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第 十八 章

 

            劒龍亂舞 (1)

 

 

촤악! 촤악!

해남검파의 정예고수들을 실은 배가 불도 켜지 않은 채 물결을 해치며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물결은 잔잔했으며 바람은 순풍이라 배는 뇌주탄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진우백은 선실에서 검룡을 오른팔에 끼고서 그 비늘에 적혀있는 초식들을 연구하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가지라도 익혀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어떤 배가 우리 해남도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룡혈운도의 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척인가?]

진우백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척 뿐입니다.]

진우백은 밖으로 달려나가 제자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과연 한척의 범선이 동산령의 선착장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천월이 본파를 칠 모양이다.]

진우백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승부는 항상 비정한 것, 이긴다 하더라도 온전히 이기는 것은 없으며 진다고 완전히 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뇌주탄으로 적룡혈운도의 선단을 기습하기 위해 가고 있는 지금 적들도 해남검파이 본거지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면 피해만 입을 뿐 성과는 조금도 거두지 못한다.

남아있는 제자들의 무공은 약하고 가족들이 염려되기는 했지만 돌아갈 순 없다.

진우백은 무겁게 내뱉었다.

[빠른 속도로 항진해라. 우리는 이 일전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갈 수도 없다. 가족들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도 오직 이 일전에 달려있다.]

해남검파의 제자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심이 흘렀다.

그때 돌연 다른 선실에서 소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해남검파는 무사할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의심스러우면 잠시 배를 멈추도록 하세요.]

[...?]

[...?]

적룡혈운도의 고수들이 탄 배가 해남검파의 본거지가 코앞인 동산령으로 접근하고 있는 데도 무사할 거라니...

해남도의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배는 멈추어서고 해남도로 접근하는 적룡혈운도의 배를 보기 위해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만큼 제자들이 쏠렸다.

적룡혈운도의 배는 점차 동산령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을 참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가슴이 타는 것같은 심정을 어쩔 수 없었으리라.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 저저... ]

쿠오오오!

적룡혈운도의 배가 한자리에서 맴도는 것같더니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만세!]

[만세!]

해남도의 제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적룡혈운도의 배는 그 사이에 완전히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 × ×

 

[그 늙은 스님은 물재주도 뛰어나신 모양이군.]

석두공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웃으며 말했다.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재주가 뛰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발 달린 짐승이 땅위에 오른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해변으로 하나씩 나올 때 마다 늙은 스님에게 제압당하겠군. 오지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이야.]

석두공의 말에 소령이 웃었다.

[오지산보다 염라국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그렇게 웃을 때는 도무지 저승사자 같지가 않소.]

석두공이 갑자기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령은 몸이 굳어지며 물었다.

[왜 제가 저승사자지요?]

[당신이 가는 곳마다 죽음이 널려있으니 저승사자가 아니고 뭐겠소?]

석두공은 침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소령은 마른 손을 씻으며 불안스러운 듯이 선실 안을 거닐었다.

[....제가 당신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게 싫은 거죠? 그렇죠?]

소령의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석두공은 내심 당황하며 말햇다.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무림인으로서 어지러운 때에 살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무림이라는 게 어차피 그렇고 그런게 아니예요?]

소령의 어투에는 어떤 비애같은 것이 진하게 배여있었다.

석두공은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말이 틀린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소령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하고 있다. 비록 석두공이나 늙은 승려가 그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소령은 석두공의 맞은 편에 있는 침상에 가서 몸을 돌려 누웠다.

흐느끼는지 그녀의 어깨가 가는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석두공의 마음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자가 우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남자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석두공은 그때 처음 알았다.

또한 여인의 눈물은 용광로의 쇳물보다 뜨거워서 남자의 철석같은 마음도 녹여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시오.]

석두공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

소령은 여전히 어깨의 잔 떨림만을 보일 뿐이었다.

석두공은 다시 말했다.

[앞으로 소저에게 실례가 되는 말은 결코 하지 않도록하겠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

소령의 등을 바라보며 석두공은 선실의 문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가슴속이 저리듯이 아파왔다.

찢어지는 듯하면서도 공허한 것하기도 하고 텅 빈 무엇이 있는가 하며 무거운 것이 가슴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데 석두공은 중요한 무언가가 물살 속으로 흘러서 영원히 뒤로 사라져버리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해(情海)는 깊고 깊어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오로지 정에 발을 딛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도 어느새 정해에 깊숙히 빠져 있었구나.]

그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탄식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뇌주탄의 결전도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무심해졌다.

석두공은 자신의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비워진 듯하자 모든 것이 들어차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한 것을 느꼈다.

 

한편 소령은 선실의 자기 침상에 돌아누운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음모만 깨뜨리면 될 것을 지금까지 사람도 많이 죽였으니... 나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

그녀의 면사가 눈물로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손바닥으로 눌러서 눈물을 훔친 후 발딱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된 것... 이렇게 된 것... 이렇게 된 것... ]

그녀는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의 사슬을 매몰차게 끊어버리는 이빨의 마주침이 있었다.

비애가 밀려온 때문일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그녀를 휘청이게 했다.

갑작스런 그 현기증이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잖아도 상심해있던 그녀인지라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으로써 모든 것을 잊으버리려 했다.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꿈속으로 침잠하는가?

소령은 아득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

 

[호오! 이거 아주 아름다운 계집이군 그래. 이런 물건을 우리가 그냥 보내면 사람이 아니지. 암 사람이 아니야.]

귀두도(鬼頭刀)를 든 장한이 가슴에 무성하게 난 털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자 서생차림을 한 자가 백옥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를 말인가? 우리야 절에 시주는 못해는 여인들에게 육보시(肉布施)는 잘 해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더구나 이 계집은 성질이 못되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우리가 안아주지 않으면 평생 처녀귀신이 되어 죽을 거야.]

[낄낄낄! 아무튼 계집들의 재주란 게 참으로 묘해, 자기 말을 하는 줄 알면서도 못들은 척하고 시치미를 뚝 떼는 건 보통 공력이 아니란 말이야. 저기 저 표정 좀봐. 아예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하잖아.]

몸을 흔들흔들 하며 건달같은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자 귀두도를 든 장한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어디 그뿐인가? 원래 계집들에겐 그것 말고도 절묘한 신공이 있는데 그건 망원망신공(忘爰忘神功)이라고 하네.]

서생이 섭선을 살랑이며 짐짓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망원망신공? 그게 뭔가 처음 듣는 거네.]

[말 그대로 잊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잊어버리는 기술이라네. 계집들로서 잘먹고 잘 사는 것들은 다 이 신공을 깊이 터득했지. 일부 그렇지 않은 여자들만 평생 괴롭게 살 뿐이네.]

귀두도의 장한이 건달 대신 대답했다.

서생이 부채를 접어 자신의 손바닥을 치면서 대소했다.

[정말 그렇네. 여자들은 정말 그런 신공을 익히고 있지. 여자에 대해선 난 우습게 보는 사람이네만 그 신공에는 정말 감탄하고 있지. 심지어는 동시에 여러 사내에게 윤간(輪姦)을 당한 일 같은 것도 그저 상상속에서 잃어난 것인 듯 간단히 잊어버리거든.]

[여자에게 뭔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특히, 그 여자에게 자신이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많다면 말이야.]

건달이 입을 찢을 듯이 벙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소령은 순간 소름이 쫘악 끼쳤다.

(저들이 지금 내말을 하고 있었나? 여긴 대체 어디지?)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천근만근인 듯 손가락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소령은 속으로 소리쳤다.

(석두공! 석두공은 대체 어디 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소리는 목구멍에 걸려서 입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녀의 인형처럼 굳어진 눈으로 다가오는 건달같은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소령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했다.

소령은 그자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직감으로 알았다.

(! 이건 꿈이야. 꿈이 틀림없어.)

그녀는 부르짖었으나 눈앞의 것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귀두도의 장한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푸하하! 저 놀란 토끼 눈 좀 보라구. 난 그일 보다도 그 전에 이렇게 구경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네.]

[난 입술이 더 좋아,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이 고혹적이지 않은가? ]

서생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령은 그가 격고 있는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이 세놈의 음적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작은 배의 갑판이었다.

마치 건져올려진 물고기처럼 그녀는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것이었다.

건달이 소령의 발목을 잡으며 말했다.

[흐흐흐! 너는 우리가 건져올렸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죽더라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죽는 게 이승에서의 죄를 조금이라도 더는 것이야.]

소령은 내심 절망감에 소리쳤다.

(아 한 줌의 진기만 있어도...)

건달의 손은 그녀의 물에 젖은 흑색치마를 걷어올리고 있는데 소령은 조금의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히야! 기가 막히는군! 아직까지 이런 계집은 구경도 못해봤어. 이 허벅지 하나만 하더라도 숨이 막히게 만드는군. 꿀꺽! ]

건달이 그녀의 허벅지로 얼굴을 가져가며 소리쳤다.

허벅지 사이의 깊은 곳을 보려고 몸을 업드리는 바람에 그자의 팔꿈치가 소령의 허벅지에 눌러졌다.

(아얏!)

소령은 심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한가닥의 빛이었다.

굳어져 있던 그녀의 몸으로 가해진 건달의 작은 압박은 그녀의 몸이 깨어나게끔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소령은 자신의 혀끝을 깨물었다.

한입 가득 피가 머금어지면서 전신의 기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건달은 이제 막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린 손바닥만한 작은 천을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푸악!

순간 소령의 입에서 피안개가 뿜어졌다.

[!]

건달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퍼억!

그때 소령의 발이 그자의 허리를 찼다.

하지만 내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건달은 비틀거렸을 뿐이었다.

귀두도의 장한과 서생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곱게 죽지 못할 계집이로군... 육시를... ]

소령은 자신이 그들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속의 내공은 아직도 밑바닥 상태이다.

그녀는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몸을 떼굴 굴러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풍덩!

[이런! 계집이 물로 들어가 버렸어. 반쯤 죽었거나 실성한 것같기에 혈도를 누르지 않았더니... 에잇! ]

건달이 벗겨들었던 소령의 신발을 팽개치며 분을 터뜨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해남도의 배가 파괴되어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내가 조금도 모를 수가 있었을까?)

소령은 물속에 드러누워 오로지 호흡에 의지하여 해류를 따라 흘러가며 생각했다.

방금 전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칫했으면 짐승같은 자들에게 능욕당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두서를 잡을 수 없을 만치 혼란스러웠다.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분명히 그녀는 석두공과 다투고 나서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서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해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 세 음적의 배에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의 말로 미루어 생각해 볼때 그들이 자신을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같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소령은 물결에 몸을 맡긴채 흘러가면서 자신의 공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공력을 크게 해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의 다른 곳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한데도 그녀의 공력은 심한 손상을 입어있었다.

(회복하려면 한달은 걸리겠어... 한데 그는 어떻게 됐을까?)

소령은 석두공을 생각하곤 마음이 심란해졌다.

얼굴의 면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남쪽바다의 뜨거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까맣게 조여대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