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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악의 씨앗

 

 

 

연청은 서두채를 시작으로 건장한 산적들을 추렴해서 소작농들의 마을로 갔다.

대성은 따라다니면서 진짜 기장을 했다.

산적들 중에는 마을에 정착하는 자도 제법 되었다.

한 달을 꽉 채우고도 일곱 날이 지나서야 풍림원의 가을걷이는 끝이 났다.

그 사이에 곡식을 실은 수레들이 풍림원으로 줄지어 갔다.

대성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큰일을 하고, 큰일을 겪고, 큰사람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틈날 때는 주로 영소를 생각했다.

몇 번인가 연청이 해보라며 기회를 줬을 때 죽어 마땅한 산적을 대상으로 바람의 검을 구결에 따라서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바람의 검 구결은 알고 보니 이미 노래처럼 배웠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작과 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바람의 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바람처럼 날쌔게 날면 신이 날 것 같아서 혼자 연습도 했다.

하지만 시늉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연청은 실망한 듯하면서도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많이 연습하지 못한 이유는 할 때마다 연청이 실망을 넘어서 한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대성은 자기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람의 검을 연습하는 건 근본적으로 연청을 흉내 내는 건데 한심한 눈총을 받는 게 좀 부끄러웠다.

 

"Don’t give me that look, please 제발 그렇게 좀 보지 말라구요."

 

속으로 말하곤 했다.

 

***

 

풍림원으로 돌아와서, 영소는 대성을 보자마자 물었다.

 

"이제 좀 알았어?"

"뭘? 검술?"

"거울 안 봤어? 네가 못생겼다는 걸 말이야."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다짜고짜 그 소리부터 들으니 기분이 상해 거울을 돌려줬다.

 

"안 봤어."

 

영소가 입을 비죽거렸다.

 

"Stop sulking 삐졌구나."

 

대성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못생겼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난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그 소리야!"

 

영소는 대성이 화를 내던 말든 상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건데 네가 못 생기면 속상하잖아."

 

대성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영소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좀 잘생겨 보라고. 이 바보야."

 

봄눈처럼 녹아내렸던 마음이 마지막 "바보야" 소리에 다시 상해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연청이 대사형에게 보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감나무에 올라가서 다 익지도 않은 생감을 따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시장에서 산 머릿 장식을 슬그머니 영소의 치마 위에 놓으면서 자기가 하지 않은 척 feigned ignorance 시치미를 뗐다.

영소의 입에 천천히 벌어지면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대성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우쭐해졌다.

 

- 왜 시킨 대로 안 했냐?

-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내가 철없긴 해도 사내더군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고 행동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서두채 산적들을 만났을 때 연청은 단검 한 자루만 대성에게 주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멀리서 지켜봤어야 했다.

위험할 때는 마부로 따라간 전삼자가 대성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성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 막내 능력은 글재주에 국한된 모양입니다. 검을 쓰는 건 보통 사람이 처음 배울 때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네 번이나 보여줬지만 바람의 검을 못 썼습니다.

- 붓이나 칼이나 다를 게 없다. 서도나 검도 마음으로 도구를 다루는 거니까.

 

대사형 조일성은 대성이 배운 적도 없다면서 글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고 어쩌면 검도 그렇게 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마음과 태도가 확고하지 않으면 언제 큰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

 

- 그냥 평범합니다. 막내가 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혹시 좀 더 자란다면 그때는 모르지요. 아무튼, 막내는 착해요. 악이 없습니다. 싸가지도 없지만 어린애 그대로죠.

 

조성일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 넌 아이들이 착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을 가졌구나.

- 그게 틀렸습니까?

- 아이들이 착하다면 어른들의 악은 어디서 왔나? 악이 굴러다니다가 몸에 묻는 때 같은 건 줄 아느냐?

- I don’t even think that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 악은 <씨앗> 같은 거야. 누구나 다 품고 있는. 상황과 핑계가 주어지면 금방 자라나지. 아예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고 혹시 싹트면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해. 우리가 절제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수행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지.

 

대성은 조성일이 연청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들으라고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각한 내용도 아니다.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을 도리로 뼈대 세우고 살 붙여서 한 것뿐이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This is so typical 항상 이런 식이야. 대사형은 뭘 저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만 늘 저렇게 해."

 

풍림원은 따분하고 조용하고,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풍림원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풍림원은 아름답고 풍요하고 아늑하고, 사부와 사형들과 그들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예쁜 영소가 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

(그 당시에는 확실히 예뻤다.)

여기로 가라고 한 할아범이 고마웠고 덥석 제자로 받아준 사부님이 고마웠다.

불현듯, 원수까지 갚아준 사부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감이 되어 대성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대성을 감을 한 번 베어 먹고는 던져버리고 선언했다.

 

"난 내일부터 무공 열심히 배울 거야."

"네가?"

 

영소는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두고 봐. 반드시 바람의 검을 익혀서 마구 놀러 다닐 거니까."

"퍽이나."

 

영소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거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랬어. 넌 무공에 소질도 없잖아. 이번에 네 번이나 보고도 못했다면서."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거야!"

 

영소의 염장질에 오기가 생겼으나 영소의 말에 틀린 게 없었다.

대성은 신경질이 났다.

전아저씨가 의심스러웠지만 증거가 없고 증거가 있어도 항의할 수는 없다.

영소는 대성이 사다준 머릿장식을 하고서는 손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이리저리 지어보고 있었다.

 

"나도 바람이 알려줬다. 왜?"

 

가끔 대성이 하던 말이었다.

 

***

 

다음 날부터 대성은 결심했던 대로 정말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네 번이나 보았던 바람의 검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흉내를 내면 그냥 칼을 들고 뛰어가는 꼬라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외우고 있는 구결들은 분명 이해는 다 되는데 써먹으려면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연습했지만 동작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의 심상만 더 뚜렷해졌다.

연청은 더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대성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한마디씩 툭 던질 뿐이었다.

 

"You are doing great 잘 하고 있네. 기장도 잘했어."

 

그냥 해마다 촌락들 다니면서 장부에 기장이나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거니 하고 믿지만, 진심은 아니겠거니 하지만 어쨌든 속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심통이 나서 대성은 대꾸도 안했다.

영소는 근처에서 놀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즉시 반응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바보는 진짠 줄 안다고요."

 

하거나, 혹은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며,

 

"사형은 진짜 보는 눈 없다. 가르치는 거만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마치 자기가 연청보다 더 어른인 것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소도 바람의 검을 못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러던 중에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대성은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총명했다.

자질도 나쁘면서 못된 자존심은 오지게 세었다.

결국 하다하다 안되니까 다른 길을 찾아내고 말았다.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날이었다.

잠시만 밖에 나와도 바람이 솜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다 뺏어 가던 날이었다.

오기로 바람의 검을 수련하던 대성은 대사형을 건너뛰고 다짜고짜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님, 사부님이 바람의 검법을 사부님이 창안하셨지요?"

 

이종무는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어서 식히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창안이라기보다는, I made it up 그냥 지어낸 거야."

"그럼 뭐 허풍 같은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성은 역시 싸가지가 없다.

할아범한테 예의범절을 잘 배우지 못하고 떠받들려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아범이 벙어리라서 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있다.

앉아 있어도 서 있는 사람만큼 큰 사부는

 

"응."

 

하고 싱그럽게 웃었다.

바람의 검은 술법에 가까운 거라서 창안보다는 지어냈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하지만 대성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불만을 토로했다.

 

"It’s really not my thing 구결이 저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부님이 만들었으니까 저한테 맞게 고쳐주시면 안 돼요? 새로 만들어도 좋고."

"그걸 왜 바쁜 내가 해야 해?"

 

이종무는 귀찮아 지는 것을 겁내는 듯이 말했다.

대성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요. I’m so frustrated 속상해 죽겠어요."

"그럼 하지마. Frustrated too. 나도 속상하다."

 

말은 그래도 이종무는 속상한 표정이 아니라 귀찮은 표정이었다.

분명 똑 같이 웃는 얼굴인데도 귀찮음이 읽혔다.

그에게는 대성이 무공을 배우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의 무공에 관한한, 모두가 비슷한 태도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who cares 누가 신경이나 쓴대? 하는 느낌이었다.

 

"사부님!"

 

대성은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저한테 맞는 구결을 만들어도 돼요?"

 

황당한 소리였다.

구결을 만든다는 것은 무공을 만든다는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대성이 무공을 만들겠다니 터무니없다.

하지만 이종무는 자기 자신부터가 터무니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치고 무시해버렸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솔깃했다.

 

"바람의 검 구결을?"

 

이종무가 흥미를 보였다.

대성이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예."

"해봐."

"예."

"해보라고."

"예."

"해보라니까."

"예. 한다고요."

 

대답한 후에 대성은 해보라는 이종무의 말이 허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만들어 왔으면 여기서 해보라고. 만들어 왔을 거 아니냐?"

 

사부 이종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공을 만들면 펼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무의 말은 반이 맞았다.

대성은 펼치지는 못해도 구결은 가져왔던 것이다.

풍림원에는 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무공이든 구결로 전수되고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나선 안 된다.

대성도 그런 규율은 따르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가 생각해왔던 구결 같지도 않은 구결을 말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지 싶어요."

 

술법에 가까운 바람의 검이 술법이 아니라 진짜 무공이 되어버렸다.

술법일 때는 배울 수 있는 사람만 배울 수 있지만 무공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배울 수 있다.

 

"엉뚱해. 아주 엉뚱해."

 

이종무는 대성이 만든 구결을 다듬고 채워주었다.

그때가 열한 살, 열두 살이 되기 몇 개월 전이었다.

대성은 바람의 검 구결을 새로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무공을 창안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 대사형 조성일은,

 

"It’s so childish 어린애다운 짓이네."

 

했지만 매우 기뻐해주었다.

그가 어린애다운 짓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성이 만든 구결대로 하면 바람의 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수련하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몸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칼에도 다치지 않아야 될텐데."

 

연청은 미심쩍어했다.

 

"그건 막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원래 놀라운 건 항상 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야."

 

조성일이 그렇게 말하자 연청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대성이 이런 구결을 만든 것도 연청이 생각할 때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연청은 이종무의 명으로 소작농들 집을 찾아다니며 자질이 좋고 눈에 총기가 있는 아이들을 골라서 풍림원으로 데려왔다.

모두 열 살 이전의 아이들이었고, 사내아이가 여덟, 계집아이도 여덟이었다.

사부의 넷째 제자이고 대성의 바로 위인 정경옥도 풍림원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 물건이네."

 

정경옥은 대성을 안고 궁둥이를 툭툭 쳐주었다.

갑자기 일이 커지고 엉뚱하게 번지는 것 같아서 대성은 당황했다.

웬지 기뻐하면서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은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That’s not what I meant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풍림원에 들어온 아이들 열 여섯은 며칠동안은 풍림원의 다른 애들 속에서 얼핏설핏 보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성과 영소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어린아이들답게, 그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가 대성이 풍림원에서 보내던 황금시절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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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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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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