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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염왕의 얼굴, 재신의 얼굴

 

 

 

마부들이 북두칠성이라 불리는 일곱 거한들을 끌어와 한 자리에 모아두었다.

북두칠성은 알이라는 알은 다 까여서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의 수작에 분노한 계집애들이 달려들어서 칼로 쓸고 발로 짓밟고 돌로 뭉개버린 것이다.

곽범은 그들의 몸에 주화입마까지 걸어놓았다. 그 때문에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절세고수들인 이십팔수도 상대할 수 있다던 북두칠성의 비참한 말로였다.

북두칠성을 모아놓은 마부들은 사냥한 짐승들을 마차에 싣고 부리나케 돌아가 버렸다. 곽범이 드러낸 염왕의 모습에 혼백이 날아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계집애들 역시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곽범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했다.

"찻집 샘은 물맛이 좋아요. 찻집에서 술도 담가보라고 할까요?”

양설이 곽범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그게 좋겠어요.”

곽범은 유순하게 대답했다.

계집애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곽범의 말투와 얼굴이 아까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은 잘 못하지만 관대하고 따뜻한 원래의 나으리였다.

곽범이 보여준 서로 다른 모습은 적응하려 애써도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아까 내가 놀라서 울지나 말라고 했지?”

양설이 웃으면서 계집애들에게 말했다.

"네...”

계집애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양설이 농을 걸었다.

"깔깔거리더니 오줌이나 싸지 않았으려나.”

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대부분의 계집애들이 실제로 지려버렸기 때문이다.

양설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건 나으리 얼굴들 중 하나야. 염왕의 얼굴! 나으리께서 싸울 때 사용하려고 만드신 거라 많이 무서워.”

"다른 얼굴들도 있나요?”

누군가가 물었다.

양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할 때 얼굴도 있어. 재물의 신, 재신의 얼굴! 그리고 원래 이 모습이시지. 더 필요한 얼굴이 있을 리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었던 계집애가 또 물었다.

"낭낭은 안 무서웠어요?”

"안 무서울 수가 없잖아. 낭군님이니까 원래 무섭고... 하지만 낭군님이니까 무서워도 괜찮은 거지.”

양설이 웃으며 대답했다.

단아가 군사답게 가장 먼저 알아들었다.

"아! 그럼 우리도 무섭지만 무서워도 괜찮구나.”

다른 계집애들의 머리도 동시에 까닥거렸다.

여기저기서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은희는 술잔을 들며 투덜거렸다.

"술 맛이 안나요. 너무 놀라서 취하지도 않는 거 같아요.”

기력을 회복한 첩밀관 장영도 말했다.

"나으리의 경고를 돌이나 비석에 새겨서 표시해놓아야겠어요. 나쁜 놈들이 우리 땅에 아예 못 들어오게. 그놈들 두 번 만 더 들어오면 제가 나으리한테 놀라 죽겠어요.”

양설이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의 이 무공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야. 지금은 무서운 정도지만 완성되면 보는 순간 급살 맞아 죽을 거야.”

계집애들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가장 겁 많고 소심한 계집애가 덜덜 떨며 물었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해요? 실수로 볼 수도 있잖아요.”

"실수가 안타까운 거지.”

양설의 놀리는 말에 그 계집애는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다른 계집애가 씩씩한 척 하며 말했다.

"괜찮아. 싸울 때 나으리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리면 돼!”

울먹이던 계집애가 빽 소리쳤다.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는데 어떻게 안 봐!”

"눈... 감아야겠네...”

또 다른 계집애가 중얼거렸다.

울먹이던 계집애가 곽범에게 물었다.

"나으리, 그 무공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우리가 다 죽일게요.”

"안 돼.”

양설이 곽범 대신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이 적어. 많은 적을 상대할 때 불리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으리께서 이 무공을 펼치면 사람이 몇 명이든 상관없어. 이 사실을 적들도 알아야해. 수가 많다고 함부로 우리를 공격 못하게.”

 

곽범은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할 줄도 모른다.

오히려 새들하고 말을 더 잘 하는 편이다.

양설이 채워준 술잔을 비운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새들과 놀았다.

새들도 남아있는 짐승들 고기를 뜯으며 놀았다.

바람쟁이가 곽범에게 날아와 물었다.

"여자 하나인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많아?”

바람쟁이는 탁양앵무들 중 가장 빨리 날았다.

그래서 반란군 속에 숨어 흑귀면탈을 감시하는 임무를 받았었다.

그러던 중 오늘 흑귀면탈이 곽범을 노리고 하호성에 다시 숨어들어왔다.

바람쟁이는 그걸 곽범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아내는 설 하나야.”

곽범이 대답했다.

바람쟁이가 다시 물었다.

"나머지는 다 첩인 거야? 짝짓기 다 해봤어?”

당황한 곽범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양설은 큭큭 웃었다.

계집애들은 바람쟁이의 노골적인 말에 황당해서 고기 씹는 것도 잊었다.

바람쟁이가 코웃음을 쳤다.

"짝짓기도 안 하면 암컷에게 무슨 쓸모가 있어? 밥만 축내지.”

곽범의 밥버러지 타령은 새들에게도 전염되어 있었다.

바람쟁이는 계집애들을 둘러보았다.

"괜찮게들 생겼네. 틈내서 확 따먹어버려.”

계집애 하나가 바람쟁이한테 말했다.

"저.... 새님. 말씀이 너무 심합니다.”

“뭐가? 따먹는 거?”

바람쟁이가 뚱해서 되물었다.

"암컷들은 따먹히는 게 당연하잖아. 따먹혀야 알 낳고 새끼 까지. 나도 봄마다 얼마나 많이 따먹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수십 놈이 달려들어. 알주머니 무겁게.”

보다 못한 빽빽이가 바람쟁이를 옆으로 끌고 갔다.

"쟤들 새 아니야. 사람이라고. 사람은 우리하고 달라.”

"다르긴 뭐 달라. 우리보다 더 하지. 밤낮 짝짓기 하는데.”

"그것도 다 사정이 있어. 사람들 사랑은 복잡해서 밤낮 짝짓기 하면서 만드는 거야. 우리는 짝짓기 해서 알 만들지만 사람들은 사랑 만들어.”

"곽범이가 그런 걸 알아? 짝짓기 못해서 안달 났던 곽범이가!”

바람쟁이가 불신에 차서 소리쳤다.

다른 새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바람쟁이를 멀찌감치 끌고 갔다.

겁쟁이가 빽빽이에게 소리쳤다.

"바람쟁이 좀 잘 가르쳐! 고생했지만 저러다 곽범이한테 맞아 죽는다.”

 

지우는 원했던 대로 유세관이 되었다.

곽범이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돈화전장 강대인을 혼내고 거래를 잘 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나으리, 저 이제 유세하고 다니려면 마차가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나이도 어린데 마차는 타고 다녀야 사람들이 무시 못할 거잖아요.”

지우가 뭘 요구할지 알고 있던 계집애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곽범의 눈치만 살폈다.

지우가 마차를 얻으면 자기들도 공을 세웠을 때 마차, 또는 그 이상의 걸 얻을 가능성이 컸다.

“마차하고 마부 한 사람만 주세요 네? 마차 타고 오가면서 생각도 해야 하고, 문서나 물건도 들고 다닐 수 없잖아요.”

지우의 간청에도 곽범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즉각 호통을 듣지 않은 건 좋은 징조다.

“특히 먼 길이라도 가면 옷이랑 가져가야 할 게 한 짐일 수도 있는데...”

이어지던 지우의 간청을 동진이 막았다.

"낭낭도 마차 없어. 나으리도 안 타시고.”

지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양설이 역성을 들어주었다.

"나야 집에만 있으니까 필요가 없는 거고. 지우는 필요하겠네.”

이미 반은 허락 받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지우가 재빨리 인사하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낭낭! 감사합니다. 유세관 역할 잘 할게요.”

희야가 지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필요할 때만 이번처럼 한 대 가져가서 쓰면 되지 왜 전용 마차가 필요해?”

"유세관 마차인데 좀 특별해야죠. 꾸미기도 꾸며야 하고.”

지우가 기다렸다는 듯 늘어놓았다.

“또 지금 마차는 타보니까 그렇게 편하지 않더라구요. 자리도 좀 더 푹신하게 해야 되겠고... 바람 안 들어오게 휘장도 치고... 멀리 갈 땐 야영 대신 잠도 잘 수 있게 긴 의자도 하나 넣고. 화살 같은 거 막게 안에 철판도 좀 대고.”

"대체 얼마나 생각했으면 저런 말이 한 번에 다 나와?”

듣고 있던 동진이 혀를 찼다.

곽범은 지우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마차방에 이야기해서 만들어라. 물과 음식을 넣어둘 자리도 마련해놓고.”

지우가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유세관 지우, 나으리와 낭낭을 위해 신명을 다 하겠습니다.”

샘이 난 은희가 단아한테 말했다.

"이제 말 잡으러 가자.”

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굿간도 없잖아. 마굿간 만들고 데려와도 돼.”

"그렇겠다. 말 먹이 아끼겠네.”

은희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첩밀관 장영이 곽범에게 물었다.

"나으리, 흑귀면탈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죽으니까 도망친 것일까요?”

단아가 곽범 대신 대답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나으리를 봤을 거야. 북두칠성을 풀 베듯 쓰러트리시는 걸 보고 도망갔을 거라고 봐.”

"집이 걱정된다. 흑귀면탈이 금왕경 찾는다고 몰래 들어가지나 않았을지.”

한 계집애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양설은 웃었다.

흑귀면탈은 무시무시한 고수지만 신중하다.

직접 곽범의 집을 침입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대신 보냈다면 그 자는 육연부나 육연별부의 기문진에 갇혀있을 것이다.

 

***

 

지우가 타고 왔던 마차도 짐마차들과 함께 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곽범 일행은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방에서는 마차방의 방장이 된 조대붕이 사냥한 짐승들을 분배하여 보낼 곳에 보내는 중이었다.

양설은 쓸개를 뽑지 않은 곰 한 마리를 찻집의 전 주인이자 투자자인 서문노인에게 보냈다.

전옥이 주먹으로 때려잡은 호랑이는 돈화전장 강대인에게 선물로 보냈다.

 

다행히 집에 침입자는 없었다.

계집애들은 방마다 불을 지피고 욕간의 물을 데우러 갔다.

고기를 먹어 든든했기 때문에 동진은 고기로 죽을 끓여 식구들 저녁으로 대신했다.

양설은 곽범과 함께 눈이 나무 밑에 쌓여있는 정원으로 나와 걸었다.

희야가 석등을 밝혀 두었다.

겨울 산책은 함께 하는 사람의 따스함을 느끼기 위해 한다.

양설은 곽범의 손을 잡고 정원을 한 바퀴 돈 후 방으로 돌아갔다.

 

계집애들은 방마다 불을 밝히고 저마다 궁리한다.

떼어 놓으면 나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계집애들은 함께 있는 한 모든 것으로 경쟁하고, 또 협력하며 다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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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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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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