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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책 파는 소녀

 

 

겁쟁이가 곽범을 데리고 간 곳은 작고 낡은 책방이었다.

쌓여 있는 책들도 헤어지고 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주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책을 보다가 일어섰다.

"책 사게요?”

목소리가 고왔다.

곽범은 갑자기 가슴이 떨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열여섯, 일곱쯤으로 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복숭아 같은 분홍빛 뺨에는 보드라운 솜털이 있었다.

곽범은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에는 헌 책 밖에 없어요. 대신 요새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어요.”

소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찾는 책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찾아 줄게요.”

곽범은 그 순간 새소리들이 정말 싫어졌다.

새소리는 아무리 사람 비슷하게 해도 긁히는 소리나 카랑카랑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그에 비해 소녀의 음성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봄바람 같기도 했다.

올이 아주 가는 그물에라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와 눈이 부딪혔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부자 되는 책을 사려고...”

"책을 사서 부자가 되려고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부끄러워져서 땀이 났다.

왜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다.

소녀가 가까이 와서 좋은 냄새까지 났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69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권에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고 쓰여 있다고...”

말을 하긴 해도 두서가 없다.

“아! 태사공서(太史公書)!”

소녀는 용케 알아들었다.

"사기(史記)라고도 불리는 태사공서의 마지막 편 화식전 말미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 책 있어요?”

살았다 싶어진 곽범이 급히 물었다.

“저희 책방에도 있긴 하지만 전권은 아니에요. 여러 권이 빠졌어요.”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사기를 읽는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을 텐데... ”

소녀의 고개가 귀엽게 갸웃거렸다.

"부자 되는 책 아닌가요?”

곽범은 어리둥절해졌다.

“부는 복에 달린 거예요.”

소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치농고아 가호부, 지혜총명 각수빈, 열자(列子)라는 분이 지은 책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리석고 귀가 먹고 병들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고,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도 가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곽범이 되물었다.

"사기라는 책에 이런 말도 있다고 들었어요.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그러면 사기와 열자의 주장은 반대되는군요.”

소녀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태사공과 열자는 모두 훌륭한 분들이신데 주장이 반대일 리 있겠어요? 그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랐겠지요.”

곽범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상과 상황이 다르다고 말이 달라지다니...

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책을 읽는다고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은 쉽든 어렵든 제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살아요. 그리곤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소녀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는 곽범에게 물었다.

"손님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해요?”

곽범은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책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많아요?”

소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곽범은 말없이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학문은 하나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소녀가 인내하는 기색을 하며 말했다.

"하나를 알려고 공부하면 두 개, 세 개를 모른다는 것만 알게 되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거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대부분이고.”

"그럼 왜 책을 읽고 배우죠?”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고 생각에 깊이를 만들어줘요. 똑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말하더라도 깊이가 더 해져서 가치가 생겨요.”

"아!”

곽범은 감탄했다.

명쾌한 설명이다.

소녀의 말에는 깊이와 더불어 설득력이 있다.

소녀를 존경의 시선으로 보았다.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모르지요. 혹시 손님은 사기를 읽어야 부자가 될 사람인지도요. 복은 엉뚱한데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곽범은 속으로 정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인가요?”

소녀가 웃었다.

"식당 아니고는 어린 여자를 점원으로 안 써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점원이 되고 싶어요.”

소녀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조금 벌린 소녀의 얇고 여린 입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서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빠르게 말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녀는 곽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채용은 안 되겠어요. 손님은 무슨 일을 칠 것 같아 보여요. 책값 없으면 가주세요.”

 

곽범은 쫓겨났다.

낙담해서 객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겁쟁이가 말했다.

"그래도 사기꾼은 아니다. 그 애.”

 

***

 

객점에 도착하자 입맛 돌게 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의 책방에 들르기 전이었다면 별 생각없이 사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소녀의 얼굴만 눈앞에 그려졌다.

소녀와 뺨을 부비고 싶어졌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도 입을 맞추고 싶다.

 

***

 

밤이 되자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들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겁쟁이가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침상에 멍하니 누운 곽범은 새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전에 몰랐던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을 해왔다.

지금은 달랐다.

두 가지 생각이 뒤섞이고 끊이지 않는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녀에 대한 생각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소녀의 책방으로 달려갔다.

 

***

 

책방 문을 열던 소녀는 곽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왜 왔어요?”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곽범은 소녀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밤새 소저만 생각했어요.”

소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곽범은 소녀에게 다가섰다.

소녀가 경계하며 물러섰다.

"물러나요. 소리치겠어요.”

곽범이 말했다.

"책 하나 줘요. 아주 오래되고 값이 싼 걸로.”

소녀가 안도하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애써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무 책이나 사는 건 의미 없어요. 읽고 배울 책을 사야해요.”

곽범은 한쪽에 있는 붓과 벼루, 연적이며 종이 따위를 가리켰다.

"저것들도 살게요.”

"책만 읽을 게 아닌가 봐요.”

소녀는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곽범의 뚱한 말에 소녀는 멈칫했다.

차가운 말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늘해졌다.

"값이 싼 건 시집밖에 없어요. 글자가 적고 얇으니까요. 골라보세요.”

몇 권의 낡은 시집을 꺼낸 소녀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곽범은 눈에 띄는 책 하나를 손에 들었다.

소녀가 물었다.

"보고 고르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나중에 다 사서 읽을 거니까. 지금은 싼 것부터 읽는 거고.”

곽범의 말에 소녀가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언제 돈 벌어요?”

"소저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곽범은 돈을 꺼내며 대꾸했다.

소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만 애처럼 하는가 했더니 행동도 애 같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곽범도 자기 말이 예닐곱 살 어린애 말과 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이후로 사람들과는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범은 산 붓과 벼루 등을 챙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아요. 난 지금도 짝짓기 할 수 있어요.”

소녀가 충격을 받고 물러섰다.

곽범은 마치 이겼다는 듯이 소녀를 한 번 보고는 책방을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겁쟁이가 귀에 대고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짝짓기 할 수 있다고 한 거?”

"그거야 할 수 있겠지. 우린 두 살만 돼도 다 하는 건데. 내 말은 책하고 벼루로 어떻게 돈 벌거냐는 거야.”

"이걸로 금방 돈 못 벌어. 사람들이 책에 뭘 써놓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 인간들이 공들이는 건 뭐든지 좋은 거잖아.”

곽범도 집이 불타기 전에 글을 배웠고 몇 권의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모두 아이를 바르게 훈육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그나마 기억조차 희미했다.

책다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돈 벌어야지. 그래야 새장도 새로 만들 수 있으니까. 어젯밤에도 열여섯 놈이 더 왔단 말이야.”

겁쟁이가 말했다.

"돈 벌 수 있어.”

곽범은 장담했다.

하지만 겁쟁이는 영 못 미더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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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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