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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넌 싸가지가 없잖아.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마차 안의 침묵 역시 계속 되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대성이었다.

 

"사형, 우리 소작농들이 산에도 있어요?"

 

연청은 대성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피식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안한다.

대성은 연청이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감추어두었던 과자 하나를 슬며시 내밀었다.

 

"없다.“

 

과자를 받으며 연청이 말했다.

 

"그럼 왜 산으로 가요? 여기는 높은 산이라서 오늘 다 넘지도 못해요."

"나도 알아. 그걸 네가 아는 게 신통하다."

 

대성은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고 편할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말들을 대성은 "소문 내지 풍문"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곧잘

 

“A little bird told me…… 풍문으로 들었는데…"

 

하면서 말을 시작하니까.

방금 전 주변에서 들리던 말들을 떠올린 대성은 조금 심각해졌다.

 

"우리… 혹시 강도…."

 

강도에 대해서 대성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범을 강도들한테 잃었던 일은 대성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다.

그랬기에 강도라면 그 실체를 넘어서 소중한 사람을 앗아갈 수 있는 흉악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과자나 뺏어먹는 연청이 할아범만큼 소중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본능으로 대성은 둘째 사형 연청도 자기가 비빌 수 있는 언덕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성의 불안한 눈에는,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연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연청은 옆에 풀어놓았던 검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도둑놈들한테 가는 거야."

 

마차가 멈추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연청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마차를 둘러싸고 여섯 명의 산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대성은 봄 날 밤 집을 덮쳤던 강도들을 떠올렸다.

무서운 생각이 와락 구체화되면서 몸이 굳었는데, 연청이 단검을 던져 주었다.

 

"맨손보다는 나을 거다."

 

대성이 울상을 지었다.

 

"전 무공 안 배웠잖아요."

"난 가르쳤다. 네가 안 익힌 거지."

 

연청은 겨우 구결만 가르쳐 준 걸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성이 열심히 익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전 죽어요? 무공 안 익혔다고?"

 

연청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대사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남자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지요?"

 

대성은 단검을 뽑아들고 연청을 따라 나갔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건 기장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것도 일은 일이야. 근처의 산채들을 정리해둬야 우리 소작농가들 피해가 없어."

 

연청은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놀랐다.

대성이 울듯이 보였지만 단검을 들고 싸우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너…"

 

왜 나왔냐고 하려는데 대성이 말했다.

 

"안에 있는데 밖에서 칼로 푹 찌르면 꼼짝 없이 죽잖아요."

 

둘째 사형 연청을 잃을까 걱정하면서도, 옆에 있으면 지켜 줄 거라 생각해서 나왔다는 말은 너무 얌체 같아서 하지 않았다.

마부석에서 함께 온 전아저씨가 대견하다는 듯이 대성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때 산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우리는 노요산 서두채에서 나왔다. 순순히 명을 따르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노요산 서두채는 녹림의 114개 산채 중의 하나였다.

연청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숲에서 왔는데."

 

산적이 의아해했다.

 

"한 식구였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소. 어디서 온 형제요?"

"풍림!"

 

연청이 대답했다.

녹림이나 풍림이나, 풍림도 숲은 숲이었다.

 

"헛!"

 

놀란 산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가시오. 어서 가! 우리는 당신들한테는 아무 볼 일이 없소. 아직 올 때가 멀었잖소."

"말투 봐라. 느슨하네. 아직 산채에 온지 얼마 안 된 반거충이 놈인가."

 

연청이 웃고는,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렸다.

 

"일단은 넷 만 해보지. 둘은 재수가 좋아 살겠어. 내 사제 덕분에."

 

말이 조금 이상해서 대성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릴 죽이려 한다!"

 

산적들은 어이없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청의 모습이 대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선을 그리면서 어느 산적을 스쳐지나갔다.

연청의 검날을 타고 피가 공중에 뿌려졌고, 목 잘린 머리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낙엽 위를 굴렀다.

 

"Like wind. 바람처럼. 하나."

 

대성은 연청이 입으로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을 들었다.

두 번째 산적의 목도 떨어졌다.

 

“Like wind, 바람처럼. 둘."

 

그렇게 네 명의 산적이 목 잘려 죽었다.

연청은 자기가 말한 대로 넷 만 죽이고 대성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머지 산 적 둘은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마차로 돌아왔을 때 연청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대성은 단검을 손에 들었는지 땀을 주먹에 쥐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고, 몸이 심하게 떨렸다.

풍림원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일대의 산채들을 돌면서 경고를 하고, 산채의 도적들을 데려다가 일손이 부족한 곳에서 추수를 돕게 시키기도 하였다.

녹림에 속한 산채들은 어느 곳에서나 농장주들에게 골칫덩어리였다.

산적이라고 다 악당들인 것도 아니다.

양민들도 봄이 되어 먹을 게 없으면 녹림에 투신하여 산적이 되곤 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녹림은 없어지지 않는다.

산적은 이름과 얼굴을 바꾸어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이종무가 택한 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민가를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가을에는 그들에게 일을 시켜서 추수한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조성일과 연청, 그리고 지금은 풍림원에 없는 셋째 사형 등일기와 넷째 정경옥이 산채를 돌면서 위엄을 보여서 이룬 것이었다.

방금 연청이 보인 모습은 그들이 처음 산채들을 제압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대성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연청이 또 피식 웃을 때 쥐어짜듯이 말했다.

 

"꼭 제가 죽는 것 같았어요."

"죽는 게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아니라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 죽는데 매우 이상하지."

 

연청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성의 뺨을 톡톡 쳤다.

 

"그래도 남한테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나아. 특히 나쁜 놈들은."

"왜 두 명은 살려줬어요?"

 

연청은 대성도 영소와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성은 연청이 아무데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녀석 은근히 남자네. 네 번 봤으면 충분하잖아. 둘은 네가 처리했어야지."

 

하고 연청이 대답했다.

 

"뭘…"

 

하다가 대성은 연청이 같은 수법으로 네 명을 죽인 이유가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림원의 진짜 무공은 전쟁, 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죽이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허공에 칼질하거나 허수아비를 때리며 익히는 무공은 풍림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이종무가 창안한 무공이고 그 제자들이 전쟁 중에 익혔던 것이었고,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에 더 가깝다.

이름 짓기에 성의가 없는 이종무는 이를 그냥 병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죽어야지.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일 수 있어야 하고."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연청이 했던 말이었다.

 

"넌 자질이 떨어지니까 노력을 좀 많이 해라. 머리는 좋으니까 그것도 도움은 될 거야."

 

대성은 자기가 지켰어야 할 소중한 것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전자는 할아범이고 후자는 영소였다.

아무래도 영소는 불안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데다가 예쁘기는 예쁘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는 것 같지 않으니 자기가 지켜야 할 경우가 많을 게 분명했다.

 

"사형한테는 뭐가 제일 소중해요?"

 

넌지시 물었다.

 

"Now you are talking. 이제 입 연거야?"

 

그 소리가 놀리는 것 같아서 대성은 칭얼거렸다.

 

"아, 좀. 그냥 좀 말해줘요."

"넌 알 거 없어."

"말해줘도 안 뺏어가요."

"말해줘도 못 뺏어가."

 

연청이 말장난을 했다.

대성은 짜증은 조금 나지만 연청과 말하는 것도 조금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왜 안 알려줘요?"

 

연청이 반박 불가능한 대답을 했다.

 

"넌 싸가지가 없잖아."

 

***

 

마차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서두채까지 갈 수 있었다.

산적들도 힘든 건 싫어하는지라 숨겨진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중년의 전아저씨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길을 찾았고, 울퉁불퉁 험난한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를 몰았다.

그는 이종무 휘하에서 전차를 몰고 적을 향해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서두채의 문을 크게 열려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앞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풍림원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여자들 중 한 명이 엎드려 절하면서 물었다.

 

"저희는 감히 장군님을 거스르지 않았는데 어떤 죄를 지었는가요?"

 

채주의 아내이거나 첩일 것이다.

연청은 그 여자를 지나서 제 집 찾아 온 듯이 산채의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난봄에 강도 네 명을 받아줬지 않소?"

 

여자가 따라가며 대꾸했다.

 

"녹림은 의탁하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 곳이 아닙니다."

 

연청이 피식 웃었다.

 

"우리 풍림원에서 그 넷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텐데."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전아저씨가 빈정거렸다.

 

"사람을 안 가리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온 돈을 가리지 않았던 게지."

 

연청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털가죽 덮인 넓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 오전에는 출발해야하니까 그 전에 데려다 놓으시오. Make yourself at home 집에서 처럼 편히 있어."

 

뒤에 말은 대성에게 하는 소리였다.

여자는 절을 하고 나갔다.

전아저씨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파수를 보았다.

대성은 연청이 말하는 네 명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할아범을 때려죽인 강도들이라는 사실을 짐작으로 알았다.

자기는 아무 생각없이 노는 동안 사문에서는 자기의 원수를 추적하고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와 사형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울컥 생겨났다.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기장하러 간다 해놓고…."

"싸가지는 그래도 양심은 있네."

 

대성이 투덜대듯이 고마움을 표하자 연청이 또 피식거렸다.

 

"사제가 있는데, 사제 원수가 있는데, 사문이 있는데, 사제는 직접 복수하기엔 어리니 사문이 나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기장한다고 했잖아요."

 

대성이 조금 기죽은 듯이 온순하게 말했다.

 

"대사형은,"

 

연청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분이 아니야. 부득이 한 가지만 할 때도 목적은 여러 가지인 분이지."

 

대사형 조성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대성은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 책망 받는 느낌이 들어서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How should I know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말하는 게 점점 더 영소 닮아간다."

 

연청이 정색하고, 대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소리라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데 영소 닮아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

 

그날 밤, 산적들 소굴에서 자면서 대성은 복잡한 꿈을 꾸었다.

할아범이 절구에서 떡을 치던 모습이며 목이 떨어진 산적들의 모습, 연청이 펼쳤던 바람의 검술, 그리고 영소의 얼굴도 꿈에 보였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니 강도 네 명이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연청은 대성에게 그들이 맞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대성이 그렇다고 하자 산채의 여자들에게 떡매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시켰다.

강도들은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산채 여자들에 의해서 떡매에 맞아 떡이 되어 죽었다.

여자들은 연청이 죽인 네 명의 산적들의 원한을 그렇게 풀었다.

대성은 연청이 산적들을 당연히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아저씨는 산적 중에는 착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I doubt it 그래도 간혹 있지 않을까요?"

 

대성이 물으니까,

 

"좋은 사람은 다 굶어 죽었어."

 

전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착한 사람들은 산적이 되지도 못하고 흉년에 굶어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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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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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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