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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天下第一人의 죽음 (1)

 

 

 

천하제일인과 세명의 고수가 대치한채 차 한잔 정도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이 천인공노할 놈들! 수상하다 했더니 삼마경(三魔經)을 익혔구나!]

돌연 동호천의 두눈에서 폭발하듯 노광이 터져나왔다.

꽈르르릉!

이어 동호천은 뇌성벽력같은 칠권(七拳)을 잇달아 쳐냈다.

권풍(拳風)과 권경(拳勁)이 서로 밀면서 부운청풍객 등을 향해 동시에 날아갔다.

동호천이 발휘한 무시무시한 내공에 부주의 여기저기가 풍지박산이 되어 날아올랐다.

그리고 동호천의 공격이 발휘되는 순간 옥풍도객등의 신형도 벼락같이 움직였다.

그들의 몸에서 터져나온 검광과 도광, 그리고 사신겸의 섬뜩한 빛이 어지럽게 대기를 갈랐다.

고오오오!

번쩍! 번쩍!

싸움은 풍운변색, 경천동지란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주는 깨어지며 통나무들이 흩어지고, 석두공과 금사종을 비롯한 자들은 모두 통나무위에 서있었다.

펑펑펑!

촤아악!

경력에 휘말린 동정호의 물이 수십장 허공까지 치솟았다.

 

<삼마경(三魔經)>

 

동호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삼마경이 대체 무엇이길래 세 명의 고수가 이같은 신위를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삼마경이란 것에 대해서는 경험이 많은 혈포단객이나 무형도객 같은 인물도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러나 무림의 몇몇 노강호(老江湖)들은 알고 있었다. 이 삼마경이란 것이 얼마나 가공할 마물(魔物)인지를...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삼마경을 익힌 자는 고금무적(古今無敵)이 된다는 말이있다.

또한 삼마경을 익힌자는 십만 명의 인명을 살해하고 난후 자신도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삼마경은 알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입에서 떠올리기를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삼마경은 말 그대로 세권의 마경(魔經)이다.

 

-검마경(劒魔經),

-도마경(刀魔經),

-살마경(殺魔經),

 

이 중에서 검마경에는 구가천마검법(驅駕天魔劒法)이란 절대적인 악마의 검법이 수록되어 있으며,

도마경에는 또한 팔황지옥도법(八荒地獄刀法)이란 것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살마경은 검마경이나 도마경이 각기 한가지의 무공만을 수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극히 잡다한 살인수법들을 수록하고 있다.

살마경에는 구가천마검법나 팔황지옥도법처럼 체계는 없지만 그에 못지않는 갖가지 수법들이 잡다하게 실려있는데, 이 살마경은 검마경이나 도마경과는 달리 천성적으로 그것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결코 연마해낼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살마경의 마공을 이루기만 한다면 그 기괴막측함은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원래는 이 삼마경이 한사람에 의해서 창안되었을 것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가공하게 변했었다.

삼마경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마력!

그것은 누구든지 한번 보기만 하면 깊이 빠져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 오묘한 수법들과 무공에 흔혹당한 고수는 그동안 익혔던 자신의 공력을 모두 버리고 삼마경을 익히고자 하게 된다.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삼마경을 연구하여 더욱 완벽한 무공으로 만들수 있지만, 그 무공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공력을 포기해야한다.

공력을 폐한 고수들은 삼마경을 익힐 때까지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게 되고, 그때는 무림인이 아닌 파락호조차도 당해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삼마경을 연성하지 못하고 보통 적에게 죽게 되고 삼마경의 주인은 끝없이 바뀌어져 왔다.

그럼에도 삼마경은 다른 비급들과는 달리 극히 은밀하게 쟁탈되고 쟁탈해왔기 때문에 무림에 거의 소문이 나지 않았었다.

 

한데 적룡혈운도주 해천월과 부운청풍객, 그리고 잔혼살객은 분명히 삼마경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해천월은 우검으로는 독문의 검법인 십이적룡검식(十二赤龍劒拭)을 펼치면서 왼손의 도()로는 도마경에 수록된 팔황지옥도법을 펼쳤다.

부운청풍객은 고검으로 구가천마검법을 펼치며 잔혼살객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살마경 상의 무공들을 펼쳐내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슈아아아아!

그들 삼인의 가공할 공격앞에서 동호천은 나약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동호천은 허공에 우뚝 멈춰서면서 손으로 우수로 하늘을 가리켰다.

[유성탄천(流星彈天)!]

그리 크지도 않은 음성이다.

그러나 그의 필생의 공력이 담긴 최후의 일초가 동호천의 손에서 펼쳐졌다.

쩌저저정!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빛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아올라갔다.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폭죽같이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촤아아아!

그 다섯가닥의 빛덩이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눈으로는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퓽퓽퓽!

[크아아악!]

[크악!]

그것은 세사람의 호신강기를 종이장처럼 찢어버리며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실로 눈깜박할 사이의 일이었다.

삼마경의 무공도 대단했지만 동호천의 유성탄천이란 무공은 그보다 더욱 강했다.

!

잔혼살객의 오른팔이 몸에서 분리되어 물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검풍과 도풍이 사라진 그곳에는 이미 세사람의 모습이 없었다.

그들은 호수위를 빛살처럼 날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동호천은 몸 주위에 푸른 빛이 감도는 호신강기를 둘러치고 물위로 내려섰다.

[사부님!]

석두공은 소리치며 달려갔다.

스스스!

갑자기 동호천의 호신강기가 빛을 잃고 사그라졌다.

동호천의 몸은 그와 동시에 허물어졌다.

석두공은 그를 안고 통나무위로 돌아왔다.

[사부님... ]

석두공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금사종이 말했다.

[어서 치료를...]

동호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엇다.

[이제 다 끝났다. 치료를 한다고 해도 노부의 생은 여기서 끝나니 그만두어라.]

동호천의 음성에는 조금의 기력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의 배에는 깊게 찔린 자상이 나 있었는데 그 상처에서 흐른 피가 복강(腹腔)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휘익! !

그때 망연자실하여 지켜보고 있던 무형도객과 혈포단객이 통나무 위로 날아왔다.

금사종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위급한 틈을 타 공격할 생각이오? 그렇다면 먼저 나부터 죽이시오.]

그의 얼굴에는 영웅적인 협기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석두공이 말했다.

[놔둬요. 그들에겐 살기가 없어요.]

 

[소형제, 동노선배의 상처는 엄중한가?]

다가온 무형도객이 침중하게 물었다.

동호천이 대답했다.

[곧 죽을 걸세. 아마도 자네들이 제일 먼저 온 문상객이 될듯하네.]

[...!]

[...!]

무형도객과 혈포단객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도 한눈에 동호천의 상세가 치명적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보았는가?]

동호천이 혈포단객과 무형도객에게 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호천은 다시 말했다.

[그들의 삼마경은 아직 삼성(三成) 수준이네. 그들 중 한사람만이라도 사성(四成)의 경지에 이르렀더라면 그들은 노부를 어렵지 않게 죽였을 것이네. 그들을 조심하게.]

[...!]

[노선배께선 그말을 하기 위해서 오늘같은 일을 벌였습니까?]

무형도객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는 이런 작정이 아니었지.”

동호천은 쓰게 웃었다.

[헌데 삼마경이 그만 노부의 의도를 빗나가게 했네. 하지만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네.]

동호천은 입을 다물었다.

석두공이 울먹이며 물었다.

[사부님!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지요?]

그러나 동호천은 묵묵부답이었다.

돌연 석두공은 손을 덜덜 떨면서 동호천의 가슴에 얹혔다.

아무런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석두공은 망연자실 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두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동호천은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 × ×

 

동정호에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수에 어지럽게 흩어졌던 통나무들을 다시 모아서 석두공과 금사종이 태운 불이었다.

일세를 풍미한 대기인 동호천은 동정호에서 한줌의 재로 변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바람을 부르는 풍래고도 풍래동자(風來童子)도 호변의 어부들에겐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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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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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바보냐 천재냐?

 

 

 

아름드리 통나무들을 수백개를 이어서 만들어놓은 부주 위에는 작은 집도 있으며 채소 밭도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빈터도 있다.

“...!”

“...!”

그 빈터에 칠척장신의 맹호산과 어린 석두공이 삼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석두공은 벙실벙실 웃기도 하고 천진한 표정이었지만, 맹호산은 긴장된 신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녀석은 보기보단 아주 딴판이구나. 자연스러운 저 자세도 자세이려니와, 저 웃음이 그대로 방패가 되어서 공격할 엄두를 못내게 하니... 만박노조 등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여간 낭패가 아니로군.)

적의를 전혀 보이지 않는 석두공에 대해서 아무리 비무라고 하지만 손안에 든 묵직한 판관필(判官筆)을 쳐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맹호산은 광명정대한 인물도 아니고 사람의 인명을 중히 여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람죽이는 것을 풀을 뽑거나 파리 죽이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도무지 그를 향해 손도 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손 한번 쓰지 않고 물러선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도 없는 일, 그는 눈을 딱 감고 자신의 무기인 판관필을 뻗었다.

[조심하게!]

!

판관필이 서로 한번 마주친 후 방향을 나누어 두공의 요혈로 날아들었다.

슈숙!

신쾌하고 강맹한 기세를 지닌 판관필의 왼쪽은 두공의 오른쪽에 있는 열여덟 개의 요혈을 노렸고, 오른쪽의 것은 왼쪽의 열여덟 개 요혈을 노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피하기가 쉽지 않은 수법이었다.

하삼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맹호산의 판관필은 과연 대단하군. 저 수법을 피하자면 나라도 진땀을 흘리겠는 걸?)

사실 맹호산은 망설이다 마음먹고 한번 펼치는 수법이고 보니, 기왕이면 자신의 절초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맹호산의 판관필은 두공의 현기(玄機)와 풍곡(風谷)의 두 혈도를 찍어갔다.

두공과의 거리는 불과 한자의 거리도 남지 않았기에 맹호산은 성공을 확신했다.

(그럼 그렇지!)

그는 판관필에서 경기가 쏘아나가지 않게 진기를 뭉쳤다. 두공이 부상을 입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한데 바로 그순간에 두공의 손바닥이 두개의 판관필을 향해서 뻗어지는 것이 아닌가?

쉬쉭!

번개처럼 빠르기는 했지만 아무런 수법도 아닌 그냥 빠르게 뻗은 것에 불과했다.

[어딜!]

맹호산은 크게 외치면 판관필을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두개의 판관필은 수십개로 변해버린 듯했다.

맹호산은 그 기세 그대로 두공의 혈도를 찍었다.

!!

그러나 두공의 몸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판관필을 타고 마치 물 흐르듯이 하면서 맹호산의 머리를 타넘어가고 있었다.

[일초!]

머리위에서 두공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맹호산은 그의 신속한 반응에 놀라며 뒤로 판관필을 느리게 던져냈다.

그리고 즉시로 몸을 돌리며 선풍각(旋風脚)의 수법으로 공중에서 내려오는 두공의 허리를 찼다.

휘이잉!

선풍각이 말그대로 선풍을 일으켰다.

두공은 제비가 물을 차고 나르듯이 빠르게 맹호산의 발을 차면서 날아올랐다.

[!]

[훌륭하다!]

맹호산은 그가 연거푸 두번이나 자신의 수법을 피하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원래가 성격이 조폭한 맹호산이다.

쏴아아!

그는 즉시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날아올랐다.

만박노조 등의 안색이 확 변했다.

맹호산은 내외공을 모두 골고루 닦은 인물이다. 도검이 불침하는 그의 몸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가공할 병기이다.

게다가 내공이 가세한다면...

맹호산은 질풍처럼 두공을 향해서 부딛혀갔다.

한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피이잉!

그가 느리게 던졌던 판관필은 밑에서 회전하며 날아올라 두공의 등뒤를 노리고 있었다.

무형도객이 버럭소리쳤다.

[맹보주! 어린아이를 죽일 참이요?]

그는 황급히 동호천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동호천은 보지도 못한 듯 덤덤했다.

중인들이 놀라는 사이에 판관필은 두공의 등으로 그리고 인간병기인 맹호산의 몸은 정면에서 두공에 부딛혀갔다.

두공이 갑자기 등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굉음이 터져나왔다.

한데 두공의 몸은 마치 연기처럼 맹호산의 겨드랑이로 빠지면서 그의 등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맹호산은 눈앞에 날아든 자신의 판관필을 받으며 땅으로 내려섰다.

두공이 빠져나가면서 두 판관필의 각도마저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 받아라!]

그는 사초를 사용하고도 두공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자 화가 꼭지 끝까지 올랐다.

[파천벽해(破天劈海)!]

파아아앗!

두개의 판관필로 부터 수백 가닥의 강기가 폭발하듯 퍼저나갔다.

강기들은 종과 횡으로 각각 방향을 잡고 있어서 피할래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두공이 소리쳤다.

[나는 당신처럼 호걸인 척 하는 사람이 싫어요.]

스스슷!

순간 그의 몸은 세개로 나뉘어졌다.

소리치는 그의 몸은 그대로 서있는데도 그의 왼쪽과 오른쪽으로는 각기 하나씩의 석두공이 뒹굴면서 강기들의 영향권으로 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만박노조가 소리쳤다.

[분신둔형술(分身遁形術)!]

파파파팍!

퓽퓽퓽퓽!

강기들은 두공의 몸과 함께 아름드리 통나무마저 뚫고 들어갔다.

두공의 몸은 마치 벌집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순간에 갈라졌던 두개의 분신이 굴러와서 함께 합쳐졌다.

그러자 그의 몸은 그대로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었다.

맹호산은 할말을 잊고 멍하니 서있었다.

[크하하하하!]

그는 미친듯이 한바탕 광소를 터뜨리고는 부주를 차고 날아올랐다.

슈아아앙!

그의 몸은 한줄기 빛처럼 동정호를 날아갔다.

[동노선배! 훌륭하외다 훌륭하외다. 이 맹호산은 선배의 어린 제자조차 당해내지 못했으니 앞으로 무림에 나오지도 않겠소.]

멀리서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남아있는 사람들로서는 한편으로는 반가운 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섬찟한 말이었다.

동호천은 나직하게 말했다.

[잘가게!]

비록 나직했지만 그의 말은 진기로 가득차 있어서 멀리멀리까지 퍼져갔다.

만박 등은 그의 내공에 내심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잘가게란 말 한마디가 뇌성벽력처럼 그들의 고막을 두드렸던 것이다.

단혼곡주 하삼풍이 차갑게 말했다.

[선배께선 차라리 우리 모두에게 그냥 은거하라고 명하시지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꾸미셨소?]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하니 자네도 내 제자를 제압하지 못한단 말인가?]

동호천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의도가 어떤 것인지를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일곱 명의 고수들은 석두공을 더이상 어린아이로도 바보로도 보지 않고 있었다.

한마리의 도깨비새끼로 여길 뿐이었다.

맹호산의 공격은 그들로서도 그처럼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었는데 석두공은 대수롭지 않게 피해버린 것이다.

[으하하하하...]

하삼풍이 광소를 터뜨렸다.

우르르릉!

그의 웃음소리에 동정호의 물결이 부르르 떨리고 내장이 터져 죽어버린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금사종은 학질에 걸린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진정 하삼풍의 공력은 엄청났다.

갑자기 동호천이 말했다.

[이제 그만하게.]

!

하삼풍은 거짓말처럼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요. 흐흐흐... 감히 선배께 무례를 범할 수야 있겠소? 이 하삼풍도 그만 떠나야 겠소. 하지만 내 마음은 지극히 기쁘오.”

[...!]

[...?]

[선배께서 오늘 내일 한다는 말을 듣고도 사실은 반신반의 했소. 그러다가 선배의 정정한 모습을 보고는 낭설이었구나 해소. 한데, 이런 일을 꾸미는 것을 보니 선배께서 세상을 하직할 때가 다 됐긴 된 모양이오. 으하하하하... ]

하삼풍은 다시금 광소를 터뜨리고 날아올랐다.

쐐애애액!

그는 순식간에 맹호산이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져갔다.

하삼풍은 번개처럼 날아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흐흐흐흐... 동호천의 손에 죽지만 않으면 무림을 장악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동호천은 자신이 죽기 전에 우리 모두를 죽여버리려고 이런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이곳은 빨리 떠나는 것이 최선이다. 헛된 욕심을 부리다가 천추의 한을 남기기 쉽상이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동호천의 무공을 얻기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미련없이 깨끗하게 포기하고 물러설 줄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진정 무서운 효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박노조와 무형도객이 거의 동시에 일어서면서 포권했다.

[후배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스읏!

만박노조가 먼저 몸을 날렸다.

명색이 무불통지라는 만박인 그 역시 이곳에서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무형도객 역시 몸을 날리려고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동호천이 소리쳤다.

[자네는 잠시 머물러라!]

무형도객이 움찔하면서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한 표정이 역력했다.

[후배가 노선배께 바른 말을 좀 했기로서는 이렇듯 소인배처럼 구는 것이오?]

[그냥 있기만 하게.]

동호천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여덟 명의 고수 중에서 세사람이 떠났고, 남은 사람은 적룡혈운도주 해천월과 혈포단객, 부운청풍객, 그리고 잔혼살객 및 무형도객 뿐이었다.

그러나 무형도객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물러설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부주 위의 공기는 더욱 팽팽하게 당겨진 듯했다.

부운청풍객이 앞으로 나섰다.

스르릉!

그는 보검을 뽑아들면서 허공에 흰빛을 몇 번 뿌렸다.

번쩍! 번쩍!

[소생은 노선배의 제자가 아닌 노선배께 직접 한수 가르침을 받았으면 합니다.]

무치 동호천이 무림에서 움직인 것만도 일백십수 년, 그동안에 단 한번도 도전조차 받아본 일이 없는 동호천이다.

한마디로 도전불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에게 처음으로 도전자가 나타났다.

이것은 어쩌면 동정호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는 것보다 더욱 큰 사건일 수도 있었다.

휙휙!

석두공과 금사종이 동호천 앞을 막아섰다.

석두공은 부운청풍객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천만 개의 바늘처럼 부운청풍객을 찔렀다.

(!)

부운청풍객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맹세코 그는 이처럼 극강한 살기를 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살기에는 다른 고수들마저 물러섰다.

어마어마한 살기...

동호천의 두 동생인 주치 동복신과 보치 동적선 마저 놀라게 만들었던 그 가공할 살기다.

소위 고수라고 불릴 정도의 인물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몇가지 있다.

첫번째가 힘으로 여인을 간음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둘째로는 죽음을 앞둔 자에게 치욕을 주는 짓도 말아야 할 것이며,

죽음에 임박한 자를 공격하는 것또한 말아야 하는 것이다.

동호천은 이제 스스로 죽음을 선언한 입장인데 그런 동호천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파렴치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석두공이 자르듯이 한자한자 내뱉었다.

[.......]

부운청풍객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쳤다.

이토록 살기로 가득찬 음성이 있을 수 있을까?

석두공의 음성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놈... 죽여야 한다!)

부운청풍객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물러서거라!]

동호천이 소매를 슬쩍 저었다.

부드러운 경풍이 그이 손짓에 따라 일어나며 석두공과 금사종의 몸이 옆으로 주르르 밀려갔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다.

한데 부운청풍객은 자신을 응시하는 동호천의 눈망울 속에서도 하늘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심혼을 송두리채 빨아들이는 심연(深淵)과도 같았다.

(이것은 심력(心力)이다! 강한 심력으로 이미 나를 공격했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백치가 되고 말 것이다.)

부운청풍객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눈을 뗄래야 뗄 수도 없었다.

자신이 송두리채 동호천의 눈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혼신의 공력을 다짜내어 자신을 버텼다.

파파파팟!

그가 딛고 있는 부주의 통나무가 움푹 파였다.

또한 그의 옷자락도 찢어질듯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시퍼런 혈관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그의 전신은 삽시간에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동호천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운청풍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때 손에 땀을쥐고 두사람을 바라보던 적룡혈운도주 해천월과 잔혼살객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교환되고,

해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혈포단객에게 은밀한 전음을 뛰웠다.

[혈포단객! 무엇때문에 이곳에 왔소? 지금이 기회요. 함께 동호천을 죽입시다.]

하지만 혈포단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동호천과 부운청풍객에게 못박아두고 있었다.

해천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혈포단객은 혼자서 행동하는 인물, 함께 하자는 데 대한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동호천을 돕지도 않을 것이다.

이때 잔혼살객은 죽음이 서려있는 것같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무형도객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형도객! 동호천이 가장 사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귀하다. 우리 개개인으로서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동호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만약, 귀하가 동호천에게 도전하겠다면 본인은 당신을 적극 돕도록 하겠다.]

[웃기는군.]

무형도객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동호천이 나를 죽이겠다면 당당히 싸워보겠다. 하지만 그가 그런 뜻이 없다면 나는 그에게 도전할 생각이 없다.]

[...!]

무형도객의 말에 잔혼살객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뜻은 모두 모여졌다. 귀하 혼자만 고집을 부리겠다면 그것도 할 수 없지. 그러나, 만약 우리를 방해한다면 그순간부터 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형도객이 냉랭하게 되받았다.

[잔혼살객! 당신과 나는 같은 오객으로서 조금 아는 사이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를 협박하지 마라.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고요한 전음이었지만 무형도객의 음성에는 태산같은 무게가 있었다.

그때 동호천이 돌연 눈을 감으며 말했다.

[부운청풍객! 네 무공은 아주 특이하군.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다른 걸 보니 기연이 있었던 모양이군. 오초를 양보하마!]

쿵쿵쿵!

부운청풍객은 세걸음을 물러서며 식은땀을 씻어냈다. 하지만 그의 전신은 이미 물에 빠진 생쥐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도전이 받아들여졌다.

동호천은 상대방의 무공을 상대방보다 더욱 능숙하게 펼쳐보임으로서 아예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해왔던 절대고수다.

그런 그가 부운청풍객의 무공을 파악하지 못하고 도전을 수락한 것이다.

스르릉!

부운청풍객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동호천은 여전히 눈을 감고 떠지 않았다.

그때였다.

[후배 해천월 부운청풍객과 함께 노선배의 무공을 견식하고자 하오.]

해천월이 우검과 좌도를 뽑아들면서 말했다.

동호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었다.

[그것도 좋겠지.]

[잔혼살객도 두사람과 뜻을 같이 하겠소.]

잔혼살객이 허리에서 그의 성명병기인 사신겸(殘魂鎌)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번쩍! 번쩍!

시퍼런 사신겸의 날이 햇빛에 빛을 발했다.

[상관없네.]

동호천은 방금 전에 석두공과 맹호산이 섰던 곳으로 가서 우뚝 섰다.

부운청풍객, 잔혼살객, 그리고 적룡혈운도주 해천월은 그를 세 방향에서 둘러싸고 병기를 뽑았다.

금사종은 석두공의 눈치를 살폈고,

석두공은 살기어린 표정으로 세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팽팽히 당겨놓은 활시위같은 긴장이 부주 일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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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동정호의 파란 (2)

 

 

[금사종, 상화장은 얼마나 익혔느냐?]

동호천이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금사종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겨우 초식을 암기했을 뿐입니다.]

[당장은 그 정도면 족하다. 밖으로 나가서 의자들을 내놓고 자리를 만들어라!]

동호천의 말에 금사종은 어리둥절하면서 나갔다.

밖으로 나왔지만 부주의 어디에도 의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통나무를 잘라놓은 것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걸로 의자를 대신하라는 말인가? 한데 무슨 일로...?]

금사종은 말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부주의 근처로 시체가 떠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인물들이 물위에서 부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한명은 마치 빛살처럼 부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

금사종은 통나무를 번쩍 들어 한쪽에 놓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앉으시오.]

그 자신도 엉겁결에 취한 행동이었다.

 

동호천은 두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곧 당금 무림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은 거의 다 모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너를 탐내는 자도 있을 것이고 너를 죽여버리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쪽의 뜻에도 따라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공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동초천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죽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무림은 난세로 치닫게 된다. 그동안 내 눈치를 보던 자들이 천하제일이란 자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게 되겠지. 네가 할 역할이 그들에게 또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공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는 그만한 힘이 없을 것같습니다.]

[아직은 없지. 그러나 앞으로 생기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들끼리 싸우지 않고 너를 죽이려고 쫓아다니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동호천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두공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런 제 목숨이 백개라도 모자랄 텐데요.]

[어쩌면 네 목숨은 백한개 일지도 모르지 않느냐? 자 밖으로 나가자.]

동호천은 말을 하고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꼿꼿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공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나섰다.

 

***

 

부주의 가운데 위치한 마당같은 곳에는 통나무 의자 십여개가 양쪽으로 나란히 놓여져 있고, 네 사람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금사종은 한쪽에 서있다가 동호천과 두공이 나오자 허리를 굽혔다.

네사람, 그들은 만박노조와 하삼풍, 잔혼살객, 그리고 혈포단객(血袍單客)이었다.

혈포단객은 하삼풍의 쾌속선에 달라붙은 탓에 물에 젖지 않고 부주까지 이른 것이다.

동호천은 그들을 향해서 웃어보이며 말했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소. 여러분!]

만박노조 등은 벌떡 일어서면서 안색이 변했다.

(어떻게 된 건가? 분명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들었는데...)

만박노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후배 만박이 동노선배께 문안드리오.]

[고맙네.]

동호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삼풍도 포권을 했다.

[하삼풍 노선배께 인사드리오.]

[됐네. 됐어. 모두 앉도록 하게.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동호천은 손을 저어 만류하며 통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도 그 중의 하나에 가서 앉았다.

하삼풍과 잔혼살객 등은 그가 앉은 후에 따라 앉았다.

모두가 동호천의 눈치를 살피며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문득 동호천이 소리쳤다.

[모두들 나오게.]

순간,

휘익! 휙휙휙!

부주의 곳곳에서 여러 명의 인물이 번개처럼 빠르게 뛰쳐나왔다.

[역시 노선배께서는 명불허전이시군요. 후배 부운청풍객(浮雲淸風客) 인사드립니다.]

중년의 나이지만 관옥같은 얼굴을 가진 중후한 인상의 사나이가 포권하며 말했다. 그의 어깨에는 한자루의 고색창연한 보검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포권을 했다.

[적룡혈운도주(赤龍血雲島主) 해천월입니다.]

[철사보주(鐵獅堡主) 맹호산이외다.]

[무형도객(無形刀客)입니다.]

원래 있는 네 사람의 몸에서 풍겨나는 기도만으로도 사위가 압도당할 듯했다.

한데 이들 네사람이 새로이 더해지자 공기는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되어버렸다.

 

적룡혈운도주 해천월,

그는 칠십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년과도 같은 단단하고 탄력있는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천월은 등에는 도()를 맸으며 왼쪽 허리에는 검()을 매고 있었다.

그는 우검좌도를 사용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철사보주 맹호산,

사십이 막 넘었을 그는 칠척이 넘는 키를 가진 거한이었다.

피부는 철판이라도 깐 듯이 검붉게 보였으며 두자루의 판관필을 가지고 있었다.

 

무형도객,

오객의 한사람인 그는 이들 중에서 가장 젊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전혀 무림인 같지 않을 정도로 표정은 부드럽고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생이란 전혀 모르고 자란 대부호의 자제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호천은 그런 무형도객을 가장 유심히 보았다.

(대단한 녀석이군. 무도에 대해 깊이 깨달았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공을 스스로 만들어 익혔다니... 당금 무림에 나 이외에 또 이런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유심히 보았다고는 하지만 동호천의 시선이 무형도객에게 머무른 것도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

하지만 무형도객은 그에게 알듯말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호천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옆에 서있는 두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이 노부의 제자요.]

 

-무치 동호천의 제자!

 

그 하나만으로도 세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만박노조 등의 시선이 일제히 두공에게로 모였다.

순간,

[!]

모두가 거의 동시에 짧은 탄성을 질렀다. 두공의 골격이 무공을 익히기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한데 동호천은 한숨을 푹쉬었다.

[... 옥에 티란 말이 있듯이, 하늘은 언제나 완전한 것은 만들지 않는 모양이오. 이놈은 골격이 이토록 뛰어나지만 머리는...]

[...!]

[...!]

[바위처럼 단단하오. 두공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동호천은 두공에게 말했다.

두공은 포권을 취했다.

[후배 석두공(石頭公)입니다. ]

순간,

[허허허허... ]

단혼곡주 하삼풍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석두공...

말그대로 돌대가리란 소리가 아닌가?

한데,

[하하하하... ]

석두공 그도 따라서 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삼풍은 웃음을 뚝 그쳤다.

반짝반짝 별빛같은 눈을 가진 미소년이 바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행동이 바로 그 인물이 아닌가?

이같은 상황에서 화내지 않고 웃는다는 것만 보아도 정말 바보거나, 아니면 아주 심기가 깊거나, 그것도 아니면 모든 일에 초탈한 그런 사람일 것이다.

(바보로군!)

이것은 그곳에 있는 고수들 모두의 생각이었다.

단 한사람, 금사종 만은 석두공에게 어떤 신비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동호천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렇다네. 한데도 노부는 이녀석에게 내 모든 것을 물려주지 않을 수 없다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동호천의 모든 것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그대로 천하제일인의 뒤를 잇는다는 것,

서로가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는 이정삼사오객으로서는 군침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노부는 이런 생각을 했네. 이녀석 혼자서는 결코 무림에서 배겨나갈 수가 없을 걸세. 완전히 자랄 동안만이라도 보호자가 필요하단 말일세.]

[그렇겠군요. 선배께서 이 만박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고제자의 후견인이 되고 싶습니다.]

만박노조가 일어서면서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하삼풍의 시선이 만박의 뒤통수에 내리꽂혔다.

(교활한 늙은이. 염치도 없구나.)

동호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도 그렇게 하고 싶네.]

만박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순간 다른 일곱 명의 고수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노선배!]

그들이 막소리치는 데,

[! 앉게, 모두 진정하고 앉게.]

동호천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그들은 털썩 주저앉았다.

동호천의 말이 이어졌다.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게 아닌가? 노부는 만박에게 후견을 맡겼으면 싶지만, 이런 일은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내 제자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네.]

[헤헤헤... 사부님! 제뜻은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전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요. 저도 부하를 거느린 대장부인데 남에게 몸을 의탁하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두공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만박 등은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바보가 맞는가? 바보가 어떻게 저런 말을 다...)

동호천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이놈! 나는 곧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네녀석이 무림을 너무 쉽게 보는구나.]

[저는 무림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쉽고 어렵고가 있습니까? 단지 대장부로서 제 뜻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석두공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박노조 등은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무형도객이 일어서면서 형형한 눈초리로 물었다.

[동노선배님! 그럼 이번 동정호의 일이 모두 선배님께서 제자를 위해 벌이신 일이란 말씀이십니까?]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상대가 동호천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느꼈던 의문이지만 모두 잊어버렸던 것인데, 사실이 확연해지자 무형도객이 직접 따지고 든 것이다.

동호천은 그를 빤히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그렇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무형도객의 영준한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은연중에 무림을 견제하여 오신 노선배께서 이같은 일을 벌이시다니... 수천 명의 목숨이 동정호에 피를 뿌리고 시체를 가라앉혔는 데 선배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입니까?]

피를 토할 듯한 말이었다.

(젊은 놈이 곧 죽겠구나. 감히 무치 동호천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아무리 평생 사람을 죽이지 않은 동호천이라 할지라도 살지 못할 것이다.)

하삼풍은 속으로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나가 죽으면 그만큼 적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한데 동호천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대단한가? 감탄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선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소? 평생 한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던 선배의 명성은 모두 헛된 것이었구려!]

무형도객이 분에 찬 일갈을 터뜨렸다.

동호천은 그의 고함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일곱고수는 물론이고 금사종마저 바짝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고 있었지만,

석두공과 동호천은 북소리를 들은 듯 바람소리를 들은 듯 표정이 없었다.

동호천이 말했다.

[사실, 한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던 말은 거짓말이네. 난 한사람을 죽였다네. 독한 놈이었지.]

[...!]

[...!]

무형도객마저 말을 잊고 입을 딱 벌렸다.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부주에 감돌았다.

잠시 후 동호천이 다시 말했다.

[아마도 내가 있음으로 해서 자네들은 행동을 어느 정도 자제했을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사신도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호천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사람이 별로 죽지 않았겠지? 오늘 나때문에 이삼천 정도 죽는다고해서 그다지 나쁠 것이 뭐있는가?]

[어떻게 그런 궤변이... 노선배 정말 실망했소이다.]

무형도객이 기가막힌 듯 살기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석두공이 그를 만류하면서 말했다.

[이미 일은 벌어진 것,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사부님께 추궁하신댔자 대협께서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사부님께서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하고 죽도록 해주시지요.]

무례한 것같으면서도 아닌 것같기도 하고, 조리가 있어 현명한 것같기도 하면서 바보스러운 데가 있는 두공의 말이었다.

만박노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똑똑한 바보로군 똑똑한 바보야.)

그때 동호천이 말했다.

[무형도객이라 했든가? 자네의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네. 하지만 난 달리 감흥이 없으니 내 제자 말대로 접어두고 내 말이나 다 들어보도록 하게.]

무형도객은 분을 누르고 가만히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호천의 말이 이어졌다.

[내 제자의 후견을 정하는데 있어, 노부는 오초 내에 내 제자를 제압하는 자로 정하고 싶네. 만약 오초 내에 제압하는 사람이 여럿이라면 가장 먼저 제압하는 자로 하지. 무림인이 무공으로 정하는 것인 만큼, 아마 이녀석도 무공에는 토를 달지 못할 걸세.]

[오초내에 저를 제압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석두공이 물었다.

그의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은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고,

동호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또한, 이곳에 온 자네들도 마음대로 해도 좋네. 내 제자를 억지로 잡아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분명히 밝혀두네만 저녀석을 잡는다면 노부가 직접 엮은 두권의 무치무요(武痴武要)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무치무요란 말에 중인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천하제일인의 비급을 탐내지 않는 무림인이 누가 있겠는가?

[좋습니다. 대장부가 자유를 위한 일인데 누구와 싸우길 마다하겠습니까? 당장 시작하지요.]

석두공이 호언을 하면서 나섰다.

만박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무지 석두공이란 놈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같았다.

[껄껄껄...]

갑자기 철사보주 맹호산이 대소하고 말했다.

[자네는 머리는 좀 시원찮은데 행동은 정말 시원시원한데가 있군그래. 본좌가 먼저 자네를 상대해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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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동정호의 파란 (1)

 

 

동호천은 침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자네는 앞으로 오년 동안만 머리를 빌려주게.]

[...머리라니... 이것 말입니까?]

금사종이 안색이 변하며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동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종이 뒷걸음질 쳤다.

[...안됩니다.]

[고깃덩어린 필요가 없다. 노부가 빌리려고 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역할 뿐이니까.]

동호천의 말에 금사종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시고... ]

[지금 말했지 않은가? 단지 자네가 참을성이 없었을 뿐이지.]

금사종은 멋쩍게 웃었다.

과연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호천은 두공에게 말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 그게... 저 서생이라고... ]

두공은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얼버무렸다.

동호천은 금사종에게 말했다.

[이렇다네. 자네가 할 역활은 이 아이의 머리가 되어주는 것 뿐이네. , 무슨 말이든지 이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야만 하네.]

금사종은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었는데 그사이에 다 잊어버렸다니...

(무공은 아주 고강한 것같은데 이런 머리로 어떻게 상승무공을 익혔을까?)

금사종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의문이었다.

동호천의 말이 이어졌다.

[오년 동안만 하면 되네. 그때까지는 한시도 내 제자의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돼. 대신!]

[...!]

금사종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호천은 베개밑에서 두권의 책을 꺼냈다.

[이것을 자네에게 주겠네. 이 두 권을 익히게 되면 천하제일(天下第一)은 못되도 천하제이(天下第二)는 될 수 있을 걸세.]

포개진 비급의 표지에는 <무치무요(武痴武要)>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금사종은 무치라는 글을 보고는 몸이 급격하게 떨렸다.

죽음이 임박한 것같은 노인이 바로 전설적인 고수인 무치 동호천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본 것이다.

털썩!

금사종은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자분께서 익히셔야 할 것입니다.]

[협기(俠氣)가 있기는 있군.]

동호천이 만족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또 말했다.

[하지만 익히지 않으면 지금 당장부터 어려움이 닥칠거야. 상권은 신공편이고 하권은 신초(神招)편이네. 하권에서 상화장(翔華掌)이란 수법을 당장 익히도록 하게. 한가지 명심할 것은....]

금사종은 비급을 받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호천의 눈에서 가공할 빛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살기도 아니고 무공도 아니었다.

단지 위엄이라고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자네가 이것들을 모두 대성한다고 하더라도 내제자는 즉시 자네를 죽일 수 있네.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말게.]

금사종은 동호천의 말에 다만 몸을 움추릴 뿐이었다.

[저쪽으로 가서 상화장을 익히게.]

동호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금사종이 두공의 방으로 들어간 후, 동호천은 두공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사부... ]

두공은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면서 울먹였다.

동호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너와 헤어질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아직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스윽!

두공은 대답을 못하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동호천이 말했다.

[장부란 자신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다. 울고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어야 한다. 정사라든지 의리같은 데에도 얽매이지 말아라. 너를 얽어매는 것은 너자신 하나면 족하다.]

두공은 동호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동호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평생 오직 한사람을 죽였다. 처음에는 한사람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지. 인간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난 후다. 그래서 내 목숨이 하나이니 만큼 딱 한사람만 죽이자고 생각했었지.]

[...!]

[단혼곡주 하삼풍의 아들을 죽였는데, 그래도 죽이고 나니 후회가 되더군.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앙금이다. 네게 부탁하는데, 하삼풍을 죽일 기회가 오더라도 나를 생각해서 두번은 살려줘라. 세번 살려줄 필요까지는 없다.]

[한데 사부님...]

두공이 고개를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제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상관없다. 나는 네게 부탁했고,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하삼풍의 복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동호천이 웃으며 말했다.

[!]

두공도 따라서 웃었다.

죽음을 눈앞에둔 사부의 유언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제자는 그것들을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했다.

 

***

 

시간은 흘러서 정오가 지나고, 동정호변에 모여든 무림인들의 숫자는 더욱 많아져서 삼천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배를 준비했고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살아있는 무림의 전설적인 존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심장은 급격하고 고동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배를 저어 부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감히 먼저 가려는 사람도 없었고 뒤쳐지려는 사람도 없었기에 배들은 횡으로 열을 지어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올가미가 가운데를 향해서 조여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 ×

 

갑자기 동호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벌컥 화를 냈다.

[그 미친 놈들이 날짜를 잘못 계산했구나!]

[...?]

두공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호천을 바라보았다.

씩씩!

동호천은 화가 나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미친놈들! 멍텅구리! 때려죽일 놈들!... ]

그는 잇달아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두공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사부 혹시 미친 건... ]

철썩!

동호천의 손바닥이 두공의 뺨에 작렬했다.

[이놈아! 미치긴 내가 왜 미쳐? 그 두놈들이 미쳤지.]

두공은 얼이빠진 듯이 뺨을 감싸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호천이 다시 소리쳤다.

[아직 열흘도 더 남았는데 그놈들이 나를 일찍 죽으라고 하다니... 멍텅구리같은 녀석들! 날짜계산도 제대로 못하다니... 씩씩!]

[그놈들이 누굽니까? 사부. 제가 혼을 내놓겠... ]

짝짝!

두공은 다시 뺨을 싸잡고 한걸음 물러섰다.

[네놈은 사숙(師叔)들을 혼내놓겠다는 거냐? 도무지 경우가 없구나.]

동호천이 준엄하게 말했다.

[주치(酒痴)사숙과 보치(寶痴)사숙 말이십니까?]

두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리 기억력이 없는 두공이지만 그 두사람만은 조석으로 보고 자랐기에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머리가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입이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동호천이 소리치고는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듯이 가만히 있었다.

[...]

그러다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네말이 맞다맞아. 그놈들은 혼이 나야된다. 내가 열흘이나 일찍 죽도록 한 댓가를 받아야지. 껄껄껄... ]

[...?]

[다음에 그놈들을 만나면 아무소리도 하지 말고 다짜고짜 뺨부터 열대씩 때리도록 해라. 이말은 잊어버리면 내가 죽기전에 네녀석부터 죽여버리겠다.]

동호천의 말은 진심이었다.

두공은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서 숯으로 몇자 적었다.

 

<사숙들은 뺨을 열대씩 맞아야 한다. 열흘 빨리 사부를 죽게 했으니 당연히 맞아야 한다.>

 

번개처럼 써내려간 글씨였다.

그러나 그것은 숯으로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껄껄껄껄... ]

동호천은 만족한듯 크게 웃었다.

그의 눈앞에는 제자에게 두들겨 맞을 두 동생의 얼굴이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웃고난 후 그는 극히 피로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요한 그의 얼굴은 덕도한 고승인듯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콰아아아!

[배 밑창이 뚫렸다. 어서 다른 배로 옮겨가라!]

누군가가 고함쳤다.

그러나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개같은 놈이 밑창을 뚫었다.]

[무치가 남길 비급을 혼자서만 독식하려는 놈이 있다.]

[찾아서 찢어 죽여야 한다. !]

갖가지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올가미처럼 부주를 조여가던 배들이 일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뿌직! !

휘이이익!

휙휙휙휙!

일제히 배의 갑판같은 나무판자를 줏어들고 물위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림을 주름잡는 고수들이다. 작은 나무판자 하나만 하더라도 타고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동정호에는 갑자기 배들이 사라지면서 수 천명의 고수들이 마치 소금장이처럼 물위에 새까맣게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분수자(分水刺)가 고수들의 다리를 찍기 시작했다.

!

[으악!]

피가 호수물로 적셔들고,

펑펑!

암습자들에 대항하여 물속으로 장력을 쳐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물속에 있는 자들의 수공(水功)은 대단했다.

한개의 분수자가 다리를 찍는 순간에 이미 다른 하나의 분수자가 다시 등을 찍고 있었다.

호수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면서 사람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수공(水功)을 익힌 고수는 극히 드물다.

물에서 이같은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처럼 죽어가는 것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무엇보다도 놀라고 당황한 데다 수공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감하게 물속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치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분수자로 사방에서 찍어대는 그들에게 난도분시가 되어 영원히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살아 있는 수백 명의 인물들은 단지 널판지들 위를 빠르게 뛰어다니며 분수자의 공격을 피할 뿐이었다.

 

동정호변,

그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있던 한척의 배위에서 하삼풍이 씨익 웃으며 만박노조를 바라보았다.

[다른 자들은 내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소?]

내 솜씨가 어떻느냐는 듯이 교만한 음성이었다.

만박노조가 말했다.

[순식간에 이천삼 백여 명이 죽었군. 무림의 힘이 크게 줄어들었어.]

[노조께선 저들도 고수로 보는 것이오? 저들은 대부분 명을 받아서 온 이인자거나 충실한 후계자를 두고 왔을 것이오. 한마디로 있으나 마나한 자들이오.]

하삼풍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만박노조는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대신할 자가 있는 자들은 모두 죽어버려야겠군.]

[다행히 난 후계자가 아직 없소이다. 노조.]

하삼풍은 농담처럼 말하며 배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탄 배는 쾌속선이었다.

배는 손살같이 부주를 향해 달려갔다.

스읏!

그때 물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없이 뛰쳐올라오며 하삼풍의 배 후미에 붙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혈포를 입은 중년인으로 손에는 역시 피처럼 붉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마치 불에 달아올라 벌건 단계를 지나 하얗게 백열하는 철판처럼 보였다.

어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강렬한 힘이 그에게 숨겨져 있는 것같았다.

손가락 두개가 쾌속선에 박혀서 그의 몸을 지탱시켜주고 있었다.

한데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동정호에서 부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 쾌속선 말고도 또 있었다.

쏴아아아아!

물위에 우뚝 서서 부주를 향해 미끌어져가는 사람...

그는 전신에 먹보다 검은 묵의(墨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피풍의가 어둠처럼 그를 감싸고 있다.

쾌속선 위에서 그 묵의인을 발견한 하삼풍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잔혼살객(殘魂煞客)이로군.]

잔혼살객...

드디어 오객(五客) 중의 잔혼살객 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슈슈슉!

물속에서 분수자들이 튀어나오면서 잔혼살객의 몸을 노렸다.

그러나,

파파파팍!

잔혼살객의 주위에는 이미 철벽처럼 두터운 호신강기(護身剛氣)가 펼쳐진 후였다.

[크아아악!]

[크룩!]

물속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를 습격했던 자들이 호신강기에 반탄되어 자신들의 내장이 파열되어 버린 것이다.

파아아아앗!

잔혼살객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주위에서는 비명이 줄을 이었다.

[크아아아악!]

[크악!]

물속에서도, 물위에서 물속의 살수들을 피했던 자들도, 잔혼살객이 그들의 곁을 지나감에 따라서 비명과 동시에 시체가 되어갔다.

추풍낙엽이라는 표현,

그 표현으로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갑자기 잔혼살객의 귓전을 때리는 음성이 있었다.

[잔혼살객! 더이상 본좌의 수하들을 해친다면 먼저 본좌와 싸워야 할 것이다!]

(단혼곡주 하삼풍!)

잔혼살객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하삼풍이 천리전음의 수법으로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잔혼살객의 눈빛은 흐릿한 회색이었다. 죽음의 빛이란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쾌속선을 보고 말했다.

[하곡주! 당신은 남을 죽여도 되고 나는 안된단 말이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당신의 단혼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휘익!

말이 끝나자 마자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부주를 향해서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하삼풍의 전신에서 폭풍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푸르르르...

그의 옷자락이 바람을 맞은 돛인양 팽팽해지면서 떨었다.

만박노조는 그런 하삼풍을 힐끗 보고는 속으로 놀랐다.

(대단하군. 이미 내공이 오기조원(五氣造元)의 경지에 달했어. 하삼풍, 역시 삼사의 우두머리라는 이자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군.)

그때 하삼풍이 분노를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잔혼살객!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능히... 그러나 두렵진 않더라도 죽을 순 있다네...]

얼굴은 평색을 회복한 듯했으나 음성에는 여전히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잔혼살객이 나왔으니 이제 남은 자들은 맹호산(孟湖山)과 해천월(海天月), 그리고 혈포단객(血袍單客)과 부운청풍객(玉風秘客), 무형도객(無形刀客)이로군.]

옆에서 만박노조가 말했다.

그 순간 잔혼살객은 이미 부주에 다다르고 있었다.

[타앗!]

하삼풍이 돌연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슈아아앙!

그는 한마리의 독수리처럼 비상하여 부주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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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바람을 부르는 가공할 돌머리 (2)

 

 

풍랑은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푸르던 동정호는 물이 뒤집혀 뻘겋게 변해버렸고 물가에는 파선되어버린 배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봄눈녹듯 잦아지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둘 호변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 중에는 금의청년도 있었다.

약간 오만한 듯하면서도 의협심은 있어보이는 이 인물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풍래고... 풍래동자... 반드시 그 껍질을 벗기고 말겠다. 사악한 자를 제거하여 세상을 편안케 하는 것이 무공을 배운 사람의 도리...]

멀리 수평선 처럼 가물거리는 곳에 풍래동자가 있다는 부주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물로 나갈 것이오?]

금의청년은 직접 배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열이면 열 모두 배를 손봐야 되기 때문에 지금 물로 나갈 수는 없다고 한다.

금의청년이 실망하며 돌아설 때였다.

[이보시오! 물로 나가시려오?]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금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잘됐소. 나도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오.]

달려온 사람은 몸이 떡 벌어진 전형적인 사공이었다.

그는 금의청년의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지금 다른 배들은 아마 움직이지 못할 거요. 하지만 내 배는 다르오. 당장 출발할 수 있소. 한데 어디로 가실 거요? 군산(群山)?]

[아니오. 저곳이오.]

금의청년은 멀리 호심(湖心)에 아스라히 보이는 부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순간 사공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는 금의청년의 손을 놓고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저곳은 갈 수 없소.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소. 그럼 이만... ]

그의 음성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기다리시오!”

금의청년은 성큼 다가서며 사공의 손목을 잡았다.

[놓으시오. 나는 아직 죽고싶은 생각이 없소. 저곳엔 풍래동자가 있는 곳인데 어떻게 간단 말이오?]

사공은 말을 하면서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금의청년의 손은 마치 쇠갈쿠리처럼 사공의 손목을 조이고 있었다.

사공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금의청년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당신이 직접 갈 필요는 없소. 배만 빌려주면 나혼자 가겠소.]

그는 한덩어리의 은을 꺼내서 손목을 주무르는 사공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사공의 배는 정말 튼튼한 것이었다.

천년은 묶었을 법한 굵은 나무 하나를 통째로 깍아서 만든 배였다. 그러니 풍랑이 아무리 거세도 어디 부서지고 말고 할 곳도 없어보였다.

금의청년은 천천히 노를 저어서 부주를 향해 나아갔다.

선창가에서는 사공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수근거리고있었다.

[어쩌면 또 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군. 빨리 피하는게 좋을 것같아.]

한데, 그 무렵 하나 둘... 호수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공도 아니고 또한 유람객도 아니었다.

각양 각색의 무림인들...

그들의 수효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 × ×

 

휘익!

금의청년은 부주에 가까이 이르자 경신술을 발휘하여 사뿐히 내려섰다.

기둥에 매인 커다란 북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 북소리가 이 넓은 동정호 곳곳까지 퍼져나간단 말이지? 보통 공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

금의청년은 북을 힐끗 보고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부주 위에 지어진 집으로 다가갔다.

창가에 몸을 붙이고 안쪽의 동정을 옅보려는 데 갑자기 안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아! 공아!]

노인의 창노한 음성이었다.

금의청년은 호흡을 멈추고 긴장했다.

 

두공은 자기 방에서 사부인 동호천의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면서 대답했다.

[사부! 무슨일입니까?]

[내 손을 잡아다오.]

동호천은 일어나려고 하면서 손을 뻗었다.

두공은 그를 안아 앉히면서 말했다.

[뒤를 보시게요?]

[그게 아니다. 오랫만에 밖을 보고 싶구나.]

동호천은 힘없이 말했다.

두공이 창문을 밀며 말했다.

[날씨가 화창해요. 사부!]

[아니다. 아니다. 밖에 나가서 보겠다.]

동호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공은 염려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비온 뒤라 바람이 차가운데...]

[이놈아! 내가 나가겠다는데 왠 잔말이냐?]

갑자기 동호천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두공은 눈을 찔끔 했으나 이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동안만입니다. 금방 들어와야 해요.]

[이놈이 내가 늙었다고 그사이에 나를 괄시하려는구나.]

동호천은 노기서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이미 기운이 서려있지 않았다.

두공은 그를 업고 나가며 말했다.

[사부도 참... 세상에 저와 사부 두사람 뿐인데 제가 어떻게 사부를 괄시해요? 사부야 날 늘 괄시하시지만...]

[...]

동호천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그의 말을 받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두공에게 엎혀 밖으로 나가자 찬바람이 순간적으로 그를 떨게 만들었다.

창밖에 있던 금의청년은 재빨리 문뒤로 몸을 숨겼다.

후우...!”

밖으로 나온 두공은 상쾌한듯 숨을 들이켰다.

[저리로 가자!]

동호천은 손가락으로 풍래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을 치면 안되요.]

두공은 걸어가면서 다부지게 말했다.

그는 북이 울리면 사람들이 바람이 오는 것으로 오해할까 싶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동호천은 두공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북에 다가서면서 북을 쓰다듬었다.

[공아! 이 북이 아마도 수백 명의 목숨은 구했겠지?]

[헤헤... 그정도까지야...]

두공은 숙스러운지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동호천은 북을 주먹으로 통통 두드렸다.

[그런데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풍래동자라는 요상한 이름?]

[뭘 바라고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냥 이상하게 미리 알 수 있으니까 알려준 것뿐인데... ]

[그래... 그런데 너와 나 외에는 아무도 그걸 모르는구나. 오히려 네가 바람을 불러오는 것으로 생각할 뿐...]

[전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사부께서 오래 사시기만 한다면...]

두공은 동호천이 혹시라도 넘어질까봐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동호천은 그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착한 녀석! 하지만 너의 그 행동으로 인해 너를 죽이려는 자가 왔구나. 이런 것이 세상이란다.]

숨어있던 금의청년은 기절초풍했다.

(저 노인은 내가 온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그러니 이 북은 깨어버려야겠다.]

동호천은 말을 하면서 갑자기 손바닥을 북에 밀착시키고 가볍게 눌렀다.

순간 두공은 맑은 눈으로 동호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부의 뜻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저를 죽이려 온 사람은 기회를 놓쳤어요. 그는 이미 제가 쳐놓은 덧에 걸렸거든요.]

!

거대한 북이 약간 흔들리는가 싶더니 가루가 되어서 날았다.

동정호에서 공포를 던져주던 명물 풍래고는 바람을 부르지 못하고 바람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숨어서 지켜보던 금의청년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더구나 자신이 이미 덧에 걸렸다는 말은 그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만 같았다.

급히 자신의 몸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어디에도 덧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호천의 음성이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자를 죽이지는 말아라. 복우파(伏牛派)의 중강면장(重剛綿掌)을 제대로 익혀낸 것을 보니 쓸만한 인재인 것같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염려마세요.]

두공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금의청년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맹세코 그는 나와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복우파 출신으로 중강면장을 익힌 것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두공이 버럭 소리쳤다.

[아직도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요?]

금의청년은 얼굴이 붉어지며 문뒤에서 나왔다.

한데 그가 걸어온 뒤에는 검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는 것이 아닌가?

동호천은 두공을 보고 허허 웃었다.

그는 두공이 펼쳐놓았다는 덧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아본 것이었다.

금의청년은 그의 웃음에 더욱 당황하며 포권했다.

[소생은 복우파의 금사종(琴思鍾)이라고 하며 별호는 혼장서생(渾掌書生)이오. 노선배께서는 명호가 어떻게 되...]

[서생? 그럼 책을 잘 읽겠군요.]

두공은 금사종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금사종은 얼떨결에 답했다.

[그렇소. 왠만큼은 읽소.]

[잘됐어. 아주 잘됐어.]

동호천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두공이 다시 물었다.

[한번 보면 잘 잊어버리지도 않겠군요?]

[대충 그런 편이오. 한데 소형제는... ]

금사종은 도깨비에 홀린 심정이 되어 되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호천의 말이 그의 물음을 막아버렸다.

[두공아! 안으로 들어가자구나!]

[! 사부님... ]

두공은 동호천을 업으며 금사종에게 말했다.

[맨발로 들어오세요.]

금사종은 그제서야 자신의 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신발이 검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가 지나온 곳마다 검은 발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혼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 독이었구나. 바닥에 독을 발라놓았어.)

그렇다. 그것이 바로 두공이 설치한 덧이었던 것이다.

두공은 침입자가 숨을 곳은 구석진 곳이고, 구석진 곳은 주인의 발이 닿을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꺼리낌없이 그런 곳마다 독을 발라놓았던 것이다.

금사종이 황급히 신발을 벗어던지는데 두공의 말이 들려왔다.

[일곱걸음인가? 여덟걸음인가? 그렇게만 걸으면 죽게 되요.]

음성은 벌써 집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호변(湖邊),

검과 도를 비롯한 갖가지 병기들을 휴대한 형형색색의 무림인들이 몰려서있다.

그들은 심각한 신색으로 멀리 호수 가운데 떠있는 부주를 바라보면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무려 천 수 백여 명을 헤아리는 무림인들,

그들은 무리를 지어온 자들도 있었으며 독불장군으로 혼자서 온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리를 지어왔다고 해서 강한 것도 아니며, 혼자 왔다고 해서 약한 자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잔잔한 호수물에 바위가 내리비치는 곳에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한사람의 노인이 서있었다.

키는 불과 오척의 단구이나, 그 사람만을 바라본다면 태산인양 거대하게 보이는 인물...

백발에 백염, 그리고 백미인데 눈에는 마치 보석처럼 형형한 빛이 감돈다.

“....!”

그는 그 눈으로 멀리 부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형형한 눈으로 부주위에 있던 마지막 한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스라히 보였다.

사르르르...

오척단구의 노인은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환사(幻死)와 섬쾌(閃快) 거기 있느냐?]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 중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며 두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종들은 여기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주인님.]

[이곳에 온 자들은 누구누구인가?]

노인은 여전히 눈을 내리감은 채 물었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나직한 음성으로 누군가가 말했다.

[검성(劒聖)과 독비신검객(獨臂神劒客)을 제외한 십대고수(十大高手)가 다 모였습니다.]

[단혼곡주 하삼풍도 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어떻게 하여 소문이 이처럼 날 수 있었단 말인가? 당금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인 무치(武痴) 동호천 노선배의 은거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단 말인가?]

[...!]

환사와 섬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주인이 모르는 것을 그들이라고 알리가 없다.

그때였다.

휘이이익!

한줄기 백영이 빛살처럼 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번쩍!

파아아앗!

백색검광이 허공중에서 그어지며 백영을 향해 짓쳐갔다.

그때 노인이 소리쳤다.

[무례하지 마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검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백영이 유유히 그의 뒤로 날아떨어졌다.

[허허허허...!]

웃음을 터뜨리는 그자는 긴 수염을 휘날리는 네모난 얼굴의 각진 턱을 가진 사자같은 인물이었다.

[만박노조(萬博老祖)께 두 사람의 귀신같은 비밀호위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명불허전이오.]

만박노조...

그렇다.

오척단구의 노인은 바로 만박노조였던 것이다.

이정삼사오객(二正三邪五客) 중 이정(二正)에 속한 인물로, 무림의 고수들을 논할때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이 이 신비(神秘) 속에 감춰진 기인 만박노조인 것이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단혼곡의 하삼풍, 하곡주이신가? 노부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왕림하셨나?]

단혼곡주,

그렇다면 삼사(三邪)의 우두머리로 불리우는 그가 아닌가?

만박노조의 두 하인이 말한 대로 진정 이곳에는 당금의 고수중 열에 아홉은 모인 곳이란 말인가?

단혼곡주 하삼풍은 얼굴을 실룩실룩했다.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만박노조에게서 모욕을 당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노조께서 방금 전에 본좌의 소식을 묻지 않으셨소?]

(그때 이자는 적어도 삼백장 밖에 있었는데... )

만박노조는 내심 하삼풍의 공력에 놀라움을 금치못하며 뒤로 돌았다.

하삼풍의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걸렸다.

그가 말했다.

[이 하삼풍은 수완을 부리는 데는 둔한 사람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시다.]

[그대가 내게 할말도 다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고 하지 않았소?]

하삼풍은 눈쌀을 찌푸렸다.

[허허허허...]

만박노조가 허탈한 듯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가공할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런...! 허무살소(虛無殺笑)! 이 늙은이가...)

하삼풍은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충격을 순간적으로 받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만박노조가 허무살소를 그치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자들 중에 고수가 아닌 자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하곡주와 나를 능가할 인물은 아마도 없겠지?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이곳에 온 자들 중에는 아마 없겠지만 저곳에 있는 자는 우리가 힘을 다 합친다 해도 상대가 안될 거요.]

하삼풍이 동정호의 호심에 떠있는 부주를 가리키치면서 말했다.

만박노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치 동호천 선배를 이길 순 없겠지.]

[그렇소. 동선배는 나와 출신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내가 극히 존경하는 분이오. 그러나 이제 곧 고인(故人)이 되실 것이오.]

하삼풍은 말을 하면서 만박노조의 표정을 살폈다.

만박노조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지 묵묵히 있었다.

하삼풍의 말이 이어졌다.

[동선배의 무공은 고수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오. 이정삼사오객이라 불리는 우리가 그다지 큰 충돌을 벌이지 않고 지내온 것이 사실 동선배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음을 노조께서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오.]

만박노조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지.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하곡주부터 말일세.]

[아마 그럴 것이오.]

하삼풍은 겸면쩍게 웃었다.

그는 야심(野心)을 속으로 감추는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남이 짐작하는 야심은...

[하지만, 노조께서도 들었을 것이오. 동선배께 바보같은 제자가 하나 있다는 말 말이오. 그자가 동선배의 무공을 그대로 이었다면 향후의 무림은 오로지 그자의 뜻에 따라 좌우될 것이오.]

[...!]

하삼풍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어리석은 자의 손에 무림이 좌우된다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데 없을 것이오.]

[만약 그대같은 자의 손에 조종되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염려할 것도 아니지.]

만박노조는 하삼풍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하삼풍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어쨌든 앞으로 우리들의 충돌은 아마 피할 수 없게될 것이오. 이정의 일인으로서 노조께서는 무림의 안위가 염려스럽지 않소?]

만박노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하곡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고 하고서도 말을 돌리기만 하는군. 그럼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하하하하... 그것도 좋겠소. 내뜻에 꼭 맞는 말이오.]

하삼풍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할 말을 만박노조가 하는 것도 좋다는 말을 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뜻에 맞다고 했다.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서로가 힘을 합친다는 것이리라.

만박노조가 말했다.

[이번 만은 하곡주와 힘을 합치도록 하지. 그러나, 그 댓가는 분명히 정해야 할걸세. 나는 동선배의 제자를 데려가겠네. 그 나머지는 뭐든지 자네가 차지하게.]

[이의없소이다.]

하삼풍의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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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바람을 부르는 가공할 돌머리 (1)

 

 

 

 

-동정호(洞庭湖),

 

악양(岳陽)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천하제일호는 마치 바다처럼 드넓다.

파란 물결에는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하고, 그 하늘로는 흰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청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위를 떠가는 유람선은 하늘을 나는 듯 호수를 미끌어지고, 낚시를 드리운 태공(太公)들은 하늘을 낚아올릴 듯하다.

호수물을 스치운 맑은 바람은 갈대들을 이리저리 흔들고, 동정호 가운데에 마치 점처럼 떠있는 하나의 부주(浮州)에까지 이른다.

아름드리 통나무들을 수백개를 이어서 만들어놓은 부주는 이름 그대로 하나의 떠있는 섬이다.

한변의 길이가 족히 백장이 넘는 드넓은 부주 위에는 작은 집도 있으며 채소 밭도 있고, 작으나마 한척의 배도 끌어올려져 있었다.

또한 한쪽에는 커다란 북도 기둥에 매달려 있다.

멀리서 보아서는 도무지 부주라고 믿지 않을 그런 것이었다.

종종 섬으로 오해받는 부주는 그러나 한곳에 고정되어잇지 않고 바람에 밀리면서 동정호의 이곳저곳을 떠다닌다.

한데 부주 위에서 한 소년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한곳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가득 얼굴을 찌푸렸는데,

세상에 이처럼 잘생긴 미소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짙은 검미에 검은 하늘을 담은 듯 영롱한 눈빛,

건강미가 넘쳐흐르는 적당히 그을린 피부,

오똑한 콧날과 부드러운 턱선...

나이는 아직 열두엇 정도,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장중한 무게가 실려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큰 바람이 불겠어. 비도 많이 오겠지.]

소년은 말하고는 즉시 한쪽에 매달린 북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자기 키만큼이나 한 북채를 들고는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둥둥둥...!

 

북을 두드리는 소년의 팔놀림은 힘찼고,

북소리는 동정호 수면위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 × ×

 

둥둥둥---!

[어이! 장삼(張三), 이거 북소리 아닌가?]

푸르른 동정호에 그물을 던지던 어부가 다른 배에 있는 어부를 향해서 소리쳤다.

그쪽에 있던 어부는 그물을 걷어올리며 외쳤다.

[맞네. 풍래고(風來鼓)가 틀림없네.]

[북소리가 급한 것을 보니 큰바람이 올모양일세. 빨리 돌아가세나.]

갑자기 동정호에 떠있던 배들이 일제히 술렁이고 있었다.

둥둥둥-󰠏!

북소리는 들리고 동정호에 떠있던 배들은 그 북소리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모두 물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배들중에는 어선도 많았지만 유람선(遊覽船)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유람선에는 외지에서 동정호의 풍광을 구경온 외지인들이 타고 있다.

갑자기 들려온 북소리와 더불어 배가 움직이고 풍악소리가 그치자 유람선 안의 인물들은 놀라 당황하고 있었다.

둥둥둥---!

점점 빠르게 들려오는 북소리가 마치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고(軍鼓)의 것인양 우렁찼다.

배를 조종하는 선부(船夫)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려있다.

물가를 향해 경주하듯 달리는 여러척의 배들 중 가장 뒤쪽에 처진 한척의 유람선에서 노를 젓던 늙은 선부가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급박하게 풍래고가 울린 적은 한번도 없다. 최대한 빨리 뭍으로 나가야 한다. 어쩌면 모두 여기서 죽을 지도 모른다.]

유람선의 승객들 중 금의(錦衣)를 입은 한 청년이 노인에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수적(水賊)이라도 나타났소? 대체 무슨일인데 이런 소동이요?]

그러나 늙은 선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필사적으로 노를 저을 뿐이다.

유람선에 올라 손님들의 흥을 돋구던 기녀(妓女)들마저도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표정은 굳었고 금()과 비파(琵琶)를 잡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금의청년이 화가 치밀었는지 배의 기둥에 일장을 가하면서 소리쳤다.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청년의 손에 맞은 배의 기둥에는 칼로 새긴듯이 장인(掌印)이 세치 깊이로 파여있었다.

보통 수련을 쌓아서는 그처럼 매끈한 일장을 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녀들도 늙은 선부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늙은 선부는 마주 고함쳤다.

[살고 싶으면 빨리 빈 노라도 잡고 저으시오.]

[... 뭐라고?]

금의청년은 어이가 없는듯 기녀를 돌아보았다.

기녀가 재빨리 말했다.

[바람이 와요. 바람이....! 이대로 물위에 있다간 모두 고기밥이 될거예요.]

[하하하하...!]

금의청년은 낭소를 터뜨렸다.

[대체 바람이 어디 분다고 그러시오. 하늘도 구름 한점 없이 맑고 물결도 잔잔하지 않소? 이런 물위에서는 나뭇잎도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오.]

[미친 놈! 풍래고를 듣고도 부정타게스리 그딴 소리를 하다니...]

늙은 선부가 버럭 욕지거리를 해댔다.

순간 금의청년의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늙은이! 정말 이 공자님의 손에 죽고싶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옆에 있는 기녀만이 그 기세에 오돌오돌 떨었을 뿐 늙은 선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젊은 놈이 노인 앞에서 힘자랑을 하려는 겐가? 내가 죽고 나면 이배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나지 못해!]

스스스스...

노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금의청년은 움찔하며 뻗어가던 손을 거두었다.

바람!

정말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파라라락!

갑자기 옷깃이 떨리고 있었다.

청년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럴 수가... 정말 바람이 불다니... ]

하늘에는 수평선 저쪽에서 부터 검은 구름이 질풍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물결이 일어나고, 배가 벌써부터 이리저리 요동쳤다.

다른 배들에서 손님과 선부들이 힘을 합해서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변에 있던 배들은 벌써 물위로 끌어올려지고 있었으나 금의청년등이 타고 있는 유람선은 아직도 호변까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휘이이잉!

청년은 달려가서 빈 노를 잡으며 소리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오?]

[북소리... 풍래고라고 하는 저 북소리 때문이예요. 언젠가부터 이곳엔 이상한 노인과 소년이 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소년이 북소리로 바람을 부르는 힘이 있데요.]

기녀중 한명이 기둥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청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북소리가 바람을 부른다고? 세상에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가...]

[직접 겪고도 믿지 못하세요? 벌써 수십 명이 풍래고를 듣고도 피하지 않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호수에 나올땐 항상 귀를 열어놓고 있다구요. 풍래고가 울리지 않나 해서...]

우당탕! 쿵탕!

배가 좌우로 요동치면서 물건들이 굴러떨어지고, 담이 작은 승객들은 갑판에 엎드려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촤아아!

우우우웅!

바람이 배를 맴도는 소리가 귀신의 호곡(號哭)처럼 들렸다.

사방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있었다.

호수는 물결이 잔잔하다는 말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호수 물은 뒤집혀 누렇게 변했으며, 물결은 배를 엎을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청년 등이 탄 유람선만이 뭍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배들보다 너무 멀리 나가있었으며 또한 배가 날렵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손님들을 많이 실었을 때에는 수입이 좋다고 좋아했던 선부였으나, 이제는 오히려 그 손님들이 짐이되어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그 두번째 원인이었다.

늙은 선부는 탄식을 했다.

[! 조금만 빨랐어도 살 수 있었거늘...]

바람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불어 배를 오히려 뭍에서 부터 멀어지게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절망뿐이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아! 촤아!

경쾌하면서도 힘찬 노젓는 소리가 미칠 듯한 바람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그의 귀로 들려왔다.

(이런 풍랑속에서 배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니...)

늙은 선부는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피리링!

갑자기 배의 선수(船首)에 있는 용두(龍頭)로 굵은 동앗줄이 날아와 걸렸다.

늙은 선부는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 선수에 다다랐다.

촤아! 촤아!

노젓는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늙의 선부의 눈에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어둠! 그리고 산더미 같은 파도들 사이로 가랑잎같은 작은 배한척이 파도를 타고서 유유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배의 후미에는 굵은 밧줄이 매여있는데 그것은 유람선의 용두에 걸린 밧줄의 다른 한쪽 끝이었다.

흰그림자가 그 조각배 위에서 노를 저어가는데 조각배는 순식간에 뭍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늙은 선부는 혼이 빠져달아나는 것같았다.

[풍래동자(風來童子)...! 풍래동자가 직접 배를 끌어주다니... 병을 주고 약을 주는 건가?]

잠시 후, 배는 마치 거대한 손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선착장!

배들이 떠내려 가지 못하도록 동앗줄을 묶는 돌과 쇠로 만든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한데 그곳에는 부주(浮州)위에서 북을 두드렸던 미소년(美少年)이 밧줄을 매는 쇠기둥들에 기름을 바르고 밧줄을 여러 겹으로 바른 후 당기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한척의 유람선이 풍랑속에서 끌려오고 있었다.

비록 소년이 꾀를 쓰서 힘을 적게 들이고는 있지만, 끌려오는 것은 작은 물건도 아닌 수십 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한 척의 유람선이다.

소년의 신력(神力)이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오자 소년은 밧줄을 단단히 묶어 풀어지지 않게 한 다음 끌어올려놓았던 조그만 배를 밀어서 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촤아! 촤아!

힘찬 노젓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풍랑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유람선에서는 앞을 다투어 사람들이 내려왔다.

[십년감수했다!]

손님들 중의 누군가가 소리치며 객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늙은 선부는 매여져 있는 밧줄을 보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말했다.

[풍래동자님께서 이 늙은 목숨을 살려주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소녀 또한 동자님의 은혜를 가슴 깊히 새기겠습니다.]

기녀들도 내려와서 밧줄이 묶여 있는 쇠기둥에 대고 절하며 말했다.

금의청년은 괴상한 일을 당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는 객점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풍래동자인가 뭔가가 바람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인다면 왜 그를 먼저 죽여버리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구나.)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여하튼 금의청년은 굴강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 × ×

 

[이놈! 두공(頭公)!]

동정호의 중간 쯤에 떠있는 부주의 위에 지어져 있는 집 안에서 노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이곳이라고 피해갈 리 없다.

넓고 평평해서 다른 배보다는 안전하겠지만, 이곳 역시 산더미 같은 파도가 위에서 덮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이 잠겼다 말았다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미소년은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자신이 타고온 배를 끌어올려 단단히 묶어놓았다.

[이 쇠대가리! 빨리 들어오지 못하느냐?]

다시금 집 안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미소년은 탄탄한 평지를 달리듯이 흔들리는 부주위를 달려가며 소리쳤다.

[사부! 가고 있습니다. 가요. !]

!

문을 밀치고 들어서 소년은 한쪽 벽에 기대서며 일부러 힘든듯 거친 숨소리를 냈다.

[핵핵!]

[이놈! 쇠대가리! 내가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

침상에 누운 노인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면서 부르르 떨었다.

한데 이 노인...

비록 몇 년 전보다 훨씬 늙어 보이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무치(武痴) 동호천이다.

비록 일백삼십이 넘은 나이기는 하나 갑자기 이처럼 늙을 수도 있단 말인가?

동안처럼 붉으스레 하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지 않은가?

미소년이 침상으로 다가가서 동호천의 머리를 받쳐 바르게 눕히며 달래듯이 말했다.

[사부! 진노를 푸세요. 제가 한사람이라도 더 구한다면 하늘이 혹시 사부께서 더 오래 사시게 해줄지도 모르잖아요.]

[... 너 이놈... ]

동호천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을 잊지 못했다.

두공이라 불린 미소년이 다시 말했다.

[오늘은 적어도 서른 명은 구했을 거예요. 그러니 최소한 삼십년은 벌어온 셈이죠.]

동호천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사람은 늙으면 죽는게야. 내가 앞으로 아침해를 보름동안만 더 볼 수 있으면 아마 다행일 것이다.]

동호천의 음성에는 진한 허무가 배여있었다.

그는 염려가 가득한 눈으로 두공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네가 어떻게 험난한 강호를 헤쳐나갈 지... ]

[()은 아직 나가보지 않아서 잘 몰라요. 그래도 호수라면 얼마든지 자신...]

두공의 어리석은 듯한 말에 동호천은 씁쓸하게 웃었다.

[강호(江湖)란 무림을 말하는 거야.]

[그랬군요. ? 그럼 틀렸는데 왜 꾸짖지 않으세요?]

두공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동호천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쉬고 싶구나. 네방으로 가거라.]

두공은 동호천의 이불을 다시 한번 도닥거려주고 나서 옆으로 뚤린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은 하나의 창고나 다름없었다.

수십 종에 이르는 병기들이 흩어져 있고, 한쪽으로는 또한 수백권이 넘을 것 같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두공은 먼저 불을 켠 후 책더미에 벌렁 드러누워 그 중의 한권을 펴들었다.

일렁이는 등불에 책의 제목이 드러났다.

 

<필생검법(必生劒法)>

 

괴상한 제목의 책이었다.

강호의 무공들에는 필살(必殺), 필사(必死) 등의 말은 사용되어도 필생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그처럼 당연한 것이고 죽거나 죽이는 것이 평상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같이 사용되는 것이다.

파락!

두공은 한장의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잠시후,

!

필생검법은 그의 얼굴을 덮고 말았다.

그만 잠들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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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얼음속의 殺氣

 

 

 

-대별산맥(大別山脈)!

 

하남(河南)과 호북(湖北), 안휘(安徽)등 삼개성을 경계짓는 장대한 산맥이다.

대별산맥은 광대하기 이를데 없어 그 안에 속한 명산만해도 동백산(冬柏山), 계공산(鷄公山), 작산(雀山), 천주산(天柱山)등 십여개에 이를 정도다.

때는 겨울, 대별산 일대는 천지가 온통 눈으로 덮혀있다.

그 흰눈에 반사된 일광은 토끼의 털을 새까맣게 그을려 놓을 정도로 눈부시다.

한데...

[어 춥다 추워!]

[그러게 말이오. 올해는 유난히 추운 것같소.]

[한데 셋째는 어찌 아무 말도 없는가?]

[낄낄낄... 대형! 나는 벌써 입이 얼어붙었소이다.]

[그럼 말 나오는 데는 방귀나오는 그곳이냐?]

[우하하하하... ]

손에 지팡이를 짚은 세 노인이 눈길을 걸으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우스개소리를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전혀 추운 것처럼 보이지 않고, 그 풍모는 마치 신선과 같아보였다.

쿡쿡 눌러짚는 지팡이질에도 불구하고 눈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공술을 이렇게 천천히 가면서, 그리고 농담까지 해가면서 펼칠 수 있는 고수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있다면 아마 그 수효는 열을 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그들 외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으리라.

세 노인은 모습이 마치 쌍둥이인 듯 똑같다.

모두가 빛바랜 회색 도포를 입었는데 도포자락이 길어서 발까지 덮혔다. 그 때문에 어쩌면 발이 없는 유령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정도다.

얼굴은 붉으스레하고 눈은 길고 흰 눈썹속에 거의 파뭍혀버렸으며, 석자는 못되어도 두자는 족히 될 것같은 흰 수염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나란히 걸어가는 세 노인 중 가장 오른쪽의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독왕동(毒王洞)의 갈늙은이가 우리를 보면 아마 기절초풍할거요.]

[그러면 안되지. 그럼 백로주(白露酒)를 우리가 직접 찾아먹어야 할게 아닌가? 난 이 눈속에서 땅속을 여기저기 파헤치는 건 질색이야.]

가운데 노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맨 왼쪽의 노인이 버럭 소리를 쳤다.

[이 술도둑놈아! 너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피하는 것아니냐? 네가 술만 적게 훔쳐먹었더라도 우리가 하려는 일들은 훨씬 쉬워졌을 것이다.]

싫은 소리를 들은 가운데 노인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형님은 어찌 나만 갖고 그러시오? 정작 세상의 인간들이 제일 꺼리는 사람이 형님이라는 걸 왜 모르시오? 무림에서 제일가는 무공(武功) 도둑이 누구인데... !]

가운데 노인의 말은 중간에서 막혀버렸다. 그에게서 형님이라 불린 왼쪽의 노인이 한뭉치의 눈을 그의 입에다 쳐넣어버린 것이다.

!

벼락같은 솜씨로 가운데 눈을 가운데 노인의 입에 밀어넣은 왼쪽 노인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치자 꿀꺽 소리가 나며 눈덩어리가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꼼짝없이 눈덩이를 삼켜버린 가운데 노인은 눈이 빨갛게 될 정도로 화가 났다.

[입을 막는다고 진실이 뚫고 나갈 구멍이 없을 줄 아시오?]

[어디 한번 해봐라. 눈은 대별산을 덮고도 남는다. 진실이라는 것이 나오는 구멍마다 남김없이 막아주마.]

왼쪽 노인은 정말 그렇게 할 기세다.

결국 가운데 노인은 끓어오르는 속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약간 앞서 걸어가며 속으로 말했다.

(주책바가지같으니...! 겨우 반각 먼저 태어났으면서 형이라고 밤낮...! 그래 형이니까 죽을 때도 아마 먼저 죽을 거야. 이제 그렇게 큰소리치며 살 날도 얼마 남지도 않았을 걸? 올해로 벌써 백서른한살이니까.)

가운데 노인이 당하는 것을 본 오른쪽의 노인은 아예 입을 닫고 있었다.

똑같은 모습의 세 노인이지만 왼쪽의 노인은 아마 이들 사이에서 폭군이나 마찬가지인듯하다.

한데,

휘익!

앞서 나가던 가운데 노인이 갑자기 번개처럼 물러섰다.

[무슨 일이냐?]

좌측의 노인이 물었다.

가운데 노인은 허리에서 요대를 풀어들며 말했다.

[조심하시오. 누군가 앞에 잠복하고 있소. 엄청난 고수요.]

나머지 두 노인은 앞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수백년은 묵었을 듯한 한그루 거대한 소나무만이 눈속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오연하게 서있는 것이 다소 별나게 보일 뿐이다. 몇 아름이나 되어 신기(神氣)가 느껴지는 고송(古松)이다.

[거 뭐가 있다고 그러시오?]

막내인 듯한 오른쪽의 노인이 불쑥 앞으로 나서 걸어가며 말했다.

파팟!

그러나 아람들이 소나무 근처에 가자마자 그는 기세당당하게 걸어갔던 것과는 딴판으로 벼락처럼 물러나며 혈죽선(血竹扇)을 펼쳐들었다.

한 겨울에 부채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가볍게 진저리쳤다.

[작은 형 말이 맞소.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였소.]

좌측의 노인, 그러니까 이들 세노인 중의 맏이가 굳어진 표정으로 외쳤다.

[어느 방면의 친구가 노부 형제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오?]

[...]

하지만 앞쪽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좌측의 노인은 상대방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들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감히 나 동호천(董湖天) 앞에서 신비한 척을 하다니... 껍질을 벗겨버려야겠다.)

노인의 이름은 동호천이었다.

 

당금무림의 절세고수들을 꼽으라면 누구든지 이정(二正)과 삼사(三邪), 그리고 오객(五客)을 꼽는다.

그들 십인(十人)의 무공은 천하에서 상대할 고수가 없으리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천하인들이 삼노(三老)를 제쳐놓고 말할 때 뿐이다.

젊었을 때는 삼괴(三怪)로 불리웠으며 늙어서는 삼노로 불린 인물들,

그들 중의 첫째는 무치(武痴) 동호천(董湖天)이며,

둘째는 주치(酒痴) 동복신(董福身)이고,

셋째는 보치(寶痴) 동적선(董積善)이다.

이들 삼노는 전대의 고수들로 무림에서 행동할 때 기괴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주치 동복신과 보치 동적선의 무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지만 무치 동호천의 무공은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동호천은 싸우려는 상대방이 펼칠 무공을 먼저 펼쳐보이는 인물이다.

그것도 상대방보다 더욱 완벽하게 상대방의 비전절예를 펼쳐보인다.

그리하여 싸우기도 전에 상대가 기가 질려 물러나게 하고야 만다.

남과 직접 싸우는 경우가 없었기에 그를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수들일 수록 그를 두려워하고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공이 약한 사람들은 그가 보잘 것 없는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들은 동호천이 그들 자신의 절세적인 무공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삼류무공처럼 간단히 펼쳐내는 것을 보았다.

동호천은 살아있는 전설이며 숨쉬는 신화이기도 하다.

성품은 낙천적이고 소탈하지만 그의 무공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한다.

동호천은 그런 인물인 것이다.

 

동호천은 슬쩍 몸을 흔들었다.

스읏!

그 순간 이미 그의 몸은 굵은 소나무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뒤에서 동복신과 동적선이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형님도 감당하지 못할 지 모르겠소.]

(저런 죽일 놈들!)

동호천은 야유하는 동생들에게 눈을 흘기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소나무 뒤로 돌았다.

몇 아름은 되는 굵은 소나무 둥치에 가려져 동호천의 모습이 다른 두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에 누가 있소?”

동복신이 소나무쪽에 대고 외쳤다.

하지만 소나무 뒤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동복신과 동적선의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 서로를 돌아보며 찡그려졌다.

파팟!

잠시 더 동호천의 대답을 기다리던 동복신과 동적선이 동시에 몸을 날려 허공에 흰 선을 그리면서 소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공력을 모두 끌어올린 두사람의 옷은 마치 철판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나무에 다가갔을때 예의 살기가 다시 두사람의 심장을 얼릴 듯 느껴졌다.

[차앗!]

둘째인 동복신의 손에서 요대가 빳빳하게 펼쳐지며 새파란 검기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막내 동적선의 부채도 허공을 갈랐다.

번쩍!

실로 귀신같은 빠르기며 태풍처럼 강한 위력을 지닌 공격들이었다.

순간,

[멈춰!]

갑자기 동호천의 음성이 소나무 뒤에서 터져나왔다.

파팍!

이어 백색원반 하나가 선을 그리며 날아와 두사람의 공격을 차단했다.

동복신과 동적선이 병기를 거두며 소나무를 돌아 옆으로 날아내렸다.

그들의 눈에 소나무를 살펴보던 동호천이 접시를 손에 받아드는 것을 보였다. 동호천은 접시로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었다.

동호천의 눈은 여전히 한아름 가득 될 소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기는 바로 그 아람들이 소나무로부터 뿜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나무의 중간쯤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구멍은 눈이 녹아 얼은 얼음으로 막혀있었다.

그러나 동호천의 눈은 뿌연 얼음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얼음 속에는 불과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있지 않은가?

동적선이 어이가 없어 물었다.

[이 끔찍한 살기(殺氣)를 아이의 시체가 발하고 있단 말이오?]

[아직 시체라고 말할 순 없다.]

동호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복신이 다시 물었다.

[심장이 멎고 피가 얼어붙을 정도인데도 시체가 아니오?]

[멍텅구리들. 그러니까 무공이 늘지를 않지. 살기를 내뿜을 수 있다는 건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기는 내공(內功)이나 마찬가지로 정신력의 결집이 아니더냐?]

동호천이 두 동생을 욕하며 말했다.

그리고 소매를 칼날처럼 세워 소나무를 베어 넘겨뜨렸다.

우두두두!

세사람의 장정이 안아도 다 안을 수 없을 것같던 우람한 소나무는 얼음으로 막힌 작은 구멍의 윗부분에서 베어져 버렸다.

또한, 아랫부분도 잘라져 어린 아이의 시체가 있는 부분만이 따로 분리되었다.

동호천은 그 통나무토막을 끌어안았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 아이는 이십세 전에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다. 또한, 오십세가 되기 전에 고금제일인이 될 것이다.]

동호천의 말에 동복신과 동적선이 입을 딱 벌렸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동호천은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따라 오너라. 동왕동 갈영감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된다.]

 

× × ×

 

단촐하게 꾸며진 석실(石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네 명의 노인이 둘러앉아있다.

그런데 그 탁자위에 놓여있는 것은 음주가효도 아닌, 얼어붙은 하나의 나무토막이었다. 바로 동호천이 가지고 온 아이가 들어있는 소나무 토막인 것이다.

스으! 스으!

나무토막, 아니 그 속에 얼어붙은 아이는 여전히 가공할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동호천등 삼노의 맞은 편에는 머리카락이라고는 한오라기도 없는 독두옹(禿頭翁)이 앉아있다.

그가 바로 무림인들이 상종조차 하기를 꺼리는 독왕동(毒王洞)의 동주 독왕(毒王) 갈천상(葛天祥)이다.

 

[동대형(董大兄)한테는 미안하지만 안되겠소. 섣불리 녹이려다가는 아주 부숴버리고 말게요. 내 생각에는 양지바른 쪽에 묻어주는 게 좋을 것 같구려.]

나무토막을 살펴본 독왕 갈천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림인들이 가장 꺼리는 인간이라는 독왕 갈천상이지만 세상 밖의 존재같이 여겨지는 삼로 앞에서는 본래의 괴팍한 성질을 억지로라도 죽일 수밖에 없다.

묻어주라?”

독왕 갈천상을 주시하고 있던 동호천의 눈이 은은한 노기를 나타냈다.

그의 칼날같은 눈빛을 받은 갈천상이 흠칫했다.

동호천은 손을 탁자위에 얹어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삼십년 전... 단혼곡주(斷魂谷主) 하삼풍(夏三馮)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가 지녔던 단혼검(斷魂劒)을 챙겼던 자가 있었지. 아무도 그 흉수를 몰랐고, 또한 하삼풍이 길길이 날뛰며 조사했어도 흉수의 그림자도 볼수 없어 그 사건은 미궁속에 빠져버렸었지.]

갑자기 갈천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경악으로 가득 차있었다.

동복신이 물었다.

[갑자기 그 무슨말이오? 단혼곡의 하삼풍의 이름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

동호천은 대답대신 입다물고 있으라는 눈총을 쏘아보냈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지금도 하삼풍은 아들의 흉수를 찾기위해 이를 갈고 있다더군. 어쩌면 대충 감을 잡고 있을지도 모르지. 더구나 내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말이야.]

[동대형은 내가 그 흉수란 말이오?]

갈천상은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동호천은 단지 입가에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이고 동복신과 동적선은 놀란 표정이었다.

!

갈천상이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한번 말해보시오!]

탁자가 한자정도 내려앉아버렸다.

하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갈천상의 내공에 의해 다리가 바닥을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나무로 만든 탁자를 두드려 돌로 된 바닥을 뚫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력이었다.

돌연, 동호천은 어깨를 펴면서 말했다.

[갈천상... 단혼검을 지녔다고 해서 큰소리치는 건가?]

느릿한 음성이다.

그러나, 동호천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무형의 기운은 태산이 방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

갈천상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두걸음이나 물러났다.

동호천이 갑자기 너무 커보였던 것이다.

동호천이 위압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네게 단혼검이 있음은 알고 있다. 그리고, 단혼검보다도 더 중요한 오독패혼경(五毒覇魂經)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

[그런 것들 보다는 아마도 네 목숨이 더 중요하겠지.]

갈천상은 식은 땀을 흘렸다.

설마 동호천이 아무리 무치(武痴), 만나면 숨길 수 있는 무공이 없다는 무치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본 적이 없는 오독패혼경과 단혼검의 존재까지 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미 발뺌하기도 틀렸다.

갈천상은 탄식하며 말했다.

[동대형, 무엇을 원하시오?]

[처음엔 오독패혼경만을 원했다.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그러나 자네는 말을 그르쳤네. 오독패혼경으로 이 아이를 살릴 뿐만 아니라 단혼검도 이 아이에게 주게.]

단호하게 내뱉는 동호천의 말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다고 해도 번복되지 않을 듯이 들렸다.

동복신과 동적선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짐작하고 갈천상을 마치 딴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갈천상은 그들과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 만나는 사람으로 무림의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 자였다.

또한, 제자도 기르지 않고 아내도 없이 언제나 혼자 사는 괴팍한 노인이다.

그런데 그가 당금무림의 십대고수(十大高手)중 삼사(三邪)에 속하는 단혼곡주 하삼풍의 아들을 죽이고 단혼검을 빼앗았다지 않은가?

동복신 등은 그럴리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갈천상은 도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동대형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소만, 단혼검은 내가 보관하고 있소. 그러나 맹세하건데 하삼풍의 아들은 절대 내가 죽이지 않았소.]

동호천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자네가 내 말에 따르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세. 내 아우들도 마찬가지고.]

[그렇고 말고요.]

형의 눈빛을 받은 동적선이 제빨리 대답했다.

갈천상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일어섰다.

[아이를 들고 따라오시오.]

갈천상은 석실의 한쪽 벽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밀었다.

그그긍!

갑자기 벽이 빙글 돌면서 그의 몸이 석벽안으로 사라졌다.

동호천 등은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석벽 안쪽은 어두침침한 동굴이었다.

자연석동(自然石洞)을 약간 개조한 듯, 여기저기 깎여진 바위들이 보였다.

그렇지만 동굴의 낮은 천정은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약간 들어가다보니 향기로운 냄새가 동굴속에서부터 풍겨나왔다. 폐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맑은 향기였다.

[갈동주는 영약을 기르는 모양이군.]

술을 밥보다도 더 좋아하는 주치(酒痴) 동복신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내게 영약이라는 것은 오로지 독이 아니오? 지금 이 향기는 백송(白松)에서 채취한 망아독균(忘我毒菌)에서 나오는 것이오.]

심사가 꼬일대로 꼬여있는 갈천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복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향기에 독은 없는 것같은데?]

[그것이 무서운 점이라오. 망아독균은 밖에서는 독균이라고 할 수도 없소. 하지만 복용하여 사람이나 짐승의 배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무서운 독이 되는 것이오.]

[한데 어째서 망아독균이오?]

말없이 듣고 있던 동적선이 불쑥 물었다.

갈천상은 동굴의 두갈래로 갈라진 부분에 이르러 우측의 동굴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것을 먹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오. 자신을 잊는것은 물론이고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리니, 한마디로 그것을 먹는 순간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요.]

우측 동굴의 안쪽은 커다란 석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그긍!

석문은 갈천상이 동굴 천정의 한곳을 지풍으로 누르자 안쪽으로 열렸다.

석문이 열리며 들어난 곳은 한칸의 넓직한 석실로써 가운데에는 석대(石臺)가 하나 놓여져 있고 사면 벽에는 선반들이 얹혀져 있는데, 그 선반 위에는 수백, 수천개에 달할 것같은 병들이 놓여 있다.

또한 선반 아래쪽에는 괴이한 기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갈래진 두 동굴 중에서 하나는 독물(毒物)을 기르는 곳으로 사용하고 이곳은 독왕이 무공과 독을 연구하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갈천상은 중앙의 석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은 아이를 꺼내서 저기에 놓으시오.]

동호천은 수도(手刀)를 사용해서 마치 조각을 하듯이 소나무와 얼음을 베어내고 아이를 꺼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눈을 부릅뜨고 꽁꽁 얼어있는 이 아이는 많아야 칠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

아이의 모습이 들어나는 순간 동복신이 감탄을 발했다.

갈천상 역시 약을 잡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놀랍군. 천년무골이야.]

동호천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아름답게까지 보이는 어린 아이는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비록 얼어붙어 있기는 하지만...

한데 동적선이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군가 아주 지독한 짓을 했어. 일부러 눈으로 이 아이를 덮어서 죽게 했소.]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갈천상은 뻣뻣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을 모로 눕히며 말했다.

[살리고 싶다면 지금부터는 모두 내말을 들어야 하오. 일단 동대형께서 아이의 용천혈(龍泉穴)로 서서히 내공을 주입해 주시오.]

동호천은 즉시 소년의 발을 잡았다.

갈천상은 또 말했다.

[동둘째형께서는 샘물을 길어다 주시오. 동세째형은 내가 시키는 대로 금침(金針)을 꽂아주시오.]

네사람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천상은 오독패혼경상의 구결을 이용하여 다섯가지의 독을 소년의 심장(心臟)에 직접 주입했다.

심장은 피마저 얼어붙었기에, 속이 빈 구리대롱을 뜨겁게 가열하여 구멍을 뚫어도 피가 나지 않았다.

그 구리대롱을 통하여 독이 흘러들어갔다.

치이이익!

마지막 독이 들어갔을때는 구리대롱마저 녹아서 소년의 가슴에 누렇게 덮혔다.

갈천상은 즉시 소년의 천령개에 손을 얹고는 오독패혼공(五毒覇魂功)을 운용했다.

피조차 흐르지 않는 소년의 몸은 두사람의 경이적인 고수의 내공이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용천혈에서 부터 경략을 뚫고 올라간 동호천의 공력은 거의 모든 폐쇄된 기혈을 타통시키고 있었고,

그 뒤를 따라서 갈천상의 오독패혼공이 소년의 몸속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갈천상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우리 세사람을 동시에 물속에... ]

그가 말하자마자 동적선이 공력으로 그들을 띄워올려 동복신이 준비한 큰 통속에 담갔다.

출렁!

통속에 가득하던 차가운 물이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갈천상의 입이 다시 열렸다.

[빨리 금침을...]

동적선은 금침합을 손에들고 뚜껑을 열었다.

갈천상이 말했다.

[천돌(天突)에 두치 이푼!]

즉시 동적선의 손에서 금침이 날았다.

파앗!

한줄기 황금빛을 뿌리며 날아간 금침은 정확하게 소년의 천돌혈에 가서 두치이푼의 깊이로 박혔다.

갈천상의 말은 계속되었다.

[화개(華蓋) 한치... 영허(靈墟)에 반푼... ]

그의 말에 따라 금침은 선을 그리며 날아가 벌거벗은 어린 소년의 몸에 차곡차곡 꽂혀들었고, 금새 소년은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차가운 물은 소년의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고 있었고 금침과 오독패혼공의 공력은 다섯가지의 극독으로부터 소년의 몸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몸이 녹음에 따라서 피도 따라서 녹으며 얼어붙은 심장도 녹기 시작했다.

갈천상이 말했다.

[이제 동대형은 손을 떼도 좋소이다.]

동호천은 즉시 손을 뗐다.

갈천상도 손을 떼고 일어서면서 동적선의 손에서 금침을 받아 소년의 심장에 꽂았다.

[!]

동복신과 동적선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소년의 심장에 꽂힌 금침은 무려 다섯 치나 되는 큰 것이다.

한데 갈천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그와 똑같은 침을 하나더 그 옆에 꽂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 깊이...

[이젠 거의 다 되었소. 하지만 성공할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실 것이오.]

갈천상은 중얼거리며 금침에다가 가느다란 철사를 두개 연결했다.

그리고 그 철사의 다른 끝에는 각기 이상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라(銅螺)가 매달려 있었다.

갈천상은 그것을 동호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두개의 동라를 서로 부딛히게 하시오. 공력을 높혀서.]

...

동호천은 동라를 부딛혀 소리가 나게했다.

한데 그순간 물속에 드러누워 있던 소년의 머리가 쭈삣 서면서 몸이 펄쩍 하는 것이 아닌가?

갈천상이 놀라며 말했다.

[이런!]

그는 황급히 소년을 다시 석대위에 눕혔다.

[하마터면... 다시 한번 해보시오.]

...!

소년의 몸은 다시 펄쩍 한번 뛰었으나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갈천상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팍팍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시!]

...!

소년의 몸이 다시 뛰었다.

동호천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소년의 생명을 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공력을 더욱 높혀서 동라를 울렸다.

... ...!

석실이 터져나갈 듯했다.

퍽퍽퍽!

파파파파팍!

사면 벽에 있던 병들이 일제히 터져나가며 독가루가 석실에 가득 날렸다.

하지만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갈천상은 악을 쓰듯 소리쳤고, 동호천은 오성(五成)의 공력으로 동라를 두들겼다.

...!

천정의 돌부스러기가 부스스 쏟아졌다.

한데 이때였다.

푸악!

소년의 입에서 한사발은 족히 될 것같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휴우...!]

소년은 긴 숨을 쉬면서 사르르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감돌던 무시무시한 살기도 어느새 사그라지고 없었다.

동복신이 소리쳤다.

[살았다!]

갈천상은 털썩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쏟아졌던 독물이 그의 옷에 스며들어 노랗게 변했다.

동호천은 그의 손을 잡으며 크게 웃었다.

[껄껄껄... 갈형! 정말 수고 많았소이다.]

[! 그말은 고마우나 나는 이제 동대형을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싶소. 사람을 이렇게 삶을 수가 있소? 하삼풍의 아들은 내가 죽인게 아니란 말이오.]

갈천상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동복신이 웃으며 말했다.

[갈형! 우리가 하삼풍과 특별한 친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얼 염려하신단 말이오? 또한 갈형이 어떤 다른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소이다.]

[정말이요. 나는 하삼풍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소. 단혼검은 그야말로 우연히 내손에 들어온 것이오. 하삼풍에게 돌려줄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가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같아서 그만둔 것이고....]

갈천상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갑자기 동호천이 크게 웃었다.

[허허허허... ]

[...?]

[...?]

갈천상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동대형은 내가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것같소?]

[아니 아니,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지.]

동호천의 말에 갈천상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동대형께서 어떻게...?]

[하삼풍의 아들은 내가 죽였네.]

동호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갈천상과 동복신 등이 아연실색을 했다.

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갈천상이 먼저 말했다.

[.... 당신도 살인을 하시오?]

그의 물음은 지당했다.

다른 무림인에게라면 우스울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최소한 동호천에게는 그러했다.

동호천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상하게 해본 적도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동호천이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놈이 스스로 죽었다고도 할 수 있지. 놈은 감히 노부를 암습했어. 그게 그 망나니가 죽은 이유일세.]

동적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형님의 호신강기(護身罡氣)에 반탄되어서?]

동호천의 머리가 끄덕여졌다.

그랬군. 어쩐지...”

갈천상이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때 절벽 아래를 지나다가 온몸이 으스러진 채 떨어지는 시체를 하나 받았는데 그 시체가 단혼검을 가지고 있었소.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하삼풍의 아들이었소. 한데 그때 그놈은 이미 내장이 조각조각나있어서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었소. 그래서 나는 그를 묻어주고 단혼검만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오.]

[노부는 그때 절벽 위에 서서 갈동주가 단혼검을 얻는 것을 보고 그냥 떠나버렸지. 그때문에 내가 갈동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고.... 허허허]

동호천은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갈천상이 볼 메인 소리를 했다.

[그럼 손상된 내 오독패혼공은 어떻게 해주겠소? 동대형의 협박에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사십년을 수행한 공력이 십년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소.]

[그것 가지고 뭘그러시나. 자 내가 좋은 술을 대접합세. 밖에 이미 준비해놨으니 나가세.]

동복신이 갈천상의 어깨를 툭치면서 말했다.

순간 갈천상의 안색이 홱 바꿨다.

[혹시...?]

[왜 아니겠소? 천일백로주(千一白露酒), 자네가 뒷쪽 석벽의 샘물 아래 숨겨놓은 천일백로주일세.]

동복신, 술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별명을 가진 그답게 어느틈에 술을 찾아서 준비해놓고 왔던 것이었다.

번쩍!

갈천상이 번개처럼 동굴을 빠져 나갔다.

동복신이 뒤에서 걸어가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소용없을걸? 쏟아버리지 않는한 어느 곳에 숨기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내 별호가 주치(酒痴).]

동호천 등은 나가고 석대에는 발가벗겨진 어린 소년만이 고른 숨을 쉬면서 잠들어 있었다.

터져버린 약병에서 쏟아져 나온 독들이 석실을 떠다니는데...

 

* * *

 

동호천은 초랑초랑한 눈망울의 귀여운 소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소년은 빤히 동호천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는 미소만 지어보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동호천은 당황하여 갈천상을 보았다.

갈천상도 의외인 표정이었다.

소년은 이번에는 동복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동적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셋이나 있다는 것이 사뭇 이상한 모양이었다.

동호천이 그의 손을 살짝 끌어당겨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물었다.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부모님은 누구시냐?]

[?]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떠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그래.]

[나도 몰라. 모르겠는걸?]

소년은 고개를 흔들고는 갈천상을 보며 킥킥 웃었다.

갈천상의 대머리가 또 우스운 모양이었다.

동복신이 기막힌 듯이 물었다.

[이 아이가 어제 그 아이가 분명한가? 혹시 바뀌진 않았나?]

그럴리가 없다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물음은 그렇게 나왔다.

갈천상이 눈을 감고 고개를 비틀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호흡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여 뇌가 손상된 것같소. 숨을 쉬지 못하게 되면 제일 먼저 손상받는 부위가 바로 머리 속의 뇌요.]

[그럼 이 아이가 바보천치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동적선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갈천상이 탄식했다.

[아마도 우리는 헛수고를 한 것같소. 차라리 고이 죽도록 놔두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게. 이 아이의 눈을 보고도 그런말이 나오는가? 여전히 맑고 총명해. 나는 이처럼 지혜로 가득한 눈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네. 자네는 이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바보를 보았는가?]

동호천이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갈천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대형, 헛고생하지 마시오. 한번이면 족하오. 내가 독을 만지기는 하지만 의술에 대해서도 아마 동대형보다는 나을 거요. 자세히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 아이의 뇌 기능 중의 태반은 마비되었을 것이오.]

[말씨름할 게 뭐있소? 직접 해보면 될 것을... ]

동적선이 말하며 탁자에 일자(一字)를 죽 긋고 물었다.

[얘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지평선(地平線)! 지평선이네.]

소년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음성이 아주 맑고 깨끗하여 듣기 좋았다.

동호천 등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동적선은 다시 일자에 한획을 더 첨가해서 이자(二字)를 만들었다.

[이건 뭐냐?]

[계단!]

소년이 재빨리 대답했다.

갈천상이 그것보라는 듯이 동호천을 힐끗 보았다.

동호천이 말했다.

[아직 어려서 글자를 배우지 않았을 수도 있지않나. 다른 걸 물어봐라.]

[그래봤자 헛소고일 것이오. 옷차림이나 골격으로 봐서 속된 가문의 자식은 아니오.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되지 않소.]

갈천상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동호천은 그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두사람이 있단다. 그런데 다시 두사람이 더 왔단다. 그럼 모두 몇사람이 있느냐?]

[두사람!]

소년이 즉시 대답했다.

동호천은 다시 물었다.

[일곱개는 다섯개보다 많으냐 적으냐?]

[다섯개.]

소년은 이번에도 주저없이 말했다.

동호천은 속이 터질 듯한 것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일곱개는 다섯개보다 많으냐 적으냐? 많으냐 적으냐?]

[일곱개.]

소년의 대답에 동복신이 술을 들이키며 한숨을 쉬었다.

[! 형님, 이제 그만하시오. 갈형의 말이 맞는 모양이오. 천고(千古)의 인재(人才)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하늘도 무심하구려.]

동호천은 벌떡 일어서며 갈천상을 향해 물었다.

[어떤 방법이 없겠나? 영약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거라도...]

[내가 알기론 그런 약이나 치료방법은 없소. 그러나... ]

갈천상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원래의 백치와는 다르오. 만약 잘 먹고, 게다가 본인이 계속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 극복될 수도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능할런지...]

[그정도만도 됐네.]

동호천은 소년을 앉아들었다.

그는 갈천상에게 말했다.

[언제고 다시 오겠네.]

파앗!

그는 마치 연기처럼 그자리에서 꺼져버렸다.

동복신과 동적선도 일어서며 갈천상에게 몇마디 인사를 건네고는 즉시 달려나갔다.

갈천상이 소리쳤다.

[단혼검은 가져가지 않으시오?]

[훗날 이 아이가 오거든 주게나.]

동호천이 천리전음으로 답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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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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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폭풍탑은 1994년에 박스본으로 출간했던 작품입니다.*** 

 

 

와룡강 기정무협소설

 

     천신폭풍탑 天神暴風塔

 

 

 

卷頭 蛇足

 

이번 작품은 옥총서생(玉葱書生;옥수수)같은 내용이다.

껍질을 하나씩 벗겨가다 보면 점점 거대한 그 무엇에 만나게 되고 전체를 통괄하는 커다란 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정된 하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우여곡절과 운명을 만나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분명히 강하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자도 존재한다.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천신폭풍탑(天神暴風塔)을 만든 폭풍무존(暴風武尊)의 무공은 고금제일이며, 그는 천년의 시간을 격하고도 여전히 살아있다.

폭풍무존뿐만 아니라 독존패왕궁의 궁주인 혁련무적(赫連無敵) 역시 주인공보다 강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

정신적인 불구를 딛고 일어서면서도 오직 무림의 평화라는 하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의 정열(情熱)이 그에게는 있다.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보다 강한 적에 맞서는 청년의 패기(覇氣)가 있다.

정체를 모르는 여인과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는 무모함이 있다.

때로는 소중한 시간을 무심코 흘려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일 때도 있고, 주어진 상황에 끌려가는 소극성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을 때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소극적일때는 소극적이라는 것을 안다.

능력이상으로 자만하지도 않으며, 능력이상의 과욕도 부리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그의 의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무림의 흐림을 바꾸어 놓는 대역사를 이룬다.

부분적으로 흥미를 돋구기 위한 내용도 들어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관대한 독자라면 작은 것에 치우쳐 창의성을 비웃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본저자는 과분하게도 어떤 칭찬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무협이란 전적으로 재미를 만들기 위해 쓰는 것이고, 독자는 재미를 위해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저자의 생각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어도 세권의 책에 단 한마디의 말도 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본 저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독자제현께서 이 작품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모든 복잡한 것을 잊어버리고 재미있게 봐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작은 바람은 어느 정도 충족되리라 기대하면서 독자제현에 대한 인사를 마친다.

 

 

 

 

 

 

序章

 

           恩世正劍會 獨尊覇王宮

 

 

 

<은세정검회(恩世正劍會)!>

 

그것은 환상(幻想)의 전설이다.

아니, 절대의 의미를 지닌 하나의 신앙체(信仰體).

이른바 무림평화의 암중수호전(暗中守護殿)이라는 은세정검회.....

전설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정도무림(正道武林)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극강의 사마(邪魔)가 창궐하여 천하가 수습할 수 없는 위기에 빠져들 때... 그때 비로소 은세정검회는 나타난다.

 

-대정수호(大正守護)의 대명(大命) 아래, 이름없는 범인(凡人)으로 세상 곳곳에 숨어있는 은세정검회의 은자(隱者)...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며, 하나같이 진정한 무예를 일신에 지닌 개세고수들이다.

 

이같은 전설은 이미 천년 이전부터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은세정검회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그들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지 조차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은세정검회란 그저 환상처럼 아스라이 떠도는 전설속의 이름일 뿐이고... 이제는 그같은 전설이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독존패왕궁(獨尊覇王宮)!>

 

사마(邪魔)의 창궐을 막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은세정검회라면,

그러한 은세정검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신비한 세력이 있으니 바로 독존패왕궁이다.

완벽한 무림지배의 힘을 갖추어 놓고서 그들의 숙적인 은세정검회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독존패왕궁...

먼저 나서는 자는 필연적으로 당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독존패왕궁은 길고도 오랜 세월을 은세정검회를 대비하며 그늘 속에 숨어있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은세정검회마저 잊어버렸거늘 어찌 독존패왕궁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천하를 어둠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가공할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세상은 모르고 있었다.

 

-은세정검회!

-독존패왕궁!

 

이들은 과연 지금도 존재하는가?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다.

무림에는 무수한 세력과 고수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들은 아직 한번도 그 전모를 들어내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 *

 

그곳은 죽음의 마역(魔域)이다.

오직 죽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죽음의 귀기만이 자욱이 흐르고 있는...!

사시사철 항상 짙은 운무에 뒤덮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며 낮에는 죽음의 열기(熱氣), 밤에는 죽음의 한기(寒氣)가 뿜어져 나와 접근하는 일체의 생명체를 사체로 만들고야 마는 그야말로 절대의 사역(死域)이다.

 

<이기소혼곡(二氣燒魂谷)>

 

대자연의 신비한 힘이 만들어놓은 지상의 지옥(地獄)!

그러나, 그곳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같은 곳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빛바랜 옛 고서에 간간히 보일 뿐이다.

하물며 그 절대의 사지 속에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고오오오...!

문득 여명의 아침 하늘을 갈가리 찢어내며 장엄한 붕조(鵬鳥)의 울음소리가 신비롭게 울려퍼졌다.

안휘성(安徽省) 외곽에 자리한 구화산(九華山),

칼끝같이 늘어선 구화산의 수천 군봉 위로 한 마리 거대한 붕조의 자태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설의 만금지왕(萬禽之王)인 묵령신조(墨翎神鳥)였다.

묵령신조는 오백여 년 전에 존재했던 마도(魔道)의 하늘 마중천(魔重天)의 상징이었으며, 대대로 마중천의 지존인 마중천주(魔重天主)와 영()으로 통해있다는 전설속의 신조다.

콰아아아!

묵령신조는 자태를 드러냄과 동시 불가사의한 속도로 이기소혼곡으로 내려 앉았다.

“....!”

깍아지른 듯한 양쪽 절벽이 하늘까지 가리운 채 침침한 어둠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 내려선 묵령신조의 등에는 마치 태양같은 신위를 보이고 있는 인물이 우뚝 서있었다.

붉은 얼굴에 배꼽어림까지 늘어뜨린 검은 수염은 그를 미염공(美髥公)이라 칭할수 있을 만큼 기품이 있어보였다.

미염의 노인은 묵령신조의 등에서 천천히 내려섰다.

그의 품에는 어린 소녀가 안겨 있었다. 곤히 잠들은 듯 보이는 그소녀는 정말이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소녀는 입가에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불과 열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지만은 몸매의 조형미는 완벽, 아니 그 이상이었다.

뿐인가?

만지면 묻어나기라도 할 듯 곱고 투명한 피부하며... 한 나라도 위태롭게 만든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바로 이런 아름다움을 두고 생겨난 말이리라.

미소녀를 안은 미염공은 무거운 긴장이 감도는 시선으로 협곡 저편의 자욱한 홍무가 감도는 곳을 주시했다.

"이기소혼곡... 이곳이다."

 

-이기소혼곡!

 

그렇다. 묵령신조가 내려선 이 협곡의 저편이 바로 이기소혼곡이었다.

개벽(開闢)의 혼돈(混沌)이 아직 살아숨쉬고 있다는 전설속의 그 비역이 바로 이곳 구화산에 자리하고 있엇던 것이다.

미염공은 비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안에서 잠들어있는 미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자(紫鳳)! 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저곳에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이제 너는 이십세가 될때까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마중천...! 오직 마중천에 이르러야만 진정한 너를 되찾게 된다."

소녀는 대답이 없다. 달콤한 꿈에 젖었는지 얼굴 가득 미소만 지으며 곤히 자고 있을 뿐이었다.

미염공의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자그마한 백색 화살을 꺼냈다.

"은세초혼전(隱世招魂箭)! 자봉아! 너를 마굴(魔窟)로 던져야 하는 이 할애비를 용서하거라."

미염공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

갑자기 은세초혼전이 소녀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

순간 소녀는 눈을 부릅떴으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잠시후,

꾸우!

묵령신조는 소녀의 곁에서 구슬픈 듯이 울었고, 노인은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경공을 펼쳐 이기소혼곡을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죽어버린 소녀의 손에는 뜯어진 서찰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 서찰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중천주(魔重天主) 황자강(黃自强)이 삼가 존귀하신 독존패왕궁(獨尊覇王宮)의 지존께 만배를 올리오며...

-중략(中略)-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

-중략(中略)-

부디 은세정검회(恩世正劍會)을 멸하여 사무친 복수를 해주시기를...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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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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