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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깨어진 돌 머리 (2)

 

 

 

하루이틀사흘...

지옥같은 고통속에서 날들이 지나갔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잠도 잘 수 없었다.

석두공은 사람의 형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터진 그의 몸은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만배선사는 원래의 그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앉아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그 주문이 끝나면 석두공을 노려보고, 석두공의 입이 떨어지지 않으면 천왕저를 뻗어서 아무곳이나 쳤다.

소림사의 칠십이종절기 중의 하나인 금강저의 수법은 고승의 손에서 사람패기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한 석두공의 노력은 처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 쓸모도 없는 금강저의 수법만 환히 터득했을 뿐, 정작 외워야할 주문은 한마디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지쳤다.

자신의 돌머리에 대해선 자신마저도 지쳐버렸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눈앞의 만배선사는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어떤 말 못할 위엄이 있어 그에게 항거할 수도 없었다.

오직 그가 살아나는 방법은 주문을 외우는 길 밖에는 없었다.

조금도 외우지는 못하고 있었을 지라도...

 

그러나 이레째 되는 날부터는 석두공은 머리속에서 몽롱한 안개같은 것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준극봉 아래 무저갱 속에서의 경험과 비슷했다.

다만 그것은 외부적인 것이었는데 이번엔 자신의 머리속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때 이후 석두공은 어렴풋이 조금씩이나마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만배선사의 주문을 외우지 못하는 벌로 맞는 천왕저는 신기하게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안개를 몰아내는 것같았다.

아니, 실제로는 석두공의 의지가 그의 몽매를 깨고 있는 것이었다.

매에 의해서 강요된 의지가...

 

만배선사는 주문을 다 암송한 후에 다시 천왕저를 들고 석두공을 노려보았다.

석두공은 바짝 긴장하면서 처음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

오직 단 한마디였다.

그이상은 마치 백지처럼 하얗게 되어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만배선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해졌다.

그의 진물 고인 눈으로 반짝 이채가 스쳤다.

그것은 어떤 격동의 억눌러진 모습이었다.

!

그래도 석두공은 천왕저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하나 그는 이번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성취감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오직 한마디이지만 기억했다는 것, 그것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다음 차례에 석두공은 두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태상!]

그리고, 그때부터는 그에게도 만배선사에게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석두공이 그 단단한 돌머리가 암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태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다섯 대를 더 맞았을 때 석두공은 주문의 반을 외워버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두대를 더 맞았을 때는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으며,

거기에 한대를 더 보탰을 때는 앞으로도 뒤로도 줄줄 욀 수 있게 되었다.

토굴속에 들어온 후 칠일 째 되는 날이었다.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

만배선사는 천왕저를 던졌다.

[!]

석두공은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머리속은 더욱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젠 다 되었다. 아니, 노납이 사명만이 끝이 났다. 마지막 남은 너의 돌조각을 깨고 못 깨고는 오로지 네게 달린 일이다.]

만배선사는 손을 저어 물러가라는 신호를 하며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파아앗!

퍼펑펑!

폐쇄된 토굴의 벽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검기가 솟아져 들어왔다.

석두공은 천왕저를 가볍게 흔들어 그 검기들을 흡수해버렸다.

실로 귀신처럼 빠른 임기응변이었다.

토굴은 구멍이 나있었다.

뭉게뭉게...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한사람이 보치도 당당히 걸어들어왔다.

석두공은 그 사람보다 먼저 향긋한 지분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감지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가온 사람은 스스로를 종횡선녀라고 한 백란이었다.

그녀가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 멍청이, 네가 도망쳐 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구. 어랍쇼? 딴에 변장까지 했어? 꼴같지 않게.]

석두공의 모습은 도무지 사람같은 형용이 아니다.

두들겨 맞아서 형체를 잃어버리다 시피한 것이다.

한데도 백란은 그가 들고 있는 천왕저만 보고서 그가 석두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석두공이 변장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만배선사가 석두공에게 말했다.

[어서 가라. 나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의 손이 좌우의 벽을 쳤다.

쿠쿠쿵!

풀썩!

순간 토굴은 그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스읏!

석두공은 흠칫했으나 그대로 몸을 빼어 밖으로 나왔다.

백란도 가까스로 빠져나와 그의 앞으로 날아내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백란은 소리치며 그의 뺨을 쳤다.

[이 멍청이!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늦어졌잖아!]

!

갑자기 석두공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백란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석두공의 몸에서는 분노가 뿜어지고 있는 듯했다.

백란은 더욱 물러서며 품에서 손가락만한 정검령을 뽑아들었다.

[감히 정검령에 항거하겠단 말이냐?]

석두공은 매썹게 그녀를 노려본 후에 등을 돌리고 걸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만배선사가 억지로 암기시킨 주문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정심신주(淨心神呪)라고 하는 것으로 밀종(密宗)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주문이었다.

오랫동안 외우게 되면 절로 머리가 트이는 묘한 힘이 있는 것이었다.

백란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서있었다.

[사부의 말씀이 틀렸단 말인가? 그는 분명히 정검령에 복종해야만 하는데... 이건 뭔가 잘못됐다.]

 

***

 

석두공은 숲속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샘물이 솟아나듯 잊혀졌던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급기야 그것들은 봇물이 터진 듯 그의 머리를 꽉 채워버렸다.

석두공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다만 걸음만 옮겼다.

하지만 풀린 실타래처럼 생각들은 스스로 끝없이 떠올라 오면서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나온 그의 행적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사부인 동호천과 만났던 독왕동,

독왕동주 갈천상의 모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또한 동정호에서 부주를 띄워놓고 지냈던 사부와의 생활들이 작은 것하나 빠지지 않고 떠올랐으며, 동호천이 직접 손과 발로써 무공을 가르쳐 주던 일들도 떠올랐다.

또한 펼칠 수는 있고 꼬투리가 잡혀야만 말할 수 있었던 무공의 구결들도 저절로 모두 환하게 떠올랐다.

석두공은 산길을 밟아 내려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지나온 기억들을 밟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산도 보이지 않고 길도 보이지 않았으며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부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귀를 스치고 지나갔던 지난 날의 음성들이 들려왔고 보고는 잊어버렸던 일들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석두공은 그렇게 망연히 걸어갔다.

숭산을 내려와 등봉현을 지나고 관도로 접어들었건만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의 긴 해도 지고 달이 은빛을 뿌리며 별이 총총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한데 정신이 나간 듯 걸어가고 있는 석두공의 뒤를 백란도 모습을 숨겨가면서 따르고 있었다.

백란에게는 사부의 명령이 있었다.

그것은 무저갱에서 기다리다가 나온 사람에게 정검령을 보이고 데라오라는 것이었는데, 당부하기를 그 사람은 보통사람과는 좀 다르니 신경써야한다고 했었다.

백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데려가야만 한다. 사부께서 그토록 이일에 마음을 쓰는 것을 보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데, 저 멍청이가 갑자기 딴사람이 되어 버린것 같단 말이야. 허수룩한데 가 하나도 없어져 버렸잖아. 하루종일 따라왔는데도 내가 파고들 틈을 주지않으니... )

그녀의 눈에 처음과 똑같은 속도, 똑같은 보폭, 똑같은 자세로 걸어가고 있는 석두공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관도를 지나는 행인도 없었다.

근처엔 마을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녀의 지분냄새를 맡은 날파리들만이 왕왕거리며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백란은 한손을 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봐!]

그러나 석두공의 귀에는 그녀의 음성이 파고들 공간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속에 묻혀서 걸을 뿐이었다.

백란이 야무지게 눈을 빛냈다.

(좋아! 한번 혼이 나봐라!)

석두공의 뒤에 이르른 그녀는 갑자기 일장을 내리쳤다.

한데 석두공의 몸이 슬쩍 흔들리며 한걸음 나아가는 바람에 그녀의 손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

백란은 당황했다.

(그럼 어디... )

하지만 그녀는 이내 빠르게 보법을 밟아 석두공의 앞을 가로 막았다.

오만하게 허리에 팔을 걸치며 그녀가 소리쳤다.

[정말 이럴테야?]

스읏!

그러나 이번에도 석두공은 가볍게 몸을 흔들며 그녀의 뒤로 돌아가 걷고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또한 그 자신도 자신이 장애물을 피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같았다.

백란이 갖가지 수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가로막거나 공격을 했지만 석두공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고 석두공을 과거의 기억으로 부터 현재로 불러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삼경이 지나버렸다.

백란은 제풀에 지쳐서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이 나쁜 놈아! 기면기다 아니면 아니다. 무슨 말이라도 한번하면 병신이 되기라도 하냐? 내가 다시 너를 쫓아다니면 네 마누라다 네 마누라.]

씩씩 거리며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석두공은 지나쳐 버렸다.

잠시 후 어두운 관도엔 오직 그녀 한사람 만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없지. 사부껜 거짓말하는 수밖에. 무저갱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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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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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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