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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3)

 

 

바로 그 순간 청년은 무슨 영문인지 눈살을 찌푸렸고,

현천록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고무공처럼 날려가 담장에 부딪혔다.

!

휘익!

현천록의 머리 위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현천록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렸다.

[네가 이긴 것으로 해주마. 노도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다. 다음에 반드시 약속대로 해주마.]

진양진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신궁 오무한으로 변신한 상태로 물 속에서 숨을 쉬기 어려워지자 그대로 귀식대법을 펼쳤다.

그후 현천록이 이끄는대로 우물까지 와서 다시 귀식대법을 풀었지만 현천록에게 들키지 않았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서 소천성수로 현천록을 공격하고 도주해버린 것이었다.

현천록의 손에는 진무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이 현천록에게 다가왔다.

현천록은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흠뻑 젖은 옷에 흙까지 묻어버려 도포가 아주 뻑뻑하다. 조금 있으면 얼어서 완전히 뻐득뻐득해져 버릴 것 같다.

청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장력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도장은 금강불괴에 달했군.]

현천록은 쓴 입맛을 다셨다.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느새 다섯 명의 소녀들이 비수를 들고 그를 애워싸고 있었다.

청년이 말했다.

[신법도 바람을 탄 것처럼 자연스러우니 도장은 정말 듣던 것보다 훨씬 고명한 인물인 것 같소.]

현천록은 나몰라라는 듯이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교활한 진양진인에게 또 당하고 보니 어지간히 속이 상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는 이번엔 무슨 수로 진양진인을 붙잡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바보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청년이 손가락을 뻗었다.

번쩍!

소리없이 빛줄기가 현천록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현천록에게는 약간 따끔거리는 정도의 느낌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청년이 소녀들에게 말했다.

[이 도사는 이상하오. 무공도 그렇게 마음도 보통과 다른 듯하니 그냥 둘 수는 없겠소.]

소녀들 중 하나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 오늘따라 간섭이 심하군요. 그걸로 당신 잘못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아가씬 안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다 들었으니까요.]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녀와 나의 문제니 당신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오. 일단은 저 도사를 뇌옥에 가두는게 나을거요.]

돌아서서 걷는 청년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한 소녀가 현천록의 혈도를 몇 군데 거듭 찌르더니 오라로 온몸을 꽁꽁 묶었다.

두 손과 두 발도 하나로 묶였지만 현천록은 내버려두자는 심정으로 몸을 맡겨버렸다.

다른 소녀가 장대를 가져와 두팔사이로 끼워들었다.

현천록은 원시인들한테 잡혀가는 돼지새끼마냥 들리웠다.

앞에서 장대를 든 소녀의 엉덩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눈을 어지럽게 한다.

세상이 거꾸로 보이고 피가 머리에 모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상쾌한 새벽 공기, 그리고 그의 몸에 묻었던 물기가 증발되면서 모락모락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같은 안개...

현천록은 세상을 거꾸로 보면서 알듯 말듯한 펼쳐지는 요지경을 보았다.

소녀들은 몇 개의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 갔다.

건물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건물들 너머로 우뚝한 탑이 하나 보였다.

이리저리 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 이따금씩은 나이든 중년 여인들이 뭔가를 들고 가는 모습,

그곳은 조용한 가운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현천록은 탑 아래에 있는 뇌옥에 그냥 던져졌다.

소녀들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품을 뒤져보지도 않았다.

뒤쪽은 석벽이고 앞쪽은 듬성듬성한 쇠창살로 된 뇌옥이다.

현천록이 던져진 칸 외에도 한 사람씩 들어있는 칸이 세 개, 아무도 없는 빈 곳이 두 개가 더 있었다.

현천록의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이 나가는 소녀들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신경쓰지 않아서 무슨 욕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소녀들이 재빨리 나가고 문을 쾅 닫는 소리만 들렸다.

욕을 하던 사람은 사십 쯤 되어보이는 서생인데 얼굴이 아주 훤한 미남이었다.

뇌옥에 갖힌지 꽤 된 듯 차림새는 꾀죄죄하지만 이상하게 얼굴만은 반들거렸다.

그리고 보니 그 양 옆에 있는 칸의 사람들도 얼굴만은 반들반들했다.

현천록의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건네왔다.

[도장! 도장도 재수없는 년들한테 걸렸구려.]

현천록은 빙긋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전까진 진양진인 만이 그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침울한 얼굴의 청년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도장도 재주가 아주 용한 사람이오. 하하하하! 우리야 세치혓바닥과 반지르르한 얼굴을 앞세워 계집을 호리지만 도장은 무슨 수법을 쓰는거요?]

현천록이 고개를 들고 빤히 보았다.

앞에 있는 중년인이 말했다.

[거 사람 싱겁게 말게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여기 잡혀오는 사람은 다 똑같은 죄를 짓고오는데 부끄러워 할 게 뭐있소?]

중년인인 자기의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저 친구는 화양일음도(華陽一淫盜) 모청(毛鯖)이오. 하하하! 수고스럽게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소. 전문적으로 처녀만 골라가며 길을 내줬으니 뒷사람이 얼마나 고마워했겠소.]

현천록이 멀뚱하게 중년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중년인이 또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잡식성이오. 치마두른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데... 쩝 문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종종... ... 아무튼 나도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오. 음약에 관한한 저 친구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거요.]

잡식성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죽겠네. 방금 전의 고 감질나는 것들이 들어왔다 가는 통에 몸이 달아서 미칠지경이네.]

중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소린 집어치우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기회가 있을 테니까. 아참 이제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난 채음신(採陰神) 목요봉(穆耀峯)이네. 주로 채음보양을 하지.]

현천록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좋지 않은 사람들이군.]

세 사람이 껄껄 웃었다.

[도사도 여기까지 잡혀온 걸보면 만만치 않을 텐데 뭘 그러시오? 도사는 무슨 수법을 쓰는지나 말해보시오.]

[혹시 참배하러 온 여인들 방을 몰래 덮치는 치졸한 수법을 쓰는 건 아니오?]

[여기 여주인은 천하절색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혹시 도사한테는 몸을 허락할 지도 모르겠소.]

음탕한 소리를 주고 받으며 세 음적은 여자의 어디가 어떻게 어떤 여자는 거기가 어떻는데 어떻게 절묘하고, 자기가 뭘 어떻게 했는데 여자가 아주 음탕하여 무슨 수법을 요구했느니 하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반쯤은 현천록을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반쯤은 현천록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적으로는 음담패설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현천록은 화를 내며 백금퉁소를 꺼내들었다.

음담패설이 뚝 그쳤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의 공력을 실어서 백금퉁소를 검처럼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철창살이 한꺼번에 네 대가 소리없이 베어졌다.

세 음적이 겁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현천록은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중년인을 가두고 있는 창살을 베어버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당신같은 사람은 내가 죽이나 죽이지 않으나 마찬가지지만 그냥가지는 못하겠소.]

중년인이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 도사님! 소인들은 그저 심심하다보니...]

현천록은 퉁소를 뻗어서 중년인의 가슴을 겨냥했다.

투툭! !

뼈가 부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서 뒤로 넘어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폐인이 되어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현천록은 다른 두 사람도 똑같은 꼴로 만들어 놓고나자 속이 후련했다.

아주 즐거운 일을 한 것처럼 통쾌했다.

[하하하하!]

한바탕 실컷 웃고 나서 철문을 밀어보니 철문 만은 열 도리가 없었다.

공력을 모두 실어서 퉁소로 내리쳐도 철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손이 울려서 퉁소를 망칠 뻔했다.

현천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났다. 동굴에 갇혔다가 나온지 금방인데 이번엔 뇌옥에 갇혔구나. 내가 무슨 마음으로 순순히 여기까지 잡혀왔지?)

스스로 자기 머리를 꽉 쥐어 박았다.

그리고 보니 번쩍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 침울한 얼굴의 청년 때문이었다.

진양진인은 놓쳐버렸고 청년이 묘한 힘으로 그를 묶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현천록은 자기가 어떤 것에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고 사는 것도, 갇히거나 풀려나는 것도, 죽이는 것이나 살리는 것도, 현천록에게는 조금도 심각하거나 큰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오른쪽길로 갈까 왼쪽 길로 갈까 선택하는 단순한 선택문제 같이 느껴졌다.

오로지 호기심만이 그에게 점점 더 큰 비중으로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고 있었다.

현천록이 생사탄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생긴 변화였다.

잠시 후, 현천록은 철문 아래 계단에 앉아서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에게 배운 광릉산이었다.

칙칙한 뇌옥안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퉁소소리로 가득찼다.

세 사람의 음적도 그 혼이 반쯤은 빠져서 음률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 빠져들어 버렸다.

광릉산은 대륙을 가로지는 장강과도 같아서 어떤 곳에서는 급하고 어떤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며 어떤 곳은 한없이 높아지고 어떤 곳은 몸을 허물어뜨릴 만큼 낮아졌다.

광릉산의 열두 소절 중에서 일곱 소절이 끝나고 여덟 소절이 막 시작될 때였다.

갑자기 둔중한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우아한 자태로 들어왔다.

허리가 아주 가늘고 목도 가늘어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진 듯하다.

그윽한 향기가 일순간에 뇌옥을 감돌고 소녀의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현천록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소녀의 전신에 어려있는 이상한 기운이, 이상한 아름다움이 그를 질식하게 했다.

갑자기 온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퉁소소리가 뚝 끊어졌다.

소녀가 현천록 앞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인이 왕림하신 줄 모르고 누추한 곳에 모셨습니다.]

사람의 입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이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천록은 퉁소를 내리며 속으로 말했다.

(내가 미색에 빠지고 말았구나!)

소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두 말않고 바칠 것만 같았다.

현천록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떨려왔다.

강렬한 두근거림. 소녀의 체향, 귓속을 맴도는 목소리, 사그락거리는 옷자락소리. 가늘게 들리는 숨소리. 잘게 흔들리는 소녀의 속눈썹...

그 모든 것이 현천록을 포위하고 사로잡아버렸다.

얼굴은 보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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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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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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