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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장

 

           마지막 고리를 풀다 (2)

 

 

 

단촐하게 꾸며진 석실(石室),

나무로 만든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갈천상과 석두공, 그리고 금사종이 앉았다.

갈천상이 물었다.

[이곳이 기억나느냐?]

[예...]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갈천상이 동호천으로 부터 협박을 받았을 때 화가 나서 눌렀던 탁자는 여전히 다리가 돌바닥에 파고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으으으... 끄윽! 크륵... ]

탁자 옆쪽에는 여전히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며 해천월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금사종이 물었다.

[해천월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음... 십 년 전 이놈을 살린 뒤부터 쭉 연구해 온 게 있는데 그걸 한번 실험해 볼 생각이네.]

갈천상이 대답했다.

[그럼 죽기 전에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갈천상은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저 늙은이는 내공이 강해서 잘 죽지 않아.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충분하지.]

차를 마시고 난 후에야 그는 석두공과 금사종에게 말했다.

[나를 좀 거들어 주게나. 이제 일을 시작해야지. 해천월을 들고 따라오게.]

그는 석실의 한쪽 벽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밀었다.

그그긍!

갑자기 벽이 빙글 돌면서 그의 몸이 석벽안으로 사라졌다.

석두공은 십년 전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석벽 안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갈천상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소림사의 만배선사로부터 전수받은 정심신공의 효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교묘한 석벽의 장치에 신기해 하면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석벽 안은 어두침침한 동굴이었다. 자연석동(自然石洞)을 약간 개조한 듯, 여기저기 깎여진 바위들이 보였다.

그렇지만 동굴의 낮은 천정은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약간 가다보니 향기로운 냄새가 동굴속에서 부터 풍겨져 왔다. 폐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맑은 향기였다.

석두공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영약을 기르시는 모양이군요.]

[좋은 약이지. 먹기만 먹으면 네 녀석은 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완전한 돌대가리로...]

갈천상이 앞에서 대꾸했다.

금사종이 물었다.

[무슨 약이기에 그렇습니까?]

[백송(白松)에서 채취한 망아독균(忘我毒菌)이네. 이 향기는 망아독균에서 나오는 것이고.]

갈천상이 말했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향기에 독은 없는 것같습니다.]

[그게 망아독균을 내가 기르는 이유이지. 망아독균은 그 자체로서는 독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하지만 복용하여 사람이나 짐승의 배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무서운 독이 되는 것이야.]

[한데 어째서 망아독균입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갈천상은 동굴의 두갈래로 갈라진 부분에 이르러 우측의 동굴로 들어가며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이곳에 나 이외에 들어온 사람은 네 스승형제들 뿐인데 제자라는 놈들도 똑같은 질문만 하니... 아마도 십년 전에 그들도 똑같이 물었던 것같은데... ]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상궤(常軌)를 벗어나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의문도 똑같이 일어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금사종이 말했다.

갈천상은 듣기 싫은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가 유식한 척하는 것은 산위에서 실컷 들었으니 더이상 말하지 말게. 독에 관해서는 노부가 세상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이니까.]

그는 금사종을 머슥하게 한 후에 다시 말했다.

“망아독균을 먹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자신을 잊는 것은 물론이고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리니, 한마디로 그것을 먹는 순간부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지.”

우측 동굴의 안쪽은 커다란 석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그긍!

그 석문은 갈천상이 동굴 천정의 한곳을 지풍으로 누르자 부드럽게 열렸다.

석두공은 갈천상의 말에 기겁하며 물었다.

[그럼 해독할 수도 없습니까?]

[방법은 있지.]

[무엇입니까?]

[피를 몽땅 뽑아서 바꾸는 거다. 그렇게 한다면 정신을 차릴 수 있다.]

[그냥 죽으라는 말이군요.]

[생각은 편한 대로 하는게 편하지.]

갈천상은 믿거나 말거나는 식으로 말하고 문이 열려진 안으로 들어갔다.

가운데는 석대(石臺)가 놓여있고 사면 벽에는 선반들이 얹혀져 있는데 그 위에는 수백, 수천개에 달할 것같은 병들이 놓여 있다.

또한 선반의 아래쪽에는 괴이한 기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갈래진 두 동굴 중에서 다른 하나는 독물을 기르는 곳이고 이곳은 갈천상이 무공과 독을 연구하는 장소였다.

갈천상은 석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천월을 저기에 놓아라.]

석두공은 해천월은 석대 위에 펴놓았다.

해천월의 몸은 형체를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놓는 대로 축 쳐졌다.

쪼르르...

갈천상은 구리그릇에 약물을 붓고는 손을 씻었다.

그리고 말했다.

[옷을 모두 제거해라.]

금사종이 손으로 해천월의 옷자락을 베어냈다.

붉게 물든 옷자락은 그의 터진 살에 드러붙어있었다. 옷자락이 제거되자 그 상처에서 다시 피가 베어나와 석대를 타고 흘렀다.

혈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석두공과 금사종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갈천상은 손가락으로 해천월의 몸을 쿡쿡 눌렀다.

그의 손가락은 해천월의 몸이 마치 두부나 되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툭! 투툭!

해천월의 몸이 기형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 뒤에는 뼈와 근육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뼈는 여전히 부러진 상태였고 근육도 잘려진 상태였다.

갈천상은 예리한 비수를 꺼내 그의 살을 가르고 혈관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근육을 잘라냈다.

교묘한 솜씨였다.

다리의 근육이 잘려졌고 팔의 근육이 잘려졌다.

해천월은 갈천상의 손에서 해부되고 있었다.

끊어진 혈관은 갈천상의 손에 의해 꿰매졌으며 잘라낸 근육들에는 약을 바른 후 제자리에 놓여졌다. 근육이 때로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석두공은 문득 기계인간이 생각나서 말했다.

[뼈나 근육을 잘라내고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까?]

[어느 정도 가능하지. 하지만 늘 몸의 부조화로 고통받아야 하기 때문에 마약을 먹이거나 감각을 없애버려야 할 걸?]

[특이한 종류의 공력을 익혀서 감각을 통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럴 수 있을 것같군. 하지만 누가 그런 신공까지 익히면서 괴물이 되려고 할까?]

갈천상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런 괴물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누가 그런 자들을 만들었단 말인가?]

갈천상이 놀라며 물었다.

석두공은 형산에서 기계인간들을 파괴한 일에 대하여 간단히 말했다.

[행동의 기괴함이 인간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결국 다 부수긴 했지만 그때 놀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합니다.]

갈천상은 해천월의 배를 가르면서 말했다.

[다음에 그런 괴물을 보게 되거든 이리로 하나만 가지고 오게.]

[생포하기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어렵지도 않아. 어떻게 만들든지 간에 완벽하게 몸과 이물질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니까. 음공을 이용하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거네. 내부의 조화를 깨뜨리면 절로 드러누워 버릴 거야.]

대수롭지 않은듯 말하며 갈천상은 해천월의 터진 내장을 바늘로 꿰맸다.

더운 김을 내면서 내장이 꿈틀거렸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내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갈천상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해천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숨쉬고 있었다.

[껄껄껄... 노부가 네놈을 살릴 때는 심장에 구멍을 뚫고 다섯 가지 독물을 넣었다. 이 까짓게 뭐 대단하다고 불알찬 놈들이 비위상해 하느냐? ]

갈천상은 웃으며 말했다.

금사종은 말했다.

[편작도 수술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사람이 배를 가르고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배에 칼 맞고도 죽지 않는 놈이 있는데 조심해서 배를 갈랐는데도 죽는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은가? 원기의 소모야 많겠지만 깨어나고 나서 독이랑 영약이랑 먹여서 원기를 보충시킨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갈천상은 해천월의 폐에 난 상처에서 피를 뽑아내고 실로 묶었다.

그리고 또 말했다.

[한데 공기 중에 어떤 기운이 있어서 사람의 배를 열어놓은 지 반각이 지나지 않아서 사람을 죽게 한단 말이야. 노부가 독물로서 그러한 기운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시원치 않아.]

한데 해천월의 폐가 꿰매지자 그의 목에서 크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왈칵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갈천상은 재빨리 그릇으로 핏덩어리를 받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해천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허... 으으... ]

흐느낌 같기도 하고 웃음같기도 했다.

갈천상이 말했다.

[이제 이놈이 조금 살만한 모양이군. 대체 이 대가리 속에는 무슨 나쁜 짓으로 가득 차있는지 살펴볼까?]

[그것 참 좋겠습니다. 검종맹이나 잔혼각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온다면 꽤 쓸만하겠지요.]

석두공은 갈천상이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갈천상은 해천월의 배를 빠른 솜씨로 기웠다.

그리고 선반에 있는 약병들 중의 하나를 꺼내서 해천월의 입에 부었다.

노르스름한 물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무슨 약입니까?]

[망아독균에다가 노부가 다른 것을 조금 섞은 것이다.]

[아니 그럼 백치가 되어버릴 텐데 무슨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금사종이 재빨리 물었다.

갈천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독에 대해서 문외한인 자네가 아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을것 같은가? 아무 걱정말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해천월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 주이... 으... ]

그렇지만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 않은 소리였다.

근육은 해부되어 꿈틀거리고 전신은 피에 젖어있는 고깃덩어리가 입을 여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시 심제을... 심... 죽일 놈... ]

해천월은 점차 운이 있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갈천상이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잘 봐두게. 속에 있는 것을 몽땅 다 털어놓고 백치가 되는 것을... 다시는 못볼 구경일 거야. 그것도 마음에 맺혀이는 중요한 것부터 털어놓는 것을... ]

[혹시 저도 저렇게 한게 아닙니까?]

석두공이 미심쩍다는 듯이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갈천상이 정색을 했다.

[그랬다면 노부는 이미 저승에서 네 스승에게 앙갚음 하려고 달려들었겠지. 동영감이 호랑이 눈을 뜨고 보는데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려?]

석두공과 금사종이 빙그레 웃었다.

해천월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으... 안돼! 용서해줘... 독비신검객! 자네 아들을 죽인 건 잔혼살객 그놈이지 내가 아니야. 자네 부인을 죽인 건 심제을이고... 난 단지 시녀를 죽인 죄밖엔 없네.]

갈천상이 석두공과 금사종에게 눈을 끔벅해보이고는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 나쁜 놈 해천월! 왜 나를 죽였느냐? 그리고 아들을 죽인 게 어째서 잔혼살객이란 말이냐? 내 두 눈으로 네놈이 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

[아니다. 섭영소. 네가 잘못 보았다. 너의 아들은 잔혼살객 그놈이 고목나무 속에 집어넣고 눈으로 눌러 죽였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그곳이 어디냐?]

갑자기 갈천상이 크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대별산이다. 네 아들도 부인도 그리고 너도 대별산에서 죽었지 않느냐?]

해천월은 완강하게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말했다.

갈천상이 빠르게 석두공의 표정을 살폈다.

“....!”

그때 석두공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해천월의 소리가 점점 그를 어떤 환상속으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갈천상은 금사종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절대로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말게.]

금사종도 석두공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천상은 다시 해천월에게 말했다.

[내 시체는 어디에 있느냐?]

[심제을이 서쪽 절벽에서 던져버렸다. 아마 그 아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내 아내의 시체는?]

[그녀는 네 집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 모든 게 그 악마같은 심제을 그놈 짓이다.]

해천월은 힘없이 말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같았다.

갈천상이 물었다.

[내 집은 어디에 있지?]

[송죽곡(松竹谷) 안에 있지 않았느냐?]

송죽곡은 갈천상이 있는 독왕동의 완전히 맞은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 저쪽인 것이다.

갈천상은 대별산에서 자랐고 그 후에도 죽 대별산에서 살아왔다.

그러나송죽곡은 대충 위치만 알고 있을 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갈천상이 물었다.

[왜 나를 죽이고 가족마저 죽였느냐?]

[네가 애초부터 삼마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이었다. 네가 삼마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몰랐어도 난 적룡혈운도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을... ]

해천월은 원망스린 어조로 말했다.

[아!]

갑자기 석두공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금사종이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갈천상의 눈빛을 받고 거둬들였다.

석두공의 전신이 부덜부덜 떨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마치 학질에 걸리기라도 한듯이 그의 몸은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과 얼굴이 얼기라도 하는 듯이 새파랗게 변했다.

웅크리고 앉은 그의 눈빛은 망연하여 별빛같이 초롱하던 석두공의 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는 눈빛이지 밖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석두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렬하게 떨었다.

돌연,

스으으으스스스...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금사종은 심장이 멎어버릴 것같은 충격을 느끼며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쿵쿵쿵!

그의 앞에 뚜렷한 발자국이 새겨졌다.

갈천상은 이미 공력을 일으켜 석두공의 살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석두공의 살기는 십년 전의 어렸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공이 이미 극에 다다른 지금 그의 몸에서 살기는 폭풍같은 기세로 일어나고 있었다.

해천월의 심장이 멎어버렸다.

갈천상은 석대 뒤로 피했으며 금사종은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한발 한발 물러섰다.

펑!펑!펑!

선반위에 있던 병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약물과 독가루가 가득 흩날렸다.

펑펑펑펑...

제법 단단하던 병들도 깨어져 나가고 서가가 삐거덕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물건에 귀신이라도 붙은 것같았다.

이때,

[으아아아아!]

갑자기 석두공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두두두두!

실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갈천상은 쓰러져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고 금사종은 왁칵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으으으... ]

갈천상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금사종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석두공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같았다.

모든 것이 그림을 보듯이 선명해져왔다.

그의 몸에서 폭풍같던 살기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팔이 하나뿐인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놀던 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머니가 머리를 감겨주며 울지 않는다고 착하구나 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푸른 옷의 사나이에게 일검을 맞고 쓰러지던 기억도, 집이 불타고 아버지가 자신을 안고 도망치던 생각도 났다.

아버지를 협공하던 세사람의 얼굴이 눈앞에서 잡힐 듯 떠올랐다.

[아버지가 외팔이만 아니었어도... 내가 짐만 되지 않았어도....]

석두공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그의 두 볼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흘렀다.

그때 갈천상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너를 찾게 되었구나. 너무 슬프하지 말아라. 세상의 일은 사람이 다 하는 것같아도 실상 하늘의 정한바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느니라.]

석두공은 그의 위로를 받자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울먹였다.

풀리지 않던 기억의 고리가 해천월으로 인해 풀렸던 것이다.

갈천상이 그의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도 천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무골인지라 훌륭한 무가의 자손일 줄 알았다. 과연 독비신검객같은 훌륭한 사람을 아버지로 두었구나.]

이미 죽었던 아이, 자신의 손으로 끔직한 방법을 동원하여 살렸던 아이...

그러나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버렸던 그 아이가 이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품에 안겼다.

갈천상은 석두공에 대해 부모와 같은 정을 지니고 있었던지라 그 감회가 남달랐다.

석두공,

그는 바로 고검문의 문주인 섭군천의 손자이며, 오객 중의 한 사람인 독비신검객 섭영소의 아들인 섭웅평(葉雄枰)이었다.

그가 섭군천을 처음 만났을 때 남다른 친밀감을 가졌던 것은 서로가 혈친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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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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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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