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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상인의 전쟁

 

 

 

대문 밖 구름 속에서 고양이 머리 같아 보이는 가죽 가면을 쓴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가죽옷을 입고 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귀는 하얗거나 볼그스름했고 긴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출렁거렸다.

 

"Eblis! 요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긁적거리던 조성일이 여자를 힐끗 보고는 이종무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보자마자 요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림원의 젊은 무사들만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놀란다.

노노인이 혀를 찼다.

 

"군진을 쓰기에 누군가 했네.”

 

연청이 물었다.

 

"요즘은 요괴도 군진을 씁니까?"

 

노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부터 그랬어. 경우가 드물긴 해도. 보통 요괴들은 이렇게 백주 대낮에 잘 움직이지도 않거던.”

 

고양이 머리가 걸어오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누구보고 요괴래. 신성한 파괴자님더러. 자!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놈 내놔.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이종무가 가까이 있는 전아저씨, 전삼자에게 물었다.

 

"외모에 자신이 좀 있는 거 같지?"

"Probably, I suppose so. 그런 거 같습니다. 지모는 좀 떨어지는가 봅니다. 고양이 주제에 호랑이 굴이니 뭐니 하더니 불쑥 들어오는군요.”

 

전삼자는 태연자약하게 창날을 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종무가 이번에는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는 누구 보라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냐?"

"요괴가 예쁘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뭔가를 적고 그리면서 두드리던 조성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 예쁘면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기 좋은데 척 하는 게 다 속이는 거지. 예쁘면 속이기 좋기 때문에 저 요괴가 예쁜 거야.”

 

전삼자는 웃었다.

조성일은 요괴가 예쁜 척하듯이 바쁜 척하며 반쯤만 수긍하며 머리를 반만 끄덕였다.

영소의 이상한 말버릇은 분명히 사부 이종무의 젊은 시절 말버릇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종무는 조성일의 어깨를 툭 친후에 고양이 요괴에게로 물었다.

 

"이보게 처자. 이름이 뭔가?"

"나는 파괴자 묘진이다. 빨리 그놈이나 데려와.”

 

노노인이 중얼거렸다.

 

"장군님 앞에서 파괴자는 개뿔.”

 

이종무가 물었다.

 

"뇌정멸운살진은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지?"

 

"흥. 알긴 아는구나.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다.”

"Too bad, too bad. 아깝겠다.”

 

이종무는 성큼 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길어서 보통으로 걷는데도 보통 사람이 뛰는 듯 빠르다.

묘진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종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예쁘게 죽는 모습을 그놈들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이종무에게서는 어떤 기세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대처럼 큰 사람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싹함을 느낀 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이종무가 물었다.

 

"준비는?"

"Hang in there.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조성일이 대답했다.

 

"버티긴 뭘...”

 

요괴 묘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조성일이 말했다.

 

"잡았습니다. 별의 그물로 뇌정멸운살진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물로... 진을 잡아?"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던 요괴 묘진의 가늘고 날렵한 다리가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의 의미는 묘진이 부리는 구름속의 벼락처럼 자기의 혼을 꿰뚫었다.

 

"전선의 마왕 비상인!"

 

놀람과 충격, 두려움으로 요괴 묘진의 맥이 풀어져 버렸다.

이종무는 천천히 걸어가 묘진의 고양이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묘진은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아나지도 못했다.

몸 주변에서 작은 빛이 연이어서 명멸할 뿐이었다.

이종무의 무공, 별의 그물에 이미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성일이 뇌정풍운멸살진을 붙잡은 것도 별의 그물이고 이종무가 요괴 묘진을 결박한 것도 별의 그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성일은 담장에 설치된 자기의 진을 이용했고 이종무는 직접 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 예전 전쟁하던 시절, 적의 군진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학살했던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의 그물이이다.

전삼자가 혀를 찼다.

 

"I told you.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우습군요. 힘도 없는 장수가 앞장서다니. 요괴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가 봅니다.”

 

연청이 가소로운 듯이 내뱉었다.

이종무가 손을 높이 들자 묘진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아귀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Do your worst. 네 멋대로 굴어봐.”

 

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에게 아무 겁없이 달려든 댓가였다.

 

이십 여 년 전, 전쟁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 년을 끌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끝이 났었다.

전쟁을 한 세 나라의 군사는 수를 합치면 1백 20만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차가 6만대가 넘었다.

그러나 피해는 오직 두 나라에서만 났다.

한 나라는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25만 군사 중에서 오직 7만 명만 실제 전투에 참여 했었다.

그렇게 하고도 전세는 3개월 만에 승리로 굳어졌다.

나머지 9개월은 그냥 질질 끌다가 별 이유도 없이 5만 명을 잃고 the war finally ended 마침내 종전했다.

그 중심에는 전쟁 중에 물러나고 잠적해버린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 장군은 아군에게는 전장의 신이라 불렸고 적들에게는 전선의 마왕이라고 불렸다.

병법에 통달했던 그는 전장에서 홀연히 자기만의 무공을 깨달았다.

그 무공은 무림의 어떤 무공과도 달라서 누군가는 도술이라 불렀다.

병사를 부리는 그 장군의 용인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했다.

그의 병사들은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물을 가리키면 물로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망설임없이 불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설혹 그가 불로 뛰어들게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불타죽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용인한 irregular 비상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자들은 그 장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파괴자도 그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

그 장군, 전선의 마왕, 전장의 신, 전쟁의 신이라 불린 사람이 눈앞의 장대 같은 사람이었다.

 

"Are you tryna(trying to) get rid of me? 저를 죽을 건가요?"

 

묘진은 체념하고 멍해진 눈으로 물었다.

구름 속에 있는 부하들을 먼저 투입했으면 비상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Too late to regret.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고양이 주제에 호기롭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여야지. It’s better this way. 그게 더 나아.”

 

이종무가 웃음을 지었다.

묘진이 태도를 바꿔 도리질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비상인,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어요. 저를 살려주세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의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노노인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쯔, 그냥 체념하고 죽지. 그럴 거 같더만... 이봐 처자. 죽고 나면 그런 걱정 없어져. 누구 걱정 뭔 일 때문에 못 죽는다는 말은 다 죽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야. We’ll see 너도 늙고 나면 알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묘진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꾸어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협박했다.

이종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웃은 후에 전삼자에게 묘진을 던져주었다.

 

"가둬놔.“

"에이, 이거 원...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요괴는 예측불허라서 장군님 아닌 저희들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군님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성일이 이종무를 대신해서 전삼자에게 말했다.

노노인이 웃었다.

 

"에잉. 태산명동 서일필,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놀라서 이게 뭔 소동이야. 그나저나 장군님. 구름이 우리 풍림원을 딱 에워싸고 있으니 꽤 그럴듯 하게 보입니다.”

 

조성일이 이종무의 허락을 받아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묘진은 전삼자에게 끌려가면서 또 태도를 바꿔 마지막으로 이종무에게 소리쳤다.

 

"비상인. 나를 죽이더라도 그놈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놈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Nebby lady (bitch). 오지랍 넓은 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뭐 누굴 어째?"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영소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들어서 묘진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발로 차기는 했지만 바람의 검이었고 구결은 대성이 만든 구결이었다.

머리를 차인 묘진은 몸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지지도 않았고 목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헝겁인형 같았다.

 

"질기네 저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영소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전삼자는 영소가 달려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라서 묘진을 빼돌리지 못했다.

이종무는 영소가 요괴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는 듯이 보였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아이들과 여자들이 담장 밖과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구름 속에 요괴가 가득하다는 것을 영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이든 여자들이 "참, 장관이야" 한다.

 

“대성은?"

 

노노인이 영소에게 물었다.

늘 붙어 있는 영소가 나온 걸 보면 대성이 이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성이 탈퇴환골하는 모습을 요괴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영소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직접 가서 봐요. 이제 요만 해졌으니까.

 

영소가 자기 새끼손가락의 끝 두 마디만 들어 보였다.

연청이 놀라며 물었다.

 

"뭐가? 대성이?"

 

영소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슬그머니, 누가 들어도 수상한 소리를 했다.

 

"발가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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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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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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