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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3)

 

 

바깥의 계곡도 어두웠지만 동굴 안쪽은 더욱 깜깜하다.

심주은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정말 칠흑같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대안탑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용조층층공을 몸속에 쌓게 된 이후로 어둠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임청우였다.

하지만 이 동굴의 짙은 어둠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내민 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로 십삼보, ()으로 육보, () 구보, () 삼보...”

앞서가는 심주은은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임청우는 혹시 어둠 속에서 심주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당겨지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심주은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임청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심주은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심주은이 문득 멈추어 섰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임청우의 손목을 잡아서 자기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내게서 떨어지면 안돼.”

임청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며 혼자 앞서 갈 때는 언제고 이제 다 온 듯하자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

하지만 그 직후 임청우는 발밑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원래 들이키던 숨을 가쁘게 빨아들였다.

끼에에엑!”

그 바람에 자기가 듣기에도 흉한 소리가 목구멍으로 터져 나왔다.

쐐액!

임청우의 몸이 돌덩이처럼 세차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심주은의 맥박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이번에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다 온 모양이야.”

심주은이 속삭였다.

휘청!

순간 두 사람은 몸은 공중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밑을 떠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주위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헌데 어둠이 그 빛에 밀려 물러가며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자신들 주변에 빙 둘러 서있는 것이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임청우는 긴장하며 그 그림자들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수십 겹으로 휘감고 있던 휘장이 걷혀지듯 어둠이 물러가며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자들이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람이다!)

이윽고 임청우는 자신과 심주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아직 모습은 완연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궁장차림을 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심주은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하며 낭낭한 음성으로 외쳤다.

소녀 심주은,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로서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조사이신 구천신녀(九天神女)님을 뵙습니다.”

임청우는 그녀가 절을 하자 덩달아 절을 했다.

그런데 심주은은 임청우가 절을 할 때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절을 받은 사람이 답례하는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일어서다니...

특별히 예의를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지만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가 완연히 밝아지며 아홉 여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진짜 사람이 아니라 아홉 개의 인형이었구나.)

임청우와 심주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었다.

아홉 개의 인형은 모두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배꽃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형들의 모습이 그 정도이니 그 인형의 원형이었던 여인은 얼마나 아름답고 요염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임청우와 심주은이 도착한 석실에는 그 아홉 개의 인형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의 중앙에는 임청우와 심주은이 내려온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형들의 뒤쪽 석벽에는 인형과 똑 같은 얼굴에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수 만 가지의 화려한 꽃들의 그림이 나무 모양을 한 세 개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임청우가 물었다.

설마 저 그림이 이 밖에 있는 계곡을 그린 것은 아니겠지?”

임청우가 물은 것은 믿기지 않아서였다.

세 개의 봉우리로 보아 벽에 그려진 풍경은 바로 이 동부 밖의 계곡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부 밖의 계곡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 늪지대 주변에 깔려 있을 뿐 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벽화에는 무수하게 많은 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해.”

심주은이 인형들의 새끼손가락들을 천잠사로 이어 묶으며 말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황하의 물이 조금씩 이 계곡으로 스며들어서 급기야는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원래 이곳에 있던 신녀문도 물에 잠겨 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남쪽의 무산으로 옮겨가야 했었다고 해.”

임청우가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물에 잠기기 전에 이 계곡에 신녀문이란 문파가 있었다면 이곳은 혹시...?”

신녀문의 조사동(祖師洞)이야. 폐쇄되고 난 후 여기 들어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야.”

천잠사로 아홉 인형들의 손가락을 각기 하나씩 묶은 심주은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르르르!

인형들은 손가락이 각기 조금씩 젖혀지면서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걸 확인한 심주은이 빠르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신녀들의 등을 봐. 보고서 외울 수 있는 한 많이 외우도록 해! 나중엔 아무리 사정해도 가르쳐 주지 않을 테니까.”

“...?”

임청우가 무슨 소린가 하는데 팔을 내린 인형들이 빙글 돌면서 등을 보였다.

스르르!

그리고 인형들이 걸치고 있던 궁장들이 어떤 힘에 의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궁장이 흘러내리고 백옥을 깎아 만든 인형들의 눈부신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백옥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의 등에는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이 음각되어있었다.

심주은은 서둘러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화선지와 먹물이 들어있는 대나무 연적을 꺼냈다.

그리고는 인형들의 등에 먹물을 바르고 탁본(濯本)을 뜨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홉 장의 탁본이 만들어졌고 그녀는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임청우는 가까이에 있는 인형의 등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글들이 심오한 무공구결과 신비한 이술(異術)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많이 안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알고 있었다.

하나를 알아도 바로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미 임청우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빼어난 무공구결이 숨 쉬고 있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의 구결은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의 공력도 구결을 운용하기만 하면 따라서 몸속을 돈다.

임청우는 배움이 일천하여 무학의 지고한 이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뭔가를 배우고 이룬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굳어지기 전에 그 위에 또 다른 것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당장은 버티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래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무너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르게 올린 탑보다 오래 견딜 리는 만무하다.

천년을 가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세우고 역사에 남을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임청우다.

섣불리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청우가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백옥 인형들의 흘러내렸던 옷들이 다시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종아리를 지나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둔부를 거슬러서 옷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입혀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탁본한 화선지들을 재빨리 말아서 기름종이로 몇 겹으로 감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의 볼일은 다 끝났어. 나를 꽉 잡아! 신녀들은 뒷모습이지만 알몸을 본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스르르르!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옷이 입혀진 신녀들이 돌아서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암흑천지로 변하며 임청우와 심주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파앗!

두 사람은 강렬한 빛에 눈을 가렸다.

동굴 밖의 태양빛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판처럼 네모난 대리석들이 깔려있는 넓은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임청우에게 심주은이 속삭였다.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곳이야. 한걸음이라도 잘못 떼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아서 나가지 못해.”

들어올 때 칠흑처럼 어두웠던 곳은 복잡한 동굴이 아니라 바둑판처럼 넓은 광장이었던 것이다.

입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문이 열리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는 동안에는 입구가 사라지도록 만들어진 기관인 듯 했다.

심주은은 다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네모난 대리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똑 같이 걸었다.

심주은이 걸음을 떼면 따라서 발을 들었고, 그녀가 발을 딛으면 따라서 한걸음 옮겼다.

꾸불꾸불 걸어가며 삼십 여 번의 방향을 바꾼 후에야 두 사람은 벽과 붙어있는 마지막 대리석을 밟을 수 있었다.

그그긍!

그 대리석을 밟는 순간에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사방이 캄캄해졌다.

덜컥!

두 사람의 앞쪽에 있던 벽이 밖으로 넘어가며 출구가 생겨났다.

그들이 처음에 들어왔던 곳이었다.

심주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간이 조마조마했네.”

?”

임청우가 앞장서서 출구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실 난 조사님들을 속였거든.”

심주은이 얄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조사동은 한번 열리면 백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열 수 있어. 그런데 조사동에 들어온 제자는 백옥 인형들의 등에 적혀있는 무공과 술법들을 일각(一刻) 동안만 볼 수 있어. 얼마를 기억했든지 일각이 지난 후에는 우리처럼 쫓겨 올라오고 말아.”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드드드!

동굴을 나선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내딛자 넘어졌던 암벽이 다시 올라가면서 원래의 환상신녀의 그림이 나타났다.

임청우가 돌아보니 문을 여는 고리가 숨겨져 있던 바위도 어느 새 원상대로 회복되어 고리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 동안에 신녀문의 최고의 무공과 술법들을 얼마나 익힐 수 있겠어? 고작해야 한, 두 가지가 끽이지!”

심주은은 암벽에 새겨진 환상신녀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사부님이 그 사실을 일러주었을 때 이미 작심하고 있었어. 아예 탁본을 떠서 나오기로 말이야. 이제 신녀문의 모든 무공과 술법들은 내 손 안에 있는 거야!”

자랑스럽게 말하는 심주은을 보며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왜 그렇게 가슴을 졸였는지 알만 했다.

그렇게 무공을 익혀서 어디에 쓸려고?”

임청우가 묻자 심주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림제패(武林制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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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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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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