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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四 章

 

                  始作된 곳에서 始作

               

 

 

동쪽 능선이 붉게 물들고 하늘 높은 곳에서 부터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은 사라지고 붉은 수레바퀴가 동쪽에서 부터 불끈불끈 치솟아올랐다.

눈부신 빛이 석두공의 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발이 우뚝 멈추어섰다.

긴 꿈이 끝나고 드디어 눈을 뜬 아침같았다.

석두공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부는 내게 십대고수들끼리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중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부운청풍객 등이 삼마경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들을 죽이는 것이 내 임무다.]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앞으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석두공의 모습은 그 마을로 사라져갔다.

 

* * *

 

동정호(洞定湖)!

맑은 물결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수양버들을 흔들어 놓는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뱃놀이 나온 유람객들의 유람선과 어부들의 고깃배가 한가롭게 물위를 오가는데,

“....!”

언젠가부터 물위를 미끌어지는 작은 배의 선수(船首)에 서서 멀리 호면을 바라보고 서있는 청년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균형잡힌 몸매, 눈부신 백의는 그 청년의 수려한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는데 그는 약간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사부...!]

명문세가의 귀공자처럼 보이는 청년, 그는 바로 석두공이었다.

지난 한달 동안 그는 발빠른 행보로 천하의 동정을 두루 살피고 다시 동정호로 돌아왔다.

그가 본 바로는 천하는 이미 부운청풍객 등 삼인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대항할 힘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석두공도 그러하거니와 자칭 고금제일인인 폭풍무존 또한 있지 않은가?

석두공은 고검장의 폐허에도 가보았지만 고검장주 섭군천은 어디론지 떠나고 찾을 수 없었다.

동정호로 돌아온 석두공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미 천하는 그 혼자의 힘으로 돌이킬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세상은 극도로 혼란스러우며 옳바른 뜻을 세우고 정의를 숭상하던 자들은 오직 두가지의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굴복하느냐 아니면 잠적하느냐...

바야흐로 사마의 창궐은 극에 달했으며 무림에서 도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짐승같은 속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제자가 뜻이 같지 않은 사부를 죽이는 일이 그다지 기문(奇聞)이 아니게 되었고 수십 년을 사귀었던 친구지간이 원수로 돌변하여 죽고 죽이는 것도 더문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의 가치관도 파괴되어 그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석두공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무림은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무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주어야만 한다.]

그렇다. 누군가가 이 혼란스런 무림에 혼란을 걷어내고 새 질서를 부여해 주어야만 한다.

그것은 당금 무림에서의 지각있는 모든 인사들의 바람이고 뜻이기도 했다.

석두공은 스스로 그 일을 떠맡으려고 하는 것이다.

촤아! 촤아!

배는 점점 호수 가운데로 다가가며 오년 전 석두공이 사부인 동호천을 모시고 살았던 부주가 있었던 곳 근처로 향했다.

그때 노를 젓던 늙은 사공이 말했다.

[공자님! 우리 배는 지금 몇 해전만 해도 결코 갈 수 없었던 곳을 지나고 있읍지요.]

석두공은 미소를 지었다.

사공은 그가 흥미를 갖는 것같자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객지에서 오신 분들 중에서 이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이 늙은이의 말은 오로지 진실입니다. 이곳엔 한때 북을 쳐서 바람을 부르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치는 북소리가 동정호 곳곳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지요.]

사공은 눈앞의 청년이 바로 그 소년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북소리가 끝나기 전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해서 물속에 빠져죽은 사람들의 수만도 수십 명에 이르지요. 한데, 그 소년에게 구원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에는 그 소년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소년을 마귀라고 두려워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 소년이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오?]

석두공은 짐짓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물었다.

사공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있던 부주는 불타서 가라앉아 버리고 그 소년은 사라져 버렸지요. 들리는 말로는 그 악행이 하늘에 달해서 벼락이 떨어졌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의 말로는 그 소년은 천상에서 도망친 풍신(風神)이었는데, 함부로 바람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신선들이 신장들을 거느리고 내려와서 죽였다고도 하지요. 그때 떠도는 말로는 소년이 하도 무서운 힘을 지녀서 신장들이 모조리 죽고 신선들도 도망쳤다고 하더군요. 동정호의 물이 신장들이 흘린 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지지요.]

석두공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한 평이 아주 상반될 뿐만 아니라 아주 과장된 면도 있었다.

무림인이 아닌 세상의 속인들의 말이니 새겨들을 것은 없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이 모두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측면과 말로 떠돌 수 없는 사연들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니...

대성인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믿기 어렵거늘 하물며 세상의 떠도는 말을 믿을 손가?

 

사공의 이야기는 석두공에게 모든 것은 그 이면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문득 석두공이 말했다.

[노인장, 그만 여기에 멈추시오.]

배는 부주가 있던 곳에서 맴돌았다.

석두공은 보자기를 풀어서 챙겨왔던 술과 고기를 뱃전에 놓았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잔에 가득 술을 따른 후 호수를 향해서 두번 절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이날 석두공이 기억하는 바로는 그의 사부 동호천의 기일(忌日)이었다.

늙은 사공은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풍래동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럼 혹시 이 공자도 하늘의 천신?)

사공의 손과 다리가 달달 떨렸다.

풍래동자가 풍신이었으니 만큼 그의 눈앞에 있는 청년은 어쩌면 뇌신(雷神)이나 우신(雨神)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공은 호수에 술을 붓고 있었다.

오년 만에 돌아온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집이었다.

석두공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부... 이곳에서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난세가 여기서 시작되었듯이... 저도 여기서부터 천하를 평정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난세가 시작된 곳에서 천하의 평정도 시작해 나가겠다는 석두공의 맹세...

석두공은 자기의 잔에도 한잔의 술을 따라 들이키고는 적어왔던 제문을 읽지도 않고 태웠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제문이 절로 불붙으며 사그라져 버렸다.

(...뇌신(雷神)이었구나!)

늙은 사공은 내심 비명을 지르며 덜덜 떨었다.

[노인장, 돌아갑시다.]

제사를 마친 석두공이 사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공은 너무 놀라서 석두공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듣지도 못했다.

그는 석두공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보고는 그만 갑판에 넙죽 업드리며 두손을 싹싹 빌었다.

[이 김과삼이 눈이 있어도 신이 제 배에 왕림하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 나이 칠십이나 집에는 구십된 노모가 계십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석두공은 어이가 없어 풋소리를 내며 웃었다.

[노인장, 신이라니 무슨 말이오? 어서 돌아가기나 합시다.]

그렇지만 사공은 주절주절하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석두공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강도가 겨우 늙은 사공을 협박하는가?]

[멈춰라!]

두가지의 음성이 동시에 석두공의 귓전을 때렸다. 하나는 내공이 충일한 남자의 웅혼한 음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뾰쪽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석두공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척의 배가 각기 서쪽과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서쪽 배의 선상에는 죽립을 선 건장한 사나이가 뒷짐을 지고서서 석두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다가오는 배에는 백의를 입은 면사녀(面紗女)가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우뚝 서있었다.

[...!]

석두공은 굳이 설명하려고하지 않았다.

자신이 강도가 아닌데 그렇게 해야할 필요는 어디있는가? 어쩌면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강도가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안은가?

석두공은 그들을 개의치 않고 노인을 재촉했다.

[노인장, 그만하고 갑시다. 사람들이 나를 강도로 오인하고 있소.]

그러나 늙은 사공은 일어나지 않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을 뿐이고,

화라라락!

남쪽의 배로 부터 백의 면사녀가 표표히 날아왔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흰 나비를 연상시켰다.

백의면사녀는 허공에서 한바퀴 맴돌며 선상에 가볍게 내려섰다.

석두공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공을 어떻게 하여 이곳을 떠나기는 틀렸다.

[신법이 대단하군.]

석두공은 나직하게 말했다.

백의면사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 것같았다.

그때 늙은 사공이 석두공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만약, 이 개같은 늙은 목숨을 살려만 주신다면 호변에 사당을 지어 뇌신님을 모시겠습니다. 제발... ]

[...?]

백의면사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

그녀가 대충 사태를 파악하고 실소했다.

석두공은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소이다. 가져오신 배로 호변으로 건네다 주시면 감사하겠소.]

[그렇게 하세요.]

백의면사녀가 눈에 반짝 빛을 발하며 말했다.

석두공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한번 만난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사공의 손아귀에서 발을 뽑았다.

그때였다.

스슷!

그의 눈앞으로 죽립객이 내려섰다.

[칠성추운신법(七星追雲身法)!]

석두공이 짧게 내뱉었다.

죽립객의 죽립속에서 안광이 백열했다.

[소협은 누구시오? 칠성추운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텐데...]

[당신도 잊지 않고 왔군요.]

석두공의 목소리가 격하게 울려나왔다.

죽립객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부르르 떨렸다.

[석두공! 석형제이시오? ! 아직 그 모습이 남아있구려.]

그는 덥썩 석두공을 껴안으며 죽립을 벗어던져 버렸다.

그는 요사이 일초진천수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금사종이었다. 혼자서 무림의 운명을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또 하나의 젊은이였다.

동호천의 기일을 맞아 그는 먼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정호로 찾아왔던 것이다.

 

금사종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동노선배께서 돌아가신지 불과 오년 만에 천하가 이런 꼴이 되었으니, 지금에 와서야 그분이 무림을 떠받친 기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오.]

[...!]

[...!]

석두공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약간 괴팍스러웠던 동호천을 떠올리며 그 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서 백의면사녀는 퉁소를 꺼내들고 앉아 그를 훔쳐보았다.

배는 호변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석두공은 이상하다는 듯이 백의면사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아무런 볼일이 없을 것같은데 자꾸만 그녀는 석두공과 금사종을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혹시 금사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따라오겠느냐 하는 추측이 그 생각을 확신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금사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호수에서 백의면사녀가 석두공의 배로 먼저 건너간 후 아무런 충돌도 일지 않고 배를 빌려주기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으랴싶어 석두공과 백의면사녀가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객점의 방에 들어섰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악양제일루(岳陽第一樓)!

 

금사종은 들어서자마자 점소이에게 방을 달라고 했다.

[몇 개가 필요하신지요?]

금사종은 석두공과 백의 면사녀를 힐긋 보고 말했다.

[두개!]

점소이는 삼층의 객실로 그들을 데리고 올라갔다.

복도의 끝에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방문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이 두곳을 사용하십시오. 삼층에서는 제일 좋은 방들입니다. 물론 전망도 아주 좋지요.]

[술과 음식을 가져다 주게. 되도록 많이.]

금사종의 말에 점소이는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좌측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로 백의면사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들어갔다.

그리고 두 남자가 동시에 자리를 권하는 탁자에 냉큼 먼저앉았다.

[고마워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음성이란 그녀의 음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듣는 사람의 심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음성이었다.

금사종이 먼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석형제! 석형제가 무사한 것을 보니 난 아무 할 일도 없을 것같소. 정말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같소.]

[금형! 아니, 금아저씨! 약속했던 오년은 이미 지났으니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십시오.]

석두공이 함께 웃으며 말했다.

지금에 와서 그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금사종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동복신과 동적선 외에는 꼽을래야 꼽을 사람이 없다. 금사종은 석두공에게 있어서 핏줄같이 느껴지는 사람인 것이다.

금사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석형제를 아우라고 부르겠네. 나 또한 동호천 노선배님으로 부터 무공을 전해받았으니 따지자면 우린 사형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형님이 생겨 마음이 든든합니다.]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 절하며 말했다.

금사종도 마주 절했다.

문득 백의면사녀가 말했다.

[두분이 서로 형제가 되신 것을 경하드려요. 함께 있는 제가 선물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녀는 소매속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비단주머니를 열어 비취색이 감도는 두개의 구슬을 탁자에 놓았다.

[이건 비취피독주(翡翠避毒珠)라는 물건으로 자웅이 한쌍이예요. 웅주(雄珠)는 몸밖에서 침투하는 만독을 물리칠 수 있고, 자주(雌珠)는 몸속으로 스며든 독을 흡수하는 공능이 있어요. 제 성의이니 두분이서 하나씩 가지도록 하세요.]

[정말 감사하오.]

금사종이 포권하며 말했다.

[내가 이미 만독불침이니 아우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서로의 정표이니 하나씩 갖도록 하세.]

석두공과 금사종은 비취피독주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

백의면사여인의 눈에 서운한 빛이 잠시 감돌다 사라졌다.

원래 이 비취피독주는 부부가 나누어 갖는 물건이었다.

비취피독주에는 단순한 피독의 효력 말고도 공력을 증진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부부가 서로 하나씩 나누어 가져야만이 발휘되는 능력이었다.

비취피독주의 웅주는 백의면사녀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주었져야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니...

금사종이 말했다.

[고금문주이신 섭군천 노선배를 기억하겠는가?]

석두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전에 장강에서 그분을 만났네. 이 우형이 죽을 뻔 한 것을 구해주신 것이지. 한데 그분의 무공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신 고강했다네. 삼마경을 익힌 삼인의 손에서 나를 간단히 빼내셨을 정도였으니까.]

[부운청풍객 등의 손에서 말입니까?]

석두공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네. 한데 휴... ]

금사종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

석두공과 백의면사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분이 무림에 나오셨다면 다행이지 않습니까? 특히 부운청풍객은 그분의 제자이기도 하니...]

석두공의 물음에 금사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삼마경을 익힌 그자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네. 앞으로 내 무공이 좀더 높아진다면 그들중의 하나 정도는 능히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금사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내뱉었다.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고검문주이신 섭군천 노선배라네.]

[...?]

[...?]

금사종의 말에 석두공과 백의면사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분은 지금 천도(天道)를 시험하고 계시는 중이네. 삼마를 죽일 능력이 없어서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는 목이 타는 듯 찻물을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은 그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네. 부운청풍객이 일년 이내에 죽는다면 하늘의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가만히 있겠지만, 만약에 부운청풍객이 일년안에 죽지 않는다면, 그분 스스로 무림을 피로써 씻어내겠다고. 말씀하시기를 그때가 되면 검을 든 자도 주먹을 쥔 자도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더군.”

금사종은 숨을 들이 쉬지도 않고 다 말해버렸다.

백의면사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같았다.

그녀는 금사종에게 물었다.

[고검문이란 문파는 처음 듣는데 그렇게 고강한가요?]

금사종이 엄숙하게 말했다.

[검성도 고검문의 제자이고 부운청풍객도 고검문의 제자요. 하지만, 그들은 고검문의 무공을 완전히 잇지도 못했소. 고검문주이신 섭군천 그분의 무공은 이미 신인(神人)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소.]

“....!”

금사종의 말을 들은 백의면사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석두공은 눈을 감고 있다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럼 죽여야겠군요.]

[누굴? 섭군천 노선배를 말인가?]

금사종이 놀라 물었다.

석두공이 고개를 저었다.

[부운청풍객을 죽여야지요.]

그때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백의면사녀는 직접 술잔에 술을 따라 금사종과 석두공의 앞에 놓았다.

금사종은 석두공이 보통사람과 조금도 차이 없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자네! 고질이 완치된 모양이군! 축하하네. 축하해.]

석두공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빠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

[소림사에서 만배노선사님을 만나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니까 머리가 트이더군요. 하하... 그저 돌머리는 두둘겨서 깨야하는 모양입니다. ]

그 순간에 백의면사녀의 눈이 찰라적으로 반짝 빛을 발했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잔을 주고 받으면서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지 몇 시간 이미 밤은 깊어 이경이었다.

금사종이 말했다.

[구대문파를 찾아가 자네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그들의 힘을 빌릴 준비를 해놨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이곳에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듯이, 이곳에서 부터 그 끝도 시작될 것입니다.]

석두공이 그답지 않게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쇠하는 법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부운청풍객 등의 세사람은 지금 한계에 달해 있습니다. 그들이 능력으로 달할 수 있는데 까진 다 달한 것이지요. 하나, 참새가 죽을 때 짹 소리를 내고 죽듯이 그들의 행동은 더욱 격해지리라는 것이 제 짐작입니다.”

금사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네. 그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모르고 너무 설쳐되고 있네. 결국 그들이 성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애기지.]

석두공이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그들 삼인을 제거한다면 오히려 혼란은 가중됩니다.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마졸(魔卒)들이 흩어진다면 무림은 전혀 수습할 길이 없게되고 맙니다. 우선은 그들의 야욕을 꺾어서 수하들이 머리를 감추고 숨어들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 후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순서로군.]

석두공의 무림을 통찰한 계획에 금사종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석두공은 다시 말했다.

[형님께서는 잔혼각과 적룡혈운도의 세력을 유심히 관찰하십시오. 아마 서로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의 야욕을 분쇄시켜주십시오. 벌써 그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 형님을 따라가지 않고 있소?]

석두공은 백의면사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사종은 이미 떠나갔다.

그런데도 백의면사녀가 그대로 자리에 남아있자 석두공이 물은 것이다.

백의면사녀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살짝 걷은 면사 아래로 앵도같은 입술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왜 그를 따라 가야 하나요? 저는 그와 초면인데... ]

[...?]

석두공은 그제서야 사실은 그녀가 자신들과는 아무 면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구나.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말을 이 여인이 모두 들었으니 이걸 어떻게 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죽여야만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백의면사녀가 말했다.

[한잔 드시지 않겠어요? 저를 죽이시려면 술기운을 빌려야죠.]

석두공은 속마음을 들킨 것같아 흠칫했다.

쪼르르르...

백의면사녀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염려마세요. 비밀을 옅듣기 위해 왔다며 제가 아무리 간이 크기로서니 당신들 면전에서 들을 수 있겠어요?]

[소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소.]

석두공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면사녀가 말했다.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세요. 그리고, 그 실수를 저를 죽이거나 다른 외부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만회하려고 하지 말아요. 만약 당신이 저를 믿고 덮어두기로 하신다면 당신에게 득이 있을 뿐 해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저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당신은 일생에서 가장 강한 적을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단호한 말이었다.

조리가 아주 정연한 말이어서 석두공은 일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백의면사녀는 일어서면서 돌연 침상으로 가더니 침구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문을 밀고 나가면서 말했다.

[건너편 방에서 자겠어요.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

문이 닫히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두공은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협박을 당한 것같기도 한데 또한 침상을 봐주고 가는 의도는 또 무엇인가?

석두공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인?)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래야 열 손가락에 다 꼽히고도 손가락이 남을 것인데 어떤 사람이 그를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석두공으로서도 도무지 그녀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망가거나 어떤 술수를 부릴 것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이 가셔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석두공은 깜짝 놀랐다.

비밀을 옅들은 의문의 여자, 죽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경계심이 크게 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일었던 살심마저 백의면사녀의 말과 간단한 몇가지 행동으로 인해 사그라져 버린 것이다.

 

× × ×

 

석두공은 인기척을 느끼고 슬며시 눈을 떴다.

!

창문을 가렸던 휘장이 걷혀지면서 눈부신 햇살이 방안으로 비춰들었다.

그는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창문가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그만 일어나셔야죠. 해가 떴는데도 등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면사녀...!)

그랬다. 그의 방으로 들어와 휘장을 걷고 창문을 열어젓힌 사람은 바로 백의면사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백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흑의를 입고있었다.

긴치마는 발끝을 덮고 늘어져 있으며 은장식이 붙은 요대를 했으며 머리는 쪽을 진 후에 금봉채(金鳳釵)를 꽂았다.

또한 요대에는 백옥퉁소가 단정하게 꽂혀있었다.

겉모습은 간밤과 아주 다른 모습이었으나 석두공은 한눈에 그녀가 백의면사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탁자로 걸어가서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은은한 다향이 석두공의 폐부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리와서 차를 마셔요. 하지만 그전에 세수를 하는게 좋을 것같군요. 얼굴이 말이아니예요.]

[난 아직 옷도 입지 않았소.]

석두공은 홑이불을 덮은 채 말했다.

도무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무릎위에 손을 놓고 다소곳이 앉아서 말했다.

[기다릴테니 염려마세요.]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발치를 바라보았다.

석두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인의 태도는 그대로 옷을 입으라는 말로 보였다.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처럼 그는 여인을 힐끗힐긋 훔쳐보면서 옷을 집어들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 옷은 입지 마세요. 침상아래에 옷을 가져다 놓았어요.]

과연 눈을 돌리니 침상아래에 단정하게 개여져 있는 묵빛 흑의가 보였다.

[이걸 입으란 말이오? 이건 내옷이 아니오. 소저께서 내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소.]

석두공은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원래부터 당신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아마 없을 거예요. 그것도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니까요. 당신의 옷도 당신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 무엇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것들은 당신 손에 들어갔고, 당신은 그것을 당신 것이라고 말하겠죠? 그렇다면 그 옷이 당신 것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아니예요?]

석두공은 한숨을 내쉬엇다.

[휴우! 소저의 말은 정말 이상하오. 소저는 유자(儒子)? 말로써 사람을 혼돈 시키는 자는 유자라고 했는데, 소저가 바로 그런 것같소.]

여인이 눈꼬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말을 듣지 마세요. 하지만, 대장부가 한낱 여인의 성의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알면 당신을 비웃을까 두렵군요.]

말로는 도저히 못당할 여인이었다. 교묘한 언변이 석두공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같았다.

석두공은 자신이 도망치지 않는한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도망치기는 싫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베푸는 성의가 그렇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속으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흑의를 입었다.

(어떤 고수보다도 무서운 것은 여인이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것은 말이라...)

 

[차를 다마셨으면 일어나야 해요. 우린 바빠요.]

면사녀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석두공은 화가난 듯이 말했다.

[나는 아직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소.]

면사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당신이라고 하세요.]

[...!]

석두공은 가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신이란 다정한 말로 부르라니....

[호호... 그게 어색하면 제 이름을 부르세요. 제 부모님은 절 소령(笑鈴)이라고 부르시니까요.]

석두공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정말로 방울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가 소령이라고 이름을 지을 만 한 것같았다.

소령은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빨리 오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대체 어딜 가자는 거요.]

석두공은 자신이 하기로 생각한 일이 있기에 못마땅한 음성으로 말했다.

밖에서 소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종맹(劒宗盟)에서 호표장(虎彪莊)을 흡수하려고 하는데 가만있을 거예요?]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섰다.

 

호표장은 이곳 악양에서 동쪽으로 이백리 정도 떨어진 호조산(虎爪山)이라고 하는 암산(巖山)에 자리잡고 있는 방파이다.

호표장의 제자들은 불과 백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그 열배가 넘는 대호(大虎)와 표범들을 기르고 있다.

지금 세상에 나오는 호피(虎皮)들 중의 열에 아홉은 호표장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호표장은 많은 호랑이와 표범을 사육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그들의 생계수단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였다.

호표장의 장주인 오호단혼도(五虎斷魂刀) 설곽(薛藿)은 어떤 짐승이던지 간단하게 길들이는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상당히 독불장군격인 인물로 남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십대고수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의 무공은 그들에 비해 그렇게 처지는 편이 아니라는 풍문이 돌았다.

한데 만약에 호표장의 오호단혼도 설곽이 검종맹에 가입하게 된다면 그의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가 키우고 있는 엄청난 수의 호랑이와 표범들로 인해 검종맹의 힘은 말할 수 없이 강해지게 될 것이다.

 

석두공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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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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