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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궁에 빠진 신세내력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정신이 돌아온 막비강은 망연자실하여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혼미한 중에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꿈이었을까?)

막비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제발 악몽이기를 바랐다.

[흑흑! 혜아야!]

[흐윽! ... 이제 어쩌면 좋아, 언니?]

하지만 한옆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두 소녀의 울음소리가 그의 희망을 산산이 바스러뜨려 버렸다.

어둑한 동굴 속, 두 소녀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전씨 자매였다.

[죽여 주시오!]

막비강은 두 소녀 앞에 팍 머리를 박았다.

그저 그녀들의 처분에 맡길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그저 두 분이 죽으라면...!]

[닥쳐요!]

막비강이 다시 죄를 빌려 하자 언니 쪽인 홍의소녀가 발칵 화를 내었다.

[당신을 죽이면 우리 자매의 앞날은 어찌되죠? 다시 한 번 죽겠다는 소릴 하면 그땐 정말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어요!]

(자신들의 앞날이라고...? 완전히 옴치고 뛸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막비강은 홍의소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간파하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홍의소녀는 과연 언니답게 그 와중에서도 재빨리 막비강에게 올가미를 씌워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들 자매를 막비강이 함께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암시를 한 것이다.

[알겠소! 두 분에게 지은 죄가 태산보다도 무거우니 책임을...!]

[꺄악!]

막비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 순간 녹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녹의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인이 될 이 사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훔쳐보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로 막비강의 알몸이 들어온 것이다.

(망신살하고는...!)

막비강은 급히 옷을 끌어들여 가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에그머니나...)

막비강의 알몸을 본 녹의소녀는 새삼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본의 아니게 추태를 부린 셈이 된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서둘러 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는 역시 몸을 가린 두 자매와 마주앉았다.

녹의소녀는 원래의 녹의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언니 쪽인 홍의소녀는 헐렁한 막비강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막비강이 그녀의 적삼을 너무 거칠게 벗겨 버리는 바람에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 낭자께서 이렇게 도와 주셨으니 소생은 평생 두 분께 봉사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막비강의 말에 이제는 제법 대담해진 녹의소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봉사를 받으려는 거겠죠? 하여간 좋겠네요! 당신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양손에 꽃을 꺾어 든 셈이니...!]

[혜아야!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홍의소녀가 질겁하며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막비강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야 유구무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두 분 낭자의 방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홍의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싸움을 할 때는 매섭고 인정사정도 없더니 말하는 태도는 마치 여자 같군요. 제 이름은 전란(田蘭)이고 이 아이는 동생인 전혜(田蕙)예요. 사실 저희 자매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랍니다!]

그녀의 말에 막비강은 흠칫 놀랐다.

두 소녀가 자매인 줄은 알았지만 쌍둥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두 자매는 모든 게 대조적이었다.

언니 쪽인 전란은 몸매도 풍만할 뿐 아니라 성격도 넉넉하고 활달했다.

반면 동생인 전혜는 선병질적인 가녀린 체구에 성격도 쌀쌀맞고 매몰찬 것이다.

도저히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자매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두 소녀는 방년 십구 세로 막비강보다 두 살 아래였다.

또한 그녀들은 사패천 중 하나인 북산검호각의 직계 후손이었다.

막비강은 두 소녀와 몇 마디 형식적인 말을 나눈 후 다시 전포에 관해 물었다.

 

노호검(老虎劍) 전포(田袍)!

 

그는 전대 북산검호각의 각주로서 두 자매에게는 백조부(伯祖父), 즉 큰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막비강의 물음에 녹의소녀 전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은 왜 그분 어른에 관해서만 계속 질문을 하시죠?]

[그분 어른을 만나 뵙고 내 부친이 누군지 여쭈어 보려고 합니다.]

막비강은 지난일들을 대충 설명하고 눈동자에서 기대의 광망을 발산하며 두 자매를 주시했다.

언니 쪽인 전란이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실망하시겠지만 사실 우리 자매도 지금 그분 어른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이 이 말을 듣고 실망의 빛을 띠자 전란이 얼른 말을 이었다.

[백조부께서는 십오 년 전에 집을 떠나신 후 돌아오시지 않아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저희 집안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발생하여 전가족이 출동하여 그분 어른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은 곤혹의 빛을 띠며 전란을 응시했다.

[어떤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까?]

전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혜가 옆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어쩌면 당신과 관련이 있을지 몰라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요? 나와 관련이 있다구요?]

전혜는 전란이 눈짓으로 제지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은방울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에요. 사실 지난달 우리 집 중당(中堂)에서 한 장의 산수화가 발견되었어요.]

[그림?]

[그 그림 속에는 많은 인물이 있으나 대부분이 죽었으며 만면에 놀람과 당황하는 빛을 가득 머금은 한 명의 임산부와 또 두 명의 사내가 시체 더미 속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 그림은 방금 당신이 말한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잖아요?]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매우 흡사하군요. 임신한 그 부인은 아마 나의 모친일 것이며 혈전을 벌이는 두 사람 중 한 분은 나의 부친이 틀림없습니다. 헌데 당신의 백조부는 왜 찾으려고 합니까?]

이번에는 전란이 말을 받았다.

[그 그림 뒷면에는 백조부님의 수결(手決)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걸로 미루어 보건대 그 그림은 백조부님께서 친히 집안에 간직해 두셨든지 아니면 그분 어른과 관계있는 사람이 가져왔을 거예요. 어쩌면 백조부님의 원수 소행일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조사해야만 해요.]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전씨 자매를 바라보았다.

[전 낭자, 외람된 말 같지만 나를 귀각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리하여 막비강은 두 소녀를 따라 길을 떠났다.

 

***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에 도착하여 그림 속의 인물을 보면 자기의 신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만 알아내면 막고천이 부친을 괴롭히고 모친을 탈취한 증거까지 생기게 된다.

그럼 다시 혈검산장에 찾아가 떳떳하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보름 후, 그는 기대와 흥분이 뒤엉킨 심정을 안고 드디어 북악(北岳) 항산(恒山)에 자리한 북산검호각에 도착했다.

북산검호각은 사패천 중 북패천이라 불리는 것과 달리 매우 적막했다.

깎아지른 항산의 봉우리들 사이에 지어진 드넓은 성보에는 다만 삼백여 명의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북산검호각은 제자를 받아들이는 절차가 까다롭고 또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하산을 허락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 때문에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그토록 적은 인원으로도 무림의 사패천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을 보면 북산검호각의 검호들 개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검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가솔들이 적은 북산검호각인데다 근래에는 노호검 전포의 종적을 찾기 위해 대다수의 검호들이 강호로 나간 상태라 한층 더 적막했다.

두 자매의 웃어른들은 하나도 없고 그저 몇몇 문인들과 시비들만이 북산검호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시바삐 그림을 보고 싶은 일념에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의 적막한 모습 같은 것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 이분은!]

헌데 예의 그림을 보는 순간 막비강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림 속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내는 젊은 시절의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과 염라철장(閻羅鐵掌) 곡강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놀람과 당황의 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임산부는 막비강 자신의 생모 한경파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 중 다섯 번째인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염라철장이 막고천에게 빼앗긴 부인이란 다름아닌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염라철장 곡강의 자식은 막비강 자신이 아니라 그의 손아래 누이동생인 막영란이었고...!

이 발견은 막비강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더니 갑자기 외마디 함성을 질렀다.

[불효자식은 죽어 마땅하다!]

전란은 그의 얼굴빛이 갑자기 크게 변하자 급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 순간 막비강의 가슴속에선 후회와 미움, 그리고 비통이 동시에 치솟았다.

(막고천과 염라철장이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던 사람이 다섯 번째 어머니 냉상영이라면 나는 막고천의 친자식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막비강은 자신이 염라철장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막고천의 사람됨이 어떻든 간에 난 그의 친자식임에 분명하다! 헌데 나는 생부를 원수로 생각하고 다리까지 부러뜨렸다.)

극도의 비통함으로 막비강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뿐 아니라 그날 큰어머니를 학대했으며 큰형님에게까지 덤볐으니 이것은 실로 극악무도한 불효 행위다! 이제 내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던 중 전란이 이런 질문을 하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미안하오! 나중에 저승에서나 다시 만납시다.]

쐐액!

막비강은 비통하게 외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생인 전혜가 어리둥절하며 막비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니, 저승에서 만나자니 그럼 저 사람 죽으려고...!]

[빨리 뒤쫓아가자!]

두 소녀가 지붕 위로 뛰어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십여 리 밖에서 하나의 흑점이 번뜩하더니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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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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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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