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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깃발

 

 

 

비상사태가 끝났을 때 영소 어머니가 말했다.

 

"영소가 올 때까지 여기 있거라.“

"영소는 물 가지러 갔어요. 내가 물 있는 곳으로 가면 안돼요?”

 

대성이 항의했다.

하지만 영소 어머니는 무시해버리고는 하녀들을 다 데리고 나갔다.

피난처인 밀실에는 대성 혼자 남게 되었다.

영소 어머니도 환골탈태한 까까머리 대성의 귀여워진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 다 자란 사내아이의 알몸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딸이 하는 꼴을 보면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다.

영소 나이 열다섯,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때다.

이럴 때 실수라도 있으면 몸 고생 마음 고생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달리 보면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고 품을 수 있는 때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감정을 부부가 함께 공유하고 때로 서로 꺼내놓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여느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딸이 그냥 이대로 쭉 탈 없이 대성하고 혼인해서 속 썩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거 빨리 시집 보내버려야 속을 덜 썩이지.“

 

딸이 한 엉뚱한 소리들 때문에 속이 상한 영소 어머니는 하녀들과 가면서도 중얼중얼 딸 욕을 하고 있었다.

 

"자! 공부 계속하자.”

 

혼자가 되자 란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막에 바로 비쳐지기 때문에 남이 볼 수는 없고 오직 대성만 볼 수 있다.

만약에 대성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동공 안에 거꾸로 선 란선생을 볼 가능성은 있었다.

 

"어떻게 해도 파괴자는 와. 너에게 이미 깃발이 꽂혀 있으니까.“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자기 장딴지를 톡톡 친다.

그게 묘하게 눈을 사로잡고 보기에 좋다.

 

"요괴를 파괴자라 하는 거지요?"

 

아주 어려진 대성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한테 벌써 길들여져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런 셈이지. 다른 것들도 있긴 하지만.”

 

란 선생은 작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도 빠른 속도로 지식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체계화하고 있었다.

대성을 통해서 다운로드 된 이 세계의 비밀은 사라지지 않은 채 대성의 몸에 남아있다.

란 선생은 다운로드 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요괴들, 아니 그 중에 파괴자들은 깃발이 꽂힌 대상을 찾아서 파괴하고 깃발을 회수하는 일을 해. 깃발을 많이 모을 수록 더 강한 요괴가 되는 거지.“

 

대성이 물었다.

 

"요괴들은 어떻게 생겨나요? 처음부터 있던 건가요?"

"그건 너무 많은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야! 배울 때 궁금한 것부터 파고드는 건 시간이 많을 때나 하는 거고. 질문할 때는 손 먼저 들고 하라고 했잖아!"

 

란 선생이 지시봉으로 대성의 손등을 탁 때렸다.

실제로 란 선생은 대성의 머릿속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대성은 손등을 진짜 맞은 것과 똑 같은 따끔함을 느꼈다.

 

"놀라긴. 감각을 통제하는 기능은 원래 머릿속에 있는 거야. 나는 인공지능이지만 효과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학생의 감각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거고.”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생글거리며 우쭐거렸다.

 

"똑똑한 학생이라면 미리 알아차렸어야지. 네 몸을 탈태환골 시킨 게 바로 난데.“

 

원래라면 강습용 인공지능에 사용자의 신체를 바꾸는 기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란 선생의 말대로 모든 게 가능했다.

이 세상은 견고한 형식이 있기는 했지만 변화를 만드는 확고한 방식 또한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은 데이터의 변형을 통한 응용과 활용에 달린 때문이다.

인공지능인 란 선생은 어느덧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떠나버린 자들이 남긴 로그 파일과 대성의 몸을 이루는, 이 세상을 구축한 비밀이기도 한 자료들을 학습하면 자기를 갱신한 것이다.

이는 떠나간 자들이 대성의 비어있는 속을 란 선생의 라이브러리로 채우기 위해서 급하게 우겨 넣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란 선생은 무수한 경쟁자들을 뚫고 살아남아 끝까지 존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록 "강습용" 인공지능이었지만,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은 "뛰어난 학습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란 선생은 강사나 선생들이 생존을 위해 줄곧 쓰는 방법인, 자기도 금방 알았으면서 옛날부터 알았던 것처럼 시침 떼는 게 몸에 배여 있었다.

대성에게는 란 선생이 대사형 조성일 보다 더 많이, 뭐든 다 알고 다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들었다.

영소만큼은 아니지만 싸가지 없는 대성이 그렇게 하는 건 놀랄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성이 아주 순둥이가 되지는 못한다.

자기 자랑에 도취된 란 선생 대신에 자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눈에 안 보이는 깃발이 꽂혀 있는데 요괴들은 그걸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저를 죽여서 깃발을 가져가려 하는 거라는 거 잖아요. 가져가서 더 강한 요괴가 되려고.”

"그렇지.“

"그러니까 깃발을 없애버리면 되는데, 깃발은 선생님도 못 없애고. 제 생각에는 요괴하고 깃발이 관계가 있으니까 깃발을 알아서 없애려면 요괴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였던 거지요.”

"You don’t need to explain it. 네가 설명할 필요 없어.“

 

란 선생은 마음이 상했는지 톡 쏘았다.

 

"내가 그렇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나중에 보면 알아!"

 

한 마디 따끔하게 하고 란 선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이 자식도 나하고 다를 게 없지. 여기 캐릭터들은 다 인공지능이니까. 특히 이 녀석은 캐릭터 제한을 벗어났잖아.)

 

제 할 말을 못하면 대성이 아니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안하면 영소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주세요.”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알고 있는 거 맞지요?"

 

란 선생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 올리는 시늉을 하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지켜봐야지. 그들이 너를 풍림원에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나쯤은 마련된 대비책이 있을 거야.“

 

대성은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란 선생도 조금 켕기는 듯이 자기 방어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한 거 아니잖아. 탈태환골 시켜 놓았으니까. 좀 기다려봐.”

 

조용히 온 영소가 밀실로 들어올 때는 누가 볼 새라 후다닥 들어왔다.

혹시 따라온 사람이 있을까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보기도 했다.

 

"물은?"

 

발가벗은 채 변색된 얇은 이불로 몸을 감고 앉아있던 대성이 물었다.

영소는 물 가지러 갔던 거였다.

깜박 잊어버렸던 거지만 영소는 이불을 대성에게 덮어씌우며 말했다.

 

"참아! 그럴 틈 없어.“

"왜? 목마른데. 배도 고프고.”

"아! 좀 참아! 그런 게 있으니까!"

 

영소는 목소리를 낮추고 고함치는 신기한 재주를 발휘했다.

영소는 많이 배워서 묘한 재주가 많다.

대성은 마주 쏘아부치려다가 청혼했던 게 생각났다.

화를 꿀꺽 삼키고 어른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소도 조금 누그러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도망치자. 내가 사고를 좀 크게 친 거 같아.“

 

대성은 풍림원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가만히 있어도 다 듣는다.

어떤 때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진다.

이것도 이제는 떠나버린 "그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서 대성에게 부여한 기능이다.

밖에서 일어나던 소동을 소리로는 들었기 때문에, 대성은 갸웃했다.

 

"요괴 도망친 거? 대사형은 별 걱정 안하는 거 같던데.”

 

영소가 신경질을 냈다.

 

"내가 쪽팔린단 말이야. 너 때문에 쪽 다 깠다고. 눈치없게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돼?"

 

대성이 참지 못하고 마주 소리쳤다.

 

"못 들었어? 지금은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고 못 들어온다는데 가기는 어딜 가?"

 

영소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넌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지?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 지 알아?"

"난 안 쪽팔리는 줄 알아? 나도 쪽팔려! 네가 내거 요만하다고 사람들한테 말해버렸잖아.“

"내가 뭐 거짓말 했어?"

 

영소가 톡 쏘고는 대성을 답싹 들어서 품에 안았다.

대성은 영소에게 안기자 얌전해졌다.

 

"어디로 갈려고?"

 

대성이 묻자 영소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방앗간 뒤에. 거기 가서 물 배터지게 마셔.”

 

대성이 동의했다.

풍림원에는 방앗간이 하나 밖에 없다.

방앗간 있는 곳이 풍림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방앗간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수가 방앗간의 물레를 돌리며 항상 탕! 탕! 소리를 낸다.

방아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꿍! 떡! 하는데, 떡을 좋아하는 대성은 그 소리가 떡! 떡! 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대성과 영소의 비밀 장소는 폭포수 뒤에 있었다.

들어갈 때 물에 흠뻑 젖기는 하지만, 폭포수 뒤에는 기어서 들어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입구를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좀 넓어지고, 낮에는 폭포쪽 입구가 밝기 때문에 깜깜하지도 않았다.

딱 키득대기 좋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영소가 좋아하던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것이 여기서 놀고 돌아가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영소는 이 동굴로 가기는 했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장소로서는 멋진 곳이지만 그저 어쩌다 마음이 동할 때만 대성과 함께 갔다.

마음이 동할 때라는 것도 비밀이긴 했다.

어른들이 방앗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싶거나, 간혹 아이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때였다.

 

"좋은 생각이야.“

 

대성이 영소의 귀에 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아이 씨!"

 

영소가 파리를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영소는 좀 덜 쪽팔릴 때까지 눈에 안 띄게 거기서 숨어 있다가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성이 생각하기에도 폭포수 동굴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방앗간에는 떡을 자주하니까 숨어 있어도 먹을 것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

 

노노인과 전삼자 등이 대성의 상태를 보기 위해 왔을 때, 대성이 있던 곳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튀었소. 탈퇴환골한 거 구경 좀 하려 했더니.”

"자네는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고개를 기웃거리던 노노인이 아쉬워서 전삼자에게 묻는다.

 

"좀 참으시오. 잠잠해지면 알아서 오겠지.“

 

"요괴가 돌아다니는 데 걱정도 되지 않나?"

 

노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전삼자가 딴청을 부렸다.

 

"돌아다닌다니 말이 좀 과하오. 숨어 다닐지는 모르겠소만. 풍림원 안에서 요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자네도 보고 싶다며.“

"나는 뒷감당하기 싫소. 영소가 사고 치고 도망갔는데 찾아봤자 원망 들을 일 밖에 없소.”

 

전삼자는 완강히 버텼다.

노노인이 화를 냈다.

 

"애들이 요괴하고 마주치면 큰 일 아닌가?"

 

전삼자는 못들은 척했다.

그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노노인이 대답을 기다리면서 계속 노려보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조별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따지려면 조별장한테 따지시오.“

 

조별장은 조성일이다.

조성일은 풍림원을 총괄하지만 느슨한 풍림원에는 특별한 직책이 없다.

이전 군 세력이 주축인 풍림원의 위계나 조직이 여타 문파보다 허술하다는 건 또 역설적이다.

전삼자와 노노인도 일반 무림문파라면 원로에 해당하겠지만 그냥 전아저씨, 노노인일 뿐이다.

다만 조성일은 풍림원의 이인자이기에 예전 군에 있을 때 직급인 별장이었으니 간혹 그렇게 조별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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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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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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