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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검룡난무 (2)

 

 

 

풍덩!

석두공은 무엇인가가 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져 버려 경각심을 갖지도 않았다.

뇌주탄은 안개에 휩싸여 있고 그 안개를 뚫고 해남검파의 범선은 소리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를 가노라니 배에 걸린 등불들이 하나둘 반딧불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룡혈운도의 선단이오.]

진우백이 석두공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검룡이 들리워져 있었다.

석두공은 점차 가까워지는 선단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시려오?]

[선실에... 그녀를 깨워야 겠소.]

석두공은 진우백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진우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없소.]

[...?]

[그녀는 이미 배에서 내렸소.]

[배에서 내리다니? 이 바다 한가운데서 말이오? ]

석두공이 놀라며 물었다.

진우백이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는 내게 이런말을 전해주라고 했소. 적룡혈운도를 철저히 쳐부수라고... ]

[...!]

석두공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분노같은 것이 그의 가슴속에서 타올랐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불길이 토해질 것만 같았다.

(!)

진우백은 그에게서 주체하지 못할 힘을 느끼며 몇 걸음 떨어졌다.

석두공은 칼로 자르듯이 내뱉었다.

[검룡을... 검룡을 잠시 빌려주시겠소?]

진우백은 흠칫했으나 검룡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검룡을 움켜진 석두공은 분노에 가득한 눈초리로 적룡혈운도의 선단을 노려보았다.

배는 점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삐익! 삐익!

갑자기 사방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네척의 작은 쾌속선이 진우백의 범선을 포위하고 있었다.

앞쪽에 막아선 배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디서 온 배냐? 이곳이 적룡혈운도의 선단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진우백과 그의 제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같은 안개속의 새벽인데도 적룡혈운도에서는 삼엄한 경계를 풀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백의 눈이 석두공의 얼굴에 머물렀다.

석두공이 말했다.

[공격을 명하시오. 문주만 내 곁에 남아있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시오. 닥치는 대로 배를 부수고 위에서 내려오는 자들을 베라고 하시오.]

진우백은 나직한 음성으로 곁에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전해라. 즉시 공격한다. 물속으로 뛰어들어라.]

그의 명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때였다. 범선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쾌속선에서 소리쳤다.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격침시켜버리겠다.]

그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쾌속선들 위에는 각기 십명 남짓 되는 궁수들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푸른 기름불이 타오르는 화살들이 장전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

그들의 배가 기우뚱하면서 궁수들의 몸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해남검파의 제자들이 물속에서 튀어오르며 그들을 벴다.

번쩍!

[크악!]

[크윽!]

촤아아아!

진우백의 배는 멈추지 않고 바람을 받은 속도 그대로 선단을 향해서 돌진해 갔고 그 배에는 오직 진우백과 석두공만이 타고 있었다.

뿌우! !

선단에서 경계의 나팔이 울리고,

둥둥둥!

배의 방향과 움직임을 지시하는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따라서 적룡혈운도의 범선들은 대오를 형성하며 진우백의 배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이백 여 척의 범선들...

안개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는 그것들의 위용은 과연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어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배를 조종하시오. 저들은 한가운데로 돌진하시오.]

석두공이 진우백에게 명령했다.

진우백이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불가하오. 저들은 솔연진(率然陣)을 치고 있소.]

그의 음성은 완강했다.

 

솔연진...

솔연이란 원래 특이한 습성을 가진 한마리의 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뱀은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를 치면 꼬리가 반격하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반격한다고 한다.

머리와 허리, 그리고 꼬리가 자연스럽게 일체가 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솔연이라고 한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이 병진(兵陣)을 구축하는 기본으로 삶고 있었다.

이렇듯 적룡혈운도의 선단은 솔연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가운데를 치고 들어간다면 필연적으로 양쪽에서 진우백의 배를 포위하며 격침시켜 버릴 것이다.

진우백이 말했다.

[솔연진을 공략하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오. 그것도 걸려들어야만 가능하지만... ]

[...!]

석두공은 그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자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우백의 자신의 생사와 해남검파의 운명이 이 일전에 걸려있음을 아는지라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공격해 나오게 유도해야 하오. 그리하여 먼저나오는 부분을 치고 물러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흐물어뜨리는 것이 정법이오.]

[나는 솔연이 뭔지는 모르오. 하지만 이것은 알고 있소.]

석두공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진문주의 제자들은 이 배를 중심으로 해서 물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소. 그렇지 않소?]

[그렇소.]

진우백이 끄덕였다.

석두공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적의 중간을 치는 것이 옳지 않소?]

[...?]

[진문주는 욕심만 있었지 보기보단 어리석군.]

석두공은 그가 자신의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는 듯하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진우백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에서 흉광이 뿜어져 나왔다.

[만약! 실패한다면 당신의 목숨으로 보상하시오.]

[배를 조종하시오.]

석두공은 다시 소리쳤다.

진우백은 굳은 표정으로 배를 움직였고 석두공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겉과 속이 다른 자였군! 사람을 잘못 봤어!]

불현듯 그의 뇌리 속으로 번개불같이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저자가 그녀를...)

강한 불안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녀의 무공은 진우백보다 훨씬 강하다. 또한 그녀가 어떤 술수에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때 불덩어리들이 유성처럼 배위로 날아들고 있었다.

쉬이이이이...

적룡혈운도의 선단에서 불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쐐애애액!

불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뒤흔들었다.

화르르르...

불화살이 돛에 꽂히자 불이 붙으며 불길이 크게 솟았다.

그러나 배는 달려오던 힘에 의하여 여전히 선단의 중앙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쉬이이이이...

쉬이이이이...

불화살들은 새벽바다를 대낮같이 밝히면서 진우백의 배로 날아왔다.

석두공과 진우백이 탄 배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채 달려들고 있었다.

[미친 놈들이다! 피해라!]

[아무도 없는 빈배다! 속았다.]

적룡혈운도 측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급박하게 들리며 배들이 방향을 틀었다.

돌진해 오는 진우백의 배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단은 좌우로 갈라지며 진우백의 배에 길을 열었다.

그때 선단의 외곽에 있던 배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배에 물이 샌다. 놈들은 물속에 있다!]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잠수조는 물속으로 들어가 놈들을 죽여라!]

분수자(分水刺)를 가진 자들이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바다속에서 핏물이 번져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해남도의 검수들과 적룡혈운도의 수하들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석두공의 주위는 불길로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마치 하늘을 받치기라도 한듯이 우뚝 서있는 석두공의 곁으로는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강기에 가로막힌 것이다.

진우백은 검풍을 일으켜 불길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며 소리쳤다.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계속 저들에게 부딪혀 가시오. 배는 금방 가라앉지 않소.]

석두공은 냉정하게 말했다.

진우백은 이제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산더미같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자신의 배가 다가갈 때마다 적룡혈운도의 배들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우왕좌왕하면서 대오를 잃어버리는 것을 그는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이같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면 반드시 패한다.

혼란이란 지휘체계밑 명령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저돌적이고 무식하게도 보이는 석두공의 전법이지만 그는 단 한척의 배로써 이백 여 척의 배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어버렸던 것이다.

그가 탄 배의 윗부분은 거대한 불꽃과 함께 연기도 사방으로 뿜어낸다.

안개, 그리고 연기, 무섭게 다가오는 화염선,

이백 여 척의 배들은 시야가 가로막히고 달려드는 화염선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속속 가라앉고 있었다.

해남검파의 제자들은 수공(水功)에 있어서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진우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피부를 익혀버릴 듯한 열기로 인해 옷자락이 계속 불에 붙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연이어 옷을 털어 불을 끄고 있었다.

쿵쿵!

쿠르르릉!

[으아악!]

적룡혈운도의 배들끼리 안개와 연기 속에서 방향을 부딪히며 가라앉았다.

배들은 벌써 반이 가라앉아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일백 척 정도, 그들은 공격할 대상을 잃고 우왕좌왕한다. 불타는 배를 무엇으로 공격한단 말인가?

? 말도 안되는 소리다.

끼이이끽!

그러나 진우백과 석두공이 타고 있던 화염선도 드디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미 불이 갑판아래로 들어가 배가 깨어지고 있었다.

배가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있을 것이오?]

진우백이 석두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바로 그때 석두공의 오른손이 높히 들려졌다.

쩌어엉!

그의 오른손에 있던 검룡이 불빛을 받아 빛났다.

 

[검룡풍운뇌섬(劒龍風雲雷閃)!]

 

석두공의 입에서 웅혼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 외침은 아수라장이 된 바다위의 대기를 찢으며 퍼져나갔다.

동시에 백금으로 만들어진 검룡이 한줄기 빛이 되어 나르며 뇌전처럼 적룡혈운도의 배위로 떨어졌다.

쿠아아앙!

콰아아아...

천지개벽하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대한 범선이 파괴되었다.

쿠아아아!

검룡은 다시 물속에서 승천하여 올랐고, 그것은 실을 꿴 바늘이 옷을 깁듯이 배들위로 차례차례 떨어져 내렸다.

꽈장창!

크악!”

케엑!

천지는 온통 깨어져 나가는 배들이 내는 굉음과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지르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가득차는 듯했다.

진우백은 넋을 잃고 있다가 자신의 옷자락에 붙은 불을 황급히 두드려 껐다.

(검룡의 진정한 위력이다! 저것이었다!)

그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석두공은 손을 저어 검룡을 조정하면서 악마처럼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소령이 진우백을 통해서 전했다는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적룡혈운도를 철저히 부수라고? 그래, 그렇게 해주지!)

쿠오오오오...

다시 한척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뇌주탄의 여기저기엔 가라앉는 배들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그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들의 비명이 귀청을 찢을 듯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돌연 허공에서 마치 여신의 속삭임인듯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귓전에서 속삭이는 듯 뇌주탄 전역에 조용히 퍼져나갔다.

석두공은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고오오오!

검룡이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시간마저 여인의 음성을 따라서 멈춰버린 듯하였다.

사방이 더 이상 고요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해졌다.

고오오오오...

허공에 어둠보다 검은 묵빛의 거조가 나타났다.

 

-묵령신조(墨靈神鳥)!

 

바로 묵령신조였다.

석두공은 그처럼 거대한 새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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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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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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