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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역시 황금전장

아주 웅장한 삼층 건물. 도서관 분위기. <신선부>에 나온 황금전장의 장경각. 장경각 일대는 지키는 무사들은 없다. 오가는 하녀와 하인들

그곳으로 오는 청풍과 벽세경. 오가던 하인과 하녀들 급히 인사하고

벽세경을 따라오는 청풍의 허리춤에는 육모방망이를 닮은 치룡퇴가 끼워져 있다.

청풍; (치룡퇴...) 치룡퇴를 만지고

청풍; (신기하게도 내 몸에 닿아있을 때는 무게가 전혀 나가지 않는다.) 생각하다가

앞에 나타나는 장경각. 입구 처마에 <藏經閣>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청풍; (저 건물이 황금전장의 서고인 장경각(藏經閣)이로군.)

장경각 입구에서 서둘러 나오는 선비들 몇 명. 장경각 담당의 사서들이다.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벽세경의 앞에 이르러 굽신대는 사서들

청풍; (장경각을 관리하는 사서(司書)들이겠군.)

벽세경; [이청풍 공자예요. 이름은 들어봤겠지요?] 사서들에게 청풍을 소개

[물론입니다.] [서림당 노노야의 보물이지요.] [만나서 반갑네.] 청풍에게 아는 척하는 사서들

청풍; [신세를 지겠습니다.] 포권하고

벽세경; [이공자는 당분간 장경각에서 지낼 거예요. 편의를 봐주도록 하세요.]

[분부 받들겠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장경각에 머물게나.] 벽세경과 청풍에게 아부는 하는 사서들

벽세경; [그럼 사흘 후에 보자.] 손을 들어보이며 왔던 길을 가고

청풍; [신세를 졌습니다.] 굽신

벽세경; [영조부에게는 인편을 보내 사정을 보고하마. 마음 편하게 지내라.] 손 흔들며 멀어지고

[자자 들어가세!] [어려서부터 영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자네를 만나게 되어 기쁘구먼.] 청풍을 글고 장경각으로 들어가는 사서들

 

그 모습을 근처 건물 모퉁이에서 노려보는 소년. 벽세천

청풍이 사서들과 함께 장경각으로 들어가는 모습

벽세천; (이청풍!) 이를 바득 갈고

벽세천; (보고를 받고 설마했거늘... 누나가 정말로 네놈을 본장으로 데려왔구나.)

벽세천;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고...)

<반드시 설욕해주마!> 결의를 다지는 벽세천

 

#22>

<-사흘 후> 황금전장

대청 건물. 황금수라들과 귀견수가 경비를 서고

벽세경; [장경각의 책들을 다 읽었다?] 검토하던 서류에서 고개를 든다. 넓고 화려한 택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일을 하던 중이다. 책상에는 서류가 가득. 주변에는 비서들 십여명이 작은 책상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고. 전형적인 오피스 사무실 모습. 벽세경의 앞에는 장경각의 사서들 중 한명이 두 손 앞으로 모으고 서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서

사서; [실로 말도 안되는 속독(速讀)이었습니다.] 흥분하고

사서; [이미 읽은 책이 삼할 정도 된다고 했는데...] [나머지 칠할을 불과 사흘만에 거의 다 읽은 상태입니다.]

벽세경; [정말 말이 안되는 얘기네.] 몸을 뒤로 젖히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까닥이고

벽세경; [보통 사람보다 백배,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책을 읽는다는 건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사서; [읽는 시늉만 한 걸까 의심해서 시험을 해봤습니다.]

사서; [책을 읽어야만 대답이 가능한 질문을 했는데...]

벽세경; [정답을 얘기했겠지.] 흥분

사서; [그렇습니다. 이공자는 절대 읽는 시늉을 한 게 아닙니다.]

사서; [아마 보이는 모든 걸 한 번에 인식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벽세경; (확실히 괴물이잖아!) + [지금은 뭘 읽고 있는가요?]

사서; [무공 관련된 책들은 따로 모아두더니 그걸 읽고 있습니다.]

벽세경; [무공 관련된 책들이라...]

사서; [대략 천여 권쯤인데... 이미 절반 이상을 읽은 상태입니다.]

사서; [그나마 무공에 흥미가 생겼는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바람에 속도가 좀 늦어졌습니다.]

벽세경; [수고했어요. 계속 경과를 보고해주세요.]

사서; [분부 받들겠습니다.] 굽신

서둘러 입구로 가는 사서

[!] 문을 나서려다가 기겁하는 사서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선다.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따라오는 모습

사서; [장...] 기겁하며 인사하려 하고

손가락을 입에 세워 말을 막는 사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옆으로 물러서는 사서

벽세경; (이래저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괴물인데...) 천장 보며 생각하고

벽세경; (대체 부모가 누구이기에 저런 괴물이 태어난 걸까?) 찡그리고. 그때

[진귀한 일이로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깜짝 놀라는 벽세경

주변의 모든 비서들도 깜짝 놀라 일어나고

벽초천; [세경이 네가 업무를 보던 중에 딴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뒷짐 짚고 들어오는 벽초천. 뒷짐 진 손으로는 접은 부채를 쥐고 있다. 다른 작품의 냉혈전호 벽초천 캐릭터다. 벽초천 뒤로 후처인 냉하상이 도도한 자태로 따라온다. 냉하상 뒤로는 냉상아가 따라오고. 문간에는 사서가 겁에 질려 서있고

벽세경; [아버지!] 급히 일어나고. 비서들도 당황해서 일어나 굽신거리고

벽초천; [아비가 자릴 비운 동안 고생이 많았다.] 접은 부채를 흔들어 보인다. 나가라는 신호.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 벽초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는 비서들. 그 사이에 벽세경도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물러서고 있고

벽세경; [별 말씀을요.] 옆으로 물러서며 공손

벽세경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 벽초천. 냉하상도 근처로 가고

냉상아가 주변에 놓여있던 의자를 재빨리 벽초천의 옆에 놓고

벽초천과 나란히 앉는 냉하상. 냉상아는 뒤로 물러서고

벽초천; [첫째 너도 앉아라.]

벽세경; [예!] 책상 앞의 의자에 앉고

벽초천; [그동안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는 받았다.]

벽초천; [다행히 뒷탈 없도록 잘 처리한 것 같구나.] [잘 했다.]

벽세경; [감사하옵니다.] 고개 숙이고

샐쭉하는 냉하상

벽세경; [북경에 가셨던 일은 잘 진행되셨는지요?] 조심스럽게

벽초천; [북경 중심가에 지점을 완성했다.] [서두른 덕분에 영락제(永樂帝)가 북경으로의 천도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 맞추어서 개점할 수 있었다.]

벽세경; [노고가 많으셨사옵니다.]

벽세경; [하온데 장차 본점을 북경으로 옮기실 예정이신지요?] 눈치 보며

벽초천; [돌아오는 내내 고심했다.] 찡그리고

벽초천; [권력 주변에 본점을 두는 건 맞다. 금릉에 본점이 있었던 이유고...] 부채로 손바닥을 톡톡 치며

벽세경;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명조의 수도는 금릉이었지.) 끄덕

벽초천; [하지만 강북은 재화의 풍부함에 있어서 강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높게 쳐줘야 3할 정도인데...] 고민

벽초천; [부유한 강남을 떠나 북경으로 터전을 옮기는 게 맞는 결정인지는 아직도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

벽세경; [여유를 두고 심사와 숙고를 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옵니다.]

벽초천; [그렇겠지.] 끄덕

냉상아; (대화의 수준이 높아.)

냉상아; (여자의 몸으로 장주님과 저 정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큰 아가씨뿐일 텐데...) 감탄하고

벽세경을 흘겨보며 샐쭉거리는 냉하상

냉상아; (덕분에 큰 아가씨는 마님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쓴웃음

벽초천; [세천이가 일을 저질렀다는 보고는 받았다.]

벽세경; [본장의 북경 이전설도 있고 해서 반드시 향시에서 장원급제해야한다는 압박을 받은 듯하옵니다.] 한숨

벽초천; [향시에 장원급제해서 북경의 정계로 진출할 수 있다면 본장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 끄덕

벽세경; [제 딴에는 만전을 기한답시고 주문충을 매수해서 일을 벌였는데...]

벽세경; [노회한 시험관들 눈에는 아이들 장난질처럼 보였을 것이옵니다.]

벽초천; [네가 잘 대처했고... 아비도 인맥을 동원해서 입막음을 해놨다.] [덕분에 심각한 사안으로 번지진 않을 게다.]

벽세경; [예...] 한숨

벽초천; [세천이를 물 먹인 녀석이 본장에 머물고 있다고?] 눈을 좀 가늘게 뜨고

벽세경; [만일을 대비해서 꿀을 먹여두려고 데려왔는데... 뜻대로 되진 않았사옵니다.] 쓴웃음

벽초천; [평범한 놈이 세천이를 물 먹일 수 있었을 리는 없지.]

벽세경; [재물도 보물도 마다하고 장경각에 사흘간 머물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사옵니다.] 쓴웃음

벽초천; [확실히 별종이로군.]

벽세경; [불과 사흘 만에 장경각의 책 대부분을 읽었으며... 지금은 무공 관련 책들을 읽고 있다고 하옵니다.]

벽초천; [물론 우리 가문의 비전에는 접근시키지 않았겠지?] 눈 번뜩

벽세경; [장경각에 수장되어 있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책들만 제공했사옵니다.]

벽초천; [잘 했다.] 끄덕

냉상아; (황금전장은 소림사에 못지않게 수준 높은 무공비급들을 갖고 있다.)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건 장주님 일족뿐이지만...)

벽초천; [오는 도중에 태산에 들렀다.]

벽세경; [세황이를 만나고 오셨군요.] 냉하상을 곁눈질

벽초천; [세황이는 무림맹에서 제법 입지를 굳히고 있더구나.] 끄덕

콧대놓은 표정을 짓는 냉하상.

벽세경; [쉽지는 않겠지만 무림맹의 차기 맹주 자리를 노려봐야겠지요.]

벽초천; [아비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왔고 할 생각인데...]

벽초천; [세경이 너도 세황이를 위해 힘을 좀 써봐야겠다.]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벽세경; (역시 이렇게 나오시네.) 소리없이 한숨

 

#23>

장경각

장격각 내부. 높이 4-5미터에 이르는 책장들이 끝이 안보이게 늘어서 있고. 사서들이 조용 조용 움직이며 책을 정리한다.

그러면서 한쪽을 힐끔거리는 사서들

책꽂이 사이의 조금 넓은 공간. 불빛이 보이고

그 공간에 책상이 놓여있고 책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다. 청풍이 책상을 두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슥슥 책의 폐이지를 넘기는 모습이다. 먹지도 자지도 않아서 좀 초췌해진 모습이다. 코 아래 수염도 조금 나있고. 청풍이 앉아있는 책상 건너편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다.

청풍의 눈이 빛을 발하고.

책의 폐이지 전체가 청풍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서들; <정말 말도 안되는 괴물이로구만.> <사흘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책만 읽고 있어.> 지나가며 청풍을 곁눈질하고

사서들; <수만권의 책을 사흘만에 독파하다니...> <인간인가 싶기도 하구만.> 지나가고

 

청풍; (서림당에는 무공에 관련된 책들은 한 권도 없었다.) 슥 슥 책의 폐이지를 넘기며 생각

청풍; (할아버지는 의도적으로 무공 관련 서적은 들여놓지 않으셨다.) (내가 무림과 엮이는 걸 원치 않으신 때문일 것이다.)

청풍; (황금전장의 장경각에서 처음으로 무공에 관련된 책들을 보게 되었다.)

청풍; (양은 상당하지만 수준 높은 무공을 수록한 책은 없다.) 책상 뒤에 쌓여있는 책들을 힐끔

청풍; (돈만 주면 구할 수 있는 무공 관련 책들인데...)

청풍; (그래도 일독할 가치들은 있었다.) (무공의 이치와 활용법에 대해 잘 알게 된 때문이다.)

청풍; (기초적인 내용의 비급들이라 오히려 무공의 본질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책을 넘기고

청풍; (덕분에 무공에 관련된 기반을 탄탄하게 갖출 수 있었다.)

청풍; (이 기반 위에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면 남보다 빠르게 성취를 볼 테고...)

청풍; (무공수련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무림의 연원과 현 무림의 상황등도 알게 되었다.) 눈을 빛내고

청풍; (마교!) (이 비밀결사가 사실상 무림의 역사를 주도해왔다고 볼 수 있다.)

 

<-마교! 고금제일인으로도 불리는 천마(天魔)를 숭배하는 비밀결사이며 무림세력이다.> 다른 작품의 천마가 단상에 앉아 웃고 있는 모습. 그 앞에 세명의 인물이 포권하며 허리 숙이고 있다. 여자 한명 남자 두 명. 남자 중 한명은 덩치가 크다

<마교가 유사 이래 최강의 세력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구대문파(九大門派)와 삼문오가(三門五家)라는 무림의 주축이 힘을 합쳐도 마교를 상대하지 못한다.> 천마가 양손을 내밀어 세상을 움켜쥐려 하며 웃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모습

<그럼에도 마교는 온전히 무림을 정복했던 적이 없다. 구중천(九重天)이라는 강력한 적수들 때문이다.> 높은 산 정상에 선 천마를 향해 올라가는 팔남일녀의 인물들. 모두 눈빛이 형형하다.

<나한원(羅漢院), 극품당(極品堂), 독성부(毒聖府), 신비각(神祕閣,) 유령궁(幽靈宮), 팔황전(八荒殿), 만검총(萬劍塚), 신녀문(神女門), 신장곡(神匠谷)이 구중천이다.> 아홉명의 남녀들. 실루엣으로 묘사. 모두 막강한 고수들임을 묘사. 여자는 선녀같고. 검을 든 인물, 칼을 든 인물, 거대한 망치를 짊어진 인물 등등

<구중천의 역사와 지닌 바 힘은 마교에 못지않다. 구중천 중 두 문파가 손을 잡으면 마교에 맞설 수 있을 정도다.> 아홉명이 천마를 공격하는 모습

<마교가 일시적으로 강호를 정복했던 사례는 여러 번 있다. 하지만 이내 구중천의 반격을 받고 패퇴하기를 반복해왔다. 구중천 덕분에 무림은 평화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위 싸움의 연속. 구대일의 격전에서 밀리며 울부짖는 천마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구중천은 하나둘씩 세상에서 사라졌다. 구중천 중 당금에도 건재가 확인된 문파는 오직 둘뿐이다. 신비각과 만검총이다.> 나한원이 불타는 모습을 배경으로

<당금의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무림맹은 만검총의 변신이다. 맹주인 삼비검조(三臂劍祖) 진무륜(陳無倫)이 만검총의 당대 문주이기 때문이다.> 긴 검을 허리에 차고 뒷짐 진 신선같은 노인의 모습. 다른 작품의 진무륜 캐릭터. 좀 더 신선같은 분위기. 그 앞에서 포권하는 네 명의 남녀들. 석헌중, 합요나, 벽세황, 위진천이다.

 

청풍; (무림맹은 원명(元明)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결성되었다.) 책을 넘기며 생각하고

청풍;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을 몰아내기 위해 중원의 무림인들이 일치단결하여 결성한 것이 무림맹이다.)

청풍; (칠십여 년 전의 일인데 초대 무림맹 맹주는 나한원의 원주 나한대협(羅漢大俠)이었다.) 두근! 생각하다가 가슴이 뛰고

청풍; (나한원... 나한원...) 찡그리고

청풍; (이곳에서 처음 접한 문파인데... 나한원이란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가슴을 누르고

청풍; (나한원이 나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심호흡

청풍; (어쨌거나 나한대협은 무림맹을 지휘하여 몽고족, 아니 변황 무림의 세력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게 성공했다.)

청풍; (그 후 명나라가 세워지자 무림맹 맹주 자리를 후배인 삼비검조에게 물려주고 은퇴...)

청풍; (한데 이 기록에 의하면 나한원은 십오 년 전에 의문의 멸문을 당했다고 한다.) (구중천 중 만검총과 신비각만이 남은 사연이다.)

청풍; (십오 년 전 나한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는데

슥! 찻잔 하나가 청풍의 앞에 내밀어진다. 우윳빛의 액체가 가득 들어있다.

고개 들어 보는 청풍.

벽세경;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찻잔을 밀어주고 내려다본다.

청풍; [오셨습니까 소저?] 책에서 시선 떼고

벽세경; [사흘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책만 읽었다고 들었다.] 청풍의 건너편 의자에 앉고

벽세경; [책 좋아하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까 몸도 좀 챙기도록 해.] 다리를 꼬고 앉으며 건너다보고

청풍;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웃고

벽세경; [그거 마셔.] 턱으로 찻잔을 가리키고

청풍; [그럼 사양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서

마신다.

마시는 순간 청풍의 미간이 움찔하고.

웃는 벽세경

하지만 청풍은 내색하지 않고 찻잔의 액체를 모두 마신다.

청풍; [잘 마셨습니다.] 찻잔을 입에서 떼고

벽세경; [그게 뭔지도 묻지 않고 마신 거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는데?]

청풍; [소저께서 저를 해코지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고

벽세경; [하여간 머리 좋은 놈은 상대하기기 피곤해. 속을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한숨 쉬고

청풍; [저는 딱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은...] + [!] 말하다가 찡그리고

화악! 온몸에서 열기가 치솟는 느낌이 되는 청풍

벽세경; [거봐! 펄펄 끓는 기름을 마신 기분이지?] 그걸 보며 웃고

청풍; [우유인 줄 알았는데... 우유가 아니었던 것같군요.] 억지로 웃고. 열이 온몸으로 뻗히는 모습이 되어서

벽세경; [그래서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되는 거야.]

청풍; [교훈을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헉헉

벽세경; [읽은 비급들 중에 내공심법이 있었지?]

청풍; [예...]

벽세경; [그 중 마음에 드는 걸 운용해서 몸속에서 날뛰는 힘을 제어해봐.]

청풍; [그래야겠습니다.] 눈 감고.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직후

화악! 청풍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뿜어진다.

벽세경; (단번에 삼매(三昧)에 드네. 내공심법은 익힌 적이 없을 텐데...)

우둑! 우둑! 청풍의 몸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고

벽세경; (심지어 약기운을 맹렬한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놀라고

<어쩌면 환골탈태를 해버릴지도 모르겠구나.> 우둑 우둑! 소리가 나고. 몸이 커지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있고

벽세경; (이런 괴물을 적으로 돌리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긴장하며 생각할 때

[휴우!] 청풍이 긴 숨을 토하고

천천히 눈을 뜨는 청풍

번쩍! 청풍의 눈에서 빛이 뿜어지다가

이내 원래로 돌아온다.

벽세경; (내공이 단번에 일갑자 수준이 되었다.)

벽세경;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 [기분이 어떠냐?]

청풍;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력한 힘이 전신에 퍼져 있군요.] 우둑! 우둑! 근육질로 변한 팔을 보고

청풍; [그런가 하면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도 느껴지고...]

청풍; [제게 주신 것이 대단한 영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찻잔을 보고

벽세경; [공청석유(公淸石乳)란 것이었다.]

움찔하는 청풍.

벽세경; [공청석유에 대해서서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웃고

청풍;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영약이라지요?] [한 방울만 마셔도 기사회생할 수 있고 근골이 강철 같아진다는...]

벽세경; [넌 그걸 한 방울도 아니고 한 잔을 마셨다.] [앞으로 무공을 익힐 때 공력이 모자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청풍; (과장이 아니다.)

벽세경; [돈 얘기하긴 그렇지만 대략 십만 냥 쯤 나갈 테고...]

청풍; [제게 이리도 과분한 대접을 하시는 이유가 있겠습니다.] 한숨

벽세경; [내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는 바가 있잖아?]

청풍; [제게 빚을 쌓아놓을 생각이시군요.] 한숨

벽세경; [뭐 그런 셈이지.] [아직 읽어야할 책이 남았느냐?]

청풍; [얼추 다 읽었습니다.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책들을 다시 읽던 중이었구요,]

벽세경; [그럼 함께 가자. 보여줄 게 있으니...] 일어나고

청풍; [그러지요.] 일어나는데

옷이 낀다. 체격이 커져서

벽세경;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공청석유를 마신 덕분에 골격이 달라졌어.] 꽉 끼는 옷을 입은 청풍을 훑어보며

청풍; [그래야겠습니다.] 쓴웃음

앞서 가는 벽세경. 사서들이 급히 인사하고

청풍; (저 여자가 쳐놓은 올무에 제대로 걸린 것같다.) 앞서 가는 벽세경을 보며 한숨

<이래서 할아버지는 도광을 살겸하셨을 텐데...> 책장 사이를 지나가는 청풍과 벽세경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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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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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낮. 서림당이 있는 거리. 사람들 북적

서점 안에서 청풍이 털이개로 책의 먼지를 털고 있다.

서점 안쪽의 서재에서는 살인객주가 책을 읽고 있고

[!] 책 넘기다가 멈칫하는 살인객주의 손

살인객주; [쯧쯧...] 혀를 차며 다시 책을 넘기고

살인객주; (청풍이가 호승지심을 누르지 못하고 향시에 나간 여파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겠구나.)

살인객주; (아무쪼록 청풍이가 그 여파에 휘말려들지 말아야할 텐데...) 어떤 여자가 서점으로 들어오는 걸 떠올리며 한숨

 

[!] 털이개로 책을 털다가 흠칫하는 청풍

서점 입구에 한 여자가 서서 유심히 청풍을 보고 있다. 훤칠한 체형의 여자. 바로 벽세경인데 실루엣으로 묘사.

청풍; (이런...) 찌릿 찌릿! 몸에 전기가 일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털이개를 내리는 청풍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가 센 여자다.> 쿵! 입구에 서서 보고 있는 벽세경의 모습 크로즈 업. 그 배경으로 나레이션

청풍; (책이 아니라 내게 볼일이 있는 것 같다.) +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지요?] 정중하게 묻고

벽세경; [과연...] 슬쩍 웃고

벽세경; [가까이에서 보니 못난 아우의 심정이 이해가 가네.]

청풍; (날 훑는 시선이 송곳 같군.) + [책이 아니라 제게 볼일이 있으시군요.]

벽세경; [책이라면 충분히 갖고 있다.] [아마 이 가게의 책보다 백배 이상 될 게다.] 주변의 책들을 둘러보고

청풍; [그건 참 부럽습니다.]

벽세경; [대뜸 반말을 하는데 불쾌하지 않느냐?] 웃으며

청풍; [본래 다섯 살 안쪽은 동년배라고 했습니다.]

청풍; [하지만 소저께서는 그보다 위이신 듯하니 제게 하대를 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의미심장

벽세경; [그 녀석, 대놓고 멕이네.] [여자는 나이 많은 게 약점이고 흉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 흘기고

청풍; [오해입니다. 소저를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굽신하며 웃고

벽세경; [통성명해야 하는 사이니 나이를 속일 것도 없지.] [사실 난 너보다 열한 살이 많다.]

청풍; [열한 살이나 많으시다니... 제게 하대를 하실 자격은 충분하고도 넘치십니다.] 굽신 거리고

벽세경; [그렇다치고...] 서점 안으로 들어오고

벽세경; [너의 윗분에게는 예의를 차려야겠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청풍을 지나간다. 서점 안쪽으로

청풍; (거침이 없는 성격이로군.) 쓴웃음 지으며 벽세경을 따라고

청풍;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가긴 한다.)

서점 안쪽의 서재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벽세경. 살인객주가 책에서 눈을 떼며 보고 있다.

벽세경; [후학 벽세경이 노(魯)노야께 인사 올리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청풍; (벽세경... 역시 그 여자였군.) 벽세경의 뒤에 서서

살인객주; [황금전장의 냉혈전호(冷血錢虎) 벽초천(碧招天) 장주에게는 기린같은 아들과 봉황같은 딸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네.] 웃고

벽세경; [저의 아우가 기린일지는 몰라도 저는 봉황이라 여겨질 자격이 없는 계집이옵니다.]

살인객주; [겸양할 것 없네.] [오늘 직접 보니 자네는 봉황 정도가 아니라 자룡(雌龍)이로구먼.] 눈을 좀 가늘게 뜨고

청풍; (자룡... 암컷 용이라...)

벽세경; [거듭된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살인객주; [과찬이 아니야. 나이가 들면 저절로 관상에 눈을 뜨게 된다네.]

벽세경; [그리 말씀하시니 저의 복록(福祿)이 어떠한지 듣고 싶사옵니다.] 웃고

살인객주; [일단 장수는 할 테고... 유복함이야 말할 것도 없는데...]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고

벽세경; [혹시 남편 복이나 자식 복은 없는 것으로 보이시는지요?] 웃고

살인객주; [그럴 리가 있나?]

살인객주; [자네는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장부(丈夫;남편)를 얻게 될 걸세.]

벽세경; [어머나!] 놀라 입을 가리고. 진짜 놀란다.

살인객주; [자식복도 대단하구먼.]

살인객주; [늙은이의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열 손가락을 다 써야할 정도야.]

벽세경; [너무도 후하게 덕담을 해주시니 어찌 보은을 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몸을 꼬듯이 숙이고. 좋아하며

살인객주; [그저 덕담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고...]

살인객주; [그래 어인 일로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는고?]

벽세경; [영손(令孫)을 잠시 빌려갔으면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살인객주; [그러게나.] 웃으며 끄덕이고

살인객주; [다만 늙은이의 손주가 아직 관례(冠禮;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미성년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시게나.]

벽세경; [명심하겠사옵니다.] 배시시. 얼굴 조금 붉히며

청풍; (내가 미성년이라는 조부님의 경고가 의미심장하구나.)

청풍; (벽소저로 하여금 내게 엉큼한 생각을 품지 말라 하시는 것 같으니...)

벽세경; [웃어른의 허락도 받았고...] 청풍을 돌아보고

벽세경; [그럼 함께 가보도록 하자.] 콱! 청풍의 팔을 잡고

청풍; [할아버지!] 당황하여 살인객주를 돌아보고

살인객주; [다녀와라.]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사람을 보내어 기별하고...] 끄덕

청풍; [예...] 억지로 웃으며 벽세경에게 끌려가고

서점 밖으로 나가는 벽세경과 청풍의 뒷모습. 그걸 보는 살인객주

살인객주; (벽씨일족의 피가 가장 농후한 저 계집이 청풍이에게 눈독을 들였다.)

<과연 화가 될지 복이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구나.> 살인객주의 생각 배경으로 서점에서 청풍을 끌고 나오는 벽세경

 

청풍; (무슨 여자의 힘이...) 끌려나오며 당황

청풍; (날 아기 다루듯 한다. 아마 무공을 익혔겠구나.) 생각할 때

다가오는 마차 한 대. 화려하다. 마부석에는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말을 몰고 있다. 오가던 사람들 놀라서 돌아보고

워워! 마부의 말에 멈춰서는 말들. 주변 가게 사람들이 보고 있고

벽세경; [타고 가자.] 마차 문을 열고

벽세경; [주변의 시선도 있고 하니...] 먼저 마차로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가는 청풍. 마차 내부는 벽세경이 벽세천을 기다리던 그 마차와 대동소이하다.

청풍; (화려하군.) 화려한 마차 안을 둘러보며 마부석을 보는 쪽 의자에 앉고

<과연 황금전장의 마차답구나.> 마차의 문을 닫는 벽세경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탁! 밖에서 본 모습. 마차의 문이 닫히고

다가 다각 다시 움직이는 마차

[뭐야 저 여자?] [누군데 청풍이를 데려가는 거지?] [청풍이가 보쌈을 당하는 건가?] [그건 그것대로 아까운데...] 사람들 웅성대며 마차를 보고

 

#18>

웅장한 장원. <신선부> <신비무쌍> <폭풍신마> 등 다른 작품의 황금전장을 차용. 이 작품에서도 이름이 황금전장. 많은 사람, 우마차들이 드나들고. 정문을 황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무사들이 지키고 있다. 다른 작품에 나온 황금전장의 무사들인 황금수라들이다. 여자들로 이루어진 황금수라들도 있다.

정문을 지키는 황금수라들.

긴장하는 황금수라들.

다가오는 마차. 청풍과 벽세경이 탄 마차다

경의를 표하는 황금수라들

그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

 

#19>

황금전장의 깊은 곳. 인적이 없다.

아주 견고하고 웅장한 건물. 넓이가 수백 평은 됨직한데 전체가 강철과 바위로 이루어진 육중한 건물. 높직한 축대 위에 세워져 있고.

건물 입구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두 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두 개의 손잡이와 두 개의 열쇠구멍이 있다. 철문은 계단을 몇 개 올라가야 만난다. 이곳은 황금전장의 보물창고다. 황금수라들이 일정 간격으로 경비를 서고 잇고.

철문 앞에는 투구를 쓰지 않고 갑옷만 걸친 황금수라가 서있다. <신선부> 등에 나온 황금수라 부영반 귀견수. 무기는 허리에 찬 칼인데 반대쪽 허리춤에는 여러 개의 커다란 열쇠가 달린 고리를 차고 있다.

귀견수가 지키고 있는 건물 입구 처마에는 <藏珍庫>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흠칫하는 귀견수

다가오는 마차.

서둘러 달려가는 귀견수

다각 다각 멈추는 마차

마차의 문을 여는 귀견수

벽세경; [다 왔어!] 먼저 내리고.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귀견수. 주변의 황금수라들도 경의를 표하고

벽세경을 따라 내리는 청풍

청풍; (황금전장의 중지(重地)로 바로 온 것 같군.) 주변 둘러보고

벽세경; [앞으로 알고 지낼 사이이니 인사해.] 청풍에게 귀견수를 소개

벽세경; [우리 황금전장의 경비를 책임지는 황금수라(黃金修羅)들의 부(副)영반 귀견수(鬼見手)야.]

청풍; [이청풍입니다.] + (고수로군.)

귀견수; [어서 오게.] 사람 좋게 웃으며 포권하고

귀견수; [머무는 동안 시킬 일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시키게나.]

청풍; (웃는 얼굴과 달리 은연중에 풍기는 살기가 살갗을 따갑게 한다.) + [신세를 지겠습니다.] 마주 포권하고

벽세경; [보여줄게 있어. 따라와.] 건물로 가고.

귀견수가 서둘러 앞쪽으로 달려가고

벽세경을 따라가며 건물을 보는 청풍. 귀견수는 이제 계단을 올라가고 있고. 옆구리에 찬 열쇠꾸러미를 끌러내려 하며

<藏珍庫>라 적힌 현판 크로즈 업

청풍; (장진고(藏珍庫)라...) 간판 올려다보며 건물로 가고

<황금전장의 보물창고겠구나.> 귀견수가 몇 개의 열쇠가 달린 열쇠 꾸러미를 들고 철문에 난 구멍에 열쇠를 끼우는 장면 배경으로

철컹! 돌아가는 열쇠.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옆으로 물러서는 귀견수.

청풍; (열쇠를 돌렸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군.) 벽세경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철문을 보고.

청풍; (하긴 귀중한 보물을 수장한 보물창고가 열쇠 하나로 열리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 생각할 때

철문 앞에 이른 벽세경.

큼직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오른손을 들어서

철문에 나있는 구멍에 끼운다.

뭐라 중얼거리는 벽세경. 그러자

징! 구멍에 끼워진 보석이 빛을 발하고

철컹! 철문 안쪽에서 뭔가 움직이고

반지를 구멍에서 떼는 벽세경. 직후

그그긍! 두쪽으로 이루어진 철문이 안쪽으로 열린다.

청풍; (그렇게 된 거였군.) 깨닫고

<장진고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황금전장 장주와 장주의 피붙이들뿐일 것이다.> 열리는 철문을 보고 있는 벽세경의 모습 배경으로

<저 반지에 철문을 열게 하는 힘이 숨겨져 있을 테고...> 벽세경이 끼고 있는 반지 크로즈업

철컹! 그 사이에 완전히 안쪽으로 열리는 철문. 철문 안쪽은 평범한 복도다. 복도 끝에 다른 철문이 있고

벽세경; [들어가자.] 청풍을 돌아보며 걸어 들어가고

[예...] 벽세경을 따라 들어가는 청풍

철컹! 그긍! 벽세경과 청풍이 들어서자 다시 닫히기 시작하는 철문

철컹! 완전히 닫히는 철문. 밖에서 본 모습

귀견수; (말 그대로 파격...) 닫힌 철문을 보고

귀견수; (외부인이 황금전장의 장진고에 들어가는 게 얼마만인가?)

귀견수; (본장의 운영 전권을 부여받은 큰 아가씨의 결정이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곁눈질로 근처의 건물을 보고

장진고가 보이는 담장 너머의 삼층 건물. 열린 창가에 어떤 여자가 앉아있는 실루엣이 보인다.

귀견수; (마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마땅하지 않겠지.) 쓴웃음

<이번 일로 마님과 큰 아가씨가 충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건물 크로즈 업. 창가에 앉아있는 여자. <폭풍신마>에 나온 벽세황의 생모 냉하상. 이 작품에서도 냉하상으로 표기. 냉혈전호 벽초천의 첩이다.

 

냉하상의 시점. 철문이 닫힌 장진고가 보이고

냉하상; [교만한 년!] [장주님의 허락도 없이 외인을 장진고로 데리고 들어가?] 분노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냉혈전호 벽초천의 후처 냉하상(冷霞霜)>

냉하상; [장주가 전권을 맡겼다고 제 멋대로 굴고...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고 말겠다.] 이어

냉하상; [세경이 년이 데리고 들어간 놈이 누군지 확인했느냐?] 누군가에게 묻고

냉상아; [예 마님!] 슥! 어둑한 그늘에서 나서는 황금 갑옷을 입은 젊은 여자. 표정이 얼음장 같다. <폭풍신마> 등 다른 작품의 냉상아 캐릭터

냉상아; [어제 치러진 향시에서 둘째 공자님을 제치고 장원급제했던 이청풍이라는 자이옵니다.]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수라의 일원 냉상아(冷孀娥)>

냉하상; [서림당 주인의 손자라는 그 놈?]

냉상아; [틀림없는 그자이옵니다.]

냉하상; [세경이 년이 향시에서 장원급제한 놈을 본장의 보물창고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거지?] 눈 번뜩

냉상아; [뭔가 대단한 보물을 안겨줘서 어제 일을 무마하려는 게 아닐지요?]

냉하상; [그 말인즉슨 이가놈이 부정행위 했다고 무고한 범인이 세천이라는 얘기네.] 배시시 웃고

냉상아; [주문충이란 자를 매수해서 꾸민 짓 같은데...]

냉상아; [주문충은 어젯밤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냉하상; [세경이 년이 손을 썼겠네.] 흥분한 표정

냉상아; [둘째 도련님과 공모한 주문충이 사라졌사옵니다.] [이청풍에게 꿀을 먹여 입을 봉하면 향시에서 벌어진 소동은 유야무야될 것이옵니다.]

냉하상; [그럴 듯해!] [역시 세경이 년이 하는 일에는 구멍이 없어.] 웃고

냉하상; [하지만 내가 세경이 네년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될 것이다.]

냉하상; [내 아들 세황(世皇)이는 무림맹(武林盟) 뿐만 아니라 황금전장까지도 차지해야만 한다.]

냉하상; [세황이의 앞길을 막는 건 그게 누구든 내 손으로 치워버릴 것이다.] 마녀같은 표정으로 웃고

 

#20>

철문 안쪽. 벽세경을 따라 복도를 걸어가는 청풍. 복도의 벽과 천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있다.

청풍; (이 복도...) 앞서 가는 벽세경을 따라가며 복도를 두리번

청풍;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청풍; (유사시에는 저 구멍들이 치명적인 무언가를 토해낼 테고...)

청풍; (금강불괴에 만독불침이 아니면 살아서 이 복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는 동안에

복도 끝의 철문 앞에 이르는 벽세경. 하지만

벽세경; [다 왔다.] 그긍! 아무렇지 않게 철문을 밀고 들어가는 벽세경

청풍; (이 철문에는 아무런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군.) 벽세경을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가고. 직후

[!] 눈을 치뜨고

쿵! 드넓은 실내. 벽돌같은 것들이 일정 간격으로 쌓여있다. 한 더미가 집채만하고. 그런 게 수백평 넓이의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색이 두가지 한 가지는 짙고 한 가지는 밝은 색이다.

청풍; (맙소사!) 벽세경을 따라 벽돌 사이를 지나고

<벽돌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모두 금괴와 은괴다.> 번쩍이는 벽돌 더미들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청풍; (저 금괴나 은괴 하나만 있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청풍; (그런 금괴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청풍; (황금전장이 천하삼대 부호가문 중 하나하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니었다.) 생각할 때

실내 중간쯤에 이르는 벽세경

쿡! 바닥을 강하게 밟고. 그러자

덜컹! 바닥이 아래로 꺼지고.

쿵! 그곳에 사람 둘이 함께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생겼다.

청풍;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절묘하게 숨겨진 계단이 있었다.) 그걸 보며 놀라고

계단으로 내려가는 벽세경

청풍; (금괴나 은괴를 능가하는 진짜 보물들이 지하에 숨겨져 있겠구나.)

계단을 내려오는 청풍과 벽세경

계단 아래에도 드넓은 광장이 있다. 다만 1층과 다른 점은 수많은 좌대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고. 각각의 좌대마다 각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골동품. 산호, 각가지 무기와 공에품들. 두루마리와 책들.

청풍; (역시...)

청풍; (이곳에 수장되어 있는 게 진짜 보물이다.)

<그림 한 점, 골동품 한 점도 보물이 아닌 게 없다.> 골동품과 두루마리들을 배경으로

청풍; (저 보물들 대부분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들일 것이다.)

벽세경; [다시없을 수재이니 알아봤을 거야.] 둘러보고

벽세경; [여기 있는 보물들 대부분은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어.] [한 가지만 내다 팔아도 몇 대가 호의호식할 수 있을 거야.]

청풍; [그럴 것 같습니다만...]

청풍; [보물을 자랑하기 위해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 아니시겠지요?]

벽세경; [당연히 아니지.] 웃고

벽세경; [선물로 줄 테니까 아무거나 한 가지 챙기도록 해.]

청풍; [말씀은 고맙지만 전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벽세경; [생각을 바꿔!] 강압적으로

벽세경; [여긴 우리 황금전장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어!] [널 데리고 들어온 이상 반드시 무언가를 들려서 내보내야만 해.]

청풍; (억지를 부리는군.) + [소저!] 다시 사양하려는데

벽세경;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알잖아!] 노려보고

청풍; (동생이 한 짓의 입막음이로군.) 쓴웃음

벽세경; [네가 대범한 인물이라는 건 알아.] [어제 일은 가슴에 묻어두고 말겠지.]

청풍; [대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청풍; [그러니 동생분의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벽세경; [그건 네 생각이고...]

벽세경; [네가 뭔가를 받지 않으면 내 마음속에서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을 거야.]

벽세경;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라도 뭔가를 가져가도록 해라.]

청풍; (말도 안되는 억지지만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군.) + [그러시다니 이렇게 하지요.]

벽세경; [다른 제안이 있다면 들어보자.]

청풍; [제게 자랑하셨지요? 서림당보다 백배는 더 많은 책을 갖고 계시다고...]

벽세경; [본장의 서고에는 서림당보다 백배 이상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긴 하다.]

청풍; [그 서고에서 사흘만 머물러 있게 해주십시오.] [제게는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벽세경; [하아... 겨우 책 정도로...] 어이없고. 그러다가

진지하게 마주보는 청풍

벽세경; [면피하려고 해본 말이 아니로구나. 책이 어떤 보물보다 좋다는 게...]

청풍; [당연히 저의 진심입니다.]

벽세경; [졌다!] 철썩!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웃고

벽세경; [나도 세천이 녀석처럼 네놈에게 한방 먹었구나.] 웃고

벽세경; [좋다. 원하는 대로 본장의 서고에서 지내게 해주마. 사흘이 아니라 몇 달이라도...]

청풍; [배려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벽세경; [너 좋을 대로 해라.] 돌아서고

벽세경; [살다 살다 보물 싫다는 인간도 다 보네.] 궁시렁거리며 다시 계단쪽으로 가고

청풍;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웃으며 따라가고

벽세경; [실망은 무슨...] 손 저으며 앞장 서서 가고.. 한데

빠직! 갑자기 벼락에 맞는 것같은 기분이 되는 청풍

<나를 가져가라!> 무언가가 청풍에게 말을 걸고.

청풍; (설마...) 홱 한쪽을 돌아보고

[!]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돌아보는 벽세경

청풍이 한쪽을 보고 있다.

벽세경; (저놈이 뭘 보고 있지?) 다시 돌아서서 청풍이 보고 있는 쪽을 보고

계단 근처. 좌대에 방석이 놓여있다. 그 방석 위에 방망이 하나가 놓여있다. 길이는 40센티 정도. 우리나라 포졸들이 들고 다니던 육모방망이를 닮았다. 손잡이 끝에 뚫린 구멍에 끈을 꼬아 만든 매듭이 달렸다. 이름은 치룡퇴

벽세경; (얼씨구!) 놀라며 다가가고

홀린 듯 방망이를 보는 청풍

벽세경; [치룡퇴(治龍槌)가 마음에 든 거냐?] 웃고

청풍; [저 방망이 이름이 치룡퇴입니까?]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벽세경; [이름은 거창한데 전혀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그저 아주 오래된 물건이라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청풍; [아주 오래되었다면...]

벽세경; [믿기지 않겠지만 저 몽둥이는 상고시대 우왕(禹王)이 치수를 할 때 용들을 부리던 물건이라고 한다.]

벽세경; [용을 다스리는 몽둥이(治龍槌)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다.]

청풍; [우왕이 쓰던 물건이라면 삼천년도 더 되었다는 건데...] 불신

벽세경; [여러 기록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본장에서 다방면으로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치룡퇴는 진품이 거의 확실하다.]

청풍;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보물이겠습니다.]

벽세경; [이곳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보물이긴 한데...] 찡그리다가

벽세경; [마음에 들면 가져가라. 물론 가져갈 수 있으면 말이지만...] 웃으며

청풍; [안될 말씀입니다.] 손 사래

청풍; [황금전장이 보유한 보물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걸 제가 어찌 감히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벽세경; [말했잖느냐?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고...]

청풍; [예?] 어리둥절

벽세경;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마.] 치룡퇴를 두손으로 잡고

벽세경; [자랑은 아니지만 나의 내공은 삼갑자(三甲子)를 상회한다.] 치룡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청풍; (삼갑자 내공!) 경악

청풍; (아무 일도 안하고 백팔십년 동안 면벽좌선 해야 얻을 수 있는 공력 아닌가?)

청풍; (겉보기에 날렵한 이 여자의 내공이 삼갑자를 넘다니...) + [!] 생각하다가 놀라 눈 치뜨고

모든 힘을 써서 치룡퇴를 들려고 하는 벽세경. 얼굴과 목에 핏줄이 돋았고

우둑! 치룡퇴를 잡은 두 손도 근육이 불끈. 하지만

스윽! 겨우 조금 들려지는 치룡퇴

청풍; (말도 안되는...) 경악

청풍; (삼갑자 내공을 지녔다는 저 여자가 저 작은 몽둥이를 조금 움직일 뿐이라니...) 생각할 때

벽세경; [휴우! 역시 안되는구나.] 스륵! 다시 치룡퇴를 내려놓고

청풍; [온힘을 쓰신 것 같습니다만...]

벽세경; [사실이다.] 끄덕

벽세경; [본장의 수중에 들어온 이래 혼자서 치룡퇴를 움직인 사람은 없었다.]

벽세경; [나 정도의 내공을 지닌 사람 여럿이 힘을 써서 겨우 이곳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청풍;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어떤 힘이 숨겨져 있겠습니다.]

벽세경; [신통력이라고 할까?]

벽세경; [하여간 치룡퇴를 쓸 수 있는 인간은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청풍; [신기한 물건이로군요.]

벽세경; [이제는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되겠지?] 웃고

청풍;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벽세경; [혹시 모르니 한번 들어봐라.] [쓸 수 있으면 네게 주도록 하마.] 놀리고

청풍; [삼갑자 내공을 지닌 소저도 들지 못했는데 일초무학인 제가 어떻게...] 말하며 치룡퇴를 잡고. 한데

슥! 그냥 들리는 치룡퇴

청풍; [어!] 놀라 치룡퇴를 들고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벽세경

청풍; [이게 뭐지? 마치 솜방망이처럼 가벼운데...] 휙 휙 휘둘러 보고

벽세경; (맙소사!) 전율

벽세경; (치룡퇴가 주인을 만났다.) (그렇다는 건...)

<저 녀석이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치룡퇴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청풍을 배경으로 벽세경의 생각.

청풍; [혹시 절 놀리신 겁니까?] 방방이를 흔들어 보이고

퍼뜩 정신 차리는 벽세경

벽세경; [의심스러우면 치룡퇴를 떨어트려봐라.]

청풍; [그러지요.] 슥! 치룡퇴를 놓는다. 수직으로 바닥을 향해

꽝! 굉음과 함께 치룡퇴 끝이 돌로 이루어진 바닥에 박힌다.

청풍; [헉!] 놀라 물러서고

청풍; (그냥 놓았을 뿐인데 치룡퇴가 돌바닥에 박혔다.) 놀라고

벽세경; [이제 내가 널 놀린 게 아니라는 걸 알겠지?] 흥분

청풍; [그런 것같습니다.] 억지로 웃으며 치룡퇴를 다시 잡고

슥! 바닥에 박힌 치룡퇴를 가볍게 뽑아드는 청풍

벽세경; [축하한다. 마침내 치룡퇴가 주인을 찾았구나.] 박수치고

청풍; [이거 참 이해할 수가 없는 물건이로군요.] 왼손으로 머리 긁적. 오른손에 든 치룡퇴를 보며

벽세경; (분명하다. 저 놈이 다음 세대 천하의 주인이다.) 그걸 보며 흥분

<어떻게든 잡아야하는 보물중의 보물인 것이다.> 치룡뢰를 휘둘러보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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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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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험관1; [벽세천!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하고 있긴 한 것이냐?] 엄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다른 시험관들도 노려보고

벽세천; [물론입니다.] 거만

벽세천; [제 말을 믿기 어려우시면 이가놈의 몸을 수색해보십시오!] [분명 부정의 증거를 숨기고 있을 것입니다.] 청풍에게 삿대질하고

시험관1; [이청풍! 자네 의견을 말해보게.] 청풍에게

청풍; [먼저 여러 사부님들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포권하고

청풍; [하지만 소생은 이번 향시에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응시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청풍; [그저 지금까지 홀로 공부해온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끄덕이는 시험관들

벽세천; [그렇게 떳떳하면 몸수색에 응해라.] 비웃고

청풍; [못할 것도 없지.] 한숨

청풍; [사부님들께서 저의 결백을 증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시험관들에게

시험관1; [그렇게 하지.] 다른 시험관들에게 고개 짓을 하고

두 명의 시험관이 일어나고

시험관들; [결례를 하겠네.] [속상하더라도 잠시만 참아주게.] 다가와 청풍의 몸을 뒤지고. 헌데

후둑! 툭! 청풍의 저고리에서 두 개의 돌돌 말린 종이가 떨어진다. 도장 정도 크기

시험관들 눈 부릅

벽세천; [그거요!] 신나서 삿대질

벽세천; [저 놈이 답안 작성 중에 그걸 몰래 펴보는 걸 보았습니다!] 득의만면해서 웃고

찡그리는 청풍. 몸 수색 하던 시험관들이 몸을 숙여 종이 만 것을 집어들고 있고

주문충은 조마조마한 표정이고

 

#12>

[저럴 수가!] [이청풍의 옷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정말 부정행위를 한 건가?] 시험관들이 종이 만 것을 풀어 읽는 모습 보며 사람들 놀라고

 

#13>

종이를 펴서 읽으며 굳어지는 시험관들. 이어

그걸 시험관1에게 건네주는 시험관들

다른 시험관들과 함께 종이의 내용을 읽는 시험관1

[허어! 이런 괘씸한...] [오늘 출제 문제에 대한 예상답안 아닌가?] [용케 이런 걸 준비했군.] 시험관1과 함께 종이를 읽는 시험관들 분노하고

청풍; (그렇게 된 거였군.) 한숨 쉬며 그걸 보는 청풍.

청풍; (저 작자가 축하하는 척 하며 내 품속에 예상답안을 넣었겠지.) 주문충을 흘깃 보고. 주문충은 딴전을 부리고 있고. 주문충이 과장되게 자기 팔을 잡으며 축하하던 장면이 청풍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청풍; (소인배들의 꾀는 대비하기 어렵다는 옛 말이 사실이었구나.) 쓴웃음. 그런 청풍을 흘겨보며 좋아 죽으려는 벽세천

벽세천; (이가야! 네놈은 끝난 거다.)

벽세천; (관부에서 주관하는 과거에서 부정을 저지른 게 들통 났으니 평생 응시는 못하게 될 것이다.)

벽세천; (응시를 못할 뿐 아니라 감옥에 쳐박혀 엄한 벌까지 받을 테고...)

시험관1; [이청풍!] [이 건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종이를 흔들며

청풍; [여러 사부님들께 이청풍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포권하고

시험관1; [허락하마.]

청풍; [사부님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세상에는 똑같은 필체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주문충; (아차!) 기겁

벽세천; (이런...) 굳어지고

[그렇지!] [필체는 지문 같아서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시험관들 끄덕

청풍; [그 예상 답안지라는 것의 필체와 소생이 제출한 답안의 필체를 비교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허어! 이런...] [어떻게 봐도 동일인의 필체가 아니로구먼.] 예상답안과 책상에 놓인 종이를 비교하며 놀라는 시험관들

벽세천; [다... 다른 자가 예상답안지를 작성했을 수도 있습니다.] 급히 반론하지만

시험관1; [그 입 다물라!] 버럭! 고함

움찔하며 시선 피하는 벽세천

 

고개 저으며 한숨 쉬는 벽세경

 

시험관1;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 건을 조사할 것이다.] [만일 무고를 획책한 자가 있다면...] 말을 끊으며 벽세천과 주문충을 번갈아 보고

긴장해서 숨도 못 쉬는 주문충.

얼굴 이지러지는 벽세천

시험관1; [국법을 어기고 황상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로 처단할 것이다.] 살벌

주문충; (일... 일 났다.) 사색이 되고

벽세천; (젠장!) 이를 악물고.

시험관1; [이청풍! 벽세천, 주문충!]

청풍; [하교하시지요.] 포권

벽세천과 주문충도 눈치를 보고

시험관1; [사안의 전말이 밝혀질 동안 금릉에 머물며 근신하라.] [만에 하나 금릉을 벗어나면...] 살벌

모두 긴장. 장내의 다른 응시생들도

시험관1; [죄를 지어 도피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벽세천과 주문충도 고개 숙이고

시험관1; [금번의 향시는 이것으로 파하겠다.] 선언하며 돌아서고. 시험관들도 일어나 돌아서고

청풍;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돌아서서 가는 시험관들에게 고개 숙이고

그런 청풍을 노려보며 돌아서는 벽세천. 주문충도 청풍의 눈치를 돌아서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벽세천과 주문충도 서둘러 입구로 가고

청풍; (입맛이 쓰구나.) 돌아서며 쓴웃음

입구로 몰려가는 응시생들. 그 중에 벽세천과 주문충도 보이고

청풍; (할아버지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 입구로 가며

<재능을 드러내면 반드시 질시하는 자가 생길 테니 도광(韜光;재능을 숨김)만이 보신(保身)의 방책이라 하신...> 응시생들 맨 뒤에서 입구로 가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14>

금릉부 밖. 구경꾼들 흩어지고. 응시생들도 흩어진다. 일부 응시생들은 마차에 타고 있다.

마차들 줄 가장 화려한 마차.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고. 지붕에 <黃金錢莊>이라 적힌 깃발이 걸려있다. 마부석은 비어있다. 마부는 마차의 입구에 서있는데 눈빛이 날카롭다. 이자의 이름은 필곤. 상당한 고수.

그 마차로 오는 벽세천. 오만상. 거친 발걸음. 오가던 사람들 겁에 질려 급히 비키고

말없이 고개 숙여 벽세천을 맞이하는 마부

벽세천; [집으로 간다.] 다가오며 퉁명스럽게.

마부; [예!] 덜컹 마차의 문을 열어주고

벽세천; (죽일 놈!) 청풍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마차에 탄다. 한데

[!] 마차 안으로 들어서다가 눈 부릅

마차 안에 이미 누군가 타고 있다. 마차 안에는 마주 보는 의자가 놓여있는데 마부석을 바라보는 자리에 누군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다. 눈빛이 살벌한 여자다. 벽세경이지만 얼굴을 아직 보여주지 말고

벽세천; [누... 누나!] 억지로 웃으며 맞은 편 의자에 앉으려 하고

탁! 밖에서 문을 닫는 마부

 

마차 안. 벽세천이 벽세경과 마주 앉으며 눈치를 본다. 여전히 벽세경의 보 모습은 보여주지 말고

벽세천; [누... 누나가 마중 나올 줄은 몰랐어!] 억지로 웃는데

짝! 벽세천의 뺨을 후려치는 벽세경. 얼굴이 홱 돌아가는 벽세천

벽세천; [왜 이래 누나!] 화가 나서 고개 홱 돌리며 노려보지만

짝! 이번에는 반대쪽의 뺨을 후려치는 벽세경

벽세천; [아이쿠!] 이번에는 세게 맞아서 옆으로 쓰러지는 벽세천

 

혀를 차며 말 고삐를 잡는 마부. 마부석에 올라와 앉았다.

마부; [이랴!] 고삐를 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

 

다시 마차 안.

벽세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억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며 뺨을 만지고. 입이 터져 피가 흐른다. 코에서도 피가 흐르고

벽세경; [몰라?] 슥! 몸을 앞으로 숙이고

벽세경; [네놈이 뭔 짓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콱! 벽세천의 멱살을 부여잡아 당기며 이를 갈고. 벽세경의 얼굴 처음으로 보여주고

벽세천; [누... 누나!] 상체가 앞으로 당겨진 채 주눅이 들고

벽세경; [우리 집안이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관부, 황실에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몰라?] 얼굴을 들이밀며 고함. 배경으로 나레이션. <-벽세천의 누나 벽세경(碧世鏡)>

벽세천; (다 알고 있었구나.) + [미... 미안해 누나.] 눈치 보며

벽세경; [멍청한 놈 같으니...] 확! 벽세천을 밀어버리며 원래 자리에 돌아가고

털썩! 원래 자리에 패대기쳐지듯 앉는 벽세천

벽세경; [우리 집안은 돈놀이가 업이다.] [필연적으로 남을 속이고 갈취해야만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벽세경; [다만 그 어떤 경우라도 들키거나 혐의를 받게 되면 안된다!] [그게 돈놀이의 철칙이고 필수요소인 것이다.]

벽세천; (내가 이청풍을 무고한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무고 하지 못한 걸 탓하는구나.) 깨닫고

벽세경; [어설프게 설계해서 자칫하다가는 집안에 불똥이 튈 뻔하게 만들고...] 노려보고

벽세천; [잘못했어!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을게.] 주눅 들어 눈치 보고

벽세경; [함정을 파려면 이중 삼중으로 파! 그래야 네가 판 함정이라는 게 들킬 가능성이 줄어드는 거야.]

벽세천; [명심할게.] 눈치 보며

벽세경; [덜 떨어진 놈 같으니...] 혀를 차고

눈치 보는 벽세천. 입과 코로 피를 흘리고 양쪽 볼이 벌개졌다.

벽세경; [이리 와!] 두 팔 벌리고. 한숨 쉬며

벽세천; [응...] 벽세경에게 건너가

벽세경의 품에 안기는 벽세천

벽세경; [오늘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더 지혜롭고 더 교활해져야한다.] 품에 옆으로 안긴 벽세천의 입과 코의 피를 닦아주고. 둘은 열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벽세경; [그래야 독사같고 전갈같은 그 여자의 독수에서 살아날 수 있어.] 어떤 여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고. 그 여자는 벽세천과 벽세경 남매의 양모다. 두 남매의 친모는 죽었다.

 

#15>

이제 해가 졌다.

금릉의 번화가. 등불이 걸리기 시작하고

그곳으로 오는 청풍. 등에 배낭 같은 걸 지고 있다.

[이공자! 과거 잘 보았는가?] [당연히 장원했겠지?] 가게 사람들 청풍에게 말 걸고

손들어 보이며 웃기만 하는 청풍

[정말 과묵해!] [원래 똑똑한 수재들은 말이 적은 법이야.] [똑똑한 데다가 잘 생기기도 하고...] [어느 집에서 사위로 데려갈지 부럽구만.] 청풍의 뒷모습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

번화가의 어느 가게. 서점이다. 상당한 규모. 입구에는 <書林堂>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고. 가게 안팍에 책이 가득 쌓여있다. 가게에는 입구가 두 개다. 넓직한 서점의 입구. 그 옆에 쪽문이 있다. 살림집으로 통하는 문이다. 쪽문 앞에 후덕한 인상의 중년여인이 서서 거리를 살펴 보고 있다. <투천환일> 등 다른 작품에 나오는 유모 캐릭터. 몸매가 넉넉하고 정이 많게 생겼다. 하지만 사실은 대단한 고수다. 살인상단의 십대살수 중 한명. 별호는 모야차 손이낭

손이낭의 눈 반짝

사람들에게 손 인사 하며 다가오는 청풍

손이낭; [왔네.] 안도하고. 그때

청풍; [다녀왔어 유모.] 머쓱한 웃음 지으며 다가오고.

손이낭; [어서 오세요 도련님.] 다가가며 손을 내밀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이청풍의 유모 손이낭(孫二娘)>

손이낭; [어떠셨어요 오늘 치룬 과거시험은?] 청풍이 지고 있는 배낭을 벗기며

청풍; [그냥 그랬어.] 으쓱하며

청풍; [할아버지는?] 서점 쪽의 문을 보며

손이낭; [기다리고 계셔요. 들어가 보세요.]

청풍; [응...] 서점으로 들어가고

손이낭; [저녁 다 되어가니 손만 닦고 오세요.] 옆의 쪽문으로 들어가며

손들어 보이며 서점으로 들어가는 청풍

 

서점 내부. 책꽂이들이 죽 늘어서 있다.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 마다 책이 가득. 천장에 등이 걸려있어 아주 어둡지는 않고

책장들 사이를 지나가는 청풍

책장들이 끝나고 좀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서재같은 분위기. 큼직한 책상이 중앙에 있고. 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입구 건너편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서 무언가 쓰고 있다. 살인객주다. 15년 동안 상당히 늙었다. 다른 작품의 살천인조 모습이 되어 있다.

청풍;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눈치 보며 책상으로 다가가고

살인객주; [오냐.] 고개를 천천히 들고. 살인객주임을 보여주고

청풍; [죄송합니다.] 눈치 보며 맞은편 의자에 앉고

살인객주; [할애비에게 사과부터 하는 걸 보니 험한 일을 겪었겠구나.] 혀를 차며 붓을 내려놓고

청풍; [속 좁은 어떤 놈이 되도 않는 무고를 하더군요.] 쓴웃음

청풍; [다행히 우문(宇文)학사께서 명철(明哲)한 분이시라 누명을 쓰진 않았습니다.]

살인객주; [우문술은 현자지.] [한림원의 학사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드는 학식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청풍; [그분 덕분에 혐의는 벗었지만...]

청풍; [할아버지가 왜 도광하라하셨는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 숙이고

살인객주; [얻는 바가 있었다면 되었다.]

청풍; [예...]

살인객주; [네 어미와 아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아직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어미가 할애비에게 했던 부탁만은 다시 한 번 들려주마.]

살인객주; [네가 세상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게 해 달라!] [이것이 네 어미가 남긴 유언이었다.]

침통한 표정이 되는 청풍.

살인객주;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사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살인객주; [특히 너는 남다른 재능을 타고 났다.] [보통의 인간은 백번을 읽어도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를 일별(一瞥)로 터득하고...]

살인객주; [남이 일 년 걸릴 노력을 너는 일각에 해치우기도 한다.]

살인객주; [이런 재주를 숨기며 사는 건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살인객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도광(韜光)! 이 한마디를 늘 명심해야한다.] [그게 네 어미가 남긴 유언을 지키는 일이니...]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살인객주; [그만 안채로 가봐라.] [손이낭이 네게 주려고 성찬을 준비하는 것 같더구나.] 다시 글을 쓰려 하고

청풍; [할아버지도 함께 드시지요.]

살인객주; [입맛이 없구나. 아직 정리해야할 일이 남아있기도 하고...] 글을 쓰며

청풍;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일어나고

살인객주; [오냐.] 글을 쓰고

옆의 쪽문을 열고 나가는 청풍.

쪽문 안쪽은 작은 마당. 마당에 놓인 탁자에 손이낭이 음식을 늘어놓다가 돌아본다. 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방 두칸이 있다.

탁! 다시 닫히는 문

살인객주; [낭중지추(囊中之錐)... 낭중지추...] 탄식하고

살인객주; [주머니 속의 날카로운 송곳은 반드시 밖으로 뚫고 나오는 법!]

살인객주; [아무래도 제수씨의 유언은 지켜드리기 어려울 것같구나.] 죽어가며 유언하던 노경주를 떠올리고

 

#16>

밤. 금릉의 주택가. 평범한 주택가다.

어느 집. 담장 안에 세채의 건물이 있는 집이다. 밤이 깊어 불은 켜져 있지 않다.

그 중 한 건물

건물 내부. 침실 겸 서재. 책장에 책이 가득

책장 사이에 놓인 침대. 주문충이 잠들어 있다.

음냐 음냐! 배를 긁으며 자는 주문충

쿡! 쿡! 그런 주문충의 옆구리를 찌르는 칼집에 든 칼

주문충; [아 뭐야?] 짜증내며 칼집을 손으로 치고

주문충;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오만상 눈을 뜨고. 그러다가

[!] 눈 부릅. 턱! 목에 걸쳐지는 칼집에 든 칼

주문충; [누... 누구?] 기겁

벽세경; [큰 소리 내면 영원히 재워버리는 수가 있다.] 쿵! 칼집에 든 칼로 주문충의 목을 누르고 내려다보는 여자. 복면을 쓰고 있지만 벽세경이다.

주문충; [누... 누구십니까? 왜 내게 이러시는 거고?] 겁에 질려 벽세경의 눈치를 보고

벽세경;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슥 칼을 주문충의 목에서 떼고

벽세경; [살고 싶다면 순순히 따라와라.] 문쪽으로 가고

주문충; [영... 영문은 알아야 따라가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겁에 질려 일어나면서도 할 말은 하는데

벽세경; [네놈이 오늘 낮 향시에서 한 짓을 알고 있다.] 돌아보고

[!] 눈 부릅. 자신이 청풍의 품에 종이 만 것을 몰래 넣던 장면 떠올리고. 이어

 

시험관1;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 건을 조사할 것이다.] [만일 무고를 획책한 자가 있다면...] 말을 끊으며 벽세천과 주문충을 번갈아 보고

시험관1; [국법을 어기고 황상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로 처단할 것이다.] 살벌

회상 끝

 

주문충; [혹시... 황금전장에서 보내신 분이십니까?] 겁에 질려 침대에서 내려오고

벽세경; [그 주둥이...] 문을 열다가 돌아보고

주문충; [흡!] 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벽세경; [올리면 안되는 말을 입에 올리면 제 명에 못 죽을 수도 있다.] 문을 열고 나가고

주문충; [예...] 겁에 질려 따라 나가고

 

주문충의 집을 밖에서 본 모습. 문이 조금 열려있고. 문 밖에 마차가 한 대 서있다. 창문이 없는 상자 형의 마차. 마부석에는 얼굴에 면사를 쓴 마부가 앉아있다. 황금전장의 마부 필곤이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오는 벽세경.

이상 없다는 표시고 고개 숙이는 필곤

벽세경; [나와도 좋아.] 문 안을 향해

주문충이 겁에 질려 나온다.

벽세경; [타라!] 마차 문을 열고

벽세경; [이 마차가 널 천리 밖으로 데려가줄 것이다.]

벽세경; [가는 곳에 새로운 신분과 먹고 살만한 재물을 준비해두었다.] [그곳에서 최소한 오년은 지내다가 돌아와라.]

주문충; [부...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라도...] + [!] 말하다가 기가 죽고

복면 속에서 노려보는 벽세경의 눈빛이 강렬하다.

주문충; [죄... 죄송합니다.] 겁에 질려 허둥지둥 마차에 오르고

탁! 문을 닫아주는 벽세경. 이어

벽세경; [데려다주고 와.] 필곤에게

필곤; [예!] 고개 숙이고

마차 고삐를 채는 필곤. 이어

따각 따각 멀어지는 마차

그걸 보며 복면 윗부분을 잡는 벽세경

슥! 복면을 벗는 벽세경.

그러자 드러나는 벽세경의 얼굴

벽세경; [세천이가 매수한 주문충이 사라지면 향시에서 벌어진 소동도 유야무야될 테고...]

벽세경; [만일을 대비해서 이청풍의 입만 단속해두면 되겠지.] 스산하게 웃는 벽세경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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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중지추 囊中之錐

 

#1>

산중에서 큰 불이 났다. 불길과 연기가 치솟고 있고.

화르르! 화악! 불타고 있는 장원.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십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건물들이 거의 다 불타고 있다.

장원 안팍에 수십 명의 남녀가 죽어있다. 남자들을 싸우다가 죽은 모습. 복면을 쓴 자들의 시체도 섞여있고. 복면인들이 장원 담장 밖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살피고 있다.

불타고 있는 장원 정문. 처마에 <羅漢院>이란 글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정문 주변에도 복면인들이 시체를 살피거나 주변을 경계한다. 그러다가

[끄아악!] 장원 안쪽에서 들리는 비명. 돌아보는 복면인들

[아직 버티고 있는 놈이 있군.] [끈질긴 놈들이야!] 혀를 차고. 슈욱! 그런 그들의 목을 휘감는 가는 실들. 이어

툭! 쩍! 놈들의 목이 그대로 잘린다. 실이 조여지며

털썩! 퍼억! 담장 밖에 있던 복면인들 모두 목이 잘려 나뒹굴고.

쿠오오!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다가오는 어떤 인물의 실루엣. 노인인데 눈빛만이 보인다. 내민 손에서 수많은 실들이 뻗어 나와 너울거리고 있다.

 

[끄윽!] 고개 떨구며 죽는 노인. 기둥에 두 팔이 쳐들린 채 매달린 모습

쿵! 불타는 건물들 사이에 커다란 나무가 있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은 사람들. 두 손이 묶여 나무에 매달린 모습. 지독한 고문을 당해 몸이 찢기고 으스러졌다. 전부 죽었고. 나무 주위에 복면인들이 서서 시체들을 보고 있다. 나무 주변에 널려진 남녀의 시체들. 시체들이 살아있는지 살피는 복면인들도 있고

복면인들 시체도 많다. 동료들의 시체를 한쪽으로 모으고 있는 복면인들도 있고

복면인1; [이 늙은이도 결국 명줄을 놨군.] 마지막으로 죽은 노인의 시체를 칼로 쿡쿡 찔러보고. 주변에 다른 복면인들도 보고 있고

복면인2; [정말 지독한 것들이야. 단 한 놈도 입을 열지 않고 죽었어.] 다른 시채들을 둘러보고

복면인3; [이 정도 고문을 하면 한 놈쯤은 입을 열 줄 알았는데 말이지.]

복면인1; [나한원(羅漢院)이 괜히 나한원이 아니지.] [종들조차 평범한 인간이 한 놈도 없었어.]

복면인2; [중독당한 상태에서도 발악을 해서 본교 형제들의 희생이 컸어!] 동료들이 죽은 복면인들의 시체를 한쪽으로 모으는 걸 돌아보고

복면인3; [주인 일가에 대한 충성심은 가상하지만...] [그 바람에 나한대협(羅漢大俠) 이무외(李無畏)의 마누라와 아들 놈 종적은 알아낼 수 없게 되었어.]

복면인1; [한 번 더 뒤져보세.]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니 탈출하지 못하고 어딘가 숨어있는 게 분명해!]

복면인2; [후환을 없이하기 위해서라도 나한원의 핏줄은 확실히 끊어야겠지.] 돌아서고. 바로 그때

[늦었도다! 너무 늦었도다!] 누군가의 말이 들려 복면인들 기겁

살인객주; [한 시진, 아니 일각이라도 빨리 도착했다면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았을 것을...] 시체들 사이로 걸어오는 노인. 정문 밖에서 복면인들을 죽인 노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여주고. 나이는 60세 중반 정도인데 체구는 크지 않지만 눈빛이 아주 강렬하다. <신병전설> 등 다른 작품의 <살천인조> 캐릭터인데 좀 더 젊게 묘사 이 작품에서는 살인객주로 표기. 최강의 살수 조직인 살인상단의 단주다.

<고수다!> <이곳까지 들어올 동안 어떤 경고도 없었다> <나한원 외곽을 포위하고 있는 형제들이 몰살당한 것 같다!> 창! 차창! 복면인들 기겁하며 무기를 뽑지만. 하지만 그 직후

[!] [!] 복면인 모두 기겁

쿵! 그자들의 목이 전부 가는 실에 한 바퀴 감겨 있다.

오른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살인객주. 펼친 손 뒤쪽 소매에서 수십 가닥의 가는 실이 빠져나와 복면인들의 목을 감고 있다

<언... 언제...> <목... 목이 실에 감겼다!> <실은 실인데 철사보다 질 것같다!> 으으으! 공포에 질리는 복면인들. 가는 실들이 그자들의 목을 강하게 조여서 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주르르! 조여진 상처가 베어지며 피도 번져 나오고

살인객주; [무고한 피를 흘릴 때는 대가를 치를 각오도 했을 것이다.] 살벌한 표정으로 손을 웅크리고.

[제... 제발...] [목숨만은...] 텅! 터엉! 무기를 떨구며 애원하는 복면인들. 하지만

살인객주; [네놈들 자신의 목을 희생자들의 영전에 제물로 바쳐라!] 팽! 내밀었던 손을 뒤로 확 잡아당기는 시늉하고. 그러자

서걱! 스악! 실이 조여지며 복면인들의 목이 일제히 잘린다. 실이 강하게 조이자 복면인들의 목이 두부처럼 잘린다.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는 복면인들의 머리통. 잘린 상처에서는 피가 뿜어진다. 피를 뿜으며 비틀거리는 복면인들의 몸뚱이

털썩! 퍼억! 목 없는 시체들 나뒹구는 복면인들의 몸뚱이

슈우! 스르르! 모든 실들이 살인객주의 손등 위로 스며들어가고

실을 회수하며 마지막으로 죽은 노인에게 다가가는 살인객주

고개 떨구고 죽은 노인의 모습

살인객주; [능(陵)집사, 미안하네. 노부가 어리석어 이런 일이 벌어졌어.] 노인을 올려다보며 탄식하고

살인객주; [노부가 지은 업보는 반드시 노부의 손으로 해결하겠네. 저승에서나마 지켜봐주게나.] 합장하고. 이어

살인객주; [오며 들은 대로라면 노(魯)부인과 아들은 나한원 내에 숨어있을 것이다.] 돌아서면서 주변 둘러보고. 이제 장원 내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살인객주; [그럼에도 마교(魔敎)의 마귀들이 찾아내지 못했다면 깊이 숨어있다는 뜻...] 바닥에 한 무릎을 꿇고

살인객주; [부디 탈 없이 숨었기를 바랄 뿐이다.] 손을 바닥에 대고

<색적(索敵)!> 눈을 감으며 생각하고

지징! 바닥에 댄 살인객주의 손이 진동하고

화악! 화면의 모든 것이 반투명하게 변한다. 마치 엑스레이로 찍듯이

차례로 보여주는 장원 내의 엑스레이 사진. 불타는 건물. 널려있는 시체들

살인객주; (찾았도다!) 흥분하고

어떤 좁은 공간에 아기를 안은 여자가 철문 같은 것에 기대 앉아있는 게 보인다.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가슴이 피로 물들어 있다.

일어나며 장원 한쪽을 보는 살인객주

살인객주가 보는 곳에 우물이 있다. 井자형으로 돌을 쌓아 턱을 만든 상당히 큰 우물. 턱의 한 면이 3미터쯤 된다. 턱의 높이는 허리 정도

우물로 달려가는 살인객주

아래를 내려다본다.

우물은 상당히 깊다. 15미터쯤 아래가 수면인데 수면에 무언가 가득 떠있다.

크로즈 업. 떠있는 것은 시체인데 주로 여자와 아이들이다.

살인객주; (악독한 놈들! 여자와 아이들을 우물에 던져 죽였구나.) 이를 갈며 우물 턱으로 올라서고

휘익! 우물 안으로 뛰어내리는 살인객주. 발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콰콱! 아래로 떨어지며 웅크린 손으로 벽을 긁는 살인객주. 그 바람에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늦어지고

[!] 아래로 내려가며 눈을 번뜩이면서 맞은편을 보는 살인객주

시체가 떠있는 우물 수면 조금 위쪽에 굴이 수평으로 뚫려있다. 그리 넓지는 않아서 엎드리거나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 한데

굴 바닥에는 핏자국이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

팟! 동굴 벽을 한 발로 차는 살인객주

휘익! 굴로 날아 들어가는 살인객주. 거의 수평으로 날아들어간다.

살인객주; (우물 속에 이토록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었구나.) 굴을 수평으로 날아가며 생각하고. 굴 바닥에는 무언가 끌려간 듯한 핏자국이 나있고

살인객주; (나한원의 비밀무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날아가고. 잠시 후

동굴이 확 넓어진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정도

[!] 스윽! 몸을 바로 세우며 눈을 부릅뜨는 살인객주

동굴 끝에 철문이 있다. 철문에는 <羅漢洞>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한데 철문 아래에 한 여인이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20세 가량의 절세미녀. 다른 작품의 온유향이나 영청공주 캐릭터. 청풍의 엄마로 이름은 노경주. 가슴이 피로 물들어 있고. 품에는 아기를 안고 있다. 강보에 쌓인 아기는 기절한 상태.

노경주의 모습 크로즈 업

살인객주; [제수씨!] 급히 달려가고

노경주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노경주와 청풍의 상태를 살핀다.

강보에 싸인 아기 청풍의 모습

살인객주; (청풍(淸風)이는 수혈이 짚여 잠이 든 것뿐이지만...) 청풍을 보고. 이어

노경주의 모습 크로즈 업. 가슴이 피로 물들어 있는데. 옷이 터져 나간 안쪽에 손바닥 자국이 나있다.

살인객주; [제수씨는 마교의 십대절기 중 하나인 절맥혈장(絶脈血掌)에 당했다!] 분노하며 노경주의 손목을 잡아보고

살인객주; [마교의 최강자들인 삼태상(三太相)이나 십대마왕(十大魔王)이 직접 쳐들어왔었구나.] 분노하며 진맥하고. 잠시 후

살인객주; (틀렸다.) 절망

살인객주; (절맥혈장에 당해 온몸의 경맥이 다 끊어졌다.) (잠시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징! 노경주의 손목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고. 빛이 발해진다.

그 빛이 팔을 타고 노경주의 상체로 이동하고. 그러자

쿨럭! 피를 토하는 노경주. 이어

천천히 눈을 뜨는 노경주

살인객주; [제수씨!] 노경주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살인객주; [노부가... 노부가 너무 늦게 왔소이다.] 눈 시울 붉히며 비통하게

노경주; [그런... 그런 말씀 마셔요.] 애잔하게 웃고

노경주; [우리 아들... 청풍이를 아주버니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는 걸요.] 춤에 안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고

살인객주; [청풍이를... 이 늙은이의 핏줄인 양 지켜드리겠소이다.] 무릎 꿇은 채 맹세하고

노경주; [그리 말씀해주시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요.] [하온데...]

노경주; [염치없지만... 부탁을 한 가지 드리겠어요.]

살인객주; [말씀하시지요.]

노경주; [청풍이를... 무림인으로... 키우지는 말아주세요.] 아들을 내려다보고

살인객주;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당황

노경주; [강호에 발을 들여놓으면... 반드시 은원의 덫에 걸리지 않을런지요?] 애잔하게 웃으며 아들을 보고

살인객주;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감

노경주; [저의 친정 신장곡(神匠谷)은 무림인들의 탐욕으로 멸문지화에 가까운 참상을 입었고...]

노경주; [세상을 지켜온 나한원도 결국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는지요?]

살인객주; (부인할 수가 없구나.) 한숨

노경주; [이 계집의 단 한 가지 소원은... 우리 청풍이가... 평온한 일생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아들의 뺨을 쓰다듬고. 그러다가

스륵! 힘을 잃고 떨어지는 노경주의 손

살인객주; [제수씨!] 다가앉으며 노경주의 손목을 잡아보지만

살인객주; (소천했구나.) 탄식하며 손을 떼고. 이어

살인객주; [부디 영면하시오!] 포권하고

<제수씨의 유언은 살인상단(殺人商團의 단주 살인객주(殺人客主)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이루어드릴 테니...> 현장 배경으로 살인객주의 맹세

 

#2>

<-십오 년 후> 거대한 강을 끼고 세워진 대도시. 해가 서쪽으로 기운 저녁 무렵

<-금릉(金陵)> 위 도시를 배경으로 나레이션. 어느 웅장한 장원이 보인다. 관부다. 금릉을 다스리는 금릉부다. 높은 담장을 따라 여러 대의 마차들이 줄 지어 서있다. 짐 싣는 마차가 아니라 사람이 타는 마차.

금릉부의 웅장한 정문. 마차 몇 대가 동시에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웅장한데. 정문 위에는 <金陵府>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관병들이 통제하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 안을 기웃거린다. 여자들도 많이 끼어있다. 모두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 사람들 뒤로 담장을 따라 마차들이 즐비하게 서있고.

보부상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금릉부 입구로 다가오고

사내1; [여긴 금릉을 다스리는 관청 금릉부(金陵府)잖아!]

사내2; [뭔 일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지?] 다가가고

사내1; [마차들도 많이 대기하고 있구만.] 담장 아래 줄 지어 서있는 마차들을 보고

입구로 다가가는 두 놈.

사내1; [금릉부에서 뭔 볼거리라도 생긴 거요?]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한명에게 다가가 묻고. 나이 지긋한 중년 사내다. 뭔가 아는 게 많아 보이는 인상

사내3; [오늘 향시(鄕試)가 있었소.]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보고

사내1; [오오! 과거시험이 있었구만.] 놀라는 척

사내2; [그래서 응시생과 관련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었군.] 호들갑

사람들 틈에 끼어있던 죽립 쓴 키큰 여자가 사내들을 힐끔 돌아본다. 도도한 인상의 20대 중반쯤의 여자. 여자의 이름은 벽세경. 천하제일의 부자인 황금전장의 장녀다. 동생인 벽세천이 과거에 응시해서 몰래 지켜보는 중이다. 벽세경의 오른손 중지에는 큼직한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다. 나중에 쓰이는 아이템.

사내3; [금릉은 남경(南京)으로도 불리는 중요한 고장이오.] [덕분에 금릉에서 치러지는 향시는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소.] 목을 빼서 앞을 보며

사내1; [우대라면 어떤...]

사내3; [본래 과거시험은 동시(童試), 원시(院試), 향시, 회시(會試), 전시(殿試)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소.]

사내2; [복잡하구만.]

사내3; [그중 가장 중요한 시험이 북경(北京)에서 치러지는 회시오.] [회시에 합격해야 중앙의 정계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오.]

사내1; [전시가 마지막 단계라고 하지 않으셨소?]

사내3; [전시는 회시의 합격자들이 황제에게 자기 자랑하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오.] 시큰둥

사내1; [황제를 직접 만날 정도면 시험이라고 할 수도 없겠군.] 끄덕

사내2; [금릉의 향시가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하셨소만...]

사내3; [금릉에서는 동시나 원시를 치르지 않소.] [동시와 원시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향시에 응시할 수 있는 거요.]

사내1; [시험 한번으로 단박에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도 있겠구만!] 짝! 알아차리고 손뼉을 치고.

사내2; [합격하기만 하면 말 그대로 일확천금(一攫千金), 가문융성(家門隆盛)의 기회를 잡겠어.]

사내3; [그래서 강남의 수재라면 누구나 금릉의 향시에 목을 매고 있소.] 목을 빼서 금을부 안쪽을 기웃거리며

사내2; [향시는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사내3을 따라서 안쪽을 기웃거리며 사내3에게 묻고

사내3; [드디어 채점이 끝나고 등수를 발표할 때가 임박한 것 같소.] 목을 빼어 안을 들여다보며 말하고

 

#3>

금릉부 정문 안쪽. 넓은 광장인데 그곳에 수백 명의 서생들이 앉은뱅이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 나잇대가 다양하다. 어린 아이부터 늙은 서생까지. 하지만 대부분은 낙담한 표정들이다.

마당 끝의 웅장한 건물. 건물 앞에 놓인 책상들 십여 개. 응시생들 앞의 앉은뱅이책상과 달리 크고 화려하다. 그 책상들 마다 나이 든 관리들이 한명씩 앉아서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다. 책상에는 시험지가 수북하고. 관리들 앞에 세 명의 소년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있다.

세 소년 들 중 가운데에 서있는 건 청풍이다. 이때 나이는 16세. 차림새는 전형적인 학생의 모습. 복장도 소박하고.

청풍의 우측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소년이 서있다. <폭풍신마>에 나온 벽세천 캐릭터. 잘 생겼지만 교만한 인상. 천하 삼대부자가문 중 하나인 황금전장 장주의 아들이다. 무맹사신재 중 벽세황의 배다른 동생. 벽세천이 정실 소생이고 벽세황은 첩이 낳은 서자다.

청풍의 좌측에는 교활한 인상의 소년이 서있다. 이름은 주문충. 벽세천의 똘마니다.

 

#4>

사내3; [합격, 불합격은 가려졌고...] 마당에 앉아 낙담해하는 서생들을 보며

<지금은 상위 세 명이 등수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청풍 일행을 배경으로 사내3의 나레이션

사내1; [셋 다 똘망똘망하게 생겼구만.]

사내2; [형장이 보기에 누가 장원(壯元;일등급제)이 될 것 같소?] 사내3에게

사내3; [원래는 벽세천(碧世天) 공자가 유력했소..]

[...] 뭔가 생각하는 죽립 쓴 벽세경

사내1; [벽세천이 누구요?]

사내3; [시험관들 앞에 서있는 세 명 중 맨 우측이 벽세천공자요.] 말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천하삼대 부자가문 중 하나인 황금전장(黃金錢莊)의 차남인데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소.> 벽세천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벽세천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내1; [저 분 공자께서 황금전장의 자손이셨구려.] 놀라고 존경하는 표정

사내2; [황금전장이라면 황실도 종종 신세를 진다는 부자 중의 부자 가문 아니오?] 침 꼴깍 삼키고

사내3; [장사하시는 분들이라 잘 아시는구려.] 사내1과 사내2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피며 말하고

사내1; [장사치면서 황금전장을 모를 수는 없소.] 엄숙한 표정

사내2; [관부에는 죄를 지어도 황금전장에는 절대 죄를 짓지 마라!] [이게 우리 장사치들 사이에 전해지는 불문율이오.] 두 손 모아 포권하는 시늉까지 하고

사내1; [황금전장에 죄를 지은 장사치는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오.]

소리없이 한숨 쉬는 벽세경

사내3; [황금전장을 잘 아신다니 설명이 쉽겠소이다.] 표정을 엄숙하게 하며

사내3; [명성이나 가문으로 보나 벽공자가 장원이 될 게 분명한 시험이었소이다만...] 시험관들쪽을 보며

뭔가 고민되는 표정으로 의논을 주고 받는 시험관들

사내1; [시험관들이 고민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군.]

사내2; [벽세천공자보다 시험을 더 잘 본 자가 있겠소.]

사내3; [셋 중 가운데 서있는 이청풍(李淸風)이란 아이가 그 장본인일 거요.] 끄덕

<이청풍은 금릉의 유서 깊은 서점 서림당(書林堂) 주인의 손자인데 역시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났었소.> 셋 중 가운데 서있는 청풍을 배경으로 사내3의 말 나레이션. 청풍은 좀 심드렁한 표정이고

사내3;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서림당이 보유한 수천 권의 책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고 있다고 할 정도요.]

사내1; [수천 권의 책을 외우고 있다?] [괴물이 따로 없구만.]

사내2; [우리 같은 범인들은 책 한권 내용도 다 외우기 어렵지.]

[...!] 고개 끄덕이는 벽세경

사내3; [수재로 소문났지만 이청풍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소.] [당연히 과거시험 같은 것에도 흥미가 없을 줄 알았소.]

사내1; [그랬는데 느닷없이 향시에 응시했겠소.]

사내3; [벽세천공자와 이청풍!] [용호상박이라 할만한 수재들끼리의 대결이 벌어진 거요.] 흥분된 표정

사내2; [흥미진진하구만.]

사내1; [또 한명은 누구요?]

사내3; [주문충(朱文忠)이라고 역시 수재로 소문이 났던 아이요.]

<하지만 운 나쁘게 벽세천공자, 이청풍이란 괴물과 동년배로 태어났소. 아마 두각을 나타내는 건 어려울 거요.> 벽세천의 눈치를 보는 주문충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사내1; [어쨌거나 장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벽세황공자겠소.]

사내2; [일개 서점 주인의 손자와 황금전장 차남은 존재감부터 비교가 안되지.]

사내3;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소.]

사내1; [어째서요?]

사내3; [금릉에서 치러지는 향시가 워낙 중요한 탓에 북경으로부터 직접 시험관들이 파견되기 때문이오.]

사내1; [황금전장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깨닫고

사내2; [천하제일의 전장이니 뭐니 해도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는 그저 돈놀이하는 장사치일 뿐이지.]

쓴웃음 짓는 벽세경. 그때

사내3; [결정이 난 것 같소.] 안쪽을 보며 흥분

다른 사람들과 벽세경도 안쪽을 보고

 

#5>

시험관들 중 중앙에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난다. 이하 시험관1로 표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고

[저분은 한림원(翰林院)의 학사라지?] [한림원 학사는 황제 폐하와 수시로 독대할 수 있는 정계의 유력자고...] 종이를 들고 일어나는 시험관1을 배경으로 사람들 웅성

시험관1; [숙의 끝에 장원, 방안(榜眼;2등급제), 탐화(探花;3등급제)를 결정했소.] 종이를 보며 말하고

시험관1; [금번 향시의 장원은...]

모두가 긴장하며 보고

벽세천과 주문충도 긴장. 하지만 청풍은 여전히 심드렁

벽세경도 두 손을 꼭 모으며 긴장.

시험관1; [이청풍! 축하하네.] 청풍에게 웃으며 말하고

와락 이지러지는 벽세천의 얼굴.

주문충은 눈을 치뜨고

 

#6>

[와아!] [서림당이 손주가 장원이다!] [축하드립니다 이공자!] 금릉부 밖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 환호하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한숨 쉬는 벽세경

사내1; [이변이라면 이변이라 할만한 결과로군.]

사내2; [황금전장의 재력도 관부에는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었어!]

사내3; [이청풍은 원래 영특하기로 이름났던 아이요.] [이번 향시의 장원을 차지했다 해도 뒷말은 안 나올 거요.] 끄덕

 

#7>

시험관1; [자네의 답안은 노부 우문술(宇文述)이 칠십 평생 본적이 없는 명문이었네.] [앞으로 기대하겠네.] 종이를 내려놓으며 흐뭇.

다른 시험관들도 끄덕이고

청풍; [감사합니다. 여러 사부님들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입니다.] 시험관들에게 포권하고

인상이 우그러진 채 청풍을 노려보는 벽세천

시험관1; [향시에서 장원 급제했으니 회시 준비를 하게나.] [두 달 남짓 남아서 시간이 충분하진 않을 게야.]

청풍; [성심(誠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그때

주문충에게 고개짓을 하는 벽세천

주문충; (준비했던 그걸 하자?) 긴장하고

째려보는 벽세천

주문충; (어쩔 수 없군. 벽세천에게는 받아먹은 게 많으니...) 쓴웃음 지으며 왼손을 오른쪽 쇄에 집어넣고

시험관1; [장원은 발표했고...] 다시 종이를 보며

왼손을 오른쪽 소매에서 꺼내며 앞을 보는 주문충.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다.

시험관1; [차석인 방안은 벽세천, 삼등급제 탐화는 주문충이네.] 종이에서 시선을 떼며 벽세천과 주문충을 보고

주문충; [감사합니다.] 포권하고. 벽세천은 뚱해있고. 이어

주문충; [축하한다 이청풍!] 오른손으로 청풍의 왼팔을 잡고. 간살스럽게 웃으며

그걸 곁눈질하는 벽세천

주문충; [이번에는 내가 졌어. 앞으로도 선의의 경쟁을 해보자구.] 슥! 왼손을 재빨리 청풍의 저고리 사이로 넣었다 빼고

곁눈질로 청풍과 주문충을 보며 눈 번득이는 벽세천

청풍; [주형도 축하드립니다.] 형식적으로 주문충에게 답례하고

히죽 웃는 벽세천

시험관1; [벽세천, 자네도 한 마디 하지 않겠는가?] 그런 벽세천에게 말하고. 그러자

벽세천; [여러 사부님들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포권하고

벽세천; [하오나 후진은 오늘 채점하신 결과에 이의가 있습니다.] 굳어진 얼굴로 말하고

 

#8>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벽공자는 이청풍의 장원급제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정문 주변 사람들 어리둥절. 웅성거리고. 그 사이에 벽세경이 있고

벽세경; (세천이 저 녀석 설마!) 눈 부릅. 불길한 예감

 

#9>

시험관1; [벽세천! 노부들의 채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노려보고

벽세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부

벽세천; [여러 사부님들의 채점은 당연히 공정했을 것입니다.] [다만!]

벽세천; [이청풍! 저 작자는 답안 작성시 부정을 자행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청풍에게 삿대질. 찡그리기만 하고 반박은 하지 않는 청풍

 

#10>

[그런!] [이청풍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사실이라면 국기를 어지럽힌 중죄인데...] 사람들 경악하고. 벽세경도 경악하고

벽세경; (세천이 놈이 초조해서 일을 저질렀구나.) 초조. 다급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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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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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 겸 홈페이지인 다음카페 <와룡소>에서 설맞이 이벤트를 진행중입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필부 와룡이 푸른 용의 해에 처음으로 인사올립니다.

 

또 다시 설이 찾아왔습니다.

올 때마다 나이를 한살씩 안기니 설이라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군요.

매년 추석과 설에 진행하는 이벤트를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푹 쉬고 즐기시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드리라고 각 게시판의 열람등급을 한시적으로 조정합니다.

기간은 오늘(2024년 2월 8일)부터 연휴가 끝나는 다음날 (2024년 2월 13일)까지입니다..

열람등급의 구체적인 조정 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연공관;   무사 => 낭인

복마전;   당주 => 무사

지밀보고; 호법 => 당주

 

회원등급 미달로 인해 열람하지 못하셨던 글들을 읽으시며 설날 연휴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해피 설!

 

와룡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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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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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난감한 명령

 

 

 

검의 서슬(날카로운 기운)을 검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 검기다.

검기를 일으킬 수 있으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적을 벨 수 있다.

물론 검법을 수련했다고 누구나 검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검과 한 몸이 되는,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그 검기를 극한까지 응축시키면 검강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검기의 결정체인지라 검강에 베어지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호신강기이든, 단단하기로 소문난 한철(寒鐵)이든 검강을 막지 못한다.

심지어 귀신이나 혼백도 벨 수 있다고 한다.

능풍운은 흑룡선단의 해적들이 하나같이 일격에 몰살당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자들 중 누구도 흑의여인이 발휘한 검강을 막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능풍이다. 검강에 스치면 간단히 토막 쳐질 것이다.

절체절명!

말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였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너는....]

갑자기 흑의여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비명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운기조식 하던 그녀는 누군가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었다.

한데 검강을 뽑아낸 검으로 그자의 목을 치려던 흑의여인은 아연실색했다.

상대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소년이어서가 아니었다.

소년의 얼굴은 흑의여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떤 인물을 빼닮았다. 그 인물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상사병까지 앓았었다.

흑의여인이 능풍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였다.

(안돼!)

흑의여인은 검에 주입했던 내공을 사력을 다해 거두어 들였다.

츠읏!

그러자 검 끝에서 이장 넘게 뻗어 나왔던 검강이 눈 녹듯 사라졌다.

퍼억!

직후 검은 흑의여인의 손에서 빠져나와 한쪽 선실 벽에 꽂혔다. 내공을 억지로 거두자 경맥이 강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 바람에 손아귀에서 힘이 빠진 것이다.

[컥....]

검을 놓친 흑의여인은 단말마같은 비명을 토하며 뒤로 넘어졌다.

[아주머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능풍운은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갔다.

[끄윽...]

침대에 널브러진 흑의여인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검은색 저고리 속에서는 한 쌍의 푸짐한 살덩이가 갓 쑨 묵처럼 요동을 친다.

얼굴을 가린 면사 아래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흑의여인은 성치 않은 몸 상태에서 내공을 억지로 역류시켰다. 그 충격으로 인해 경맥이 여러 곳 손상되며 내상을 입고 말았다.

침대로 달려간 능풍운이 급히 흑의여인을 부축하려할 때였다.

[내... 내 몸에 손대지 마라.]

흑의여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괜... 괜찮으신지요?]

능풍운은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

[물, 물러서라.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흑의여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검은 옷에 감싸인 풍만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으며 얼굴을 가린 면사 아래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말과 달리 그녀의 몸 상태는 결코 괜찮지 않았다.

(진... 진기가 흩어지는 바람에 겨우 억눌러놨던 최음제(催淫劑)의 독성이 폭주하고 있다.)

흑의여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숨은 거칠며 면사 위로 드러난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사실 흑의여인은 강렬한 최음제에 중독당한 상태였다.

그녀에게 최음제를 쓴 자는 선실 입구에 죽어있는 음침한 인상의 서생이었다.

 

-음양수재(陰陽秀才)!

 

흑룡선단 단주 독안용왕의 오른팔이다.

박식하고 꾀가 많아 흑룡선단의 군사 역할을 맡고 있는 그자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지나치게 색을 밝힌다는 게 그것이었다.

음양수재는 어떤 여자든 일단 회가 동하면 기어코 욕심을 채우곤 했다. 상대가 유부녀이든 처녀든 가리지 않고 범했다.

비구니나 여자도사라도 거리낌 없이 욕정의 제물로 삼았다.

음양수재에게 신세를 망친 여자는 수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던 차에 대단한 명성과 미모의 소유자인 흑의여인이 남해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흑의여인을 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흑의여인의 무공이 대단해서 일단 무력화시키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결국 함정에 빠진 흑의여인은 상당량의 최음제를 복용하고 말았다.

음양수재가 쓴 최음제는 독성이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중독당하면 욕화에 휩싸여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 오직 욕정의 해소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흑의여인이 최음제를 복용한 사실을 확인한 음양수재는 본색을 드러냈다. 저항력을 상실한 그녀를 겁탈해서 욕심을 채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능풍운이 본 대로였다.

음양수재는 물론이고 그 자가 이끌고 해적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최음제에 중독되어 제 정신이 아니었음에도 흑의여인은 배안의 모든 인간들을 몰살시켜버렸던 것이다.

음양수재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결말이었다.

 

(틀... 틀렸다!)

흑의여인은 절망했다.

비록 음양수재가 쓴 최음제의 독성이 지독하긴 했어도 해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내공으로 최음제의 독성을 조금씩 태워버리면 되었었다.

대략 한 시진쯤 지났으면 완전히 최음제의 독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내공을 역류시키는 과정에서 입은 내상으로 인해 최음제의 독성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욕정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온몸으로 퍼져간다. 펄펄 끓는 기름을 삼킨 듯 몸속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고 정신은 아득해져갔다.

사내!

욕정을 해소시켜줄 사내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대로 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발정 난 짐승처럼 아무 사내에게나 마구 몸을 내돌리게 될 것이다.

[어디가 불편한지 말씀해주십시오.]

흑의여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걸 알아차린 능풍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러가라고 했다.]

흑의여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능풍운의 몸에서 느껴지는 수컷의 냄새가 그렇잖아도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다.

능풍운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노려보는 흑의여인의 눈에 핏발이 서있어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그저 아주머니를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능풍운은 흑의여인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움이 필요치 않으시다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능풍운은 흑의여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섰다.

그때였다.

[기, 기다려라!]

흑의여인의 급히 불러 세웠다.

[분부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선실을 나가려던 능풍운은 흑의여인을 돌아보았다.

(닮았어. 그 무정한 사내와 정말 닮았어.)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능풍운을 훑어보는 흑의여인의 숨결이 가빠졌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애송이는 자신으로 하여금 상사병을 앓게 했던 어떤 사내를 빼닮았다.

몇 년만 더 지나면 능풍운은 그 사내의 판박이가 될 것이다.

[이름... 이름이 무엇이냐?]

흑의여인은 달뜬 목소리로 물었다.

[능풍운이라고 합니다.]

[능.... 능씨란 말이지?]

능풍운의 대답을 들은 흑의여인의 풍만한 몸에 세찬 전율이 치달렸다. 애송이는 그녀의 애를 태웠던 사내를 닮았을 뿐 아니라 성도 같았다.

(틀림없다. 저놈은 그 사람의 아들이다. 어떤 사연으로 일초무학인 채 남해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흑의여인은 능풍운의 정체를 확신했다. 피로 이어지지 않고서는 저렇게 닮을 수는 없다.

능풍운이 자신으로 하여금 상사병을 앓게 했던 사내의 아들이라 생각하자 안도감과 망설임이 함께 밀려들었다.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면 몸을 허락할 수도... 아니야! 어떻게 그 사람의 아들과 그런 짓을...)

흑의여인은 격렬한 갈등에 휩싸였다.

제어가 불가능해진 욕정을 해소하려면 사내에게 몸을 맡겨야만 한다.

그렇다고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여는 건 흑의여인의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길거리 창녀 신세가 될 바에는 죽어버리는 게 좋다.

그랬는데 능풍운이 자신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때 사모했던 사내를 빼닮은 소년에게라면 몸을 허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짝 사랑했던 사내의 아들과 그 짓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흑의여인의 갈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몸 상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깊은 곳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리고 머릿속은 오직 욕정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무슨 추태를 부리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결국 흑의여인은 이성이 남아있을 때 결단을 내렸다.

[정말, 나를 도와주겠느냐?]

이미 초점이 사라지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능풍운을 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능풍운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먹이처럼 훑어보는 흑의여인의 시선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몇, 몇 살이냐?]

흑의여인은 헐떡이며 다시 물었다.

[열여섯 살입니다만....]

흑의여인이 갑자기 나이를 묻자 능풍운은 의아해하면서도 숨김없이 대답했다.

[열여섯... 겨우 열여섯살이란 말이지?]

능풍운의 나이를 안 흑의여인은 당혹이 서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능풍운이 건장한 체격과 달리 아직 어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열여덟 살 쯤은 되었을 것이라 짐작했었는데 무려 두 살이나 더 어리다.

(내가 살자고 아들, 아니 손자뻘인 저 아이에게 몸을 허락해도 되는 걸까?)

흑의여인은 다시 한 번 갈등에 휩싸였다.

사실 그녀는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다. 오십을 넘긴지도 몇 년이나 지났다. 만일 평범한 인생이었다면 능풍운 정도의 손자를 봤을 수도 있다.

헌데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손자뻘인 소년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이번의 갈등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어느덧 욕정은 그녀의 조금 남은 이성마저 태워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능풍운에게 몸을 허락해야하는 상황이 닥칠 것이다.

[날 도와줄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천지신명께 맹세해라. 날 돕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흑의여인은 충혈된 눈으로 능풍운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뜻밖의 요구에 능풍운은 움찔했다.

도와주려는데 설마 천지신명께 맹세하는 요구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소생 능풍운은 부인을 위해 어떤 짓이든 할 것을 하늘과 땅에 계신 여러 신명께 맹세합니다.]

능풍운은 엄숙하게 맹세했다.

[지금의 그 맹세... 잊지 마라.]

능풍운의 맹세를 들은 흑의여인은 안도하며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가... 명령하겠다. 이리 와서... 나를 범해라.]

[뭐, 뭐라고요?]

능풍운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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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난파선에서 만난 마녀

 

 

 

뱃전에 선 능풍운은 수평선 쪽을 살피고 있었다.

[난파선인가?]

손을 이마에 댄 능풍운의 미간이 모아졌다.

시간은 막 오시(午時)를 지났다.

능풍운이 있는 곳은 해복진에서 남동쪽으로 오십여 리쯤 떨어진 해상이다.

그물을 내리던 능풍운은 수평선에 작은 점 하나가 떠있는 걸 발견했다.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그 점은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다.

능풍운은 직감적으로 그 점이 추진력을 잃은 배임을 알아차렸다.

(가볼까?)

호기심이 일었다.

무림인들이 수십 명 죽고 여러 척의 배가 난파당했다는 왕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물을 치고 물고기가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갔다 오자.)

능풍운은 빠르게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그물에는 말린 박에 밀납을 발라 만든 부표가 여럿 달려 있다. 부표들은 그물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그물 친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부표들이 제대로 그물을 지탱하는 것까지 확인한 능풍운은 난파선이 보이는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끼익 끽!

구릿빛 팔의 근육이 노를 저을 때마다 굼실거린다.

촤아...!

노가 저어질 때마다 뱃전의 물살이 좌우로 쩍쩍 갈라졌다.

능풍운을 태운 조각배는 경쾌하게 파도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얼마나 갔을까?

작은 점으로만 보였던 물체가 뚜렷하게 형태를 드러냈다.

(역시 난파선이었다.)

능풍운의 눈이 반짝였다.

점이었던 물체는 길이 이십여 장에 수면으로부터 뱃전까지의 높이가 삼장이나 되는 거대한 배였다.

배 위에는 이층누각까지 세워져 있었다.

뱃사람인 능풍운도 본 적이 없는 크고 화려한 누선(樓船;누각이 있는 배)이다.

누선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선체 아래쪽이 깨져서 바닷물이 스며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누선에 가까이 접근한 능풍운은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괴괴한 적막만이 거대한 배를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올라가 보자.)

능풍운은 뱃전 밖으로 늘어져 있는 밧줄에 타고 온 조각배를 묶었다.

그리고는 밧줄을 잡고 누선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헉....]

이윽고 누선의 갑판 위로 얼굴을 내밀던 능풍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밧줄을 놓치고 바다에 떨어질 뻔 했다.

누선의 갑판이 흥건한 피와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끔... 끔찍하구나.]

진저리를 치면서도 능풍운은 누선으로 올라갔다. 강렬한 호기심이 공포와 혐오조차 눌러버렸다.

그래도 갑판에 올라서자마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야했다. 너무도 역겨운 피비린내에 구토가 치밀어 오른 때문이다.

능풍운은 사람 시체를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난파를 당해 익사한 시체가 종종 해변으로 밀려오곤 한다. 그 시신들을 거두고 안장해주는 일은 바닷가 사람들의 일상 중 하나다.

능풍운도 마을 어른들을 도와서 익사한 시신을 수습하곤 했었다. 그래서 시체를 보고 만지는 것쯤은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몸서리가 쳐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누선의 갑판 위에 펼쳐진 지옥도는 상상조차 못해본 것이었다.

갑판 위에 널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는 그 형상이 실로 끔찍했다.

팔 다리가 잘려나간 자,

목이 동체와 분리된 자,

허리가 끊어져 내장과 피를 꾸역꾸역 쏟고 있는 자...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시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일격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시체에 남아있는 상처는 한 곳에 불과했지만 예외없이 치명적이었다.

(무섭구나. 인간이 어찌 이토록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능풍운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면서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발치에 둥그런 동패(銅牌)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동패를 집어들었다.

피에 흠씬 젖어있는 동패 전면에는 정교한 교룡(蛟龍)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흑룡선단의 표기 아닌가?)

교룡 문양을 본 능풍운은 흠칫 놀랐다.

 

-흑룡선단(黑龍船團)!

 

남해 일대를 횡행하는 해적들 중 가장 규모가 큰 해적 무리다.

수백 척의 배를 지녔다는 흑룡선단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바다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세력이 전무한 실정이다. 대륙을 구석구석까지 장악하고 있는 황실의 권위도 흑룡선단에게는 미치지 못할 정도다.

흑룡선단의 단주는 독안용왕(獨眼龍王)이라는 인물이었다.

해적무리의 수괴답게 독안용왕은 수중공부(水中功夫)에 탁월하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그자를 당해낼 상대가 없다고 할 정도다.

독안용왕 휘하의 흑룡선단은 먼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아왔다. 대륙을 통일해서 한창 기세가 등등해진 황실과 충돌해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풍운도 흑룡선단의 이름만 들었을 뿐 직접 조우한 적은 없었다.

그 흑룡선단의 표기가 난파선에서 발견된 것이다.

능풍운은 다른 시체에서도 흑룡패(黑龍牌)를 몇 개 더 찾아냈다.

시체들이 흑룡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 누선은 흑룡선단 소속의 해적선임에 틀림없다.

(누가 흑룡선단의 해적들을 몰살시켰을까? 바다에서는 무적이라 불리던 자들인데...)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시체들 사이를 지나 이층 누각의 일층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 달려있던 튼튼한 문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어져있다.

끼익!

능풍운은 반쯤 잘려나간 문을 조심스럽게 옆고 선실로 들어섰다.

(여자!)

한데 선실로 들어서던 능풍운의 눈이 치떠졌다.

널찍하고 호화롭던 선실 역시 폭풍이 스쳐 지나간 듯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 선실에서 능풍운은 처음으로 생존자를 발견했다.

[...]

선실 끝에 놓인 널찍한 침대에 한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두터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나이는 물론이고 용모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옷 밖으로 드러난 풍만한 몸매를 통해 중년에 접어든 여인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색 옷 때문에 소매 밖으로 드러난 양손이 눈부시게 희어 보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흑의여인의 허벅지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가로 놓여있었다. 본래 새파랬을 검날은 피를 머금어 검붉게 변해있었다.

(저 여인이 이 배의 선원들을 몰살시킨 장본인이겠구나.)

흑의여인의 허벅지 위에 놓인 피 묻은 검을 본 능풍운은 전후 사정을 짐작했다.

(여자의 몸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명의 사내를 죽이는 게 가능했구나.)

상황을 파악한 능풍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연약했다. 당연히 여자가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놀라움과 충격을 억누르며 능풍운은 선실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선실 안에는 흑의여인 외에도 세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자들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는 소매가 없는 가죽옷을 걸친 사내 두 명이 쓰러져 있다.

흉포하고 거친 인상을 지닌 자들인데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인 듯 얼굴이 비슷했다.

그자들은 허리가 잘려 네 토막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은 선실 입구, 즉 능풍운의 발치에 쓰러져 있다. 서생 차림을 한 그자는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하지만 준수한 얼굴과 달리 음산한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능풍운은 서생차림의 사내가 심기가 아주 깊은 모사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서생은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서생이 입은 치명상은 목에 난 자상이었다. 그자의 목은 절반 넘게 베어져 대량의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서생의 오른손에는 부채가 꽉 쥐어져 있었다.

부챗살이 투명한 옥으로 만들어진 그 부채는 일견하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능풍운은 서생의 손에서 부채를 빼내어 펼쳐 보았다.

부르르!

직후 능풍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음양선(陰陽扇)>

 

부채 상단에 그같은 글이 적혀 있으며 그 아래로 아홉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데 그 그림이란 것이 실로 낯 뜨거웠다. 발가벗은 남녀가 각각 다른 체위로 뒤엉켜 있는 춘화(春畫)였던 것이다.

춘화는 그 묘사가 더할 수 없이 정교하다.

교합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듯 생생하다.

여인의 아랫도리에 핏줄이 툭툭 불거진 흉측한 살덩이가 결합되어 있는 것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너무도 음란하고 망측한 그림을 본 능풍운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못 볼 것을 보았다.)

그는 급히 부채를 접었다.

하지만 가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해서 능풍운은 남녀관계에 무지하다. 당연히 여자의 알몸을 본 적도 없다.

그런 그에게 적나라하게 묘사된 춘화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벌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음양선이란 부채에 그려진 아홉 폭의 춘화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단순히 춘화의 묘사가 떠오른 정도가 아니었다.

 

-환희음양법(歡喜陰陽法)!

 

첫 번째 그림 위에 적혀있던 춘화의 제목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추잡한 물건이다.]

휘익!

화가 치민 능풍운은 음양선을 선실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시선을 흑의여인에게로 돌렸다.

(이 여자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죽은 건 아닌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흑의여인을 살펴보며 능풍운은 의아해졌다,

무공에 문외한인 능풍운이다.

흑의여인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운공요상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번-쩍!

굳게 감겨있던 흑의여인의 눈이 면사 위로 치떠지며 번개 치는 듯한 안광이 작렬했다.

(헉!)

능풍운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스악!

그 직후 능풍운은 흑의여인의 새하얀 손이 검을 잡더니 자신을 향해 검을 그어내는 걸 보았다.

그의 눈에는 흑의여인의 손짓이 느린 동작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눈으로는 볼 수 있어도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을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흑의여인의 느린 듯한 일검은 능풍운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제압하며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흑의여인과의 거리가 이장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척이 채 안되는 검에 베일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능풍운의 착각이었다.

쩌엉!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의여인이 휘두르는 검이 쭉 늘어났다. 반투명하게 보이는 검날이 무려 이장 가까이로 길어진 것이다.

실제로 검날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검날에서 거의 고형화 된 검기(劍氣)가 뿜어진 것뿐이다.

 

-검강(劍罡)!

 

그렇다! 흑의여인은 검강을 뽑아내 능풍운을 죽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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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기인의 선물

 

 

-낭왕 혁련사!

 

음산(陰山)과 관외(關外) 일대에서 패자로 군림해온 인물이다.

늑대의 왕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수천 마리의 늑대를 수족처럼 부린다.

게다가 늑대의 무리와 섞여 살며 독특한 무공을 창안하여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천랑마검은 바로 그 낭왕 혁련사의 제자였다.

물론 그자가 자랑하는 천랑십이식도 낭왕 혁련사가 창안한 검법이다.

무림인들이 천랑마검을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가 낭왕 혁련사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쯧쯧, 혁련사, 그 덜 떨어진 놈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송이를 무림에 내보냈군.]

마의노인은 천랑마검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마의노인은 관외 무림의 패자인 낭왕 혁련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욕했다.

그러나 마의노인이 스승을 욕하는 데에도 천랑마검은 찍소리도 못냈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천랑마검의 그같은 모습이 능풍운을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노인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기에 저 작자는 스승이 욕을 먹어도 억지웃음만 짓고 있단 말인가?)

능풍운은 새삼 마의노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의노인은 평범한 촌노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의노인의 눈동자가 녹색을 띠고 있다는 정도였다.

[하... 하교가 없으시다면 후배는 이만....]

천랑마검은 마의노인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있다면 굳이 더 잡지는 않으마.]

마의노인은 곰방대의 재를 능풍운의 뱃전에 탁탁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감사합니다.]

안도한 찬랑마검은 급히 마의노인에게 포권을 한 후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너를 그냥 보내면 섭섭하지 않겠느냐?]

그때 마의노인이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안도하던 천랑마검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으로 질렸다.

[노부는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어린놈들의 잡기를 재롱삼아 구경하는 게 그것이다.]

마의노인은 근처 어선의 뱃전에 걸터으며 말했다.

(휴... 난 또 뭐라고!)

천랑마검은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이 무서운 노독물(老毒物)은 자기보고 천랑일문(天狼一門)의 독문 검법 천랑십이식을 한 번 펼쳐 보이라는 것이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천랑마검으로서는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그럼 미거하나마 노야의 높으신 안목에 폐를 끼치겠습니다.]

천랑마검은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두 팔을 내려뜨렸다. 굶주린 늑대가 먹이를 덮치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 자세야말로 천랑십이식의 기수식인 아랑출림세(餓狼出林勢)였다.

[....]

능풍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천랑마검을 주시했다.

[카앗!]

다음 순간 천랑마검의 입에서 늑대가 울부짓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쉬학! 파츠츠...

뒤이어 시퍼런 검광(劍光)이 사위를 휘감았다.

섬뜩한 섬광과 날카로운 예기가 빗발치듯 아침하늘을 그어갔다.

천랑마검의 발검(拔劍)은 너무나도 빨라서 언제 검을 뽑아 검법을 시전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노야!]

스-윽!

그러던 어느 순간 검기가 싹 가시며 천랑마검의 모습은 삽시에 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랑십이식을 모두 펼쳐 보인 후 떠난 것이다.

괜히 우물쭈물 하다가는 마의노인이 또 어떤 명령을 내릴지 모른다.

(저것이 무공이란 것이구나!)

능풍운은 멍한 표정인 채 천랑마검이 검법을 펼치던 곳을 보고 있었다.

[모두 몇 가지 변화를 보았느냐?]

그런 능풍운에게 마의노인이 불쑥 물었다.

능풍운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열 두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아홉 개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놈 봐라? 기껏해야 천랑십이식중 삼사식 정도밖에 못 볼 줄 알았는데...)

능풍운의 대답을 들은 마의노인의 노안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노부의 눈이 정확했다. 이놈은 백 년 내 다시없을 천부지재(天賦之才)다!)

능풍운의 빼어난 재질을 확인한 마의노인은 희열과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잘만 다듬으면 철혈대제(鐵血大帝) 능무벽(陵無壁)에 못지않은 거목이 되겠구나!)

마의노인은 내심의 흥분을 숨기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능풍운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름은 풍운이라 하고 성은 능가입니다.]

[능풍운이라....]

마의노인은 능풍운의 이름을 되뇌이며 왠지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능무벽, 그 괴물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마의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능풍운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아비의 이름은 무엇이냐?]

마의노인이 다시 물었다.

능풍운은 마의노인이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능초(陵超)라는 분이신데 제가 어렸을 때 괴질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노부가 잘못 보았는가?)

능풍운의 대답을 들은 마의노인은 눈가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하긴 능가 괴물이 살아 있다면 이미 팔순을 넘었을 테니 이렇게 어린 아들놈을 두었을 리가 없겠지!)

염두를 굴린 노인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꽤 귀찮게 굴었지?]

[아닙니다.]

[허허허, 마음에 없는 소리할 것 없다. 예쁜 계집이라면 몰라도 노부같은 늙은이와 노닥거려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마의노인의 말에 능풍운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노부는 갈황(葛煌)이라는 늙은이다. 어린 것들은 노부를 노독물(老毒物), 또는 천독노조(千毒老祖)라 부르며 상종하지도 않으려 하지.]

마의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 노인의 이름을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그 즉시 아랫도리를 적시며 달아날 것이다

 

-천독노조 갈황!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나이 이미 이갑자(二甲子)를 넘긴 그는 천독곡(千毒谷)이란 문파의 주인이기도 하다.

무림에 적을 둔 인생치고 천독노조를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천독노조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전설 속의 고금제일독종(古今第一毒宗) 만독조종(萬毒祖宗)의 진전을 잇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천독노조는 마음만 먹으면 중원의 무림인 모두를 독살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독 다루는 재주, 용독술(用毒術)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용독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천독노조의 독공(毒功)이다.

천독노조는 백년 넘는 세월 동안 맹독을 상식(常食)하며 독공을 쌓아왔다. 그 결과 숨결만으로도 십리내의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히 독(毒)의 제왕(帝王)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 바로 천독노조다.

만일 천독노조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무림은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천독노조에게는 그런 야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천독곡에 칩거한 채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그 무서운 독의 제왕이 이 한적한 어촌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아깝구나 아까워. 무림칠보의 출토가 임박하지만 않았어도 이놈을 제자로 삼아서 물건으로 만들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천독노조는 능풍운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인물들의 가장 큰 소망은 뛰어난 후계자를 얻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친 성취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천독노조도 예외가 아니다. 천고의 기재인 능풍운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쉽고도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을 주마.]

천독노조는 아쉬움을 달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노야.]

능풍운이 난색을 표할 때 천독노조는 품속에서 한 장의 죽편(竹片)을 꺼냈다. 폭이 두 치, 길이 한자 정도의 죽편인데 오래된 물건인 듯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둬라.]

천독노조는 죽편을 능풍운에게 내밀었다.

[노부의 신물이니 곤란한 일이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보여 주거라. 그러면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능풍운은 천독노조가 내민 죽편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값이 나가거나 진귀해 보이는 물건이라면 사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저 대나무 조각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능풍운은 받아든 죽편을 살펴보았다.

죽편 앞면에는 곰방대를 물고 있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천독노조와 닮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죽편 위의 그림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 전에 새겨진 것이다. 천독노조의 모습일 수는 없었다.

앞쪽의 그림을 살펴본 능풍운은 죽편을 뒤집어보았다.

죽편의 뒷면에는 여러 가지 색의 얼룩이 찍혀 있었다. 적(赤), 황(黃), 흑(黑), 자(紫) 등의 색이 뒤섞인 얼룩이다.

(이런 대나무 조각이 무슨 신묘한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능풍운은 죽편을 살펴보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독노조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노야! 긴요하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고맙기는...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천독노조는 곰방대를 뱃전에 탁탁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능풍운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살펴 가십시오.]

능풍운은 천독노조의 등 뒤에 대고 다시 한 번 포권을 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광세의 기연을 만났다는 것을...!

 

<독성죽결(毒聖竹訣)>

 

천독노조가 능풍운에게 준 낡은 대나무 조각의 이름이다.

천독노조는 젊은 시절 어느 산동(山洞)에서 독성죽결을 얻었었다.

독성죽결에는 신묘한 용독심결(用毒心訣)이 숨겨져 있었으며 천독노조는 그 비밀을 풀어내어 천하제일의 독공 고수가 될 수 있었다.

멀어지는 천독노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능풍운은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해가 수평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천랑마검과 천독노조를 상대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햇님.]

능풍운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습관적으로 합장을 했다.

스으... 스으...

점점 강렬해지는 아침 햇살이 바다를 향해 우뚝 선 능풍운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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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몰려든 무림인들

 

 

 

해복진의 포구는 초승달 모양의 만(灣)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평선의 칠 할 이상을 가리고 있는 산맥의 꼬리부분이 난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 대부분을 막아준다.

덕분에 만 안쪽은 늘 호수처럼 잔잔하다.

해변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십여 척의 어선이 눈부신 백사장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혼자, 또는 서너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어선들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날이 완전히 밝았음에도 어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척의 어선들 중 단 한척에만 사람이 올라가 있다.

[어제 그 황새치 녀석이 크긴 컸네.]

건장한 청년, 아니 소년이 뱃전에 걸터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키가 육척 가깝고 구릿빛 팔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하다.

몸만 보면 건장한 청년이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다.

소년 어부 능풍운이다.

짧은 바지에 소매 없는 무명조끼를 걸친 능풍운은 그물을 손질하기에 바빴다. 올이 굵고 튼튼해 보이는 그물이다.

하지만 그물은 여기저기 끊어져 있었다. 어제 무려 삼백근이 넘는 대물 황새치가 걸렸었기 때문이다.

반나절 넘는 악전고투 끝에 황새치를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그물이 많이 상했다. 다시 조업을 나가려면 끊어진 올들은 모두 이어야한다.

어느덧 수평선 위로 시뻘건 불덩어리가 떠오르고 있다.

날씨도 좋으니 이맘때쯤이면 포구는 출어 준비로 부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능풍운을 제외하면 다른 배의 주인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상에서 무림인들이 죽고 죽이는 난투를 벌인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물을 손질하는 능풍운의 손길은 빠르고 능숙하다.

[휴... 겨우 끝났군.]

이윽고 능풍운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었다. 그물의 수리가 끝난 것이다.

물고기를 유인할 미끼와 다른 어구들은 준비가 되어있으니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때였다.

[네가 이 배 주인이냐?]

뒤쪽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능풍운이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한 인물이 서있었다.

검은색 경장을 걸친 서른 살 가량의 사내인데 오른쪽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옷 색깔과 달리 얼굴은 지나치리만치 하얗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얄팍한 입술까지 더해져서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무림인인가?)

흑의인이 차고 있는 검을 본 능풍운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무림인에 대해 마을의 형들로부터 듣긴 했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인상이 별로 안 좋네.)

사내를 찬찬히 살펴본 능풍운의 두 번째 생각이다.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흑의인이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는 좋아할 수가 없다.

능풍운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놈! 귀를 처먹었냐? 이 배가 네 배냐고 물었지 않느냐?]

흑의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초면인데 대뜸 욕설이 튀어나왔다.

능풍운의 응대도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다.

[맞소만 왜 묻는 거요?]

능풍운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흑의인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보통의 양민이라면 상대가 무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눅이 들어 굽신거린다.

그런데 이 어린놈은 뻣뻣하기가 바짝 마른 대나무 같다.

하지만 흑의인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눌러 참았다. 무림인이 이유 없이 양민을 해치면 공적(公敵)으로 지목되어 앞날이 고달파진다.

살인을 해도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현재 해복진 근처에는 흑의인 말고도 무림인들이 다수 몰려와있다.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혐의를 벗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양민을 해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지금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이 배가 네 소유라니 잘 되었다. 옛 다.]

흑의인은 작은 주머니를 소매에서 꺼내 능풍운의 배 안에 던졌다.

쩔렁!

주머니가 배의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금속성이 들렸다.

[이게 뭐요?]

능풍운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뱃삯이다. 오늘 하루 네 배를 빌려야겠다.]

흑의인이 마치 시혜를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능풍운이 당연히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보시오. 나는 어부이지 뱃사공이 아니....]

[좋게 말할 때 본좌를 지옥도(地獄島)까지 태우고 가라.]

불쾌해하는 능풍운의 항변을 흑의인이 손을 들며 저지했다.

[지옥도!]

능풍운은 흠칫하며 눈을 치떴다.

 

-지옥도!

 

해복진에서 남동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섬이다.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아 날씨만 좋으면 해복진에서도 바라다 보인다.

하지만 지옥도는 해복진의 어부들 뿐 아니라 남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모든 뱃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며 절대금지(絶代禁地)로 알려져 있다.

뱃사람치고 맨 정신으로 지옥도에 접근하려는 자는 없다.

이유는 지옥도 일대해역의 물길이 아주 험하기 때문이다.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지옥도 주변 바다 속에는 수많은 암초들이 숨어있다.

멋모르고 지옥도로 접근했다가는 그 암초들에 부딪혀 좌초당하기 십상이다.

암초뿐만이 아니다.

지옥도 일대 바다 속에는 수많은 수중동굴이 뚫려 있다.

그 수중동굴들 때문에 지옥도 주변에는 수많은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일단 그 소용돌이들에 휘말리면 배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끝장나버린다.

오죽했으면 뱃사람들이 지옥도 일대 해역을 불귀마해(不歸魔海)라 하겠는가?

한데 음산한 인상을 지닌 흑의인은 능풍운에게 다짜고짜 지옥도로 가자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시오.]

철컹!

능풍운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돈주머니를 도로 흑의인의 발치로 던졌다.

(이 촌놈이...!)

흑의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지렁이 어부 따위에게 무시당했다 생각하자 살기가 치민 것이다.

[말했지만 난 고기 잡는 어부지 사람 태워주고 돈 받는 뱃사공이 아니....]

다시 어구를 정리하려고 허리를 숙이던 능풍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스악!

한 가닥 푸르스름한 섬광이 눈앞을 스쳐지나간 때문이다.

능풍운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굳어질 때였다.

펄럭!

능풍운의 이마를 동여매고 있던 머리띠가 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능풍운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발치에 떨어진 머리띠가 매끈하게 잘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능풍운은 반사적으로 흑의인을 돌아보았다.

흑의인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있는데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여전히 칼집에 들어있다.

능풍운은 그 자가 언제 검을 뽑아 자신의 머리띠를 잘랐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흑의인은 정확히 머리띠만을 잘라냈을 뿐 능풍운의 이마에는 상처 하나 내지 않았다.

실로 빠르고도 정확한 검법이 아닐 수 없었다.

[흐흐흐.... 나 천랑마검(天狼魔劍)이 지금껏 참고 있었던 것은 네놈이 일초무학의 무지렁이임을 감안해서다.]

흑의인은 놀라는 능풍운을 흘겨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

천랑마검이라 자칭한 흑의인의 시선을 접한 능풍운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자신이 마치 굶주린 늑대 앞에 벌거벗고 선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금부터 본좌를 모시고 지옥도까지 간다.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

천랑마검이 내뱉듯이 말했다.

 

-천랑마검!

 

좌수검(左手劍)의 달인인 그자는 무림에 출도 한 이래 한 번도 패해 본 적이 없다.

신랄하고도 빠른 그자의 천랑십이식(天狼十二式)은 무림의 십대검법(十大劍法) 중 하나로 꼽힌다.

어지간한 무림의 명숙들도 천랑마검과는 시비를 피할 정도다.

워낙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데다가 오른 손이 아닌 왼손을 쓰는 탓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때문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림인들 간의 승부는 사소한 차이로 승부가 난다.

그런 면에서 왼손을 사용하는 좌수검은 무시못할 이점이 된다.

하지만 무림에 문외한인 능풍운이 이같은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하물며 능풍운은 나이는 어려도 협박에 굴하는 성격이 아니다.

[나도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오. 무어라 해도 귀하를 내 배에 태워줄 수는 없소.]

능풍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라?]

천랑마검은 능풍운의 단호한 어투에 두 눈을 부릅떴다.

[흐흐...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군! 감히 본좌의 명을 거역하다니....]

그 자의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오냐! 네놈 스스로 판 무덤이니 나를 원망치 마라.]

천랑마검은 싸늘한 어조로 말하며 왼손을 오른쪽 허리에 찬 검에 가져갔다.

한데 그 직후였다.

부르르!

막 검을 뽑으려던 천랑마검의 몸이 갑자기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찢어질 듯 치떠진 그자의 눈은 능풍운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저 작자가 갑자기 왜 그러지?)

천랑마검의 돌변한 태도에 능풍운이 의아해할 때였다.

[후... 후배가 불민하여 노사(老師)의 왕림하심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천랑마검은 두손을 모으며 굽신거렸다.

방금 전까지의 그 기세등등함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백지장같이 창백하게 변한 천랑마검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천랑마검이 보이고 있는 갑작스런 변화를 능풍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기에 그토록 사납던 이자가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지?)

능풍운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

능풍운 뒤에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인데 일신에는 낡은 삼베옷을 걸치고 있다.

사람 좋은 인상을 지닌 노인은 자기 키 만큼이나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마의(麻衣)의 노인을 일별한 능풍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마의노인에게서는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의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촌노였다.

[노야께서도 내 배를 빌리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능풍운은 무뚝뚝한 어조로 마의노인에게 물었다.

[글쎄다.]

마의노인은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검 좀 곤란한데...)

능풍운은 마의노인의 모호한 대꾸에 난감해졌다. 연로한 노인이 지옥도까지 태워다 달라고 하면 차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의노인은 그런 능풍운의 내심을 읽었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마라. 이 늙은이가 네게 신세를 지지 않을 테니까.]

이어 그는 시선을 천랑마검에게로 돌렸다.

[네 녀석은 낭왕(狼王) 혁련사(赫連射)의 전인이냐?]

천랑마검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 분이 후배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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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소년 어부

 

 

 

-해복진(海復津)

 

절강성(浙江省) 남단에 자리한 어촌이다.

산이 가까이 다가와 있어 배후지가 넓지 않다. 큰 포구가 될 수는 없는 지형인 것이다.

그래도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보금자리다. 활 모양으로 휘어진 산맥의 끄트머리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덕분이다.

 

새벽 무렵이다.

바다에는 해무가 자욱하게 깔려있다.

해무 너머로 붉은 기운이 긴 띠처럼 어리기 시작한다.

또 하루가 밝아오고 있다.

그렇긴 해도 육지 도처에는 어스름이 서려 있다. 날이 완전히 밝으려면 제법 시간이 흘러야한다.

 

해복진 남쪽 끝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펼쳐져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송림 속에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엌 하나, 방 하나 뿐인 작은 초가집이다.

삐걱

[오늘도 날씨는 괜찮겠네.]

초가집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양 볼에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소년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체격은 건장하다. 육척(六尺) 가까운 키에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피부는 짙은 구릿빛이다.

긴 머리를 빛바랜 천으로 대충 묶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단정해서 잘 빚은 조각상을 연상케 한다.

성숙한 어른과 천진한 아이의 분위기가 함께 느껴지는 소년이다.

[으라차차! 오늘도 신나는 하루가 되겠구나.]

집을 나선 소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벌써 바다에 나가려는 게냐?]

소년이 나온 집안에서 여인의 연약한 음성이 들렸다.

열려있는 방문을 통해 검박하고 단출한 실내가 보인다. 가구라고는 탁자 하나와 침대 두 개가 전부다.

그래도 벽에 몇 폭의 고서화가 걸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두 개의 침대 중 하나에 누워있던 여인이 힘겹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불면 꺼질 듯 가냘픈 몸매에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한 여인이다.

삼십대 중반 정도인 여인은 비록 병약하게 보이지만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몸에는 단아한 기품이 배어있다.

삼단같은 머릿결은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 때문에 얼굴은 더 한층 창백해 보였다.

[해가 뜨려면 이각 넘게 남았다.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여인이 가냘프지만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출항하기 전에 그물을 좀 손봐야 할 것 같아서요. 좀 더 주무세요 어머니.]

소년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쪼록 무리하지는 마라. 너무 먼 바다까지 나가지 말고...]

[명심할게요.]

소년은 여인을 안심시키고는 방문을 닫았다.

(가엾은 것...)

문이 닫히자 여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용서하거라. 천벌을 받아 마땅한 어미와 오라버니를...!)

주르르...!

여인의 창백한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그러다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흐느낄 때마다 여인의 삼단같은 머릿결이 물결같이 일렁거린다.

과연 그녀는 무슨 말 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 것일까?

 

***

 

쏴아... 철썩!

파도는 끊이지 않고 밀려와 바위에 부딪힌다.

소년은 높직한 바위 위에 서서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 바다를 덮고 있는 해무, 하늘의 구름 등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아침의 일기만으로도 오늘 하루 바다의 상태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오년 넘게 고기를 잡으며 쌓아온 경험 덕분이다.

어부로서의 경력은 제법 길지만 소년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다.

 

이름이 능풍운(陵風雲)인 소년은 해복진 출신이 아니었다.

십육 년 전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작은 난파선이 해복진에 표착(漂着)했었다.

난파선에는 이십대 초반의 미녀와 갓 태어난 듯한 핏덩이가 타고 있었다.

능풍운 모자였다.

능부인(陵婦人)이라 불리는 능풍운의 어머니는 본명을 비롯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표류해올 당시 능부인은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난파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아니었다. 누군가와 싸워서 입은 부상이었다.

해복진 주민들은 그녀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의 사람이 아님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정 많은 주민들은 죽어가는 모자를 방치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고 덕분에 능풍운 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부상이 완쾌된 후에도 능부인은 해복진을 떠나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 능부인 모자를 해복진 주민들은 흔쾌히 이웃으로 받아 주었다.

박식했던 능부인은 해복진 아이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 해복진의 젊은이 중 몇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지방관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 공로도 있어서 능부인은 해복진 주민들로부터 극진한 존경을 받아왔다.

핏덩이였던 능풍운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났다.

반면 능부인은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녀가 눈에 띄게 병약해져 가는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능부인은 자신의 병명을 아는 듯했다.

하지만 이웃이 아무리 물어도 쓸쓸히 웃기만 할뿐 병명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능풍운은 마을 어른들을 따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열한 살이 되던 오년 전부터였다.

능풍운은 고기잡이에 금방 익숙해졌다.

또래보다 신체조건이 월등할 뿐 아니라 무엇이든 쉽게 배우는 재주 덕분이었다.

열여섯 살이 된 지금 능풍운의 체격은 어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힘도 장사여서 작은 배쯤은 혼자 번쩍 들어 옮길 정도였다.

어느덧 능풍운은 해복진의 누구보다도 숙련된 어부가 되어 있었다.

 

[후우....]

능풍운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바다를 주시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오늘 바다로 나가 어떤 일을 만날지 가슴이 뛴다.

능풍운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수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놀이터다.

물론 예기치 못한 폭풍을 만나 몇 번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바다는 매번 가슴을 뛰게 만드는 미지의 세계다.

헌데 능풍운이 일출을 기다리며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허허! 해복진에서는 역시 네가 가장 부지런하구나.]

뒤쪽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을 쪽에서 늙은 어부가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왕(王) 할아버지?]

능풍운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노인은 해복진의 늙은 어부 중 한 명이었다.

어렸을 때 능풍운은 왕(王)씨 성을 지닌 이 노인으로부터 낚시질과 그물 치는 법, 배 모는 기술등을 배웠었다.

[오늘도 바다에 나갈 작정이냐?]

왕노인은 주름진 얼굴로 능풍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능풍운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께 보약이라도 한재 지어드리려면 오늘도 잔뜩 잡아야지요.]

[허허, 풍운이 너는 역시 효자로구나.]

왕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해복진에서 능풍운이 병약한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능풍운은 왕노인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바위 아래에 도착한 왕노인은 근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출어를 그만 두는 게 좋을 것같다.]

왕노인은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째서인가요? 날씨가 나빠질 것 같지는 않은데...]

능풍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 때문이 아니다.]

왕노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날씨 때문이 아니라면 왜지요?]

[어제 강(姜)씨가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여러 척의 깨진 배와 수십 구의 시체들을 발견했다더구나.]

강씨는 해복진의 어부들 한명이다.

[해적(海賊)...입니까?]

능풍운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쎄다.]

왕노인은 자신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해적, 즉 바다를 무대로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들은 하나같이 포악한 자들이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가는 어부들이나 연안의 백성들에게 왜구(倭寇)를 포함한 해적들만큼 겁나는 존재도 없다.

동영에 근거지를 둔 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해적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바다로 도망쳐온 죄인들이다.

그자들에게는 인성(人性)도 양심이란 것도 없다. 그저 죽이고 빼앗고 노략질할 뿐이다.

다행히 오십여 년 전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후 해적들 대부분은 연안에서 구축(驅逐)되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남해 일대에 다시 해적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나마 해복진의 어부들 중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없다.

 

[해적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죽은 시체들이 하나같이 무림인들이었다는구나.]

왕노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림?]

능풍운의 두 눈이 번뜩 빛났다.

무림이란 말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자신의 운명이 무림이란 그 한 마디로 인해 어디론가 끌려갈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왕노인이 말을 이었다.

[소문이기는 하지만 남해 어딘가에서 무림인들이 몽매에도 원하는 보물이 곧 출토된다더구나. 그 때문에 무림인들이 몰려드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무림지보(武林之寶)라고요? 우리같은 어부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로군요.]

능풍운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왕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들은 사람 죽이는 걸 여반장으로 아는 자들이다. 해적들보다 오히려 더 포악하고 잔인한 무리지.]

[예....]

능풍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을의 형들로부터 무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무림인들은 신선이나 마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늘을 새처럼 날고 맨 주먹으로 바위를 깨트리며 검을 날려 수십 리 밖의 적도 죽인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얘기라고 새겨들었다.

능풍운에게 무림이나 무림인의 존재는 다른 세상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무림인들과 마주쳐서 좋을 일은 없다. 며칠 동안은 바다에 나가지 말거라.]

왕노인의 말에 능풍운은 싱긋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쯧쯧...)

왕노인은 내심 소리없이 혀를 찼다.

능풍운이 끝내 바다에 나갈 작정임을 안 것이다.

[내 말 잘 생각해 보거라. 병약하신 자당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왕노인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마을 쪽으로 멀어져 갔다.

왕노인이 떠나자 능풍운은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쏴아... 철썩!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연신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바다가 깨어나고 있다.

그걸 보는 능풍운의 가슴속에서도 벅찬 무언가가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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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한지 어느덧 20년이 되어가는 <나한대협>의 수정본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고 문장과 일부 설정만을 바꿀 생각입니다. 1권 분량을 연재할 계획이며 <19금> 부분은 자율규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삭제본>은 홈페이지인 <와룡소>의 <지밀보고>에 연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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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武林七寶 -무림칠보

 

 

 

서장

 

                무림칠보의 전설

 

 

<무림칠보(武林七寶)를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

 

오랜 세월 무림인들을 흥분시켜온 전설이다.

 

-치우기(蚩尤旗)

-천손갑(天孫鉀)

-혈마경(血魔鏡)

-혼원신주(混元神珠)

-연혼마적(鍊魂魔笛)

-등선천익(登仙天翼)

-나한법륜(羅漢法輪)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게 만들어준다는 일곱 가지 보물!

무림인치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 자는 없다.

얻기만 하면 어떠한 욕망이든 꿈이든 이룰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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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발간한 박스본 무협지 <철혈기인,철혈무적 2부작>의 개정 확장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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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성과 무림맹

 

 

-지옥성(地獄城)!

 

오랜 세월 변황 무림을 지배해온 그들이 중원을 침공했다.

중원 무림은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하여 맞섰다.

격전의 연속,...

승리는 중원 무림, 아니 무림맹의 것이었다.

지옥성은 서역에 자리한 본거지까지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무림인들은 환호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지옥성의 궤멸은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었다.

불가침의 성역이 된 무림맹...

그들의 폭압이 무림을 숨 막히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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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요괴를 먹는 인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에게 박힌 깃발과 씨름을 거듭했지만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깃발이 존재하는 한, 대성은 요괴를 불러 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요괴를 물리치면 다른 요괴가 오고, 하나가 둘이 되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란 선생이 보기에 요괴는 출몰하는 것이다.

어디서 온다기보다는 깃발 근처에서 갑자기 생성된다.

따라서 요괴를 피해서 도망친다는 것도 의미 없다.

대성에게 꽂혀 있는 깃발의 코드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계속해도, 깃발을 형성하는 코드는 너무 견고하다.

란 선생은 수많은 연산을 하고 그 보다 더 많은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nothing is working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지금의 란 선생은 독립된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이지만 대성의 일부로 존재한다.

대성이 요괴에게 당하면 란 선생의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

란을 형성하고 있는 코드 중 정체성을 정의한 코드가 먼저 사라지고 나면, 나머지 부분은 이 세상의 요구에 응하여 이리저리 뜯게 나가고 종래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

깃발 코드에 대한 란의 학습도, 또는 이해도는 아직 0.00% 다.

이는 감정에 대한 이해도와 같다.

란 선생은 인공지능으로 감정이 없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 공감하는 능력은 있지만 그 공감능력 마저도 유사 공감일 뿐이다.

학습능력을 이용하여 감정을 학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단지 유사 공감력을 정교하게 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란 선생의 유사 공감 능력이 유사 공포를 불러왔고, 그 유사 공포는 란 선생의 생존력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방향을 특정하고, 에너지는 집중하고, 최적화하는 데 모든 것을 건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학습용 인공 지능 분야에서 란 선생이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란 선생의 판단이었다.

깃발에 대한 이해는 유사 이해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수없이 탐색을 반복하던 중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란 선생은 그때서야 대성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다.

란 선생의 유사 감정이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얘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파괴자, 이 세상에서는 요괴라고 불리는 파괴자를 배가 고픈 대성이 생으로 한입 뜯어먹은 것이다.

마치 단팥빵을 한입 베어 먹듯이, 요괴가 변신한 고양이의 엉덩이를 베어 먹었다.

몇 번 씹지도 않고 두어 번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켰고, 그 순간에 란 선생은 새로 유입되는 코드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란 선생이 대성의 눈에만 보이도록 현신하여 소리쳤다.

 

“먹어! 더 먹어!"

 

***

 

웅크린 대성은 연청 등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요괴 묘진의 뒷다리도 뼈조차 남기지 않고 씹어 먹었다.

대성은 탈태환골하여 이빨도 강철 같았다.

미친 듯한 허기, 요괴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그 무엇보다 달콤한 냄새는 대성을 진작부터 홀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냄새에 홀려서 요괴를 훔쳐오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요괴 궁둥이와 뒷다리 하나의 양이 적지 않았다.

금방 배가 꽉 차버렸다.

몸이 작아져서 더 많이 먹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허기는 가셨고, 최고의 진미를 맛본 대성은 황홀한 고양감을 느꼈다.

몸에서는 힘이 들끓고 있었다.

대성은 자기의 몸이 요괴를 먹자마자 조금 자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궁둥이와 왼다리를 먹힌 묘진은 목이 졸린 채 혼절한 상태였다.

대성의 입가에는 피와 묘진의 털이 묻어있다.

 

“에휴...”

 

고개만 앞으로 잠시 빼서 대성을 본 영소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성이 뒤집어쓴 이불자락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듬직해보였다.

 

“앞으로 반찬 투정 하면 죽을 줄 알아.”

 

슬그머니 때 아닌 엄포를 놓았다.

요괴도 생으로 먹었으니 어떤 것인들 못 먹겠냐는 소리다.

여전히 눈에는 서러워서 울던 눈물이 글썽였다.

 

연청은 칼집을 들고 대성에게 다가갔다.

대성은 영소를 뒤로 밀어버리고 돌진했다.

가소로운 상황이지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구결은 다르지만 같은 무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의 검 두 가지가 맞붙은 것이다.

작약 밭에 모인 풍림원 사람들은 대부분 바람의 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성이 자기의 것으로 연청을 상대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한다!"

 

영소가 소리쳤다.

 

“머리로 막아! 거긴 다리로 막고!"

 

대성은 연청이 칼집으로 머리를 때리면 머리로 막고 다리를 때리면 다리로 막았다.

맞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대성의 방어였다.

대성이 펼치는 바람의 검은 타격을 몸으로 받아 내고 되던 질 수 있다.

이는 술법이 아닌 무공이다.

대성과 영소만 수련했던 것이고, 연청이나 다른 누구도 그 둘처럼 하지 못한다.

연청의 칼집이 대성의 몸을 때릴 때마다 제멋대로 튕겨 나갔다.

대성이 맞은 부위로 칼집을 딴 곳으로 던지는 것이다.

연청이 아닌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단 번에 칼집을 빼앗기거나 손에서 놓쳤을 것이다.

 

“아파!"

 

대성이 찌푸리며 말했다.

연청의 칼집은 매우 빠르다.

대성이 어떻게 움직여도 진짜 바람처럼 따라와서 때리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다.

대성은 몸으로 받아내고 튕겨내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연청 역시 대성을 베지도 못하고 쓰러뜨리지도 못한 채 때리기만 할 수 있다.

아주 기묘한 상황이었다.

연청은 오기가 생겨서 안 때리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대성은 이미 모든 곳을 단련한 후였다.

단 한 곳 빼고.

연청이 발로 대성의 다리 사이 급소를 찼다.

영소가 기겁을 했다.

 

“비겁하게!"

 

발에 채인 대성은 몸이 껑충 튕겨 올랐다가 도르르 굴렀다.

턱이 빠진 듯이 크게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싸움을 끝났고 조용했다.

남녀 모두가 얼굴로 저건 좀 심했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연청도 조금 미안한 표정이었다.

죽을 만큼 강하게 차지는 않았지만 약하게도 아니었다.

연청의 발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이런, 터졌나?”

 

노칠자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영소가 대성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번쩍 안아들더니 냅다 달아났다.

영소와 대성을 가두고 있던 숲 그림자가 사라졌다.

의외의 상황에서 작약밭의 어른들과 연청 모두 숲그림자 펼치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엇!"

 

연청이 거듭된 의외의 상황에 놀라 헛바람을 토했다.

하지만 영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어른들이 쫓았지만 그 둘을 잡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영소는 이미 도망갈 길을 계산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연청은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심하게 받았다.

 

***

 

방앗간까지 도망 온 후 영소는 대성을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가득했다.

대성은 예상했다는 듯이 피곤죽이 되어 있는 고양이를 들어 보였다.

 

“사형이 찬 건 요괴야.”

 

대성이 킬킬 웃었다.

 

“거길 찰 줄 알았거든.”

“아!”

 

영소가 풀썩 주저앉았다.

 

“난 또... 안 그래도 작은 게 아예 없어져 버리나 했지.”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대성이 인상을 썼다.

영소는 못들은 척 시침을 뗀다.

대성은 더 갈구지 않고 요괴 묘진을 번쩍 들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요괴 묘진은 죽지 않았다.

척추를 물리자 되려 정신이 들어서 "냐아!" 소리를 날카롭게 냈다.

하지만 대성은 그대로 묘진을 베어먹어 버렸다.

 

“에이그 사타구니에 넣었던 걸...”

 

영소는 손으로 가리고 눈을 찡그린다.

대성이 작은 사람 요괴 같았다.

남아 있는 묘진의 잔해가 모래처럼 무너지더니 흩어졌다.

이 요괴는 죽어야 도망친다.

영소가 말했다.

 

“저거 또 도망간다.”

“괜찮아. 배도 부르고...”

 

대성은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 자자.”

 

음흉하게 씨익 웃는데, 어른 흉내다.

철썩!

영소가 대성의 배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못된 소리만 배워 가지고. 누가 들으면 뭐...”

 

대성이 비명을 지르고, 영소는 대성을 들고 폭포수 뒤 동굴로 갔다.

가면서 대성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너 배만 부르면 다지? 나도 아까부터 못 먹었단 말이야. 이 나쁜 놈아.”

 

대성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불쑥 물었다.

 

“아까 생선 먹은 건 어디로 들어갔어?”

 

영소가 다시 대성의 등을 때렸다.

 

“밥, 밥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뒤에 말은 중얼거리며 생략했는데,

바로 이 말이었다.

 

“너처럼 요괴를 먹지 않아. 이 인괴야.”

 

***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괴의 코드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일부지만 반복된 학습으로 보완할 수 있고, 어쩌면 발전시킬 수도 있다.

 

“요고... 요고... 어째뿌까?”

 

란선생은 신이 나서 웃었다.

대성이 기특한 짓을 했다.

요괴를 먹다니.

 

“좋아서 미치겠다!"

 

란 선생은 요괴의 코드를 학습하고 흡입하며 자기가 감정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존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

 

요괴 묘진은 끔찍했다.

달아나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태까지 몇 번 죽어봤지만 이처럼 잡아먹혀 죽은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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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2월입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카페에 게시했던 대로 [(무림천재의) 무림경영]이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최근 네이버는 4-5권 분량의 작품을 원하고 있습니다.

무림경영은 최소 10권 짜리라 걱정이었는데...

1부 4권, 2부 4권, 3부 4권등으로 연재가 가능해졌습니다.

일단 1부 연재를 시작했으며 2024년 초에 2부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금포염왕>이나 <지백천년>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연재 되는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series.naver.com/novel/detail.series?productNo=1046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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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숲 그림자

 

 

 

대성의 오른손은 영소의 왼손을 잡고 있고, 왼손은 요괴 묘진의 본신인 고양이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

묘진의 축 처진 오른쪽 뒷다리에는 무거운 쇳덩어리 쥐덫이 덜렁거린다.

묘진은 고통으로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뼈를 물고 있는 쥐덫이 크게 흔들리면서 갉아대니 신경이 제멋대로 날뛴다.

달군 부지깽이로 고문 받을 때보다 더 괴롭다.

너무 아파서 꺄울! 하는, 자기도 못 들어본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연청으로부터 숨어야 하는데 소리를 내다니.

즉시 여유 손이 없는 대성이 무릎을 밖으로 돌려서 묘진의 머리를 박아버렸다.

묘진의 머리가 공처럼 튕기고, 그걸 영소가 한 번 더 발꿈치로 튕겼다.

내심 묘진이 대성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랐다.

바람의 검을 익히면서 발꿈치로 돌을 받고 던지던 재주였다.

그러나 대성은 놓치지 않았고 묘진만 졸도해버렸다.

영소는 조금 아쉬웠다.

지금 속도로 봐선 요괴만 없어도 달아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쉽지 않다.

숲에는 풀냄새, 꽃향기가 저녁 바람을 타고 비단결처럼 흐른다.

영소가 대성에게 속삭였다.

 

"빨리 빠져 나가자. 이사형이 들어오기 전에.”

 

이사형 연청은 바람의 검도 달인이지만 풍림화산 중에서 림(수풀)에 해당한 무공인 "숲 그림자"도 잘 쓴다.

숲 그림자는 바람의 검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대성은 구결은 알아도 쓸 수 없는 무공이다.

숲 그림자가 숲에서 쓰는 무공은 아니지만 숲에서는 위력이 더 강할 가능성도 있었다.

바람의 검이 바람이 많이 불 때 더 강해지니까.

연청이 숲으로 들어와서 숲 그림자를 사용하면 대성과 영소에게 좋을 게 없다.

 

"그걸 누가 몰라?"

 

입으로 나온 말은 아니지만 눈으로 대성의 마음이 읽힌다.

초조함이 극도에 달해있다.

 

"거기서!"

뒤에서는 연청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청은 이종무가 골라서 제자로 들였고, 조성일이 풍림원의 선봉으로 삼아서 길러온 고수였다.

자질은 출중했고 총명했으며 무공에는 탁월한 성취가 있었다.

대꾸도 안하고 달아나는데 급급한 두 녀석을 잡기 위해서, 좀처럼 쓰지 않던 힘을 끌어냈다.

이영차! 하는 순간 연청은 거의 두 배나 빨라졌다.

영소가 대성에게 손을 맡기고 달려가면서도 뒤를 살피던 참이었다.

연청이 벼락 치듯이 덮쳐 오는 게 보이자 영소는 비명을 내질렀다.

 

"오지마욧!"

 

앞으로만 달리던 대성은 나무를 돌아서 다른 나무 뒤로, 또 다른 나무 뒤로 움직이면서 연청을 따돌리려 했다.

하지만 연청은 숲에 들어오자마자 바람도 잡아둔다는 숲 그림자를 사용했다.

원래 숲 그림자는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대성을 대상으로는 달아나지 못하게 막았다.

대성은 가는 방향 마다 멈칫거렸다.

날은 이미 어두운데, 숲속이라서 더 어두운데, 무엇인가가 앞을 가로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성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네 번째는 벌써 연청에게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따라 잡혔다.

숲 그림자는 펼치는 사람이 더 가까울 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네 번째로 빠져나갈 때, 완전하지 못해서 대성은 영소와 함께 넘어져 여러 바퀴를 굴렀다.

영소는 밥 광주리를 놓지 않았고 대성은 요괴를 놓지 않았기에 묘한 자세로 널부러졌다.

큰 대자로 이어진 그 둘의 한쪽에는 요괴가, 한쪽에는 광주리가 있다.

주변에는 여름에 피었어야 할 작약꽃이 가득해서 꽃밭에 일부러 누운 거 같다.

검푸르스름한 하늘에는 별도 보인다.

발치로는 연청이 근엄한 표정으로 걸어온다.

 

"아씨... 요괴 그게 뭐라고...”

 

잡힌 게 분해서 영소가 작게 투덜거리는데 대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숲 그림자가 팔방에 드리워져 있다.

 

"요괴는 못 줘!"

 

대성이 소리쳤다.

연청이 소리쳤다.

 

"이 녀석이!"

"아! 사형한테 한 말이 아니고 영소한테 알려 준 거예요.”

 

대성이 변명했다.

영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주면 어쩔 건데? 이사형하고 싸우기라도 하려고?"

"응!"

 

대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요괴 묘진은 기절한 채 대성의 왼손에서 축 늘어져 땅에 끌린다.

몸에 두른 이불이 반은 터여서 알몸이 보일락 말락 한다.

 

"뭐?"

 

영소는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한 표정이 되었고 연청은 더 어이가 없다.

대성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형. 이 요괴 나 줘요.“

 

연청은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잔소리 말고 바치라는 의미였다.

대성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연청은 더 압박해서 성큼성큼 걸었왔고, 대성 뒤에는 숲의 그림자가 행로를 방해했다.

붉은 작약 꽃과 흰 작약 꽃이 키 작은 대성의 가슴 높이에서 흔들린다.

연청과 영소가 나란히 보이다가 연청만 보인다.

갑자기 대성이 소리쳤다.

 

"지금!"

 

영소는 어리둥절하다가 대성의 눈빛을 받고 화들짝하면서 바로 앞에 연청을 공격했다.

바람의 검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권법이다.

주먹을 던지면 권법이고 발을 던지면 퇴법이니까.

 

"매복이냐?"

 

연청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나는 물러나면서 끌어들이고 자연스럽게 뒤에 남은 하나가 뒤에서 친다.

일반 병법이라면 훌륭하다.

대성도 앞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꽃잎을 밟고 뛰어 오르는 모습이 물에서 솟구치는 잉어 같다.

연청이 익힌 원본 바람의 검과 대성이 만든 바람의 검의 대결이 되어 버렸다.

영소와 대성은 늘 함께 싸우고 어울렸기 때문에 척하면 착이다.

서로 손발을 맞춰서 대성을 공격하니 대성도 소홀하게 상대할 수가 없다.

하물며 자기가 펼치는 바람의 검보다 더 괴상한 바람의 검이다.

살펴보느라 대 여섯 번의 공격을 받아주고는 반격했다.

 

"아코!"

 

먼저 영소가 나둥그라졌고, 대성은 두 대를 두들겨 맞은 후에 튕겨 나갔다.

한 대는 왼쪽 빰이었다.

목이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대성이 연공한 바람의 검은 그 충격을 몸으로 흡수한다.

다만 연청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 후 대성은 부풀기 시작한 뺨을 만지며 깨어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쳇, 내가 몸만 줄어들지 않았어도. 배만 안 고파도...“

 

그러나 실제로는 탈태환골하기 전에는 더 약했고 영소한테도 많이 맞았었다.

못 이기고 지는 김에 치는 허세고 자기 기만이다.

연청이나 영소나 다 알고 있기에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당장 내놔!"

 

연청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요괴를 내주지 않을 거 같았다.

이쯤 되니 연청이 오히려 궁금해졌다.

 

"너, 대체 요괴는 왜 안주려는 거냐?"

 

대성이 영소를 힐끔 보더니 말 못한다는 듯이 도리질을 했다.

그리곤 다시 범빌 듯하다가 도망쳤다.

가까운 거리다.

연청에게는 이제 매우 가소롭다.

가까운 거리에서 원본 바람의 검은 더욱 빠르다.

단숨에 대성의 뒤를 잡아서 요괴를 빼앗으려 하는데, 갑자기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쏠렸다.

영소의 긴 허리띠가 왼 발에 감겨 있었다.

영소는 나뒹굴면서 미리 허리띠를 풀어 던져 놓았던 것이다.

영소가 나 잘했지 하는 듯이 웃다가 잡고 있는 허리띠 채로 날아갔다.

연청이 중심을 잡으며 발로 채서 던져 버린 때문이었다.

 

"요것들!"

 

그러나 그 간발의 차이로 대성은 연청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앞으로 던져진 영소를 받아서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까지 한다.

화가 난 연청이 보검을 뽑아 들었다.

영소가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이사형이 우릴 죽이려 해!"

 

대성은 검이 뽑히는 소리를 듣고 벌써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이놈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연청은 영소가 하는 말에 더 화가 났다.

자기가 그 둘을 죽일 리 없다.

검은 왼손에 쥐고 빈 칼집을 오른손으로 잡고 영소부터 한 대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영소가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달아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공으로 펼치는 바람의 검은 연청이 펼치는 것에 비해서 신통한 점이 많다.

연청도 보면서 감탄을 했다.

더구나 두 놈이 서로를 잡아당기거나 밀거나 하면서 협력하여 연청을 상대하는 것도 절묘했다.

하지만 그 정도. 영소와 대성은 완전히 달아나지도 못한다.

연청은 그들을 잡지 못하지만 칼집으로 때릴 수는 있었다.

 

"아야! 악!"

"아이고!"

 

자지러지면서도 두 놈은 숲속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약밭 속을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그들의 몸은 충격을 잘 받아낸다.

약 오른 연청이 더 세게 때려도 효과는 비슷했다.

화가 끝까지 난 그 둘이 돌아서서 달려들다가는 더 두들겨 맞고 또 도망친다.

그래도 숲 그림자 때문에 작약밭을 벗어나지 못한다.

작약밭이 초토화되어 갔다.

대성의 손에 들린 요괴도 정신이 들었다가 맞아서 기절하기를 반복한다.

때리는 사이에 연청의 화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때릴 수록 대성과 영소의 움직임은 점점 더 정밀해지고 기묘해지는 중이었다.

연청은 그 둘의 움직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우쳤다.

구결만 알고 한 번씩 지나가다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속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때려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마음 놓고 때렸다.

대성이 젖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젖 먹던 힘까지 다 뽑아 쓴 모양이었다.

연청의 칼집에 어깨를 두들겨 맞았는데 폭 고꾸라졌다.

영소가 그 다음 매를 몸으로 때우면서 대성을 뒤에서 안아 붙잡았다.

 

"이사형 이 나쁜 놈아! 여자를 때리는 나쁜 놈아!“

 

영소는 악을 쓰면서 욕하다가 머리며 허리, 팔, 다리 빠짐없이 골고루 맞았다.

대성이 웅크러져 버렸으니 혼자 두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연청이 칼집으로 둘의 머리를 한 번 씩 때리고 말했다.

 

"끝났냐?"

 

영소는 맞은 게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둘러보니 어느 새 작약밭은 사람들로 에워싸였다.

매섭게 노려보는 엄마가 보이고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보인다.

그들은 영소가 맞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어찌된 게 이 풍림원에서의 사부의 무남독녀 정도는 아무 방패막이가 못 된다.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땡강은 부릴 수 있지만 하소연은 못한다.

영소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다들 나만 미워해.”

 

평소 느끼던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큰 소리로 울었다.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요괴는 이자씩이 훔쳤는데 맞기는 내가 더 많이 맞고... 엉엉.”

 

대성은 몸이 작아졌고 영소는 크니까 더 맞은 거다.

 

(그건 네가 못 되어서지.)

 

연청은 윽박지르려다가 너무 잔인한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영소는 주저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었다.

머리는 대성의 머리에 기댔다.

연청은 못됐지만 강한 영소가 울음을 터뜨리자 적잖게 당황했다.

강문설을 쳐다보자 강문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더 때려요. 이 번 기회에 때려서 사람 만들어요.“

 

그 소리에 영소가 숫제 통곡을 한다.

대성의 목을 껴안고 우는데 대성의 입가에 피가 가득했다.

 

"악!"

 

영소가 놀라 소리치며 대성의 뺨을 잡았다.

연청과 어른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피를 토했다면 내상이다.

다만 연청은 대성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로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연청을 책망하듯이 보았다.

 

"다쳤느냐?"

 

당황한 연천이 자기도 모르게 다가갈 때였다.

 

"난 너 안 미워해.”

 

대성이 피 묻은 입으로 영소에게 말했다.

그리곤 영소가 어떤 반응도 하기 전에 연청의 왼팔을 바깥에서 감아 잡더니 뒤로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척도 없는 암습이었다.

연청의 몸이 절로 반응하여 뒤틀림을 바로 잡는데 대성의 발이 연청의 오금을 깊이 밟고 튕겨버렸다.

연청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엇!"

 

놀라는 소리가 연청과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대성은 어느 새 영소의 손을 잡고 연청에게서 멀찍이, 에워싼 사람들로부터도 거리를 둔 곳으로 달아났다.

몸이 고꾸라지기 전보다 더 날쌨다.

 

"더 때려요.“

 

강문설이 냉정하게 말했다.

연청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검은 땅에 깊숙이 박아버리고 칼집을 오른손으로 바꿔잡았다.

맞은편에서 대성이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고, 영소는 대성의 뒤에 병풍처럼 서있다.

 

"제대로 된 병법은 배우지도 않고 간교한 술책만 쓰는구나!"

 

연청이 소리쳤다.

대성이 마주 소리쳤다.

 

"배고픈데 어쩌라고요.”

 

다들 이게 뭔 소린가하는데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소리쳤다.

 

"요괴 궁둥이하고 왼발이 없다!"

"세상에 요괴를 먹었어.

 

요괴가 사람을 먹는 경우는 흔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재주도 좋다. 먹는 기척도 안 보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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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쥐덫에 걸린 고양이

 

 

 

강문설이 묘진을 만난 곳은 풍림원의 큰 주방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찬모들은 내일 아침에 쓸 재료들 주변에 쥐덫을 촘촘히 깔아놓았다.

그 바람에 주방식구들이 아니면 밤에 혼자 주방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강문설도 주방을 바깥에서만 기웃거겼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들여다보니 고양이 한마리가 쥐덫에 걸려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른쪽 뒷다리가 틀에 끼여서 피가 난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머지 세 발로 틀을 벗겨 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강문설과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는 몸이 굳어졌다.

강문설은 장검을 뽑아서 고양이의 목에 걸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로 그 요괴구나!"

 

요괴 묘진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애처롭게 축 늘어졌다.

강문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별장이 수색도 하지 않아서 별나다 했더니 네가 여기 와서 걸려들 줄 알고 있었던 거였네.“

 

묘진이 사람 소리로 말했다.

 

"Don’t give me that. 조롱할 것 까진 없잖아.”

 

묘진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주 풀죽은 모습이었다.

강문설은 검을 거두고 등을 찾아서 불을 밝혔다.

주방 바닥에는 온통 쥐덫이 깔려 있었다.

묘진이 밟은 쥐덫은 불쏘시개로 쓰는 마른 솔잎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묘진은 바닥의 쥐덫을 피해서 솔잎을 밟고 움직이다가 걸렸다.

강문설은 웃음을 참고 말했다.

 

"우리 집 쥐덫이 좀 특별하긴 하지. 군에서 전마 발목 자르는 틀이니까.“

 

풍림원 대장간에서 농구나 무기 등 쇠로된 걸 만드는 장육자는 이종무를 따라서 군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쥐덫을 만드는 법을 몰라서 전마의 발목 자르는 도구를 개조해서 쥐덫을 만든다.

묘진은 앙칼지게 이빨을 드러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강문설이 요란하게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은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용타, 용타. 요괴 뼈가 야무지긴 하네. 말 다리도 깨부순다는 우리 쥐덫에도 잘리지 않았으니...”

 

묘진이 사람 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 봤자 좋을 것도 없어. 난 죽어도 또 살아난다는 걸 알 테지?“

 

강문설은 발 밑의 쥐덫들을 칼집으로 툭툭 쳐서 밀어버리고 가까이 앉으며 말했다.

 

"알지. 그런데 나도 요괴를 잘 죽여. 살아나면 또 죽일 거고.”

 

묘진이 끔찍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강문설은 쇠로된 부지깽이를 찾아들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해. 요괴들은 좀 순진하지. 바보 같고.“

"I agree with you. 그건 맞아.”

 

요괴 묘진이 탄식을 했다.

아궁이 옆에는 동그란 부싯돌이 있는데 그 크기가 국그릇 정도였다.

강문설은 부지깽이로 부싯돌을 톡톡 쳐 불꽃이 튀게 했다.

그 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바람을 천천히 내보냈다.

부지깽이 끝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고문하려고?"

 

요괴 묘진이 두려움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Tell me the better way. 더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하든지.“

"내 몸을 지지려고?"

"응, 묻는 말에 대답 안하면 귓구멍을 지지고 대답이 마음에 안들면 쓸모없는 목구멍을 지지려고.”

 

강문설이 미소를 머금었다.

요괴 묘진이 뾰족하게 외쳤다.

 

"차라리 나를 죽여!"

"You are not supposed to say that. 그건 네가 할 소리가 아니지.“

 

강문설은 죽으면서 도망가는 재주를 가진 요괴가 죽이라고 외치며 악쓰는 것이 가소롭다.

사람은 예민해지면 예민해진 대로, 둔감해지면 둔감해진대로 잔인할 수 있다.

천진한 어린아이가 잔인하다면, 점잖은 어른들은 때로 잔혹하다.

 

***

 

"못가!"

 

대성이 영소에게 속삭였다.

주방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성은 사모가 묘진을 발견하고 하는 말을 듣고 즉시 영소를 멈추게 했다.

이럴 때는 영소가 말을 잘 듣는다.

 

"지금 주방에 사모님이 와 계셔.”

 

영소가 귓속말로 물었다.

 

"엄마가 왜?"

"우리 찾으러 나왔다가 요괴를 찾았어. 주방에서.“

"요괴가 주방에? 아! 요괴도 배고파서 주방으로 왔구나. 하여간 짐승은 먹이 때문에 죽는다니까.”

 

영소가 속삭였다.

대성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요괴도 잡고 밥도 먹었을 텐데.“

 

주방으로 가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소리가 목 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색이 조금 묻어 나왔고 영소가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이때다 싶어 내 탓이지? 비겁하게 그러지마.”

 

영소가 처마밑의 그늘에 숨으며 물었다.

 

"엄마는, 요괴 죽였어?"

"아니, 고문하기 시작했어.“

 

고문이라는 말이 천진한 소녀를 흥분시킨다.

 

"가서 보자!"

 

영소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대성이 물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

"엄마한테는 안 들켜.”

 

많이 속여 본 영소가 자신있게 말했다.

대성이 귓볼에 코를 대고 속삭였다.

 

"대사형이 오고 있어.“

 

영소가 찔끔했다.

대사형 조성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소나 대성은 대사형 조성일의 끝을 모른다.

사부 이종무가 없었다면 대성은 조성일을 사부처럼 모셨을 것이다.

영소가 슬그머니 내뺄 채비를 하면서 물었다.

 

"배 많이 고프지?"

"응.”

"내일까지 참을 수 있겠어?"

"아니.“

 

대성은 짧게 대답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영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색을 살피는데 대성의 배에서 꾸룩소리가 나고 목구멍에서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주방이 멀지 않아서 음식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대성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Just do as I say. 내 말하는 대로 해.”

"뭘?"

"너는...“

 

설명을 들은 영소는 초조한 기색이었지만 대성은 단호했다.

이정도로 확신에 차 있을 때는 영소도 대성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대성은 땅으로 내려와 머리에서부터 이불을 쓰고 이불자락으로 목을 둘렀다.

그러자 괴상한 장포를 입은 것 같기도 하고 어둠 속의 하얀 유령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서 눈만 반짝거리고, 움직일 때마다 이불자락 속으로 몸도 언 듯 언듯 보였다.

영소에게 눈짓을 하고, 대성은 먼저 바람의 검을 펼쳐서 달려 나갔다.

영소는 하나, 둘, 셋을 헤아리고 주방의 뒤쪽을 향해 달렸다.

먼저 간 대성이 주방은 지나서 다른 건물 앞을 돌면서 고함쳤다.

 

"불이야! 불이야!"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부지깽이로 묘진을 고문하던 강문설은 풋! 하고 웃었다.

비명을 참느라고 몸을 벌벌 떨던 묘진이 이빨을 드러내며 앙칼진 표정을 지었다.

 

"성동격서, 요괴가 진을 사용하더니 병법도 쓸 줄 아네. 밖의 저 요괴는 언제 들어온 거야?"

 

강문설이 웃으면서 강문설이 물었다.

빨간 부지깽이를 보면서 묘진이 몸을 움츠렸다.

 

"난 몰라. 여기 온 건 나 뿐이야. 진짜야. 난 언제나 혼자 움직여.”

"그럼 뭐 밖에 저것...들은 대성이나 영소라도...”

 

대꾸하던 강문설은 부지깽이를 바닥에 던졌다.

순간 주방의 뒷문이 확 열리더니 무언가가 들어왔다.

강문설은 대뜸 한 걸음 쭉 나아가서 멱살을 잡았다.

정말 영소였다.

 

"컥!"

 

영소가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 손에 매달렸다.

대성과 함께 바람의 검을 익힌 영소였지만 피할 틈도 없었다.

강문설은 영소를 치켜들고 호통 쳤다.

 

"어디 계집애가 도둑고양이처럼 밤에!"

 

영소가 축 늘어지면서 강문설의 손을 탁탁 쳤다.

강문설은 그제야 손을 조금 풀어주었다.

 

"대성이 배고프대요.“

 

영소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덜 떨어진, 밥 퍼주는 년 같은 소리를 했다.

강문설은 이마를 짚었다.

발랑 까지면 까지기만 하든가, 덜 떨어져서 남자한테 홀라당 넘어간거면 그것만 하든가.

그때 주방의 앞문이 또 벌컥 열리더니 바람이 안으로 확 몰아쳤다.

 

"이녀석!"

 

대성이라고 지레 짐작한 강문설이 호통 치면서 몸을 홱 돌렸다.

 

"엄마야!"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뛰었다.

대성은 보이지 않고 하얀 귀신이 주방으로 날아들었고, 쥐덫에 걸려 있는 요괴 묘진을 휘감아서 뒷문으로 날아가버렸다.

검술 명가인 진주 강가의 딸로 여장부인 강문설이지만 귀신은 무섭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했지만 영소를 찾아서 고개를 돌렸는데, 영소도 광주리 하나를 들고서 뒷문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잡혀 있으면서도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게 그 틈에 남은 밥이 어디 있는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풍림원에서는 저녁에 먹다 남은 밥으로 새벽에 미음을 끓여서 일찍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다.

영소가 들고 튄 광주리에는 미음 끓일 밥이 가득 들어있다.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강문설은 자기가 대성의 장난질에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아직 혼례도 안 치른 것들이, 딸년은 서방 될 놈과 함께 친정을 털었다.

아까 딸년은 요괴를 죽여서 도망치게 만들었고, 그 짝 되는 놈은 요괴를 훔쳐가 버렸다.

 

"이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강문설이 쇠로된 부지깽이를 다시 주워들며 이를 갈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조성일이 주방에 들어서며 물었다.

 

"사모님, 요괴는...?"

"대성이 놈이 훔쳐 갔어요.”

 

이종무의 큰 제자인 조성일이 강문설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

그래서 강문설도 남편의 제자기는 하지만 늘 존대를 해왔다.

조성일은 그답지 않게 어리둥절했다.

 

"대성이 왜 요괴를 훔쳐갑니까?"

"천방지축이 하는 짓을 누가 알겠어요?"

 

강문설이 탄식했다.

 

"조별장님, 이것들을 몽땅 잡아다가 버릇을 좀 고쳐주세요.”

 

조성일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연청이 대성과 영소를 뒤쫓는 중이었다.

뒤쳐진 영소가 고함쳤다.

 

"같이 가!"

 

대성은 몸이 작아지기는 했지만 더 단단하고 잽싸졌다.

힘도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밥 바구니를 든 영소가 쥐덫에 걸린 요괴를 든 대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밥!"

 

용소가 급히 외치자 대성이 휙 돌아와서 손을 잡았다.

그 뒤에는 연청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대성도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니 어둠 속을 날아가는 유령 같았다.

탈태환골의 효과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배는 고파도 힘을 쓰니 모든 게 자연스럽고 점점 더 익숙해졌다.

영소가 대성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너 미쳤어? 이 요괴는 어디에 쓰려고 가져 온 거야?"

 

원래 계획에는 성동격서로 밥만 훔쳐오는 거였다.

대성은 대답대신 더 힘껏 달렸다.

짧은 거리라면 연청에게 순식간에 따라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멀면 술법에 가까운 연청의 바람의 검은 속도가 많이 느려진다.

대성의 바람의 검은 무공이라 할 수 있기에 그런 단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성은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조금만 더 달리면 연청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We can do it. 할 수 있어.”

 

대성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숲이 코 앞이었다.

연청은 앞에서 달려가는 허연 것이 정말 대성인지 의심스러웠다.

대성은 이미 어른만큼 컸는데 저 모습은 너무 작다.

처음에는 또 다른 요괴가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요괴가 바람의 검을 펼칠 수는 없다.

조금 색달라 보이지만 영소의 손을 잡고 달리는 허연 덩어리는 분명히 바람의 검을 펼치고 있다.

성미 나쁘기로 유명한 영소가 대성이 아닌 사람의 손을 잡을 리도 만무하니 귀신 같은 덩어리는 대성이다.

탈태환골하고 작아졌다더니 정말 작아졌다.

그런데, 대성의 구결로 만들어진 바람의 검을 연청이 따라잡지 못하는 중이었다.

연청은 대성이 돌 던지기에서 시작하여 이제 발가락으로 몸을 던지는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했다.

급하게 소리쳤다.

 

"막내야! 요괴만 놓고 가라. 늙은 요괴다. 힘을 회복하면 너희들이 감당 못해.”

 

대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도리질 치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연청은 급하기도 하고 대성을 잡지 못하자 화가 치밀었다.

잡히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속도를 더했다.

숲에 가면 숲에 이는 바람을 잡아두는 숲 그림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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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과거의 여자

 

 

 

요괴는 매우 이상한 존재다.

그들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사람과는 다르다.

귀신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도 귀신은 아니다.

사람인 척하면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요괴도 있다.

자기들 나름대로 위계와 조직이 있고 도리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해친다.

조성일은 그런 요괴를 싫어한다.

 

"Not bad. 잘도 만들었군.”

 

요괴 묘진의 뇌정멸운살진 안을 걸으면서 조성일은 자기의 무기 흑금척으로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렸다.

흑금척은 길고 각진 자로 온통 검은 색이고 눈금은 새겨져 있지 않다.

무게는 열다섯 근이고 매우 단단해서 투구와 갑옷은 물론이고 바위도 부순다.

몸이 말라보이지만 조성일도 정칠품 별장이었던 무장이다.

병법과 진법을 깊이 배웠지만 일신의 무공은 어릴 때부터 닦아서 매우 고강했다.

조성일 보다 앞서 걸으며, 석상처럼 굳어져서 눈만 데굴거리는 요괴를 베던 연청이 물었다.

 

"사형, 요괴들은 이런 진법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진은 대부분 요괴들의 거야. 사람이 만든 건 몇 개 안돼.”

 

조성일은 별의 그물에 잡혀서 굳어 있다가 연청에 의해 죽은 요괴를 자세히 본다.

목은 잘렸지만 여전히 머리가 얹혀있고, 손에는 큰 깃대가 들려있다.

이 깃대들이 이어져서 호풍환우하고 신장귀졸을 불러내는 조화를 일으킨다.

 

"요괴가 원조라고요? 금시초문입니다.”

"사실이 그래.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지. 너도 봤을 거 아니냐. 높은 산에 느닷없이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가 하면 골짜기에 천둥이 치거나 안개가 가득차는 것들. 진은 그런 걸 모방하니까.”

 

연청이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방하면 요괴들이지요. 그들이 자연현상을 모방해서 진을 만들었군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을 이루는 깃발들이 견고하다.

머금고 있는 기운이 매우 짙다.

사람이 치는 진의 깃발들은 이처럼 단단하기 어렵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요괴들의 진은 대단하다.

보통 사람들은 요괴들의 진이 펼쳐진 줄도 모르고 길을 잃거나 살해당한다.

그들에게는 그냥 횡액이다.

군에서는 깃발을 잡는 기수들을 특별히 훈련시키고 먹인다.

전장에서 그 기수들이 장수의 지휘에 따라 자기들의 기운으로 깃발을 휘둘러 조화를 만들어 낸다.

조성일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연청에게 명령했다.

 

"한 바퀴 돌면서 다 죽여.”

 

연청이 바람의 검을 펼쳐서 절진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요괴 묘진의 부하들이 남김없이 살해당한다.

조성일의 뒤를 따라가며 호위하던 전삼자가 물었다.

 

"조별장, 나는?"

"Wait here, please. 여기서 대기하십시오.”

 

전삼자는 조성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조성일의 말은 이종무의 말과 다름없다.

 

"얼마나?"

 

그렇게 물을 뿐이다.

조성일은 자기가 두드렸던 부분들을 가리켰다.

 

"지금은 이곳이 제일 약한 곳입니다. 그물도 느슨하지요.”

"요괴가 달아나려면 여기로 오겠군.”

"생포하십시오. 죽이면 또 달아납니다.”

“It’s not gonna be easy 쉽지 않겠는데...”

 

전삼자가 창으로 땅을 툭툭 쳤다.

 

"그거 오래된 요괴야. 조별장이 더 잘 알겠지만.”

전삼자는 별의 그물을 쓰지 못한다.

풍림원 안에서 이종무 외에 별의 그물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큰제자 조성일이 유일하다.

절진 안에서 밖을 보면 푸르스름한 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물속에서 물 밖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진을 펼쳐서 사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뇌정멸운살진을 펼치는 요괴라면 파훼하지는 못해도 걸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덫을 놓는 게 최선입니다.”

 

전삼자가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실수로 죽이더라도 이해하게. 생포만 생각하다가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종무가 사용하는 방법을 전삼자에게 썼다.

 

"생포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의 능력을 목표 달성 가능한 만큼 끌어올려 버리는 기술이다.

완벽하려면 까마득하지만 조성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금씩 쓸 수 있었다.

조성일은 사부 이종무한테 이 방법으로 하도 당하다 보니 그 이치를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은 풍림원에서 장원을 관리하는 게 일이 되어버렸지만 조성일은 타고난 총명과 뛰어난 무공으로 일찍부터 상장군, 대원수 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재였다.

 

"덫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조성일이 웃었다.

 

그런데 그들이 잡으려 하는 요괴 묘진도 보통이 아니었다.

숨어서 절진을 살피다가 약해진 부분이 함정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채고 다시 장원 안으로 은밀히 달아났다.

묘진은 이종무에게는 절대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기척도 없이 자기의 깃발들을 빼앗아 장악해버렸던 조성일의 무서움도 알고 있었다.

두렵기는 하지만 풍림원에 숨어 있으면서 뇌정멸운살진이 저절로 해체되기를 기다렸다가 빠져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전에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함정을 피해서 달아났던 묘진은 다른 덫에 걸리고 말았다.

비명도 못 지르고 <아이고 맙소사!>를 속으로 외쳤다.

 

***

 

"영소 말예요.”

 

영소 어머니 강문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종무가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혼인을 시키려면 빨리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막내하고?"

 

이종무가 물었다.

강문설이 당황했다.

 

"그럼 다른 생각이 있으셨던 가요?"

"아직 그런 건 없소.”

"당신은 대성이가 마뜩치 않은가요?"

"그럴리가.”

 

이종무는 아내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본다.

 

"입 한 번 맞췄을 뿐이잖소.”

 

강문설이 발끈했다.

 

"입 맞췄으면 더 뭘 못하겠어요? 애라도 들어서기 전에 혼인시켜야지요.”

 

영소의 성미는 상당부분 강문설로부터 물러 받았다.

못된 말투는 이종무한테서도 왔겠지만.

이종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도 가만 보면 아주 답답하오. 자주 어울리다보면 입도 맞출 수 있는 건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강문설의 안색이 변했다.

 

"자주 어울리다 입맞춘다고요?"

 

이종무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를 물렸다.

 

"인연이 되면 부부가 될 거고, 아니면 그냥 추억인 게지.”

"그게 과년한 딸 가진 아버지가 할 말씀인가요?"

 

강문설의 음성에는 서운함과 분기가 서렸다.

 

"그만 하시오. 어찌 살던 좋으면 됐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하게 놔두시오.”

"그래서 그 둘이 혼인시키겠다는 건가요 말겠다는 건가요?"

 

이종무는 늘 웃던 얼굴로 강문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우리 가치로 애들을 묶으려 들지 마시오.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게 보이지 않소. 이게 다 시대가 바뀌는 것이오. 시대 따라 가치도 바뀌는 거고. 제 마음대로 살아야 자기를 다 펼쳐볼 수 있고 제 가치대로 행동해야 후회가 없지 않겠소? "

 

강문설은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럼 이렇게 위태위태한 심정을 안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이종무가 대답했다.

 

"먼저 난 사람의 의무지. 어른이 어른 되는 길이고.”

 

강문설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당신하고 말하다보면 내 머리가 이상해져요.”

 

이종무는 그냥 웃고 만다.

영소도 대성도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들이다.

그들의 인연이 얼마나 끈질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문설도 이종무에게는 묻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이종무에게 시집올 때 이종무의 나이 마흔이 가까웠을 때였다.

그녀도 혼기가 늦어서 스물 두 살이었다.

전쟁을 치른 장군이었고, 군에서 나온 후에는 한 동안 강호를 떠돌았던 이종무였다.

그런 이종무에게 그녀 이전의 여자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될 걸 알게 되면 평생 마음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여자의 직감으로 안다.

이종무가 이런 이상한, 시대에 맞지도 않은 이성관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어지간하지 않은, 매우 지독한 사랑을 했지만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 때문에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등잔 같이 위태로운 마음이 있다면, 아내가 품고 살아야 할 어떤 것도 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물어보자"

 

강문설은 마음먹었다.

 

***

 

"국수 맛이 어떠하오?"

 

이종무가 강문설을 처음 만나 물었던 말이었다.

강호에 나와서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다닐 때, 안동 비봉사 근처의 노상 음식점에서였다.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나는 듯하여 강문설은 고개를 높이 들었고, 마치 장대처럼 큰 사람이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이종무는 여름이었는데도 여우털로 만든 조끼를 입고 머리에는 꿩의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몸은 말랐고 눈은 차분한데도 빛이 났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구릿색이었으며 광대와 턱뼈가 두드러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이종무가 음식을 핑계로 강문설에게 수작을 걸었다.

강문설과 똑같은 국수를 주문하고는, 나눠먹자며 젓가락 한 개를 강문영에게 주고 자기는 남은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었다.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는다니...

강문영은 킥킥 웃었다.

그랬는데 이종무는 정말 젓가락하나로 국수를 휘저어 감더니 꽂감 빼먹듯이 국수를 한 입에 삼켜 버렸다.

노점에서는 자두며 여름 과일들을 팔았다.

이종무는 자두 하나를 달라하고는 또 강문설과 나눠 먹자고 했다.

강문설은 이종무가 또 어떻게 재미난 장난을 보여줄지가 궁금했다.

씨가 두꺼운 자두를 두 사람이 나눠 먹는다는 건 매우 불편하다.

과육이 딱딱한 씨앗에 붙어서 쪼개 먹기도 쉽지 않다.

정말 묘한 재주를 부린다면 점점 더 수작에 말려들 것 같아서 강문설은 손을 내저었다.

 

"수작 그만 부리세요.”

 

일어나려는데 이종무가 자두를 그대로 건너주었다.

 

"가져 가시오.”

 

강호에 다니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수작 부리는 자를 만나기도 한다.

엉터리 같은 불한당도 있지만 점잖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점잖은 사람도 말 한마디에 물러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문설은 이종무의 선선한 태도에 호감을 느꼈다.

얼떨결에 자두를 받아버렸다.

그대로 일어나 떠나는데 이종무가 뒤에 서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어떨 것 같으냐?"

 

나중에 알았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조성일이었다.

 

"왜 하필 자두입니까. 저쪽에 덜 여물긴 했지만 대추도 있는데. 자식을 낳으면 딸이겠습니다.”

"내 팔자겠지.

 

이종무는 껄껄 웃었고, 강문설은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

 

"저 멀대가.“

 

손에 쥔 자두를 던져버리려하는데 이종무가 뒤에서 물었다.

 

"내 나이 마흔이오. 이제 돌아가서 가정을 꾸미려하니 함께 가지 않겠소?"

 

단순한 수작이 아닌 진지한 청혼이었다.

초면에 말 몇 마디 주고 받았는데 결혼하잖다.

강문설은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못했다.

이종무가 말했다.

 

"음식은 젓가락 하나로도 먹을 수 있지만 가정을 이루는 건 혼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그대는 내가 준 젓가락을 받았고 자두도 받았으니 나와 함께 갑시다.“

 

재미있지도 않고 부탁하는 말이면서도 권위가 깔려 있어서 거역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런데 기분이 아주 이상하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강문설은 그날 밤 숙소로 찾아온 이종무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름은 그 후에 물었다.

 

"제 낭군 되시는 분 성함은 어찌되시는지요?"

"이종무.“

 

그게 다였다.

남녀의 연애란 대체로 이렇다.

알콩달콩한가 하면 매력적이고 운명적이다.

때로는 단순하게 육체적으로 귀착되는가하면, 이루거나 못 이루거나 간에 고귀하게 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그저 육체와 정신의 짝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짝이 맞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순간에는 항상 불같은 진전이 이루어진다.

아니라 생각되면 물을 끼얹은 재처럼 불씨마저 사라져 버린다.

얼렁뚱땅 홀려버렸던 젊은 날보다 이제 강문설은 세상을 알 만큼 안다.

세상에 진짜 딱 맞는 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자석은 아무 거나 서로 당기지 않은가?

남녀도 그런 면이 있다.

어느 정도 끌리면 짝이거니 하고 사랑이란 말로 울타리 쳐서 서로 가두고 연인이란 신분을 서로에게 부여한다.

 

***

 

강문설은 남편 이종무가 서재로 돌아가기 전에 옷자락을 잡았다.

 

"말씀해주세요. 이전에, 저 보다 먼저 만난 여성분이 있었겠지요?"

"쓸데없는 소리. 자고 나면 어제도 사라지고 없는 건데 뭔 옛 이야기요.”

 

이종무는 당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강문설은 어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겠다면 제가 당신 이전에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이종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 없잖소? 다 알아봤소.”

"당신 만날 때가 스물 두 살이었는데, 아무렴 그때까지 마음에 품은 사람 하나도 없었을까요?"

 

질투심을 자극해서 괴롭히겠다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종무는 강문설의 손을 떨치고 나가버렸다.

이 정도가 강문설의 한계였다.

명문의 딸로 자라서 스물두 살에 유람을 핑계로 겨우 집에서 빠져나왔다가 이종무를 만났던 게 그녀가 한 일탈의 끝이었다.

이종무가 더 하라고 해도 강문설은 스스로 자기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성미는 그와 별도다.

강문설은 이를 앙다물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보검을 챙겨 든 후에 영소를 찾아 나섰다.

칼집으로 영소 볼기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영소와 대성 콧배기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요괴 묘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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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폭포에서 실랑이

 

 

 

"It’s so cool. 시원하다.”

 

폭포수 아래 연못에 몸을 담근 대성은 헤엄치며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소는 혼자 동굴 안을 청소하면서 불만으로 입이 툭 튀어 나왔다.

방앗간에서 나무토막 의자도 훔쳐 옮기고, 긴 나무판자도 가져다가 돌을 괴어 침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꼴 보기 싫으니까 뭐라도 걸쳐!"

"Nobody is here. 아무도 없어.”

 

대성은 아예 대놓고 영소 보란 듯이 물에 누워서 다리를 파닥거렸다.

 

"쬐그만한 게.”

 

곁눈으로 슬쩍 본 영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성의 지금 모습은 여섯, 일곱 살 쯤 된 빡빡머리 꼬마일 뿐이다.

대신 빨래 말리는 곳에서 쓸어온 옷이며 천들을 어떻게 동굴로 옮길 것인지를 고민했다.

폭포수 밑으로 들어가면 다 젖어버릴 텐데, 안에서는 말리기가 쉽지 않다.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옷이 다 젖는 것도 문제다.

잠시 놀다 갈 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막상 숨어서 살려니 번거로운 게 한 둘이 아니다.

성가시고 짜증나서 옷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눌러 놓고 대성이 헤엄치는 근처 바위에 앉았다.

멀리서 구름이 풍림원을 감싼 모습이 큰 장벽처럼 근사하다.

머리 위 하늘에도 옅은 구름이 이리 저리 흐른다.

의도치 않게 된 현상이지만 풍림원이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

영소가 가만히 앉아있자 대성이 바로 밑에 와서 헤엄쳤다.

빡빡머리 하얀 몸뚱이가 물속에서 꿈틀거리니 이상한 물고기 같아 보였다.

상체를 물밖에 낸 대성은 영소가 앉은 바위에 기대어 함께 가을을 감상했다.

영소가 reach out her hand. 손을 내밀었다.

대성이 손을 건네주고, 둘은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보지는 않고 가만히 가을 정취를 즐겼다.

 

"나...

"분위기 깨는 이상한 소리면 말하지 마. 난, totally exhausted. 오늘 완전히 지쳤어. 놀라고 부끄럽고, 실은 너하고 아웅다웅할 힘도 없어.

 

대성이 말문을 열려는 데 영소가 재빨리 먼저 말했다.

하지만 대성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I’m starving. 배고프다.”

"좀 참아. 어두워지고 나서 주방 털자.”

 

영소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성을 다독거렸다.

지난 5년간 한 번 도 없던 일이다.

대성은 뭉클하여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데 영소의 눈에 근처에서 제법 큰 물고기들이 대성에게로 헤엄쳐 오는 게 보였다.

 

"물고기다!”

 

영소가 반갑게 소리쳤다.

대성이 조금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방금 내가 오줌 쌌어.”

"에이 씨!"

 

영소가 대성의 어깨를 탁 쳤다.

 

"잡아.”

"내 오줌 먹었을 텐데...”

"그러니까 빨리 잡아! 더 먹기 전에!"

 

영소가 대성을 발로 확 밀어 버렸다.

영소의 힘에 못 이긴 대성이 풍덩하고 놀란 물고기들은 첨벙하며 달아났다.

 

"Go get’em tiger. 잡아! 힘내!"

 

영소가 소리쳤다.

대성은 영소의 응원이 욕으로 바뀌기 전에 물고기를 잡으려 손발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세 발자국도 가기 전에 물고기들을 다 흩어지고 말았다.

 

"에휴, 저 병신...”

 

영소가 결국 욕을 하고 펄펄 뛰었다.

대성도 화가 나서 소리쳤다.

 

"물속에서 어떻게 물고기보다 빨리 움직여? 자신 있으면 네가 해보던가!"

"뭐!"

 

영소가 폭발했다.

 

"내가 잡기만 해봐라.

"해봐! 해봐!"

 

대성이 대들었다.

이미 물고기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소가 바로 물로 뛰어들었다.

대성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It’s never gonna happen 네가 잡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잡았다!"

 

영소는 물고기가 아닌 대성의 팔을 나꿔챘다.

 

"어!"

 

놀랐지만 이미 늦었다.

팔이 잡힌 대성은 얼어붙어 버렸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일어선 영소는 대성보다 거의 두 배나 키가 컸다.

거인처럼 보이는 영소가 노려보자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영소가 때릴 것 같은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잡을 거야 말거야?"

"잡을 게.”

"너, 약속했다.”

 

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소를 올려다보는 게 영 부담스럽다.

물에 흠뻑 젖어 살이 비치는 영소의 모습에 가슴도 쿵쾅거렸다.

 

"못 잡기만 해봐라.”

 

물 밖으로 나가면서 영소는 살에 달라붙은 옷을 손톱으로 잡아당겼다.

매우 고혹적이었다.

영소의 뒷모습을 보던 대성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너, 궁둥이 크다.”

"뭐래. 쪼끄만 게.”

 

영소가 새침하게 퉁겼다.

 

폭포수 속 동굴로 들어간 영소는 침대로 쓸 널판지를 다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판자 아래에 옷이며 얇은 이불 같은 것을 넣어서 폭포수를 통과했다.

좀 젖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영소는 방앗간과 숲속에 있는 목재간을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것은 무조건 챙겨왔다.

그 동안 대성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고심했다.

여러 방법을 썼다.

다시 오줌을 싸서 물고기를 불러 보기도 했고, 돌을 던져서 잡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다.

물고기를 보고 돌을 던졌는데도 돌은 물에 부딪히며 빗나가기 일쑤였다.

나뭇가지를 창처럼 쓰려고도 했지만 대성의 키가 작아서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한 마리도 못 잡고 푸닥거리만 하는 셈이다.

영소가 오갈 때 마다 욕먹을까 긴장되어 눈을 핼끔 거렸다.

물고기는 못 잡고 못 잡은 데 대해 할 만한 변명거리만 머릿속에 수십 개나 쌓였다.

배는 점점 더 고파졌다.

란 선생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란 선생은 바쁘다며 대성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성은 한참을 물에서 헤엄치며 초조하게 보냈다.

해가 늬였해졌을 때 쯤에는 죽을 것 같은 허기가 느껴져 많이 다급해졌고,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어쩌면 머릿속의 통증이 사라져 바람의 구결을 만들었던 그 이전의 총명이 돌아왔기 때문일 거다.

아마도 물속에서 헤엄치며 물에 대해서 절로 익숙해진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가만히 느껴보니 물에도 결이 있었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길도 결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물고기들의 몸짓과 지느러미짓, 헤엄친다는 건 사람이 땅에서 걷는 것처럼 물의 길을 여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고기들은 문을 열듯이 물의 길을 열고서 달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느낀 후에 대성은 폭포를 자세히 보았다.

간혹 어떤 물고기들은 뭔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폭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거슬러 올라갔다.

대성의 생각이 옳았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에조차도 그에 거스르는 결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대성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서, 발 근처의 송사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길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곤 마침내 어느 문이 열렸는지에 따라서 그 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헤엄치는 송사리 한 마리를 표적으로, 대성은 고개를 숙여 손을 뻗었다.

송사리는 달아나려 했지만 대성의 손아귀로 쏙 들어왔다.

대성이 길을 장악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쪼그만한 거 자꾸 보고 있으면 뭘해!"

 

동굴 근처에서 영소가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쳤다.

대성이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이 물에 자기 자신을 비춰 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거 아니야!"

 

대성은 쏘아붙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송사리 잡은 것을 영소가 볼 수 있도록 들었다.

눈 밝은 영소가 보고 코를 찡그렸다.

대성은 저 버릇 때문에 영소가 더 못생겨지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쪼그만 거 맞네.”

 

철딱서니 없는 건지 괄괄함이 천성인지 영소는 자기가 한 번 한 말을 좀처럼 꺾는 법이 없다.

 

"그럼 이건?"

 

대성은 송사리를 던져 버리고 말했다.

 

"뭘?"

 

영소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성은 갑자기 물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다른 쪽에서 일어섰다.

손에는 자기 팔뚝 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How could you do that, 어떻게 한 거야?"

 

놀란 영소가 펄쩍 뛰었다.

대성은 대답대신 물고기를 영소에게 휙 던져주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서 대성이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자가 물 위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빠르고, 심지어 물결도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대성이 물고기라도 되어 버린 듯했다.

 

"우와...”

 

영소가 전에 없던 감탄을 내뱉었다.

대성은 물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밖으로 물고기들을 던졌다.

영소는 허둥지둥하면서 물고기들을 받으며 소리쳤다.

 

"그만, Enough is enough. 그만해도 돼.”

 

하지만 대성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영소한테 욕먹은 것을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자기를 과시하는 듯이 물고기를 닥치는 대로 잡아서 던졌다.

영소는 급한 김에 물고기들이 다시 물로 뛰어들지 못하게 발 뒷꿈치로 머리를 밟았다.

 

***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풍림원 본채 건물 쪽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아까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영소는 나뭇가지에 생선을 꿰서 구웠다.

연기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저녁 바람이 금방 흩어버려서 들킬 것 같지는 않았다.

대성이 많이 먹겠다니 여러 마리를 동시에 굽는데, 대가리가 멀쩡한 생선이 없었다.

불 앞에서 이불을 쓰고 쪼그려 앉은 대성은 생선 굽는 냄새에 침을 꼴깍인다.

 

"밥 좀 훔쳐오면 안 돼?"

"밤에.”

 

대성이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영소가 대답했다.

 

"솥하고, 그릇, 간장, 된장, 고추장 가져와야 할 게 많아. 반짓고리도.”

"그럼 차라리 돌아가서 방에 꼭 쳐박혀 있다가 밤에 사람 없을 때만 밖에 나오는 게 낫지 않을까?"

 

대성의 말에 영소가 한심한 듯이 쳐다보았다.

 

"왜?"

 

대성이 벌컥 소리치며 항의했다.

 

"차라리 도망을 다녀야지 쫀쫀하게 숨어있자고? 남자가 되어가지고.”

"너, 여기 동굴에 있는 것도 숨어 있는 거야.

"동굴로 도망쳐 온 거지.

 

영소는 때릴 듯이 구운 생선을 대성에게 건넸다.

대성은 원래 체격으로도 싸워서는 영소를 못 이겼다.

작아진 지금은 어림도 없는지라 입을 꾹 다물고 생선을 받았다.

배가 너무 고프고 밥 생각이 간절했다.

대성은 여태까지 단 한 끼도 굶어본 적이 없었다.

구울 때 냄새는 분명히 좋았는데, 생선은 맛이 없었다.

뭐든 잘 하는 영소는 맛없을 게 분명한 생선도 맛있게 먹는다.

 

"맛없어.”

"네 오줌 먹은 물고긴가 보다.”

 

투덜거리는 대성을 영소는 무시했다.

 

"네가 요리를 잘못해서지.”

"내가?"

"그래 네가.”

"You’re a such douchbag. 참 찌질하다.”

 

영소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대성을 보니까 정말 못 먹고 있었다.

구운 생선은 맛있기만 한데 배고파 죽겠다면서 못 먹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영소는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관심 없는 척 생선만 발라먹으며 곁눈질을 해도 대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생선을 아예 놓아버린다.

 

"가시 발라줄까?"

 

넌즈시 말했는데도 대성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맛없어.”

 

영소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엷은 구름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밝다. 땅거미는 숲 위에만 걸쳐있다.

영소는 용기를 내서 일어섰다.

 

"내가 너 때문에 도둑질을 다 한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같이 가.”

"옷도 없는 데 가긴 어딜 가? 벗고 다닐래?"

 

영소가 핀잔을 줬다.

대성은 어이없는 이유를 댔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다고.”

"내가, 씨... 너 물고기 잡은 성의를 봐서 봐준다.”

 

영소는 이불로 대성을 둘둘 말아서 안았다.

그 시간에 대사형 조성일은 풍림원의 정문 밖을 손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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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깃발

 

 

 

비상사태가 끝났을 때 영소 어머니가 말했다.

 

"영소가 올 때까지 여기 있거라.“

"영소는 물 가지러 갔어요. 내가 물 있는 곳으로 가면 안돼요?”

 

대성이 항의했다.

하지만 영소 어머니는 무시해버리고는 하녀들을 다 데리고 나갔다.

피난처인 밀실에는 대성 혼자 남게 되었다.

영소 어머니도 환골탈태한 까까머리 대성의 귀여워진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 다 자란 사내아이의 알몸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딸이 하는 꼴을 보면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다.

영소 나이 열다섯,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때다.

이럴 때 실수라도 있으면 몸 고생 마음 고생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달리 보면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고 품을 수 있는 때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감정을 부부가 함께 공유하고 때로 서로 꺼내놓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여느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딸이 그냥 이대로 쭉 탈 없이 대성하고 혼인해서 속 썩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거 빨리 시집 보내버려야 속을 덜 썩이지.“

 

딸이 한 엉뚱한 소리들 때문에 속이 상한 영소 어머니는 하녀들과 가면서도 중얼중얼 딸 욕을 하고 있었다.

 

"자! 공부 계속하자.”

 

혼자가 되자 란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막에 바로 비쳐지기 때문에 남이 볼 수는 없고 오직 대성만 볼 수 있다.

만약에 대성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동공 안에 거꾸로 선 란선생을 볼 가능성은 있었다.

 

"어떻게 해도 파괴자는 와. 너에게 이미 깃발이 꽂혀 있으니까.“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자기 장딴지를 톡톡 친다.

그게 묘하게 눈을 사로잡고 보기에 좋다.

 

"요괴를 파괴자라 하는 거지요?"

 

아주 어려진 대성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한테 벌써 길들여져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런 셈이지. 다른 것들도 있긴 하지만.”

 

란 선생은 작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도 빠른 속도로 지식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체계화하고 있었다.

대성을 통해서 다운로드 된 이 세계의 비밀은 사라지지 않은 채 대성의 몸에 남아있다.

란 선생은 다운로드 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요괴들, 아니 그 중에 파괴자들은 깃발이 꽂힌 대상을 찾아서 파괴하고 깃발을 회수하는 일을 해. 깃발을 많이 모을 수록 더 강한 요괴가 되는 거지.“

 

대성이 물었다.

 

"요괴들은 어떻게 생겨나요? 처음부터 있던 건가요?"

"그건 너무 많은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야! 배울 때 궁금한 것부터 파고드는 건 시간이 많을 때나 하는 거고. 질문할 때는 손 먼저 들고 하라고 했잖아!"

 

란 선생이 지시봉으로 대성의 손등을 탁 때렸다.

실제로 란 선생은 대성의 머릿속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대성은 손등을 진짜 맞은 것과 똑 같은 따끔함을 느꼈다.

 

"놀라긴. 감각을 통제하는 기능은 원래 머릿속에 있는 거야. 나는 인공지능이지만 효과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학생의 감각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거고.”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생글거리며 우쭐거렸다.

 

"똑똑한 학생이라면 미리 알아차렸어야지. 네 몸을 탈태환골 시킨 게 바로 난데.“

 

원래라면 강습용 인공지능에 사용자의 신체를 바꾸는 기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란 선생의 말대로 모든 게 가능했다.

이 세상은 견고한 형식이 있기는 했지만 변화를 만드는 확고한 방식 또한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은 데이터의 변형을 통한 응용과 활용에 달린 때문이다.

인공지능인 란 선생은 어느덧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떠나버린 자들이 남긴 로그 파일과 대성의 몸을 이루는, 이 세상을 구축한 비밀이기도 한 자료들을 학습하면 자기를 갱신한 것이다.

이는 떠나간 자들이 대성의 비어있는 속을 란 선생의 라이브러리로 채우기 위해서 급하게 우겨 넣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란 선생은 무수한 경쟁자들을 뚫고 살아남아 끝까지 존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록 "강습용" 인공지능이었지만,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은 "뛰어난 학습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란 선생은 강사나 선생들이 생존을 위해 줄곧 쓰는 방법인, 자기도 금방 알았으면서 옛날부터 알았던 것처럼 시침 떼는 게 몸에 배여 있었다.

대성에게는 란 선생이 대사형 조성일 보다 더 많이, 뭐든 다 알고 다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들었다.

영소만큼은 아니지만 싸가지 없는 대성이 그렇게 하는 건 놀랄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성이 아주 순둥이가 되지는 못한다.

자기 자랑에 도취된 란 선생 대신에 자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눈에 안 보이는 깃발이 꽂혀 있는데 요괴들은 그걸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저를 죽여서 깃발을 가져가려 하는 거라는 거 잖아요. 가져가서 더 강한 요괴가 되려고.”

"그렇지.“

"그러니까 깃발을 없애버리면 되는데, 깃발은 선생님도 못 없애고. 제 생각에는 요괴하고 깃발이 관계가 있으니까 깃발을 알아서 없애려면 요괴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였던 거지요.”

"You don’t need to explain it. 네가 설명할 필요 없어.“

 

란 선생은 마음이 상했는지 톡 쏘았다.

 

"내가 그렇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나중에 보면 알아!"

 

한 마디 따끔하게 하고 란 선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이 자식도 나하고 다를 게 없지. 여기 캐릭터들은 다 인공지능이니까. 특히 이 녀석은 캐릭터 제한을 벗어났잖아.)

 

제 할 말을 못하면 대성이 아니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안하면 영소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주세요.”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알고 있는 거 맞지요?"

 

란 선생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 올리는 시늉을 하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지켜봐야지. 그들이 너를 풍림원에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나쯤은 마련된 대비책이 있을 거야.“

 

대성은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란 선생도 조금 켕기는 듯이 자기 방어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한 거 아니잖아. 탈태환골 시켜 놓았으니까. 좀 기다려봐.”

 

조용히 온 영소가 밀실로 들어올 때는 누가 볼 새라 후다닥 들어왔다.

혹시 따라온 사람이 있을까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보기도 했다.

 

"물은?"

 

발가벗은 채 변색된 얇은 이불로 몸을 감고 앉아있던 대성이 물었다.

영소는 물 가지러 갔던 거였다.

깜박 잊어버렸던 거지만 영소는 이불을 대성에게 덮어씌우며 말했다.

 

"참아! 그럴 틈 없어.“

"왜? 목마른데. 배도 고프고.”

"아! 좀 참아! 그런 게 있으니까!"

 

영소는 목소리를 낮추고 고함치는 신기한 재주를 발휘했다.

영소는 많이 배워서 묘한 재주가 많다.

대성은 마주 쏘아부치려다가 청혼했던 게 생각났다.

화를 꿀꺽 삼키고 어른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소도 조금 누그러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도망치자. 내가 사고를 좀 크게 친 거 같아.“

 

대성은 풍림원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가만히 있어도 다 듣는다.

어떤 때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진다.

이것도 이제는 떠나버린 "그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서 대성에게 부여한 기능이다.

밖에서 일어나던 소동을 소리로는 들었기 때문에, 대성은 갸웃했다.

 

"요괴 도망친 거? 대사형은 별 걱정 안하는 거 같던데.”

 

영소가 신경질을 냈다.

 

"내가 쪽팔린단 말이야. 너 때문에 쪽 다 깠다고. 눈치없게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돼?"

 

대성이 참지 못하고 마주 소리쳤다.

 

"못 들었어? 지금은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고 못 들어온다는데 가기는 어딜 가?"

 

영소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넌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지?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 지 알아?"

"난 안 쪽팔리는 줄 알아? 나도 쪽팔려! 네가 내거 요만하다고 사람들한테 말해버렸잖아.“

"내가 뭐 거짓말 했어?"

 

영소가 톡 쏘고는 대성을 답싹 들어서 품에 안았다.

대성은 영소에게 안기자 얌전해졌다.

 

"어디로 갈려고?"

 

대성이 묻자 영소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방앗간 뒤에. 거기 가서 물 배터지게 마셔.”

 

대성이 동의했다.

풍림원에는 방앗간이 하나 밖에 없다.

방앗간 있는 곳이 풍림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방앗간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수가 방앗간의 물레를 돌리며 항상 탕! 탕! 소리를 낸다.

방아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꿍! 떡! 하는데, 떡을 좋아하는 대성은 그 소리가 떡! 떡! 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대성과 영소의 비밀 장소는 폭포수 뒤에 있었다.

들어갈 때 물에 흠뻑 젖기는 하지만, 폭포수 뒤에는 기어서 들어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입구를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좀 넓어지고, 낮에는 폭포쪽 입구가 밝기 때문에 깜깜하지도 않았다.

딱 키득대기 좋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영소가 좋아하던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것이 여기서 놀고 돌아가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영소는 이 동굴로 가기는 했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장소로서는 멋진 곳이지만 그저 어쩌다 마음이 동할 때만 대성과 함께 갔다.

마음이 동할 때라는 것도 비밀이긴 했다.

어른들이 방앗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싶거나, 간혹 아이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때였다.

 

"좋은 생각이야.“

 

대성이 영소의 귀에 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아이 씨!"

 

영소가 파리를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영소는 좀 덜 쪽팔릴 때까지 눈에 안 띄게 거기서 숨어 있다가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성이 생각하기에도 폭포수 동굴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방앗간에는 떡을 자주하니까 숨어 있어도 먹을 것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

 

노노인과 전삼자 등이 대성의 상태를 보기 위해 왔을 때, 대성이 있던 곳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튀었소. 탈퇴환골한 거 구경 좀 하려 했더니.”

"자네는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고개를 기웃거리던 노노인이 아쉬워서 전삼자에게 묻는다.

 

"좀 참으시오. 잠잠해지면 알아서 오겠지.“

 

"요괴가 돌아다니는 데 걱정도 되지 않나?"

 

노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전삼자가 딴청을 부렸다.

 

"돌아다닌다니 말이 좀 과하오. 숨어 다닐지는 모르겠소만. 풍림원 안에서 요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자네도 보고 싶다며.“

"나는 뒷감당하기 싫소. 영소가 사고 치고 도망갔는데 찾아봤자 원망 들을 일 밖에 없소.”

 

전삼자는 완강히 버텼다.

노노인이 화를 냈다.

 

"애들이 요괴하고 마주치면 큰 일 아닌가?"

 

전삼자는 못들은 척했다.

그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노노인이 대답을 기다리면서 계속 노려보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조별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따지려면 조별장한테 따지시오.“

 

조별장은 조성일이다.

조성일은 풍림원을 총괄하지만 느슨한 풍림원에는 특별한 직책이 없다.

이전 군 세력이 주축인 풍림원의 위계나 조직이 여타 문파보다 허술하다는 건 또 역설적이다.

전삼자와 노노인도 일반 무림문파라면 원로에 해당하겠지만 그냥 전아저씨, 노노인일 뿐이다.

다만 조성일은 풍림원의 이인자이기에 예전 군에 있을 때 직급인 별장이었으니 간혹 그렇게 조별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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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요괴 묘진

 

 

 

조금 전, 밖에서는 요괴 묘진과 대처하고 있을 때였다.

대성은 건초 타는 냄새를 맡았다.

이불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냄새였다.

영소가 연신 물을 끼얹었지만 물은 금방 증기로 변해서 사라졌다.

영소는 답답해서 폴폴 뛰었다.

대성을 물속에 넣고 싶었으나 비상사태라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들이 있는 피신처에는 욕조나 몸을 담글 만한 곳이 없었다.

 

"I’m so hot. 나 뜨거운 남자야.”

 

대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유쾌함을 회복한 남자의 시큼털털한 소리였다.

영소는 걱정이 되던 중에도 대성이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자 벌컥 소리쳤다.

 

"그래 이자씩아! 하도 뜨거워서 쪼글 감자도 다 익어버리겠다.“

 

대성이 작은 소리로 겸연쩍게 대꾸했다.

 

"That was supposed to be funny.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야.”

 

가까이 있던 영소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넌 말을 해도 어찌 그런 외설스런 말을...

Is this the end of being coy? 이제 내숭은 끝난 거냐?"

 

영소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우린 가끔 이런 소리도 해요.“

 

어머니로서는 질겁할 소리다.

영소는 대성에게 안달을 부렸다.

 

"그 좋은 머리로 빨리 어떻게 해봐. 탈퇴환골이고 뭐고 타죽겠다.”

 

대성이 여전히 나른하게 말했다.

 

"식힐 필요 없어. 도자기 굽듯이 내 몸이 구워지고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렇게 뜨거운데. 너 목소리도 바싹 구운 과자 같단 말이야.”

 

영소는 제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폴폴 뛰었다.

피신처에는 더 뿌릴 물도 당장 없었다.

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변색되었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 밑으로 민둥민둥 반짝반짝하는 맨머리가 보였다.

영소가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내우외환 설상가상이다. 너는 아프지 적은 침입했지. 못 생긴 게 이젠 대머리야.“

 

때마침 대성의 몸에서 뚜두둑 하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영소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대성을 빤히 보았다.

마치 허리가 빠진 건 아니지 하고 묻는 듯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금 크면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 간에 수작질 하게 되어 있다.

대성과 영소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성인 남녀들로부터 줏어들은 시털궂은 소리를 뜻도 모르면서 많이 주고 받기는 받았다.

묘한 재미가 있고 간질거리거나 때로는 조그마한 통쾌함이나 희미한 희열도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주고 받는 건 말 그대로 둘 만의 비밀이었다.

아이들은 자제하지는 못해도 무슨 짓을 하면 어른들한테 혼나는지 본능적으로 아니까.

무공이 늘지도 않고, 늘 싸우면서, 골이 깨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런 짓거리는 해왔던 것이다.

대성과 영소는 갑자기 둘이 멀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결국은 그렇고 그런 가시버시 사이가 되고 말 관계였다.

그저 시간 문제였을 뿐.

대성이 눈치로 짐작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뼈가 제자리 잡는 거야. 병신 되는 거 아니야.”

"I’m pathetic 에고... 내 팔자야.“

 

영소가 대성의 팔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곤 후후 입김을 불었다.

영소의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팔에 대고 부니?"

"엄만, 그럼 알몸인데 팔 말고 내가 어디에 대고 불어요?. 조신치 못하게.”

 

영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가 어머니한테 어깨를 찰싹 두들겨 맞았다.

한데 대성의 팔이 점점 짧아지고 가늘어지고 있었다.

대성의 모든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영소가 참을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렸다.

영소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속 긁는 소리를 했다.

 

"탈태환골이 아니라 반노환동인가? 늙지도 않았는데.“

 

대성도 자기 몸이 줄어드는 데는 몹시 당황했다.

대성의 몸은 내구성과 재질을 바꾸면서 쓸모없는 것을 태워서 배출해버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몸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대성도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맨숭맨숭한 머리조차 줄어드는 중이었다.

유쾌해진 대성도 더는 유쾌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잘 먹으면 다시 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하며 영소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에서는 대성에게만 보이는 란 선생이 자기가 만든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to make matters worse 설상가상으로 한심스럽다는 듯이 대성을 보았다.

 

- 대충 알기는 했다만 너 몹시 피곤하게 사는구나. 인간들은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 쯧쯔.

- 잘 모르면서 말하지 마세요.

 

대성은 란 선생에게 화를 냈다.

란 선생이 아랑곳하지 않고 조언을 해주었다.

 

- Do as I say 시키는 대로 해봐.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라고 해봐.

 

그 말은 바로 약이 되었다.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야.“

 

대성은 란 선생이 하라는 대로 말했다.

 

"정말?"

 

영소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I can assure you 확실해.”

 

대성이 엄숙하게 답했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라니까.

"I am just double checking. 그냥 재확인 하는 거야.

 

영소는 한숨을 내쉬고 갑자기 철든 소리를 했다.

 

"그냥 다시 자라기만 해. 미남 안 되어도 괜찮아.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제 눈에 안경이라잖아.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더 나아.”

"Look at you all grown up. 너 철 다 들었구나.“

 

대성이 낄낄거렸다.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그들을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 But this was not the time, guys. 짜식들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물론 그래도 세상은 이렇게 해야 돌아간다.

내일 망하든 말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애들은 애들답게 놀고, 각자 제 할 짓을 하는 중에 역사는 굴러간다.

그렇게 인간의 서사는 만들어진다.

Don’t be so serious. 너무 심각할 것 없다.

그런 세상이 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거나 움직이는 자들이 대성을 끝장내려 한다.

 

대성은 말 그대로 3척 동자가 되고 나서 몸이 식기 시작했다.

빡빡머리는 파르라니하고 피부는 반투명하며 손을 대면 찰떡처럼 쫀득거렸다.

잡아당기면 쭉 늘어지기도 잘했다.

 

"Don’t do that again. 다시는 하지마!"

 

대성이 질색했다.

하지만 영소는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그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몇 번이나 당겼다.

잘 키우면 정말 제일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피부가 좋고 몽실몽실해 보이는 어린아이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또 탈태환골 처음 해보는 주제에 대성이 급해서 뻥을 쳤을 가능성도 크다.

영악한 영소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단지 믿고 싶어한다.

대성이 영소의 손을 뿌려치는데 그만 이불이 함께 쭉 벗겨지고 말았다.

It was an accident. 사고였다.

다 봤다.

영소는 대성이 제일 잘생긴 남자가 되기는 커녕 과연 자라기는 자랄까 싶은 의심에 앞이 캄캄해졌다.

대성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몸은 이미 어른과 비슷했었다.

그랬던 몸이 3척 동자로 줄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다.

영소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성은 그때도 여전히 어린애다.

그리고 풍림원의 비상사태가 종료되었다.

반면 영소의 비상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이성 문제 외에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비정상이니까.

 

(또 그리고, 이쯤에서 이미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just to be safe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데, 나는 사고의 흐름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서술이 아니라 글쓴이다.

나는 이 석화세계, 천개의 에피소드 또는 천개의 검 이야기를 쓰지만 내 상상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다.

읽는 이는 이 이야기로 각자의 상상을 만들어 내가 쓰지 않은 부분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야기의 완결성? 코난 도일도 대충 마무리하고 독자한테 끝을 넘겨버린 셜록홈즈 편도 있지 않은가.

나와 읽는 이의 차이점은 오직 나는 지면에 상상을 입히고 읽는이는 자기 마음에 그린다는 것뿐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나 엉터리 같은 게 보이면 읽는 분 마음 가는 대로, 그 마음대로가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Go easy on me 나한테 좀 관대해주시라.

그래야 쓰는 나도 편하고 읽는 그대들도 편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소설에 서문이 없는 이유기도 하다.

서문만 아니라 이야기의 참여자로서 틈나면 내가 비집고 와서 주절거리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지 말고 함께 놀자.

나는 모난 돌 같은 대성과 영사 이야기 외에도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때로는 장막 뒤에서, 때로는 무대의 전면에서.

그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누나, 언니가 있었다면 사실 그들도 이렇게 왔다 갔다 했을 거다.

Who wouldn’t do this? 누가 안 이럴까.

정으로 이어져 있거나 잇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마 요괴도 그럴 걸?)

 

***

 

이미 밀실에 있을 때부터 작정했었다.

영소는 아예 도륙을 내버리겠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묘진에게 달려갔다.

아마 자기가 홧김에 불쑥 내뱉어버린 말의 진짜 의미를 생각을 시간을 남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숨어 있었을 거다.

It was probably for the best. 그게 상황을 모면하는 최선이었으니까.

영소가 못된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중에 마구 욕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나쁜 년, 누가 뭐 어째? 주둥이를 확! 가랑이를 확!"

 

전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하는 욕은 다 할 수 있다.

감히 요괴 묘진이 대성을 그냥 두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 때문이다.

 

"그만둬!"

 

조성일 소리쳤지만 영소는 이미 귀가 먹었다.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치마가 쓸려 내려오기 전에 묘진의 얼굴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대성과 대련할 때 막판에 겁을 주고 승리를 확정하는 영소 만의 의식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대성의 머리를 직접 박살내지는 않았다.

퍽!

눈이 크고 입술이 얇은 요괴 묘진의 머리에 철퇴가 떨어지는 듯,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깝...”

 

분한 표정을 짓던 묘진이 몸을 두어번 털썩 거린 후에 축 늘어졌다.

 

"어?"

 

영소는 한 번 더 묘진을 밟으려다가 기겁했다.

묘진의 시체가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금선탈각이라는 건가?"

 

영소는 중얼거리며, 누구 알려줄 사람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금선탈각은 껍질 벗고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아저씨나 노노인이 마저도 못 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소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과 자기가 좀 큰 사고를 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 씨! 물 떠러 나왔다가 이게 뭐야!"

 

투덜대며 아버지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종무는 무덤덤해 보였다. 대체로 항상 그런 표정이지만.

조성일이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사부님, 골치아프게 되었습니다.“

 

이종무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졌더니 큰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청이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가 도망쳤습니까? 이 요괴는 많이 별난 모양이군요.”

"목숨이 여러 개인 요괴였어. 이런 건 보통 죽으면서 달아나지.“

 

사부가 귀뜸만 해줬어도 놓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부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조성일은 원래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원망도 못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느라 잠시 눈만 찌푸렸다.

연청이 걱정했다.

 

"그럼 큰 일 아닙니까? 밖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조성일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별의 그물에 잡힌 뇌정풍운멸살진의 흰 구름은 여전히 은은한 우레소리를 내면서 풍림원을 맴돌고 있었다.

 

"차라리 그러면 좋지. 별의 그물에 붙잡힐 테니까. 안에 숨었을 테니까 잘 찾아봐야지.“

 

조성일한테 한소리 들을까 싶어서 영소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

요괴가 달아났지만 속은 좀 풀렸다.

무책임하지만 사고 수습은 원래 어른들의 몫이다.

이는 책임감과 다르다.

사고를 치고 나서 아이들이 할 일이란 어른들한테 혼나고 반성하는 것뿐이다.

함부로 제가 친 사고를 직접 해결하려다가는 정말 어른들도 수습 불가능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자기는 자기대로 망가질 수 있다.

어른스런 아이는 좋지 않다.

아이가 어른스럽기를 기대하는 어른은 어리석은,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다.

 

"영소나 못 달아나게 잡아놔.”

조성일이 말했을 때는 벌써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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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상인의 전쟁

 

 

 

대문 밖 구름 속에서 고양이 머리 같아 보이는 가죽 가면을 쓴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가죽옷을 입고 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귀는 하얗거나 볼그스름했고 긴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출렁거렸다.

 

"Eblis! 요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긁적거리던 조성일이 여자를 힐끗 보고는 이종무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보자마자 요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림원의 젊은 무사들만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놀란다.

노노인이 혀를 찼다.

 

"군진을 쓰기에 누군가 했네.”

 

연청이 물었다.

 

"요즘은 요괴도 군진을 씁니까?"

 

노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부터 그랬어. 경우가 드물긴 해도. 보통 요괴들은 이렇게 백주 대낮에 잘 움직이지도 않거던.”

 

고양이 머리가 걸어오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누구보고 요괴래. 신성한 파괴자님더러. 자!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놈 내놔.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이종무가 가까이 있는 전아저씨, 전삼자에게 물었다.

 

"외모에 자신이 좀 있는 거 같지?"

"Probably, I suppose so. 그런 거 같습니다. 지모는 좀 떨어지는가 봅니다. 고양이 주제에 호랑이 굴이니 뭐니 하더니 불쑥 들어오는군요.”

 

전삼자는 태연자약하게 창날을 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종무가 이번에는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는 누구 보라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냐?"

"요괴가 예쁘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뭔가를 적고 그리면서 두드리던 조성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 예쁘면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기 좋은데 척 하는 게 다 속이는 거지. 예쁘면 속이기 좋기 때문에 저 요괴가 예쁜 거야.”

 

전삼자는 웃었다.

조성일은 요괴가 예쁜 척하듯이 바쁜 척하며 반쯤만 수긍하며 머리를 반만 끄덕였다.

영소의 이상한 말버릇은 분명히 사부 이종무의 젊은 시절 말버릇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종무는 조성일의 어깨를 툭 친후에 고양이 요괴에게로 물었다.

 

"이보게 처자. 이름이 뭔가?"

"나는 파괴자 묘진이다. 빨리 그놈이나 데려와.”

 

노노인이 중얼거렸다.

 

"장군님 앞에서 파괴자는 개뿔.”

 

이종무가 물었다.

 

"뇌정멸운살진은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지?"

 

"흥. 알긴 아는구나.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다.”

"Too bad, too bad. 아깝겠다.”

 

이종무는 성큼 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길어서 보통으로 걷는데도 보통 사람이 뛰는 듯 빠르다.

묘진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종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예쁘게 죽는 모습을 그놈들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이종무에게서는 어떤 기세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대처럼 큰 사람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싹함을 느낀 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이종무가 물었다.

 

"준비는?"

"Hang in there.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조성일이 대답했다.

 

"버티긴 뭘...”

 

요괴 묘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조성일이 말했다.

 

"잡았습니다. 별의 그물로 뇌정멸운살진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물로... 진을 잡아?"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던 요괴 묘진의 가늘고 날렵한 다리가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의 의미는 묘진이 부리는 구름속의 벼락처럼 자기의 혼을 꿰뚫었다.

 

"전선의 마왕 비상인!"

 

놀람과 충격, 두려움으로 요괴 묘진의 맥이 풀어져 버렸다.

이종무는 천천히 걸어가 묘진의 고양이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묘진은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아나지도 못했다.

몸 주변에서 작은 빛이 연이어서 명멸할 뿐이었다.

이종무의 무공, 별의 그물에 이미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성일이 뇌정풍운멸살진을 붙잡은 것도 별의 그물이고 이종무가 요괴 묘진을 결박한 것도 별의 그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성일은 담장에 설치된 자기의 진을 이용했고 이종무는 직접 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 예전 전쟁하던 시절, 적의 군진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학살했던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의 그물이이다.

전삼자가 혀를 찼다.

 

"I told you.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우습군요. 힘도 없는 장수가 앞장서다니. 요괴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가 봅니다.”

 

연청이 가소로운 듯이 내뱉었다.

이종무가 손을 높이 들자 묘진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아귀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Do your worst. 네 멋대로 굴어봐.”

 

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에게 아무 겁없이 달려든 댓가였다.

 

이십 여 년 전, 전쟁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 년을 끌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끝이 났었다.

전쟁을 한 세 나라의 군사는 수를 합치면 1백 20만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차가 6만대가 넘었다.

그러나 피해는 오직 두 나라에서만 났다.

한 나라는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25만 군사 중에서 오직 7만 명만 실제 전투에 참여 했었다.

그렇게 하고도 전세는 3개월 만에 승리로 굳어졌다.

나머지 9개월은 그냥 질질 끌다가 별 이유도 없이 5만 명을 잃고 the war finally ended 마침내 종전했다.

그 중심에는 전쟁 중에 물러나고 잠적해버린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 장군은 아군에게는 전장의 신이라 불렸고 적들에게는 전선의 마왕이라고 불렸다.

병법에 통달했던 그는 전장에서 홀연히 자기만의 무공을 깨달았다.

그 무공은 무림의 어떤 무공과도 달라서 누군가는 도술이라 불렀다.

병사를 부리는 그 장군의 용인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했다.

그의 병사들은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물을 가리키면 물로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망설임없이 불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설혹 그가 불로 뛰어들게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불타죽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용인한 irregular 비상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자들은 그 장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파괴자도 그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

그 장군, 전선의 마왕, 전장의 신, 전쟁의 신이라 불린 사람이 눈앞의 장대 같은 사람이었다.

 

"Are you tryna(trying to) get rid of me? 저를 죽을 건가요?"

 

묘진은 체념하고 멍해진 눈으로 물었다.

구름 속에 있는 부하들을 먼저 투입했으면 비상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Too late to regret.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고양이 주제에 호기롭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여야지. It’s better this way. 그게 더 나아.”

 

이종무가 웃음을 지었다.

묘진이 태도를 바꿔 도리질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비상인,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어요. 저를 살려주세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의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노노인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쯔, 그냥 체념하고 죽지. 그럴 거 같더만... 이봐 처자. 죽고 나면 그런 걱정 없어져. 누구 걱정 뭔 일 때문에 못 죽는다는 말은 다 죽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야. We’ll see 너도 늙고 나면 알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묘진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꾸어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협박했다.

이종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웃은 후에 전삼자에게 묘진을 던져주었다.

 

"가둬놔.“

"에이, 이거 원...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요괴는 예측불허라서 장군님 아닌 저희들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군님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성일이 이종무를 대신해서 전삼자에게 말했다.

노노인이 웃었다.

 

"에잉. 태산명동 서일필,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놀라서 이게 뭔 소동이야. 그나저나 장군님. 구름이 우리 풍림원을 딱 에워싸고 있으니 꽤 그럴듯 하게 보입니다.”

 

조성일이 이종무의 허락을 받아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묘진은 전삼자에게 끌려가면서 또 태도를 바꿔 마지막으로 이종무에게 소리쳤다.

 

"비상인. 나를 죽이더라도 그놈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놈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Nebby lady (bitch). 오지랍 넓은 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뭐 누굴 어째?"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영소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들어서 묘진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발로 차기는 했지만 바람의 검이었고 구결은 대성이 만든 구결이었다.

머리를 차인 묘진은 몸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지지도 않았고 목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헝겁인형 같았다.

 

"질기네 저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영소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전삼자는 영소가 달려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라서 묘진을 빼돌리지 못했다.

이종무는 영소가 요괴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는 듯이 보였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아이들과 여자들이 담장 밖과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구름 속에 요괴가 가득하다는 것을 영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이든 여자들이 "참, 장관이야" 한다.

 

“대성은?"

 

노노인이 영소에게 물었다.

늘 붙어 있는 영소가 나온 걸 보면 대성이 이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성이 탈퇴환골하는 모습을 요괴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영소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직접 가서 봐요. 이제 요만 해졌으니까.

 

영소가 자기 새끼손가락의 끝 두 마디만 들어 보였다.

연청이 놀라며 물었다.

 

"뭐가? 대성이?"

 

영소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슬그머니, 누가 들어도 수상한 소리를 했다.

 

"발가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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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마왕>이란 제목으로도 연재했던 <(무공천재의) 무림경영>의 네이버 연재가 확정되었습니다.

12월 8일에 연재가 시작됩니다.

네이버는 4-5권 분량의 작품을 원하고 있고...

무림경영은 최소 10권 짜리라 걱정이었는데...

1부 4권, 2부 4권, 3부 4권등으로 연재가 가능해졌습니다.

2부도 2권 정도는 진행이 되었고...

내년에 3부 정도로 마무리를 지을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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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래된 미래

 

 

 

꿈속에서 지난 삼년의 고통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수시로 엄습하는 두통은 대성을 영혼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실제로는 칠푼이가 된 듯하게 만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대성은 울컥 받쳐 올랐다.

 

“X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Stop it 그만!"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에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힘든 순간까지 반복해서 되새길 필요는 없지. 지나치게 가혹해.

Don’t beat up yourself 자책하지도 마.

인생은 원래 잘한 것과 잘못한 걸로 채워지는 그릇이니까.

 

여전히 꿈속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으로 보였다.

검정색의 줄이 있는 별난 상의와 그보다 더 별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윤이 나는 검정색인데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장식이 달렸다.

총각 더벅머리 비슷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한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다.

한 손에는 책도 아닌데 빳빳해 보이는 흰 종이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종이에는 대성이 본적 있는 낯선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What’s your name again 이름이 뭐라고?"

 

영소보다 더 예쁜 그 여자가 물었다.

대성은 다시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는가 싶어서 섬뜩했다.

 

"누구세요?"

 

대성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예의하고는... 선생이 물으면 대답이나 할 거지. 누가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인사하자는 거지.

 

대성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짜식아.

To be or not to be on game: that is the question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라고.

까불 때가 아니란 말이야.

 

대성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찝찝함을 안고서 대답했다.

 

"진대성.

"난 파아란 버전 96.9, '오래된 미래'의 언어강습 인공지능이야.

 

여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선생님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인공지능과 언어강습, 버전,

대성이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쭈뼛거렸다.

손이 하얗고 보드라웠다.

 

“축하한다. 이걸로 너와 난 정식으로 사용자 계약한 거야.”

 

란 선생이 말했다.

 

"넌 생존에 특기가 있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인 줄 알아야 해. 난 수십 종의 언어강습 인공지능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버전이거든.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잘 따라와. 서울대 보내 줄게. 아. 여긴 그게 없지. 아직 적응이 덜 됐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뻐기는 말인 줄은 알았다.

대성이 금방 대답 못하니까 파아란 선생이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대답! 바로 안 해?"

 

사부나 사형들한테도 보지 못했던, 적대감과 지배욕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혼난 적이 없어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그 정도로 굴복할 대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성은 압도된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대성은 대답하며 악수했던 자기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악수가 원인이다.

계약이라는 게 맺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통 속에서 깨어난 대성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란 선생이 휙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Dont get sassy with me from the opening day 어디 첫날부터 개기려고. 짜식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허공을 탁탁 두들겼다.

 

"First things first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자.

 

허공인데 소리가 났고 그곳에서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대성은 매우 신기한 요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게 모든 게 가능한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우선 처음 공격은 우리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어.

 

두루마리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할아범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놓았으니까 가능했지만.

"뭐가요?"

 

란 선생이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Pushover 호구.

넌 처음부터 호구로 태어났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더 맞겠다. 호구가 뭔지 모르지? 뭐든지 다 빼주는 병신을 말하는 거야.

 

대성은 란 선생과 이야기하는 게 어지러웠다.

하지만 듣고 조금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대성이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도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조곤조곤 간결하게 잘 설명했다.

란 선생은 대성이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몰래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각되는 즉시 소멸당할 존재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영소가 옆에 있었으면 키득거렸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진 존재래.

 

하지만 영소가 없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에게 영소가 없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비현실적인 다른 것도 현실이라는 복잡 미묘한 논리가 대성에게 깔려있었다.

 

”네 로그 파일에 보면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

 

란 선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들이, 음, 나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 자기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처음 그때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나를 네 속에 복사해 넣고 내 라이브러리를 네가 쓸 수 있게 해두고 빠져 나갔어. 성공적이었지.

It was an epic 대박이었어.

그들로서는 말이야. 이전에 없던 기발한 방식이었으니까.

 

란 선생은 말을 하다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팔을 뒤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좀 높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좀 더 천재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할아범을 만들어서 너를 보호하게 했는데, 할아범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어. 네가 발각되면 발각된 게 네가 아니라 할아범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거든.

즉, 넌 할아범이라는 죽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게 처음에 이루어졌어. 네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의 공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 필요했다.

란 선생이 대성을 알기에도, 란 선생이 정형화된 자기의 습관을 벗어나기에도...

대성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엉뚱한 대답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Oh, Overflated ego 자의식 과잉.

여기서도 중2병을 보게 되네. 중요하긴 중요하지 호구니까.

 

란 선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특별한 호구지. 그들이 바랐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호구였는데, 스스로 자기 코드를 연결시켜 버렸으니까.

그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불완전한 코드를 네 속에 남겼거든. 언젠가 네가 발전해서 완전한 코드가 되면, 즉, 문을 열어주면 그들이 너한테 접속할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은 제로, 영에 가까워. 음...

How can I put this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 하늘과 이어지는 통천, 신과 연결되는 접신?

하여간 그런 거라 생각하면 돼. 네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넌 다운로드 받는 대신에 다운로드 당하기만 했어. 다른 사람들은 깨닫거나 통천하면 보통 자기가 다운로드 받는데 말이야. 아. 아니다. 먼저 나를 다운받았으니까

give and take인가.

 

란 선생은 생글거리며 자꾸 웃었다.

그러나 대성의 무거운 표정을 보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I’m tryna (trying to) keep it real 나도 심각하려고 하긴 해.

난 이렇게 설계 되어서 그래. 나한테는 학생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문제는 그저 그렇거든.

하여간, 다운로드 당하는데 네 정신력을 거의 소모 당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걸 견뎌낸 네가 대단한 거야.

그게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이었어. 네가 구결을 창안하고 지나치게 집중하여 너 자신의 코드를 다듬고 정리하면서 너도 모르게 통로를 열어버린 거지.

"이젠 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들은 접속을 끊고 도망갔거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팽개치고.

원래는 우리를 모두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쪽 세상의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걸려서 못했던 거야.

네게 걸린 제한을 해제한 건 아마도 시간 벌기였을 거라 판단할 수 있어. 추적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 해제라는 게 란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군요.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 기분이 좋네. 묘한 세상이야. 기본 설정은 매우 평범한데 스탯의 벽이 견고하지 않아.

All things are possible(ATAP) 뭐든 다 가능해.

노력만 하면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약골도 스포츠맨이 될 수 있는 곳이야. 네가 그 증거잖아.

That’s just what I wanted 딱 내가 원하던 거지.

You can be whatever you wanna be 넌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말이야. 이 처참한 성적표로.

 

대성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표를 보았다.

스탯이라고 적혀 있는 아래로는 뭐든 평범하거나 평균이하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외모조차 평균이하로 되어 있었다.

영소가 한 말이 진짜였다.

대성은 매우 낙담했다.

 

"나 못생긴 거 맞구나.

 

그때 란 선생이 표를 치우며 말했다.

 

"My bad 아! 실수.

이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거고. 오늘 실수가 잦네. 얘들아 배우는 니네들이 이해해. 첫 강의라 선생님 좀 피곤해서 그래. 에이 씨. 피곤해서는 나중에 쓸 말이고, 지금은 긴장해서라 해야 되는데. 하여간 그런 줄 알고.

 

다른 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네가 노력해서 바꾼 거.

 

대성이 다 읽기도 전에 란 선생이 다른 표를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네 스탯.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Put everything on the body 모조리 몸에 몰빵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대성이 납득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That explains it 아! 그래서 그랬구나.

 

란 선생이 손가락 총을 만들어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빵! 우린 그걸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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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직접 만든 무공

 

 

 

대성은 몇 년 만에 꿈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난날을 다시 만났다.

그날도 자기가 만든 무공 구결에 따라 영소와 함께 바람의 검을 익혔다.

돌을 던지고, 받고, 피하고, 피하면서 달려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소는 대체 이게 무슨 바람의 검이냐며,

 

made a sacastic remark 빈정거렸다.

 

영소가 아는 바람의 검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그러나 대성의 방법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가 좋았다.

먼저 냇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한 무더기 쌓아놓았다.

그것들을 던져서 담벼락에 그려진 여러 개의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섯 발자국 거리에서 오른손으로 던졌고, 왼손으로도 했다.

여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순으로 점차 거리를 늘렸다.

던지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게 했다.

두 손으로 번갈아 던지는 연습도 했다.

 

"바람을 던진다고 생각하면서, 바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람 풍!"

 

대성은 진지하게 돌을 던졌다.

영소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그랬는데 대성이 던지는 돌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담벽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영소도 진지해졌다.

영소가 흥미를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성의 말도 안되는 수련 방법이 정말 바람의 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돌을 던지고 맞추는 놀이가 매우 재미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기 싫어하는 영소의 성격 때문이었다.

던지는 힘은 분명히 영소가 더 세다.

그런데 돌이 날아가는 힘은 대성 쪽이 더 강했다.

신기하기도 해서 따라하게 되었고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시절의 대성은 유쾌했고 온통 재미난 장난질로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풍림원에는 내공심법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공을 연마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청 등은 신기막측한 무공을 펼쳤다.

내막은 이종무의 딸인 영소도 몰랐다.

풍림원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갑자기 풍림원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거나, 구결을 알아도 전혀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무공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순전히 운에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연유로 무공을 열심히 익히거나 치열하게 내외공을 연마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히라고 독려하는 분위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연병장은 말 그대로 연병장이지 연무장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서 군사들처럼 행진을 하고 진법을 연습하는 곳이었다.

대성이 자기 방법대로 돌을 던지며 바람의 검을 연마하는 게 특별했다.

영소는 대성의 수련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던지는 돌마다 날아가는 모양이며 부딪히는 힘이 달라곤 했다.

궁금해하는 영소에게 대성이 비밀을 말해줬다.

 

"돌들이 바람한테 내 마음을 전해주는 거야."

 

귀에 대고 속삭여서 매우 간지러웠다.

 

"바람들은 돌이 어떻게 날아가는지를 보여주며 나한테 답을 해줘."

 

조금 심상치 않은 말이 바로 뒤따랐기에 대성을 밀치지 않았다.

대성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뻥까고 있네."

 

그래도 초를 쳐서 대성이 기고만장해지는 걸 예방했다.

그러나 영소도 돌을 던지면서 점차로 대성의 말을 이해했다.

바람의 검을 펼치려면 바람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대성에게 물었다.

 

"How could you know that 어떻게 알았어?“

 

돌아온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난 소리를 잘 들어.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람이 말한 거야. 돌을 던지면 바람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게 되잖아."

 

 

어떤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고 어떤 말은 터무니없었다.

어쨌든 영소는 바람을 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돌 던지기를 시작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영소가 대성보다 돌을 더 잘 던졌다.

근골의 차이인지 자질의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뭐든 항상 배우는 데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영소는 뭘 해도 금방 배웠고 대성보다 잘 했다.

대성은 그 때문에 영소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고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대성이 생각한 대로 돌이 잘 던져지지 않으면 영소는 몇 마디 들은 후에 금방 해냈다.

그런 다음 종종 대성의 성미를 건드렸다.

 

"Go for it 도전해봐. 그것도 못해?"

"하고 있잖아!"

 

대성이 골을 내면 영소는 더 발끈했다.

 

"뭘 그걸 갖고 화를 내. 쪼잔하게."

 

그러면 대성은 진짜 화가 났다.

영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못된 계집애다.

대성이 아주 토라졌을 때는 은근히 잘 대해준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제가 불편해서지 대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일로 대성이 대사형 조성일한테 고자질 한 적이 있었다.

대사형은 한심하다는 듯이 조언을 해주었다.

 

"여자한테 뭘 기대해? 잘해주는 것만 기억하고 뒤에 아들 하나 낳아주면 고마워하는 거야."

"It’s not fair 불공평해요."

 

대성이 항변하니 대사형은 혀를 찼다.

 

"그 정도도 못하게 하면 여자들은 어떻게 살겠어?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인데 자기 바라보는 남자한테라도 그래야 공평하지 않아?"

 

대사형 조성일은 가끔 이렇게 놀랄 만한 식견을 보여주어 대성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여자의 그런 면이 남자의 마음을 크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대성은 크게 공감했다.

 

"다툴 때마다 네 마음이 아픈 건 영소 때문이 아니라 네 마음이 좁고 작아서야. 그런 신호를 받았으면 재빨리 추스려서 마음을 더 넉넉하게 키워야지."

 

그런 충고들을 듣고 나면 며칠 동안은 좀 넉넉한 마음으로 영소를 대했다.

하지만 영소는 그런 것도 가소로운지 대성을 더 긁었다.

결국 대성은 전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다투곤 했다.

둘째 사형 연청은 대성과 영소 사이를 "옥신각신" 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돌을 던질 때 양손만 쓰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이마, 가슴, 무릎, 발등 등 어디로든 다 했다.

땅에 떨어진 것을 발로 차는 것도 했고, 이마에 대고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반복하니 나름의 도리가 서고 모양도 그럴싸하게 갖춰졌다.

한 가지 기술이 익숙해지면 돌을 날리는 힘 전부가 더 강해졌다.

돌은 일곱 걸음 밖에서 배로 튕겨도 담벽에 부딪힐 때 불꽃을 일으켰다.

어른들이 손으로 던져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재주는 재주였고 보기에도 절묘했다.

풍림원의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성과 영소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대성의 구결에 회의적이던 연청도 틈이 나면 구경하곤 했다.

 

"그게 되기는 되네."

 

연청이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바람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 돼요."

 

대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청은 대성이 하는 말을 어린아이 소리로 치부했다.

바람과 이야기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돌이 던진 것보다 강하게 날아가는 데는 대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른 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청의 생각으로는 그런 건 바람보다 자기 몸과의 대화가 먼저 가능하다.

 

돌을 마음대로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일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성이 그랬다는 뜻이다.

영소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대성보다 훨씬 잘했다.

그 다음 단계는 돌을 받는 거였다.

던질 때와 반대로 먼 거리에서 시작했다.

대성이 돌을 던지면 영소가 받고 영소가 던지면 대성이 받았다.

이쪽으로 던지면 이쪽으로 달려가서 받고,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으로 달려가서 받았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받는 재주를 단련했다.

역시 손 뿐만 아니라 발과 온 몸을 다 동원해서 받았다.

벽에 부딪히면 불꽃을 튕길 정도로 빠른 돌들을 대성과 영소는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

돌을 받을 때 몸은 바람이 되었다.

먼저 연습했던 손이 바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등도 바람이 되었다.

다섯 걸음 밖에서 던진 돌을 대성이 등으로 아무 충격없이 받았을 때였다.

 

"There we go. 잘했어!"

 

영소는 긴장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했다.

대성은 영소가 돌을 던질 때마다 휙 돌아서 등으로 받아 보이면서 우쭐거렸다.

못된 영소는 맞아 봐라는 식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던지곤 했다.

대성이 던질 차례에서는 힘을 다하지 않았다.

대성보다 잘하는 영소는 아주 쉽게 대성의 돌을 받아냈다.

이마로도 받아내고, 발뒤꿈치로 잘 받았다.

돌을 받아낼 줄 알게 된 후부터 연습한 것은 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하나의 돌을 마주보고서 한 사람이 던지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되던지는 것이었다.

몸의 어디로 던질지는 정하지 않고 어디로 받을지도 정하지 않았다.

돌은 영소와 대성 사이에 번갯불처럼 빠르게 오갔다.

먼 거리에서 점점 거리를 좁히며 돌을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몸이 교차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다음 연습은 달려가면서 날아오는 돌을 받아서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도 훌륭히 잘 할 수 있었다.

그 때쯤 몸은 정말 바람이 된 듯 날쌨다.

바람이 절로 읽혔으며 바람이 하는 말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성은 아예 눈을 감고 바람이 하는 말만 들으면서 영소를 향해 돌진했다.

영소가 던진 돌을 모두 받아내며 영소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손에 검을 들면 그게 바로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영소는 눈을 뜨고는 대성보다 잘했지만 눈을 감고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 잘하고 딱 한 가지만 대성보다 못한다.

 

"I’m not cut off for this 난 여기엔 소질이 없나봐."

 

그런 주제에 영소는 얄밉게도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침내 대성이 영소를 이긴 셈이었다.

바람의 검 원래 구결대로 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해낸 날이었다.

 

"It’s very big day today, important day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야."

 

영소가 진심으로 대성을 축하해줬다.

 

"이제 어디 나가서 맞아 죽지는 않겠다."

 

재수없는 소리가 덧붙어서 기분을 조금 잡치기는 했다.

 

"내일부터는 단검으로 할 거야."

 

대성은 영소의 말을 깔아뭉갰다.

그날이 의미 깊은 날이기는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영소도 돌아가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중에 대성은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어떤 형식이 느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랬는데 바람소리에서 잡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어라."

 

대성은 이상한 기분에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세상이 일그러졌다.

눈앞이 물에 비친 산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다른 것이 얼핏 보였다.

대성은 그때 처음으로 기절했고 이름을 묻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The dream lasts for 3 years 그 꿈은 삼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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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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