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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神行魔童과 반로환동

 

 

 

소일초는 깜깜한 밤 어둠에 잠긴 산속을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키 만큼이나 큰 아버지의 애도(愛刀) 어린도(魚鱗刀)가 꽤나 거추장스러웠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의 작은 마누라는 신통방통하여 어디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날지 몰랐다.

사마귀가 정뇌(井牢) 속에서 창안한 무중일전신법(霧中一電身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서 소일초는 벌써 수백 리를 달려왔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그를 추격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

숲으로도 들어가고 강물위로도 달리고 마침내는 자기도 모르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와 버렸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한 번 띈 이상, 숨이라도 한 번 돌렸다 하면 어느새 냉큼 그의 목덜미는 그녀의 손에 쥐어지곤 했다.

이번에 잡혀서 돌아가면 아버지가 무슨 벌을 줄 지도 모른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인 것이다.

(사마귀의 무공 중에서 이것 하나는 정말 쓸만해……)

그는 암중에 자신의 경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무중일전신법을 배우기 전에는 아무리 잘 도망을 쳐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띄자 마자 잡혀 가곤 했는데……

무중일전신법을 배운 후에는 멈추지만 않으면 신통력이 대단한 그의 작은 어머니도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손가락이라도 닿는 다면 만사는 모두 끝장이다.

오갑자에 이르는 그의 공력도 그녀에게 한번 붙잡히기만 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도저히 힘을 못쓰는 것이었다.

그녀야 말로 천방지축 신행마동인 소일초의 최고 천적(天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소선풍에게도 그녀와 같은 재주는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어린도까지 훔쳐왔으니 아버지는 정말로 날 죽이려고 덤빌지도 몰라……)

아버지의 화난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 마도구식(魔刀九式)을 혼자만 알고 있으랬나?)

그가 이번에 가출한 동기는 백인장의 최고도법인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 주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소선풍은 그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일초가 무공을 배운 것은 백인장의 구십구 도객(刀客)들에게 떼를 써서 얻어 배운 것에다 사마귀의 무공을 더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백인장의 고수들마저도 그를 설설 피하기만 할 뿐 무공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제 밤이었다,

소일초는 잠이 오지 않아 정원의 나무위에 올라가 애꿋은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았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침실 앞에서 한 줄기 백광이 번쩍 이는 것이 보였다.

지붕위로 살며시 올라가서 살펴보니 소선풍이 도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옳지! 저것이 바로 천하제일의 도법이라는 마도구식이구나.)

그는 쾌재를 불렀다.

훔쳐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영 실망이었다.

도무지 그 도법의 원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소선풍은 몇 번이고 거듭 펼쳐보이지만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여태까지 자기가 보았던 것과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도법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도대체 흉내마저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소일초는 어떤 난해한 무공도 한 번 보기만 하면 척척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불가사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살그머니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자고 있는 침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선풍과 그의 작은 어머니는 갑작스런 침입자에 허둥지둥하며 그를 맞았고,

그는 다짜고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한밤중에 한바탕 꾸지람만 듣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심통이 날 대로 났다.

아침에 틈을 보고 있는데 작은 어머니가 어딘가에 잠시 외출한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아버지도 잠시 동안 침실을 비울 것이다.

옳다구나 싶은 그는 즉시 아버지의 침실로 가서 어린도를 가지고 줄행랑 놓아버렸던 것이다.

 

(지독한 우리 아버지……어쩌면 나는 주워온 자식인지도 몰라……친 아들에게 그렇게 인색한 아버지가 세상에 또 있을라구……)

나무들 위로 스치고 날아가며 소일초는 계속 아버지를 원망하고 지금 쫓아오고 있을 작은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는 작은 어머니가 쫓아 오고 있는가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뒤로 휙 집어 던지고 귀를 모았다.

과연 술병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은 어머니가 허공에서 받아들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쳇! 내가 무림의 십이대 고수 중 하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우리 작은 어머니만도 못한데 고수는 무슨 고수……작은 어머니야 말로 일대고수(一大高手)이고 일등고수(一等高手)다 일등고수……)

그의 몸은 큰 나무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 나무에는 어둠속에도 뚜렷이 분간이 되는 붉은 천조각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는 그는 그 천조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그의 작은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분명했다.

소일초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도망칠 만큼 나쁜 악당은 아니었다.

기실, 그와 그녀의 작은 어머니는 사이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려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작은 어머니의 술수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빙 돌았다.

하지만, 그는 어리둥절해 지고 말았다.

갑자기 작은 어머니의 전음이 귀에 들리는데,

그녀는 이미 방향을 바꾸어 왔던 멀리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그녀의 전음은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조금만 놀다가 돌아오너라. 너무 위험한 곳엘랑 가지 말고……]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저 여자는 저렇게 포기하고 갈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이제 아무튼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잠이나 자고 볼 일이다.

(아이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부모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데……내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다 밤에 잠을 잘 자지 않아서 그런지도 몰라……)

주변에는 나무들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가 내려선 곳은 큰 바위가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바위 위로 올라가 편편한 부분을 찾아 척하니 드러누웠을 때였다.

[이상한 놈이군……]

아주 낭낭한 목소리가 그가 누운 바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일초는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껑충 솟아오르며 등 뒤에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어린도를 뽑아 들었다.

[웬 놈이냐?]

어린도의 가늘고 긴 도신(刀身)은 그의 몸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바위 속의 목소리는 조금도 어조를 바꾸지 않고 울려나왔다.

소일초는 바짝 긴장했다.

무림에서 자기보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저 바위 덩어리는 도무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몸이 설설 떨려오기 시작했다.

등골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귀……귀신……이냐?]

[도무지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놈이군……]

바위 속에서는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 없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소일초는 그의 표현대로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귀신에 대해서는 여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큰 용기를 냈다.

[에잇! 내가 이놈의 바위를 베어버려야지……]

그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어린도에 결집시킨 후에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면서 바위를 베어갔다.

어린도가 갑자기 쭉 늘어나면서 도신이 삼장이나 되어버리며 바위에 통째로 부딪혔다.

바로 강기였다.

큰 바위는 소리도 없이 베어져 옆으로 쩍 벌어지는데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나왔다.

[아이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놈이구나……]

갈라진 바위 속에서 흰 그림자가 바위 위로 튀어나왔다.

소일초는 내친 김에 그 그림자를 향해 다시 전력을 다해 어린도로 베어나갔다.

백인장의 백인도객들에게서 배운 절초 중의 한 가지 수법이었다.

삼장으로 늘어난 어린도의 도신이 수백 개의 환영을 만들며 흰 그림자를 베었다.

그림자는 흩어지듯 흐릿해졌고 소일초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제 공격할 만큼 해 보았으니 여차하면 삼십육계인 것이다.

그는 이름처럼 언제나 일초 이상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원래 이름은 소선풍이 지어준 태봉(太峰)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라 자기가 마음대로 일초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 일초를 공격했으니 저 귀신이 죽지 않았다면 자신의 규칙대로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흰 그림자는 다시 뚜렷해지면서 말을 내뱉었다.

[이 수법은 백인장에서 흘러나온 듯 한데……]

소일초는 흰 그림자가 귀신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도로 분명히 베었는데도 죽지 않고 말하다니 귀신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을 향해 덮쳐오지 않으니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도망치는 데야 그야말로 신행마동(神行魔童)인 자신이 아닌가?

흰 그림자는 쪼개진 바위에 턱 걸터앉으며 소일초에게 말했다.

[애야! 이리와 앉거라.]

그러나 소일초는 도망칠 준비만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 녀석!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어……]

흰 그림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형씨. 당신 귀신은 아니겠지? 나 같은 애들은 모두 귀신을 무서워한단 말이야……]

소일초의 주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흰 그림자는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야 이놈에 너같은 놈이야 말로 남들이 귀신같은 꼬마라고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나보고 형씨라니…… 마음에 쏙 드는 놈이군 그래.]

그의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긴 메아리가 온 산속에 울려 퍼졌다.

소일초는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았으나 웃음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길, 웃는 소리 한 번 젠장 맞게 크군……]

그러나 그는 어린도를 등 뒤에 꽂고 쪼개진 바위 중 흰 그림자가 앉지 않은 쪽에 걸터앉았다.

그가 본대로 흰 그림자는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준수한 얼굴의 이십 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서는 은은한 금광(金光)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대체 누가 형씨같은 청년을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소일초는 백의청년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백의청년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릴 말썽꾸러기로군, 백인장 소영감 작품인가?]

[백인장에 영감은 아니지만 영감 못지않게 고리타분한 소씨가 한 분 계시기는 하지, 소선풍이라고……]

소일초는 냉큼 말을 받아 대답했다.

[소선풍? 그는 소영감 아들인데? 그럼 소영감은 언제 죽었지?]

[우리 할아버지를 말하는 모양인데 언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 아직 어린아이니까……그리고 형씨도 우리 할아버지를 알 수 없지. 아직 젊으니까……]

백의청년의 눈에서 금광이 폭사되었다.

그의 무서운 안광에 소일초는 찔끔했다.

[바로 소선풍의 자식이었군, 네 엄마는 조씨(趙氏)지?]

[반 만 맞았어. 아버지는 맞추었지만 어머니는 이씨(李氏)라구……]

백의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같았다.

소일초가 그의 불신에 찬 표정을 보면서 한마디 했다.

[이봐! 내 사부는 거짓말장이지만 나는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이야.]

백의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의 말투가 영 맘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치를 읽었는지 소일초가 다시 한마디 한다.

[내 나이도 겉보기보다는 꽤 많다구. 내가 반말 좀 하기로서니 그렇게 안좋은 얼굴까지 할 건 없잖아.]

백의청년 완전히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 녀석! 대체 몇 살이길래……]

[열살!]

소일초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쳤고 백의청년은 기가 막혀 버렸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허참! 허참……]

[형씨도 나보다 겨우 몇 살 연상인 듯 한데 말투는 완전히 노인네 티를 물씬 풍기는군.]

[너 보기엔 노부가 몇 살로 보이는가?]

소일초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한 열 네살쯤……]

백의청년은 오히려 이제는 그와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지 자꾸 질문을 했다.

[내가 누구인것 같은가?]

[글세…… 무공이 나보다 훨씬 강한 것으니까 이름없는 사람은 아닐 것 같고……]

그는 백의청년의 아래위를 쭉 훑어보았다.

몸에는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사수(四手) 중의 하난가?]

백의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남들이 혈기자라고 하지……]

그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일초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어찌나 웃는지 그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바위 밑으로 굴러 버렸다.

그래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지 한창 웃고 난 뒤에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형씨가 혈기자라고? 형씨가?]

[물론……]

[대체 혈기자의 나이를 알기나 하고 거짓부렁을 하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을 들었으니까 지금쯤 그는 백 살 이백 살 아니 천 살 쯤 됐을 거야……그런데 혈기자라고?]

[네가 지금 몇 살 인데?]

[열살!]

대답하고 보니 소일초 자신도 조금 이상했다.

너무 어른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서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백의청년의 말이 들렸다.

[나는 물론 혈기자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올해로 일백 이십 칠 세지.]

[그런데 어떻게 형씨가 혈기자란 영감이 될 수가 있어?]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소일초가 물었다.

스스로 혈기자라고 밝힌 청년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군.]

[무가(武家)의 자식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그럼…… 형씨가 반로환동했단 말이야?]

혈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 정말로 우리 할아버지도 알겠네?]

소일초는 어느덧 그의 말을 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늙었을 때 가끔 만나던 친구였지. 우린 다들 무학에 정신이 팔려서 혼인이 아주 늦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아들을 낳고 그 후에 내가 아들을 낳았지.]

[형씨하고 우리 할아버지 하고 싸우면 누가 이겼어?]

소일초는 여전히 그를 형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입가에 쓴 웃음을 지으며 혈기자가 말했다.

[소영감의 마도구식은 대단하지. 그 당시에 그의 내공이 오갑자만 됐어도 내가 패했을 거야.]

 

백의청년,

그는 정말로 반로환동한 천하제일인 혈기자였다.

여러 해 전, 그러니까 소일초가 태어나기도 전에 혈기대종사의 겁으로 등천마교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해에 그의 제자들은 혈기자가 연공실로 사용하던 무진동을 파괴해 버렸다.

그 당시 혈기자는 자식과 며느리를 잃은 슬픔과 분노 때문에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있었는데……

그는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었으니 자기가 그 몫까지 다 살아야겠다는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하고 무진동 속으로 들어가 반로환동의 술법을 닦기 시작한 중이었다.

무진동 속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제자들의 소행인지는 모르고 묵묵히 술법만을 닦았다.

당세의 무학대종사로 불리던 그 인지라 과연 얼마의 연구 후에는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서 큰 성과를 볼 수가 있었다.

먼저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고 피부가 다시 부드러워지며 동안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백발과 백염,백미가 뿌리부터 새롭게 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검게 되어버렸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윤기가 있어져 젊은이의 음성이 되어버렸다.

수 년 동안 증진 하자 몸은 완전히 이십 대의 청년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무너진 무진동의 동굴을 뚫고 나오면서 제자들이 성의가 없어서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진동 밖에 세워진 석비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부! 저희 제자들이 느끼건 데 요즘 사부께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비록 사부 밑에서 다년간 무공을 닦았다 하나 아직 사부의 일초을 감당할 수조차 없습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사부가 죽이시면 달게 죽음을 받아야 하지만, 저희들을 죽이는 것이 사부의 참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사부의 일거수 일투족에 불안을 느껴 감히 사부 곁을 떠나고자 의견을 모았습니다. 무진동을 파괴하는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부의 추격을 잠시라도 늦추고자 함입니다. 부디 석송림에서 편안히 여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린 소아(小阿)는 우리가 데려가 잘 키우겠습니다. 우리가 소아를 잘 키우게 사부께서는 절대로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불초한 제자들이 간절히 바랍니다.>

<석송림을 나오지 마십시오. 소아를 훌륭히 키우겠습니다. 혹시 사부께서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신다면 이월(二月) 보름달이 떨때 석송림에서 연기를 올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 제자들이 안심하고 사부를 다시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소아는 우리가 잘 키우겠습니다.

제자일동 >

 

비석을 본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간이 콩만한 놈들. 네가 아무리 정신이 없기로서니 공들여 키운 제 놈들을 죽일까봐 도망을 쳐? 흥 이놈들 좋다. 어디 두고 보자. 나도 이제 네놈들 못지않게 젊은데 내가 네 놈들이 주는 밥만 차려먹을 줄 알고……)

석비는 석송림의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아마도 혈기자가 다른 곳으로 뚫고 나올까 싶어서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혈기자는 비석의 글씨들을 유심히 살폈다.

(요건 셋째 진성(震聲)이 놈 글씨고……이건 큰 놈인 청천(靑川)이……이건 예진(藝珍)이 그년……그리고 요건 성화(成華) 놈……흥! 성화 이놈이 제일 많이 만들어다 세웠구나. 겁장이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

동굴 속에서 반로환동이란 신선의 술법을 닦고 나온 혈기자의 마음은 맑고 깨끗해져 있었다.

이미 예전의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은 깨끗이 사라지고 마치 어린 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요놈들이 감히 소아(小阿)를 가지고 은근히 인질로 삼아? 못된 놈들……)

그러나 비석의 글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불쑥 찾아가면 젊은 놈들이 겁먹고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그렇다고 비석에 적힌 대로 이월 보름을 기다려서 <나 미치지 않았소>하고 광고하는 것도 자존심상 내키지 않았다.

며칠을 어떻게 할까 고심을 하다가 문득 기막힌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석에는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석송림 안이 아닌 절벽 밑의 석옥 이었던 것이다.

석송림을 지나가지 않고 뒤쪽 절벽으로 해서 분지를 나가버린다면 석비의 경고를 어긴 것이 아닐것 같았다.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은 거야? 내가 늙었을 때는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할 계책이지……만약 놈들이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면 무조건 몰랐다고 잡아떼야지……)

그렇게 해서 천하제일인 혈기자는 청년으로 둔갑하여 다시 세상에 나와 버렸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들어도 제자들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러다 그는 십이 고수 중의 사수(四手)가 자기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바람 같아서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멀리 남황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막내인 조예진이 자기의 옛날 친구의 소호연(蘇昊硯)의 아들과 연인이었음을 생각해 내고 백인장에 들르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이곳 창산(蒼山)에서 백인장의 어린 꼬마를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네 내공이 오갑자가 되는 것 같으니 그 영문을 모르겠구나]

[응,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심심하니까 해본 짓 일 거야. 난 날 때부터 그랬어.]

[한데, 무슨 일로 집을 나왔지? 그리고 아까 너를 쫓아 왔던 그 여자는 누구?]

[어? 그것까지 알아? 우리 작은 어머니……]

혈기자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이 났고 소일초는 또다시 불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싶어 투덜대기 시작했다.

[글쎄,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무공을 가르쳐줄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가출했더니 작은 어머니가 잡으러 온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냥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여태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그건 나의 표기를 보았기 때문이지. 그걸 보아도 네 작은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이 틀림없을 거야.]

[누군데?]

[조예진!]

[이름은 맞지만 성은 틀렸는 걸. 누구나 소부인(蘇夫人)이라고 하더라……]

[이 녀석아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거야.]

[정말 세상에 그런 법이 있었나?]

혈기자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짙은 우수가 그의 얼굴에 깔리고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천하의 신행마동도 감히 함부로 떠들 수 없었다.

소일초는 혈기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만 바위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혈기자는 몸도 마음도 다 젊어졌고 무엇 하나 맘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직하나 제자들과 손녀 소아(小阿)는 보고 싶었다.

소일초의 말로 짐작해 보건데 조금 전에 소일초를 쫓아왔다가 부리나케 돌아가버린 여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제자인 조예진이 분명했다.

혈기자로서는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표기를 붙쳐둔 것이 오히려 나쁜 효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으로 번쩍 들었다.

그러자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부터 붉은 빛줄기가 날아와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바로, 그의 독문표기인 혈기(血旗)였다.

그의 혈기가 꽂혀있는 영역 내에서는 무림인이라면 결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에게는 제자들이 자기가 있는 동굴을 무너뜨렸다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자들에게도 큰 악의는 없었고 단지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한 정도 일 뿐이었다.

동굴 따위가 무너져서 혈기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제자들도 자기도 우수운 정도의 일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를 실제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들마저 죽어버린 지금에야 제자들이 친자식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아무튼 중간에서 화해를 성사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야 손녀도 만나고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자기는 젊어져 버렸는데 자기가 아무리 혈기자라고 해도 제자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제자들의 속이 좁은 것 같아 화가 벌컥 치밀었다.

[못된 것들……]

하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소일초가 깜짝 놀라 공중제비를 넘으며 뒤로 날아가 큰 나무 뒤에서 눈을 비비며 쳐다보았다.

과연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는 녀석이었다.

혈기자에게는 순간적으로 소일초를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소일초는 잠이 들깬 표정으로 말했다.

[소일초. 신행마동이 바로 나지.]

혈기자는 소일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절세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가출했다고 했지?]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그 대신 너는 몇 가지 일을 내 대신 해주는 거지……어때?]

혈기자는 소일초가 단번에 응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일초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우리 내기로 결정하자. 내가 지면 형씨 일을 대신 해 주기로 하고 형씨가 지면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

[특히 아까 내 어린도를 맞고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그 무공을 배우고 싶어……]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린애라서 예의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다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숫제 자기 친구처럼 대하려 한다.

아무리 자기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소일초가 어느새 그의 눈치를 긁었는지 재빠르게 말했다.

[형씨 분명히 반노환동한 혈기자지?]

[…………]

[잘 생각 해보라구. 나는 신행마동(神行魔童), 형씨는 반노환동(返勞還童) 뭐가 어떻게 됐던지 간에 다같은 어린아이 인데 굳이 어른인척 하지 말라구.]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었다.

혈기자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놈은 아예 내놘 놈이니 무시하고 사는 것이 수명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대로 받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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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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