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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絶陣 속의 復活

 

 

 

!

석두공은 자신의 몸이 기묘한 물체에 부딪혔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그가 극렬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알게된 것은 자신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위에 눕혀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리석 바닥 외에는 어떤 특이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있는 곳은 불과 백평도 되지 않는 작은 폐쇄된 공간이라는 것이 특기할 만했다.

똑바로 보이는 위쪽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것같은 푸른공간이었다.

석두공은 자신이 어떤 큰 짐승의 알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가슴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은 그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힘이 없을 수가 있을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까풀은 겨우 움직일 수 있었지만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의 단전에서 넘칠듯 찰랑거리던 진기는 한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고통속에서도 잠은 찾아왔다.

잠들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도 석두공은 잠들고 말았다.

 

두번 째로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이 훨씬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통도 상당히 가셔서 이제 극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서 사방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있는 공간엔 그 하나 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한 곳이구나. 이곳엔 밖으로 통하는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이곳에 와 있지?)

의문을 던져보지만 그 의문을 풀어줄 사람도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 깊히 박혀있던 사신겸과 두 자루의 못이 원래보다 훨씬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 그곳에서 석두공은 시간마저 느낄 수가 없었다.

그곳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그 만의 정지된 공간인 것같았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그는 졸려왔고 눈까풀은 의지의 힘을 배신하여 내리덮혔다.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 처럼 깊은 잠이어서 그는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꾸었겠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원래 그는 무엇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세번째로 그가 눈을 떴을 땐 그의 몸 옆에 사신겸과 혈정(血錠)이라고 불리는 못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가뿐하게 치료되어 있었으며 미약하나마 공력이 다시 단전으로 뭉쳐들고 있었다.

심한 기갈이 느껴졌다.

피를 많이 흘려서 아무래도 물과 영양을 보충해야만 할 것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은 멎어버리고 공간은 제한된 듯한 이 공간에는 그가 먹을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꼬로록! 꾸룩!

뱃속에서 염치없이 내장이 아우성을 쳤다.

[이곳은 누가 만들었을까?]

석두공은 뱃속의 민생고는 젓혀두고 잘 닦여진 대리석 바닥을 유심히 보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의 방망이를 줏어들고는 대리석 바닥을 두드려 보았다.

!!

한데 무엇이나 부수어 버리는 괴력을 가지고 있던 그의 방망이는 대리석에 대해서는 조금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방망이는 평범한 보통 방망이나 다름이 없었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한쪽에 떨어져 있는 사신겸을 두드렸다.

그순간,

쨍그랑!

유리조각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사신겸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사신겸도 잔혼살객의 독문병기인 만큼 보통 쇠로 만들어진 고철덩어리가 아니었다.

평범한 도검은 사신겸에 스치기만 해도 무토막처럼 잘려나가는 신병인 것이다.

한데 그 사신겸은 방망이에 박살이 났건만 대리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석두공은 혈정을 두드려 다시 실험해 보았다.

혈정도 가루로 변해 버렸다.

알 껍질같이 생겨 벽과 천정을 동시에 잇고 있는 푸른벽을 두드렸다.

!

이번에도 그의 방망이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무지 그 벽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몇 가지의 시도를 쉬지않고 해보았으나 석두공이 얻은 것은 낙담뿐이었다.

상처는 그럭저럭 치유가 되었지만 공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는 것도 석두공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두가지의 힘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오독패혼공을 갈천상에게서 이어받았음으로 인해서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된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고검문의 문주인 섭군천에게서 전수받은 포연신공의 위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잔혼살객의 공격에 그의 공력이 모두 흩어져 버렸을 때, 다른 한줄기의 공력이 그의 심장과 내장을 보호하여 그가 죽지 않게끔 했었다.

오독패혼공만이 있었어도 그가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고, 포연신공만 익혔어도 그가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몸속을 돌고 있는 공력은 포연신공을 익힘으로 해서 형성된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본래 안쪽에 존재하던 것이었다.

그의 고강하던 내공과 자리바꿈을 하여 그의 그 뛰어난 공력들은 모두 그의 몸속 깊히 숨어버린 뒤였다.

그것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면 큰 충격을 받아 지금의 공력이 흩어져야만 가능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석두공은 백평 남짓한 그 공간을 맴돌다가 드러누워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눈앞이 노랗게 보였다.

문득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피에 젖은 종이뭉치가 두개, 그리고 얼마의 돈이 나왔다.

찌이익!

그는 종이를 조금 뜯어서 입안에 넣고 씹었다.

무엇이나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같았다.

연거푸 종이를 세장이나 씹어먹고 나자 배가 불러나오는 것같았다.

이렇게 하여 기이한 공간에서의 석두공의 기이한 삶은 시작되었다.

종이를 뜯어먹고 그리고는 옷도 조금씩 조금씩 먹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곳은 밤도 없고 낮도 없으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득 어느 순간에 석두공은 그 공간이 자신의 머리속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그는 자신의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속도 그 공간을 닮아 더욱 텅비어 갔다.

그에 따라서 그의 머리속은 안개가 걷히는 것같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그때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던 사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운청풍객의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으며 잔혼살객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혼장서생 금사종이 생각나기 시작했으며 고검문주 섭군천도 생각났다.

한데 석두공에게서 그런 변화가 일어남과 동시에 그가 있는 그 공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푸른 벽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었다.

석두공은 중얼거렸다.

[이것은 어쩌면 내 자신이 만든 것인지도 몰라.]

그는 방망이를 들고서 눈을 감은 채 벽으로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

슈웃!

그는 벽에 다다랐고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벽을 뚫고 나갔다.

그의 몸은 벽을 그냥 투과해 버린 것이었다.

석두공은 자신의 걸음수를 계산하고 있었기에 눈을 감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슴에 터질듯한 기쁨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또 어떤 것이 눈앞에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도 밀려왔다.

 

× × ×

 

항아리처럼 생긴 곳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은 큰 항아리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정은 뚫려있어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밑쪽은 사방이 완전히 막힌 절지였다.

풀도 있고 샘도 있었으며 나무들도 있었다.

풀은 당연히 땅에 깔리는 것이겠지만 아름드리 나무들도 위로 자라지 않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그 나무들에는 황금색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렸고,

[뾰롱뾰롱!]

소리를 내면서 과일을 쪼는 새들도 있었다.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하늘로 빛은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늘 환했다.

석두공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다만 대리석으로 깔려진 바닥만 있을 뿐, 이미 벽도 존재하지 않았고 기이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먹다가 남겨놓은 옷이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샘물을 마시고...

과일을 따먹고...

새를 잡아서 구워먹었다.

이제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항아리 같은 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벽을 파고 올라가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벽은 너무도 물렀다. 억지로 판다면 그곳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석두공은 어느 날, 풀을 헤치고 돌아다니며 칡덩쿨과 등나무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벽가로 옮겨 심어 놓았다.

그것들이 벽의 바깥쪽에 이르도록 자라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멀리 내다보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석두공은 샘물에서 세수를 하다가 낯선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샘물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커보였다.

[내가 이렇게 컸는가?]

석두공은 그제서야 자신의 손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했던 주먹도, 작았던 발도 이젠 제번 큰 것같았다.

또 어느 날, 석두공은 자신의 턱이 까칠까칠한 것을 느꼈다.

수염이 살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뼈마디는 굵어지고 강해졌으며, 키는 육척에 달할 정도로 훤칠해졌다.

옷을 뜯어먹어버린 후로 알몸이 된 그의 몸에도 사나이의 성징(性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종종 가슴속이 답답해 오며 원인모를 열기가 불끈불끈 치솟곤 했다.

그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도 점점 성숙되어 치기어린 생각들이 가시고 의젓하고 당당하면서도 강렬한 패혼(覇魂)을 보였다.

이따금씩 머리속에 떠오르는 동작들을 몸으로 펼쳐 보이는 가운데 그의 무공도 점점 완성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미약했던 포연신공의 내공도 점점 웅대해지고 있었다.

 

흙벽 아래 심었던 칡덩쿨이 십 수 장이나 올라가 있는 어느 날 곤히 잠들어 있던 석두공은 몸을 흔드는 진동에 눈을 번쩍 떴다.

드르르르...

대리석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이쿠! 무너지면 어떡하나?)

석두공은 나무위로 몸을 피한 후에 대리석 바닥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망이로도 어쩔 수 없었던 바닥이었다.

한데,

드르르르르...!

타타타타탁...!

진동하던 대리석 바닥이 급기야 가운데서 부터 일어나면 접혀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손이 깔아놓은 멍석을 마는 것처럼 보였다.

타타타탁!

대리석 바닥이 접혀지는 곳에서는 그에 따라서 무엇인가가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드르르르...!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대리석 바닥이 완전히 걷혀졌을 때,

우르르릉... 쩌저적...!

지면이 갈라지면서 무엇인가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

그것은 탑()!

묵광이 흐르는 거대할 석탑(石塔)이 아닌가?

땅속에 웅크리고 있던 거수(巨獸)가 몸을 일으키듯, 굉음을 울리며 웅장무비하게 솟아나는 석탑!

총 삼층(三層)으로 된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돌을 깎아서 만든 정교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석두공은 긴장된 표정으로 석탑을 주시했다.

어떤 강렬한 힘으로 석탑은 석두공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쿠르르릉...

그 사이에 철탑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고 진동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석탑은 총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층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일층 문위에 양각으로 부조된 웅휘무쌍한 글씨가 보인다.

 

<천신폭풍탑(天神暴風塔).>

 

[천신폭풍탑...!]

석두공은 격동에 찬 일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신폭풍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천신폭풍탑이 자신의 단조로운 생활에 극적인 변화를 줄 그 무엇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

석두공은 격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일층의 문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것은 숙명에로의 이끌림이었다.

 

일층,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한쪽 벽면에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본좌 폭풍무존(暴風武尊)은 천신폭풍탑을 만든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무엇때문에 본좌가 이 천신폭풍탑을 만들어야 했는가?

대체 사부의 뜻은 무엇이었는가?

본좌는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이 절곡으로 들어와 이백사십 년을 보냈다.

천신폭풍탑을 만든 것도 사부의 뜻,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도 사부의 뜻,

본좌의 인생은 오로지 사부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단 본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둘째 사제는 포연신공을 가지고 어느 곳인가로 갔다.

셋째 사제는 천하의 모든 기학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본회에서 익혔던 일신의 무공을 폐쇄당한 채 강호에 내쳐졌다.

본좌는 폭풍무존다.

본좌의 무공은 사부를 앞 지른지 오래였으며, 석년의 달마조사나 본 은세정검회(恩世正劒會)의 창시자인 벽천검왕(劈天劒王)마저도 본좌보다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천강철골신(天剛鐵骨身)을 타고난 나 폭풍무존,

능히 고금제일을 자부하건만 사부는 어이하여 내 인생을 절곡속에 묻어버렸는가?

은세정검회의 정통후계자인 나는 이렇게 절곡 속에 스스로 힘을 분출하지 못해 죽어가는데 은세정검회는 아마도 넷째 사제가 이었겠지.

사부가 천년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음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 훗날을 위해서 본좌의 젊음이, 본좌의 패기가 이 절곡속에서 시들어가도 좋단 말인가?

본좌는 분개한다.

본좌는 사부의 뜻을 단 한번만 거스르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이백사십 년을 이곳에서 보낸 데 대한 보상이든 댓가이든 상관이 없다.

본좌는 죽지 않을 것이다.

사부의 모든 안배가 우리 은세정검회의 숙적인 독존패왕궁의 야심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부는 너무 소심했던 것이 된다.

본좌는 결코 이대로 죽지 않는다.

이대로는...

...>

 

폭풍무존이라는 사람은 학문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는지 문장이 두서가 없고 어지러웠다.

스스로 고금제일인임을 주장하고 있는 은세정검회의 정통후계자 였다는 폭풍무존,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은 석두공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은세정검회... 패왕독존궁... ]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같기도 하고 없는 것같기도 했다.

폭풍무존의 한이 맺힌 글을 뒤로하고 석두공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이층에 막 올라서는 순간,

그그긍...

이층의 석문이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둔중한 기음과 함께 열렸다.

[...!]

석두공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석문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드넓은 공간이었는데 역시 일층과 마찬가지로 공간 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석두공는 의아로운 눈빛으로 사면을 휘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 벽면 전체를 가득 메운 빽빽한 그림과 글씨 뿐이다.

하지만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석두공은 다시금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폭풍무존의 무공은 정말 고금제일이라 할만하구나. 저 모든 것이 석벽을 두부처럼 주물러서 양각시켜 만든 그림과 글이라니...!)

그렇다.

당금의 천하를 통틀어도 이와 같은 공력을 지닌 인물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돌을 부스러뜨리지도 않고 용암처럼 녹여서 글자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경이,

석두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부의 뜻이 미치는 곳은 이곳까지 뿐이다.

사부의 명에 따라 본좌 폭풍무존은 이곳에 본좌의 최고 무공인 천신폭풍보(天神暴風步) 단 한가지만을 적어놓는다.

하지만 스스로도 본좌의 실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다.

천신폭풍보는 본좌가 아닌 그 누구도 익힐 수 없는 것을...

설마하니 사부는 본좌가 이것을 적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어찌되었든 후세의 누군가가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는 알게 되리라. 세상에 본좌의 천신폭풍보같은 무공도 존재했었음을...>

 

폭풍무존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 자신하는 만큼이나 사부를 냉소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시각은 상당히 삐뚤어져 있다는 것이 석두공의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공은 인간적으로 폭풍무존에게 강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석두공은 온순하며 사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제자였다.

 

석두공은 눈은 폭풍무존이 기록해놓은 천신폭풍보를 보고 있었다.

한데 그는 그것을 읽어가면서 점점 가슴이 떨려오고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건...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어떻게 이게 인간의 무공일 수가 있는가?]

떨리는 음성이 석두공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천신폭풍보의 구결들은 석두공의 눈을 도무지 뗄 수없도록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의 무공이 이처럼 구결만으로도 사람을 떨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석두공이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동호천의 제자로 어떤 무공이든지 암기는 할 수 없어도 펼칠 수는 있는 기괴한 천재였지 않은가?

그런 그를 놀라게하는 천신폭풍보는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 × ×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절학의 하나의 권법(拳法)속에 응축시킨다.

또 어떤 사람은 검법(劍法)이나 도법(刀法) 속에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별난, 정말 별난 사람은 남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에 자신의 혼을 담기도 하는 것이다.

폭풍무존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천신폭풍보라른 하나의 보법(步法)에 자신의 모든 무학을 담았다.

검을 익힌 사람에게 검이 모든 것이듯, 폭풍무존에겐 천신폭풍보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신공(絶對神功)이며, 또한 초식이기도 하고, 빛을 방불케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신법이기도 하며, 부딪히는 것은 무엇이나 깨뜨릴 수 있는 패도적인 강기신공이기도 했다.

천신폭풍보가 있는 한 폭풍무존을 죽일 수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에게 천신폭풍보가 있는 한 죽일 수 없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천신폭풍보는 진정 그가 스스로 고금무적임을 자부하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천신폭풍보는 잊어먹는 데는 도사인 석두공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것으로 낙인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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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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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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