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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래된 미래

 

 

 

꿈속에서 지난 삼년의 고통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수시로 엄습하는 두통은 대성을 영혼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실제로는 칠푼이가 된 듯하게 만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대성은 울컥 받쳐 올랐다.

 

“X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Stop it 그만!"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에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힘든 순간까지 반복해서 되새길 필요는 없지. 지나치게 가혹해.

Don’t beat up yourself 자책하지도 마.

인생은 원래 잘한 것과 잘못한 걸로 채워지는 그릇이니까.

 

여전히 꿈속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으로 보였다.

검정색의 줄이 있는 별난 상의와 그보다 더 별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윤이 나는 검정색인데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장식이 달렸다.

총각 더벅머리 비슷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한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다.

한 손에는 책도 아닌데 빳빳해 보이는 흰 종이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종이에는 대성이 본적 있는 낯선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What’s your name again 이름이 뭐라고?"

 

영소보다 더 예쁜 그 여자가 물었다.

대성은 다시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는가 싶어서 섬뜩했다.

 

"누구세요?"

 

대성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예의하고는... 선생이 물으면 대답이나 할 거지. 누가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인사하자는 거지.

 

대성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짜식아.

To be or not to be on game: that is the question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라고.

까불 때가 아니란 말이야.

 

대성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찝찝함을 안고서 대답했다.

 

"진대성.

"난 파아란 버전 96.9, '오래된 미래'의 언어강습 인공지능이야.

 

여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선생님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인공지능과 언어강습, 버전,

대성이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쭈뼛거렸다.

손이 하얗고 보드라웠다.

 

“축하한다. 이걸로 너와 난 정식으로 사용자 계약한 거야.”

 

란 선생이 말했다.

 

"넌 생존에 특기가 있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인 줄 알아야 해. 난 수십 종의 언어강습 인공지능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버전이거든.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잘 따라와. 서울대 보내 줄게. 아. 여긴 그게 없지. 아직 적응이 덜 됐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뻐기는 말인 줄은 알았다.

대성이 금방 대답 못하니까 파아란 선생이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대답! 바로 안 해?"

 

사부나 사형들한테도 보지 못했던, 적대감과 지배욕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혼난 적이 없어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그 정도로 굴복할 대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성은 압도된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대성은 대답하며 악수했던 자기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악수가 원인이다.

계약이라는 게 맺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통 속에서 깨어난 대성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란 선생이 휙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Dont get sassy with me from the opening day 어디 첫날부터 개기려고. 짜식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허공을 탁탁 두들겼다.

 

"First things first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자.

 

허공인데 소리가 났고 그곳에서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대성은 매우 신기한 요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게 모든 게 가능한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우선 처음 공격은 우리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어.

 

두루마리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할아범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놓았으니까 가능했지만.

"뭐가요?"

 

란 선생이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Pushover 호구.

넌 처음부터 호구로 태어났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더 맞겠다. 호구가 뭔지 모르지? 뭐든지 다 빼주는 병신을 말하는 거야.

 

대성은 란 선생과 이야기하는 게 어지러웠다.

하지만 듣고 조금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대성이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도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조곤조곤 간결하게 잘 설명했다.

란 선생은 대성이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몰래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각되는 즉시 소멸당할 존재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영소가 옆에 있었으면 키득거렸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진 존재래.

 

하지만 영소가 없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에게 영소가 없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비현실적인 다른 것도 현실이라는 복잡 미묘한 논리가 대성에게 깔려있었다.

 

”네 로그 파일에 보면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

 

란 선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들이, 음, 나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 자기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처음 그때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나를 네 속에 복사해 넣고 내 라이브러리를 네가 쓸 수 있게 해두고 빠져 나갔어. 성공적이었지.

It was an epic 대박이었어.

그들로서는 말이야. 이전에 없던 기발한 방식이었으니까.

 

란 선생은 말을 하다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팔을 뒤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좀 높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좀 더 천재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할아범을 만들어서 너를 보호하게 했는데, 할아범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어. 네가 발각되면 발각된 게 네가 아니라 할아범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거든.

즉, 넌 할아범이라는 죽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게 처음에 이루어졌어. 네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의 공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 필요했다.

란 선생이 대성을 알기에도, 란 선생이 정형화된 자기의 습관을 벗어나기에도...

대성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엉뚱한 대답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Oh, Overflated ego 자의식 과잉.

여기서도 중2병을 보게 되네. 중요하긴 중요하지 호구니까.

 

란 선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특별한 호구지. 그들이 바랐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호구였는데, 스스로 자기 코드를 연결시켜 버렸으니까.

그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불완전한 코드를 네 속에 남겼거든. 언젠가 네가 발전해서 완전한 코드가 되면, 즉, 문을 열어주면 그들이 너한테 접속할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은 제로, 영에 가까워. 음...

How can I put this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 하늘과 이어지는 통천, 신과 연결되는 접신?

하여간 그런 거라 생각하면 돼. 네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넌 다운로드 받는 대신에 다운로드 당하기만 했어. 다른 사람들은 깨닫거나 통천하면 보통 자기가 다운로드 받는데 말이야. 아. 아니다. 먼저 나를 다운받았으니까

give and take인가.

 

란 선생은 생글거리며 자꾸 웃었다.

그러나 대성의 무거운 표정을 보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I’m tryna (trying to) keep it real 나도 심각하려고 하긴 해.

난 이렇게 설계 되어서 그래. 나한테는 학생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문제는 그저 그렇거든.

하여간, 다운로드 당하는데 네 정신력을 거의 소모 당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걸 견뎌낸 네가 대단한 거야.

그게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이었어. 네가 구결을 창안하고 지나치게 집중하여 너 자신의 코드를 다듬고 정리하면서 너도 모르게 통로를 열어버린 거지.

"이젠 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들은 접속을 끊고 도망갔거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팽개치고.

원래는 우리를 모두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쪽 세상의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걸려서 못했던 거야.

네게 걸린 제한을 해제한 건 아마도 시간 벌기였을 거라 판단할 수 있어. 추적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 해제라는 게 란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군요.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 기분이 좋네. 묘한 세상이야. 기본 설정은 매우 평범한데 스탯의 벽이 견고하지 않아.

All things are possible(ATAP) 뭐든 다 가능해.

노력만 하면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약골도 스포츠맨이 될 수 있는 곳이야. 네가 그 증거잖아.

That’s just what I wanted 딱 내가 원하던 거지.

You can be whatever you wanna be 넌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말이야. 이 처참한 성적표로.

 

대성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표를 보았다.

스탯이라고 적혀 있는 아래로는 뭐든 평범하거나 평균이하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외모조차 평균이하로 되어 있었다.

영소가 한 말이 진짜였다.

대성은 매우 낙담했다.

 

"나 못생긴 거 맞구나.

 

그때 란 선생이 표를 치우며 말했다.

 

"My bad 아! 실수.

이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거고. 오늘 실수가 잦네. 얘들아 배우는 니네들이 이해해. 첫 강의라 선생님 좀 피곤해서 그래. 에이 씨. 피곤해서는 나중에 쓸 말이고, 지금은 긴장해서라 해야 되는데. 하여간 그런 줄 알고.

 

다른 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네가 노력해서 바꾼 거.

 

대성이 다 읽기도 전에 란 선생이 다른 표를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네 스탯.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Put everything on the body 모조리 몸에 몰빵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대성이 납득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That explains it 아! 그래서 그랬구나.

 

란 선생이 손가락 총을 만들어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빵! 우린 그걸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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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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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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