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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 보낸 여살성

 

 

한 바탕의 혈우성풍(血雨腥風)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이라트부의 무사들 중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다만 철목풍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자는 수하들이 이검한의 손에 몰살당하는 틈을 타 사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자가 이검한의 추격을 뿌리칠 가능성은 없다.

(이런...)

하지만 철목풍을 추격하려던 이검한은 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했던 첫 번째 청년의 시체를 밀어내고 또 다른 청년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 때문이다.

이검한으로서는 그 청년들이 나유라가 기른 심복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단지 달단여왕으로 보이는 여인을 능욕하는 색마들로 보일 뿐이다.

감히....”

쩌어어엉!

분노한 이검한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낭아검에서 시퍼런 검강이 쭉 내뻗어 네 청년의 몸뚱이를 휩쓸어버렸다.

퍼퍼퍽! 후두둑!

검강이 스치는 순간 네 명의 청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이 동강나 사방으로 쓰러져 버렸다.

흑혈맹호단의 청년들로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그 죽음이 차라리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제 정신이 돌아왔다면 자신들의 여왕을 능욕했다는 죄책감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 “....!”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이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이검한과 하후진진, 그리고 다섯 청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목욕을 한 달단여왕 나유라 뿐이었다.

이검한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의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하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저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이검한으로서는 이것이 두번째 살인이다.

첫 번째 살인에서 십여 명을 죽였는데 두 번째 살인에서는 무려 오십여 명이나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를 견디지 못해 최근에 연마해낸 낭아검법과 화염마강을 전력을 다해 시전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철목풍의 수하들이 몰살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태연하게 살인을 하다니... 이러다가 나란 놈은 전대미문의 살인귀가 되는 게 아닐까?))

이검한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죽어랏!”

!

독살스러운 외침과 함께 한 자루 비수가 벼락같이 이검한의 등을 찔렀다.

독수를 쓴 것은 물론 하후진진이었다.

하후진진은 처음에는 이검한의 무서운 신위에 압도당해 온몸이 얼어붙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하후진진의 가슴 속에서 독랄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극독이 발려진 비수로 이검한의 등을 찌른 것이다.

(죽였다!)

하후진진은 비수 끝에 닿는 묵직한 느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독비(毒匕)는 이검한의 등에 위치한 사혈(死穴)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하지만 하후진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회심의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자신의 독비가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조차 뚫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하후진진으로서는 이검한이 걸친 적룡풍이 도검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희세지보라는 것을 알 리 없다.

이검한은 적룡풍 덕분에 독비에 찔리고도 그저 움찔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 이럴 수가!”

하후진진은 얼굴을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이며 비칠 물러섰다.

이검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부르르!

돌아서는 이검한의 시선과 마주친 하후진진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쩌엉!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검한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불에 달궈진 시뻘건 부젓가락으로 머리 속이 휘저어지는 것같은 전율을 느낀 것이다.

사갈(蛇蝎)같은 심보를 지녔구나! 나이도 어린 계집이...!”

이검한은 무서운 눈으로 하후진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흐윽...!”

이검한의 일갈에 하후진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 낯선 소년이 내뱉은 한마디가 잘 벼려진 비수처럼 방심을 파고든 것이다.

인생이 가엾어서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혼은 좀 나야한다!”

이검한은 준엄하게 일갈하며 유령같이 하후진진 앞으로 다가왔다.

!

다음 순간 하후진진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호되게 뺨을 얻어맞았다.

!”

퍼억!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군 하후진진의 왼쪽 뺨이 삽시에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꺼져라!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네년의 그 악독한 심장을 뽑아내 으스러트려버릴 것이다!”

이검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후진진을 내려다보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하후진진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이 똑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치심과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다!”

하후진진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독기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러운 사내놈아! 오늘 나 하후진진에게 모욕을 준 대가는 언제고 갚고 말테니까!”

하후진진은 한 서린 저주가 실린 독설을 이검한에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검한은 하후진진이 퍼붓는 저주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에 이검한에게 저주를 퍼부은 하후진진의 모습은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장차 세상을 피로 씻을 여살성(女殺星)을 살려준 느낌이 든다!)

이검한은 사라지는 하후진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하후진진을 쫓아가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 악독한 계집이 오늘 내 손에 죽지 않은 것도 정해진 운명이겠지.)

쓴웃음을 지은 이검한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에게 다가갔다.

헌데 나유라에게 다가가던 이검한은 움찔하며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유라의 지금 모습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몸이 된 채 혼절해 있는 나유라의 풍만한 육체는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시신에서 뿜어진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한 걸음 늦었구나!)

가까이 다가가 나유라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던 이검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몸에 유린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유라의 무참한 자태를 본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한걸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일국의 여왕인 나유라의 고귀한 육체가 유린당한 것이다.

(이 비밀은 영원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검한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달단부의 결속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유라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혼절하여 그 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

(가엾은 여자다.)

이검한은 한숨을 쉬며 찢긴 옷가지를 주어모아 나유라의 몸에 칠갑이 되어 있는 피를 대충 닦아주었다.

피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에 나유라의 풍만한 알몸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하지만 이검한은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피에 젖은 그녀의 무참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크!)

그러다가 이검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움찔했다. 멀리 남동쪽 지평선으로 작은 점이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 점은 아마도 철산산과 포대붕일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자. 생모의 이런 무참한 모습을 보면 산산공주가 큰 충격을 받을 테니...!)

파천마도를 회수한 이검한은 적룡풍을 벗어 나유라의 나신을 감쌌다.

스읏!

그리고는 적룡풍에 싸인 나유라의 알몸을 두 팔로 안아들고 서쪽으로 질풍같이 몸을 날렸다.

삽시에 이검한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졌다.

지옥같은 참극이 벌어진 장내에도 어느덧 눈부신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녹원(綠園;오아시스)-!

망망한 사막 가운데 아담한 녹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도는 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을 작은 녹원이다.

녹원 가운데에는 맑은 물이 고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이라는 말이 어울릴 작은 크기의 호수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에서 피어오르는 실같은 아침 안개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찰박! 찰박!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물소리와 함께 능어같은 여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풍만한 여체다.

조심조심 호숫물로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덕분에 여인은 한층 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달단여왕 나유라!

호수에 가슴까지 몸을 담근 채 몸을 씻고 있는 금발의 여인은 물론 나유라였다.

(철목풍!)

찰박! 찰박!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풍만한 몸을 씻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순진하던 진진이를 저토록 악독하게 만들다니... 네놈의 죄는 열 번 죽어도 부족하다!)

나유라는 하후진진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딱히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핏덩이일 때부터 보아온 탓인지 하후진진이 그녀 자신의 친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철목풍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철목풍은 끔찍한 일을 겪은 하후진진을 위로하고 달래주기는커녕 복수심을 부추켜 사갈독심을 지닌 독한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말 신비한 아이다!)

철목풍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던 나유라는 흘깃 한쪽을 돌아보았다.

한쪽 호숫가에는 이검한이 나유라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녹원으로 나유라를 데려와 그녀로 하여금 목욕을 하게 해준 것이다.

(나이가 많아봐야 산산이 보다 두 세살 위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철목풍 조차 능가하는 내공을 지녔다니...!)

나유라는 이검한의 늠름한 뒷모습을 주시하며 숨결이 약간 더워졌다.

자신은 이검한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까지 적나라하게 보였었다. 아들뻘인 어린 소년에게 속살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릇한 설레임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나유라는 십 년 넘게 사내와 관계해 본적이 없었다.

철산산을 낳은 후 그녀는 산후조리를 잘못 해서 상당히 살이 쪘었다. 거의 백오십 근이나 나가 어지간한 사내들보다도 무거운 체중을 지녔었다.

원래 살집이 있고 키가 큰 데다가 살까지 디룩디룩 쪄버리자 남편인 철고륜은 질색하며 그녀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젊고 날씬한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돼지처럼 살이 찐 그녀를 본처라는 이유만으로 상대해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철고륜이 여전히 매력적이고 날씬한 하후란에게 빠져 버린 데에는 나유라가 한 때 비만한 뚱보였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그후 나유라는 무공 연마에 정진하여 다시 원래의 체형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한번 떠난 남편의 애정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드세고 도도한 나유라의 성격상 남편의 애정을 되찾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아양을 떠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여자로서의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절부터 독수공방을 해야만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육체적인 본능을 억눌러 오긴 했으나 물론 그녀가 완전히 석녀(石女)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부에는 쌓이고 쌓인 욕정이 폭발 직전의 수위로 쌓여 있었다.

가끔 뜨거워진 몸을 스스로 달래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손이나 이런 저런 민망한 도구를 이용한 부끄러운 시도는 오히려 갈증만 더 심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얄궂은 운명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이검한에게 모두 보이고 말았다.

그 때문일까?

왜곡된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나유라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귀엽고도 늠름한 저 소년이라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몸을 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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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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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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