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第 二十八 章

 

             거지 소굴을 찾아온 미녀들

 

 

 

-개봉(開封)!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丐幇)의 총단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한마디로 개봉은 거지들의 천국이라는 말이다.

물론 거지들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는 하겠지만...

개봉은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삼대 고도(古都)의 하나인데 서주(西周) 문왕(文王)의 아들 필공(畢公)에 의해 성이 세워졌다.

그 이후 전국시대의 우, 오대시대의 양, 진, 한 , 주, 북송, 금의 칠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지들이란 원래 사람이 많은 곳에 살아야만 굶어죽지 않는다.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이곳 개봉에 있는 것은 이처럼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데 그러한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은 역설적으로 용정(龍亭)이라고 하는 곳이다.

용정이 어떤 곳인가 하면 예전에는 궁전이 있던 곳으로 개봉의 중심지다.

거대한 토대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언젠가부터 거지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용정 앞에 있는 두개의 큰 연못은 거지들의 우물이기도 하고 목욕을 하는 곳이기도 한 다목적 적인 장소가 되었다.

 

햇살이 아직 퍼지지도 않은 이른 아침, 아리따운 두 소녀가 용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거지들의 소굴로 찾아가는 두 소녀의 모습은 도저히 거지들과 어떤 상관이 있을 것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지들은 그녀들이 오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여름이기에 그들은 연못가에서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기도 하고 웃통을 훌떡 벗고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자는 엉금엉금 기어서 일어나 아무데나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별빛 같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개판이군. 거지들은 이렇게 질서가 없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래도 거지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아요.]

다른 소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말한 소녀가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장매가 거지들을 어떻게 잘 알지?]

[저와 조금은 관계가 있지요.]

다른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우리 거지들이 질서가 없다니 그 말은 인정하지 못하겠구려.]

두 소녀가 지나치는 옆쪽에 있던 거지가 몸을 뒤척여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거지가 말을 받았다.

[나라의 어려운 때 가진 것이 없으니 목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충을 행한다 할 것이고 비럭질을 하더라도 부모를 갖다버리지 않으니 불효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것을 탐하지 않고 비럭질해온 것은 나눠먹으니 의리가 있으며 불쌍한 자를 보면 거지의 수법을 전수하기 망설이지 않으니 인(仁)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들은 그들의 조리있는 말에 내심 감탄했다.

(이 거지들은 아주 학식이 있는 거지들이구나. 개방에 숨은 인재가 많다는 말이 헛된 소문이 아니었구나.)

먼저 말한 거지가 다시 말을 받았다.

[분수를 지켜 감히 왕좌를 넘보지 않으니 임금과 백성 간에 벼리가 있다할 것이고 비럭질 한 것도 부모에게 먼저 드리니 그 또한 벼리가 있고 처가 감히 남편의 일을 다투지 않으니 부부간에도 벼리가 있다할 것이 아닌가? 삼강(三綱)을 진실로 행하는 자가 우리 거지들 외에 또 어디 있던가?]

[삼강을 몸소 행하는 우리 거지가 오륜(五倫)은 어디 지키지 못하겠는가? 삼강과 오륜은 도의의 기본인데 이것을 지키는 우리에게 질서가 없다는 말이 과연 타당하기나 한가?]

거지를 욕했던 소녀가 졌다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제가 잘못했다고 하죠. 아니 잘못했어요. 두 분께선 명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껄껄껄... 우린 늙은 거지들일 뿐이오. 방주를 만나러 왔다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시오.]

거지가 누운 채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허리에는 팔결의 마디가 걸려있었다.

매듭의 수로써 신분의 고하를 따지는 개방에서 팔결이라고 하면 장로(長老)의 신분이다.

개방의 장로는 모두 열셋, 중원의 십삼성(十三省)의 수와 맞춘 것이다.

장로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자는 것이었다.

[장로님들을 알아 뵙지 못했군요. 실례하겠어요.]

다른 소녀가 포권을 하고 용정의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릉! 드릉!]

그녀들의 뒤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있자 그게 어디 있더라? 여기 였던가 저기였던가?]

사십대의 풍채가 아주 당당한 거지가 허둥대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거지치고는 너무 잘먹었는가? 혈색도 붉그스레하고 풍채도 마치 부호처럼 당당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다.

때가 많이 묻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천조각을 이어 붙여서 손바닥보다 큰 조각이 없는 알록달록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 거지는 낡은 서랍을 뒤져보기도 하고 먼지가 풀썩 나는 방석을 들어보기도 하고 선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문이 덜컹 열리며 한 거지가 말했다.

[방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또 어떤 놈들이 좀도둑질을 했나? 그놈을 혼낸다고 말하고 잘 타일러 보내게.]

중년거지가 신경질이 나는지 상자를 내려 바닥에 와르르 쏟으며 말했다.

한데 방주라니...,

중년거지는 개방의 방주인 낙천부개(樂天富丐) 필요금(畢堯錦)이었던 것이다.

문 옆에 선 거지가 다시 말했다.

[방주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하십니다.]

[아무 소리말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 나같은 거지를 만나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낙천부개 필요금은 상자에서 쏟아낸 물건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필방주님! 너무하시는군요. 전에는 제게 한번 놀러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문밖에서 여인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본 음성인데...?]

[보기도 본 사람일걸요?]

문으로 한소녀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니 장소저 아니신가? 아니지, 아니지 이제는 장장주이신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 거지를 다찾아 왔는가? 아무튼 잘 왔네 잘 왔어. 그렇잖아도 뭘 찾느라고 골머리를 썩히던 중이었는데.]

[필방주님을 뵙습니다.]

장소저라고 불린 소녀의 곁에선 다른 소녀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필요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소저는 누구신가? 어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은 밝히지 않는단 말인가?]

방금 전의 호들갑을 떠는 것같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게가 있었다.

[그녀는 백언니라고 하는데 신분은 말할 수 없데요. 하지만 맹세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보증하죠.]

이렇게 말하는 소녀는 장지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백언니는 백란이었다.

필요금은 굳었던 얼굴을 풀면서 웃었다.

[거지는 거울과 같은 사람들이오.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밑바닥 인생이고 보니 때로는 행한 대로 돌려 비치기도 한다오.]

[괜찮습니다.]

백란은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거지들의 세상이 뭐 이리 복잡느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이라는 개방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복잡성이 자유분방함 속에 적절히 어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개방은 무림에서도 대방파이고 개방의 방주라면 또한 그 신분에 있어서 소림사의 장문인에 전혀 못지않은 것이다.

필요금은 백란과 장지연에게 자리를 권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 이곳 개봉을 구경하고 싶어서는 아닐 텐데?]

[사람을 찾아주세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우리 개방을 능가할 곳이 없지. 아무 걱정말고 누군지나 말해보시게.]

[석두공! 석두공이라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십칠팔세 정도, 이십 일 전 쯤에 황산 백검보에 나타난 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석두공? 그를 찾는단 말인가? 에잉! 쯧쯔!]

[...?]

[...?]

필요금이 혀를 차자 장지연과 백란은 괜스레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대체 그는 뭣하러 찾는단 말인가?]

필요금이 오만상을 쓰면서 물었다.

백란이 재차 물었다.

[그를 아세요?]

[알다마다.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가지고 골치만 아프게 되었지. 불과 며칠 전에 여기 왔다갔지.]

필요금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석두공을 생각하기만 해도 영 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를 왔었다고요?!]

“정말요?”

백란과 장지연이 동시에 소리쳤다.

필요금이 말했다.

[덕분에 지금 팔십만이 넘는 내 제자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케 돌아다니고 있지. 밥도 제대로 못빌어먹고 말이야.]

[...?]

[...?]

두 여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무튼 거지들을 괴롭히는 건 오직 정의니 의리니 뭐니 하고 들고 나오는 협객들 밖에 없단 말이야. 나쁜 놈들은 정작 건드리지도 못하는 게 우리 거지들인데...]

필요금이 투덜거렸다.

장지연이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어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어디로 올지는 알고 있지.]

필요금의 대답에 두 소녀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을 것이네.]

그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나 꺼내 밀었다.

원래는 네모나게 접혀진 붉은 종이였다.

겉에는 굵고 강인한 필치로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무림첩(武林帖)>

 

무창의 귀산(龜山)에서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무림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형도객의 이름과 함께 석두공의 성명이 적혀있었다.

[보름도 남지 않았군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내 제자들만 죽어날 지경이지.]

[빨리 가야겠어요.]

장지연이 백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때였다.

[잠깐!]

필요금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문을 가로막았다.

[...?]

[마침 이곳까지 왔으니 내 어려움을 하나만 해소해주고 가시게. 제발...]

필요금이 장지연에게 아첨하듯이 손을 비볐다.

장지연이 풋! 소리를 내며 웃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 차림새를 보게, 뭔가 빠진 것같지 않나?]

필요금이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그리고 보니 매듭이 보이지 않는군요.]

[총명한 장소저... 아니 장장주... 과연 그렇다오. 분명히 이 방안 어디에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으니... 제자들에게 말하기엔 체면도 서지 않고... ]

필요금은 우스광스런 표정을 지었다.

장지연과 백란은 그가 일파의 지존으로서 조금도 흉허물이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과연 개방같은 대 방파의 주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장지연이 물었다.

[매듭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어요?]

[어젯밤 술시경... 그때부터 이 방안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신세지.]

[그 이후에 뭘 했어요?]

[그냥 제자들이 비럭질해온 술찌끼미를 걸려 한잔 마시고 장로들과 둘러앉아 한바탕 입씨름이나 하고 잤지 뭐. 다른 건 한 것도 없다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내 죽결이 없어져 버렸지 않은가?]

[저 깨진 독에 술찌끼미가 있었어요?]

백란이 물었다.

필요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여기서 이렇게... ]

필요금은 한쪽에 앉으며 말했다.

장지연이 웃으며 물었다.

[또 술독을 껴안고 마셨겠죠?]

[그렇지, 그렇게 마시지 않으면 술맛이 나질 않으니까...]

[술독의 오른쪽 뒤에 보세요.]

백란이 말했다.

[없다네. 내가 이미 다... 어? ]

필요금은 술독의 뒤쪽에서 죽결을 발견하고 줏어들었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 있는줄 알았지?]

[필방주님이 허리띠를 푸는 건 아마 두 가지 경우 뿐일 걸요? 하나는 측간갈 때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 술 마실 때겠죠. 하지만 측간에서 잃어버릴 리는 없을 테고 당연히 술 마시느라고 허리띠를 풀다가 한쪽에 흘렀겠죠. 그게 술독을 밀어젖히면서 그 뒤로 밀려가지 않았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겠죠. 설마하니 술독 뒤에 있으랴 싶어서 술독은 차마 못 치웠을 것이고...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은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과연 그렇구나. 백소저 또한 장소저 못지않게 지혜롭구만 하하하... 거지 두목이랬자 아무 소용이 없어. 거지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없어. 와하하하하... ]

그는 허리에 죽결을 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답례로 오늘은 내가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지. 따라오시게나.]

[방주님이 무슨 돈이 있어 요리를 대접한다는 거예요?]

장지연이 뒤따라 가면서 물었다.

필요금이 웃고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우리 개방의 하루 수입으로 따지자면 장장주의 하루수입보다 적지는 않을 걸? 팔십만 거지가 쌀 한 홉 씩만 얻어도 그게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는가? 또 석두공 그 친구가 내게 푼돈을 주고 가더구만.]

[푼돈?]

[한 오십만냥 정도 되더군.]

백란은 입이 딱 벌어졌다.

오십만냥!

거지 주제에 오십만냥을 푼돈이라고 말하는 낙천부개 필요금...

[음... 그럼 제게 빚을 조금 갚아도 되겠군요.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일순 표정을 싹 바꾸면서 말했다.

[거지한테 돈을 꿔줄 때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것도 왕거지한테는... 리어배면(鯉魚焙麵) 한 접시 사줄 테니 다른 말은 꺼내지도 말게.]

리어배면은 황하에서 잡은 잉어를 매콤달콤하게 맛을 낸 뒤, 바싹 튀긴 메밀국수에 곁들여 내는 것으로 개봉에서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