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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장

 

            붓 속에 숨겨진 재산 (2)

 

 

 

석두공이 객방으로 들어가자 무형도객이 무림첩을 적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글 써줄 서생들은 구했는가?]

[요즘엔 서생들이 글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형도객은 기대했다가 낙심한 듯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하는 수 없이 손목이 빠지도록 적어야겠군.]

[한데...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부릴 귀신은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

[자네... 무슨 수단을 찾은 모양이군. 어서 말해보게.]

무형도객이 희색이 만면하며 말했다.

석두공이 요즘은 그런 글은 직접 적는 것이 아니라 인장처럼 찍어낸다고 하니까 무형도객이 무릎을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책들도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적지 않은데...]

[그건 그렇고 곧 은자를 받으러 올 텐데 무슨 방법으로 거금을 마련합니까?]

[함께 가세.]

무형도객이 일어났다.

[...?]

[돈을 마련해야지.]

 

***

 

무형도객은 석두공을 데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강도라도 할 생각입니까?]

[무림을 위한 일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무형도객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형도객이 강도를 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림을 위해서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을 것같기도 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럼 부잣집을 골라서 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 돈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금 가고 있는 중일세.]

무형도객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천지의 소음을 모두 쓸어가버렸다.

무형도객은 문이 닫힌 점포들 중 한곳으로 가서 두드렸다.

쿵쿵쿵!

잠시 후에 쪼글쪼글한 노파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검을 팔러 왔소이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노파가 물었다.

[우린 검을 사지 않소. 여긴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이라오.]

탁!

노파가 문을 닫았다.

석두공이 물었다.

[정말 검을 파실 생각이십니까?]

무형도객이 그의 발을 쿡 밟으며 가만히 있으란 신호를 했다.

무형도객은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내 검은 세우면 하늘에 닿고 눕히면 땅을 다 쓸 수 있으며 거두면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오.]

(세상에 그런 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배께서도 거짓말이 상당하구나. )

석두공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닫혔던 문이 열리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서 흥정해봅시다.]

[...!]

석두공은 무형도객을 보았다.

무형도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골동품 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넓었다.

더구나 손님이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큰의자가 차탁 앞에 놓여있었다.

주인 노파는 칠십이 넘어보였지만 온화한 얼굴에 어떤 기품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노파는 가운데 의자에 앉으면서 무형도객과 석두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가지고 오너라!]

노파는 안쪽을 향해서 말했다.

그리고 무형도객과 석두공이 앉자 탁자위에 좁고 긴 나무상자를 하나 올리면서 말했다.

[손님이 팔겠다는 검은 이 검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노파가 나무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순간 나무상자에서는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는 한 자루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보기(寶氣)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막야(莫耶)가 뛰어난 명검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찌 내가 가진 검에 비하겠소?]

무형도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노파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노파는 보검을 탁자 아래로 쓸어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럼 이 검은 어떻소?]

다시 한 자루의 둔중해 보이는 기형 철검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 검은 검날의 두께만도 한치가 되고 날의 넓이는 반자나 되었다. 무게가 적어도 오십 근은 넘을 것 같은 데 노파는 종이장 들듯이 가볍게 다루었다.

[붕산검마(崩山劍魔)가 백오십 년을 연마하여 만들었다는 붕산검(崩山劒)이구려. 하지만 내 검에는 미치지 못하오.]

노파가 검을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시오.]

무형도객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빈손이잖아? 그럼 그렇지...)

석두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무형도객의 손바닥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손바닥 위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가락만큼 작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진기를 모아 응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석두공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 작은 검의 모습을 그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검령...]

석두공이 나직막한 소리로 내뱉었다.

무형도객과 노파가 눈을 부릅뜨며 석두공을 노려보았다.

노파의 손바닥에도 작은 검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형도객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정검령을 아는가?]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내 앞에서 그걸 보이며 복종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시하고 그냥 와버렸습니다.]

[...!]

[...!]

무형도객과 노파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심부름하는 소녀가 차를 다려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무형도객이 노파에게 말했다.

[당장 오백냥의 은이 필요하오.]

[이것을 가지고 가시오.]

노파가 한장의 전표를 주면서 말했다.

[천냥짜리니 여유가 있을 거요.]

 

***

 

(무림에는 드러나지 않은 조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양이다.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두개나 그런 조직을 목격했으니...)

객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석두공은 생각했다.

(소령이 속해있는 조직의 힘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았는데, 무형도객이 속해있는 조직도 전혀 그에 못지않을 것같구나. 그 노파의 무공도 놀라울 정도였다. 무형도객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깊은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은 피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진정한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같았다.

이런 느낌도 벌써 두번 째다.

부운청풍객 심제을과 잔혼살객 등이 삼마경을 익혀 극히 고강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강한 사람도 석두공은 여럿 알고 있다.

드러난 모든 것이 피상일 것만 같았다.

무형도객이 석두공에게 부탁했다.

[정검령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게. 함부로 말하게 되면 사마의 세력을 돕는 것이 될 것일세.]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응락하자 무형도객은 근심을 털어버린듯 껄껄 웃었다.

 

객점에 들어서자 탁자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무림첩들을 한곳으로 쓰윽 밀어버리며 석두공이 소리쳤다.

[이제 손이 해방되었군요.]

며칠 동안 무림첩을 적는 고생을 하느라고 얼마나 질렸는지 모른다.

석두공은 막힌 속이 탁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붓도 이젠 안녕을 고해야겠지요.]

뚝!

석두공은 자신이 사용했던 붓을 꺾어버렸다.

한데,

[어? 이게 뭐야?]

꺾어진 붓 속에서 돌돌말린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

무형도객도 그의 옆으로 왔다.

쫘라라락!

석두공 종이를 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하... ]

[와하하하... ]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문서였다.

무혁해의 재산 중의 한 가지에 대한 소유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뚝!뚝!

석두공은 다른 붓도 부러뜨렸다.

부러진 붓마다 한 장씩의 문서가 나왔다.

무혁해의 재산은 고스란히 붓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천하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든다는 갑부 무혁해...,

그는 기묘한 방법으로 재산을 감추고 도망치고자 했으나 결국 해천월의 손에 죽고 말았다.

헌데 그의 재산은 엉뚱하게도 석두공의 손으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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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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