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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6.19 [천신폭풍탑] 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1
  3. 2020.06.18 [마종천황보] 제 5장 만년화룡
  4. 2020.06.18 [천신폭풍탑] 제 21장 삼노장의 귀빈
  5. 2020.06.17 [마종천황보] 제 4장 기인들의 배려
  6. 2020.06.16 [천신폭풍탑] 제 20장 우울한 고금제일인 2
  7. 2020.06.15 [마종천황보] 제 3장 예기치 못한 살인
  8. 2020.06.15 [천신폭풍탑] 제 20장 우울한 고금제일인 1
  9. 2020.06.14 [마종천황보] 제 1장 북안탕의 소년
  10. 2020.06.13 [마종천황보] 서장 천마대종과 도룡천황
  11. 2020.06.13 [마종천황보(魔宗天皇譜)] 연재합니다.
  12. 2020.06.13 [천신폭풍탑] 제 19장 마음을 가두는 기이한 성형진 2
  13. 2020.06.09 [천신폭풍탑] 제 18장 검룡난무 2
  14. 2020.06.08 [천신폭풍탑] 제 18장 검룡난무 1
  15. 2020.06.07 [천신폭풍탑] 제 17장 해남도의 보물
  16. 2020.06.05 [천신폭풍탑] 제 16장 밀실의 기계인간 2
  17. 2020.06.04 [천신폭풍탑] 제 16장 밀실의 기계인간 1
  18. 2020.06.03 [천신폭풍탑] 제 15장 가공, 천신폭풍보 2
  19. 2020.06.02 [천신폭풍탑] 제 15장 가공, 천신폭풍보 1
  20. 2020.06.01 [천신폭풍탑] 제 14장 시작된 곳에서 시작을
  21. 2020.05.28 [천신폭풍탑] 제 13장 깨어진 돌머리 1
  22. 2020.05.27 [천신폭풍탑] 제 12장 폭풍무존, 천년만의 부활
  23. 2020.05.09 [천신폭풍탑(天神暴風塔)] 연재합니다.
  24. 2020.04.24 [천세무림기보(千世武林奇譜)] 연재합니다.
  25. 2020.03.11 단행본 출간목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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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絶地의 남녀

 

 

 

“위험하다!”

모산독군의 다급한 폭갈이 터졌다.

위―― 잉!

모산독군의 소매로부터 강맹한 경기가 일어 만년화룡과 내단을 잇고 있는 무형경기를 잘라갔다.

파파파팟!

눈부신 불꽃이 튀었다.

모산독군의 웅후한 공세가 만년화룡(萬年火龍)이 내단을 조종하는 경기를 차단시킨 것이다.

그러나 단화(丹火)에 둘러싸인 만년화룡의 내단은 날아가던 여진으로 적연흥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피해볼 수도 없었다.

“아!”

적연흥이 당황하여 입을 딱 벌렸다.

다음 순간,

“아―― 악!”

적연흥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한순간, 만년화룡의 단화와 내단이 고스란히 적연흥의 벌린 입안으로 날아든 것이다.

“아우님!”

제연연이 비명을 지으며 적연흥을 끌어 안았다.

“연흥아!”

막 만년화룡을 향해 독강(毒罡)을 퍼부으려던 모산독군이 대경하며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절벽이…….”

음산잔마의 경악성이 터졌다.

만년화룡의 거구가 올라서는 통에 석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와아…… 앙!

콰――르릉……

“아―― 악!”

신무애 쪽으로 돌기한 암벽전체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적연흥을 꼭 끌어안은 제연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기우뚱하던 두 남녀는 만년화룡의 거구와 함께 신무애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이야앗!”

모산독군은 일성대갈과 함께 떨어지는 두 남녀를 노리고 날아 내렸다.

찌지직――

안타갑께도, 간일발의 차이로 모산독군의 손은 적연흥의 장삼끝을 잡아채는 것으로 그쳤다.

휘르르――!

눈 깜짝할 사이에 적연흥과 제연연은 까마득히 떨어지고 이제는 모산독군마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형님!”

그 순간 음산잔마가 떨어지는 모산독군을 향하여 나무토막을 던져내었다.

“차하압!”

모산독군은 일성대갈과 함께 나무토막을 걷어찼다.

휘르르……

그리고는 그 반진을 이용 천학(天鶴)과도 같이 단애 위로 날아 올랐다.

“연흥아……!”

절벽 위로 날아오른 모산독군은 신무애를 내려다보며 처절하게 외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적연흥과 제연연, 만년화룡, 그리고 몇 명의 무림인들을 집어 삼킨 신무애에서 여전히 꾸역꾸역 안개만이 치솟고 있었다.

털퍽 주저앉은 모산독군의 두 볼로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형님……!”

음산잔마가 침통한 표정으로 모산독군에게 다가섰다.

 

***

 

“으으……!”

적연흥은 정신을 차렸다.

괴이하게도 몸속은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 같이 뜨거운데 전신의 피부는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이 차가웠다.

‘으……으…… 여…… 여기가 지옥인가?’

적연흥은 뜨겁고 차가운 상반된 기운에 내외로 고통을 받으며 전신을 떨었다.

‘으…… 누…… 누가 내게 붙어 있는 모양이구나…….’

전신의 피부가 얼어붙은 듯하여 제대로 느낄 수는 없으나 분명 누구인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눈…… 눈을 떠야 하는데…….’

적연흥은 딱 붙어있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이를 악물었다.

한동안 사력을 다해 근육을 움직여서야 비로소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헛…… 누…… 누님께서……!”

눈을 뜬 적연흥은 대경했다.

그들은 지금 넓은 호수 속에 빠져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호수 가운데에 솟아 있는 검은색의 바위로 이루어진 돌섬인 모퉁이었다.

흑옥(黑玉)같이 검은 바위로부터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솟았으며 반쯤 몸이 담긴 호수물도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얼마나 차가웠으면 몸 주위에 한 겹의 얼음이 얼었을 정도였다.

한데, 적연흥의 몸을 한 여인이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 여인은 지독한 한기로 인해 전신이 얼어붙어 있었다.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얼어붙어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제연연이었다.

“누…… 누님께서…….”

적연흥은 손을 움직여 제연연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파파팍…… 쩌――엉……!

제연연의 의복이 유리 부서지듯 부서져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으음…… 자칫하면 누님의 옥체마저 부서지기 십상이다. 한데……”

적연흥은 천천히 전후사정을 상기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만년화룡의 단화(丹火)와 내단(內丹)을 삼키는 순간 정신을 잃었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모든 사정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신무애 밑으로서 천지(天地)의 극음지기(極陰之氣)가 모이는 곳이었다.

이름하여,

 

――극음빙천(極陰氷泉).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극음지기가 모여드는 비소(秘所)인 관계로 무엇이든지 얼려버리는 지독한 한기를 지니ㄱ조 있다.

두 남녀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수면에 만년화룡의 거구가 떠있는데 만년화룡도 전신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또한 함께 떨어진 몇 명의 무림인들도 꽁꽁 얼어붙은 채로 떠있었다.

“천행으로 나는 저들같이 얼어붙지 않았구나.”

적연흥은 나직이 탄성을 토했다.

그는 만년화룡이 만년동안 태양자기와 지심열극을 흡수하여 단련한 내단을 복용한 탓에 얼어 죽지 않은 것이다.

얼어 죽기는 커녕 그의 내부는 마치 용광로 같이 뜨거웠다.

어디론가 그 열기를 토해 버리지 않으면 전신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만년화룡의 내단은 천하제일인 극양지물(極陽之物)이었다.

천하제일의 극양지물인 만년화룡의 내단을 삼켜 그 극심한 열기로 내부가 한 줌의 재가 되버리려는 순간 이곳 극음빙천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천행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비록 살았으나 누님께서는 어떤 상태인지…….”

적연흥은 조심스럽게 자신과 한 몸이나 된듯이 붙어 있는 제연연의 상세를 살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하옵니다.”

갑자기 적연흥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또 다른 천행(天行)!

기적이라 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적연흥을 꼭 끌어안고 있는 제연연의 가슴 부분에 미미하게 온기가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는 태양(太陽)과도 같은 불덩어리인 적연흥을 안고 있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폭발할 듯한 열기가 적연흥과 마주 닿은 제연연의 가슴부위로 흘러들었고, 그로 인해 제연연은 동사를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누님은 간신히 한 줄기 숨이 붙어 계신 상태이다. 어떻게든지 이분을 회생시켜야 하는데…….”

격동을 가라앉힌 적연흥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독한 운무가 사방에 깔려 있다.

그런 속이건만 기이하게도 적연흥은 시야가 더할 수 없이 환했다.

모두가 만년화룡의 내단을 복용한 때문이리라.

“지면(地面)이 있다.”

그는 자기의 우축 삼십여 장 밖에 널찍한 지면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우선 뭍으로 나간 뒤에 치료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겠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으윽……!”

그 흑옥석같은 바위 위를 떠나자 내부의 열기가 미친 듯이 기승을 부렸다.

호수물도 지극히 차가왔으나 적연흥 내부의 열기를 식혀주기에는 부족했다.

하나, 멈출 수 없는 노릇,

그는 전신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천천히 물을 헤쳐 나갔다.

산곡의 거치른 물살에서 자맥질을 즐기던 그인지라 수영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 그였다 .

이윽고, 적연흥은 물가에 닿았다.

제법 넓은 지면이 깎아지른 듯한 석벽에 연하여 있었다.

“으―― 흡!”

물가로 올라서던 적연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어하는 것이 없자 몸속의 열기들이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못견딜 정도다.”

적연흥은 이를 악물었다.

“내…… 내게는 고통스러우나 누님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사실이었다.

적연흥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열기가 솟구치자 제연연의 전신에 뒤덮였던 얼음들이 모조리 녹아 내린 것이다.

“크…… 으…… 음……!”

적연흥은 제연연을 안고 비틀비틀 석벽 밑으로 갔다.

이미 제연연의 전신은 완전히 풀려있고 적연홍의 몸속의 열기는 극에 달해 있었다.

“조심해야한다. 할아버지들께서 주신 귀중한 비급들이 손상될 수도 있으니…….”

적연흥은 품속에서 세 권의 비급을 꺼냈다.

 

<천후독존유록(天候毒尊遺錄)>

<만황독성진전(萬荒毒聖眞典)>

<천잔경(天殘經)>

 

이것이 세 비급의 제목이었다.

세 권의 비급은 지독한 열기에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자칫했으면 두분 할아버지의 은혜를 수포로 만들 뻔 했다.”

적연흥은 세 권의 비급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파다닥……

제일 위에 놓였던 천후독존유록(天候毒尊遺錄)이 미끄러지면서 활짝 펼쳐졌다.

“응?”

도로 잘 놓으려던 적연홍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는 황급히 천후독존유록(天候毒尊遺錄)을 집어 들었다.

 

<요상편(療傷篇)>

 

――천하만물(天下萬物)은 음양(陰陽)에서 나오고 오행(五行)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으로 유지 되나니, 훼(毁)를 보(甫)하고 상극(相克)을 해(解)함이 요상(療傷)의 요체(要體)라. 상극(相克)은……――

 

적연흥은 이미 일시의 고통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로, 오직 요상편을 읽는데 몰두했다.

 

<음양화합도전대법(陰陽和合到轉大法)>

 

적연흥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난생처럼 해괴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본 것이다.

남녀(男女)가 교합(交合)하고 있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흐―― 음!”

진탕되는 가슴을 진정시퀸 적연흥은 그림 아래로 적힌 설명을 읽어갔다.

 

―― 천지(天地)가 음양(陰陽)으로 나뉘니 천지간(天地間)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음양(陰陽)으로 나뉘도다.

따라서 음양의 위치에서 나오는 힘(力)이야말로 천지간에서 가장 강(强)하고 넓으며(幽) 깊음(深)이라.

요상(療傷)에 있어서 제일(第一)로 음양(陰陽)의 이치로 기(氣)를 살리며(生)…… 따라서 음양화합도전대법(陰陽和合到轉大法)은 가장 훌륭한 요상대법(療傷大法)이니라. 상대가 어머니, 누이들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이로움(益)이 있는……――

 

그 아래로 자세한 시술 방법이 적혀 있었다.

이의 특징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데에서도 시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 시술이 부부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

“휴…… 이를 어쩐다……”

적연흥은 난색을 지었다.

요상편의 다른 곳을 살펴보았으나 모두가 내공(內功)의 힘이나 정교한 침술 등으로 시전하는 요상대법들 뿐이다.

지금 당장 적연흥이 제연연에게 베풀 수 있는 요상대법은 음양화합도전대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어찌 누님의 청결함을 더럽히랴? 하물며 나는 아직 어린 아이니…… 도저히 그런 것은……”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잠시 떼어놓은 사이에 제연연의 전신이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언제 한 줄기 숨마저 끊어질지 모를 일이다.

적연흥은 빨리 가부간의 결정을 내야만 했다.

‘별 도리 없다. 누님을 이대로 절명케 할 수 없으니…… 나중에 누님께 죽음으로 속죄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연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떨리는 손길로 제연연의 몸을 바로 뉘였다.

살짝 눈을 감은 채 고요한 모습으로 몸을 뉘고 있는 여인.

더구나 그 여인의 모습이 천상선녀와 같고 농염함이 극에 달한 삼십대 여인임에야……

적연흥은 숨이 탁 막혔다.

위경에서는 몰랐으나 막상 여인을 안으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옴을 어쩔 수 없었다.

몸에 젖어 의복이 몸에 착 달라붙은 관계로 여인의 농만한 육체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은……

“누님…… 용서하십시요.”

적연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제연연의 옷고름을 잡아 당겼다.

사르르……

옷고름이 풀어지며 저고리가 옆으로 벗겨졌다.

“으으음……”

적연흥의 눈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백설보다도 뽀얀 가슴의 속살, 둥그스름한 어깨 밑으로 불룩한 융기가 분홍빛 천에 꼬옥 눌려 있었다.

“흐…… 음!”

적연흥은 단전으로 부터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치솟음을 느끼며 제연연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뭉클!

무어라 형언할 수도 없는 탄력과 부드러움이 손바닥 가득히 느껴졌다.

입안이 탄다!

적연흥은 침을 삼키며 제연연의 젖가슴을 졸라맨 젖가리개를 풀어내었다.

출―― 렁!

물결이 인다.

천하에서 가장 넓고, 가장 부드러우며, 가장 따스한 커다란 바다!

그 바다가 출렁인다.

뽀얀 육향으로 천지를 가득 메우면서……

그 부드러운 파도의 융기 위에 분홍빛으로 수줍게 물든 두 개의 열매……

떨리고 있다.

천하에서 가장 굳건한 정력(定力), 모산독군조차 감탄했던 적연흥의 정력도 이 순간에는 허무한 모래성 같이 흩어졌다.

태초(太初)!

인간이 가장 먼저 찾았던 그 따스하며 풍요한 생명의 근원 앞에서야……

‘안고 싶다.’

순수하고도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적연흥은 양손으로 제연연의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뭉―― 클!

적연흥은 아찔해지는 젖가슴의 감촉을 음미하며 젖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르르……

죽은 듯 늘어진 제연연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적연흥은 서서히 제연연의 가슴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또르르……

발갛게 익은 유두가 굴렀다.

그 향기로움, 그 따스함……

“누님…… 당신을 갖겠습니다.”

적연흥은 제연연의 가슴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의 손과 입술에 의해 제연연의 젖무덤이 끝없이 파랑을 일으켰다.

적연흥의 다른 한 손은 서서히 제연연의 몸을 탐색해 내려갔다.

바람을 잔뜩 머금은 듯 팽팽히 부푼 복부,

끊어질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잘룩한 세요(細腰).

그와 반대로, 천하의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드넓게 벌어진 둔부.

오목한 배꼽 밑으로 부드럽게 부푼 하복부의 융기……

그리고……

“으음……”

적연흥의 전신이 뇌전에 맞은 듯이 경련을 일으켰다.

왜?

그의 손이 무엇을 보았기에……

적연흥은 제연연의 젖무덤에서 얼굴을 떼고 일어섰다.

이미, 제연연의 하의는 둔부까지 벗겨져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넓은 둔부의 전면으로 불룩이 솟은 둔덕이 있다.

긴 능선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한 둔덕은 분홍빛 천으로 살짝 가려져 있었다.

“으음……”

적연흥은 흥분과 두려움으로 떨며 제연연의 그곳을 쳐다보았다.

이어, 그의 떨리는 손이 제연연의 하의를 벗겨 내렸다.

천하명장(天下名匠)이라 한들 어찌 이같은 조각품을 만들랴?

미끈하고 알맞게 살이 오른 두 개의 백옥기둥이 살짝 벌어진 채 적연흥의 앞으로 드러난 것이다.

“으으으……”

적연흥의 눈에서 핏발이 돌았다.

휘릭……

그는 찢다시피 자신의 의복을 벗어 던졌다.

삽시에 적연흥은 태어 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했다.

벌거벗은 그의 나신은 마치 화신(火神)의 그것같이 보였다.

전신이 시뻘건 화기(火氣)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흐……”

강렬한 욕망을 실은 눈길로 반듯이 누운 제연연을 바라보던 적연흥은 제연연의 하의로 손을 가져갔다.

부―― 욱!

얇은 천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 나갔다.

그리고, 적연흥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비궁(秘宮)!

적연흥은 화석같이 굳어졌다.

난생처럼 발견한 여인의 비소는 적연흥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어느 순간,

“으……누…… 누님! 용서……”

적연흥이 야수같이 부르짖으며 덮쳐 들었다.

파―― 악!

파과(破瓜).

적연흥은…… 제연연의 것이 되었다.

아니, 제연연이 적연흥의 것이 된 것이다.

천지합일(天地合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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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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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二 章

 

                사람을 찾습니다. (1)

 

 

 

석두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잔혼각은 처음부터 그들 삼인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수법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 그들은 삼노장을 복속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아예 없애버리려 한 것일까? 혹시 그 삼노장에 와있다는 귀빈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석두공의 머리속으로 날아내리던 장아가씨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검을 쓰는 품이 일품이었지.)

석두공은 그녀의 멋진 자태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안계셔요? 소녀 장지연이 찾아왔습니다.]

초옥의 밖에서 어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석두공은 자신의 알몸을 보고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급한 김에 그는 벗어던졌던 허물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누구시오? 누구를 찾소?]

[여기에 흰옷을 입고 어깨가 넓은 서른 정도의 아저씨가 살고 계시지 않아요?]

석두공은 폭풍무존을 가리키는가 보다 생각하고 말했다.

[여기에 사시긴 하지만 지금은 계시지 않소. 잠시 기다리거나 나중에 오도록 하시오.]

[말하는 분은 누구시죠?]

[난 그분의 제자요.]

석두공은 그제서야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장지연이 얼기설기 만들어진 문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될까요?]

꽝!

석두공은 문을 안에서 꽉잡아당겨 열리지 않게 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기다리려면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이봐요! 난 당신 사부님께서 초대한 손님이에요. 그런데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어요?]

장지연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석두공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 안으로는 절대 들어올 수 없소.]

[흥! 당신 사부님의 제자라면 행동도 그분을 닮아 의젓해야 할게 아니예요? 어째 졸장부같은 짓을 하고 있는거죠?]

화가 난 장지연은 물러서지 않고 소리쳤다.

석두공이 간청하듯이 말했다.

[사정이 있어 그러니 제발 밖에서 기다려 주시오. 사부님께선 곧 돌아오실 거요.]

[안돼요. 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아야겠어요.]

장지연은 약이 오를 데로 올랐다.

더구나 그녀는 호기심 많은 여자가 아닌가?

석두공은 애초부터 그녀의 호기심을 유발시킬만한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펑!

얼기설기 나무로 엮은 문이 그녀의 일장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후다닥!

석두공은 다른쪽 벽을 뚫고 뛰어나갔다.

[...?]

장지연이 방으로 들어섰을때 그녀는 석두공의 뒷모습만을 얼핏보았다.

하지만,

[흥! 어딜 도망치려고?]

그녀는 콧웃음을 치면서 석두공이 나간 구멍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석두공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장지연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초옥을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석두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붕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석두공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지? 금방 뒤쫓아 나왔는데... ]

그때였다.

[왜 지붕에 올라가 있는가?]

갑자기 밑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장지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뛰어내렸다.

폭풍무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지금, 들어오너라.]

그는 깨어진 문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성미가 보기보단 급하군.]

[저 제자분이... ]

장지연은 얼버무렸다.

폭풍무존은 방에 들어서서 다른 쪽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것을 보고 영 기분이 상한 듯했다.

어쨌거나 그 초옥의 그가 만든 자기 집인데 만들어진지 하루만에 이처럼 부서졌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장지연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폭풍무존을 보았다.

하나 폭풍무존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네놈은 내가 만든 건 뭐든지 부수는구나. 전에는 천신폭풍탑을 부수더니...]

[...?]

장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그 장소저가... ]

장지연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고함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저건 분명히 당신이 그랬는데.]

[당신이 갑자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랬겠소?]

석두공은 마주 고함쳤다.

그 바람에 입에서 침이 튀었다.

[응?]

장지연은 자신의 얼굴에 떨어진 침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순간 석두공과 장지연의 눈이 마주쳤다.

두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앗!]

원래 석두공은 밖으로 나갔다가 재빨리 돌아서 문으로 들어와 천정에 매다린 것이었다.

석두공은 장지연이 자신을 발견하자 비명을 지르며 폭풍무존의 뒤로 숨었다.

몸에 걸쳤던 숯덩어리 같은 허물이 훌렁 날아가버렸다.

장지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왜 석두공이 그처럼 숨어있으려고 했는지 알았던 것이다.

(알몸이었어!)

폭풍무존은 가져왔던 옷을 뒤에있는 석두공에게 건네주었다.

[네놈의 알몸도 벌써 몇번이나 보는구나.]

그가 말하는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마중천에서 자봉과 정사를 벌이는 석두공을 지켜보기도 했던 것이다.

 

폭풍무존이 말했다.

[이것은 지금은 사라진 어떤 문파의 비전절기(秘傳絶技) 중의 하나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마 이것보다 뛰어난 절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짙은 향수(鄕愁)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연을 알고 있는 석두공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검을 다오.]

장지연이 폭풍무존에게 연검을 풀어서 주었다.

그녀의 연검은 여느 연검과는 달리 길이가 무려 사장이나 되었다.

[옛날에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사람도 이처럼 긴 연검을 좋아했었지. 지금 내가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도 실상 그가 만든 검법인데 내가 약간 고친 것이야.]

피리리릭!

폭풍무존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검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휘익!

검의 끝이 돌아가며 폭풍무존의 뒤쪽으로 찔러갔다.

그러나 폭풍무존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검을 잡고만 있는 중이었다.

뜻에 의해서 검을 움직이는 진정한 이기어검술(以氣馭劒術)이었다.

파파팟!

검은 살아있는 마음대로 움직였다. 검광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뻗어갔다.

돌연,

[물러서거라.]

폭풍무존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석두공과 장지연이 십여장 밖으로 물러났다.

칙! 칙!

갑자기 연검의 끝에서 백색강기가 쏘아져나갔다.

[검강이다! ]

장지연이 깜짝놀라 소리치며 더욱 물러섰다.

파파파팍!

연검의 끝이 가리킨 곳마다 바위들이 예리하게 베어져나갔다.

폭풍무존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검을 든 손을 들어올렸다.

휘리리릭!

연검이 그의 손목에 뱀처럼 휘감겼다.

[기로써 검을 움직이면서도 검강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검법의 뛰어난 점이지.]

폭풍무존은 연검을 장지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장지연이 물었다.

[원리는 그렇다 하고 초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초식?]

폭풍무존이 오히려 반문했다.

[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냥 편한 대로 펼치면 되는 거지.]

[...?]

장지연은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무공이 경지에 달하면 초식이 필요없다는 말을 그녀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진짜로 초식이 없다면 마구잡이 무술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어쨌거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초식따윈 없다고 하는 데야 도리가 없다.

[그럼 구결을 가르쳐 주세요.]

[내가 다 보여주었는데 구결은 또 무슨 구결?]

폭풍무존은 그녀의 질문에 속이 터지는지 버럭 화를 냈다.

장지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폭풍무존은 죽간을 들고 강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어서 집이나 고쳐놓고 가버려라.]

 

장지연은 한쪽에 서있는 석두공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 사부님은 항상 저래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무공을 배웠어요? 뭐 이래요? 이게 무슨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거예요?]

그녀의 한꺼번에 퍼붓는 소리에 석두공은 귀를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이렇게도 배우지 못했소. 이게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장지연은 기가 막혔다.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공은 숲으로 나무를 베러 들어가고 있었다.

집을 고쳐놓으라 했으니 고쳐야 할게 아닌가?

장지연은 놀림을 당한 것같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석두공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이봐요. 숯덩어리. 그럼 당신은 조금 전에 그 검법을 펼칠 수 있단 말이에요?]

[배웠는데 왜 못하겠소?]

[얼마나 연습해서 펼칠 수 있게 되었어요?]

장지연은 그에게 다가서며 붙임성있는 음성으로 물었다.

석두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고 펼쳐보지도 않았소.]

[뭐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펼칠 수 있단 말이에요.]

장지연이 소리쳤다.

석두공도 화를 내며 말했다.

[이게 그것 아니오?]

쉬익! 쉭!

순간 그의 손에 들리웠던 나뭇가지가 활처럼 휘어졌다.

쉭!쉬쉭!

나뭇가지지만 폭풍무존이 펼쳤던 그 검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장지연은 깜짝 놀라 물러서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언제 배운 거죠?]

휙!

석두공은 나뭇가지를 던져버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에 같이 배웠잖소?]

장지연은 한쪽에 가만히 서서 입을 꼭 다물었다.

(이들 사제는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나도 무엇이든 쉽게 배워서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이사람들 앞에서는 입도 떼지 못하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들께서 말씀하시길, 절세적인 총명을 타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펼치는 무공을 대충 보기만 해도 그 알맹이까지 꿰뚫고 헛점까지 보완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금 무림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직 둘 뿐이었는데, 한분은 돌아가셨으며 한 사람은 실종되었다고 했다. 한데, 이곳에서 또 그런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구나.)

장지연은 수도로 나무들을 베어서 들고가는 석두공의 뒷모습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석두공은 자신이 부순 벽을 다시 떼우고 장지연이 부순 문도 새로 달았다.

그리고 어제 밤에 만들지 않았던 침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도 만들어 방안에 갖다 놓았다.

초옥은 오직 네 개의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린 것일 뿐이다.

부엌도 따로 없고 측간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폭풍무존은 집을 고쳐놓고 떠나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장지연에게 하는 것같았지만 석두공은 자신에게도 해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고 폭풍무존은 세상을 돌아다닐 낙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함께 가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떠나기 전에 석두공은 조금이라도 폭풍무존이 생활하기 편하게 해놓고 가려는 것이었다.

그가 삼노장을 찾아갔던 것도 그러한 일념에서였다.

삼노장은 이 일대에서 가장 텃세가 강한 장원이다.

삼노장이 폭풍무존 근처에서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면 폭풍무존이 조용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푹!푹!푹!

석두공은 측간과 부엌을 만든 후에 집 주위에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지연이 그를 도와 울타리로 쓸 나무들을 날라다 주었다.

그녀의 태도는 고분고분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태양이 붉게 변했다. 벌써 저녁때가 된 것이다.

폭풍무존이 죽간(竹竿)을 들고 초옥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가는 소나무가지가 쥐어져 있고 그 소나무가지에는 그가 낚아올린 네 마리의 물고기가 꿰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물고기들은 하나같이 크기가 사람의 팔뚝만하고 굵기는 사람의 허벅지만한 잉어들이었다.

[아직도 안 갔느냐?]

그가 잉어들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

장지연은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했고 석두공은 이마를 치면서 말했다.

[사부님! 잉어들을 낚은 게 아니라 건져올리셨군요.]

낚은 것과 건져 올린 것,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철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폭풍무존은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갔다.

장지연이 잉어들을 받아들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건져 올린 것과 낚아 올린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폭풍무존은 한낮이 다 가도록 고기를 낚을 수가 없자 공력으로 잉어들을 건져 올려 가져온 것이었다.

물고기들의 입에는 바늘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잉어를 불에 그슬러서 밥 대신 먹고 났을 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초옥으로 찾아왔다.

삼노장의 삼노와 그들을 가마에 싣고 온 하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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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萬年火龍

 

 

백의염왕은 주춤 하다가 이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퍼――억!

피가 튀었다.

털퍽!

백의염왕의 왼팔이 피를 튕기며 지면에 떨어졌다.

‘으음…… 역시 할아버지의 명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만하다. 자기 스스로 자기 팔을 끊다니…….’

적연흥은 내심 경악했다.

모산독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는지 재삼 깨달은 것이다.

백의염왕은 감히 불평 한 마디 못하고 묵묵히 지혈을 하였다.

“가자!”

백의염왕은 이어 끊어진 자기 팔을 접어 들고 몸을 날려갔다.

그러자 약삭빠르게 생긴 중년인과 백의몽면인들은 어마 뜨거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잠깐 멈춰랏!”

모산독군이 돌연 냉갈을 터뜨렸다.

삼사십 장 밖으로 달려가던 백의염왕의 몸이 일순 차갑게 식었다.

‘저…… 저 노독물이 혹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닐까?’

백의염왕은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 내림을 느끼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노선배님, 무슨 분부 계시온지요?”

모산독군은 싸늘히 말했다.

“다른 자들은 가도 좋지만 독심제갈이란 애송이는 남거라.”

백의염왕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와 함께 중인들의 시선이 약삭빠르게 생긴 중년인에게로 모아졌다.

“으으…….”

그자는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섰다.

“후…… 후배는 잘못한 일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공포의 기색을 띄웠다.

그러나 모산독군의 안색은 점점 더 싸늘하게 변해갈 뿐이다.

‘여…… 여기서 개죽음을 할 수야 없다. 내게는 야심이 있거늘…… 저 노독물과의 거리가 이십 장이 넘으니…… 잘하면 달아날 수도…….’

그자는 결심하자마자 전공력을 모았다.

파――얏!

“이―― 얏!”

그자의 신형이 번뜩 허공으로 떠올라 단번에 칠팔십 장 밖으로 날아갔다.

‘설마 저 정도 거리면…….’

중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모산독군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리석은 놈, 살려 줄 수도 있었으나, 네놈이 감히 노부의 앞에서 달아나려 하다니…….”

냉갈과 함께 모산독군의 우수가 허공으로 들려졌다.

그리고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크――아―― 악!”

파파파팟――!

삼십 장 밖으로 달아나던 독심제갈이 처절한 비명을 터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그자의 몸은 삽시에 혈수(血水)로 녹아 내렸다.

실로 믿지 못할 일이었다.

“……!”

“……!”

장내는 물 끼얹은 듯이 조용해 졌다.

‘으…… 무섭다. 삼십 장을 격하고도 살상할 수 있다니…….’

휘―― 익――

“으아아……!”

백의염왕이 몸을 날리자 염왕보의 졸개들도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군웅들 중에서도 마음 약한 자들은 슬금슬금 사라졌다.

“핫하…… 형님 대단하십니다. 무형심독강(無形心毒罡)까지 완성하셨군요.”

음산잔마가 크게 웃자 모산독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형심독강(無形心毒罡)은 독문(毒門)에 내려오는 전설적인 독공이었다.

살의만 품으면 백 리 밖의 적도 살해할 수 있다고 전한다.

유사이래 독문의 조종격인 만독노조(萬毒老祖)만이 이루었다는 경지로서 그 후에는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었다.

그 경지를 모산독군이 이룬 것이다.

문득, 적연흥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용연곡의 입구입니다. 소자는 이만 신무애 쪽으로 가보겠사옵니다.”

모산독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무애는 이곳에서 머냐?”

“그리 멀지는 않사옵니다. 이곳에서 일마장 정도 가면 되옵니다.”

“흐음……그래?”

모산독군은 고개를 돌려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중인들은 모산독군의 시선이 자기들에게 닿자 움찔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후배…… 인사드리옵니다.”

그들 중 일인이 문득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 인물은 특이한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삼십 전후의 여인으로서 궁장같으나 자세히 보면 궁장(宮裝)이 아닌 특이한 자의(紫衣)를 걸치고 있었다.

‘미인이다.’

적연흥이 여인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무척이나 서글서글한 눈매와 포근한 인상의 여인이다.

이미 삼십 정도 되어 뵈는 여인이 어전히 처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여인의 모습을 본 모산독군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은하궁(銀河宮)의 제자냐?”

여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소녀는 은하선자(銀河仙子) 제연연(齊淵燕)이라 하옵니다.”

“흠…… 은하여제(銀河女帝) 제여협은 너와 어떤 사이냐?”

 

-은하여제(銀河女帝).

 

그녀는 일대여걸이었다.

무명의 은하궁이라는 문파를 무림제일염파(武林第一艶派)로 만들었다.

은하궁이란 여인들만의 문파로서 기이하게도 궁도들이 모두 제씨(齊氏) 성을 갖고 있다.

은하여제는 이미 구십여 년 전에 타계했으며 당대 은하궁주는 은하여제의 증손녀였다.

“그분께서는 소녀의 증조모 되시옵니다.”

“흠 그렇게 되겠군. 제여협께서 타계하신지 이미 백여 년이 다되어 가니…….”

모산독군과 은하여제는 동시대의 인물이다.

“네게 이 아이를 부탁하고 싶구나.”

모산독군이 적연흥을 가리키자 은하선자의 봉목이 이채를 띄었다.

‘대단한 기재다. 재질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일대종사의 기개가 서려 있으니……’

언뜻 제연연의 눈에 야릇한 빛이 지나갔다.

모산독군과 음산잔마 같은 인물들이 그걸 놓칠 리 없다.

그러나 두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 못본 척 했다.

“해는 이미 기울어지고 이 아이는 신무애로 한 가지 약초를 찾으러 가니 아무래도 안심이 아니 되는구나.”

제연연이 뇌살적이라 할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노선배님께선 심려놓으시옵소서. 소녀가 이분 공자를 모시겠습니다.”

“허허…… 그래주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제연연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소녀, 이분 공자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적연흥도 모산독군과 음산잔마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소자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두분 할아버지께서도 만년화룡을 상대하심에 조심하시기 비옵니다.”

모산독군은 빙그레 웃고 음산잔마는 헤벌쭉,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하하…… 어서 가보아라. 후일 기회 있으면 음산(陰山) 천잔곡(天殘谷)으로 놀러오거라.”

“네……그럼…….”

적연흥은 두 노인과 작별하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공자님…… 소첩이 도와드릴까요?”

제연연이 바짝 다가섰다.

진한 분내음이 확 풍겼고 적연흥으로서는 생전처음 느끼는 성숙한 여인의 살내음이 물씬 풍겼다.

거기다 처음 보는 자기에게 소첩운운하하며 다가들자 적연흥은 한바탕 가슴이 진탕 되었다.

적연흥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소생 혼자서도 달릴 수 있소이다.”

말을 함과 동시에 적연흥의 몸이 전면을 향해 쏘아갔다.

휘르르……

그 즉시 은하선자 제연연의 교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는 그녀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적연흥은 길도 아닌 험지를 마치 질주하는 맹호와 같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대…… 대단한 주력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면서 저 정도로 달릴 수 있다니…….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제연연의 작은 가슴에서 거센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삽시에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음산잔마가 걱정스러운 빛을 띄었다.

“노형님! 자칫하면 연흥이가 은하궁(銀河宮)의 씨받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린 계집의 눈치를 보니……”

모산독군이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은 일 아닌가? 은하궁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쓸만한 아이들이며 저 아이의 혈통으로 보면 훌륭한 자손들이 나올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금 두 노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

씨받이라니…….

음산잔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적가의 자손이 못되고 제가의……”

모산독군이 손을 저었다.

“허허, 그만 두어라. 너의 속셈 모를 줄 아느냐? 훌륭한 손주 사윗감 놓칠까 보아 안달하는 게지?”

음산잔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게 웃었다.

“인연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조바심 낼 것도 없느니라. 자 용연곡으로 들어가자. 노형의 목적은 만년화룡을 제거하는 것이니…… 내단을 얻으면 네게 양보하마.”

“고맙습니다, 형님……”

두 노기인은 용연곡으로 들어섰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군웅들도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너무나 아름답다. 대면하기 두려울 정도로……’

적연흥의 가슴이 난생 처음으로 크게 뛰고 있었다.

바람결에 긴 머리칼을 펄럭이며 날아가는 제연연의 모습!

그것은 그대로 선녀(仙女) 바로 그것이었다.

적연흥은 이제껏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세상에 존재하리라 믿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영원히 최고지상(最高至上)의 여인임으로…….

제연연의 일보 일보의 옥보와 자그마한 움직임조차 미와 조화의 극치였다.

물론, 제연연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적연흥에게 잘 보이려 하는 때문도 있으나 사실 그녀는 천하에 내놓아도 적수가 드물 최고의 미인이었다.

휘르르……

양인은 어느덧 병풍을 세워 놓은 듯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닿았다.

절벽의 안쪽은 수직으로 깎아 세운 끝이 없는 단애였다.

단애의 밑으로 부터는 극히 음랭한 한기를 실은 운무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 한기가 얼마나 강한지 무공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제연연이건만 교구를 바르르 떨어야 했다.

“이곳이 북안탕 이대절지의 다른 한 곳인 신무애(神霧崖)입니다.”

적연흥은 제연연을 향하여 말했다.

파파팟!

양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작열하며 빛을 발했다.

거의 동시에, 양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적연흥은 눈길을 절벽의 외측 경사면을 더듬었다.

어머니의 고질을 치료하기 위한 담석화(曇石花)를 찾는 것이다.

“저…… 공자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문득, 제연연이 절벽 위에 선채 적연흥에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집요하게 적연흥의 등쪽을 따르고 있었다.

“적연흥이라 하외다.”

적연흥이 발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소첩의 천명은 제연연이라 하옵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적연흥은 씩 웃어보였다.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제연연의 두 볼이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감사하옵니다. 하온데 찾고 계시는 것이 무슨 약초이시온지요?”

적연흥은 담석화와 유사한 야생화를 살피며 말했다.

“담석화(曇石花)라 하는 약초외다.”

“담석화라면 기(氣)가 허해지고 심약(心弱)한 체질을 바꾸는 약초 아니옵니까?”

적연흥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제연연이 의도에도 조예가있음을 깨달은 때문이리라!

“맛소이다. 소저께서 담석화를 알고 계신 것을 보니 소저께서도 의도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이 보이외다.”

적연흥의 말을 들은 제연연은 살포시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조예라고 하기에는 너무 천박한 것이라 부끄럽사옵니다. 하온데 담석화를 어디에 쓰시려고……?”

적연흥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말해 주어도 괜찮겠지……’

적연흥은 천천히 자기의 주변 이야기를 했다.

본시는 그다지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성질은 아니었으나 제연연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제연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눈길은 따스하게 빛나며 적연흥을 바라보았다.

“소생이 괜한 신변잡기를 길게 늘어 놓아 소저의 심기만 어지럽힌 것 같소이다.”

적연흥의 어투는 그대로 어른의 어투였다.

‘누가 이 소년을 십육 세의 소년이라고 볼 것인가? 저 태도하며 기개가 천인(天人)의 그것과 같으니…… 연연아. 궁을 위해서라도 저 소년을 놓치면 아니 될 것이니라.’

제연연은 눈부신 듯한 시선으로 적연흥을 바라보았다.

“저……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사와요.”

여인이 두 볼을 장미빛으로 상기시키며 말하는 모습은 너무도 고혹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소생의 힘으로 할수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적연흥이 선선히 대답했다.

제연연은 바싹 긴장ㅎ며 입을 열었다.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나…… 제 나이가 공자보다 조금 많으니……”

제연연은 힘겹게 운을 떼었다.

“저를…… 저를…… 누나라고 불러 주실 수 없으세요?”

“누…… 누님으로……?”

적연흥의 몸이 휘청 했다.

제연연의 부탁이라는 것이 외남매를 맺자는 얘기인 줄은 생각도 못한 때문이다.

적연흥은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연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제연연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흑!”

갑자기 제연연은 섬섬옥수로 옥안을 가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흑흑…… 알아요. 이 계집은 공자와 의를 맺을 정도로 잘 생기지도 못했고…… 모든 것이 형편없는 계집이라고요…… 흑흑……”

적연흥은 당황했다.

그가 언제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는가?

“그……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연흥은 얼른 제연연에게 다가가 제연연의 섬섬옥수를 얼굴에서 떼어냈다.

“누님같이 아름다운 분을 누님으로 둘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정…… 정말이시옵니까?”

“그렇습니다……”

제연연의 두 눈이 이번에는 감격으로 붉게 충혈되었다.

“아우님……!”

제연연이 와락 안겨 들었다.

‘어! 어어……!’

뭉클한 여체가 가슴 가득히 안겨오자 적연흥은 기겁을 했다.

뭉클한 감촉과 향긋한 육향이 그의 가슴을 무섭게 탕진시켰다.

생전 처음 여체를 접한 때문이다.

그러나, 밀어낼 수도 없는 일, 적연흥도 굳건한 두 팔로 제연연을 마주 안았다.

“누님……!”

“아우님…… 고마워요. 아우님을 얻게되다니……”

제연연은 적연흥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그녀의 두 팔은 적연흥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소 지나친 그녀의 태도다.

적연흥도 그것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떼어 놓으려하면 그녀가 무안해 할 것이므로……

두 남녀는 마주 끌어 안은 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점차, 적연흥은 단전으로부터 괴이한 열기가 솟구침을 느끼고 대경했다.

‘내가…… 음심을 품다니…… 이 무슨 추태인가?’

적연흥이 제연연에게 음심(淫心)을 일으키는 자신을 탓하며 막 제연연을 떼어 놓으려 할 때였다.

크아…… 아……앙!

북안탕 전체가 뒤흔들렸다.

용연곡쪽으로부터 천지를 뒤흔드는 괴물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학!”

“으음……!”

두 남녀는 흠칫 하며 용연곡쪽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용연곡쪽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들렸다.

푸드득! 푸드득!

우―― 우!

두두두……!

일대 소란이 일었다.

용연곡쪽으로부터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산짐승들이 산지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맹호, 곰, 늑대, 표범 등의 맹수로부터 사슴, 노루, 토끼 등등의 짐승들까지 서로 뒤엉킨 채 달아나고 있었다.

쿵! 쿵! 쿵!

크와아…… 앙!

지축이 뒤흔들리고 심혼을 떨어 울리는 거창한 포효소리가 점점 더 가까와졌다.

화르르르――

그와 함께, 용연곡 방향이 완전히 불바다로 화했다.

시뻘건 화마가 허공을 시커먼 연기로 뒤덮으며 노도같이 번져 나갔다.

쿵―― 쿵!

불길을 헤치고, 돌연 거대한 괴물이 몸을 드러내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 않을 것만 같던 적연흥이건만 이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괴물은 두 다리로 우뚝 일어선 채 두 앞발로 높이 수십 장이나 되는 거목들을 썩은 짚단같이 쓰러뜨리고 있었다.

우뚝 일어선 키만도 이십 장, 전신이 시뻘건 가죽으로 뒤덮여 있으며 머리하나 크기만도 집채만했다.

게다가, 딱 벌린 동굴같은 아가리에서는 지옥의 그것같은 불길이 토해지고 있다.

인화가 번뜩이는 한 쌍의 눈에서는 굉폭한 흉갈이 번뜩이고…… 그야말로 인세(人世)에서는 상상도 못할 그런 거대한 괴물이었다.

“꺄아악!”

여인인 제연연, 황급히 적연흥의 등뒤로 숨었다.

적연흥은 그녀의 교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절정의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역시 아녀자이므로……

“으음…… 만년화룡(萬年火龍)!”

적연흥의 입에서 무거운 탄성이 터졌다.

“듣기보다 더욱 대단한 괴물이군.”

적연흥은 천천히 어깨에 메었던 강궁(强弓)을 풀어 손에 쥐었다.

“아…… 아우님…… 무엇을 하시려고……?”

제연연이 놀라 물었다.

“피하기는 너무 늦었습니다. 저놈이 우리를 발견못하고 지나친다면 모르나 만일 발견한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신무애의 돌출한 부분으로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게다가 운나쁘게도 만년화룡은 나머지 한 방향에서 정면으로 달려 들고 있었다.

크와……아앙!

만년화룡은 점차 신무애쪽으로 다가왔다.

만년화룡의 전신은 지독한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아마도, 모산독군과 음산잔마의 극심한 공세에 당한 모양이다.

“웃!”

적연흥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만년화룡의 두 눈이 무서운 흉광을 발하는 것을 본 것이다.

‘발견 되었다!’

어지간한 적연흥이건만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삼십 장의 거구를 지닌 공룡(恐龍)이 아닌가?

크와아…… 앙!

쿵! 쿵쿵!

적연흥과 제연연을 발견한 만년화룡은 무서운 기세로 양인을 향해 돌진해왔다.

“흥아!”

멀리서 다급한 모산독군의 고함소리가 일었다.

쐐――애액!

휘―― 잉!

모산독군과 음산자마의 신형이 뇌전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쿵! 쿵!

만년화룡의 거구는 이미 오십 장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아……아우님……”

제연연이 바들바들 떨었다.

“소제 뒤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적연흥은 침착히 말하며 강궁을 쳐들었다.

제연연은 이미 무림여걸이 아니라 연약한 한 아녀자일 뿐이었다.

패―― 앵!

강궁이 크게 부풀었다.

쿵! 쿵쿵!

만년화룡은 이미 삼십 장 안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연홍아! 활로는 안된다.”

만년화룡의 뒤로부터 모산독군의 다급한 일성이 터졌다.

파――앗!

쐐애――앵!

그 순간 강전(强箭)이 전광갈이 폭사되어 나갔다.

카―― 앙!

이럴 수가……

한 자 두께의 목판도 꿰뚫는 강전이건만 만년화룡의 가죽에 그대로 튕겨 나갔다.

크와―― 아앙!

그 화살은 만년화룡의 노기만 돋구었다.

화르르……

거창한 불기둥이 두 사람을 휩쓸어왔다.

“우웃!”

적연흥은 다급히 제연연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신무애의 바로 끝에 몰렸다.

쿵…… 쿵!

만년화룡이 다가서자 절벽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눈! 눈이라면……’

적연흥의 봉목이 신광을 발했다.

패―― 앵!

쾌첩하게 또 다른 강전이 강궁에 매겨졌다.

쉬―― 익!

전광석화(電光石火)!

다음 순간,

파――악!

크와―― 와―― 악!

강전은 정확히 괴물의 오른쪽 눈을 관통했다.

“이 노―― 옴!”

그순간 만년화룡의 등쪽으로 모산독군이 날아들며 일장을 후려쳤다.

콰―― 앙…… 콰르르……

만근 화약이 터지듯!

쿠와아아―― 악!

철판같은 만년화룡의 등판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만년화룡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입을 딱 벌렸다.

콰――우웅……

화르르……

갑자기 만년화룡의 입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토해졌다.

찬연한 화광을 발하는 불덩이는 곧장 적연흥에게로 쏘아져 갔다.

아!

그것은 만년화룡이 만년 동안 태양자기(太陽磁氣)와 지심극열(地深極熱)을 흡수하여 형성한 내단(內丹)과 단화(丹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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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一 章

 

             三老莊貴賓

 

 

 

석두공은 맞은 편 전각에서 걸어나오는 또 한명의 흑의인을 볼 수가 있었다.

그자는 이곳에 온 다른 자들과는 달라보였다.

움직임이 마치 귀신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특이한 보법을 밟아 상대가 예측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흰머리들은 본좌가 상대하겠다. 너희들은 나머지를 죽여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이 반복되어 터져나왔다.

추릿!

그 흑의인은 검을 뽑아들고 목을 찌를 듯한 자세를 취하며 조창에게 다가갔다.

파앗!

조창과의 거리가 사장 정도로 좁혀 졌을 때 갑자기 흑의인은 조창에게 쇄도하며 검을 찔러냈다.

실로 쾌속하여 한줄기 빛과 같이 보였다.

(...)

조창은 내심 소리치며 고개를 돌리며 일장을 밀었다.

한데,

화끈!

조창의 자신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흑의인은 분명히 자신의 목을 노렸는데 어떻게 허리게 베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창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흑의인의 검은 다시 그의 가슴을 찔러오고 있었다.

말도 없고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고도의 살인수법을 익힌 전문살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아악!]

[으악! !]

삼노장의 무사들이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소리가 삼노장을 울렸다.

그러나 조창은 그 사이에 다시 일검을 맞았다.

흑의인의 장검은 그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찔러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가슴을 찌르는가 싶었는데 머리를 베어오고, 다리를 벤다고 생각했는데 목을 찌르고 있었다.

조창은 자식의 절학인 화염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식은 땀을 흘렸다.

한데 팽덕과 하진은 꼼작도 하지 않고 한곳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조창은 속으로 욕을 했다.

(무정한 놈들... )

그러나 석두공은 팽덕과 하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마치 동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내가 도와야겠군.)

석두공은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조할아버지 거들어드릴까요? ]

허공에서 작고 흰 그림자가 떨어지면서 말했다.

조창은 크게 기쁘하며 대답했다.

[장아가씨께 번거로움을 드리는구려. !]

말하는 사이에 다시 다리에 일검을 맞았다.

나타난 것은 작고 흰그림자는 십육칠 세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였다.

깜찍하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생긋웃으며 허리의 체대를 풀었다.

휘리리릭!

긴 체대가 연검(軟劒)으로 변하며 흑의인을 베어갔다.

!

흑의인은 조창을 공격하던 검을 돌려 막았다.

그 사이에 조창은 숨을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소녀의 체대는 방향을 돌려 이번에는 장원의 무사들을 살해하고 있는 흑의인들을 향했다.

휘리릭!

[크악!]

마음대로 방향을 틀면서 날아드는 긴 연검을 피하지 못한 한 흑의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소녀는 땅으로 내려선 후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길고 가는 연검만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의 검술은 소박한 듯하면서도 정치(精緻)했고, 빠르면서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석두공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보다 어린 것같은 데 저같은 검술을 닦는 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저런 검술은 명사(名師)의 지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창을 공격했던 그 흑의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소리쳤다.

[퇴각해라.]

휙휙휙!

상대를 버려두고 흑의인들은 담을 넘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소녀가 낭낭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휘리릭!

갑자기 그녀의 연검이 방향을 틀어 팽덕과 하진에게로 날아갔다.

[! 안돼!]

조창이 다급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연검은 두 사람의 몸을 살짝 찍고는 물러났다.

차앗!

팽덕과 하진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번쩍!

거의 동시에 그들의 뒤에서 돌연 백광이 솟구쳤다.

작약을 담은 상자 속에서 두 명의 흑의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팽덕과 하진은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검을 피했던 것이다.

[크하하하... ]

흑의인들은 광소를 터뜨리며 석두공의 머리위를 지나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무공은 조창을 상대했던 그 흑의인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이엇다.

-!

콰콰쾅!

석두공은 눈앞이 섬광으로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

 

전각이 폭발해버렸다.

십리 밖에서도 하늘로 치솟는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전각이 있던 곳에는 큰 웅덩이가 생겨버렸다.

삼노장의 전각들 중에서 태반이 무너져버렸다.

삼노장에는 사람의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돌연,

들썩들썩!

무너진 한채의 전각의 일부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아가씨라고 불린 소녀가 하얗게 질린 채 기어나왔다.

그녀의 옷자락은 군데군데 불길에 타고 그을려 시꺼멓게 변해있었다.

그녀는 폭발의 여력에 날아가 전각속에 쳐박혔다가 전각이 무너지자 갇혀버렸던 것이다.

[팽할아버지! 조할아버지! 하 할아버지!]

장아가씨가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소리쳐 불렀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웅덩이가 마치 마귀의 입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으으으... 장아가씨... ]

미약한 신음과 함께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웅덩이가 파지면서 생긴 주위의 흙더미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장아가씨가 비틀거리며 다가가 손과 발로 흙을 치웠다.

팽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흙이 코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서 드러누워있었다.

심한 화상으로 인해 전신에 물집이 생겼는데 그 물집에는 흙들이 파고 들어있어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그의 얼굴만은 본능적으로 가렸는지 그다지 손상을 입지 않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아가씨는 그를 끌어내어 반듯한 곳에 눕혔다.

그때 흙더미 속에서 나온 손 하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

장아가씨는 깜짝 놀라며 힘껏 발을 잡아뺐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을 잡은 손은 더할 수 없이 완강했다.

장아가씨는 발목이 으스러지는 것같은 고통을 느꼈다.

쓔욱!

그녀의 발목에 이끌려 검게 탄 숯덩이같은 것이 흙더미 속에서 뽑혀나왔다.

땅 밖으로 나오자 그 숯덩이는 장아가씨의 발목을 놓았다.

장아가씨의 눈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발목의 뼈가 부러진듯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숯덩이가 누군지를 살폈지만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몇 사람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장주님! 장주님!]

장원의 일하던 노인들로 이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폭발에 크게 놀라 금방 다가오지 못했다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아무 기척이 없자 다가온 것이었다.

장아가씨가 반색하며 그들을 불렀다.

[이리오세요.]

장아가씨의 지휘아래 시체들과 살아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땅을 파고 전각들을 뒤지고 했지만 그들이 찾아낸 건 오직 세명의 장주와 한 구의 숯덩이 같은 인물뿐이었다.

몇 개의 타다남은 팔과 다리들을 찾아내기도 했으나 주인을 알 수도 없었다.

팽덕과 조창의 부상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내상과 화상이 심하긴 했지만 치료하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진의 화상은 심했다.

그는 두 다리가 완전히 타버려 하체가 짧아져버린 상태였다.

장아가씨는 그들을 치료하고 녹초가 되어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도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었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쉬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곁에 공교롭게도 숯덩이같은 인물이 눕혀져 있었다.

지금 그녀와 생존자들이 있는 곳은 장원의 뒤쪽에 있는 귀빈을 맞는 곳이다.

바로 현재의 그녀가 머무는 거처이기도 하다.

[... 이 사람도 살 수가 있을까?]

장아가씨는 몸이 천근만근이었으나 옆에 있는 숯덩이를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숯덩어리는 숯덩어리 같은 데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진의 하체가 타서 없어진 것에 비하면 그것은 기적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장아가씨는 그의 팔에 손을 대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숯덩이 같은 인물은 숨이 멎어있었으나 기이하게도 심장의 박동이 아주 힘찬 것이 아닌가?

더구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진력이 그 숯덩어리의 몸속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그 힘이 거대했다.

장아가씨는 세상에 그처럼 고강한 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도보도 못한 것이다.

숯덩어리는 살아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삼노장에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데,

쩌쩍!

! 쩌적!

갑자기 숯덩어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장아가씨는 깜짝 놀라서 천근만근 같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 제자를 구한 게 너냐?]

장아가씨는 흠칫 놀라며 뒤로 돌았다.

허무한 듯 또는 담담한 듯이 서있는 삼십세 정도의 사나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후줄근하게 보이는 백의를 입은 사나이였다.

[당신은 누구세요?]

장아가씨가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폭풍무존이었다.

그는 허무한 듯이 말했다.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다. 내 제자를 구해줬으니 노부는 저들을 치료해주도록하마.]

(노부?)

장아가씨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쩌적!

숯덩어리는 계속 균열이 가고 있는데 폭풍무존은 손을 내밀었다.

돌연,

슈우우우우-!

그의 손에서 흰기류가 솟아오르더니 작은 구슬처럼 뭉쳐졌다.

장아가씨는 그같은 기이한 일에 눈을 크게 떴다.

(진기가 형체를 이루다니... 어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가있지?)

구슬은 세개나 되었다.

그것은 폭풍무존의 손바닥에서 두둥실 떠올라 세방향으로 날아갔다.

팽덕과 조창, 그리고 하진에게로였다.

구슬은 그들의 단전으로 직접 스며들어버렸다.

폭풍무존이 장아가씨를 보면서 물었다.

[그리고 보니 정작 네게는 준 것이 없군. 이름이 무엇이냐?]

[지연(芝娟), 장지연이에요.]

장아가씨는 황급히 대답했다.

폭풍무존의 신기에 놀라서 그녀는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변의 단애로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폭풍무존은 그녀의 눈을 보면서 말한 후에 열려진 창으로 신선처럼 날아나갔다.

쩌쩍! !

균열이 가고 있던 숯덩어리가 둥실 떠오르며 그의 뒤를 따라서 사라졌다.

장지연은 자신의 손등을 꼬집었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으으음... ]

그때 팽덕 등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사부님!]

[빨간 것이 영락없이 금방 태어난 아기로구나.]

폭풍무존이 말했다.

불에 탄 껍질을 벗어버린 석두공은 그야말로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빨간 몸으로 폭풍무존 앞에 엎드렸다.

[복수하러 갔느냐?]

폭풍무존이 물었다.

알같은 석두공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도 홀랑 타버린 후에 배냇머리처럼 부드럽고 노르스름한 솜털이 있을 뿐이고, 눈썹도 희미했다.

[아닙니다. 전 그자들에게 사부님을 부탁하려고...]

[다 부질없는 짓이다. 부질없는 짓이야.]

폭풍무존이 탄식하며 말했다.

 

단애 위에는 장강의 급류를 바라보고 한채의 초옥이 서있었다.

급하게 만들어져 초옥의 지붕으로 썬 나무들은 아직도 푸른 빛이 가시지 않았다.

그 초옥 속에 폭풍무존과 석두공이 있는 것이다.

폭풍무존이 말했다.

[너는 나를 깨우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영원히 잠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석두공은 천신폭풍탑에서 충동을 이기지 못해 천신폭풍보를 펼친 적이 있다.

천신폭풍탑은 모두 삼층이었는데 그 삼층에 폭풍무존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신폭풍보에서 펼쳐진 힘으로 인해 탑이 파괴될 때 그 힘을 빌어서 다시 정신을 차렸었다.

폭풍무존은 석두공에게 그를 탓하는 듯 말했지만 실상 그 말은 자신을 탓하고 하늘을 탓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살고자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그같은 능력이 없었더라면 살고자 해도 살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금제일의 절대강자인 폭풍무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 지금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고독을 달래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세월은 너무 변해버렸다.

폭풍무존은 스스로가 자신을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

폭풍무존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옷을 구해오마.]

석두공은 폭풍무존이 나간 후 알몸으로 방안을 서성였다.

방바닥은 나무들을 깎아서 깔아놓아 편편했다.

방 한쪽 구석에는 그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숯껍질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천왕저가 그 숯껍질에 붙어있었다.

석두공은 잔혼각의 인물들이 작약으로 위장하여 갖다 놓았던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었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 있는 오독패혼공과 포연신공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중상을 입지도 않고 살아난 것이다.

포연신공은 그의 내공을 다시 한번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석두공은 불에 탄 허물을 벗어버리고 매끈한 알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변화는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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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奇人들의 배려

 

 

 

적연흥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모산독군의 말에 적연흥은 멋적게 씨익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산독군은 그런 적연흥의 모습을 보며 더욱 마음이 끌림을 느꼈다.

볼수록 훌륭한 아이다. 마치 갈지 않은 보옥과 같도다. 한번 크게 길러볼 만한 아이지만……

적연흥은 백호피를 둘둘 말아 짊어진 뒤 모산독군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께서 이 깊은 북안탕까지 오신 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있으신 때문이겠지요?”

모산독군은 자애롭게 웃었다.

그렇단다. 연흥이는 북안탕에서 살았으니 이곳의 지리는 훤하겠구나.”

몇 군데 가보지 못한 험지가 있기는 하오나 대개의 지형은 알고 있사옵니다. 할아버지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만 해주시면 소자가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허허, 그래 주겠느냐? 노부는 용연곡(龍淵谷)이라는 곳을 찾고 있단다.”

갑자기, 적연흥의 안색이 침중히 변했다.

용연곡(龍淵谷)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한데 네 안색을 보니 무엇인가 꺼리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는구나.”

적연흥이 침중한 안색을 짓는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북안탕에는 몇 군데 절지가 있으며 특히 그중의 양대절지(兩大絶地)는 세상에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용연곡(龍淵谷)>

<신무애(神霧崖)>

 

이 두 곳을 일컬어 양대절지라고 한다.

용연곡은 특이하게도 방원이 수십 장이나 되는 작은 호수가 있는 계곡이다.

언제부터인가 그 호수에는 한 마리 괴물이 살고 있어 가끔 물 밖으로 나오곤 한다는 것이다.

적연흥은 아직 용연곡의 괴물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 괴물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적연흥이 사는 마을에도 몇명 있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괴물은 그 크기가 근 삼십 장이나 되어 마치 작은 동산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머리 하나가 집채만 하며 코와 입에서는 시뻘건 불을 뿜는다고 했다.

특히, 요즘은 그 괴물이 자주 연못에서 나와 용연곡 주위를 돌아다니는데 그 통에 용연곡 주위 오 리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용연곡이 이러한 곳인 까닭에 적연흥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한 것이다.

할아버지. 용연곡에 꼭 가셔야 합니까?”

그의 어조와 안색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를 본 모산독군은 점점더 마음이 흐뭇해짐을 느꼈다.

그는 껄껄 웃으며 적연흥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용연곡에 사는 만년화룡(萬年火龍)에 대한 소문을 들은 때문에 노부를 걱정하는 게로구나.”

적연흥은 흠칫 했다.

만년화룡(萬年火龍)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오냐. 혹시 네가 만년화룡을 알고 있지 않느냐?”

적연흥은 겸연쩍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전에 아버님께서 남겨 놓으신 고서 중에 괴이지(怪異誌)라는 책에서 만년화룡에 대한 기록을 본적이 있었사옵니다.”

모산독군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이 아이 부모들도 그저 평범한 촌민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모산독군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괴이지에 무어라 적혀 있느냐?”

적연흥은 신중히 대답했다.

만년화룡(萬年火龍)은 상고시대에 살았던 화룡(火龍)중에서 잔존한 괴물로서 태양자기(太陽磁氣)와 지심극열(地深極熱)을 쌓는다고 합니다. 만년의 수련을 쌓은 만년화룡은 하나의 내단(內丹)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내단이 완성되고 백일이 지나면 승천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일단 승천하면 악룡(惡龍)이 되어 천하를 열기로 휩쓸어 잿더미로 만들며……

적연흥은 말을 하다가 문득 모산독군을 바라보았다.

모산독군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마주 바라보았다.

혹시…… 만년화룡(萬年火龍)이 만년수련을 마친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만년화룡이 승천하기 전에 제거하시려고……

하하…… 영리한 아이로다. 그렇다, 노부가 멀리 모산에서 이곳 북안탕까지 온 것은 만년화룡이 승천하기 전에 제거하려고 온 것이다.”

적연흥은 우려의 빛을 띄웠다.

만년화룡의 만년수련이 끝났다면 그 난폭함이 극에 달하였을 터인데 할아버지께서 만년화룡을 제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누가 모산독군에게 모산독군의 능력을 의심하는 소리를 했다면 그 즉시 날벼락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산독군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십여 장 밖에 서 있는 높이 삼 장 정도의 암석을 가리켰다.

저 바위를 잘 보거라.”

적연흥은 고개를 돌려 그 암석을 바라보았다.

스스스――

모산독군이 가볍게 소매를 흔들었다.

그와 함께, 족히 만 근이 넘는 거석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

적연흥은 탄성을 지르며 허공에 떠오른 암석을 주시했다.

일반인이 그것을 보았다면 기절초풍을 했겠으나 적연흥은 단지 한마디 탄성으로 끝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스스스……!

―― !

갑자기, 만근 거석 전체가 연기를 내며 얼음이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음……

이번에는 적연흥도 안면을 부르르 떨었다.

대단한 침착성이군. 이 아이의 정력(定力)은 가히 천하제일이겠는걸……

모산독군은 감탄하며 손을 내렸다.

이미 만근 거석은 모두 녹아버린 후였다.

어떠냐? 이 정도면 노부가 만년화룡과 싸워서 지지 않을 것을 믿겠느냐?”

적연흥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소자는 오늘에야 안목이 떠졌사옵니다. 용연곡으로 안내하겠으니 소자를 따르시옵소서.”

허허…… 신세를 지겠다.”

적연흥은 훌쩍 걸음을 옮겼다.

험산에서 능숙해진 그 특유의 빠른 걸음걸이는 마치 행운유수같았다.

허허 볼수록 놀랍군. 이 아이 발걸음은 같잖은 경공을 익힌 아이들보다 오히려 빠르겠는걸……

모산독군은 감탄하며 적연흥과 보조를 같이했다.

연흥이는 무슨 이유로 어린 나이에 사냥을 하게 되었느냐?”

모산독군이 넌즈시 물었다.

적연흥은 모산독군이 마치 친할아버지같이 느껴져 사실대로 집안사정을 이야기했다.

허허, 어린 나이에 정말 대견하도다. 그래 너는 어느 정도의 책을 읽었느냐?”

적연흥은 겸손하게 이야기했다.

다행히 아버님께서 작고하실 때에 남기신 서적들이 있어 사서삼경 등의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모두 읽었사옵니다.”

모산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모산독군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길로 전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정말 신선같은 할아버지시다. 호랑이도 따라잡는 내가 힘을 다해 달리는 데도 그저 걸어서 따라오시다니……

적연흥이 염두를 굴리는데 모산독군은 품속에서 두 권의 두툼한 비단책자를 꺼내었다.

노부는 우연히 한부의 독경을 얻어 독술의 일인지가 되었다. 그후 그 독경을 연구 발전시켜 나름대로 또 한 권의 독경을 만들었느니라.”

적연흥은 의아한 신색으로 모산독군을 바라보았다.

모산독군은 미소를 지으며 두 권의 독경을 적연흥에게 내밀었다.

받거라. 너와 만난 기념으로 이 두 권의 독경을 네게 주마.”

적연흥은 엉겁결에 독경을 받아들고는 당황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소자에게……

허허, 그 두권 속에는 너무나 패도적인 독공이 수록되어 있다. 노부는 평생 제자를 두어 가르킨 적도 없으며 자칫 노부의 진전이 악인에게 전해져 무림에 해를 끼칠까 저어해 왔다.”

…… 하오면 이를 어찌 소자에게……

허허, 본시는 이번 북안탕의 일을 마치면 그 독경들은 없애버리려 했었으나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다. 독경이 유용하게 쓰일 인재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니라.”

적연흥은 겸연쩍어 얼굴을 붉히면서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소자에게 귀한 독경을 전수하셨으니……

적연흥이 절을 하려하자 모산독군은 무형경기로 그의 몸을 떠받쳤다.

허허, 그럴 필요 없느니라. 노부는 다만 네가 독경을 바른 일에 사용하길 바랄 뿐이다. 아울러 그 독경은 무림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니 절대 타인에게 보이면 안된다.”

소자 명심하겠사옵니다.”

적연흥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 !”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일순 모산독군의 백미가 꿈틀 했다.

! 가보자꾸나!”

모산독군이 재빨리 적연흥의 팔목을 잡고 몸을 솟구쳤다.

…… !”

적연흥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미풍에 실려가는 깃털마냥 둥실 떠오름을 느꼈다.

―― !

적연흥이 놀라는 사이 그의 손목을 쥔 모산독군은 선풍같이 폭사되어 나갔다.

주위의 경물이 환상같이 홱홱 지나가고 무서운 속도감이 적연흥을 휘감았다.

 

삽시에 두 사람은 어느 협곡으로 날아들었다.

……!”

모산독군과 협곡으로 날아내린 적연흥의 검미가 깊이 찌푸려졌다.

협곡 입구에는 이십여 명의 백의몽면인들이 죽어 있었다.

한데, 그들이 죽어 있는 형상이 너무나 끔찍했다.

사지가 끊어져 나간 자가 있는가 하면 상체가 완전히 부서져 죽은자, 복부가 터지고 두상이 박살이 난자 등등 하나같이 잔혹 악랄한 수법에 절명해 있었다.

―― !

으아악…… 아악!”

그사이에도 연신 협곡 안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 음산(陰山)의 못된 애송이가 저지른 짓이군. 이십 년만에 강호에 나오자마자 후배들에게 무자비한 살수를 쓰다니…… 그 잔혹한 손속을 버리지 못했군.”

시체들을 살펴본 모산독군이 혀를 찼다.

아시는 분이 저지른 일입니까?”

적연흥이 다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단다. 음산잔마(陰山殘魔)라는 후배인데 손 씀씀이가 무척 잔혹하다. 들어가 보자.”

모산독군과 적연흥은 협곡 안으로 들어 섰다.

크크크…… 네놈들이 감히 노부를 건드리다니…… 한놈 남기지 않고 때려 죽이리라.”

협곡의 안쪽으로 들어선 적연흥의 눈에 일단의 인물들이 혈전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인물은 이십여 명의 백의인들 사이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회포노인이었다.

회포노인은 불구자였다.

한 팔과 한 다리가 없을 뿐 아니라 두 눈 중 하나가 없었다.

하나, 그 노인은 비록 불구였으나 그 무공은 대단했다.

외팔과 외다리가 날아가면 칼날같은 경풍이 휘몰아쳤다.

파파팟!

―― !”

그 사이에도 한 백의몽면인이 괴인에게 죽음을 당했다.

백의인의 검이 허공을 베는 순간 귀인의 손아귀가 그자의 목뼈를 꺾어 버린 것이다.

이미 바닥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고 남은 백의인들도 정신없이 괴인의 공세를 피하기에 바빴다.

이놈!”

모산독군이 두 눈에서 노기를 발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협곡전체가 무너질 듯이 진동하였다.

!”

으윽…… !”

적연흥에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괴인과 백의몽면인들은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큼 모산독군의 내공은 무서웠다.

! ……형님!”

모산독군을 발견한 괴인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 !

괴인은 한 다리로 껑충 뛰어 모산독군 앞으로 내려섰다.

아니 형님께서도 모산에서 예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

괴인, 음산잔마의 말을 들은 백의몽면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 모산독군!”

확실히 모산독군의 명성은 무서웠다.

음산잔마에게는 대항해서 싸우던 백의인들이건만 모산독군이 나타나자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 !”

모산독군은 노여운 눈길로 음산잔마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얼굴을 폈다.

네 손속은 여전히 잔악하구나. 이제 염라전에 갈 날도 멀지 않은 것이 그 잔악한 손버릇을 못 고치다니…… 쯧쯧……

모산독군의 야단을 맞은 음산잔마는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형님, 소제도 이렇게 손을 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요. 헌데 저놈들의 하는 짓거리가 소제의 오장을 북북 긁어 놓아 그만 심하게 손을 쓰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모산독군은 음산잔마의 말을 들으며 날카로운 눈길로 한구석에 엉거주춤 물러 서 있는 백의몽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모산독군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자 백의인들의 전신은 더욱 심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쓰고 있는 보자기를 벗어라!”

모산독군이 백의인들을 노려보다가 버럭 일갈했다.

…… 예옛!”

백의인들은 깜짝 놀라며 몽면을 벗었다.

몽면 속에서 나온 얼굴들은 모두가 그다지 선하게 보이지 않는 면상들이었다.

어느 놈이 우두머리냐? 이리 나와라!”

모산독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자가 엉거주춤 걸어 나왔다.

말해랏!”

모산독군이 싸늘히 바라보며 일갈했다.

그러자 그자는 그대로 털퍽 주저앉았다.

…… 죽여 주십시오. …… 후배들은 염왕보(閻王堡)의 수하들로서…… 보주님의 명을 받들어…… 군웅들은 용연곡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속해라.”

모산독군이 냉랭히 말하자 그자는 한 차례 부르르 떨며 말했다.

…… 모두가…… 군사이신 독…… 심제갈(毒心諸葛)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 요소요소에 함정을 마련하여 용연곡으로 만년화룡의 내단을…… 노리고 오는 군웅들…… 암습……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후배들은 단지……시킨대로 했을……

알았다. 부상자를 데리고 썩 사라져랏!”

모산독군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 선배님의 은혜…… 각골난망이옵니다.”

그자는 산았다는 안도감에 수십 번이나 이마를 땅에 찍어대고는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헤헤…… 형님 축하합니다.”

느닷없는 음산잔마의 말에 모산독군은 영문을 몰라 백미를 찌푸렸다.

축하라니……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하, 형님두 참, 소제가 아무렴 형님제자를 빼앗기라도 할까봐 그러십니까? 이 아이같은 귀재를 얻은 것을 축하드린다는 말씀이옵니다.”

음산잔마가 신나게 떠들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고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음산잔마의 말을 들은 모산독군은 피식 웃었다.

오해말게. 이 아이는 오늘 막 만난 아이일세. 자 연흥아 인사 드려라.”

적연흥이라고 하옵니다.”

적연흥이 인사를 하자 음산잔마는 유심히 그를 들여다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볼수록 훌륭한 기골입니다. 만일 무공을 익힌다면 능히 천하인(天下人)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산독군이 말을 받았다.

그것을 누가 모르는가? 하나 무공을 익히고 안 익히고는 이 아이의 마음이니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게.”

음산잔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나 뿐인 손을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힐끗 모산독군을 바라보자 모산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산잔마는 한 권의 낡은 고서를 빼들었다.

이것은 전대기인이신 천잔수(天殘叟)라는 분이 남기신 무공비급이다. 본래는 천하무쌍의 무공이나 노부의 자질이 아둔하여 육성 정도 밖에 연성하지 못했다.”

음산잔마가 무공비급을 내밀자 적연흥은 움찔 했다.

허허…… 비록 노부가 너를 제자로 맞을만한 그릇은 못되나 천잔수께서 남기신 이 비급안의 내용은 가히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것이니라, 너와 만난 기념으로 주는 것이니 받거라.”

모산독군이 빙그레 미소하며 말했다.

연흥아 받아 두거라. 익혀두면 후일 큰 쓸모가 있을 것이니라.”

적연흥은 정중히 천잔수가 남겼다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감사하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하심을 잊지 않겠사오며 반드시 좋은 일에 사용 하겠사옵니다.”

음산잔마는 입이 찢어져라 헤벌쭉 웃으며 적연흥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그만 용연곡으로 가보세.”

모산독군이 주의를 상기하여 삼인은 협곡을 빠져 나왔다.

노제는 무슨 욕심이 생겨 용연곡을 찾는가? 다 늙은 주제에 만년화룡의 내단이라도 얻겠다는 얘긴가?”

음산잔마가 비록 모산독군에게 하대를 받고 있으나 사실 그의 나이도 백 살이 넘은지 오래였다.

문득, 음산잔마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형님도 아시고 계시지요? 소제가 삼십 년 전에 아이 하나를 양자로 삼은 일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경한이라는 아이던가? 그때 아마 열 살쯤 된 똘망똘망한 아이였지.”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다 자라서 이십여 년 전에 양가규수를 신부로 맞아 오년 만에 제게 귀여운 손녀를 안겨 주었습지요.”

모산독군은 적연흥의 팔을 잡고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이 나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질 고약한 네게는 너무 과분한 복이군.”

음산잔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 녀석의 이름은 혜미(慧美)라고 지었는데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한시도 제 손에서 놓지를 않았습죠……한데……

흠 무슨 일인가 있었군.”

음산잔마의 안색이 극히 어두워 졌다.

그 아이의 전신 경맥이 점차 한기를 띄더니…… 급기야 요즘에 와서는 운신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신이 새파래지고……

모산독군의 안면이 부르르 떨렸다.

오음절맥(五陰絶脈)이군!”

적연흥도 흠칫 했다.

부모님들이 모두 병환으로 고생하셔서 적연흥은 자연 많은 의서를 읽었다.

오음절맥이 난치의 고질이라는 사실을 그 의서들 중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저도 최근에야 그 아이의 증세가 오음절맥임을 알았습니다.”

모산독군이 혀를 찼다.

미련곰탱이 같은 네 돌 머리는 여전하구나. 그렇다면 일찌감치 노형에게 데려올 것이지…… 쯧쯧…… 그래서 혜민가 하는 손녀의 오음절맥을 고치기 위해 만년화룡(萬年火龍)의 내단이 필요하단 말이지?”

음산잔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년화룡의 내단으로도 아니 됩니까?”

만년화룡의 내단은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强)한 기물이지. 오음절맥이 아니라 구천태음신맥(九天太陰神脈)이라도 치료할 수 있어. 다만 여아일 경우에는 그 거센 양기로 순음지기가 훼손될 수도 있으므로 직접 복용은 못할 따름이지……

음산잔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못된 놈들……

갑자기 모산독군의 동안에 냉기가 흘렀다.

음산잔마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전면을 바라보았다.

염왕보(閻王堡)와 백의염왕(白衣閻王)이란 애송이가 갈 수록 못된 짓거리만 하고 있군요.”

가보세!”

두 기인의 말에 적연흥은 의아했다.

―― ―― !

모산독군과 음산잔마의 신형이 더욱 빨라져 질풍같이 쏘아나갔다.

음산잔마는 외다리만으로도 껑충껑충 뛰어 오는대도 그 빠르기가 굉장했다.

―― !”

――차창――

―――― 아악!”

, 적연흥의 귀에 어지러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멈춰랏!”

허공에 뜬 모산독군의 일성이 북안탕을 뒤흔들었다.

!”

…… …… 저 노인은……

장내에서 여러 마디의 경악성이 터지며 중인들은 모두 손을 멈추었다.

휘르르……

모산독군은 적연흥과 함께 표표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 모산독군!”

경악성이 장내를 메웠다.

적연흥은 장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널찍한 곡구를 백여 명의 몽면인들이 막아 서 있었다.

몽면인들의 전면에는 한 명 거구의 노인이 왜소한 중년인과 서 있었다.

그들의 전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모산독군의 출현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 외에 한쪽으로는 남녀노소가 뒤섞인 일단의 군웅들이 모여 있었다.

! 이리 와랏!”

모산독군이 거구의 백의노인을 가리키며 준엄하게 외쳤다.

…… 노선배님…… 무슨 하교가 계신지……

백의노인이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다가섰다.

사지중 하나를 자르고 떠나랏!”

모산독군의 일갈에 백의노인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 잘못 걸렸다. 저 노독물이 설마 이곳까지 올 줄이야…… 자칫하면……한 목숨 구하기도 힘들다.’

백의노인은 무림사패(武林四覇)로 불리는 네 개의 큰 세력 중 하나인 염왕보(閻王堡)의 주인 백의염왕(白衣閻王)이란 자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무림사패 중 하나라 해도 모산독군과는 천양지차!

거역하다가는 한줌 혈수로 변하리라……

백의염왕의 이마에서 주르르 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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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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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우울한 고금제일인 (2)

 

 

 

삼경이 지난 깊은 밤,

쿵쿵쿵!

[누구요?]

주점 주인 왕노이는 눈을 비비면서 나가 문을 열었다.

[!]

왕노이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헛바람을 삼켰다. 해질 무렵에 떠났던 술꾼 중의 한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내고야 말 것같던 두 사람 중의 한사람, 그는 바로 석두공이었다.

왕노이가 물었다.

[공자님께서 무슨 일로 다시 우리집에... ]

[왕노이! 당신을 왕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소.]

석두공이 말했다.

[저녁때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세 노인은 어디에 있는 사람들인지 말해주시오.]

[, 모릅니다. 공자님!]

왕노이는 이놈이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석두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당신을 아는데 당신이 그들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소. 어서 말하시오.]

[정말 모릅니다. 단지 우리집에 자주 찾는 손님일 뿐입니다.]

왕노이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석두공이 그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

순간 왕노이는 석두공의 키가 작아지는 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그는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석두공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어... ]

석두공은 단지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는데 그의 몸은 풍선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삼노장(三老莊)의 주인들입니다. 삼노장, 하지만 삼노장은 작약장(芍藥莊)으로 더 유명하지요. 남쪽으로 십오리 정도 가면 야산 하나를 통채로 둘러싼 장원이 있는데 바로 그 곳입니다.]

왕노이는 신체의 위험을 느끼자 묻지도 않은 것까지 빠르게 말했다. 보신(保身)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는 자였다.

석두공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고 땅으로 내려선 왕노이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만했으면 난 도리는 지킨 거야.]

 

*****

 

휘이익!

석두공은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큰 장원을 발견했다.

왕노이가 말한 그 삼노장이었다.

석두공은 삼노장의 담벽을 연기처럼 타넘었다.

작약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장원의 안은 전각들보다는 가지각색의 작약들로 뒤덮혀 있었다. 어째서 작약장이라고 하는지 알만했다.

석두공은 가장 커보이는 전각으로 소리없이 날아갔다.

삼노장은 아무도 경계를 서고 있는 것같지가 않았다. 그저 빗장만이 굳게 닫혀있을 뿐이었다.

얼핏 보아서 무림의 세력같지가 않았다.

석두공은 불이 켜져 있는 큰 전각의 지붕위에 날아내렸다.

전각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바로 찾았군.)

그 음성들은 석두공이 만났던 세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는 박쥐처럼 지붕에 거꾸로 매달렸다. 활짝 열린 창을 통해서 전각 안이 환히 보였다.

 

삼노(三老)는 모두가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형제와 같은 관계이면서도 위 아래가 없었다. 모든 일은 항상 서로 의논해서 해결해왔으며 어느 누구의 독단으로 일이 좌지우지된 일은 없었다.

언제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은 팽덕(彭德)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소림의 외가신공인 금강지(金剛指)를 잘 썼다.

약간 성미가 꼬인 것같은 노인은 조창(曺昌)으로 화염장(火焰掌)이라는 독문의 장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잘 웃는 노인은 하진(夏唇)이라하며 소매 속에 숨긴 비조(飛爪)를 쓰는 인물이었다.

이렇듯 삼노는 모두가 한 분야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이곳 섬서성 일대에서만 활약하고 있지만 웬만한 무림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 있었다.

 

조창이 분통이 터지는 듯 버럭 소리쳤다.

[오늘은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군. 낚시를 망친 데다가 일하러 갔던 놈들은 물건마저 잃어버리고 돌아왔으니...]

[원래 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고 했네. 좋지 않은 일은 늘 달아서 생기는 법일세.]

팽덕이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창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몰라서 이러나? 내말은 화가 난단 말일세. 화가!]

[작약 이천근 정도 잃어버린 것은 큰 일이 아니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어쩌면 다른데 있는지도 모르네.]

팽덕의 말이었다.

하진이 팽덕의 말을 받았다.

[다른 데라면?]

조창도 입을 다물고 팽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팽덕은 생각이 깊은 인물이다. 그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경우란 전혀 없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면 그것은 분명히 심각한 것이다.

팽덕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우리가 작약을 취급해온 이래로 이처럼 강도를 만났던 적이 있던가?]

그의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평덕이 말했다.

[작약이 이천근이면 돈으로 꽤 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거금이라고는 할 수 없네. 또한, 당장 무엇으로 바꾸기도 어렵고 양이 많아서 어디 처분하기도 쉽지 않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약을 훔쳤다면 이건 무엇을 뜻하겠는가?]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하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며 음성이 탁하게 흘러나왔다.

[설마하니 우리를 노린단 말인가?]

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밖에는 결론이 나지 않네. 또한 저녁 무렵에 우리가 만났던 두 젊은이도 그일과 무관한 것같지가 않아. 어쩌면 우리를 염탐하기 위해 왔던 자들일 수도 있지.]

[틀림없어. 틀림없이 그놈들은 염탐꾼들일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뺨을 맞고도 그냥 갈리가 있는가?]

조창이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팽덕은 염려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귀빈께서 와 계실 동안 만이라도 좀 조용했으면 좋으련만.....]

석두공은 속으로 말했다.

(성미 못된 영감이 있는 한 원수가 생기지 않을 리 없지.)

그는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았다.

 

문득 석두공은 누군가 장원의 담장을 넘어서 곧장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휘익! 휙휙!

칠흑같이 검은 야행복을 입은 자들이 전각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다. 적게 잡아도 이십 명은 넘을 것같았다. 그들의 등에는 상자같은 것이 얹혀있었다.

(기습(奇襲)이구나!)

석두공은 내심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처마 밑에 납작 붙었다.

쿵쿵쿵!

다가온 그들은 갑자기 등에 지고 있던 상자들을 전각을 향해 던졌다.

파앗!

휙휙휙!

조창과 팽덕, 그리고 하진이 대갈하며 뛰쳐나왔다.

[웬놈들이냐?]

이십 여명의 흑의복면인들은 이미 전각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흑의복면인들 중에서 노란 수실을 드리운 검을 맨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물건을 돌려드리기 위해 왔소.]

번쩍!

그자는 검을 뽑아 상자를 반으로 잘랐다.

잘려진 상자에서 작약이 쏟아졌다.

우루루루...

장원의 일꾼들과 무사들이 달려왔다.

[저 저... ]

그들은 흑의인들을 보고 놀라며 소리쳤다.

[사부님! 강도들입니다!]

육백이 고함쳤다.

조창이 차갑게 응수했다.

[알고 있다.]

그때 팽덕이 나서며 말했다.

[귀하들은 아주 간이 크군. 밖에서 강도를 하고 집까지 쫓아오다니...]

[노인장들을 만나기 전에 선물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오.]

노란수실의 검을 가진 자가 말했다.

그가 말하기는 선물이었으나 실제로는 협박물이란 소리로 들렸다.

[무엇을 노리고 왔는가?]

조창이 눈에 살기를 뛰면서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잔혼각(殘魂閣)에 가입하시오.]

[...!]

[...!]

세 노인은 가슴을 망치로 맞기나 한 듯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잔혼각...

결국 잔혼각의 힘이 이곳까지 뻗어온 것이다.

사십여 명이나 되는 장원의 무사들과 일꾼들도 잔혼각이라는 말에 파랗게 질리며 물러섰다. 잔혼각의 살수라면 그들로서는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하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싸워야겠군.]

뱀의 머리는 되어도 용의 꼬리는 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파앗!

그 순간에 흑의인은 하진의 눈앞으로 쇄도하며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허리를 베어올렸다.

스팟!

하진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의 소매속에서 은빛 손이 솟아나오며 흑의인을 쳐나갔다.

하진의 병기인 비조(飛爪)였다. 쇠로 만든 손모양의 물건에 은사가 달려있어 내공으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무기였다.

!

비조는 주먹으로 변해 흑의인의 검을 쳤다.

흑의인은 원래 반발하려는 그를 단숨에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는 하진의 능력을 제대로 가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격이 실패하자 그가 외쳤다.

[모두 죽여버려라!]

그때 조창이 그의 뒤로 돌아가면서 일장을 내밀었다.

[네놈부터 죽여야겠다.]

[으악!]

흑의인은 조창의 화염장에 격중되어 퍽 고꾸라졌다. 시체로 변해버린 그의 몸위로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흑의인들은 흠칫하며 공격을 하지 못했다.

조창이 소리쳤다.

[장원을 불사르고 산속에 숨는 한이 있어도 잔혼각 따위에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놈들을 모두 죽여버려라.]

그의 서슬 퍼런 명령이 흑의인들이 한곳으로 모여들며 말했다.

[...후회할 것이다.]

[나는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네놈들은 그땐 죽었을 것이다.]

조창이 냉소했다.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후...]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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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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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예기치 못한 殺人

 

 

 

!”

적연흥의 눈이 번뜩였다.

이곳은 북안탕의 깊은 산중.

인적이 닿아 본적이 없는 원시림으로 꽉 들어찬 험지였다.

적연흥의 전신은 무엇 때문인지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전면의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백여 장쯤 되는 거리일까?

한 마리 거구를 지닌 백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백호(白虎)는 호랑이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종자이다.

몸 크기가 보통 호랑이보다 한배반이나 되는 거구를 지닌 것이 보통이며 지극히 영민하면서도 사납다.

그 백호가 적연흥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일진이 좋군. 몇달 동안 찾아 다녀도 발견할 수 없었던 저놈을 산에 들어오자마자 발견하다니……

범인이라면 백호의 모습만 보고도 오금이 저려 사족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연흥은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침착하게 은신한 곳에서 움직이지를 안았다.

이윽고, 백호는 오십여 장 앞으로 다가왔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전통(箭筒)으로 가져갔다.

강전(强箭)을 써야겠군.’

그는 전통에 들어있는 화살 중 굵기가 가장 굵은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이는 특별히 사나운 맹수를 잡기 위해 마련한 화살이다.

화살 끝에 달린 한 치 정도의 날카로운 화살촉을 쓰다듬어본 적연흥은 화살을 강궁(强弓)에 걸었다.

이어, 그는 천천히 힘을 주어 강궁의 시위를 잡아 당겼다.

―― ――

기분 좋은 탄력감이 손끝에 느껴진다.

그는 강궁을 들어 백호의 정수리를 겨누었다.

시위는 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고 그와함께 궁은 반월형으로 굽어져 갔다.

이백보……

백오십보……

백이십보……

적연흥의 이마로 한 방울 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휘르르……!

갑자기 변덕스런 산풍(山風)의 방향이 역류(逆流)하였다.

적연흥의 검미가 꿈틀 하였다.

이런…… 이 중요한 때에……

이제 바람의 방향이 적연흥쪽에서 백호가 오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맹수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에게 이토록 갑작스런 풍향의 역류는 치명적이다.

맹수에게 사냥꾼의 존재를 알려주는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호의 거구가 흠칫 했다.

그와 함께 백호의 호안(虎眼)이 무섭게 부릅떠졌다.

자신의 노리고 있는 자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크르―― !

백호의 입에서 북안탕 전체가 뒤흔들리는 포효성이 터졌다.

재미없군!’

적연흥은 백호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깨닫고 벌떡 일어섰다.

은신해 보아야 소용없음을 잘 아는 때문이다.

―― !

백호의 거구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적연흥의 눈이 번뜩이며 강전의 날카로운 촉이 영민하게 떠오른 백호의 거구를 따라 이동하였다.

―― !

―― !

강전이 대지를 찢으며 허공을 날았다.

―― !

―― !

백호가 날아오는 강전을 발견하고 머리를 트는 순간 강전은 백호의 어깻죽지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 !

백호의 거구가 둔중하게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그러나,

―― !

백호는 뒤미처 용수철 튕겨지듯이 뛰쳐 일어나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대단히 강한 놈이군.’

적연흥은 그 상황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이 사냥꾼이긴 했으나 그는 맹수들을 사랑한다.

힘없이 거꾸러지는 놈은 맹수축에 들지도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손이 신속하게 전통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또 하나의 강전(强箭)이 시위에 매겨졌다.

그사이, 백호는 이미 오십 오보 앞으로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산역을 뒤흔드는 포효성(咆哮聲)!

부릅뜬 호안, 날카로운 송곳니, 일 장은 됨직한 거구.

아무리 수십 년간 사냥을 해온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오금이 저릴 상황이다.

하지만 적연흥은 너무도 침착했다.

무표정한 중에서도 신속히 시위가 당겨졌다.

―― !

―― !

또 하나의 강전이 허공을 갈랐다.

백호와 적연흥 사이의 거리는 삼십여 보.

이번의 강전만큼은 백호라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백호는 참으로 영민했다.

시위 튕겨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몸을 지면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 !

―― !

피보라가 일었다.

강전(强箭)이 백호의 등어림을 스치고 헛되이 멀리로 날아간 것이다.

―― !

지면으로 몸을 떨구었던 백호가 재차 도약했다.

정말 영민한 놈이다.’

적연흥은 감탄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도끼를 사용할 것이냐? 다시 활을 쏠 것이냐?’

이는 어쩌면 생사를 가를 중대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다시 활을 사용하여 실패한다면 목숨을 내걸고 백호와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기왕에 활로 시작한 것, 굳이 도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 !

그의 손이 다시 신속하게 전통을 더듬었다.

―― !

백호는 이미 이십여 보 앞으로 덮쳐 들어오고 있었다.

강궁에 강전이 매겨지고 시위가 크게 당겨졌다.

백호의 거구가 바로 눈앞으로 치솟아 덮쳐 들었다.

―― !

―― !

적연흥의 손이 지체없이 시위를 놓았다.

―― !”

동시에, 그는 활을 집어 던지며 덮쳐드는 백호에 마주쳐 갔다.

화살이 어찌 되었는지는 살필 겨를도 없었다.

최악의 상태로 화살이 빗나갔다는 가정하에서 백호에 마주 덮쳐간 것이다.

파파팟!

백호의 거구와 적연흥의 몸이 맞부딪혔다.

이겼다!’

백호와 맞부딪히는 순간 적연흥은 쾌재를 불렀다.

두 개의 몸이 서로 부딪히자마자 적연흥은 백호의 몸에 생명의 탄력이 없음을 느낀 것이다.

―― !

백호의 거구가 적연흥이 뻗은 일격에 둔중하게 뒤로 넘어갔다.

휴우――

적연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몸을 세웠다.

쓰러진 백호의 체구는 엄청나게 커보였다.

마치 거상(巨象)이 쓰러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설같이 하얀 백호의 복부에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혈흔이 번지고 있다.

마치 소복이 쌓인 백설 위에 빨간 물이 스며들 듯이……

적연흥이 마지막으로 날린 강전은 백호의 복부 깊숙이로 박혀 있었다.

적연흥의 팔 힘이 워낙 강한데다가 거리가 가까웠던 탓으로 강전은 반 이상이 백호의 복부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이제껏 잡아본 그 어떤 놈보다도 훌륭한 놈이다. 족히 천 냥 이상 나가겠는걸……. 당분간 어머님 공양해드릴 걱정은없게 되었구나.’

적연흥은 집어던진 강궁을 회수하여 전통에 집어넣었다.

!”

이어 그는 백호의 몸에 팔을 뻗쳐 기합을 질렀다.

그러자, 수백근은 나갈 백호의 거구가 번쩍 들려졌다.

그는 백호의 거구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 그는 맑은 계류가 흐르는 옥계에 닿았다.

―― !

백호의 거구를 바위 위에 내려놓은 그는 계류에 손을 담그었다.

시원하군!”

한 차례 물을 끼얹어 땀을 씻은 그는 품속에서 날카로운 비수(匕首)를 꺼내들었다.

이어, 그는 능숙한 솜씨로 백호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귀한 백호의 가죽이라도 잘못하여 흠을 내면 가치가 반감한다.

그는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면서도 신속하게 비수를 움직였다.

반각 후, 드디어 백호의 가죽이 벗겨졌다.

그는 백호의 가죽을 물에 담그어 피가 빠지도록 두고 백호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는 맹수의 가죽을 얻는 것으로 만족했다.

맹수를 잡으면서도 자유롭게 사는 맹수를 사랑하는 그는 맹수의 고기만큼은 먹질 않았다.

보면 볼 수록 훌륭하군.”

백호의 가죽을 물에서 꺼내어 바위에 펼쳐 널며 적연흥은 감탄했다.

백호의 가죽은 보통의 호피보다 배나 클뿐 아니라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털로 뒤덮여 있어 지극히 훌륭했다.

팔기 아까운 물건이군. 어머님이 사용하시는 황호피(黃虎皮)와 바꾸어 어머님이 사용하시도록 해야겠군.”

적연흥은 백호피의 몇 군데를 가다듬은 뒤 한쪽 바위에 걸터 앉았다.

이미 태양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적연흥은 흘깃 올려다보았다.

백호를 만나는 통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군. 자칫하면 신무애를 살펴 보지 못할지도……

적연흥은 검미를 슬쩍 모으다가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에는 약초캐는 호미 하나와 연잎으로 싼 건량이 들어 있었다.

적연흥은 건량을 꺼내 천천히 먹으며 발밑의 계류를 바라 보았다.

, 서둘러야겠구나.”

반각 후, 적연흥은 백호의 가죽이 어느정도 말랐으므로 걸을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자리에서 일어서던 적연흥은 흠칫 했다.

예기(銳氣)!

섬칫한 예기를 느낀 것이다.

본시, 맹수사냥에 몰두해온 적연흥인지라 누구보다도 민감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주위 환경의 조그마한 변화도 극히 민감하게 감지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맹수사냥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능력 때문에 적연흥은 몇 번인가 맹수와 부딪히고도 결정적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이순간 적연흥은 자기 주위에 심상치 않은 예기(銳氣)가 번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맹수가 풍기는 원시적인 살기같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흉폭함은 맹수보다 덜하나 무엇인가 섬칫한 느낌을 주는 그런 예기였다.

적연흥은 쾌첩하게 몸을 돌렸다.

일순, 적연흥의 검미가 찡긋 하였다.

어느 사이엔가?

“...!”

적연흥으로부터 오장여 떨어진 곳에 한 명의 인물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시커먼 털로 뒤덮이고 무척이나 험상궂게 생긴 자였다.

그자도 적연흥이 의외로 아직 치기를 못다 벗은 소년임을 알고 흠칫 했다.

이내 그자의 입가에 음악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흐…… 저놈이 어떻게 저런 희귀한 백호의 가죽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나 악도부(惡屠夫)가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하겠는걸.’

그자는 탐욕스런 눈길로 바위 위에 널린 백호의 가죽을 쓸어 보았다.

백호의 가죽은 좀체 구하기 힘든 귀중한 것으로 부르는 것이 값인 물건이다.

그자는 백호의 가죽을 보자 걷잡을수 없는 탐욕이 솟았던 것이다.

흐흐…… 본래 보물 때문에 이곳 북안탕에 왔으나, 천하에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몰려 왔으니 내차지가 되기는 힘들다. 저 어린 놈의 백호피나 빼앗아 실속 차려야겠다.’

그자 악도부는 무림에서도 이름난 망나니였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잔악한 이를 데 없는 간교하고 음악한 자였다.

반반한 여인들을 보면 처녀이건 유부녀이건 가리지 않고 범하고, 마음에 드는 기물(奇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무림의 기생충 같은 자였다.

그자는 북안탕에 광세의 영물이 출현한다는 소문을 듣고 북안탕에 왔다가 적연흥이 잡아놓은 백호의 가죽을 보자 그 못된 버릇이 동한 것이다.

그자는 음충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섰다.

무림인인 모양이군. 결코 심성이 제대로 박힌 자는 아니군.’

적연흥의 봉목에 냉기가 흘렀다.

원시적이긴 하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영민하게 알아내는 능력이 적연흥에게 있었다.

귀하, 소생에게 용무가 있으시오?”

적연흥이 냉막하게 말했다.

엇 이놈 봐라. 산골 촌놈같지 않게 뻑뻑한걸……

악도부는 흠칫 했다.

그자도 무림에서 눈치보며 지금껏 살아온 인물이다.

본능적으로 적연흥의 일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개가 풍김을 느낀 것이다.

아니, 그자가 지금껏 보아오지 못한 기개를 적연흥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악도부는 적연흥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음악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봐, 자네 백호피를 내게 팔지 않겠는가?”

그자는 영악하게 적연흥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하오. 이것은 팔 물건이 아니외다.”

적연흥은 냉막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백호피를 걷기 시작하였다.

악도부의 눈길이 악독하게 번뜩였다.

흐흐흐……!”

그자는 음악하게 웃으며 몸을 날려 적연흥앞으로 날아내렸다.

적연흥의 검미가 꿈틀 했다.

악도부가 백호피의 한끝을 밟고 섰던 것이다.

적연흥은 몸을 일으키며 냉막한 시선으로 그자를 바라보았다.

적연흥의 눈길을 받은 악도부는 흠칫 하다가 험악하게 웃었다.

흐흐…… 촌놈아, 네놈이 바라보면 어쩌겠단 말이냐? 감히본 악도부께서 백호피를 사주겠다는데 거절하다니……

그자는 한 술 더떠서 아예 백호피 위로 올라섰다.

내려서시오!”

적연흥이 버럭 일갈을 질렀다.

그의 일갈은 마치 맹호의 포효같이 우렁찼다.

악도부는 흉흉한 살기를 띄우며 음산하게 말했다.

본 악도부께서 사주시겠다면 네놈에게는 무상의 영광이거늘…… 감히 거역하다니…… 흐흐…… 이제는 본인이 생각을 바꾸었다. 목숨이 아까우면 순순히 백호피를 놓고 사라져랏!”

적연흥은 내심 대노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냉랭한 신색을 유지하며 침중히 입을 열었다.

억지 쓰지 마시오. 더 이상 얼굴 붉히기 싫으니 물러가시오!”

적연흥은 백호피를 잡아 당겼다.

흐흐……

악도부도 음소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적연흥의 검미가 꿈틀 했다.

비키시오!”

적연흥이 버럭 일갈과 함께 백호피를 뒤집었다.

!”

악도부는 기겁을 했다.

적연흥의 손힘이 상상외로 막강하여 악도부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 이놈아. 촌놈이……

악도부의 얼굴이 썩은 돼지 간빛으로 변했다.

적연흥은 냉랭히 그자를 바라보며 백호피를 말았다.

이놈! 뒈져랏!”

악도부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장을 후려쳤다.

―― !

한 줄기 강맹한 장풍이 적연흥을 짓쳐 왔다.

!”

적연흥도 더 이상 노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 !

적연흥의 바윗덩이 같은 주먹이 마주 날아갔다.

―― !

먼지가 확 일었다.

!”

악도부는 안색이 홱 변하여 비칠 하며 물러섰다.

!”

적연흥도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 이놈의 주먹이 마치 돌덩이 같다니……

악도부는 경악했다.

사실, 적연흥의 주먹은 거웅(巨熊)도 일격에 쓰러뜨린 적이 있는 강한 것이었다.

악도부가 비록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정면으로 부딪히자 적연흥의 신력에 밀린 것이다.

이놈!”

악도부는 길길이 날뛰었다.

―― !

그자는 메고 있던 귀두도를 빼들고 적연흥에게 덮쳐들었다.

쐐애―― !

귀두도가 허공을 가르며 적연흥의 미간을 향해 날아 들었다.

!”

적연흥도 지체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 ! ―― !

불꽃이 튀었다.

!”

악도부는 호구가 찌르르 울림을 느끼고 안색이 홱 변했다.

맹수를 잡던 적연흥의 손도끼는 정확하고도 강했다.

이놈! 죽어랏!”

악도부는 흠칫 하다가 재차 미친 듯 귀두도를 휘둘렀다.

―― ――

―― ―― !

그자의 도세는 신랄하고 악독했다.

!”

적연흥은 안색이 대변했다.

그가 상대한 것은 속임수를 모르는 맹수들이다.

비록 강하기는 하지만 직선적인 맹수들을 상대하던 적연흥이었다.

사방을 뒤덮으면서 덮쳐드는 도세를 대하자 적연흥은 일시에 당황하였다.

―― !

적연흥은 다급히 도끼를 휘둘러 도세를 막아갔다.

―― !

―― !”

그러나, 어느 한순간 적연흥은 가슴이 화끈함을 느끼고 신음을 토했다.

어느 틈엔가 악도부의 귀두도가 파고 들어온 것이다.

―― !

적연흥은 가슴을 누르며 밀려났다.

뜨거운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크흐흐…… 이번엔 목을 잘라주마!”

―― !

귀두도의 도신이 악귀의 호곡성을 끌며 날아들었다.

―― !”

적연흥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

―― !

휘르르――

손을 떠난 도끼가 맹렬하게 악도부의 정면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얍!”

악도부는 다급히 귀두도를 쪼개 내었다.

―― !

귀두도가 부러질 듯이 휘어졌다.

―― !

귀두도에 부딪힌 도끼가 튕겨져 나가 멀리 서 있는 고목에 박혀 들었다.

흐흐…… 이놈! 이제는 네놈을……

득의하며 적연흥을 바라보던 악도부는 흠칫 했다.

어느 틈엔가, 적연흥은 한 손에 강궁(强弓)을 들고 악도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러가시오. 더 이상 덤비면 본인의 화살이 그대의 피를 볼 것이오.”

적연흥의 말에 악도부는 냉소했다.

적연흥은 화살을 재지 않은 채 강궁을 내리고 있었던 것을 본 때문이다.

흐흐…… 네놈이 화살을 쏘기 전에 네놈의 머리를 뽀개주겠다.”

적연흥이 냉갈했다.

모험하지 마시오. 본인의 화살이 더 빠를 것이오.”

악도부의 눈길이 흔들렸다.

비록 화살을 재고 있지는 않지만 적연흥의 침착한 기세에 움찔한 것이다.

그러나 그자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뒈져랏!”

악도부가 악독한 일갈과 함께 귀두도를 쓸어 내었다.

하지만, 그자의 기세가 빠르다고 해도 백호가 덤벼드는 기세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사사삭――

적연흥의 손길이 섬전같이 전통을 더듬었다.

―― !

―― !

악도부가 십보 앞으로 쇄도하는 순간 강전이 쏘아 나갔다.

!”

악도부는 꿈에도 적연흥의 동작이 이토록 빠를 줄은 몰라 기겁을 했다.

――!

그자가 전력으로 휘두른 귀두도가 강전을 잘라 내었다.

이겼다!’

악도부는 요행히 강전을 막아내자 쾌재를 부르며 적연흥에게 쇄도하였다.

그러나 그자가 이보를 움직이기 전에 두번째 강전이 강궁에 매겨졌다.

―― !

악도부가 채 오보를 움직이기 전에 강전이 강궁을 떠났다.

!”

악도부는 기겁을 하며 귀두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 !

―― !”

피가 튀었다.

처절한 비명이 일면서 가슴에 부러진 화살이 박혀 나뒹굴었다.

거리가 너무 가깝고 화살이 날아가는 힘이 강한 탓으로 중간을 잘랐으나 그대로 가슴에 박힌 것이다.

…… …… 내가…… 네놈…… 에게……

악도부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적연흥을 노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

적연흥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가슴을 누르며 주저앉았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평생 사람을 해쳐본 적이 없는 적연흥인지라 악도부의 죽음에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

적연흥은 귀두도에 맞은 상처를 누르며 일어나 악도부의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본인을 원망하지 마시오. 당신 스스로 부른 화이니까.”

적연흥은 악도부의 가슴에 박힌 반도막의 화살을 뽑아내었다.

피가 확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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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 章

 

               우울한 古今第一人 (1)

 

 

 

석상(石像)이 바닥으로 내려와 있었다!

아니 석상이 아닌, 석상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곳에 서서 석상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 대충 차려입은 듯 성의없는 옷차림,

석두공은 그를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언제 왔습니까?]

그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추레한 백의를 입은 사람이 말했다.

[자네들 보다 조금 먼저...]

석두공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먼저 왔다면 자봉과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다 보았다는 말이 아닌가?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석두공과 자봉이 전혀 기척조차 알 수 없었던 이 사람,

그는 자칭 고금제일인인 폭풍무존(暴風武尊)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 흐르듯 폭풍같은 기도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지고 쓸쓸한 고독이 감돌고 있었다.

[사문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어째서 이곳 마중천에는...?]

석두공은 달아오른 얼굴을 빨리 지워버리려는 듯 물었다.

폭풍무존이 간단히 내뱉었다.

[여기가 바로 내 사문이었네.]

석두공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럼 저 석상이 정말로 노선배님...? ]

[아마도 그런 것같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

폭풍무존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석상의 뒤로 걸어왔다.

[이젠 나가세.]

석두공은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폭풍무존의 모습에서 그는 인생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폭풍무존은 삼십대의 젊은이 모습이건만...

(없다. 천신폭풍탑을 만들고 이백 사십 년동안 무저갱 안에서 살면서도 죽지 않겠다고 생의 의지로 불타올랐던 그의 패기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석두공은 사람이 변해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선배님의 석상이 그곳에 서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조사이신 벽천검왕(劈天劍王)의 석상이 서있었다.]

[그럼 조사의 석상을 치우고 노선배님의 석상을 세웠단 말씀이십니까?]

[본좌도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 아니, 우리 은세정검회(恩世正劒會)의 후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곳은 은세정검회였는데 언제부터 마중천이란 게 되었단 말인가?]

폭풍무존의 음성엔 칼로 저미는 듯한 고통이 스며있었다.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버렸어!]

 

× × ×

 

석두공은 출구를 은밀하게 가리운 엄청난 폭포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구당협(瞿唐峽)!]

구당협은 장강의 물줄기가 대파산(大巴山)을 지나면서 급류가 되어 흐르는 곳이었다.

물고기가 이곳까지 오면 흐르는 물살에 배가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험하다.

석두공과 폭풍무존은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 × ×

 

수양버들이 강물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곳에 작은 주점이 있었다.

주위에는 뙤악볕 아래서 낚시를 드리운 태공들이 여럿 보이고 우마차를 끌고 가는 소나 그 소의 고삐를 잡은 농부나 다같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석두공은 주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쉬었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폭풍무존은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강가에 나란히 앉아서 낚시를 드리우던 세 사람의 노옹(老翁) 중의 한사람이 휘두른 낚시바늘이 공교롭게도 폭풍무존의 옷자락에 걸렸다.

그러나,

스슥!

폭풍무존은 낚시바늘을 손가락으로 비벼버렸다.

철사를 구부려 만든 낚시바늘은 쇠부스러기가 변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바늘이 옷에 걸리자마자 가루로 변해 버린 것이다.

노옹은 바늘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다시 물속으로 낚시를 던져 넣었다.

 

주점 안은 네 개의 탁자가 있을 뿐이지만 아주 정갈했다.

석두공은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같은 주인에게 술과 고기를 달라고 했다.

[우리 집에는 비늘달린 고기와 발 달린 고기가 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주인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었다.

석두공이 폭풍무존을 보며 눈으로 의향을 물었다.

하지만 폭풍무존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묵묵히 있기만 했다.

[둘 다.]

석두공이 대답했다.

 

!

폭풍무존은 석두공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잔을 내밀었다.

석두공은 다시 잔을 챘웠다.

하지만 폭풍무존은 게눈 감추듯이 입안에 들여부어버렸다.

석두공이 참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섰다.

[주인!]

[네네네... ]

[큰잔을 주시오. 그리고 술도 더 많이.]

술잔이 네배는 커졌다.

하지만 폭풍무존의 술을 마시는 속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술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석두공과 폭풍무존이 앉은 자리에는 금방 빈 술통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폭풍무존이 폭음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주인은 속으로 금방 넘어가겠구나 했었다.

하지만 빈 술통이 하나 둘 늘어나고 급기야는 아직 익지도 않은 술을 땅에서 파왔을 때 주인은 안절부절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구! 저거 오늘 아무래도 일 치고 말지.)

심각한 폭풍무존의 표정, 그리고 그와 마주 앉아 잔을 채워주고 있는 젊은 석두공...

마셔도 마셔도 술은 취하지 않는다.

성질을 풀려고 술을 마시는 게 보통인데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 성질을 풀 방법은 성질을 부리는 것(?)밖에는 없다

주점의 주인만큼 이같은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과연 주인의 우려는 금방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재수가 없으려니 원... 제기랄! 낚시도 없는 바늘을 드리우고 고기를 잡겠다고 했으니 참내...]

강변에서 낚시를 드리웠던 세 노인이 들어오면서 그 중의 한 사람이 투덜거렸다. 폭풍무존의 옷자락에 겁도 없이 바늘을 걸었던 그 노인이었다.

[낄낄낄... 낚시도 없는 바늘을 드리웠다고? 바늘없는 낚시를 드리운게 아니고?]

다른 노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먼저 말했던 사람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뻔히 보았으면서도 말꼬리를 잡나? 대충 말하면 알아들을 거지...]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이 말했다.

[화풀게, 낚시를 한지 벌써 오십 년이 넘었지만 오늘에야 진짜로 강태공이 되었잖은가?]

[! 나같은 필부야 팔십까지 살지도 못할 건데 무슨 강태공은...]

투덜거리던 사람이 그래도 화가 조금 풀리는지 수그러졌다.

석두공과 폭풍무존이 앉아 있는 탁자의 뒤쪽에 있는 다른 탁자에 앉으며 그 노인이 소리쳤다.

[왕노이! 술을 갖다 주게.]

주인이 뛰쳐 나오며 말했다.

[... 나으리 술이 없습니다.]

[? 저 사람들이 마시는 건 술이 아니고 뭐야?]

!

탁자를 부술 듯 세차게 두드리며 노인이 일어섰다.

주인이 쩔쩔 매면서 말했다.

[나으리! 정말 현명하십니다. 실은 바로 저 술 때문에 나으리께서 마실 술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집에서 마지막 술입지요 저게...]

[당장 이리로 가져오시오. 아직 뜯지 않았으니 우리가 마시면 될 것 아니오.]

그 낚시꾼은 말하면서 털썩 앉았다. 주인이 자신의 말대로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였다.

그에게선 투덜거릴 때와는 또 다른 위엄이 우러나왔다.

하지만 주인은 손을 비비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가뜩이나 분위기를 잡고있는 폭풍무존과 석두공의 면전에서 술통을 들고 뒤쪽의 탁자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낚시꾼의 신분이 범상치 않은 듯 주인은 손바닥만 서로 비빌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난 노인을 달랬던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말했다.

[그럼 국수나 말아주게. ]

[아이구! 나으리 감사합니다요.]

주인이 허리를 꺾으며 절하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심술기가 있는 화났던 노인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주룩주룩 문지르기 시작했다.

스륵스륵!

탁자의 한쪽이 평평하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대패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석두공과 폭풍무존에 대한 은근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석두공에게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석두공은 술을 조금 마시기는 했으나 주변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다. 저 노인들이 이분을 자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석두공은 속이 타는 것같았다. 만약에 그들이 폭풍무존을 건드려서 폭풍무존이 분노하게 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석두공의 속을 모르는 노인은 이제 대패밥같은 깎여진 나무를 훅 하고 불어보냈다.

휘리리리리...

석두공은 날아드는 대패밥을 안주를 집는 척하면서 소매로 막았다.

노인은 석두공이 대패밥을 막는 것을 보고 콧웃음을 쳤다.

[젊은 놈이 제법 주먹질을 하는 모양이군. ]

[어허! 이사람!]

다른 노인이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탕탕탕!

노인이 탁자를 세게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내입으로 말도 내 맘대로 못하는가?]

공력을 실어서 탁자를 두드리는 바람에 바닥이 울렸고 앞쪽에 있는 석두공과 폭풍무존의 탁자도 덩달아서 진동했다.

술잔도 튀어 올랐다.

그러나 석두공도 폭풍무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술잔을 받아서 입으로 가져가버렸다.

노인들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폭풍무존과 석두공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때 그들의 귀로 석두공의 회성전음(廻聲傳音)이 들려왔다.

[화를 자초하지 마십시오. 저와 함께 있는 이분은 어르신들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 무슨 미친 소리! 그럼 반노환동(返老換童)이라도 했단 말인가?]

참으려던 노인이 그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석두공은 크게 당황하여 폭풍무존을 보았다.

하지만 폭풍무존은 듣지도 못한 듯 술잔만 기울였다.

(휴우...)

석두공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밖에서 한명의 건장한 젊은이가 들어오며 노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무슨 일이십니까?]

[글쎄 저놈이... ]

노인은 화가 난김이라 폭풍무존을 향해서 삿대질을 했다.

순간,

!

노인의 제자가 다짜고짜 폭풍무존에게 다가가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쨍그랑!

석두공은 너무 놀라서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노인들도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젊은이가 그처럼 성급하게 행동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젊은이가 소리쳤다.

[사부님께 무례한 자는 본 화염장(火焰掌) 육백(陸白)이 용서하지 않는다.]

!

폭풍무존이 술잔을 놓고 일어섰다.

석두공은 주먹에 땀을 쥐며 말했다.

[사부...]

[사부? 내 무공을 배웠으니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

폭풍무존의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폭풍무존은 아직 삼십이 되지 않은 듯이 보이며 오관은 반듯하고 몸은 건장하다. 석두공과 함께 있으면 형님과 동생 정도로 생각되는 정도이다.

폭풍무존은 등을 돌리고 나가며 말했다.

[가자!]

[...!]

[...?]

석두공은 일장의 피바람이 몰아치리라 생각했었다.

한데 폭풍무존이 처량한듯 말하며 주점을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석두공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의 가슴을 망치로 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 사부...]

먼저는 폭풍무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부른 사부였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감복하여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폭풍무존을 뒤쫓아 나갔다.

그때 주인이 주방에서 소리쳤다.

[공자님! 술값을 주셔야지요.]

[저런 파렴치한 놈들은 혼을 내줘야 하오. 내가 받아주겠소.]

화염장 육백이 도망치듯 나가는 폭풍무존과 석두공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무례하지마라!]

노인 중의 한사람이 외쳤다.

하지만 성질 급한 육백의 손은 벌써 폭풍무존의 가슴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석두공은 육백의 손이 다시 폭풍무존의 몸에 닿을 새라 주머니를 던지며 말했다.

[술값은 여기 있소.]

주머니가 육백의 손바닥을 쳤다.

[!]

육백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두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실제로 손의 뼈가 깨어져버린 것이었다.

휙휙휙!

노인들이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상처가 심하냐?]

[, 이자가 암습을...]

육백이 다른 손으로 석두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두공은 속에서 불덩어리같은 것이 치밀어올랐다.

(암습은 누가 했는데...)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폭풍무존이 다시 걸어가며 재촉했다.

[어서 가자.]

석두공은 주먹을 불끈 쥐고 세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주먹을 내리고 폭풍무존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폭풍무존의 등에는 짙은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실수를 한 것같네.]

강을 따라 황혼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노인이 탄식을 했다.

[...!]

[...!]

[범상한 자가 결코 아닐세. 무슨 사연으로 술을 그처럼 마시는 지는 몰라도 마음이 큰 사람임에 틀림없네.]

[겨우 암습 따위나 하는 자들...]

육백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두 노인이 그를 쏘아보았다.

육백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육백의 사부인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모두 내가 책임지겠네.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목숨으로 책임지면 될 게 아닌가?]

 

× × ×

 

강변의 단애위에 노을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폭풍무존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장엄하기 조차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단애는 오십 장 정도의 높이고 단애의 중간 중간에는 물새들이 집을 틀고 있었다. 둥지로 돌아오는 새들의 날개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폭풍무존은 단애위로 올라갔다.

무협(巫峽)을 지나온 장강의 물살은 여전히 급했지만 표면에서는 잔잔함이 보였다.

폭풍무존이 석두공에게 물었다.

[자고 가겠느냐 아니면 그냥 떠나겠느냐?]

[사부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자고 가도록 해라.]

폭풍무존은 그렇게 말하고는 단애의 뒤쪽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자고 가도록 해라? 그렇다면 당신은 가지 않겠다는 말씀...!)

! !

폭풍무존은 숲에서 나무를 꺾고 있었다. 움막을 만들 생각인 모양이었다.

석두공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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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北雁蕩少年

 

 

 

북안탕(北雁蕩),

절강성(浙江省)의 동북단에 자리한 험산(險山)이다.

비록 중원오악과 같이 이름난 명산은 못되지만 산을 아는 사람이면 북안탕이 결코 중원오악에 못하지 않음을 안다.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다.

그러나 마치 창날을 거꾸로 박아 놓은 듯한 첨봉(尖峯)이 연이어져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창끝같은 연봉이 성처럼 둘러 서 있는가하면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는 천인단애가 나타나곤 한다.

북안탕의 골골이 들어차 있는 원시림의 숲은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지쳐 죽을 때까지 헤매도 빠져 나오지 못하기 십상이다.

아직도 전인미답의 험지가 산재해 있는 곳이 북안탕이다.

자연히 북안탕의 심중(深中)에는 세속에서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독물(毒物) 괴수(怪獸)들이 잔생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기사회생의 효능이 있는 선약기초들이 자라고 있기도 하다.

벌려져 있는 곳곳마다 태고이래의 신비가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북안탕이다.

그때문에 선약기초를 찾는 무림인들이나 기상천외의 독물들을 구하려는 독문(毒門)의 괴인들, 그리고 채자(採者)들의 발길이 가끔 북안탕의 절지에 닿곤 한다.

 

북안탕(北雁蕩)의 아침,

자연의 순환은 한시도 쉬임이 없는 법이다.

찬연한 태양의 광휘가 북안탕 전체를 산뜻하게 비추었다.

여명에 쫓겨 곳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의 잔영들이 찬란한 광휘에 산산이 흩어져 나갔다.

이곳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봉이 병풍같이 둘러싸고 있는 넓은 분지다.

분지에는 납작한 토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토막의 낮은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이 빈한해 뵈는 산촌이지만 더 할 수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뵈는 산촌(山村)이다.

아침을 짓느라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토막들 사이의 공터에는 아침잠 없는 산골아이들이 모여 무엇인가 놀이를 하고 있다.

, 애들아 연홍이 형이다.”

동무들과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문득 허리를 펴며 말했다.

어디……

코흘리개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마을의 앞으로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가 있었다.

그 옥계의 옆에는 오륙 장 높이의 커다란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에 의지하여 한 채의 초옥이 서 있었다.

지금, 초옥 옆의 바위 위에 한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의연히 바위 위에 몸을 세우고 산봉 위로 떠오른 태양을 직시하고 있는 인물, 일견하여 범상해 보지 않는 인물이다.

햇빛에 그을려 피부가 구리빛으로 빛나고 있으나 그 용모는 이런 궁벽한 곳이 어울리지 않는 청년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청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신장이 육척 가까이 되고 가슴이 떡 벌어져 건장한 청년과같이 보이지만 그는 확실히 아직 완전히 치기를 다 못벗은 소년이었다.

십 육칠 세쯤 되었을까?

먹을 듬뿍 찍어 놓은 듯한 검미(劍眉), 서글서글하면서도 무엇인가 깊이 침잠해 있는 눈매,

더할 수 없이 곧은 코의 선과 그 밑으로 자리한 굳게 다문 입술,

마치 태산이 찍어 누른 듯이 굳게 물려 있는 두 입술은 천년세월이 지나도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오연히 태양을 직시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웅비의 때를 기다리며 날개를 접고 있는 대붕(大鵬)의 모습과도 같았다.

때를 기다리는 고독한 대붕(大鵬),

소년은, 이 작은 산골의 우상이었다.

특히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에게 있어서 이 거구의 소년은 신과같은 존재였다.

소년의 이름은 적연흥(赤燕興), 그의 아버지는 전직고관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적대인(赤大人)하면, 천하가 알아주는 청백리로 많은 백성들에게 흠모를 받았던 인물이다.

한데, 어느 해인가 신병(身病)이 심하게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북안탕 주위에 있는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나날이 병이 중해져가고 본시 청렴한 인물로 관직에 있는 동안 재물을 모아본 적이 없는 적대인인지라 제대로 약을 써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적부인은 남편과 어린 아들을 이끌고 이곳 북안탕의 깊은 산촌으로 들어왔다.

본시 의가(醫家) 출신인 적부인은 북안탕 깊은 곳에 선약기초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병을 고칠만한 선약을 찾기 위해 이곳 북안탕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신병을 고칠 일념으로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북안탕을 뒤지고 다녔다.

규중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 보지 못했던 적부인에게는 실로 어렵디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 어려움을 남편의 병을 고칠 일념으로 감수하며 선약기초를 찾아 다녔다.

하나, 선약기초(仙藥奇草)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찾아질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뜻을 이루기도 전에 적대인은 눈을 감고 말았다.

몇년 동안 전신이 만신창이 되도록 북안탕의 험봉을 헤매며 남편의 병을 고치려 했던 부인은 적대인이 이승을 떠나자 허탈감과 심화로 몸져 눕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번에는 어린 소년 적연흥이 북안탕을 헤매어야 했다.

쓰러진 어머니의 병을 고칠 약초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보낸 세월이 오 년이었던가 육 년이었던가?

소년 적연흥은 보통 소년들보다 몇 배나 빨리 자랐다.

가세가 빈한한 탓으로 병드신 어머니 봉양하기도 힘들지경이었다.

자연, 그는 주린 배를 야생의 과일이나 북안탕에 자생하는 약초들로 채워야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쓰디쓴 약초들을 본의 아니게 장복하게 되었고……

그것이 득이 되어 소년은 누구보다도 건장하게 자랐고 어른들도 당하지 못할 신력(神力)을 지니게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산을 타기 시작한 소년 적연흥의 발걸음은 북안탕의 험산준령을 평지같이 내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년 전이었다.

어느날, 한 마리 맹호가 산촌으로 내려와 아이를 물어가는 호환(虎患)이 났었다.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누구하나 맹호를 쫓을 생각도 못할 때였다.

소년 적연흥이 분연히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맹호를 쫓아갔다.

마을사람들이 만류했으나 적연흥은 아무 말없이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맹호를 쫓았다.

적부인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하루를 보냈을 때였다.

석양을 등지고 피투성이가 된 적연흥이 돌아왔다.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정수리가 갈라져 죽은 맹호를 끌고……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른 열 명이 상대해도 잡기 힘든 맹호를 소년 혼자 잡은 것이었다.

소년은 맹호를 잡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이후로, 소년은 마을의 자랑이었으며 수호신적인 인물이 되었다.

또한, 소년은 어머니를 보다 잘 공양할 법을 깨달았다.

호랑이의 가죽을 벗겨 산 밑의 시진에 내다 팔아 어머니께 오랜만에 성찬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사냥에 몰두했다.

그의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말렸으나 그는 미소 지을뿐 사냥을 그만 두지 않았다.

그 후 일년, 몇 차례 맹수를 잡다가 크게 다치기도 했으나 이제 그는 한 명의 어엿한 사냥꾼이 되었다.

그것도 보통 사냥꾼이 아닌 북안탕 제일의 맹수 사냥꾼이 된 것이다.

그의 힘은 능히 거웅(巨熊)의 허리를 꺾어 죽일만하고 그의 발걸음은 맹호를 따라가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활솜씨는 백보 밖의 움직이는 표적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을 뿐더러 즐겨 쓰는 한 자루 도끼만 손에 들면 어떤 맹수라도 때려 누일 수 있었다.

그런 소년 적연흥인지라 마을의 아이들과 소년들은 그를 마치 산신(山神)과 같이 떠받들었다.

하나, 그는 언제나 고독했다.

창공을 비상할 대붕, 그에게 이곳 북안탕은 너무나 좁았던 것이다.

보시 과묵한 그는 더욱더 말수가 적어져 갔다.

비록 그가 그러한 사실을 내색치는 않았으나 적부인은 아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부인은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

적연흥은 길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돌아섰다.

흥아……

문득, 초옥 안에서 병색이 완연한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 적연흥은 급히 바위를 뛰어 내렸다.

―― !

그의 몸은 마치 한 마리 비호가 날아내리듯 가볍게 바위위에서 뛰어 내렸다.

어머님, 기침하시었사옵니까?”

적연흥은 정중한 어조로 말을하고 방문을 여었다.

약초 내음이 확 풍겼다.

초옥의 방안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방안의 천정에는 약초뭉치가 주렁주렁 걸려 있으며 방의 한쪽 벽에는 수백 권의 서적들이 쌓여 있었다.

지금, 방문의 맞은편에는 한 좌의 침상이 놓여 있었다.

침상은 손으로 정성들여 깎아 만든 것이었고 침상 위에는 호피가 깔려 있었다.

그 침상 위에 한 명의 중년여인이 힘겨운 듯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비록 병색이 완연하기는 하였으나 본 바탕은 은은한 기풍을 지닌 미부인이었다.

일견하여 적연흥의 단정한 용모는 중년부인과 매우 흡사하였다.

오냐, 네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자꾸나.”

부인이 힘들여 몸을 일으켜 앉자 적연흥은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 부인을 부축하였다.

두 사람은 방문을 나섰다.

 

맑은 아침이다.

적부인은 적연흥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두모자는 초옥 뒤의 둔덕 위로 올라섰다.

둔덕 위의 양지쪽, 잘 다듬어진 하나의 봉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첩이 왔사옵니다.”

적부인은 봉분 앞에 힘없이 앉았다.

이 봉분이 적연흥의 부친인 적대인이 묻혀 있는 것이었다.

적부인은 서글픈 눈길로 봉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길이 힘겹게 봉분을 쓸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적연흥은 공손히 시립한 채로 묵묵히 바라다 보았다.

두 모자는 한동안 굳은 듯이 묘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적부인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흥아, 오늘도 사냥을 나갈 것이냐?”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은 신무애(神霧崖) 쪽으로 가볼 생각이옵니다. 그곳은 늘 음한지기가 깔려 있으니 어쩌면 어머님의 병환을 치료할 수 있는 담석화(曇石花)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적부인의 눈가에 안스런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에미 때문에 어린 네가 이 고생을 하니…… 이 모진 목숨 빨리 끊어져 네 아버님께 갔으면 좋겠구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부디 오래오래 사셔야 하옵니다.”

적연흥의 말에 적부인은 아들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아들의 얼굴에서 이미 땅에 묻힌 남편의 영상을 찾으려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휴우……

적부인은 이윽고 시선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내려 가시옵소서. 가을인지라 아침바람은 차옵니다.”

적연흥은 어머니의 가냘픈 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젖먹이 때에는 온 천지같이 넓고 이세상 무엇보다도 커보이던 어머니지만 지금은 너무나 가냘프고 작아 보였다.

특히 병마로 시달려 앙상한 적부인은 애처로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

적연흥은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부축하여 초옥으로 들어갔다.

 

일각 후, 적연흥은 전통(箭筒)을 짊어지며 초옥을 나섰다.

해는 이미 중천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머님, 다녀 오겠사옵니다.”

적연흥은 열린 방문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하니라.”

적부인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연흥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초옥을 떠났다.

그의 왼쪽 허리에는 반자 정도의 폭이 좁고 날이 날카롭게 선 손도끼 한 자루가 걸려 있고 오른쪽 허리에는 약초자루가 걸려 있었다.

허허, 오늘도 사냥을 나가시는구먼. 호랑이라도 한 마리 잡아 오시게.”

마을을 지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적연흥에게 말을 건넸다.

적연흥은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이 잠깐만.”

적연흥이 막 마을을 걸어 나가려는데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적연흥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 한 명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냥꾼이었다.

그 젊은 사냥꾼은 헐떡이며 적연흥에게 다가왔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구씨 청년은 숨을 가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 줄 일이 있네. 요 근래 이 주위에 여러 명의 괴인들이 출몰하고 있어.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펄펄 나는 재주들을 지닌 인물들로서 성격들이 포악하니 주의하게.”

구씨 청년의 말을 들으며 적연흥의 검미가 찡긋 하였다.

무림인들이 북안탕에 무슨 일로 나타난 것일까?’

그는 이어 구씨청년에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구씨청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마을 주위에 나타났던 괴인들만도 이십여 인이 넘네.”

이십여 명이 넘는다고요?”

그러네……

적연흥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려서 병든 아버지와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며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다.

그 때문에 잘은 모르나 무림(武林)이라는 집단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무림인들이 적잖이 북안탕에 모인 모양이구나.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아뭏든 주의하게. 그들과 충돌하는 일 없도록 하여야 하네. 그런 괴인들과 상대해서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구씨청년의 말에 적연흥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구씨청년은 사람 좋게 씨익 웃었다.

고맙기는…… , 이만 가네.”

구씨청년은 시내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잠시 자리에 서서 구씨청년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적연흥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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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력>

 

1983년 7월, 정확히 37년 전에 전5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와룡강이란 필명으로 출간한 3번째 작품이기도 하지요.

(데뷔작이 무림군웅보, 두 번째 작품이 천세무림기보입니다.)

훗날 <나한대협>으로 확장증보판이 발간되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序 章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과 도룡천황(屠龍天皇)

 

 

 

――복종하라!

불연(不然)이면, 혈령(血靈)을 만나리라!――

 

일성대갈(一聲大喝)이 천지(天地)를 뒤흔든다.

한 명의 효웅(梟雄)이 몸을 일으켰다.

육 척 거구, 검은 장포, 구만 리 장천을 꿰뚫는 무서운 안광, 그는 단신(單身)이었다.

아니, 단신이라 할 수 없었다.

한 자루 검이 한시도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으므로――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선홍(鮮紅)의 검신을 지닌……

 

<천마검(天魔劍) 혈령(血靈)>

 

검명(劍名)이다.

천하가 떨었다.

일시에 중원뿐 아니라 대막(大漠), 새외(塞外), 관외(關外), 안남(安南), 심지어 천축(天竺)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의 추종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엎드려 머리를 대지에 처박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오오, 조종(祖宗)이시여. 영원한 마의 조종이시여――

 

 

그 이름,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마도(魔道)에 있어서 전설같이 내려오는 절대마종(絶代魔宗).

본래 마도에는 한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혈령(血靈)이 주인을 찾으리라. 그가 바로 조종(祖宗)이시니라――

 

혈령(血靈)!

이는 한 자루 검의 이름이다.

끔찍하고도 처절한 비사를 지닌 마도 제일기보(第一奇寶).

이는 스스로 영성(靈性)을 지녀 주인을 찾는다고 전한다.

천마혈령검(天魔血靈劍)이라 불리는 이 마검을 다스리는 자!

그가 바로 영원한 마의 조종인 절대마종이 된다는 것이다.

한데, 천여 년 간 잠들었던 천마혈령검이 나타난 것이다.

천마혈령검이 주인으로 택한 인물,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강무(康武)!

 

바로 이 인물!

수천 년 무림사에서 항시 정도(正道)에 패하여 짓눌려 있던 마()를 부활시킨 인물,

 

――으하핫! ()란 곧 도()이며 본 조종은 곧 법()이니라. 무릎을 꿇어라. 아니면, 혈령(血靈)의 제물로 만드리라.――

 

그의 일성에 중원이 몸서리를 쳤다.

삽시에 그의 휘하로 수만 명의 마도고수들이 모여들었다.

 

――십만지존충사(十萬至尊忠士),

 

천마대조종 수하로 모여든 마인들이 스스로 칭한 이름이다.

광풍노도!

중원뿐 아니라, 천하가 일시에 마풍에 휩쓸려 들어갔다.

당시는 중원 무림 최대의 번영기,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최강의 고수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마의 세력은 너무나 가공했다.

천마혈령검(天魔血靈劍)의 혈기가 천지를 뒤덮으니 등천할 무공을 지녔다던 천하의 고수들이 짚단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하늘이시여! 이대로…… 이대로 정도의 정기가 허물어져야 하오니까?

 

태산 관일봉(觀日峯)에서의 최후결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정파의 최고기인들.

 

우내사존(宇內四尊)!

 

그들은 치욕스런 도주를 하며 피눈물을 뿌렸다.

 

――으하하, 그대들의 목숨만은 거두지 않겠다. 이는 본 조종이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룬 기념으로 베푸는 단 한 번의 은혜이니라――

 

달아나는 우내사존을 바라보며 천마대조종은 천지를 뒤흔드는 광소를 터뜨렸다.

치욕(恥辱)!

무인으로서, 그것도 백년 내 최고기인들이라던 우내사존(宇內四尊)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스런 도주였다.

그러나, 그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만천하의 조롱을 짊어진 채 관일봉을 떠났다.

오로지 회천대업(回天大業)을 꿈꾸며……

그리고, 천하는 혈령(血靈)의 혈기(血氣) 아래 굴복하였다.

 

마도천하(魔道天下)!

 

마도인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영광이었고 반면 정도인(正道人)들에게는 죽음의 암흑기였다.

일말의 서광도 비치지 않는……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정파기인들이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돌연, 관일봉에서 천마대조종의 광소를 등에하고 도주했던 네 명의 고수,

우내사존(宇內四尊)!

그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노안은 비장하게 빛나고, 그들은 한 명의 인물 뒤에 시립하고 있었다.

그 인물, 붉은 장포, 학발동안, 그리고, 그의 한 손에는 길이 일 장이나 되는 한 폭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도룡천황(屠龍天皇)>

 

도룡천황(屠龍天皇)이시다!

몸을 숨기고 칼을 갈던 정파기인, 고수들이 환성을 터뜨렸다.

마치, 천마대조종이 처음 강호에 나타났을 때 마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룡천황(屠龍天皇)!

그는 전설적 인물이다.

알려진 바로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죽었어야할 인물이다.

한데, 이미 우화등선(羽化登仙)했을 것이라 믿어졌던 전설의 전대기인이 무림에 나온 것이다.

이는 모두, 우내사존(宇內四尊)이 십년 동안 뼈를 깎는 고생으로 얻은 결과였다.

관일봉에서 패한 후 우내사존은 천마대조종을 제어할 인물은 단 한명, 전설상의 고금제일비문 천황문(天皇門) 문주인 도룡천황(屠龍天皇) 뿐이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날로 우내사존은 도룡천황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천하를 주유한 끝에 도룡천황의 은거지를 찾아내고 간곡한 청을 넣어 도룡천황을 무림으로 불러 내었던 것이다.

 

――아이야! 노부와 일전을 치를 자신이 있느냐?――

 

도룡천황이 천마대조종을 불렀다.

거절할 천마대조종이 아니었다.

마침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전이 벌어졌다.

한쪽은 최초의 마도조종사의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다른 한쪽은 천마대조종보다 다섯 배나 더 나이가 많으며 고금제일비문 천황문(天皇門)의 주인 도룡천황(屠龍天皇),

대격전.

양인의 절대고수는 십주십야를 쉬지않고 격돌했다.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그들의 격전이 있었던 태산 관일봉이 그후 백 자(百尺)나 낮아졌다던가?

드디어, 십일의 격전 끝에 결판이 났다.

 

――크하하…… 본 조종이 패했오! 그러나, 본 조종은 이번의 패배에 설복할 수 없오.

십년 후, 십년 후에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겠오――

 

!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그가……

영원히 패하지 않을 것으로 믿어졌던 그가 패했다.

비록, 무엇인가 지극히 원통한 안색이었으나 천마대조종은 패한 것이다.

―― ―― !

천마혈령검이 주인의 심정을 안듯 통한의 검명(劍鳴)을 울렸다.

휘르르……

천마대조종은 사라졌다.

도룡천황은 한 손에 쥔 도룡천황혈기(屠龍天皇血旗)를 늘어뜨린 채로 망연히 사라지는 천마대조종을 바라 보았다.

결국, 이렇게 하여 다시 천하는 마의 기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중인들이 환호하였으나 도룡천황은 쓸쓸한 표정으로 태산을 떠났다.

그후,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천마대조종은 도룡천황을 모종의 장소로 불러 들여 도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도룡천황(屠龍天皇)……

모든 것이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양대 거두가 사라진 무림에서는 마도와 정파의 대혈전이 벌어졌으며 마침내 정파가 승리하여 마도는 몰락하고 말았다.

세월은 바람과 같은 것.

쉬임없이 흘러 지나갔다.

십년……

백년……

이백 년……

드디어,

삼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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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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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무려 37년 전에 전 5권으로 출간한 박스본 무협지입니다.

한자 제목은 <魔宗天皇譜>

<보(譜)>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이며 와룡강의 첫 히트작이기도 합니다.

그 전에 출간한 <무림군웅보>, <천세무림기보> 보다 판매량이 압도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득한 37년 전의 작품이라 실소가 나오는 구성과 문장이 도처에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추억 삼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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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마음을 가두는 기이한 성형진 (2)

 

 

땅속이 분명하지만 이곳의 모든 것은 마치 해가 뜨기 전의 여명처럼 훤하다.

복도와 대전의 천정 부근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형광(螢光)의 구름덩어리가 엷게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석두공은 지하에 이같은 건축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죽어버린 어둠의 성시(盛市)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대전들을 지났으며 무수한 석실들과 회랑을 지났다.

하지만 황폐한 마중천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커녕 시체 하나 널려있지 않았다.

석두공은 마중천 안에서 숨쉬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 그리고 함께 들어온 그 여인 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요...

음산...

그리고 죽음이 마중천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같았다.

(마중천은 오백 년 전에 무림을 독패하다 시피했던 절대적인 세력이다. 한데 그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입구에 쓰여있는 대로 그들이 자중지란을 당해 죽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시체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석두공에게는 이것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점점 마중천의 중심부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기물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득 석두공은 걸음을 멈추었다.

막다른 곳이었다.

그의 앞을 악마의 형상이 생생하게 새겨진 황동으로 만들어진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를 기관장치를 주의하면서 석두공은 공간을 격하고 황동의 문을 밀었다.

문은 그 육중함과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소리없이 열렸다.

스르르릉...

천정의 높이는 삼십여 장,

넓이가 족히 오천 평에 달할 것같은 원형의 둥근 광장이 문사이로 드러났다.

원형 광장의 가운데에는 이장 정도 높이의 석상(石像)이 하나 서있었다.

거인의 형상을 한 그 석상의 모습은 뜻밖에도 석두공이 알고 있는 그 누군가와 아주 닮아 있었다. 오연히 고개를 들고 천하를 좌시하듯이 서있는 석상...

(폭풍무존!)

석두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석상의 모습은 영락없는 폭풍무존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철봉을 이어서 만든 별모양의 기구가 들려있었다.

석두공은 천천히 석상을 향해서 다가갔다.

석상 앞에는 이미 선객(先客)이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멍하니 서서 석상의 손에 들려진 별모양의 기구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석두공은 석상을 뒤로 돌았다.

(아무리 보아도 폭풍무존이다. 그렇다면 폭풍무존은 마중천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 은세정검회라는 곳의 정통을 이어갈 제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천신폭풍탑에서 읽었던 것을 상기해 내고는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석두공은 소림사에서 만배선사에게서 정심신주를 배운 이후 점차 머리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의 기억력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기억력을 십배 뛰어넘은 것이다.

매를 맞으며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기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능력이다.

그때였다.

[아아아! ]

석상의 손에 들리워진 별모양의 기구를 바라보던 여인이 갑자기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의 무공은 이미 경지를 벗어난 것이기에 어떤 기관으로 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같은 데 갑자기 혼자서 쓰러진다니...

석두공은 그녀가 쓰러진 것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끈끈한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은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고 있었다.

[풀어야 하는데... 저것을 풀어야만 하는데... ]

그녀는 혼수상태에서 손을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은 별모양의 기구를 향하고 있었다.

석두공은 생각했다.

(저 성형(星形)의 기구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인가? 능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곳는 마중천의 가장 중심지가 아닌가?)

스스로 그럴 것이란 결론을 내린 석두공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심장을 풀쩍 뛰게했다.

석두공은 별모양을 보기도 전에 여인의 미모에 정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여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살며시 여인의 도화꽃 같은 볼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짜릿한 흥분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석두공은 고개를 들고 일어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행동이 그야말로 소인배의 짓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든 그의 눈으로 성형의 기구가 가득 차서 들어왔다.

[...!]

석두공은 그 별모양이 마치 자신의 정신을 옭아매는 듯한 것을 느꼈다. 별모양은 눈을 통해 들어와서 그의 마음에 낙인처럼 찍혀지는 것같았다.

다섯 개의 뿔을 가진 별이었다.

석두공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의 정신에 납덩어리라도 올려놓은 듯 생각하기가 힘들어지는 것같았다.

정신에 이상이 생기는 것같자 석두공은 즉시 마음속으로 정심신주를 외우기 시작했다.

(태상태성응변무정구사박매... )

그의 정신에 파고들던 별모양의 낙인은 점차 흐려지며 사라져버렸다.

석두공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어쩌면 자신도 여자처럼 당해버렸을 수도 있었다.

[만배선사님께서 나를 살려주셨구나!]

석두공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여인은 저 성형이 머리 속에 파고 든 후에 억지로 깨뜨리려다가 당했다. 어떻게 한사람의 절세고수를 이런 간단한 것이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성형의 기구는 여전히 무서운 마력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마중천의 힘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는가? 어떤 고수라도 옭아매는 간단한 도형의 힘... ]

석두공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부좌를 틀었다.

성형의 기구가 마중천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든 아니든, 그 안에 있는 어떤 비밀을 풀어내야만 할 것같았다.

 

별은 석두공의 마음에 낙인되었다가 정심신주에 의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석두공의 옆에서 여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화석처럼 누워있고 그는 온 정신을 모아서 별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섰으며 긴장으로 인해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변해있었다.

한데 어느 순간 석두공은 낙인되어다가 사라지는 별에 다른 별이 겹치는 것을 보았다.

별안간 그의 머리 속으로 섬전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는 미친 말처럼 풀풀 뛰고 눈을 본 강아지처럼 뒹굴며 소리쳤다.

[그랬구나, 그랬어! 으하하하하...]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고 있는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세차게 뺨을 쳤다.

짝짝!

[!]

여인이 입가로 피를 흘리며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흐릿했으며 아주 피곤해 보였다.

[잘보시오! ...]

짝짝!

석두공은 다시 그녀의 뺨을 두대나 더 때리고 석상의 손에 들려있는 별모양의 기구를 가리켰다.

여인의 눈이 흐릿하나마 그곳으로 촛점을 모으고 있었다.

이미 신()과 지()가 혼돈된 것이 분명했다.

석두공은 별모양의 기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슈우욱!

갑자기 별의 뿔들이 실에 걸린 듯이 석두공의 손을 향해서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한데 별의 모습이 변화함에 따라서 여인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의 뿔들은 점점 더 딸려왔다.

그리고 마치 불가사리가 발을 오무리듯이 그것들은 한곳에 모였고 그 순간에 방향을 바꾸어 중심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

쿠르르르...

쿠르르릉...

별모양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갑자기 마중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여인이 눈을 부릅뜨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그릉그릉...

마중천 전체에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끝없이 터져나오고 어디에나 가득하던 먼지들이 날아올랐다.

그같은 상황에 석두공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방금 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가 떠올랐다.

[이런 바보!]

석두공은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별의 비밀을 깨닫게 되자 너무 기쁘서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알려줘 버렸던 것이다.

하나...

[흑흑흑흑...]

여인은 갑자기 주저앉으며 무릎을 감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얼음장 처럼 싸늘하던 그녀는 봄눈처럼 허물어져 버린 것같았다.

[엉엉... 으흑흑흑흑... ]

그녀는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방성대곡을 했다.

쿠쿠쿠!

사방에서는 아직도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석두공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울지 마시오. 왜 왜이러는 거요?]

[으왕!]

갑자기 여인은 석두공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향긋한 지분냄새가 진한 체향과 함께 석두공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석두공은 눈앞이 보라빛으로 아롱아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황홀...

그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속에서 이성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또 바보짓을... 금방 후회를 하고도...)

장미꽃 같은 여인의 입술이 그의 입을 덮어버렸다.

석두공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달콤함과 함께 짭짤한 눈물의 맛이 느껴졌다.

여인의 농염한 몸에서 훅훅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석두공에게 전염되었다.

뼈가 없는 듯 여리고 보드라운 섬섬옥수가 석두공의 옷을 잡아벌렸고 석두공의 손도 어느덧 여인의 몸에서 껍질을 벗겨내고 있엇다.

마치 허물처럼 검은 섬유질이 벗겨지는 안쪽에서 너무도 싱그럽고 뽀얀 몸둥이가 들어난다.

여인의 알몸을 본 적은 있지만 만져보는 것은 처음이다.

단순히 보는 것이 직접 만져보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싱겁고 하잘 것 없는 것인지를 석두공은 절감했다.

젊은 육체는 너무도 쉽게 달아올랐다.

거칠게 찍어누르는 석두공의 학대에 여인은 암코양이처럼 가릉거리며 다리를 벌린다.

떨리는 손이 여인의 가랑이 사이로 더듬어간다.

보드랍고 까실한 섬모가 만져지고 이내 뜨겁게 달아오른 상구(傷口)가 손 끝에 느껴졌다.

그곳은 열탕이고 늪이었다.

아니 용암을 머금은 채 들끓는 분화구(噴火口).

난생 처음 사내의 손길을 느낀 여인의 몸이 자지러진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복수라도 하듯 손을 뻗어 석두공의 하체를 더듬어왔다.

그녀의 뼈가 없는 듯한 손아귀에 쥐켜지며 석두공은 완벽하게 패배햇다.

그는 명줄이 여인에게 잡혔으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엇다.

...어서....!”

석두공을 자신의 늪지 입구에 잇댄 여인이 간절하게 애원하며 둔부를 일렁인다.

첫경험인 숫총각의 어설픈 허리질이 이어졋다.

비록 어설픈 몸짓이었지만 여체는 너무도 뜨겁게 만개해잇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뜻을 이룰 수가 잇었다.

석두공은 여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갓다.

마치 기름칠이 되어있는 듯한 그 미끈덩한 점막은 단번에 석두공을 깊이 깊이 흡입해들었다.

도중에 진저리치는 여체의 경련이 있엇지만 석두공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완전히 깊은 동굴 속으로 자신을 몰입시켰다.

그런 쾌감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햇다.

혼백이 육체와 괴리되고 몸의 모든 부분이 남김없이 여자의 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흐느끼며 벌벌 떠는 석두공의 몸을 미끈덩한 뱀같은 여체가 마구 휘감아온다.

자신을 머금은 주인의 그 재촉에 못 이겨 석두공은 불맞은 짐승처럼 펄쩍 펄쩍 뛰기 시작했다.

 

× × ×

 

여인은 몸을 돌리고 옷을 입었다.

석두공도 그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원형의 대전 바닥엔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는데...

석두공은 일어서서 그녀를 살며시 끌어당겨 안았다.

여인은 못이기는 척 그의 품에 기댔다.

말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석두공은 여인의 볼에 얼룩진 눈물자국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이윽고 석두공이 입을 열었다.

[... 석두공이오. 이름이 무엇이오?]

[흑봉... 아니 자봉... ]

서로가 적인 두사람, 정체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적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그 끈끈한 흐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을 묻고 나자 물을 말도 없어져 버렸다. 서로가 밝힐 수 없는 것을 물을 수도 없는 일...

찌이익!

석두공은 돌연 소매를 길게 찢어내며 말했다.

[자봉... 뜻하지 않게 우리가 맺어졌지만,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사람이오. 영원토록...]

“....!”

자봉의 어깨가 가는 떨림을 보였다.

석두공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혈풍강호에 던져진 몸...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소. 운명이... 운명이 기어코 당신과 나를 괴롭게 하여 서로가 검을 겨누게 되더라도, 난 난 영원히 당신을...]

그는 격정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자봉이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긴 입맞춤...

그리고 자봉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젠... 죽어도 아무 한이 없어요. 죽어도... ]

자봉은 물기어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석두공이 떨리는 음성으로 불렀다.

[자봉...]

석상의 뒤에는 기관이 움직이며 열려진 감춰져 있던 계단이 있었다.

자봉은 한떨기 백합처럼 처연한 웃음을 짓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고마워요.]

[자봉!]

석두공은 한달음에 자봉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

자봉은 연기처럼 꺼져버렸다.

석두공의 손에는 빈 허공만이 들어왔다.

[자봉...]

그는 망연한 눈빛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계단의 아래에서 찬바람만이 올라왔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석두공은 왠지 낯설지 않은 어떤 분위기를 느끼며 문득 고개를 돌렸다.

 

× × ×

 

! ... 또독...

계단이 끝난 곳에는 천연의 종류동굴이 어지럽게 뻗어있었다. 종류석들 끝에서는 석회암을 녹인 물방울이 떨어졌다.

자봉...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운명에 의해 자신을 잃어버렸던 그녀는 애써 눈물을 닦으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 성숙한 몸으로 인해 나이보다 더 많아보이는 그녀는 이제 이십세, 그녀를 위해 안배되었던 저주가 풀리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녀는 목이 잠긴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원망하진 않겠어요. 어차피 산다는 게 치열하기만 할 뿐 그리 즐거운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이젠 두려워요. 두공... 그 사람곁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문득 그녀는 눈물을 닦고 중얼거렸다.

[제 한몸 희생하겠어요. 하지만... 석두공 그 사람은 아버지께서 안배하신 사람이 아니길 바래요. 만약... 그의 희생까지 요구한다면... 무림의 영원한 평화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겠어요. 그것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동굴 속으로 걸어갔다.

전에는 양심의 갈등 속에 괴로워 했으며 안배에 의해 기억을 되찾은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사명에 괴로워하는 여인, 그녀는 자봉이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출구가 표시되어 있는 미로같은 동굴을 빠져나간 그녀는 폭포수 밑으로 나왔다.

꾸워!

폭포수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데 묵령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묵령신조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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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검룡난무 (2)

 

 

 

풍덩!

석두공은 무엇인가가 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져 버려 경각심을 갖지도 않았다.

뇌주탄은 안개에 휩싸여 있고 그 안개를 뚫고 해남검파의 범선은 소리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를 가노라니 배에 걸린 등불들이 하나둘 반딧불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룡혈운도의 선단이오.]

진우백이 석두공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검룡이 들리워져 있었다.

석두공은 점차 가까워지는 선단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시려오?]

[선실에... 그녀를 깨워야 겠소.]

석두공은 진우백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진우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없소.]

[...?]

[그녀는 이미 배에서 내렸소.]

[배에서 내리다니? 이 바다 한가운데서 말이오? ]

석두공이 놀라며 물었다.

진우백이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는 내게 이런말을 전해주라고 했소. 적룡혈운도를 철저히 쳐부수라고... ]

[...!]

석두공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분노같은 것이 그의 가슴속에서 타올랐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불길이 토해질 것만 같았다.

(!)

진우백은 그에게서 주체하지 못할 힘을 느끼며 몇 걸음 떨어졌다.

석두공은 칼로 자르듯이 내뱉었다.

[검룡을... 검룡을 잠시 빌려주시겠소?]

진우백은 흠칫했으나 검룡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검룡을 움켜진 석두공은 분노에 가득한 눈초리로 적룡혈운도의 선단을 노려보았다.

배는 점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삐익! 삐익!

갑자기 사방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네척의 작은 쾌속선이 진우백의 범선을 포위하고 있었다.

앞쪽에 막아선 배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디서 온 배냐? 이곳이 적룡혈운도의 선단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진우백과 그의 제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같은 안개속의 새벽인데도 적룡혈운도에서는 삼엄한 경계를 풀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백의 눈이 석두공의 얼굴에 머물렀다.

석두공이 말했다.

[공격을 명하시오. 문주만 내 곁에 남아있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시오. 닥치는 대로 배를 부수고 위에서 내려오는 자들을 베라고 하시오.]

진우백은 나직한 음성으로 곁에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전해라. 즉시 공격한다. 물속으로 뛰어들어라.]

그의 명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때였다. 범선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쾌속선에서 소리쳤다.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격침시켜버리겠다.]

그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쾌속선들 위에는 각기 십명 남짓 되는 궁수들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푸른 기름불이 타오르는 화살들이 장전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

그들의 배가 기우뚱하면서 궁수들의 몸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해남검파의 제자들이 물속에서 튀어오르며 그들을 벴다.

번쩍!

[크악!]

[크윽!]

촤아아아!

진우백의 배는 멈추지 않고 바람을 받은 속도 그대로 선단을 향해서 돌진해 갔고 그 배에는 오직 진우백과 석두공만이 타고 있었다.

뿌우! !

선단에서 경계의 나팔이 울리고,

둥둥둥!

배의 방향과 움직임을 지시하는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따라서 적룡혈운도의 범선들은 대오를 형성하며 진우백의 배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이백 여 척의 범선들...

안개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는 그것들의 위용은 과연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어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배를 조종하시오. 저들은 한가운데로 돌진하시오.]

석두공이 진우백에게 명령했다.

진우백이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불가하오. 저들은 솔연진(率然陣)을 치고 있소.]

그의 음성은 완강했다.

 

솔연진...

솔연이란 원래 특이한 습성을 가진 한마리의 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뱀은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를 치면 꼬리가 반격하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반격한다고 한다.

머리와 허리, 그리고 꼬리가 자연스럽게 일체가 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솔연이라고 한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이 병진(兵陣)을 구축하는 기본으로 삶고 있었다.

이렇듯 적룡혈운도의 선단은 솔연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가운데를 치고 들어간다면 필연적으로 양쪽에서 진우백의 배를 포위하며 격침시켜 버릴 것이다.

진우백이 말했다.

[솔연진을 공략하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오. 그것도 걸려들어야만 가능하지만... ]

[...!]

석두공은 그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자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우백의 자신의 생사와 해남검파의 운명이 이 일전에 걸려있음을 아는지라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공격해 나오게 유도해야 하오. 그리하여 먼저나오는 부분을 치고 물러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흐물어뜨리는 것이 정법이오.]

[나는 솔연이 뭔지는 모르오. 하지만 이것은 알고 있소.]

석두공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진문주의 제자들은 이 배를 중심으로 해서 물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소. 그렇지 않소?]

[그렇소.]

진우백이 끄덕였다.

석두공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적의 중간을 치는 것이 옳지 않소?]

[...?]

[진문주는 욕심만 있었지 보기보단 어리석군.]

석두공은 그가 자신의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는 듯하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진우백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에서 흉광이 뿜어져 나왔다.

[만약! 실패한다면 당신의 목숨으로 보상하시오.]

[배를 조종하시오.]

석두공은 다시 소리쳤다.

진우백은 굳은 표정으로 배를 움직였고 석두공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겉과 속이 다른 자였군! 사람을 잘못 봤어!]

불현듯 그의 뇌리 속으로 번개불같이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저자가 그녀를...)

강한 불안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녀의 무공은 진우백보다 훨씬 강하다. 또한 그녀가 어떤 술수에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때 불덩어리들이 유성처럼 배위로 날아들고 있었다.

쉬이이이이...

적룡혈운도의 선단에서 불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쐐애애액!

불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뒤흔들었다.

화르르르...

불화살이 돛에 꽂히자 불이 붙으며 불길이 크게 솟았다.

그러나 배는 달려오던 힘에 의하여 여전히 선단의 중앙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쉬이이이이...

쉬이이이이...

불화살들은 새벽바다를 대낮같이 밝히면서 진우백의 배로 날아왔다.

석두공과 진우백이 탄 배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채 달려들고 있었다.

[미친 놈들이다! 피해라!]

[아무도 없는 빈배다! 속았다.]

적룡혈운도 측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급박하게 들리며 배들이 방향을 틀었다.

돌진해 오는 진우백의 배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단은 좌우로 갈라지며 진우백의 배에 길을 열었다.

그때 선단의 외곽에 있던 배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배에 물이 샌다. 놈들은 물속에 있다!]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잠수조는 물속으로 들어가 놈들을 죽여라!]

분수자(分水刺)를 가진 자들이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바다속에서 핏물이 번져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해남도의 검수들과 적룡혈운도의 수하들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석두공의 주위는 불길로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마치 하늘을 받치기라도 한듯이 우뚝 서있는 석두공의 곁으로는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강기에 가로막힌 것이다.

진우백은 검풍을 일으켜 불길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며 소리쳤다.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계속 저들에게 부딪혀 가시오. 배는 금방 가라앉지 않소.]

석두공은 냉정하게 말했다.

진우백은 이제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산더미같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자신의 배가 다가갈 때마다 적룡혈운도의 배들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우왕좌왕하면서 대오를 잃어버리는 것을 그는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이같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면 반드시 패한다.

혼란이란 지휘체계밑 명령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저돌적이고 무식하게도 보이는 석두공의 전법이지만 그는 단 한척의 배로써 이백 여 척의 배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어버렸던 것이다.

그가 탄 배의 윗부분은 거대한 불꽃과 함께 연기도 사방으로 뿜어낸다.

안개, 그리고 연기, 무섭게 다가오는 화염선,

이백 여 척의 배들은 시야가 가로막히고 달려드는 화염선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속속 가라앉고 있었다.

해남검파의 제자들은 수공(水功)에 있어서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진우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피부를 익혀버릴 듯한 열기로 인해 옷자락이 계속 불에 붙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연이어 옷을 털어 불을 끄고 있었다.

쿵쿵!

쿠르르릉!

[으아악!]

적룡혈운도의 배들끼리 안개와 연기 속에서 방향을 부딪히며 가라앉았다.

배들은 벌써 반이 가라앉아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일백 척 정도, 그들은 공격할 대상을 잃고 우왕좌왕한다. 불타는 배를 무엇으로 공격한단 말인가?

? 말도 안되는 소리다.

끼이이끽!

그러나 진우백과 석두공이 타고 있던 화염선도 드디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미 불이 갑판아래로 들어가 배가 깨어지고 있었다.

배가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있을 것이오?]

진우백이 석두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바로 그때 석두공의 오른손이 높히 들려졌다.

쩌어엉!

그의 오른손에 있던 검룡이 불빛을 받아 빛났다.

 

[검룡풍운뇌섬(劒龍風雲雷閃)!]

 

석두공의 입에서 웅혼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 외침은 아수라장이 된 바다위의 대기를 찢으며 퍼져나갔다.

동시에 백금으로 만들어진 검룡이 한줄기 빛이 되어 나르며 뇌전처럼 적룡혈운도의 배위로 떨어졌다.

쿠아아앙!

콰아아아...

천지개벽하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대한 범선이 파괴되었다.

쿠아아아!

검룡은 다시 물속에서 승천하여 올랐고, 그것은 실을 꿴 바늘이 옷을 깁듯이 배들위로 차례차례 떨어져 내렸다.

꽈장창!

크악!”

케엑!

천지는 온통 깨어져 나가는 배들이 내는 굉음과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지르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가득차는 듯했다.

진우백은 넋을 잃고 있다가 자신의 옷자락에 붙은 불을 황급히 두드려 껐다.

(검룡의 진정한 위력이다! 저것이었다!)

그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석두공은 손을 저어 검룡을 조정하면서 악마처럼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소령이 진우백을 통해서 전했다는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적룡혈운도를 철저히 부수라고? 그래, 그렇게 해주지!)

쿠오오오오...

다시 한척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뇌주탄의 여기저기엔 가라앉는 배들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그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들의 비명이 귀청을 찢을 듯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돌연 허공에서 마치 여신의 속삭임인듯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귓전에서 속삭이는 듯 뇌주탄 전역에 조용히 퍼져나갔다.

석두공은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고오오오!

검룡이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시간마저 여인의 음성을 따라서 멈춰버린 듯하였다.

사방이 더 이상 고요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해졌다.

고오오오오...

허공에 어둠보다 검은 묵빛의 거조가 나타났다.

 

-묵령신조(墨靈神鳥)!

 

바로 묵령신조였다.

석두공은 그처럼 거대한 새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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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八 章

 

            劒龍亂舞 (1)

 

 

촤악! 촤악!

해남검파의 정예고수들을 실은 배가 불도 켜지 않은 채 물결을 해치며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물결은 잔잔했으며 바람은 순풍이라 배는 뇌주탄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진우백은 선실에서 검룡을 오른팔에 끼고서 그 비늘에 적혀있는 초식들을 연구하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가지라도 익혀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어떤 배가 우리 해남도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룡혈운도의 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척인가?]

진우백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척 뿐입니다.]

진우백은 밖으로 달려나가 제자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과연 한척의 범선이 동산령의 선착장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천월이 본파를 칠 모양이다.]

진우백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승부는 항상 비정한 것, 이긴다 하더라도 온전히 이기는 것은 없으며 진다고 완전히 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뇌주탄으로 적룡혈운도의 선단을 기습하기 위해 가고 있는 지금 적들도 해남검파이 본거지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면 피해만 입을 뿐 성과는 조금도 거두지 못한다.

남아있는 제자들의 무공은 약하고 가족들이 염려되기는 했지만 돌아갈 순 없다.

진우백은 무겁게 내뱉었다.

[빠른 속도로 항진해라. 우리는 이 일전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갈 수도 없다. 가족들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도 오직 이 일전에 달려있다.]

해남검파의 제자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심이 흘렀다.

그때 돌연 다른 선실에서 소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해남검파는 무사할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의심스러우면 잠시 배를 멈추도록 하세요.]

[...?]

[...?]

적룡혈운도의 고수들이 탄 배가 해남검파의 본거지가 코앞인 동산령으로 접근하고 있는 데도 무사할 거라니...

해남도의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배는 멈추어서고 해남도로 접근하는 적룡혈운도의 배를 보기 위해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만큼 제자들이 쏠렸다.

적룡혈운도의 배는 점차 동산령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을 참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가슴이 타는 것같은 심정을 어쩔 수 없었으리라.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 저저... ]

쿠오오오!

적룡혈운도의 배가 한자리에서 맴도는 것같더니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만세!]

[만세!]

해남도의 제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적룡혈운도의 배는 그 사이에 완전히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 × ×

 

[그 늙은 스님은 물재주도 뛰어나신 모양이군.]

석두공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웃으며 말했다.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재주가 뛰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발 달린 짐승이 땅위에 오른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해변으로 하나씩 나올 때 마다 늙은 스님에게 제압당하겠군. 오지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이야.]

석두공의 말에 소령이 웃었다.

[오지산보다 염라국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그렇게 웃을 때는 도무지 저승사자 같지가 않소.]

석두공이 갑자기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령은 몸이 굳어지며 물었다.

[왜 제가 저승사자지요?]

[당신이 가는 곳마다 죽음이 널려있으니 저승사자가 아니고 뭐겠소?]

석두공은 침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소령은 마른 손을 씻으며 불안스러운 듯이 선실 안을 거닐었다.

[....제가 당신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게 싫은 거죠? 그렇죠?]

소령의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석두공은 내심 당황하며 말햇다.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무림인으로서 어지러운 때에 살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무림이라는 게 어차피 그렇고 그런게 아니예요?]

소령의 어투에는 어떤 비애같은 것이 진하게 배여있었다.

석두공은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말이 틀린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소령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하고 있다. 비록 석두공이나 늙은 승려가 그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소령은 석두공의 맞은 편에 있는 침상에 가서 몸을 돌려 누웠다.

흐느끼는지 그녀의 어깨가 가는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석두공의 마음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자가 우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남자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석두공은 그때 처음 알았다.

또한 여인의 눈물은 용광로의 쇳물보다 뜨거워서 남자의 철석같은 마음도 녹여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시오.]

석두공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

소령은 여전히 어깨의 잔 떨림만을 보일 뿐이었다.

석두공은 다시 말했다.

[앞으로 소저에게 실례가 되는 말은 결코 하지 않도록하겠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

소령의 등을 바라보며 석두공은 선실의 문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가슴속이 저리듯이 아파왔다.

찢어지는 듯하면서도 공허한 것하기도 하고 텅 빈 무엇이 있는가 하며 무거운 것이 가슴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데 석두공은 중요한 무언가가 물살 속으로 흘러서 영원히 뒤로 사라져버리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해(情海)는 깊고 깊어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오로지 정에 발을 딛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도 어느새 정해에 깊숙히 빠져 있었구나.]

그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탄식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뇌주탄의 결전도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무심해졌다.

석두공은 자신의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비워진 듯하자 모든 것이 들어차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한 것을 느꼈다.

 

한편 소령은 선실의 자기 침상에 돌아누운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음모만 깨뜨리면 될 것을 지금까지 사람도 많이 죽였으니... 나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

그녀의 면사가 눈물로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손바닥으로 눌러서 눈물을 훔친 후 발딱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된 것... 이렇게 된 것... 이렇게 된 것... ]

그녀는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의 사슬을 매몰차게 끊어버리는 이빨의 마주침이 있었다.

비애가 밀려온 때문일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그녀를 휘청이게 했다.

갑작스런 그 현기증이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잖아도 상심해있던 그녀인지라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으로써 모든 것을 잊으버리려 했다.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꿈속으로 침잠하는가?

소령은 아득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

 

[호오! 이거 아주 아름다운 계집이군 그래. 이런 물건을 우리가 그냥 보내면 사람이 아니지. 암 사람이 아니야.]

귀두도(鬼頭刀)를 든 장한이 가슴에 무성하게 난 털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자 서생차림을 한 자가 백옥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를 말인가? 우리야 절에 시주는 못해는 여인들에게 육보시(肉布施)는 잘 해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더구나 이 계집은 성질이 못되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우리가 안아주지 않으면 평생 처녀귀신이 되어 죽을 거야.]

[낄낄낄! 아무튼 계집들의 재주란 게 참으로 묘해, 자기 말을 하는 줄 알면서도 못들은 척하고 시치미를 뚝 떼는 건 보통 공력이 아니란 말이야. 저기 저 표정 좀봐. 아예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하잖아.]

몸을 흔들흔들 하며 건달같은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자 귀두도를 든 장한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어디 그뿐인가? 원래 계집들에겐 그것 말고도 절묘한 신공이 있는데 그건 망원망신공(忘爰忘神功)이라고 하네.]

서생이 섭선을 살랑이며 짐짓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망원망신공? 그게 뭔가 처음 듣는 거네.]

[말 그대로 잊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잊어버리는 기술이라네. 계집들로서 잘먹고 잘 사는 것들은 다 이 신공을 깊이 터득했지. 일부 그렇지 않은 여자들만 평생 괴롭게 살 뿐이네.]

귀두도의 장한이 건달 대신 대답했다.

서생이 부채를 접어 자신의 손바닥을 치면서 대소했다.

[정말 그렇네. 여자들은 정말 그런 신공을 익히고 있지. 여자에 대해선 난 우습게 보는 사람이네만 그 신공에는 정말 감탄하고 있지. 심지어는 동시에 여러 사내에게 윤간(輪姦)을 당한 일 같은 것도 그저 상상속에서 잃어난 것인 듯 간단히 잊어버리거든.]

[여자에게 뭔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특히, 그 여자에게 자신이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많다면 말이야.]

건달이 입을 찢을 듯이 벙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소령은 순간 소름이 쫘악 끼쳤다.

(저들이 지금 내말을 하고 있었나? 여긴 대체 어디지?)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천근만근인 듯 손가락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소령은 속으로 소리쳤다.

(석두공! 석두공은 대체 어디 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소리는 목구멍에 걸려서 입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녀의 인형처럼 굳어진 눈으로 다가오는 건달같은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소령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했다.

소령은 그자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직감으로 알았다.

(! 이건 꿈이야. 꿈이 틀림없어.)

그녀는 부르짖었으나 눈앞의 것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귀두도의 장한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푸하하! 저 놀란 토끼 눈 좀 보라구. 난 그일 보다도 그 전에 이렇게 구경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네.]

[난 입술이 더 좋아,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이 고혹적이지 않은가? ]

서생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령은 그가 격고 있는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이 세놈의 음적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작은 배의 갑판이었다.

마치 건져올려진 물고기처럼 그녀는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것이었다.

건달이 소령의 발목을 잡으며 말했다.

[흐흐흐! 너는 우리가 건져올렸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죽더라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죽는 게 이승에서의 죄를 조금이라도 더는 것이야.]

소령은 내심 절망감에 소리쳤다.

(아 한 줌의 진기만 있어도...)

건달의 손은 그녀의 물에 젖은 흑색치마를 걷어올리고 있는데 소령은 조금의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히야! 기가 막히는군! 아직까지 이런 계집은 구경도 못해봤어. 이 허벅지 하나만 하더라도 숨이 막히게 만드는군. 꿀꺽! ]

건달이 그녀의 허벅지로 얼굴을 가져가며 소리쳤다.

허벅지 사이의 깊은 곳을 보려고 몸을 업드리는 바람에 그자의 팔꿈치가 소령의 허벅지에 눌러졌다.

(아얏!)

소령은 심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한가닥의 빛이었다.

굳어져 있던 그녀의 몸으로 가해진 건달의 작은 압박은 그녀의 몸이 깨어나게끔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소령은 자신의 혀끝을 깨물었다.

한입 가득 피가 머금어지면서 전신의 기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건달은 이제 막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린 손바닥만한 작은 천을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푸악!

순간 소령의 입에서 피안개가 뿜어졌다.

[!]

건달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퍼억!

그때 소령의 발이 그자의 허리를 찼다.

하지만 내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건달은 비틀거렸을 뿐이었다.

귀두도의 장한과 서생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곱게 죽지 못할 계집이로군... 육시를... ]

소령은 자신이 그들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속의 내공은 아직도 밑바닥 상태이다.

그녀는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몸을 떼굴 굴러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풍덩!

[이런! 계집이 물로 들어가 버렸어. 반쯤 죽었거나 실성한 것같기에 혈도를 누르지 않았더니... 에잇! ]

건달이 벗겨들었던 소령의 신발을 팽개치며 분을 터뜨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해남도의 배가 파괴되어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내가 조금도 모를 수가 있었을까?)

소령은 물속에 드러누워 오로지 호흡에 의지하여 해류를 따라 흘러가며 생각했다.

방금 전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칫했으면 짐승같은 자들에게 능욕당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두서를 잡을 수 없을 만치 혼란스러웠다.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분명히 그녀는 석두공과 다투고 나서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서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해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 세 음적의 배에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의 말로 미루어 생각해 볼때 그들이 자신을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같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소령은 물결에 몸을 맡긴채 흘러가면서 자신의 공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공력을 크게 해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의 다른 곳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한데도 그녀의 공력은 심한 손상을 입어있었다.

(회복하려면 한달은 걸리겠어... 한데 그는 어떻게 됐을까?)

소령은 석두공을 생각하곤 마음이 심란해졌다.

얼굴의 면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남쪽바다의 뜨거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까맣게 조여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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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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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七 章

 

               海南島寶物

 

 

오지산 중턱에 해남파는 자리잡고 있었다.

 

-해남파(海南派)!

 

비록 해외의 변방에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나 명성에 있어서나 여느 중원의 명문대파에 뒤지지 않았다.

오지산 중에 우뚝 서서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남파의 성곽과 전각들은 해왕(海王)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검룡전(劒龍殿)>

 

해남파 장문인 진우백(晉祐伯)의 거처이자 해남파 창설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

밤이 늦도록 켜져 있는 불빛에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너무 희어 약간 음침해보이기까지 하는 인상을 지닌 이 인물이 바로 해남파의 당대 장문인인 진우백이다.

[진정 그들을 상대할 힘은 어디에도 없단 말인가?]

진우백은 고뇌에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뚜벅뚜벅!

뱅글뱅글 맴도는 탁자의 주위엔 그가 일으킨 바람을 따라 촛불이 길게 늘어지고 진우백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

그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의 눈길이 잠시 탁자위에 펼쳐진 피빛 서찰에 머물렀다.

혈운(血雲)속에서 적룡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진 서찰에 검은 글씨로 몇 자 적혀있었다.

 

<...준걸(俊傑)은 시류(時流)를 알며 현명한 자는 허리를 숙이기 마다하지 않는다했다.

우리 해외의 세력이 중원에서 소외되어 온지 벌써 기 백년, 그동안 쌓여온 억압된 분노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천운이 돌아 우리에게 천년의 대운이 돌아왔으니 마땅히 해외의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 중략...

해남도에 우리 적룡혈운도의 제자들을 보내는 바이니 진도주께서 익히 양해해 주시리라 믿소.

하나 이것은 모두 본 도주의 생각일 뿐, 만에 하나 진도주의 뜻이 본인과 다르다면 뇌주탄(雷州灘)에서 자웅을 결하길 원하오.

금월 초닷새까지 소식이 없으면 본인의 제의를 승락한 것으로 알겠소.>

 

[내일까지다.]

진우백은 침침하게 내뱉었다.

[놈의 의도를 빤히 알면서도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해남도를 수중에 넣고자 마음먹은 놈이다. 단지, 그것을 조용하게 하고 싶을 뿐...]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당신을 노리는 것이 겨우 해남도를 탐낸 때문이었을까요?]

어디선가 여인의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우백이 몸이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 흑의를 입은 면사여인이 서있었다.

[누구요?]

진우백은 무거운 음성으로 내뱉었다.

면사여인이 말했다.

[지금 급한 것은 내가 누군지 묻는게 아닐 텐데요? 적룡혈운도의 해천월이 당신을 노리는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으셔요?]

그런 것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진우백은 잠시 벙어리가 되었다.

적룡혈운도가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서 같은 해양의 세력인 해남파로도 손을 뻗었다고만 생각한 진우백이었던 것이다.

면사여인이 다시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뇌주탄으로 가게 되면 그땐 해남파가 세상에서 없어지겠지요. 그리고 가지 않는다면 무림에서 당신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 되겠죠.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하지만...]

문득 진우백은 그녀가 자신을 도와 줄 수도 있을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신음을 삼키며 말했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주시겠소?]

[호호호! 어째서 장로들과 의논하지 않고 정체도 모르는 제게 묻는 거죠? ]

면사여인이 은구슬이 부딪히는 듯한 음성으로 웃었다.

진우백은 나직하게 탄식했다.

[장로들의 생각은 들을 필요가 없소. 부끄러운 말이오만 그들은 이미 해남파를 생각지 않고 있소.]

갑자기 면사녀가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군요. 하지만 실행력이 부족해요. 돌아선 자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당신을 죽일 거라는 것을 어째서 모르죠? 한번 망설이면 때를 잃게 되는 법이죠.]

진우백의 낯빛이 확 변했다.

[혹시 장로들이 모반을...!]

[그래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두릅에 꿰어진 물고기가 되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면사여인은 진우백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진우백은 그녀가 다가섬에 따라서 똑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다.

면사여인에게서 어떤 강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면사여인이 말했다.

[이곳이 해남검파의 창설에 관한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 맞는가요?]

진우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에 대한 경외심같은 것이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여인이 들어선 순간에 이미 자신이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면사여인이 밖을 향해서 말했다.

[이곳이 확실해요. 진우백 문주가 그렇다고 했으니까요.]

[대체 그곳에 뭐가 있다고 그러시오? 아직 적룡혈운도의 놈들은 보이지도 않는데...]

석두공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우백은 비상시라서 경계가 엄중한 해남파를 마치 자기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대체 제자들을 뭘하기에... )

그때 면사여인, 즉 소령이 말했다.

[해천월이 노리는 것이 여기에 있어요. 그에겐 해남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죠.]

[어디? 어디 있소?]

석두공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소령은 말했다.

[이제 찾아봐야죠. 하지만 그전에 먼저 진문주로부터 해남파의 개파에 얽힌 전설을 들어야겠어요.]

진우백이 물었다.

[대체 해천월이 내게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주시오.]

[당신에겐 그게 없어요. 만약에 당신이 그걸 가졌더라면 해천월에게 꿀릴 게 없을 테니까요. 개파(改派)에 얽힌 전설이나 말하세요.]

소령은 차갑게 말했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진우백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잠시 소령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떤 분노의 표시도 아무런 위안조차 될 수 없을 것같았다.

그는 탄식을 하고 말했다.

[우리 해남검파를 처음 세우신 분은 동은검객(憧恩劍客)이라는 분이셨소. 그분은 당시 중원에서 명망을 크게 떨치던 분이셨으나 다섯 명의 원수를 상대하다가 패해 이곳까지 도망쳐 오셨소.]

[우린 그 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소령이 말했다.

진우백은 못들은 척하며 계속 말했다.

[그때부터 이곳 오지산에 숨어 사시면서 더욱 검술을 닦았는데, 잠은 항시 이곳 대전 자리에 서있었던 한 그루 천년거목 아래에서 주무셨다 하오. 그러던 어느날 밤 갑자기 나무 속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리기에 잠결에 놀라 검을 휘두르셨고 그 바람에 그 천년 거목이 베어져버렸다 하오. 이 탁자가 바로 그 나무의 그루터기요.]

진우백은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같은 탁자를 가리켰다.

나무 그루터기를 다듬어 만든 그 탁자의 면은 대패질을 한듯이 매끄러웠다. 석년의 동은검객의 검법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한데, 천년거목이 베어지는 순간 나무 속에서 갑자기 한 마리의 백룡이 튀어나왔소. 조사께서는 놀라 검으로 용의 입을 찔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백금(白金)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하오.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한 가지 씩의 검초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우리 해남검파가 창설되었다고 하오.]

진우백이 자부심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백금으로 만들어진 용은 어디 있소?]

석두공이 물었다.

진우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 수가 없소. 그것은 검룡(劒龍)이라고 불렀는데 언젠가 부터 사라져 버렸다고 하오. 노부가 사부님께 들은 바로는, 검룡은 생명이 있는 물건이라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라 했소.]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검룡은 이곳 검룡전 내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예요.]

소령이 말하며 옥퉁소를 뽑아들었다.

진우백과 석두공이 동시에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검룡이 있을 당시엔 천하의 어느 누가 해남검파를 노릴 수 있었겠어요? 아무도 검룡을 훔쳐갈 수 없었을 거예요.]

소령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남파의 장문인이나 제자들 중 누군가가 숨겼다는 뜻인데, 그것이 악의에서는 결코 아니었을 거예요. 결국 선의로 숨겨진 검룡은 후세의 제자들이 어느 정도 생각만 하면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을 거란 말이죠.”

[검룡이니 검룡전에 있다... 능히 그럴 수 있겠구료.]

진우백이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 석두공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보겠소.]

[...?]

[저 탁자를 부수려는 것이죠?]

소령이 퉁소로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탁자는 검룡이 나왔다는 거목의 둥치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만든 것이었다.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로 다가갔다.

[...!]

[...!]

소령과 진우백은 긴장된 시선으로 석두공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석두공은 탁자에 쌍장을 놓더니 공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엄청난 내공이 탁자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탕퉁!

탁자위의 찻잔과 주전자가 튕겨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석두공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소령이 재빨리 물었다.

[느낌이 있어요?]

[뭔가가 내 공력에 반응하기 시작했소.]

석두공이 대답하며 더욱 공력을 돋우었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힘으로 인해 방안에도 어떤 기류가 형성되는 듯했다.

진우백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석두공은 약관이 될듯말듯 보이는데 그 무공의 강인함은 그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인 것같았기 때문이다.

진우백에게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소령과 석두공이 신비하고 두렵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이때 석두공이 말했다.

[움직인다.]

순간,

파앗!

탁자가 벌어지며 그 속에서 은빛 빛 덩어리가 치솟았다.

그 기세는 실로 놀라워서 용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듯했다.

!

빛 덩어리는 검룡각의 지붕을 뚫고 높이 날아올랐다.

[검룡이다!]

[검룡!]

파앗! 쐐애액!

진우백과 소령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그들은 승천하는 빛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은빛 덩어리는 석두공의 손짓에 따라 그의 손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번쩍!

엄청난 빠르기였다.

진우백과 소령이 방향을 틀기도 전에 그것은 석두공의 손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오오!]

석두공은 검룡을 손에 쥐고 놀라움에 찬 탄성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룡, 그것은 백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삼척이고 굵기는 사람의 허벅지만큼 굵었다.

머리는 생생하게 날아오를 듯한 용의 모습이며 눈에는 붉은 빛을 발하는 주먹만한 홍보석이 박혀 있다.

입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한 투명한 여의주(如意珠)를 물었으며 뿔은 사슴의 그것마냥 갈래져 있고, 비늘 하나하나는 살아있는듯 생동감이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마리의 용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용의 머리부분만 있을 따름이었다.

한데 그것의 끝부분에는 속이 비어 있어서 사람의 손이 들어갈 수 있을 것같았다.

검룡은 비늘하나하나에 초식이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병기로서 모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공은 그 검룡을 통해서 전해지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천왕저에 비해 손색없는 힘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해천월이 노릴 만도 하군.]

석두공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했다.

소령과 진우백이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석두공은 검룡을 세세히 살핀 후에 진우백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잘 간직하시오. 그 안에는 숨겨진 비밀이 무척 많을 것같소.]

진우백의 입이 딱 벌어졌다.

검룡이 자신의 거처에서 나왔고 또한 해남검파의 보물이라고는 하지만 찾아낸 사람은 석두공과 소령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자신에게 넘겨주자 그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받아도 되 되겠소?]

[이제 뇌주탄으로 가서 적룡혈운도의 세력을 분쇄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진문주께서도 도와주시겠죠?]

소령은 아쉬운 듯이 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우백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해천월의 손에 가루가 된다고 해도 가겠소이다.]

[당신의 장로들은 모두 혈도가 제압당한 채 꽁꽁 묶여 있어요. 믿을 수 있는 부하들과 함께 한 척의 배만 가지고 뇌주탄으로 가도록해요.]

소령이 명령하듯 말했다.

진우백은 단 한 척의 배만 가지고 간다는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우리도 함께 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소령의 음성을 듣는 순간 모든 경각심을 풀어버렸다.

소령과 석두공이 있는 한 무엇이든 잘 될 것만 같았다.

이유없는 복종심과 신뢰감이 그의 가슴에 싹트고 있었다.

[당장 배를 준비시키겠소.]

그는 두 사람을 검룡전 안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진우백이 나가자 소령이 구석진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오세요.]

순간 키가 작달막하며 까무잡잡한 것이 용화사의 그 중과 흡사한 중이 나왔다.

단지 그는 나이가 훨씬 많아 구십 세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머리를 간단히 조아리자 소령이 말했다.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편안히 쉬시라는 말씀이 계셨어요.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늙은 중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납은 오래 전부터 쉬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요. 또한, 천하를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 했을 뿐이니 노고라고도 할 것이 없소이다. 노납은 여전히 건강하다고 전해주시오.]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어요. ,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을 드려야 겠군요.]

[말해 보시오.]

[이곳으로 오는 적룡혈운도의 무리들을 혼내주세요. 고수들이긴 해도 수가 많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리다.]

스스스!

소령의 말이 끝나자 늙은 중은 안개가 흩어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석두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소소저보다 더욱 뛰어난 고수였군. 저 정도라면 무림에서 십대고수에 능히 들고도 남음이 있을 것같은데...]

소령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빙산의 일각이죠.]

[...?]

흠칫하는 석두공을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엇다.

[십대고수는 겉으로 드러난 자들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에요. 실제로 제가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십대고수와 무공이 엇비슷하거나 더욱 강한 자들이에요.]

[십대고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들리는군.]

[사실이 그래요.]

소령은 눈을 깜짝이며 말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피곤한 모양이군! 하긴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괜찮아요. 뇌주탄에 갈때까지 푹 쉴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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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밀실의 기계인간 (2)

 

 

 

한데 석두공이 현장에서 사라진 직후의 일이다.

스윽!

무너진 연화봉의 단애에 마치 유령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어둠속에서 백의를 날리며 서있는 그는 스무 두세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인이었다.

천상의 선녀를 연상시키게 하는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얼음장보다 싸늘한 한기를 풍기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는 연화봉을 내려가고 있는 석두공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본녀가 한발 늦었군. 한데 이곳에서 저런 엄청난 고수를 만날 줄이야! 만만치 않겠어. 직접 겨룬다해도 이길 것같지가 않아! 대체 어디서 저런 고수가 툭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석두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잔혼각의 비밀장소로 들어갔다.

스스슥!

그녀의 몸은 유령처럼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위는 그녀의 모습같은 구멍이 뚫리는 것이었다.

석두공에 대해서 만만치 않은 자라고 이야기한 이 여인, 그녀의 무공 또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했다.

 

땅속으로 깊숙히 뚫고 들어간 그녀는 석두공과 소령이 기계인간을 처음 보았던 그곳에 이르렀다.

석문을 뚫고 들어가 석실로 들어갔다.

한데 놀랍게도 기계인간은 여전히 새파란 눈빛을 발하며 꼿꼿이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에는 무너진 천정을 이고 있었다.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것들은 부수지 않았구나.]

그녀는 석실마다 뚫고 들어가 열개의 기계인간을 들고 나왔다.

기계인간들은 불상처럼 앉아 있는데 한곳에 그것들을 모아놓은 그녀가 쌍장을 펴고 공력을 일으켰다.

두둥실,

순간 기계인간들이 가부좌를 튼 채 날아올라 하나하나 밖으로 날아갔다.

여인은 쌍장을 펼친 채 그 뒤를 따라서 날아갔다.

휘이이잉!

단애아래에서 돌연 거대한 새가 날아올랐다.

그것은 마중천(魔重天)의 상징이라는 전설적인 영물 묵령신조(墨靈神鳥)였다.

쏴아아아!

열 개의 기계인간과 여인을 태운 묵령신조는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 × ×

 

[흐흐흐...]

금포(錦袍)노인은 음산하게 웃었다.

[고수가... 세 놈의 종보다 더욱 강한 고수들이 속출하고 있단 말이지? 은세정검회(恩世正劍會)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로 들리는군. 세상에 그들 이외에 고수를 키워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단연코 없습니다.]

서릿발 같은 표정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그녀는 바로 황산 연화봉에서 묵령신조를 타고 사라진 그 여인이었다.

금포노인이 말했다.

[너는 그 세 놈들이 더욱 날뛰게 해라. 크흐흐흐... 천하를 더욱 어지럽게 해야만 놈들이 나타난다.]

[존명!]

스스스!

여인은 연기처럼 그자리에서 사라졌다.

금포노인은 다시 몸을 비스듬히 눕히며 말했다.

[미사!]

[네 궁주님... ]

[그녀가 아름답지 않느냐?]

미사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되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흑봉(黑鳳) 외에 아름답단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자가 또 있느냐?]

금포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미사의 눈까풀이 가는 떨림을 보였다.

흑봉...!

그것은 방금 전에 복명한 얼음장처럼 싸늘한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 때문이었어!)

미사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궁주가 한달에 한번씩은 방사를 금하고 있는 것도 그녀 때문이었어! 오직 그녀를 만나는 그날 만이...!)

미사는 참담한 표정으로 물러앉았다.

흑봉...

그녀는 궁주의 무공을 직접 전수받은 제자이다.

들리는 말로는 그녀의 고강함은 궁주에 필적할 정도라고 했다.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미사가 도저히 미치지 못할 바였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그럴 진데, 만약 그녀가 웃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의 혼을 빼놓을 것이다.

궁주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음을 안 미사가 절망속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석두공과 소령은 뇌주반도(雷州半島)에서 배를 탔다.

이제 물길로 삼백리 남짓이면 해남도에 도착하는 것이다.

석두공은 동정호에서 놀았지만 바다는 처음이었다.

그는 손으로 바닷물을 적셔 혀를 대 보았다.

[뭐하는 거예요?]

소령이 물었다.

석두공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바다물이 진짜 짠가 하고 시험해 보는 중이오.]

[차라리 한번 들이켜 보지 그러세요? 그럼 바다물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소령이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황하를 들이켰다는 사람 이야긴 들어보았지만 바다물을 들이켰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키를 움직이던 사공이 말했다.

소령은 석두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바닷물을 들이킨 사람도 보게 될 거예요. 이사람은 배가 바다보다 더 크거든요.]

[어이쿠! 제발 그렇게 하진 마십시오. 그러면 저는 어디가서 밥벌어 먹습니까?]

사공이 엄살을 부렸다.

[하하하하... ]

[호호호호... ]

석두공과 소령은 배를 잡고 웃었다.

소령의 웃음소리가 방울소리처럼 영롱했다.

 

여름이라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다.

사공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에는 두 명의 사공이 있었다.

한 사람은 배 주인이었으며 다른 사람은 그에게 고용된 젊은이였다.

두 사람의 물질은 아주 익숙하여 배는 역풍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바다로 떨어지면서 물결이 황금빛으로 출렁거렸다.

석두공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일몰을 바라보았다.

소령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며 낮게 말했다.

[금방 어두워지겠죠?]

[해남도도 멀지 않았을 것이오.]

[...]

소령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석두공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해가 가라앉은 곳에서는 마지막 비명처럼 적광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소령이 말을 꺼냈다.

[만약에... 만약에 말예요.]

[말해보시오.]

[제가 당신을 속였다면 절 용서하실 수 있겠어요?]

소령은 입술을 꼭 깨물면서 물었다.

석두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용서할 수 없을 거요. 어쩌면 당신을... 할지도 모르겠소.]

[어떻게 한다구요?]

소령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석두공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답하지 않았다.

멀리 남쪽으로 해남도가 구름처럼 수평선 위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령의 눈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뭇 별들이 해남도의 하늘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바다는 숨을 죽인듯 고요했다.

촤아촤아!

배가 나아가는 소리만 밤바다에 울려퍼지고 해남도는 점점 거대한 모습으로 석두공과 소령의 앞으로 다가왔다.

해안에서 하나둘 불이 보였다. 밤에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어선이었다.

소령이 말했다.

[등불을 꺼요.]

해가 지면서부터 배에는 두개의 등을 달았었다.

헌데 사공은 소령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등불을 껐다.

[동쪽으로 돌아서 내려가요.]

소령은 다시 명령을 내렸고 배는 해남도의 해안선을 따라서 동으로 내려갔다.

 

***

 

해남도는 보도(寶島)라고 불린다.

그만큼 해남도가 모든 것에 있어서 풍족하다는 것이다.

해남도를 동으로 돌아서 섬의 중동부에는 산수가 수려한 야트막한 구릉이 하나 있다.

이곳이 해남도의 명소 중의 하나인 동산령(東山嶺)이다.

석두공과 소령은 동산령을 넘어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논들 사이를 지나 오지산(五指山)의 기슭에 이르렀다.

군데군데 파초(巴草)와 야자(椰子)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석두공이 물었다.

[저 박처럼 생긴 열매는 먹을 수 있소?]

[엿보다 달콤하죠.]

소령이 발로 야자나무를 차면서 말했다.

! 툭툭!

야자열매가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소령은 재주를 부려 먼저 하나의 야자를 손으로 받은 위에 또 다른 야자를 받았다.

그녀의 손위에 둥근 야자가 다섯 개나 쌓여 있었다.

!

그녀는 제일 밑에 있는 야자를 석두공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열매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다시 받쳐들었다.

석두공은 야자를 한번 베어물더니 던져버리며 말했다.

[맛도 없고 단단하기만 하군.]

순간 소령이 야자를 놓아버리며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실컷 웃은 그녀는 퉁소를 뽑아 야자의 가운데를 툭 쳤다.

야자열매가 마치 예리한 검에 베인듯 잘렸다.

윗부분이 날아간 푸른 열매 속에는 맑은 물이 찰랑이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군침을 돌게했다.

[마셔보세요.]

소령은 석두공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석두공이 겸면쩍게 웃으며 받았다.

 

해남도에는 해남검파(海南劍派)가 있다.

해남검파는 한때 중원의 일각을 차지하기도 했던 검의 명문이다.

화산파와 무당파에 비견될 정도로 해남파의 검술은 유명한데 그 해남파의 검술은 모두 오지산에서 나왔다.

오지산은 해남파의 발상지이면서 지금까지 해남파가 존속해오는 곳이기도 했다.

해남도는 비록 섬이기는 하지만 결코 작은 섬이 아니다.

대륙에 속한 섬으로서는 대만(臺灣)을 제외하고는 두번 째로 큰 섬이니 일개 성 만큼 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반은 되는 크기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남도에는 해남검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산도 있고 들도 있으며 밀림도 있는데, 오지산의 자락에는 민간인들에게 점을 쳐주는 작은 산사(山寺)가 있다.

석두공과 소령은 각기 네가지의 글자로 쓰여진 간판이 있는 산사로 올라갔다.

 

<용화사(龍華寺)>

 

절이름은 용화사였지만 간판은 한자로 쓰여진 외에도 회족(回族)의 글자와 묘족(苗族) 및 장족(藏族)의 글자로 쓰여져 있었다.

이곳 해남도에는 민족의 분포가 그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탕탕탕!

소령은 닫혀진 절문을 두드렸다.

[아미타불... ]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중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여기서 용화사가 먼가요?]

소령이 물었다.

석두공은 암호로 구나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용화사의 간판을 보고 들어왔는데 용화사를 묻는다는 것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실수가 아닌가?

중이 합장하며 말했다.

[문안에 있으니 들어오시죠. 하루밤 유하고 가실 방은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기가 용화사라면 점을 치고 돌아가겠습니다. 물 한잔만 먹게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소령이 재빨리 대답했다.

중은 따라오라고 말한 후에 앞서들어갔다.

 

차락차락!

차락차락차락!

엿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나무통 속에서 울렸다.

석두공은 속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밤중에 점을 친다는 것도 별난 짓인데 그것도 엿으로 한다니... )

!

중은 눈을 감고 한참 나무통을 흔들더니 소령 앞에 놓았다.

[뽑으시오. ]

소령은 두손으로 하나씩 뽑았다.

그러자 중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빨리 도로 꽂으시오. 점은 오직 한번 만 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도 없소.]

!

소령은 두개의 엿을 젓가락처럼 나란히 놓으며 말했다.

[명을 받아라!]

순간 중이 넙죽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사부께서 기다리신지 오래입니다.]

[어디에 있소?]

소령의 물음에 중은 대답했고 석두공과 소령은 그 중의 사부라는 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전해듣자 마자 몸을 날려 오지산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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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六章

 

                密室機械人間 (1)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지하광장 바닥에 내려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지하광장에서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들이 십 여개나 있었다.

소령은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 비도에 적혀 있지 않았소?]

석두공이 물었다.

소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도에 적힌 것은 우리가 지나온 미로(迷路)뿐이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도 삼십 명의 고수가 죽어갔어요.]

석두공은 내심 섬득해짐을 느꼈다.

소령의 뒤에 있는 힘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수십 명의 고수들을 희생시키며 비밀을 캐왔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떤 전율같은 것이 느껴졌다.

소령은 자신이 무심결에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석두공은 횃불이 꽂혀있지 않은 문쪽으로 다가가 슬며시 밀어보았다.

그러나 석문은 안쪽에 빗장이라도 걸려있는 듯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때 소령이 다가와 석문의 아래부분을 발로 살짝 밀었다.

그그긍!

그러자 석문은 가벼운 소음과 함께 열렸다. 기관이 설치된 문이었던 것이다.

문을 지나자 긴 복도가 나왔다. 습기가 차있었으며 횃불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했다.

석두공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말했다.

[이곳은 위험하오. 아주... 조심해야 할거요. 내 뒤에서 한발짝도 떨어지지 마시오. ]

석두공에게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힘이 있었다.

어떤 위기를 재빨리 감지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자연의 재해(災害)에 대해서도 동물처럼 알아차리는 힘이 있었다.

동정호에서 큰 바람이 불어올 것을 미리 알고 경고를 해준 넉분에 풍래동자(風來童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그같은 타고난 위험감지의 능력덕분이었다.

그의 그런 본능이 지금 이 순간 위험을 말하고 있었다.

석두공은 경각심을 가지고 허리에서 천왕저를 뽑아들었다.

소령은 그의 신중한 모습을 보고는 덩달아 긴장하여 등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한데 석두공이 딱 한걸음 내딛는 순간이엇다.

쿠앙!

그의 뒤에서 굉음이 들리며 긴 철판같은 칼날이 횡()으로 복도를 가득 채우며 날아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나온 문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앞을 방비하던 석두공은 그것이 움직이는 순간 즉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엎드렸다.

슈앙!

등뒤에 있던 소령은 혼이 반쯤 달아난 상태에서 그의 몸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녀의 쪽을 지어 올린 머리카락이 베어져 나가 맨머리가 드러났다.

하나 위험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횡으로 복도를 매운 칼날이 지나가자 마자 다시 종으로 그와 비슷한 칼날이 석두공을 뒤에서 베어왔다.

쿠앙!

엄청난 빠르기, 또한 엎드리거나 굴러서 피할 수 있는 공격도 아니었다.

석두공은 벽으로 거미처럼 착 달라붙었다.

소령은 그의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힘대로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스팟!

칼날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등쪽 옷자락이 베어져 앞으로 사라지는 검을 따라 날았다.

차앗!

석두공은 번개처럼 앞으로 내달으며 칼날을 잡고 따라가려 했다.

한데 그 기관을 만든 자는 정말이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측한 자였다.

슈캉!

갑자기 그 칼날이 우뚝 멈추어 서고 양쪽 벽에서 두개의 칼날이 튀어나오며 석두공을 종으로 베어내렸다.

석두공의 형세로 말하자면 그는 칼날을 향해 뛰어든 꼴이 되고 말았다.

앗차했으나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

부웅! !

그의 천왕저가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퍼펑!

천왕저의 위력은 한마디로 절대! 그것은 칼날들은 모두 박살내버리고 말았다.

쐐애액!

석두공은 식은 땀을 흘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데 그 복도는 문이 없었다.

막다른 석벽이 그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석두공은 눈을 부릅뜨고 멈추려 했다.

순간 그의 귓전에 등에 매달린 소령이 짧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석두공은 그녀의 말에 따라 기계적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 직후였다.

파아앗!

그의 눈앞에 있던 석벽에서 수십 개의 예리한 칼날이 튀어나와 그의 발밑으로 지나갔다.

길은 소령의 말처럼 석두공의 머리위로 뚫어져 있었다.

머리 위로 부터는 계단이 있고 오르막이었다.

휴우!”

석두공은 그곳에서 일단 멈추어서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관이었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에 꼭 붙은 소령도 그제서야 공포가 밀려드는지 몸을 덜덜 떨었다.

진정 악마같은 기관이었다.

[우리가 오기는 바로 온 모양이오. 그렇지 않다면 길이 이토록 험할리 있겠소?]

석두공은 씽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은 소령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헌데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등이 쓸렁함을 느끼고 재빨리 손을 가져갔다.

뒷통수에선 머리카락이 만져지지 않았다.

또한 뒷 등의 옷이 넙적하게 베여져 나가 앞으로 벌어져 있었다.

[내머리! 내옷!]

소령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석두공은 겉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주었다.

소령은 면사로 가려진 얼굴뒤로 흐느끼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것이 그렇게도 서러운 모양이다.

석두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계단을 오르자 다시 삼십여 평 정도 되는 곳이 나왔다.

그곳에는 열한 개의 문이 있었다.

석두공은 방금 전과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경각심을 돋우고 제일 왼쪽에 있는 문을 발로 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령은 손으로 그 문을 당겼다.

스르릉!

[!]

석두공은 입맛을 다셨다. 이번은 미는 문이 아닌 당기는 문이었던 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

문을 열던 소령이 빽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

츠으으으!

열려진 그 문의 안쪽에서 새파란 눈동자 두개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러서시오!”

석두공은 소령의 앞으로 썩 나서면서 문안을 노려보았다.

그곳은 작은 석실이었다.

“....!”

석실 안에는 돌로 된 침상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 위에는 새파란 눈빛을 발하는 괴물같은 인간이 앉아있었다.

이 인물은 머리카락 한올없는 대머리이며 몸에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몸의 군데군데에 철판을 붙여놓은 것같은 실로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자였다.

그자는 석두공을 파릇파릇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석두공도 그자를 마주 노려 보았다.

엄청난 살기가 그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파파파팟!

불똥이 튈듯이 눈빛이 서로 마주친지 반각이 지났음에도 그 괴인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소령이 살그머니 석두공의 등뒤에서 나와 문을 밀어버렸다.

스르릉!

문이 닫혔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자가 기계인간인 모양이에요. 다른 석실도 한번 보기로 해요.]

소령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열 개의 석실, 그곳엔 모두 새파란 눈빛을 발하는 기계인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문을 석두공이 열었을 때 그곳에 있는 자는 새파란 눈빛을 가졌지만 기계인간이 아니었다.

그자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누구냐?]

얼굴이 세모꼴로 생긴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

번개처럼 뻗혀진 석두공의 천왕저가 노인의 머리에 닿았고 노인의 두개골은 항아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이곳을 관리하던 자인 모양이에요.]

소령이 석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곳은 다른 석실들과는 달리 여러 가지 기괴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또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도 있었다.

소령은 사람의 팔 모양으로 생긴 물건을 줏어들어 석두공에게 보여주었다.

[이 속에 절명화골침(絶命化骨針)이 장치되어 있어요. 다른 석실에 있는 열명의 괴인들이 모두 이런 팔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서운 일이에요.]

소령은 노인의 시체를 향해 그것을 겨냥하고 어느 부위를 건드렸다.

!

은빛 섬광이 손가락으로 부터 쏘아져나가 노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츠츠츠츠!

한데 그 순간부터 시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소령이 그 팔모양의 물건을 내려놓을 때는 이미 시체는 백골만이 남아있었다.

진정 무시무시한 독이었다.

석두공이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이 문뒤엔 무엇이 있는지 한번 봅시다.]

석실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을 소령이 당겨 열었다.

 

좁은 회랑(回廊),

돌로 된 석벽들에 마치 장식물처럼 새파란 눈빛을 발하는 괴인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양쪽 벽면에 등을 붙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그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구십 개였다.

소령이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들은 완성된 것인 모양이에요. 모두 깨뜨려 버리세요.]

헌데 그때였다.

그그긍!

회랑의 끝부분의 석벽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 누구냐!]

들어선 자는 석두공과 소령을 발견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동시에 석두공의 손에서 흰 백광이 날았다.

!

그자의 머리에 구멍이 뚫리며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드드드드...

고이한 소리가 갑자기 회랑을 울리더니 석벽에 붙어있던 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명이 더 있었어요. ]

소령이 소리쳤다.

과연 열려진 석문의 뒤에서 누군가가 작은 깃발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기계인간들은 그것에 의해 조종되는 것같았다.

 

기계인간들의 처음 동작은 상당히 느렸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갑자기 빨라졌다.

쏴아아아!

기계인간들은 새파란 눈으로 흉폭한 살기를 발하며 석두공과 소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

키이이!”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석두공은 벼락같이 천왕저를 뻗어내며 소리쳤다.

[금강일타(金剛一打)!]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의 하나인 금강저의 수법이었다.

!

그의 좌측에서 덮쳐들던 자의 어깨가 완전히 부서졌다.

피가 금속조각과 함께 터져나왔다.

파앗!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 기계인간의 왼손은 석두공의 목을 찔러오고 있었다.

석두공은 고개를 돌려 피하며 그자를 젓혀두고 다른 자를 공격했다.

!

그의 천왕저에 배를 맞은 자가 등이 터져나가며 고꾸라졌다.

원래 이들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는 도검불침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석두공의 천왕저는 상고시대의 병기로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었다.

천왕저에 격중된 것은 무엇이든 간에 폭죽이 터지듯이 터져버렸다.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기계인간들은 인간의 몸에 특이한 장치들을 단 것들이었다.

극악한 마공을 주입하여 그 마공으로 하여금 쇠붙이를 몸속에 박아넣고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완전한 기계가 아니고 인간을 도구로 만든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마공으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 지라 지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령도 퉁소를 뽑아서 자신을 방비하고 있었다.

석두공이 기계인간들을 상대하고는 있었지만 그 기계인간들의 공격은 예측불허였다.

석두공은 그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그들을 상대할 뿐 몇 초식을 펼친 후부터는 제대로 수법조차 펼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계인간들은 전신으로 공격해왔다.

그 때문에 몸의 어느 한 곳을 공격해서는 소용이 없었다.

팔은 팔대로 뻗어오고 주먹은 주먹대로 휘둘러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절명화골침을 발사했다.

배가 터져나갔는데도 입안에서 예리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다다다다닥!

석두공은 철판위에서 콩이 튀듯이 빠르게 움직이며 공방을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무의식중에 천왕저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런 형편이니 소령은 자신을 스스로 방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석두공이 대부분을 막아주고는 있지만 어느 구석에서 그녀를 향해 기계인간이 덮쳐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날아들지도 모를 독침을 대비하여 퉁소로 무형의 강막을 만들며 소리쳤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난들 어쩌겠소? 이들은 괴물들이오.]

석두공이 그 다급한 중에도 대답했다.

소령이 다시 소리쳤다.

[정말 몰라서 그래요? 그 천신폭풍본가 하는 것은 어디 써먹으려고 아껴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떠는 것을 느꼈다.

석두공이 어느새 그녀를 안아들고 있었다.

[진작 말하지 그랬소?]

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폭풍같은 강기가 일어났다.

파파파팍!

그에게로 다가들던 기계인간의 몸이 가루가 되어버리며 혈무가 자욱하게 뿌려졌다.

쿠아아아앙!

화약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이 석두공의 좌우에 있던 석벽이 터져나갔다.

콰아아아--󰠏󰠏!

석두공은 천신폭풍보를 펼쳐서 그대로 달렸다.

콰드드드!

기계인간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석벽이 터져나가고 천정이 무너져내렸다.

쿠르르르릉!

소령이 석두공의 품에서 소리쳤다.

[내친 김에 모두 부셔버려요!]

콰르르릉!

석벽들은 종이조각 처럼 찢겨나가고 석두공은 무인지경으로 석벽이고 어디고간에 무작정 뚫고 나갔다.

그의 몸 주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터져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다른 문에서 몇 명의 흑의인들이 뛰쳐나오다가 천신폭풍보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침내는 지하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가공할 천신폭풍보의 위력!

그것을 어찌 인간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 무공이 천신폭풍보인지를 절감하게 했다.

석두공의 품에 안겼던 소령마저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아!

석두공은 수직으로 솟구치며 땅을 뚫고 올라왔다.

드드드드...

연하봉의 단애가 허물어져 버렸다.

스스스!

땅을 뚫고 날라오른 후에도 어두운 암천(暗天)으로 수십장을 치솟아 올랐던 석두공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그의 몸에는 자신이 다스리기 힘들 정도의 거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석두공은 천신폭풍보의 위력에 스스로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펼칠 때 마다 위력이 가공해지고 있다. 이 무공은 정말로 천신(天神)의 힘을 빌리기라도 한 듯 엄청나다. 결코 내 능력이 아니다.]

석두공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천신폭풍보라면 세상을 송두리채 파괴할 수도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으로 이 천신폭풍보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석두공은 소령을 안고 연화봉을 내려갔다.

천신폭풍보를 다시 펼친다는 것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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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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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가공, 천신폭풍보 (2)

 

 

 

해남도(海南島)까지 며칠이면 갈 수 있겠어요?”

동백산(桐栢山)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의 야산, 큰 소나무 아래에 한쌍의 남녀가 등을 마주 기댄 채 앉아있다.

그들은 석두공과 소령이었다.

소령의 물음에 석두공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하루 밤낮으로 곧장 달려간다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소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농담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셔요.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그럼 이틀이라고 합시다.]

석두공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소령이 눈썹을 상큼 치켜뜨고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이러기예요? 중요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왜 내말을 못 믿소? 내가 언제 농담을 한 적이 있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소?]

석두공은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소령의 눈이 다시 크게 떠졌다.

[그럼 정말 그 먼길을 이틀에 갈 수 있단 말이에요? 설마 날아가기라도 한단 말이에요?]

[나도 잘은 모르오. 그만큼 달려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마 그 비슷할 거요.]

석두공은 풀잎을 씹으며 말했다.

그들은 조금 전에 동백산의 동백파(冬柏派)를 방문하고 내려온 길이었다.

석두공은 소령에게 홀린 듯이 끌려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아는 것인지 부운청풍객 등이 손을 뻗치는 곳을 신통하게 찾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석두공은 그러한 계획을 세우기는 했었지만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은 소령 그녀였으며 석두공의 역할은 현재 그녀의 수족이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그녀는 묘한 마력(魔力)으로 석두공을 사로잡아 버렸으며 석두공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마음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기쁨이기도 했지만...

소령이 발딱 일어서면서 말했다.

[동백파에서 그들을 죽인 건 정말 잘했어요. 피곤하겠지만 우리 해남도로 가요.]

[해남도에도 그들이 손을 뻗친단 말이오? ]

석두공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소령은 신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가보면 알일 아녀요? 빨리 일어서요.]

옷깃을 잡고 일으키는 그녀에게 끄질려서 석두공은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등에 전해지던 뜨뜻한 감촉이 사라지고 나니 썰렁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서 가요.]

소령은 석두공의 왼팔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향긋한 그녀의 냄새가 석두공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했다.

그 순간 소령은 그의 허리를 꼬집으면서 따끔하게 말했다.

[엉뚱한 상상은 하지도 말아요. 당신은 여자에게 약해서 큰일이에요. 영웅의 무덤 오직 미녀의 가슴이란 것을 잊지 말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 당신을 만나고나선 내가 어디갔는지 없어져 버린 느낌이오.]

석두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소령은 코웃음을 쳤다.

[제가 미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한번도 본적이 없을 텐데...]

석두공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미인일 것이오. 남을 배려하는 그 마음씨와 영롱한 음성, 그리고...]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소령은 석두공의 말을 끊었다.

석두공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다.

정작 석두공이 말을 멈추자 소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석두공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또한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소령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제 제 말에 화가... 났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나 석두공은 화석이 된듯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몸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휘루루루룽!

쏴아아아아!

강한 바람이 일어나면서 그의 옷깃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령은 그의 팔을 꽉 잡으며 소리쳤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

그녀의 음성은 울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휘루루룽!

파라라락!

석두공의 몸에서는 더욱 강한 기운이 발산되면서 그녀의 옷자락마저 찢어버릴 듯이 펄럭이게 했다.

그녀는 석두공의 화석같은 표정도,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풍같은 기운도, 그 모두가 두려워지면서 석두공을 꽉 껴안으며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아아아앙!

그녀는 자신의 발이 땅을 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자신의 팔뿐만 아니라 석두공의 팔도 자신을 꽉 껴안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바람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들려왔다.

소령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석두공과 자신이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석두공은 강호에 출도해서 처음으로 천신폭풍보(天神暴風步)를 펼친 것이었다.

고오오오!

한마리의 천룡(天龍)이 날아가듯 그의 몸 주위에는 강기의 막이 길게 펼쳐져있었다.

자칭 고금제일인인 폭풍무존의 모든 것이 집결되어 있는 천신폭풍보다.

그것은 결코 범상한 고수가 아닌 소령조차도 눈을 떠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 ×

 

(이거야 정말 폭풍 그대로군. 두번째 펼치는 것이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달리면 달릴 수록 더욱 달리고 싶다. 그리고, 몸속에서는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을 것같은 힘이 꿈틀거린다.)

석두공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

그의 품에는 소령이 눈을 꼭 감은채 그의 목을 틀어안고 있었다.

석두공은 작은 산도 그냥 날아 넘고 강도 그냥 날아 넘었다.

무엇 하나 그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가 낮게 날아가면 그 주위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렸다.

바위도 가루가 되었으며 나무도 가루가 되어버렸다.

실로 엄청난 천신폭풍보의 위력이었다.

 

얼마를 달리자 산중으로 접어들었는데 해가 졌다.

산은 그들의 앞을 거대한 담장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휘루루루룽...

석두공은 큰 바위위로 신룡처럼 날아내렸다.

콰우우우우...

그가 내려선 주변의 바위와 나무들이 깨어지고 날아가며 황폐하게 변해버렸다.

소령이 눈을 꼭 감은 채 물었다.

[벌써 해남도에 도착한 건가요? ]

[아니오. 아마도 형산(衡山)인 듯 한데 해가 졌소.]

석두공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했다.

소령은 얼른 그를 밀치고 품속에서 빠져나오며 토라진 소리를 했다.

[형산이라구요? 아직 반도 못 왔군요. 그건 그렇고, 제 간을 반쯤 오그라들게 한 건 어떻게 할 거예요? 세상에 이런 무식한 신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만든 게 아니오. 나도 배웠을 뿐이니 나를 탓할 것은 없소. 그분이 아직 살아계시니까 따지고 싶으면 그분에게 따지시오.]

석두공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말했다.

그녀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것같은 승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겨우 여자를 놀라게 하고서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깜짝 놀랐다.

(... 졸장부 중에서도 졸장부구나. 내가 겨우 이렇게 밖엔 안된단 말인가?)

한데 소령이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떠듬떠듬 물었다.

[... 그 신법을 만든 분이 아...아직 살아계시다고요? 대체 어 어떤 분이 그런 신법을 만 만드셨어요?]

[말해도 아마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언젠가 한번 만날 지도 모르겠소.]

석두공은 폭풍무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천 년 전의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한다면 누가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말해봤자 자신만 놀림감이 될 것같아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필 이런 곳에서 멈췄어요? 산사나 암자 근처에서 내렸더라면 밤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

소령은 주위를 둘러보고 투덜거렸다.

석두공이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적당한 동굴이나 찾아서 쉬고 갑시다.]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형산이라면 당신이 또 해야할 일이 있어요. 해남도에 갔다 오면서 들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이곳의 일부터 보게 됐군요.]

석두공은 생각했다.

(도무지 이 소저는 모르는 게 없다. 어떻게 해서 형산에도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을 안단 말인가? 지금까지 나를 데리고 돌아다닌 곳이 모두 삼마경을 익힌 자들의 공격이 있는 곳이거나 음모가 있는 곳이었다. 항상 나와 같이 있어 떨어질 때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때 소령이 주위를 살펴보고 말했다.

[이곳은 아마도 망월대(望月臺) 근처인 것같아요. 연하봉(煙霞峰)으로 가도록 해요. 저쪽이에요.]

스읏!

석두공은 그녀의 손을 잡아쥐고 훌쩍 몸을 날렸다.

어쩌면 그녀에게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가 원하던 일들을 그녀의 도움으로 편하게 해왔었다.

뒤의 일은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잠시 후 석두공은 소령과 함께 운무 자욱한 연하봉 아래에 도착했다.

소령은 정상을 유심히 보고 그 후에 부용봉(芙蓉峰)의 정상을 살펴보더니 먼저 몸을 날렸다.

휘이익!

석두공은 유유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소령은 그가 바로 뒤에서 들으리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혹시 기둥처럼 생긴 바위를 보면 말씀하세요. 그곳이 우리가 목적지예요. ]

[그럼 더 갈것도 없소. 저 바위가 기둥같이 보이오.]

석두공은 그녀 앞에 훌쩍 날아내리면서 말했다. 그의 손이 앞을 가리킨다.

헌데 소령은 석두공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저게 어떻게 기둥같이 생겼어요? 저건 꼭... ]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렀다.

석두공이 가리킨 바위는 일장 정도 높이의 남근석(男根石)이었다.

소령은 와락 석두공을 밀쳐버리려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

그녀의 은근한 속삭임에 석두공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닿을 듯 말듯 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소령은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재빨리 빠져나가 달려가 버렸다.

석두공은 허전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몰라서 고개를 흔들고는 소령의 뒤를 따라갔다.

소령은 자신을 유혹하는 듯하면서도 그런가 하면 또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휘이이익!

연하봉을 올라가던 소령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길이 끊어지고 단애가 양쪽으로 있는 곳이었다.

건너가자면 날아넘어야만 했다.

석두공은 그녀의 곁에 내려서며 물었다.

[여기가 거기요?]

[아마도 그런 것같아요. 하지만 그 기둥같은 바위를 찾을 수가 없네요.]

소령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석두공은 오른손을 들어 맞은 편 단애의 중간 정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흰기운이 단애를 어슴푸레하게 가리고 있는 곳이었다.

[혹시 저것 아니오?]

밤은 어두운 밤이다.

더구나 석두공이 가리킨 곳은 짙은 운무(雲霧)가 깔려 있어 대낮에도 보기가 힘든 데였다.

소령은 안력을 모았으나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바위가 어떤 모양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소령이 아미를 모으며 말했다.

[... 정말 기둥같이 생겼소. 밑에는 주춧돌이 있는 것같고 위에는 상량을 얹기 위한 받침이 있는 것같소. 한데 기둥이 손가락 같이 세 마디로 된 것같구려.]

석두공은 보이는 데로 설명했다.

그러자 소령은 낮게 외쳤다.

[바로 그곳이에요.]

스읏!

그녀는 먼저 몸을 날려 운무 속으로 뛰어들었다.

앞이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조심하시오!”

석두공은 깜짝 놀라며 그녀 곁으로 날아갔다.

화라라라락!

하지만 석두공의 근심과는 달리 소령은 두 소매를 새처럼 펼치며 바람을 받아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봉황비(鳳凰飛)의 신법... )

석두공은 내심 중얼거리며 똑같이 봉황비를 펼쳤다.

그렇게 하자 자신과 소령이 한쌍의 봉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슷!

소령은 운무속에서 기둥바위를 발견하고 소리없이 그 곁으로 날아내렸다.

그녀는 행여나 석두공이 무슨 말이라도 할까봐 입가에 손을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텐데... )

소령은 바위틈 새를 살피다가 횡으로 가늘게 그어진 두 선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것은 마치 도()자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소령은 그 글자가 씌여져 있는 아래의 돌멩이를 치우더니 작은 옥병(玉甁)을 하나 찾았다.

!

옥병이 그녀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손바닥에는 한장의 비도(秘圖)가 남게 되었다.

석두공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소령이 그런 것이 있을 줄 알았을까?

아마도 소령의 배후에는 거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소령은 기둥바위의 뒤쪽에서 일장 높이 정도 되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을 힘껏 미세요. ]

석두공은 가만히 서서 장력을 움직여 그곳을 밀었다.

그긍!

순간 절벽의 한틈이 쏙 밀려들어가며 한사람이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스읏!

소령은 재빨리 몸을 날려 그곳으로 들어갔다.

비좁아서 무릎으로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석두공은 그녀의 뒤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따라가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는 탱탱하기 이를데 없는 그녀의 둔부만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기어갔다.

좁고 긴 동굴은 이리저리 휘어지고 내리막도 있었으며 오르막도 있었고 또한 미로처럼 갈림길도 있었다.

그러나 소령은 한번도 망설이지 않고 한 방향을 택해서 나아갔다.

석두공이 전음으로 물었다.

[이곳은 누가 만든 것이오?]

[원래는 천연동굴이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만들기까진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죠.]

소령의 대답이 역시 전음으로 들려왔다.

석두공은 다시 물었다.

[여기엔 뭐가 있소?]

[알게 되면 천하의 당신이라 해도 깜짝 놀랄걸요.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직접 보세요.]

스팟!

갑자기 소령이 눈앞에서 사라지며 말했다.

동굴은 갑가기 끝이 나면서 아랫쪽으로 뻥뚫려 있었고 소령은 그 아랫쪽으로 거미같이 달라붙어 내려가고 있었다.

석두공도 급히 동굴을 빠져나왔다.

석두공과 소령이 동굴을 통해 이른 곳은 거대한 지하광장의 천정 부분이었다.

소령이 두손과 두 발로 거미처럼 천정에 달라붙은 자세로 석두공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곳 어딘가엔 잔혼살객이 만들고 있는 기계인간(機械人間)이 숨겨져 있어요. 그것을 파괴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거예요.]

[기계인간?]

석두공도 두손과 두발로 엉금엉금 광장의 천정에 달라붙어 이동하며 반문했다.

[자세한 것은 저도 몰라요. 다만, 그것들은 끔찍한 살상력을 지녔다는 것 정도밖에... ]

소령은 빠르게 말하고는 능숙한 벽호공(壁虎功)을 펼쳐서 천장에서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읏!

석두공은 천정에 자신의 몸을 달라붙여 놓았던 두손과 두발을 놓았다.

그러자 그의 몸이 무게 없는 깃털처럼 천천히 아랫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로 천신폭풍보의 한 묘용이다.

소리없이 날아내리는 석두공의 모습은 마치 신선처럼 신비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천신폭풍보를 경험해보았던 탓인지 소령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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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五 章

 

               可恐! 天神暴風步!

 

 

 

-호조산(虎爪山)!

 

산의 생김새가 일단은 넙적하면서도 날카로운 호랑이의 발톱을 닮아서 그런지 이곳은 옛날부터 유달리 호랑이가 많았다.

한 산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만 산다는 말도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서는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았다.

()에서 많은 고수들을 동원해서 사냥하곤 했으나 번번이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한 두 마리의 호랑이라면 그렇게 해서 사냥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호조산에는 토끼보다 흔한 것이 호랑이였다.

그 엄청난 수의 호랑이들과 싸운다는 것은 실로 일국(一國)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한데 사십여 년 전에 한 청년이 호조산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은 변해버렸다.

어깨에 긴 칼을 비끌어 맨 그 사나이는 어떤 사냥꾼도 군침만 삼킬 뿐 들어가지 못했던 호조산으로 들어갔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은 아까운 젊은이가 또 하나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헌데 그가 호조산으로 들어간 후 호환이 점점 줄어들더니 세달 째 되던 날에는 호환이 뚝 그치고 말았다.

밤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마을 사람들은 밤이 되어도 고요하자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며칠 후에 설곽(薛藿)이란 이름의 그 청년이 다시 호조산을 내려왔을 때, 그의 뒤에는 거대한 백호(白虎) 한 쌍이 따르고 있었다.

설곽은 마을의 청년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고 호조산중에 호표장(虎豹莊)이란 장원을 세웠다.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던 호랑이들과 표범들은 그의 앞에서 순한 양처럼 길들여진 뒤였다.

이 공으로 인해 설곽은 황실에 호피를 독점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호표장의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으며 설곽은 호피를 팔아서 엄청난 재물을 얻었다.

한마디로 설곽은 무림인이면서도 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

 

호표장(虎豹莊)은 호조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호표장은 지금 청의를 입은 검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십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들의 시체가 그 청의검객들의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 청의검객들을 눈에서 불을 뿜는 듯한 호랑이와 표범들 수천 마리가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호표장의 대전,

호피가 드리워진 태사의에 앉은 한 노인이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다.

[노부는 무림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한데도 부운청풍객이 먼저 나를 건드리고 이제 와서는 복종을 맹세하라고? 크하하하하... 정말 개가 웃을 일이다. ]

광소가 터져 나오고 그의 앞에 선 세명의 청의인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세 청의인들 중 키가 작고 몸이 약간 똥똥한 자가 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일갈했다.

[설곽! 거역하면 죽음뿐이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렁!

크왕!

설곽의 양쪽에서 마치 대리석으로 깎아세운 석상같이 앉아있던 두 마리의 백호(白虎)가 포효하며 벌떡 일어섰다.

[!]

검을 잡았던 청의인은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백호의 포효성은 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우렁찼다.

그 뒤를 이어,

크왕!

으으릉!

호표장의 주위에 있는 모든 호랑이들과 표범들이 포효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

호표장을 포위하고 있던 청의검객들 중 몇 명이 덜덜 떨면서 바지에 오줌을 쌌다.

또 어떤 자는 근육이 녹신해오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똥을 싸기도 했다.

수천마리의 호랑이와 표범들이 발하는 위세는 실로 가공한 것이었다.

설곽은 만족스러운 듯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놈들은 사람을 잘못 봤다. 노부는 결코 부운청풍객 따위에게 머리를 숙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또한, 노부를 먼저 건드린 자는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세명의 청의검객 중 깡마르고 키가 큰자가 검을 뽑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그런 말은 죽어서나 하시지!]

파앗!

그는 발검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백호를 막아라!]

다른 두명의 검객도 날아오르며 각기 한마리의 백호를 향해 날아갔다.

번쩍!

[!]

설곽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자신을 찔러오는 검광에 눈을 부릅떴다.

(겨우 심제을의 수하에 불과한 자의 검술이 이렇게 뛰어나다니...)

하지만 설곽의 몸은 그 경악의 순간에도 동물같이 반응하며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

그가 앉아있던 태사의가 반듯하게 둘러 나눠졌다.

설곽은 허공에서 도를 뽑아 깡마른 청의검객을 겨누며 소리쳤다.

[오호도장강(五虎渡長江)!]

쩌러렁!

순간 설곽의 도에서 다섯 줄기의 흐릿한 안개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희미하나마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의검객은 돌연 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검막을 형성하며 소리쳤다.

[피해라! 도강(刀罡)이다.]

설곽의 무공은 강호에 알려진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비록 아직까지 뚜렷한 형체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번 도를 휘둘러 다섯 줄기의 도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는 무림에서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파악!

청의검객은 가까스로 도강을 피하기는 했지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우웃!]

백호와 싸우던 두 사람도 도강을 설곽이 펼쳐낸 도강을 보고는 혼비백산했다.

[일단 이곳을 뜨도록 하자.]

청의검객은 벽을 넘어 날아오르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크왕!]

두마리의 백호가 벼락처럼 그를 덮쳤다.

[으아아악!]

퍼퍼퍽!

청의검객의 몸은 순식간에 백호의 발톱에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다.

오호단혼도 설곽이 바닥에 내려섰다.

동료의 몸둥이가 걸레쪽처럼 찢어지는 것을 본 다른 두명은 너무 놀라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설곽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닌 인물이 단지 일개 방파의 방주로 지내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설곽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부운청풍객, 그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다.]

[존명!]

그의 부하들이 재빨리 움직여 청의검객들의 혈도를 찍었다.

이미 우두머리의 죽음을 목격한 그들인지라 아무도 반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혈도가 찍혔다.

설곽은 오만하게 말했다.

[당했던 만큼의 모욕은 천천히 갚아준다. 부운청풍객!]

그는 뒤돌아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그의 곁으로 어슬렁거리며 두 마리의 백호가 따랐다.

 

“....!”

“....!”

호표장의 전각 들 중의 하나의 지붕에는 언젠가부터 흑의를 입은 두 남녀가 서있었다.

그들은 호표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었다.

두 남녀는 석두공과 소령이었다.

[설곽이란 저 노인은 천산백호사(天山白虎寺)의 무공을 익혔군.]

석두공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소림사에서 만배선사에게 죽도록 얻어맞아 기억력을 회복한 그는 무림에 전해지는 거의 모든 무공과 수법에 대해서 훤히 궤뚫고 있었다.

덕분에 설곽이 시전한 도법의 내력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무림에 흔히 알려진 그런 오호단혼도가 아닌, 진짜 오호단혼도(五虎斷魂刀)를 익혔군요. 화후가 거의 구성(九成)에 달했어요.]

소령이 대꾸했다.

석두공은 그녀 역시 천산백호사에 대해서 아는 듯하자 내심 놀랐다.

천산백호사는 머나먼 서쪽의 천산에 자리한 탓에 중원무림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새삼스레 소령을 한번 더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헛걸음을 한 것같소. 저 노인의 실력이면 혼자서도 저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이오. 더구나 이미 검종맹의 수하들은 모두 제압되고 말았소.]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원래 무너지는 것은 안이 먼저고 그 다음이 밖이죠. 내우외환(內憂外患)은 항상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소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석두공이 물었다.

[그럼 내부에 배신자가 있단 말이오?]

[가서 직접 보시면 아실 것 아녀요?]

소령은 그의 손을 잡아 끌면서 말했다.

석두공은 흠칫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

소령은 석두공의 수줍어하는 반응에 입을 가리며 웃엇다.

스스스!

그리고는 연기처럼 전각 밑으로 내려갔다.

귀신같이 재빠르면서도 기척이 없는 신법이었다.

석두공은 혀를 내두르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체 사문이 어디기에 번번히 다른 무공을 사용한단 말인가? 하나같이 익히기 쉽지 않은 절학들을... ]

석두공 자신과 금사종 이외에 또 천하의 각종 무공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 × ×

 

스슷!

석두공과 소령은 천정에 붙어서 설곽이 있는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들보에 모습을 숨기고 내부를 살폈다.

아래쪽에 설곽과 한 쌍의 남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한 쌍의 남녀중 남자쪽은 마치 곰처럼 덩치가 컸으며 여자는 반대로 호리호리하면서도 요염한 듯보였다.

설곽의 성난 음성이 석두공의 귀로 들려왔다.

[정양(鄭陽)! 당장 가까운 검종맹의 지부로 달려가서 일백 명의 목을 베어오너라. 빚은 즉시 즉시 갚아야 한다.]

석두공은 내심 생각했다.

(저 사람의 말은 앞뒤가 다르구나. 밖에선 분명히 천천히 갚아준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는 즉시 갚아야 한다고 말하니... )

그때 그의 귓속으로 소령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의 말은 천천히, 오랫동안 갚아주겠다는 말이었어요. 아마 저런 식으로 해서 수백배는 갚아주겠죠.]

그녀는 또 다시 석두공의 마음을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래에서 정양이라고 불린 거한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종맹에 대항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부.]

[뭐라고?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단 말인가?]

설곽이 버럭 고함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정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호표장을 보전하기 위해선 검종맹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말이 그말 아닌가?]

설곽은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정양은 고개를 꼿꼿히 들면서 말했다.

[사부께선 이미 검종맹에 패했습니다. 더이상 재고할 것도 없습니다.]

닥쳐랏!”

추릿!

설곽은 도를 뽑아들면서 정양의 가슴에 갖다대며 말했다.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무림에 관여하고 싶었다면 왜 호표장을 세우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겠느냐.]

추상같은 설곽의 기세에도 정양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사부께선 그것때문에 패했습니다.]

[이놈이... ]

설곽은 도를 정양의 가슴으로 더욱 바싹 밀어부쳤다.

그의 수염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순간 설곽의 다른 제자인 황시연(黃翅燕), 즉 가날픈 몸매의 여인이 설곽의 뒤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우린 사부처럼 숨어서 살긴 싫어요.]

[!]

설곽은 등줄기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 눈앞에서도 백색의 도광이 치솟고 있었다.

파앗!

곰같이 생긴 정양의 손이 번개처럼 도를 뽑으며 설곽의 목을 베어오고 있었다.

[크으악!]

콰당탕!

설곽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베어지며 오른팔이 성둥 잘려서 떨어졌다.

그런 그의 등에는 예리한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찰라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네놈들이... ]

원한에 찬 눈동자로 설곽은 두 남녀를 노려보았다.

정양은 피묻은 도를 설곽의 목에 갖다 댔다.

[잘 가시오 사부!]

[마무리는 내가 하겠어요.]

황시연이 설곽의 가슴을 밟았다.

[내가 네 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배신을!]

설곽은 피에 젖어 분노로 떨며 말했다.

황시연이 발로 정양의 도를 내리 밟았다.

!

예리한 칼날이 설곽의 목으로 파고들어갔다.

한데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 카가각!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며 설곽 목으로 파고들던 칼날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허억!”

[누구냐?]

정양과 황시연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스스슷!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나며 차갑게 내뱉었다.

[스승을 해치는 자들이 여기도 있었군.]

정양과 황시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

그들의 앞에도 검은 옷을 입은 면사여인이 떨어지면서 설곽의 몇 군데 혈도를 짚었다.

황시연이 물었다.

[... 당신들은 누구냐?]

너무 놀라 말을 앞으로 하는지 뒤로 하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면사여인, 즉 소령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석두공에게 말했다.

[이들은 기사멸조(欺師蔑祖)의 대죄를 범했어요. 그래도 살려두실 건가요?]

[무슨 허튼 수작이냐?]

쩌러러렁!

정신을 차린 정양이 도를 벼락처럼 휘두르며 소리쳤다.

설곽의 무공을 거의 전수받았는지 정양의 도법도 가공한 데가 있었다.

하기사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암습이기는 했지만 설곽을 벨 수 있었겠는가?

소령은 덮쳐드는 정양에게 차갑게 소리쳤다.

[짐승같은 놈!]

파앗!

다음순간 그녀의 예쁜 손바닥이 도의 숲을 헤치고 정양의 눈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실로 귀신을 방불케하는 쾌속한 솜씨였다.

!

정양의 몸이 기우뚱 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 몸위로 정양의 머리가 떨어져 나뒹굴었다.

부릅뜬 그의 눈은 도무지 믿지 못한다는 불신을 가득 담고 있었다.

소령의 일장에 정양의 머리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일섬단주장법(一閃斷柱掌法)!]

석두공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이 순간 황시연은 혼이 반쯤 달아나 버렸다.

끔찍한 정양의 죽음에 그녀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녀의 치마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만 오줌을 싸고 만 것이었다.

소령이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 추한 꼴을 보고 싶어요?]

[제발 목숨만...]

황시연은 얼어붙은 혀를 간신히 놀렸지만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석두공의 손가락이 그녀의 미간에 닿아있었다.

!

황시연은 핏물속에 쓰러졌다.

설곽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분은 누구신가? 검종맹에서 온 것같진 않은데...]

소령은 석두공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말했다.

[몸이나 잘 돌보세요. 우린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렸을 뿐이니까요.]

[....잠깐... ]

석두공은 그녀에게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귓속으로 파고든 소령의 전음은 그를 꼼짝 못하게 했다.

[아무리 배신한 제자지만 수십 년 키운 그 제자를 죽인 자를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또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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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四 章

 

                  始作된 곳에서 始作

               

 

 

동쪽 능선이 붉게 물들고 하늘 높은 곳에서 부터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은 사라지고 붉은 수레바퀴가 동쪽에서 부터 불끈불끈 치솟아올랐다.

눈부신 빛이 석두공의 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발이 우뚝 멈추어섰다.

긴 꿈이 끝나고 드디어 눈을 뜬 아침같았다.

석두공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부는 내게 십대고수들끼리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중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부운청풍객 등이 삼마경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들을 죽이는 것이 내 임무다.]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앞으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석두공의 모습은 그 마을로 사라져갔다.

 

* * *

 

동정호(洞定湖)!

맑은 물결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수양버들을 흔들어 놓는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뱃놀이 나온 유람객들의 유람선과 어부들의 고깃배가 한가롭게 물위를 오가는데,

“....!”

언젠가부터 물위를 미끌어지는 작은 배의 선수(船首)에 서서 멀리 호면을 바라보고 서있는 청년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균형잡힌 몸매, 눈부신 백의는 그 청년의 수려한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는데 그는 약간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사부...!]

명문세가의 귀공자처럼 보이는 청년, 그는 바로 석두공이었다.

지난 한달 동안 그는 발빠른 행보로 천하의 동정을 두루 살피고 다시 동정호로 돌아왔다.

그가 본 바로는 천하는 이미 부운청풍객 등 삼인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대항할 힘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석두공도 그러하거니와 자칭 고금제일인인 폭풍무존 또한 있지 않은가?

석두공은 고검장의 폐허에도 가보았지만 고검장주 섭군천은 어디론지 떠나고 찾을 수 없었다.

동정호로 돌아온 석두공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미 천하는 그 혼자의 힘으로 돌이킬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세상은 극도로 혼란스러우며 옳바른 뜻을 세우고 정의를 숭상하던 자들은 오직 두가지의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굴복하느냐 아니면 잠적하느냐...

바야흐로 사마의 창궐은 극에 달했으며 무림에서 도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짐승같은 속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제자가 뜻이 같지 않은 사부를 죽이는 일이 그다지 기문(奇聞)이 아니게 되었고 수십 년을 사귀었던 친구지간이 원수로 돌변하여 죽고 죽이는 것도 더문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의 가치관도 파괴되어 그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석두공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무림은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무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주어야만 한다.]

그렇다. 누군가가 이 혼란스런 무림에 혼란을 걷어내고 새 질서를 부여해 주어야만 한다.

그것은 당금 무림에서의 지각있는 모든 인사들의 바람이고 뜻이기도 했다.

석두공은 스스로 그 일을 떠맡으려고 하는 것이다.

촤아! 촤아!

배는 점점 호수 가운데로 다가가며 오년 전 석두공이 사부인 동호천을 모시고 살았던 부주가 있었던 곳 근처로 향했다.

그때 노를 젓던 늙은 사공이 말했다.

[공자님! 우리 배는 지금 몇 해전만 해도 결코 갈 수 없었던 곳을 지나고 있읍지요.]

석두공은 미소를 지었다.

사공은 그가 흥미를 갖는 것같자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객지에서 오신 분들 중에서 이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이 늙은이의 말은 오로지 진실입니다. 이곳엔 한때 북을 쳐서 바람을 부르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치는 북소리가 동정호 곳곳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지요.]

사공은 눈앞의 청년이 바로 그 소년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북소리가 끝나기 전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해서 물속에 빠져죽은 사람들의 수만도 수십 명에 이르지요. 한데, 그 소년에게 구원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에는 그 소년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소년을 마귀라고 두려워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 소년이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오?]

석두공은 짐짓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물었다.

사공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있던 부주는 불타서 가라앉아 버리고 그 소년은 사라져 버렸지요. 들리는 말로는 그 악행이 하늘에 달해서 벼락이 떨어졌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의 말로는 그 소년은 천상에서 도망친 풍신(風神)이었는데, 함부로 바람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신선들이 신장들을 거느리고 내려와서 죽였다고도 하지요. 그때 떠도는 말로는 소년이 하도 무서운 힘을 지녀서 신장들이 모조리 죽고 신선들도 도망쳤다고 하더군요. 동정호의 물이 신장들이 흘린 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지지요.]

석두공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한 평이 아주 상반될 뿐만 아니라 아주 과장된 면도 있었다.

무림인이 아닌 세상의 속인들의 말이니 새겨들을 것은 없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이 모두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측면과 말로 떠돌 수 없는 사연들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니...

대성인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믿기 어렵거늘 하물며 세상의 떠도는 말을 믿을 손가?

 

사공의 이야기는 석두공에게 모든 것은 그 이면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문득 석두공이 말했다.

[노인장, 그만 여기에 멈추시오.]

배는 부주가 있던 곳에서 맴돌았다.

석두공은 보자기를 풀어서 챙겨왔던 술과 고기를 뱃전에 놓았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잔에 가득 술을 따른 후 호수를 향해서 두번 절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이날 석두공이 기억하는 바로는 그의 사부 동호천의 기일(忌日)이었다.

늙은 사공은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풍래동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럼 혹시 이 공자도 하늘의 천신?)

사공의 손과 다리가 달달 떨렸다.

풍래동자가 풍신이었으니 만큼 그의 눈앞에 있는 청년은 어쩌면 뇌신(雷神)이나 우신(雨神)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공은 호수에 술을 붓고 있었다.

오년 만에 돌아온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집이었다.

석두공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부... 이곳에서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난세가 여기서 시작되었듯이... 저도 여기서부터 천하를 평정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난세가 시작된 곳에서 천하의 평정도 시작해 나가겠다는 석두공의 맹세...

석두공은 자기의 잔에도 한잔의 술을 따라 들이키고는 적어왔던 제문을 읽지도 않고 태웠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제문이 절로 불붙으며 사그라져 버렸다.

(...뇌신(雷神)이었구나!)

늙은 사공은 내심 비명을 지르며 덜덜 떨었다.

[노인장, 돌아갑시다.]

제사를 마친 석두공이 사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공은 너무 놀라서 석두공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듣지도 못했다.

그는 석두공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보고는 그만 갑판에 넙죽 업드리며 두손을 싹싹 빌었다.

[이 김과삼이 눈이 있어도 신이 제 배에 왕림하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 나이 칠십이나 집에는 구십된 노모가 계십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석두공은 어이가 없어 풋소리를 내며 웃었다.

[노인장, 신이라니 무슨 말이오? 어서 돌아가기나 합시다.]

그렇지만 사공은 주절주절하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석두공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강도가 겨우 늙은 사공을 협박하는가?]

[멈춰라!]

두가지의 음성이 동시에 석두공의 귓전을 때렸다. 하나는 내공이 충일한 남자의 웅혼한 음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뾰쪽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석두공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척의 배가 각기 서쪽과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서쪽 배의 선상에는 죽립을 선 건장한 사나이가 뒷짐을 지고서서 석두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다가오는 배에는 백의를 입은 면사녀(面紗女)가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우뚝 서있었다.

[...!]

석두공은 굳이 설명하려고하지 않았다.

자신이 강도가 아닌데 그렇게 해야할 필요는 어디있는가? 어쩌면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강도가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안은가?

석두공은 그들을 개의치 않고 노인을 재촉했다.

[노인장, 그만하고 갑시다. 사람들이 나를 강도로 오인하고 있소.]

그러나 늙은 사공은 일어나지 않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을 뿐이고,

화라라락!

남쪽의 배로 부터 백의 면사녀가 표표히 날아왔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흰 나비를 연상시켰다.

백의면사녀는 허공에서 한바퀴 맴돌며 선상에 가볍게 내려섰다.

석두공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공을 어떻게 하여 이곳을 떠나기는 틀렸다.

[신법이 대단하군.]

석두공은 나직하게 말했다.

백의면사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 것같았다.

그때 늙은 사공이 석두공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만약, 이 개같은 늙은 목숨을 살려만 주신다면 호변에 사당을 지어 뇌신님을 모시겠습니다. 제발... ]

[...?]

백의면사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

그녀가 대충 사태를 파악하고 실소했다.

석두공은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소이다. 가져오신 배로 호변으로 건네다 주시면 감사하겠소.]

[그렇게 하세요.]

백의면사녀가 눈에 반짝 빛을 발하며 말했다.

석두공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한번 만난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사공의 손아귀에서 발을 뽑았다.

그때였다.

스슷!

그의 눈앞으로 죽립객이 내려섰다.

[칠성추운신법(七星追雲身法)!]

석두공이 짧게 내뱉었다.

죽립객의 죽립속에서 안광이 백열했다.

[소협은 누구시오? 칠성추운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텐데...]

[당신도 잊지 않고 왔군요.]

석두공의 목소리가 격하게 울려나왔다.

죽립객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부르르 떨렸다.

[석두공! 석형제이시오? ! 아직 그 모습이 남아있구려.]

그는 덥썩 석두공을 껴안으며 죽립을 벗어던져 버렸다.

그는 요사이 일초진천수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금사종이었다. 혼자서 무림의 운명을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또 하나의 젊은이였다.

동호천의 기일을 맞아 그는 먼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정호로 찾아왔던 것이다.

 

금사종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동노선배께서 돌아가신지 불과 오년 만에 천하가 이런 꼴이 되었으니, 지금에 와서야 그분이 무림을 떠받친 기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오.]

[...!]

[...!]

석두공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약간 괴팍스러웠던 동호천을 떠올리며 그 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서 백의면사녀는 퉁소를 꺼내들고 앉아 그를 훔쳐보았다.

배는 호변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석두공은 이상하다는 듯이 백의면사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아무런 볼일이 없을 것같은데 자꾸만 그녀는 석두공과 금사종을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혹시 금사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따라오겠느냐 하는 추측이 그 생각을 확신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금사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호수에서 백의면사녀가 석두공의 배로 먼저 건너간 후 아무런 충돌도 일지 않고 배를 빌려주기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으랴싶어 석두공과 백의면사녀가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객점의 방에 들어섰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악양제일루(岳陽第一樓)!

 

금사종은 들어서자마자 점소이에게 방을 달라고 했다.

[몇 개가 필요하신지요?]

금사종은 석두공과 백의 면사녀를 힐긋 보고 말했다.

[두개!]

점소이는 삼층의 객실로 그들을 데리고 올라갔다.

복도의 끝에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방문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이 두곳을 사용하십시오. 삼층에서는 제일 좋은 방들입니다. 물론 전망도 아주 좋지요.]

[술과 음식을 가져다 주게. 되도록 많이.]

금사종의 말에 점소이는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좌측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로 백의면사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들어갔다.

그리고 두 남자가 동시에 자리를 권하는 탁자에 냉큼 먼저앉았다.

[고마워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음성이란 그녀의 음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듣는 사람의 심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음성이었다.

금사종이 먼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석형제! 석형제가 무사한 것을 보니 난 아무 할 일도 없을 것같소. 정말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같소.]

[금형! 아니, 금아저씨! 약속했던 오년은 이미 지났으니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십시오.]

석두공이 함께 웃으며 말했다.

지금에 와서 그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금사종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동복신과 동적선 외에는 꼽을래야 꼽을 사람이 없다. 금사종은 석두공에게 있어서 핏줄같이 느껴지는 사람인 것이다.

금사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석형제를 아우라고 부르겠네. 나 또한 동호천 노선배님으로 부터 무공을 전해받았으니 따지자면 우린 사형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형님이 생겨 마음이 든든합니다.]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 절하며 말했다.

금사종도 마주 절했다.

문득 백의면사녀가 말했다.

[두분이 서로 형제가 되신 것을 경하드려요. 함께 있는 제가 선물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녀는 소매속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비단주머니를 열어 비취색이 감도는 두개의 구슬을 탁자에 놓았다.

[이건 비취피독주(翡翠避毒珠)라는 물건으로 자웅이 한쌍이예요. 웅주(雄珠)는 몸밖에서 침투하는 만독을 물리칠 수 있고, 자주(雌珠)는 몸속으로 스며든 독을 흡수하는 공능이 있어요. 제 성의이니 두분이서 하나씩 가지도록 하세요.]

[정말 감사하오.]

금사종이 포권하며 말했다.

[내가 이미 만독불침이니 아우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서로의 정표이니 하나씩 갖도록 하세.]

석두공과 금사종은 비취피독주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

백의면사여인의 눈에 서운한 빛이 잠시 감돌다 사라졌다.

원래 이 비취피독주는 부부가 나누어 갖는 물건이었다.

비취피독주에는 단순한 피독의 효력 말고도 공력을 증진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부부가 서로 하나씩 나누어 가져야만이 발휘되는 능력이었다.

비취피독주의 웅주는 백의면사녀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주었져야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니...

금사종이 말했다.

[고금문주이신 섭군천 노선배를 기억하겠는가?]

석두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전에 장강에서 그분을 만났네. 이 우형이 죽을 뻔 한 것을 구해주신 것이지. 한데 그분의 무공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신 고강했다네. 삼마경을 익힌 삼인의 손에서 나를 간단히 빼내셨을 정도였으니까.]

[부운청풍객 등의 손에서 말입니까?]

석두공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네. 한데 휴... ]

금사종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

석두공과 백의면사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분이 무림에 나오셨다면 다행이지 않습니까? 특히 부운청풍객은 그분의 제자이기도 하니...]

석두공의 물음에 금사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삼마경을 익힌 그자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네. 앞으로 내 무공이 좀더 높아진다면 그들중의 하나 정도는 능히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금사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내뱉었다.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고검문주이신 섭군천 노선배라네.]

[...?]

[...?]

금사종의 말에 석두공과 백의면사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분은 지금 천도(天道)를 시험하고 계시는 중이네. 삼마를 죽일 능력이 없어서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는 목이 타는 듯 찻물을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은 그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네. 부운청풍객이 일년 이내에 죽는다면 하늘의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가만히 있겠지만, 만약에 부운청풍객이 일년안에 죽지 않는다면, 그분 스스로 무림을 피로써 씻어내겠다고. 말씀하시기를 그때가 되면 검을 든 자도 주먹을 쥔 자도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더군.”

금사종은 숨을 들이 쉬지도 않고 다 말해버렸다.

백의면사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같았다.

그녀는 금사종에게 물었다.

[고검문이란 문파는 처음 듣는데 그렇게 고강한가요?]

금사종이 엄숙하게 말했다.

[검성도 고검문의 제자이고 부운청풍객도 고검문의 제자요. 하지만, 그들은 고검문의 무공을 완전히 잇지도 못했소. 고검문주이신 섭군천 그분의 무공은 이미 신인(神人)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소.]

“....!”

금사종의 말을 들은 백의면사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석두공은 눈을 감고 있다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럼 죽여야겠군요.]

[누굴? 섭군천 노선배를 말인가?]

금사종이 놀라 물었다.

석두공이 고개를 저었다.

[부운청풍객을 죽여야지요.]

그때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백의면사녀는 직접 술잔에 술을 따라 금사종과 석두공의 앞에 놓았다.

금사종은 석두공이 보통사람과 조금도 차이 없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자네! 고질이 완치된 모양이군! 축하하네. 축하해.]

석두공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빠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

[소림사에서 만배노선사님을 만나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니까 머리가 트이더군요. 하하... 그저 돌머리는 두둘겨서 깨야하는 모양입니다. ]

그 순간에 백의면사녀의 눈이 찰라적으로 반짝 빛을 발했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잔을 주고 받으면서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지 몇 시간 이미 밤은 깊어 이경이었다.

금사종이 말했다.

[구대문파를 찾아가 자네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그들의 힘을 빌릴 준비를 해놨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이곳에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듯이, 이곳에서 부터 그 끝도 시작될 것입니다.]

석두공이 그답지 않게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쇠하는 법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부운청풍객 등의 세사람은 지금 한계에 달해 있습니다. 그들이 능력으로 달할 수 있는데 까진 다 달한 것이지요. 하나, 참새가 죽을 때 짹 소리를 내고 죽듯이 그들의 행동은 더욱 격해지리라는 것이 제 짐작입니다.”

금사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네. 그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모르고 너무 설쳐되고 있네. 결국 그들이 성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애기지.]

석두공이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그들 삼인을 제거한다면 오히려 혼란은 가중됩니다.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마졸(魔卒)들이 흩어진다면 무림은 전혀 수습할 길이 없게되고 맙니다. 우선은 그들의 야욕을 꺾어서 수하들이 머리를 감추고 숨어들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 후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순서로군.]

석두공의 무림을 통찰한 계획에 금사종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석두공은 다시 말했다.

[형님께서는 잔혼각과 적룡혈운도의 세력을 유심히 관찰하십시오. 아마 서로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의 야욕을 분쇄시켜주십시오. 벌써 그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 형님을 따라가지 않고 있소?]

석두공은 백의면사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사종은 이미 떠나갔다.

그런데도 백의면사녀가 그대로 자리에 남아있자 석두공이 물은 것이다.

백의면사녀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살짝 걷은 면사 아래로 앵도같은 입술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왜 그를 따라 가야 하나요? 저는 그와 초면인데... ]

[...?]

석두공은 그제서야 사실은 그녀가 자신들과는 아무 면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구나.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말을 이 여인이 모두 들었으니 이걸 어떻게 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죽여야만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백의면사녀가 말했다.

[한잔 드시지 않겠어요? 저를 죽이시려면 술기운을 빌려야죠.]

석두공은 속마음을 들킨 것같아 흠칫했다.

쪼르르르...

백의면사녀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염려마세요. 비밀을 옅듣기 위해 왔다며 제가 아무리 간이 크기로서니 당신들 면전에서 들을 수 있겠어요?]

[소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소.]

석두공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면사녀가 말했다.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세요. 그리고, 그 실수를 저를 죽이거나 다른 외부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만회하려고 하지 말아요. 만약 당신이 저를 믿고 덮어두기로 하신다면 당신에게 득이 있을 뿐 해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저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당신은 일생에서 가장 강한 적을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단호한 말이었다.

조리가 아주 정연한 말이어서 석두공은 일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백의면사녀는 일어서면서 돌연 침상으로 가더니 침구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문을 밀고 나가면서 말했다.

[건너편 방에서 자겠어요.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

문이 닫히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두공은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협박을 당한 것같기도 한데 또한 침상을 봐주고 가는 의도는 또 무엇인가?

석두공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인?)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래야 열 손가락에 다 꼽히고도 손가락이 남을 것인데 어떤 사람이 그를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석두공으로서도 도무지 그녀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망가거나 어떤 술수를 부릴 것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이 가셔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석두공은 깜짝 놀랐다.

비밀을 옅들은 의문의 여자, 죽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경계심이 크게 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일었던 살심마저 백의면사녀의 말과 간단한 몇가지 행동으로 인해 사그라져 버린 것이다.

 

× × ×

 

석두공은 인기척을 느끼고 슬며시 눈을 떴다.

!

창문을 가렸던 휘장이 걷혀지면서 눈부신 햇살이 방안으로 비춰들었다.

그는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창문가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그만 일어나셔야죠. 해가 떴는데도 등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면사녀...!)

그랬다. 그의 방으로 들어와 휘장을 걷고 창문을 열어젓힌 사람은 바로 백의면사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백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흑의를 입고있었다.

긴치마는 발끝을 덮고 늘어져 있으며 은장식이 붙은 요대를 했으며 머리는 쪽을 진 후에 금봉채(金鳳釵)를 꽂았다.

또한 요대에는 백옥퉁소가 단정하게 꽂혀있었다.

겉모습은 간밤과 아주 다른 모습이었으나 석두공은 한눈에 그녀가 백의면사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탁자로 걸어가서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은은한 다향이 석두공의 폐부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리와서 차를 마셔요. 하지만 그전에 세수를 하는게 좋을 것같군요. 얼굴이 말이아니예요.]

[난 아직 옷도 입지 않았소.]

석두공은 홑이불을 덮은 채 말했다.

도무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무릎위에 손을 놓고 다소곳이 앉아서 말했다.

[기다릴테니 염려마세요.]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발치를 바라보았다.

석두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인의 태도는 그대로 옷을 입으라는 말로 보였다.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처럼 그는 여인을 힐끗힐긋 훔쳐보면서 옷을 집어들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 옷은 입지 마세요. 침상아래에 옷을 가져다 놓았어요.]

과연 눈을 돌리니 침상아래에 단정하게 개여져 있는 묵빛 흑의가 보였다.

[이걸 입으란 말이오? 이건 내옷이 아니오. 소저께서 내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소.]

석두공은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원래부터 당신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아마 없을 거예요. 그것도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니까요. 당신의 옷도 당신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 무엇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것들은 당신 손에 들어갔고, 당신은 그것을 당신 것이라고 말하겠죠? 그렇다면 그 옷이 당신 것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아니예요?]

석두공은 한숨을 내쉬엇다.

[휴우! 소저의 말은 정말 이상하오. 소저는 유자(儒子)? 말로써 사람을 혼돈 시키는 자는 유자라고 했는데, 소저가 바로 그런 것같소.]

여인이 눈꼬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말을 듣지 마세요. 하지만, 대장부가 한낱 여인의 성의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알면 당신을 비웃을까 두렵군요.]

말로는 도저히 못당할 여인이었다. 교묘한 언변이 석두공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같았다.

석두공은 자신이 도망치지 않는한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도망치기는 싫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베푸는 성의가 그렇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속으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흑의를 입었다.

(어떤 고수보다도 무서운 것은 여인이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것은 말이라...)

 

[차를 다마셨으면 일어나야 해요. 우린 바빠요.]

면사녀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석두공은 화가난 듯이 말했다.

[나는 아직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소.]

면사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당신이라고 하세요.]

[...!]

석두공은 가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신이란 다정한 말로 부르라니....

[호호... 그게 어색하면 제 이름을 부르세요. 제 부모님은 절 소령(笑鈴)이라고 부르시니까요.]

석두공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정말로 방울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가 소령이라고 이름을 지을 만 한 것같았다.

소령은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빨리 오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대체 어딜 가자는 거요.]

석두공은 자신이 하기로 생각한 일이 있기에 못마땅한 음성으로 말했다.

밖에서 소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종맹(劒宗盟)에서 호표장(虎彪莊)을 흡수하려고 하는데 가만있을 거예요?]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섰다.

 

호표장은 이곳 악양에서 동쪽으로 이백리 정도 떨어진 호조산(虎爪山)이라고 하는 암산(巖山)에 자리잡고 있는 방파이다.

호표장의 제자들은 불과 백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그 열배가 넘는 대호(大虎)와 표범들을 기르고 있다.

지금 세상에 나오는 호피(虎皮)들 중의 열에 아홉은 호표장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호표장은 많은 호랑이와 표범을 사육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그들의 생계수단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였다.

호표장의 장주인 오호단혼도(五虎斷魂刀) 설곽(薛藿)은 어떤 짐승이던지 간단하게 길들이는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상당히 독불장군격인 인물로 남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십대고수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의 무공은 그들에 비해 그렇게 처지는 편이 아니라는 풍문이 돌았다.

한데 만약에 호표장의 오호단혼도 설곽이 검종맹에 가입하게 된다면 그의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가 키우고 있는 엄청난 수의 호랑이와 표범들로 인해 검종맹의 힘은 말할 수 없이 강해지게 될 것이다.

 

석두공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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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三 章

 

               깨어진 돌머리 (1)

 

 

 

숭산(崇山),

준극봉(峻極峰) 아래의 만장단애의 아래쪽에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피해가는 무저갱(無底坑)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바닥이 얼마나 되는 지 측량할 수 조차 없는 이 무저갱은 다행히 입구가 별로 크지 않다.

또한 자비를 우선하는 소림사에서 이 무저갱의 둘레에 우물처럼 담을 쌓아놓았다.

그 때문에 스스로 들어가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 한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곳에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드높은 위쪽의 만장단애에서 그대로 무저갱안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햇살이 거북이 등딱지를 떼어버릴 정도로 뜨겁게 내리 쪼이는데,

에고 더워라! 헥헥헥!”

엷은 백의를 입은 한 소녀가 무저갱을 둘러싼 담장가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보석같이 초랑한 눈망울을 가진 그 소녀는 야무지게 다문 입매가 극히 지적으로 보였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옥퉁소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발이 아픈지 가죽신 위로 발을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사부님께서도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되기는 됐어. 시키는 대로 준극봉을 이 잡듯이 뒤져서 무저갱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게 뭐 어떻다는 거야? 무저갱에서 뭐 사람이 올라와? 그럼 그게 어디 무저갱이야? 웅덩이지.]

쫑알쫑알 거리는 그녀는 장난기가 다분했으며, 틀에 얽매이지 못하는 그런 성미가 옅보였다.

그녀는 돌연 벌렁 드러누우면서 소리쳤다.

[애고, 난 모르겠다. 사람이 나오든 도깨비가 나오든 나오면 나오는 거고 난 낮잠이나 한숨자야겠다.]

나른해지는 여름날의 오후다.

소녀는 눕자마자 새근새근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저갱에서 금방이라도 삭아서 녹아버릴 것같은 백의를 걸친 인물이 한명 쑤욱 떠올랐다.

바로 천년만에 부활한 폭풍무존이었다.

그러나 잠이 든 소녀는 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스읏!

폭풍무존은 그녀를 힐끗 본 후에 준극봉을 날아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무저갱을 둘러싼 담장위로 더부룩한 검은 머리가 수욱 올라왔다.

피로에 지친 듯한 그 인물은 가까스로 담장을 손으로 잡고 밖으로 기어나왔다.

알몸에 방망이를 든 석두공이었다.

“....!”

순간 그의 기척에 백의소녀가 눈을 번쩍떴다.

그녀의 눈에 석두공의 알몸이 그대로 들어왔다.

석두공은 그녀를 보고서야 이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나왔구나싶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데 소녀는 석두공을 보고도 처음에 잠시 당황한 눈빛을 보였을 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말했다.

[척보니 무저갱에서 나왔군요.]

[무저갱? 여기를 말하는 거요?]

석두공이 반문했다.

소녀가 그의 하체를 잠시 보았다가 눈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

[그럼 깊은 구멍이 거기 말고 또 있나요?]

무의식중에 구멍이란 말을 한 그녀는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석두공의 나신도 점잖케 훔쳐본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석두공은 아무것도 모른채 심지어 자신이 발가벗었다는 사실도 모른채 말했다.

[아무튼 나는 이곳으로 올라왔소. 한데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물론이예요. 그 때문에 나는 수천리를 달려왔어요. 이 가죽신 보이죠? 이게 길을 떠나고 나서 세번째로 사서 신은 거예요.]

백의소녀는 자신의 발을 번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치마가 훌렁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기가 막히게 다리를 살짝 돌려 치마속이 보일 듯 말듯 하게 했다.

석두공은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켰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얼른 말했다.

[무슨 일이오?]

질문부터가 좀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수천리 밖에서 어떻게 자신이 오늘 무저갱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일을 보러 왔단 말인가?

그에 대한 질문은 조금도 없고 생각이 건너뛰어 그렇게 묻고 말았다.

[이것을 아시겠어요?]

백의소녀는 품속에서 손가락 만한 은검(銀劒)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그것은 크기만 작았지 모양은 완전한 검이었다.

[아주 작은 검이군요.]

석두공이 말했다.

백의소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난치지 말고 말해요. 나를 만만하게 보다간 큰코다칠 거예요.]

[그럼 검이 아니란 말이오?]

석두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순간 백의소녀의 눈에서 서릿발같은 한기가 감돌았다.

쉬익!

손가락만한 검이 섬짓한 소리를 내면서 뽑혔다.

번쩍!

강렬한 백광이 그 검으로 부터 발해졌다.

소녀가 준엄하게 소리쳤다.

[정검령(正劍令)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겠단 말인가?]

석두공은 소녀가 살기를 돋우고 소리치자 저으기 당황했다.

[정검령?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아니오? 나는 정검령이 무엇인지 모르오.]

[!]

소녀가 혀를 차면서 작은 검을 거두었다.

[사부말이 이번에도 맞기는 맞았군. 상대하려면 골치 아픈 자라고 하더니만, 이런 돌머리를 어디다 쓰려고 데려오라는건지 원... 그래도 명령이니 듣기는 들어야지.]

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작은 보따리를 풀더니 석두공에게 휙 던졌다.

[우선 옷이나 걸치고 보시지. 아무리 대책없는 사람이라 해도 상대를 잘못 만났어. 난 백란이란 말이야. 종횡선녀(縱橫仙女) 백란(白蘭)이라구.]

석두공은 속으로 뜨끔했다.

(어떻게 내가 돌머리인줄 알았을까? 무슨 멍청한 짓을 한 것같지도 않은데... , 한데 옷이라니... !)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사실을 알아채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훌쩍 뛰어 바위뒤로 숨어버렸다.

[호호호호... 멍청이! 이미 다 봤는데 숨기는 또 뭘 숨어? 사내대장부가 숫기 없기는..... 어서 옷이나 입어.]

백란이라는 소녀가 깔깔 웃으면서 옷이든 보따리를 발로 차서 바위 뒤로 보냈다.

석두공은 옷을 받아들고 풋! 하고 웃었다.

(남자가 몸을 한번 보인게 뭐 대단하다고 이런 호들갑인가? 여자인 그녀는 내 알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

석두공은 소녀가 준 옷을 입고 허리까지 드리워진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리고 바위뒤에서 나오자 백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아주 잘생겼잖아. 조금 전과는 아주 딴판인데.)

방금 전의 모습이 연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석두공은 멋진 사나이로 둔갑해버렸다.

[음음, 가자!]

그녀는 마치 하인을 대하듯 석두공에게 명령하곤 앞서 걸었다.

석두공은 어이가 없었다.

(옷이 고맙긴 하지만 아무래도 미친 여자인 모양이군. 내가 궂이 따라갈 이유가 어디 있겠나?)

내심 속으로 생각한 그는 슬그머니 돌아서서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편 백란은 그가 따라오리라는 것을 확신했는지 보치도 당당히 걸어갔다.

한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싹 돌아보는 순간 그녀는 빽 소리쳤다.

[튀다니! 내 허락도 없이. , 감히 이 종횡선녀를 우섭게 봐? 별 떨거지같은 놈이... ]

그녀는 번개같은 신법으로 석두공이 사라진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석두공은 생각했다.

(내가 비록 무공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하지만 이것으로 그 끝에 달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폭풍무존의 경우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폭풍무존의 무공수준에 달하려면 아직도 나는 멀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에 의하면 나는 소림사로 가는 길이었다. 무슨 이유로 가던 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먼저 소림사로 가고 볼 일이다.)

석두공은 또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절곡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에 내 몸이 훨씬 자란 것같으니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같은데...)

그는 혼자라는데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것은 세상천지에 오직 자기뿐이라는 고독감이었다.

 

***

 

마침내 소림사에 도착했다.

석두공은 산문으로 들어서서 무작정 걸었다.

딱히 지리를 아는 바가 없기에 그저 다른 참배객들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그를 저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사찰다운 사찰을 처음으로 구경하는 석두공에게 소림사의 웅장한 건축은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둥과 벽면에 화려한 단청과 울굿불굿한 물감으로 그려진 탱화들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대웅보전으로 갔다.

한데 대웅보전 어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낮게 속삭이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저분이 바로 만배선사(萬拜禪師)라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만번 씩 부처님께 절을 한다는 그 스님말인가?]

[그렇네. 저분의 절하는 신공은 고금무적이라서 한시간이면 만배를 다하고 나오신다고 하더만.]

[!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만약에 만배를 하자면 열흘은 몰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데... ]

[한데 만배선사께선 좀처럼 본사로 내려오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석두공의 앞쪽에서 걸어가는 두사람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석두공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기인은 참으로 많구나. 하루에 만배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력일 텐데... )

그의 눈에도 대웅전 안에서 걸어나오는 한 노승이 보였다.

한데 하루에 만배씩 한다는 사람의 몸이 저럴 수도 있는가?

허리는 보통 사람의 두배나 굵었으며 목은 짧고 손과 발은 자그만 했으며 팔다리는 통나무를 연상시킬 만큼 굵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흘러내릴 만큼 쳐져있었고 눈에는 진물이 고여있으며, 수염과 눈썹은 허리까지 늘어져있었다.

너무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 모습이 부처님의 화신으로 보이는지 앞을 다투어 합장하며 입속으로 나직히 소원을 빌고 있었다.

(저 스님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석두공이 속으로 생각하는 찰라에 만배선사는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스쳐지나가면서 혀를 찼다.

[끌끌... 천왕저(天王杵)가 주인을 잘못 만나 울고 있군.]

[...?]

석두공은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금방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만배선사는 그를 지나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소리쳤다.

[!]

석두공의 귀가 얼얼했다.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지나치려 해도 도무지 화가 나서 못참겠다. 이놈!]

만배선사는 선장을 들어 석두공의 머리를 내려쳤다.

슈앙!

[으악!]

다른 참배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두개골이 깨어져 즉사하는 석두공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 석두공은 이상하게 만배선사에게 저항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피하려면 피하고 막으려면 막고 반격하여 일초에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을 그였지만 가만히 두들겨 맞고 말았다.

!

!

선장이 그의 머리에 부딪히며 반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껄껄껄껄... 그놈 머리 하난 단단하구나!]

돌연 만배선사는 선장을 휙 던져버리고 대소를 터뜨렸다.

석두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모든 것은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니...

참배객들이 석두공을 귀신보듯 하면서 그 근처를 피했다.

약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강한 자 보다 더욱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것은 스스로 몸을 사리고 물러선다는, 강한자가 결코 익힐 수 없는 호신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배선사는 곰처럼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선장으로는 네놈의 머리를 깨지 못했지만 불력(佛力)으로 깨뜨리고 말겠노라.]

 

× × ×

 

소실산의 중턱,

입구에 울타리가 쳐져있는 토굴(土窟)이 있었다.

토굴의 앞에는 몇 가지 야생의 꽃들이 피어있었고 흰 토끼가 울타리의 틈사이로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숲 사이로 난 소로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장 선 사람은 사람인지 아니면 옷입은 늙은 곰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뚱뚱한 괴물같은 중이었으며, 그 뒤를 따라오는 젊은이는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땋지도 않고 뒤로 묶어 넘긴 자였다.

젊음이 발산되는 듯한 그런 싱그러운 맛이 젊은이에겐 있었다.

또한 그의 얼굴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준수한 것이었다.

그는 바로 석두공이었다.

만배선사는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하늘이 모든 것을 모아주는데도 여전히 바보멍청이라니... 노납이 네놈의 머리를 깨지 못한다면 내 머리라도 깨고 말겠다.]

토굴의 안은 좁았다.

만배선사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니 빈틈이 없는 것같았다.

석두공은 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그때 만배선사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내놔라!]

(이 몽둥이를 말하는 모양이로군.)

석두공은 허리에 매어두었던 몽둥이를 끌러서 주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놈이군. 이놈아!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전 모릅니다.]

석두공은 자신에게 욕을 하는 만배선사에 대해서 조금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또한 만배선사는 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만배선사는 몽둥이를 들어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건 천왕저(天王杵)라고 하는 물건으로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기물이다. 우리 소림사의 금강저(金剛杵)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천왕저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

바닥이 천왕저에 닿을 때마다 푹푹 꺼졌다.

천왕저...

석두공이 무당파의 해검지에서 주어왔던 몽둥이는 천왕저라는 이름을 가진 상고시대의 병기였던 것이다.

만배선사는 갑자기 주문같은 몇 마디를 외우기 시작했다.

[태상태성응변무정구사박매보명호신지혜명정삼혼영구... ]

분명히 그것은 불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슨 무공구결같지도 않았다.

석두공은 그 주문이 천왕저와 어떤 연관을 가진 것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만배선사가 돌연 석두공을 향해 천왕저를 휘둘렀다.

[!]

석두공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한데 그의 등뒤에는 출구가 아니었다.

언제 막혀있었는지 그것은 만배선사의 뒤나 다름없는 흙벽이었다.

!

그의 몸이 석벽을 두자깊이나 파고들어갔다.

그때였다.

!

만배선사가 휘두른 천왕저가 그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

석두공은 한사발의 피를 토해냈다.

천왕저의 힘은 진정 두려운 것이었다.

이미 도검이 불침하게 된 석두공의 몸이건만 천왕저에 맞아 그의 갈비뼈가 두대나 부러져 버렸다.

또한 천왕저에 서린 힘은 그의 몸에서 고통이 되어 번져갔다.

석두공은 까무라치고 싶었다.

그때 만배선사가 호통쳤다.

[이놈! 열심히 듣고 따라 욀 생각은 않고 정신을 어디에 빼놓는 거냐?]

그가 맞은 이유는 그때문이었다.

만배선사는 다시 태상태성하고 외우기 시작했고 석두공은 피를 머금은 입으로 웅얼웅얼 따라했다.

[태상태성응변무정구사박매보명호신... ]

만배선사는 다시 한번 들려준 후에 말했다.

[혼자서 외워봐라!]

[...!]

석두공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외는 것도 하는 사람이나 하지...

!

천왕저가 그의 어깨로 떨어졌다.

석두공은 너무도 심한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어깨가 능충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뼈가 바스라진 것같았다.

만배선사는 눈을 감고 못본척하며 다시 괴이한 주문을 한번 외웠다.

그리고 턱으로 한번 외워보라는 시늉을 했다.

하나 이번에도 석두공은 삼혼영군가 하는 말 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

천왕저는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천하의 석두공도 입과 코로 피를 쏟으며 뒤로 넘어갔다.

한데 그의 몸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포연신공이 절로 일어나면서 밖의 손상입은 공력이 잠복하고 잠복하고 있던 공력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배선사는 또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석두공은 평생 이처럼 정신을 집중시킨 적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천왕저를 맞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만배선사는 겨우 중간정도 외웠을 뿐인데 벌써 앞의 구절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석두공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다시 맞을 것을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후들떨려왔다.

매에는 진정 장사가 없는 법인 모양이다.

더욱이 석두공을 때리고 있는 천왕저는 원래 때리기 위한 전문도구인 몽둥이였으니...

검으로 베인 상처는 싸늘한 느낌에 따가울 뿐이다.

주먹으로 맞았을 때는 둔중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금방 그 충격이 사라진다.

하지만 몽둥이라는 놈은 그 고통을 뼛속에 저장해서 두고두고 괴롭히는 괴물같은 놈이다.

한 대 한대 맞을 때마다 석두공은 천왕저가 더욱 더 두려워졌다.

처음 맞는 한대보다는 열번째 맞는 한대가 그 고통에 있어선 처음 한대의 열배도 더 될 것같았다.

[...]

니라니라하고 다 왼 만배선사의 눈초리가 다시 석두공을 노려보았다.

석두공은 눈을 찔끔 감았다.

달달달...

무슨 말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입술은 달짝이고 있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천왕저는 그의 옆구리를 두드리고 돌아갔다.

고통! 그 고통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석두공은 그 고통을 만끽할 여유마저도 없었다.

만배선사가 또다시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구절이라도 외워야 한다!)

장렬한 결심을 했건만 석두공의 돌머리는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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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二 章

 

             暴風武尊, 千年만의 復活

 

 

 

(제길... 틀렸다.)

자신의 진로를 가로막은 잔혼살객을 발견한 죽립객은 입술을 악물었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퍼엉!

맹렬히 앞으로 내달으면서 잔혼살객에게 일장을 가하고 몸을 홱 돌려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부운청풍객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여전히 앞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퓨아아앗!

부운청풍객은 벼락같이 검을 휘둘러 날아든 장력을 양단하며 죽립인에게로 날아들었다.

장력은 파죽지세로 쪼개지고 부운청풍객의 검은 죽립인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에 잔혼살객의 손에서 청월천인혈(靑月千人血)이라는 공포의 수법도 펼쳐지고 있었다.

앞 뒤에서 펼쳐진 그 두가지 살초는 죽립객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립객은 동귀어진을 생각했다.

기왕 죽어야한다면 이 악종들 중 한놈이라도 저 세상으로 데려가야만 한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촤악!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손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죽립객의 발을 끌어당겼고,

그와 동시에 한 자루의 검이 손을 따라 치솟아 오르며 부운청풍객의 검과 잔혼살객의 청월천인혈을 풀어버렸다.

번쩍!

스파팟!

그리고, 돌연 유령같은 흰 그림자가 두둥실 떠올라서는 유유히 장강위로 날아가 버렸다.

그 그림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조각 구름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였다.

“...!”

“...!”

부운청풍객과 잔혼살객, 그리고 해천월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 그들로부터 말을 앗아간 것이다.

잠시 후, 부운청풍객 심제을이 암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공... 그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자신이 천하의 십대고수 중의 일인으로 오객에 속했을 때만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그 후에 동호천이라는 서열에서 제외된 절대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부운청풍객은 단혼곡주 하삼풍의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아들을 자극하여 동호천을 암습하게 했었다.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호신강기에 진탕되어 그가 죽음으로써 증명되었다.

자신의 무공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운청풍객은 잔혹한 수법을 동원하여 삼마경을 얻었다.

그 중에서 구가천마검법을 익히고 난 후에 이번에는 정말 적수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동호천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물론 잔혼살객과 적룡혈운도주 해천월마저 합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상을 입고 도망쳤어야 했다.

물론 동호천은 그때 죽었지만 그에 대한 공포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부상을 겨우 치료하고 다시 무림으로 나왔을 때 동호천의 제자와 맞부딪혔다.

더 자라기 전에 제거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동호천의 제자 석두공은 동호천과는 또다른 종류의 고수였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괴하면서도 귀신같이 빠른 공격에 당해 손목이 부러지는 치욕을 당했다.

석두공을 제거한 것은 잔혼살객의 술수에 의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후 부운청풍객은 절치부심 각고의 수련으로 드디어 구가천마검법을 팔성(八成) 수준까지 익혔다.

그의 무공은 오년전 석두공과 싸울 때에 비해서 다섯 배 이상 강해졌으며 이제야말로 하늘 아래 더 이상 자신의 적수는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잔혼살객과 해천월마저도 그의 무공은 인정했고 은연 중에 부운청풍객은 그들의 우두머리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데...

한데 이게 또 뭐란 말인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렇게 쉽게 사람을 빼갈 수 있는 자가 또 있었단 말인가?

구가천마검법을 막고 잔혼살객의 청월천인혈을 깨뜨리고 말이다.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검성과 만박노조 등이 더이상 자신의 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고수들은 아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검종맹의 수하들을 보면서 말했다.

[돌아가자!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잔혼살객과 해천월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노선배님!]

장강의 남쪽에 있는 작은 야산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엔 용왕묘(龍王廟)가 한채 서있다.

그리고 놀람에 찬 음성이 그 안에서 터져 나왔다.

“...!”

용왕묘의 안에는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죽립객이 엉거주춤 서있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네 주인인가 하는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소림사로 가던 중에 실종됐습니다. 아마 부운청풍객이나 잔혼살객을 만났던 것같습니다.]

죽립객은 이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듯이 죽립을 벗었다.

그는 바로 복우파(伏牛派)의 기재인 혼장서생(渾掌書生) 금사종이었다.

노인이 준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뭘 했기에?]

[전 그때 백검보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적룡혈운도주 해천월을 만나 그자의 검에 가슴을 맞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그는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공력이 극히 미미하게 변한 지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혼장서생 금사종,

그가 바로 요즈음 신비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는 일초진천수(一招震天手)였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그와 석두공이 구해주었던 고검문의 문주인 섭군천이다.

금사종은 그에게서 포연신공을 전수받은 적이 있기에 해천월의 일격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검문주 섭군천이 냉소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심제을 그놈을 죽이기는커녕 도로 죽을 뻔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느냐?]

[...!]

금사종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에게 섭군천의 추궁이 이어졌다.

[놈이 삼마경을 익혔다고 해도, 아직 팔성을 넘지 않은 수준인데 그 정도라면 포연신공으로 능히 겨루어 볼 수 있는 것이건만...]

금사종은 암담했다.

지금도 그를 죽일 수 없는데 앞으로 만약 그가 검마경을 십이성까지 수련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금사종은 무치무요를 거의 다 익혀보았지만 그중의 어느 무공도 대성(大成)하지는 못했다.

기기묘묘한 수법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의 머리속에 있었으나 아직 그것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섭군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노부는 굳게 마음먹은 것이 있다. 만약 일년 안에 심제을 그놈이 죽는다면 천하에 공도(公道)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천하에 공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

[만약, 천하에 공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섭군천의 두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번져나왔다.

[노부는 거리낌없이 천하를 피로써 씻어버리겠다. 그때는 검을 들거나 주먹을 쥔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부르르르...

금사종은 극심한 추위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천하제일의 검문이라는 고검문의 문주!

그라면 능히 그럴 힘이 있을 것같았다.

부운청풍객 등 삼인의 손에서 주머니의 물건을 꺼내듯이 자신을 빼내온 그가 아닌가?

 

-천하를 피로써 씻어버린다!

-검을 들거나 주먹을 쥔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실로 무시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자는 몰라도 부운청풍객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무림이 깡그리 사라질 지도 모른다!)

금사종의 가슴은 심하게 떨렸다.

심제을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속을 꽉 채웠다.

제자의 배신에 가족을 잃고 이십 년을 감금당해 있었던 고검문주!

그는 언제든지 피를 부를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 × ×

 

이정(二正)과 일사이객(一邪二客)이 부운청풍객등에게 당한 패배는 무림에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왔다.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던 검성등이 어이없이 패해 도망쳤다는 소문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커나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 검종맹과 잔혼각등에 붙지 않고 있던 많은 군소문파들이 스스로 장문령부를 그들에게 갖다 바쳤다.

백검보가 패했는데 누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백검보의 분위기는 침통했고 모였던 고수들은 다시금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다.

뭉쳐도 패배,

흩어져도 패배,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들의 성격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 * *

 

[뜻밖의 인물이라!]

금포(錦袍)노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뜻밖의 인물이 아니라 본좌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인물일 수도 있지. 그가 만약에 은세정검회(恩世正劒會)의 고수였다면 말이야!]

금포노인의 입가로 미묘한 웃음이 흘렀다.

[이제서야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가? 흐흐흐!]

그는 갑자기 소리쳤다.

[미사(美邪)! 둔부를 뒤로 하고 엎드려라!]

명을 받은 미사가 금포노인의 앞에서 둔부를 내밀며 개처럼 엎드렸다.

금포노인의 눈앞에 그녀의 희멀건 둔부가 산등성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둔부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사이에 붉은 꽃잎이 보였고, 꽃잎에는 깊고도 검은 동굴이 수초들에 가로막혀 있었다.

노인은 손가락을 뻗었다.

[!]

미사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노인의 중지가 그녀의 붉은 꽃잎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촉촉한 물기가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실을 감듯이 뱅글뱅글 돌렸다.

미사의 은밀한 곳이 옴찔옴찔 움직이며 맑은 물이 음모를 타고 흘렀다.

[아아아! 헉헉헉!]

노인은 쥐구멍에 빠뜨린 동전을 꺼집어 내기라도 할 듯이 손가락을 더욱 깊이,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미사의 둔부는 그의 손을 마중하러 나왔으며 질척이는 소리가 침상에 있는 모든 여인들의 귀속으로 파고들며 음욕을 돋구었다.

[아아아!]

미사의 신음소리는 절정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다가 자신의 둔부를 끌어당기며 은밀한 부분을 더욱 크게 벌리려 했다.

그때 노인이 손을 뽑았다.

[이정도까지, 흐흐흐...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거지.]

미사가 돌아서서 그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달아오른 얼굴은 노인에게도 뜨거운 열기를 전해주었다.

[웁웁]

노인의 손가락을 입에 넣은 미사는 혀를 오물거리며 빨았다.

스윽!

노인의 금포가 젓혀지고 그의 배꼽어림에서 거대한 물건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그것은 마침내 완전히 모양을 갖추었고 노인은 미사의 머리를 잡고 그곳으로 끌어당겼다.

[헉헉!]

미사의 혀가 노인의 남성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한입에 들어가기에 그것은 너무도 컸다.

오직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밖에는 받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비스듬히 드러누운 노인에게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아래서부터 접근했다.

앉은 채 조금 씩 몸을 밀착시켜 노인의 남성을 자기의 꽃잎에 맞추었다.

순간 노인이 와락 그녀의 둔부를 끌어당겼다.

[아악!]

미사가 비명을 질렀다. 천지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노인이 흥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천하는! 이렇게 갑자기 취하는 것... ]

마치 천하를 취하기라도 하는 듯이 미사를 힘껏 끌어당기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아아악! ! !... ... ]

침상위에선 광란의 난교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천신폭풍보...]

석두공은 그말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껏 달려보고 싶다. 미친듯이 폭풍처럼 달리고 싶다... )

천신폭풍보를 펼쳐보고 싶은 충동으로 그의 가슴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기분은 명마(名馬)를 얻은 사람이 타보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석두공은 다리가 달달 떨렸다. 절로 달리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두두두!

마침내 석두공은 달리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오!

거대한 폭풍인양 그의 몸은 흐릿해지면서 천신폭풍탑을 이층 내부를 돌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

진정 말 그대로 그는 천신(天神)의 폭풍(暴風)이 되었으며 그 여파에 석탑은 여지없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콰드드드!

석벽이 터져나갔으며 바닥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탑의 삼층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고오오오!

그는 더욱 빠르게 맴돌았다.

콰콰쾅!

마침내 어느 순간 천신폭풍탑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듯 송두리채 터져서 날아올라갔다.

콰아아아아!

휘이이이잉!

 

그것도 분명 인간의 힘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인간의 힘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천신폭풍보-!

그것은 대자연의 거력이었으며 신의 힘이었다.

투두두둑!

천신폭풍탑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모두 작은 모래가 되어서 떨어져 내렸다.

천신폭풍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또한 항아리같은 그 절곡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석두공은 허탈한 심정으로 우두커니 멈추어섰다.

그가 선곳은 처음 석두공이 이 절곡에 떨어져 정신을 차렸던 그 대리석바닥위였다.

자신이 한 일이건만 그는 도저히 자신이 했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속에 어떤 악마가 들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데 이럴 수가...!

“....!”

석두공의 머리위 이십여 장 정도의 허공, 그곳에 한사람이 허공을 평지처럼 밟고서 손바닥만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가만히 떠있는 그의 몸에서는 진정 천신도 범할 수 없을 것같은 엄청난 기도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석두공의 머리에 벼락같이 생각이 지나갔다.

 

-본좌 폭풍무존은 부활하리라!

 

(정말 폭풍무존이 부활했단 말인가? 저 사람이 폭풍무존이란 말인가?)

석두공은 아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곳에서 알같이 생긴 공간을 빠져나오면서 상당한 기억력을 회복한 석두공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보통사람의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이긴 하지만 조금씩은 기억력이 늘고 있었다.

그는 폭풍무존의 글에서 떠오르는 구절을 상기해 내고는 부르르 진저리쳤다.

대체 몇년 전의 인물이란 말인가?

신이 아닌 인간이 어떻게 그처럼 오랫동안 살 수 있단 말인가?

폭풍무존은 이미 이 절곡에서만도 이백사십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그때 폭풍무존이 옷깃을 날리며 서서히 밑으로 내려왔다.

이미 무공이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선 석두공이건만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폭풍무존,

그의 모습은 불과 삼십을 넘지 않은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오관은 반듯했으며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몸에서 풍겨나는 기운을 패도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패도적인 것마저 초월한, 말 그대로 강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았다.

석두공은 그의 모습에서 부터 폭풍무존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와 닿았다.

그의 손짓 하나에 산이 날아가고 그의 입김에 숲의 나무들이 모두 뽑힐 것만 같았다.

석두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사부가 당신을 이곳에서 탑이나 깍게한 이유를 알만도 하군. 어쩌면 나라도 그랬을 것...)

석두공과 폭풍무존의 눈이 마주쳤다.

파파파팟!

석두공은 눈알이 뽑히는 것같았다.

그러나 그는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응시했다.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폭풍무존의 얼굴이 실룩실룩거렸다.

그리고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 흘러나왔다.

[너가 나르 깨우 자리가?]

석두공은 기억력은 형편없지만 순간적인 이해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그는 그 말을 정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깨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탑은 제가 부순 것같습니다.]

폭풍무존은 계속 입을 실룩거렸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상당히 정확한 발음이 나왔다.

[본좌의 천신폭풍보를 익힐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군. 너는 누구냐? 본좌는 폭풍무존이다.]

하지만 여전히 말의 두서는 없었다.

그저 생각나는 순서대로 말을 하고 있었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부터 말이 저런가 아니면 너무 오랫만에 말을 해서 그런가?)

여하튼, 그는 즉시 대답했다.

[전 석두공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천신폭풍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 본좌가 살았던 때로 부터 얼마나 세월이 흘렀느냐? 본좌는 당()의 고종(高宗) 삼년에 태어났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태어난 지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인데,

안타깝게도 그가 최초로 만난 상대는 석두공이었다.

석두공은 역사에 대해서 문외한 일뿐 아니라 무공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돌머리다.

폭풍무존의 질문은 하나마나 한 것이 되었다.

석두공은 간단히 대답했다.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얼마나? 이백 년 정도 되었는가?]

[아마 그 정도 됐을 것입니다.]

석두공은 아마라는 말을 붙혀서 답했다.

그래야 틀리더라도 발뺌할 여지는 남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폭풍무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본좌는 혹시 한 천 년이나 지났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 세상이 너무 많이 달라져 버리면 곤란하지.]

[여기서 나갈 방법은 있습니까?]

석두공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폭풍무존이 씨익 웃었다.

[천신폭풍보를 익힌 놈이 겨우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니... 아마도 네 녀석은 바보인 모양이군. 이미 이곳을 폐쇄하고 있던 진도 깨어졌다. 못나갈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밖으로 나가시면 뭘 할 작정입니까?]

석두공이 빠르게 물었다.

그는 폭풍무존이 세상으로 나가기만 하면 꼭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듯한 기분이 들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폭풍무존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 일단은 본 은세정검회의 숙적인 독존패왕궁, 그놈들이 아직도 발톱을 다듬고 있는지 살펴봐야겠지. 그리고 은세정검회로 돌아가서 어떤 녀석이 회주가 되었는지도 알아보고, 사부께서 내게 혹시 남긴 말은 없는지도 알아봐야겠지.]

[그 다음에는요?]

[글쎄... , 아무래도 무림에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놀아봐야겠지. 평생 가까이 못했던 여자들도 한번 만나보고... ]

폭풍무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석두공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폭풍무존은 천천히 허공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

[그럼 무림에서 보게나.]

그의 몸은 구름처럼 두둥실두둥실 떠올라서 손바닥만한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것이지 신법을 펼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공답허니 허공답보는 하는 경공술도 비록 허공을 밟고 오를 수는 있는 것이지만 이처럼 날아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폭풍무존의 모습을 만약에 도가(道家)의 제자가 보았다면 신선(神仙)이라고 엎드려 절하고 그 자리에 도관이라도 세웠을 것이다.

그처럼 폭풍무존의 모습은 우화등선(羽化登仙) 그 자체였다.

석두공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폭풍무존에게 뭔가가 모자라는 것같은데 그걸 알 수가 없군. 틀림없이 그도 나처럼 뭔가 하나는 빵통인데...]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방망이를 손에 들고 폭풍무존의 흉내를 내어 날아올랐다.

하지만 흉내뿐인 무공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떨어질듯 말듯 위태위태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 순간 석두공은 폭풍무존에게 뭔가가 빠진 것같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자신에게도 기억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빠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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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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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폭풍탑은 1994년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박스본은 만화가게에 대여용 출간을 의미합니다.

5-7권으로 완결되는 작품을 박스에 넣어 공급한 데서 생긴 이름이지요.

2000년 3월에 만인루라는 제목의 전 3권 단행본으로 재간이 되었었습니다.

만인루로 재간이 된 후로도 무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오래 전 작품이라 요즘의 웹소설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감안하시고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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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세무림기보(千世武林奇譜)

 

 

1983년 5월 경에 전 5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박스본은 전권을 박스 하나에 포장하여 만화방에 대여용으로 출간한 형태를 말합니다.

무려 37년 전의 작품입니다.

문장은 거칠고 구성은 허술하며 이야기 전개는 고루한 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이런 작품도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4월 24일 와룡강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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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의 목록입니다.

 

           武俠小說 執筆日誌() 단행본

 

1; 사대천왕(四大天王) <전3권>

2; 사련오맹(四聯五盟)

3; 천년무벌(千年武閥)

4; 흑룡왕(黑龍王)

5; 화룡왕(火龍王)

6; 해룡왕(海龍王)

7; 혈룡왕(血龍王)

8; 무림기병(武林奇兵)

9; 사황마존(邪皇魔尊)

10; 도수무영(盜帥無影)

11; 고독사랑(孤獨死狼)

12; 마면신협(魔面神俠)

13; 혈무연(血霧淵)

14; 폭풍세가(暴風世家)

15; 탄검강호(彈劍江湖)

16; 천왕팔가(天王八家)

17; 신마팔황(神魔八荒)

18; 패왕투(覇王鬪)

19; 혈해등룡(血海騰龍)

20; 촉루혈(燭淚血)

21; 자객혈(刺客血) <전4권>

22; 마제열전(魔帝列傳) <전3권>

23; 탑마생사화(塔魔生死花)

24; 종횡사해(縱橫四海)

25; 유아독존(唯我獨尊)

26; 환신(幻神)

27; 신행마동(神行魔童)

28; 영웅산맥(英雄山脈)

29;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30; 역천항로(逆天航路)

31; 패왕전승(覇王傳承)

32; 무영신화(無影神話)

33; 백면투신(白面鬪神)

34; 무명신협(無名神俠)

35; 풍류몽(風流夢)

36; 마왕투(魔王鬪)

37; 존(尊)

38; 황(皇)

39; 패(覇)

40; 전황(戰皇)

41; 철인(鐵人)

42; 천외천(天外天)

43; 용왕투(龍王鬪)

44; 무적혼(無敵魂)

45; 철혈혼(鐵血魂)

46; 천인혈(千人血)

47; 초인행(超人行)

48; 금포염왕(錦袍閻王) 제1부 <전4권>

49; 적붕왕(赤鵬王) <전3권>

50; 호화지존(護花至尊)

51; 군림몽(君臨夢)

52; 철환교(鐵環轎)

53; 대혈하(大血河)

54; 초혼무(招魂舞) <전4권>

55; 호협도(豪俠道) <전3권>

56; 철혈시대(鐵血時代)

57; 기상천외(奇想天外)

58; 철왕투(鐵王鬪)

59; 무적시대(無敵時代)

60; 열혈시대(熱血時代)

61; 혈왕겁(血王劫)

62; 흑도백도(黑道白道)

63; 금포염왕(錦袍閻王) 제2부 <전4권>

64; 지옥교(地獄橋) <전3권>

65; 몽환시대(夢幻時代)

66; 사신검(四神劍)

67; 질풍록(疾風錄) 제1부

68; 질풍록(疾風錄) 제2부

69; 폭풍시대(暴風時代)

70; 강호야화(江湖夜話)

71; 고검추애기(孤劍追愛記)

72; 사신겁(邪神劫)

73; 지백천년(至白千年)

74; 강호두목(江湖頭目)

75; 만인루(萬人淚)

76; 백왕경(百王經)

77; 낭인맹(浪人盟)

78; 흑백강호(黑白江湖)

79; 강호전선(江湖戰線)

80; 고독천년(孤獨千年) 제1부

81; 팔혼번(八魂幡)

82; 화왕시대(花王時代)

83; 벽공일월(碧空一月)

84; 고독천년(孤獨千年) 제2부

85; 고독천년(孤獨千年) 제3부

86; 강호천년(江湖千年)

87; 기인몽(奇人夢)

88; 마도겁(魔刀劫)

89; 탐화랑객(探花浪客)

90; 군마무(群魔舞) 제1부

91; 생사지존(生死至尊)

92; 군마무(群魔舞) 제2부

93; 도(刀)

94; 쾌도난마(快刀亂魔)

95; 천방지축(天房地築)

96; 연정무한(戀情無限)

97; 기정무한(奇情無限)

98; 독행무한(獨行無限)

99; 저주마경(詛呪魔經)

100; 몽정무림(夢征武林)

101; 다정독왕(多情毒王) 제1부

102; 엽기도사(獵奇道士)

103; 대마일대기(大馬一代記)

104; 흑백염라(黑白閻羅)

105; 불루(不淚)

106; 래도(來盜)

107; 절대고수(絶代高手)

108; 환골탈태(換骨奪胎) <전8권>

109; 삼절지존(三絶至尊) <전4권>

110; 나한대협(羅漢大俠) <전5권>

111; 패왕독보(覇王獨步) <전6권>

112; 대륙독보(大陸獨步) <전6권>

113; 지존독보(至尊獨步) <전5권>

 

단행본 출판은 지존독보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웹 전용으로 집필중이며 그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고독천년(전8권)>

<북두무맥(전8권)>

<전설신검(전14권)>

<달마묵장(전10권)>

<무림일기(전11권)>

<제2천마(연재 중)>

 

상기의 작품들은 카카오페이지, 문피아, 원스토오, 리디북스, 미스터불루, 판무림등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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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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