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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奇緣을 만나다.

 

 

 

“흑흑흑……”

여인이 운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자그맣고 둥그스름한 어깨가 끝없이 파문을 일으키고, 얼굴을 파묻은 무릎으로부터 맑디맑은 이슬이 발끝으로 구른다.

‘어찌해야 하는가?’

적연흥은 안절부절 못하고 제연연의 주위만 뱅뱅 돌 뿐이다.

한바탕의 열풍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들끓던 열기도 지금은 저녁호수같이 잠들었다.

한독(寒毒)에 사경을 헤매던 제연연은 이제는 조금도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추위하지 않는다.

한 번의 정사가 양인에게 큰 이득을 주었다.

적연흥은 전신에서 요동치던 열기를 제연연에게 배출하고 극강한 열양지기(熱陽之氣)를 전신 심맥으로 유입시켰다.

반면, 제연연은 능히 백년공력(百年功力)에 비견되는 양기(陽氣)를 적연흥으로부터 받았다.

너무나 강렬한 적연흥의 그것에 생사현관이 녹아 버리고 전신의 기맥이 대로(大路)같이 활짝 열렸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경지가 우연한 기연(奇緣)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웬지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제연연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면 그녀도 대답을 못하리라.

그저 우는 것 뿐이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통스러워 우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녀는 운신하기도 힘들게 격심한 상처를 가장 은밀한 곳에 입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우는 것은 그 상처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놀랍게도 삼십에 이른 제연연은 그때까지도 처녀지신(處女之身) 이었다.

지면에 묻은 붉은 앵혈의 흔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파과(破瓜)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희(歡喜)이고 열락(悅樂)이다.

그 때문에 울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과 허전함이 제연연의 전신을 휘감는 것이다.

“으음……!”

적연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털―― 썩!

적연흥은 제연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님! 소제를…… 죽여 주십시오.”

그리고는 끝이었다.

적연흥은 제연연의 발끝에 머리를 갖다대고 요지부동이었다.

“흑…… 흑…… 흑……”

제연연의 울음소리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소리가 낮아지더니 마침내 뚝 끊어졌다.

기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

“……!”

제여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홍조띈 상아빛 뺨과 촉촉히 젖은 두 눈, 요염하리만치 붉은 두 입술이 철석간장이라도 녹일 듯 뇌살적이다.

‘이…… 이 아이는…… 어른이구나. 나이로만 보아 아이로 믿었건만…… 내가 만난 어떤 사내보다도 훌륭한 장부(丈夫)다. 몇백, 몇천의 여인이라도 거느릴 수 있는……’

제연연의 눈길이 점차 변해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그것이었으나 이제는 사내를 바라보는 아낙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장차 은하궁(銀河宮)은 이 아이…… 아니 이분에 의해 크게 빛을 발하리라.’

그녀의 눈길이 다소 안타깝게 변했다.

‘이제는 나의 그이만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제연연은 천천히 섬섬옥수를 내밀어 적연흥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눈을 뜨고 첩신을 보시옵소서.”

제연연의 말에 적연흥은 천천히 눈을 떴다.

파―― 앗!

두 남녀의 눈길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

“……!”

이윽고, 제연연이 살포시 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떨구었다.

순종(順從)의 뜻을 나타냄이리라.

제연연은 나직하고도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첩신은…… 상공을 탓할 수 없사옵니다. 상공께서 첩신께 또 다른 생명을 주시려 한 일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다만 소첩을 버리지만 말아주시옵기를……”

적연흥은 제연연의 뜻을 알았다.

“누님!”

그의 우람한 두 팔이 제연연의 개미허리를 힘 있게 안았다.

“아……상…… 상공……!”

제연연의 나신이 활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적연흥의 우람한 몸 밑에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제연연을 뒤덮었다.

그녀의 교구는 적연흥의 태산같은 힘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가냘펐다.

문득, 제연연은 곧 찍힐 엄청난 고통의 낙인이 떠오르자 두려움이 치솟았다.

“아…… 상…… 상공…… 아직은…… 아아…… 제발……”

그러나, 난폭한 군주는 여인의 의사는 아예 무시해 버렸다.

“아―― 악!”

파과(破瓜)의 그것보다 더한 고통이 제연연을 강타했다.

거의 까무러칠 듯한 고통이 하복부로 파고 들었다.

마치 예리한 보검으로 회를 치는 것같은 고통이었다.

“누님……!”

적연흥은 성난 광풍같이 몰아치고 제연연은 한 마디 애처로운 먹이가 되어 흐느끼며 학대받았다.

“아아아……”

언제부터인가?

고통의 비명은 점차 환희와 신음으로 윤색되어 가고 있었다.

검은 맹호와 아리따운 암사슴의 처절하도록 강한 움직임이 무인지경의 신무곡을 가득 메웠다.

 

* * *

 

“이 사람은 태호(太湖)의 흑사채(黑蛇寨)의 채주인 흑사신편(黑蛇神鞭) 채윤(彩潤)이란 인물이예요.”

제연연은 한 명의 흑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적연흥과 제연연 앞에는 네 구의 시신이 뉘어져 있었다.

그들은 절벽이 무너질 때 함께 떨어진 무림인들이었다.

제연연은 날카로운 인상의 삼십대 장한의 시신에서 하나의 검은 빛이 도는 채찍을 풀어내었다.

“이것이 채윤의 성명무기인 흑사편(黑蛇鞭)으로써 그의 흑사칠십이로(黑蛇七十二路)의 편법은 강호일걸이라 불리어요.”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의 무공은 낭심수사에 비하여 어떻습니까?”

“글쎄요. 낭심수사는 장법(掌法)과 수법(手法)을 주로 익혀 흑사신편과의 비교는 어렵지만 아마 비슷할 거예요. 다만 낭심수사쪽이 공력상 다소 우세하니 결국 장기전에 들어가면 낭심수사가 이길 거예요.”

제연연은 두번째 인물 앞에 섰다.

그 인물은 청수하게 생긴 중년문사로서 등에 한 자루 보검을 메고 있었다.

“이 인물이 상공께서 말씀하신 낭심수사와 함께 무림오사(武林五士)에 드는 인물이에요.”

“흐음…… 그래요?”

“네, 신검수사(神劍秀士) 상관청(上官靑)이란 인물로서 무림오사의 두번째 고수예요.”

적연흥은 신검수사의 등에서 보검을 풀어내었다.

보검의 길이는 세자 여섯치로 손잡이 부분이 상아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보검이었다.

“한번 뽑아 보시와요. 무림사대신검(武林四大神劍) 중의 하나로서 비상(飛霜)이라하는 명검(名劍)이옵니다.”

적연흥은 비상검을 잡고 힘주어 뽑았다.

스르릉――

맑은 용음(龍吟)과 함께 싸늘한 한기가 골수에 미쳤다.

“비상(飛霜)이라…… 과연 대단한 예기를 지녔습니다.”

적연흥은 감탄하며 한 차례 검을 휘둘러보았다.

그 자세가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인지라 제연연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그 검은 주인보다 더 유명한 보검으로 강철을 무우 베듯 하옵지요.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신검수사의 양의검법(兩儀劍法)정도 펼치는데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신검이옵니다.”

“무림사대신검(武林四大神劍)이란 어느 어느 명검을 말함입니까?”

적연흥이 비상검을 회수하며 물었다.

“먼저 사대신검의 수좌는 오백 년 전의 기인이신 태백성군(太白聖君)께서 사용하시던 태백신검(太白神劍)이옵니다. 일설에 의하면 태백신검이 한번 검집에서 나오면 방원 십장 이내가 얼음으로 뒤덮여 버린다고 하옵니다.”

적연흥이 약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제연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과장됨이 없지는 않겠지만 태백신검에 태백천음기(太白天陰氣)가 실려 있음은 천하가 인정하는 일이옵지요.”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번째는 무당파의 진산보검인 칠성신검(七星神劍)이옵고 세번째가 비상(飛霜), 네번째가 천산(天山) 용문장(龍門莊)의 비검(飛劍) 금혼(金魂)이옵니다.”

적연흥이 비상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천하에는 수많은 보검(寶劍)과 명검(名劍)이 있지 않습니까? 거궐(巨闕)이 있고 간장(干將), 막야(莫耶) 등 춘추오대명검 등이 있거늘 어찌하여 비상(飛霜) 등만으로 사대신검(四大神劍)을 칭할 수 있습니까?”

“상공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무림의 전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사대신검보다 훌륭한 보검들은 많사옵니다. 하나 사대신검을 세운 기준은 당금 천하에 존재하는 검들에서 세운 것이지요. 거궐, 간장, 막야, 어장, 태아, 경영 등의 전설 속 보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에서 사라져 나타나고 있지 않사옵니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나머지 이들은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제연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명은 녹림인 무리이고 다른 한 명은 청성파의 속가제자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옵니다.”

“그럼 이제 이들을 매장해야 되겠습니다. 조금 물러서 계시지요.”

“네!”

제연연이 물러서자 적연흥은 극음빙천(極陰氷泉)에서 찾아낸 도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것은……?”

땅을 파던 적연흥이 고개를 갸웃 하며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마치 참마 갈이 생긴 덩어리인데 땅속 여기저기에 묻혀 있었다.

“줄기도 없는데 땅속에서 이런 덩이뿌리가 자라다니 이상하군요?”

제연연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적연흥은 급히 천후독존유록을 펼쳤다.

‘저 비급이 모산독군께서 상공께 주신 독경(毒經)인 모양이구나.’

제연연은 내심 생각했으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적연흥 뿐이므로……

적연흥은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여기에 있군요.”

적연흥은 자신이 먼저 읽어보고 제연연에게 건네주었다.

“한령토황우(寒靈土黃牛), 지극음기(地極陰氣)가 모이는 곳에 자생한다. 지극음기를 흡수 극히 천천히 자라는데 백 년 이상 되어야 주먹만해진다.”

제연연은 비급에서 시선을 떼고 적연흥이 땅을 파내며 캐놓은 한령토황우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주먹보다 크고 깊은 곳에서 파낸 것일 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놈은 족히 몇천 년은 되었겠습니다.”

적연흥이 땅속 깊이에서 머리통만한 것을 캐내어 웃으며 말했다.

제연연은 계속 읽어갔다.

 

<이를 장복하면 백독(百毒)이 불침하게 되고 정기(精氣)를 튼튼히 해주며 특히 여인에게는 만 가지 효능(效能)이 있는바 그중의 한 가지가 영원히 젊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읽은 제연연은 뛸듯이 기뻐했다.

그녀 역시 미모를 생명보다 더 아끼는 여인이므로,

잠시 후, 적연흥이 네 구의 시신을 매장했을 때는 한령토황우가 수북이 쌓였다.

“이 신무애를 언제 빠져 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야 할 지도…… 어쨌든 식량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제연연이 두 볼을 상기시키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첩신은 상공과 함께라면 이곳에서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이라도 지낼 수 있사옵니다.”

적연흥은 따스한 눈길로 제연연을 바라보다가 팔을 벌렸다.

그러자 제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연흥에게 안기며 스스로 적연흥의 입술을 찾았다.

두 남녀는 긴긴 입맞춤을 하며 서로를 굳게 부둥켜 안았다.

“누님, 고맙습니다.

이윽고 입술을 뗀 적연흥이 그윽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하자 제연연은 푹 고개를 떨구었다.

적연흥은 정열이 담긴 눈으로 제연연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홀로 계신 어머님을 돌봐드릴 사람이 없음이로다. 아! 어머님께서는 불효한 이놈 때문에 걱정하심이……!”

돌연 고개를 들던 적연흥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뚫어져라 호수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상…… 상공, 무슨 일이시옵니까?”

제연연이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적연흥을 바라보았다.

“누님! 저쪽 맞은편 석벽을 보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아연했다.

“상…… 상공께서는 저 운무너머의 석벽이 보이시옵니까?”

적연흥이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공력이 이갑자하고도 반이나 되시는 누님의 안력으로 저 운무가 장애가 되십니까?”

제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첩신의 공력이 다섯 배로 급증했다고는 하나 그저 흐릿하게 맞은편에 석벽이 있다는 정도밖에 볼 수 없사옵니다.”

적연흥의 고개가 갸웃 했다.

“흠, 그럼 내 눈이 이상해졌나?”

그런 적연흥의 모습을 보며 제연연은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무공을 익히지도 않으신 분의 시력이 이정도시라니…… 만일 이분이 무공을 익히신다면…… 무적이 되시리다.’

그녀가 생각하는데 적연흥이 제연연의 허리를 안아 등에 업었다.

“어머멋! 상공!”

제연연은 입으로는 귀성을 토했으나 몸은 적연흥의 넓은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하하 누님도……이곳에 누가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님은 아직 걸음을 옮기시기 불편하실 테니 소제가 저곳까지 업고 가겠습니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얼굴을 홍시같이 붉히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이갑자 반, 즉 백 오십 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제연연, 그녀가 왜 걸음을 걷기에 불편할까?

모를 일이다.

“하하…… 누님! 갑시다!”

적연흥은 제연연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씨―― 잉―― 씨―― 잉!

칼날이 스치듯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멋!”

고개를 들었던 제연연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적연흥의 달리는 속도는 대단했다.

신무애에 추락하기 전보다 몇 배 빠른 것으로 전에 제연연이 전력을 다해 펼치던 경공에 버금가는 속도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누가 믿겠는가?’

제연연이 내심 혀를 내두르는데 적연흥은 이미 오 리 정도를 달려 그들이 처음에 섰던 곳의 반대쪽에 이르렀다.

“누님 보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석벽을 바라보던 제연연은 깜짝 놀랐다.

“어머! 동굴(洞窟)이 있었군요.”

그렇다.

적연흥이 맞은편에서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큼직한 동굴이었다.

동굴은 지면으로부터 이 장 정도 높이에 뚫려있는데 제법 컸다.

“올라가겠습니다.”

제연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뛰어올라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적연흥은 그녀의 말에 껄껄 웃었다.

“하하……이곳에 떨어지기 전에도 이 장 정도는 뛰어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신에 장강대하와 같은 힘이 끝없이 솟으니 능히 오 장이라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자꾸만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구나.’

제연연은 내심 놀라면서도 흐뭇했다.

왜냐하면 적연흥이 자신의 지아비이므로……

“갑니다!”

적연흥은 일갈하며 지면을 박찼다.

파―― 앗!

슈―― 웃!

제연연을 업은 적연흥의 몸이 가볍게 날아 올랐다.

“웃!”

돌연, 동굴로 들어서던 적연흥의 몸이 흠칫 굳었다.

“독……독물이라도 있사옵니까?”

제연연은 겁이 나서 안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누님. 잠깐 내려 주십시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은 조심조심 바닥에 내려섰다.

대체 동굴 안쪽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제연연이 의아해 하는데 적연흥이 갑자기 동굴 안쪽을 향해 부복하는 것이었다.

“미생 적연흥 감히 두 분의 선거(仙居)에 들어 어지럽혔습니다. 두 분의 영령께서는 널리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연연은 적연흥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시력을 돋우어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의 두 눈도 크게 치켜 떠졌다.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 깊이는 겨우 오 장 정도였는데 동굴 끝의 석벽 앞에 두 구의 좌화한 시신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적연흥은 그 시신들에게 절을 했던 것이었다.

시신 중 왼쪽에 있는 시신은 회색가사를 걸친 승려의 시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구의 시신은 청포를 걸친 음산해 보이는 인물의 시신이었다.

‘아! 이 신무애에 우리보다 먼저 닿았던 인물들이 있었다니……’

제연연이 놀라는데 적연흥이 조용히 돌아섰다.

“누님, 저 두 분께서 최후를 마치신 안식처이니 그냥 나갑시다.”

적연흥의 말에 제연연이 적연흥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상공께선 저 두 분의 신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시지도 않으시옵니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저 두 분은……”

“두 분께선 어쩌면 저희들이 읽기를 바라시고 어떤 단서라도 남기셨는지 모르는 일 아니옵니까? 나가시더라도 잠시 살펴보신 뒤에 나가시옵소서.”

제연연이 이끄는 바람에 적연흥은 제연연과 동굴 깊숙이로 들어갔다.

‘놀랍구나. 좌화한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듯 하건만 시신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니…… 아마도 이 두 분은 생존시에 내공이 초극에 이르러 계셨을 것이다.’

제연연이 놀라는 사이 적연흥은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장방형의 옥함이었는데 옥함의 뚜껑에 글이 적혀 있었다.

적연흥과 제연연은 옥함에 상배를 한 뒤에 조심스럽게 옥함에 적힌 글을 읽었다.

거기에는 놀라운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노납의 법명은 무허(武虛)라고 한다. 후일 천운으로 이곳에 드는 자가 있을까하여 이글을 적는다……>

 

“무... 무허!”

옥함에 적혀있는 글을 읽은 제연연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누님께선 이 분을 아시옵니까?”

제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아요. 이분은 오백 년 전에서 사백 년 전까지 생존하셨던 소림사상 최강의 고승(高僧) 중 한 분이셨어요.”

“소림사의 고승이셨군요.”

제연연의 표정은 극히 엄숙하고도 공손하게 변했다.

“이 분은 소림 십팔대 장문인이 되실 분이셨으나 스스로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시는 성품임을 깨달으시고 장문인의 보위를 자신의 사질에게 양위한 미담은 유명해요. 당시에 무림에는 절대미문의 대혈겁이 발생했었어요.”

적연흥은 침중한 표정으로 제연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천살교(天煞敎)라는 한 방파가 저지른 혈겁으로, 그들은 천하패권을 위해 중원천하를 혈란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때 이분 노선사께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셔서 천살교를 타도하셨다고 해요.”

“으음, 승인이라기보다 대협객이 되시는 것이 어울리셨을 분이셨군요.”

“네, 당시까지만 해도 구대문파의 성망이 대단하여 이분이 주도하신 구파연합군은 천살교를 괴멸시킬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일전으로 구파가 격심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말예요. 그후 이분의 행방이 묘연하셨는데 이곳에서 입적하셨군요.”

적연흥은 무허선사의 좌화한 시신을 우러러 보았다.

과연 덕망있는 노선사라기보다는 마치 나한(羅漢)같이 위맹하게 생겼다.

양인은 다시 옥함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살교(天煞敎)를 괴멸시키기는 했으나 구파연합군의 구축을 이루었던 본사의 타격은 극심하였다. 이에 노납은 본사의 재건에 절치부심을 하였다.

그러던 중 노납은 불사 최고최강(最高最强)의 선공(禪功)이 도적의 손에 의해 장경각에서 반출되어 무림으로 유출되었음을 알았다.

대노한 노납은 강호로 나와 그 도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이곳 북안탕의 산역(山域)에서 그 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 자는 야천신투(夜天神偸)라는 자였는데 알고 보니 그 자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 선공(禪功)을 빼내었던 것이다.>

 

적연흥과 제연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림(少林) 최강의 선공(禪功)이라면 무엇을 말함입니까?”

적연흥의 물음에 제연연은 자신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금까지 알려지기로는 광명법신(光明法身)과 불영수미선강(佛影須彌禪罡)등이었아오나 이글을 보니 그 두 가지 선공보다 더 강한 선공이 있었던 것 같사와요.”

“계속 읽어 봅시다.”

 

<…… 야천신투가 위경에 처하자 그 사주자가 나타났다. 한데 놀랍게도 그 인물은 천살교(天煞敎)에서 교주 천살마신(天煞魔神)에 이어 제 이인자이던 환영비천신(幻影飛天神)이라는 자였다.

결국 일대 이의 대격전이 벌어졌다. 노납은 야천신투는 격살하고 선공(禪功)을 회수할 수 있었으나 환영비천신과 겨루다가 어이없게 둘이 함께 이 괴곡(怪谷)으로 추락했다.

그후 노납과 환영비천신은 간신히 목숨은 구했으나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점점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에 만일 후인이 이곳에 닿게 되면 노납이 못다 했던 일을 이루어주기 바란다.

즉 이 옥함을 소림사(少林寺)에 전해주기를 바란다. 이 안에는 본사 조사령(祖師令)과 회수한 선공비급(禪功秘笈), 그리고 환영비천신(幻影飛天神)의 절기가 수록된 환영비천경(幻影飛天經)이 들어 있다.

만일 그대가 이미 섬긴 사문이 있다면 환영비천경을 그대에게 주겠으며 만일 아직 사문이 없다면 소림(少林)의 제자로 받아줄 수도 있다. 소림을 사문으로 섬기겠다면 노납에게 배사지례를 하고 조사령을 받들도록 하라.>

 

제연연이 환히 웃었다.

“상공 잘되었습니다. 이제 무공을 익히셔야 하니 기왕에 사문을 갖는 바에야 천년전통의 소림을 사문으로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옵니다.”

적연흥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다시금 무허선사의 시신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올린 연후에 그는 조심스럽게 옥함을 열었다.

과연 옥함 속에는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고 하나의 자옥불상(紫玉佛像)이 놓여 있었다.

그 자옥불상이 바로 조사령으로 소림장문인이 갖고 있는 장문령(長門令)인 녹옥불령(綠玉佛令)마저 제어할 수 있는 조사령이었다.

그 권위가 이러함으로 대개 조사령은 장문인의 일대 스승이 지니게 되어 있다.

“소림 제 십구대 속가제자 적연흥 조사령을 배알합니다.”

적연흥은 다시 조사령에게 삼배를 올린 연후에 조사령을 조심스럽게 간수했다.

‘후훗, 되었다. 당금 소림의 최고 장로의 혜자돌림이 이십 육대 제자, 장문인 법현(法賢)방장께서 이십칠대 제자이니……상공께서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신 분이 되셨다.’

제연연은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여자들의 소견머리라니……

적연흥은 조사령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사부님과 이분 노선배님의 유해를 안치해야 되겠습니다.”

제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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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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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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