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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요괴 묘진

 

 

 

조금 전, 밖에서는 요괴 묘진과 대처하고 있을 때였다.

대성은 건초 타는 냄새를 맡았다.

이불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냄새였다.

영소가 연신 물을 끼얹었지만 물은 금방 증기로 변해서 사라졌다.

영소는 답답해서 폴폴 뛰었다.

대성을 물속에 넣고 싶었으나 비상사태라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들이 있는 피신처에는 욕조나 몸을 담글 만한 곳이 없었다.

 

"I’m so hot. 나 뜨거운 남자야.”

 

대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유쾌함을 회복한 남자의 시큼털털한 소리였다.

영소는 걱정이 되던 중에도 대성이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자 벌컥 소리쳤다.

 

"그래 이자씩아! 하도 뜨거워서 쪼글 감자도 다 익어버리겠다.“

 

대성이 작은 소리로 겸연쩍게 대꾸했다.

 

"That was supposed to be funny.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야.”

 

가까이 있던 영소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넌 말을 해도 어찌 그런 외설스런 말을...

Is this the end of being coy? 이제 내숭은 끝난 거냐?"

 

영소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우린 가끔 이런 소리도 해요.“

 

어머니로서는 질겁할 소리다.

영소는 대성에게 안달을 부렸다.

 

"그 좋은 머리로 빨리 어떻게 해봐. 탈퇴환골이고 뭐고 타죽겠다.”

 

대성이 여전히 나른하게 말했다.

 

"식힐 필요 없어. 도자기 굽듯이 내 몸이 구워지고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렇게 뜨거운데. 너 목소리도 바싹 구운 과자 같단 말이야.”

 

영소는 제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폴폴 뛰었다.

피신처에는 더 뿌릴 물도 당장 없었다.

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변색되었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 밑으로 민둥민둥 반짝반짝하는 맨머리가 보였다.

영소가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내우외환 설상가상이다. 너는 아프지 적은 침입했지. 못 생긴 게 이젠 대머리야.“

 

때마침 대성의 몸에서 뚜두둑 하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영소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대성을 빤히 보았다.

마치 허리가 빠진 건 아니지 하고 묻는 듯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금 크면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 간에 수작질 하게 되어 있다.

대성과 영소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성인 남녀들로부터 줏어들은 시털궂은 소리를 뜻도 모르면서 많이 주고 받기는 받았다.

묘한 재미가 있고 간질거리거나 때로는 조그마한 통쾌함이나 희미한 희열도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주고 받는 건 말 그대로 둘 만의 비밀이었다.

아이들은 자제하지는 못해도 무슨 짓을 하면 어른들한테 혼나는지 본능적으로 아니까.

무공이 늘지도 않고, 늘 싸우면서, 골이 깨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런 짓거리는 해왔던 것이다.

대성과 영소는 갑자기 둘이 멀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결국은 그렇고 그런 가시버시 사이가 되고 말 관계였다.

그저 시간 문제였을 뿐.

대성이 눈치로 짐작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뼈가 제자리 잡는 거야. 병신 되는 거 아니야.”

"I’m pathetic 에고... 내 팔자야.“

 

영소가 대성의 팔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곤 후후 입김을 불었다.

영소의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팔에 대고 부니?"

"엄만, 그럼 알몸인데 팔 말고 내가 어디에 대고 불어요?. 조신치 못하게.”

 

영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가 어머니한테 어깨를 찰싹 두들겨 맞았다.

한데 대성의 팔이 점점 짧아지고 가늘어지고 있었다.

대성의 모든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영소가 참을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렸다.

영소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속 긁는 소리를 했다.

 

"탈태환골이 아니라 반노환동인가? 늙지도 않았는데.“

 

대성도 자기 몸이 줄어드는 데는 몹시 당황했다.

대성의 몸은 내구성과 재질을 바꾸면서 쓸모없는 것을 태워서 배출해버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몸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대성도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맨숭맨숭한 머리조차 줄어드는 중이었다.

유쾌해진 대성도 더는 유쾌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잘 먹으면 다시 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하며 영소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에서는 대성에게만 보이는 란 선생이 자기가 만든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to make matters worse 설상가상으로 한심스럽다는 듯이 대성을 보았다.

 

- 대충 알기는 했다만 너 몹시 피곤하게 사는구나. 인간들은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 쯧쯔.

- 잘 모르면서 말하지 마세요.

 

대성은 란 선생에게 화를 냈다.

란 선생이 아랑곳하지 않고 조언을 해주었다.

 

- Do as I say 시키는 대로 해봐.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라고 해봐.

 

그 말은 바로 약이 되었다.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야.“

 

대성은 란 선생이 하라는 대로 말했다.

 

"정말?"

 

영소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I can assure you 확실해.”

 

대성이 엄숙하게 답했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라니까.

"I am just double checking. 그냥 재확인 하는 거야.

 

영소는 한숨을 내쉬고 갑자기 철든 소리를 했다.

 

"그냥 다시 자라기만 해. 미남 안 되어도 괜찮아.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제 눈에 안경이라잖아.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더 나아.”

"Look at you all grown up. 너 철 다 들었구나.“

 

대성이 낄낄거렸다.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그들을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 But this was not the time, guys. 짜식들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물론 그래도 세상은 이렇게 해야 돌아간다.

내일 망하든 말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애들은 애들답게 놀고, 각자 제 할 짓을 하는 중에 역사는 굴러간다.

그렇게 인간의 서사는 만들어진다.

Don’t be so serious. 너무 심각할 것 없다.

그런 세상이 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거나 움직이는 자들이 대성을 끝장내려 한다.

 

대성은 말 그대로 3척 동자가 되고 나서 몸이 식기 시작했다.

빡빡머리는 파르라니하고 피부는 반투명하며 손을 대면 찰떡처럼 쫀득거렸다.

잡아당기면 쭉 늘어지기도 잘했다.

 

"Don’t do that again. 다시는 하지마!"

 

대성이 질색했다.

하지만 영소는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그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몇 번이나 당겼다.

잘 키우면 정말 제일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피부가 좋고 몽실몽실해 보이는 어린아이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또 탈태환골 처음 해보는 주제에 대성이 급해서 뻥을 쳤을 가능성도 크다.

영악한 영소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단지 믿고 싶어한다.

대성이 영소의 손을 뿌려치는데 그만 이불이 함께 쭉 벗겨지고 말았다.

It was an accident. 사고였다.

다 봤다.

영소는 대성이 제일 잘생긴 남자가 되기는 커녕 과연 자라기는 자랄까 싶은 의심에 앞이 캄캄해졌다.

대성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몸은 이미 어른과 비슷했었다.

그랬던 몸이 3척 동자로 줄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다.

영소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성은 그때도 여전히 어린애다.

그리고 풍림원의 비상사태가 종료되었다.

반면 영소의 비상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이성 문제 외에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비정상이니까.

 

(또 그리고, 이쯤에서 이미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just to be safe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데, 나는 사고의 흐름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서술이 아니라 글쓴이다.

나는 이 석화세계, 천개의 에피소드 또는 천개의 검 이야기를 쓰지만 내 상상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다.

읽는 이는 이 이야기로 각자의 상상을 만들어 내가 쓰지 않은 부분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야기의 완결성? 코난 도일도 대충 마무리하고 독자한테 끝을 넘겨버린 셜록홈즈 편도 있지 않은가.

나와 읽는 이의 차이점은 오직 나는 지면에 상상을 입히고 읽는이는 자기 마음에 그린다는 것뿐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나 엉터리 같은 게 보이면 읽는 분 마음 가는 대로, 그 마음대로가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Go easy on me 나한테 좀 관대해주시라.

그래야 쓰는 나도 편하고 읽는 그대들도 편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소설에 서문이 없는 이유기도 하다.

서문만 아니라 이야기의 참여자로서 틈나면 내가 비집고 와서 주절거리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지 말고 함께 놀자.

나는 모난 돌 같은 대성과 영사 이야기 외에도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때로는 장막 뒤에서, 때로는 무대의 전면에서.

그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누나, 언니가 있었다면 사실 그들도 이렇게 왔다 갔다 했을 거다.

Who wouldn’t do this? 누가 안 이럴까.

정으로 이어져 있거나 잇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마 요괴도 그럴 걸?)

 

***

 

이미 밀실에 있을 때부터 작정했었다.

영소는 아예 도륙을 내버리겠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묘진에게 달려갔다.

아마 자기가 홧김에 불쑥 내뱉어버린 말의 진짜 의미를 생각을 시간을 남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숨어 있었을 거다.

It was probably for the best. 그게 상황을 모면하는 최선이었으니까.

영소가 못된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중에 마구 욕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나쁜 년, 누가 뭐 어째? 주둥이를 확! 가랑이를 확!"

 

전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하는 욕은 다 할 수 있다.

감히 요괴 묘진이 대성을 그냥 두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 때문이다.

 

"그만둬!"

 

조성일 소리쳤지만 영소는 이미 귀가 먹었다.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치마가 쓸려 내려오기 전에 묘진의 얼굴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대성과 대련할 때 막판에 겁을 주고 승리를 확정하는 영소 만의 의식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대성의 머리를 직접 박살내지는 않았다.

퍽!

눈이 크고 입술이 얇은 요괴 묘진의 머리에 철퇴가 떨어지는 듯,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깝...”

 

분한 표정을 짓던 묘진이 몸을 두어번 털썩 거린 후에 축 늘어졌다.

 

"어?"

 

영소는 한 번 더 묘진을 밟으려다가 기겁했다.

묘진의 시체가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금선탈각이라는 건가?"

 

영소는 중얼거리며, 누구 알려줄 사람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금선탈각은 껍질 벗고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아저씨나 노노인이 마저도 못 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소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과 자기가 좀 큰 사고를 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 씨! 물 떠러 나왔다가 이게 뭐야!"

 

투덜대며 아버지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종무는 무덤덤해 보였다. 대체로 항상 그런 표정이지만.

조성일이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사부님, 골치아프게 되었습니다.“

 

이종무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졌더니 큰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청이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가 도망쳤습니까? 이 요괴는 많이 별난 모양이군요.”

"목숨이 여러 개인 요괴였어. 이런 건 보통 죽으면서 달아나지.“

 

사부가 귀뜸만 해줬어도 놓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부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조성일은 원래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원망도 못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느라 잠시 눈만 찌푸렸다.

연청이 걱정했다.

 

"그럼 큰 일 아닙니까? 밖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조성일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별의 그물에 잡힌 뇌정풍운멸살진의 흰 구름은 여전히 은은한 우레소리를 내면서 풍림원을 맴돌고 있었다.

 

"차라리 그러면 좋지. 별의 그물에 붙잡힐 테니까. 안에 숨었을 테니까 잘 찾아봐야지.“

 

조성일한테 한소리 들을까 싶어서 영소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

요괴가 달아났지만 속은 좀 풀렸다.

무책임하지만 사고 수습은 원래 어른들의 몫이다.

이는 책임감과 다르다.

사고를 치고 나서 아이들이 할 일이란 어른들한테 혼나고 반성하는 것뿐이다.

함부로 제가 친 사고를 직접 해결하려다가는 정말 어른들도 수습 불가능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자기는 자기대로 망가질 수 있다.

어른스런 아이는 좋지 않다.

아이가 어른스럽기를 기대하는 어른은 어리석은,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다.

 

"영소나 못 달아나게 잡아놔.”

조성일이 말했을 때는 벌써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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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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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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