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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사람이구나.

 

 

봄이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산비탈은 진달래와 철쭉이 뒤섞여서 울긋불긋했다.

숲을 벗어나 길로 들어섰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갈림길에는 인적이 없다.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풀을 따라가며 뜯었다.

곽범은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눈길이 자꾸만 십지암쪽으로 향했다.

팔년을 산 곳이다.

정이 들었다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까?”

여전히 겁이 나서 새장으로 못 돌아가는 겁쟁이가 새소리로 물었다.

"도망 안가. 절대 안가.”

즉답이 없자 겁쟁이는 거듭 다짐했다.

곽범은 허락하고 길가의 바위에 앉았다.

산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사부를 따라 왔던 길이다.

그 길 아주 먼 어디에는 자신이 태어난 집도 있다.

물기 없는 바람과 온화한 햇살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본 적 없는 낮잠이 밀려왔다.

봄풀 냄새와 여린 나뭇잎이 뿜어내는 초목의 숨결이 폐부를 씻었다.

새들도 햇살을 즐겼다.

새장 안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햇볕을 쬐려 다투었다.

"나는 사람이구나.”

곽범은 짧아진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을 보며 생각했다.

새들과 달리 자신의 팔에는 깃털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경서의 내용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꾸지람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났다.

몸은 자라서 어른처럼 커졌는데, 그간의 날들은 하룻밤의 꿈인 듯 여겨졌다.

곽범은 바위에서 일어나 새장 문을 열었다.

"가라.”

"어디로?”

새 한 마리가 뚱하게 물었다.

"가고 싶은 대로.”

"집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다른 새가 물었다.

곽범은 공력을 돋우어 새장을 뜯어버렸다.

콰드득

철사를 꼬아 만든 새장이 짚이나 왕골인 듯 찢어졌다.

새들은 곽범이 새장을 우그러뜨려 땅에 묻는 동안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어떤 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동동 뛰었다.

"새장이 얼마나 좋은데. 우리는 새장 없으면 잠도 못자.”

보통의 새들에게 새장은 가두는 도구다.

동시에 천적들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다.

그러나 범도 뜯어먹는 탁양앵무들에게는 천적이 없다.

새장 없으면 못 잔다는 건 침대 없으면 못 잔다는 투정과 같은 소리다.

"조마조마해서 잠이 안와.”

한데서 어떻게 잘 수가 있어?”

볼 매인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새가 불만인 건 아니었다.

"조금만 날고 올게.”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눈치 보던 놈들 여럿이 뒤따랐다.

그들의 신나는 비행이 다른 새들을 자극했다.

후두둑 쏴아

본능에 이끌린 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곽범은 겁쟁이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새장이 없으니 짐도 없다.

품에는 금왕경과 돈주머니만 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은 제법 거뭇하다.

커진 몸에 걸친 옷은 낡고 깡동하다.

영락없는 미친 사람 행색이다.

"다 어디 갔어?”

겁쟁이가 돌아와서 물었다.

"떠났다.”

"잡아먹은 건 아니지?”

겁쟁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밖에는 먹을 거 많아.”

"... 난 또.”

겁쟁이가 안도하며 정찰 보고를 했다.

거기엔 누가 살고 있었어. 빡빡머리 중이야.”

곽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부다.

사부가 돌아와 있다.

사부는 올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었다.

진짜 중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십지암에 머물 때는 승복을 입은 중이었다.

사부에게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먹이고 입히고 무공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죽이려 했다.

사부와 제자로서의 인연은 그때 끝이 났다.

겁쟁이가 주위를 돌면서 물었다.

"나도 가야해?”

".”

"난 같이 가면 안 돼?”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쟁이는 한 번 새장을 나온 후 계속 밖에 머물렀다.

곽범의 비위를 맞추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들었다.

겁쟁이가 다시 물었다.

"따라가면 나 잡아먹을 거야?”

"금수도 정이 있나?”

곽범은 피식 웃었다.

마음이 한결 같기는 금수가 사람보다 나을 걸. 원앙이나 기러기는 평생 짝을 배신하지 않아.”

겁쟁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같이 가자. 넌 세상 물정도 모르잖아. 난 잘 알아.”

뻐기는 겁쟁이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곽범은 순순히 인정했다.

겁쟁이가 매우 좋아했다.

높이 날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앞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와서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수다도 떨었다.

곽범은 걷는 것이 좋았다.

오랫동안 걷지 못했다가 땅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더 좋았다.

 

***

 

큰 길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겁쟁이는 새소리로만 말했다.

곽범은 거지꼴이다.

사람들은 새 한 마리 데리고 있는 소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범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마다 살펴보았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곽범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뭉클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도 그들 중 한명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계속 걸어서 저녁 무렵에 하호성에 도착했다.

곽범은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묻혀서 성문을 지났다.

겁쟁이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옷부터 사서 입어. 거지들이 동무하자 들겠다.”

"어디로 가야하지?”

"저 앞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포목하고 옷 파는 상회들이 있어.”

겁쟁이는 하호성을 잘 알았다.

곽범은 겁쟁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옷 사시게?”

점원이 곽범의 행색을 못마땅해 하며 물었다.

".”

"돈은 있나?”

곽범은 돈이 든 주머니를 툭 쳐서 소리를 냈다.

점원은 곽범의 키에 맞춰서 잿빛 장포를 건네주었다.

"이거면 맞을 것 같은데.”

겁쟁이가 새소리로 말했다.

"얼만지 물어봐.”

 

***

 

곽범은 겁쟁이의 도움으로 바가지를 쓰지 않고 신발도 샀다.

입고 있던 작아진 옷은 팔아서 빗과 거울, 머리에 두를 건을 샀다.

그리고는 객점을 찾아갔다.

가로에 있는 주루와 객점에서 풍기는 음식내음이 곽범의 혼을 뺐다.

그러나 객점에 들어가서는 요리 이름을 몰라서 만두만 시켜 먹었다.

황홀해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객실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인간 세상에 온통 좋은 것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는 곽범이 탁자에 놓은 돈주머니를 펼쳐서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아껴 쓰면 세 달은 버티겠다. 다 떨어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해.”

"어떻게?”

묻고는 웃었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새한테 돈 버는 방법을 묻는 건 우스웠다.

겁쟁이가 돈주머니를 조이고 침대로 나아왔다.

"방법이야 많아. 예전에 이판이 했던 것처럼 새를 파는 게 제일 좋고.”

이판은 곽범에게 죽은 새장수의 이름이었다.

"수입이 괜찮아. 하루 한 두 마리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어. 우리처럼 예쁜 새는 비싸서 부자들만 사가거든.”

"이판이 너희들을 팔았어?”

"당연히 팔았지. 새장수인데.”

팔려갔었는데 어떻게 이판과 계속 함께 있었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팔려가서 좀 놀다가 죽은 척하면 묻거나 갖다버리거든. 그때 이판에게 다시 돌아가는 거야. 금방 돌아가야 할 때는 새장을 부수면 되고...”

곽범은 그림이 그려졌다.

시장에서 새를 팔면 그 새가 돌아오고,

다시 팔고 다시 돌아온다.

그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사기네.”

"그게 싫으면 내가 다른 새들 잡아오면 돼. 넌 그걸 팔고. 다른 새들은 밤눈이 어두워. 숲에 들어가서 움켜쥐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해.”

곽범은 딱히 내키지 않았다.

새장수가 했던 짓을 따라하는 것 같아 꺼리낌이 있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이가 있으면 새 점을 치는 것도 괜찮은데. 어려서 수입이 적을 거야.”

"그런 거 말고는?”

겁쟁이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기 부잣집들 몇 군데 알아. 밤에 몰래가서 패물 같은 거 슬쩍 가져오는 것도 괜찮아. 갔다 올까?”

"그건 도둑질!”

"새한테 도둑질이 어디 있어? 보이면 따먹고 아무거나 가져와서 둥지에 깔고 하는 거지.”

곽범은 침대에서 몇 번 뒹굴고 일어나서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평평한 마루다.

겁쟁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기억났다. 어릴 때 바닥이 시원해서 뒹굴다가 옷 더러워진다고 혼났다.”

"그래서?”

"이렇게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방에서 살고 깨끗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못하면 혼나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거야.”

"혼나야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그러면 나도 사람이다. 얼마나 혼이 많이 났는데.”

겁쟁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투였다.

"뭐할지 천천히 찾아보겠다는 말이야.”

곽범의 말에 겁쟁이는 한숨을 쉬는 시늉을 했다.

"넌 어느 쪽이야?”

"뭐가?”

"네가 좋아하는 건 음식이야 여자야 돈이야? 아니면 좋은 집이야?”

곽범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이판은 여자를 제일 좋아했어.”

겁쟁이가 말했다.

"금왕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새장수였다더라. 새는 돈 많고 예쁜 여자들이 주로 사가거든. 여자들은 예쁜 새하고 놀면 더 예뻐 보인다는 걸 알아.”

"그렇구나! 예쁜 여자들을 매일 보겠다.”

곽범의 음성이 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길이 좁아졌다.

겁쟁이는 곽범의 얼굴을 가까이 와서 보며 말했다.

"이판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오면 한 쌍 중에서 꼭 한 마리만 팔았다더라. 그런 후에 밤에 남은 한 마리만 들고 나가는 거야. 짝을 부르면서 그 새가 울면 팔려간 새가 듣고 같이 울어.”

"! 그러면 그 새를 몰래 찾아오는구나.”

"... 바보야. 그럴 거면 예쁜 여자한테만 한 마리를 팔 이유가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여자가 이판의 짝짓기 상대가 되는 거야.”

겁쟁이가 말을 이었다.

"이판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가 있는 방에서 먼 곳에 불을 질러. 사람들이 불 끄려 몰려갈 때 이판은 그 여자를 붙잡아서 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짝짓기를 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데, 이판은 그때 여자가 제일 예뻐 보인다더라.”

"그거 겁탈이다.”

곽범은 사부를 만나 따라가기 전에 거리를 떠돌았다.

그때 거지들한테 여자가 겁탈 당하는 것도 봤다.

겁쟁이가 말했다.

"이판은 새라니까. 새한테 겁탈이 어디 있어. 마음에 들면 달려들어서 붙잡아 끝장 보는 거지. 놓치면 병신이고.”

여자, 겁탈, 예쁜 미녀.

곽범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저었다.

"난 사람이야. ... 짝짓기에는 그 이상 뭔가 있을 것 같아.”

"있지. 암컷이 알 낳고 새끼 까는 거. 결국 새끼 까는 거면서 인간처럼 별스럽게 구는 것도 없어. 그냥 한 번 하고 알 낳으면 되는 건데.”

"난 별스러워야겠다.”

곽범이 단언했다.

"짝짓기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야. 아까 길에서도 예쁜 애들한테 달려들어서 막 만지고 짝짓기 하고 싶었어.”

"내숭이다.”

겁쟁이는 포르르 날아올라 옷을 거는 장대에 내려앉았다.

평평한 땅은 움켜잡을 것이 없어서 불편했다.

곽범은 겁쟁이와 자기의 차이를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겁쟁이는 금수이고 곽범 자신은 사람이다.

남녀의 차이와 이성에 대해서도 배운 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안다.

옳고 그름을 모두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아는 게 당연했다.

시비를 가리는 것도 이성에 대한 것처럼 본능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이 할 짓과 아닌 것이 구분되었다.

더불어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 세상으로 돌아오니 기억났다.

"다듬어야 옥도 그릇이 되고 배워야 사람은 도리를 알게 된다.”

곽범은 자기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숲을 배웠다.

이제는 인간들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한다.

인간들의 세상을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모래나 바위 위에 누워 자도 불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평한 바위가 편했어도 침상의 부드러운 이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동물들의 고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오늘 먹은 만두 한조각보다 못했다.

길에서 본 여자들은 산 중의 어떤 꽃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인간 세상은 무한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곽범은 이 좋은 것을 왜 안 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몸속에 공력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끓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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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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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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