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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2)

 

 

현천록이 오무한에게 물었다.

[두분은 우리 외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아무도 못봤습니다.]

현천록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현천록은 일곱사람과 함께 진양진인에게서 태극혜검을 배웠던 곳으로 돌아왔다.

지하에 흐르는 강은 신비로움을 주고,

흘러오는 곳과 가는 곳은 모두 또 다른 동굴이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에게 여기서도 방위를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신궁 오무한이 지남철(指南鐵)을 꺼내 놓았다.

오무한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항상 지남철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물이 들어오는 쪽은 북쪽이고 나가는 쪽은 남쪽이었다.

자금산은 장강의 남쪽에 있으니까 물은 장강으로 들어가는 물이 아니라 장강에서 지하동굴로 흘러오는 물일 가능성이 많았다.

어느 쪽을 통하는 것이 나가기 더 수월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속으로 가야하는 만큼 밖이 나올 때까지 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천산삼로 중의 노대가 노삼을 물에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귀찮게 생각할 것 없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라. 한 달이고 두달이고 간에 언젠가는 밖에 이르겠지.]

노이는 노대를 피해서 머뭇거렸다.

노대가 가까이 가자 노이가 급하게 말했다.

[노대! 내 검은 독검이오. 물에 들어가면 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고 말거요.]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마라. 주머니가 이렇게 많은 데 무슨 걱정이냐?]

노대가 노이의 독검을 뺏었다.

그리고 벼락같이 오무한의 등줄기에 칼집채로 내리박았다.

[으악!]

오무한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현천록도 장군묵도 막지 못했다.

옆에 있던 포두화상이 오무한을 옆으로 당겼다.

노대가 내려친 검은 오무한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쳤다.

오무한이 쓰러져버렸다.

[이 흉악한 마두!]

마춘보가 철연화를 유성추처럼 날리며 고함쳤다.

노대는 손에 들었던 검으로 철연화를 튕겨버리고 두 걸음 물러섰다.

노대는 오무한의 몸을 노이의 독검을 감싸는 도구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오무한이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아주 놀라운 속도였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 시주 공력이 놀랍군. 뽑히진 않았지만 노대의 칼에 맞고도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순간 장군묵이 고함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멈춰라!]

추앙!

용이 뛰어든 듯 물이 높이 치솟았다.

현천록도 속으로 욕을 하며 물에 뛰어들었다.

(교활한 도사! 어쨌든 내가 빠져나가게 해주지. 하지만 당신은 나한테 졌다구.)

멀리 사라졌는가 했던 진양진인이 신궁 오무한으로 변장해서 가까이 숨어있었다.

어쩌면 나가려다가 동굴이 막혀버려서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노대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마각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현천록은 장군묵보다 늦게 물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주 깊이 몸을 가라앉혔다.

자기가 진양진인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현천록은 물 속에서 미미하게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꾸륵! 꾸륵하는 소리도 들렸다.

초상감각에 눈을 뜬 현천록은 그 소리들이 무엇인지 즉시 알았다.

쿵쿵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꾸륵꾸륵하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왔다.

심장소리, 그리고 내장이 움직이는 소리다.

현천록이 다가옴을 알고 심장은 느리게 뛰게 하거나 박동을 멈춘 모양이지만 내장이 내는 소리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은 살그머니 손을 뻗었다.

쇠갈쿠리같은 억센 뼈마디가 현천록의 손을 휘감았다.

현천록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버렸다.

서로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위에서 첨벙이는 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한 덩어리가 되어 물밑 바닥에 가라앉은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현천록의 허파에 물이 가득찼다.

하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않고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자니 발버둥치던 진양진인이 축늘어졌다.

현천록은 그제서야 진양진인을 겨드랑이에 끼고 물을 거슬러 헤엄치기 시작했다.

 

x x x

 

현천록은 한참 후에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되고 말았다.

무작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그만 샛길로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또다른 동굴로 들어와버렸는지 사방은 꽉 막혀있고 위는 칠흑처럼 깜깜하다.

매끈한 사방은 어디 발이라도 올려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다시 물 속의 미로를 헤엄쳐야 한다는 사실에 맥이 쭉 빠졌다.

그러나 일단 폐속의 물을 겨워내고 공기로 채우고 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허파 속이 얼어붙는 것같은 묘한 느낌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진양진인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찢어진 가죽부대에 담긴 술처럼 물이 저항없이 흘러나왔다.

현천록은 일단 그곳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진무검을 들어서 석벽에 깊숙히 박고 자루에 진양진인을 걸어놓았다.

바로 그때 콧소리가 섞인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여기서 얼쩡대다가 우리 아가씨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리고 죽을걸요?]

[다른 뜻은 없소. 난 다만 먼발치에서라도 소저를 한 번 뵙고 싶은 마음뿐이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현천록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하늘인가 저승인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당신한테 얼굴을 보이겠어요?]

[나는... 나는... 나는 다만...]

남자가 말을 더듬는 모양이다.

여자가 차갑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가씨의 면사를 벗기려다가 실패해서 죽은 사람만도 서른이 넘어요. 한데 당신은 공짜로 몰래 숨어서 보려하다니 아주 뻔뻔스럽군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나는 싸우고 싶지 않소. 하지만 소저는 꼭 보고 싶소.]

[웃기는 소리 말고 빨리 꺼져요. 삼년 동안 본 안면이 있으니 그냥 보내주겠어요. 자꾸 딴소리하면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여자의 말소리가 얼음장보다 더 차갑다.

부드럽고 달콤하던 처음의 그 여자 음성이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현천록은 여자는 정말 열두번도 더 둔갑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한테 모욕을 당하고 참는 건지 분노하지 못하는 건지 몰라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휘이익!

허공에서 무언가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현천록은 급히 진양진인을 붙잡고 검을 거둔 후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철퍼덕!

물위에 뭔가 떨어졌다.

현천록은 그 순간에 확연히 깨달았다. 자기는 네모난 우물 속에 들어있고 방금 떨어진 것은 커다란 두레박이라는 것을.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구나!)

현천록은 두레박을 기울여 물을 쏟아버리고 진양진인을 넣었다. 보나마나 도르레로 움직이는 아주 큰 두레박이다.

드륵드륵!

두레박이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

현천록은 두레박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따라올라갔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렸다.

[좋게 말할 때 빨리 꺼져요. 난 아가씨한테 꾸중듣고 싶은 생각없으니까.]

목소리의 주인이 말하면서 보이는 호흡과 두레박이 올라가면서 보이는 박자가 동일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난 소저를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다만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을 뿐이오.]

여자가 소리친다.

[! 직접 나설 용기도 없는 작자가.]

드륵!

두레박이 끝까지 다 올라왔다.

열 여덟 쯤 된 소녀가 두레박을 끌어서 옮겨부으려고 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고 위로 솟구쳤다.

휘익!

[!]

소녀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리고 현천록은 깜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돌려 다시 우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

우물을 덮고 있던 지붕과 도르레를 받치듯 받침대가 박살나버렸다.

[웬놈이냐?]

소녀가 앙칼진 소리를 외치며 현천록을 향해서 공격해왔다. 손에는 다섯치 길이의 비수가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은 검의 자루로 소녀의 손목을 치고 물러났다.

시비를 붙을 이유도 없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미안하오.]

현천록은 정중하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날렸다.

하지만 현천록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희뿌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며 멈춰섰다.

스물살 쯤 된 청년이 마치 허깨비처럼 공중에 서있었다.

현천록은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설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의 어깨에는 수실이 삭아버리고 가죽이 바랜 고검(古劍)이 걸려있고 청년의 얼굴은 희뿌연데 암울한 눈빛을 하고 있다.

청년은 어느 새 다시 현천록의 앞에 내려서 있었다.

현천록은 말 그대로 등골이 서늘했다.

청년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다만 그의 앞을 가로막기만 했지만 현천록에게 아주 기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뒤에서 소녀가 현천록의 등을 공격해왔다.

현천록은 보지도 않고 칼집 채 휘둘러 소녀의 공격을 받았다.

소녀가 길길이 날뛰며 비수를 휘둘렀지만 현천록에게 다가설 수 조차 없었다.

현천록은 암울한 눈빛의 청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중얼거렸다.

[무당파의 진양도장이었군. 가보시오.]

청년은 어느 새 삼보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말 그대로 부동이면서 동()인 미묘한 신법이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지나가지 못했다.

청년이 말했다.

[소저에게 불측한 마음을 품은 자인줄 알았소. 가도 좋소.]

[!]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바보 도터지는 소리를 냈다.

우물에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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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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