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본'에 해당되는 글 101건

  1. 2020.07.07 [환락영웅] 제 4장 밀림 속에서의 긴 꿈
  2. 2020.07.07 [네이버 블로그]에도 와룡강의 블로그가 있습니다.
  3. 2020.07.06 [환락영웅] 제 3장 반로환동, 신행마동에게 패하다
  4. 2020.07.06 [천신폭풍탑] 제 30장 수라장이 된 무림대회 1
  5. 2020.07.05 [환락영웅] 제 2장 신행마동과 반로환동
  6. 2020.07.05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3
  7. 2020.07.04 [환락영웅] 제 1장 운남으로 가는 꼬마
  8. 2020.07.04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2
  9. 2020.07.03 [환락영웅] 서장 천하제일인의 제자들
  10. 2020.07.03 [환락영웅(歡樂英雄)] 연재합니다.
  11. 2020.07.03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1
  12. 2020.07.02 [천신폭풍탑] 제 28장 거지 소굴을 찾아온 미녀들
  13. 2020.07.01 [천신폭풍탑] 제 27장 붓속에 숨겨진 재산 2
  14. 2020.06.30 [천신폭풍탑] 제 27장 붓 속에 숨겨진 재산 1
  15. 2020.06.29 [천신폭풍탑] 제 26장 강상봉적
  16. 2020.06.28 [천신폭풍탑] 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2
  17. 2020.06.26 [천신폭풍탑] 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1
  18. 2020.06.25 [천신폭풍탑] 제 24장 고수척살대
  19. 2020.06.24 [마종천황보] 제 10장 사년만의 출도
  20. 2020.06.23 [천신폭풍탑] 제 23장 혈포단객 2
  21. 2020.06.23 [마종천황보] 제 9장 신공을 만들다
  22. 2020.06.22 [마종천황보] 제 8장 둘만의 낙원
  23. 2020.06.22 [천신폭풍탑] 제 23장 혈포단객 1
  24. 2020.06.21 [마종천황보] 제 7장 기연을 만나다
  25. 2020.06.20 [천신폭풍탑] 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2
728x90

第 四 章

 

       밀림 속에서의 긴 꿈

 

 

 

괴물들은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차렸다.

호수가에서 소일초가 불을 피우고 악어 한 마리를 통째로 굽고 있었다.

어른의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나무에 매여져 있는 악어는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몸부림 치고 있었다.

옆에는 마른 나무가지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소일초는 입맛을 다시면서 화력을 높이고 있었다.

괴물들도 그에게 혹사를 당한 뒤라 몹시 배가 고팠다.

게다가 아직 살아 있는 악어가죽 굽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군침을 삼키며 악어를 보고 있었다.

지글지글-------

직지글---------

마침내 악어는 축 늘어져 노글노글하게 익어버렸다.

순간 소일초는 손에서 아주 밝은 빛이 반짝 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얇고 날카로운 깃털모양의 수정(水晶)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길이는 약 두치 반 정도,

너비는 한치 못되어 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수정검우(水晶劍羽),

 

바로 도귀(賭鬼)의 수정검우였다.

그의 손에서 다시한번 깃털 모양의 수정이 반짝 하다 사라졌는데,

악어의 살점이 뚝 떨어졌다.

냉큼 받아서 입에 넣고 씹어보니 보기보단 영 맛이 없었다.

[쳇! 이러면 헛수고 한 거잖아……]

고개를 슥 돌려 한 줄로 나란히 누워있는 괴물들을 보았다.

[저 놈들은 수(數)가 많으니까 한 마리 쯤 잡아먹어도 괜찮겠지……]

그가 입에 넣었던 고기를 뱉고 눈빛을 번뜩이며 자기들을 노려보자 괴물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일초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저놈들을 집에까지 끌고 가서 키워야 되는데 눈앞에서 동료가 잡아먹히는 것을 보게되면 자살해버릴 지도 몰라…… 맛이 좀 없더라도 오늘 저녁은 이걸로 때워야겠군……]

그는 조금 전에 악어의 질긴 가죽을 씹었던 것이다.

그것이 맛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석달쯤 굶은 후 일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연해 보이는 곳을 찾아서 살점을 베어먹어 보니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즉시 휴대했던 소금을 꺼내놓고 본격적으로 악어를 파(?)먹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그가 먹는데 열중하는 것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고 팍 늘어졌다.

실컷 먹은 소일초는 괴물들을 힐끗 보고는 엄청나게 굵은 나무둥치 밑으로 가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렸다.

하는 짓에 비하여 잠자는 모습은 여느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

…………

× × ×

 

…………

정뇌(井牢),

 

무림에서 가장 험난한 뇌옥이자 백인장의 금역이다.

수백 년 전,

백인장이 무림에서 암중리에 활동하던 때부터,

무림의 최고 거마(巨魔)들을 가둬온 뇌옥이다.

수직으로 밑으로 파내려간 우물처럼 된 이 뇌옥은 모두 구층(九層)으로 되어있으며,

각 층마다 팔 명 씩의 혼세거마를 가둘 수 있다.

이 곳에 갇히는 마두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무림에 웅크리고 있으므로 무림은 완전한 피의 혈풍에 휩싸이게 할 수 있음은 물론,

무림천지를 사마(邪魔)의 땅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도 이었다.

때문에,

정뇌를 지키는 엄중한 경비는 백인장은 물론 중원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백인장의 최일류 도객들의 온 힘이 기울어져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십여 년 전 도(刀)의 하늘인 백인장(百刃莊)이 무림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후 에는 오히려 정뇌에 잡혀 들어오는 마두의 수가 격감했다.

아마도 백인장 도객들이 무서운 힘이 강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자 사마가 숨을 죽인 때문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백인장의 원로도객들이 정뇌를 관리해 왔는데 각 층 마다 한 사람의 원로가 직접 거처하면서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로 도객들은 모두가 백인장의 전대고수들로 지금은 자기의 지위를 후손에게 물러주고 오직 도법의 연구와 장원 내의 중대한 일에만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인장(百刃莊)에는 백 명(百名)의 도객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을 젊은 도객들과 은퇴한 노도객(老刀客)들도 있기 때문에 실제의 도객 수는 수 백 명이었고,

백인장의 식구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법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백인장의 도객들의 도법은 각기 다른 것이었으니……

백인장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절세의 도법들만 해도 백 가지나 되었던 것이다.

실로, 무림에서 최강문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정뇌……

지금은 불과 십 여 명의 마두들만 갇혀 있는데……

 

× × ×

 

쿠르르르르……

돌연 백인장의 절대금역인 정뇌의 여러 문들 중 하나가 둔중히 열렸다.

동시에,

콰아아아……

뭉타래 기운이 음습하고 사이로우며 마기로움의 구름덩이를 만들어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리고 어디선가로 부터 들려오는 전율의 호곡(乎哭),

[…으흐흐흐흐……]

한꺼번에 매케한 냄새에 실려오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괴성(怪聲),

절규,

울부짖음……

마치 저 십 팔 층 지옥유부(地獄幽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때다.

돌연,

검은 마기와……

소름이 끼치는 울부짖음이 소용돌이 치는 사이를 뚫고,

자박 자박 자박………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화섭자를 손에 들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소리는 그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불과 오 세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일신에는 눈보다 흰 백의를 걸쳤고,

머리에는 두 마리의 학이 허공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듯한 백학건을 늠름하게 쓴 이 소동(小童),

밝고 천진하며……

천상(天上)의 선동(仙童)처럼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고 볼에는 장난기가 가득 배어 있는 듯 했다.

헌데 무슨 일로……

이토록 깨끗하고 고아하며……

그러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어린 아이가 이 음습한 정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적지 않는 어려움을 겪은 듯,

그의 깨끗한 백의가 먼지로 인해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헌데 일순간,

슷……!

이 어린 아이의 앞으로 한 명의 노인이 소리없이 날아내렸다.

단아한 백색장포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인,

마치 그의 몸의 일부인양 자연스럽게 장도(長刀)가 허리에 걸려있는 그의 모습은 기품이 이를 데 없었으며 눈빛은 맑고 고요했다.

거기에다 온화로운 얼굴,

마치 신선을 직접 대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노인이었다.

사실 신선 같은 노인은 날아내렸으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 뜬 채 유령처럼 떠있었다.

노인은 다섯 살 정도의 꼬마가 정뇌에 들어오자 아주 이상한 듯 했다.

번쩍,

그의 맑은 두 눈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작렬했다.

[애야 너는 누구냐?]

[…………]

[누구길래 감히 정뇌에 들어왔단 말이냐? 허참, 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뭘 하기에 어린아이가 이곳까지 오게 한담……]

노인은 혀를 차면서 싸늘하게 목소리를 깔았고 어린 아이는 밝고 천진한, 그러면서도 장난기가 짙은 얼굴을 들었다.

[영감이 원로십팔도객(元老十八刀客) 중 제일 막내 도객인 백승옥도(百勝玉刀)인가?]

비록 장난기가 들어있는 하대(下待)였지만,

조용한 미소에다 행동은 침착하고 유연했다.

백승옥도의 몸이 어이가 없는 듯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소동을 보고는 절로 흠칫 했다.

(이 어린애……오오……저 뛰어난 기품과 아름다움……그리고 천부적인 골격……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노부를 대번에 알아보는 것인가?)

백승옥도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학(鶴)처럼 단아한 기품의 소동을 세심히 살폈다.

(아무튼 간에 이 정뇌에는 기관이 없어서 탈이야……위에서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해서 이 아이를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이녀석! 나는 백승옥도가 맞다마는 너는 누구길래 그처럼 어른도 몰라보고 말을 막 하느냐?]

백승옥도는 어린아이에게 크게 감탄하고 있었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겠다는 듯이 물었다.

순간 백의 소동의 얼굴에 영악한 웃음이 환하게 스쳐지나갔다.

[믿지 못하겠지만……이 정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영감처럼……나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없었지.]

[…………]

[또 나는 내가 누구라고 남들에게 한 번도 말할 필요가 없었지.]

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가던 백의 소동이 돌연 어깨를 흔들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낭랑한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한참 후에야 그쳤다.

백의 소동은 웃느라고 빨갛게 변한 얼굴에서 애써 웃음을 흐트리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백승옥도에게 말했다.

[왜냐하면……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었고…………나에 대해 모른다는 것조차 그것은 내게 큰 죄에 해당되었고……또한 당연히 가혹한 형벌로 이어졌지……]

순간 백승옥도의 깊은 동공에서 가는 파장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너는 ?]

백의소동은 백승옥도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환한 웃음을 빨개진 얼굴에 다시 피워올렸다.

[그렇지.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군. 백인장의 모든 사람은 나를 며칠 전 부터 소일초(蘇一招)라고 부르지. 그 전에는 소태봉이라 불렀고……]

단아한 가운데 듣는 이를 압도하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

백승옥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어 그의 얼굴에 가득히 번져오는 격동의 물결,

그는 그 자세로 소동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정중히 무릎을 낮추고 눈을 마주했다.

[십팔원로 중 백승옥도가 소장주(少莊主)를 뵙겠소.]

소장주……

이 아름답고 천진하며……

환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소동은 바로 백인장의 절대고수인 도왕 소선풍의 일점혈육인 마동(魔童) 소일초였다.

이 순간,

[영감은 너무 겸양을 부리는 군.]

소일초는 하얀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어 백승옥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승옥도는 장주인 소선풍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원로도객인데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어이가 없었으나,

귀여움만 받고자란 철부지의 행동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영감이 이 정뇌에 들어왔을 테니까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

이제 소일초의 말을 듣는 늙은 도객 백승옥도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정뇌에 들어온 후 벌써 칠년의 세월이 흘렀다오. 앞으로 삼년이 지나면 다시 밖으로 나가 소장주를 만나게 되겠지요.]

[내가 태어나던 날 원로들이 옥소도(玉小刀)을 전해 축하해 주었다고 하는 것 같더군.]

소일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 크기의 반투명한 하나의 옥으로 된 소도(小刀)를 백승옥도에게 내밀었다.

그 소도를 받아든 백승옥도,

그의 얼굴에 짙은 감회가 서려왔고,

그는 추억에 잠기듯 소도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랬었지.……소장주의 탄생을 이 늙은이도 정뇌 안에서 소문으로 알게 되었는데…당시 후사가 없어 애태우시던 장주께서 후사를 얻으셨으니……정말 큰 경사였지……]

이때 소일초는 얼굴을 찌푸리며 재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엣취……엣취……]

백승옥도은 황망히 소일초를 부축하려 했으나,

소일초는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이런 재치기쯤은…… 그런데 이 정뇌 안은 너무 환기가 안되는 것 같애. 공기가 나뻐……]

염려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소일초를 부축하려던 백승옥도,

헌데 돌연 백승옥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소……소장주,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소도에 산공산(散功酸)을 바르셨소?]

느닷없는 백승옥도의 음성과 태도,

소일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입술을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왜 나는 아직도 영감이 반응이 없을까 걱정을 했어.]

[소……소장주……!]

백승옥도의 부처처럼 자비롭던 얼굴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허나 소일초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시선을 환한 미소로 백승옥도의 얼굴에 던졌다.

[미안, 미안……그 산공독은 ……만지는 순간 혈맥을 타고 약효가 번진다지? 아마?]

순간 백승옥도의 얼굴이 더욱 참당하게 일그러지고,

급히 그는 내력을 돋구어 삼매진화로 산공독을 태워버렸다.

푸지지직……!

옥소도를 쥔 그의 손에서 연기가 뭉텅 피어오르는 찰나,

[헉……!]

백승옥도은 푸석한 신음성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소일초의 고사리 같은 손이 백승옥도의 마혈(麻穴)을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찍어버린 것이다.

[소……소장주……!]

아득히 정신이 달아나는 속에서도 백승옥도는 두 손을 내저었다.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환히 피어있던 미소와 천진과 장난기가 걷히고,

대신,

이제 조금 안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백인장의 다른 곳은 다 가보았지만 여기는 구경을 못했거든…… 얌전하게 구경만 하고 갈거니까 너무 화내지마. 위 층에 있는 영감들도 지금 똑 같은 신세니까……]

[소……소……]

[위층에는 마음에 드는 마두(魔頭)들이 없었어……여기서 괜찮은 마두를 만나면 잠시 놀다가 갈께……]

마음에 드는 마두라니?

마두와 놀다가 간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일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명만 세상에 빠져나가도 온천하가 피로 잠길 거마들과 놀다 가겠다니!

어쨌거나,

소일초는 완강한 걸음으로 음습한 뇌옥문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백승옥도는 혼절해 가는 영혼을 붙들고 마지막 기력을 다해 두 손을 휘저었다.

[소……장주……위……위험……무서운 일……제……발……]

허나,

소일초는 등을 돌리고 그를 힐끗 보면서 손을 마주 흔들어 주고 가벼운 걸음으로 지하 구층의 뇌옥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어,

소일초의 한개의 문앞에 가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데,

퉁퉁------

그의 손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전혀 뜻 밖에도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그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관을 휙 돌려서 문을 열어보아도 텅빈 곳이었다.

대충 두드려가며 조사해본 결과 그래도 구층의 석실에는 네 명의 죄수가 있었다.

그 정도라면 어느 층 보다 많은 것이다.

위의 팔층 까지는 기껏해야 열 두 명의 마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정뇌의 구층 석실에는 바로 무림에서 기이한 악명을 떨친 바 있는 사마귀(四魔鬼)가 감금되어 있었다.

[안에 있는 놈은 어떤 놈이냐?]

앳되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정뇌안에 길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누가 십 년 동안을…… 이 저주 받을 뇌옥에서 갇혀 지낸 우리를 부르는 건가?]

[우하하하……이 뇌옥에서 그렇게 소리치는 놈이 있다니 대체 어떤 놈이냐……누군냐?]

세 가닥의 종잡을 수 없는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안에 있는 네 놈들의 이름을 물었다.]

소일초가 소리쳐 물었고,

석실 안에서는 당당한 어린애의 목소리에 어리둥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린, 사마귀(四魔鬼)다. 너는 누구냐?]

이 음성은 먼저 들린 세 음성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귀 네 놈이라고? 그럼 너희들은 지옥에서 잡혀왔단 말이냐?]

[와하하하……이곳이 지옥이지 다른 지옥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 꼬마놈아!]

순간,

끝없이 울려퍼지는 웃음과

철컹……컹커덩……

소름이 끼치는 금속성에 불쾌함을 느낀 소일초가 고함을 쳤다.

[시끄럽다. 못된 것들……]

 

시끄럽다……

시끄럽다……

 

소일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어둑어둑해 오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 괴물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함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길 꿈이었군……그 때가 언젠데 꿈을 꿔? 사마귀가 또 잡혀 들어왔나?]

아직 정신이 덜 들었는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때, 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났는데……씨……또 잡혀 들어와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

 

밀림에서는 해가 지는 저녁에도 무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워있는 괴물들 옆으로 가서 발로 툭 찼다.

[일어나! 일어나!]

괴물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설사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두릅모양으로 엮인 데다가 손과 날개가 함께 묶인 상태에서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 씩 잡아 일으키자 괴물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 낮의 악몽이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낮에 그 때,

소일초는 역시 괴물들을 세워놓고 차례대로 박치기를 해서 놈들을 모두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렬로 세워진 괴물들의 뒤에서 줄을 잡고 남은 자락으로 채찍질을 했다.

영특한 괴물들은 그가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짧은 다리로 줄지어 어둠이 깃드는 숲으로 걸어갔다.

거목이 줄지어 있는 사이를 얼마동안 걸어가자 정말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장정 백 명이 손을 맞잡아도 다 두르기 힘들 정도로 굵고 큰 나무 였다.

나이가 몇이나 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적게 잡아도 수 천 년은 됐을 것 같았다.

거목의 밑동 주변에 드러나 있는 뿌리들도 무려 사 오 장의 높이가 되어 보였다.

괴물들은 그 뿌리들이 엉켜있는 사이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 근처에는 흙이 오랜 시간을 두고 갈라지고 붕괴되어 천연의 동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법 괴물다운 곳에 사는데……]

소일초는 어두운 동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내공이 깊어서 어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지라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동굴의 처음 얼마동안은 토굴이었으나 조금 더 들어가자 석굴이었다.

동굴안은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인공의 가미된 흔적마저도 보였다.

과연,

석동의 안쪽에는 사십여 평 정도 되는 넓은 곳이 나왔는데 그곳에는 수십 개의 야명주가 천정에 박혀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누군가가 여기서 살았거나 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괴물들은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추어 섰는데,

소일초는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경각심을 일으켰다.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는 광장의 저 편,

다시 하나의 작은 석동이 있었고 흰 그림자 두 개가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괴물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네이버에도 와룡강의 블로그가 있습니다.

올리는 글의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대피소나 미러싸이트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티스토리의 와룡강 블로그에 문제가 생기거나,

네이버가 접근이 쉽고 편할 경우 네이버의 와룡강 블로그를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watop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三 章

 

           返老還童, 神行魔童에게 敗하다.

 

 

 

[좋다. 그러면 어떻게 내기를 할까?]

혈기자는 소일초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일곱 살 짜리 꼬마가 내기를 하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설마 사마귀가 이 꼬마의 사부들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소일초의 눈에서는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사마귀는 탈출의 일념으로 그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서 자신들의 절기를 전수해 주었다.

그렇기에 사마귀의 막내인 도귀(賭鬼)로부터 소일초는 온갖 종류의 도박과 승부를 점치는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지금 형씨 품속에 은전(銀錢)이 네 개 이상이 있으면 내가 진 걸로 하고 네 개가 되지 않으면 내가 이긴 걸로 하면 어때?]

혈기자는 소일초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자기 품속에 은전이 몇 개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무학의 대종사인 그가 언제 자기 품속의 은전이나 헤아려 볼 생각이나 했겠는가?

머리를 숙이고 며칠 동안의 출납상황을 이리저리 점검해 봤다.

소일초는 고심하는 그의 옆에 와서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혈기자는 대충 계산을 해낼 수 있었는데, 세 개인지 네 개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좋다. 두 말 하기 없기다.]

혈기자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자 소일초가 소리쳤다.

[잠깐!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함께 봐야 될 게 아니겠어?]

[물론,그렇지.]

[하지만 형씨의 무공이 너무 고강하니까 어떤 속임수를 쓸 지도 모른단 말이야……]

[…………]

[그러니까 주머니를 열지 말고 손으로 주물러서 몇 개 인지를 돌아가며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좋다. 네가 먼저 확인해 봐라.]

혈기자는 주머니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소일초는 몇 번 주물럭거리다가 혈기자에게 다시 던져주면서 말했다.

[첫 판은 형씨가 이긴 것 같은 데……]

혈기자는 내심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주머니를 받아들자마자 표정이 확 바뀌어져 버렸다.

주머니의 무게가 조금 전과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소일초가 무슨 술수를 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두눈을 똑 바로 떠고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손으로 만져보니 은화는 세 개 밖에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현장을 잡지 못했으니 사기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흥! 내가 졌군, 단 한 번 만 이환공(移環功)의 구결을 들려주겠다. 익히고 못 익히고는 네게 달렸다.]

말을 마치자 마자 혈기자는 몹시 빠른 속도로 구결을 읊었고 소일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마나 기억했지?]

[십중일이(十中一二)!]

[그럼 다시 시작하자. 내기 조건은 먼저와 같다.]

[…………]

[단, 내기의 종류는 내가 정한다.]

[하지만 무공을 겨루거나 누구 나이가 많은가 하는 따위는 절대로 안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들은 날이 훤 하게 밝을 때 까지 무려 열 세 가지의 각기 다른 내기를 했고 그때 마다 번번히 소일초가 이겼다.

소일초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했으면 이긴 후에 혈기자가 임의로 한 가지 무공을 가르쳐 주고,

혈기자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하면 소일초가 이긴 다음에 자기가 원하는 무공을 선택해서 요구했다.

그리하여 소일초는 자기가 원하는 여섯가지의 절학을 배울 수 있었다.

총명한 그는 한 번씩 밖에 그 무공들의 구결을 듣지 않았지만 이미 머리 속에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에 혈기자는 속이 탈대로 다 탔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소일초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했다.

[내가 금방 형씨한테서 배운 무공들로 공격하면 형씨는 가만히 앉아서 방어만 하는 거야.]

[…………]

[만약 일어서거나 자리를 옮기게 되면 형씨가 진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긴 걸로 하면 어떻겠어?]

혈기자는 이미 그의 무공을 한 번 보았기 때문에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좋아! 만약 이번에 내가 이기게 되면 너는 내 제자들을 만나서 내 근황을 모두 일러주고 아무 염려말라고 전해줘야 하고 내 손녀와 나를 한 번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아무 염려 말고 이기기나 해. 형씨의 제자가 바로 사수(四手)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그럼 바로 시작 할까?]

혈기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일초는 조금 전에 그에게서 들은 수법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퍼부어 댔다.

그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혈기자도 처음에 깜짝 놀랐다.

(요놈이 일이할 정도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더니 나를 속였구나……)

소일초의 수법들은 점점 능숙해져갔다.

혈기자는 과연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되는 인물인 만큼 꿈적도 않고 그 자리에서 태연하게 다 받아 넘겼다.

열 두 가지의 초식을 번갈아 사용하던 소일초는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열 세 가지 중에서 열 두 가지는 사용했고 나머지 한 가지는 열 흘 후에 와서 사용해 보기로 하지. 만약 열흘 후에 내가 오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패한 것으로 하고……]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홱 돌아서더니 낄낄 대면서 날아가 버렸다.

혈기자는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완전히 골탕만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번이야 말로 내기에서 한 번 이라도 이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흘 동안 앉아있기로 했다.

그놈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승리는 자기 것이다.

이겨 놓기만 하면 여산(廬山)에 있는 백인장으로 찾아가 소일초가 아니면 그의 아비 소선풍에게라도 윽박지르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일 것 같았다.

소선풍이라면 자기 제자들에 뒤지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소일초 보다 나은 것이다.

더우기 자기의 막내제자인 조예진이 소선풍의 작은 마누라니까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반노환동한 천하제일인 혈기자는 무려 십일을 뙤악볕과 소나기를 맞아가며 창산의 이름모를 산곡에서 보내게 되었다.

 

× × ×

 

한편 소일초는 기다란 어린도를 등에 매고 남만의 밀림 속을 헤매 다니고 있었다.

[제길, 되게 덮군.]

그의 손에는 난도질이 된 표범의 가죽이 들려있었다.

아마 가죽 좋은 줄 알고 벗기다가 다 찢어 버린 모양이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빽빽한 밀림 속을 그는 벌써 며칠 째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저 괜찮은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돌아갈 생각으로……

몇 번 인가 사람 같지도 않은 만족(蠻族)을 만났으나 오히려 그를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 버렸다.

커다란 비단뱀도 그를 만나자마자 몸뚱아리가 토막토막 나버렸고 사자(獅子)도 목이 짤린 후 탐스러운 갈퀴를 소일초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의 행로에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무조건 길도 없는 밀림속을 직진(直進)해 나갔다.

독충들이 그의 몸을 무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갑자의 내공을 가진 그는 날 때부터 금강체(金剛體) 였고 만독불침(萬毒不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몇 시간을 똑 바로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흔한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맹수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밀림은 마치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디에도 짐승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숲은 다른 곳 보다 더욱 우거져 있었다.

갑갑함을 느낀 그는 호신강기를 강하게 일으킨 후 그대로 돌진해 버렸다.

[와아아……]

잡목들은 칼에 베인듯 잘려져 나가 버리고 큰나무에 그의 몸이 부딪혔을 때는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 나갔다.

쾅! 우두두둑-----

한데 갑자기 그의 눈 앞이 탁 터이면서 밀림이 끝나고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그러나 전력으로 질주하던 중인지라 멈추지 않고 호수 위를 그대로 날아넘어 건너편에 내려섰다.

역시 그곳에도 숨막힐 듯한 적요가 감돌고 있었지만 나무들은 여태까지 봐 왔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어린 소일초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목들을 바라보았다.

작아 보이는 것도 높이가 삼십 장은 족히 될 것 같았고 큰 나무들은 오십 장 정도 돼 보였다.

밑동도 장정 오십 명은 서로 손을 맞잡아야 될 정도로 굵었다.

그가 감탄을 하면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딱> 소리가 나도록 다물면서 오른 팔을 홱 돌렸다.

순간,

캑-------끄륵-------!

고개를 돌리고 보니 난 생 처음보는 해괴한 동물이 자기의 작은 손에 매달려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동물이 뒤에서 기습하는 것을 소일초가 먼저 알아채고 목을 잡아버렸던 것이다.

꽥------!

소일초는 그 괴물의 너무도 이상한 모습에 기성을 지르며 땅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놈은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검은 털을 가졌는데,

겨드랑이에는 자기 몸 만한 날개를 달려있고 사람을 닮은 얼굴에 손과 발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박쥐와 원숭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 같은 괴상한 동물이었다.

땅에 패대기 쳐졌던 그 괴물은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새,

그놈의 동료들로 보이는 것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괴물들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이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랐던 소일초,

그러나 이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남만까지 온 보람을 이제서야 느끼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검은 괴물들을 오히려 음흉스런 눈초리로 처다보았다.

 

날개 달린 검은 괴물들,

키는 큰 놈도 넉 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등치로 본다면 열 한 두 살 짜리 애들만 했다.

그리고 키에 비해서 유달리 다리가 짧은데 팔은 반데로 길었다.

헤아려 보니 널부러져 있는 놈까지 해서 모두 열여섯이었다.

 

소일초가 천천히 다가서자 오히려 그놈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착각일 뿐이었다.

놈들은 아주 영리했다.

동료중의 하나가 그에게 단번에 당하는 것을 보았는지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차륜전을 펼치려 하는 것 같았다.

끽끽-------

한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자 다른 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날개짓을 했다.

원래 놈들은 이 밀림일대에서 흉폭한 성격과 강한 힘, 그리고 영리한 두뇌로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사자도 그들을 보면 도망가기에 바빴고 열 놈이면 코끼리 마저도 죽여버리는 맹수들이었다.

그들의 날개바람은 무척이나 강해서 주변에 가득 흙먼지가 일었다.

뿌연 먼지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되자,

그 놈들은 날개와 긴 팔을 이용해서 소일초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소일초에게는 단지 신기한 장면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

덤벼드는 놈마다 소일초의 손아귀에 목을 틀어잡혀서 땅에 패대기 쳐지고 말았다.

캑------

끽-----끄윽------

금방 주변에는 밀림의 왕으로 군림하던 괴물들이 일제히 손 발을 허공으로 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하하하하……]

쓰러진 괴물들 사이에서 소일초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품속에서 가늘고 긴 줄을 꺼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괴물들의 손과 날개를 한꺼번에 묶어서 일렬로 죽 눕혔다.

손바닥을 탁탁 턴 다음 제일 앞에 누워있는 괴물의 배위로 풀쩍 뛰어 올라가며 노래를 불렀다.

 

----일 년은 삼백 오십 육일, 봄 여름 가을 겨울,

남자는 배를 타고 여자는 파도친다.

일 년은 열 두 달, 달거리도 열두 번……

 

꽥-------!

꽥-------!

소일초가 노래를 부르며 괴물들의 배에서 배로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 다니자 정신을 잃었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그놈들에게는 이처럼 재수 없는 날은 평생 처음 이었다.

골치덩어리 신행마동에게 걸렸으니 껍질이 벗기지 않으면 조상님 은덕이라고 제사라도 지내야 할 판이었다.

소일초의 무게야 열 살 짜리 아이가 몇 근 이나 나가겠냐 만서도 그의 등에 매어져 있는 어린도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칼 이었다.

어린도 전체가 하나의 만년한철로 돼 있는데 무려 칠십 근이나 되었다.

소일초는 한 놈을 건너 뛰기도 하고 두 놈을 건너뛰기도 하며,

어떨 때는 한 놈을 죽으라고 밟아 대기도 했다.

괴물들은 손과 날개가 동시에 뒤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두려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자기의 배를 밟지 않고 지나가면 안도의 눈빛을 보냈고 여러 번 밟힐라 치면 죽는 소리를 냈다.

소일초의 노래소리에 맞춘 괴물들의 효과음향은 한 동안 계속 되었고,

그놈들은 이제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어떤 놈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비명소리 마저 잘 세어나오지 않았다.

소일초는 신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괴물들은 밟혀 죽을 지경이었다.

괴물들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려 더 이상 신나는 비명이 나오지 않자 소일초는 그 장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제일 끝에서 부터 하나 씩 하나 씩 차례대로 잡아 일으켜 세웠다.

괴물들은 눈초리는 아예 공포에 젖어 있었다.

진짜 괴물 같은 꼬마놈이 또 무슨 짓을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三十 章

 

            修羅場이 된 武林大會 (1)

 

 

 

군웅들은 저자가 석두공이구나 하면서도 내심 못미더워했다. 그렇게 고수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형도객이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왔는가? 수고했네. 정말 애썼네.]

하지만 석두공의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 말했다.

[빨리 이곳을 피해야합니다. 척살대가...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형도객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들이 벌써 나왔단 말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소이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두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두공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났는가?]

[그들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의형인 일초진천수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석두공은 말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부상을 당했는가?]

[아닙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서 저들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척살대는 모두 삼마경을 익혔습니다.]

석두공은 양주를 떠난 이후 단 한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무형도객은 북위로 뛰어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어서!]

그의 말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갑자기 돌아가라니 무슨 말이오? 영문을 말하시오!]

[적들의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빨리 피해야하오.]

[물은 제방을 쌓아서 막고 적은 적은 병사로써 응한다고 했소. 적이 온다면 맞서 싸워야지 그 무슨 말씀이시오?]

군웅들이 아우성을 쳐대었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무형도객이 다시 외쳤다.

웅성웅성...

광장은 질서를 잃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리 높여 무형도객을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무슨 영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하는 자들도 있었다.

석두공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 × ×

 

장강으로 흘러드는 한수(漢水)의 푸른 물결,

그 푸른 물결위로 새처럼 낮게 날아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쉬이이이이!

쉬이이이잉!

수효는 일백,

그들은 한무더기의 구름처럼 날아서 귀산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검과 도, 또는 다른 기이한 병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

그들은 바로 척살대였다.

삼인이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제거하기 위해 삼마경으로 연성시킨 그들이 무림대회의 장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귀산의 광장은 척살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질서를 잃은 군중들이 어지러운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고함치며 서로 삿대질 하는 자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더욱 고함치는 자들로 귀산의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무림인들은 척살대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석두공을 부르며 소리쳤다.

[석두공 소협은 뭘 하시오? 그들이 온다면 물리쳐야 할 게 아니오?]

[우리가 힘을 모았는데 누가 우릴 공격할 수 있단 말이오?]

의기가 충천하는가 아니면 소란이 극심해 질뿐인가?

군웅들의 아우성으로 인해 어떤 말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슈아아앙-!

갑자기 전망대의 왼쪽에서 일백 여 명의 인물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늦었다.]

석두공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어서 도망치시오. 척살대요.]

무형도객이 소리쳤으나 군웅들은 오히려 병기를 뽑아들었다.

창차차차차!

병기가 뽑히는 금속성이 한동안 귀산을 메아리쳤다.

슈슈슈슈...

일백 여 명의 척살대가 양떼들에 덮쳐드는 늑대들처럼 날아들었다.

[차앗!]

쐐애액!

석두공이 극심한 피로를 무릅쓰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값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철사보주 맹호산도 버럭 소리치며 날아올랐다.

[이놈들! 죽어라!]

파파팟!

그는 한 쌍의 판관필로 잇달아 여덟 개의 초식을 펼치며 척살대를 막아섰다.

[와아아아!]

군중들이 그의 멋들어진 모습을 보고 환호했다.

석두공은 척살대의 선두에 돌입하며 고함쳤다.

[회천마벽(廻天魔劈)!]

고오오오!

석두공의 몸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척살대를 부딪혀갔다.

차차차창!

하지만 척살대의 인물들 중의 일부가 검을 떨치는 순간 석두공이 일으킨 회천마벽은 종이짝처럼 찢어지며 흩어져 버렸다.

그때 맹호산의 초식도 척살대에 다다랐다.

한데 척살대는 그의 초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빠른 기세로 그를 지나쳐 버렸다.

맹호산은 크게 당황했다.

쏴아아!

벌떼처럼 날아든 척살대는 이제 석두공의 몸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고오오!

석두공의 몸에서 호신강기가 펼쳐졌다.

파파팟! 촤아악!

거의 동시에 맹호산의 몸이 수백 점의 고기조각으로 변하며 허공에 피를 뿜었다.

[으아아악!]

그의 비명이 귀산을 울렸다.

척살대가 지나치면서 이미 그의 몸은 난도질당한 후였던 것이다.

퍼퍽!

석두공의 호신강기가 깨어지면서 그의 몸에서도 군데군데서 피가 솟았다.

군웅들은 척살대의 가공할 힘에 전율했다.

십대고수의 한사람인 철사보주 맹호산이 저항도 한번 못해보고 죽었다!

이것은 척살대가 무림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모두 흩어지시오!]

무형도객의 소리가 다시 광장을 뒤흔들었다.

쩌어어엉!

이미 척살대를 맞아가는 그의 전신에서 백색의 도광이 쏟아져 나왔다.

[으와와와...! ]

군웅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제히 경신술을 펼치며 날아오르는 그들은 메뚜기 떼를 방불케했다.

파파팡!

무형도객의 백색도광은 척살객들 중 세 명이 동시에 펼쳐낸 팔황지옥도에 가로막혔다.

“가요 백언니!”

장지연과 백란이 날아올라 무형도객과 쓰러진 석두공을 향해 쏘아갔다.

검성과 만박노조도 척살대를 공격해갔다.

그러나 해남검파의 진우백과 그 제자들은 소리없이 광장에서 빠져나갔고,

단혼곡주 하삼풍도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군중들 틈으로 달아나 버렸다.

극히 몇 사람 만이 척살대를 가로막았고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만박노조가 고함쳤다.

[천강검진을 펼쳐라!]

백검보의 검객들이 비장한 신색으로 천강검진을 펼쳤다.

그리고 검성과 무형도객, 만박노조와 호표장주 설곽 및 삼노장의 세 노인이 연계하여 척살대를 가로막았다.

척살대의 하나하나의 무공으로 따지자면 검성을 능가할 자는 없는 것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수효는 일백, 뭉쳐진 그들의 힘은 진정 가공했다.

석두공이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으로 장지연과 백란이 호위하듯 둘러서서 연검과 옥퉁소를 사용하여 척살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연검은 살아있는 빛이 되어 사장방원을 뒤덮었으며,

삘리리리...

옥퉁소에서 흘러나온 음은 척살대의 인물들이 정신을 혼돈하게 만들고 또한 은연중에 공력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또한 백란의 무공은 기이하도록 고강하여 옥퉁소를 불면서도 연신 그녀의 발은 풍차처럼 움직이며 발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무공은 아버지인 무형도객에 비해 오히려 뛰어나 보였다.

척살대도 두 소녀의 필사적인 대항에 주춤하며 그녀들의 곁으로는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백검보의 천강검진은 깨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검성도 무형도객도 다 부상을 입었다.

호표장주 설곽의 오호단혼도가 무서운 기세로 척살대에 대항했다.

하지만 그의 오호단혼도 역시 척살대가 펼치는 팔황지옥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겨우 일어선 석두공의 귓전으로 예리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아우! 왜 아직 도망가지 않았나? 이들은 모두 시한부의 생명이라 몇 달만 지나면 모두 시체가 되고 말텐데... 내가 도울 테니 어서 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자넨 너무 지쳤어 빨리 가게. 천추의 한을 남기지 말고... ]

금사종의 급박한 전음이었다.

석두공은 돌연 이를 악물고 뇌성벽력같은 소리를 냈다.

[천신폭풍보!]

쿠아아아아앙!

그의 몸에서 엄청난 강기가 뿜어지며 양쪽에 섰던 장지연과 백란이 퉁겨나갔다.

그리고 그의 몸은 강기속에 묻히며 척살대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콰아아아아...

그가 스치는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바위도 검도 도도 시체조차 상관 없었다.

그의 천신폭풍보의 위력이 미치는 것은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렸다.

[크아아아아!]

척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신폭풍보의 엄청난, 상식을 벗어난 가공한 위력 앞에선 그들도 발악 속에 가루가 되어갔다.

검성 등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일어났다.

한데 척살대의 반수 이상이 가루로 변해버렸을 때 천신폭풍보의 기세가 약해지며 석두공이 뚝 떨어져 내렸다.

척살대의 인물들이 석두공을 향해 덮쳐들었다.

[아악!]

장지연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때 석두공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척살대 중의 한 인물이 갑자기 석두공을 안아들고 다른 척살대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파아아앗!

그의 소매 속에서 한자루이 장검이 쏘아나오며 동시에 두 사람의 척살대를 베었다.

[크아악!]

번개를 방불케하는 쾌검이었다.

슈아아앙!

척살대를 벤 자는 파혼검이었다.

쐐애액!

그는 석두공을 안아들고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이 펼쳐지면서 그의 몸은 빛살처럼 빠르게 산아래로 달려갔다.

[배신이다!]

척살대의 인물들이 소리치며 파혼검을 뒤따랐다.

무형도객 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라락!

그들은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는 잘 몰랐지만 척살대가 달려가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악!]

[으악!]

비명이 꼬리를 물고 들려오고 있었다.

척살대의 인물들은 파혼검, 즉 금사종을 뒤쫓는 과정에서 마주 치는 모든 무림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 章

 

      神行魔童과 반로환동

 

 

 

소일초는 깜깜한 밤 어둠에 잠긴 산속을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키 만큼이나 큰 아버지의 애도(愛刀) 어린도(魚鱗刀)가 꽤나 거추장스러웠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의 작은 마누라는 신통방통하여 어디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날지 몰랐다.

사마귀가 정뇌(井牢) 속에서 창안한 무중일전신법(霧中一電身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서 소일초는 벌써 수백 리를 달려왔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그를 추격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

숲으로도 들어가고 강물위로도 달리고 마침내는 자기도 모르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와 버렸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한 번 띈 이상, 숨이라도 한 번 돌렸다 하면 어느새 냉큼 그의 목덜미는 그녀의 손에 쥐어지곤 했다.

이번에 잡혀서 돌아가면 아버지가 무슨 벌을 줄 지도 모른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인 것이다.

(사마귀의 무공 중에서 이것 하나는 정말 쓸만해……)

그는 암중에 자신의 경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무중일전신법을 배우기 전에는 아무리 잘 도망을 쳐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띄자 마자 잡혀 가곤 했는데……

무중일전신법을 배운 후에는 멈추지만 않으면 신통력이 대단한 그의 작은 어머니도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손가락이라도 닿는 다면 만사는 모두 끝장이다.

오갑자에 이르는 그의 공력도 그녀에게 한번 붙잡히기만 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도저히 힘을 못쓰는 것이었다.

그녀야 말로 천방지축 신행마동인 소일초의 최고 천적(天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소선풍에게도 그녀와 같은 재주는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어린도까지 훔쳐왔으니 아버지는 정말로 날 죽이려고 덤빌지도 몰라……)

아버지의 화난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 마도구식(魔刀九式)을 혼자만 알고 있으랬나?)

그가 이번에 가출한 동기는 백인장의 최고도법인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 주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소선풍은 그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일초가 무공을 배운 것은 백인장의 구십구 도객(刀客)들에게 떼를 써서 얻어 배운 것에다 사마귀의 무공을 더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백인장의 고수들마저도 그를 설설 피하기만 할 뿐 무공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제 밤이었다,

소일초는 잠이 오지 않아 정원의 나무위에 올라가 애꿋은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았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침실 앞에서 한 줄기 백광이 번쩍 이는 것이 보였다.

지붕위로 살며시 올라가서 살펴보니 소선풍이 도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옳지! 저것이 바로 천하제일의 도법이라는 마도구식이구나.)

그는 쾌재를 불렀다.

훔쳐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영 실망이었다.

도무지 그 도법의 원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소선풍은 몇 번이고 거듭 펼쳐보이지만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여태까지 자기가 보았던 것과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도법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도대체 흉내마저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소일초는 어떤 난해한 무공도 한 번 보기만 하면 척척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불가사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살그머니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자고 있는 침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선풍과 그의 작은 어머니는 갑작스런 침입자에 허둥지둥하며 그를 맞았고,

그는 다짜고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한밤중에 한바탕 꾸지람만 듣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심통이 날 대로 났다.

아침에 틈을 보고 있는데 작은 어머니가 어딘가에 잠시 외출한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아버지도 잠시 동안 침실을 비울 것이다.

옳다구나 싶은 그는 즉시 아버지의 침실로 가서 어린도를 가지고 줄행랑 놓아버렸던 것이다.

 

(지독한 우리 아버지……어쩌면 나는 주워온 자식인지도 몰라……친 아들에게 그렇게 인색한 아버지가 세상에 또 있을라구……)

나무들 위로 스치고 날아가며 소일초는 계속 아버지를 원망하고 지금 쫓아오고 있을 작은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는 작은 어머니가 쫓아 오고 있는가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뒤로 휙 집어 던지고 귀를 모았다.

과연 술병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은 어머니가 허공에서 받아들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쳇! 내가 무림의 십이대 고수 중 하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우리 작은 어머니만도 못한데 고수는 무슨 고수……작은 어머니야 말로 일대고수(一大高手)이고 일등고수(一等高手)다 일등고수……)

그의 몸은 큰 나무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 나무에는 어둠속에도 뚜렷이 분간이 되는 붉은 천조각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는 그는 그 천조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그의 작은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분명했다.

소일초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도망칠 만큼 나쁜 악당은 아니었다.

기실, 그와 그녀의 작은 어머니는 사이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려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작은 어머니의 술수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빙 돌았다.

하지만, 그는 어리둥절해 지고 말았다.

갑자기 작은 어머니의 전음이 귀에 들리는데,

그녀는 이미 방향을 바꾸어 왔던 멀리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그녀의 전음은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조금만 놀다가 돌아오너라. 너무 위험한 곳엘랑 가지 말고……]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저 여자는 저렇게 포기하고 갈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이제 아무튼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잠이나 자고 볼 일이다.

(아이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부모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데……내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다 밤에 잠을 잘 자지 않아서 그런지도 몰라……)

주변에는 나무들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가 내려선 곳은 큰 바위가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바위 위로 올라가 편편한 부분을 찾아 척하니 드러누웠을 때였다.

[이상한 놈이군……]

아주 낭낭한 목소리가 그가 누운 바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일초는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껑충 솟아오르며 등 뒤에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어린도를 뽑아 들었다.

[웬 놈이냐?]

어린도의 가늘고 긴 도신(刀身)은 그의 몸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바위 속의 목소리는 조금도 어조를 바꾸지 않고 울려나왔다.

소일초는 바짝 긴장했다.

무림에서 자기보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저 바위 덩어리는 도무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몸이 설설 떨려오기 시작했다.

등골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귀……귀신……이냐?]

[도무지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놈이군……]

바위 속에서는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 없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소일초는 그의 표현대로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귀신에 대해서는 여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큰 용기를 냈다.

[에잇! 내가 이놈의 바위를 베어버려야지……]

그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어린도에 결집시킨 후에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면서 바위를 베어갔다.

어린도가 갑자기 쭉 늘어나면서 도신이 삼장이나 되어버리며 바위에 통째로 부딪혔다.

바로 강기였다.

큰 바위는 소리도 없이 베어져 옆으로 쩍 벌어지는데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나왔다.

[아이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놈이구나……]

갈라진 바위 속에서 흰 그림자가 바위 위로 튀어나왔다.

소일초는 내친 김에 그 그림자를 향해 다시 전력을 다해 어린도로 베어나갔다.

백인장의 백인도객들에게서 배운 절초 중의 한 가지 수법이었다.

삼장으로 늘어난 어린도의 도신이 수백 개의 환영을 만들며 흰 그림자를 베었다.

그림자는 흩어지듯 흐릿해졌고 소일초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제 공격할 만큼 해 보았으니 여차하면 삼십육계인 것이다.

그는 이름처럼 언제나 일초 이상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원래 이름은 소선풍이 지어준 태봉(太峰)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라 자기가 마음대로 일초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 일초를 공격했으니 저 귀신이 죽지 않았다면 자신의 규칙대로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흰 그림자는 다시 뚜렷해지면서 말을 내뱉었다.

[이 수법은 백인장에서 흘러나온 듯 한데……]

소일초는 흰 그림자가 귀신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도로 분명히 베었는데도 죽지 않고 말하다니 귀신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을 향해 덮쳐오지 않으니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도망치는 데야 그야말로 신행마동(神行魔童)인 자신이 아닌가?

흰 그림자는 쪼개진 바위에 턱 걸터앉으며 소일초에게 말했다.

[애야! 이리와 앉거라.]

그러나 소일초는 도망칠 준비만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 녀석!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어……]

흰 그림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형씨. 당신 귀신은 아니겠지? 나 같은 애들은 모두 귀신을 무서워한단 말이야……]

소일초의 주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흰 그림자는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야 이놈에 너같은 놈이야 말로 남들이 귀신같은 꼬마라고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나보고 형씨라니…… 마음에 쏙 드는 놈이군 그래.]

그의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긴 메아리가 온 산속에 울려 퍼졌다.

소일초는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았으나 웃음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길, 웃는 소리 한 번 젠장 맞게 크군……]

그러나 그는 어린도를 등 뒤에 꽂고 쪼개진 바위 중 흰 그림자가 앉지 않은 쪽에 걸터앉았다.

그가 본대로 흰 그림자는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준수한 얼굴의 이십 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서는 은은한 금광(金光)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대체 누가 형씨같은 청년을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소일초는 백의청년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백의청년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릴 말썽꾸러기로군, 백인장 소영감 작품인가?]

[백인장에 영감은 아니지만 영감 못지않게 고리타분한 소씨가 한 분 계시기는 하지, 소선풍이라고……]

소일초는 냉큼 말을 받아 대답했다.

[소선풍? 그는 소영감 아들인데? 그럼 소영감은 언제 죽었지?]

[우리 할아버지를 말하는 모양인데 언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 아직 어린아이니까……그리고 형씨도 우리 할아버지를 알 수 없지. 아직 젊으니까……]

백의청년의 눈에서 금광이 폭사되었다.

그의 무서운 안광에 소일초는 찔끔했다.

[바로 소선풍의 자식이었군, 네 엄마는 조씨(趙氏)지?]

[반 만 맞았어. 아버지는 맞추었지만 어머니는 이씨(李氏)라구……]

백의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같았다.

소일초가 그의 불신에 찬 표정을 보면서 한마디 했다.

[이봐! 내 사부는 거짓말장이지만 나는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이야.]

백의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의 말투가 영 맘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치를 읽었는지 소일초가 다시 한마디 한다.

[내 나이도 겉보기보다는 꽤 많다구. 내가 반말 좀 하기로서니 그렇게 안좋은 얼굴까지 할 건 없잖아.]

백의청년 완전히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 녀석! 대체 몇 살이길래……]

[열살!]

소일초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쳤고 백의청년은 기가 막혀 버렸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허참! 허참……]

[형씨도 나보다 겨우 몇 살 연상인 듯 한데 말투는 완전히 노인네 티를 물씬 풍기는군.]

[너 보기엔 노부가 몇 살로 보이는가?]

소일초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한 열 네살쯤……]

백의청년은 오히려 이제는 그와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지 자꾸 질문을 했다.

[내가 누구인것 같은가?]

[글세…… 무공이 나보다 훨씬 강한 것으니까 이름없는 사람은 아닐 것 같고……]

그는 백의청년의 아래위를 쭉 훑어보았다.

몸에는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사수(四手) 중의 하난가?]

백의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남들이 혈기자라고 하지……]

그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일초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어찌나 웃는지 그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바위 밑으로 굴러 버렸다.

그래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지 한창 웃고 난 뒤에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형씨가 혈기자라고? 형씨가?]

[물론……]

[대체 혈기자의 나이를 알기나 하고 거짓부렁을 하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을 들었으니까 지금쯤 그는 백 살 이백 살 아니 천 살 쯤 됐을 거야……그런데 혈기자라고?]

[네가 지금 몇 살 인데?]

[열살!]

대답하고 보니 소일초 자신도 조금 이상했다.

너무 어른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서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백의청년의 말이 들렸다.

[나는 물론 혈기자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올해로 일백 이십 칠 세지.]

[그런데 어떻게 형씨가 혈기자란 영감이 될 수가 있어?]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소일초가 물었다.

스스로 혈기자라고 밝힌 청년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군.]

[무가(武家)의 자식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그럼…… 형씨가 반로환동했단 말이야?]

혈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 정말로 우리 할아버지도 알겠네?]

소일초는 어느덧 그의 말을 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늙었을 때 가끔 만나던 친구였지. 우린 다들 무학에 정신이 팔려서 혼인이 아주 늦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아들을 낳고 그 후에 내가 아들을 낳았지.]

[형씨하고 우리 할아버지 하고 싸우면 누가 이겼어?]

소일초는 여전히 그를 형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입가에 쓴 웃음을 지으며 혈기자가 말했다.

[소영감의 마도구식은 대단하지. 그 당시에 그의 내공이 오갑자만 됐어도 내가 패했을 거야.]

 

백의청년,

그는 정말로 반로환동한 천하제일인 혈기자였다.

여러 해 전, 그러니까 소일초가 태어나기도 전에 혈기대종사의 겁으로 등천마교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해에 그의 제자들은 혈기자가 연공실로 사용하던 무진동을 파괴해 버렸다.

그 당시 혈기자는 자식과 며느리를 잃은 슬픔과 분노 때문에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있었는데……

그는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었으니 자기가 그 몫까지 다 살아야겠다는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하고 무진동 속으로 들어가 반로환동의 술법을 닦기 시작한 중이었다.

무진동 속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제자들의 소행인지는 모르고 묵묵히 술법만을 닦았다.

당세의 무학대종사로 불리던 그 인지라 과연 얼마의 연구 후에는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서 큰 성과를 볼 수가 있었다.

먼저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고 피부가 다시 부드러워지며 동안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백발과 백염,백미가 뿌리부터 새롭게 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검게 되어버렸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윤기가 있어져 젊은이의 음성이 되어버렸다.

수 년 동안 증진 하자 몸은 완전히 이십 대의 청년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무너진 무진동의 동굴을 뚫고 나오면서 제자들이 성의가 없어서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진동 밖에 세워진 석비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부! 저희 제자들이 느끼건 데 요즘 사부께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비록 사부 밑에서 다년간 무공을 닦았다 하나 아직 사부의 일초을 감당할 수조차 없습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사부가 죽이시면 달게 죽음을 받아야 하지만, 저희들을 죽이는 것이 사부의 참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사부의 일거수 일투족에 불안을 느껴 감히 사부 곁을 떠나고자 의견을 모았습니다. 무진동을 파괴하는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부의 추격을 잠시라도 늦추고자 함입니다. 부디 석송림에서 편안히 여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린 소아(小阿)는 우리가 데려가 잘 키우겠습니다. 우리가 소아를 잘 키우게 사부께서는 절대로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불초한 제자들이 간절히 바랍니다.>

<석송림을 나오지 마십시오. 소아를 훌륭히 키우겠습니다. 혹시 사부께서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신다면 이월(二月) 보름달이 떨때 석송림에서 연기를 올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 제자들이 안심하고 사부를 다시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소아는 우리가 잘 키우겠습니다.

제자일동 >

 

비석을 본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간이 콩만한 놈들. 네가 아무리 정신이 없기로서니 공들여 키운 제 놈들을 죽일까봐 도망을 쳐? 흥 이놈들 좋다. 어디 두고 보자. 나도 이제 네놈들 못지않게 젊은데 내가 네 놈들이 주는 밥만 차려먹을 줄 알고……)

석비는 석송림의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아마도 혈기자가 다른 곳으로 뚫고 나올까 싶어서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혈기자는 비석의 글씨들을 유심히 살폈다.

(요건 셋째 진성(震聲)이 놈 글씨고……이건 큰 놈인 청천(靑川)이……이건 예진(藝珍)이 그년……그리고 요건 성화(成華) 놈……흥! 성화 이놈이 제일 많이 만들어다 세웠구나. 겁장이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

동굴 속에서 반로환동이란 신선의 술법을 닦고 나온 혈기자의 마음은 맑고 깨끗해져 있었다.

이미 예전의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은 깨끗이 사라지고 마치 어린 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요놈들이 감히 소아(小阿)를 가지고 은근히 인질로 삼아? 못된 놈들……)

그러나 비석의 글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불쑥 찾아가면 젊은 놈들이 겁먹고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그렇다고 비석에 적힌 대로 이월 보름을 기다려서 <나 미치지 않았소>하고 광고하는 것도 자존심상 내키지 않았다.

며칠을 어떻게 할까 고심을 하다가 문득 기막힌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석에는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석송림 안이 아닌 절벽 밑의 석옥 이었던 것이다.

석송림을 지나가지 않고 뒤쪽 절벽으로 해서 분지를 나가버린다면 석비의 경고를 어긴 것이 아닐것 같았다.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은 거야? 내가 늙었을 때는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할 계책이지……만약 놈들이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면 무조건 몰랐다고 잡아떼야지……)

그렇게 해서 천하제일인 혈기자는 청년으로 둔갑하여 다시 세상에 나와 버렸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들어도 제자들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러다 그는 십이 고수 중의 사수(四手)가 자기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바람 같아서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멀리 남황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막내인 조예진이 자기의 옛날 친구의 소호연(蘇昊硯)의 아들과 연인이었음을 생각해 내고 백인장에 들르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이곳 창산(蒼山)에서 백인장의 어린 꼬마를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네 내공이 오갑자가 되는 것 같으니 그 영문을 모르겠구나]

[응,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심심하니까 해본 짓 일 거야. 난 날 때부터 그랬어.]

[한데, 무슨 일로 집을 나왔지? 그리고 아까 너를 쫓아 왔던 그 여자는 누구?]

[어? 그것까지 알아? 우리 작은 어머니……]

혈기자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이 났고 소일초는 또다시 불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싶어 투덜대기 시작했다.

[글쎄,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무공을 가르쳐줄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가출했더니 작은 어머니가 잡으러 온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냥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여태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그건 나의 표기를 보았기 때문이지. 그걸 보아도 네 작은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이 틀림없을 거야.]

[누군데?]

[조예진!]

[이름은 맞지만 성은 틀렸는 걸. 누구나 소부인(蘇夫人)이라고 하더라……]

[이 녀석아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거야.]

[정말 세상에 그런 법이 있었나?]

혈기자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짙은 우수가 그의 얼굴에 깔리고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천하의 신행마동도 감히 함부로 떠들 수 없었다.

소일초는 혈기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만 바위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혈기자는 몸도 마음도 다 젊어졌고 무엇 하나 맘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직하나 제자들과 손녀 소아(小阿)는 보고 싶었다.

소일초의 말로 짐작해 보건데 조금 전에 소일초를 쫓아왔다가 부리나케 돌아가버린 여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제자인 조예진이 분명했다.

혈기자로서는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표기를 붙쳐둔 것이 오히려 나쁜 효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으로 번쩍 들었다.

그러자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부터 붉은 빛줄기가 날아와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바로, 그의 독문표기인 혈기(血旗)였다.

그의 혈기가 꽂혀있는 영역 내에서는 무림인이라면 결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에게는 제자들이 자기가 있는 동굴을 무너뜨렸다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자들에게도 큰 악의는 없었고 단지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한 정도 일 뿐이었다.

동굴 따위가 무너져서 혈기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제자들도 자기도 우수운 정도의 일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를 실제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들마저 죽어버린 지금에야 제자들이 친자식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아무튼 중간에서 화해를 성사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야 손녀도 만나고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자기는 젊어져 버렸는데 자기가 아무리 혈기자라고 해도 제자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제자들의 속이 좁은 것 같아 화가 벌컥 치밀었다.

[못된 것들……]

하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소일초가 깜짝 놀라 공중제비를 넘으며 뒤로 날아가 큰 나무 뒤에서 눈을 비비며 쳐다보았다.

과연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는 녀석이었다.

혈기자에게는 순간적으로 소일초를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소일초는 잠이 들깬 표정으로 말했다.

[소일초. 신행마동이 바로 나지.]

혈기자는 소일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절세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가출했다고 했지?]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그 대신 너는 몇 가지 일을 내 대신 해주는 거지……어때?]

혈기자는 소일초가 단번에 응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일초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우리 내기로 결정하자. 내가 지면 형씨 일을 대신 해 주기로 하고 형씨가 지면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

[특히 아까 내 어린도를 맞고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그 무공을 배우고 싶어……]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린애라서 예의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다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숫제 자기 친구처럼 대하려 한다.

아무리 자기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소일초가 어느새 그의 눈치를 긁었는지 재빠르게 말했다.

[형씨 분명히 반노환동한 혈기자지?]

[…………]

[잘 생각 해보라구. 나는 신행마동(神行魔童), 형씨는 반노환동(返勞還童) 뭐가 어떻게 됐던지 간에 다같은 어린아이 인데 굳이 어른인척 하지 말라구.]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었다.

혈기자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놈은 아예 내놘 놈이니 무시하고 사는 것이 수명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대로 받아 주기로 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3)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석두공이 누구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오. 돌대가리라는 그 말이 이름이오 아니면 외호요?]

[와하하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설곽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이름이오. 조금 남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무공으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만약...]

[...!]

[...!]

설곽이 잠시 말을 끊자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엇다.

[이 자리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부는 자천을 해서 다른 분들과 비무하도록 하겠소. 사실대로 말하자면 노부는 석두공 소협 이외에 지금 추천된 어느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소.]

웅웅웅...

내공이 엄청나게 깃든 그의 음성은 소용돌이 치듯이 귀산을 울렸다.

군웅들의 안색이 변했다.

또한 설곽의 무공을 잘 모르던 하삼풍 등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곽의 공력은 그들에 비해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삼노장의 팽덕이 일어나서 말했다.

[노부의 생각도 근본적으로 설문주와 같소이다. 석두공 소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부도 다른 분들과 비무를 해볼 생각이오.]

석두공... 석두공...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도 나도 석두공하는가?

그만 없다면 검성이고 십대고수고 간에 나서서 맹주의 자리를 노려보겠다고 말하는 고수들이 잇달아 나오지 않는가?

군웅들의 관심은 온통 석두공이라는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때 무형도객이 말했다.

[사실 본인도 석두공 소협을 추천할 생각이었소. 그는 작고하신 천하제일인이신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직전제자이시오.]

술렁술렁...

동호천의 제자라는 말에 군중들은 앞뒤를 돌아보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림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오년 전, 동호천이 작고하면서 부터였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살아있을 때는 풍진기인으로 천하를 유람하며 지냈던 그였지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 하는 것을 모든 무림인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치 동호천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천하는 여전히 태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동호천의 제자가 이번 무림대회를 주관했으며 고수들이 추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 할 뿐이었다.

동호천의 제자, 무치 동호천은 제자를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검성이 조용히 일어서며 말했다.

[무형도객의 말이나 호표문의 설문주의 말이나 삼노장의 팽장주 말이나 모두 옳소이다. 노부는 단언하건데 이 자리에 석두공 소협보다 무공이 더 강한 분은 없으리라 생각하오.]

[노부의 의견도 검성과 같소이다.]

만박노조도 검성의 말에 찬동했다.

군웅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그럼 그 석두공 소협은 지금 어디 계시오? 어째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소?]

군웅들 모두의 궁금함이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 귀산에서 무림대회를 연다는 것은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일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도들께선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검종맹이나 잔혼각, 적룡혈운도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을 것이오.]

[그렇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군. 나도 집에서 나올 때 검을 갈아서 나왔는데 오는 중에 한번도 써보지 못했소.]

누군가가 소리쳤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석두공 소협은 여러분들이 이곳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의 총단을 단신으로 공격했었소. 그들은 그 피해로 인해 이곳으로 올 여력이 없었던 것이오.]

군웅들 중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혼자서 세 곳의 총단을 공격했단 말이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농간이다. 석두공이란 자에게 우리를 고스란히 바치려는 농간이다.]

누군가 술병을 던지며 농간이라고 고함쳤다.

순간,

취릿!

은색검광이 허공을 가르며 던져진 허공을 휘감았다.

한 소녀가 가늘고 긴 연검을 뻗쳐들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열여덟 번의 자세를 바꾸며 옆으로 움직여갔다. 마치 선녀가 하늘을 나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술병이 던져진 곳을 정확하게 찾아내서 내려섰다.

그녀는 장지연이었다.

화가 잔뜩 난 듯한 그녀가 털보장한의 목에 연검을 겨누면서 소리쳤다.

[뭐가 농간이라는 것이냐? 농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라. 그렇지 못한다면 즉시 목을 베어버리겠다.]

검이 살짝 흔들리자 연검에 매달렸던 술병이 소리없이 베어져 떨어졌다.

털보장한은 싸늘한 감촉이 목으로 전해지자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인간의 무공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농간이라고 생각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것을 증명이라고 하느냐?]

장지연이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인간의 무공이 그렇게 강하면 안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때였다.

[어린 계집애가 검을 너무 함부로 쓰는 구나. 본 곡주가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

하삼풍이 둥실 떠오르면서 나직하게 소리쳤다.

장지연이 차갑게 내뱉었다.

[이제 보니 저 능구렁이를 추천한 자였군. 아마도 능구렁이의 제자중 하나겠지?]

[다... 닥쳐라! 난 하곡주님을 모른다.]

털보장한이 당황하여 외쳤다.

[흥!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맹주로 추천해? 웃기는 일이군!]

털보장한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때 하삼풍이 그녀의 뒤로 이르며 소리쳤다.

[버릇을 고쳐주마!]

그의 손에서 백광이 번쩍였다.

[장매! 조심해 단혼장(斷魂掌)이야!]

백란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스읏!

순간 장지연의 연검이 살아있는 듯이 백광을 뿌리며 뒤로 향했다. 손은 여전히 앞을 향한 그대로인데 연검만이 휘어지며 하삼풍을 공격해나간 것이었다.

연검의 빠름은 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어검술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파파팍!

하삼풍은 손을 거두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장지연은 그의 단혼장을 깨끗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폭풍무존에게 배운 검법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라라락!

중인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녀의 위기를 보고 몸을 날렸던 백란이 그녀의 곁으로 내려섰다.

[아주 훌륭한 검법이야! 장매!]

장지연은 생긋웃고 말했다.

[이건 내가 석두공 소협으로부터 배운 거예요. 만약 그가 직접 펼쳤더라면 하곡주께선 이미 지옥을 구경하고 게실 걸요?]

그녀는 비웃음을 던지고 백란과 함께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

하삼풍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더 싸우게 된다면 그가 패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초에서 그녀에게 밀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휘이익!

한줄기 흰 그림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광장의 중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줄근하게 보이는 백의는 핏물로 얼룩져 있었으며 짧고 노르스름한 머리는 귀에도 닿지 않을 듯하고 그러면서도 호수같이 심원한 눈빛을 가진 미청년이 거무튀튀한 방망이를 들고 서있었다.

얼굴에는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몇 사람이 벌떡 일어섰고 장지연과 백란이 동시에 소리쳤다.

[석두공!]

군웅들은 저자가 석두공이구나 하면서도 내심 못미더워했다. 

그렇게 고수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형도객이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왔는가? 수고했네. 정말 애썼네.]

하지만 석두공의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 말했다.

[빨리 이곳을 피해야합니다. 척살대가...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형도객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들이 벌써 나왔단 말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소이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두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두공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났는가?]

[그들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의형인 일초진천수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석두공은 말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부상을 당했는가?]

[아닙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서 저들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척살대는 모두 삼마경을 익혔습니다.]

석두공은 양주를 떠난 이후 단 한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무형도객은 북위로 뛰어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어서!]

그의 말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갑자기 돌아가라니 무슨 말이오? 영문을 말하시오!]

[적들의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빨리 피해야하오.]

[물은 제방을 쌓아서 막고 적은 적은 병사로써 응한다고 했소. 적이 온다면 맞서 싸워야지 그 무슨 말씀이시오?]

군웅들이 아우성을 쳐대었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무형도객이 다시 외쳤다.

웅성웅성...

광장은 질서를 잃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리 높여 무형도객을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무슨 영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하는 자들도 있었다.

석두공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第 一 章

 

      운남(雲南)으로 가는 꼬마

 

 

 

강남은 물빛이 좋다.

봄 날을 즐기는 유객(遊客)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고 있고,

대리로 향해 뻗은 길에는 마차들과 사람들이 번잡한데,

아주 기괴한 꼬마 하나가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소년의 등에는 자기의 키만큼이나 한 장도(長刀)가 매어져 있었고,

옆구리에는 머리통만한 술병이 매달려 있었다.

깔끔한 용모와 단정한 백의로 보아 명가(名家)의 자손이 분명한 듯 한데,

눈에서 반들거리는 장난기는 사람 여럿 골탕 먹일 것만 같았다.

강남의 사월 햇볕은 따갑기 조차 했는데……

따분했던지 타박타박 걸어가던 꼬마 소년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행인들이 쳐다보자 꼬마는 기분이 조금 풀리는지 대로를 가로막고 섰다.

한대의 마차가 달려오다가 길을 막고 있는 꼬마 앞에서 황급히 멈추었다.

[아니 이 녀석이 다치면 어쩌려고……]

마차의 마부는 꼬마를 향해 소리쳤다.

꼬마는 앞으로 한걸음 내딛어서 말의 코를 작은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소일초(蘇一招)라구……자네 멋대로 부르지 마!]

마부는 갑자기 말이 막혔다.

사십이 넘은 자기를 꼬마가 자네라고 부르다니……

[이……이……]

화가 뻗혀서 막 욕이 튀어 나오려는 찰나인데 꼬마의 말이 먼저 그의 입을 막았다.

[이 마차 운남 가는 거지? 그렇지?]

행인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눈이 둥그레져서 이 꼬마 악당의 횡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얼굴마저 벌개지는데 마차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래! 운남 간다! 어쩔래 임마!]

역시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마차의 문을 벌컥 열면서 뛰어나왔다.

스스로 소일초라고 밝힌 꼬마는 마차에서 뛰어나온 꼬마를 보더니 다짜고짜 달려가서 소매를 꽉 잡았다.

그리고 확 잡아채더니 번쩍 들었다가 관도에 던져버렸다.

[도련님!]

[너 이놈!]

마차의 안팎에서 여자와 남자의 소리가 어우러 터져나오고……

흰옷을 입었던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이놈이 기습을 해……?]

마부는 어느새 소일초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옷자락을 터는 백의소년의 옆에는 중년여인이 내려서 있었다.

소일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건방진 녀석……감히 내게 덤벼?]

그때 마부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행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부는 보통사람이 아닌 듯 그의 손에서는 예리한 바람소리가 나며 마치 소일초의 머리를 깨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빡!

 

소리가 나면서 소년은 뒤로 퍽 쓰러져 버렸다.

눈동자를 까뒤집고 입을 짝 벌린 것이 영락없이 죽은 것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살인(殺人)이다. 살인이다!]

마부와 백의소년, 그리고 중년부인은 안색이 확 변했다.

[이……이런, 나는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마부는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빨리 마차에 태워요.]

중년부인이 마부를 향해 소리치며 먼저 소년을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네……네……]

마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쓰러져 있는 소일초를 안아들다가 허리를 휘청했다.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아이쿠……시체가 무겁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었구나. 이 꼬마마저 이렇게 무거운 것 같으니……)

[빨리 달려 의원으로 가요!]

마차 안에 소년의 시체를 들여 놓자마자 중년부인이 또 소리쳤다.

마차는 미친 듯이 달려갔고, 행인들은 술렁거리다가 제각기 걸음을 재촉했다.

소일초의 시체를 태운 마차는 관도를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마차 안에는 한 켠으로 소일초가 눕혀져 있고 다른 쪽에 백의소년과 중년부인이 앉아 있었다.

[유모! 이젠 어떻게 하지?]

백의소년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도련님은 아무걱정 않아도 됩니다.]

중년부인이 말했다.

한데 갑자기 죽은 소일초의 목소리가 백의소년의 귀에 들려왔다.

[아니 나를 죽였으니 너도 곧 죽게 될거야………]

백의 소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유모! 이 놈이 벌써 귀신이 되었나봐? 금방 내귀에다 대고 뭔가 말했어……]

소년의 유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금방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어, <나를 죽였으니 너도 죽게 될거야> 하고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소년의 귀에 소일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란 말이 빠졌군]

[그래 <곧>이란 말이 빠졌군.]

하고 소년은 따라서 말하다가 깜짝 놀랐다.

유모는 소년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시체가 곁에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지요. 그럼 내가 화골산으로 녹여 없애버리도록 하지요.]

그녀는 품에서 작은 옥병을 끄집어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소일초의 몸에 가까이 갔다.

막 그녀가 화골산(化骨酸)을 그의 몸에 부으려 할 때였다.

[왁!]

하고 소리치고 소일초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백의소년은 발을 들어 소일초를 걷어차려 했고,

중년부인의 손에든 화골산은 마차의 앞 벽에 쏟아져 버렸다.

[악독한 계집!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증거까지 인멸(湮滅)하려는 구나!]

소일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죽지 않았구나!]

백의소년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중년부인은 그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코웃음을 치면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소일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차 좀 얻어 타자는 거였지. 앞에 앉은 바보에게 내가 맞기는 왜 맞아?]

[아까 분명히 머리를 맞는 것 같았는데……?]

[내가 살짝 피하면서 입으로 <빡>하고 소리를 질렀지.]

소일초는 입으로 다시 한 번 <빡> 소리를 냈다.

영락없이 그 소리였다.

백의소년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

[그래. 이제 생각해 보니 네 비명소리가 나지 않았어.]

소일초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소일초라고 해. 운남까지 가려고 하는 데 설마 쫓아내지는 않겠지?]

[나는 백소중(白小重)이야. 운임은 조금만 받을게.]

그의 말에 중년부인이 정색을 했다.

[도련님! 저런 불량스런 아이와 함께라니…… 안됩니다.]

소년 백소중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을 뱉었다.

[안되다니……? 그럼 유모가 내리도록 해!]

도저히 어린아이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유모는 찔금하며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일초가 백소중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보였다.

[너도 대단한데…… 최고야!]

 

마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려가고 안에서는 두 명의 괴동(怪童)이 의기투합하여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백소중이 물었다.

[운남에는 뭘 하려 가니?]

[응, 우리 집 글 선생으로 있는 구질구질한 늙은이가 하나 있는데, 그 늙은이가 운남이란 곳에 가면 괴상한 짐승들과 맹수, 그리고 독물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군]

[…………]

[그래서, 아버지한테 불만도 좀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운남에 가서 그것들이나 잡아오려고 도망쳐 나왔지.]

[몰래 집을 나왔다고?]

백소중의 물음에 소일초가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물론. 나같이 어린아이에게 운남까지 가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걱정하실텐데……]

[한 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니까 별로 걱정은 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벌써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가 나를 잡으러 오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네 아버지 작은 마누라가 무섭니?]

[그럼! 제기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를 꼽으라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여자를 꼽을 거라고. 무공도 얼마나 센지 도저히 한 번 눈에 뛰었다 하면 천하의 나도 도망칠 생각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잡혀가고 말지……]

[너보고 때리기도 해?]

[아니……그와는 정반대야 항상 나에게 잘해줘. 게다가 내가 무엇을 해도 꾸짖는 법이 없어.]

[그런데 왜 무섭다는 거지?]

백소중은 점점 더 소일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수법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거든, 나는 매일 장난을 치지 않으면 몸에서 좀이 쑤신다고!]

옆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일초를 지켜보던 중년부인도 그들의 말에 점점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있었다.

[내가 잘하는 장난 중에 불장난이 있어.]

[…………]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작은 찻잔에다 불씨를 담아가지고 소매 속에 숨겼다가 여종들을 만나면 그들의 낡은 치마나 옷자락에 대고 살그머니 불씨를 옮겨 놓아 버리는 거지.]

[그러면……?]

[그들은 치마를 벗어 던지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나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백소중도 못마땅한 듯이 말했고 중년부인은 아예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러면 아버지가 알고 난 후에는 그 여종에게 새 옷을 주거든.]

[아무래도 그건 좀 심한 것 같애. 여종에게 옷을 줄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군]

[좋아! 네 생각도 일리가 있어. 한데 그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 말이야……]

[…………]

[그 여자한테는 아무리 몰래 옷자락에 불을 붙혀도 불씨가 절로 사그라져 버리고 연기하나도 나지 않는단 말야 게다가……]

[잠깐! 너는 어느 집의 자손이지?]

중년의 유모가 소일초의 등에 있는 장도(長刀)에 눈이 닿자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절대 말 못해!]

[네 등에 있는 그 장도는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한데……]

소일초는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흥! 물론 보통이 아니지…… 내가 나오면서 우리 아버지 걸 훔쳐서 나온 거니까!]

유모는 어이가 없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고 백소중은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너 집에서 나올 때 도둑질까지 했구나!]

[원래 가출할 때는 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야 가출효과가 더 큰 거라구……]

그때 마차의 뒤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멈춰라!]

아주 큰 목소리 였다.

순간, 소일초는 욕을 했다.

[제기랄, 저 귀신같은 영감들이 벌써 이곳까지 쫓아 오다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잡힐 수도 있겠어……]

마차는 이내 멈추어 섰고,

뒤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마차의 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마차 앞에는 두 사람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 마차가 그 마차 인 듯하군……]

[내가 물어보도록 하지.]

두 노인은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그 중에서 한 사람이 마부에게 물었다.

[당신이 마차 속에 장도를 맨 꼬마를 태웠소?]

[물어볼 것 뭐 있어. 문을 열어 보면 금방 알 것가지고……]

한 노인은 성미가 급한 듯 마차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마부는 안색이 확변하며 성미급한 노인을 향해 일장을 내리쳤다.

[영감! 물러서!]

마부의 손은 허공에서 많은 그림자를 남기며 문을 여는 노인을 향해 덮쳐갔고 노인은 모른 척 하고 그냥 문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마부의 무수한 손 그림자는 다른 한 노인이 소매를 휘두르자 무산되어 버렸다.

이어 노인의 한 손이 마부의 허리띠를 잡아들고 멀리 휙 던져 버렸다.

덜컹󰠏󰠏󰠏󰠏󰠏󰠏

소리를 내며 마차문은 열렸고,

불안한 기색을 띤 중년의 유모가 백소중을 안은 채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백소중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한 마디 툭 뱉고 문을 닫았다.

[실례했소이다. 사안이 워낙 급하다 보니 결례를 하게 되었소. 우리는 백인장(百刃莊)의 사람들이오.]

두 노인은 몸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부는 황당한 일을 당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의 천정에 매달려 있던 소일초는 그때서야 내려오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조마조마 했네……]

이때 멀리서 노인의 음성인듯한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백대선생(白大先生)에게 백인장의 두 늙은이가 안부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귀신같은 쭈그렁탱이들……]

소일초가 또 욕을 했다.

중년의 유모는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밖에 있는 마부는 원래 백가장(白家莊)의 일급무사였다.

노인을 향해 백가장의 절기인 산수장(散手掌)을 펼쳤음에도 전혀 힘도 쓰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붙잡혀 던져지고 말았다.

게다가 백인장(百刃莊)의 사람들이라니……

천하 무림인 치고 누가 그 위대한 백인장을 모르겠는가?

백 명의 도(刀)의 달인들이 대를 이어서 소속해 있는 곳,

백인장의 사람치고 고수아닌 자 없다 했는데……

게다가 십여 년 전부터는 그 모습을 완전히 세상에 드러내 놓고 있었다.

강북에서는 청옥검궁이 최고의 문파라고 하고 있지만 강남에 웅크리고 있는 백인장이야 말로 진정 고수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주(莊主)인 도왕(刀王) 소선풍(蘇仙風)은 무공이 신화경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도법(刀法) 뿐만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내공(內功)으로 당금 무림에서 은근히 최고수로 부상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백인장(百刃莊)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하나뿐인 아들 신행마동(神行魔童) 소일초(蘇一招)이다.

 

-신행마동 소일초!

 

그는 그의 아버지 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로 불리워 진다.

나이는 올 봄에야 겨우 십 세가 되었지만 칠 세 때 부터 무림에 이름을 떨쳐왔다.

도왕 소선풍과 그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원영련무대법을 펼쳐서 소일초를 낳았기 때문이다.

 

-원영련무대법(元影鍊武大法)!

 

무림사에 유래가 없는 특이한 비법이었다.

소선풍이 창안한 것으로 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대법은 산모(産母)가 이미 절정의 신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태아가 발생한 초기부터 산모는 원영련무대법에 따라 아직 제대로 발현도 하지 않은 태아에게 운기행공을 시키게 된다.

즉 태아는 태중에서 부터 신공을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태아가 자란 삼개월 부터는 매일 그의 아버지가 내공을 주입하여 태아의 신공을 숙달시켜 나가고……

그렇게 하여 육개월이 지나면 태아는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이백 팔십 년에 달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으며 몸은 금강체(金剛體)가 되어 있는 것이다.

태어난 후 하루가 지나면 걸으며 이틀이 지났을 때는 뛰고 달릴 수 있다.

사흘이 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바로 신행마동 소일초, 그가 그 대법이 장본인이었다.

너무도 총명하여 그의 아버지가 나중에는 아예 괴물이라고 쳐다보기조차 싫어 했다는 꼬마다.

지금의 신행마동 소일초는 오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서 신행마동 소일초는 다른 두 명의 절세고수와 더불어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당금 무림의 고수들을 꼽자면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노일녀일소이왕삼현사수(一老一女一少二王三賢四手),

 

일노는 당연히 은거한 천하제일인인 혈기자를 말한다.

그리고 일녀는 취풍녀(吹風女), 일소는 바로 신행마동이다.

이왕(二王)은 신행마동의 아버지인 백인장주 도왕과 청옥검궁주 검왕 이극송(李克宋)을 말하고,

삼현은 백대선생과 혈군자, 그리고 무심군자이다.

사수는 바로 혈기자의 네 제자로 등천마교의 겁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누가 꼽더라도 혈기자가 제일 먼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는 직접 겨루어 보지 않는 한 무공의 우열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다만 도왕 소선풍의 무공이 혈기자 다음일 것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중년의 유모는 이러한 사실을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꼬마가 바로 신행마동 소일초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소중이 소일초에게 말했다.

[네 집이 백인장(百刃莊)이었구나.]

소일초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꺼덕였다.

[네가 바로 신행마동(神行魔童)이고……?]

[응.]

대답한 소일초가 백소중에게 되물었다.

[네 아버지가 백대선생이냐?]

[아니……우리 할아버지…… 그런데 너 정말 그렇게 무공이 강해?]

소일초가 씩 웃었다.

[별것 아니야.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도 못 이기고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한테도 못이기는 걸……]

[…………]

[게다가 난 진짜 절학은 맛도 못봤다구……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자기 도법은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뺀단 말이야……]

[그걸 가르쳐 주고 나면 네 아버지가 너한테 질까봐서 그럴 거야!]

백소중이 틀림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내 불만이 쌓인 거지. 사실 내 사부들은 신법 말고는 쓸만한 무공이 없거든……]

[네 사부도 따로 있어?]

[물론이지 임마! 원래 무공이란 사부한테 배우는 거라고……]

[난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 주던데……그런데 네 사부들도 유명한 사람이야?]

[별로……난 잘 모르겠어. 다들 우리 아버지가 백인장에 잡아다 놓았는 걸 내가 몰래 풀어줘 버렸지……]

[이름이 뭔데……?]

[사마귀(四魔鬼)!]

소일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백소중의 유모가 아연실색을 했다.

 

사마귀(四魔鬼)-!

 

바로 네 사람의 괴인들을 말한다.

그들은 각기 주색투도(酒色偸賭)로 악명을 날렸다.

 

주귀(酒鬼)는 불취(不醉)이고 부진언(不眞言)이었다.

그의 말에 사실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럼에도, 들을 때는 도무지 거짓의 흔적 역시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의 주전신공(酒箭神功)은 술 대결에서 패한 많은 주당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그가 바로 사마귀의 우두머리였다.

 

색귀(色鬼)는 남성경직증환자(男性硬直症患者)였다.

그의 남성(男性)은 언제나 팽만해 있었고 그의 눈은 향상 대상을 찾아 희번덕거렸다.

그는 여성을 언제나 정면에서 마주보지 않는다.

얼굴을 돌린 채 어떤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기에 동조하게 되는 여자는 그의 마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고 대화하는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그에게 빠져 들어가 버리게 된다.

그때 그는 얼굴을 상대편 여인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그스레하고 중후한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는 여인으로 하여금 넋을 놓아버리게 한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면 또한 언제나 팽만해 있는 그의 바지속의 남성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미 여인은 그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다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관계가 맺어지고 나면 매정하게 버려 버린다.

버림받은 여인은 자살하기 일쑤였고 원한을 품은 여인이나 남자는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했다.

그런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색귀가 익힌 무공은 전혀 엉뚱하게도 소림의 대자비수(大慈悲手)였으니……

 

투귀(偸鬼)는 세상에서 가장 대담한 도둑이다.

그가 드나드는 장소에는 분간이 없다.

빈민가의 주방에서 부터 황실의 보고(寶庫)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바닥은 마치 기름을 칠한 듯 매끄러워 어디에서도 매이는 법이 없었고 그의 신형은 연기와 같아서 누구도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도 한 가지 철저한 규칙이 있었으니,

바로 살인과 절도를 동시에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결코 그곳에 있는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한 장소에서 물건을 훔쳤다면 반대로 그곳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또 한 장소에서 물건을 훔칠 수 없었으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는 무림에서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중무신법(重霧身法)을 익혔으며 화산파의 매화지를 훔쳐 배운 후 더욱 발전시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도귀(賭鬼)는 철저한 도박사(賭博士)다.

결코 어떠한 도박에서도 패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정말로 승부를 점칠 수 있는 절묘한 재주가 있었고 그가 손가락을 몇 개만 꼽아보면 승패는 간단하게 추론해 낸다.

그렇기에 그는 큰 도박에서는 언제나 자기의 목을 걸고 상대방의 사지 중 하나를 걸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도박이 끝날 때 까지는 상대방은 결코 도귀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도박에 대하여 불복하는 자는 그의 수정검우(水晶劍羽)에 목숨을 잃고 만다.

도귀……

사마귀의 막내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공은 그들 중 제일 높을 것이라고 추정되어 진다.

그의 무공은 전혀 내력이 알려지지 않았다.

무림사에 어느 누구도 수정검우를 무기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사마귀 중의 신비인(神秘人) 도귀……

 

백소중의 유모는 정말 까무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행마동의 사부가 사마귀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사마귀는 무림의 고수서열에서 열외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정식적인 무공대결을 하는 법이 없기에 누구도 그들을 고수에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도 그들과 함부로 맞서지도 못한다.

무서운 마귀들이기 때문이다.

유모가 떠듬거리며 소일초에게 물었다.

[사마귀가 소대협(蘇大俠)에게 감금되어 있다구요?]

그녀의 어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유모는 귀가 없어? 내가 풀어줬다고 했잖아!]

소일초는 거듭 말하는 것이 귀찮다는 듯이 툭 쏘아붙였다.

[야! 너 아직도 젖 먹어?]

[아니……]

백소중이 눈을 동그랗게 떠고 대답했다.

[그럼 어디다 쓸려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유모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백소중은 아무 말도 못하고 유모를 바라보았다.

유모도 속이 부글부글 끌었지만 상대가 워낙 무서운 십이 고수 중의 하나 인지라 역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유모는 신경쓰지 말고 이야기나 계속해봐……뭘 그런데 자꾸 신경쓰고 그래?]

백소중이 소일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소일초는 얼굴에 무서운 표정을 한번 지으며 유모를 노려본 후 다시 말했다.

[사마귀 사부는 말이야 우리 아버지한테 죄를 지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

[…………]

[그래서 도망 다녔는데 ……너도 보았지 아까 그 두 영감쟁이 말이야. 그 영감들이 천하를 이 잡듯이 뒤져서 붙잡아 왔지. 그런데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이야.]

[…………]

[우리 집에 경계가 가장 심한 곳이 정뇌(井牢)인데 우물처럼 생긴 감옥이지. 그저 밑으로만 파져 있는 곳의 제일 밑에 사마귀가 감금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아홉 개의 칸이 있는데 각 칸 마다 한 사람의 고수가 지키고 있지.]

[그렇게 되면 정말 빠져 나올 방법이 없겠는데……?]

백소중의 말이었다.

[천만에! 더욱 빠져 나오기가 쉽지.]

[어떻게……?]

[내가 사마귀한테 무공을 배운 대가로 가르쳐 줬는데, 그건 뇌옥을 무너뜨려 버리는 거야.]

[…………?]

[뇌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뇌옥에서 지키고 있던 고수들이 먼저 빠져 나가게 되지. 그러면 제일 밑의 뇌옥만 파괴하고 그 고수들의 뒤를 따라서 빠져 나오는 거야. 그 다음 장원을 빠져 나가는 일이지 뇌옥을 나가는 일은 아니니까 내 소관이 아니지……]

백소중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너는 너무 일을 경중(輕重) 없이 처리하는 것 같아……]

소일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봐! 난 아직 어린아이야, 당연히 어린아이는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거라구……]

[말이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참.]

[사마귀가 정뇌에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기는 했어. 아버지한테서 도망가려고 그들은 특이한 신법을 한 가지 창안했더군, 그 이후로 내가 가출할 때 마다 잘 써먹고 있지……]

 

마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렸는데 사방은 어둑어둑 해 오고 있었다.

소일초가 문득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백소중, 고마웠다. 이제 나는 다시 도망쳐야겠어.]

[아까 그 영감들은 가버렸잖아?]

[그 영감들은 별 것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는 정말 대단하거든, 실은 여기서 내가 노닥거리고 여유를 부린 것도 오늘은 그 여자가 외출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야.]

[…………]

[벌써 돌아와서 나를 잡으러 나섰을 텐데……여긴 우리 집에서 겨우 오백 리 정도 밖에 안되잖아. 이 정도라면 우리 작은 어머니 손바닥 위라고 할 수 있거든.]

[어? 너 이제는 작은 어머니라고 하는 구나.]

[짜식! 나도 스무 번에 한 번쯤은 아버지 작은 마누라 대신에 작은 어머니 라고 불러주기도 하는 효자란 말이야. 그만 갈게.]

그가 막 마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디서 들려오는 지 분간이 되지 않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곁에서 이야기 하듯이 조용히 들려왔다.

[우리 말썽꾸러기…… 거기에 숨어있었구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소일초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어머니! 한 달 만 놀다 갈게요. 절 쫓아오지 마세요……]

소일초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면서 빗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득히 사라져 갔다.

그의 끝말은 이미 먼 곳에서 들려왔다.

마부와 백소중, 그리고 유모는 멍해져 버렸다.

마차는 그대로 달리고 있는데……

마차의 열려진 문 앞에 아주 아름다운 젊은 부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마차가 달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문 앞에서 안에 탄 백소중과 유모를 향해서 인사를 했다.

[우리애가 아직 버릇이 없어서……폐가 많았지요? 언제 백인장에 한번 들려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달칵!

마차 문은 절로 닫혔고 미부(美婦)의 모습은 소일초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유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인장이야 말로 무림의 용담호혈(龍潭虎穴)이구나. 일개 여주인의 무공도 초일류라고 할 만 하니……]

마차는 어둠이 깃드는 관도 속으로 사라져 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2)

 

 

 

광장에 쳐져 있는 천막들에는 각기 사람들이 나누어 들어가 있었다.

음주가효가 펼쳐져 있으며 벌써부터 얼굴이 벌건 사람들도 있었다.

하삼풍은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한쪽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했다.

검성과 만박노조, 그리고 백검보의 전 고수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숙연한 표정은 주변의 공기를 가라앉히는 것같았다.

하삼풍이 포권하고 말했다.

[이정께서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소이다. 그동안 안녕하시었소?]

만박노조와 검성이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하삼풍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검성등이 있는 천막의 맞은편으로 갔다.

[초상집같은 분위기로군. 백검보의 오만한 태도가 어딘지 달라진 것같은데...]

무심코 던진 듯한 그의 한마디가 검성과 만박노조의 귀에까지 들렸다.

“휴우....!”

검성이 탄식을 했다.

자신의 부덕함이 이에 이르렀다 싶으니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진우백의 해남검파는 이미 쳐져 있는 천막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상하는 용(龍)이 그려진 천막을 빈터에 세우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들의 그같은 행동에 부러움과 찬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우백은 가마 속에서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났다.

군웅들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주최자들을 기다리며 웅성거렸다.

[무형도객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석두공이라는 자는 어떤 자야?]

[어째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지?]

 

검성의 천막과 하삼풍의 천막, 양쪽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는 천막에 있는 군웅들 사이에 아리따운 두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장지연과 백란이었다.

장지연이 소곤거렸다.

[그가 과연 어디서 나올까요? 이틀 전부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구대문파를 이곳에 부르기 위해 간게 아닐까요?]

[그렇진 않을 거야. 구대문파에 대해선 내가 단정할 수 없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될거야. 그는 아마 또다른 무슨 준비를 하고 있을거야.]

백란이 대답했다.

장지연이 말했다.

[난 아직도 그 숯덩어리가 석두공이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는 무치 동호천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부로 모시고 있었는데... ]

[그가 누군지는 도무지 모르겠어. 세상에 그처럼 무공이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쨌든 난 그를 찾아서 빨리 데려가야만 해. 뇌주탄의 일만 끝나고 나면 함께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백란이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둥󰠏󰠏둥󰠏󰠏둥-󰠏󰠏!

누군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큰 북으로 달려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번져감에 따라 좌중의 소요는 가라앉고 군웅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백란의 눈에 반가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북을 두드리던 사람이 북채를 던져버리며 북위로 날아올라갔다.

헌앙한 풍모의 백의중년인, 바로 무형도객이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지 이름만 들어본 사람이 더 많았다.

무형도객은 내공이 충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무림동도 여러분, 정말 고맙소이다. 본인은 무형도객이란 허명을 얻고 있는 사람이외다.]

 

󰠏󰠏와아!

 

뭇 군웅들이 환호로써 그의 인사에 답했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당금 무림은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로 말미암아 혼란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정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도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소. 능력이 있는 자는 나서려하지 않고 뜻이 있는자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오.

본인이 전해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들 삼인은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제거해버릴 전문적인 척살대(刺殺隊)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하오. 백만 무림 동도가 힘을 합치지 않고는 이 무림의 존망이 걸린 난국을 타개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외다.]

[...!]

[...!]

찬물을 끼얹은 듯 군웅들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백만 동도가 힘을 합친다면 그들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무림에 그릇된 야욕을 품은 자는 기필코 멸망하고 만다는 교훈을 후세에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오. 이 모든 것에 무림동도 여러분의 정의를 수호하려는 붉은 의지가 필요하오.]

[그렇소이다! 더 이상 그들의 발호를 묵과해서는 아니되오. 그들이 다른 문파를 공격할 때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방관해 온 것이 급기야는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소. 그들이 점차 세력을 키워가면 마침내는 모두가 그들의 종이 되거나 죽게될 것이오.]

군웅들 중에서 한 노인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커다란 도를 등에 맸으며 오른팔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으나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무형도객이 포권하며 말했다.

[호표장의 장주이신 오호단혼도 설곽대협이시군요. 설대협의 그같은 의기를 후배는 높이 존경합니다.]

[마땅히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오.]

호표장주 설곽은 포권을 한 후에 앉았다.

무림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고 지냈지만 호표장주 설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웅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까지 무림대회에 나오자 술렁이며 지금이 어려운 때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또 한사람의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노부는 작약을 캐서 먹고 사는 삼노장의 팽덕이란 늙은이요. 설장주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그들의 검은 손은 노부가 있는 시골까지도 뻗치고 있소. 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협박을 받거나 하신 분이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오. 이래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권각을 배우고 도검을 휘두를 줄 안다고 하지만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러자 한 중년부인이 일어서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항주 장보장(藏寶莊)의 며느리로 무림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룡혈운도와 잔혼각 등을 쳐부수기 위한 무림대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항주 장보장이라고 하면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인다는 갑부 무혁해의 장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데 그의 며느리가 무림대회에 불쑥 나타났다는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이었다.

또한 장보장이 얼마 전에 의문의 혈겁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부인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무형도객이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부인께서는 내공을 지니지 않으셨으니 동도여러분께선 모두 조용히 해주시기 바라오.]

그의 음성은 크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또릿하게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금방 광장은 조용해졌고 부인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제가 친정에서 돌아왔을 때, 집은 불에 탔으며 가족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모두 처참하게 죽어있었습니다. 호위무사들의 시체들은 모두 목이 잘려 널려있었습니다. 어린 아들도 딸도 허리가 반으로 잘려서 죽어있었고, 남편의 시체는 반쯤 불에 타 있었습니다!]

중년 부인의 음성은 슬픔마저 초월한 듯 담담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을 듣는 군웅들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말이 격하게 흘러나왔다.

[저희 집은 무림에 속해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집을 멸문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강도의 무리입니다.

저는 관(官)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이 땅의 주인이신 황제페하께도 진언할 생각입니다. 무림인들을 관에서 간여하지 않는 대신에 무림인들은 황제의 백성인 우리들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황제께 무림을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진언할 것입니다.]

[...!]

[...!]

무부인은 스스로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황제에게 무림에 대한 개입을 요청한다!

 

황실과 무림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서운 말이었다.

여인의 한이 깊어지면 능히 그럴 수도 있다.

군웅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장보장을 멸망시킨 것으로 알려진 적룡혈운도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강호의 근본적인 도의마저 무너뜨린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되오!]

누군가가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옳소! 그들을 영원히 제명시켜야하오.]

누군가 소리치자 군웅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그들을 죽이자!

󰠏그들을 죽여야한다.

󰠏무림인의 터전을 없애는 그들을 죽여야한다!

 

검광과 도광이 하늘을 찌를 듯 번득거리고 군웅들의 함성이 귀산을 무너뜨릴 듯 터져 나왔다.

무부인은 군웅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장지연이 초조한 듯이 물었다.

[그는, 그는 어째서 아직까지 보이지 않을까요?]

[기다려봐, 이제 곧 이곳의 분위기는 무림맹을 결성하고 맹주를 추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는 맹주가 되기 위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무형도객께서 지원해준다면 그로서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백란이 군웅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면서 말했다.

장지연이 놀란 듯이 말했다.

[맹주라고요?]

[짐작일 뿐이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거죠?]

백란이 미소를 지었다.

[저분은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이시거든... ]

[...?]

[우리 아버지야.]

[세상에...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

장지연이 그녀의 말에 입을 짝 벌렸다.

한데 백란, 그녀가 바로 무형도객의 딸이었단 말인가?

 

어쨌든 광장의 분위기는 백란 그녀가 말한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맹주를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뭉쳐서 삼인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에 따라 맹주감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먼저 맹주를 추대해야 하오.]

[그렇소, 맹주로 하여금 조직을 정비하고 삼인을 맞아 싸울 체계를 갖추도록 해야하오.]

[맹주를 추대합시다!]

군중들은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무형도객이 소리쳤다.

[한분씩 말씀하도록 하시오. 이래서는 아무 의논도 되지 않소이다.]

다시 술렁임이 가라앉자 누군가가 일어서서 말했다.

[이곳에는 지금 무림의 대표적인 고수들도 몇 분 계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숨기고 은인자중하시던 고수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분들 중에서 맹주의 대임을 맡으실 분이 나오리라 생각되기에 두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소이다.]

[빨리 말해보시오.]

[어떤 방법이오?]

군웅들이 소리쳤다.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타천과 자천의 방법입니다. 추천을 받으신 분과 스스로 맹주의 대임을 맡아보시겠다고 나서시는 분 모두 맹주의 자격이 있는 것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들 끼리 비무를 하여 최후의 승자가 맹주가 되는 것입니다.]

[옳소! 맹주는 무엇보다도 무공이 강해야하오. 무림인이 무공으로 가리지 않으면 무엇으로 고하를 나누겠소?]

 

--옳소! 옳소!

 

군웅들이 산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다른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비무는 단지 승부만 갈라야지 서로 죽이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림의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소이다. 그러면 이제 후보를 추천하도록 합시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산동 권문의 팽전이 백검보의 보주이신 검성을 추천하외다.]

한 사람의 중년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라면 능히 맹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때 다른 사람이 일어서며 또 말했다.

[해남검파의 장문인이신 진우백 문주를 추천합니다.]

진우백은 요즘 혜성처럼 부각되고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환호로써 답했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 대회를 주관하신 분은 바로 무형도객이십니다. 무공으로 보나 그 출중한 협기로 보나 마땅히 맹주가 되실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소!]

[옳소!]

무형도객의 이름이 거론되자 군웅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때 냉막한 인상의 노인이 일어서서 하삼풍을 추천했다.

[이 자리는 무공으로 맹주를 뽑는 자리라고 제위들께서 말하셨소. 무공으로 말하자면 단혼곡의 하삼풍 곡주께서도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 믿소.]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삼풍의 살명이 높기는 하지만 그의 무공이 강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또 다른 사람이 만박노조를 추천했다.

누군가가 철사보주 맹호산도 추천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십대고수는 모두 추천된 것같았다.

그 이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는지 잠시 거론되는 사람이 없었다.

장지연이 초조한 듯이 말했다.

[언니, 어째서 그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자천할 수 있는 기회도 있잖아.]

[난 그를 맹주로 만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예요. 그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으니까 염려스러워서... ]

그때 호표장의 장주인 설곽이 일어났다.

“노부는 다른 분들과 달리 한분의 젊은 영웅을 추천하고 싶소이다.”

웅혼한 내공이 실린 음성이었다.

군웅들은 호표장주 설곽의 공력이 그렇게 뛰어났던가 하고 놀라워했다.

[그 젊은 영웅께서 아직 이곳에 당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먼저 추천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무형도객과 함께 이 대회를 주관한 석두공, 석두공 소협이외다.]

석두공...

모든 무림첩에 적혀있던 얼굴없던 이름이 결국 거론되었다.

하지만 고수들 중에서 그를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검성과 만박노조등은 고개를 떨구었고 가마속의 진우백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序 章

 

       天下第一人의 弟子들

 

 

 

천년무림사에 일대 획(劃)을 그을 수 있는 절대무이(絶對無二)의 초고수가 당금에 있었다.

그는 전 무림인에 의해서 서슴없이 천하제일인으로 불리어졌다.

어느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사용하는 무공의 연원조차 아는 자가 전혀 없었다.

 

-혈기천존(血旗天尊)!

 

바로 그였다.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대는 무학의 일대조종(一代祖宗)-!

고금을 통틀어도 그 이름 앞에 설 수 있는 인물은 고사하고 비견될 수 있는 이름조차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절대무적의 경지에 올라선 가장 강하고, 그래서 가장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

그는 인간이기보다는 무신(武神)이마 선인(仙人)으로 취급되었다.

누구도 감히 그의 신성불가침함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천하제일인은 오래 전에 은거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천하무림은 결코 그의 존재를 잊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조용히 칩거하는 이 거인(巨人)을 깨우지 않기 위하여 정사(正邪)가 모두 자중하고 있었다.

혈기천존의 별호에서 보듯이 이 천하제일인을 잘못 건드리면 어느 누구도 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실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혈기천존의 아들 부부가 무림에 나왔다가 일단의 사파무리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등천마교(騰天魔敎)>

 

바로 이들이 범인이었다.

저 전설속의 비밀결사인 마교(魔敎)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광폭한 무리들...!

그들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신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전 무림에 가공할 재앙을 불러들인 등천마교,

그들은 사실 당금의 강호무림을 분할하고 있는 가장 강대한 네개의 세력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

등천마교는 신주사패천중에서도 연원은 가장 일천한 문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오래전부터 전 무림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었다.

등천마교내에는 고수들이 즐비했으며 교주인 등천마황(騰天魔皇) 조천수(趙千壽)는 은연중에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

황산(黃山)의 절곡에서 은거하며 아들 내외를 기다리고 있던 혈기천존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내외를 기다리다 못해 세상에 나선 순간 등천마교의 신화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는 어느 날 새벽,

장강을 끼고 세워져 있던 등천마교의 총단에서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안개가 완전히 걷혀져 유월(六月)의 햇살이 장강 일대를 아름답게 비추었을 때,

한명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단장을 짚고 등천마교의 본단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어도 등천마교만은 깨어날 수 없었다.

등천마교 본단에 있던 모든 인간들은 이미 머리를 보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무림사에 유래가 없는 대살겁(大殺劫)이 바로 천하제일인 혈기천존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교주 등천마황 조천수 이하 등천마교 총단의 이천칠백여 교도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머리가 파열되어 분간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 대살겁에서는 하물며 개와 고양이등의 미물들 마저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천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에 의한 하나 거대문파의 몰살…!

이 어찌 전율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림의 모든 문파들은 행여나 이 전대미문의 살겁의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혼자 손으로 천하사대거파중의 하나인 등천마교를 멸해버린 혈기천존,

그는 그길로 다시 황산 절곡으로 돌아가 산문(山門)을 닫아 걸어버린 것이다.

다만,

혈기천존의 제자들이라고 알려진 네 명의 남녀가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등천마교의 지단(支團)들마저 완전히 쓸어버렸을 뿐이다.

 

-혈기사신재(血旗四神才)!

 

천하제일인의 네제자들!

무려 이만여명에 달하는 등천마교의 교도들이 그들 혈기사신재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대살겁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대살겁에 소요된 겨우 한달 남짓,

그러나 신주사패천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라던 등천마교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등천마교가 사라진 후 혈기사신재도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강호인들은 이 끔찍한 혈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무림은 이를 일컬어 혈기대살겁(血機大殺劫)이라 부르며 전율로 기억했다.

어느 누구도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천하제일인 혈기천존(血旗天尊)의 이름과 함께...!

 

× × ×

 

-황산(黃山)!

 

무릇 황(黃)이란 오행(五行)의 중심이며 중원의 상징 색이 아닌가?

그러기에 황산은 중원의 중심이며 도교(道敎)의 본산(本山)이다.

그 황산의 깊은 곳.

그림과 같은 두 개의 절봉사이에 이만 여 평의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세외선경같은 이 분지에는 들쑥날쑥한 수많은 석순(石筍)들과 천년노송(千年老松)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황산 제일금역인 석송림(石松林)이었다.

석송림이 금역(禁域)으로 화한 것은 이곳에 한명 신인(神人)이 은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빛의 혈기(血旗)를 신표로 삼는 천하제일인이...!

 

오후의 나른 한 햇살이 석송림을 눈부시게 비출 때,

[호호호! 재미있지 아가야?]

문득 옥슬같이 해맑은 웃음 소리가 석송림을 울렸다.

한명 아름다운 소녀가 세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기를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석순(石筍)들의 숲 속을 춤추듯이 걷고 있었다.

열 일곱 살 쯤 되었을까?

전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해맑은 용모의 소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 장단에 맞추어 아기를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였다.

아기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도 까르르 들리고……

소녀의 청초한 웃음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때였다.

[사매, 빨리 오너라. 다들 기다리고 있지를 않느냐?]

어디선지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소녀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미안해요 사형! 지금 가요!]

소녀는 즉시 대답하며 아기를 바짝 가슴에 당겨 안고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화라락!

너울너울 춤추는 나뭇잎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소녀의 자태…!

하강한 선녀의 모습이 저러할까?

오륙십장쯤 날아갔을 때,

문득 십장 높이의 거대한 돌기둥이 소녀의 눈 앞으로 다가오고,

수평으로 날아가던 그녀의 몸이 반쯤 비틀리더니 바람에 휘감기듯 수직으로 솟아올라 거대한 석순위에 올라갔다.

[제가 조금 늦었나요?]

석순(石筍)위에는 세 사람의 신태비범한 젊은 청년들이 먼저와서 앉아 있다가 그녀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왔으니 됐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중앙에 앉아 있던 흑의를 입은 청년이 말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사자(獅子)같이 위맹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한데, 대사형! 지금 사부님께선 어디 계신지요?]

소녀가 말하자 대사형이라 불린 사자얼굴의 청년이 다시 말했다.

[묘시말에 무진동(無塵洞)에 들어가셨다.]

[마침 적당한 때로군.]

소녀의 왼쪽에 앉아 있던 청삼을 입은 영준한 청년이 대사형이란 청년의 말을 받으며 눈을 번뜩였다.

[....!]

[....!]

잠시 네 남녀 사이로 심상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눈빛은 은은한 두려움과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대사형이라 불린 흑의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사제(師弟)부부가 등천마교의 무리에게 변을 당한 이후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셨다.]

[…………]

[사부님은 변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마성(魔性)에 빠지신 게지.]

[지금 무진동(無塵洞)에 들어가 폐관(閉關)하신 것도 보다 살기가 강한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서다. 만일 사부님께서 폐관을 마치고 나오시면 어떤 또 끔찍한 살겁을 자행하실 지 모르는 일이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만 하오]

네 남녀의 심각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마침내 그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했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을 물어 나온 피로 무언가를 맹세하는 혈서(血書)를 썼다.

바야흐로 역천의 모의가 이루어진 것이련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는 그들을 방실거리면서 쳐다보았다.

 

× × ×

 

저녁무렵,

석송림의 안쪽 절벽 밑에는 아담한 석옥이 몇 채 서있다.

제일 좌측의 한 석옥,

직접 손으로 만든 듯한 나무침상과 탁자가 보이고 예의 소녀가 아기를 작은 침상에 눕혔다.

아기는 이미 깊은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다.

소녀의 이름은 조예진(趙藝珍),

그녀는 바로 혈기천존(血旗天尊)의 네 제자인 혈기사신재(血旗四神才)중 막내로서 별호를 천외비연(天外飛燕)이라고 했다.

이곳 석송림은 바로 혈기천존의 은거지인 것이다.

그리고 천외비연 조예진이 낮에 석순 위에서 만났던 청년들이 혈기사신재의 다른 셋이었다.

 

-사면천왕(獅面天王) 위청천(衛靑天)!

-옥기린(玉麒麟) 대성화(代成華)!

-천수마영(千手魔影) 사진성(史震聲)!

 

이들 세 청년과 조예진이란 소녀야말로 단 한달만에 등천마교(騰天魔敎)의 교도 이만여명을 척살하여 전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장본인들이었다.

전대미문의 혈풍을 일으켰던 혈기사신재가 이제 겨우 이십전후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천외비연 조예진,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지난 번에 강호에 나갔을 때 그분을 만나 보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마음 속으로 한 사람을 생각해 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사부님이 변하기는 했어. 대사형의 말처럼 이성을 잃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녀는 낮에 석순위에서 했던 논의를 생각해 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혈기천존은 아들 내외가 등천마교의 무리들에게 살해당한 후에 성격이 많이 변해 버렸다.

직접 등천마교의 본단에서 대살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젊은 네 제자들로 하여금 무려 이만명에 달하는 등천마교의 교도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무진동에 들어가서 또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조예진은 자신의 세사형들의 야심(野心)이 적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당금의 강호에서는 그들 네 사형제들의 무공을 당할 수 있는 인물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사형들은 이번 기회를 빌어서 내심 사부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도 사부가 요즘 들어 더욱 무서워지고 정신도 온전한 것 같지도 않아서 불안했었다.

석송림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녀 역시도 간절했던 것이다.

아무튼 사부 혈기천존 몰래 석송림을 떠날 계책이 그들 네 사형제에 의해서 세워졌고……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사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사부의 어린 손녀, 주소아(周小阿)를 데리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사부의 손길도 피할 수 있을 뿐더러 어린 소아를 마성에 빠진 사부에게 맡겨 놓을 수도 없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사부님은 앞으로 영원히 이 석송림을 나오지 못하실 것이다. 휴…아무리 사부님의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해도 꼭 이렇게 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녀는 죄책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연세때문에 무공이나 줄어들면 아무 염려없이 모실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

혈기천존의 무공은 나이를 몰랐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고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무진동을 파괴한다고 해도 사부님은 이미 금강불괴의 몸이니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고 땅을 뚫고 밖으로 나오시겠지]

그녀는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어둠이 깃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남긴 글을 보신다면 아마도 평생을 이 석송림 밖으로 나오시는 일은 없으시겠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탁자 주위를 돌았다.

[한데……그분이 내가 사부를 배신한 것을 알면 뭐라고 하실까? 나를 용서해 주실까……?]

그분,

과연 그분이 누구이길래,

사부를 떠나기로 작심한 그녀가 사부보다 오히려 그를 더욱 염려한단 말인가?

 

다음날,

콰르릉!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석송림 안쪽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수천관의 화약이 폭발하며 절벽 아래에 자리한 작은 동굴 하나가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절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자욱한 먼지를 뒤로 하고 네 줄기의 인영이 석송림을 빠져 나갔다.

그것이 무림사에 다시 없을 대겁풍의 서막이었으니...!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九 章

 

            龜山의 武林大會 (1)

 

 

 

 

[무림대회가 개최된다고? 흠... 일이 점점 재미있어 가는군.]

금포노인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그의 앞에 환요가 찻잔을 받쳐들고 꿇어앉아 있었다.

금포노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슬금슬금 스며들었다.

금포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림대회가 펼쳐질 무창으로 가는 무림인들을 아무도 막지 못하게 해라. 세 종놈들에겐 귀산에 모든 자들이 모였을 때 공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그 자리가 무림의 무덤이 될 수 있도록 말이야.]

[존명!]

허공의 어디쯤에선가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포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지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딱딱!

그가 손뼉을 쳤다.

스르르르...

그러자 천정에서 줄이 내려오며 둥근 침상의 주위에 있는 고리에 걸렸다.

줄이 당겨 올라가면서 침상이 천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간 쯤에 멈춰진 침상의 주변에도 줄들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미소년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다섯 만 남고 물러가라.]

제일 앞쪽의 다섯 명이 남고 나머지는 물이 빠지듯이 나가버렸다.

[올라오라!]

다섯 명의 미소년들은 삼장 높이나 되는 침상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금포노인은 미소년들을 향해서 손을 들어올렸다.

미소년들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슬쩍!

금포노인의 손이 흔들렸다.

파아아아...

순간 다섯 명의 미소년들의 옷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미소년들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

마치 옷이 저절로 분해되어 가루가 된 것같았다.

미소년들은 알몸이 된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들의 몸은 예쁘장한 얼굴과는 달리 우람한 근육질이었다.

[초훼! 일어서라.]

금포노인은 그의 뒤쪽에 있는 초훼를 불렀다.

초훼가 일어섰다.

푸스스스!

순간 그녀의 옷도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네가 만족스럽게 저들 다섯을 상대해 낸다면 네게 자유를 주겠다.]

금포노인의 말이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초훼의 어깨가 순간 가늘게 떨렸다.

만족스럽게 상대해 내지 못한다면, 그 댓가로 그녀에게 주어질 것은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때때로 주어지는 이같은 시험 속에서 빠져나가 자유로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노야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초훼는 금포노인에게 날아갈 듯이 절했다.

그녀의 백옥같은 나신이 움직이자 다섯 미소년의 남성들이 우뚝 치솟아올랐다.

“...!”

“...!”

다른 여인들이 눈이 그들의 하체에 머물렀다.

초훼는 미소년들에게로 걸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수밀도 같은 가슴이 출렁이고 옥기둥같은 두다리 사이의 검은 삼각주가 잘게 물결치는 듯했다.

초훼는 미소년 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곧 진득한 앳굥의 향연이 벌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초훼의 몸이  허물어졌다.

결국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것이었다.

소년들의 눈이 일제히 금포노인을 향했다.

금포노인은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했다! ]

금포노인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노인의 입가에 싸늘한 빛이 띄워졌다.

소년들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스읏!

금포노인이 손이 흔들렸다.

스스스슷!

순간 소년들의 몸이 모래처럼 부서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엔 어떤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놀라움과 두려움만이 피어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모래처럼 부서지며 허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초훼! 넌 자유다. 영원히 이곳의 일은 잊도록 해라!]

금포노인의 손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초훼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마도 초훼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모양이었다.

초훼가 흐릿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짝짝짝!

금포노인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저 여인을 내보내라. 이곳에서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다.]

[존명!]

허공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내 초훼의 몸이 사라졌다.

다른 여인들의 눈에 부려움이 가득했다.

[귀산에 모여드는 자들... 그들에게 주어질 것도 죽음 뿐... 혼란이 가득하면 은세정검회는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겠지... 흐흐흐흐흐... ]

금포노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놀랍게도 그는 여인들과의 정사 속에서 무림의 모든 일들에 대해 입안하고 있었다.

 

           ***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던가?

무창에는 두개의 명산이 있다.

하나는 황학루(黃鶴樓)가 서있는 사산(蛇山)이며, 다른 하나는 이 사산에 마주 보고 있는 귀산(龜山)이다.

전설에 의하면 하왕조의 시조 우(禹)는 홍수(洪水)를 다스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무창에 와서 장강(長江)의 치수를 실시하려고 했을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근에 사는 물의 정(精)이 방해하여 몇 년 씩이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완성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령스러운 거북이 하늘에서 물의 정(精)을 잡아서 우의 치수는 성공하였다.

그 후 공사가 완료된 뒤에 신령스런 거북은 산으로 모습을 바꾸어 장강의 흐름을 계속 지켜본다고 하는데 그 산이 바로 귀산(龜山)인 것이다.

이 귀산은 서쪽 끝의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된다.

계단을 다 올라가보면 끝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또 그 뒤에로 완만히 뻗은 좁은 길에는 무창에서 제일가는 전망대가 있다.

왼쪽에는 장강으로 흘러드는 최대의 지류인 한수(漢水), 오른쪽에는 장강(長江), 그리고 정면으로는 무창의 강남쪽이 보이게 된다.

한데 귀산의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있는 넓은 광장에는 수백 개의 천막이 들어차 있고 오색의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귀산을 오르고 있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병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천하의 무림인의 태반은 이곳에 모여든 것같았다.

검과 도를 든 자들,

노인들, 그리고 여인들,

심지어는 어린 소년들과 도적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홀홀단신 무림의 낭인들도 있었으며, 가족이 함께온 무가(武家)도 있었고 제자들을 데리고 문파 전체가 온 곳도 있었다.

 

이날은 구월구일, 명절인 중양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귀산, 이곳은 무림대회가 열리는 곳이니...

엄청난 돈을 풀어서 귀산에는 수만 명이 숙식을 할 수 있도록 가건물들이 지어져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에 귀산의 풍물을 변경시켜 버린 힘,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광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몇 걸음 간격으로 안내하는 자들이 검정무림(劒正武林)이란 글자가 씌여진 두건을 머리에 쓰고 안내를 했다.

크게 소리치는 사람도 없건만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려 서로의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배들이 속속 귀산 아래에 당도했으며 그때마다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나와 귀산을 올라갔다.

군웅들의 이같은 호응만 보아도 검종맹과 잔혼각 등의 발호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으왓! 비켜라!]

[단혼곡이다!]

갑자기 돌계단의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면서 사람들이 물살처럼 갈라졌다.

단혼곡주 하삼풍을 필두로 그의 다섯 제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삼풍의 잔혹한 성격은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는지라 어느 누구도 그들과 부딪히려 하지 않았다.

하삼풍은 차디찬 표정을 지으며 광장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뿌아앙!

바다에서나 다니는 범선이 무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귀산이 가까워지자 뿔 나팔을 울리는 범선, 해남도의 깃발이 선수(船首)에서 펄럭였다.

[흥!]

하삼풍이 코웃음을 치고 천막들 사이로 사라졌다.

[와아!해남검파다!]

[해남검파도 참석하기 위해 왔다.]

[와와아! 진우백!]

군웅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진우백이 단 한척의 배만 가지고 적룡혈운도의 이백여 척의 대 선단을 깨뜨린 것은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던 중이었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진우백이야말로 삼인에 대적할 수 있는 진정한 고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군웅들 중에서 나란히 서있던 두 소녀 중 하나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군웅들을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해남검파를 비웃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양쪽 다 비웃는 것인지...

어쨌거나,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남도의 범선에서는 작은 배들이 십여 척이나 내려지면서 뭍으로까지 부교를 만들었다.

부교위로 화려한 옷을 입은 해남검파의 무사 열두명이 보치도 당당히 걸어 나와 도열했다.

그리고 다시 청의를 입은 해남검파의 무사들이 두줄로 서서 부교위로 나오더니 양쪽으로 나누어 마주보며 섰다.

척척척!

그 가운데로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해남도의 무사들이 삼열로 나란히 서서 걸어 나왔다.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나온 후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받쳐든 가마 한대가 부교위로 나왔다.

가마에는 화려한 금장식과 은장식을 붙였으며 가마를 들고 있는 무사들의 옷도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군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남검파의 등장은 마치 황궁의 황제같은 복잡한 격식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마치 황제의 행차같군.]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해남검파의 진우백 문주라면 그럴 만도 하지! 혼자서 적룡혈운도의 대선단을 쳐부순 위용이니...]

군웅들의 의견이 분분해지며 수군거림이 큰 소란이 되어 주위를 스산하게 했다.

진우백이 탄 것으로 짐작되는 마차의 앞으로는 열두명의 무사들이 길을 열었고 그 뒤로는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호위하듯 뒤따랐다.

무림인들로서는 좀처럼 볼 수없는 광경이었다.

요란하게 등장한 진우백의 가마도 돌계단을 올라가 광장으로 사라졌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八 章

 

             거지 소굴을 찾아온 미녀들

 

 

 

-개봉(開封)!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丐幇)의 총단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한마디로 개봉은 거지들의 천국이라는 말이다.

물론 거지들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는 하겠지만...

개봉은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삼대 고도(古都)의 하나인데 서주(西周) 문왕(文王)의 아들 필공(畢公)에 의해 성이 세워졌다.

그 이후 전국시대의 우, 오대시대의 양, 진, 한 , 주, 북송, 금의 칠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지들이란 원래 사람이 많은 곳에 살아야만 굶어죽지 않는다.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이곳 개봉에 있는 것은 이처럼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데 그러한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은 역설적으로 용정(龍亭)이라고 하는 곳이다.

용정이 어떤 곳인가 하면 예전에는 궁전이 있던 곳으로 개봉의 중심지다.

거대한 토대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언젠가부터 거지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용정 앞에 있는 두개의 큰 연못은 거지들의 우물이기도 하고 목욕을 하는 곳이기도 한 다목적 적인 장소가 되었다.

 

햇살이 아직 퍼지지도 않은 이른 아침, 아리따운 두 소녀가 용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거지들의 소굴로 찾아가는 두 소녀의 모습은 도저히 거지들과 어떤 상관이 있을 것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지들은 그녀들이 오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여름이기에 그들은 연못가에서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기도 하고 웃통을 훌떡 벗고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자는 엉금엉금 기어서 일어나 아무데나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별빛 같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개판이군. 거지들은 이렇게 질서가 없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래도 거지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아요.]

다른 소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말한 소녀가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장매가 거지들을 어떻게 잘 알지?]

[저와 조금은 관계가 있지요.]

다른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우리 거지들이 질서가 없다니 그 말은 인정하지 못하겠구려.]

두 소녀가 지나치는 옆쪽에 있던 거지가 몸을 뒤척여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거지가 말을 받았다.

[나라의 어려운 때 가진 것이 없으니 목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충을 행한다 할 것이고 비럭질을 하더라도 부모를 갖다버리지 않으니 불효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것을 탐하지 않고 비럭질해온 것은 나눠먹으니 의리가 있으며 불쌍한 자를 보면 거지의 수법을 전수하기 망설이지 않으니 인(仁)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들은 그들의 조리있는 말에 내심 감탄했다.

(이 거지들은 아주 학식이 있는 거지들이구나. 개방에 숨은 인재가 많다는 말이 헛된 소문이 아니었구나.)

먼저 말한 거지가 다시 말을 받았다.

[분수를 지켜 감히 왕좌를 넘보지 않으니 임금과 백성 간에 벼리가 있다할 것이고 비럭질 한 것도 부모에게 먼저 드리니 그 또한 벼리가 있고 처가 감히 남편의 일을 다투지 않으니 부부간에도 벼리가 있다할 것이 아닌가? 삼강(三綱)을 진실로 행하는 자가 우리 거지들 외에 또 어디 있던가?]

[삼강을 몸소 행하는 우리 거지가 오륜(五倫)은 어디 지키지 못하겠는가? 삼강과 오륜은 도의의 기본인데 이것을 지키는 우리에게 질서가 없다는 말이 과연 타당하기나 한가?]

거지를 욕했던 소녀가 졌다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제가 잘못했다고 하죠. 아니 잘못했어요. 두 분께선 명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껄껄껄... 우린 늙은 거지들일 뿐이오. 방주를 만나러 왔다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시오.]

거지가 누운 채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허리에는 팔결의 마디가 걸려있었다.

매듭의 수로써 신분의 고하를 따지는 개방에서 팔결이라고 하면 장로(長老)의 신분이다.

개방의 장로는 모두 열셋, 중원의 십삼성(十三省)의 수와 맞춘 것이다.

장로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자는 것이었다.

[장로님들을 알아 뵙지 못했군요. 실례하겠어요.]

다른 소녀가 포권을 하고 용정의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릉! 드릉!]

그녀들의 뒤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있자 그게 어디 있더라? 여기 였던가 저기였던가?]

사십대의 풍채가 아주 당당한 거지가 허둥대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거지치고는 너무 잘먹었는가? 혈색도 붉그스레하고 풍채도 마치 부호처럼 당당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다.

때가 많이 묻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천조각을 이어 붙여서 손바닥보다 큰 조각이 없는 알록달록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 거지는 낡은 서랍을 뒤져보기도 하고 먼지가 풀썩 나는 방석을 들어보기도 하고 선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문이 덜컹 열리며 한 거지가 말했다.

[방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또 어떤 놈들이 좀도둑질을 했나? 그놈을 혼낸다고 말하고 잘 타일러 보내게.]

중년거지가 신경질이 나는지 상자를 내려 바닥에 와르르 쏟으며 말했다.

한데 방주라니...,

중년거지는 개방의 방주인 낙천부개(樂天富丐) 필요금(畢堯錦)이었던 것이다.

문 옆에 선 거지가 다시 말했다.

[방주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하십니다.]

[아무 소리말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 나같은 거지를 만나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낙천부개 필요금은 상자에서 쏟아낸 물건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필방주님! 너무하시는군요. 전에는 제게 한번 놀러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문밖에서 여인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본 음성인데...?]

[보기도 본 사람일걸요?]

문으로 한소녀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니 장소저 아니신가? 아니지, 아니지 이제는 장장주이신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 거지를 다찾아 왔는가? 아무튼 잘 왔네 잘 왔어. 그렇잖아도 뭘 찾느라고 골머리를 썩히던 중이었는데.]

[필방주님을 뵙습니다.]

장소저라고 불린 소녀의 곁에선 다른 소녀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필요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소저는 누구신가? 어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은 밝히지 않는단 말인가?]

방금 전의 호들갑을 떠는 것같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게가 있었다.

[그녀는 백언니라고 하는데 신분은 말할 수 없데요. 하지만 맹세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보증하죠.]

이렇게 말하는 소녀는 장지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백언니는 백란이었다.

필요금은 굳었던 얼굴을 풀면서 웃었다.

[거지는 거울과 같은 사람들이오.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밑바닥 인생이고 보니 때로는 행한 대로 돌려 비치기도 한다오.]

[괜찮습니다.]

백란은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거지들의 세상이 뭐 이리 복잡느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이라는 개방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복잡성이 자유분방함 속에 적절히 어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개방은 무림에서도 대방파이고 개방의 방주라면 또한 그 신분에 있어서 소림사의 장문인에 전혀 못지않은 것이다.

필요금은 백란과 장지연에게 자리를 권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 이곳 개봉을 구경하고 싶어서는 아닐 텐데?]

[사람을 찾아주세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우리 개방을 능가할 곳이 없지. 아무 걱정말고 누군지나 말해보시게.]

[석두공! 석두공이라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십칠팔세 정도, 이십 일 전 쯤에 황산 백검보에 나타난 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석두공? 그를 찾는단 말인가? 에잉! 쯧쯔!]

[...?]

[...?]

필요금이 혀를 차자 장지연과 백란은 괜스레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대체 그는 뭣하러 찾는단 말인가?]

필요금이 오만상을 쓰면서 물었다.

백란이 재차 물었다.

[그를 아세요?]

[알다마다.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가지고 골치만 아프게 되었지. 불과 며칠 전에 여기 왔다갔지.]

필요금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석두공을 생각하기만 해도 영 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를 왔었다고요?!]

“정말요?”

백란과 장지연이 동시에 소리쳤다.

필요금이 말했다.

[덕분에 지금 팔십만이 넘는 내 제자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케 돌아다니고 있지. 밥도 제대로 못빌어먹고 말이야.]

[...?]

[...?]

두 여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무튼 거지들을 괴롭히는 건 오직 정의니 의리니 뭐니 하고 들고 나오는 협객들 밖에 없단 말이야. 나쁜 놈들은 정작 건드리지도 못하는 게 우리 거지들인데...]

필요금이 투덜거렸다.

장지연이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어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어디로 올지는 알고 있지.]

필요금의 대답에 두 소녀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을 것이네.]

그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나 꺼내 밀었다.

원래는 네모나게 접혀진 붉은 종이였다.

겉에는 굵고 강인한 필치로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무림첩(武林帖)>

 

무창의 귀산(龜山)에서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무림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형도객의 이름과 함께 석두공의 성명이 적혀있었다.

[보름도 남지 않았군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내 제자들만 죽어날 지경이지.]

[빨리 가야겠어요.]

장지연이 백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때였다.

[잠깐!]

필요금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문을 가로막았다.

[...?]

[마침 이곳까지 왔으니 내 어려움을 하나만 해소해주고 가시게. 제발...]

필요금이 장지연에게 아첨하듯이 손을 비볐다.

장지연이 풋! 소리를 내며 웃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 차림새를 보게, 뭔가 빠진 것같지 않나?]

필요금이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그리고 보니 매듭이 보이지 않는군요.]

[총명한 장소저... 아니 장장주... 과연 그렇다오. 분명히 이 방안 어디에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으니... 제자들에게 말하기엔 체면도 서지 않고... ]

필요금은 우스광스런 표정을 지었다.

장지연과 백란은 그가 일파의 지존으로서 조금도 흉허물이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과연 개방같은 대 방파의 주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장지연이 물었다.

[매듭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어요?]

[어젯밤 술시경... 그때부터 이 방안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신세지.]

[그 이후에 뭘 했어요?]

[그냥 제자들이 비럭질해온 술찌끼미를 걸려 한잔 마시고 장로들과 둘러앉아 한바탕 입씨름이나 하고 잤지 뭐. 다른 건 한 것도 없다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내 죽결이 없어져 버렸지 않은가?]

[저 깨진 독에 술찌끼미가 있었어요?]

백란이 물었다.

필요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여기서 이렇게... ]

필요금은 한쪽에 앉으며 말했다.

장지연이 웃으며 물었다.

[또 술독을 껴안고 마셨겠죠?]

[그렇지, 그렇게 마시지 않으면 술맛이 나질 않으니까...]

[술독의 오른쪽 뒤에 보세요.]

백란이 말했다.

[없다네. 내가 이미 다... 어? ]

필요금은 술독의 뒤쪽에서 죽결을 발견하고 줏어들었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 있는줄 알았지?]

[필방주님이 허리띠를 푸는 건 아마 두 가지 경우 뿐일 걸요? 하나는 측간갈 때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 술 마실 때겠죠. 하지만 측간에서 잃어버릴 리는 없을 테고 당연히 술 마시느라고 허리띠를 풀다가 한쪽에 흘렀겠죠. 그게 술독을 밀어젖히면서 그 뒤로 밀려가지 않았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겠죠. 설마하니 술독 뒤에 있으랴 싶어서 술독은 차마 못 치웠을 것이고...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은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과연 그렇구나. 백소저 또한 장소저 못지않게 지혜롭구만 하하하... 거지 두목이랬자 아무 소용이 없어. 거지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없어. 와하하하하... ]

그는 허리에 죽결을 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답례로 오늘은 내가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지. 따라오시게나.]

[방주님이 무슨 돈이 있어 요리를 대접한다는 거예요?]

장지연이 뒤따라 가면서 물었다.

필요금이 웃고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우리 개방의 하루 수입으로 따지자면 장장주의 하루수입보다 적지는 않을 걸? 팔십만 거지가 쌀 한 홉 씩만 얻어도 그게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는가? 또 석두공 그 친구가 내게 푼돈을 주고 가더구만.]

[푼돈?]

[한 오십만냥 정도 되더군.]

백란은 입이 딱 벌어졌다.

오십만냥!

거지 주제에 오십만냥을 푼돈이라고 말하는 낙천부개 필요금...

[음... 그럼 제게 빚을 조금 갚아도 되겠군요.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일순 표정을 싹 바꾸면서 말했다.

[거지한테 돈을 꿔줄 때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것도 왕거지한테는... 리어배면(鯉魚焙麵) 한 접시 사줄 테니 다른 말은 꺼내지도 말게.]

리어배면은 황하에서 잡은 잉어를 매콤달콤하게 맛을 낸 뒤, 바싹 튀긴 메밀국수에 곁들여 내는 것으로 개봉에서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7장

 

            붓 속에 숨겨진 재산 (2)

 

 

 

석두공이 객방으로 들어가자 무형도객이 무림첩을 적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글 써줄 서생들은 구했는가?]

[요즘엔 서생들이 글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형도객은 기대했다가 낙심한 듯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하는 수 없이 손목이 빠지도록 적어야겠군.]

[한데...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부릴 귀신은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

[자네... 무슨 수단을 찾은 모양이군. 어서 말해보게.]

무형도객이 희색이 만면하며 말했다.

석두공이 요즘은 그런 글은 직접 적는 것이 아니라 인장처럼 찍어낸다고 하니까 무형도객이 무릎을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책들도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적지 않은데...]

[그건 그렇고 곧 은자를 받으러 올 텐데 무슨 방법으로 거금을 마련합니까?]

[함께 가세.]

무형도객이 일어났다.

[...?]

[돈을 마련해야지.]

 

***

 

무형도객은 석두공을 데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강도라도 할 생각입니까?]

[무림을 위한 일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무형도객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형도객이 강도를 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림을 위해서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을 것같기도 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럼 부잣집을 골라서 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 돈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금 가고 있는 중일세.]

무형도객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천지의 소음을 모두 쓸어가버렸다.

무형도객은 문이 닫힌 점포들 중 한곳으로 가서 두드렸다.

쿵쿵쿵!

잠시 후에 쪼글쪼글한 노파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검을 팔러 왔소이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노파가 물었다.

[우린 검을 사지 않소. 여긴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이라오.]

탁!

노파가 문을 닫았다.

석두공이 물었다.

[정말 검을 파실 생각이십니까?]

무형도객이 그의 발을 쿡 밟으며 가만히 있으란 신호를 했다.

무형도객은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내 검은 세우면 하늘에 닿고 눕히면 땅을 다 쓸 수 있으며 거두면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오.]

(세상에 그런 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배께서도 거짓말이 상당하구나. )

석두공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닫혔던 문이 열리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서 흥정해봅시다.]

[...!]

석두공은 무형도객을 보았다.

무형도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골동품 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넓었다.

더구나 손님이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큰의자가 차탁 앞에 놓여있었다.

주인 노파는 칠십이 넘어보였지만 온화한 얼굴에 어떤 기품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노파는 가운데 의자에 앉으면서 무형도객과 석두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가지고 오너라!]

노파는 안쪽을 향해서 말했다.

그리고 무형도객과 석두공이 앉자 탁자위에 좁고 긴 나무상자를 하나 올리면서 말했다.

[손님이 팔겠다는 검은 이 검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노파가 나무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순간 나무상자에서는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는 한 자루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보기(寶氣)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막야(莫耶)가 뛰어난 명검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찌 내가 가진 검에 비하겠소?]

무형도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노파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노파는 보검을 탁자 아래로 쓸어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럼 이 검은 어떻소?]

다시 한 자루의 둔중해 보이는 기형 철검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 검은 검날의 두께만도 한치가 되고 날의 넓이는 반자나 되었다. 무게가 적어도 오십 근은 넘을 것 같은 데 노파는 종이장 들듯이 가볍게 다루었다.

[붕산검마(崩山劍魔)가 백오십 년을 연마하여 만들었다는 붕산검(崩山劒)이구려. 하지만 내 검에는 미치지 못하오.]

노파가 검을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시오.]

무형도객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빈손이잖아? 그럼 그렇지...)

석두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무형도객의 손바닥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손바닥 위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가락만큼 작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진기를 모아 응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석두공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 작은 검의 모습을 그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검령...]

석두공이 나직막한 소리로 내뱉었다.

무형도객과 노파가 눈을 부릅뜨며 석두공을 노려보았다.

노파의 손바닥에도 작은 검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형도객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정검령을 아는가?]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내 앞에서 그걸 보이며 복종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시하고 그냥 와버렸습니다.]

[...!]

[...!]

무형도객과 노파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심부름하는 소녀가 차를 다려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무형도객이 노파에게 말했다.

[당장 오백냥의 은이 필요하오.]

[이것을 가지고 가시오.]

노파가 한장의 전표를 주면서 말했다.

[천냥짜리니 여유가 있을 거요.]

 

***

 

(무림에는 드러나지 않은 조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양이다.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두개나 그런 조직을 목격했으니...)

객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석두공은 생각했다.

(소령이 속해있는 조직의 힘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았는데, 무형도객이 속해있는 조직도 전혀 그에 못지않을 것같구나. 그 노파의 무공도 놀라울 정도였다. 무형도객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깊은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은 피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진정한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같았다.

이런 느낌도 벌써 두번 째다.

부운청풍객 심제을과 잔혼살객 등이 삼마경을 익혀 극히 고강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강한 사람도 석두공은 여럿 알고 있다.

드러난 모든 것이 피상일 것만 같았다.

무형도객이 석두공에게 부탁했다.

[정검령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게. 함부로 말하게 되면 사마의 세력을 돕는 것이 될 것일세.]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응락하자 무형도객은 근심을 털어버린듯 껄껄 웃었다.

 

객점에 들어서자 탁자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무림첩들을 한곳으로 쓰윽 밀어버리며 석두공이 소리쳤다.

[이제 손이 해방되었군요.]

며칠 동안 무림첩을 적는 고생을 하느라고 얼마나 질렸는지 모른다.

석두공은 막힌 속이 탁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붓도 이젠 안녕을 고해야겠지요.]

뚝!

석두공은 자신이 사용했던 붓을 꺾어버렸다.

한데,

[어? 이게 뭐야?]

꺾어진 붓 속에서 돌돌말린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

무형도객도 그의 옆으로 왔다.

쫘라라락!

석두공 종이를 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하... ]

[와하하하... ]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문서였다.

무혁해의 재산 중의 한 가지에 대한 소유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뚝!뚝!

석두공은 다른 붓도 부러뜨렸다.

부러진 붓마다 한 장씩의 문서가 나왔다.

무혁해의 재산은 고스란히 붓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천하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든다는 갑부 무혁해...,

그는 기묘한 방법으로 재산을 감추고 도망치고자 했으나 결국 해천월의 손에 죽고 말았다.

헌데 그의 재산은 엉뚱하게도 석두공의 손으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七 章

 

               붓 속에 숨겨진 財産 (1)

 

 

 

-소흥(紹興)!

 

하(夏)왕조 시대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치수를 한 우(禹)의 무덤인 우릉(禹陵)이 있다.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이 직접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 우릉에는 시인묵객과 영웅호걸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객점과 주루들도 근처에 적지 않게 있다.

소흥은 또 술을 장 빚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소흥주(紹興酒)가 명주임은 주당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르릉!

우르릉! 쿠쾅!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코 무너지며 시퍼런 번개불을 토해냈다.

번쩍!

콰쾅!

오후가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어둑어둑해지고 공기가 무거웠다.

콰󰠏󰠏! 쏴아아아!

우르릉... 쿠쾅!

번개불이 갈라놓은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장대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릉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둘러서 주위의 객점이나 주루로 피해 들어갔다.

 

[에이 기분 나빠! 하필이면 비가 쏟아질게 뭐람. 조금만 빨랐어도 괜찮았을 텐데... ]

장지연은 흠뻑 젖은 옷을 공력을 돋구어 말리며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객점 안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그녀가 망설이며 두리번거리자 점소이가 달려와서 한쪽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그곳도 빈자리는 아니었다.

[손님, 여기 앉으십시오. 이분은 일행이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점소이가 권한 그 자리엔 장지연과 비슷하거나 한살 많아 보이는 소녀가 앉아있었다.

보석같이 초랑한 눈망울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로 얇은 흑의를 입었고 허리춤에는 백옥퉁소가 끼워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예사로운 소녀같지는 않았다.

장지연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시켰다.

그녀 앞의 흑의소녀는 이미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장지연은 침을 꼴깍 삼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화상같은 석두공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사라지려면 영영 사라져버리든가 할 것이지 사람을 이렇게 고생만 시키다니...)

한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녀도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석두공! 그는 어떻게 됐을까? 뇌주탄에서의 해전은 그가 벌인 것이 틀림없을 텐데 진우백의 이름만이 무림에 진동하고... 빨리 그를 찾아야 하는데... )

이 흑의소녀는 바로 백란(白蘭)이 아닌가?

석두공이 무저갱(無底坑)에서 올라오자마자 만났던, 그리고 석두공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포기해버렸던 그 소녀 백란인 것이다.

백란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를 빨리 찾아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은데... 두발 달린 짐승이니 묶어둘 수 도 없고... )

맞은편에서 장지연도 생각하고 있다.

(이러다가 꽃같은 내 청춘이 그 얼간인가 하는 석두공 찾아다니다가 다 지나버리는 건 아닌 지 모르겠네. 만나기만 한다면 개목걸이라도 채우겠는데...)

백란의 생각은 이렇게 번져가고 있었다.

(만난다면 먼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까? 휴...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

장지연의 머릿속도 분주했다.

(한데 참, 그 숯덩어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보니 그 생각은 또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때 백란은 젓가락을 튀긴 닭고기로 가져가며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진 내가 그를 만났는데도 데려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때려죽이려 들거야. 빨리 뇌주탄에서 이후의 행방을 찾아야돼. 내키지는 않지만 해남도의 그 늙은이 진우백에게라도 물어봐야겠어.)

장지연이 생각했다.

(쳇 그 숯덩어린 무슨 새끼방울인가 소령인가 하는 계집애를 찾아다니고 있겠지. 에이 기분...)

백란이 생각했다.

(정검령(正劒令)을 사용하여 그를 찾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주 발이 넓은 조직이 있다면 좋을 텐데... 발이 넓은 조직?)

장지연이 생각에 몰두하여 백란의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하지만 백란도 그런 사정이라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지연은 속으로 석두공을 욕했다.

(무정한 자식! 내 마음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척 했겠다. 그리고서도 뭐 소령인가 그 계집애를 찾아? 나쁜 놈... 정말 나쁜 놈... 석두공보다 더 나빠.)

백란은 자기의 말에 스스로 반문하고 있었다.

(발이 넓은 조직...? 그럼 무림에서 개방을 능가할 세력이 없잖아?)

장지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쁜 놈... 하지만 어쨌든 석두공부터 찾아야 돼. 이제는 지쳐버렸어. 개방에라도 손을 벌리는 수 밖에... )

[그래! 개방이다.]

[개방!]

갑자기 백란과 장지연이 동시에 내뱉었다.

[...!]

[...!]

서로가 눈이 뚱그레져서 바라보았다.

서로의 젓가락이 음식물의 경계를 침범하고 있었다.

 

× × ×

 

쏴아아아...

콰르르릉... 쏴아아아...

[소식이 빠르기로는 개방을 능가할 곳이 없지.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손이 빠르기로써 서생(書生)들을 능가할 사람이 없겠지.]

무형도객이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석두공이 붓을 집어던졌다.

[정말이지 서생들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쓰더라도 다 못할 것같습니다.]

그의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첩지들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같았다.

석두공과 무형도객이 팔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게 적은 무림첩들이었다.

[제가 근처의 학당을 알아보고 글쓸 사람을 구해오겠습니다.]

석두공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서문가(西門街)로 가면 대통학당(大通學堂)이라는 곳이 있네. 거기 가서 알아보게.]

석두공은 객점의 주인에게서 우산(雨傘)을 얻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진강(鎭江)가에 있는 양주(陽州)가 물에 잠겨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는 많이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 × ×

 

[하하하하!]

광광광광!

학당의 새끼 서생들이 바닥을 치면서 웃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글을 읽는 분이 아니시죠?]

[그렇습니다.]

석두공은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책만 펴들면 잠들었던 기억이 있는 그였다.

서생들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요즘은 그렇게 똑같은 내용을 손으로 적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적포(書籍布)에 가셔서 한 번 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내용인지는 몰라도 불일간에 될 것입니다.]

석두공은 하례를 하고 나왔다.

그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요즘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하하하!]

석두공은 책을 만든다는 곳으로 찾아가면서 투덜거렸다.

[글을 사람이 쓰지 않고 인장(印章)처럼 찍는다니 참... 나중엔 검도 사람이 휘두르지 않고 다른 뭐가 어떻게 할 지 모르겠군. 나야 본래부터 좀 모자랐으니까 모른다고 치더라도, 무형도객 선배도 까막눈인가? 왜 이런 것도 몰라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까?]

 

***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서적포의 점원이 물었다.

[최소한 오만 장 정도... ]

점원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오만 장의 분량이면 웬만한 서적포에서 반년 동안 주문받는 량을 다 합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이상은 걸립니다. 하지만 급한 것이라면 다른 집과 일을 나누어 더 빨리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오.]

[하지만 그럴려면 돈이 조금 더...]

점원은 석두공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얼마가 필요하오?]

[요즘 종이값이 워낙 비싸서 헤헤... 은으로 오백냥은 주셔야겠습니다.]

점원이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상객점(昶翔客店)에 와서 나를 찾으시오. 돈은 그때 주겠소.]

[그럼 찍어내야 할 내용을 여기에 적어주십시오.]

점원은 백지를 내밀었다.

석두공은 먹물을 흠뻑 적신 붓으로 써내려갔다.

 

<...

무림동도...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의 발호가 극에 달하여...

강호의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이에 천하 무림의 정기를 회복하고자 십대 고수 중 오객의 한분이신 무형도객과 무림말학 석두공이 감히 기치를 잡았...

의열남아라면 주저없이 나서 악의 기운을 이땅에서 몰아내는데 힘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명월 중양절(重陽節)에 무창(武昌) 귀산(龜山)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바이니 무림제위들께서는 아직도 정의가 건재함을 보여주시기 바라오.

무형도객, 석두공 서(書)>

 

[손님처럼 필적이 뛰어나신 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판을 새기고 나서 이 글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점원이 석두공의 필체에 감탄하며 물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석두공은 질렸다는 듯이 붓을 던져놓고 객점으로 돌아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六 章

 

       江上逢敵

 

 

 

[해천월!]

석두공은 뇌성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을 쭉 뻗었다.

“으헉!”

해천월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석두공의 손가락에서 흰빛이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그것은 수백개의 유성으로 변해서 해천월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단천(流星斷天),

동정호에서 동호천에 의해서 한번 펼쳐졌던 바 있던 바로 그 무공이었다.

당시 해천월과 심제을, 그리고 잔혼살객이 이 한수에 모두 중상을 입고 달아나야 했었다.

해천월의 손에 도가 쥐어졌다.

[팔황지옥도(八荒地獄刀)!]

해천월은 비명처럼 고함치며 팔황지옥도의 수법을 잇달아 펼쳐냈다.

휘루루룽!

파도가 도기를 따라 치솟으며 벽을 이루었다.

파파파파팟!

카캉!

광풍이 몰아치는 듯 무형도객 등이 탄 배는 물결의 여세에 밀려서 이십 여 장이나 멀어져 버렸다.

[헉!]

해천월은 어깨를 꿰뚫는 화끈한 통증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섰다. 유성단천의 수법에 그의 도가 부러지고 어깨가 꿰뚫려버린 것이다.

순간,

꾸륵꾸륵!

뿌르륵!

그의 쾌속선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천월! 가라!]

꽈르르릉!

석두공의 그의 면전으로 떠오르며 얼굴로 일장을 가해왔다. 실로 기이하도록 빠른 몸놀림이고 빠른 장력이었다.

해천월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들었다.

[지옥참렬(地獄斬裂)! 지옥혈우(地獄血雨)! 지옥멸천파(地獄滅天破)!]

그는 팔황지옥도의 최후절초들을 잇달아 세가지나 검으로 펼쳤다.

콰콰쾅!

그의 몸 주위에 푸른 검막이 생기고 이내 그 검막에서 새파란 도기가 줄기줄기 뻗어올랐다.

석두공은 그의 몸을 넘어 허공에서 멈춰섰다. 그가 펼쳤던 장법은 팔황지옥도에 의해 막혀버리고 이제는 가공할 도기가 그의 몸을 난도질해오고 있었다.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나뉘어진 그의 몸은 검막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푸앙!

갑자기 검막도 사라지고 도기도 사라졌으며 적룡혈운도주 해천월의 모습도 사라졌다.

오직 셋으로 나뉘어졌던 석두공의 몸이 천천히 합쳐지며 하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물 위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휘이익!

무풍도객이 석두공의 곁으로 날아내리며 물었다.

[해천월은 죽었는가?]

석두공은 고개를 저었다.

[팔황지옥도법... 악마의 도법이라고 할만합니다. 제 공격을 막아내고 그 짧은 시간에 물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였다.

[으악!]

푸하악!

갑자기 그들이 타고 있었던 배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한사람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스팟!

석두공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져갔다.

촤아아!

그 직후 배의 선미에서 한 가닥 붉은 빛이 일렁이더니 금방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로 해천월이었다. 그자가 석두공의 시선을 피해 배위로 올라와 살인을 하고 사라진 것이다.

석두공은 배위에 내려서며 발을 굴렀다.

[너구리같은 늙은이! 기필코 죽여버릴 테다!]

[으으으... ]

장사꾼들이 석두공의 살기에 오줌을 싸면서 덜덜 떨었다.

석두공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배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때 무형도객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곁으로 떨어졌다.

[누굽니까?]

[천하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든다는 갑부 무혁해(武赫懈)네. 항주의 장보장(藏寶莊)의 장주이기도 하지. 해천월은 이 사람을 노리고 있었던 모양일세.]

무형도객이 수급을 목없는 시체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무혁해는 결코 혼자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 이렇게 홀홀단신으로 배를 탔다가 죽다니 영문을 알 수 없군.]

[해천월이 황금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석두공의 말에 무형도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남해에선 지금 해천월의 선단이 해남도의 진우백에게 박살이 났다고 떠들썩 하니까. 아마도 새로운 선단을 만들 자금이 필요했던 게로군.]

그때 그들의 대화를 끊으면서 사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체를 그냥 배위에 두고 모두 절이라도 지내자는 거요? 함께 물속에 던져버리고 가도록 합시다.]

사공이 목이 떨어진 시체를 꺼림직해하면서도 배위에 두는 건 더욱 끔직한지라 물속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만 두시오. 거적이나 하나 주면 내가 강북에 다다라서 묻어주겠소.]

[예예에...]

사공이 화들짝 놀라며 슬금슬금 선실로 들어갔다. 석두공과 무형도객이 마치 신선처럼 날아다니는 것을 본 후 인지라 그가 말을 거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석두공은 사공에게서 거적을 받아서 피에 젓은 무혁해의 시신을 쌌다.

머리도 떨어지지 않게끔 잘 고정시켜 거적을 돌돌 말은 후에 아래위로 끈으로 묵었다. 끈이 풀어지지 않는 한 시체는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의 초라한 죽음이라... 세상은 진정 알다가도 모르겠군.]

무형도객이 중얼거렸다.

석두공은 시체를 만 거적을 번쩍 들어올려 한쪽으로 가져갔다.

또르르...

그때 갑자기 그의 발에 뭔가 채였다.

황모필(黃毛筆),

아주 질 좋은 붓이었다.

그가 줏어들자 사공이 말했다.

[죽은 그 영감의 물건입니다. 붓장수지요. 저쪽에 있는 것이 모두 그의 것이지요.]

등에 질 수 있는 네모난 나무 상자 속에는 수백 개의 황모필이 담겨져 있었다.

석두공은 줏어들었던 붓을 상자 속에 넣었다.

 

× × ×

 

강을 건너 나루에 닿자마자 석두공은 거적을 들쳐들고 배를 내려갔다.

그때였다.

[무사님! 무사님!]

사공이 소리쳐 불렀다.

[이 물건은 꺼림직하니 무사님께서 가져가십시오.]

사공이 붓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나와 석두공이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석두공을 뒤따라 내리던 무형도객이 그 상자를 받아들고 내려왔다.

[시체를 치워주는 댓가로 붓이라! 무혁해가 듣던만큼 노랭이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기왕이면 검이 더 나을 텐데... ]

무형도객이 말했다.

석두공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무림첩을 만들어야 할 텐데 이 붓이 꼭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렇군! 내가 깜박했네.]

무형도객이 크게 웃었다.

석두공은 강가의 높은 언덕을 골라서 무혁해의 시체를 묻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새워주며 말했다.

[가족이 살아있다면 연락해서 모셔가도록 하겠소. 하지만 해천월이 그들을 그냥 두었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군요.]

[이보게. 무림대회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면 이런 강가는 어떤가?]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던 무형도객이 석두공에게 물었다.

[괜찮겠군요. 어디 마땅한 데가 있습니까?]

[물론 있지. 객점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상의하도록 하세.]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어깨를 툭쳤다.

석두공의 옷은 거적에서 배어나온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

 

붉은 장갑을 낀 깜직하고 귀여운 모습의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석두공이란 사람이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음... 얼마 전에 말예요?]

[그런 사람은 온 적이 없소. 괜히 사람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가시오.]

백검보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번자검(飜刺劒) 표청(杓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여자만 보면 마음이 흔들거려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읽히기라도 할까 싶어 늘 여자에게만 퉁명스러운 남자다.

[온적이 없다구요? 그렇다면 있다가 오겠군요. 수고하셔요.]

이렇게 말하고 표청을 슬쩍 지나쳐 문안으로 들어가는 소녀는 장지연이었다. 그는 혈포단객으로부터 석두공이 백검보로 갔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응?]

표청은 장지연이 갑자기 문안으로 뛰쳐들어가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들어갈 수 없소.]

그는 장지연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장지연은 간발의 차이로 문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말았다.

삐이익!

표청은 호각을 불었다.

[멈춰라!]

장지연의 앞쪽으로 두 사람의 검객이 날아내리며 소리쳤다.

장지연이 뾰쪽하게 소리쳤다.

[무슨 손님대접이 이래요?]

파팍!

그녀의 귀신처럼 빠르게 두 검객의 사이를 돌파해버렸다.

휘이익!

휙휙!

이번에는 네명의 검객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쾌속하고도 정확한 솜씨, 백검보의 무사로서 손색이 없는 솜씨였다.

[정말 이럴 거예요? 난 사람을 찾으러 왔단 말이에요.]

장지연은 화난 목소리고 고함치며 손으로 검들을 쳐갔다.

검객들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깡깡! 까깡!

네자루의 장검은 그녀가 둥글게 휘두른 한 수에 부딪혀 모두 잘려져 나가 버렸다.

[헛! 혈천갑이다. 넌 혈포단객과 무슨 관계냐?]

검객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장지연은 화가나서 말했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아요? 백검보가 무슨 용담호혈이나 된다고 들어오자 마자 다짜고짜 칼로 찌르고 야단이에요? 검성을 만나보고 좀 따져야겠어요. 그는 어디있죠?]

그때였다.

[노부가 바로 검성이다. 무슨 일로 나를 찾느냐?]

검성이 전각을 돌아나오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쳇!]

장지연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백검보는 들어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기로 작정한 모양이죠? 그러고도 검성이 인의대협이라고 하겠어요?]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한데 소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검성이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지연이 말했다.

[난 석두공이라는 사람을 찾아왔어요. 혈포단객은 그가 이곳으로 갔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죠? 여기서 그를 기다려도 되겠어요?]

“...!”

순간 검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요? 안되요? 참 인색하군요. 이런 큰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장지연이 그의 안색을 보고 즉시 말했다.

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오.]

장지연의 예쁜 눈썹이 상큼 찌푸려졌다.

[어째서요? 혈포단객은 이리로 갔다고 했는데...]

검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흘 전에 이곳에 왔다 갔소. 진짜 석두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석두공이라고 했소.]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밖에 있는 사람은 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그리고 무슨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단 말이에요? 그는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장지연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인즉슨 아래와 위의 말이 다르니 무슨 횡설수설이냐는 것이다.

검성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변명할 만한 말이 없었다.

장지연은 검성이 입을 다물고 있자 다시 물었다.

[그럼 그는 어디로 갔어요?]

[모른다.]

검성은 고개를 저었고,

장지연은 벌컥 화를 냈다.

[대체 당신은 아는게 뭐예요? 들어서면서부터 부하들에게 칼질이나 하게하고...]

[무례하다!]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장지연은 심통이 났는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했다.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무슨 제왕이나 된 것같으세요? 세상에서 검성의 손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요?]

[흥! 어찌 없겠느냐? 하지만 너같은 어린애는 아니다.]

갑자기 검성의 뒤에서 만박노조가 나오면서 차갑게 응수했다.

장지연은 그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오호라! 세상에 모르는게 없다는 만박노조 할아버지시군요. 그럼 제가 누군지 맞춰보시겠어요?]

[넌 검성은 손님은 될 수없다.]

만박노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장지연이 입을 삐죽했다.

[그게 대답이에요? 만박노조란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네요. 하지만 그러고도 틀렸어요.]

[허허허... 그렇다면 네가 검성의 손님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만박노조가 실소하며 말했다.

장지연이 돌연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막하다니... 만박이란 이름이 부끄럽군요.]

만박노조가 눈을 부릅떴다.

장지연이 갑자기 검성을 향해서 주먹을 불숙 내밀며 말했다.

[이래도 내가 손님이 될 수 없어요?]

검성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검성에게로 쏠렸다.

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저는 내 귀빈이오.]

그의 말투마저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만박노조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여전히 검성을 향해서 뻗어있는 장지연의 주먹은 혈천갑속에 쌓여있고 얇디얇은 혈천갑위에는 녹옥지환(祿玉指環)이 끼워져 있었다.

검성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분께선 아직도 정정하신지?]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소식을 듣지 못했소. 그분께서도 결국 세월을 이기시지는 못했구려. 그럼 들어가서 이야기 합시다.]

검성이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장지연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단지 석두공, 그분에 대한 것만 아는 대로 말해주시면 돼요.]

주위의 검객들이 아연 긴장했고,

검성은 탄식하며 말했다.

[휴... 소저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소.]

[제 신분을 알고도 소저라고 부르세요?]

장지연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검성은 흠칫하고 말했다.

[장주(莊主)께 실언했소이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소.]

[그는 왜 이곳에서 떠났죠? 혈포단객의 말로는 이곳에 있을 것같았는데... ]

[...!]

[...!]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장지연의 신분을 그들이 알 수는 없었지만 검성의 태도로 보아서 오히려 검성이 조심하는 듯하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질문이지만 석두공이 백검보에 찾아왔을 때의 상황을 말로 설명해주기는 난감하기 이를데 없다.

장지연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흥! 대충 알겠군요. 또 들어서자마자 칼질을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석두공이 제 사부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아시죠? 사부님께서 아시면 기분이 어떠하셨을까요?]

검성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잃고 있었다.

장지연이 말했다.

[이점은 앞으로 분명히 고려하겠어요. 다시는 당보주님과 만나고 싶지 않군요.]

어린소녀지만 장지연은 아주 당찬데가 있었다. 그녀는 검성을 매섭게 쏘아본 후에 백검보를 걸어나가 버렸다.

검성은 망연히 하늘을 보다가 탄식을 거듭했다.

[노제... 저 소녀는 신분이 무엇인가?]

만박노조가 물었다.

검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말년에 이르러 내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 없구려. 사흘이 멀다하고 후배들의 공박을 받으니 참으로 부끄럽소.]

[...!]

[게다가 그 말들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욱 나를 괴롭게 하는구려. 그동안 내가 단지 검성이란 이름에 얽매여 얼마나 나태했는지...]

[...!]

검성은 초라한 어깨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음성이 뒤에 남았다.

[경계를 풀어라. 죽어도 장부로서 죽어야겠다.]

그의 말은 만박노조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만박노조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당노제가 저렇게 된 것은 실상 내 책임이 크다. 장부... 과연 나는 장부로 살았는가? 열근도 되지 않을 머리를 믿고서 귀계로써만 살아오지 않았을까? 장부... 대장부... 어째서 지금까지 이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인생에 있어서 남은 것이 허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 사람이 느끼는 허탈감을 무슨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만박노조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열리는 것 같음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지나온 생이 무위로 돌아가는 그 허탈감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2)

 

 

 

-남경(南京)!

 

장강을 건너 강북으로 가는 배위에 머리카락이 조금 이상한 미청년이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있다.

호수같이 심원한 눈빛에 굳게 다문 입가에 은은히 비치는 매력, 허리에 걸려있는 거무튀튀한 방망이까지도 그렇게 잘어울릴 수가 없는 미청년이었다.

그는 석두공이었다.

진정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 그대로의 모습인지라 배위의 선객(船客)들이 너도 나도 그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이정(二正)이 겨우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다니! 좁쌀같은 자들...! 경우에 따라선 적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거늘 동지마저 믿지 못하다니...]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파란 물결이 그의 발아래로 들어오는 것같았다.

그때였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졌기로서니 이정을 드러내놓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그의 뒤에서 웅혼한 음성이 들렸다.

석두공은 고개를 돌렸다.

백의문사(白衣文士)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띠고 서있었다.

[무형도객! 무형도객이시군요.]

석두공이 반색을 하면서 덥썩 그의 손을 잡았다.

백의문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난 자네를 모르네. 나를 아는가?]

[이런 멍청이!]

석두공은 자신의 머리를 쿡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전부터 인상이 좋았던 무형도객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실수를 했던 것이다.

석두공이 포권을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오년 전 동정호에서 제 사부님께서 임종하시는 것을 함께 지켜주셨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그때 그 소년... 그러고 보니 닮았군 그래.]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말을 금방 알아듣고 기뻐했다.

 

일렁이는 물결과 까마득한 수평선은 이곳 장강이 바다인지 강인지 모르게 한다.

“그 사람들을 너무 탓할 것도 없네.”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무공만이 능력이 될 수는 없네.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 할 수 있네. 포용력이 없고 속이 좁다고 해서 원망할 수야 있는가? 그들의 그릇이 그것 뿐인 것을... 나도 일찌기 그들이 난세를 평정할 주역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저도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여 도에 지나치게 화를 낸 듯합니다. 하지만 삼인이 만든 척살대가 무림에 나오기 전에 제거해야 할 텐데 여간 큰 일이 아니군요.]

석두공이 말했다.

무형도객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소림사에서 무림첩을 발하도록 하는 것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와 자네, 그리고 소림사의 이름으로 발송된다면 더욱 많은 무림인들의 힘을 규합할 수 있을 것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닙니다만 오히려 걱정이 됩니다.]

석두공의 말에 무형도객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구대문파는 움직임이 없었으며 또한 삼인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림사에서 무림첩을 발송하고 무림대회를 연다면 그들이 구대문파를 경계하게 될 것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무형도객이 물었다.

석두공이 머뭇머뭇하면서 말했다.

[사실 저와 저의 의형이신 일초진천수가 그동안 구대문파의 힘을 언제든지 빌릴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사용할 생각으로...]

무형도객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랬었군. 음... 그랬었군.]

[...?]

무형도객은 뜻모를 말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형도객 그도 구대문파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구대문파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힘이 무엇엔가 묶여 있는듯하다는 인상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이제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한데 석두공이 강상으로 달려오는 두척의 쾌속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배들을 알고 계십니까?]

[이 넓은 장강에서 불쑥 나타난 배를 내가 어찌 알겠나?]

무형도객이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속도로 보아 부딪힐 수도 있겠습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는 동정호에서 직접 배를 부렸던 사람이다. 물과 그 위로 달리는 배의 성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구 저저...]

[애그머니나! 저걸 어쩌나...]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젊은 부인이 달려드는 배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사공! 사공! 배가 부딪히겠소!]

누군가 소리치자 사공들 중의 한사람이 선실로 뛰어 들어갓다가 징을 들고 다시 뛰쳐나왔다.

지잉! 지잉!

[부딪히겠소. 부딪히겠소!]

그 사공은 징을 두드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쾌속선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석두공 등이 탄 배의 허리부분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으아악!]

성질 급한 사람들은 미리 비명을 질러댔고 사공도 놀라서 징을 던져버리고 배를 젓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배는 쾌속선이다.

사람과 하물을 많이 실은 도선(導船)과는 그 속도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

석두공이 말했다.

[수적(水賊)입니다.]

[단순한 수적은 아니네. 저것을 보게.]

무형도객이 손을들어 뒤쪽의 쾌속선을 가리켰다.

그 배에서는 막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언듯 보아도 붉은 색인 것같았다.

[적룡혈운도(赤龍血雲島)!]

석두공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으아아!]

그 무렵 배에 탄 선객들이 소동을 일으켜 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러다간 충돌하기도 전에 가라앉고 말겠군.]

무형도객은 천근추의 공력을 운용하여 배의 중심을 잡았다.

[자네가 하나를 맞게. 내가 하나를 맞...]

무형도객은 말을 하다가 곁이 허전하여 돌아보았다.

석두공은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미 한 마리의 비조처럼 강물위로 쏘아져 날아가고 있었다.

쾌속선과 그의 거리가 불과 오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촤아아아!

쾌속선이 갑자기 머리를 돌렸다. 달려오던 여파로 배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파도가 무형도객이 탄 배를 넘겨버릴 듯이 크게 떠올랐다.

콰르르르릉...

석두공의 손에서 우레 소리가 터져 나오며 다시 쌍장이 격출되었다.

꽝!

쾌속선의 허리가 벼락을 맞은 듯이 절단되어 버렸다.

[으악!]

풍덩풍덩!

살아남은 자들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와 동시에 배는 가라앉아 버렸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석두공은 물위를 밟고 나아가며 뒤쪽의 쾌속선으로 접근해갔다. 적룡혈운도의 깃발이 올라간 그 배였다.

촤아아아!

그가 지나감에 따라 물결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삼각파도를 이루었다.

갑자기,

[크하하하하... ]

쾌속선에서 광소가 터져 나오며 황의를 입은 노인이 갑판위에 나타났다. 등에는 도(刀)를 맸으며 왼쪽 허리에는 검을 매고 있었다.

적룡혈운도주 해천월-!

바로 그자였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석두공은 물론이고 무형도객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그렇게 작은 배안에 도주인 해천월이 타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 그를 발견한 석두공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천하의 해천월이라고 하지만 석두공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호굴에 뛰어든 토끼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五 章

 

               百劒堡의 訪問客 (1)

 

 

 

금포노인이 말했다.

[그놈들이 만든 척살대가 빨리 가동할 수 있도록 도와라. 일백 개의 마정단(魔精丹)을 심제을에게 보내라.]

(이 일백 개의 마종단을...! 한개에 각기 일백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을... )

그의 근처에 있던 여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존명!]

스스슷!

금포노인의 앞에 서있던 흑봉(黑鳳)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보이고 사라졌다.

금포노인은 몸을 뒤로 젓히고 누워 눈을 감았다.

[흐흐흐! 척살대... 그놈들만 세상으로 뛰쳐나오면 몸을 도사리던 은세정검회도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흐흐흐! 그때가 천지가 뒤바뀌는 때...!]

금포노인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누구냐?]

[십구은(十九隱)의 급보입니다. 척살대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자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금포노인의 이마가 좁혀졌다.

[제거해버릴까요?]

조심스러운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만두어라. 척살대에 첩자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 척살대는 단지 은세정검회를 끌어내기만 하면된다. 사은(四隱)에게 명해서 백검보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해라. 어쩌면 놈들은 백검보 주변에서 은밀히 서성일지도 모른다.]

[존명!]

그 목소리는 사라졌다.

금포노인은 중얼거렸다.

[은세정검회! 그들이나 본궁이나 힘은 백중지세! 먼저 움직이는 쪽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처럼...!]

노인은 고개를 돌리고 미사를 바라보았다.

미사가 흠칫하면서도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벗고 올라와라!]

사라락!

미사의 옷이 요염한 율동에 따라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미끈한 알몸이 된 미사는 금포노인에게로 걸어가 그의 금포를 벗겼다.

노인의 남성이 꿈틀대며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거대한 남성, 미사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그녀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순간 그녀의 은밀한 곳이 마치 동굴처럼 넓어졌다. 특이한 방중술을 익힌 것이다.

노인의 무지막지한 남성은 아무 저항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받아들여졌다.

노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미사의 은밀한 부위의 앞쪽을 쓰다듬었다.

미사가 맷돌을 돌리듯이 둔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흥분이 고조되자 미사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봉사를 받는 노인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사심도 없는 수행자의 그것인 것같았다.

어느 순간 미사는 혼자 발버둥치다가 고개를 뒤로 젓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흰자위로 드러나 있었다. 정사로 인해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금포노인은 중얼거렸다.

[이젠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움직여야만 할 상황이 만들어진 이상...]

 

× × ×

 

[본궁에서 보내온 영단이오. 이번에 본궁에 흡수된 약성문(藥聖門)에서 수 백년에 걸쳐 만든 것이라 하오.]

백사 마소악이 파혼검, 즉 신분을 감춘 금사종에게 말했다.

금사종이 물었다.

[모두 몇 개요? 어떤 효력을 지녔소?]

[정확하게 일백개요. 그리고 효력은 실로 놀랄만 하오. 일백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소.]

백사 미소악 대신 흑사 우문추가 말했다.

순간 금사종의 눈이 크게 떠였다.

[일백년의 공력? 그렇다면 우리가 당장 무림에 나갈 수도 있겠군.]

[그것 때문에 파혼검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백사 마소악이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

금사종의 눈에 차가운 한망이 스쳐지나갔다.

백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 말을 이었다.

[우...우린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이라는 것을 알았소. 다른 자들은 그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소.]

[백사, 말을 돌리지 말게!]

듣고 있던 흑사 우문추가 답답했는지 성을 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를 살려주시오. 약속만 한다면 당신의 종이라도 되겠소.”

흑사 우문추는 금사종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햇다.

백사 미소악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함게 무릎을 꿇었다.

“....!”

금사종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문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볼때 파혼검 당신도 겨우 척살대의 일원으로 만족할 그런 사람은 아니오. 당신도 뜻을 펴고자 하면 우리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오.]

탕!

금사종이 탁자를 치고 일어섰다.

[...!]

[...!]

흑백쌍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금사종을 올려다 보았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 말에 복종하라!]

금사종이 가공할 기도를 발하며 말했다.

(우리가 잘못 보지 않았다. 이자는 엄청나다.)

흑백쌍사는 무릎을 꿇은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견...견마지로를 다하겠소이다.]

금사종은 그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단약을 이곳에 두고 나가라. 다른 자들이 눈치채면 안되니....!]

 

흑백쌍사는 단약이 들어있는 옥병을 놓고 나갔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금사종은 단약을 눈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장 이것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지 않은가? 저들은 이 단약이 없어도 앞으로 몇 개월만 지나면 무공을 거의 다 이루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이것을 그대로 저들에게 다 줄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무림에 혈풍이 휘몰아친다. 내 능력으로는 이미 삼마경을 어느 정도 터득한 저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

이곳에 있는 자들의 무공은 모두가 흑백쌍사보다 강하다.

조금 강한 자들도 있지만 훨씬 강한 자들도 있다.

삼마경을 어느 정도 익혔는가에 따른 차이였다.

흑백쌍사는 삼마경을 보기는 했으되 익히지는 못했다.

익히자면 필연적으로 내공을 파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즉시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기에...!

무림인답지 않게 죽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흑백쌍사이기에 삼마경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사종의 무공으로도 삼마경을 익히고 있는 그들은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아직 화후가 약해서 단신으로는 그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하지만 셋 넷만 모이면 금사종도 그들을 당할 수 없다.

금사종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금사종은 한가지 결심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마경을 연성하자. 이 영단의 위력을 빌린다면 내공이 폐쇄되어도 금방 복원될 수 있다. 삼마경의 무공으로 삼마경의 무공을 제압하는 것이다.]

그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부운청풍객 등은 모두 하나의 마경만을 익혔다. 내가 삼마경을 모두 익힌다면 그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그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금제를 받아서 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금사종은 자신의 방을 나가 흑백쌍사를 찾아갔다.

[납과 수은을 가지고 있소?]

[...?]

[있기는 합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백사가 물었다.

금사종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니...!]

 

금사종은 납과 수은을 가지고 돌아왔다.

옥병을 열어서 밀납속에 든 영단들을 모두 꺼낸 후 자신이 복용할 한알만을 따로 챙겼다.

그리고 바늘로 밀납에 작은 구멍을 뚫고 납과 수은을 혼합하여 나머지 영단들의 가운데로 흘러넣었다.

구십아홉개의 영단에 은밀하게 납과 수은이 들어갔다.

금사종은 옥병속으로 하나하나 다시 넣으며 중얼거렸다.

[영단을 주기는 해야겠지. 하지만 삼 개월 이내에 모두 몸이 썩어나갈 것이다. 단전에서 부터...]

 

× × ×

 

-황산(黃山) 백검보(百劍堡)!

 

부운청풍객등에게 패한 검성 당이정이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이곳은 석두공이 들어서면서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검종맹이나 잔혼각, 적룡혈운도의 공격에 대비하여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데 석두공은 사십 여 명의 검객들이 둘러싸인 채 연무장에서 검성과 만박노조를 만났다.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라고? 소협이 말이오?]

태사의에 앉은 검성이 말했다.

만박노조는 석두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석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금 이상하군. 자네는 닮기는 했지만 그는 아니네.]

만박노조가 말했다.

순간,

척!척척!척!

주위에 있는 검객들의 손이 일제히 검을 잡았다.

눈을 빛내는 그들의 검은 금방이라도 뽑혀나올 것만 같았다.

석두공이 물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노부는 오년 전 동정호에서 동호천 노선배와 그 제자를 만난 적이 있다. 너는 분명히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이름은 알고 있다. 석두공, 바로 네가 말한 그 이름이지. 하지만, 진짜 석두공에겐 고질이 있어 자네처럼 똑똑할 수가 없네. 내가 보기에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듯이 보였지. 또한 노선배도 그렇게 말했고...]

[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석두공은 만박노조의 눈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궂이 내가 나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나가려했다.

검성이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멈추게.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는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야 겨우 묻는군요. 혈포단객의 부탁을 받고 백검보에 찾아왔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말만 전해주고 가도록 하지요.]

석두공은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모든 검객들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삼인이 척살대를 만들어 무림의 고수들을 모두 죽이려한다. 척살대가 뛰쳐나오기 전에 부운청풍객 등을 깨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무림첩을 뛰워 모든 무림인의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 대충 이런 말이었소.]

석두공은 시를 읊듯이 혈포단객의 말을 전한 후에 성큼 걸음을 옮겼다.

만박노조의 손이 기이한 신호를 만들었다.

순간,

휙! 휘휙!

무사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석두공을 포위했다.

만박노조가 말했다.

[그것은 천강검진(天綱劒陣)이다. 만약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가 분명하다면 그것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증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소.]

석두공이 딱딱하게 말했다.

만박노조는 그의 말을 묵살하고 소리쳤다.

[공격해라!]

창! 차차차창!

삼십 육인의 검객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한데 그들이 뽑은 검은 뽑는 기세로 그들의 검끼리 부딪히며 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눈이 부시게 할 정도였다.

석두공은 눈에 은은한 분노가 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살기가, 그동안 억눌러 있던 살기가 폭발하듯이 그의 몸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동복신과 동적선마저 질리게 했던 그 가공할 살기가...

[헉!]

[저 저럴 수가... ]

천강검진을 형성했던 자들이 그의 걸음에 밀리기라도 하듯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숨이 막힐 듯한 살기였다.

검성 당이정도 벌떡 일어섰다.

그와 만박노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만박노조가 삼인을 상대하겠다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강검진은 석두공 앞에서 공격한 번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석두공은 벌써 연무장의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진저리치는 살기에 억눌러 그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석두공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살기어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검성! 당세의 협객이라고? 스스로 적을 만드는 졸장부에 불과한 것을... 섭군천노선배가 불쌍하다. 저런 자를 제자라고 믿고 길렀다니...]

순간 검성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번쩍!

그는 한달음에 석두공의 앞으로 날아내리며 소리쳤다.

[네... 네가 사부님을 아느냐?]

석두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뒤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만박노조와 그를 방관하는 검성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던 것이다.

휘루루루룽!

갑자기 그의 몸 주위에 강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성은 경악하며 물러섰다.

순간,

[으하하하... ]

석두공은 분노에 찬 광소를 터뜨리며 까마득히 사라져갔다.

[윽!]

[으윽!]

백검보의 검객들이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석두공의 모습은 벌써 완전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석두공이 마지막 순간에 펼쳐보인 천신폭풍보는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간의 무공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연무장에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 얼이 빠져 버린 듯했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오직 신만이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검성의 눈이 만박노조를 찾았다.

만박노조는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서서 걸었다.

검성이 따라가며 물었다.

[어떤 무공이오? 동호천 선배의 무공이오?]

만박노조가 고개를 저었다.

[동호천 선배에게도 저같은 무공은 없었을 것이네. 인간의 무공이 아니야!]

[그럼 우리 고검문의 무공이란 말인가?]

검성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웠다.

 

비둘기 한마리가 백검보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둘기는 황산에서 멀지 않은 구화산쪽을 향하고 있었다.

 

× × ×

 

<동호천의 제자라는 자가 백검보를 찾아왔었음.

하지만 만박과 검성의 인정을 받지 못함.

척살대에 관한 말을 했음.

엄청난 무공을 소유, 만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강검진을 손 한번 쓰지않고 깨뜨렸음.

검성이 고검문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음.

동호천의 제자라고 하는 자는 가공할 신위를 보이며 날아갔음. 인간의 무공이 아님. 오직 궁주님 만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그자를 주시해야만 함.

사은(四隱)>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四 章

 

               高手刺殺隊

 

 

 

섬서성에서 발원되어 대별산맥을 따라 호북성으로 흘러드는 물이 있다.

한수(漢水)라고 불리는 이 강은 호북성에서 크게 돌아 흐르는데 그 바람에 물의 흐름이 느려져서 굴곡이 심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 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수는 곳곳에 만(灣)을 이루고 있고 그러한 곳마다 대개 하나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이 밖에서 보아 쉽게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바람을 피하기도 좋고 도적의 피해도 적기 때문이다.

또한 물살이 느리니 고기를 잡기도 좋은 강이 한수였다.

다른 곳에서는 어황이 좋지 않을 때가 있어도 이 한수는 늘 물고기가 풍족하다.

장마철이 되어 장강의 물이 역류하면 물고기들이 맑은 물을 따라서 한수로 거슬러 올라오기 때문이다.

올라올 때는 올라오지만 한수의 물은 완만하기에 그 고기들은 쉽게 장강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물살이 완만하고 굴곡이 심한 이 한수에서도 유독 한곳만은 배들이 근처에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어찌나 빠른지 물이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이다.

 

-흑성소(黑星沼),

 

맑은 물위에 있는 단 한 곳의 검은 점처럼 존재하는 곳이기에 어부들이 흑성소라고 부르는 곳...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흑성소를 지나서 있는 좁은 만은 바퀴처럼 휘어져 있으며 그속에는 무림에서 전설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는 어떤 세력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시설이 있을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구우우우!

비둘기 한마리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흑성소 위를 지나 그 뒤쪽의 좁은 골짜기로 날아들어갔다.

 

× × ×

 

[오늘 또 한놈을 보낸다고 하는군.]

[그럼 마지막 놈이로군.]

[이번놈은 자질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

방금 전해진 전서를 탁자위로 휙 던져버리며 세모난 얼굴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맞은 편에 있는 새까만 얼굴에 흰수염이 가득하고 눈만 반짝이는 노인이 말했다.

[이곳에 오는 놈들 중에서 대단하지 않다는 놈들이 있기나 했나? 실제로는 모두 그저 그런 정도일 뿐이었지만... ]

[다르다니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다 못해 물건이라도 말이야. 흐흐흐...]

세모난 얼굴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끼익!

깜둥이 노인이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보냈다고 했으니 며칠 후에야 도착하겠군. 난 놈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나 살펴보겠네.]

 

밖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깜둥이 노인이 나온 그 집만이 제법 클 뿐, 그 아래로는 마당이 하나씩 달린 작은 집들이 백여 개나 늘어서 있었다.

그 아래쪽은 강물이 들어와 있었고...

한데 노인이 나온 집을 제외하곤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또한 그 집들은 작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모두가 불에 구운 기와를 얹었으며 역시 불에 구운 벽돌과 돌을 사용해서 벽을 만든 것들이었다.

바람도 직접 받지 않는 곳에 지어졌으니 수백 년, 또는 천년을 지난다 하더라도 허물어지지 않을 것같았다.

스으...

노인은 허깨비처럼 둥둥 날아서 한채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나비가 그렇게 하듯이 그집의 울타리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쓰륵!쓰륵!

풀벌레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릴 뿐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휘익!

노인은 울타리 밖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길고 가느다란 풀잎 하나가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후우욱!

노인은 손바닥에 풀잎을 올리고 살그머니 불었다. 풀잎은 바람을 타고서 집으로 날아갔다.

한데 풀잎이 막 창을 넘어가는 순간,

파파팍!

백색도광이 솟구치며 풀잎이 수백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쌀알같은 크기로 변한 풀잎의 잔해들이 무서운 속도로 반탄되어 나왔다.

쇄애애액!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스스스!

풀잎의 잔해들은 집을 찾아 날아드는 벌들처럼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검은 얼굴의 노인은 다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여기가 연백곡(鍊魄谷)이오?]

갑자기 그의 삼장 앞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휘리리릭!

흑면노인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십여 장 밖으로 물러섰다.

[웬놈이냐?]

노인이 준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데 그가 단번에 십여 장을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 삼장 쯤에 검은 인영이 서있었다.

(이런....!)

노인은 다시 오장을 더 물러났다.

스읏!

그러나 검은 인영은 다시 똑같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아직 연락을 받지 않았소? 지금 쯤 연락이 됐으리라 생각했는데...]

[네... 네놈이 파혼검(破魂劒)이란 놈이냐?]

노인은 경악하며 물었다.

그 순간이다.

파앗!

그의 눈앞에서 은빛이 번득였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놈이라고 할 자격이 없소.]

철컥!

검이 칼집을 찾아서 꽂히는 소리가 났다.

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가슴 옷이 반으로 베어져 있었다.

(무... 무서운 놈이다.)

그는 식은 땀을 흘렸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오?]

노인은 엉겁결에 제일 아래쪽,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검은 인영이 흰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잘해봅시다.]

노인은 그제서야 검은 인영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각진 얼굴에 눈에서 턱까지 두 가닥의 검상이 있는 자였다.

검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파혼검은 터벅 터벅 자신이 배정받은 집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화석이 된듯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파혼검... 흑백쌍사(黑白雙邪)의 흑사(黑邪)인 나 우문추(于文秋)가 그의 단 일검을 피하지 못했다. 무서운 놈이다.)

 

-흑백쌍사(黑白雙邪),

 

이들은 백여 년 전 무림에서 활동했던 사파(邪派)의 절정고수들이었다.

석년의 그들은 지금의 십대 고수들에 비해서 그 성명에서 떨어지지 않던 인물들이었다.

흑사 우문추는 축쳐진 어깨로 제일 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파혼검(破魂劒),

 

그는 자기의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슴을 헤치고 무엇인가를 꺼냈다.

새까만 오죽패(烏竹牌)였다.

 

<검종(劒宗)>

 

오죽패에 홈을 파고 은(銀)을 먹여 만든 글씨, 그것은 검종맹의 신물이었다.

(후후! 석아우의 뜻과 달리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고 말았군.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파혼검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이것은 마지막 남은 필사본(筆寫本)이다. 얼마나 익히는가는 전적으로 네게 달렸다.]

세모난 얼굴을 가진 백사(白邪) 마소악(馬掃惡)이 세권의 얇은 책을 주며 말했다.

파혼검은 무심한 듯이 말했다.

[거기에 놓고 가시오.]

마소악의 눈이 새파란 살기를 뿜었다.

[네가 강하다는 말은 흑사로 부터 들었다. 하지만, 겨우 우리같은 늙은이 하나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이곳엔 너 못지 않은 자들이 적지 않다. 경거망동은 하지않는게 좋을 거다.]

[나도 한마디 하겠소. 흑백쌍사가 악독하다는 말은 들었소.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게 좋을 거요. 간밤에 이곳의 규칙을 읽어보니까 당신들은 쓸모없는 존재더군.]

파혼검이 냉소하며 말했다.

마소악이 살기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뜻이냐?]

[후후후! 당신들은 우리가 무공을 연성할때까지 뒷바라지나 하는 역할에 불과하더군.]

파혼검의 음산한 어조가 이어졌다.

[명목상의 지위야 그럴듯하지만... 아마도 우리의 무공이 연성되고 난 후엔 무용지물이 될 사람들이 당신들이지. 어쩌면 맹주는 당신들을 제거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마소악은 흠칫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맹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린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수도 있다. 맹주는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 다른 무공들을 익힐 수 없지만 우리는 삼마경을 다 보았다. 훗날, 아니 훗날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의 공력을 폐하고 삼마경을 익히기만 한다면 그들을 능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맹주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파혼검이 그의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감시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는 게 좋을 거요. 더불어, 늙은 개같은 목숨이지만 살아서 나갈 궁리도 하는게 좋겠지.]

마소악은 간이 떨리는 것같았다.

그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파혼검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재들이다.

또한 그들은 저주받은 악마의 무공이라는 삼마경을 익히고 있다.

삼마경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때까지의 내공을 완전히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직 초보적인 지금은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강해질 것이다.

검종맹주인 부운청풍객 심제을의 밀명을 받은 자가 있다면 마소악과 우문추, 두 껄끄러운 존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마소악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다.

 

파혼객은 삼마경을 펼치지 않았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가장 무서운 적은 삼마경이다. 어느 누구든 한번 빠지기만 하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악마의 무공... 이것을 익히기 보다는 파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익히기 위해 지금 공력을 폐한다면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무치무요를 익혔으니 다른사람보다 유혹에 잘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삼마경 앞에서는 나도 장담할 수없다.)

무치무요를 익혔다!

그렇다면 파혼검은 바로 금사종이란 말인가?

어쨌든 파혼검은 자신의 혈도를 스스로 눌렀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그의 혈도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책장만 넘길 수 있게 된 그는 그제서야 삼마경 중 제일 위에 놓여있는 검마경(劒魔經)을 펼쳤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十 章

 

                 사년만의 出道

 

 

“으하하하!”

창룡(蒼龍)의 울부짖음인가?

천지를 뒤흔드는 우렁찬 장소가 북안탕을 뒤흔들었다.

휘―― 익!

돌연, 자욱한 신무애의 신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폭사되어 날아 올랐다.

그 인영은 석벽을 따라 수직으로 날아 오르는데 그 빠르기가 전광같았다.

휘――르르!

삽시에, 그 인영은 신무애의 단애 위로 치솟아 까마득히 삼십 장 허공으로 치솟았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천하에 누가 이런 경공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염연히 그 인영은 절세의 경공으로 신무애를 날아 오른 것이다.

위―― 잉!

허공에서 멈칫 하던 그 인영은 방향을 틀어 단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스스스!

마침내 그 인영은 단애 위로 내려섰다.

물론, 그 인영은 제연연을 등에 업은 적연흥이었다.

“우하하핫!”

지면에 내려선 적연흥은 털썩 지면에 무릎을 꿇으며 대소를 터뜨렸다.

얼마만에 밟아 보는 지면인가?

발밑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지면의 감촉이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적연흥이건만 이 순간만은 가슴이 터지는 듯한 감흥이 솟구침을 어쩔 수 없었다.

“흑……!”

적연흥의 등에서 내린 제연연의 눈에서 뜨거운 이슬 방울이 흘렀다.

입은 분명히 웃고 있으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

적연흥의 두 눈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상공!”

제연연이 눈물을 닦으며 다가섰다.

“누님!”

“상공!”

두 남녀는 으스러져라 서로를 끌어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이 크게 요동을 침을 느낄 수 있었다.

꼭 끌어 안은 두 남녀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영원히 그대로 있을 듯이,

이윽고, 적연흥은 고개를 들어 제연연을 바라보았다.

제연연은 촉촉히 젖은 맑은 눈으로 적연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상공…… 꿈이…… 꿈이 아니겠지요?”

제연연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다는다는 듯이 묻자 적연흥은 빙그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누님, 꿈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 신무애를 빠져 나온 것입니다.”

제연연의 봉목에 다시 핑그르 물기가 돌았다.

“상공! 사랑해요! 상공!”

제연연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적연흥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누님!”

적연흥도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듯이 제연연의 교구를 끌어 안았다.

뜨거운 애정의 격류가 두 사람의 가슴을 요동치며 흘러갔다.

잠시 후, 양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만 내려 가셔야지요. 어머님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연연이 큼직한 짐보퉁이를 집어 들며 말하자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히에 찬 눈길로 신무애를 내려다보았다.

신무애에서는 여전히 꾸역꾸역 신무가 솟구치고 있었다.

‘신무애…… 너는 사년 동안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저 평범한 산촌의 아이였던 나에게 천하를 짊어질 만한 힘을 주었다.’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 오리라.’

적연흥은 천천히 돌아섰다.

“누님! 가십시다.”

“네!”

두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파――앗!

휘――잉!

일진선풍이 부는가 싶었는데 두 남녀는 이미 백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공 중의 하나인 비천어기신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초춘(初春)이건만 견디지 못할 정도로 덥군요.”

제연연이 달리며 말하자 적연흥은 미소를 지었다.

“사년 동안 극음빙천의 한기를 쏘이며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다소 시간이 지나면 몸의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야앗!”

제연연이 맑은 일갈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적연흥의 호탕한 장소가 그 뒤를 따르며 두 남녀는 오십여 장 높이의 절벽을 날아 내렸다.

“그 가죽 주머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적연흥은 제연연이 등에 메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은 한령토황우(寒靈土黃牛)의 정수를 추출하여 만든 한령지황유(寒靈地黃油)예요. 한령토황우 천근을 써서 만든 것이에요.”

적연흥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하하……언제 그런 것을 만드셨습니까?”

“출곡하면 은하궁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만든 것이었는데 예상 외로 빨리 출곡하게 되어 이것 밖에 만들지 못했어요.”

“하하……역시 누님의 성품은 참으로 치밀하십니다.”

두 남녀는 밟게 웃으며 북안탕의 험준한 산령을 날아 내렸다.

 

***

 

“으음…….”

적연흥의 입에서 침중한 신음이 흘렀다.

적연흥의 앞에는 퇴락한 초옥이 한채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적연흥과 그의 어머니가 살던 초옥이었다.

“상공, 어머니께서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나신 것이 아닐까요?”

제연연이 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밖에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셨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셨는지…….”

적연흥은 침중히 말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도 역시 오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낡을대로 낡아 있었다.

적연흥은 쓸쓸한 심정과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발길을 집밖으로 떼어 놓았다.

“아버님께 문안을 드려야 겠습니다.”

적연흥은 집뒤의 둔덕으로 올라갔다.

의외로 분묘만은 깨끗이 다듬어져 있었으며 전에는 없던 비석마저 서 있었다.

“아버님, 소자 연흥, 이제야 문안 드리옵니다.”

적연흥은 묘앞에 절을 올리고 꿇어 앉았다.

제연연도 적연흥을 따라 절을 올린 뒤 그의 뒤에 시립했다.

적연흥은 한동안 묘앞에 앉아 회상에 잠겼다.

옛날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가며 그럴 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침중해져만 갔다.

“아니…… 웬 분들이십니까?”

문득, 한 명의 노인이 둔덕으로 올라오며 말을 건넸다.

적연흥은 천천히 일어나 돌아섰다.

그의 시선에 좀 더 주름이 늘었으나 눈에 익은 한명 노인의 모습이 띄었다.

“선우 할아버님이 아니십니까?”

적연흥이 반색을 하며 정중히 허리를 굽히자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신선(神仙)같이 청수한 청년이 아는 듯이 인사를 했기 때문에.

“귀인께서 뉘신데 이 늙은이를 알아보시오?”

적연흥은 미소를 지었다.

“소자, 이 아래의 초옥에서 살던 연흥이옵니다.”

적연흥의 말을 들은 노인의 두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노인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적연흥의 얼굴에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 내었다.

노인은 덥석 적연흥의 손을 잡았다.

“그렇구먼, 우리 마을의 호신(護神)이셨구먼, 그래 그동안 어디 있었기에 마을에 한 번도 들르지 않으셨는가?”

노인이 격동에 차 말하자 적연흥도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다.

“소자 한곳의 절지에 빠져 이곳에 들를 수가 없었사옵니다. 하온데 저희 어머님께서는…….”

노인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잠시 잊었군. 사년 전 자네가 산중에서 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난 직후, 한분의 신선께서 마을에 오셔서 자당을 어디론가 모셔가셨네.”

적연흥의 뇌리에 퍼뜩 모산독군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모산의 할아버지이시리라. 모산의 할아버지께서 모셔가셨다면……무고하시겠구나.”

“그후 일 년만에 돌아 오셔서 자네 선친의 묘에 제사를 지내셨네. 그때 보니 자당께서도 마치 여신선같이 변해 계시더구먼, 그후 매년 자네 선친의 기일에 이곳에 들르셨다네.”

적연흥의 얼굴이 펴졌다.

‘모산 독성곡(毒聖谷)에 가면 어머님을 뵐 수 있겠구나.’

그는 노인에게 포권을 했다.

“할아버지.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자 노인이 완고하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무슨 소린가? 오랜 만에 마을에 돌아와서는 금방 훌쩍 떠나려는가? 자! 마을로 가세. 마을 사람들이 자네가 무사한 모습을 보면 기뻐할 걸세.”

노인이 잡아끌자 적연흥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지. 사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구나.’

적연흥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허허…… 폐라니…… 무슨 섭섭한 말인가? 자 가세 어서……”

적연흥은 노인에게 잡아끌리다시피 마을로 들어갔다.

제연연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적연흥과 노인의 뒤를 따랐다.

산중의 한촌에서는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

 

휘르르――

언뜻, 두 줄기 인영이 허공을 가로 질렀다.

정오 무렵이었다.

“누님. 잠깐 쉬어 가십시다.”

두 줄기 인영 중 하나가 표표히 지면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휘르르――

뒤미처 한 줄기 왜영이 그 뒤를 따라 내려섰다.

그들은 물론 적연흥과 제연연이었다.

그들은 사년 동안 걸치고 있던 헌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삼베로 만든 검소한 의복을 걸쳤으나 두 남녀의 뛰어난 용모는 조금도 감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깨끗한 계류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계류에 담갔다.

“총망중에 만든 옷이라 엉성하지만 산을 내려갈 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제연연이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의복은 제연연이 지난밤에 밤을 새워 만든 것이다.

그녀는 엉성하다고 말하지만 산촌의 노부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르고도 정확히 만들어진 의복이다.

“하하……아닙니다 누님, 누님이 만들어 주신 이 옷이 너무도 잘 맞습니다. 평생 입고 있으라고 해도 입을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상공.”

두 남녀의 시선이 따스하게 뒤엉켰다.

두 사람은 물가에 앉아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준 건량으로 요기를 했다.

문득, 건포를 씹고 있던 제연연이 입을 열었다.

“몇년 후면 북안탕에 고수(高手)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생기겠군요.”

제연연의 말에 적연흥은 빙긋이 웃었다.

적연흥은 자신이 살던 산촌의 청년들에게 내공심법과 만절철환연(萬絶天幻連)의 초식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에 생길지도 모를 우환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 당장에야 별 성과가 없지만 몇년 지나면 청년들이 만절천환연의 초식을 능숙히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무림에 나가도 일류고수로 통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큰 욕심이 없고 착한 사람들이라 아마 무림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요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아―― 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매우 멀리서 인 비명인지라 극히 낮았으나 적연흥과 제연연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평화스러운 곳에 혈풍(血風)이라니!”

적연흥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이곳은 아직 북안탕의 권역이다.

적연흥은 이 북안탕에서 무림인들의 분규가 이는 것이 내심 못마땅했다.

“상공! 가보시겠사옵니까?”

“가보십시다. 누님!”

“네!”

양인은 즉시 몸을 날렸다.

두 남녀의 신형은 한 줄기 선풍같이 수림 위를 날아 나갔다.

 

***

 

창! 차창……

펑…… 펑―― 펑!

“아악! 으아악!”

두 사람은 삽시에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지는 소성이 들리는 곳에 이르렀다.

“잠시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강호 경험이 많은 제연연이 적연흥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적연흥도 고개를 끄덕였다.

휘르르……

두 사람은 가지가 무성한 소나무 위로 날아 올랐다.

소나무 가까이에 여러 명의 고수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두 사람이 나무 위로 날아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두 남녀의 신법이 은밀했던 것이다.

적연흥은 은신한 채 장내를 내려다보았다.

펑――펑!

“아――악……”

“크―― 윽!”

그 순간에도 몇 명의 인물이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십여 명의 청의검수(靑衣劍手)들이 다섯 명의 혈인(血人)들과 싸우고 있었다.

한데 한눈에 보아 숫적으로 몇 배 우세한 청의검수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혈인(血人)들은 무슨 기공을 익혔는지 전신이 칙칙한 혈무(血霧)에 휩싸여 있었다.

‘저 혈무는 일종의 강기(罡氣)구나.’

적연흥은 침중한 안색으로 혈의인들을 노려보았다.

청의검수들의 검세가 혈무에 닿기만 하면 맥없이 튕겨 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으음!”

제연연의 몸이 문득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장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 저들을 아십니까?”

적연흥이 전음으로 묻자 제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검세를 보건대 청의인들은 호남(湖南)의 명문인 신검장(神劍莊)의 제자들이예요. 그리고 저 혈무에 뒤덮여 있는 자들은 전설 속의 사파인 혈무곡(血霧谷)의 인물들이예요!”

“혈무곡!”

“네, 이백 년 전에 한번 무림에 나타나 전 무림을 혈풍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이예요.”

제연연의 말을 들은 적연흥의 눈이 번뜩였다.

“아――악!”

그 순간에도 신검장의 수하들이 혈인들에 의해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안되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신검장의 검수들이 몰살당할 것 같으니 제가 도움을 주어야……”

적연흥이 일어서려하자 제연연이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이 주위에 저희 말고도 또 다른 고수가 있어요. 그가 곧 몸을 드러낼 것이예요.”

제연연의 제지에 적연흥은 물러 앉으며 급히 청력을 기울였다.

“역…… 역시……”

적연흥은 감탄의 눈으로 제연연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막강한 내공을 지닌 한 명의 인물이 은신해 있었다.

분명 적연흥의 공력이 제연연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적연흥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제연연이 발견한 것이다.

“무림에서 살아 나가는 데에는 무공보다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될 경우가 많아요. 항시 주위 환경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만해요.”

“알겠습니다. 누님.”

적연흥이 전음으로 대답할 때였다.

“호호호홋!”

돌연, 한 줄기 여인의 교소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엇?”

“앗! 누구냣?”

장내의 인물들은 황급히 손을 멈추고 물러섰다.

그때,

휘――익!

한 줄기 백영이 허공을 가르며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3장

 

           혈포단객 (2)

 

 

(읍!)

혈포단객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정신을 하얗게 표백시켜버렸다.

정말 지독한 악녀였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절세고수인 혈포단객은 그녀의 손에 의해 남성을 잃어버렸다.

[호호호호...]

청의여인은 잘라낸 것을 들고 잔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은 피로서 범벅이 되어있었다.

[천천히 죽여주마!]

청의여인은 웃음을 뚝 그치며 사악한 음성을 내뱉었다.

혈포단객의 배가 길게 찢어졌다. 

풀위로 쏟아진 내장이 꿈틀거리며 더운 김을 뿜었다.

흑의인, 즉 절대칠살의 일살(一殺)이 그 내장을 불끈 밟았다.

[나도 네놈의 천근추에 배가 터져서 죽을 번 했지. 이건 공평한 복수다.]

혈포단객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그러나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아직도 그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의여인은 그의 오른 팔을 잘라내며 말했다.

[본녀를 잘도 괴롭혔겠다. 하나하나 잘라내 나무기둥을 만들어주마.]

피가 그녀의 얼굴로 튀었다.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분이 풀리지 않겠어요.]

혈포단객의 왼팔이 비틀리며 어깨에서 뽑혀나왔다.

혈포단객은 입만 짝 벌렸을 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크흐흐흐...]

일살이 즐거운듯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청의여인이 혈포단객의 팔을 팽개치며 일살의 허리를 잡았다.

흥분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달아있었다.

그녀는 피를 보면서 강렬한 성욕을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토하며 일살의 바지를 까내렸다.

여인에게 기습을 당한 일살이 숨을 들이마셨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낮 뜨거운 장면이 벌어졌다. 

[아아! 더 빨리! 더 세게!]

여인은 일살을 힘껏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황홀한 듯 벌어진 입으로는 몸안으로 무엇이 들어오는 만큼 묘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한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발로 툭 찼다.

[...?]

섬찟한 느낌에 고개를 들면서도 그녀는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피어오른 욕구는 죽더라도 풀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다.

퍽!

일살은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는 것을 느꼈다.

[윽!]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사람을 죽이고 이걸로 잔치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뭐야? 정말 못 봐주겠어.]

돌연 소녀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낭낭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두들겼다.

한몸이 되어 눌린 자세가 된 청의여인과 일살은 피가 싸늘히 식는 것같았다.

[누...누구냐?]

퍽!

소녀의 발의 번쩍 들리워졌다가 일살의 등에 찍혔다.

“...!”

일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등판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텐데? 이 아가씨가 묻는 대로 대답이나 하시지?]

여전히 한몸이 된 채 누워있는 두 남녀를 내려다보며 소녀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가랑이를 벌린 자세로 사내에게 깔린 채 청의여인이 말했다.

[뭘 대답해라는 거냐?]

[이 짓이 재미있어?]

소녀가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치고 턱을 고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청의여인은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남녀간의 정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 구경하는 모양이구나. 이런 풋나귀들은...!)

그녀는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직접 해보기 전에는 말로 설명해줘도 모를 걸? 골이 뻥 뚫리는 것같은 느낌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어?]

[그래? 그럼 기회가 닿는 대로 나도 해봐야겠군. 하지만 넌 누구야?]

소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청의여인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건 누구의 시체지?]

[...!]

청의여인은 입이 얼어붙었다.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군. 골이 뻥 뚫려버려서 그런 모양이지?]

소녀는 돌아서서 혈포단객의 처참한 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데 혈포단객의 몸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러고도 살아있다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녀는 혈포단객의 무참한 잔해에 눈살을 찌푸리며 보다가 감탄했다.

그때 청의여인은 일살의 혈도를 풀어주며 소리없이 일어섰다.

일살의 복면속 눈알이 악독한 빛을 뿜었다.

소녀는 한쪽에 떨어진 혈포단객의 팔을 발견했다.

[이건 혈포단객의 혈천갑... ]

바로 그 순간이다.

번쩍!

일살의 검이 소리없이 그녀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파앗!

헌데 그 직후 갑자기 소녀의 허리에서 한줄기의 빛이 폭사되었다.

그것은 마치 은뱀처럼 일살의 허리를 쓸어버렸다.

그리고 그 빛은 더욱 멀리 뻗어나가 청의여인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푸악!

일살의 허리가 그제서야 두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바지도 입지 않은 하체가 흉칙한 모습으로 피속에 뒹굴었다.

그 악독하던 청의여인도 치마를 걷어올려 허연 하체를 고스란히 들어낸 부끄러운 자세로 숨이 끊어졌다.

추릿!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치켜드는 손목으로 연검이 휘감겨 들었다.

[허리보다 이게 좋을 것같군.]

그녀는 중얼거리며 혈포단객의 미심혈을 눌렀다.

혈포단객의 눈이 희미하나마 빛을 발했다.

[혈포단객이신가요? 안타깝지만 당신은 대라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아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고맙... 혈천갑... 백검보... 석두공에게... ]

혈포단객이 입술만을 달짝거렸다.

소녀는 다른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검보와 석두공, 혈천갑, 이 말들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석두공?!]

소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혈포단객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두공을 알고 있어요? 지금 어디에 있죠?]

소녀가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백...]

혈포단객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가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오객(五客) 중 한명으로 평생 다른 누구와도 상종하지 않고 외로운 늑대처럼 독행(獨行)하던 혈포단객의 어이없는 최후엿다.

소녀는 망연한 듯이 중얼거렸다.

[석두공... 석두공... 그가 살아있었어. 그렇게 찾아헤맸던 그가... 한데 왜 가슴이 이렇게 무겁고 답답할까?]

석두공을 찾아다니는 소녀, 그녀는 바로 장지연이었다.

석두공이 떠난 후 뒤따라 왔던 그녀였는데 숲에서 헤매다가 청의여인과 일살의 정사를 목격하고 다가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폭풍무존으로부터 배운 검법으로 절대칠살 중의 두 사람을 순식간에 처치해버렸다.

한데 석두공을 찾아다니면서 정작 석두공의 현재 얼굴은 알지 못하고 진짜 석두공을 만났으면서도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그녀는 혈포단객으로부터 석두공이라는 이름을 듣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뽀송뽀송한 머리털을 가진 석두공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장지연은 석두공이 살아있다는 말에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혈포단객을 묻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혈포단객이 <백>이라고 한 말은 아마도 백검보를 가리킬 것이다. 이미 백검보라는 말을 한번 한 적이 있으니까. 백검보... 석두공... 내키지는 않지만 찾아가지 않을 수 없구나. 사부님의 유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스읏!

질끈 입술을 깨문 장지연은 빠른 속도로 숲속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달려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九 章

 

              神功을 만들다

 

 

 

“이……이것은……”

제연연이 놀란 눈으로 손에 든 비급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비급은 양피지로 만든 것으로 매우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이 보였다.

 

<천후독존유록(天候毒尊遺錄)>

 

그것은 바로 모산독군이 적연흥에게 준 두 권의 비급 중 하나였다

“그 비급의 유래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적연흥이 담담히 묻자 제연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림인치고 이 비급을 지으신 분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적연흥의 눈이 빛났다.

“천후독존(天候毒尊)이란 분이 그렇게 유명하신 분입니까?”

제연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고사를 말씀드려야겠군요.”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연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근 삼백 년 전이었어요. 무림에는 전대미문의 대마종(大魔宗)이 한명 나타났었어요.”

“대마종(大魔宗)?”

“네, 그는 사상초유의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가 된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강무(康武)라는 인물이었어요.”

적연흥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대단한 인물이었겠군요?”

적연흥은 크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물었다.

 

천마대조종(天魔大祖宗) 강무(康武)!

 

최초의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로서 초유의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루었던 대마웅(大魔雄)!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적연흥의 가슴은 이유도 없이 크게 요동쳤다.

마치, 어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줄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자신과 천마대조종을 한 몸으로 묶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천마대조종의 이름이 이분을 이토록 흥분시키다니……’

제연연은 내심 놀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는 보기 드문 대장부였어요. 비록 마도의 인물이기는 했으나 호협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어요.”

제연연은 차분히 이야기를 이었다.

마도에 내려오는 천마혈령검(天魔血靈劍)에 얽힌 전설.

천마대조종이 그 천마혈경검의 주인으로 몸을 일으케 세웠고, 만마(萬魔)와 천파(千派)가 그의 발아래 굴복했으며, 천하가 마기(魔氣)로 뒤덮이리라.

우내사존(宇內四尊)이라는 기인들이 천마대조종에 도전했으나 허무하게 패하고, 드디어 사상초유의 마도천하(魔道天下)가 십년 동안 이어지다.

천하가 마기(魔氣)에 굴복하여 신음하고 있을 때, 패주했던 우내사존이 한 명의 절대기인을 강호로 불러내었으니,

그 이름,

 

-도룡천황(屠龍天皇)!

 

전설의 문파 천황문(天皇門)의 문주 도룡천황이 천마대조종과 결투.

천지변색(天地變色)!

천붕지열(天崩地裂)!

대결전의 결과는 의외로 천마대조종의 패배로 드러나 천마대조종은 울분을 터뜨리며 십년 후를 기약,

다시 십년 후, 천마대조종과 도룡천황은 어디선가 대결전을 벌인 뒤 행방이 묘연해지고,

우내사존이 이끄는 정파연합군이 마도연맹을 괴멸시켰다.

 

제연연의 이야기가 이윽고 끝났다.

“……!”

적연흥은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천마대조종, 도룡천황, 천년후에도 잊혀지지 않은 대영웅(大英雄)들…… 기왕에 든 무공일도(武功一道), 반드시 그들에 못지않은 대종사(大宗師)가 되리라.’

적연흥은 눈을 떴다.

제연연은 적연흥의 두 눈에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결의의 빛을 보았다.

“혹시 천후독존(天候毒尊)이란 고인은 우내사존(宇內四尊)의 한 분이 아니셨습니까?”

“그렇사옵니다. 천후독존께서는 우내사존(宇內四尊) 중 한 분이셨습니다.”

“우내사존(宇內四尊)의 다른 세 분은?”

“풍운검존(風雲劍尊), 독목천존(獨目天尊), 혈룡도존(血龍刀尊) 등이 바로 그분들이예요.”

적연흥은 만황독성진전(萬荒毒聖眞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금 모산 할아버지께서는 당년의 우내사존보다 배 이상 강하시겠군요?”

제연연이 말을 받았다.

“모산의 노선배께서 얻으신 독경이 바로 천후독존(天候毒尊)께서 남기신 독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마 당년의 우내사존께서 환생하신다 해도 모산 노선배님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예요.”

“오늘부터는 독공(毒功)도 익힐 것입니다. 누님께서도 마음에 있으시면 함께 익히십시오.”

“감사하옵니다. 상공.”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뒤엉켰다.

 

그날부터 두 남녀는 함께 무공을 연마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전 중에 적연흥은 무상반야금강경을 참수하고 오후에는 제연연과 함께 무공을 연마했다.

천후독존유록(天候毒尊遺錄)의 독공은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다.

독의 사용법,

해독법, 독물(毒物)을 다루는 법,

독(毒)으로 익히는 여러가지 독공 등등……

천하를 울리던 우내사존(宇內四尊)에 독술(毒術) 한 가지로 끼어들 수 있었으니만큼 천후독존의 독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후독존의 독술에 놀란 두 남녀는 모산독군이 직접 지은 만황독성진전(萬荒毒聖眞典)을 보았을 때 비로소 천외유천(天外有天)이 있음을 알았다.

만황독성진전에 기록되어 있는 독술은 독공(毒功)이 중심이었다.

가히 경천동지할 위력의 독공이 수십 가지 적혀 있었다.

그 수십 가지나 되는 독공이 하나같이 천후독존의 독공을 능가하는 데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천후독존(天候毒尊)의 최고 독공인 천후융천독강(天候隆天毒罡)은 독문사상 세번째로 강한 독공이었다.

그러나, 모산독군이 최초로 창안한 만천뢰우독강(滿天雷雨毒罡)은 천후융천독강보다 오히려 일이성 정도 강한 듯이 보였다.

모산독군이 최후로 창안한 것은 무형심독강(無形心毒罡)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이름하여,

 

<만황패멸독강인(萬荒覇滅毒罡印)>

 

독공(毒功)을 한 줄기 무형의 독강인(毒罡印)으로 만들어 천지사방(天地四方)으로 발출 할 수 있다.

과연 그 위력이 미쳐지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모산독군 자신도 완전히 펼쳐본 적이 없으므로.

고금이래 만황패멸독강인에 비견될 수 있는 독공은 한 가지가 있다.

독문의 조종인 만독노조(萬毒老祖)!

그가 남긴 최고 절대의 독공(毒功)!

 

<파라살황독강류(破羅薩恍毒罡流)>

 

만황패멸도강인과 더불어 유일하게 무형심독강(無形心毒罡)의 경지에 이른 독공.

지금까지는 독문제일독공(毒門第一毒功)으로 공인되어 온 독공이지만 아깝게도 실전되어 전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실상 만황패멸도강인은 천하제일의 독공(毒功)이다.

두 사람은 만년화룡(萬年火龍)의 시신을 해부하여 만년화룡이 지니고 있던 화독(火毒)을 꺼내 나누어 복용하고 독공을 연마했다.

화독 한 가지로는 독공을 연마하기에 많은 부족함이 있었으나 신무애에는 달리 독물(毒物)이 없으니 별 도리 없었다.

제연연은 천후독존의 독공을 주로 연구했다.

모산독군의 허락이 없었으므로 경솔히 모산독군의 진전을 연마할 수 없기 때문에.

제연연이 독의 사용법, 해독법 등에 몰두할 때 적연흥은 독공 중심으로 연마해 나갔다.

독공을 익히는 한편 적연흥은 음산잔마가 전수해 준 천잔경(天殘經)을 연마했다.

천잔경을 지은 천잔수(天殘叟)는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다.

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말도 못할 수모를 겪으며 살아야했다.

결국, 주위 환경이 그의 성품을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극히 편협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을 멸시한 모든 사람을 저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세상에 한을 품은 한 기인(奇人)의 손에 거두어져 무공을 연마했다.

그의 오성은 극히 뛰어나 불구를 극복하고 일신에 뛰어난 무공을 지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불구라고 멸시하고 천대했던 세상 사람들에게 잔혹한 살수를 펼쳤다.

그의 눈에 벗어나는 자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비단 그 자신뿐만 아니라 친인조차도 천잔수의 살수에 피를 뿌려야했다.

자연, 원수는 많아지고 무림전체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천잔수는 언제 어디에서 죽음의 마수가 덮쳐들지 모르는 강호를 용케도 헤집고 다녔다.

수십 차례나 죽음직전에서 빠져 나오곤 하였고 그럴 수록 그의 성품은 점점 더 편협 잔악해져갔다.

또한, 한 번의 위기를 넘길 때마다 그의 무공은 강해져만 갔다.

모두가 그의 뛰어난 오성 때문이었다.

결국, 천잔수가 강호에 발을 들여 놓기 일갑자, 무림천하에는 더 이상 천잔수의 적수될 고수가 없었다.

젊었을 때는 천방지축으로 무림을 휘젓고 다녔던 천잔수도 나이가 들며 주름살이 늘어가자 성격이 변해갔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무림에 벌려놓은 것이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다 천하를 뒤져도 자신과 맞설 적수도 한명 없는 그 고독감, 천잔수의 최후는 그렇게 쓸쓸히 끝이 났다.

그러한 천잔수의 무공이 담긴 천잔경(天殘經)!

자연히 극히도 실전적이며 잔혹한 수법이 기록되어져 있었다.

무공의 성격이 이러한데다가 천잔경은 외팔 외다리의 인물만이 연마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 때문에 적연흥은 천잔경의 연마를 보기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음산잔마의 배려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는 어려움을 무릅쓰며 천잔경을 연마했다.

그러나 막상 익히려니 그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도 없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반만 사용하려니 이것도 저것도 되지를 않았다.

그냥 남아도는 한팔 한 다리가 걸리적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좌충우돌하는 적연흥을 제연연은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멀쩡한 팔다리를 무엇 때문에 놀리시옵니까? 나머지 팔다리도 함께 사용하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제연연의 말을 들은 적연흥은 퍼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렇지, 이 팔다리를 쓸데없이 둘 필요 없지.”

그래서 그는 나머지 팔다리로도 다른 쪽의 팔다리가 펼치는 무공을 똑같이 펼치려 하였다.

자,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적연흥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좌충우돌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띄었다.

때로 관망하던 제연연의 두 눈이 핑핑 돌아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도대체 무공인지 발광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상공, 아니되겠사옵니다. 천잔경은 접어 두시고 미천하나마 저희 은하궁 무공을 연마하시옵소서.”

보다 못한 제연연이 말렸다.

그러나, 그 무렵 적연흥은 그 미친 짓거리같은 행동 속에서 서서히 무엇인가를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연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없이 발광하는 듯한 행동을 계속했다.

원래, 무상반야금강경(無常般若金剛經)은 한 가지 전무후무한 불문선공(佛門禪功)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무상반야금강선공(無常般若金剛禪功)>

 

이것이 소림(少林) 최강의 선공인 것이다.

천년 세월을 거치면서 누구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절대선공(絶代禪功)!

이것이 적연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호신(護身)의 묘용이 있는 무상반야선강(無常般若禪罡)과 공격의 묘용이 있는 금강항마신강(金剛降魔神罡)으로 나뉘어진다.

금강항마신강(金剛降魔神罡)은 패도(覇道)적인 강맹함을 지녔다.

금강(金剛)이라 함이 본래 가장 강함(强)을 항마(降魔)란 모든 마(魔)를 누른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금강항마신강(金剛降魔神罡)은 가히 무적(無敵)이라 할 만큼 강했다.

이에 반하여 무상반야선강(無常般若禪罡)은 지극히 유(柔)하며 그 심오함이 끝이 없었다.

이에는 수많은 묘용이 있어 모든 마로부터 심신을 보호해준다.

그중에 분광혜심대법(分廣慧心大法)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을 가능케 해주는 기상천외의 대법이었다.

적연흥은 이 분광해심대법의 묘리를 터득해감에 따라 어떤 영감이 스쳐갔다.

즉, 천잔경(天殘經)상의 무공초식은 한 팔과 한 다리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분광혜심대법으로 양팔 양 다리를 다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적연흥의 끈기와 뛰어난 심지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적연흥의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제연연은 그저 탄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났을 때, 천잔수의 무공은 적연흥의 손에 의해 완전히 개편되었다.

그 위력은 천잔수가 환생한다 해도 기절초풍하고 말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그 새로운 무공은 장(掌), 검(劍), 지(指), 수(手), 각(脚), 경(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되었다.

만절천환연(萬絶天幻連)이라 이름붙인 이 무공수법은 천하에서 가장 복잡난해한 수법일 것이다.

적연흥은 만절천환연을 다듬으면서 제연연에게 가르쳤다.

한령토황우를 장복하여 뛰어난 혜지를 지니게 된 제연연이건만 만절천환연(萬絶天幻連)에는 두손 들고 말았다.

자신이 최초로 창안한 무공인지라 적연흥은 만절천환연에 각별히 애정을 쏟았다.

그는 끝없이 만절천환연의 일천백사십구초(一千百四十九招)의 변화를 갈고 다듬었다.

기어코 천하제일의 복잡다단한 무공을 만들겠다는 듯,

 

***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일까?’

제연연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적연흥을 바라보았다.

지금, 적연흥은 신무애의 석벽을 마주 보고 좌정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벌써 오일 째 저 상태로 계시니 옥체에 누가 가시지나 않으실지……’

제연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기이하게도 제연연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나날이 젊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떨어질 때 사십대로 보이던 그녀였건만 지금은 이십 오륙 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를 않았다.

모두가 한령토황우를 장복한 때문이다.

‘이미 이곳에 떨어진 지도 사 년이 흘렀다.’

제연연은 문득 가득히 운무가 낀 천공(天空)을 바라보았다.

사년(四年)!

이미 사 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적연흥의 나이 이미 이십 세가 되어 완전히 성인이 되었다.

그의 무상반야금강선공은 구성(九成)의 경지에 이르렀다.

만절천환연이란 절기를 창안한 것도 이미 이년 전의 일.

모산독군이 남긴 독문의 진전도 이미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공(內功)을 기르는 외에 미친듯이 서로를 탐하는 일밖에 없었다.

제연연으로서는 적연흥이 있는 한 이 신무애의 절지도 낙원이었다.

하지만, 적연흥은 그렇지 못한 듯, 요즈음 그는 한껏 우울해지고 말수가 적어졌다.

하기는 이제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필요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일 전, 적연흥은 돌연 신무애의 한쪽 석벽을 마주하고 앉아 면벽에 들어갔다.

이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것이 오래이건만 적연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러니 자기 몸보다 적연흥이 소중한 제연연으로서는 안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연흥의 면벽을 중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일까? 무엇이 천하제일의 기재이신 저분을 저토록 고심하게 만드는 것일까?’

제연연은 총명한 여인이다.

문득, 한 가지 짚이는 일이 있었다.

“무상반야금강선공은 극히 미미한 진보를 보임으로 서두를 일이 아니다. 저분이 고심할 단 한 가지 문제는 바로……이곳을 탈출하는 일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연연의 가슴은 급격히 두근거렸다.

‘저분이 혹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어떤 단서라도……?’

제연연은 묘한 심정이 되어 적연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 자신도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하지만, 이곳을 나간다면 사랑하는 적연흥은 더 이상 그녀의 독점물일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별 수 없는 일 아니냐?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할 것, 하루 빨리 저분의 뜻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빌 뿐이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으하하하핫――!”

거창한 장소가 신무애를 뒤흔들었다.

“상공!”

제연연의 환성이 터졌다.

그녀의 눈앞에, 태산같은 기개를 지닌 영준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인물.

바로 적연흥이었다.

“상공! 뜻을 이루셨사옵니까?”

제연연이 달려가자 적연흥은 그녀의 섬섬옥수를 꼭 쥐었다.

“그렇습니다. 누님, 드디어 이곳 신무애를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적연흥이 다소 격동에 찬 목소리를 말했다.

“역……역시……!”

제연연의 두 눈에 까닭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작은 가슴은 흥분으로 크게 불룩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셨사옵니까?”

제연연이 섬섬옥수로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찍어 누르며 물었다.

“만절천환연(萬絶天幻連)을 창안할 때부터 생각하던 것입니다. 만일 허공에서 두세 번만 진기를 바꿀 수 있다면 신무애를 날아 오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연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지만 허공에서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로 어떻게 진기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적연흥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소제가 면벽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그럼 방법을 찾아 내셨다는 말씀……?”

“그렇습니다. 분광혜심대법(分廣慧心大法)을 응용하여 일종의 양심신공(兩心神功)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제연연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무림에는 전설적으로 심신을 양분할 수 있다는 양심신공(兩心神功)이 있다고 전해왔다.

그러나 그것은단지 전설일 뿐인데 적연흥이 그것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 양심신공(兩心神功)!”

“놀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무상반야금강경 중의 분광혜심대법은 양심신공보다도 더 고차원의 대법이었습니다. 소제는 단지 이를 약간 변형시켰을 따름입니다.”

적연흥은 제연연을 안은 채로 절벽 위로 가리켰다.

“양심신공으로 공력을 좌우(左右)로 나눈 뒤 우선 한 쪽의 공력만으로 비천어기신법을 펼치는 것입니다.”

제연연이 그말을 받았다.

“연후에 반대편의 공력을 이용하여 다시 날아 오르고 그사이 나머지쪽의 공력을 보충하고……”

“하하……그렇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사부님께 인사 드리고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하십시다.”

제연연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그……그렇게 해요. 첩신은 조금 준비할 것이 있사옵니다.”

“서두르십시오.”

“네!”

제연연은 눈물을 닦으며 달려갔다.

제연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적연흥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생각하면 더할 수 없이 긴 사 년이었으나 이제 막상 떠나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 지는군.’

적연흥은 신무애를 휘둘러 보았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절지였으나 너무나 정이 든 풍경이었다.

“어머님께서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 궁금하구나. 병환이나 심해지신 것은 아니신지……”

적연흥은 동굴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부님과 환영비천신 선배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다.”

적연흥의 몸도 곧 짙은 운무 사이로 사라져갔다.

 

<一卷 끝>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八 章

 

      둘만의 樂園

 

 

 

잠시 후, 무허선사와 환영비천신의 시신을 매장하고 나자 제연연은 동굴 안을 깨끗이 손질하였다.

그리고 극음빙천에서 건진 백호피(白虎皮)를 바닥에 깔아놓자 동굴 안은 제법 아늑했다.

시장기가 돈 그들은 한두 개씩의 한령토황우를 먹었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무어라할 수 없는 은은한 향기와 맛이 있었다.

두 사람은 곧 동굴 안에 들어와 마주 앉았다.

그들 앞에는 예의 옥함이 놓여 있었다.

“환영비천경(幻影飛天經)부터 보십시다.”

적연흥은 두 권의 비급 중 다소 얄팍한 환영비천신의 비급을 꺼내 들었다.

“환영비천신은 고금을 통털어 가장 경공이 뛰어났던 기인 중 한 명이예요. 환영비천경의 무공은 이 절곡을 빠져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예요.”

두 사람은 환영비천경을 펼쳐 들었다.

 

<환영미리신보(幻影迷漓神步)>

 

환영비천경의 첫머리에 적힌 무공이었다.

이는 보법(步法)으로 소위 일반인들이 말하는 분신술(分身術)이라는 것이었다.

신형(身形)을 단번에 삼십육 개로 나눌 수 있으며 일시지간 모습을 감출 수도 있는 가공한 절기였다.

본시 음흉한 환영비천신은 강호행도시 누구에게도 그 위력의 반 이상을 펼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허선사 외에는 그 누구도 환영비천신의 옷자락 하나 건들이지 못했다.

하나, 그 음흉함이 화근이 되어 신무애 위에서 무허선사에게 강력한 일장을 맞고 이곳으로 떨어져야 했다.

즉, 만일 그가 전력을 다해 환영미리신보(幻影迷漓神步)를 펼쳤다면 무허선사의 천수미허신장(千手彌虛神掌)이 아무리 천지를 뒤덮는 절기라 해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실력을 반푼 정도 숨겼고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환영미리신보 외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무공과 잡술들이 섞여 있었다.

그런 것들은 무림행도시에는 큰 도움이 되겠으나 지금 당장은 별 의미없는 잡기였다.

쓸만한 무공은 거의 끝쪽에 적혀 있는 세 가지였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무공이었다.

 

<환영분뢰강지(幻影分雷罡指)>

 

가히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은밀한 지공(指功)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무공이다.

빠르고 은밀한 뿐만 아니라 한 자 두께 철판도 관통하는 강한 면도 있는 절세의 지공(指功)이었다.

 

<만환천영술(萬幻天影術)>

 

희대의 기만술이라할 기공(奇功)이다.

비단 얼굴 모습을 제멋대로 뒤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변성술, 변체술 등등……

상대가 누구라도 본인도 구별 못할 정도로 변환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위기 어떤 상황에서도 빠져 나올 수 있는 요결이 환영비천신의 경험으로써 기록되어 있었다.

 

<비천어기신법(飛天馭氣身法)>

 

환영비천경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최고의 경신법이다.

한 모금 진기로 백 리를 날아갈 수 있다는 절세의 경공인 것이다.

신무애를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공이다.

환영비천경(幻影飛天經)을 살펴본 두 사람은 소림사 최고선공이 실려 있다는 두툼한 경전을 집어 들었다.

 

-무상반야금강경(無常般若金剛經).

 

“이것은 불교경전 아닙니까?”

제목을 읽어본 적연흥이 고개를 갸웃 하며 제연연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군요. 금강경(金剛經)의 일종인 것 같으니…… 내용을 보시지요.”

제연연의 말에 적연흥은 경전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곤혹스런 표정은 더욱 짙어가기만 했다.

소림(少林)제일의 선공비급이라 하여 광세신공의 구결을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경전의 내용도 역시 심오한 불교의 법리가 기록된 것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혹시 모르니 소제는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옵소서. 하여튼 소림의 제자가 되셨으니 불법(佛法)에 대해서도 아셔야 하니까요. 첩신은 잠깐 나갔다 오겠사옵니다.”

제연연은 목욕이라도 할 생각으로 조용히 동굴을 나섰다.

혼자 남은 적연흥은 정좌한 후에 정신을 가다듬고 무상반야금강경(無常般若金剛經)의 참수에 들어갔다.

본시 읽기를 좋아하던 적연흥인지라 곧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이해 못할 일이 일어났다.

적연흥은 경전을 넘김에 따라 점차 몸속에서 강렬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힘은 아주 극강(極强)하면서도 끝없이 넓어 그 유심(幽深)함이 가이없는 그런 힘이었다.

경전의 장을 넘김에 따라 그 기운은 더욱 성(盛)해 갔다.

그무렵 적연흥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적연흥의 전신에서 서서히 찬연한 서광(瑞光)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서광은 어떠한 사악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그런 것으로 처음에는 그 농도가 엷었으나 점차 적연흥의 전신을 가릴 정도로 짙어졌다.

마침내 적연흥의 일신은 완전히 서광으로 뒤덮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적연흥 자신은 이미 무아지경에 들어 그러한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그의 몸이 기이한 형상을 취하고는 하였다.

자세히 보면 때로 나한(羅漢)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왕(天王), 보살(菩薩), 관음(觀音), 심지어 불존(佛尊)의 형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멋!’

일각 후 목욕을 마치고 물기젖은 촉촉한 모습으로 동굴에 들어서던 제연연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경악성을 급급히 되삼켜야 했다.

동굴 전체가 성스런 서광(瑞光)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 광채는 부드러운 가운데 두 눈을 찌르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어 감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또한 그 서광은 접하는 이로하여금 지극히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효능이 있었다.

‘상공께서 어떤 인연을 얻으셨음에 틀림없다. 겉보기에는 그저 불교경전에 불과한 무상반야금강경(無常般若金剛經)의 어디엔가 상공을 기다리고 있던 큰 안배가 있었으리라.’

제연연은 내름대로 추측하며 조용히 동굴을 물러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적연흥은 무심한 눈빛으로 무상반야금강경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문득, 무심하기만 하던 적연흥의 두 눈이 이채를 띄며 빛났다.

그곳에 몇 자의 글이 적혀 있음을 본 때문이다.

 

<인연있는 자만이 뜻을 얻으리라. 인연이란 석존(釋尊)께서 베푸시는 큰 빛(光明)에 이어지나니 결코 강제로 탐하지 말 것이며 서두르고 조바심 내어 얻어질 것이 아니니라.

불기(佛紀) 구백 팔 년(九百八年) 달마(達磨).>

 

미소가 번진다.

적연흥의 옥안에 더할 수 없이 맑고 부드러우며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소가 감돈다.

염화미소(艶花微笑)가 이러하리라.

적연흥은 무상반야금강경을 덮었다.

점차 그의 몸에서 서광이 사라져 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얻으려하면 얻을 수 없고 얻지 않으려 하여야 얻을 수 있다니……”

적연흥은 미미하게 미소지었다.

무상반야금강경(無常般若金剛經)은 한 권의 불교경전이면서 그 자체에 선공(禪功)의 묘의를 지니고 있었다.

달마(達磨)이래 수많은 고승들이 무상반야금강경을 해인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경전의 자구(字句)에 연연하여 그중에서 어떤 뜻을 찾으려 한 때문이다.

하나 그런 상태에서는 백번 천번 보아도 무상반야금강경은 그저 단순한 경전일 뿐이다.

아무것도 원함이 없고 무엇인가를 얻으려 연연함이 없는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심정으로서만 비로소 무상반야금강경의 의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적연흥은 무상반야금강경이 선공비급임을 믿지 않았으므로 단지 소림의 제자 된 몸으로서 불교경전을 접해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무상반야금강경을 참수했다.

그 때문에 그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상반야금강경에 비장된 큰 뜻을 깨달은 것이다.

그 뜻을 깨달은 것은 전체 중의 극히 일부이며 피상적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연흥의 일신에 지극히 강한 힘이 충만해 있었다.

“모든 것이 조사님의 은혜이시다.”

적연흥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 제연연이 조용히 들어섰다.

들어오던 제연연은 아찔함을 느꼈다.

적연흥이 자신을 바라보며 극히 무심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이분, 그 능력이 대해(大海)와 같이 넓으시고 창공(蒼空)과 같이 높으신 분이 나의 지아비시다.’

제연연은 가슴 벅참을 느끼며 조용히 적연흥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적연흥은 미미하게 웃으며 제연연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제연연은 살포시 눈을 감으며 적연흥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갔다.

 

* * *

 

“비천어기신법(飛天馭氣身法)은 분명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는 절세경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적연흥이 제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적연흥은 완전히 성인(成人)같이 자라 있었다.

체구가 더 커졌음을 물론이려니와 그의 전신에서는 범접키 어려운 성스런 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오면 상공께선 비천어기신법을……”

제연연이 놀란 눈빛으로 우러러보며 물었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년 동안 저는 무상반야금강경을 참수하는 외에 비천어기신법(飛天馭氣身法)만을 익혀 이미 더 갈곳이 없는 정도로 익혔습니다.”

“아……”

제연연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는 경외스러움과 자랑이 담긴 눈빛으로 적연흥을 올려다보았다.

제연연에 있어서 적연흥은 태산(泰山)이며 태양(太陽)이었다.

‘이분의 능력은 어디가 끝일까? 나는 이제 겨우 사성(四成) 정도밖에 익히지 못한 비천어기신법을 극에 달하도록 연마하셨다니……’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령토황우(寒靈土黃牛)는 여인이 복용할 시에 만효(萬效)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혜지(慧智)를 극도로 높여 주는 것이다.

지금, 제연연의 혜지는 신무애에 떨어지기 전보다 십 배 이상 높아져 천하를 통틀어 가장 지혜로운 여인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연흥은 여전히 그녀보다 세 배 이상 뛰어난 것이다.

“비천어기신법이 극에 달한 지금 소제는 일시에 백여 장을 날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제연연은 놀라운 기색을 지으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거에 백 장을 뛰어 오를 수 있다니……

천하에 누구에게라도 물어 보아라.

누가 사람의 몸으로 백 장을 뛰어오를 수 있다고 믿겠는가?

적연흥은 침중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비천어기신법으로도 이 신무애를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제연연의 표정도 어둡게 변했다.

“신무애의 절벽이 그리도 높사옵니까?”

“그렇습니다. 누님. 가장 높은 곳이 오백 장이 족히 되고 가장 낮은 곳이라도 삼백 오십 장이 됩니다. 소제가 사력을 다해 신법을 펼친다면 이백 장이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만 그 이상은 불가능 합니다.”

“석벽 어디엔가 발을 붙일만한 곳이라도……”

적연흥은 고개를 저었다.

“석벽 전체가 강철같이 굳고 동판같이 굳은 청옥석(靑玉石)으로 이루어져 발을 붙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연연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첩신이야 상공과 함께라면 이곳에서 백년 천년 살아도 괜찮사옵니다만 상공께서야 큰 뜻을 펴실 대붕(大鵬)이시니……”

적연흥이 미소 지으며 제연연의 어깨를 잡았다.

“하하……대붕(大鵬)이 날개가 생긴다면 이정도 절곡이야 금방 날아 갈 수 있지 않습니까? 걱정마십시오.”

제연연은 적연흥의 가슴으로 파고 들며 눈을 감았다.

“상……상공, 사랑받고 싶어요. 사랑해 주세요.”

제연연은 다른 사람이 보면 기겁을 할 정도로 대담하게 적연흥의 사랑을 구했다.

이곳은 두 남녀만의 세상,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무공을 익히고 서로를 사랑하는데 몰두하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두 남녀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정열이 일며 사랑의 행위를 하였다.

세속의 인간들이 보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짓거리라고 힐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하하…… 누님, 누님 한 분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적연흥은 제연연의 농염한 몸을 번쩍 안아들고 두 사람의 보금자리인 동굴로 향했다.

곧, 동굴 속에서는 제연연이 환희에 떨며 흐느끼는 교성이 흘러 나왔다.

뜨거운 열풍은 점점 거세지고 제연연의 흐느끼는 비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실, 만년화룡의 내단과 단화를 흡수한 적연흥은 그대로 불(火)의 화신(化身)이었다.

그 강렬함과 뜨거움은 제연연 혼자 몸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종종 제연연은 적연흥과의 관계 후에 한동안 운신도 못하곤 하였다.

너무나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연연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또한 늘 그렇게 당해야만 이곳 신무애 하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녀의 공력이 비록 기고하다고는 하지만 극음빙천의 한기를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늘상 적연흥으로부터 전해받은 열양지기(熱陽之氣)로 극음지기(極陰之氣)를 견디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극음빙천의 중간에 솟아있는 극음(있는

극음한령석(極陰寒靈石)에서 한 가지 절대기공(絶代氣功)을 연마하고 있었다.

극음한령석은 천지간에서 가장 강한 한기를 지니고 있다.

그 한기를 몸속으로 흡수하여 한 가지 기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적연흥은 그런 그녀에게 조금도 아끼지 않고 열양지기를 전해준다.

사실 그는 만년화룡의 내단과 단화의 상당 부분을 용해하여 자신의 공력으로 삼았다.

그의 공력 이미 제연연과 비슷한 지경에 이르러 있으나 그가 용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부분은 전체 중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빙산일각(氷山一角)이랄까?

 

일각 후, 열풍은 가라앉고 아늑한 피로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대강 몸을 가린 적연흥은 아직도 환희에서 못 깨어나는 제연연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 신무애를 빠져 나가는데 대해서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늦어도 십년 이내에는 빠져 나갈 수 있으니까.”

적연흥이 삼단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제연연은 촉촉히 젖은 눈을 떴다.

“어떤 방법이라도 있으시온지요?”

적연흥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 소제는 무상반야금강경을 삼성(三成) 정도 참수한 상태입니다.”

제연연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천어기신법을 일 년만에 완성하신 상공께서 겨우 삼성 정도 밖에 못 이루실 정도로 무상반야금강경이 난해하옵니까?”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이라면 몇백 년 걸려도 그 진전이 힘든 절대선공이지요. 반면 무상의 위력도 있으나 갈 수록 난해해지니 무상반야금강경을 연성하는 데는 저라고 해도 최소한 십 년의 세월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경지는……”

“심어제행(心御制行)의 경지로서 마음만으로 천 리(千里)를 날아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제연연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적연흥을 우러러 볼 뿐이다.

“억지로 서두른다 해도 진전이 빨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내일부터는 모산의 할아버지와 음산의 할아버지께서 주신 비급도 연마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어…… 어머……상공…… 첩신은 더 이상…… 못…… 견디…… 아아……”

제연연의 자그마한 나신이 다시 적연흥의 우람한 체구에 눌려 버렸다.

“상공……그만……”

제연연이 발버둥쳤으나 적연흥은 태산같이 눌러왔다.

또다시 뜨거운 열풍이 동굴 안을 후덥지근하게 메웠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二十三 章

 

          血袍單客 (1)

 

 

 

(틀림없이 그 여인이다. 소림사로 가던 중에 만났던...!)

석두공은 혈포단객의 뒤를 유유히 쫓아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쐐애액!

혈포단객의 앞으로는 한사람의 여인과 네 명의 흑의인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 중 여인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석두공은 자칫 그녀 때문에 죽을 뻔 한 적이 있는 것이다.

잔혼각(殘魂閣)의 절대칠살(絶代七殺)의 한명인 그녀는 그때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석두공의 평정심을 흔들어놓았었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여체의 은밀한 구조, 게다가 사내의 흉칙한 물건이 그곳을 쑤셔대며 유린하는 장면을 보며 석두공은 그만 정신이 흐트러지고 말았고,

그 결과 잔혼살객의 사신겸(殘魂鎌)에 심장을 찔려 자칫 죽을 뻔 했었다.

헌데 그때 그 요사한 계집이 동료들과함께 혈포단객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네명의 사내는 바로 절대칠살중 살아남은 네명이었다.

 

휘이익!

청의여인과 절대칠살의 생존자들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혈포단객은 숲으로 들어간 적은 쫓지 않는다는 강호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들어갔다.

여름의 숲은 입과 가지를 무성하게 펼쳐놓았고 그 사이로 다섯 사람은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

혈포단객은 형형한 눈초리로 사방을 살폈다.

숲으로 스며드는 붉은 저녁 노을에 나뭇잎들이 피로 물든 듯이 보였다.

스윽!

혈포단객은 소매를 걷어올렸다. 소매 속에서 드러난 손은 그의 옷이나 마찬가지로 피처럼 붉었다.

그것은 붉은 장갑이었다.

[혈천갑(血天匣)에 오랫만에 피를 먹이게 되었군.]

혈포단객은 살기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나무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의 힘찬 발걸음에서 강렬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강기의 막이 그의 몸을 공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혈포단객의 무공도 전보다는 훨씬 강해진 것같군.)

석두공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의 청력으로도 다섯 사람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풀은 무릎까지 자라있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루는 빛과 그늘은 눈앞을 아롱지게 만들었다.

혈포단객은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귀로는 팔방을 들으며 한발한발 걸어나갔다.

스윽!스윽!

그는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하지만 풀벌레 소리들 조차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직 고요만이 깃든 숲속은 혈포단객 같은 고수에게도 심장이 조여드는 긴장을 주었다.

긴장의 도가 높아지고 신경이 팽팽이 당겨짐에 따라서 그의 발소리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는 무릎까지 자란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을 밟고 나아가고 있었다.

초상비(草上飛), 초상비의 경공술이었다.

숲 안에는 넓직한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한쪽에 수 백 년은 됐음직한 고목(古木)이 있었다.

“...!”

혈포단객의 눈에 번개불 같은 섬광이 비쳤다.

고목은 굵기는 수 아름이 되지만 크지는 않았다. 가지는 앙상하고 가운데는 썩어서 구멍이 파여있었다.

하지만 몇 개의 푸른 입은 아직도 그 나무가 고사목(枯死木)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번쩍!

갑자기 혈포단객의 발아래서 강렬한 백색 섬광이 한가닥 솟구쳐올랐다.

[흥!]

혈포단객은 미끄러지듯 옆으로 반보 물러서면서 왼발로 섬광을 차버렸다.

팍!

또한 그의 몸이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뚝 떨어졌다.

푹!

[으악!]

그의 가경할 공력이 실려있는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나!]

혈포단객은 웅혼하게 내뱉으며 고목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스스스슷!

풀 위를 낮게 날면서 흑의복면인이 검으로 그의 다리를 베어왔다.

바다위로 배가 지나간 듯이 풀들이 갈라졌다.

혈포단객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파앗!

붉은 빛이 한순간 번쩍하고,

휘리리리!

흑의인은 풀위를 뒹굴어 혈포단객의 혈천갑에서 뿜어나온 강기를 피했다.

푸앗!

혈천갑의 강기에 격중된 풀들이 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쏴아아!

하지만 흑의인은 여전히 혈포단객을 향해 베어오고 있었다.

[제법....]

혈포단객은 살기어린 음성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핑!

깡!

흑의인의 검이 부러졌다.

스스스슷!

흑의인은 귀신처럼 빠르게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고목 쪽으로 일부의 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람이 그쪽으로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차앗!]

혈포단객은 한줄기 홍영(紅影)이 되어 고목나무를 향해서 쇄도해들었다.

그 순간에 흑의인은 고목나무의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으합!]

혈포단객이 무시무시한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횡으로 그어졌다.

스파앗!

붉은 강기가 고목나무로 파고들었다.

그그그그... 쿵!

고목나무가 반듯하게 베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뒤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흑의인의 등이 보였다.

 

석두공은 공터의 다른 나무 위에서 혈포단객의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저 한 수는 아주 멋지군. 나무를 벨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큰 나무를 베어 그 뒤에 있는 적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먹기는 어려울 것인데...]

한데 흑의인이 쓰러진 그곳엔 또 다른 시체가 있었다. 마른 풀과같은 빛의 청의를 입은 가날픈 몸매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시체의 머리는 몸에서 두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청의여인, 석두공이 소림사로 갈 때 만났던 여인이며 또한, 석두공이 객점에서 부터 쫓아온 그 여인이었다.

[...?]

석두공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혈포단객의 손에 죽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동료가 죽였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천천히 날아올라 고목의 뒤로 돌아갔다.

한데,

[헛]

석두공은 무심코 눈을 돌리다가 숲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머리를 볼 수가 있었다. 젊은 여인의 머리였다.

하지만 그 여인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셋인가?]

스읏!

혈포단객은 나직하게 내뱉으며 청의여인의 시체를 지나치고 있었다.

석두공은 크게 외쳤다.

[위험하오!]

그때였다.

파파팟!

혈포단객의 뒤에서 흑의인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쐐애애액!

이미 그의 손에서 두자루의 비수(匕首)가 발출된 후였다.

혈포단객은 석두공의 외침과 흑의인의 기습에 흠칫했으나 콧웃음을 쳤다.

[가소로운... ]

카캉!

두자루의 비수가 그의 호신강기에 부딪히며 깨어졌다.

휙휙!

날아오른 흑의인은 다시 두자루의 비수를 던졌다.

혈포단객은 비수엔 신경도 쓰지않고 흑의인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와우우웅...

수 백 개의 손그림자가 생기면서 흑의인을 뒤덮었다.

흑의인은 몸을 팽이처럼 돌리며 회오리 바람처럼 움직여 허공에서 이동했다.

펑펑펑펑!

하지만 혈포단객의 손그림자는 그의 몸을 공처럼 두들겼다.

헌데 그때였다.

스팟! 찌이익!

두자루의 비수가 그의 호신강기를 찢으며 들어왔다.

혈포단객의 두눈이 부릅떠졌다.

[놈!]

그는 황급히 혈천갑을 휘둘려 비수를 쳐갔다.

퍼억!

하지만 비수는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비스듬히 틀어지며 그의 어깨에 박혔다.

그 비수는 호신강기마저 찢어버리는 특별한 병기였던 것인데 호신강기와 부딪히면서 방향이 틀어졌던 것이다.

팍!

혈포단객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붉은 그의 혈포가 더욱 검붉게 변했다.

나머지 하나의 비수는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쿵쿵!

혈포단객은 두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눈앞에는 자신의 혈천갑의 수공에 격중된 흑의인의 시체가 폭죽처럼 터져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하나 남았군.]

그는 어깨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읏!

그는 문득 자신의 뒤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옆으로 몸을 미끄러 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함정이었다.

펑!

흙더미가 눈앞에 치솟으며 그의 몸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에 혈포단객은 옆구리가 화끈해옴을 느꼈다.

청의여인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

혈포단객의 눈이 부릅떠졋다. 청의여인은 분명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채 쓰러져 있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혈포단객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그녀의 몸은 온전했다. 머리만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몸으로 생각했던 머리없는 여인의 시체는 여전히 누워있었고 청의여인의 목이 놓여있었던 곳에는 웅덩이가 파여있었다.

청의여인은 바로 그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목만 남은 시늉을 한 것이었다.

[속았구나.]

콰창!

혈포단객은 버럭 소리치며 혈천갑을 휘둘렀다.

순간 청의여인의 웃을듯 말듯하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미처 가라앉지도 않은 흙더미 속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오며 혈포단객의 팔을 찔렀다.

[멈춰라!]

쐐액!

석두공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날아갔다. 그의 손바닥에서 파란 불꽃이 발출되었다.

순간 혈포단객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모조리 죽여주마!]

꽈르릉!

그의 혈천갑이 돌연 방향을 돌려 석두공을 쳐갔다.

“헛!”

석두공은 깜짝 놀라 자신의 상화장(翔華掌)을 거둬들이며 혈천갑을 피했다.

그리고 즉시 두가닥의 지풍을 날렸다.

핑핑!

탄지신통(彈指神通)이었다.

[욱!]

[크윽! 큭!]

세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혈포단객은 석두공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알고 전력을 다해서 그를 방비했다.

그리하여 흙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을 막지 않았다. 그 검은 호신강기가 흩어진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팔에 뼈가 드러나도록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또한 청의여인은 그의 옆구리에 검을 더욱 깊이 찔렀다.

그러나 그를 공격했던 두 사람도 석두공의 탄지신통에 맞아 혈도가 제압당한 상태였다.

석두공은 혈포단객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퍽!

혈포단객의 혈천갑이 흑의인의 두개골을 깨뜨려버렸다.

그리고 엽구리를 찌르고 있는 검을 뚝 부러뜨려 뽑아낸 다음에 석두공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석두공의 머리카락은 정상이 아니다. 마치 갖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노르스름하면서도 뽀송뽀송하다. 아주 잘생긴 미청년이기는 하지만 이상해 보이기는 어쩔 수 없었다.

석두공이 말했다.

[석두공입니다. 오년전 동정호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순간 혈포단객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도가 제압되어 화석처럼 굳어있는 청의여인이었다.

부러진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 석두공인가?]

혈포단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석두공이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선 몸을 돌보도록 하시지요.]

[어느 구석에 숨어있다가 이제서야 나왔는가?]

혈포단객은 스스로 혈도를 눌러 지혈시키며 물었다.

석두공이 청의여인을 보면서 대답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 여인의 도움이 컸던 것같더군요.]

“...!”

청의여인은 파랗게 질린 채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혈포단객의 표정이 확 변했다.

[무슨 뜻인가?]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이 여인에게 유인되어 잔혼살객과 부운청풍객에 의해 절벽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살아나왔으니까요.]

석두공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혈포단객이 물었다.

[지금 천하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대충은... 그런데 어쩌다가 이자들을 만나게 됐습니까?]

[그렇지, 깜박 잊을 뻔 했군. 그 육시를 할 세놈들이 또 다시 힘을 합쳤네. 부하들 중에서 고수들을 뽑아서 척살대(刺殺隊)를 조직한다는군. 만리어옹(萬里漁翁)이 내게 그 말을 전해주고 이놈들에게 죽었어.]

혈포단객은 흉광을 발하면서 말했다.

만리어옹이라면 장강의 곳곳,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노인이다. 한 자루의 묵철간(墨鐵竿)을 병기로 사용하며 구구팔십일의 팔십일초 어룡간(魚龍竿)은 일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만리어옹은 우연히 잔혼각과 검종맹, 그리고 적룡혈운도가 연합하여 전문적으로 고수들만을 죽이는 척살대를 조직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잔혼각의 절대칠살에게 쫓기던 만리어옹은 혈포단객을 만나 그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리어옹은 결국 절대칠살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또한 절대칠살은 사실을 알고 있는 혈포단객마저 이중 삼중의 덫을 꾸며서 암살하려했던 것이다.

혈포단객이 말했다.

[무림이 단결해야만 하네. 그놈들은 악마의 무공이라는 삼마경(三魔經)을 익히고 있네. 무림첩(武林帖)이라도 띄워져야만 할 걸세.]

[척살대라면... 설마 무림에서 고수들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그런....]

[그게 아니라면 척살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혈포단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리어옹의 말로는 그들 척살대의 하나하나는 삼마경중에서 필요한 무공은 어떤 것이든 배울 것이라고 했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척살대란 자들이 삼마경을 익히는게 사실이라면 그자들에게 지목되고서도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혈포단객의 말이 이어졌다.

[그자들이 연공을 끝내고 나오기 전에 검종맹 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천하는 영원히 그 마귀같은 세놈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일세.]

[...!]

석두공의 얼굴도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혈포단객이 두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천하제일인이셨던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유일한 제자. 만약에 자네가 무림첩을 뛰워서 무림인의 단결을 호소한다면 아마 거역할 사람이 그다지 없을 것일세.]

[...]

석두공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당장 백검보로 가게. 일초진천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도 단독이기는 하지만 삼인에 대항하고 있네. 가능하면 그와도 힘을 합치는 것이 좋을 것일세.]

[일초진천수는 저의 의형인 금사종입니다.]

석두공의 말에 혈포단객은 희색을 띄었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 잘됐군. 어서 가보게.]

[한데 이 여인은...]

석두공이 청의여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혈포단객이 말했다.

[작은 것에 매이지 말게. 이 계집은 내가 심문하겠네.]

혈포단객의 혈천갑을 낀 우수가 청의여인의 목을 잡아갔다.

석두공은 무언가 미진한 기분이 들엇다. 그의 비상한 본능이 어떤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혈포단객의 말이 워낙 완강한 지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대로 떠났다.

백검보,

백검보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부운청풍객등이 만든다는 척살대가 무림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들을 분쇄시켜야만 한다.

쐐애액!

석두공은 한줄기 빛살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혈포단객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청의여인의 다리가 땅에 떠서 바둥거렸다.

[잔혼각의 살수냐?]

혈포단객은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올린 채 물었다.

“...!”

청의여인은 눈알이 빨갛게 되어갔다.

뚜둑!

혈포단객은 손아귀에 힘을 더욱 가하며 물었다.

[잔혼각의 살수냐?]

청의여인은 숨도 재대로 쉬지 못하고 입술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혈포단객의 창백한 얼굴은 마치 저승사자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냉혈한이기라도 하듯 혈포단객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며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잔혼각의 살수냐?]

[끄륵 끄륵!]

여인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혈포단객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그는 청의여인에게서 죽고싶은 의지마저 박탈해버릴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여인의 몸이 빨래줄에 걸린 빨래처럼 흐느적거렸다.

갑자기 혈포단객은 손을 풀어버렸다.

스르르...

청의여인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눈빛은 망연하고 동자가 빛을 잃고 풀려있었다.

혈포단객의 음성이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악마의 음성처럼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척살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을 말해라.]

청의여인의 입술이 달짝거렸다.

혈포단객은 그녀의 혈도를 풀었다.

[처 척살... ]

청의여인은 완전히 이지를 잃어버리고 들릴 듯 말듯한 음성을 흘러냈다.

휘청!

한데 그 순간에 혈포단객의 몸이 갑자기 휘청했다.

[웃!]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 혈포단객은 흔들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푸른 풀밭이 그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풀썩!

혈포단객은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같이 무거워지면서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청의여인의 얼굴과 불과 세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쓰러져 있었다.

[척살대는... 운... ]

청의여인이 실성한 듯이 우물거린다.

[일곱째! 말할 필요없다.]

돌연 혈포단객이 쓰러진 곳에서 삼정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분명히 죽였는데... ]

혈포단객은 입밖으로 겨우 나오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흑의인이 일어난 곳은 혈포단객이 처음 암습을 받았던 그곳이었다.

혈포단객의 천근추(千斤錐)에 의하여 죽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물, 그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뚜껑이 열려진 납작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혈포단객! 산공독(散功毒) 맛이 어떤가? 내 아우들을 죽인 후이니 더욱 맛이 있었을 거다.]

흑의인은 혈포단객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파앗!

그는 청의여인의 마혈을 풀어주고 비수를 뽑아들었다.

[크흐흐흐... 더욱 신나는 맛을 보여주마. ]

[휴우... 휘우... ]

청의여인은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더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으왕! ]

청의여인은 눈앞에 있는 혈포단객의 코를 물어뜯었다.

[크윽!]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는 혈포단객의 코가 걸레처럼 뜯어졌다.

[퉤!]

여인은 입에든 코의 조각을 뱉어내며 새파란 살기를 발했다.

[개새끼! ×을 뽑아버리겠다.]

청의여인은 흑의인의 손에서 비수를 뺏어들며 소리쳤다.

쫘악!

혈포단객의 옷이 길게 찢어졌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七 章

 

         奇緣을 만나다.

 

 

 

“흑흑흑……”

여인이 운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자그맣고 둥그스름한 어깨가 끝없이 파문을 일으키고, 얼굴을 파묻은 무릎으로부터 맑디맑은 이슬이 발끝으로 구른다.

‘어찌해야 하는가?’

적연흥은 안절부절 못하고 제연연의 주위만 뱅뱅 돌 뿐이다.

한바탕의 열풍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들끓던 열기도 지금은 저녁호수같이 잠들었다.

한독(寒毒)에 사경을 헤매던 제연연은 이제는 조금도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추위하지 않는다.

한 번의 정사가 양인에게 큰 이득을 주었다.

적연흥은 전신에서 요동치던 열기를 제연연에게 배출하고 극강한 열양지기(熱陽之氣)를 전신 심맥으로 유입시켰다.

반면, 제연연은 능히 백년공력(百年功力)에 비견되는 양기(陽氣)를 적연흥으로부터 받았다.

너무나 강렬한 적연흥의 그것에 생사현관이 녹아 버리고 전신의 기맥이 대로(大路)같이 활짝 열렸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경지가 우연한 기연(奇緣)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웬지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제연연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면 그녀도 대답을 못하리라.

그저 우는 것 뿐이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통스러워 우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녀는 운신하기도 힘들게 격심한 상처를 가장 은밀한 곳에 입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우는 것은 그 상처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놀랍게도 삼십에 이른 제연연은 그때까지도 처녀지신(處女之身) 이었다.

지면에 묻은 붉은 앵혈의 흔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파과(破瓜)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희(歡喜)이고 열락(悅樂)이다.

그 때문에 울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과 허전함이 제연연의 전신을 휘감는 것이다.

“으음……!”

적연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털―― 썩!

적연흥은 제연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님! 소제를…… 죽여 주십시오.”

그리고는 끝이었다.

적연흥은 제연연의 발끝에 머리를 갖다대고 요지부동이었다.

“흑…… 흑…… 흑……”

제연연의 울음소리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소리가 낮아지더니 마침내 뚝 끊어졌다.

기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

“……!”

제여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홍조띈 상아빛 뺨과 촉촉히 젖은 두 눈, 요염하리만치 붉은 두 입술이 철석간장이라도 녹일 듯 뇌살적이다.

‘이…… 이 아이는…… 어른이구나. 나이로만 보아 아이로 믿었건만…… 내가 만난 어떤 사내보다도 훌륭한 장부(丈夫)다. 몇백, 몇천의 여인이라도 거느릴 수 있는……’

제연연의 눈길이 점차 변해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그것이었으나 이제는 사내를 바라보는 아낙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장차 은하궁(銀河宮)은 이 아이…… 아니 이분에 의해 크게 빛을 발하리라.’

그녀의 눈길이 다소 안타깝게 변했다.

‘이제는 나의 그이만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제연연은 천천히 섬섬옥수를 내밀어 적연흥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눈을 뜨고 첩신을 보시옵소서.”

제연연의 말에 적연흥은 천천히 눈을 떴다.

파―― 앗!

두 남녀의 눈길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

“……!”

이윽고, 제연연이 살포시 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떨구었다.

순종(順從)의 뜻을 나타냄이리라.

제연연은 나직하고도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첩신은…… 상공을 탓할 수 없사옵니다. 상공께서 첩신께 또 다른 생명을 주시려 한 일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다만 소첩을 버리지만 말아주시옵기를……”

적연흥은 제연연의 뜻을 알았다.

“누님!”

그의 우람한 두 팔이 제연연의 개미허리를 힘 있게 안았다.

“아……상…… 상공……!”

제연연의 나신이 활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적연흥의 우람한 몸 밑에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제연연을 뒤덮었다.

그녀의 교구는 적연흥의 태산같은 힘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가냘펐다.

문득, 제연연은 곧 찍힐 엄청난 고통의 낙인이 떠오르자 두려움이 치솟았다.

“아…… 상…… 상공…… 아직은…… 아아…… 제발……”

그러나, 난폭한 군주는 여인의 의사는 아예 무시해 버렸다.

“아―― 악!”

파과(破瓜)의 그것보다 더한 고통이 제연연을 강타했다.

거의 까무러칠 듯한 고통이 하복부로 파고 들었다.

마치 예리한 보검으로 회를 치는 것같은 고통이었다.

“누님……!”

적연흥은 성난 광풍같이 몰아치고 제연연은 한 마디 애처로운 먹이가 되어 흐느끼며 학대받았다.

“아아아……”

언제부터인가?

고통의 비명은 점차 환희와 신음으로 윤색되어 가고 있었다.

검은 맹호와 아리따운 암사슴의 처절하도록 강한 움직임이 무인지경의 신무곡을 가득 메웠다.

 

* * *

 

“이 사람은 태호(太湖)의 흑사채(黑蛇寨)의 채주인 흑사신편(黑蛇神鞭) 채윤(彩潤)이란 인물이예요.”

제연연은 한 명의 흑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적연흥과 제연연 앞에는 네 구의 시신이 뉘어져 있었다.

그들은 절벽이 무너질 때 함께 떨어진 무림인들이었다.

제연연은 날카로운 인상의 삼십대 장한의 시신에서 하나의 검은 빛이 도는 채찍을 풀어내었다.

“이것이 채윤의 성명무기인 흑사편(黑蛇鞭)으로써 그의 흑사칠십이로(黑蛇七十二路)의 편법은 강호일걸이라 불리어요.”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의 무공은 낭심수사에 비하여 어떻습니까?”

“글쎄요. 낭심수사는 장법(掌法)과 수법(手法)을 주로 익혀 흑사신편과의 비교는 어렵지만 아마 비슷할 거예요. 다만 낭심수사쪽이 공력상 다소 우세하니 결국 장기전에 들어가면 낭심수사가 이길 거예요.”

제연연은 두번째 인물 앞에 섰다.

그 인물은 청수하게 생긴 중년문사로서 등에 한 자루 보검을 메고 있었다.

“이 인물이 상공께서 말씀하신 낭심수사와 함께 무림오사(武林五士)에 드는 인물이에요.”

“흐음…… 그래요?”

“네, 신검수사(神劍秀士) 상관청(上官靑)이란 인물로서 무림오사의 두번째 고수예요.”

적연흥은 신검수사의 등에서 보검을 풀어내었다.

보검의 길이는 세자 여섯치로 손잡이 부분이 상아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보검이었다.

“한번 뽑아 보시와요. 무림사대신검(武林四大神劍) 중의 하나로서 비상(飛霜)이라하는 명검(名劍)이옵니다.”

적연흥은 비상검을 잡고 힘주어 뽑았다.

스르릉――

맑은 용음(龍吟)과 함께 싸늘한 한기가 골수에 미쳤다.

“비상(飛霜)이라…… 과연 대단한 예기를 지녔습니다.”

적연흥은 감탄하며 한 차례 검을 휘둘러보았다.

그 자세가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인지라 제연연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그 검은 주인보다 더 유명한 보검으로 강철을 무우 베듯 하옵지요.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신검수사의 양의검법(兩儀劍法)정도 펼치는데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신검이옵니다.”

“무림사대신검(武林四大神劍)이란 어느 어느 명검을 말함입니까?”

적연흥이 비상검을 회수하며 물었다.

“먼저 사대신검의 수좌는 오백 년 전의 기인이신 태백성군(太白聖君)께서 사용하시던 태백신검(太白神劍)이옵니다. 일설에 의하면 태백신검이 한번 검집에서 나오면 방원 십장 이내가 얼음으로 뒤덮여 버린다고 하옵니다.”

적연흥이 약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제연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과장됨이 없지는 않겠지만 태백신검에 태백천음기(太白天陰氣)가 실려 있음은 천하가 인정하는 일이옵지요.”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번째는 무당파의 진산보검인 칠성신검(七星神劍)이옵고 세번째가 비상(飛霜), 네번째가 천산(天山) 용문장(龍門莊)의 비검(飛劍) 금혼(金魂)이옵니다.”

적연흥이 비상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천하에는 수많은 보검(寶劍)과 명검(名劍)이 있지 않습니까? 거궐(巨闕)이 있고 간장(干將), 막야(莫耶) 등 춘추오대명검 등이 있거늘 어찌하여 비상(飛霜) 등만으로 사대신검(四大神劍)을 칭할 수 있습니까?”

“상공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무림의 전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사대신검보다 훌륭한 보검들은 많사옵니다. 하나 사대신검을 세운 기준은 당금 천하에 존재하는 검들에서 세운 것이지요. 거궐, 간장, 막야, 어장, 태아, 경영 등의 전설 속 보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에서 사라져 나타나고 있지 않사옵니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나머지 이들은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제연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명은 녹림인 무리이고 다른 한 명은 청성파의 속가제자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옵니다.”

“그럼 이제 이들을 매장해야 되겠습니다. 조금 물러서 계시지요.”

“네!”

제연연이 물러서자 적연흥은 극음빙천(極陰氷泉)에서 찾아낸 도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것은……?”

땅을 파던 적연흥이 고개를 갸웃 하며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마치 참마 갈이 생긴 덩어리인데 땅속 여기저기에 묻혀 있었다.

“줄기도 없는데 땅속에서 이런 덩이뿌리가 자라다니 이상하군요?”

제연연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적연흥은 급히 천후독존유록을 펼쳤다.

‘저 비급이 모산독군께서 상공께 주신 독경(毒經)인 모양이구나.’

제연연은 내심 생각했으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적연흥 뿐이므로……

적연흥은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여기에 있군요.”

적연흥은 자신이 먼저 읽어보고 제연연에게 건네주었다.

“한령토황우(寒靈土黃牛), 지극음기(地極陰氣)가 모이는 곳에 자생한다. 지극음기를 흡수 극히 천천히 자라는데 백 년 이상 되어야 주먹만해진다.”

제연연은 비급에서 시선을 떼고 적연흥이 땅을 파내며 캐놓은 한령토황우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주먹보다 크고 깊은 곳에서 파낸 것일 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놈은 족히 몇천 년은 되었겠습니다.”

적연흥이 땅속 깊이에서 머리통만한 것을 캐내어 웃으며 말했다.

제연연은 계속 읽어갔다.

 

<이를 장복하면 백독(百毒)이 불침하게 되고 정기(精氣)를 튼튼히 해주며 특히 여인에게는 만 가지 효능(效能)이 있는바 그중의 한 가지가 영원히 젊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읽은 제연연은 뛸듯이 기뻐했다.

그녀 역시 미모를 생명보다 더 아끼는 여인이므로,

잠시 후, 적연흥이 네 구의 시신을 매장했을 때는 한령토황우가 수북이 쌓였다.

“이 신무애를 언제 빠져 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야 할 지도…… 어쨌든 식량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제연연이 두 볼을 상기시키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첩신은 상공과 함께라면 이곳에서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이라도 지낼 수 있사옵니다.”

적연흥은 따스한 눈길로 제연연을 바라보다가 팔을 벌렸다.

그러자 제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연흥에게 안기며 스스로 적연흥의 입술을 찾았다.

두 남녀는 긴긴 입맞춤을 하며 서로를 굳게 부둥켜 안았다.

“누님, 고맙습니다.

이윽고 입술을 뗀 적연흥이 그윽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하자 제연연은 푹 고개를 떨구었다.

적연흥은 정열이 담긴 눈으로 제연연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홀로 계신 어머님을 돌봐드릴 사람이 없음이로다. 아! 어머님께서는 불효한 이놈 때문에 걱정하심이……!”

돌연 고개를 들던 적연흥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뚫어져라 호수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상…… 상공, 무슨 일이시옵니까?”

제연연이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적연흥을 바라보았다.

“누님! 저쪽 맞은편 석벽을 보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아연했다.

“상…… 상공께서는 저 운무너머의 석벽이 보이시옵니까?”

적연흥이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공력이 이갑자하고도 반이나 되시는 누님의 안력으로 저 운무가 장애가 되십니까?”

제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첩신의 공력이 다섯 배로 급증했다고는 하나 그저 흐릿하게 맞은편에 석벽이 있다는 정도밖에 볼 수 없사옵니다.”

적연흥의 고개가 갸웃 했다.

“흠, 그럼 내 눈이 이상해졌나?”

그런 적연흥의 모습을 보며 제연연은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무공을 익히지도 않으신 분의 시력이 이정도시라니…… 만일 이분이 무공을 익히신다면…… 무적이 되시리다.’

그녀가 생각하는데 적연흥이 제연연의 허리를 안아 등에 업었다.

“어머멋! 상공!”

제연연은 입으로는 귀성을 토했으나 몸은 적연흥의 넓은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하하 누님도……이곳에 누가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님은 아직 걸음을 옮기시기 불편하실 테니 소제가 저곳까지 업고 가겠습니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얼굴을 홍시같이 붉히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이갑자 반, 즉 백 오십 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제연연, 그녀가 왜 걸음을 걷기에 불편할까?

모를 일이다.

“하하…… 누님! 갑시다!”

적연흥은 제연연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씨―― 잉―― 씨―― 잉!

칼날이 스치듯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멋!”

고개를 들었던 제연연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적연흥의 달리는 속도는 대단했다.

신무애에 추락하기 전보다 몇 배 빠른 것으로 전에 제연연이 전력을 다해 펼치던 경공에 버금가는 속도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누가 믿겠는가?’

제연연이 내심 혀를 내두르는데 적연흥은 이미 오 리 정도를 달려 그들이 처음에 섰던 곳의 반대쪽에 이르렀다.

“누님 보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석벽을 바라보던 제연연은 깜짝 놀랐다.

“어머! 동굴(洞窟)이 있었군요.”

그렇다.

적연흥이 맞은편에서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큼직한 동굴이었다.

동굴은 지면으로부터 이 장 정도 높이에 뚫려있는데 제법 컸다.

“올라가겠습니다.”

제연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뛰어올라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적연흥은 그녀의 말에 껄껄 웃었다.

“하하……이곳에 떨어지기 전에도 이 장 정도는 뛰어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신에 장강대하와 같은 힘이 끝없이 솟으니 능히 오 장이라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자꾸만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구나.’

제연연은 내심 놀라면서도 흐뭇했다.

왜냐하면 적연흥이 자신의 지아비이므로……

“갑니다!”

적연흥은 일갈하며 지면을 박찼다.

파―― 앗!

슈―― 웃!

제연연을 업은 적연흥의 몸이 가볍게 날아 올랐다.

“웃!”

돌연, 동굴로 들어서던 적연흥의 몸이 흠칫 굳었다.

“독……독물이라도 있사옵니까?”

제연연은 겁이 나서 안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누님. 잠깐 내려 주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조심조심 바닥에 내려섰다.

대체 동굴 안쪽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제연연이 의아해 하는데 적연흥이 갑자기 동굴 안쪽을 향해 부복하는 것이었다.

“미생 적연흥 감히 두 분의 선거(仙居)에 들어 어지럽혔습니다. 두 분의 영령께서는 널리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연연은 적연흥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시력을 돋우어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의 두 눈도 크게 치켜 떠졌다.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 깊이는 겨우 오 장 정도였는데 동굴 끝의 석벽 앞에 두 구의 좌화한 시신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적연흥은 그 시신들에게 절을 했던 것이었다.

시신 중 왼쪽에 있는 시신은 회색가사를 걸친 승려의 시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구의 시신은 청포를 걸친 음산해 보이는 인물의 시신이었다.

‘아! 이 신무애에 우리보다 먼저 닿았던 인물들이 있었다니……’

제연연이 놀라는데 적연흥이 조용히 돌아섰다.

“누님, 저 두 분께서 최후를 마치신 안식처이니 그냥 나갑시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이 적연흥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상공께선 저 두 분의 신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시지도 않으시옵니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저 두 분은……”

“두 분께선 어쩌면 저희들이 읽기를 바라시고 어떤 단서라도 남기셨는지 모르는 일 아니옵니까? 나가시더라도 잠시 살펴보신 뒤에 나가시옵소서.”

제연연이 이끄는 바람에 적연흥은 제연연과 동굴 깊숙이로 들어갔다.

‘놀랍구나. 좌화한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듯 하건만 시신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니…… 아마도 이 두 분은 생존시에 내공이 초극에 이르러 계셨을 것이다.’

제연연이 놀라는 사이 적연흥은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장방형의 옥함이었는데 옥함의 뚜껑에 글이 적혀 있었다.

적연흥과 제연연은 옥함에 상배를 한 뒤에 조심스럽게 옥함에 적힌 글을 읽었다.

거기에는 놀라운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노납의 법명은 무허(武虛)라고 한다. 후일 천운으로 이곳에 드는 자가 있을까하여 이글을 적는다……>

 

“무... 무허!”

옥함에 적혀있는 글을 읽은 제연연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누님께선 이 분을 아시옵니까?”

제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아요. 이분은 오백 년 전에서 사백 년 전까지 생존하셨던 소림사상 최강의 고승(高僧) 중 한 분이셨어요.”

“소림사의 고승이셨군요.”

제연연의 표정은 극히 엄숙하고도 공손하게 변했다.

“이 분은 소림 십팔대 장문인이 되실 분이셨으나 스스로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시는 성품임을 깨달으시고 장문인의 보위를 자신의 사질에게 양위한 미담은 유명해요. 당시에 무림에는 절대미문의 대혈겁이 발생했었어요.”

적연흥은 침중한 표정으로 제연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천살교(天煞敎)라는 한 방파가 저지른 혈겁으로, 그들은 천하패권을 위해 중원천하를 혈란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때 이분 노선사께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셔서 천살교를 타도하셨다고 해요.”

“으음, 승인이라기보다 대협객이 되시는 것이 어울리셨을 분이셨군요.”

“네, 당시까지만 해도 구대문파의 성망이 대단하여 이분이 주도하신 구파연합군은 천살교를 괴멸시킬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일전으로 구파가 격심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말예요. 그후 이분의 행방이 묘연하셨는데 이곳에서 입적하셨군요.”

적연흥은 무허선사의 좌화한 시신을 우러러 보았다.

과연 덕망있는 노선사라기보다는 마치 나한(羅漢)같이 위맹하게 생겼다.

양인은 다시 옥함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살교(天煞敎)를 괴멸시키기는 했으나 구파연합군의 구축을 이루었던 본사의 타격은 극심하였다. 이에 노납은 본사의 재건에 절치부심을 하였다.

그러던 중 노납은 불사 최고최강(最高最强)의 선공(禪功)이 도적의 손에 의해 장경각에서 반출되어 무림으로 유출되었음을 알았다.

대노한 노납은 강호로 나와 그 도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이곳 북안탕의 산역(山域)에서 그 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 자는 야천신투(夜天神偸)라는 자였는데 알고 보니 그 자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 선공(禪功)을 빼내었던 것이다.>

 

적연흥과 제연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림(少林) 최강의 선공(禪功)이라면 무엇을 말함입니까?”

적연흥의 물음에 제연연은 자신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금까지 알려지기로는 광명법신(光明法身)과 불영수미선강(佛影須彌禪罡)등이었아오나 이글을 보니 그 두 가지 선공보다 더 강한 선공이 있었던 것 같사와요.”

“계속 읽어 봅시다.”

 

<…… 야천신투가 위경에 처하자 그 사주자가 나타났다. 한데 놀랍게도 그 인물은 천살교(天煞敎)에서 교주 천살마신(天煞魔神)에 이어 제 이인자이던 환영비천신(幻影飛天神)이라는 자였다.

결국 일대 이의 대격전이 벌어졌다. 노납은 야천신투는 격살하고 선공(禪功)을 회수할 수 있었으나 환영비천신과 겨루다가 어이없게 둘이 함께 이 괴곡(怪谷)으로 추락했다.

그후 노납과 환영비천신은 간신히 목숨은 구했으나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점점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에 만일 후인이 이곳에 닿게 되면 노납이 못다 했던 일을 이루어주기 바란다.

즉 이 옥함을 소림사(少林寺)에 전해주기를 바란다. 이 안에는 본사 조사령(祖師令)과 회수한 선공비급(禪功秘笈), 그리고 환영비천신(幻影飛天神)의 절기가 수록된 환영비천경(幻影飛天經)이 들어 있다.

만일 그대가 이미 섬긴 사문이 있다면 환영비천경을 그대에게 주겠으며 만일 아직 사문이 없다면 소림(少林)의 제자로 받아줄 수도 있다. 소림을 사문으로 섬기겠다면 노납에게 배사지례를 하고 조사령을 받들도록 하라.>

 

제연연이 환히 웃었다.

“상공 잘되었습니다. 이제 무공을 익히셔야 하니 기왕에 사문을 갖는 바에야 천년전통의 소림을 사문으로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옵니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다시금 무허선사의 시신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올린 연후에 그는 조심스럽게 옥함을 열었다.

과연 옥함 속에는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고 하나의 자옥불상(紫玉佛像)이 놓여 있었다.

그 자옥불상이 바로 조사령으로 소림장문인이 갖고 있는 장문령(長門令)인 녹옥불령(綠玉佛令)마저 제어할 수 있는 조사령이었다.

그 권위가 이러함으로 대개 조사령은 장문인의 일대 스승이 지니게 되어 있다.

“소림 제 십구대 속가제자 적연흥 조사령을 배알합니다.”

적연흥은 다시 조사령에게 삼배를 올린 연후에 조사령을 조심스럽게 간수했다.

‘후훗, 되었다. 당금 소림의 최고 장로의 혜자돌림이 이십 육대 제자, 장문인 법현(法賢)방장께서 이십칠대 제자이니……상공께서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신 분이 되셨다.’

제연연은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여자들의 소견머리라니……

적연흥은 조사령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사부님과 이분 노선배님의 유해를 안치해야 되겠습니다.”

제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2)

 

 

까딱!까딱!

물살은 점점 느려지고 반대로 강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강물에 담긴 파란 하늘에는 한점 두점 구름들이 떠가고 그 구름들 위로 조그마한 나룻배가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물결에 배가 까닥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따라 노를 저어 배를 조종하는 사람이나 뱃머리에 앉아서 턱을 고이고 있는 사람이나 덩달아 까닥까닥하고 있었다.

한데 배를 젓는 사람은 뽀송뽀송한 솜털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준수한 미청년이었다.

또한 그의 앞쪽에 앉아서 턱받침을 하고 있는 사람은 깜찍한 소녀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배도 참 잘 움직이네요. 언제 이런 것까지 배웠어요? 아참참. 무공도 한번만 보면 다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이런 걸 묻다니... 난 하는 수 없는 가봐.]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을 톡톡 두드리는 소녀, 그녀는 장지연이었다.

석두공은 못들은 척 그저 물위로 흘러가는 구름그림자를 보면서 노를 흔들었다.

장지연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봐요. 구결도 없이 어떻게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거죠?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휴... 정말 당신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오. 왜 날 그냥 좀 내버려 두지 못하오?]

석두공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장지연이 피식 웃었다.

석두공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사부께서 당신에게 그 검법을 알 때까지 가르치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랬다면 벌써 도망쳤겠다는 말이군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장지연이다.

[그렇소. 난 성가신 건 질색이오. 휴... 소령이 옆에 있을 땐 신경 쓸 일 하나 없었는데... ]

말하던 석두공은 무심코 소령을 생각해내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행동이 종잡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소령은 그를 잘 돌봐주었다.

잠자리에서 시작해서 세숫물까지 하나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석두공은 그녀를 사랑하는지 않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없다는 것은 아주 허전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의 마음은 단 한 번의 정사를 가진 자봉에게 모두 주어버렸다고 하지만...

이때 장지연은 눈에 기이한 열기를 담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물었다.

[소령이 누구죠? 당신의 정혼녀인가요? ]

[그렇진 않소.]

[그럼 누이인가요?]

[아니오.]

석두공은 자꾸만 묻는 그녀가 성가셔서 딱 잘라 말했다.

장지연은 잠시 있다가 그에게 또 물었다.

[그럼 그녀는 당신에게 무엇이죠?]

[...!]

[같이 잠을 자기도 했나요?]

[...!]

석두공이 대답이 없자 장지연은 발딱 일어섰다.

[그래요. 나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요. 나도 지금 정혼자를 찾아다니는 중이거든요. 그도 숯덩어리 당신처럼 무슨 무공이든 한번 보기만 하면 다 배워버리는 사람이죠. 너무 기고만장할 것 없어요.]

[정혼자를 찾아다닌다고? 정혼자가 장소저를 거들떠보기나 할지 모르겠군.]

석두공은 그녀가 정혼자를 찾아다닌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장지연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왜요? 무슨 악담을 그렇게 해요?]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성가시게 하니 정혼자는 얼마나 괴롭히겠소? ]

석두공은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싶었는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흥!]

장지연은 콧웃음을 쳤으나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석두공은 그녀가 당연히 반박할 줄 알았다가 가만히 있자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사귀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활달하면서도 붙임성있는 장소저를 아주 좋아할 지도 모르겠소.]

장지연은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냐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어서 그 검법의 구결이나 알려주세요.]

[이런 걸 구결이라 하는 지는 잘 모르겠소만, 펼치려면 이렇게 해야하오.]

석두공은 겸염쩍어져서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검의 끝을 진기로서만 움직이려면 먼저 몸속의 진기가 혈도마다 조금씩 달라야 하오. 또한 한편으로는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를 검끝까지 뻗쳐가게 한 후에 다른 한편으로는 몸 안에서 진기를 운용해야만 하는 것이오.

몸 안의 진기의 움직임이 단전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단전에서 뻗쳐나간 진기를 유동시켜 검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오. 이기어검의 요체는 오직 여기에 있을 뿐이오.

검이 손안에 있던 없던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소. 또한 몸 안에서의 진기 움직임은 조금만 연습해 보면 스스로 터득할 수 있소. 대저 무공이란 것이 걸음마와 같아서 방법만 알게 되면 어느 정도로 느는 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오.]

장지연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해요? 검강의 발출 말예요? 검기만 해도 웬만한 고수는 흉내도 못내는 데 어떻게 검강을 발할 수 있죠?]

석두공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기어검도 마찬가지지만, 일단은 충실한 내공이 있어야하오. 그리고, 원래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힘을 여럿으로 나누었다가 어느 순간에 합치는 것이 최고요.

일부의 내공을 먼저 검에 주입하는 것이오. 그것도 검의 표면에. 그 다음에 나머지의 공력을 모두 검의 중앙으로 내쏘는 것이오. 두개의 공력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때 합쳐서 내밀게 되면 검강이 될 수 있소.]

장지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순수하게 한 가지 내공만 익힌 사람은 검강이나 어검술을 펼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진 않소. 단지 그렇게까지 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되오.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그 정도가 되면 힘을 나누었다가 합치는 방법만 터득하면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오.]

장지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통검문에서 검강이나 어검술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문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짐작일 뿐이오.]

장지연이 또 물었다.

[초식이 필요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가요?]

[그것은 느낀다는 것이오. 눈으로 보아서 알고 귀로 들어서 알고 직접 만져보아서 안다면 그것은 상승의 경지에 달하지 못한 것이오. 눈으로 보기 전에 귀로 듣기 전에 그리고 직접 만지기 전에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야 하는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초식이란 것은 소용이 없소.]

[...?]

장지연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개만 끄덕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지도 직접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남들의 생각으로 머리로 끄덕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석두공은 그녀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하자 직접 예를 들었다.

[생각해보시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경우에 처할 수는 없는 것이오. 대개 초식이란 것은 천지에 도리에 합당하게 만든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면서 실상에 있어서는 격식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끼워놓은 것들도 적지가 않소.]

그 점에 대해서는 장지연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석두공의 말이 계속되었다.

[만약에 열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검법이 있다면 그 검법 정화의 구할은 그 중의 하나에 담겨있을 것이오. 나머지 아홉이 일할의 정화를 나눠갖는 다고 볼 수 있을 것이오.]

장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벽을 쳤다.

[과연 그렇겠군요. 보통 무공을 배울 때 한가지 초식만 익히고 나면 다른 것은 그 하나에서 발전 된 것이라 배우기가 쉬웠는데 그 때문이었군요.]

[또한, 중요한 것은 대개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오. 장황하게 말해야 한다면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귀를 막아버려도 괜찮은 것이오.

검법의 정화도 그렇소. 초식이란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초식을 가장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소.]

 

석두공의 말은 이러했다.

어떤 초식이든 간에 실제로 사람이 처한 그 상황에 가장 맞는 초식이란 없다.

각 상황마다 그것에 맞는 초식이 따로 있는 것이다.

물론 수십 만 가지의 초식이 있다면 아주 비슷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도로(徒勞)에 불과하다.

초식을 많이 익힌다고 해서 좋은 것이 결코 아니다.

초식을 많이 알게 되면 그만큼 초식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그 상황에 가장 알맞는 적절한 방법으로 검을 휘두르고 권각을 휘두르면 그뿐, 무슨 복잡한 초식을 그 순간에 벼락같이 떠올려 펼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에 볼과하다.

한마디로 손톱으로 눌러서 죽여야 할 이(蝨)가 있는가하면 껍질을 깨뜨려서 죽여야 하는 거북(龜)도 있다는 말이다.

 

장지연은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지만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같았다.

장강을 떠가는 배위에서 그녀는 깊은 묵상에 잠겨들었고 석두공은 노를 저어 배의 방향을 조정했다.

 

× × ×

 

강변의 어느 객점이다.

밖에는 어느덧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한적한 객점 안에는 십여명의 손님이 앉아 배를 채우고 있다.

[난 벌써 삼년 째 그 사람을 찾아서 쇠신이 닳도록 천하를 헤맸어요. 하지만 아무데도 없더군요. 아마 죽었나봐요?]

장지연은 술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날이 저물자 뭍에 오른 그녀와 석두공은 때늦은 점심을 들고 있는 중이다.

창가 자리에는 네명의 흑의인이 말없이 앉아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들은 아직 주문도 하고 있지 않다.

장지연은 반주 삼아 시킨 술을 홀짝이며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마음이 여린 석두공인지라 그녀의 신세도 무척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소?]

장지연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 사람? 나도 잘 몰라요. 한번도 만나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렸을 때 머리를 다쳐 당신처럼 총명한 사람은 아니래요. 오히려 그 반대...]

[그럼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단 말이오?]

[초상화를 가지고 있어요. 한번 보여드릴까요?]

장지연이 가슴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석두공이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아...아니오 됐소.]

[왜요? 사실 당신을 조금 닮기도 했어요. 당신일 리는 없지만...]

장지연은 그의 말을 묵살하고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바로 그때였다.

펑!

갑자기 객점의 문이 날아가며 청의를 입은 여인이 놀란 사슴처럼 뛰어 들어왔다.

[발각됐어요. 여길 피해요!]

그녀가 소리치며 객점의 후문으로 달려갔다.

파팟! 쐐액!

그 즉시 창가에 앉아있던 네명의 흑의인도 몸을 날려 그녀를 뒤쫓았다.

“....!”

석두공의 시선은 청의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에 못이 박혔다.

그녀를 어디선가 보았었음을 깨달은 때문이다.

(오년전의 그 여자다!)

석두공의 눈이 불을 뿜었다. 청의여인은 그에게 갚아야만 하는 빚이 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장지연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은 여자만 보면 눈을 못 떼는군요.]

그러나 석두공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지연은 그가 화가 난 줄 알고 흠칫하며 따라 일어났다.

그때였다.

휘이익!

붉은 그림자 하나가 객점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혈포단객(血袍單客)!]

장지연과 석두공의 입에서 그 붉은 그림자의 정체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 붉은 그림자는 바로 혈포단객이었다.

오객(五客)중 한명으로서 언제나 혼자서 행동한다는 혈포단객...

“...!”

파앗!

혈포단객은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즉시 주위를 한번 살펴보더니 그대로 객점의 뒷문으로 달려갔다.

[오객의 하나인 혈포단객이 이런 외진 곳에 나타났군요.]

장지연은 석두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을 돌렸을 때 석두공은 이미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

장지연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으나 석두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탁자위에는 그녀가 꺼내놓은 소년의 초상화가 놓여있었다.

한데, 그 초상화는 바로 어린 시절의 석두공이 아닌가?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장지연은 그를 찾고 있었단 말인가?

삼노에 의해서 귀빈으로 대우받던 장지연은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석두공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이전버튼 1 2 3 4 5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