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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과거의 여자

 

 

 

요괴는 매우 이상한 존재다.

그들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사람과는 다르다.

귀신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도 귀신은 아니다.

사람인 척하면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요괴도 있다.

자기들 나름대로 위계와 조직이 있고 도리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해친다.

조성일은 그런 요괴를 싫어한다.

 

"Not bad. 잘도 만들었군.”

 

요괴 묘진의 뇌정멸운살진 안을 걸으면서 조성일은 자기의 무기 흑금척으로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렸다.

흑금척은 길고 각진 자로 온통 검은 색이고 눈금은 새겨져 있지 않다.

무게는 열다섯 근이고 매우 단단해서 투구와 갑옷은 물론이고 바위도 부순다.

몸이 말라보이지만 조성일도 정칠품 별장이었던 무장이다.

병법과 진법을 깊이 배웠지만 일신의 무공은 어릴 때부터 닦아서 매우 고강했다.

조성일 보다 앞서 걸으며, 석상처럼 굳어져서 눈만 데굴거리는 요괴를 베던 연청이 물었다.

 

"사형, 요괴들은 이런 진법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진은 대부분 요괴들의 거야. 사람이 만든 건 몇 개 안돼.”

 

조성일은 별의 그물에 잡혀서 굳어 있다가 연청에 의해 죽은 요괴를 자세히 본다.

목은 잘렸지만 여전히 머리가 얹혀있고, 손에는 큰 깃대가 들려있다.

이 깃대들이 이어져서 호풍환우하고 신장귀졸을 불러내는 조화를 일으킨다.

 

"요괴가 원조라고요? 금시초문입니다.”

"사실이 그래.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지. 너도 봤을 거 아니냐. 높은 산에 느닷없이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가 하면 골짜기에 천둥이 치거나 안개가 가득차는 것들. 진은 그런 걸 모방하니까.”

 

연청이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방하면 요괴들이지요. 그들이 자연현상을 모방해서 진을 만들었군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을 이루는 깃발들이 견고하다.

머금고 있는 기운이 매우 짙다.

사람이 치는 진의 깃발들은 이처럼 단단하기 어렵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요괴들의 진은 대단하다.

보통 사람들은 요괴들의 진이 펼쳐진 줄도 모르고 길을 잃거나 살해당한다.

그들에게는 그냥 횡액이다.

군에서는 깃발을 잡는 기수들을 특별히 훈련시키고 먹인다.

전장에서 그 기수들이 장수의 지휘에 따라 자기들의 기운으로 깃발을 휘둘러 조화를 만들어 낸다.

조성일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연청에게 명령했다.

 

"한 바퀴 돌면서 다 죽여.”

 

연청이 바람의 검을 펼쳐서 절진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요괴 묘진의 부하들이 남김없이 살해당한다.

조성일의 뒤를 따라가며 호위하던 전삼자가 물었다.

 

"조별장, 나는?"

"Wait here, please. 여기서 대기하십시오.”

 

전삼자는 조성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조성일의 말은 이종무의 말과 다름없다.

 

"얼마나?"

 

그렇게 물을 뿐이다.

조성일은 자기가 두드렸던 부분들을 가리켰다.

 

"지금은 이곳이 제일 약한 곳입니다. 그물도 느슨하지요.”

"요괴가 달아나려면 여기로 오겠군.”

"생포하십시오. 죽이면 또 달아납니다.”

“It’s not gonna be easy 쉽지 않겠는데...”

 

전삼자가 창으로 땅을 툭툭 쳤다.

 

"그거 오래된 요괴야. 조별장이 더 잘 알겠지만.”

전삼자는 별의 그물을 쓰지 못한다.

풍림원 안에서 이종무 외에 별의 그물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큰제자 조성일이 유일하다.

절진 안에서 밖을 보면 푸르스름한 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물속에서 물 밖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진을 펼쳐서 사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뇌정멸운살진을 펼치는 요괴라면 파훼하지는 못해도 걸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덫을 놓는 게 최선입니다.”

 

전삼자가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실수로 죽이더라도 이해하게. 생포만 생각하다가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종무가 사용하는 방법을 전삼자에게 썼다.

 

"생포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의 능력을 목표 달성 가능한 만큼 끌어올려 버리는 기술이다.

완벽하려면 까마득하지만 조성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금씩 쓸 수 있었다.

조성일은 사부 이종무한테 이 방법으로 하도 당하다 보니 그 이치를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은 풍림원에서 장원을 관리하는 게 일이 되어버렸지만 조성일은 타고난 총명과 뛰어난 무공으로 일찍부터 상장군, 대원수 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재였다.

 

"덫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조성일이 웃었다.

 

그런데 그들이 잡으려 하는 요괴 묘진도 보통이 아니었다.

숨어서 절진을 살피다가 약해진 부분이 함정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채고 다시 장원 안으로 은밀히 달아났다.

묘진은 이종무에게는 절대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기척도 없이 자기의 깃발들을 빼앗아 장악해버렸던 조성일의 무서움도 알고 있었다.

두렵기는 하지만 풍림원에 숨어 있으면서 뇌정멸운살진이 저절로 해체되기를 기다렸다가 빠져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전에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함정을 피해서 달아났던 묘진은 다른 덫에 걸리고 말았다.

비명도 못 지르고 <아이고 맙소사!>를 속으로 외쳤다.

 

***

 

"영소 말예요.”

 

영소 어머니 강문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종무가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혼인을 시키려면 빨리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막내하고?"

 

이종무가 물었다.

강문설이 당황했다.

 

"그럼 다른 생각이 있으셨던 가요?"

"아직 그런 건 없소.”

"당신은 대성이가 마뜩치 않은가요?"

"그럴리가.”

 

이종무는 아내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본다.

 

"입 한 번 맞췄을 뿐이잖소.”

 

강문설이 발끈했다.

 

"입 맞췄으면 더 뭘 못하겠어요? 애라도 들어서기 전에 혼인시켜야지요.”

 

영소의 성미는 상당부분 강문설로부터 물러 받았다.

못된 말투는 이종무한테서도 왔겠지만.

이종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도 가만 보면 아주 답답하오. 자주 어울리다보면 입도 맞출 수 있는 건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강문설의 안색이 변했다.

 

"자주 어울리다 입맞춘다고요?"

 

이종무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를 물렸다.

 

"인연이 되면 부부가 될 거고, 아니면 그냥 추억인 게지.”

"그게 과년한 딸 가진 아버지가 할 말씀인가요?"

 

강문설의 음성에는 서운함과 분기가 서렸다.

 

"그만 하시오. 어찌 살던 좋으면 됐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하게 놔두시오.”

"그래서 그 둘이 혼인시키겠다는 건가요 말겠다는 건가요?"

 

이종무는 늘 웃던 얼굴로 강문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우리 가치로 애들을 묶으려 들지 마시오.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게 보이지 않소. 이게 다 시대가 바뀌는 것이오. 시대 따라 가치도 바뀌는 거고. 제 마음대로 살아야 자기를 다 펼쳐볼 수 있고 제 가치대로 행동해야 후회가 없지 않겠소? "

 

강문설은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럼 이렇게 위태위태한 심정을 안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이종무가 대답했다.

 

"먼저 난 사람의 의무지. 어른이 어른 되는 길이고.”

 

강문설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당신하고 말하다보면 내 머리가 이상해져요.”

 

이종무는 그냥 웃고 만다.

영소도 대성도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들이다.

그들의 인연이 얼마나 끈질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문설도 이종무에게는 묻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이종무에게 시집올 때 이종무의 나이 마흔이 가까웠을 때였다.

그녀도 혼기가 늦어서 스물 두 살이었다.

전쟁을 치른 장군이었고, 군에서 나온 후에는 한 동안 강호를 떠돌았던 이종무였다.

그런 이종무에게 그녀 이전의 여자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될 걸 알게 되면 평생 마음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여자의 직감으로 안다.

이종무가 이런 이상한, 시대에 맞지도 않은 이성관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어지간하지 않은, 매우 지독한 사랑을 했지만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 때문에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등잔 같이 위태로운 마음이 있다면, 아내가 품고 살아야 할 어떤 것도 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물어보자"

 

강문설은 마음먹었다.

 

***

 

"국수 맛이 어떠하오?"

 

이종무가 강문설을 처음 만나 물었던 말이었다.

강호에 나와서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다닐 때, 안동 비봉사 근처의 노상 음식점에서였다.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나는 듯하여 강문설은 고개를 높이 들었고, 마치 장대처럼 큰 사람이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이종무는 여름이었는데도 여우털로 만든 조끼를 입고 머리에는 꿩의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몸은 말랐고 눈은 차분한데도 빛이 났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구릿색이었으며 광대와 턱뼈가 두드러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이종무가 음식을 핑계로 강문설에게 수작을 걸었다.

강문설과 똑같은 국수를 주문하고는, 나눠먹자며 젓가락 한 개를 강문영에게 주고 자기는 남은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었다.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는다니...

강문영은 킥킥 웃었다.

그랬는데 이종무는 정말 젓가락하나로 국수를 휘저어 감더니 꽂감 빼먹듯이 국수를 한 입에 삼켜 버렸다.

노점에서는 자두며 여름 과일들을 팔았다.

이종무는 자두 하나를 달라하고는 또 강문설과 나눠 먹자고 했다.

강문설은 이종무가 또 어떻게 재미난 장난을 보여줄지가 궁금했다.

씨가 두꺼운 자두를 두 사람이 나눠 먹는다는 건 매우 불편하다.

과육이 딱딱한 씨앗에 붙어서 쪼개 먹기도 쉽지 않다.

정말 묘한 재주를 부린다면 점점 더 수작에 말려들 것 같아서 강문설은 손을 내저었다.

 

"수작 그만 부리세요.”

 

일어나려는데 이종무가 자두를 그대로 건너주었다.

 

"가져 가시오.”

 

강호에 다니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수작 부리는 자를 만나기도 한다.

엉터리 같은 불한당도 있지만 점잖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점잖은 사람도 말 한마디에 물러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문설은 이종무의 선선한 태도에 호감을 느꼈다.

얼떨결에 자두를 받아버렸다.

그대로 일어나 떠나는데 이종무가 뒤에 서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어떨 것 같으냐?"

 

나중에 알았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조성일이었다.

 

"왜 하필 자두입니까. 저쪽에 덜 여물긴 했지만 대추도 있는데. 자식을 낳으면 딸이겠습니다.”

"내 팔자겠지.

 

이종무는 껄껄 웃었고, 강문설은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

 

"저 멀대가.“

 

손에 쥔 자두를 던져버리려하는데 이종무가 뒤에서 물었다.

 

"내 나이 마흔이오. 이제 돌아가서 가정을 꾸미려하니 함께 가지 않겠소?"

 

단순한 수작이 아닌 진지한 청혼이었다.

초면에 말 몇 마디 주고 받았는데 결혼하잖다.

강문설은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못했다.

이종무가 말했다.

 

"음식은 젓가락 하나로도 먹을 수 있지만 가정을 이루는 건 혼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그대는 내가 준 젓가락을 받았고 자두도 받았으니 나와 함께 갑시다.“

 

재미있지도 않고 부탁하는 말이면서도 권위가 깔려 있어서 거역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런데 기분이 아주 이상하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강문설은 그날 밤 숙소로 찾아온 이종무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름은 그 후에 물었다.

 

"제 낭군 되시는 분 성함은 어찌되시는지요?"

"이종무.“

 

그게 다였다.

남녀의 연애란 대체로 이렇다.

알콩달콩한가 하면 매력적이고 운명적이다.

때로는 단순하게 육체적으로 귀착되는가하면, 이루거나 못 이루거나 간에 고귀하게 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그저 육체와 정신의 짝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짝이 맞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순간에는 항상 불같은 진전이 이루어진다.

아니라 생각되면 물을 끼얹은 재처럼 불씨마저 사라져 버린다.

얼렁뚱땅 홀려버렸던 젊은 날보다 이제 강문설은 세상을 알 만큼 안다.

세상에 진짜 딱 맞는 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자석은 아무 거나 서로 당기지 않은가?

남녀도 그런 면이 있다.

어느 정도 끌리면 짝이거니 하고 사랑이란 말로 울타리 쳐서 서로 가두고 연인이란 신분을 서로에게 부여한다.

 

***

 

강문설은 남편 이종무가 서재로 돌아가기 전에 옷자락을 잡았다.

 

"말씀해주세요. 이전에, 저 보다 먼저 만난 여성분이 있었겠지요?"

"쓸데없는 소리. 자고 나면 어제도 사라지고 없는 건데 뭔 옛 이야기요.”

 

이종무는 당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강문설은 어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겠다면 제가 당신 이전에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이종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 없잖소? 다 알아봤소.”

"당신 만날 때가 스물 두 살이었는데, 아무렴 그때까지 마음에 품은 사람 하나도 없었을까요?"

 

질투심을 자극해서 괴롭히겠다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종무는 강문설의 손을 떨치고 나가버렸다.

이 정도가 강문설의 한계였다.

명문의 딸로 자라서 스물두 살에 유람을 핑계로 겨우 집에서 빠져나왔다가 이종무를 만났던 게 그녀가 한 일탈의 끝이었다.

이종무가 더 하라고 해도 강문설은 스스로 자기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성미는 그와 별도다.

강문설은 이를 앙다물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보검을 챙겨 든 후에 영소를 찾아 나섰다.

칼집으로 영소 볼기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영소와 대성 콧배기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요괴 묘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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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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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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