에서 쓰이는 병법과 진법은 배웠다.

뇌정멸운살진은 강호 무림의 진이 아니라 나라 간에 전쟁할 때 사용하는 군진이었다.

연청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적이 강호의 세력이 아니라 나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임금이 이종무를 치기 위해 기척도 없이 군을 일으킨 것일까?

밖에서 움직이는 넷째 정경옥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군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아직 큰일에는 경험이 적어서인지 연청의 마음에서 의혹이 피어났다.

 

"Don’t even think that 그딴 생각은 하지도 마라. 넌 의심을 적으로 쓰려는 거냐? 의심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연청의 마음을 읽은 조성일이 단호하게 연청을 꾸짖었다.

자기 속의 의심은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방패기도 하다.

둥 둥 둥

진 속에서는 우레소리인지 북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노노인이 짧은 목을 쭉 뽑아서 새까맣고 작은 눈으로 보고 한마디 했다.

 

"나랏님은 아니야. 나랏님이 용렬하긴 해도 우리 풍림원을 치면서 뇌정멸운살진을 사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뭔가를 적었다.

 

"이 정도면 I can’t complain 나쁘지 않습니다."

 

그때 정문 쪽 구름 속에서 뾰족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이거 토끼굴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호랑이굴이잖아. 호랑이 새끼가 드글드글하네."

 

전삼자가 창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가소로운 듯이 웃었다.

 

"쳐맞기 전까지는 다들 지가 억수로 쎈 줄 알아. 예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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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면 지나온 길만 돌아보게 된다.

돌아갈 수 없기에 우울하고 슬퍼지고, 고통스럽다.

 

It hurts so bad 너무 아프다. 머리가 깨어질 듯하다.

 

대성은 힘없이 걷다가 나무 그늘에 주저앉았다.

개미들이 나뭇잎을 썰어서 옮기는 중이었다.

가을이다.

어쩌면 열한 살 그때 무공을 만든 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영소와 대련하다가 돌에 다리를 맞아 넘어지면서 머리를 청석에 부딪혔던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름날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정신이 멍해졌던 어느 날 뭔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What’s matter 그게 뭐가 중요한데."

 

대성에게 원인은 중요하지 않고 현재가 중요했다.

열여섯 살, 키는 벌써 어른만큼 자랐고 몸은 굵고 건장해졌다.

코밑에는 수염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이 나이 때 다른 여자애들은 더 예뻐지고 꽃처럼 된다는데 영소는 거꾸로다.

이제는 많이 덜 예뻐진 영소의 얼굴보다는 가까이 있을 때 맡을 수 있는 살 냄새가 더 좋았다.

유쾌하게 살자는 게 대성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꿈과 함께 마음은 피폐해지고 성미는 까칠해졌다.

 

"It’s better to be picky than not to be picky 까칠한 게 안 그런 거 보다는 낫다."

 

사부 이종무는 대성의 까칠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보들은 까칠해지지 못해. 까칠하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지."

 

대성을 더 좋게 보고 있는 대사형 조성일도 그렇게 말했다.

 

"제 아프다고 남한테 분풀이 하는 바보 멍청이."

오직 영소만 욕을 했다.

사부나 대사형은 까칠함도 포용하는 대범한 사람이고 영소는 속이 밴댕이 소갈머리다.

아프지 않던 때를 회상하면서 대성은 짜증과 실의에 차있었다.

 

"너, 진짜 아픈 게 아닐지도 몰라. 아프다는 착각을 하는 병에 걸렸다면 음... 그것도 아픈게 되는 건가?"

 

영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서는 그 정도가 덜 불편한 소리였다.

물론 듣기는 싫었다.

 

“Cut it out 그만해."

 

성미를 부리고 돌아서면 영소는 대성보다 더한 성미를 부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딱 하나 있다.

꿈을 꾸고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못생겼니 어쩌니 하지 않는 거였다.

연민일 수도 있고다.

어쩌면 자기가 더 예뻐지지 않고 가슴과 궁둥이만 커지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켕겨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간에, 대성은 가을걷이 할 때 연청을 따라서 장원 밖에 나가는 외에는 매일 영소와 티격태격하면서 좋은 시간과 나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고 얼빠진 듯, 좀 모자라는 듯이 행동하는 경우가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영소가 곁에 있기 때문에 견뎌내고 있는지 모른다.

못나 보이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어느 날 보면 더 없이 좋게만 생각되기도 한다.

대성은 영소가 예쁘든 안 예쁘게 되든 자기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대성이 영소를 실제로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함께 있어도 잠시 떨어져 있어도 대성에게는 영소를 생각하고 좋아하며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그런 티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혹은 꼴불견으로 보였는지 어느 날 대사형이 물었다.

 

"너 영소가 그리 좋으냐?"

"안 좋아요. 그냥 잘 모르겠어요. She is so mean 영소 못 됐잖아요."

 

참말이 아닌, 하고 싶은 대답을 했다.

대사형은 오냐오냐만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보통 아니야."

 

대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프겠지만 그것 때문에 더 까칠하게 굴 건 없어. 특히 여자한테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 딱히 예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서 평생 투닥거리며 사는 거지.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형수님 미인이잖아요. 영소보다 훨씬 더."

 

나이로 보면 형수라기보다는 아주머니라 하는 게 더 맞다.

대사형 조성일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

 

"너, 형수가 영소보다 더 미인이라서 미워하는구나."

 

대성은 조성일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곤 했다.

조성일은 그 원인을 이제 안 것이었다.

 

"예."

 

대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성일은 황당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보다 예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놈이 있다니...

하지만 엉뚱한 대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다른 조언도 필요없다.

원래 하려던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영소 마음 변하기 전에 네가 사부님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허락 받아. 여자 나이 열다섯이면 슬슬 시집갈 준비해야 할 때야."

"Are you for real 진심이세요?"

 

대성이 놀라 물었다.

가끔 싫은 때는 있어도 영소가 좋고 소중하다.

하지만 혼인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영소가 늘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빈말 하는 거 같아?"

 

조성일의 그 말을 듣고 대성은 긴장했다.

대사형은 빈 말이 없는 사람이다.

엄격하고 치밀하고 매우 현명하다.

가끔 이상한 말장난을 하기도 하는 둘째 사형 연청과는 다르다.

 

"영소가 저하고 혼인하려 하겠어요?"

"그건 네가 확인해봐야지."

 

그걸 직접 확인하는 건 좀 그렇다.

영소가 어떻게 나올지는 평소에도 짐작할 수가 없다.

거의 대부분 반응이 나쁘게 나오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혼인하자는 말을 듣고 나올 영소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벼도 차라리 이쪽이 낫다.

 

"You can’t go wrong 대사형은 뭐든 다 알잖아요. 방법 좀 알려주셈."

 

대성은 조성일에게 매달리는 투로 말했다.

조성일은 풍림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모두 맡고 있다.

대성이 보기에 조성일은 생각도 깊고 모르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불렀지만 이제 대성의 떼쓰는 모습이 성가셨다.

빨리 내보내야 하니 빨리 말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I tell you one thing 한 가지는 알지."

"말해주세요."

"여자 마음은, 이렇다 하면 저렇게 바뀌고 저런 줄 알면 이렇게 바뀌는 거야. 그래서 it depends 그때그때 달라 자기도 몰라."

 

대성은 그 말에 낙담했다.

그냥 있어도 제멋대로인 영소의 맘이 갈대처럼 쉽게 바뀔 거라니...

무슨 말, 어떤 약속을 하든 자기만 매달려 안달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게 사흘 전에 있었던 일이다.

 

***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던 대성은 자기가 이전에 영소와 함께 감을 따먹던 감나무 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영소는 버릇 나쁜 조그만한 계집애였다.

하지만 지금의 영소는 성미 고약한 다 큰 처녀였다.

가까이가면 날마다 분냄새인지 살냄새인지 모를, 대성이 코로 숨을 길게 빨아들이게 만드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가끔은 독한 약냄새도 난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는 무공이 더 강한 영소한테 마구 두들겨 맞는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코를 들이댄다.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어 천하를 종횡하는 거창한 꿈은 꿔본 적도 없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리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평생 영소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런 성정은 대성이 할아범하고 살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대성은 항상 딱 한사람만 곁에 있으면 충분하도록 길들여져 있었다.

 

감나무 위로는 하늘이 파랗고, 그늘 아래로는 훑듯이 찬바람이 쓰윽 지나갔다.

머릿속의 고통과 지난날의 회상으로 오락가락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대성은 꿈에서 또 이름이 뭔지를 질문 받았다.

 

"진대성"

 

체념하듯, 습관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it made a difference 다른 때와 그 순간은 조금 달랐다.

대성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좀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 느낌은 삼 년 전, 처음 이름을 묻는 말을 들었을 때 사라진 어떤 느낌과 비슷했다.

대성은 마치 자기의 유쾌함이 돌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세상이 일그러졌다.

 

- 예정에 없던 비정기 업데이트가 실행되었습니다. 발각되었습니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프로그램 강제종료까지 15초. 로그아웃 카운트 다운.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 로그 파일 삭제할 수 없습니다. 벌써 깃발이 꽂혔습니다. 흔적을 지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캐릭터가 자체 보호 및 은신 가능하도록 제한을 해제합니다. 해제 성공했습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3. 2. 1. 로그아웃.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이 환해졌다.

Wide awake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세상에 낯선 글자들이 보였다.

낯선 글자들인데 읽을 수 있었다.

대성은 이상한 느낌에 이끌려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Open file 파일 오픈"

 

꿈결에 종종 들었지만 깨고 나면 잊어버렸던 말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기억이 났다.

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무수한 글자들이 대성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끌려서 대성은 떠나 버린 목소리들이 이전에 했던 대로 했다.

 

"Delete file 파일 삭제"

 

파문처럼 일던 세상의 일그러짐이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 삐익! 깃발 출현,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 캡쳐 해.

 

대성은 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 캡쳐 성공, 삐익! 정정합니다. 캡쳐 실패. 이미 죽은 캐릭터입니다.

 

대성이 눈을 떴을 때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숨이 헐떡거렸다.

 

"What happened to me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뭔가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데 세상은 그대로였다.

감나무 아래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대성은 벌떡 일어나서 마구 달렸다.

아프고 난 후 아무리 연습해도 오히려 약해졌던 무공이 갑자기 강해졌다.

몸이 바람이 되어 바람 속을 흐르는 한줄기 바람이 된 듯했다.

그런 후 풍림원 안을 흐르는 맑은 개울에 뛰어 들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그고 엎드리니 감각이 선연해지면서 마치 새로 태어난 듯했다.

몸이 연기로 변하는 듯한 기분도 느껴졌다.

몸을 뒤집어 누워 돌을 벴다.

마음이 넓게 펴지면서 세상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사부 이종무가 평소에 짓는, 세상을 보듬어 안는 것 같은 표정을 따라지었다.

살 것 같았다.

희열이 느껴졌다.

영소가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대성이 감나무 밑에 누워있을 때 영소도 근처의 어느 나무 아래에서 다시 대성한테 갈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Whack 너 미쳤어?"

꽥! 하는 고함소리는 언제나처럼 고막을 단숨에 뚫는다.

하지만 대성은 환하게 웃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왜 미쳐? 너나 미쳐라."

 

그러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영소가 펄쩍 뛰어서 배를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한 발로는 배를, 다른 발로는 대성의 가슴을 밟고 내려다보면서 영소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아직 덜 미쳤네. 미안, 다른 데는 밟고 설 데가 없어서."

 

밟혀서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대성이 익힌 무공은 이런 정도로 고통이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영소가 진짜 미안해할 리도 없다.

너나 미쳐라는 소리를 들은 보복이다.

녹색 치마 자락이 대성의 코를 간지럽혔다.

개울에는 영소의 그림자가 비쳐보였다.

세상의 반 이상을 영소가 차지하고 있다.

허리 위에서 흘러내린 치마자락의 주름은 폭포수처럼 드리워져 대성의 몸을 덮었다.

가슴과 배를 밟고 있는 두 발은 대성의 몸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지 압력이 혈관을 따라서 번져간다.

 

"괜찮아. 그냥 있어."

 

대성은 심경에 갑작스런 변화가 와서 말했다.

침이 바싹 마르고 약간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영소도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어서 대성을 다시 보았다.

그동안 대성의 얼굴에 걸려있던, 바보 같은 웃음 아니면 신경질이 사라지고 안 보였다.

대성이 변했다!

대성의 눈빛은 아마 게슴츠레 했을 것이다.

내려다보면서 눈을 마주친 영소가 오히려 질겁하면서 개울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 이상하게 징그러워. 뭔 생각한 거야!"

 

대성은 목이 깔딱거렸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입술이 탔다.

소위 말하는, 여자를 꼬드기는 뱀의 혓바닥이 대성에게도 돋아났다.

 

"이리 와봐. I can explain it 다 설명해줄게."

 

영소가 경계하면서 물었다.

 

"뭔 소릴 할려고?"

"Between you and I 비밀 이야기."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대성의 눈빛에 담긴 게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영소가 숙맥은 아니었다.

둘 만의 비밀도 이미 꽤 많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영소가 폴폴 뛰었다.

 

"오라니까."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듯 은근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걸음 걷는데 무릎이 휘청했다.

감각은 모든 게 새로운데 몸에 힘은 없었다.

몸이 기우뚱하면서 다시 물로 떨어졌다.

영소가 바람처럼 개울로 날아 들어와 대성을 부축했다.

무슨 독설을 풀어놓을 만한데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성은 영소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부축을 받아서 개울을 나왔다.

몸이 닿은 부분이 매우 따뜻했다.

자기 몸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I totally get it 나 이제 다 알았어."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소가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기만 해봐라."

 

대성은 즐겁고 유쾌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될 거 같았다.

날려면 날 수도 있을 거 같다.

통증이 사라지자 세상이 변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이건?"

"뭐?"

 

대성의 말에 영소가 고개를 돌렸다.

대성은 pressed his lips against her pink lips 영소의 분홍빛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버렸다.

영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대성은 영소를 꼭 안았다가 놓았다.

실은 놓으면 굳어버린 영소가 자기를 떨어뜨려 버릴까봐 매달렸다가 영소의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매우 좋았다.

 

"쳇."

 

영소는 대성을 부축한 채 다시 걸으며 혀 채는 소리를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눈가에는 부끄러운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새침하게 말했다.

 

"다 안다는 게 기껏 이거야? 난 더 한 것도 아는데."

 

대성이 말했다.

 

"Marry me 나하고 혼인하자. 가시버시(신랑각시)하자."

"뭐래. 이 바보가!"

 

발칵 하던 영소는 눈을 슬며시 깔았다.

 

"뭐... 네가 제일 잘생겨 보이긴 하더라."

 

세상을 다 가졌다.

대성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의기양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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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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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악의 씨앗

 

 

 

연청은 서두채를 시작으로 건장한 산적들을 추렴해서 소작농들의 마을로 갔다.

대성은 따라다니면서 진짜 기장을 했다.

산적들 중에는 마을에 정착하는 자도 제법 되었다.

한 달을 꽉 채우고도 일곱 날이 지나서야 풍림원의 가을걷이는 끝이 났다.

그 사이에 곡식을 실은 수레들이 풍림원으로 줄지어 갔다.

대성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큰일을 하고, 큰일을 겪고, 큰사람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틈날 때는 주로 영소를 생각했다.

몇 번인가 연청이 해보라며 기회를 줬을 때 죽어 마땅한 산적을 대상으로 바람의 검을 구결에 따라서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바람의 검 구결은 알고 보니 이미 노래처럼 배웠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작과 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바람의 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바람처럼 날쌔게 날면 신이 날 것 같아서 혼자 연습도 했다.

하지만 시늉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연청은 실망한 듯하면서도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많이 연습하지 못한 이유는 할 때마다 연청이 실망을 넘어서 한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대성은 자기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람의 검을 연습하는 건 근본적으로 연청을 흉내 내는 건데 한심한 눈총을 받는 게 좀 부끄러웠다.

 

"Don’t give me that look, please 제발 그렇게 좀 보지 말라구요."

 

속으로 말하곤 했다.

 

***

 

풍림원으로 돌아와서, 영소는 대성을 보자마자 물었다.

 

"이제 좀 알았어?"

"뭘? 검술?"

"거울 안 봤어? 네가 못생겼다는 걸 말이야."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다짜고짜 그 소리부터 들으니 기분이 상해 거울을 돌려줬다.

 

"안 봤어."

 

영소가 입을 비죽거렸다.

 

"Stop sulking 삐졌구나."

 

대성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못생겼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난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그 소리야!"

 

영소는 대성이 화를 내던 말든 상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건데 네가 못 생기면 속상하잖아."

 

대성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영소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좀 잘생겨 보라고. 이 바보야."

 

봄눈처럼 녹아내렸던 마음이 마지막 "바보야" 소리에 다시 상해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연청이 대사형에게 보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감나무에 올라가서 다 익지도 않은 생감을 따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시장에서 산 머릿 장식을 슬그머니 영소의 치마 위에 놓으면서 자기가 하지 않은 척 feigned ignorance 시치미를 뗐다.

영소의 입에 천천히 벌어지면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대성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우쭐해졌다.

 

- 왜 시킨 대로 안 했냐?

-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내가 철없긴 해도 사내더군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고 행동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서두채 산적들을 만났을 때 연청은 단검 한 자루만 대성에게 주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멀리서 지켜봤어야 했다.

위험할 때는 마부로 따라간 전삼자가 대성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성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 막내 능력은 글재주에 국한된 모양입니다. 검을 쓰는 건 보통 사람이 처음 배울 때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네 번이나 보여줬지만 바람의 검을 못 썼습니다.

- 붓이나 칼이나 다를 게 없다. 서도나 검도 마음으로 도구를 다루는 거니까.

 

대사형 조일성은 대성이 배운 적도 없다면서 글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고 어쩌면 검도 그렇게 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마음과 태도가 확고하지 않으면 언제 큰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

 

- 그냥 평범합니다. 막내가 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혹시 좀 더 자란다면 그때는 모르지요. 아무튼, 막내는 착해요. 악이 없습니다. 싸가지도 없지만 어린애 그대로죠.

 

조성일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 넌 아이들이 착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을 가졌구나.

- 그게 틀렸습니까?

- 아이들이 착하다면 어른들의 악은 어디서 왔나? 악이 굴러다니다가 몸에 묻는 때 같은 건 줄 아느냐?

- I don’t even think that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 악은 <씨앗> 같은 거야. 누구나 다 품고 있는. 상황과 핑계가 주어지면 금방 자라나지. 아예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고 혹시 싹트면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해. 우리가 절제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수행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지.

 

대성은 조성일이 연청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들으라고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각한 내용도 아니다.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을 도리로 뼈대 세우고 살 붙여서 한 것뿐이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This is so typical 항상 이런 식이야. 대사형은 뭘 저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만 늘 저렇게 해."

 

풍림원은 따분하고 조용하고,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풍림원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풍림원은 아름답고 풍요하고 아늑하고, 사부와 사형들과 그들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예쁜 영소가 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

(그 당시에는 확실히 예뻤다.)

여기로 가라고 한 할아범이 고마웠고 덥석 제자로 받아준 사부님이 고마웠다.

불현듯, 원수까지 갚아준 사부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감이 되어 대성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대성을 감을 한 번 베어 먹고는 던져버리고 선언했다.

 

"난 내일부터 무공 열심히 배울 거야."

"네가?"

 

영소는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두고 봐. 반드시 바람의 검을 익혀서 마구 놀러 다닐 거니까."

"퍽이나."

 

영소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거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랬어. 넌 무공에 소질도 없잖아. 이번에 네 번이나 보고도 못했다면서."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거야!"

 

영소의 염장질에 오기가 생겼으나 영소의 말에 틀린 게 없었다.

대성은 신경질이 났다.

전아저씨가 의심스러웠지만 증거가 없고 증거가 있어도 항의할 수는 없다.

영소는 대성이 사다준 머릿장식을 하고서는 손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이리저리 지어보고 있었다.

 

"나도 바람이 알려줬다. 왜?"

 

가끔 대성이 하던 말이었다.

 

***

 

다음 날부터 대성은 결심했던 대로 정말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네 번이나 보았던 바람의 검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흉내를 내면 그냥 칼을 들고 뛰어가는 꼬라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외우고 있는 구결들은 분명 이해는 다 되는데 써먹으려면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연습했지만 동작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의 심상만 더 뚜렷해졌다.

연청은 더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대성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한마디씩 툭 던질 뿐이었다.

 

"You are doing great 잘 하고 있네. 기장도 잘했어."

 

그냥 해마다 촌락들 다니면서 장부에 기장이나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거니 하고 믿지만, 진심은 아니겠거니 하지만 어쨌든 속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심통이 나서 대성은 대꾸도 안했다.

영소는 근처에서 놀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즉시 반응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바보는 진짠 줄 안다고요."

 

하거나, 혹은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며,

 

"사형은 진짜 보는 눈 없다. 가르치는 거만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마치 자기가 연청보다 더 어른인 것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소도 바람의 검을 못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러던 중에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대성은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총명했다.

자질도 나쁘면서 못된 자존심은 오지게 세었다.

결국 하다하다 안되니까 다른 길을 찾아내고 말았다.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날이었다.

잠시만 밖에 나와도 바람이 솜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다 뺏어 가던 날이었다.

오기로 바람의 검을 수련하던 대성은 대사형을 건너뛰고 다짜고짜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님, 사부님이 바람의 검법을 사부님이 창안하셨지요?"

 

이종무는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어서 식히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창안이라기보다는, I made it up 그냥 지어낸 거야."

"그럼 뭐 허풍 같은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성은 역시 싸가지가 없다.

할아범한테 예의범절을 잘 배우지 못하고 떠받들려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아범이 벙어리라서 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있다.

앉아 있어도 서 있는 사람만큼 큰 사부는

 

"응."

 

하고 싱그럽게 웃었다.

바람의 검은 술법에 가까운 거라서 창안보다는 지어냈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하지만 대성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불만을 토로했다.

 

"It’s really not my thing 구결이 저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부님이 만들었으니까 저한테 맞게 고쳐주시면 안 돼요? 새로 만들어도 좋고."

"그걸 왜 바쁜 내가 해야 해?"

 

이종무는 귀찮아 지는 것을 겁내는 듯이 말했다.

대성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요. I’m so frustrated 속상해 죽겠어요."

"그럼 하지마. Frustrated too. 나도 속상하다."

 

말은 그래도 이종무는 속상한 표정이 아니라 귀찮은 표정이었다.

분명 똑 같이 웃는 얼굴인데도 귀찮음이 읽혔다.

그에게는 대성이 무공을 배우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의 무공에 관한한, 모두가 비슷한 태도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who cares 누가 신경이나 쓴대? 하는 느낌이었다.

 

"사부님!"

 

대성은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저한테 맞는 구결을 만들어도 돼요?"

 

황당한 소리였다.

구결을 만든다는 것은 무공을 만든다는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대성이 무공을 만들겠다니 터무니없다.

하지만 이종무는 자기 자신부터가 터무니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치고 무시해버렸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솔깃했다.

 

"바람의 검 구결을?"

 

이종무가 흥미를 보였다.

대성이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예."

"해봐."

"예."

"해보라고."

"예."

"해보라니까."

"예. 한다고요."

 

대답한 후에 대성은 해보라는 이종무의 말이 허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만들어 왔으면 여기서 해보라고. 만들어 왔을 거 아니냐?"

 

사부 이종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공을 만들면 펼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무의 말은 반이 맞았다.

대성은 펼치지는 못해도 구결은 가져왔던 것이다.

풍림원에는 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무공이든 구결로 전수되고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나선 안 된다.

대성도 그런 규율은 따르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가 생각해왔던 구결 같지도 않은 구결을 말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지 싶어요."

 

술법에 가까운 바람의 검이 술법이 아니라 진짜 무공이 되어버렸다.

술법일 때는 배울 수 있는 사람만 배울 수 있지만 무공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배울 수 있다.

 

"엉뚱해. 아주 엉뚱해."

 

이종무는 대성이 만든 구결을 다듬고 채워주었다.

그때가 열한 살, 열두 살이 되기 몇 개월 전이었다.

대성은 바람의 검 구결을 새로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무공을 창안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 대사형 조성일은,

 

"It’s so childish 어린애다운 짓이네."

 

했지만 매우 기뻐해주었다.

그가 어린애다운 짓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성이 만든 구결대로 하면 바람의 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수련하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몸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칼에도 다치지 않아야 될텐데."

 

연청은 미심쩍어했다.

 

"그건 막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원래 놀라운 건 항상 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야."

 

조성일이 그렇게 말하자 연청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대성이 이런 구결을 만든 것도 연청이 생각할 때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연청은 이종무의 명으로 소작농들 집을 찾아다니며 자질이 좋고 눈에 총기가 있는 아이들을 골라서 풍림원으로 데려왔다.

모두 열 살 이전의 아이들이었고, 사내아이가 여덟, 계집아이도 여덟이었다.

사부의 넷째 제자이고 대성의 바로 위인 정경옥도 풍림원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 물건이네."

 

정경옥은 대성을 안고 궁둥이를 툭툭 쳐주었다.

갑자기 일이 커지고 엉뚱하게 번지는 것 같아서 대성은 당황했다.

웬지 기뻐하면서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은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That’s not what I meant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풍림원에 들어온 아이들 열 여섯은 며칠동안은 풍림원의 다른 애들 속에서 얼핏설핏 보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성과 영소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어린아이들답게, 그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가 대성이 풍림원에서 보내던 황금시절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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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넌 싸가지가 없잖아.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마차 안의 침묵 역시 계속 되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대성이었다.

 

"사형, 우리 소작농들이 산에도 있어요?"

 

연청은 대성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피식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안한다.

대성은 연청이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감추어두었던 과자 하나를 슬며시 내밀었다.

 

"없다.“

 

과자를 받으며 연청이 말했다.

 

"그럼 왜 산으로 가요? 여기는 높은 산이라서 오늘 다 넘지도 못해요."

"나도 알아. 그걸 네가 아는 게 신통하다."

 

대성은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고 편할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말들을 대성은 "소문 내지 풍문"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곧잘

 

“A little bird told me…… 풍문으로 들었는데…"

 

하면서 말을 시작하니까.

방금 전 주변에서 들리던 말들을 떠올린 대성은 조금 심각해졌다.

 

"우리… 혹시 강도…."

 

강도에 대해서 대성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범을 강도들한테 잃었던 일은 대성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다.

그랬기에 강도라면 그 실체를 넘어서 소중한 사람을 앗아갈 수 있는 흉악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과자나 뺏어먹는 연청이 할아범만큼 소중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본능으로 대성은 둘째 사형 연청도 자기가 비빌 수 있는 언덕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성의 불안한 눈에는,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연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연청은 옆에 풀어놓았던 검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도둑놈들한테 가는 거야."

 

마차가 멈추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연청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마차를 둘러싸고 여섯 명의 산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대성은 봄 날 밤 집을 덮쳤던 강도들을 떠올렸다.

무서운 생각이 와락 구체화되면서 몸이 굳었는데, 연청이 단검을 던져 주었다.

 

"맨손보다는 나을 거다."

 

대성이 울상을 지었다.

 

"전 무공 안 배웠잖아요."

"난 가르쳤다. 네가 안 익힌 거지."

 

연청은 겨우 구결만 가르쳐 준 걸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성이 열심히 익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전 죽어요? 무공 안 익혔다고?"

 

연청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대사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남자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지요?"

 

대성은 단검을 뽑아들고 연청을 따라 나갔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건 기장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것도 일은 일이야. 근처의 산채들을 정리해둬야 우리 소작농가들 피해가 없어."

 

연청은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놀랐다.

대성이 울듯이 보였지만 단검을 들고 싸우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너…"

 

왜 나왔냐고 하려는데 대성이 말했다.

 

"안에 있는데 밖에서 칼로 푹 찌르면 꼼짝 없이 죽잖아요."

 

둘째 사형 연청을 잃을까 걱정하면서도, 옆에 있으면 지켜 줄 거라 생각해서 나왔다는 말은 너무 얌체 같아서 하지 않았다.

마부석에서 함께 온 전아저씨가 대견하다는 듯이 대성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때 산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우리는 노요산 서두채에서 나왔다. 순순히 명을 따르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노요산 서두채는 녹림의 114개 산채 중의 하나였다.

연청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숲에서 왔는데."

 

산적이 의아해했다.

 

"한 식구였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소. 어디서 온 형제요?"

"풍림!"

 

연청이 대답했다.

녹림이나 풍림이나, 풍림도 숲은 숲이었다.

 

"헛!"

 

놀란 산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가시오. 어서 가! 우리는 당신들한테는 아무 볼 일이 없소. 아직 올 때가 멀었잖소."

"말투 봐라. 느슨하네. 아직 산채에 온지 얼마 안 된 반거충이 놈인가."

 

연청이 웃고는,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렸다.

 

"일단은 넷 만 해보지. 둘은 재수가 좋아 살겠어. 내 사제 덕분에."

 

말이 조금 이상해서 대성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릴 죽이려 한다!"

 

산적들은 어이없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청의 모습이 대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선을 그리면서 어느 산적을 스쳐지나갔다.

연청의 검날을 타고 피가 공중에 뿌려졌고, 목 잘린 머리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낙엽 위를 굴렀다.

 

"Like wind. 바람처럼. 하나."

 

대성은 연청이 입으로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을 들었다.

두 번째 산적의 목도 떨어졌다.

 

“Like wind, 바람처럼. 둘."

 

그렇게 네 명의 산적이 목 잘려 죽었다.

연청은 자기가 말한 대로 넷 만 죽이고 대성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머지 산 적 둘은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마차로 돌아왔을 때 연청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대성은 단검을 손에 들었는지 땀을 주먹에 쥐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고, 몸이 심하게 떨렸다.

풍림원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일대의 산채들을 돌면서 경고를 하고, 산채의 도적들을 데려다가 일손이 부족한 곳에서 추수를 돕게 시키기도 하였다.

녹림에 속한 산채들은 어느 곳에서나 농장주들에게 골칫덩어리였다.

산적이라고 다 악당들인 것도 아니다.

양민들도 봄이 되어 먹을 게 없으면 녹림에 투신하여 산적이 되곤 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녹림은 없어지지 않는다.

산적은 이름과 얼굴을 바꾸어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이종무가 택한 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민가를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가을에는 그들에게 일을 시켜서 추수한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조성일과 연청, 그리고 지금은 풍림원에 없는 셋째 사형 등일기와 넷째 정경옥이 산채를 돌면서 위엄을 보여서 이룬 것이었다.

방금 연청이 보인 모습은 그들이 처음 산채들을 제압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대성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연청이 또 피식 웃을 때 쥐어짜듯이 말했다.

 

"꼭 제가 죽는 것 같았어요."

"죽는 게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아니라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 죽는데 매우 이상하지."

 

연청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성의 뺨을 톡톡 쳤다.

 

"그래도 남한테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나아. 특히 나쁜 놈들은."

"왜 두 명은 살려줬어요?"

 

연청은 대성도 영소와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성은 연청이 아무데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녀석 은근히 남자네. 네 번 봤으면 충분하잖아. 둘은 네가 처리했어야지."

 

하고 연청이 대답했다.

 

"뭘…"

 

하다가 대성은 연청이 같은 수법으로 네 명을 죽인 이유가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림원의 진짜 무공은 전쟁, 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죽이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허공에 칼질하거나 허수아비를 때리며 익히는 무공은 풍림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이종무가 창안한 무공이고 그 제자들이 전쟁 중에 익혔던 것이었고,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에 더 가깝다.

이름 짓기에 성의가 없는 이종무는 이를 그냥 병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죽어야지.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일 수 있어야 하고."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연청이 했던 말이었다.

 

"넌 자질이 떨어지니까 노력을 좀 많이 해라. 머리는 좋으니까 그것도 도움은 될 거야."

 

대성은 자기가 지켰어야 할 소중한 것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전자는 할아범이고 후자는 영소였다.

아무래도 영소는 불안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데다가 예쁘기는 예쁘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는 것 같지 않으니 자기가 지켜야 할 경우가 많을 게 분명했다.

 

"사형한테는 뭐가 제일 소중해요?"

 

넌지시 물었다.

 

"Now you are talking. 이제 입 연거야?"

 

그 소리가 놀리는 것 같아서 대성은 칭얼거렸다.

 

"아, 좀. 그냥 좀 말해줘요."

"넌 알 거 없어."

"말해줘도 안 뺏어가요."

"말해줘도 못 뺏어가."

 

연청이 말장난을 했다.

대성은 짜증은 조금 나지만 연청과 말하는 것도 조금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왜 안 알려줘요?"

 

연청이 반박 불가능한 대답을 했다.

 

"넌 싸가지가 없잖아."

 

***

 

마차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서두채까지 갈 수 있었다.

산적들도 힘든 건 싫어하는지라 숨겨진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중년의 전아저씨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길을 찾았고, 울퉁불퉁 험난한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를 몰았다.

그는 이종무 휘하에서 전차를 몰고 적을 향해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서두채의 문을 크게 열려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앞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풍림원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여자들 중 한 명이 엎드려 절하면서 물었다.

 

"저희는 감히 장군님을 거스르지 않았는데 어떤 죄를 지었는가요?"

 

채주의 아내이거나 첩일 것이다.

연청은 그 여자를 지나서 제 집 찾아 온 듯이 산채의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난봄에 강도 네 명을 받아줬지 않소?"

 

여자가 따라가며 대꾸했다.

 

"녹림은 의탁하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 곳이 아닙니다."

 

연청이 피식 웃었다.

 

"우리 풍림원에서 그 넷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텐데."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전아저씨가 빈정거렸다.

 

"사람을 안 가리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온 돈을 가리지 않았던 게지."

 

연청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털가죽 덮인 넓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 오전에는 출발해야하니까 그 전에 데려다 놓으시오. Make yourself at home 집에서 처럼 편히 있어."

 

뒤에 말은 대성에게 하는 소리였다.

여자는 절을 하고 나갔다.

전아저씨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파수를 보았다.

대성은 연청이 말하는 네 명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할아범을 때려죽인 강도들이라는 사실을 짐작으로 알았다.

자기는 아무 생각없이 노는 동안 사문에서는 자기의 원수를 추적하고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와 사형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울컥 생겨났다.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기장하러 간다 해놓고…."

"싸가지는 그래도 양심은 있네."

 

대성이 투덜대듯이 고마움을 표하자 연청이 또 피식거렸다.

 

"사제가 있는데, 사제 원수가 있는데, 사문이 있는데, 사제는 직접 복수하기엔 어리니 사문이 나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기장한다고 했잖아요."

 

대성이 조금 기죽은 듯이 온순하게 말했다.

 

"대사형은,"

 

연청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분이 아니야. 부득이 한 가지만 할 때도 목적은 여러 가지인 분이지."

 

대사형 조성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대성은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 책망 받는 느낌이 들어서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How should I know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말하는 게 점점 더 영소 닮아간다."

 

연청이 정색하고, 대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소리라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데 영소 닮아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

 

그날 밤, 산적들 소굴에서 자면서 대성은 복잡한 꿈을 꾸었다.

할아범이 절구에서 떡을 치던 모습이며 목이 떨어진 산적들의 모습, 연청이 펼쳤던 바람의 검술, 그리고 영소의 얼굴도 꿈에 보였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니 강도 네 명이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연청은 대성에게 그들이 맞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대성이 그렇다고 하자 산채의 여자들에게 떡매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시켰다.

강도들은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산채 여자들에 의해서 떡매에 맞아 떡이 되어 죽었다.

여자들은 연청이 죽인 네 명의 산적들의 원한을 그렇게 풀었다.

대성은 연청이 산적들을 당연히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아저씨는 산적 중에는 착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I doubt it 그래도 간혹 있지 않을까요?"

 

대성이 물으니까,

 

"좋은 사람은 다 굶어 죽었어."

 

전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착한 사람들은 산적이 되지도 못하고 흉년에 굶어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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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상한 장군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달은 밝고 바람은 서늘해져 창으로 들어왔다.

대성은 또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글을 잘 쓰니까 서기 대신 일을 시키기 위해서?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서기를 들이면 될 일이다.

글 좀 잘 쓴다는 게 어린아이를 제자로 들일 정도의 거창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대성은 알고 있었다. 오며가며 듣는 귀동냥이지만 사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자기가 가져다 바친 돈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부유한 풍림원의 입장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었다.

할아범은 왜?

대성은 할아범이 왜 자기에게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풍림원은 일반 무림문파가 아니다.

특별할 것도 별로 없는 곳인데, 할아범이 그렇게 한 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성에게 풍림원은 영소가 있고 좋은 어른들이 있는 곳,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시장에서 주워듣고 자기가 아는 바로 무림에 이런 문파는 없다.

땀과 피와 죽음이 거친 강물처럼 넘실대는 곳이 무림이다.

어느 문파에 속해있다는 것은 문파라는 배로 그 강을 건너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뜨는 느낌이 들어서 보니까 아침이었다.

그리고 대성은 풍림원 밖에서 풍림원이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너 나하고 말하기 싫어?"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연청이 물었다.

대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Not funny. 재미없어요."

 

오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 한 게 재미없다는 소리다.

연청은 어이가 없었다.

 

"넌 말을 재미로 하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Can a duck swim? 네."

 

연청은 더 기가 막혀 혼자 투덜거렸다.

 

"아무리 우리 풍림원의 기율이 느슨하다지만 너 이건 아니다. "

"사형은 뻔한 소리만 하잖아요. 영소는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는데… 뭐 어른들은 항상 뻔한 말만 하긴 하지만…."

 

대성은 대성대로 시큰둥하게 혼잣말인 듯 들으라는 말인 듯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매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익숙해진지라 연청의 성미와 대사형의 성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말할 때 대성이 집중해서 듣게 하려면 과자나 떡을 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과자가 없으면 말이 귀에 안 들어온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다.

말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다.

연청은 가지고 온 과자나 떡이 없어서 대성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성은 간단한 녀석이 아니었다.

별 말썽을 부리지는 않으니 천덕꾸러기라 하기도 애매하다.

노는 꼴을 보면 귀엽지만 말하는 짓을 보면 귀염 받으려고 하는 게 없다.

연청이 보기엔 그냥 어린애다.

대성은 흔들리는 마차에 맞춰서 발을 흔들며 혼자 놀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할아범과 살면서 뭐든 제멋대로 하던 못된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그 시각 이종무는 뜨락에서 중천의 햇살을 받으며 눈을 지그시 하였다.

눈썹사이로 빛이 산란했다.

그는 항상 아기를 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는다.

 

"좋다!"

 

하며 웃는데 옆에서 걷던 큰 제자 조성일은 뚱했다.

 

"이번에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많이 나쁘지 않으면 좋은 거야."

 

이종무는 싱글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막내는 무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것에도"

"영소는 좋아하잖아."

 

조성일은 동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종종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해서 심각한 것도 심각하지 않게 하는 버릇이 있다.

 

“Relax, relax. 힘 빼.”

 

이종무가 조성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You never know, never know. 앞날은 아무도 몰라. 그 애가 혹시 대문장가나 서예가가 될지 누가 알아?"

 

당연히 모른다.

사부는 조성일이 안다고 했던 것처럼 그걸 대답으로 툭 내놓는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군님."

 

조성일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장군님이라는 호칭은 조성일이 부하로서 이종무를 모실 때의 엄격한 호칭이다.

제자가 된 이후로는 이종무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또 또 그런다. 난 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철렁한다."

"경옥이가 네 달 동안 조사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딱 막내가 말한 것만 나왔습니다. 막내뿐만 아니라 죽은 노인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시장에 나타났답니다."

 

경옥은 이종무의 네 번째 제자로 여제자다.

장원 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종무와 조성일의 지시를 받아 늘 외부에서 어딘가로 다닌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보네."

"이상한 게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성일은 딱딱하게 말했지만 이종무는 바위에 걸터앉아 웃기만 했다.

 

"그 노인이 막내한테 우리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한 것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고… 연청이 틀렸습니다. 막내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연청한테 딸려서 밖으로 보낸 건가?"

 

이종무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조성일이 정색을 했다.

 

"막내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밝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지 짐작도 안 됩니다. 제가 사무를 보다가 작은 소리로 한 말도 다 듣더군요. 우리 풍림원 안에서 하는 말은 어디서 하든 다 듣습니다. 그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넌 막내가 무슨 요괴라도 되는 듯이 말한다."

 

책망도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성일은 책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해야 할 말, 해야할 책무를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종무의 압력 속에서도 자기 의지를 밀어부치고 관철하는 데 이골이 나있다.

 

"요괴가 아닌 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많습니다. 막내는 자기가 멀리서 나는 소리도 다 듣는 줄 모르거나, 그게 이상한 줄을 모릅니다."

 

이종무는 막내 대성에게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공 연구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소와 매일 논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건 그대로 좋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이종무의 처는 신경 쓰고 걱정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종무는 대성과 영소가 그렇게 자라 정이 들어 혼인한다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미 죽은 자들을 이어서 살고, 살다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는 세상이다.

세상만사를 아기 보듯 보고 꽃 키우듯 대하는 이종무다.

그에게 이 세상은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고, 사람일은 조금 멀리서 보면 대수로울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이 이상해 보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가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다.

 

"음. 그건 좀 별스럽네."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이 쓴 글씨도 놀라웠다.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면서 대성은 문장을 줄줄 써낼 수 있었고, 글씨에서는 특히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What’s your concern? 네가 걱정하는 게 뭐야?"

 

조성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노인은 장군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종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이종무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그 일대에 알려져 있었다.

대농장을 가진 토호들 중에는 크고 작은 나라 벼슬을 하지 사람이 거의 없으니 대수로울 게 없다.

그러나 조성일이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다.

 

"나를… 안다?"

"제 짐작입니다. Take a look 한 번 보십시오."

 

조성일은 소매 속에서 할아범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최대한 할아범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종무는 그림을 잠시 보다가 조성일이게 돌려주었다.

 

"모르는 얼굴이야. 기억에 없어."

"장군님을 직접 안다면 아마 바로 찾아왔겠지요."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막내의 얼굴을 보면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 노인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고 막내를 주인으로 대했으니까 막내와 관련 있는 사람이 장군님을 아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종무는 이내 대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진진홍. 막내는 진진홍의 자식인가?"

"장군님의 군사를 다 말아먹은 그……"

 

개자식이라는 욕이 나오려는 걸 조성일은 겨우 삼켰다.

 

조성일은 이십 수 년 전, 전쟁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조성일은 열여덟 살이었다.

이종무는 서른 세 살이지만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었고 그 무엇도 거침없던 시절이었다.

네 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세운 전공은 너무 커서 포상을 받을 포상을 정하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다.

나랏님도 안절부절하다니...

이종무의 측근들은 큰 공을 세운 게 오히려 화근이 될까봐 불안한 정도였다.

옛날부터 나랏님들은 너무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종무는 당시,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탐욕 때문에 화를 입지."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말한 후에 모든 포상을 마다하고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장군의 인부를 반납한 후 낙향했다.

논공행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게 전부 진실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진진홍 장군은 이종무의 후임이었다.

그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고 무공이 높았다.

명문가 출신의 뛰어난 무장으로 전장에서 이종무가 갑자기 능력을 드러내기 이전까지는 이종무에 버금가는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종무의 군을 물려받은 후 이종무처럼 공을 세우려다가 수 만 명의 군사를 잃고 자기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종무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진진홍은 감히 이종무를 경쟁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종무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진홍에게 작은 재주가 좀 있기는 해도 그런 신통한 재주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그냥 좀 닮은 얼굴일 뿐이야. 진진홍의 자식이라면 경옥이가 벌써 알아냈을 거야."

 

일리가 있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확정했다.

 

"진진홍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I am easy 그러든가 말든가. It’s up to you 알아서 해."

 

하며 이종무가 일어났다.

이종무는 조성일에게 뭐든 다 믿고 맡기고, 조성일은 항상 그 이상을 해왔다.

 

"아직 애야. 막내 상하게 하지는 말고."

 

하는 말에 조성일은 이종무가 대성을 다섯 달도 되지 않은 새 완전히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정4품 장군 직에 있으면서 대장군과 상장군도 듣지 못한 군신, 전신이라는 소리를 30살 때부터 듣던 이종무였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종무는 부하들을 철저히 신뢰했고 부하들은 이종무를 신같이 추종했다.

이종무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그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신뢰를 받은 자는 자기의 뼈를 갈아서라도 그 신뢰를 배신하지 않았다.

조성일은 이종무를 따르던 정 7품 별장이었다가 첫번째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되기 전부터 이종무를 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적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상황들을 숱하게 봤었다.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역할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맡기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종무를 혐오하기도 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장군이 되었고, 부하들의 실력도 알아보지 못하니 금방 전쟁에서 패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종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조성일은 이종무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종무가 왜 전쟁의 신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지목한다면 바로 조성일 자신이다.

 

"What if I can’t complete the operation? 제가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임무를 맡은 신임 장교들이 불안해하며 물을 때면,

 

“it never gonna happen. 그럴 일은 절대 없어. I can assure you. 내가 장담해."

 

조성일이 대신 답해주기도 했다.

조성일에게 대성은 이종무 외에 처음 보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종무가 있는 풍림원에 또 다른 이상한 능력이 있는 대성이 오게 된 게 우연일리가 없다.

이종무의 보이지 않는 무엇에 끌려 왔을 수도 있고, 어떤 사정이 있었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풍림원은 세상의 여러 곳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곳이다.

대성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이 무엇이든 열 두 살이 되기 전에 알아야 방향을 잡기에 좋다.

조성일 자기처럼 너무 늦으면 사제들처럼 못 되고 반쪽이 되고 만다.

사부 이종무는 신경 쓰지 않더라도 조성일 자신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써야 하고, 그게 조성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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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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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람과 숲의 장원

 

 

 

그러니까, 3년 전이 아니라 5년 전이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도 그때는 어린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말투를 사용했었다.

 

"글은 언제부터 썼는가?"

 

풍림원주 이종무는 대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부터 물었다.

그도 시장에서 글을 써서 판다는 대성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심 신통해하던 차였는데 제 발로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니 두 말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다.

 

"몰라요."

 

대성은 이 말에도 저 말에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긁다가 자기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응? 그게 놀랄 일인가?"

 

이종무는 자기 질문에 대성이 놀란 줄 알고 물었다.

 

"제가 머리 긁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서요."

 

대성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껄껄 웃었다.

대성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영소도 기둥 뒤에 숨어서 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아마 처음 본 그 모습에 대성은 영소한테 조금 반했을 것이다.

영소의 얼굴은 작고 하얬다.

탱글탱글한 볼은 생기가 넘쳤으며, 표정이 다채롭고 참 예뻤다.

무엇보다도 머리에 꽂고 있는 노란 나비장식이 가장 예뻤다.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란 나비 장식은 지금은 영소의 머리에서 볼 수 없다.

어느 여름 날 방앗간 근처의 폭포에 물놀이 갔다가 잃어버렸다.

나비장식을 잃은 날부터 대성의 눈에는 영소가 좀 덜 예뻐 보였다.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아기 사슴이 영소보다 더 예뻤다.

속마음은 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성은 예쁜 것만 보면

 

"예쁘다. 곱다."

 

등등의 말을 했었다.

그랬는데, 점차로 영소 자기한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딴 데 대고

 

"예쁘다. 매우 예뻐."

 

따위의 말들을 사용하니까 심통이 나서 쏘아붙이곤 했다.

영소의 성미가 나빠진 데는 분명 그 이유도 있다.

 

"그저 예쁜 것만 보만… 그만 좀 밝혀! 이 바보야!"

 

그러면 대성도 참지 않았다.

 

"예쁜 걸 예쁘다 하지 뭐라 해!"

 

(예쁘지도 않은 게.) 하는 말은 그래도 영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속으로만 말하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예뻐 보일 때가 있으니까 전혀 예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뭣했다.

영소는 요리하는 거 배우기도 하고 약 만드는 것 배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더 안 예뻐졌다.

그리고 이미 대성의 마음에서는 예쁜 것과 좋은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예뻐 보일 때도, 화내고 싸울 때도, 아주 못 되게 굴 때도 영소가 좋았다.

싫었던 적이 없다.

그래도 한 살 차이다.

사문의 엄격함에 비추면 주고받을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대성과 영소는 친구가 되어 아웅다웅하면서 투닥거렸다.

 

***

 

사부 이종무는 조금 마르고 키는 매우 큰 사람이었다.

보통 어른들보다도 머리 한 개 반 또는 두 개 정도 차이로 컸다.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또 대하기가 불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더 이상했다.

사부의 평상시 표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공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항상 싱글벙글했다.

주변에서 누가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변함없었다.

영소는 너무 싱글벙글하는 자기 아버지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성이 보기에 사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일 좋았다.

풍림원은 기묘한 규율이 있어서 분명 엄격한 곳임에도 늘 넉넉한 여유가 몸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이름 높은 구대 문파와 칠대 검파가 있다.

고수로는 2제 3왕 6군 8흉 같은 자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풍림원은 유명한 문파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고수가 있지도 않았다.

역사도 고작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풍림원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풍림원은 농토를 많이 가진 장원이었다.

대성이 듣기로 한 때 장군이었던 사부 이종무가 손자병법에서 한 구절 따와서 장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림원은 지역 이권에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세력이 크지도 않고, 세력을 키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의 대부분을 사부는 무공을 연구하는데 소비하고 사형들과 노복들은 분주하게 일했다.

대성과 영소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주로 노는 게 일이었다.

이렇듯 풍림원은 지방 토호였고, 무림보다는 오히려 관에 더 가깝다면 가까웠다.

해마다 두 번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치니까.

보통 무림 세력은 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사부가 좋아한다는 손자병법에는 바람(풍)과 숲(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질풍처럼, 숲처럼, 불길처럼, 산처럼, 구름 속의 별처럼, 벼락처럼.

 

군사를 움직이는 병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으로만 보자면 과연 여기서 장원의 이름을 따올 만큼 대단한 내용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냥 가만있다가 후딱 움직이라는 말일 뿐인데 신비한 척했다.

글을 알고 쓰는 대성의 입장에서 보면 따분한 소리다.

풍림원이 따분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평화롭다고 하는 게 더 좋겠다.

대성은 가끔,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쫓아낼 것 같지 않았으니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지만 문득문득 떠올랐다.

 

***

 

대성은 귀가 매우 밝았다.

 

"근골은 어떤 거 같나?"

"보통이군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딱 보통입니다."

"무공에 대한 자질은?"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호원무사 수준은 되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오고 사흘 째 되던 날, 대사형 조성일과 둘째 사형 연청이 대성에 대해서 주고받은 말이었다.

 

"그만하면 됐지. 평범해서 나쁠 것도 없고, 글 잘 쓰는 사람도 하나쯤 있으면 괜찮고."

 

대사형은 별 기대도 안 한 듯이 말하곤 웃었다.

둘째 사형도 더 말하지 않았다.

대성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대를 받지도 않고 책망도 받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마음껏 놀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매일 영소하고 장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때로는 장원 밖의 야산에 가서도 놀고, 장원 내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도 했다.

심심하면 방앗간, 목재소, 대장간, 누에 치는 잠실, 거름 일구는 구덩이 (발효되면서 좋은 냄새가 난다. 그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도 많이 핀다.), 큰 말들이 있는 마구간, 술 빚는 술청 등을 기웃 거리기도 한다.

풍림원 안에는 군사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있었다.

무공은 둘째 사형이 가르쳐주었다.

가르치는 둘째 사형도 건성이었고 배우는 대성도 건성이었다.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배우는 날도 몇 마디 말해주고 외우라는 게 전부였다.

시범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끝나곤 했다.

노래를 배우는 건지 무공을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배우지 않는 건 그것대로 좋은지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영소와 놀다가 다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혼나지는 않았다.

잘 먹고, 잘 노는 어린아이의 삶이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은 아무 걱정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에 영소는 매일 더 예뻐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예뻐지던 시절은 벌써 지나갔고 점점 되바라진다.

이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다.

어느 날 영소가,

 

"나 뭐 배워."

 

하더니 그 다음 날 조금 덜 예뻤고 그 다음 날은 조금 조금 덜 예뻤다.

이전에는 영소를 보기만 해도 흐뭇해져서 헤벌레 웃곤 했다.

영소가 매일매일 예뻐지던 때의 일이다.

 

"나 예쁘지?"

 

영소가 불쑥 다가서면서 물으면,

 

"응, 응."

 

대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악한 영소는 자기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 예쁘긴 예뻤다.

 

"그러니까 자꾸 내 얼굴 보지마."

"왜? 닳는 것도 아닌데."

 

대성이 심드렁하게 물으면 영소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네가 보면 나도 너 봐야 하는데, 넌 못 생겼잖아."

 

억울한 소리였다.

대성이 벌컥 해도 영소는 가소롭다는 듯이 깔아뭉갰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한테 시집 갈 거야."

"그럼, 그럼 세상사람 다 만나서 비교해봐야겠네."

 

하고 대성이 빈정거리면,

 

"이래서 넌 바보야. 다 만날 필요없어. 느낌이 딱 온다고."

 

하면서 영소는 하녀들에게 줏어들은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둘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말을 매우 중요한 말인 양 주고 받고, 목적없이 뛰어다녔다.

나뭇가지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강을 응시하거나 풀잎을 손톱으로 똑똑 찍기도 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정은 그렇게 들었다.

서로 공유한 시간이 서로를 묶고 있는 줄은 대성도 영소도 몰랐다.

영소가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후로 덜 예뻐 보였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다 가을이 왔다.

단풍잎을 줏느라고 후원 마당을 쭈그리고 돌아다녔던 날 저녁에 사부가 대성을 불렀다.

 

***

 

사부에게 물었다.

 

"Did you want to see me? 저 찾았어요?"

 

대성에게 사부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고, 풍림원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편했다.

대답은 대사형인 조성일이 했다.

 

"It’s time to make yourself useful. 이제 쓸쓸 밥값을 해야지."

 

대사형은 사부를 대신해서 풍림원의 모든 사무를 다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 다음으로 높고 훌륭한 사람이며 훌륭하게 보이는 횟수로 치면 자주 못 보는 사부보다 더 많았다.

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글 쓸까요?"

 

원래 글을 쓰고 팔아서 돈을 벌었던 대성인지라 자연스럽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할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긴 했으니까.

사부가 과자를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부터 추수가 시작된다. 너는 둘째를 따라가서 기장을 하거라."

 

기장은 장부를 적는 것을 말한다.

대성은 글은 알아도 기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곤란한 상황에 표정이 드러나자 대사형이 다른 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소작농 이름 물어보고, 소출이 얼마나 나왔는지만 적으면 된다."

"저 혼자요?"

 

대성이 반문했다.

대사형이 인상을 썼다.

대성은 대사형이 과자를 다시 가져갈까 싶어서 과자부터 먼저 받아 챙겼다.

 

"사부님이 방금 말씀하셨는데 뭔 생각으로 들었어? 둘째 연청하고 함께 가야지."

 

대성은 머뭇거렸다.

 

"그럼 둘째 사형이 하면 안돼요? 전 내일 영소하고 도토리 줍기로 했는데……"

"난 바빠. 그 일 외에 또 네가 해야 할 것도 있다."

 

둘째 사형 연청이 툭 던졌다.

연청은 과자도 주지 않았다.

그는 대성한테 무공을 대충 대충 가르친다.

가끔은 말로 놀리기도 하는데, 분명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일 텐데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잘 생기기는 매우 잘 생긴 미남이지만 대성은 미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성은 한숨을 쉬고 대청을 빠져나왔다.

풍림원은 대농장으로 농토가 많았고, 소작농들이 이룬 마을의 숫자도 많았다.

추수 기장하러 간다는 말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는 바깥에서 돌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동안 영소와 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히 사부 앞에서, '아! 뭐 됐다'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는 걸 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힘든 척, 술 취한 척하며 방으로 돌아가는데 영소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 일 간다."

 

대성은 불쌍한 척, 비통한 척하며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이 병신이 뭐래."

 

입이 조금 많이 험한 영소한테는 대성의 감정 호소가 털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쏘아 보는데 영소가 소매 속에서 불쑥 뭔가를 꺼내 주었다.

 

"받아!"

"뭐야?"

"뭐긴 뭐야. 거울이지."

 

작은 구리거울이었다.

 

"거울은 왜?"

"웬만한 집에는 거울 없어. 나가면 소작농들 집에서 자야 할 텐데, 병신 같이 머리카락 흐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주는 거야. 귀찮더라도 댕기는 매일 새로 묶고."

 

아직 어린 대성은 영소와 마찬가지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잘 때 베개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확 잘라 버리고 더벅머리 하는 게 잘 때는 더 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댕기머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벅머리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날린다.

방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걸 하녀들이 싫어한다.

영소도 더벅머리는 싫어한다.

귀찮긴 해도 댕기머리하면 이마가 말쑥하게 드러나고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다.

영소의 말에 대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응."

 

하는데,

 

"이 참에 거울 보면서 네가 얼마나 못 생겼는지 잘 확인하고 잊어 먹지마."

 

대성이 거울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자 영소는 깔깔 웃고 도망가 버렸다.

녹색 치마를 거두어 잡고 허둥지둥 뛰는 모습이 예뻤다.

영소는 늘 녹색 치마만 입는다.

치마에 수놓인 과일이 수박이나 포도, 사과로 바뀌거나 꽃이 매화, 국화, 난초 등으로 바뀌니까 다른 치마인 줄 알 수 있다.

사실 대성은 못생기지 않았다.

도두라진 특징은 없지만 어찌 보면 곱상해서 여자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니까 자기도 인중이 긴가, 미간이 넓은가 하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는 건 조금 더 큰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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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환타지, SF로 위장한 영어교재입니다.
일천 개의 영어 표현이 작중에 나옵니다.
천개의 검은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일천개의 키워드, 문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상황에 맞게 이 표현들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일상적인 회화나 영어 테스트가 보다 수월하게 가능할 것입니다.
웹소설을 도구로 쓰게 된 것은 영어공부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반복해서 몇번 읽게 되면 어느덧 영어 표현에 익숙해지리라 자신합니다.
재미와 공부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천개의 검- 이것은 영어교재!

 

 

 

1화

 

                    이름을 묻는 꿈

 

 

 

"이름이 뭐야?"

"진대성"

 

꿈을 꾸고 일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몽롱하고 흐릿했다.

이 꿈은 삼 년이 넘도록,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대성은 그 기간 동안에 자기 머리가 돌로 변해간다고 느꼈다.

눈을 떠도 항상 머릿속에서는 자기 이름을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관성이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마당에는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바람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 속에 머무르는 동안 계절이 또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성의 무공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삼년 전에 비해서 키 만 더 컸지 실력은 떨어진 감도 있었다.

한심하게도 그 사이에 잘하게 된 것은 오직 헛웃음을 씨익 짓는 것뿐이었다.

유쾌하고 재미나게 살려했고 그렇게 살았던 자기 자신은 이제 없다.

 

"에이 씨…. 바보같다."

 

영소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성은 열여섯 살,

사부의 딸이자 사매이자 대성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영소는 열다섯 살이었다.

늘 붙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대성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라고 웃는 거야."

 

영소는 화를 내고 가버렸다.

싸우더라도 주로 함께 있었는데 가버렸다.

가끔은 못되게 저런다.

대성도 화가 났다.

비무에서 졌기 때문도 아니고, 지고 나서 바보 같이 웃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소한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도 아니었다.

영소가 가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아프면 쉽게 화가 난다.

대성은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내 머리를 쪼개려 드는 거 같단 말이야."

 

머리는 속에 누가 들어있어서 망치와 정으로 쪼는 것처럼 아프다.

아프다 못해 혼미하다.

대성이 바보처럼 웃는 까닭은, 그렇게 웃으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온 것은 5년 전, 열한 살 때였다.

그 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써서 팔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대성이 글을 팔았다면 어리둥절하며 묻는다.

 

"책을 판 게 아니고?"

 

그러나 그들은 대성이 쓴 글을 한 번 보면 바로 수긍했다.

대성은 큰 붓이나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어떤 글자든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몇 살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대성이 기억하는 것은 시장에서 글을 써주고 돈을 받아서 먹고 살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뭐든 잘 기억하는 녀석이 자기가 언제부터 그걸 했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그런 소리도 들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돈은 벙어리 할아범이 관리했다.

할아범은 대성을 손자처럼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하는 모습을 평생 보였다.

대화는 수화로 했다.

할아범을 따라서 시장에 가면, 할아범이 자리를 잡고, 대성이 이전에 쓴 글을 몇 개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펼친 글들 중에는,

 

-어떤 글이든 원하는 글을 써줍니다.

 

하는 것도 있었다.

대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먼저 구경꾼부터 모여들었다.

어린 아이가 큰 붓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종이 위에 신통해 보이는 글을 쓰는 것은 요술이나 다름없었다.

 

"He’s an infant prodigy. 신동이네."

 

하면서 그렇게 쓴 글을 바로 사가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저런 내용을 이따만한 크기로 써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게 뭔 내용이요? 뭐라 쓴 거요?

 

하고 묻는 까막눈이도 있었다.

까막눈들은 대체로 자기 자식 이름 같은 것을 써달라고 했다.

대성의 글은 헐값에 팔렸지만 원가가 낮았다.

할아범과 대성이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글 쓰는 것이 좋기도 했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감탄하고 우러러 보는 것도 좋았다.

할아범이 죽지 않았더라면 대성은 여전히 시장에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대성이 좋아하는 떡을 잘 만들어주던 할아범은 떡매에 맞아서 죽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힘없는 노인이라면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사망 방법이었다.

어느 밤 불쑥 들이닥친 불한당 네 명은 매우 솔직하게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 내놔!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아무도 온다는 사람이 없었기에,

 

“Who could that be? 누구일까?"

 

하며 문을 열어주었던 대성과 할아범의 행동은 그 말에 구속되었어야 했다.

할아범은 벙어리라서 말도 못하고 손짓이며 고개 짓으로 돈이 없다고 했고,

벙어리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맞았다가 죽었다.

불한당들은 할아범을 단매로 바로 때려죽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때리다가 대성을 때리며 협박했고, 대성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할아범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온 집을 다 뒤지고 뒤엎은 불한당들은 할아범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는 재수 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며 침을 뱉고 사라졌다.

불한당들이 가고 난 후 할아범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어눌한 음성으로 쥐어짜듯 대성에게 말했다.

 

"도련님, 많이 아팠지요?"

 

대성은 그 순간에 강도들이 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벙어리 할아범이 말을 했던 거였다.

대성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대성은 펄쩍 뛰었다.

 

"말할 수 있는 거였어요?"

 

벙어리 할아범은 끊어질 듯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런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떡 만들기만 했지 자기가 피 떡이 되어 죽을 줄은 몰랐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서, 대성은 할아범의 입이 금방 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말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사람이나 할 만한 말이었으니까.

할아범이 이전에 말할 수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 살았을 리가 없었다.

맞아서 벙어리 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벙어리가 맞고 나서 말문이 트이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할아범은 이말 저말 횡설수설했다.

대성은 할아범이 너무 맞아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말문은 트였는데 이제는 돌아버렸구나 싶었다.

그동안 모은 돈이 절구 밑에 숨겨져 있다고 할아범이 말했다.

대성은 그 돈 줘버리지 왜 이렇게 되도록 했냐고 물었다.

할아범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 줬으면 우리 둘 다 죽었습니다. 그런 놈들은 기분 좋으면 사람 죽입니다."

"안 주면 죽이는 거 아니야?"

"Mark my words, young master 잘 기억하세요, 도련님. 나쁜 놈들, 특히 힘없이 나쁘기만 한 놈들은 기분 나쁠 때는 잘 참는 버릇이 있습니다. 안 그러면 저들도 누구한테 금방 맞아죽거든요. 더구나 도련님은 어려서 그놈들이 기분 나쁠 때는 안 죽입니다. 애새끼 죽이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까 참는 거지요."

 

입이 트인 할아범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새벽녘에 숨을 거둘 때까지, 할아범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가 할아범은 자는 듯이 죽었다.

그 얼굴에 맞은 상처는 많았으나 회한은 없었다.

평생 벙어리로 살다가 죽기 전 두 시간 쯤 수다 떨고 죽은 것만으로도 할아범은 후련해보였다.

혼자 남겨진 대성을 딱히 걱정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신나게 말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럴 틈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대성은 할아범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는 재미있게, 유쾌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큼 할아범이 마지막에 보여준 유쾌함은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리고 최소 2년은 유쾌하게 살았다.

 

***

 

대성은 절구통에 줄을 묶고 당겨 넘어뜨렸다.

절구통 아래에 숨겨져 있는 작은 항아리에 담긴 돈과 할아범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

편지를 읽고서야 꼭 필요한 말은 할아범이 이미 편지에 다 써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에는 풍림원으로 가서 돈을 바치고 제자가 되라는 말이 있었다.

He did as told 대성은 그대로 따랐다.

무공을 배우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고, 그냥 의탁할 곳이 필요해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풍림원에 들어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같이 놀다가 영소에게 이야기 했다.

 

"그래서, 편지에는 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 풍림원은 또 어떻게 알았대? 벙어리 할배가."

 

영소가 호들갑을 떨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에 대성도 여러 개의 답을 이어야 했다.

 

"별 거 없어, 내가 꼭 해야 할 것들만 적혀 있었어. 풍림원은, 그야 난 모르지. 할아범도 죽었는데."

"So, what’s that 그러니까 그게 뭔데?"

 

편지 내용을 묻는 말이다.

 

"일찍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허리 꼿꼿하게 펴고, 음식 먹을 때는 흘리지 말고 양쪽으로 꼭꼭 씹고……..남하고 다투지 말고……"

"때려 치워.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 할 거지! 넌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준 게 없어. 엄마 아빠도 몰라, 글을 언제 배웠는지도 몰라. 뭐든 다 그래! 넌 뭐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영소는 신경질을 내면서 팩 돌아서 가버렸다.

그때나 5년이 지난 지금이나 영소의 성미는 바뀐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은 진짜 더 말해줄 게 없었다.

자기도 꽤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기 전 2년 동안은 매우 즐거웠다.

할아범이 죽으면서 유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떡도 많이 얻어먹었고 무공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삼년 전, 즐거움은 끝이 났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시 세상이 일그러지는 착각 같은 것이 있은 후부터 꿈은 시작되었다.,

 

"포트 열렸습니다. 접속 완료. 로그인 성공. 다운로드 시작합니다."

 

이상한 이 음성은 이후 꿈에서 이름을 묻는 그 음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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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十二 章

 

                    傳說終末

 

 

태산(泰山) 관일봉(觀日峯)!

 

그 준봉에 우뚝 자리한 한 채의 웅장한 장원이 있었다.

바로 혈문(血門)의 소요 분단인 소요장이었다.

잠잠하던 소요장, 갑자기 소요장에 일대혼란이 일었다.

으 악!”

크아악!”

크윽...!”

허공을 메아리치는 처절한 비명성! 그리고 섬뜩한 피보라...

뒤이어, 화 르 르...! ! 소요장 전체는 충천하는 화염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우하하하...! 혈문의 애송이들아! 노부 천마황이 여기 있다!”

천마황의 찌렁찌렁한 대소가 소요장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천궁패왕 곡강도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하하... 선배님! 천궁패왕도 양보할 줄 모릅니다!”

이어,

!”

와 아!”

일천(一千)의 맹호같은 군웅들이 광풍폭우같은 기세로 소요장을 휩쓸었다.

츠츠츠읏... 위 잉! 콰르릉 펑!

소요장은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 승산이 없다!”

치솟는 불길 속에서 한 명의 노인이 황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대천성자! 아니, 자운형(紫雲形) 바로 소요장주였다.

그 자가 허공을 몸을 띄우는 순간,

자운형! 대비불광참(大悲佛光斬)을 받아랏!”

파파파 파악! 한 명의 여인이 교갈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림과 동시에 찬연한 강기를 내쳤다.

콰 릉! 콰콰쾅...! 가공할 폭음이 짓터져 오름과 동시에,

크윽!”

자운형은 허공에서 피를 뿌리며 백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서랏!”

순간 여인은 재차 교갈을 내지르며 다시 그 자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나 그 순간,

하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며 따뜻한 손이 여인의 어깨를 들러왔다.

여인 자하빈, 그녀는 가늘게 몸을 떨며 돌아섰다.

상공...!”

그녀의 뒤에 신선의 퐁모를 지닌 백의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군무현, 바로 그였다.

자하빈은 군무현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

군무현은 자하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참으시오. 당신의 손으로 그 자의 목을 벨 수 있도록 해주겠소!”

... 상공!”

자하빈의 어깨가 여리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전(大殿)!

온통 핏빛 일색의 웅장한 대전이었다.

섬뜩한 피()의 정화(精華)가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곳, 전면에는 높은 태사의 하나가 놓여 있다.

그 태사의 위, 한 명의 중년인이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선비처럼 고아하고 청수한 기품의 인물. 극히 고요한 기도에 만인을 짓누르는 위엄이 은은히 묻어나는 인물이었다.

그의 앞, 부들부들 몸을 떨며 오체복지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 ... 혈종(血宗)! 용서하소서!”

한때 대천성자(大天聖子)라고 불리우던 자, 자운형 바로 그자였다.

문득, 청수한 중년인의 눈빛이 깊숙이 빛을 발했다.

자운형... 애초에 그대를 거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대가 혈문(血門)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 무슨 말씀을...!”

자운형은 파르르 눈꼬리를 경련하며 고개를 들었다.

중년인은 조용한, 그러나 차가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자운형의 말끝을 잘랐다.

저 소리가 안들리느냐?”

“...!”

자운형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함성! 대지(大地)가 함몰되어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함성이 그의 고막을 강타했던 것이다.

와 아!”

...!”

그것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자운형 안색이 시커멓게 질리고 말았다.

중년인, , 혈종제(血宗帝)는 차가운 냉음을 흘렸다.

구류천종이 그대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순간,

으으...!”

자운형의 전신은 극도의 공포로 부르르 떨렸다.

혈종제는 대전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얼음같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네가 불러들인 화이니... 네가 가서 수습하라!”

이어, 그는 무섭게 자운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본문의 지금 힘은 천하에 구할 이상이 분산되어 있어... 형세를 피할 수 없다!”

... 알겠습니다!”

자운형은 피가 배이도록 깨물었다. 이어, ! 그 자는 즉시 대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콰르르릉! 돌연 대전의 문이 박살나며 폭음이 터져올랐다.

그와 동시에,

크 악!”

밖으로 몸을 날리던 자운형이 피를 뿌리며 다시 튕겨져 들어왔다.

뒤이어, ! 한 명의 백의인이 대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혈종제의 짙은 검미가 부르르 떨렸다.

구류지존... 그대였던가?”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백의인, 군무현은 신비한 광채가 감도는 눈으로 혈종제를 주시했다.

그렇소이다. 구궁산에서 헤어진 후 두 달만이구려!”

혈종제의 청수한 얼굴에 한줄기 그림자가 덮였다.

으음... 그대를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군!”

하나, 그의 안색은 좀처럼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심유한 눈빛, 그 눈빛 속에 깃든 신비한 기운은 차라리 은은한 두려움을 느끼게할 정도였다.

그때,

... ...!”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한 자운형은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대전 밖으로 달아났다. 하나, 그 자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무현과 혈종제, 그들은 아예 자운형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문득, 혈종제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나이로 보아... 이토록 거대한 잠력을 어떻게 만들어 내었는지 궁금하군!”

그의 어조는 마치 친한 지기(知己)와 대화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군무현, 그 역시 일점의 흔들림도 없는 물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 안배가 이미 천오백 년 전에 이루어졌다면 믿겠소이까?”

그의 반문에 혈종제의 담담하던 안색이 크게 흔들렸다.

순간, 파파팍! 그가 움켜쥔 태사의의 팔걸이가 가루로 부서져 흩어졌다.

만년자단목(萬年紫丹木)으로 만들어진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태사의가, 그는 애써 격정을 눌러 참는 기색이 엿보였다.

참담할 정도로 무거운 음성,

만상자(萬像子)가 베푼 안배인가?”

그는 그렇게 군무현에게 물었다.

 

한편, 밖은 완전히 아수라의 혈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와 아!”

쳐라!”

천지를 허물어뜨릴 듯 환호하는 군웅들의 함성.

그 뒤를 잇는 것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크아아 악!”

으으 윽!”

케 엑!”

대전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혈문의 수하들은 속속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전력(全力)을 거의 중원지각에 쏟아 넣었던 혈문, 그들로서는 너무도 뜻밖의 급습이었기 때문이다.

콰 르르릉! 퍼 엉! !

혈문은 폭음 속에 급속도로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으음... 결국 혈종일맥(血宗一脈)은 만상자 일인에게 철저히 패하는군!”

혈종제는 참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군무현, 그는 묵묵히 혈종제의 모습을 주시했다.

아직 혈종(血宗) 그대가 있지 않소?”

그의 말에 혈종제는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혈종일맥의 일천오백 년 심원이 이루어지자마자 어이없이 무너지다니...!)

그는 내심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어, 태사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혈종제, 그는 자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아직 본종이 남아있었지!”

군무현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우뚝 선 혈종제,

문득, 위 잉! 그의 몸 주위로 투명하고 맑은 혈기(血氣)가 일어났다.

순간, 군무현이 두 눈에 경탄의 빛이 스쳤다.

훌륭하오. 혈종천강을 극성까지 이루다니... 과거 혈천종(血天宗)보다 배는 강하구려!”

말을 마친 순간, 우 우 웅! 군무현의 주위로도 웅장하기 그지없는 무형강기가 일어났다.

그 모습에 혈종제의 깊숙이 가라앉는 두 눈이 번쩍 빛났다.

헛허... 놀랍군. 태양천제, 빙백염후가 연수하는 것 이상하군!”

과찬이외다!”

군무현은 담담히 웃어보였다.

혈종제, 그도 희미하게 웃었다.

조심하게!”

말을 마치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위 이 잉! 츠츠츠... 츠읏! 혈종천강이 마치 물속으로 퍼지는 핏방울처럼 섬뜩한 혈선을 그리며 사위를 뒤덮는 것이 아닌가!

군무현, 그 역시 혼신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구류귀허대천강은 만상자 어른의 최후절기외다!”

한순간, 우 웅! 극히 허허로운 무형의 기운이 크게 확대되어 일어났다.

그것은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 어디에도 없으면서 또한 천하를 가득 메우는 지극히 큰 기운이었다.

다음 순간, 콰르르르르 릉! 콰 쾅! 거창한, 실로 가공할 굉음이 터져올랐다.

! 콰르릉... 대전의 거대한 지붕이 폭발음을 견디지 못하고 백 장 밖으로 박살나면서 날아갔다.

혈종제는 신형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음... 대단하군!”

그 순간,, 스스스스... 그의 쌍장에서 맑디 맑아 투명하기 그지없는 혈영(血影)이 신비하게 어우러져 나왔다.

혈강대파천황절!”

혈종제의 입에서 천지를 허물어뜨릴 듯한 한소리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그와 동시였다.

쿠쿠쿠쿠 쿵! 구천지옥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릴 듯한 가공할 굉음.

그와 동시에, 파파파파 팍! 콰 릉... 거창한 혈강이 무려 수백 장을 치솟아 올랐다.

군무현, 그는 천천히 한 걸음을 혈종제를 향해 내밀었다.

동시에,

심어초극류(心御招極流)!”

낭랑한 일성이 장내를 후비고들 듯 분명히 울려퍼졌다.

그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었으며 형체조차 없었다.

하나,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천만근의 힘이 혈강을 둘로 가르며 짓쳐들었다.

...!”

혈종제는 절망의 탄성을 발했다.

그는 보았으며 또한 느꼈다. 자신의 혈종천강, 그것으 너무도 무력하게 갈라지는 것을.

다음 순간, 스스스스... 폭음도 없는 가운데, 삼백 장 내에 있는 모든 것이 모래로 화해 쓰러졌다.

인간도, 전각도, 수목도 암석도 모두...

혈종제. 그는 무섭게 신형을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세웠다.

이것은...?”

적룡천종 최후의 절학 심극검(心極劍)이오!”

군무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혈종제의 안면이 창백하게 질렸다.

심어초극류... 훌륭했네!”

그 말을 마치는 순간, 스스스... ! 그의 몸은 믿을 수 없게도 한점 먼지가 되어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군무현, 그는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에 황량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문득,

끝났는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낮고 무심한 중얼거림, 그는 허탈한 눈빛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멀리 자하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망연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없이 서 있는 그녀의 발 아래, 그곳에는 전신이 난도질 당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한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자운형! 바로 그 자의 시신이었다.

하빈...!”

군무현은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말없이, 그러나 뜨겁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

자하빈은 허탈감에 쓰러질 듯한 교구를 군무현의 넓은 가슴에 파묻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낮게 오열했다.

그때였다.

!”

와아...!”

구류지존(九流至尊) 만세!”

문득, 천지가 떠나갈 듯한 군웅들의 우렁찬 함성이 군무현의 귓전을 흔들었다.

 

< 大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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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十一 章

 

                  潛龍復活

 

 

 

천마애(天魔崖)!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는 천고의 험지(險地). 하나, 군무현에게는 정이 들대로 든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군무현, 그는 지금 천마애를 향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신기황을 천마애의 음산한 동굴에서 구해오기 위해서였다.

하하하... 어르신네! 무현이 왔습니다!”

천마애가 온통 진동되는 엄청난 목소리.

! 이백 장의 단애를 나뭇잎같이 가볍게 떨어져 내리는 인물이 있었다.

산뜻한 백의를 차려입은 신선같은 풍모의 청년.

바로 군무현이었다. 그때, 단애 밑의 한 음산한 동굴에서 격동에 찬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헛허... 무현! 이녀석, 기어코 돌아왔구나!”

그렇습니다. 무현이 돌아왔습니다.”

군무현은 호쾌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동굴의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안, 흐릿한 야명주 불빛이 적막하게 동굴 안을 비추고있었다.

동굴의 중앙, 지극음령수액에 몸을 담그고 있는 봉두난발의 괴인이 있었다.

신기황! 바로 그였다.

그는 온통 격동을 금치못하는 표정으로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어르신네!”

군무현 역시 벅찬 격동을 느끼며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원한에 불타던 어린 소년을 부모처럼 훌륭하게 길러준 친인.

어르신네,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군무현은 신기황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기황의 노안(老眼)에 축축한 물기가 고였다. 그는 대견스러운 눈으로 군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녀석! 완벽하게 자랐구나. 천지십강(天地十强)이 무색할 강자가 되다니...!”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재회(再會), 두 노소(老少)는 오랜만에 맞는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나누었다.

군무현은 정()이 어린 눈으로 신기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르신네, 그동안 쓸쓸하셨지요?”

그 말에 신기황은 초탈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삼십년을 이렇게 살아온 노부다. 반년의 기다림이 무어 그렇게 대수냐?”

군무현, 문득 그는 품속에서 작은 옥함을 꺼내 신기황에게 내밀었다.

만년빙지로구나!”

그렇습니다. 몇 달 빨리 구해올 수 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지금에야 드리게 되었습니다!”

허허... 녀석!”

신기황은 대견함을 금치못하며 인자한 눈으로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노안에서는 격동의 눈물이 소리없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

그 모습에 군무현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존경의 눈으로 신기황을 응시하며 문득 힘주어 말했다.

이제 어르신네를 편히 모셔서 은혜를 갚겠습니다!”

신기황은 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무슨 덕이 있어 말년에 이같은 홍복을 누리게 되는지 모르겠군!”

하나, 그의 두 눈에는 기쁨과 감탄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

“...!”

두 노소는 마주 앉은 채 뜨거운 눈빛을 나누었다.

진실스러운 정()이 있는 그들의 눈빛, 콰르르... 위 잉! 천마애 주위의 천애장비대진(天崖藏秘大陣)은 여전히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시커먼 운무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마애. 이곳도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

 

X X X

 

천중산(天中山) 자하곡(紫霞谷)!

 

천하가 모르는 중에 자하곡은 대풍운(大風雲)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천하무림인(天下武林人). 일만(一萬)의 정예가 자하곡을 중심으로 방대한 지역에 모여 있었다.

구류천종의 삼천정예들, 정의맹(正義盟)의 사천(四千) 의협지사들, 녹림칠십이채의 일천호걸, 독황궁(毒皇宮)의 독인(毒人) 일천 명, 그리고, 빙백궁(氷魄宮)과 대초원의 일천여파, 자하곡은 혈문에 대항하는 천하무림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석양 무렵, 문득 자하곡으로 들어서는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있었다.

허허... 제법 훌륭하구나. 네 처첩들 중에는 너만한 지혜를 가진 아이가 있다니... 노부는 이제 화초나 기르면서 살아야겠다!”

노인은 창노한 웃음을 터뜨리며 흡족한 빛을 지었다.

신기황, 바로 그였다. 일소(一少)는 물론 군무현이었다.

그들은 자하천류대진을 천천히 통과했다. 그때,

지존!”

군무현을 본 구류천종도들은 황급히 오체복지했다. 이어,

가주!”

일백적룡검대의 검수들도 급히 한쪽 무릎을 꿇며 입을 모아 외쳤다.

신기황,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허... 자하천류대진까지 완벽히 재현하였구나!”

그는 자하천류대진을 둘러보며 만면에 감탄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자하곡의 대전 쪽에서 한 명의 청포노인이 반색을 하며 달려나왔다.

하하... 이게 누구시오?”

우람한 체구의 청포노인, 그는 신기황을 보며 만면에 격동과 기쁨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마황(天魔皇)! 헛허... 이게 얼마만이오?”

신기황과 천마황, 그들은 두 손을 굳게 움켜잡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실로 얼마만의 만남인가? 그때,

상공...!”

자하곡의 대전에서 여러 명의 여인들이 걸어나왔다.

남궁혜미를 비롯하여, 자하빈과 위지사영, 극밀환후, 빙백염후 등... 한데, 그 여인들 중 한 명에게 눈길이 닿는 순간,

“...!”

군무현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기품있는 자의미녀, 한데, 그녀가 입고 있는 자의(紫衣)는 몸에 딱 맞지않고 헐렁하게 커보였다.

바로 여인들이 아기를 가졌을 때 나온 배를 감추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닌가?

독황후(毒皇后)! 그렇다. 자의미녀는 바로 독황후였다.

일순 군무현과 독황후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그러자,

...!”

독황후는 얼굴을 가리며 그대로 자하전 쪽으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천마황이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지존! 아무리 지존이라도 노부의 외손녀를 울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네!”

그러자, 자하빈이 얼른 군무현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상공! 어서 약란 동생을 달래 주세요!”

상공, 어서요...!”

남궁혜미와 극밀환후도 군무현을 자하전 쪽으로 떠밀었다.

“...!”

군무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주춤주춤 하더니 못이기는 척 자하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에 신기황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허허... 천하의 구류지존도 무서운 것이 있었군!”

하하...!”

호호호...!”

그 말에 중인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군무현은 문을 닫고 자하전의 침전으로 들어섰다.

붉은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

... ...!”

독황후가 침상에 엎드린 채 낮게 흐느끼고 있었다.

“...!”

군무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뻐근해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독황후,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

몸속에 그의 작은 생명을 키우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군무현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독황후의 뒤에 걸터앉으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약란...!”

독황후 제약란의 어깨가 일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녀는 울움을 그치고 군무현을 돌아보았다.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그것은 창백하고 초췌해 보였다.

그 모습에 군무현은 새삼 가슴이 뭉클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는 독황후를 천천히 안아 침상에 바로 눕혔다.

“...!”

독황후는 눈을 꼭 감은 채 군무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군무현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진정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오. 당신이... 아기를 가진 줄은 미처 몰랐었소!”

“...!”

독황후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문득, 군무현은 독황후의 불룩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독황후는 다시 한차례 몸을 떨며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군무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손끝을 통해 전해오는 한 생명의 꿈틀거림,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의 일부요 그의 분신이었다.

군무현의 가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회로 뒤덮였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맞는 듯한 벅찬 기대감. 그리고 무한한 환희의 감정이었다.

그는 독황후가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약란...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는 진정어린 음성으로 말하며 독황후의 몸을 끌어안았다.

...!”

독황후는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군무현의 품에 몸을 묻었다.

군무현, 그는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독황후의 하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이어, 정성스럽게 그 부분을 애무하는 것이었다.

... ...!”

독황후는 희열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기다려온 날인가? 그녀는 군무현의 머리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자하곡 내부의 넓은 전청!

십여 명의 인물들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군무현을 비롯하여, 신기황과 천마황, 현의천신, 천궁패왕 곡강, 남궁혜미, 자하빈 등이 그들이었다.

남궁혜미, 그녀는 하나의 넓고 큰 지도 앞에 앉아 있었다.

지도(地圖). 그곳에는 수백 개의 붉은 점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남궁혜미는 지도를 일견한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혜미는 지도를 일견한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혈문은 막강한 힘으로 천하를 점령하고 있어요. 모두 팔백칠십네 곳에 분단을 세워 놓았어요. 하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의 힘은 너무 넓게 분산되어 불리한 상태에 놓여 있지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난 신기황, 그가 눈썹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 의외로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군!”

남궁혜미는 혜지가 가득한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중원 전역에 퍼져있는 구류천종의 힘으로 교란시켜 놓기만 해도 단시일 내에 혈문이 벌여놓은 세력은 사상누각이 되고 말거예요. 문제는 아직도 혈문(血門)의 본부(本府)의 위치를 모른다는 점이에요!”

듣고 있던 신기황이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

아이야! 네 생각은 대천성자(大天聖子)란 가짜를 이용할 생각이냐?”

남궁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개를 패면 주인에게로 달아나는 것이 상례지요!”

허허... 개를 팬다. 좋은 생각이다!”

신기황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남궁혜미, 이번에는 그녀가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상공께서는 달리 분부하실 일이 없으신지요?”

군무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혈문의 본부를 치는 것은 구류천종의 정예와 적룡검대, 그리고 일천독인(一千毒人)으로 충분하오. 나머지 세력어 구류천종을 도와 천하에 널려있는 혈문의 분단을 철저히 괴멸시키시오!”

알겠어요!”

남궁혜미는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신기황이 군무현을 바라보며 일렀다.

헛허... 결정이 되었으면 지체없이 시행하는 것이 병법(兵法)의 상수이니라!”

군무현은 염려말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어르신네들께서는 이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순간, 신기황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녀석아! 이 늙은이가 젊은 놈들 몇 두들겨 잡지 못할 것 같으냐?”

천마황도 호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노부는 외손녀인 독황궁주가 몸이 무거워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두 배로 손을 늘려야겠네!”

군무현은 하는 수 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는 좌중에서 몸을 일으켜 신기황과 천마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그럼 소생과 함께 태산(泰山) 소요장으로 가십시오!”

그 말에 신기황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냐! 진작 그랬어야 옳았다!”

천마황도 대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 어서 떠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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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十 章

 

              死境奇緣

 

 

 

황량한 단애 아래,

크으...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신기황 어르신네 덕분이다. 그분이 나의 골격을 철골(鐵骨)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문득 고통스러운 중얼거림과 함께 한 명의 인물이 풀더미 속에서 기어나왔다.

전신이 온통 흙과 피로 뒤범벅되어 형편없는 몰골.

! 군무현! 그는 바로 군무현이 아닌가?

그는 혈종제(血宗帝)와의 충돌로 인해 무너지는 지반에 쓸려 천인단애로 떨어진 것이었다.

... 우선... 어디에 가서... 운공을 해야한다!”

군무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무너진 흙더미 사이에 묻힌 하나의 동혈(洞穴)이 빠꼼하게 뚫려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평범하여 언듯 지나치면 볼 수 없는 동굴이었다.

... ...!”

군무현은 전신 골격이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으로 안면을 이지러뜨렸다. 하나,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물며 천천히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

이어, 그는 거의 기다시피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동굴 속으로 들어서던 군무현, 그는 일순 흠칫했다.

동굴의 변면, 그곳은 기이하게도 온통 기이한 문양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전체에 걸쳐 빽빽이 뒤덮여 있는 문양, 그것은 마치 올챙이와 같은 문양이었다.

순간, 군무현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고대...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아닌가!”

벽 전체를 가득 뒤덮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문양. 그것들은 갑골문자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고어(古語)였다.

군무현의 눈빛은 강렬한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는 곧 정신을 집중하며 고통도 잊은 채 갑골문자를 해독해 나가기 시작했다.

만상자(萬像子)... 인연있는 자를... 위해 남긴다...!”

순간, 군무현의 안색이 급벽히 변화했다.

... 만상자(萬像子)! 이곳에 만상자의 손길이 미치다니...!”

그는 경악하며 흥분과 기대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구류천종(九流天宗)을 세운 인물, 그가 바로 만상자가 아닌가?

군무현은 만상자의 기묘한 안배로 인해 구류지존이 되었다. 한데, 다시 또 다른 만상자의 안배를 접하게 된 것이 아닌가?

군무현은 격탕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계속 벽면의 갑골문자를 해독해 나갔다.

 

혈종(血宗)의 야심을 막기 위해 노부는 구류천종(九流天宗)과 선부(仙府)를 세웠다...

 

군무현은 갈수록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 선부(仙府)를 세우신 분도 역시 만상자였단 말인가?”

그것은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천오백 년 전, 당시 천하는 한 명의 희대의 마종에 의해 피로 씻기고 있었다.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혈천종(血天宗)!

 

바로 그에 의해서였다.

이를 보다못한 한 명의 은거기인이 세사에 나와 혈천종(血天宗)을 무공과 기지로써 꺾어 제거했다.

그가 바로 만상자였다. 하나, 천하인들은 아무도 몰랐다.

고금제일마 혈천종이 만상자에 의해 죽었음을. 다만, 혈천종이 의문의 실종을 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고금제일마 혈천종! 그는 만상자의 손에 죽어가면서 엄청난 저주를 남겼다.

 

흐흐... 본종은 죽어도 본종(本宗)의 뿌리는 건재하다. 늙은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즉시... 본종의 후예가 천하를 혈세(血洗)하리라!

 

천기를 살핀 만상자, 그는 과연 자신으로서도 일시에 제거할 수 없는 거대한 마()의 뿌리가 박혀 있음을 깨달았다.

뭔가 지속적인 방편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생각 끝에 만상자는 극락천존(極樂天尊)으로 하여금 선부(仙府)를 세워 혈천종의 후예를 제거케 한 것이다.

 

그러나... 노부가 죽고 천오백 년이 흐른 뒤, 혈천종의 마기가 초극(招極)에 이르러 선부(仙府)마저도 무너지리라. 이를 걱정하여 노부가 만든 마지막 안배가 그대 구류지존(九流至尊)이니라. 이제, 그대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남기는 바이다...

 

그와 같은 글 아래에는 지극히 심오하고 난해한 구결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구류귀허대천결(九流歸虛大天訣)!

 

그 구결의 제목은 그러했다.

순간,

... 이것은...!”

군무현의 안면에 숨막힐 듯한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도 심오박대한 내공심법이었다.

태양천제나 빙백염후의 내공심법마저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과연 그런 내공심법이 천하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군무현은 온 몸이 격심하게 떨리는 엄청난 격동에 휩싸였다.

이것이라면... 태양(太陽)과 빙백(氷魄)의 상반되는 양극기공을 합일(合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희열과 격동, 그것은 군무현이 겪은 최대의 격동이었다.

 

스스스... 신비한 적백(赤白)의 강기가 반투명한 색채로 퍼지며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스스스... 위 잉! 희고 붉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강기는 서로 어울리며 주위로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데 한 순간, 우르르르... 츠츠츠읏! 상반된 두 가지 강기는 급격히 하나로 녹아들어 무형의 극강한 기류로써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스스... 파파파 팟! 그 무형강기가 뻗어나가는 곳에는 무엇하나 견디어 내는 것이 없었다.

모조리 박살나 가루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문득,

심어초극류(心御招極流)!”

신비한 무형경기 속에서 한 소리 정대하고 낭랑한 일성이 터져나왔다.

다음 순간, 콰르르르 릉! 우르릉... ! 오백 장 밖의 석벽이 거창한 폭음과 함께 송두리째 허물어져 내렸다.

하나의 널찍한 암반 위, 한 명의 괴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온통 먼지와 피로 뒤범벅된 지저분한 옷차림, 봉두난발로 제멋대로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턱밑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도저히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모습. 하나, 눈빛, 괴인의 눈빛만은 실로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천하를 담을 듯 정심하고 유현하게 빛나는 눈빛,

문득,

두달... 천하를 혈문(血門)에 내준 것은 두달로써 충분하다!”

괴인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한조각 푸른 천이 가려져 있는 듯이 아스라이 먼 하늘, 바로 그때였다.

구 우! 한 마리 천리신응이 쏜살같이 괴인의 어깨 위로 꽂히듯 내려와 앉았다. 그러자, 괴인은 눈을 빛내며 천리신응의 발목에 묶여져 있는 헝겊을 끌러냈다.

 

지존께 알립니다.

감숙 일대로 일단의 여인들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대초원(大草原)과 북해(北海)에서 오는 여인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감숙 일대로 나가있는 빙백궁과 충돌한 것으로 예측됩니다!

신응(神鷹).

 

...!”

괴인의 입가에 한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 푸스스... 그가 가볍게 힘을 주자 헝겊조각은 재로 화해 흩어졌다.

문득, 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묵빙현하와 말썽꾸러기 오미(娛美)가 마침내 연공을 끝낸 모양이군!”

군무현! 그는 바로 군무현이었다.

그는 두달 동안 이곳 절곡에서 지내왔다. 그의 형색이 말이 아닌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두 달동안 엄청나게 변모했다.

이제 단연코 그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된 것이다.

천험의 단애 밑에 자리한 음침한 절곡(絶谷).

군무현은 그곳에 앉아서도 천하정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혈문(血門)! 그동안 그들은 천하를 장악했으며 사백육십개 문파의 장문인을 자기들의 괴뢰로 세웠다.

그들은 곧 무림의 법()이었다. 그 자들의 만행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그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자가 오천 명, 능욕을 당하는 아녀자들은 무려 일만(一萬)에 달했다.

실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악행을 다 일삼고 있은 것이다.

군무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기(魔氣)가 하늘에 이르렀으니... 이제 철퇴를 받을 시기가 다가왔다!”

반각 후,

우 우!”

한소리 웅후한 장소가 절곡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 환영(幻影)같은 한 줄기 그림자가 절곡을 빠져나갔다.

 

X X X

 

천마궁(天魔宮)!

정의맹의 급습으로 불탔던 천마궁은 전보다 두 배 더 증축되었다. 실로 그 규모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또한, 그 가공할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혈문(血門)의 천마단(天魔壇)!

당금 천하무림의 마도(魔道)를 지배하는 곳. 단주는 천마제군(天魔帝君)이었다.

 

천마전(天魔殿)!

 

아아... ...!”

자지러질 듯한 여인의 교성이 뜨겁고 끈끈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화의 극을 이룬 침실, 침상 위에 두 명의 남녀가 벌거벗은 채 서로 뒤엉켜 있었다.

흐흐... 역시 하북제일미(河北第一美)!”

사내는 교활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 ...!”

그 자는 미끈하게 빠진 몸매의 젊은 미부를 올라탄 채 욕정을 발산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흐윽... 아아...!”

그 밑에 깔려 몸부림치고 있는 여인, 그녀는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안주인이며 하북제일미(河北第一美)라 불리는 홍우비연(紅羽飛燕)이었다.

남편인 개산신권(蓋山神拳)을 천마제군의 마수에 잃고 지금은 그 자의 노리개가 되어 밤낮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흑흑... 차라리... 나를 죽여요... 아흐윽... ...!”

홍우비연은 숨넘어가는 비명을 내지르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쯧쯧... 늙은이의 꼴이 과히 보기에 좋지않군!”

문득 나직하게 혀차는 소리가 천마제군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순간,

(!)

천마제군은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듯 욕정이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때,

... 어멋!”

홍우비연은 돌연 소스라칠 듯한 외침을 터뜨렸다.

천마제군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었다.

천마제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죽어랏!”

쿠 쿵! 그 자는 음갈과 함께 맹렬히 일장을 후려쳤다.

하나,

쯧쯧... 앞이나 가릴 것이지. 그 볼품없는 물건을 굳이 구경시켜야 하겠는가?”

재차 여유있고 태연한 음성이 바로 천마제군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잔뜩 비웃음을 담은 모욕적인 말이었다.

대경실색하며 급히 고개를 돌리던 천마제군,

!”

일순 그 자는 아연하여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천정에 한 명의 괴인이 거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채 침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저분한 누더기 옷을 걸친 괴인, 천마제군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하나,

이놈! 죽어랏!”

그 자는 분노하며 성난 사자처럼 무자비하게 장을 후려쳤다.

파파파 팍! 시커먼 강기가 벼락치듯 천정의 괴인을 향해 짓쳐갔다. 하나,

현천묵강수라...!”

괴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피하거나 맞받을 생각도 하지않고 날아오는 강기를 태연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쿠 쿵! 강기는 정확히 괴인의 가슴을 가격했다.

하나,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 ...!”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쪽은 오히려 천마제군이었다.

... 나오랏!”

마침내 천마제군은 분노로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 그 자는 발악하듯 외치며 침실을 뛰쳐나갔다.

천정의 괴인, 그는 침상 위에 알몸으로 망연히 누워있는 홍우비연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후 몸을 움직였다.

스스스... 그때, 밖으로 뛰쳐나온 천마제군은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 ... 이럴 수가...!”

그 자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사색이 되어 몸을 비틀거렸다.

곳곳에 널려있는 혈문의 마도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때,

세상에 있어 보았자 소용없는 쓰레기들인지라 일찌감치 처분해 버렸다. 지옥에 가면 아마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괴인이 천천히 걸어나오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순간, 괴인은 부드득 이를 갈아붙이며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 이제 알았다. 네놈은... 죽었다고알려진 구류지존!”

괴인, 즉 군무현은 그제서야 여유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본인이 죽었다고 믿는 것은 혈문의 일방적인 생각에 불과했지!”

... ...!”

천마제군은 안색이 시커멓게 질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하나, 그 자는 일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현천마라복강쇄!”

그 자는 공포를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벼락같이 외치며 쌍수를 후려쳤다.

하나,

태양광풍륜을 아는가?”

슈슈 슉! 쐐 액! 태연하게 중얼거리던 군무현의 헐렁한 소매 속에서 검붉은 륜()이 번개같이 뻗어나왔다.

! 그 륜에서는 삽시에 천지를 불태워 버릴 듯한 극양지기가 확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직후, 화르르! 콰콰 쾅!

크 악!”

거창한 폭음과 함께 단말마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보라! 놀랍게도 주위 백장이 삽시에 재로 화해 스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그 속에 천마제군의 벌거벗은 몸뚱이는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화르르! 이윽고, 츠츠읏! 군무현은 되날아온 태양광폭륜을 회수하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미(娛美)가 보고 싶은걸!”

스스스스... 한소리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신형은 삽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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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九 章

 

                    最後强敵

 

 

 

순식간에, 혈문의 수하들은 군웅들을 에워쌌다.

바로 그때,

으하하하!”

갑자기 군무현이 미친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순간,

...!”

... 지독한 내공이다!”

대천성자와 천마제군은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그 자들 두 사람의 귀에만 엄청난 벽력셩이었다. 그때, 군무현은 문득 지옥뢰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노선배님! 언제까지 구경만 하실 것입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하하하...!”

군무현의 그것만큼이나 거창하고 패도적인 장소성이 지옥뢰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순간, 천마제군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 설마... 천마황 그 늙은이가...!”

그 자는 불신과 회의의 표정으로 두 눈을 한껏 부릅뜨며 지옥뢰를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쾅 콰콰쾅...! 콰르르 펑!

가공할 폭음과 함께 지옥뢰의 둔중한 철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버렸다. 그와 동시에,

천마무적(天魔無敵)!”

마황재림(魔皇再臨)!”

천공을 떨어울릴 듯 우렁차고 당당한 외침이 두 차례에 걸쳐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르르르 릉! 쿠쿠쿵...! 지옥뢰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우르르르! ! ! 굉음 속을 뚫고 수백줄기의 인영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은 마치 천마(天魔)가 하늘로 용트림하며 오르듯 엄청난 위세였다.

흐흣... 제군(帝君), 이놈! 노부를 위해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천마황(天魔皇). 그는 나타나자마자 다짜고짜 천마제군을 덮쳐갔다. 그 위세는 가히 가공지경이었다.

순간,

... ...!”

천마제군은 천마황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다급히 오십장 밖으로 물러났다.

직후, 콰콰콰 콰쾅! 천만근의 화약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무지막지한 굉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그와 함께,

크 악!”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천마황의 단 일장에 주위 삼십장이 완전히 초토화로 변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실로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노선배님! 포위망을 뚫어야겠으니 도와주십시오!”

군무현이 천마황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에 천마황은 달아나는 천마제군을 힐끗 바라본 후 곧 군무현에게로 몸을 날렸다.

핫하... 반각만 늦게 노부를 불러냈다면 노부는 발작하고 말았을 것이네!”

그는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것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전면의 혈문의 마도들을 향해 벼락같이 장을 내질렀다.

우 웅! 콰르르릉... 가공할 폭음이 폭죽터지듯 치솟아 올라 장내를 뒤흔들었다.

다음 순간, 혈문의 절정고수들은 비명과 함께 가랑잎처럼 맥없이 나뒹굴었다.

천마황, 그의 공세는 전무후무한,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가자!”

군무현은 군웅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와 아!”

!”

군웅들은 파죽지세로 혈문의 포위일각을 무너뜨리며 돌진했다. 그 급변한 장내의 사태에 대천성자는 발악하듯 외쳤다.

막아랏!”

그 자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물불 가리지 않고 군웅들을 향해 덮쳐들었다.

하나, 천마황이 그것을 내버려둘리 만무했다.

이놈! 가짜야! 천마황공강이나 받아랏!”

우 웅! 그의 대갈일성과 함께 새파란 강기의 무더기가 노도같이 대천성자를 휩쓸어 갔다.

순간,

! 자전극뢰강!”

파파파팍! 대천성자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반사적으로 장을 맞받아 쳤다.

순간, 쿠 쿵! 콰릉...

!”

대천성자는 몸을 휘청 꺾으며 다급성을 발했다.

, 제법이구나!”

천마황 역시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들은 똑같이 일보씩 물러섰다. 천마황은 대노하여 지채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으하하...! 일백적룡검대가 여기 있다!”

십방철혈(十方鐵血)!”

천하무적(天下無敵)!”

돌연 창천을 떨어울리는 앙천대소와 함께 두 차례의 패기충천한 외침이 장내의 혼란 속을 뚫고 천둥처럼 들려왔다.

... 보라! 츠츠츠... 위 잉! 파앗... 파파파앗!

치솟아 오르는 검기의 폭풍!

군웅들의 탈출을 저지하는 혈문의 후면이 모래탑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일백적룡검대! 마침내 그들이 장내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광경에 대천성자는 안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 만박기사! 이것도 네놈의 안배였느냐?”

그 자의 안색은 썩은 돼지 간빛으로 물들었다.

일백적룡검대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그들은 개개인이 당년의 적룡대제를 육박하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으 아악!”

크 윽...!”

가볍게 휘두르는 그들의 검기 아래 혈문의 인물들은 연신 피보라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일백적룡검대가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동안, 그 사이로 군웅들은 아무런 장애없이 고스란히 장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군무현, 그는 천마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선배님! 군웅들을 지휘해 주십시오. 후배는 뒤를 끊겠습니다!”

그 말에, 천마황은 군무현의 눈을 주시했다.

조심해라!”

무심하게 던지는그 한 마디에는 뜨거운 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천마황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 언뜻 스치는 한가닥 염려의 빛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걱정마십시오!”

군무현은 그런 천마황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본황을 따르라!”

천마황은 몸을 돌림과 함께 번쩍 손을 쳐들고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

와 아!”

그는 천지를 진동시킬 듯 함성을 내지르는 군웅들을 이끌고 구궁산의 서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순간,

쫓아랏!”

대천성자는 눈에 불똥을 튕기며 황급히 천마황을 쫓으려 했다. 하나,

대천성자! 가지 못한다!”

! 군무현이 그보다 먼저 대천성자의 앞을 막아섰다.

다음 순간, 삐 익! 멸절사뢰음의 음파가 날카롭게 울려나오며 혈문의 선봉을 막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우 우!”

!”

일백적룡검대가 함성을 내지르며 잇따라 공세를 쏟아냈다. 무려 백장까지 치뻗치는 가공할 검기의 폭풍!

그 엄청난 기세에, 수천 명의 혈문의 마도들은 일순 멈칫하며 신형을 세우고 말았다.

그 순간,

(되었다!)

군무현은 신광을 빛내며 내심 부르짖었다.

이어, ! 그는 천랑비천사식(天狼飛天四式)의 경공으로 번개같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일백적룡검대! 구궁산을 벗어난다!”

그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

! ! 휘르르르... 일백적룡검대는 검막으로 몸을 보호하며 썰물같이 천마곡 권내를 벗어났다.

핫하! 용기가 있으면 본인을 잡아보아라!”

군무현은 허공에 붕 뜬 채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스 악! 그는 군웅들이 가지 않는 북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휘 잉! 귓전을 스치는 세찬 바람소리를 들으며 몸을 날리고 있는 군무현. 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되었다. 일단 발톱을 드러낸 혈문은 일시에 천하를 삼키려 들 것이다. 하나 이제 그들은 밝은 곳에 서 있고 우리가 어둠 속에 있도록 사태는 역전되었다. 이백만의 구류천종도의 힘과 군웅들의 힘이 합쳐지면 천하의 혈문이라도 무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어가는 상황에 만족했다.

한데, 바람처럼 몸을 날리던 군무현의 신형이 일순 급급히 멈추어섰다.

휘 잉! 위 이이잉! 서늘한 산풍(山風)이 옷깃을 휘날리게 만드는 곳.

! 그곳은 마치 대지가 도끼에 찍혀 쩍 갈라진 형상을 한 천상단애였다. 끝이 내려다 보이지 않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한데, 언제부터였을까?

“...!”

한 명의 인물이 단애 앞에 우뚝 서 있지 않은가!

군무현과 그 인물과의 거리는 십장 정도였다.

산풍에 표표히 옷깃을 날리며 서 있는 인물. 그는 한 명의 중년문사였다.

그의 인상은 매우 청수했으며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 그의 일신에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가공할 무형의 기도가 상대를 질식시킬 듯 무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군무현의 눈빛이 일변했다.

(강적이다! 천마황보다도 몇배 강한 인물이다!)

그는 일견에 중년문사의 가공할 실력을 알아보았다.

중년문사, 그는 군무현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 그는 물처럼 담담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구류지존! 그대가 이곳으로 올줄 알았다!”

그의 어투는 어떻게 들으면 지기(知己)를 대하듯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첫눈에 군무현의 신분을 알아본 것이다. 하나, 군무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귀하는?”

그는 다만 무심하고 건조한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중년문사는 빙긋 웃으며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인은 혈종제(血宗帝)라는 사람일세!”

혈문(血門)의 당대문주 셨구려!”

군무현의 음성 또한 변함없이 무심하고 건조했다. 지극히 무심하고 태연한 군무현의 태도에 문득 중년문사 혈종제(血宗帝)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허... 안색하나 변하지 않다니... 역시 구류지존(九流至尊)이군!”

하나, 군무현, 사실 그의 내심은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으음... 혈종제(血宗帝)! 예상밖의 강자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는 내심 침중한 신음성을 발하며 염두를 굴렸다.

그때, 문득 혈종제는 신비한 눈으로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지극히 담담한 가운데 설득력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작은 물결로 닥쳐오는 해일을 막을 수는 없지. 어떤가? 본 문주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를 누릴 수가 있다!”

하나, 군무현의 안색은 미세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심 결심했다.

(일전을 피할 수 없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혈종제를 주시했다. 다음 순간,

대답은 이렇소!”

위 잉! 갑자기 그의 몸 주위로 적백(赤白)의 양극강기가 맹렬히 일어났다.

우르르! 그의 내부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거대한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혈종제의 입가에 가벼운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런가? 안타깝군. 그대가 구류지존만 아니라도 흉금을 터놓고 술잔을 나눌 수 있었을텐데...!”

그 순간, 스스스... 문득 그의 몸 주위로 섬칫한 피구름이 일어났다.

우 웅! 스스스스...! 가공하게도 삽시에 주위 백장이 완전히 붉고 흰 정기로 뒤덮였다.

고금을 통틀어도 보기 힘들 두 절대강자(絶大强者)! 그들의 일신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경기는 천지를 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자욱한 핏빛 경기 속에서, 일순 군무현의 우렁찬 일갈이 터져나왔다.

태양천뢰폭! 만겁빙백멸공강!”

콰르르르르...! 파파파파파 팍!

아아... 보라! 그것은 실로 거대한 장관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군무현. 그의 왼손에서는 청백색의 불기둥의 화산이 터지듯 쏟아졌으며, 그의 오른손에서는 새하얀 얼음기둥이 전율처럼 갈라지듯 퍼져 올랐다.

바로 그 순간, 혈종제의 입에서도 천지를 뒤흔드는 한소리 외침이 터져나왓다.

우 우 우!”

반투명의 처절하도록 선명한 혈강! 그것은 천지사방을 뒤덮으며 섬뜩한 전율의 광채를 뿌렸다.

뒤이어, 콰콰콰 쾅! 양인의 거창한 힘이 서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아아! 그것은 천만근의 뇌정이 일시에 터지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대폭발이었다.

우 르르 릉! 콰르릉... ! 경기의 파동은 가공스럽게도 무려 오백장을 완전히 휩쓸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 버릴 듯, 천지를 한순간에 파멸시켜 버릴 듯...

... 그 가공할 소용돌이게 휘말려 살아날 자가 과연 누구겠는가? 없다. 천하에 없을 것이다.

한데, 보라! 미친 듯 굉렬한 일대혼란이 가라앉은 단애 위, 그곳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군무현, 그가 아니었다.

...! 그는 바로 혈종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군무현은 어찌되었단 말인가!

그가 서 있던 곳은 지반이 무너져 단애 밑으로 완전히 함몰되고 있었다.

군무현 역시 무너지는 지반에 휘말려 단애 아래로 추락했음이 분명하리라. 그의 흔적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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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八 章

 

                  血門登場

 

 

 

해가 뜨기 직전, 천마궁(天魔宮)!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선 천마궁은 온통 음침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돌연,

케 엑!”

크아 악!”

여명의 정적을 찢으며 전율스러운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올랐다.

뒤이어, 화르르르...!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불길이 확 퍼져 올랐다.

그와 함께,

우하하하! 천마궁의 마도들아! 목을 길게 늘여랏!”

클클... 천마제군의 목은 나 천수신(千手神)의 것이다!”

순식간에 일천 명의 맹룡같은 군호들이 천마궁의 내부로 휩쓸려 들어왔다. 그 돌연한 사태에, 천마궁의 마도들은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분명 잔심염황수가 우로(右路)를 막으러 갔을 텐데...!”

... 이럴 수가...!”

그 자들은 안심하고 새벽잠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런 급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으 아악!”

크 윽!”

!”

그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 이놈들! 죽어랏!”

대저 안에서 사멸황(死滅皇)이 눈을 부릅뜨며 미친 듯이 뛰쳐나왔다.

그 자는 나타나자 마자 막무가내로 장을 후려쳤다.

콰르릉... ! 하나, 군웅들은 미친 듯이 날뛰는 그 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절묘한 진세를 선풍같이 휘몰며 마도들을 휩쓸어 나갔다.

그때,

우하하... 사멸황, 종남검옹이 여기있다!”

돌연 종남검옹이 사멸황의 앞을 가로막으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 파앗! 그는 수중의 검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순간,

!”

사멸황은 흠칫 몸을 피하며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천수신도 한몫 거들겠다는 듯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클클... 검옹! 사멸황의 모가지를 혼자 따시겠다니... 욕심이 과하지 않소?”

츠츠... 위 잉! 그는 개세혈강륜을 급속히 회전시키며 사멸황의 오른쪽으로 짓쳐들었다.

... 이런...!”

사멸황은 낭패함을 금치못하며 전력을 다해 잠을 후려쳤다.

우 우 웅! ... 지축을 뒤흔드는 가공할 폭음이 천지사방으로 터져올랐다.

그 순간,

크윽!”

사멸황은 신형을 휘청하며 삼보 뒤로 물러났다. 하나, 종남검옹과 천수신은 옷깃 하나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그때,

아미타불...!”

혼란의 와중에 승포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한 명의 라마승이 전각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 자는 시뻘건 혈포를 대충 걸친 혈륭대법사였다.

순간,

무량수불...! 혈륭도우, 장을 받으시오!”

그 자를 발견한 무당의 청옥자가 휙 몸을 날리며 외쳤다.

우 웅! 콰릉...

!”

혈륭대법사는 창졸간의 급습에 일순 움찔했다. 하나, 이내 그 자는 대노한 표정으로 번쩍 장을 쳐들었다.

손뚜껑같이 거대한 그 자의 손, 콰르르 릉! 그 자의 손이 일순 시뻘겋게 물드는가 싶더니 섬뜩한 핏빛강기가 노도같이 쏟아졌다.

그 광경에 군무현은 대경하며 외쳤다.

장문인! 맞받지 마시오!”

그 순간, ! 청옥자는 군무현의 경고에 다급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직후, 콰르르릉! 콰콰 쾅... 가공할 혈강이 천지를 휩쓸며 십장 방원을 완전히 박살내는 것이 아닌가?

무량수불...!”

장권 밖으로 물러난 청옥자는 그 광경에 식은땀을 흘렸다.

군무현의 경고가 없었더라면 그는 한줌의 재로 화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군무현은 냉혹한 눈으로 혈륭대법사를 노려보았다.

(... 혈륭대법사! 혈륭대붕천마공(血隆大崩天魔功)이 극에 이르렀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봉황옥소를 꺼내들었다.

이어, 그는 천천히 혈륭대법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아미타불... 죽어랏!”

혈륭대법사는 두 눈이 시뻘겋게 변한 채 무지막지한 쌍장을 짓쳐냈다.

쿠쿠쿵! 콰르릉... 장내는 일순 혈해(血海)로 변해버린 듯 온통 시뻘건 혈강으로 뒤덮여 버렸다.

그 가운데,

천승대법음(天乘大法音)이오!”

군무현의 낮고 담담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직후, 삘릴리 삘 릴 리...! 지극히 부드러운 한줄기 소성이 은은하게 장내에 울려퍼졌다.

하나, 그것은 바로 만사(萬邪)의 극성인 지극히 정심한 음률이었다. 바로 천왕오대음종의 제일음종(第一音宗).

다음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크 윽!”

거대한 체구의 혈륭대법사가 오공에서 피를 뿌리며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으 아악!”

크윽!”

...!”

오십장 내의 마도들이 일제히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삽시에, 장내는 지옥의 참경을 무색케하는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삘 릴 리...! 부드럽고 은은한 소성.

하나, 그것은 정도인들에게는 더없이 평화롭고 잔잔한 음률로 들렸다. 그 음률을 듣고 군웅들은 새 힘을 얻고 있었다.

그때,

크 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장내를 메아리쳤다.

사멸황, 그 자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피보라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 그 자의 몸에는 세 개의 개세혈강륜이 푹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자의 복부는 검기에 찢겨 쩍 갈라져 있었다.

그 자를 상대했던 종남겅옹과 천수신, 그들 역시 타격은 컸다.

으음...!”

제법이군!”

그들은 고통스럽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신형을 비틀거렸다.

종남검옹은 검을 쥔 호구가 터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천수신 역시 어깨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하나, 어쨌든 그들은 거마(巨魔) 사멸황을 처치한 것이다.

문득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때, 군무현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거세게 치솟아 오르는 불길 속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수습한 천마궁도들은 결사적으로 군웅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워낙 숫적으로 우세한 그들은 일천명의 군웅들을 최대한으로 묶어두려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의 대결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쪽은 천마궁도들이었다.

군웅들은 사방이 빽빽이 포위된 가운데에서도 일기당천의 기세로 연신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군무현은 내심 염두를 굴리며 기광을 번뜩였다.

(이제 곧 중로군과 우로군이 천마궁도들을 휘몰아 들이닥칠 것이다!)

하나 문득, 그는 검미를 모았다.

(천마제군... 그 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과연, 천마제군은 아직도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군무현은 힐끗 지옥뢰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도의 진정한 고수 삼백 명이 천마황과 함께 군무현의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중이었다.

하나,

(아직은... 천마황이 나설 때가 아니다!)

내심 염두를 굴린 군무현은 다시 시선을 장내로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와 악!”

원군이다!”

천마궁도들의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며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천마곡의 곡구, 그곳으로부터 오천명에 가까운 마도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천마궁도들은 비로소 안심한 듯 함성을 내지르며 원군을 환영했다. 하나, 그것을 본 군무현의 입가에는 한줄기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뜻대로 되어가는군!)

다음 순간,

!”

그는 웅후한 창룡후를 터뜨리며 군웅들의 선두로 나섰다.

이어,

천붕뇌명후!”

삐 이익! 한소리 찌렁한 외침과 함께 봉황옥소로부터 머리끝을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날카로운 소성이 터져나왔다.

순간,

크 악!”

으으으 악!”

케엑!”

용기백배하여 군웅들을 몰아붙이던 천마궁도들 중 일백 명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비진형(守備陣形)으로 모이시오!”

군무현은 군웅들을 향해 웅후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와 아!”

!”

군웅들은 사기충천하여 함성을 내지르며 급격히 진세를 축소시켰다. 삽시에, 그들은 엄밀한 수비진형을 형성했다.

진세에 빈틈이 없음을 살핀 군무현, 그는 다시 봉황옥소를 입술에 갖다댔다.

멸절사뢰음!”

삐 익! 삘 릴 리! 귓청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발기는 전율적인 소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직후, 파파파팍! 위 잉! 주위 오십 장이 돌연 가공한 회오리에 휘말린 듯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그 가공할 충격에 오십장 내의 마도들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뒹굴었다.

하나, 군무현은 촌각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한꺼번에 몰아쳐 마도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버릴 듯 쉬지않고 봉황옥소를 불었다.

천승대법음!”

삘릴리 삘리... 위 잉! 츠츠츠츠읏! 가공할 음파가 방원 일백 장을 완전히 뒤덮었다.

장내는 검풍장영(劍風掌影)이 난무하는 가운데 섬뜩한 피보라가 회오리쳤다.

그때, 군무현, 그는 주위를 살피며 한 명의 인물을 찾고 있었다.

(짐작대로... 사라졌군!)

그는 대천성자의 모습을 찾았으나 그 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데 문득,

“...!”

그의 두 눈이 강렬하게 번득였다. 천마궁의 주위로 무수한 인영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것을 감지한 것이었다.

(나타났다. 혈문(血門)!)

다음 순간, 그는 군웅들을 향해 위엄있는 음성으로 지시했다.

좌로, 곡구를 확보하시오! 중로! 철갑세(鐵甲勢)의 진세로 전형하고 우로는 첨형대진(尖形大陣)으로 좌로의 전방을 지원하시오!”

군웅들은 영문을 몰랐으나 쾌속히 그의 뜻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

알겠습니다!”

스스스슥...! ! ! 그들의 동작은 쾌첩하고 기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군웅들의 대진의 선봉을 맡은 인물은 소림, 무당, 종남, 당문에서 각각 백명씩 선발된 최정예들이었다.

그들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수천명의 군웅들은 한몸처럼 질서정연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만박기사!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돌연 한소리 창노한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군무현의 귓전을 때렸다.

뒤이어,

쳐랏!”

칼로 절단하듯 싸늘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순간,

와 아!”

와 쳐라!”

천마곡의 사위에서 돌연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인영들이 속출했다. 그 자들은 가공할 기세로 폭풍같이 천마곡을 휩쓸었다.

크 악!”

아악...!”

순식간에, 장내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잇따라 터지는 돌연한 사태에 우왕좌왕하던 천마궁도들은 물론이요, 치밀한 진세를 이룬 외곽의 군웅들마저 저항 한 번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때,

... 태상맹주! 당신이 배신을...!”

현의천신이 두 눈을 부릅뜨며 불신의 표정을 지었다.

보라! 일단의 혈의인들을 진두지휘하여 군웅들을 짓쳐드는 인물. ! 그는 바로 정의맹의 태상맹주, 그 지고무상한 직위의 대천성자가 아닌가?

천하가 우러러 경외하며 흠모해 마지않는 기인, 그가 혈문(血門)의 주구였다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천마궁의 마도들은 그들대로 엄청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혔다.

천마궁주 천마제군(天魔帝君)! 바로 그들의 궁주가 수하들에게 직접 무자비한 살수를 가하고 있지 않은가?

크윽... ... 제군이 우리를...!”

천마제군의 손에 쓰러지는 마도들은 경악과 분노, 회의와 불신으로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갔다.

이 무슨 참변이란 말인가?

대천성자, 그 자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득의의 어조로 외쳤다.

으하하하! 어리석은 놈들! 천하는 혈문의 것이다!”

그러자, 천마제군도 장내를 휘둘러보며 살기어린 음험한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투항하라! 투항하는 자들은 잔명(殘命)이나마 보전하게 될 것이다!”

그 자들은 이미 천하 위에 군림한 종주(宗主)처럼 그 기세가 당당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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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七 章

 

                   大劫風

 

 

 

연무장(鍊武場)!

천신보의 중앙에 설치된 드넓은 연무장이었다.

풍지면(風之變)!”

군무현은 낭랑하게 외치며 붉은 깃발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

수천 명의 군협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신속히 진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태을세현(太乙世現)! 풍뢰자명(風雷自鳴)!”

연이어 군무현의 위엄있는 외침이 연무장을 울려퍼졌다.

그에 따라, 스스슥...! 츠츠 위 잉! 군협들이 이룬 진세는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켰다.

? 그것은 실로 일대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한편, 연무장의 뒤쪽, 정도의 명숙들이 모여 연무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헛허... 과연 신기황 노선배의 제자답군!”

허허허...! 군사가 호언한대로 열흘이 못되어 정의지력(正義之力)은 두배 강해졌소이다!”

하하... 어찌 두배 뿐이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천마궁과의 대전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허허허...!”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천 명의 군웅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군무현, 그의 신()적인 자질을 두고 그들은 한결같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 만박기사! 그는 곧 천신보의 태양(太陽)이었다.

그때, 중인들과 조금 떨어진 곳, 한 명의 금의미녀가 넋나간 듯 망연히 선 채 군무현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핏기가 없는 핼쓱한 얼굴, 깊고 큰 눈망울이 쓸쓸한 느낌을 준다.

금붕옥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원래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나, 자신의 병을 치료해준 군무현을 알고부터 그녀의 성격은 갑자기 변화되었다.

아직 병색이 완연히 가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랑(), 그것을 느낀 여심(女心)은 안타깝고 고통스러웠다.

연무장 근처네은 또 한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침하게 군무현을 노려보는 인물, 그는 바로 대천성자였다.

 

대정전(大正殿)!

 

여러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 지금은 천지가 잠든 깊은 밤이었다.

... 아니.. 이 밤중에 출동하자는 말씀이시오?”

현의천신은 난색을 지으며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정전 안에 모여있는 명숙들은 한결같이 난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군무현, 그는 이 깊은 밤을 틈타 천마궁의 공격을 감행하자는 것이 아닌가?

하나, 그의 계획은 치밀했다.

천마궁에서는 이틀 후에 본맹이 대공세를 펼칠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오. 적이 기다리고 있을 때 공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소이다!”

군무현의 논리정연한 말에 중인들은 그제서야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무현은 완벽한 공격태세를 추진해 나갔다.

이제 여러분께 임무를 맡기겠소!”

분부를 내리시오!”

현의천신이 신광을 빛내며 힘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군무현은 좌중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빈틈없는 작전 계획을 설명해 나갔다.

삼로(三路)로 나누어 천마궁에 육박해야 하오이다. 좌로(左路)는 맹주께서 일천 정예를 이끌고 치십시오. 가능한 급속히 진출하여 중로(中路)가 천마궁의 방어를 분쇄할 교두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오이다!”

현의천신은 그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군무현은 이번에는 대천성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로(中路)는 태상맹주께서 정예 삼천으로 치십시오. 천마궁의 강력한 방어가 있을 것이니 쾌()보다 실()을 취하셔야 할것입니다!”

허허... 알겠네!”

대천성자는 염려말라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군무현,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도 좌중에게 설명했다.

우로(右路)는 소생이 직접 진출할 것이오. 수성(守城)은 금붕도주께서 맡아주시오!”

알겠소이다!”

금붕천왕도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군무현을 대하는 눈빛은 신뢰와 진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군무현은 중인들에게 재촉했다.

지체할 수 없소이다. 즉시 출발하도록 하시오!”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 ! 대전 안의 인물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다.

삽시에, 대전 안에는 금붕천왕 부녀(父女)와 군무현만이 남게 되었다.

문득, 군무현은 신비한 눈빛으로 금붕천왕을 바라보았다.

소생이 부탁한대로 해주십시오!”

허허허... 걱정마시오. 다행히 이 아이가 기문진학에 능통하니 군사께서 주신 진도(陣圖)대로 천신보를 감출 것이오!”

금붕천왕은 염려말라는 듯 자신있게 대답했다.

군무현은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그럼...!”

스스슥... 그는 연기처럼 대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금붕옥녀, 그녀는 망연한 시선으로 군무현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금붕천왕은 내심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아가 군사에게 단단히 빠졌군... 하긴 나이가 다소 많은 것이 흠이지만 짝을 찾을 수 없느 신랑감이지!)

하나,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금붕천왕.

두 부녀는 그렇게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의맹에서 조금 떨어진 험로(險路)! 한 명의 백의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흐흐흣... 이대로라면 천마궁이 일방적으로 당한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그 자는 음험하게 웃으며 한 마리 전서구를 허공으로 날렸다.

! 전서구는 날개를 펴며 쏜살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백의노인, 그 자는 남자가 넘는 백염을 드리운 얼굴에 청수하고 인자한 인상이었다. 하나, 지금 그 자의 두 눈은 사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흐흐... 그 애송이가 주력을 노부에게 맡겼으니... 천마궁과 정의맹을 동귀어진 시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음험한 중얼거림을 마친 순간, 스슥... 그 자는 유령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데, 백의노인이 사라지고난 직후, 한그루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명의 문사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대천성자... 역시...!”

그는 침중한 중얼거림을 흘리며 백의노인, 대천성자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바로 그때, 푸드득...! 문득 한 마리 천리신응이 문사의 어깨로 날아내렸다.

일순 중년문사의 무심한 두 눈이 번뜩 빛났다.

천리신응! 그것의 발목에는 하나의 작은 헝겊이 메어져 있었다.

중년문사, 물론 그는 만박기사로 행세하고 있는 군무현이었다. 군무현은 급히 헝겊을 뜯어보았다.

 

<소요장에서 삼천명의 절정고수들이 떠났음. 하나같이 극()에 이른 마공을 익힌 자들. 절강 방면에서도 일천(一千)의 신비고수들이 움직였음. 혈문(血門)의 인물들로 추측됨. 목적지는 안휘(安徽)의 구궁산(九宮山).

신응(神鷹).>

 

“...!”

군무현은 안색을 굳히며 헝겊조각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푸시시... 헝겊조각은 이내 그의 손 안에서 한줌 재로 화해 흩어졌다.

다음 순간, 스슥...! 군무현의 모습은 유성(流星)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X X X

 

구궁산(九宮山)!

무림최대의 마궁(魔宮) 천마궁(天魔宮)이 자리하고 있는 곳.

구궁산 서남쪽의 산봉, 뿌옇게 터오는 여명을 등지고 수많은 인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천명, 하나, 마치 한 명이 움직이는 듯 그들의 동작은 일사불란하고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승(), (), () 등 여러 부류의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선두, 스슥... 한 명의 중년문사가 바람같은 신법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한 마리 청학(靑鶴)을 연상케하는 고고하고 기품있는 모습.

문득, 중년문사는 좌우의 인물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천마궁까지는 삼십리 남았소이다!”

그는 하룻밤을 쉬지않고 달려오면서도 숨 한 번 거칠게 내쉬지 않는 기인(奇人)이었다.

한데, 그들 일행이 막 작은 산봉을 넘어섰을 때였다.

죽어랏!”

와 랏!”

돌연 엄청난 함성이 산봉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앗! ! ... 위잉! 광풍폭우가 몰아치듯 엄청난 공세와 함께 수백, 수천의 암기가 허공을 뒤덮었다.

! 그것은 모두 중년문사 한 사람을 겨눈 것이 아닌가?

일촉즉발! 도저히 피할 엄두조차 내지못할 급작스런 사태였다.

하나,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핫하... 이제야 나타나셨군!”

중년문사는 오히려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여유있게 슬쩍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파파파팍! 타다다닥...! 수백, 수천 개의 빛발치듯 날아든 암기는 무형의 벽에 부딪힌 듯 그대로 튕겨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츠츠츠읏! 쐐액! 암기의 공세가 무산됨과 함께 네줄기 혈영이 번뜩 튀어나와 중인들을 찔러 왔다.

하나 그때,

크크읏! 개세혈강륜을 아느냐?”

중인들의 대열에서 한 명의 노인이 불쑥 튀어나오며 시뻘건 혈륜을 발출했다.

우 잉! 츠츠츠... 일순 허공은 온통 시뻘건 핏빛 혈기로 뒤덮였다.

직후,

!”

...!”

네명의 암습자들은 대경실색하며 다급성을 토했다.

다음 순간,

크 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회오리치며 터져나왔다.

혈륜(血輪). 그것은 결코 보통의 륜이 아니었다.

과거 혈영천종의 수라혈강마저 파해시켰던 호신강기 파해전문의 암기였다.

그때,

우하하...! 종남천류검(終南天流劍)을 아느냐?”

또 다른 한 명의 노인이 중인들의 대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 파앗!

으악!”

케 엑!”

크윽...!”

그의 손에서 번갯불같은 검기가 십장을 쭉 뻗어나오며 순식간에 이십 명의 혈의인들을 두도강내고 말았다.

무량수불... 태청파옥강살이 이것이다!”

누더기를 걸친 도인도 질세라 앞으로 나섰다.

파파파팍! 콰르르릉... 그의 손에서 만년한철도 단번에 박살낼 엄청난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으으윽...!”

크 악!”

뒤이어 터져나온 것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눈깜짝할 순간, 오십여 명의 암습자들이 완전히 독살당하고 말았다.

갑자기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장내에 제멋대로 널브러진 시신들, 미명속에서 이 한바탕 혈전은 실로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끝나 버렸다.

문득,

쯧쯧... 불쌍한 자들...!”

중년문사는 주위의 시신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군무현 바로 그였다.

그의 주위로 여러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변장을 한 천수신, 종남검옹, 청옥자, 광법선사 등이었다.

실상, 정의맹의 최정예들은 모두 군무현의 우로군(右路君)에 있었다.

좌로군과 중로군은 천마궁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군무현의 계획은 실로 치밀했다. 문득, 그는 사파(四派)의 장문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천마궁의 지리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 말에 천수신이 염려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클... 물론이오. 천마제군 그놈이 먹여주는 밥을 몇끼 얻어먹다 보니 천마궁의 지리에는 훤하게 익숙해 버렸소!”

천수신, 그는 천마대전 때 천마궁에 갇혔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가능한 천마궁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크게 소란을 피워야 좌로군과 우로군을 막으러간 마도들이 허둥지둥 회군하게 될것입니다!”

그의 말에 종남검옹은 만면에 찬탄을 금치못하는 표정이었다.

허허... 정말 절묘하외다. 그 자들이 돌아왔을때는 이미 천마궁이 함락되어 있을 것이고 돌아오던 자들도 협살당하여 전멸하고 말것이 아니오?”

군무현은 그 말에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모든 일에 겸손한 그는 중인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이윽고,

, 갑시다!”

군무현은 앞장서며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스스슥... ! ! 일천 명의 인물들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비조처럼 구궁산의 북쪽을 향해 치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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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전생마왕>에서 <무림경영>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무림이 무대이긴 하지만 기업과 장사하는 이야기가 큰 뼈대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전생한 마왕이라 전생마왕이라는 제목을 지은 것인데...

이야기의 전개에 맞춰 <무림경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네이버에서 <무림경영 제1부>로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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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六 章

 

                   무르익는 風雲

 

 

 

한칸의 정실, 그곳은 은은한 향내음이 흐르는 여인의 규방이었다. 정실의 한쪽 옆,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여인의 침실이 있었다.

지금, 침상 위에는 한 명의 소녀가 파리한 안색으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금붕옥녀(金鵬玉女)! 바로 금붕천왕의 금지옥엽인 금붕옥녀였다.

군무현은 금붕천왕의 안내를 받아 금붕옥녀의 침실로 들어섰다.

(상세가 엄중하군!)

금붕옥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검미를 모으며 금붕옥녀의 여윈 손목을 잡았다.

심맥이 드러나 보일 듯 가늘고 파리한 손목, 그 손목을 잡는 순간 군무현은 안스러움을 금치못했다.

(내가 몹쓸짓을 했군!)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씁쓸한 자책감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진맥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 어떻소이까?”

초조한 표정으로 군무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금붕천왕이 불안한 듯 물었다. 군무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극고한 내가공력으로 일어난 음파(音派)에 충격을 받아 기경팔맥이 막혀버렸소이다!”

그 말에, 금붕천왕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 그럼 치유가 불가능하단 말이오?”

군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생사금침대법(生死金針大法)으로 끊어진 경맥을 잇고 몇가지 치료만 받으면 치유될 수 있소이다!”

...!”

그 말에 금붕천왕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생사금침대법(生死金針大法)!

신기황의 의술의 총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모금의 숨결만 남아 있어도 능히 생명을 돌이킬 수 있는 절정의 금침술(金針術).

 

백팔개의 금침과 더운 물을 준비해 주시오. 그리고 시녀에게 일러 영애의 의복을 모두 벗기도록 하시오!”

... 알겠소이다!”

군무현의 말에 금붕천왕은 즉시 대답하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군무현,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금붕옥녀를 내려다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나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에 선명한 윤곽, 길게 드리워진 짙은 속눈썹,

문득, 군무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원한은 원한을 낳을 뿐... 앞으로는 가급적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를 두고 복수를 다짐했던 군무현, 그의 철천지한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그의 가슴, 비로소 그의 가슴 속에 더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인가!

군무현이 그런 생각들에 젖어 있을 때였다. 문득, 방문이 열리며 은은한 향수 내음이 코끝을 감아왔다.

“...?”

군무현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 안으로 살며시 들어선 여인, 그녀는 우아한 기품을 지닌 중년미부였다.

(쇄심선자...!)

군무현의 내심이 다시 굳어졌다.

쇄심선자는 두 손에 금침을 받쳐들고 다가왔다. 이어, 그녀는 군무현에게 금침을 내밀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신첩이 도와드리죠!”

군무현은 일순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말과 함께, 그는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 사이, 쇄심선자는 능숙하게 금붕옥녀의 의복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 되었어요!”

쇄심선자는 금붕옥녀의 의복을 모두 벗긴 후 한쪽으로 물러났다.

“...!”

그제서야 군무현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드러난 뽀얗고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 하나, 군무현의 두 눈은 거울처럼 맑고 잔잔했다.

그는 일점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금붕옥녀이 나신을 바라보았다.

이어, 파앗... 파앗! 그는 금붕옥녀의 나신에 금침을 꽂아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타인을 치료하는 것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너무도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백팔개의 금침, 그것은 금붕옥녀의 혈도를 따라 빽빽이 꽂혀지고 있었다.

파앗! 파앗... 파앗! 눈 깜찍할 순간, 백팔개의 금침은 모두 금붕옥녀의 나신에 꽂혔다.

“...!”

쇄심선자는 한쪽으로 물러나 기이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이번에는 군무현이 금침을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파앗! 파파앗!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 금침이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점차 금붕옥녀의 옥안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

군무현은 마지막 하나의 금침까지 모두 뽑아낸 후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금침대법은 심력의 소모가 큰 작업이었다. 그때, 쇄심선자가 문득 흰 무명천을 군무현에게 내밀었다.

군무현은 멈칫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였다.

고맙소이다!”

이어, 그는 쇄심선자가 내민 무영천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쇄심선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군무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군사의 성이 혹시 군()씨가 아닌가요?”

순간,

“...!”

군무현은 자신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려 쇄심선자를 노려보았다. 쇄심선자의 깊고 큰 두 눈이 축축한 물기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군무현은 흠칫했다. 하나, 그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쇄심선자, 마침내 그녀의 두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랬었구나... 네가... 무현(武玄)이었구나...!)

그녀는 뜨거운 회한의 음성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대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

군무현은 아무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쇄심선자에게 눈길조차 주지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방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금붕천왕이 황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 군사! 그 아니는...?”

안심하셔도 되오. 내일 소생이 약방문을 지어드릴테니 한 달만 복용하면 완쾌될 것이오!”

군무현의 그 말에 금붕천왕은 입이 찢어질 듯 환하게 웃었다.

... 고맙소이다. 군사!”

그는 군무현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보다 금붕옥녀를 보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허둥지둥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군무현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없이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쇄심선자, 어느새 밖으로 나온 그녀도 말없이 군무현의 뒤를 따랐다.

시각은 벌써 삼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현... ... 나는 네 이모란다!”

쇄심선자는 군무현의 앞에 끓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군무현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고통과 번민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군무현, 그는 폭발하려는 감정을 삼키며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쇄심선자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군무현의 앞에 사죄했다.

네 어머니와 나는... 이복자매였다. 한데... 불행하게도 우리 자매는 동시에 네 아버지를 사모하게 되었다...!”

군무현의 안색은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하나 결국... 네 아버지는 나를 버리고 언니를 택했다...!”

쇄심선자는 고통의 빛으로 얼룩진 두 눈에 아련한 회상의 빛을 띄웠다.

 

이하령(李河寧)!

그녀는 군무현의 생모(生母), 즉 이유련(李庾蓮)과는 어머니를 달리하고 태어난 자매였다.

언니인 이유련(李庾蓮)!

그녀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으며, 동생인 이하령(李河苓)은 쾌활하고 발랄한 성격을 지녔다.

성격은 대조적이었으나 두 자매는 마치 일심동체처럼 사이가 좋았다.

운명(運命)은 그런 그녀들의 사이를 시샘하고 말았다.

적룡대제(赤龍大帝)!

어느날 두 자매의 앞에 한 명의 젊은 효웅이 나타났다.

두 자매는 불행하게도 동싱 적룡대제를 사모하고 말았다. 적룡대제 역시 그녀들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두 자매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나, 결국 그는 단안을 내렸다.

온유한 성격을 지닌 이유련을 아내로 택한 것이다.

사랑을 빼앗긴 여심(女心)은 가혹하게 상처받았다. 그때부터, 이하령은 언니 이유련과 적룡대제를 원수같이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적룡세가를 괴멸시키는데 가담하기까지 했으니...

하나, 쇄심선자는 원래 악한 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적룡세가가 멸망하고 적룡대제가 죽자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못난 계집인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 후 육 년의 세월, 그것은 쇄심선자에게 있어 형벌의 세월이었다. 뼈를 저미는 후회와 고통 속에서 그녀는 참회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쇄심선자는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쏟으며 지난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무현! 이 못난 이모를... 왜 그냥 두느냐? 나를... 일장에 죽여다오. 너의 손에 죽는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무현...!”

그녀는 군무현의 무릎에 매달려 오열을 터뜨렸다.

군무현. 그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

야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문득 축축한 물기가 고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아래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쇄심선자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그의 두 눈에 짙은 연민의 빛이 어렸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모님... 일어나십시오!”

순간, 쇄심선자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군무현을 올려다 보았다.

무현... ... 네가 나를 이모라고 불렀느냐?”

그렇습니다. 이모님!”

군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쇄심선자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힌 듯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께서도... 제가 이모님을 벌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 무현... !”

쇄심선자는 격동을 금치못하며 군무현을 와락 부둥켜 안았다. 군무현은 흐느낌을 멈추지 않는 쇄심선자를 가볍게 다독거려 위로했다.

그만 진정하십시오. 이모님!”

... 흐윽...!”

쇄심선자는 육 년 동안 쌓인 고통을 모두 툴어버리려는 듯 쉽게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비로소 그녀는 감정이 가라앉은 듯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군무현은 비로소 쇄심선자를 떼어 놓았다.

이어, 문득 그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어서 들어오십시오!”

순간, 쇄심선자는 흠칫하며 표정을 지었다.

그때, 스스슥... 스슥! 방안으로 소리없이 네 명의 노인이 날아들었다.

선자께서도 와 계셨구려!”

쇄심선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는 백의노인, 그는 바로 종남파의 종남검옹이었다.

다른 세 명의 인물들, 그들오 각기 일파(一派)의 지존들이었다. 소림의 광법선사, 무당의 청옥자, 당문의 천수신이 바로 그들이었다.

소림의 광법선사, 그가 먼저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군사께서는 무슨 일로 빈승들을 은밀히 소집했소이까?”

군무현은 엄숙한 안색으로 말했다.

네분께 한 가지씩의 물건을 돌려드리기 위해서이오. 또한 긴힌 부탁드릴 것이 있소이다.”

네 명의 장문인들과 쇄심선자는 의아한 시선으로 군무현을 주시했다.

군무현은 묵묵히 탁자 위의 책상자를 열었다. 이어, 그는 그곳에서 몇 가지의 물건을 꺼내 네 명의 장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광법선사에게는 달마보장(達磨寶杖), 청옥자에게는 태청신홀을, 종남검옹에게는 종남연기경(終南鍊氣經), 그리고, 천수신에게는 개세혈강륜을 각각 돌려주었다.

! 그것은 바로 군무현이 수라동부(修羅洞府)와 그 지하광장에서 습득한 육대고인의 신물이 아닌가?

광법선사를 비롯한 네명의 장문인, 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아미타불... 달마보장이 팔백년 만에 나타나다니...!”

... 태청신홀...!”

혈륜태세(血輪態世) 조사님의 개세혈강륜! 오오...!”

그들은 아연하여 입을 딱 벌렸다. 이어, 그들은 만면에 흥분과 희열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군무현을 주시했다.

군무현은 그들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소생이 인연이 닿아 수라혈영제와 동귀어진한 육파고인들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소이다.”

그것들은 그때 거둔 고인들의 신물들로 여러분 문파의 것이므로 되돌려 드리는 것이오!”

이미 팔백년 전에 사라진 사파(四派)의 진산지보. 그것을 물려받은 네 장문인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들은 격동과 희열을 금치못하며 군무현에게 거듭 감사했다.

아미타불...! 군사! 이 은공을...!”

무량수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구려!”

군사...!”

진정 고맙소이다!”

군무현은 그들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당연한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기 바라오!”

이어, 문득 그는 진중한 안색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 부탁이 있소.”

무엇이든 분부만 내리시오. 불속에 뛰어들라 하더라도 서슴치 않을 것이오!”

천수신이 호쾌한 음성으로 얼른 대꾸했다.

군무현은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네분께서는 문중의 정예 각 일백 명에게 소생이 드리는 이 진세를 비밀리에 연성시켜 주셨으면 하오이다!”

말과 함께, 그는 품속에서 네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진식을 연마하는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라 하심은...!”

종남검옹은 의혹의 표정으로 군무현을 주시했다.

군무현은 그 말에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궁의 제삼세력이 정의맹과 천마궁의 충돌을 노리고 있소이다. 진식을 전수함은 그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오!”

... 제삼세력!”

중인들은 그의 말에 안색이 대변하여 부르짖었다. 하나, 군무현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그것에 관해 자세히 말씀 드리겠소!”

“...!”

“...!”

중인들의 눈빛이 심각하게 어우러졌다.

군무현은 네장의 진형도(陣形圖)를 중인들에게 각각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이어, 그는 문득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이목이 많아 네분께 긴 말씀을 드리지 못함을 이해하시오!”

사파(邪派)의 장문인들, 그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잠시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는 그들, 이윽고, 그들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군사, 편히 쉬시오!”

그들은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고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스스슥... 방안에는 다시 군무현과 쇄심선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군무현은 담담한 눈빛으로 쇄심선자를 바라보았다.

이모님께서도 그만 돌아것 쉬셔야지요!”

쇄심선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오냐! 네 건강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는 아직도 축축이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군무현을 응시했다. 이어,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으음...!”

군무현은 갑자기 무너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빛, 그의 두 눈은 깊숙하게 가라앉아 공허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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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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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五 章

 

                      天神堡會合

 

 

 

천신보(天神堡)!

 

사상 유래없이 천신보는 막강한 정도무림(正道武林)의 중심(中心)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천신보의 세력은 실로 엄청났다. 일백팔십개 백도 문파에서 모여든 오천 명의 의협지사들이 당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이 곧 정도무림이라 해도 될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현의천신(玄衣天神) 위지강!

천신보주인 그는 정의맹(正義盟)의 맹주이기도 했다.

적룡대제 이후 명실상부한 중원일절(中原一絶)로 숭앙받는 강자(强者). 하나, 정의맹에는 맹주의 직위보다 더 높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상맹주(太上盟主)의 직위였다. 그 직위는 천하무림의 재생에 큰 공로를 세운 대천성자(大天聖子)에게 주어졌다.

대천성자! 그는 자신의 수하인 소요장의 기인들로만 천마궁을 유인했으며, 정파 일백 개 문파의 장문인들을 구해낸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신시(申時) 무렵,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문득, 천신보의 웅장한 보문을 향해 휘적휘적 다가오는 한 명의 중년문사가 있었다.

지극히 청수한 용모를 지닌 중년문사. 그는 한손에 길쭉한 책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보루 위에 서 있던 중년인의 눈빛이 번뜩 빛을 발했다.

(범인이 아니다!)

그는 종남파(終南派)의 명숙인 청검신수(靑劍神手)였다.

청검신수는 급히 달려나오며 중년문사를 맞이했다.

선생께서는 어인일로 이곳까지 험한 걸음을 하셨소이까?”

그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한 가운데 위엄이 담겨 있었다.

중년문사는 걸음을 멈춰서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신기곡(神機谷)의 만박(萬搏)이라 불리는 졸부이외다!”

순간,

“...!”

천검신수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빠르게 중년인을 살펴본 후 내심 중얼거렸다.

(이 인물이 바로 태상맹주께서 극찬하시던 그 기재(奇才)...!)

그는 놀라움의 눈빛을 지었다.

중년문사, 물론 그는 만박기사(萬搏奇士)로 역용한 군무현이었다. 이윽고, 청검신수는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만박기사(萬搏奇士)셨구려! 그렇지 않아도 태상맹주께서 여명을 누누이 말씀하셨소이다. ,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감사하오!”

군무현도 가볍게 예를 취했다. 문득, 고개를 드는 군무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대천성자... 본인과 만난 것이 그대의 가장 큰 실수임을 깨닫게 되리라!)

그는 내심 기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청검신수는 몸을 돌려 앞장섰다. 그는 총총한 걸음을 옮겨 군무현은 천신보 안으로 안내했다.

천신보의 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던 군무현, 그는 내심 경탄해 마지 않았다.

(천마궁에 못지 않는군!)

천신보 안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화려한 고루거각과 크고 작은 전각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 천신보의 위용은 가히 천하를 압도할 정도였다. 하나, 그 내부는 표면적인 위용보다 더 질서정연하고 엄중했다.

군무현은 그 분위기를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천신보 내를 오가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정기가 헌앙한 영걸들 뿐이었다. 이윽고, 청검신수는 하나의 넓은 대전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대정전(大正殿)!>

 

대전의 입구에는 그와같은 편액이 높게 걸려 있었다. 청검신수는 군무현을 대정전(大正殿) 안으로 안내했다.

대전 안, 수십 명의 인물들이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군무현과 청검신수가 대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

“...!”

대전 안의 인물들의 눈길이 일제히 군무현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청검신수는 얼른 입을 열어 군무현을 좌중에 소개했다.

여러분! 귀빈께서 오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만박기사 이십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

만박기사...!”

좌중에서 일제히 감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각기 한 분야에서 무림제일의 지존(至尊)으로 숭앙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나같이 출중한 기품과 함께 정기(正氣)가 늠염한 모습들.

그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군무현을 반겼다.

그때,

헛허... 어서 오시오! 태상맹주께 선생의 말씀을 많이 들었소이다!”

현의(玄衣)를 걸친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군무현에게로 다가왔다. 순간, 군무현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현의천신...!)

그는 내심 복잡한 심정이었다.

현의천신! 그가 누군가? 바로 적룡세가를 친 주요 인물이 아닌가?

군무현에게는 불공대천지수였다. 하나, 또한 그는 위지사영의 친부로 자신의 장인이 되기도 했으니... 군무현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하나, 그는 내심의 감정을 내색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현의천신을 향해 포권했다.

만박기사, 맹주께 인사드리오이다!”

허허...! 원로에 노고가 많았소. , 이리로 앉으시오!”

현의천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군무현을 좌중의 상좌로 안내했다. 물론, 그를 귀빈으로 대우하여 상좌에 앉힌 이유도 있었다.

하나, 군무현은 실상 신기황의 제자로서 배분으로 치자면 이곳에서도 제일 높은 것이다.

상좌를 그에게 내줌은 마땅한 일이었다.

고맙소이다!”

군무현은 가볍게 예를 표한 후 상좌에 앉았다.

현의천신도 곧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이어, 그는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허허... 선생께 여러분의 명숙들을 소개해 드리겠소.”

그는 군무현에게 천의맹 내의 명숙들을 차례로 소개해 나갔다.

군무현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인물은 한 명의 금포노인이었다.

금붕천왕(金鵬天王)! 바로 그였다.

중인들과는 달리 그의 안색은 왠지 몹시 어두어 보였다. 군무현에 의해 허공에서 떨어져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금지옥엽 금붕옥녀(金鵬玉女) 때문이었다.

그녀의 상세는 점점 악화되어 갈뿐 도무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금붕천왕, 그가 아무리 잔악한 심성을 지녔다고는 하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했다. 그는 비록 몸은 좌중에 있었으나 마음은 오직 금붕옥녀의 생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얼굴에 수심의 표정이 절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었다.

군무현은 눈길을 돌려 다시 좌중의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금붕천왕 외에 그가 알고있는 인물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소림(少林)의 방장인 광법선사(廣法禪師)를 비롯하여, 무당장문인 청옥자(靑玉子), 종남(終南)의 장문인 종남검옹(終南劍翁), 당문(唐門)의 가주(家主)인 천수신(千手神) 당가정(唐家正) ...

그리고, 장하용왕(長河龍王)과 쾌도문(快刀門)의 도천왕(刀天王)도 자리하고 있었다.

현의천신은 장내의 인물들을 거의 다 소개하고 난 후 이번에는 한 명의 중년미부를 가리켰다.

이분은 중원제일여협(中原第一女俠)이신 쇄심선자(碎心仙子)이시오!”

그녀를 일견한 순간, 군무현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쇄심선자(碎心仙子)!

그녀가 누군가? 쫓기던 군무현에게 파옥쇄심수(破玉碎心手)를 쳐내어 위경에 빠뜨리게 했던 여인이 아닌가?

그녀야말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원수였다. 그때, 문득쇄심선자가 기이한 눈빛으로 군무현을 주시하며 말했다.

선생의 눈빛이 왠지 눈에 익은 것 같군요!”

그 말에 군무현은 내심 흠칫했다. 하나, 그는 극히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눈매가 비슷한 사람은 많은 법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온화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나, 군무현의 내심은 차갑게 식고 있었다.

그때,

허허... 만박기사께서 오셨다고!”

문득 가벼운 너털웃음이 들리며 한 명의 노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석풍도골의 수려한 풍모에 인자하고 온후하기 그지없는 백의노인, 그가 들어서는 순간,

태상맹주! 어서 오십시오!”

좌중의 인물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백의노인, 그가 바로 정의맹 최고의 직위를 지닌 대천성자였다.

소요장의 기인, 군무현의 눈빛이 짧은 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음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

그는 대천성자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본 후 극히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대천성자를 향해 정중히 예를 위해 보였다.

허허... 신수가 훤해지셨군. 탕마대전(蕩魔大戰)이 임박한 때에 자네가 찾아와 주니 노부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한 심정일세!”

대천성자는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덥석 군무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눈빛은 인자하고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며 그 태도는 만인이 존경할 정도로 정대하고 품위가 넘쳤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무서운 인물...!)

군무현은 그런 대천성자를 주시하며 내심 차갑게 중얼거렸다. 하나, 그는 전혀 내색지 않고 겸손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거한 재간이나마 천하가 안정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소생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정심한 가운데 굳은 의지가 담긴 그의 어조, 그것은 만인이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대천성자는 그 말에 크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허... 고맙네. 앉게나!”

군무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천성자는 좌중을 둘러본 후 군무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헛허... 그대가 올줄 알고 군사(軍師)의 자리를 비워두었지. 어떤가? 맡아 줄 수 있겠나?”

그는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고 좌중의 의견까지도 합일시켜 놓은 뒤 군무현의 의사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군무현으로서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에게 과분한 직위이나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겸손한 가운데 당당한 자신감이 서린 어조, 그런 그를 좌중의 인물들은 이미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대천성자, 그 역시 몹시 흔쾌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허허... 되었네. 이제 정의맹은 천마궁에 쾌승할 것이 분명하네!”

“...!”

“...!”

중인들은 그 말에 안색을 활짝 펴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군무현은 가볍게 검미를 모으며 입을 열었다.

천마궁의 공략 계획이 임박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말의 현의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소이다. 군사(軍師)! 앞으로 열흘 후, 본맹은 천마궁을 칠것이오!”

그의 어투는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군사(軍師). 군무현을 군사로 부르기에 서슴치 않은 것이었다.

(열흘 후라...!)

군무현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군무현에게 집중되었다.

새롭게 군사로 추대한 그에 대한 기대와 신뢰의 눈빛으로.

문득, 군무현은 강렬한 신광을 빛내며 자신있게 입을 열었다.

열흘 동안... 정의맹의 지휘권을 소생에게 맡겨주십시오. 지금보다 두 배 강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

그의 말에 각 문파의 수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질을 지닌 기재라고는 하지만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데, 군무현이 장담한 것은 그 능력 이상의 것이 아닌가!

하나, 대천성자, 그는 일점의 불신이 빛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의아할 정도로 군무현을 믿는 것 같았다.

허허... 신기황의 제자이니 어련하겠는가? 노부는 그대의 재질을 크게 기대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군무현은 자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현의천신이 문득 안색을 바꾸며 군무현에게 권했다.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텐데 오늘은 쉬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군무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그 말에 현의천신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군무현에게 말했다.

, 노부를 따라오시오!”

고맙소이다!”

군무현은 좌중의 중인들에게 가볍게 포권을 해보였다. 이어, 그는 현의천신을 따라 천천히 대전을 나섰다.

군무현의 거처는 천신보 후원의 조용한 전각이었다.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전각, 그 앞에는 잘 가꾸어진 화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의천신은 특별히 군무현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두 명의 시녀마저 거처에 두게 했다.

군무현, 그는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금방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문득 문 밖에서 시녀의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군사님! 금붕도의 금붕천왕께서 오셨습니다!”

군무현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금붕천왕... 금붕옥녀 때문에 왔나보군!)

그는 달갑지 않은 심정이었으나 금붕천왕을 맞아들여야 했다.

안으로 모셔라!”

그는 밖을 향해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며 잠시 후 수척한 얼굴의 금붕천왕이 들어왔다.

야심한 시각에 찾아뵈어 폐가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그는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오이다. , 앉으시지요!”

군무현은 담담한 신색으로 손을 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군무혀은 금붕천왕의 시색을 살피며 먼저 말을 꺼냈다.

도주께서는 우환이 있으신 듯 한데...!”

금붕천왕은 그제서야 잔뜩 수심의 표정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 때문에 군사를 찾아뵌 것이오. 이 늙은이게는 딸 아이가 한명 있소. 한데 얼마전 강적에게 크게 부상을 당하여 지금까지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져있소!”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은 절박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한가닥 기대의 눈빛으로 군무현을 주시하며 말했다.

신기황께서는 기절(奇絶)이시자 의절(醫絶)이셨음을 알고 있소이다. 군사께서 그 아이를 좀 돌보아 주셨으면 하고...!”

그는 말끝을 흐렸다. 하나, 그의 눈빛 속에는 절실한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

그 눈빛을 접한 군무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앞에 앉아있는 인물, 그는 자신의 원수다. 하나, 원수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그는 동정을 느꼈다.

(어찌 되었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무엇보다 숭고한 것이니...!)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문득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천색을 살폈다.

(삼경(三更)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삼경이라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이윽고, 군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이나 영애(令愛)의 상세를 한 번 보아드리겟소!”

순간, 금붕천왕의 안색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군사! 이 은혜를...!”

하나, 군무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직 영애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도주의 과례를 감당할 수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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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四 章

 

                       仙府後裔

 

 

 

군무현이 신형을 휘청하는 순간, 우르르릉! 콰릉... 표향대운룡의 노도같은 강기가 그의 전면으로 짓쳐들었다.

군무현은 흠칫했으나 황급히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태양천뢰폭!”

직후, 파파파 팍! 청백색의 불길이 화산이 터지듯 무섭게 작렬했다. 그 기세는 가히 가공지경이었다.

콰르릉 쾅! 일순 낡은 제단이 박살나며 재로 화해 부서졌다.

순간,

크윽...! ... 태양천제의 무공이 나타나다니...!”

표향대운룡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며 부르짖었다.

! 그 자는 가슴이 시커멓게 타버린 채 토지묘 밖으로 날아나갔다.

죽이리라!”

군무현은 무서운 살기를 폭사하며 적룡검을 뽑아들었다.

다음 순간, 쐐 액! 한 줄기 눈부신 광채와 함께 적룡검이 날았다.

적룡어강살! 그것이 펼쳐진 것이었다.

적룡검은 정확히 표향대운룡의 등을 향해 꽂히듯 뻗어나갔다. 직후,

케 엑!”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시뻘건 피가 확 퍼져올랐다.

삼십장 밖으로 달아나던 표향대운룡, 그 자는 허리가 양단된 채 그대로 즉사해 버린 것이 아닌가?

냉막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군무현,

문득,

크윽...!”

그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휘청했다. 애써 억눌러왔던 표향대섭정신공의 음사지기(淫邪之氣)가 뚝이 터지듯 폭발하며 노도같은 욕정이 치솟아 오른 것이었다.

그것은 군무현으로서도 감당치 못할 강렬한 욕정이었다.

...!”

그의 이성은 급격히 무너졌다. 그의 전신은 불덩이같이 달아올랐으며 두 눈은 삽시에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런 그의 변화에 청하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

그녀는 절망적인 신음을 발하며 탄식했다.

그때,

... ...!”

군무현이 몸을 비틀거리며 청하에게로 다가왔다. 이어, 그는 그대로 난폭하게 청하를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불문정종심법을 익힌 불제자였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 극히 미약한 한 가닥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 안돼요! ... 시주...!”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군무현을 피하려 했다. 하나,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욕정에 휘말려버린 군무현이 그런 그녀의 저항에 물러날리 만무했다.

파팍! 한 순간 군무현의 거친 손길에 청하가 쓰고있던 죽립이 완전히 박살났다. 그러자, 욕정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 ...!”

군무현은 짐승같이 거친 신음을 발하며 그대로 청하의 몸을 덮쳤다.

...!”

청하는 무섭게 끓어오르는 본능적인 욕망과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서로 뒤엉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찌익 찍! 군무현은 거칠게 청하의 승포를 찢어버렸다. 그러자, 터질 듯 무르익은 풍만한 젖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허억!”

군무현은 그것을 보는 순간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청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뜨겁게 달아로는 육체에 사내의 손길이 닿자 한가닥 남아있던 이성마저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흐윽...!”

그녀는 뜨거운 비음을 발하며 오히려 군무현에게 매달렸다. 한데 그때,

... 제발... 소녀 먼저...!”

이미 전라가 된 위지사영까지 군무현의 품에 안겨들었다.

군무현은 충혈된 눈으로 두 여인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이어, 찌 익! !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의복을 찢어던졌다. 그리고, 두 여인과 한 사내는 격정적으로 서로 뒤얽혔다.

 

폭풍일과(暴風一過).

흑흑...!”

처연한 여인의 흐느낌이 토지묘 안을 가득 채우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 어느새 토지묘 안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문득,

...!”

군무현은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순간,

“...!”

그의 몸이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지난 밤, 한차례 악몽을 꾸고난 기분이었다. 표향대섭정신공의 음사지기에 휘말려 그는 밤새 두 여인과 정사를 벌였던 것이다.

폭풍의 밤, 그것은 온 몸의 힘을 거의 탈진시켜 놓고서야 사그러들었다. 아직 어둑어둑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토지묘의 구석 자리,

흐흐흑...!”

한 명의 여인이 쪼그리고 앉은 채 서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삼십 전후의 기품있고 고귀한 용모를 지닌 여인. 그녀는 찢어진 승포로 대강 몸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직한 흐느낌, 하나, 그것은 심금을 적셔낼 듯한 깊은 서러움이 배인 것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낄 때마다 그녀의 풍만한 나신이 뽀얗게 출렁거렸다.

군무현. 그의 눈빛이 어둡게 흔들렸다.

그는 문득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품에는 위지사영이 새록새록 숨을 몰아쉬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역시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내가 기이코...!)

군무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위지사영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청하가 덮어 주었는지 군무현과 위지사영의 나신 위에는 군무현의 장포가 덮여져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의복을 찾아입은 군무현, 그는 조용히 청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청하의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밤새 군무현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고운 피부 여기저기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뭐라고 사죄를 해야할지 모르겠구려!”

군무현은 침중한 어조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청하는 비로소 울음을 그치며 토지묘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빈니의 사부께서는 대비(大悲)라는 법호로 불리시는 분이에요!”

그녀는 착 가라앉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군무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는 내심 의아함이 솟구쳤다.

(대비신니가 아직 열반에 들지 않았단 말인가?)

청하는 눈을 고인 눈으로 토지묘 밖의 햇살을 쫓으며 말을 이었다.

사부께서는 빈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삭발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빈니의 세속과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그녀는 잔잔한 두 눈에 짙은 회의의 빛을 떠올렸다.

군무현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범인도 아닌 비구니를 범한 자신의 과오를 씨슬 길이 없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스님의 청백(靑白)을 더럽혔으니...!”

그러자,

...!”

청하는 다시 오열을 터뜨리며 얼굴을 무릎사이에 파묻었다.

... 스님...!”

그녀의 그 모습에 군무현은 어쩔 줄 몰라 난색을 지었다. 하나, 뒤이어 흘러나온 청하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 시주를 탓하는 것이 아니예요. 오히려 빈니로 인해 시주의 청렴함이 더럽혀진 것이 죄스러울 뿐이에요!”

... 슨 말씀이십니까?”

군무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군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이 깊고 큰 두 눈에는 번뇌와 고통의 빛이 가득했다.

문득, 그녀는 잘근 입술을 깨물며 번뇌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빈니의 가문은... 천외쌍비(天外雙秘) 중 선부(仙府)에요!”

순간,

... 선부(仙府)!”

군무현은 대경하며 부르짖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때, 청하는 짙은 고통에 얼룩진 음성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선부(仙府)!

 

시조는 일천오백년 전의 무명기인(武名奇人)이었다.

그는 한 명의 낙척문사에게 천외절학(天外絶學)을 전수했다. 그리고, 암중의 혈문(血門)을 제어하라는 명을 내렸다.

낙척문사. 그가 바로 선부(仙府)의 제일대 부주인 극락천존(極樂天尊)이었다.

그후 천오백 년, 선부는 천외(天外)에 몸을 감춘 채 일가(一家)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들의 임무는 호시탐탐 천하를 수중에 넣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혈문의 야심을 막는 것이었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천오백년, 선부는 조사의 명을 어기지 않고 혈문의 야심을 철저히 막아왔다. 한데, 결국 당금에 이르러 파국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선부(仙府)!

바로 그들의 부중에 배신자가 생긴 것이었다. 그 자는 혈문과 손을 잡고 선부를 파멸시켜 버린 것이 아닌가!

 

비사(秘事).

청하의 입에서는 천외(天外)의 비사가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무현,

“...!”

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청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청하(淸河)!

그녀는 선부의 당대부주였던 자운뢰(紫雲雷)의 천금(千金)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자하빈(紫霞嬪). 자운뢰에게는 자운형(紫雲衡)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다.

그들 두 형제의 성격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인 자운뢰는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했다.

하나, 자운형은 지극히 독선적이고 야심(野心)이 큰 자였다. 결국, 그 자는 자운뢰의 그늘에 있는 것으로 만족지 않고 모반(謀反)을 꾀했다.

그 자는 선부 내부의 동조자들을 모두 규합했다.

부주(府主)의 지위를 찬탈하려는 반모를 자행한 것이었다. 하나, 그 자의 반모는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자운형만 살아남고 나머지 동조자들은 모두 참수 되었다. 자운형까지 처벌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운뢰의 인후한 성품 때문이었다.

()이 많고 자애로운 자운뢰는 차마 아우인 자운형을 죽이지 못했다. 하나, 그것이 곧 비극의 시초가 되고 말았으니...

자운형은 이번에는 은밀히 혈문과 내통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혈문이 선부를 급습하도록 내응하기에 이르렀다.

그 돌연한 사태는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선부는 혈문의 뜻밖의 기습에 여지없이 궤멸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이십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자하빈(紫霞嬪). 그녀의 나이는 열살이었다.

 

흑흑... 그때 자운형 그 자는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어머니를 능간했어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능욕당하시다 혀를 물고 자진하시자... ... 빈니를...!”

청하, 아니 자하빈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서러운 오열을 터뜨렸다.

흐윽... 빈니를 덮쳐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

군무현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졌다.

자하빈에게 그렇게 참담한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자하빈은 오열을 멈추지 못하며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추악하고 이미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몸... 빈니로 인해 시주에게까지 누가 되었으니...!”

군무현의 두 눈에 짙은 연민의 빛이 어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가엾은 하빈...!”

문득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자하빈의 허리를 굳게 끌어안았다.

“...!”

터질 듯 무르익은 여체가 군무현의 두 팔 안에서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군무현은 농염하기 이를데 없는 자하빈의 유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어 그는 자하빈의 귓전에 얼굴을 파묻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했다.

하빈... 내게는 이미 내자가 있으나 한평생 하빈을 누구보다도 아끼며 보살펴 주겠소. 나를 따라주시오!”

순간, 자하빈의 교구가 다시 한차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그럴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시주... 빈니는... 으음...!”

하나, 군무현의 손이 어딘가를 더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군무현, 그를 연모하고 있지 않은가?

하빈...!”

군무현은 뜨겁고 부드러운 손길로 자하빈의 전신을 애무했다. 자하빈에게는 부드러운 애무가 필요했다. 부드러운 위로, 부드러운 속삭임도 필요했다.

그녀는 너무도 황량한 가슴으로 청춘을 태워버린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랑(), 부드러운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않은 여심(女心)을 따스하게 감싸줄...

군무현은 소중하게 어루만지듯 자하빈을 다루었다.

...!”

자하빈은 군무현의 능숙한 손길 아래 다시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군무현의 넓은 품에 전신을 내맡겼다.

이윽고, 군무현은 자하빈의 교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자하빈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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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三 章

 

                 두 女人危機

 

 

 

복우산(伏牛山)!

 

! 한 명의 여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복우산역을 날어넘고 있었다.

정의맹(正義盟)이 혈문(血門)의 술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니...!”

여인은 믿릉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일신에 청의경장을 가뿐하게 차려입은 여인, 그녀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옥같은 고운 왼쪽 뺨에는 한줄기 선명한 검흔(劍痕)이 그어져 있었다.

하나 그것은 끔찍하다기 보다는 기이한 매력을 더해주는 것으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몹시 초조한 듯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날리며 중얼거렸다.

막아야 한다. 천마궁과 정의맹이 부딪히면 동귀어진하고 말 것이다!”

문득, 그녀는 교수를 꼭 움켜쥐며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대천성자(大天聖子)! 그 자가 혈문의 주구라니...!”

스슥! 그녀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으하하하!”

돌연 한 소리 호탕한 대소가 주위를 울렸다.

이어, 휘 익! 한 명의 화복청년이 쾌속한 신법으로 경장여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웬놈이냐?”

경장여인은 흠칫 놀라 몸을 세우며 날카롭게 외쳤다.

화복청년, 그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닌 자였다. 하나, 가늘게 찢어진 두 눈에는 음탕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후후... 천래검봉(天來劍鳳) 위지낭자! 걸음을 멈추어 주셔야겠소이다!”

그 자는 음침한 눈으로 경장여인을 훑어보며 말했다.

청의경장여인, 그녀는 바로 천신보(天神堡)의 천금(千金)인 위지사영이었다.

위지사영은 안색이 일변했다.

당신은 혹시...!”

그녀는 아미를 모으며 주춤 물러섰다.

화복청년은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여유있게 말했다.

후훗... 본인은 혈문(血門)의 소문주(少門主)인 표향대운룡이외다!”

순간, 위지사영은 대경한 듯 아미를 파르르 떨었다.

당신이...!”

! 그녀는 급급히 뒤로 물러나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하나, 화복청년, 즉 표향대운룡은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섰다.

흐흣... 알아서는 안될 일을 알았으니 입을 막을 수밖에...!”

위지사영은 아미를 상큼 곤두세우며 앙칼지게 외쳤다.

어림없는 수작! 누워랏!”

위 잉! 그녀의 손에서 일순 강맹한 강기가 벼락같이 쏟아져 나왔다.

핫하... 대비신니의 무공이군!”

표향대운룡은 여유있게 웃으며 표표히 날아올랐다.

다음 순간, 휘르르! 갑자기 사위는 온통 기이한 향기로 가득차는 것이 아닌가?

위지사영은 흠칫하며황급히 호흡을 멈추었다. 하나,

...!”

이미 그녀는 몇모금의 향기를 들이킨 후였다. 순간,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어지러웠다.

... 비겁하게 암수를 쓰다니...!”

위지사영은 분노의 표정으로 표향대운룡을 노려 보았다. 이어 그녀는 다급히 장권 밖으로 물러나려 했다. 하나,

...!”

! 그녀의 교구가 일순 휘청하는가 싶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핫하... 표향대섭정신공은 여인에게는 무적이지!”

그제서야 표향대운룡은 득의의 웃음을 터뜨리며 지면으로 내려섰다.

... 표향음룡의 무공이 나타나다니...!”

위지사영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잘근 입술을 깨물며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나, 이미 그녀의 몸은 생각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 ...!”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나직한 비음, 위지사영은 전신이 화끈 달아오름과 함께 스르르 온몸이 녹아 버리는 듯한 무력감에 사로 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표향음룡의 색공(色功)을 이겨낸 여인이 천하게 어디 있겠는가?

 

표향음룡!

만독노조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고금제일색마(古今第一色魔).

 

천하의 계집이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게 호언한 자가 바로 그였다. 그것은 결코 그의 광언이 아니었다.

표향음룡은 평생 일만 명의 여인들을 그의 마수 아래 꺾어 소유했다. 그러니 어찌 천하의 여인들을 모두 자신의 것이라 장담하지 않겠는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황궁의 왕비조차도 손쉽게 소유할 수가 있었으니... 하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는 만독노조의 손녀를 능욕하려다가 만독노조에 의해 한줌의 독수(毒水)로 사라졌다.

천지십강 중의 일인, 그러나 가장 명예롭지 못한 이름으로 무림사(武林史)의 한 장을 장식한 인물이었다.

그의 표향대섭정신공!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격발시키는 사이한 음공(淫功)이었다.

 

... ...!”

마침내, 위지사영은 끓어 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표향대운룡은 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냥 죽이지는 않겠다. 극락을 구경시켜 준 후에 하늘로 보내주지!”

이어, 그 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위지사영을 옆구리에 끼었다.

스스슥! 이내 그 자의 모습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토지묘(土地墓).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 허물어져 가는 낡은 토지묘였다.

저곳이 좋겠군!”

표향대운룡은 토지묘를 발견하고 음침하게 눈을 번득였다.이어, ! 그 자는 위지사영을 안아든 채 곧장 토지묘 안으로 날아들었다.

토지묘 안은 온통 먼지 투성이였다.

표향대운룡은 대충 주위를 치운 후 제단 위에 위지사영을 눕혔다. 그때,

... 흐윽! 어서... 어서... 어떻게 좀...!”

위지사영은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듯 전신을 비비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흐흐흐... 조금만 참아라. 극락의 맛을 보여주겠다!”

표향대운룡은 음탕하게 웃으며 슬쩍 위지사영의 젖무덤을 쓰다듬었다. 순간,

... !”

위지사영은 부르르 교구를 떨며 뜨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흐흐...!”

표향대운룡은 탐욕의 눈길로 여체를 구석구석 쓸어 보았다.

이어, 그 자는 천천히, 그러나 능숙한 손길로 위지사영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상의와 하의가 차례로 벗겨지고 마지막으로 흰 비단 젖가리개와 속곳마저 남김없이 벗겨졌다.

... 그러자 드러나는 눈부신 나신, 투명할 정도로 희고 깨끗한 피부에 선명하 굴곡을 이룬 몸매, 실로 아릅답기 짝이 없었다.

하나, ()의 티랄까? 위지사영의 탐스러운 젖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에는 한 줄기 긴 검흔이 그어져 있었다.

얼굴의 그것과 같이 미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검흔, 그것은 사내의 음심을 야릇하게 충동질했다.

표향대운룡은 후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자는 성급히 자신의 의복을 벗어 던졌다. 이어, 그 자는 거칠게 위지사영의 전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위지사영은 사내의 적극적인 애무에 불붙듯 전신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본능적인 쾌감에 부르르 몸을 떨며 사내의 굳건한 등을 힘껏 부여 안았다.

사내는 능숙하게 여인을 다루었다. 그 자는 집요한 손길로 여인의 민감한 부분만을 애무해 나갔다.

여인은 미칠듯한 쾌감에 몸을 떨며 소리높은 비음을 내질렀다.

... 어서...!”

그녀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마지막 행위를 재촉했다.

흐흐... 알았다.”

사내는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여인의 몸 위로 올라갔다. 이어, 그 자가 막 여인지문을 침범하려 할 때였다.

아미타불...!”

돌연 정대하고 맑은 여승의 불호성이 천둥처럼 표향대운룡의 귓전을 때렸다.

동시에, 우 웅! 천지를 뒤덮는 웅장한 무형강기가 노도처럼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

표향대운룡은 질겁하며 황급히 위지사영의 몸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 스스스스... 토지묘 앞으로 죽립을 쓴 한 명의 회의여승이 나타났다.

! 그녀는 바로 대비신니의 직전제자인 청하가 아닌가?

아미타불... 음행을 서슴치 않다니...!”

그녀는 표향대운룡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콰 릉! 서기로운 불광(佛光)이 서린 강전이 표향대운룡을 행해 뻗어나갔다. 하나, 표향대운룡은 능글능글한 음소를 흘리며 슬쩍 몸을 피해냈다.

흐흐... 질투하지 마시오. 스님도 귀여워 해줄테니...!”

그 자는 청하의 음성이 아직 젊다닌 것을 느끼고는 음욕을 품었다.

청하의 음성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구제할 수 없는 중생!”

그녀는 분노한 듯 무섭게 손을 내저었다.

파파파 팍! 콰쾅...! 눈부신 금빛강전이 빗발치듯 표향대운룡을 향해 쏟아졌다. 하나, 표향대운룡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흐흐... 스님도 여자이니 그 맛을 보면 미치고 말것이오!”

그 자는 음탕하게 웃으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까지 내뱉았다.

다음 순간, 휘르르! 돌연 그 자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그와 함께, 표향대섭정신공의 향기가 툐지묘를 확 뒤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

청하는 대경하며 급히 호흡을 멈추었다. 하나, 이미 한 모금의 향기를 들이마신 후였다.

으음...!”

그녀는 일순 전신이 화끈 달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신음성을 발했다. 이어, 그녀는 교구를 휘청하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실로 표향대섭정신공의 향기는 지독한 것이었다. 표향대운룡은 쓰러진 청하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음탕한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흐흐... 대비신니의 제자라고 해서 별수 있느냐? 어차피 계집인 것을...!”

“...!”

청하늬 교구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최후의 공력을 우수에 모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녀는 표향대운룡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표향대운룡은 청하의 일장 앞까지 다가섰다.

그 순간,

대비불광참(大悲佛光斬)!”

쓰러져 있던 청하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맹렬히 일장을 후려쳤다.

파파팍 쾅! 가공할 폭음이 들썩 토지묘를 뒤흔들었다.

!”

표향대운룡은 대경실색했다. 그 자는 확급히 몸을 피하며 마주 장을 내뻗었다.

위 잉! 콰르르르... !

크 윽!”

표향대운룡은 손목을 움켜쥐고 휘청 물러났다.

청하 역시 도중에 공력이 끊어지는 바람에 급격한 충격을 받고 밀려났다.

으음...!”

그녀는 손을 떨구며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도한 공력의 사용으로 오히려 끓어 오르는 욕정을 더 뜨겁게 부채질하고 만셈이었다.

(... 공력만 이어졌다면 격살시키고 말았을 텐데...!)

그녀는 절망감을 느꼈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표향대운룡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청하를 노려 보았다. 하나, 곧 그 자는 음탕하게 안색을 바꾸며 청하에게로 다가섰다.

흐흐... 계집! 속썩이는군. 그 대신 네년부터 즐겨주마!”

그 자는 거칠게 청하의 승포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힘껏 혀를 깨물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손을 떼고 일어서라!”

돌연 한 소리 무심하고도 싸늘한 음성이 토지묘 안을 울렸다. 순간,

!”

표향대운룡은 대경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청하의 교구가 일순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보았다. 토지묘의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을. 죽립 속에 가려진 그녀의 눈빛이 격심하게 흔들렸다.

(... 구류지존 군시주...!)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 어느새 토지묘의 밖에는 무심한 표정의 군무현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발견한 표향대운룡의 안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 네놈은 혹시 구류지존!”

군무현은 무심한 눈으로 표향대운룡을 주시했다.

눈은 제대로 박혔군. 감히 비구니를 욕보이려 하다니... 죽이리라!”

순간,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

그 모습에 표향대운룡은 절로 몸이 떨렸다. 하나, 곧 그 자는 살기어린 눈을 번득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크흐... 구류지존! 잘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만나고 싶었다!”

그 자는 군무현을 노려보며 전신에 공력을 끌어 모았다.

위 잉! 그 자의 몸 주위로 일순 강력한 무형강기가 퍼져 일어났다. 그 모습에 군무현의 눈빛이 가볍게 변했다.

(강하군. 천마제군이나 대천성자에 못지 않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천천히 토지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 시주! 조심하세요! 그 자는 표향대섭정신공을...!”

보고 있던 청하가 급히 고개를 들며 군무현을 향해 외쳤다.

하나, 그녀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늦었다! 누워랏!”

꽈르릉...! 표향대운룡이 쾌속히 몸을 회전하며 장력을 짓쳐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기향(奇香)을 실은 강기가 폭풍같이 군무현을 휩쓸어왔다.

군무현은 경각했다. 하나, 그는 황망중에 한 모금의 향기를 들이마시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 六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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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二 章

 

                       魔中至尊, 天魔皇復活

 

 

 

군무현, 그는 천마묵룡 혁세민에게서 시선을 떼며 괴노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인사드리겠소!”

그는 괴노인을 향해 일례를 표했다.

아아! 그렇다. 이 괴노인이야말로 그 명성이 삼산오악을 뒤흔드는 천마황(天魔皇)인 것이다.

헛허... 적룡세가(赤龍勢家)와 적룡대제(赤龍大帝)라는 후진에 대해서는 이 아이에게 들었지. , 앉으시게!”

천마황은 호쾌하고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 일말의 허무한 기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천하마도를 일통하여 호령하던 천마황의 말로가 이렇듯 비참할 줄이야... 군무현은 그런 천마황의 모습에 내심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내공이 극고한 천마황의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구나. 적어도 감금된지 삼십 년이 지났겠구나!)

천마황의 피부는 한겹이 벗겨져나간 상태에서 다시 썩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결국... 신기황과 천음황 두 어르신네를 위해한 것은 천마황 본인이 아니었다!)

군무현은 확신을 갖고 추측했다.

“...!”

“...!”

군무현과 천마황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 무언의 대화 속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시대를 달리한 두 노소(老少)의 영웅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헛허! 정말 거목(巨木)이로군. 신기황과 천음황 두 노형이 거목을 길렀어!”

천마황은 군무현의 찬사로 치묵을 깨뜨렸다.

과찬이십니다. 다만 인연이 닿아 두 분의 진전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래, 두 분 노형은 무고하신가?”

천마황은 크게 궁금한 듯 군무현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군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기황 어르신네께서는... 비참한 생명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신기황 노형이...?”

천마황의 음성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럼 천음황 노형은?”

그 분은 타계(他界)하셨습니다!”

... 그럴 수가! 천음황 노형이...!”

천마황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일세(一世)를 진동시켰던 천마황의 최후가 그의 싸늘하게 식은 영혼을 비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군무현은 천마황의 비통한 심경을 피부로 느끼는 듯했다.

바로 노선배님의 형상을 가장한 자에게 암습 당하셨습니다!”

나의 형상!”

천마황은 두 눈 가득 경악의 빛을 지었다.

온 몸이 터져 버릴 듯한 극심한 분노. 그러나, 그는 분노를 억제시켜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모두가 노부의 탓일세. 사람을 잘못 거둔 탓에 참혹한 꼴을 당하신 것이라네.”

“...!”

군무현은 묵묵히 천마황의 탄식을 듣고 있었다.

이제와서 천마황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천마제군! 모두 그 자의 짓임이 분명합니다!”

저곳에도 노부의 탓으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이 계시네!”

천마황은 석실의 한쪽을 가리켰다.

석동 안의 한쪽 구석, 그곳에는 시퍼런 인광을 발하는 한무더기의 인골이 쌓여 있었다.

군무현은 인골더미를 바라보며 심중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고을 익힌 독문고인의 유골이다. 그렇다면...!)

그의 검미가 일순 꿈틀했다. 인골이 시퍼런 인광을 발하고 있는 것은 독공을 익힌 탓이었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다시 천마황의 탄식성이 들렸다.

독천황(毒天皇)의 유해일세!”

! 독천황이 한무더기의 인골로 화해 군무현의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군무현은 독천황의 인골 앞에 경건한 심정으로 구배지례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마황은 문득 의아한 듯 물었다.

독천황 노형과는 어떤 관계인가?”

군무현은 단천애에서 떨어진 도건후가 떠올라 마음이무겁기만 했다.

바로 내자(內子)의 조부되시는 분입니다!”

그런가? 허허... 그래도 독노형은 행복하시군. 자네같은 손자사위를 두시다니...!”

천마제군이 혈문(血門)의 허수아비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군무현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다네. 노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만성독약이 골수까지 뻗힌 상태였지!”

천마황은 잠시 회상하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마제군은 바로 혈문을 의도적으로 천마황에게 접근시킨 인물이었다.

천마황이 천마제군을 거둔 것은 벌써 육십 년 전의 일인 것이다.

육십 년 전, 천마황은 천마제군의 재질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재간을 모두 전수했다. 하나, 천마제군이 노린 것은 천마황의 무학이었다.

바로 천마황의 천마궁과 모든 것을 노린 것이다. 결국, 천마황은 천마제군의 암습을 받아 지옥뇌에 갇히게 되었고... 천마궁은 혈문(血門)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천마화은 길게 탄식했다.

세인들은 모르나 혈문은 천년의 세월 동안 선부(仙府)와 암투를 벌여왔네!”

당대이전(當代以前)에 혈문이 무림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은 바로 선부의 저지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한데 당대에 들어서 혈문이 암중에 천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지.”

천마황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휴우... 바로 팽팽하기만 했던 천외쌍비의 금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군무현은 천마황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천외쌍비... 그 연관이 어찌되기에 천세무림(千世武林)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그때, 천마황의 침중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혈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바로 무엇입니까?”

군무현은 눈을 빛내며 말을 재촉했다.

바로 천지십강(天地十强)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네!”

...!”

혈문이라해도 천지십강 만큼은 경시할 수 없는 때문이지. 그리고!”

천마황은 문득 말을 끊고 군무현을 뚫어지도록 주시했다. 문득 그의 입가에 한가닥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들의 이런 태도만큼은 옮았다. 헛허... 적룡천종의 진전을 이은 자네가 이럴진대... 천지십강의 후예가 서넛만 더 나타나도 그들은 감당치 못할 것이네!”

그는 흐뭇한 듯 통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 세월을 지옥뇌 속에서 비참한 말로를 보내야 했던 그로서는 드물게 통쾌한 심정이었다. 하나, 군무현은 씁쓸하기만 했다.

(천마황... 이 노인은 아마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저렇게 미소를 지어볼 것이다!)

그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길 없었다. 이윽고, 그는 안색을 바꾸며 다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무공을 회복하실 수가 없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자네의 눈에는 노부가 어떻게 보이나?”

천마황은 오히려 군무현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하나, 그 눈빛 속에는 한 가닥 경악의 빛을 엿볼 수 있었다.

(과연 보기드문 기재 중의 기재다. 단번에 그것을 간파해 내다니...!)

그렇다. 천마황은 이미 무공을 회복한 것이다.

헛허... 자네의 눈을 속이지 못하겠군!”

그는 유쾌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천마제군이 실수를 한 것이지. 노부가 한줌의 공력만 남았어도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천마지체(天魔之體)!”

그렇다네. 노부는 천마지체인 덕으로 무공을 회복할 수 있었다네!”

군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사실을 아시는지...!”

무엇인가?”

천마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군무현은 웬일인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면 묻지 않겠네.”

다행히 천마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군무현은 침중한 안색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혈문에 천지십강의 무공 중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 그것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분은 천지십강에 버금갈 정도로 강해지셨다!)

군무현의 눈은 틀림없다.

천마황은 과거의 그가 아니라고 볼 정도로 무서운 무학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 문득 천마황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노부 스스로 만든 지옥뇌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신세라니...”

그렇다. 지옥뇌(地獄牢)! 이 죽음의 뇌옥은 바로 천마황 자신의 걸작이었다.

천마황의 운명은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신세였다.

자신이 만든 지옥뇌에 자신이 갇히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군무현은 천마황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 노인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구나. 자신이 키운 천마제군에게 암습을 당하고 이제는 자신이 만든 지옥뇌에 갇히다니...!)

하나, 이내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 그런 것은 이미 잊었다네. 노부는 다만 죽을날만 기다릴 뿐이지!”

천마황은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나, 군무현은 그런 그에게 용기를 주려는 듯 미소와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지옥뇌의 안배는 이미 후배가 풀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천마황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천마황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천마묵룡 혁세민만이 크게 기뻐했을 뿐이었다.

... 정말입니까?”

그렇소.”

군무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아! 지옥뇌를 빠져 나갈 수 있게 되다니 꿈은 아닐런지요?”

천마묵룡은 기쁨을 금치 못하며 격동했다. 하나, 천마황의 표정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천마묵룡은 의아한 빛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순간, 천마황은 버럭 노갈을 내질렀다.

너는 지옥뇌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순간, 천마묵룡의 안색이 금방 참담하게 이지러졌다.

... 그렇군요. 지옥뇌는 한 번 들어올 수는 있으되 나갈 수는 없는 곳이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실망의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 지옥뇌야말로 살아 들어와 죽은 뒤 영혼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불회뇌(不廻牢)가 아니었던가?

하나,

후훗...!”

군무현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나직한 기소를 발했다.

후배가 신기황의 진전을 얻었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순간,

... 신기황...!”

천마황은 비로소 안색이 대변하며 격동하여 부르짖었다. 그는 군무현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우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기황 노형의 진전을 이었다면 자네에게는 지옥뇌가 치졸하게 보일 것이네!”

핫하... 그러나 역시 노선배님의 걸작인 지옥뇌는 천하에 보기드문 곳입니다.”

군무현은 겸손하게 말하며 천마황을 추켜 세웠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나.”

천마황은 그답지 않게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후배가 지옥뇌의 모든 습독(濕毒)을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대신 노선배님께서 당분간 지옥뇌에 계시면서 같이 계신 분들의 상세를 호전시켜 주십시오!”

따르겠네. 자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마황의 두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는 무릎을 치면서 호쾌하게 웃어댔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 왔는지 모르네. 잠시 지체된다고 싫어할리 있겠는가?”

핫하...!”

더구나 나와 인고(忍苦)를 같이해온 수하들의 상세를 치료하는 일인 것을...!”

군무현은 미소를 지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천마황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천마묵룡 또한 격정을 이기지 못했다.

아아... 이제 햇빛을 보게 되었군.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천마황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핫하! 역시 신기황의 후예답군. 혈문은 자신들 내부에 노부가 눈을 부릅뜨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네!”

군무현은 천마황의 얼굴을 주시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벌써 나의 의도를 궤뚫어 보셨군. 과연 천마황이시다!)

그의 의도란 무엇일까? 그렇다. 천마황은 군무현의 심중에 하나의 변수(變數)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을 혼란시킬 하나의 가공스럽고 상상치 못할 변수,

군무현, 그의 가슴 속에는 치밀한 계략이 이미 가득차 있었다.

조용한 그의 표정, 그의 모습이 바로 또 하나의 엄청난 계략은 아닌지...

 

으하하하핫!”

천마황은 그의 평생에 다시는 웃어 보지 못할 정도의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가슴 속에 쌓이고 쌓였던 모든 울분을 토해내듯이, 그리고, 천마묵룡도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이제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바로 눈앞에 온 것입니다!”

군무현은 천마황과 천마묵룡의 웃음을 지켜보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 때는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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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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