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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람과 숲의 장원

 

 

 

그러니까, 3년 전이 아니라 5년 전이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도 그때는 어린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말투를 사용했었다.

 

"글은 언제부터 썼는가?"

 

풍림원주 이종무는 대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부터 물었다.

그도 시장에서 글을 써서 판다는 대성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심 신통해하던 차였는데 제 발로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니 두 말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다.

 

"몰라요."

 

대성은 이 말에도 저 말에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긁다가 자기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응? 그게 놀랄 일인가?"

 

이종무는 자기 질문에 대성이 놀란 줄 알고 물었다.

 

"제가 머리 긁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서요."

 

대성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껄껄 웃었다.

대성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영소도 기둥 뒤에 숨어서 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아마 처음 본 그 모습에 대성은 영소한테 조금 반했을 것이다.

영소의 얼굴은 작고 하얬다.

탱글탱글한 볼은 생기가 넘쳤으며, 표정이 다채롭고 참 예뻤다.

무엇보다도 머리에 꽂고 있는 노란 나비장식이 가장 예뻤다.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란 나비 장식은 지금은 영소의 머리에서 볼 수 없다.

어느 여름 날 방앗간 근처의 폭포에 물놀이 갔다가 잃어버렸다.

나비장식을 잃은 날부터 대성의 눈에는 영소가 좀 덜 예뻐 보였다.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아기 사슴이 영소보다 더 예뻤다.

속마음은 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성은 예쁜 것만 보면

 

"예쁘다. 곱다."

 

등등의 말을 했었다.

그랬는데, 점차로 영소 자기한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딴 데 대고

 

"예쁘다. 매우 예뻐."

 

따위의 말들을 사용하니까 심통이 나서 쏘아붙이곤 했다.

영소의 성미가 나빠진 데는 분명 그 이유도 있다.

 

"그저 예쁜 것만 보만… 그만 좀 밝혀! 이 바보야!"

 

그러면 대성도 참지 않았다.

 

"예쁜 걸 예쁘다 하지 뭐라 해!"

 

(예쁘지도 않은 게.) 하는 말은 그래도 영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속으로만 말하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예뻐 보일 때가 있으니까 전혀 예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뭣했다.

영소는 요리하는 거 배우기도 하고 약 만드는 것 배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더 안 예뻐졌다.

그리고 이미 대성의 마음에서는 예쁜 것과 좋은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예뻐 보일 때도, 화내고 싸울 때도, 아주 못 되게 굴 때도 영소가 좋았다.

싫었던 적이 없다.

그래도 한 살 차이다.

사문의 엄격함에 비추면 주고받을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대성과 영소는 친구가 되어 아웅다웅하면서 투닥거렸다.

 

***

 

사부 이종무는 조금 마르고 키는 매우 큰 사람이었다.

보통 어른들보다도 머리 한 개 반 또는 두 개 정도 차이로 컸다.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또 대하기가 불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더 이상했다.

사부의 평상시 표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공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항상 싱글벙글했다.

주변에서 누가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변함없었다.

영소는 너무 싱글벙글하는 자기 아버지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성이 보기에 사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일 좋았다.

풍림원은 기묘한 규율이 있어서 분명 엄격한 곳임에도 늘 넉넉한 여유가 몸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이름 높은 구대 문파와 칠대 검파가 있다.

고수로는 2제 3왕 6군 8흉 같은 자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풍림원은 유명한 문파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고수가 있지도 않았다.

역사도 고작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풍림원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풍림원은 농토를 많이 가진 장원이었다.

대성이 듣기로 한 때 장군이었던 사부 이종무가 손자병법에서 한 구절 따와서 장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림원은 지역 이권에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세력이 크지도 않고, 세력을 키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의 대부분을 사부는 무공을 연구하는데 소비하고 사형들과 노복들은 분주하게 일했다.

대성과 영소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주로 노는 게 일이었다.

이렇듯 풍림원은 지방 토호였고, 무림보다는 오히려 관에 더 가깝다면 가까웠다.

해마다 두 번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치니까.

보통 무림 세력은 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사부가 좋아한다는 손자병법에는 바람(풍)과 숲(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질풍처럼, 숲처럼, 불길처럼, 산처럼, 구름 속의 별처럼, 벼락처럼.

 

군사를 움직이는 병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으로만 보자면 과연 여기서 장원의 이름을 따올 만큼 대단한 내용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냥 가만있다가 후딱 움직이라는 말일 뿐인데 신비한 척했다.

글을 알고 쓰는 대성의 입장에서 보면 따분한 소리다.

풍림원이 따분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평화롭다고 하는 게 더 좋겠다.

대성은 가끔,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쫓아낼 것 같지 않았으니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지만 문득문득 떠올랐다.

 

***

 

대성은 귀가 매우 밝았다.

 

"근골은 어떤 거 같나?"

"보통이군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딱 보통입니다."

"무공에 대한 자질은?"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호원무사 수준은 되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오고 사흘 째 되던 날, 대사형 조성일과 둘째 사형 연청이 대성에 대해서 주고받은 말이었다.

 

"그만하면 됐지. 평범해서 나쁠 것도 없고, 글 잘 쓰는 사람도 하나쯤 있으면 괜찮고."

 

대사형은 별 기대도 안 한 듯이 말하곤 웃었다.

둘째 사형도 더 말하지 않았다.

대성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대를 받지도 않고 책망도 받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마음껏 놀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매일 영소하고 장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때로는 장원 밖의 야산에 가서도 놀고, 장원 내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도 했다.

심심하면 방앗간, 목재소, 대장간, 누에 치는 잠실, 거름 일구는 구덩이 (발효되면서 좋은 냄새가 난다. 그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도 많이 핀다.), 큰 말들이 있는 마구간, 술 빚는 술청 등을 기웃 거리기도 한다.

풍림원 안에는 군사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있었다.

무공은 둘째 사형이 가르쳐주었다.

가르치는 둘째 사형도 건성이었고 배우는 대성도 건성이었다.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배우는 날도 몇 마디 말해주고 외우라는 게 전부였다.

시범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끝나곤 했다.

노래를 배우는 건지 무공을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배우지 않는 건 그것대로 좋은지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영소와 놀다가 다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혼나지는 않았다.

잘 먹고, 잘 노는 어린아이의 삶이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은 아무 걱정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에 영소는 매일 더 예뻐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예뻐지던 시절은 벌써 지나갔고 점점 되바라진다.

이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다.

어느 날 영소가,

 

"나 뭐 배워."

 

하더니 그 다음 날 조금 덜 예뻤고 그 다음 날은 조금 조금 덜 예뻤다.

이전에는 영소를 보기만 해도 흐뭇해져서 헤벌레 웃곤 했다.

영소가 매일매일 예뻐지던 때의 일이다.

 

"나 예쁘지?"

 

영소가 불쑥 다가서면서 물으면,

 

"응, 응."

 

대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악한 영소는 자기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 예쁘긴 예뻤다.

 

"그러니까 자꾸 내 얼굴 보지마."

"왜? 닳는 것도 아닌데."

 

대성이 심드렁하게 물으면 영소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네가 보면 나도 너 봐야 하는데, 넌 못 생겼잖아."

 

억울한 소리였다.

대성이 벌컥 해도 영소는 가소롭다는 듯이 깔아뭉갰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한테 시집 갈 거야."

"그럼, 그럼 세상사람 다 만나서 비교해봐야겠네."

 

하고 대성이 빈정거리면,

 

"이래서 넌 바보야. 다 만날 필요없어. 느낌이 딱 온다고."

 

하면서 영소는 하녀들에게 줏어들은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둘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말을 매우 중요한 말인 양 주고 받고, 목적없이 뛰어다녔다.

나뭇가지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강을 응시하거나 풀잎을 손톱으로 똑똑 찍기도 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정은 그렇게 들었다.

서로 공유한 시간이 서로를 묶고 있는 줄은 대성도 영소도 몰랐다.

영소가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후로 덜 예뻐 보였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다 가을이 왔다.

단풍잎을 줏느라고 후원 마당을 쭈그리고 돌아다녔던 날 저녁에 사부가 대성을 불렀다.

 

***

 

사부에게 물었다.

 

"Did you want to see me? 저 찾았어요?"

 

대성에게 사부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고, 풍림원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편했다.

대답은 대사형인 조성일이 했다.

 

"It’s time to make yourself useful. 이제 쓸쓸 밥값을 해야지."

 

대사형은 사부를 대신해서 풍림원의 모든 사무를 다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 다음으로 높고 훌륭한 사람이며 훌륭하게 보이는 횟수로 치면 자주 못 보는 사부보다 더 많았다.

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글 쓸까요?"

 

원래 글을 쓰고 팔아서 돈을 벌었던 대성인지라 자연스럽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할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긴 했으니까.

사부가 과자를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부터 추수가 시작된다. 너는 둘째를 따라가서 기장을 하거라."

 

기장은 장부를 적는 것을 말한다.

대성은 글은 알아도 기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곤란한 상황에 표정이 드러나자 대사형이 다른 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소작농 이름 물어보고, 소출이 얼마나 나왔는지만 적으면 된다."

"저 혼자요?"

 

대성이 반문했다.

대사형이 인상을 썼다.

대성은 대사형이 과자를 다시 가져갈까 싶어서 과자부터 먼저 받아 챙겼다.

 

"사부님이 방금 말씀하셨는데 뭔 생각으로 들었어? 둘째 연청하고 함께 가야지."

 

대성은 머뭇거렸다.

 

"그럼 둘째 사형이 하면 안돼요? 전 내일 영소하고 도토리 줍기로 했는데……"

"난 바빠. 그 일 외에 또 네가 해야 할 것도 있다."

 

둘째 사형 연청이 툭 던졌다.

연청은 과자도 주지 않았다.

그는 대성한테 무공을 대충 대충 가르친다.

가끔은 말로 놀리기도 하는데, 분명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일 텐데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잘 생기기는 매우 잘 생긴 미남이지만 대성은 미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성은 한숨을 쉬고 대청을 빠져나왔다.

풍림원은 대농장으로 농토가 많았고, 소작농들이 이룬 마을의 숫자도 많았다.

추수 기장하러 간다는 말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는 바깥에서 돌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동안 영소와 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히 사부 앞에서, '아! 뭐 됐다'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는 걸 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힘든 척, 술 취한 척하며 방으로 돌아가는데 영소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 일 간다."

 

대성은 불쌍한 척, 비통한 척하며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이 병신이 뭐래."

 

입이 조금 많이 험한 영소한테는 대성의 감정 호소가 털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쏘아 보는데 영소가 소매 속에서 불쑥 뭔가를 꺼내 주었다.

 

"받아!"

"뭐야?"

"뭐긴 뭐야. 거울이지."

 

작은 구리거울이었다.

 

"거울은 왜?"

"웬만한 집에는 거울 없어. 나가면 소작농들 집에서 자야 할 텐데, 병신 같이 머리카락 흐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주는 거야. 귀찮더라도 댕기는 매일 새로 묶고."

 

아직 어린 대성은 영소와 마찬가지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잘 때 베개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확 잘라 버리고 더벅머리 하는 게 잘 때는 더 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댕기머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벅머리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날린다.

방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걸 하녀들이 싫어한다.

영소도 더벅머리는 싫어한다.

귀찮긴 해도 댕기머리하면 이마가 말쑥하게 드러나고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다.

영소의 말에 대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응."

 

하는데,

 

"이 참에 거울 보면서 네가 얼마나 못 생겼는지 잘 확인하고 잊어 먹지마."

 

대성이 거울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자 영소는 깔깔 웃고 도망가 버렸다.

녹색 치마를 거두어 잡고 허둥지둥 뛰는 모습이 예뻤다.

영소는 늘 녹색 치마만 입는다.

치마에 수놓인 과일이 수박이나 포도, 사과로 바뀌거나 꽃이 매화, 국화, 난초 등으로 바뀌니까 다른 치마인 줄 알 수 있다.

사실 대성은 못생기지 않았다.

도두라진 특징은 없지만 어찌 보면 곱상해서 여자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니까 자기도 인중이 긴가, 미간이 넓은가 하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는 건 조금 더 큰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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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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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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