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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八 章

 

         變身

 

 

 

무림(武林),

삼성무림청의 거대한 악(惡)의 발굽에 짓밟혀 가고 있던 무림엔……

희비(喜悲)……엄청난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정의 하늘엔 찬란한 영광이……

사(邪)의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람……

단 한 사람이 출현하므로 중원 정사(正邪)의 판도는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푸른 계곡의 처참한 대혈전(大血戰)으로부터 무림에 폭탄을 터뜨린 신행마동 소일초……

기가 막힌 열 세 살 짜리 꼬마가 그 돌풍의 주역이었다.

그는 처음의 공언대로 과연 삼성무림청의 멸망시키는 전초단계로 그 주력인 삼혈단을 몰살시켜버렸다.

그리고,

전력의 팔할에 해당하는 삼혈단을 잃어버린 삼성무림청은,

그들이 벌여놓은 싸움의 곳곳에서 패하고 있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삼성무림청의 가공하던 힘과 세력은 여기저기서 피를 뿌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행마동 소일초,

천하는 그 동안 그에게 주었던 눈총을 거두고 찬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원어디에서나 신행마동의 이름은 높아 갔고,

잠자는 사자들의 숲, 백인장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백인장에는……

금족령을 당해서 밖으로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속 터지는 도객들이 한둘이 아닌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신행마동의 이름과 함께 시간은 쉬임없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 * *

 

파양호가 멀리 보이는 여산의 백인장(百刃莊)

내전 깊은 곳의 침상에 한 사람의 중년인이 누워있고,

그 앞에서는 절색의 미부가 의자에 앉아서 따뜻하게 익힌 낙화생을 까서 중년인의 입에 넣어주고 있다.

침상에 누워있는 중년인은 정기 늠름하여 도저히 누워있을 사람같지는 않은데,

부드러운 눈길을 미부에게 주면서 말했다.

[요즘처럼 편안하게 살았던 적이 여태 없었던 것 같소. 말썽꾸러기 아들 녀석은 무림에서 이름을 더날리고 있고, 아름다운 부인이 장내의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해 주니……나는 다만 이렇게 누워서 음식만 받아먹으면 되는군……]

[그런 말씀만 마시고 당신도 빨리 일어나셔서 그 애를 도와주셔야죠……]

[하하하……그 녀석이 백인장의 모든 사람들의 발을 묶어 놨는데 나도 별 수 있소. 일어나 봤자 갑갑한 장원 안에서 칼질이나 하고 있겠지……]

눕고, 앉은 채 다정스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 두 사람,

바로 백인장의 장주부부인 소선풍과 조예진이었다.

소선풍은 소일초가 보내준 불사환혼단을 복용한 후 신체의 회복이 급속도로 빨라져 이제는 말도 할 수 있고 음식을 받아먹을 수도 있었다.

그가 완전히 일어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아무튼, 파양호 안의 옛 장원에 당신이 일초를 데리고 들어온 날은 볼만 했지……]

[…………]

[멀쩡한 아이더러 사부니 뭐니 하면서 법석을 떨어대니 천하의 일초 그 놈도 울고 말더군. 그때 나는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지. 결과적으로 그게 복이 되기는 했지만……]

[대체 몇 번 이나 더 그 애길 해야 그만하겠어요. 쑥스럽게 자꾸 그때 이야기 하시면 더 이상 낙화생을 드리지 않겠어요.]

조예진이 은근히 먹는 것으로 남편을 협박한다.

[그때만 생각하면 항상 즐거운 걸……]

[그래도 절 위해 이제 그만 하셔요.]

소선풍이 먹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묻는다.

[정말 일초녀석의 무공이 그렇게 높아졌나?]

[몇 번이나 말했어요. 전설적인 검객인 검마의 진전을 물려받았다고요.]

조예진이 혀를 쏙 내밀면서 말한다.

[아마 당신도 이제 못당할 걸요?]

[글쎄……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설사 어르신이라고 해도……]

[아이구라……누워서 허풍만 세졌어요? 어떻게 사부님을 이길 수 있단 말이예요?]

조예진은 남편의 호기가 살아나는 것을 반가와 하면서도 자기 사부도 이길 수 있다는 말에 살짝 빈정댄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깨달은 무공이 있거든……마도구식을 바탕으로 한 건데……단 이초식의 도법으로 집약이 되지……]

[그렇게 그게 대단해요? 그럼 사부와 겨뤄보기 전에 먼저 나와 한번 겨루어 봐요.]

소선풍이 벌떡 일어서는 그녀를 보고 눈이 둥그레 지는데,

조예진의 몸이 그를 덮쳐서 눌러버렸다.

[윽-----]

소선풍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봐 비명도 크게 못 지르는데 조예진의 팔은 그의 목을 휘감고 눈섭을 깜짝거려 소선풍의 귀를 간지럽혔다.

[나를 이길 수 있어요? 없어요? 빨리 대답해요. 안 그러면 더 잔인한 고문을 할 거예요.]

소선풍은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직 입만 살아있는 그가 어떻게 피할 도리도 없다.

[항복! 항복! 당신이 천하제일고수요.항복……하하하하하……]

참다참다 말하는 바람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조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소선풍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보……사부께서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실까요?]

[전번에 만났을 때 느낀 것이지만, 그 어르신께서는 인생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실 작정인 것 같았어.]

[…………]

[어쩌면 무림인이 아닌 아주 다른 모습으로 살고 계실 지도 모르지……]

[휴……저는 사부님을 뵙고도 몰라봤으니……]

[빨리 소아와 어르신께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사형들이 그렇게 변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들은 사악한 무공을 섞어서 사용했어……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마교(魔敎)의 마공(魔功)들인 것 같아……]

[어디서 그런 마공들을 익혔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 그때 소아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쯤 철저히 그들의 병기로 화해버렸겠지……그때도 이미 삼갑자의 내공을 주입한 상태였으니까……]

[여보……정말 소아의 무공에 대한 재질은 사부님을 그대로 닮았어요. 우리 일초보다 결코 재질에 있어서 뒤지지 않아요.]

[한데……일초와 소아가 잘지내고 있을까?]

[그야 모르죠. 애들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겠죠……]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우리도 함께 무림에 나가 유람이나 합시다. 얼마나 통쾌하겠소.]

소선풍은 벌써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제발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생과부 삼 년에 당신 몸무게까지 잊어버렸어요.]

조예진의 투정에 소선풍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당신 몸무게를 알고 있잖아……]

 

× × ×

 

섬,

차가운 서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장강의 물결이 금방이라도 덮쳐버릴 듯한 조그만 섬,

갈대숲이 섬 전체를 뒤덮고 있는데……

무성한 갈대를 헤치고 걸어 나오며 차가운 장강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년,

허리에는 이가 빠진 시커먼 철검,

소일초였다.

그 옆에는 주소아가 따르고 있었고……

…………

[틀렸어……이곳도 전혀 기억에 없어. 다른 곳으로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주소아가 낙담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이때,

살짝 주소아의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입술을 주시하던 소일초가 장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과……한 달 도 지나지 않았어……]

[…………]

[성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어…… 그리고 천천히 기다리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잊어버린 샘 치면되지뭐……지금이 행복한데 까짓 옛날 생각나지 않으면 어때……]

그렇게 말하는 주소아의 표정에는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소일초는 녹림맹에서 이후로 주소아를 아주 존중해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소아의 미모에 넋을 잃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강한 질투심이 생겼던 것이다.

자연히 주소아를 더 잘 대해주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소아에 대한 장난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장난은 점점 도를 더해가서,

요즘에는 아예 잠잘 때에는 주소아를 알몸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아슬아슬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일초는 여체의 신비를 여기저기 엿보았고,

눈을 감고도 주소아의 몸을 훤히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 짖궂은 장난만 아니라면 주소아는 소일초에게 최고대접을 받고있는 것이다.

지금,

그녀의 아름다운 동공은 소일초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넋 잃은 듯 바라보고 있으니……

자기보다 작은 소일초의 어깨를 손으로 감고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금시,

그 아름다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며시 소일초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이제……어떻게 따돌리지?]

[직접 부딪쳐 볼까?]

[상대방도 엄청난 고수야……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리는 것 같아……혹시 정말 할아버지가 우릴 따라 다니시는게 아닐까?]

대체 이들은 또 전혀 그런 척 하지 않으면서 또 무슨 말을 주고 받는 것인가?

따돌린다니……

엄청난 고수라니……

[절대 아니야. 그 형씨……아니 네 할아버지는 아무런 기도가 없어. 그리고 나를 보셨으면 납작 잡아서 혼을 내려고 드실 걸?]

[왜?]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물어보는 주소아다.

[실은……내가 사기를 조금 친 적이 있거든……전에도 조금은 말했지……내가 배운 무공 중 일초검공 말고 다른 절기들은 다 젊은 할아버지한테 사기 쳐서 배운 거란 말이야……]

[그럼, 우리 다시 따돌려 보자. 그리고 우리가 역으로 한 번 정체를 파헤쳐 보는게 어때?]

[좋아, 오늘 밤에……]

소일초는 주소아의 손을 잡으며 안개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안개가 흩어졌을 때 이미 그는 주소아와 손을 마주잡은 체 까마득히 장강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사르르르……

소일초와 주소아가 사라진 갈대숲에 백의를 단정히 차려입은 젊은 부인이 나타났다.

머리는 옥잠을 꽂고 어깨에는 고색창연한 장검이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어려 있는데……

[태봉아……많이 자랐구나……]

오오……

태봉……

바로 소일초의 원래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백의미부는?

[이 어미가 무정한 네 아버지는 잊을 수 있겠지만,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었겠느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여인,

바람에 갈대는 날리고, 바람에 검병(劍柄)의 수술도 날리고……

고독이 배어나는 목소리는 짙은 처량함이 감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남몰래 백인장을 찾아 갔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한데……그 여자는 정말 너와 네 아버지에게 너무 잘 해주더구나. 나는 부끄러워서 그때마다 도망치듯이 돌아오고 말았단다……너는 이 어미는 생각도 않고 자라는 것 같더구나……]

그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넘쳐 두 볼을 타고 내렸다.

소일초의 생모(生母) 이주용(李珠蓉),

그녀는 소일초가 두 살 되던 해에 백인장을 떠나가 버렸다.

소선풍과 심한 말다툼을 한 후에……

[네 아버진 무정한 사람이었어. 몇 년 동안 백인장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그 사람도 많이 변했겠지……그러나, 무슨 이유로 어린 너를 혼자서 험한 강호에 내보냈는지 모르겠구나……]

 

***

 

이주용이 갈대 섬에서 깊은 감회에 빠져 있을 때,

소일초와 주소아는 주루(酒樓)를 들어서고 있었다.

별원에 방을 얻어 들어간 두 사람은 국수를 먹은 후 침상에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저녁 마다 있는 그들의 일과 중 하나였다.

[전에 색귀한테 들은 애긴데……여자는 억눌려 있을 때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하더군……]

술단지를 놓고 마주 앉자 마자 흘러나오는 소일초의 막되먹은 소리였다.

[말도 안돼는 소리하지마……내가 겪어보니까 답답하기만 하더라……]

[색귀말이 틀렸을 리가 없어……네가 잘못됐으면 잘못됐지……]

고개를 내두르는 소일초다.

[그럼 네가 한 번 눌려볼래? 갑갑한가 아닌가?]

[싫어. 계집애한테 눌린다는 것은 꼭 지는 것 같아서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역지사지(易之思之)라는 말을 잊지마.]

[그래도 내가 위에 있을 땐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던데……]

[그 기분도 없으면 힘들게 일해서 마누라 먹여 살릴 골빈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다 상부상조하는 거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일초가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럼, 나는 당연히 네 위에 올라갈 권한이 있는 거네. 네가 먹고 자는 모든 것이 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니까……]

주소아가 코웃음을 친다.

[그런 소리마, 그렇게 따진다면 나에게 물이라도 한 잔 준 놈은 몽땅 다 한 번 씩 태워줘야 잖아. 그럼 네 기분이 좋겠어?]

[그건 절대 안되지. 절대로……만약 그런 꿈이라도 꾸는 놈이 있으면 껍질을 홀랑 벗겨서 죽여버릴 거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이 소일초가 흥분하면서 소리친다.

[거봐. 겨우 몇 푼 안되는 돈 좀 썼다고 내 몸을 아예 말등처럼 오르내릴 생각을 하면 안된다구. 요즘은 내가 너한테 지니까 할 수 없이 봐주는 거지만……]

[…………]

[다음에 내가 좀 더 강해지면 그땐 내가 올라가서 네 그 하늘을 나르는 것 같다는 기분을 좀 느껴봐야겠어……]

끝없이 술을 퍼부어면서 계속되는 대화이기에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술이 올라 빨갛게 되었고,

입에서는 혀 꼬부라진 소리가 연방 나왔다.

소일초는 술단지를 내려놓았다.

[그만 자자……]

주소아가 휙 하니 술잔을 던져 탁자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놓으며 뒤로 벌렁 누웠다.

[이리와……]

주소아의 말에 따라 소일초가 그녀의 몸에 자기의 몸을 얹었다.

그의 얼굴이 주소아의 얼굴을 마주 보는데,

[단번에 외워. 정말 취한 것 같다구……]

주소아가 낮은 소리로 말한다.

[이건 내가 역근천골공(易筋遷骨功)이라고 이름을 붙여봤는데……]

주소아……

그녀는 정말,

조부인 혈기자의 혈통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무학의 기재였다.

생사보록의 무공을 깊이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어떤 절학도 한 번 보기만 하면 그 근본 원리까지 파악해 내곤 했다.

그리하여, 벌써 몇 가지의 괴상한 무공을 만들어 냈는데……

역근천골공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근육을 마음대로 바꾸고 뼈마저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는 괴상한 무공으로,

축골공이 있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다.

소일초는 가만히 그녀의 입을 주시하면서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겨우 그거야? 아주 간단한 것 같은데?]

주소아의 말을 다 듣고서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소일초가 소근거렸다.

[그건 네가 이미 무공의 큰 줄기를 꿰뚫고 있어서 그런 거야……이게 시시한 게 아니라구……]

[지금 한 번 해볼까?]

[응.]

소일초는 잠시 역근천골공을 운용하다가 뚝 멈추었다.

[큰일 날 뻔 했다.]

[왜?]

[옷이 다 찢어질 뻔 했잖아. 더 어둡기 전에 미리 큰 옷을 사다놓아야겠어.]

[안돼! 지금 밖으로 나가면 들통이 날 수도 있어. 점소이를 불러 시켜. 가장 좋고 예쁜 옷으로 두 벌 사오라고……]

그녀는 말을 다 끝 맺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

 

깊은 밤,

이상한 느낌에 주소아는 또 소일초의 장난이거니 하면서 눈을 부시시 떴다가 비명을 질렀다.

[끼악----!]

자기의 몸에는 여느 밤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은데……

굵직한 팔 하나는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고,

다른 커다란 손 하나가 자신의 전신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육척은 좋이 될 거한이 아닌가?

그것도 알몸으로……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비명은 채 다나오기도 전에 커다란 손에 의해 막혀버렸다.

[쉿! 나야, 나.]

맑은 눈에 덩치는 크다랗지만 얼굴은 여전히 수염하나 없는 동안(童顔)이다.

바로 소일초인 것이다.

[휴……깜짝 놀랐네. 이 바보야! 미리 말이라도 해야지.]

손톱을 세워서 소일초의 가슴을 팍 긁어버렸다.

그러나,

날 때부터 금강체(金剛體)인 소일초의 몸이 그 정도로 손상이 갈 리가 없다.

[어때? 감쪽같지?]

[시꺼. 사람 간 떨어지게 해놓고……]

소일초의 몸을 슥 훑어보는 주소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응……여기? 여기는 본래 그대로야. 아무리 해도 더 커지지 않던데……]

[아차……나한테는 그게 없어서 미처 그걸 크게 만드는 법문은 만들지 못했어……내건 다 되는 데……]

주소아가 실수했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네가 한 번 해봐!]

[그래, 잘 봐……]

정말 잘보고 배워놓으라는 듯이 눈길을 준 후 주소아는 소일초를 한쪽으로 밀쳐놓으며 누운 자세를 반듯이 했다.

젖빛으로 뽀얀 주소아의 알몸은 아직 완전히 발육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봉긋한 가슴 밑으로 펼쳐진 나신은 매일 보는 것이지만 소일초의 숨을 막히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일순간,

그녀의 조그마한 발이 다리와는 불균형을 이루면서 커졌다.

다리가 쭉 가늘게 늘어나더니 다시 살이 오르며 정상적으로 되어 가는데,

이번에는 잘록하던 허리가 스물스물 길어지며 상체가 한꺼번에 커지고 있었다.

목도 더 자라고 머리(頭)도 더 굵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손과 팔이 늘어나고 커졌다.

[이건 얼마만큼 하면 좋을까?]

[크게……무조건 크게……]

조그마한 유방을 보면서 주소아가 하는 말에 소일초의 주문은 무조건 크게이다.

[바보야, 적당한 게 더 이뻐.]

직접 손으로 크기를 갸름하면서 유방의 크기를 조절했다.

어느새 그녀는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 되어버렸다.

침상에서 커다랗게 자라버린 소일초를 보면서 성숙하게 변해버린 주소아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내 것도 크게 해줘……빨리……이건 불공평해.]

[안돼. 네 건 본래부터 나이에 맞지 않게 큰 거였어. 더 크면 여자가 견디지 못해.]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흥. 빨리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아마 괴로울 걸?]

주소아……

그녀도 뭘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아무튼,

아침에 주루를 나가는 한 쌍의 젊은 부부를 보고 점소이는 언제 저 손님들을 맞았을까 생각하며 어리둥절했다.

그는 그 부부가 맨발인 것을 보고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

 

소일초와 주소아는 여유만만하게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벌써 신을 사 신었다.

서로의 변한 모습에 킥킥대며 장난을 치면서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소일초의 그것도 과연 커졌을까?

안보니까 모르는 일이고……

 

[지금 쯤, 그 미행자는 사라진 우리를 찾느라고 허둥대고 있겠지?]

[히히……어쩌면 우리한테 와서 어린 꼬마 둘 못봤냐고 물어볼지도 모르지……]

소일초가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누가 우리 이름을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그냥 주소아, 소일초 하고 대답할 수는 없잖아.]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지. 소일초, 주소아라고 해야지……윽!]

주소아가 소일초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꽉 친 것이다.

[좀 진지해 질 수 없어? 덩치는 뭐 만해가지고……]

[좋아. 씨……그럼 나는 무적검(無敵劍)이다.]

[그럼 난 승무적(勝無敵)이야.]

[그럼 난 무적검 안해. 승소아(承小阿)라고 할 테다.]

다시 주소아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쳤지만 허공인 듯 아무 감각이 없었다.

소일초가 이환공을 일으키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제길……무적검을 이기는 승무적이나 주소아를 밤마다 올라타는 승소아나 그게 그거지……]

[알았어, 무적검(無敵劍)해. 나는 불패도(不敗刀)할 테니까. 대신……]

[…………]

[내가 양보했으니까, 다시는 승소아니 뭐니 하는 소린 꺼내지도 마! 남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주소아의 말투가 약간은 달래는 듯하다.

[그래도 사실인데……]

[그래도 안돼!]

주소아는 소리를 꽥 지르고 소일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삼성무림청을 뿌리 채 뒤흔들어 버릴 수 있는 일침!]

[무슨 계획인데?]

주소아의 음성도 들릴락 말락 낮아졌고,

[이번엔 직접 삼수(三手)를 상대하겠어.]

순간,

자기보다 커져 버린 소일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걷고 있던 주소아의 몸이 제자리에 딱 멈췄다.

[무……무슨 말을……]

하나,

오히려 어른의 얼굴 만큼 커진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짓는 소일초……

[그 정도로 놀라긴 뭘 놀래. 이제 삼수와 직접 붙어 볼 때도 됐지.]

우뚝!

석상처럼 한 곳에 멈춰버린 주소아,

[좋은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소일초의 눈을 염려스러운 듯이 빤히 쳐다보며 물어본다.

[없어. 그냥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무식하게 대결해 보는 거지.]

[말도…안돼……!]

주소아의 떨리는 외침이,

휘이이이……

차가운의 북서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한 곳에 굳은 주소아는 도대체 움직일 줄 모른다.

다만 별빛을 향한 그녀의 두 눈에,

반짝반짝……

눈물이 고여 넘친다.

그녀의 몸에서 겨우 들릴 정도로 낮은 휘파람소리마저 잠잠해 진 듯 한데,

(이렇게 하는 말은 장난이 아니야……정말로 싸우려고 하는 거야.)

소일초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무적검이잖아……]

[바보야……내 생사보록 원래 주인이 누군지 알아? 바로 그들, 할아버지의 못된 제자들인 삼수(三手)란 말이야……고모부도 당해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으셨단 말이야.]

[나는 검마의 진전을 이은 유일한 제자야. 일초무적이라구.]

이어,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겨가는 그의 등에 희미한 겨울 햇빛이 내렸다.

 

***

 

그리고,

소문……

무림에 전례없던 소문의 바람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신행마동이 삼성무림청의 수뇌부에 도전장(挑戰章)을 냈다……

------일대일(一對一)의 결투를 원했다……누구도 참여할 수 없는……

------장소는 화산(華山)의 옥녀봉(玉女峰)이나 날짜와 시간은 알 수 없다……

 

소문,

이처럼 무림에 전례(前例)없던 열 세 살 짜리 꼬마와 한 문파의 수뇌와의 결투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중원천하의 모든 시선은 이들의 대결에 초점이 모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휘이이잉……

대지(大地)는 부는 차가운 북풍(北風) 도 일었다 자는데……

무림인의 사이에 분 이 소문의 바람은 자는 법도 없이 더욱 거세져 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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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七 章

 

          記憶의 端緖를 잡다.

 

 

 

정적(靜寂),

소름이 끼치는 정적의 소용돌이였다.

간간히 솟는 불길도 더하여 스러지고……

처절히 터지던 비명과 신음도 밤의 정적에 휩싸여 갔다.

푸른 숲의 계곡,

이곳에 몰아닥친 처절한 피의 혈전은 일단 그 끝을 맺은 셈이다.

바로 이 푸른 숲, 푸른 성의 녹왕전에,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울 소년과 소녀……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조용히 서있는 검고 흰 날개달린 괴물들……

그렇다.

소일초와 주소아, 그리고 비성성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금,

그들의 앞에는 녹림맹의 맹주인 황녹천을 비롯하여 삼혈단과 싸웠던 녹림인들이 희열이 감도는 낯빛으로 서있다.

피투성이의 처참한 이들 옆으로……

도봉과 홍건개가 처참했던 혈전에 치를 떨면서 서있었다.

시신(屍身)의 숲이되고……

피의 혈하(血河)가 불에타 말라버린 이 푸른 숲……

그 장엄한 푸른 숨은 화약과 축융화탄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웠던 흔적을 찾아볼 수 조차 없다.

그리고,

개방의 일천 인물들과 소림백팔나한 또한 벌써 철수시킨 듯,

그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짙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이 정밀한 정적의 푸른 계곡……

휘이이잉---------!

잠시 고개를 숙이던 바람이 다시 힘을 더해 불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시신의 숲으로 변한 처참한 푸른계곡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의 귀에는 오직,

[휘이이 휘이……]

바람소리에 섞여 주소아의 몸에서 나는 휘파람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불덩이를 내뱉는 듯한 음성이 소일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두들 수고했다.]

[…………]

[…………]

[당신들의 투쟁으로 이제 장강의 삼성무림청은 지닌 힘의 팔할은 잃게 되었을 것이다.]

죽어간 자들의 처참한 운명에 가슴이 아파서인가? 아니면 부서진 푸른 계곡이 아까워서인가?

파르르르……

황녹천의 푸른 면사속의 눈이 무섭게 떨고 있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비록 대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그의 심적인 고통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리라.

[신행마동께서 그와 같은 계책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늦게나마 감사드리오……]

핏물이라도 쏟아내는 듯한 육합전승의 신비한 음성이 다시 정적을 깼을 때,

부르르르……

한 편에 서 있던 주소아의 아름다운 몸이 강풍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떨었다.

그리고 말……

[이처럼 사방에서 회오리치듯 들리는 말……핏물이 떨어지는 듯한……차가운 어투……언젠가 들어본 것 같아……아아 머리야……!]

찰랑……찰랑……

그 어떤 여인보다 고결하고,

그 어떤 여인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주소아의 두 눈에 괴로운 신음과 함께 맺혀오는 눈물……

[아아……생각이 안나……아무래도 생각이 안나………]

실로,

떨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도리질 하는 는 주소아의 태도는 애처롭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순간,

도봉과 홍건개의 얼굴에 경악에 찬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벌컥벌컥……

[끄윽……저 여자는……갑자기 세상이 거꾸로 보이기라도 한 것인가……젠장……갑자기 웬 발작은?]

홍건개는 단숨에 한 홉 가량의 술을 목구멍에 붓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소일초에서 부터였다.

[너……이제 막 기억을 찾기 시작했구나……황녹천의 말 때문이지……그렇지?]

[아…몰라……비슷한 소리를 언젠가 들은 것 같아……]

음성과 동시,

소일초의 몸이 번뜩이더니 어느새 황녹천의 맥문을 쥐고 있었다.

오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주소아가 삼 년 동안 잃었던 기억을 일부나마 희미하게 되살리려 하다니……

중인들은 갑작스런 두 사람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황녹천은 주소아가 원래 알고 있던 신분(身分)이었단 말인가?

주소아가 어떻게 황녹천의 육합전성에서 과거의 기억을 엿보았단 말인가?

어쨌거나,

갑자기 소일초에게 맥문을 잡혀 전신을 솜뭉치처럼 늘어트리는 황녹천,

이때 돌연,

슷……!

[맹주께 무례하지 말라!]

흰 빛 그림자를 빛살처럼 그려내며 소일초의 몸을 공격해 가는 녹림사존자와 녹림맹의 고수들……

[물러서!……난 지금 급해!]

소일초의 음성에는 다급함이 있었고, 그의 철검이 말과 함께 발출되었다.

순간,

그의 철검에서 기이한 기류가 흘러나와 덮쳐드는 녹림사존자와 다른 녹림인을 일제히 휘감아버렸다.

이가 빠져 검은 쇠몽둥이 같은 검이 빙글 돌면서 한 방향을 가리키자 검의 기류에 휘말려 있던 그들은 가랑잎처럼 그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급한 가운데 소름이 끼치도록 싸늘한 신행마동 소일초 음성,

[누구든 더 이상의 접근은 용서치 않는다!]

그의 철검이 이 장 앞의 대리석 바닥에 긴 금을 그었다.

[…………!]

[그길 넘어오는 즉시 목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순간,

소일초의 눈을 마주하고 황녹천의 전신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듯 무겁게 고개를 내젖던 황녹천이 입을 열었다.

[본 맹주가 대체 무슨 잘못을 또 저질렀다는 것이요?]

황녹천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는 속에 퍼부어지자,

[그 소리 말고……아까 그 소리로……]

소일초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황녹천은 기가 막혀 몸을 떨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늦게나마 감사드리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까하고 똑 같이 해! 빨리……]

믿지 못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홍건개와 도봉의 표정이었다.

하기야,

중원제일의 신비인이자 녹림맹주인 황녹천이 소일초의 단 일초를 피하지 못하고 제압당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감사드리오……

……감사드리오……

……몰랐소이다 감사드리오……

 

소일초는 괴로움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아름다운 주소아의 반응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이제 그만해……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

[이제 반응이 있었으니까 곧 기억을 되찾게 되겠지……]

[정말 괜찮겠어?]

소일초가 염려스러운 듯이 물어본다.

[응……]

찰나,

황녹천의 섬약한 몸이 또 한 번 격렬히 떨고,

[비키시오……]

[…………]

[아직도 내가 더 필요하오?]

황녹천은 자신의 맥문을 쥐고 산악인 양 버티고 서 있는 자그마한 신행마동 소일초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마자,

[그래……고마왔어……손목이 부드럽군……]

마른나무가 타는 듯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며 소일초가 휘적휘적 주소아의 옆으로 돌아가버렸다.

녹림맹의 상하가 모두 치욕에 몸을 떠는데……

갑자기,

짝------!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아이쿠……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주소아로 부터 뺨을 맞은 소일초가 소리쳤다.

[꼭 그렇게 떠들어서 내가 골빈 여자라는 걸 온데다 선전해야 해?]

[나는 다만 네가 걱정이 돼서……]

그리나,

[다시 한 번 이따위로 하기만 해보라……]

주소아는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

홍건개와 도봉의 시선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 피어나는 회의와 불신-------

[아미타불……아미타불……]

도봉은 연이어 불호를 터뜨리고……

[제기랄……이런 제기랄……]

홍건개는 개소리를 내뱉다가는 벌컥벌컥 호로병을 거꾸로 처박는다……

무림이 언제부터 이렇게 애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주소아……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씩씩대고 있는 소녀,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건강한 붉은 혈색이 감돌고 있고 별빛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어디에선가 가늘고 맑은 휘파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소일초로 말미암아 중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 아름다움과 환상적인 분위기……

인간의 영혼을 빼앗는 극치의 아름다움이 환한 아침 창문의 햇살처럼 드리워져 있다.

[아미타불……아미타불……]

[우라질……여우일 테지……빌어먹을 ……정신은 말짱한데 헛것이 보이다니……제기랄……]

도봉과 홍건개의 시선은 더 이상 치켜떠질 수 없을 만큼 치켜떠져 주소아의 한 몸에 굳어 있었다.

아니, 그들의 몸조차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니……

이 순간……

[당신들은 부상자의 치료도 하지 않을 작정이야!]

중인들이 주소아를 바라보며 넋을 빼고 있자 영문을 모르는 화가 치밀어 오른 소일초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에 도봉 등이 펏득 자신들의 실태를 깨닫기는 했으나 여전히 주소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소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어찌할 바를 몰라 소일초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약간의 놀라움과 당황을 섞어내던 주소아의 얼굴빛이 다시 침착하게 고요로 치장되었다.

그리고,

홍건개와 도봉을 향한 힘이 가득 실린 음성,

[이 따위 인물들이니까 황녹천 따위의 꼬리질에 죽을둥 살둥 정신없이 쫓아왔겠지……내 말이 틀렸어?]

원래의 음성으로 되돌아온 주소아의 말에도,

도봉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두 손을 합장하여 물었다.

[아미타불……소시주는 대체 누구시오?]

[…………]

[그리고 대체 조금 전에는 어찌된 일이시오?]

순간,

소일초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주소아에 대한 것은 나를 거쳐서 물어야 돼……!]

[아미타불………]

[우라질……중 놈이 별걸 다 알려고……제기랄……]

[아미타불……]

[이름은 주소아고 천하제일인의 손녀이시며 장차 내 마누라가 될 사람이라구…]

소일초는 화가 나서 생각도 않았던 말까지 해버렸다.

그러나,

그 말의 파장은 아주 컸다.

먼저 주소아의 얼굴이 발개져서

[너……너……]

소리를 연발했으며,

도봉과 홍건개, 그리고 황녹천을 비롯한 녹림인들은 천하제일인의 손녀란 말에 눈이 둥그레 질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혈기대종사의……]

술이 확 깨는지 홍건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알았으면 이제 눈 돌려. 확 뽑아버리기 전에……]

주소아는 소일초의 행동에 기가 막히는지 아무소리도 않고 쳐다만 보았다.

[…………]

[…………]

[지금은 그분이 이 근처에 와 계실지도 몰라. 아마 이 꼴을 본다면 내일쯤 소림사에서 맨대가리는 하나도 볼 수 없게 될 지도 모르지……]

펏득,

홍건개와 도봉의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렀다.

혈기자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바로 장강 변에 있던 무림사대 세력 중의 하나였던 등천마교가 그의 손에 의해 닭 한마리 남지 않고 몰살당한 일이 불과 얼마 전인가?

[아미타불……무슨 소리를 ……]

벌컥벌컥……

[우라질……눈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빌어먹을……]

이때,

소일초의 진짜같은 거짓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백인장에 고수가 없어서 우리끼리만 내보낸 줄 알아?]

[……?]

[다 천하제일인이 암중에 지켜봐 주시니까 안심하고 내보낸 거지……어떤 부모가 애 혼자서 무림에 돌아다니게 하겠어.]

진짜, 진짜같은 거짓말이다.

혈기자는 소일초도 다시 마주칠까 싶어 겁나는 젊은 형씨다.

혈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사부인 검마도 얼마나 극찬을 했던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혈기자에게 감탄하지 않았던가?

단지 소일초가 그에게서 배운 몇 가지 무공만 보고서도……

천하의 소일초도 그 젊은 형씨한테는 도저히 자신이 생기지 않는 터였다.

그러나,

거짓말인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조리가 있었다.

소일초가 도법을 쓰지도 않으면서 무공이 극강한 것과 주소아 또한 신비하기 짝이 없는 무공을 구사하는 것이 모두 혈기자에게 직접 배워서 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혈기자와 관련 있다면 개미 한 마리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보신(保身)의 최고 술법이다.

[대종사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신지……]

[너보다 더 젊어지셨어. 너들 둘 특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소일초가 도봉과 홍건개를 가리키면서 톡 쏘듯이 말하자 그들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소아! 이제 가자. 제기랄……좋은 일 하고도 기분이 나빠서 이거 원……성질나는데 녹림맹이고 구파일방이고 확 엎어버릴까 보다.]

주소아의 손을 야무지게 쥐고서 뿌연 안개에 휩싸이며 어느덧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음성,

소일초의 입에서 대는 대로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던 음성,

사람은 가버렸지만 그 음성이 남긴 여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울리고 있었다.

혈기자……

그의 이름을 들고 나오는 데야 모욕을 당했던 수치를 당했던 더 이상 따질 수 없다.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되는 무학의 절대종사 혈기자,

홍건개와 도봉의 몸이 가늘게 떠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오……아미타불……단지 백인장의 말썽꾸러기인 줄만 알았던 신행마동이……혈기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니……)

(빌어먹을……어리기는 하지만 용(龍)새끼가 아닌가……그것도……인간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막강한 배경을 지닌……)

참담하게 꾸겨진 얼굴로 생각을 되씹는 그들이었다.

(으으……정말로 혈기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니……고수가 암암리에 보호를 하리라 예상하기도 했었지만……전혀 발견할 수 없었는데……혈기자였다니……)

황녹천의 면사에 가려진 얼굴에서 식은땀이 팎팎 쏟아지고 있었다.

(우라질……어처구니없는 계획으로 그 어마어마한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몰살시켜버린 놈……빌어먹을 왜 내 가슴이 이렇게 타는 듯하지? 왜 내 가슴이 이리도 뛰는 거지……제기랄……제기랄… 그 계집애가 너무 이뻤어…)

벌컥벌컥……

홍건개는 반은 입으로……

나머지 반은 온몸으로 마셔대면서 붉게 물든 동공을 주소아가 서있던 곳에 퍼부어 댔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꼬마 계집애가 아닌가……빌어먹을……그런데 왜 가슴이 두근거려…? 빌어먹을……)

어떤 대답도 없이……

그저 놀란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던 도봉과 홍건개 두 사람,

돌연,

그들은 황녹천을 향해 신중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의 비밀 중 일부는 그들의 눈에 드러났소……우리도 만약을 대비하여 당신과의 거래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소…당신도 조심하시오…우리들은 영원히 당신을 모르는 것이오.]

[…………]

벌컥벌컥……

[젠장할……소림의 망나니……네놈도 나처럼 취해버리고 말았군……젠장할……]

[아미타불…… 당신을 믿고 떠나겠소……]

짙은 감정의 빛을 던지던 도봉이,

돌연, 선 그 자세로 길게 몸을 뽑아 올렸다.

수수수수……

멀리 서 터오는 여명에 섞이듯 순식간에 연대구품으로 날아가는 도봉……

순간,

홍건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 눈빛은 한동안 황녹천을 지켜보더니……

벌컥벌컥……

술을 미친 듯이 들이마셨다.

[빌어먹을……이 놈의 가슴……우라질……이 놈의 심장……끄윽……할 수 없지……할 수없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슈슈슈슈--------!

그의 몸 역시 저 황혼구만리에 섞여 날았다.

순간,

[울컥……울컥……!]

황녹천이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냈다.

[맹주! 맹주……]

녹림사존자와 녹림인들이 놀라 달려들 때,

황녹천은 이미 힘겨운 걸음으로 녹왕전 안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섞여나는 선혈과 함께 흐르는 음성,

[괜찮아요……나는……]

[…………!]

그는 소일초에게서 받은 감당할 수 없는 수모로 인해 심맥의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도봉과 홍건개의 매정한 태도에 더욱 충격을 받아 피를 토하고 만 것이다.

중원제일의 신비인,

대체 그와 구파일방의 젊은 기재들과는 어떤 거래가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제1권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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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六 章

 

           불타는 푸른 숲, 무너지는 계곡

 

 

 

소일초의 그 말에 득도한 고승같은 청년승 도봉의 얼굴마저 무참히 구겨졌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당금 무림의 십이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고, 사문(師門)으로 따지자면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은 눈이 둥그레 졌다.

[너희들 중에 누가 내 사문과 스승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소일초의 목소리는 또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데……

[우라질……네 사문이야 백인장이라는 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끅……]

[젊은 거지! 백인장은 내 집이다. 모르면 아예 입 닥쳐라.]

소일초는 허리에 걸려있는 시꺼먼 철검을 손에 잡았다.

[백 육십년 전,이 철검을 사용하신 분께서 바로 나의 스승이시다. 그 분은 소림사의 기재라 불렸던 우광대사 보다도 배분이 높았으며 천하제일인이라는 혈기자 보다도 배분이 앞선다.]

[…………]

[누가 나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이 있는가? 무림의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사승과 배분이 나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땡초와 거지는 도무지 모른단 말이냐?]

그의 말은 준엄했다.

그른 말 한 마디 없었다.

짝짝짝-------!

[정말 훌륭한 일장연설(一場演說)이었어. 저 중 얼굴표정 좀 봐……]

주소아가 손뼉을 치면서 칭찬한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중인들의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인데……

도봉이 입을 열었다.

[대체 그 스승이라는 분이 누구시오? 우리 소림사와도 관련이 있소?]

[관련? 물론 있지. 자 여기 와서 공손히 받아가라구. 안 그래도 언젠가 소림사에 들르려고 생각했는데 잘됐군.]

소일초는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내 생각이지만, 이건 던져서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야. 공손히 절하고 받으라구.]

도봉이 반신반의 하면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소일초의 앞에 가서 합장을 하면서 주머니를 건네 받았다.

물러서서 주머니를 열어본 도봉은 깜짝 놀랐다.

고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선종의 본산 소림사에서 자란 그도 주머니 속에 있는 것 처럼 굵고 큰 사리(舍利)를 본 적이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사리들이 은은한 서기를 발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것은 어느 분의 사리입니까?]

도봉의 말투가 바뀌었다.

소일초는 빙그레 웃었다.

[우광대사, 전 소림사의 장경각주였던 분. 그분은 큰 깨닳음을 얻으신 후 남황에서 입적하셨지……내가 그분을 화장시켰고. 한데 그분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내 스승님이셨지……]

[그분도 불가에 몸을 담으신 분입니까?]

[장장 일백오십 년을 참선과 고행으로 지내신 분이지……]

사부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소일초의 눈에서 주루루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황녹천이 어떤 재주가 있기에 소림사와 개방을 이처럼 떡 주무르듯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황녹천, 청년승 도봉, 그리고 홍건개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들은 지난 삼 년동안 삼성무림청을 방관만 해 왔는데 어째서 내가 나서자마자 녹림맹을 도와 그들과 싸우겠다고 일제히 나섰을까?]

[그……그건……]

도봉이 말을 더듬으며 황녹천을 바라보았다.

[뻔한 걸 뭘 물어봐……]

주소아가 얼굴을 돌려 황녹천을 쳐다보았다.

[중원제일의 신비인 황녹천은 아무렇게 몸이나 굴리는 계집이야!]

꽝-------!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중원제일의 신비인 녹림맹주 황녹천이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는 계집이라니?

중인들은 가슴이 뻥 뚫린 듯 놀랐고,

황녹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분이 높은 젊은 중놈이나 거지가 아쉬운 게 뭐가 있겠어? 오직 하나밖에……]

도무지 어린계집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같지가 않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사씨 자매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주소아의 신분을 모른다.

단지,

소일초와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신분일 거라는 정도로 짐작할 뿐이었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어? 구파일방이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오직 자기들만 잘났다고 콧대 세우는 그들인데 여자때문에 움직이겠어?]

소일초의 반문이었다.

[가장 나쁜 자들은 원래부터 선한 자들의 탈을 쓰고 있지.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입으로 떠들지 않고 묵묵히 행동하는 고모부같은 사람이야!]

주소아는 말을 빙돌렸다.

[내 말이 완전히 옳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구파일방과 황녹천 사이에 남에게 밝히지 못하는 은밀한 거래가 있겠지……]

[다른 말은 몰라도 이번에는 네 말을 못 믿겠어. 너는 어제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거야.]

소일초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도봉 등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어린애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마. 하지만, 오늘 당신들도 더 이상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해. 어쩌면 다음 공격목표로 구파일방이 될 수 도 있어.]

소일초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자들의 귀에는 더욱 우뢰와 같은 힘을 담고 들려오는 충격을 느낀다.

그런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적지 않은 수고를 해서 일을 이만큼 꾸몄어. 한데 지금에 와서 당신들이 본인이 하는 일에 관여하려 든다면……또한 그것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곧 내 신념을 깨고 믿음을 깨는 일이 아니겠어?]

순간,

벌컥벌컥……

홍건개가 호로병의 술을 한꺼번에 쏟아넣듯 거칠게 들이켰다.

[제기랄……지금 이 자리에 화산(華山)의 그 놈 주둥아리가 왔어야 말 상대가 되는 것인데……]

벌컥벌컥……

[우라질……이 소화자 술만 먹지 않았어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낼 것인데……빌어먹을……에이 빌어먹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홍건개의 호로병을 감싸며,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별빛은 더욱 영글고 있었다.

쿠르르르……

쿠쿠쿠쿠……

계곡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 치는데……

청년승 도봉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그 신념과 믿음은 신행마동께서만 지닌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그대들은 그대들의 믿음대로 해보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본인의 산통을 다깨뜨리던지 말든지?]

[흥, 황녹천도 무엇으로 구파일방을 구워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구파일방이 녹림맹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군.]

주소아가 쏘듯이 하는 말이다.

[아미타불……좀더 신중한 판단을 바라오……]

[에이……끄윽……제기랄……]

이 순간,

소일초의 묵직한 음성이 달빛을 뚫고 다시 흘러나왔다.

[우스운 일이야……]

[…………]

[근본적으로는 황녹천이 삼성무림청을 멸망시키겠다는 내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문제겠지. 그래서 그들의 주력이 몰려오자 부랴부랴 최후의 수단으로 당신들을 불렀을 테고……]

정확한 추리였다.

[…………]

[그것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어?]

[아미타불………]

[끄윽……빌어먹을……]

소일초의 뼈가 맺힌 말에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의 안면에 가는 분노가 서려났다.

하나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쏟아져 나오는 소일초의 음성,

[너희들은 우선 나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나이 살 몇 더 있다고 감히 나 신행마동을 우습게 대했다.……기회다 싶어서 나를 핍박하려 했다.]

문득,

청년승 도봉의 깊은 동공에 파릇한 분노의 광망이 일었다.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소.]

[억지라…… 언제나 곤란할 때는 모든 것을 억지라고 돌려버리는 것이 소림사의 신공인가?]

그리고 한 순간,

청년승 도봉이 단정짓듯이 음성을 흘려냈다.

[아미타불……분명히 말하겠소만 마동……]

[…………]

[아무 대책 없이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끌어들인 처사는 명백한 잘못이었소.]

[…………]

[그리고 빈승과 홍시주는 오늘밤 구파일방의 힘으로 그들을 녹림맹에서 조용히 물러가도록 할 것이오.]

홍건개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탄식하듯,

[꺼억……끅……더군다나 오늘밤의 격전은 절대……없소……]

[…………!]

[우라질…… 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꼭 피를 흘리겠다는 것이오……우라질……구파일방의 이름때문에 적들은 물러나게 될 것인데……]

순간, 소일초의 눈에서 파르르 불꽃이 분노로 일었다.

[구파일방의 온 건 바로 그 때문이었군.]

소일초는 격분하는 내심에 또 한 바탕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또한,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분노를 토하는 듯한 음성……

[그대들이 나에게 이토록 친절히 충고하는 것도 백인장주인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서 인듯하군……]

소일초는 피가 맺혀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발출 될 듯이 쥐어진 철검,

[좋아……더이상 본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

터질 듯 긴장해 가던 분위기가 소일초의 양보로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

[아미타불……무엇이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은 꼼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시가 지난 다음에는 구파일방의 이름으로 협상을 하든 위엄을 보이든 마음대로 해라.]

음성은 낮고 들릴락 말락 했으나,

소일초의 그 음성엔 그 누구도 거역치 못할 굳강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홍건개와 청년승 도봉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우라질……어쩔 수 없군……좋소……좋아……제기랄……그때가지 기다려 주지……]

 

× × ×

 

 

어둠이 꺼꾸로 부침하는 심야,

드디어 자시였다.

휘이이잉!

밤바람이 미친듯이 푸른 숲의 계곡 사방 질타하고,

솨아아아아……

휘르르르릉……

숲은 성난 파도처럼 미친 듯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바로 이 미친 듯한 자시의 야공(夜空)을 찢어발기며……

똑똑똑------!

마치 뇌성벽력과 같은 목탁소리가 천지를 질타했다.

동시에,

이 목탁음이 신호라도 되는 것인가?

번뻑……번쩍……

막막한 어둠 뿐이던 푸른 계곡의 호로병같은 골짜기 여기저기서 현란한 불꽃이 일어나더니……

꽝--------꽈꽝-------

쿠꽝---------

오오……

엄청난 폭발음이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로 터져 나오고,

그 현란하던 불꽃은 조만간 엄청난 불길로 화해 푸른 계곡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엄청나게 치솟지 않는가?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장엄한 광경을 보라!

혈의인(血衣人),

녹림맹 푸른 계곡을 까마득히 메우며 바람처럼 날아들어 오든 수백 수천 척의 혈의인들,

불의 방벽……

그 충천하여 터지는 화기(火氣),

일시에,

이 거대한 녹림맹은 이 엄청난 화광에 타고 메말라 한줌의 잿가루만 남아날 것 같았다.

한데 일순간,

슛슛슛______ !

혈의인들이 일제히 장력을 격출하여 화염의 완전포위를 뚫고서,

마치 화살이 꽂혀 오듯 녹림맹을 향해 질풍처럼 쇄도해 오는 것이었으니……

만일, 이대로 이 어마어마한 혈의인의 무리가 녹림맹의 본체인 푸른 성에 접근한다면……

이 녹림맹은 그대로 시산혈해로 가득차고 말리라.

그러나,

이런, 염려는 즉시에 사라졌다.

슈_____슛!

꽈꽈꽝_________!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녹림맹의 입구인 호리병 같은 계곡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으아아악------

으아악--------

화르르륵……!

화아아확!

이 푸른 숲의 입구는 참혹한 비명과 무너져 내리는 바위절벽,

그리고 마른 장작에 기름을 부어놓은 것처럼 엄청난 화광을 내뿜고 타기 시작했다.

녹림맹을 향해 화살처럼 달려오던 혈의인들,

그리고 번지는 화광,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시체들……

일시에 녹림맹은 염부의 불꽃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길과……솟아오르는 검은 연기와……

화약냄새와 시신이 타는 노린내……

이 모든 것에 녹림맹의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 쪽의 절벽위에서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일초와 주소아의 아리따운 얼굴에,

씨익!

검은 빛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말,

[됐어……본인은 이제 당신들 모두가 이곳에서 무얼하든지 상관하지 않겠어.]

순간,

흠칫!

그를 향한 수백 쌍의 눈빛이 가는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녹천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은 이미 삼혈단의 몰락을 보고 있는지라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음을 느꼈다.

동시에,

슈슈슛!

그들은 벼락같이 몸을 날려 미리 준비해 둔 연들을 이용하여 푸른 성으로 날아내렸다.

바로 이 순간,

쿠쿠쿵!

계곡이 통째로 뒤집히는 엄청난 진동을 겪는가 싶더니……

오오……

도저히 그 크기를 한눈에 담아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불꽃이 계곡의 입구에서 부터 계곡 절반을 장악하며 치솟지 않은가?

동시에,

우르르릉……

꽈꽝----쿵쿵쿵---------

계곡의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 막히고 수 백 수 천의 혈의인들이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은 다름아닌 삼성무림청의 삼혈단들이었으니……

혈향단-!

붉디붉은 혈의에 흰색 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복면에 그려진 한 송이 붉은 매화(梅花)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더불어……

향기…… 매화의 향기가 가득히 피워오는 듯한 착각이 들고……

그 속에 소름이 끼치는 살기를 피워내는 인물들이었다.

혈살단-!

그들은 혈의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검은 복면에 그려진 아수라상(阿修羅像),

피와 검은 지옥의 음기와……

냉혹비정한 기운을 광휘처럼 피워올리는 자들이었다.

혈혼단-!

이들은 혈의에 얼굴 또한 혈의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혼(魂),

혼을 부르는 저주의 악령들인가?

피리리……피리리리리……

삐리리리……삐리리리리……

그들은 피리가 아닌 기이한 악기를 쉴 새 없이 불어대고 있었는데,

그 악기 소리를 듣는 순간 영혼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은 혈의복면에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마(魔),

바로 이 한 자였다.

수수수수……

슷스스스……

소리없이 밀려들던 이 악령의 피그림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絶頂高手)인 듯 몸놀림이 흐르는 바람처럼 날렵했다.

그러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화약으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당한 후에,

연이어 떨어져 내린 축융화탄으로 말미암아 계곡의 앞부분이 무너지면서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폭발과, 화염……

그 와중에서도 삼혈단의 일부고수들은 살아서 악령처럼 녹림맹으로 돌진했으니……

파츠츠츠____츳츳_____ 츳츳!

쌔애애______액!

충천하는 화광 속에 난무하기 시작하는 검장도권(劍掌刀拳)의 소용돌이!

[크아아악!]

[크_____악!]

비명이 천지(天地)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후리리리_____릭!

시퍼런 살광(殺光)과……

검은 살기(殺氣)와……

핏빛 잔광(殘光)이 엄청나게 소용돌이 치는 속에,

간혹 천지번복의 굉음이 잇달아 터지고,

달빛아래 희미한 어둠은 부르르르 전율을 일으켰다.

거기에다,

하늘로 치솟아 난비(亂飛)하는 무수한 나무들과 불타는 숲……

콰아아아아……쾅……

바람도 불을 만나 더욱 미친듯이 불어대는……

이곳은 녹림맹이 아닌 아수라 광천귀역!

번________쩍!

콰콰콰______쾅!

천지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파공성을 타고,

[으아아아아_________악!]

[크아아아아_________악!]

참담한 비명은 끝없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폭음이 잦아들고 대신 허공에서 까마득히 몰려 내리는 구파일방과 녹림맹의 고수들……

조용하고 은밀한 계곡에 위치해 있던 아름다운 푸른 숲의 푸른 성(城),

이제 이것은 충천하는 화광과……

난비하는 검장도권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 사비팔산(四飛八散)되어 나가 떨어지는 시신(屍身)들 만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아수라 귀역으로 변했을 뿐이다.

한편,

이미 장강의 강변으로 피신한 황녹천과 그 수천 수하(수河),

그리고,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가 이끄는 대소림의 인물들과 개방의 일천인물들……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에 찬 시선으로 이 처참한 혈전(血戰)에 동참하고 있었다.

문득,

덮쳐드는 혈의인을 향해 일 장을 퍼부으며,

하늘처럼 맑은 시선에 침울한 기운을 피워올리던 청년승 도봉이 중얼거리듯 말을 흘려냈다.

[아미타불……어찌……이런 처참한 살겁을……]

[끄억……컥……일찍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할 손가……우라질……!]

이 순간,

황녹천의 눈빛은 남다르다.

하기야 그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왔던……

그의손에 의해 더욱 키워지고 다듬어진 푸른 성인가?

그것이 황폐하게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는 이 마당에 어찌 만감(萬感)이 교차하지 않으랴?

(아아……본인의 푸른 숲과 푸른 성이 이렇게 …!)

그러나,

황녹천의 참담한 기분이 어찌 죽어가는 수하들을 지켜보는 사은상의 심정에 비길손가?

사은상……

절벽위에서 소일초 등과 함께 이 참혹한 혈전을 지켜보는 그의 두 눈에는 쉬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느새 깨물었던가?

그녀의 파리한 입술에 선혈이 가득하다.

파츠츠……츳츳……츠츠……

[크아아아악!]

무모할 정도로 장렬히(?) 아니면 흉악히(?) 몸을 던진 혈의인하나가 형체도 없이 녹림인들의 손에 찢겨 날아간다.

[으아______악!]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사은상의 몸이 부르르르 떠는가 싶더니,

[쿨룩……쿨룩……]

그녀는 한덩어리의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입술에 저미는 선혈과,

안타까워서……

너무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저 눈물과……

문득, 그런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후휘휘……

희디흰 백의를 바람에 표표히 날리고 있는 천상의 옥동옥녀 같은 두 사람,

소일초와 주소아,

오늘의 참극을 계획한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서운 꼬마들이다.

이때 돌연,

참담함과 눈물로 젖어 있던 사은상의 동공에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회상(回想),

며칠 전, 사옥상과 함께 주소아의 손에 어처구니없이 잡히고, 다시 고찰에서 도망쳤다가 소일초의 저녁값으로 잡혀온 일들이 이 참혹한 순간에 회상의 수증기로 피어오른 것이다.

(그때 옥상이가 저 꼬마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이 되었을 까? ……아니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저 꼬마들은 다른 수단으로 똑 같은 결론을 만들어 냈을 거야………)

지금,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소일초도 사부 구멍뚫린 시신을 화장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소일초,

그의 남만 오지에서의 삼 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비록 다시 돌아갈지 안돌아갈지 기약 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그의 마음은 거목의 숲에 있는 검마의 동굴에 머물곤 할 것이다.

삼 년……

사부와 함께 보냈던 힘겨웠던 세월,

의미도 모르는 참선을 강요당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 몇 날이며 해도 해도 깨우쳐 지지 않는 검마의 독문 무공 일초검공을 반복하며 얼마나 많은 꾸지람과 구박을 맞았던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지리한 생활동안에 친구가 되어주었던 비성성들,

그들이 오늘 삼혈단을 초토화 시킨 주역들이다.

소일초의 두 눈에 굳은 기개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막 돌아와 그의 곁으로 내려서있는 그 비성성들을 주시했다.

한데,

문득, 소일초가 나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술과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마……]

순간,

십 수 마리의 비성성들이 끽끽 거리며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불꽃, 폭음, 그리고 인간들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늘게 떨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주소아가 소일초에게 술병을 건네 주었다.

[두려우면 멀리가서 놀다가 나중에 우릴 찾아와.]

동시에, 회색동공의 비성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날개를 펴고 올라갔다.

[이제 대충 끝난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싸움이야. 아마도 다시는 이런 처참한 장면을 볼 일이 없겠지……]

[어쩌면 지금이 시작일지도 모르지. 삼성무림청이 삼수가 만든 집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뿌리를 뽑아버리겠어.]

소일초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약속이나 지켜야 겠어.]

주소아가 눈물과 자신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사은상과 사옥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언니들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 보셨듯이 삼성무림청은 우리 손에 멸망하고 말거예요. 아마도 죽은 것 처럼 위장하고 깊이 숨어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건 그 동안의 정리로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 보셔요.]

[…………]

[다음에 다시 우리가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먼저 언니들을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주소아는 손가락을 튕겨서 사은상과 사백상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녀들은 잠시 앉아서 운기행공을 한 다음 원망의 눈초리를 소일초와 주소아에게 보낸 후 몸을 날려 떠나갔다.

[흥, 이제 심심해서 어떡할까? 천하의 색마께서……]

[낄낄낄……네가 밤새 내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히히……]

소일초는 술을 들이키면서 요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쳇, 오늘 밤에는 쥐덫을 설치하던가 해야지 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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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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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五 章

 

         건방진(?) 九派一幇

 

 

 

콰아아아아아…………

달빛과 별빛과……

그리고,

불어닥치는 거센 늦가을 바람을 맞이하며 깊은 계곡 속의 거대한 푸른 성(城)은 우뚝 그 견고함을 자랑하며 서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호리병 같은 그 계곡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천상에서 내려온 옥동옥녀(玉童玉女)인양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소일초와 주소아……

그 들의 주변에는 비성성들이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초조한 눈빛으로 서있는,

똑 같은 생김새의 아름다운 두 미녀 사은상과 사옥상,

맞부딪치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그녀들은 표연한 자세로 서 있다.

지금,

그녀들의 앞에서……

소일초와 주소아는 비성성들에게서 끊임없이 끽꽥 되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휘황한 달 빛에 멀리 장강이 은하수처럼 보이는데……

사은상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리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백인장이나 청옥검궁과도 비견될 정도로 막강하다고 사부가 말했다.……)

문득,

사은상의 수려한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백인장의 주력은 백인도객(百刃刀客)이고 최고수들은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원로십팔도객들 이라고 했다.)

그녀는 멀리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사옥상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은 전면적으로 무림에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은연중에 최강의 문파로 공인되어 있다고도 했다.)

이 순간,

생각을 헤아리고 있던 사은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한데 오늘 우리측에서는 최정예인 삼혈단이 나섰다.그만큼……우리 삼성무림청도 백인장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지금껏 무림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혈향단(血香團),

혈살단(血殺團),

혈혼단(血魂團),

 

물씬 피냄새를 느끼게 하는 이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은,

그 존재만 알려져 왔을 뿐 완전한 비밀과 신비 속에서 따로 행동해 왔던 것이다.

사은상 그녀의 파리한 입술이 단호하게 깨물어졌다.

(한데……저 귀신같은 꼬마들은 어떻게 삼혈단을 상대하려는 것일까? 어떤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고수들도 저 괴물들 외에는 볼 수가 없었는데……아무튼 이번 격전에 승리만 할 수 있다면 녹림맹 마저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겠지……참 그리고 보니 녹림맹에서 돕기는 하겠구나. 자신들의 사활이 걸렸으니.)

사은상,

그녀의 내심이 이번 결전에서는 삼성무림청의 승리가 확고하다고 굳혀지고 있을 때,

돌연,

[승리할 확신이있소?]

맑고 청아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위엄을 느끼게 하는 음성이 울려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음성은 육합전성으로 울려진 모호한 음성이었다는 것과,

때문에 이 음성의 주인은 황녹천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어느 새……

소일초와 주소아 옆에 소리없이 솟아난 한 사람……

청의면사인이었다.

모습도 헤아릴 수 없고 사내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청의 면사인,

한데,

이 청의면사인이 지닌 수려한 몸매는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휘영청 꺽일 것처럼 심약해 보였다.

거기에다,

청의면사 사이로 드러난 푸른 벽옥색의 동공,

그 동공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바로,

이 청의면사인의 뒤로 금의(錦衣)를 걸친 기도가 비범한 네 명의 노인이 정중히 시립하고 있었다.

금빛 수염에……

금빛 안광을 폭출시키며 사해를 떨어울리는 듯 한 이 네 노인,

이들은 다름 아닌 황녹천의 수족과 같은 녹림사존자(綠林四尊者)였다.

소일초와 주소아는 이미 청의면사인 황녹천이 나타남을 알고 있었는지 별 변화가 없었다.

이때, 소일초의 입에서는 어느 새 또다시 그 답지 않게 무량한 무게를 실은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마귀에게 연락은 되었소?]

[그들은 천산으로 갔다고 하오. 그래서 연락이 불가하외다.]

[천산? 연락불가? 그럼 당신은 벌써 내 조건 중에서 한 가지를 어겠군.]

소일초의 말은 단호했다.

그의 조건,

그것은 사마귀에게의 연락과 녹림맹의 임차가 아니었던가?

청의면사인은 벽옥색 동공을 살짝 빛내며 말했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소. 천산까지 가자면 그 기간만도 몇 달이 걸릴 것이오.]

[첫번째 조건에 기한은 없었어. 무조건 가장 빠른 시간내에 사마귀를 이곳으로 불러.]

소일초의 얼굴이 치켜들리면서 무서운 안광을 발하며 황녹천을 바라보았다.

[녹림을 지켜주는 댓가로는 비싸지 않은 조건이야. 만약……우리가 여기서 그만두고 물러나버린다면 녹림맹의 전멸은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지.]

황녹천과 녹림사존자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신행마동……맹세코……당신들이 삼성무림청의 주력인 삼혈단을 멸망시킬수 있소?]

[물론 당신이 한 가지 협조는 해야겠지……]

청의면사인의 섬연한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이어, 곧바로 되물어 오는 음성,

[……대체 그 한 가지 협조하는 게 무엇이오?]

소일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황 맹주(黃盟主)……이곳 녹림맹의 총인원은 얼마나 되오?]

[이곳에만 삼천(三千)!]

[음……삼천이라……]

[…………!]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소일초의 음성은 한동안 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오늘밤 자시를 기하여 그 인원들 모두에게 싸울 준비를 시키시오.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쳐부셔야 하니까…… ]

[우리 녹림인들 만으로……!]

비명처럼 내뱉는 음성과 함께 황녹천의 섬연한 몸이 부르를 진동을 일으켰다.

그만큼 그의 벽옥색 아름다운 동공이 크게 흔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 이때,

황녹천은 다소 싸늘하게 궅은 음성을 흘려냈다.

[신행마동, 당신은 본좌더러 이 녹림맹을 포기하고 도망치라는 것 같소.]

[반쯤은 맞았어.]

순간, 그림처럼 서 있기만 하던 녹림사존자의 몸에서 칼날 같은 분노가 터져 올랐다.

[무슨 소릴!]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을!]

이때,

황녹천의 전신에서도 분노가 물보라처럼 피어올랐다.

[신행마동, 당신은 우리 녹림의 안위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었군.]

[…………!]

[본맹으로 적의 주력을 끌어들여 놓은 후에 우리끼리 싸우라고?]

[나는 당신 말이 반쯤 맞았다고 했어! 도망칠 필요는 없어. 단지 이 푸른 성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말도 마찬가지요. 이곳은 우리 모든 형제들의 수 백 년 삶의 터전이오.]

[…………!]

[귀하가 바라는 것은 곧 우리더러 삶은 터전을 버리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오?]

준렬한 황녹천의 말,

어느 새 소일초의 낯빛은 푸른 청동빛으로 일그러졌고……

그의 이마엔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그의 전신에서 폭풍과 같은 기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옆에서 주소아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황녹천! 그대야 말로 우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약속대로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멸망시킬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다.]

[…………]

[그런데, 그대들 녹림에서 그 정도, 만약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태를 가지고 그렇게 짜게 나오는가? 우리가 어리다고 토닥거리기만해서 그야말로 녹림을 너무 쉽게 지키려 하는 속셈이 아니냐?]

신랄한 어조였다.

삼혈단이 오기도 전에 녹림맹과 일전이라도 불사할 듯이 보이는 소일초,

그리고 황녹천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는 듯한 주소아의 말,

사실,

황녹천은 설마 소일초등이 혼자서 움직이랴 싶었다.

어디선가 백인장의 고수들이 암암리에 보호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삼성무림청과 싸울 생각이 없지 않았기에 선뜻 안방까지 제공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감도는 씁쓸한 미소,

주소아의 몸에서 나는 낮은 휘파람소리를 뒤로 하고 폭풍같은 기도를 뿜어내는 조그마한 체구의 소일초에 압도당한 듯,

그는 꿋꿋이 서있기도 힘이드는 듯 천천히 녹림사존자에게로 몸을 기댄다.

연하여 흘려내는 음성,

[신행마동……이 점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겠소.]

[……?]

[당신들은 떠나면 그만이겠지만……이 녹림맹은 수십만 녹림도의 터전이라는 것을……]

[…………!]

[만일 당신들이 그점을 생각해 준다면 우리도 기꺼이 당신의 요구를 수락해 주겠소……]

[너는 더이상 나에게 어떤 결정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여전히 딱딱하게 무서운 눈빛을 발하는 소일초였다.

[이곳이 아니라도 삼성무림청을 쳐부술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다시 한번 내 성미를 건드린다면 그대로 철수해버리겠다.]

[…………]

[물론, 그전에 네 몸에 먼저 땅에 영원히 눕게 되겠지만……]

살기(殺氣)!

인간이 이처럼 무서운 살기를 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은 물론 소일초의 충천하는 살기에 주변을 날고있던 비성성마저 두려움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직접 그 살기를 마주대하고 있는 황녹천과 녹림사존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소일초의 살기는 서서히 걷혀졌다.

(무서운……너무나 무서운 살기였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심맥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황녹천과 녹림사존자는 그에 대한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이때 돌연,

[황녹천! 아직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주소아의 싸늘하고 냉오한 음성이었다.

[…………]

[이 밤이 새기전에 당신은 믿지 않으려 해도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다.]

[이 밤이 새기전에?]

[그래.분명히……!]

약간 말끝을 흐리던 주소아가 더불어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마당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

[당신의 목숨은 하나이지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라.]

순간

[…………!]

황녹천의 섬약한 몸이 기이로운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몸만큼이나 파문을 이르키고 있는 눈빛!

황녹천은 자신의 내면에서 치미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공은 더욱 큰 벽옥빛의 파장을 일으킨다.

(……나는 지금 저들의 말을 모두 따라야 하지 않는가?)

황녹천은 자신의 생각이 생각만 해도 무서운 듯,

쉴 새 없이 떨림의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즉시 부하들에게 자시(子時)까지 싸울 준비를 갖추게 하라.]

주소아의 음성이 소일초의 분노한 목소리 보다 부드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냉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녹천은 그 두사람을 주시하며 참열한 선택의 고통에 젖었다.

한데 돌연,

[아미타불……]

소리,

한 가닥 장중하고 청아하여,

세상의 모든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한 불호성이 사위를 때리며 들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그 불호성은,

소일초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동시에 울려왔고……

그리고 녹림사존자의 바로 뒤에서 울려왔던 것이니……

오오……보라……!

스스스스……

부서지는 달빛인가?

아니면 내리는 별빛인가?

사방 백 여덟 방위에서 소리없이 솟아난 고월창송(孤月蒼松)한 풍모의 노승들을……

그들은 하나같이 황색가사(黃色袈裟)를 걸쳤고,

위엄이 충만하여 흐르는 고매함을 지닌 노승들이었다.

그리고,

교자의 바로 앞에 소리없이 솟아난 한 명의 젊은 승려,

십 팔구 세가 되었을까?

수려한 눈빛은 하늘을 닮았고……

그의 전체적인 얼굴은 온화함과 따사로움이 불존처럼 성스럽게 빛나기조차 하다.

거기에다,

귀족인양 고귀롭게 피어오르는 저 기질……

한데 보라!

연화(蓮花),

활짝 만개한 연화가 허공에 떠있고……

이 청년승은 바로 이 연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소림의 최상승 경공절기인 연대구품(蓮臺九品)이다.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그런 청년승은 나타나서 지금껏 그 하늘 같은 시선을 소일초와 주소아에게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을 향하고만 있던 청년승의 입이 열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조금전 까지 분노를 터뜨렸던 소일초가 합장을 하면서 똑같이 청년승의 불호를 흉내냈다.

청년승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신행마동……소승은 소림의 도봉(渡峰)이외다.]

[소동(小童)은 백인장의 소일초외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할 말 만 하는 청년승 도봉이었다.

[소승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녹림맹주의 청을 받아서 이외다. 녹림마저 삼성무림맹에 흡수된다면 무림의 전체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기에……]

시종 침묵,

청년승이 나타난 이후로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주소아의 눈빛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늘한 기운을 뿌려냈다.

녹림맹주인 황녹천은 어떤 수단으로 소림을 끓어들였단 말인가?

자신들과 황녹천등이 아웅다웅 다투느라고 그들이 다가선다는 비성성들의 보고 마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끄윽……취한 세상……취한 눈으로 바라보니……크윽……끅……오락가락 할 수 밖에……]

확!

술트림의 역겨운 냄새를 싣고 어둠의 일편에서 취한 음성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비틀비틀……

한 명의 거지소년이 갈지자로 걸어왔다.

봉두난발(蓬頭難髮)에 ……

헤어질대로 헤어진 악취 풍기는 의복(衣服)은 기우지 않은 곳이 더물었고……

얼마나 세수를 하지 않았음인가?

얼굴에 낀 때는 아예 새까만 빛이어서 소년의 얼굴을 헤아려 볼 수 조차 없다.

거기에다,

볼품사납게 산발한 머리에 아무렇게나 둘러진 붉은 머리띠,

그리고, 오른손에 치켜든 항아리 만한 호로병……

이쯤되면,

과히 이 소년거지의 형상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비틀비틀……

[커억……끅……이놈의 술버러지……천하의 개방의 홍건(紅巾)개를 울리누나……울리누나……에이……오늘의 술버러지……]

벌컥벌컥……

혀 꼬부라진 소리와 함께 거대한 호로병을 거꾸로 처박는 소년거지,

아니,

스스로 홍건개라 했던가?

한데 오오……

개방의 신분(身分)을 나타내는 허리에 늘어진 여덟 개의 매듭이라니?

그렇다면 이 거지소년은 아홉매듭의 개방 방주(幇主)보다 겨우 한 배분 낮은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애기인데……

[꺼억……우라질 삼성무림청인지 뭔지……한 번 싸워보지……그러면 내가 죽던지 지가 죽던지 결단이 나겠지……꺼억……끅……뒤집힌 세상……]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히죽 웃기까지 하는 홍건개,

한데,

그의 두 눈만은 그 어떤 것보다 맑고 빛나며 지혜로움이 넘실거리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이 자리에,

무림천년 뿌리인 전설의 구파일방 중 소림과 개방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니……

지금,

백팔 방위에서 빈틈없는 포위의 원진을 이루고 있는 황색가사의 노승들은 바로 소림의 백팔나한(百八羅漢)들이다.

한 번도 무림에 거취를 드러낸 적은 없으나……

거은 일백 오십 년 동안이나 소림의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소림 백팔나한……

이 미증유의 힘을 지닌 소림의 거력 뒤로,

홍건개로 미루어 보아 개방의 고수들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듯 하니……

이때,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가 번갈아 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신행마동께선 큰 실수를 하셨소이다.]

[꺼억……큭……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보였기로서니……삼성무림청의 주력을 아무 대책없이 녹림맹으로 유인해내다니……우라질……꼬마야 너는 구파일방 보다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이냐?아무리 세상이 미쳤기로……커억끅……]

소일초의 입이 열려지기도 전에 주소아의 말이 먼저 떨어졌다.

[술병을 들었기에 괜찮은 놈인가 싶었더니, 입으로는 개소리만 하는군,]

[뭐……빌어먹을……끄윽……계집애가……뭐라고?]

벌컥벌컥……

호로병을 거꾸로 처박으며 술을 들이키는 홍건개,

이때, 청년승 도봉이 심해처럼 맑은 눈빛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신행마동……빈승은 구파일방과 천하정파인의 이름으로 녹림맹을 도와 삼성무림청과 싸우고자 하오……]

이때, 지금까지 그들의 떠드는 말을 들으며 이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던 소일초,

문득,

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더할 나위없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낮빛,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가 너무 녹림맹을 핍박하지 말아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한데……건방지기 짝이없는 자식들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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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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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四 章

 

          술 마시는 朱小阿

 

 

 

주소아(朱小阿),

그녀는 백인장에 있을 땐 결코 이렇지 않았다.

얌전하고도 영리하며, 신비했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던 소녀였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어른을 꼭 알아보았고 행실이 발랐다.

그런데……

그런 주소아가 소일초와 함께 다니는 요 얼마동안 성격이 많이 변한 것이다.

마치 소일초를 닮아 가기나 하듯이 그녀의 심술도 늘고 무림인들을 아무렇게나 무시하고 했다.

어쩌면,

소일초와 맞서 싸우자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듯도 한데,

아직 그녀는 나이 말고는 소일초를 이길 만 한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찰에서의 치욕적인 패배이후로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또 싸우고 난 후에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소일초의 행실이 미운 점이 있기는 했지만, 마냥 미운 것만은 아니었다.

소일초의 짖궂은 짓도 그렇게 싫지 많은 않았다.

더우기 전혀 장난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소일초는 또 사은상이나 사옥상에게 짖궂은 짓을 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은 그녀다.

차라리 자기에게 하는 것이 낳지……

지금 주소아는 한 다발의 국화를 꺽어서 요생각 조생각 하면서 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이곳,

 

녹왕전(綠王殿),

 

사방 백여 장의 반경에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는 꽃의 천국(天國)……

바로 이 꽃의 바다에 날아갈 듯 서있는 한 채의 누각(樓閣)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전에는 녹림맹주 황녹천의 거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신행마동 소일초의 거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아니,

신행마동 소일초가 잠시 빌린 곳일 뿐 완전한 거의 거처는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도 녹왕전의 이십 장 이내엔 접근이 불허되는,

절대금역(絶對禁域)이 되었다.

왜냐하면?

접근의 대가는 곧바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死)으로 까지 지불되었으니까……

 

실내,

사방이 깨끗하게 정돈된 아담하고 고아하기 이를 데 없는 실내이다.

하나의 침상에……

자단피의 의자가 두 개 ……

바로 이 실내에서,

돌연,

 

낄낄낄------

 

듣기만 해도 고약한 악동의 웃음소리가 휘장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부르르 온 몸을 떠는 탁자에 앉은 두 미녀,

장강 변에서 포로로 잡았던 바로 사은상,사옥상 자매였다.

또 소일초가 주소아가 없는 틈을 타서 무슨 장난을 한 것인가?

그 동안 얼마나 심하게 시달렸는지 사은상은 노을 빛 얼굴은 초췌하여 처음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핼슥했다.

고민따위는 모르는 사옥상은 단지 소일초의 웃음이 또 무슨 짓을 하기 전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

먹기도 잘 먹어서 건강해 보였다.

이때,

덜컥-----

방문이 열리면서 주소아가 한 아름의 국화를 들고 들어왔다.

[얌전히 침상에가서 잠이나 더 자……]

그녀를 보고 두 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소일초는 두손을 등뒤에 감추었다.

[지금 숨긴게 뭐야? 빨리 꺼내놓지 못해?]

[헤헤헤……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없어.]

두 손을 앞으로 숙 내밀었는데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소아는 분명히 소일초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는 것을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보았었다.

물증을 잡지 못하자 사은상 자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은장은 질끈 눈을 감을 버렸고,

사옥상이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게서 이걸 가지고 갔어. 그리고 언니에게서는 이걸……]

사옥상의 한 손은 사은상의 하체를 가리켰다.

말로하지 않아도,

주소아는 소일초가 두 여자에게서 무엇을 훔쳤는 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장 돌려줘……아무튼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해……어휴 골치야……!]

[벌써 돌려줬어, 발 옆에 다 놓여 있을 거야.]

소일초가 어느새 도둑질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흑흑……]

이 세상에 존재하여,

미(美)란 이름의 굴레를 쓴 그 어떤 것에도 비유를 해낼 수 없는 노을 빛 피부를 가진 미녀,

바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안타까운 흐느낌이었다.

분노와 수치로 죽고만 싶은 그녀였다.

주소아는 도끼눈을 뜨고서 소일초를 한 번 노려보았다.

이어,

사은상의 가슴에 그녀가 꺽어온 국화를 한 아름 안겨주면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미안해요. 이번 일 만 끝나면 풀어드릴께요. 이제 내가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저 말썽꾸러기를 지킬께요.]

본래,

심성이 고왔던 주소아다.

비록 요즘들어 많이 악랄해 지기는 했어도, 사은상의 눈물과 사옥상의 자신의 처지마저 깨닫지 못하는 천진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순진한 감상적인 소녀였기에……

찰랑……찰랑……

세상의 온갖 비리(非理)와 추악함을 잊어 버린 동공에 눈물이 솟아났다.

여인의 감정이라고는 오직 색귀에게서 들었던 육체적 반응 외에는 모르는 소일초는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또 한쌍의 눈빛이 있었다.

천진한 아기같은 심성의 사옥상, 바로 그녀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 × ×

 

 

[내 말 잘들어. 오늘 낮에 백인장에서 고모가 편지를 보냈어.]

[나는 못 봤는데……]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에서 소일초와 주소아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치웠어. 고모부의 상세가 지난 번에 사옥상에게서 받은 약을 복용한 이후로 급속도로 나아지고 있데……]

[그럼 언제 쯤 다 나을 수 있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너는 아무래도 지금 행동을 좀 고쳐야 해.]

[또 잔소리……]

[고모부는 사옥상에게 받은 약으로 빨리 치료되고 있는데 너는 그들 남매를 괴롭히기만 한잖아. 그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라고……]

소일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그 여자들은 녹림맹도들을 무수하게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삼성무림청의 요인들이야.]

[…………]

[아버지가 그렇게 다친 건 삼성무림청때문일 가능성이 십중 팔구고. 그렇다면 네가 인질로 잡혀있었다는 곳도 그곳이라는 이야기야.]

[…………]

[그런데도 그 여자들에게 관대해지라고? 흥, 더 잔인해 질 수 도 있어.]

[하지만, 그녀들이 고모부를 해친 것은 아니잖아? 또 더우기 여자로서 치욕을 주지는 않을 수도 있잖아?]

주소아도 마주 소리쳤다.

소일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소아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더 이상 그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겠어. 대신, 그들에게서 삼성무림청이 사수 중의 삼수(三手)와 관련이 있다는 자백을 책임지고 받아내.]

[알았어.]

 

침상에서의 두 어린 남녀의 어린 것 같지 않은,

장난기라고는 전혀 들어있지않은 어른스러운 대화,

그들은 어리지만 무섭도록 치밀한 계획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 × ×

 

소일초와 주소아가 같은 침상을 쓰는 방에서 멀지 않은 다른 방,

무공을 폐쇄당한 사은상 자매가 침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이 오면,

그녀는 문에 빗장을 걸고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지만,

소일초는 도둑고양이 처럼 스며들어와 두 자매를 만지고 쓰다듬고 짖궂은 장난을 하다가 가곤 했다.

사옥상은 그냥 두면서도 자기는 꼭 아혈(啞穴)을 집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였다.

지금,

사은상은

한(韓)과 증오의 눈빛을 가닥가닥 실어내면서……

(천하의 사은상이……이런 초라한 몰골로 잡혀있어야 한다니……저……젖비린내 나는 꼬마에게……성(性)적인 수모까지 당해가면서……)

문득,

자조의 새파란 광망이 그녀의 두 눈에서 불을 뿜고,

그녀는 하얀 이가 바스러지도록 이빨을 가라붙였다.

(되돌려 준다……오늘의 이 수모에 천배 만배를 더하여 되돌려 준다……한데, 도대체 저 꼬마놈의 의도는 무엇일까?)

소일초를 생각하던 사은상의 눈빛이 파릇한 경련을 일으켰다.

사실,

그녀는 며칠 동안 소일초를 지켜보면서 한두 번 놀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철부지 장난꾸러기라고하나 세상의 어떤 빙심(氷心)의 여인도 흔들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귀여운 얼굴……

그얼굴의 아름다움을 타고 도도히 대하처럼 흐르는 신비한 기질은 타인으로 하여금 절로 적대감을 느낄 수 없게 한다.

거기에다,

그와 함께 있는 주소아라는 계집아이……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녔으면서도 사악할 정도의 기괴한 무공을 구사하는 그녀……

천상의 선동들인 듯 한 두 어린 남녀의 의도는 아무래도 무림에 알려진 것 처럼

삼성무림청과 무림정벌이라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같았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기로서니,

절세고수로 알려진 백인장의 장주 소선풍이 있는데,

백인장에서 두 어린 아이가 밖에나와서 마음대로 날뛰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들리는 바로는 여태까지 신행마동 소일초가 집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마다,

백인장의 여주인인 그의 어머니가 직접 무림에 나와서 잡아갔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오기도 전에 정식으로 출두를 선언하고 나왔지 않은가?

사은상, 그녀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들과 꾸준히 싸워오던 녹림맹의 맹주마저 소일초에게 그토록 쉽게 안방을 내주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그녀였다.

이때,

[아직 자지 않으면 문좀 열어줘요.]

문이 덜컹거리며 주소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은상은 바짝 긴장했다가 문을 열어주었다.

주소아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기에는 탐스럽게 구워진 닭고기와 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한 순간,

사은상의 눈이 의아심에서 크졌다.

[이제 괜찬아요. 언니……!]

주소아가 빛이 날 정도로 흰 얼굴을 갖다대면서 말했다.

[이제 그 꼬마가 더이상 언니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주소아의 말투는 낮에 이후로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은상은 살살맞게 돌아서 사옥상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어가 버렸다.

천천히 주소아는 사은상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어,

사은상의 앞에 준비된 음식을 한 숟갈 떠 사은상의 입에 들이 밀었다.

[먹어요……]

순간,

사은상의 그 차가운 눈빛에 강한 욕구가 배어났다.

들이 밀어진 음식을 삼키고 싶은 짐승 같은 욕구가……

그러나 끝내,

사은상은 찬바람이 들도록 싸늘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주소아는 숟갈은 내릴 생각도 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언니! 언니는 바보야……]

[…………]

[언닌 벌써 나흘 째 굶었어……이대로 계속 굶는다면 무공도 폐쇄된 그몸으로는 죽게 돼……]

[…………]

[언닌 죽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아……이렇게 초라하게 말이야? 그 꼬마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주소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니, 아니 삼성무림청의 소공녀……어서 이 음식을 먹어요……그리고 사는 거야……!]

순간,

냉엄히 고개를 돌리고 있던 사은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치워!]

[…………]

[더 이상 추근대면 그 음식에 침을 뱉겠다.]

주소아는 얼굴에 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사은상……나나 일초에 대한 저주가 크다면 왜 더이상 발악을 해보지 않는 거지?]

그녀의 어투는 다시 달라졌다.

[…………]

[삶을 체념하지 않았다면 먹는 거야……더구나 이곳은……]

[……?]

[녹림맹……!]

[…………!]

[나는 몰라도 그 꼬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당장이라도 당신을 이 녹림맹의 사람들에게 넘겨 버릴 지도 몰라……]

[…………!]

[그럼, 녹림맹에서는 우리에게 크게 감사하겠지? 무수한 녹림인들을 살해한 당신들을 잡아주었다고……그들이 당신들을 어떻게 할지는 아마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

사은상은 도무지 어린애 같지 않은 주소아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일초 등은 자기들의 정체를 녹림맹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당신들은 우리에게도 이용할 가치가 없는 몸이 되었어.]

찰나,

사은상은 싸늘히 소일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따위 꼬마들에게 죽을 이 사은상이라면?]

[사은상이라면?]

[이 땅에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문득,

그녀의 싸늘한 냉음에 주소아는 얼굴에 핀 미소를 거두어 들였다.

[말해 두겠는데……우리 아니 그 꼬마의 목적은 당신들을 이용하여 삼성무림청의 주력을 이곳에 끌어 들이는 것이었어.]

[…………]

[그리고 그 계획대로 오일 만에 삼성무림청의 정예고수들을 이곳으로 끌어 들이게 됐어.]

찰나, 사은상의 두 눈에서 파릇한 광망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끝장이다.]

[왜?]

[삼성무림청의 정예인 삼혈단이 힘을 합치면 천하에 당해낼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은상의 득의와 싸늘함이 풀려나는 음성에,

주소아는 지웠던 웃음을 피워올렸다.

[호호……그것은 두고 보면 알 일이지……더구나 내 일이 아니고 소일초가 처리할 일이니까. 허나 분명한 것은 당신들은 우리게 이미 이용가치가 없어졌다는 거야.]

[…………!]

[게다가 난 일초가 당신들을 집적거리는 것이 영 싫어……]

[…………]

[정 그렇게 버틴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당신들을 한 시라도 빨리 죽일 수 밖에 없는 일이지.]

순간,

사은상의 싸늘한 얼굴에 가는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죽일지도……모른다……저 계집애의 아름다운 웃음 속에 무서운 살심이 숨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꼬마놈은 ……소름이 끼치는 괴물들을 끌고 다니는 무림에 악명이 자자했던 신행마동이 아닌가?)

그녀의 등줄기를 후벼파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걷잡을 수 없이 치달렸다.

생명,

단 하나 뿐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엄청나다.

더구나 독기와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생명을 얻고자 할 것이다.

사은상,

아무리 차가운 빙심의 그녀라 해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일단,그녀는 생명의 애착이 가슴에 피어오르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자신의 팔만사천모공에 팽만하여 터지는 충격을 느꼈다.

이런 그녀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주소아의 미소,

어쩌면, 이 계집애도 그 꼬마 못지않은 독심의 소유자 일 것이다.

[자! 먹어……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순 한기로 뭉쳐진 사은상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이 흘렀다.

(그래 좋아……먹자……그리고 살자……그리하여……받은 것에 천만배를 되돌려 주자…… 이 악마같은 계집애……꼬마놈…… 애송이 꼬마놈…… 이 어린 마물들……!)

사은상은 그녀의 입에 들이밀어진 음식을 덥석 삼키기 시작했다.

주소아의 미소 띈 얼굴이 끄덕여지고,

또 한 숟갈의 음식을 떠 사은상의 입으로 가져가니……

이것은 마치 어미가 새끼에게 밥을 떠먹이는 광경이었다.

한 순간, 또 한 숟갈의 음식을 떠먹이던 주소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저 사옥상 언니와는 쌍둥이야?]

사은상은 음식을 삼키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삼성무림청의 주인이 언니 아버지야?]

[사부……]

(이 계집애가 나를 들었다 놨다 마음대로 하는 군, 또 말투를 바꿨어……)

[하면 어니의 사부는 삼수 중 세째인 사진성(史震聲)이겠네?]

단정짓듯 말하는 주소아의 음성에 사은상의 고개가 다시 무심코 끄덕여졌다.

동시에 주소아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언니,고마워!]

단 세 마디의 음성과 더불어 주소아가 몸을 일으키자,

돌연,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사은상의 전신이 부르르 떨었다.

거기에다,

[우욱……!]

씹어 삼키던 음식까지 토해내는 것이니……

[아니다……나의 사부은 사진성이 아니다……!]

사은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더이상 주소아는 그녀를 상대로 말을 하지 않았고,

사박사박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

[문단속 잘하고 자요. 혹시 모르니까……]

문밖에서 주소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소아는 소일초의 침실로 들어섰다.

소일초는 침상의 휘장을 걷어젖힌 채 술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술맛 괜찮아?]

[녹림맹의 술은 기가 막히는 데가 있어. 차라리 도둑질 집어치우고 주루를 하면은 더 편히 살것 같은데……]

[나도 조금만 줘볼래?]

주소아가 침상에 걸터 앉으면서 말했다.

소일초가 두 말 않고 술병을 건네주었다.

꿀꺽꿀꺽-----

[커----- 혀가 착 감기는 것이 술도 괜찬은 물건이네……]

[정말 그렇지? 야……우리 더 잘 통할 수 있겠는데……]

소일초가 반색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새 술을 더 갖고 올테니까……]

[어디가서?]

주소아가 사과처럼 발개진 얼굴로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술창고에 가서 슬쩍 해오면 되는 거지……배운 도둑질 이때 써먹어야지.]

주소아는 피식 웃었다.

과연,

신행마동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소일초는 나가자마자 몸통 만큼이나 굵은 단지를 들고 들어왔다.

막고있던 소가죽을 벗기고 나자 향긋한 술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침상 한가운데다 술독을 놓고 두 꼬마는 찻잔으로 떠마셨다.

[기가막히다……이렇게 신나게 술마신 적은 없었는데……]

[나도 술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벌개진 얼굴로 연신 술을 떠마시며 주소아가 말했다.

[확실히 술은 여자를 곁에 두고 마셔야 한다더니……어른들 말이 그른 게 없군.]

[그 뜻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야?]

[뭔데?]

[원래부터 주색(酒色)이라고 했잖아. 당연히 술 다음에는 여자를 찾는 거라구……]

주소아는 이미 취기가 돌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잘 아는 척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난, 주색투도(酒色偸賭)에 모두 통달했어. 사마귀로부터 직접배웠거든.]

[까불지마. 주투도라면 몰라도……아직 꼬마가……난 이래도 이미 이 년 전에 초조(初潮)를 치른 여자란 말이야……]

[내가 재미나는 것을 한 가지 보여주지……]

그말을 마치자 마자 소일초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풀린 눈동자로 주소아가 말했다.

[별 것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소일초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는 전혀 흩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공처럼 빙빙돌며 뭉쳐졌다.

그기에서 강렬한 주향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주정(酒酊)이구나!]

주소아가 손뼉을 쳤다.

소일초는 입을 다물고 공중에 떠있는 주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름같은 주정은 점점 작아지면서 조그마한 구슬로 변해버렸다.

다시 소일초가 공중으로 던지자 구슬이 퍽 흩어지며 구름같은 주정이 용(龍)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스르르 바뀌며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사람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주소아는 연신 재미있어하며 박수를 쳐댔다.

이 기술은 소일초가 주귀(酒鬼)에게 배운 주전신공(酒箭神功)을 응용한 것이었다.

소일초가 입을 벌리자 여인의 형상을 이루고 있던 주정은 후루룩 빨려들어가 버렸다.

소일초의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주정을 한꺼번에 흡입한 때문이었다.

한 동안 횡설수설하면서 술을 퍼마신 소일초와 주소아는 술독을 내려 놓은 후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어땠어?]

소일초의 말이다.

[예상대로 였어. 사진성의 제자래. 같은 성씨라서 딸인줄 알았는데……]

주소아는 완전히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이 순간,

소일초는 곁에 퍼질러진 주소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주소아의 빨간 얼굴이 희미한 황촉불에 비쳐 소일초를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그녀가 몸을 돌려 소일초의 몸에 다리를 걸쳤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여 그녀의 뺨 위를 타고 흘러내릴 것 같다.

[왜……나는 삼 년 전에 일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까?]

[…………]

[몇 달 만……몇 달 만 지나면……고모부 상처가 완쾌되겠지. 그럼 고모부는 내 기억을 돌려 주실 수 있을 지도 몰라……]

[내 말만 잘들으면 내가 기억을 치료해 줄께……]

[사기치지마……네가 무슨 수로……괜히 수작이나 걸어보려는 거지……]

[어떻게 알아.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나 말해.]

[말했잖아. 내 목탁이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목탁으로 펼치는 무공도 있어? 잘못되면 녹림맹이 폭삭 망하는 수도 있어……일부러 이곳의 위치까지 그쪽에 몰래 알렸는데……]

주소아의 혀 꼬부라진 소리에는 염려가 들어있었다.

[목탁 속에 축융화탄이 가득들었어.]

[뭐?]

호호호------

히히히------

두 가지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음이 잦아지자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흘렀다.

[삼성무림청……그들이 언제쯤 이 녹림맹을 공격할까?]

[아마 다가오는 새벽이 아니면 내일 밤이겠지. 물론 새벽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뭐? 그럼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

놀라면서 벌떡 일어서려는 소일초의 목을 주소아가 천연덕스럽게 휘감았다.

[괜찮아. 비성성들이 교대로 하늘에서 지키고 있어. 때가 되면 와서 깨울거야……]

주소아는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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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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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三 章

 

       아도래영(我到來迎), 내가 왔다! 맞이 하라!

 

 

 

성(城),

그것은 실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성이었다.

성 둘레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십여 리도 넘을 것 같고,

황혼의 노을 아래서 보자니 물빛보다 더 새파란 녹빛이 마치 세외선경(世外仙 景)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성의 크기라든가 아름다운 경관 때문이 아니었다.

성은 놀랍게도 깊은 산속 계곡 속에 있었다.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바다에 떠다니는 낙엽처럼 ,

푸른 숲의 바다 속에 하나의 섬처럼 자리하고 있는 성(城).

호리병 처럼 입구가 좁은 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하고,

오오……그렇다.

그 거대한 산속의 녹색 성(城)은 바로 수천만 개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그 위에는 수많은 고루거각과 전각은 물론이요,

인공호수도 있었고 울울창창한 과수림(果樹林)도 있으니……

이것은 성이 이토록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황혼 아래……

이는 바람으로 인해,

나무들의 만경창파를 유유히 헤치며 장엄히 떠다니는 듯한 녹색의 성,

 

<녹림맹(綠林盟)>

 

바로 이것이다.

장강 일대의 일천팔백대소 녹림채(綠林寨)를 관장해 왔으며……

십만 녹림도(綠林徒)들의 총 본산으로 우러러지는 푸른 숲의 제왕 녹림맹……

백인장과 청옥검궁, 삼성무림청이 땅의 지배자들이라면,

녹림맹은 숲을 지배하는 하늘 중의 하늘이다.

땅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지만,

숲은 통일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림에서 손을 뻗친 적이 거의 없었던 녹림을 잠식해 오기 시작한 세력이 있었으니,

삼성무림청,

바로 그 악명 높은 장강 일대의 삼성무림청이다.

땅에서는 몰라도, 숲에서는 언제나 하늘은 오직 하나였다.

그런 만큼……

이 두 세력은 서로 숲을 빼앗고 지키기 위해 이미 수없이 전쟁을 벌여온 상태였고,

아직도 그 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부언해 둘 것은……

녹림맹의 대맹주(大盟主)인 황녹천(黃綠天)은 그 이름만 전해지고 있을 뿐……

일체가 비밀에 쌓인 중원제일의 신비인(神秘人)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누굴까?

아무리 그 의혹을 해결하려 해도 여전히 신비로 가려져 있는 장막의 인물 황녹천……

 

× × ×

 

녹왕전(綠王殿),

녹림맹의 심장부(心臟部)요,

핵심인 곳이다.

헌데 돌연,

슛……

삼엄한 경비(警備)와 무수한 기관장치(機關裝置)로 엄중히 지켜지고 있는 녹왕전으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

바람인 양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간 사이로,

스스스……

몸서리치는 푸른 빛이 소리도 없이 폭사되는 것이었고,

일시에 녹왕전은 그 푸른 빛으로 인하여 밝게 변해버린 듯했다.

뿐인가?

그가 스쳐 지나는 뒤로,

녹왕전의 곳곳에서 우수수 낙엽이 지듯이 떨어져 나뒹구는 경비고수(警備高手)들……

문득,

스________ 슷!

한 줄기 바람처럼 유령과 같은 흑영(黑影)은 녹왕전 가장 깊숙한 내전에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내전(內戰),

능라휘장,

상아빛 침상,

용봉촛대와 백옥탁자,

내전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고 넓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아찔아찔한 광택을 내고 있어 지고한 기운(氣運)과 귀풍이 물살처럼 쇄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 화려의 극(極)을 치달리는 내전의 한편에 드리워진 능라휘장,

소리없이 스며든 흑영은 그 능라휘장을 향해 불꽃 같은 시선을 쏟아내고 있는데……

오오……이런 일이라니?

슈슈슈슈……

그 흑영은 전신에 검은 기운을 가득 피워올린 채 자신의 한몸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동시에,

이 검은 인영(人影)의 몸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너무도 가공해서인가?

돌연,

능라휘장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그림자의 호흡소리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한 순간,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휘장을 향해 바라보던 흑영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황녹천……나와라!]

아름다운 목소리……

흑영은 여자였던가?

아무튼,

그가 부른 이름 황녹천!

황녹천이라니?

그렇다면 중원제일의 신비인인 황녹천이 저 휘장 속의 그림자란 말인가?

어쨌든,

휘장 속의 그림자은 일체의 대답도 해오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가공할 검은 기운을 일으키며 흑영은 제삼 아름답기 그지없는 옥성(玉聲)을 소곤거리듯 내뱉었다.

[이곳을 비워라………이제부터 이 녹림맹은 잠시간 내 처소가 되어야 한다. 황녹천! 빨리 나와라.]

이때 돌연, 지금껏 침묵만을 고수하던 휘장 속의 그림자가 최초의 음성을 터뜨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남자도 아닌 것 같고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군……]

소리,

더할 수 없이 청아하고 맑으나,

어디서도 느껴보기 힘든 위엄이 서린 음성이 최초로 터져나왔다.

그런데, 그 음성은 도저히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비로움 그 자체일 뿐이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듯한 목소리……아니 어쩌면 자신의 영혼에서 들려오는 듯하기도 한……

이때,

섬뜩한 검은 안개에 휩싸인 채,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침입자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옥성을 흘려냈다.

[흥! 시시한 육합전성(六合傳聲)이군, 스스로 신비인을 자처하는 황녹천이 남의 이름을 묻다니 웃기는 노릇이군.]

[본좌는 당신의 신분을 물었다.]

[호호호……궁금하면 직접 한 번 맞추어 보지 그래……하나……]

[…………]

[황녹천……당신에게 그다지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순간, 청아하고 아름다우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음성이 신음인양 새어나왔다.

[그대의 몸에서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군!]

[호호……맞았네……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았나?]

[취풍녀…………]

[틀렸어……나는 취풍녀가 누군지도 몰라. 한 가지 더 알려 주지……우리 집은 여산에 있어……완전히 우리집이라고는 말하기 좀 뭣하지만……]

[백인장(百刃莊)!]

또다시 예의 그 맑고 청아한 음성이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맞았어……잘도 알고 있네 ……]

[…………]

[하지만……그렇다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혹시……신행마동?]

[천만에……당신은 설마 내가 징그러운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

[신행마동은 남자애란 말이야!]

순간,

또다시 예의 그 음성이 비명과 신음을 섞어 터져나왔다.

[혹……조부인?]

[쯧쯔 틀렸어……중원제일의 신비인을 자처하는 자가 상당히 머리가 나쁘군 그래, 그분이 어떤 분이 신데 한 밤 중에 당신같은 자의 침전에 뛰어들겠어……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렇지……]

[…………]

[백인장에 또 다른 절세고수가 한 사람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

[으음……]

[다시 말해 봐……]

[백인도객 중의 한 사람인가?]

[또 틀렸군……그 들은 분명 고수들이지만……호호호……나한테는 늘 한 수 양보하는 처지야……]

그 소리를 들은 황녹천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했다.

세상에 그런 고수가 백인장에 있었나?

[우리 녹림맹은 백인장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 같은 데……]

[나를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어.]

순간,

녹왕전의 일편에서 분노를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본 황녹천을 너무 무시하는 군……]

찰라,

검은 안개막을 치고 있던 인영의 몸이 세차게 요동쳤다.

[호호호호……그렇군……이제 보니……내가 당신을 너무 무시했어……중원제일의 신비인인 귀하를……호호호……]

맑고 아름다우며 건방지기 짝이 없는 듯한 어린 여자의 웃음소리가 묵빛 기류 속에서 한동안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따라,

휘이이휘휘휘------

높은 음으로 울려퍼지는 휘파람 소리!

한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어쨌던 반갑소. 당신이 누구이든!]

지금껏 혼란속에서 흑영의 정체를 알기위해 커졌던 음성이 조용히 가라앉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비웃는 듯한 음성을 흘러내는 게 아닌가?

[본좌보다 더 신비한 척하는 귀하와 조용한 해후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겠소……]

[뭐…?]

흑영이 뾰족한 음성으로 반문을 화살처럼 퍼부을 때,

[흥분하지 말기 바라오. 귀하! 내가 마련한 곳에서 잠깐만 기다리면 될 게요.]

황녹천의 음성이 은근한 어조로 가라앉았다 싶을 순간!

쩍!

[헉!]

흑영이 밟고 있던 대리석 바닥이 지각할 수 없는 사이에 갈라지고,

흑영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흡입력이 무섭도록 빨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고 다급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바로,

[호호…… 황녹천 당신 따위가 감히 ……]

한 소리 간드러진 소성과 함께 흑영은 길게 몸을 뽑아올렸다.

하나 이것은 또 웬일인가?

[아악……!]

흑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몸이 더욱 깊숙이 빨려든 것이니……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에 다급한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동시에,

꽝_____!

둔착한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은 다시 원위치를 회복해 버렸고……

이때,

휘장 속의 그림자가 다시 심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경악을 가라앉히는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서운 고수였다……백인장에서 무슨 일로 우리 녹림맹에 고수를 파견했을까?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수를……]

휘장이 다시 흔들렸다.

[또다시……누군가가 오고 있다.……한 둘이 아닌 것 같은데……이들이 정말 백인장의 고수들일까?]

곧바로,

끅끅-------!

끽---끅------!

한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괴성과 함께,

스스슷……!

네 개의 흑영이 성광처럼 날아들었고……

푸스스스스……

휘장 속의 그림자가 형체도 없이 소멸된 것은 동시였다.

찰나간,

[캑!]

[끅……캐객……!]

두 흑영이 입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듯한 비명이 터지나왔다.

동시에,

털썩털썩 짚단처럼 나뒹구는 네 흑영……

한데,

오오……

섬뜩하리만큼 검은 털이 전신에 돋아있고 겨드랑이에는 박쥐처럼 날개가 달려있는 인간을 닮은 괴물(怪物)들이아닌가?

이 순간,

스스스스……

흩어졌다 모이는 휘장 속의 그림자,

그리고 침통하게 터지는 경악성,

[믿을 수 없는 일……어떻게 남만에서 멸종했다고 전해지는 비성성(飛猩猩)들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음……]

쓰러져 있는 비성성들은 털북숭이 손에 각기 한 장씩의 종이를 펼쳐든 채였다.

 

------아도래영(我到來迎)

 

[내가왔다 맞이해라?]

대체 누가 왔다는 말인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경악에 찬 음성이 내전에 울려퍼질 때,

돌연,

고오오오오……

기이한 영혼의 울림과 같은 소리가 사위를 진동하는가 싶더니……

스스스스으……

내전에 신비롭고 상서로운 광휘가 천신의 하강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욱히 피어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어느 순간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희미한 광휘에 휩싸인 인영 하나,

그 뒤에는 두 마리의 하얀 비성성이 각기 아름다운 미녀를 한 사람 씩 지키고 있었다.

물빛옷의 미녀와 피처럼 붉은 노을빛 옷의 미녀……

물론 이 미녀들은 인질이 되어 잡힌 사은상과 사옥상이었다.

한데 놀라운 것은,

희미한 광휘가 감사인 인영은 뒤에있는 비성성들과는 달리,

허공을 땅처럼 밟고 있으니……

이때,

능라휘장 속의 그림자가 심하게 떨고 있음을 그곳에 있는 사람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 그림자를 향한 안개속에 휩싸인 인영의 음성,

[내가 왔다.]

음성,

더할 수 없이 장중하고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엄이 깃든,

나직한 음성이었다.

[음……귀하는 누구시오?]

휘장 속의 그림자가 다소 경악한 음색으로 물었다.

[그대 황녹천의 녹림맹을 잠시 빌리고 싶어하는 사람!]

순간,

휘장 속의 그림자,

아니, 정확히 말해,

황녹천의 의혹 서린 음성이 다시 터지고 있었다.

[빌린다?]

[그래, 잠시……]

[후훗……대체 당신은 누구이길래, 그리고 무엇때문에 본좌가 당신에게 이곳을 빌려주겠소?]

황녹천의 물음에,

안개 속에서 만인을 압도하는 음성이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담고 흘러나왔다.

[투귀(偸鬼)는 요즘 어디에 있는가?]

[투……투귀?]

투귀!

신행마동 소일초에게 백인장의 정뇌(井牢) 속에서 도둑질의 온갖 수법과 매화지를 가르쳤던 사마귀 중의 하나……

이 이름을 중원에 살고 죽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모를손가?

중원의 도둑들의 우상이며 신이고 절대자이며 모든 보물의 주인인 이 이름,

황녹천의 경악 서린 음성이 반문하듯 튀어나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이어지는 음성,

[그대가 투귀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말 말고 본인에게 이곳을 빌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게 바로 녹림맹을 살리는 길이기도 할 것……]

[…………]

[투귀는 백인장에서 탈출했다. 천하에 숨을 곳이 이곳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나는 백인장의 전권을 지닌 사람, 사마귀를 죽이고 살리고는 오직 그대의 결정하나에 달려있다.]

[…………]

[빨리 사마귀에게 연락을 취하고 바로 이 곳을 잠시 동안만 넘겨라.]

[…………]

[그러면……]

[그러면…?]

[빌리는 기간은 단 열흘, 그 후에는……그대들의 녹림맹이 삼성무림청을 물리치고 영원히 녹림맹 단독으로 숲을 장악하도록 해 주겠다.]

안개속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

바로 천하의 말썽꾸러기 신행마동 소일초가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

하나 지금,

만인을 잡아끄는 위엄과 힘을 지니고 흘러나오는 음성,

그것은 절대 소일초의 음성이 아니었다.

과거의 어떤 자가,

신행마동 소일초의 음성을 들어보았던 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필경 저 안개 속의 음성이 죽었다 깨어나도 신행마동 소일초의 음성이 될수 없다고 단언하리라!

[…………!]

침묵,

황녹천은 이 엄청난 제안에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수하들과 취할 수 있는 모든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그 정교한 기관장치에 의한 연락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곧,

녹림맹의 모든 기능이 바로 저들에 의해 이미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음……]

능라휘장 속의 황녹천의 입에서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바로 이때,

슈_____ 슛……!

오오……

안개속에서 번쩍이는 소일초의 한 손,

그리고 백색의 광채가 네 줄기……바로 화산파의 절기인 매화지(梅花指)가 아닌가?

아도래영이라 적혀진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쓰러져 있는 네마리의 비성성의 몸에백색 매화지가 소리없이 가격되었다.

동시에,

혈이 타동된 듯 벌떡 몸을 일으킨 네 마리의 검은 비성성!

그들의 눈에 흉악한 광망이 폭출되었다 싶은 순간 소멸되고,

슬금슬금……

그들은 소일초의 안개에 가려진 몸 뒤로가서 조심스럽게 시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슈_______ 슛________!

안개속의 소일초의 손에서 어느새 맑은 빛이 반짝하며 폭출되어 대리석 바닥을 쩡쩡 때리고 있었다.

찰나,

쿠르르릉……!

흔적도 없이 닫혔던 대리석 바닥이 열리고,

[이 간교한 놈……가만 두지 않겠다……!]

한 마디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숫______ !

하나의 인영이 치솟아 올랐다.

소녀(少女),

도저히 인간이라 여길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녀였다.

그 몸을 가리고 있던 검은 안개는 어딘지 사라져 버리고 백의가 선명하게 드러난 주소아였다.

그녀 한 몸에서 서려나오는 살기는 일시에 휘장을 펄럭거리게 하며 황녹천을 조각내 버릴 것처럼 엄청났다.

이 순간,

그녀의 눈이 한 쪽에 서있는 소일초와 두 포로를 발견하고,

[응……왔어? 재수가 조금 없었어……]

이때,

안개가 스르르 사그라지면서 소일초의 모습이 나타났다.

[킥…! 허풍 잘 떨던데……나보다 먼저 무림에 나왔으면 신행마녀라는 호칭은 따고도 남았을 거야……]

본래의 장난꾸러기 목소리였다.

황녹천은 그 모습을 보고 얼떨떨 해 져 버렸다.

그는 백인장주인 도왕 소선풍이 아닌가 의심했었던 것이다.

주소아는 함정에 빠졌던 지라 자존심이 상당히 상해있었다.

[황녹천! 대체 어떻게 할 거야? 우리에게 녹림맹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아니야?]

중원제일의 신비인 황녹천에게 고함을 치면서 분풀이를 했다.

[이런 꼬마들이었다니……기가막힐 노릇이군.]

황녹천이 중얼거렸다.

[이봐! 황녹천, 괜히 신비한 척 하지마. 나도 네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야. 설마 내 입으로 밝혀야만 믿는 것은 아니겠지?]

소일초가 친구에게 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서 사마귀를 잘 알고 있지?]

[하하하……한때 사마귀와 내가 서로 교류한 적이 있었지.]

[……?]

[사마귀는 나에게 자신들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나는 그들에게 정뇌를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

[…………]

[한데, 나는 교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나에게 사부라고 부르라고 하더군, 제기랄……가르쳐 주는 것은 똑같았는데……자기들이 가르친 것은 무공이라고……]

[…………]

[쯥, 그때는 따로 사부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어서 불러줬지, 하지만 이제는 안돼, 물려야 되겠어, 그 후로 훌륭하신 분을 사부로 모시게 됬거든……]

사부를 무른다?

한 번 사부면 영원한 사부지 무르는 법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황녹천은 어이가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사마귀에게도 연락을 좀 해주실까? 할 것이 있으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은 습관이거든,]

[사마귀는 지금 이곳에 없다. 그러나 연락은 해 주지……]

이때,

주소아가 소리를 질렀다.

[사마귀진 당랑인지 엉뚱한 소린 그만 두고 당장 내 물음에 대한 답변부터 해!]

잠시의 긴장과 침묵이 흘렸고 이윽고 알 수 없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도대체 성별조차 구별할 수 없는 황녹천의 음성이 떨렸다.

[좋소……대신 그 기간은 열흘 뿐이오.]

[흥, 그 대답이 당신을 살렸어, 그럼 빨리 다른 곳에가서 잠이나 마저 자라구……]

차갑게 흘러나오는 주소아의 음성,

휘장속의 황녹천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너무 기분나빠 하지마. 사귀다 보면 그 여자도 좋은 여자야.]

소일초의 달래는 듯한 말이 나오자 황녹천은 더욱 어처구니 없어지고……

아뭏든 이 밤은 기이한 의미를 함축한 채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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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二 章

 

         고찰에서의 밀고 당기기

 

 

 

사위에는 어둠이 내려 깔리고,

장강을 굽어 보고 있는 크지 않은 산,

황페한 고찰(古刹)의 대웅전 안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검고 흰 짐승들이 십여 마리……

그리고,

초췌한 모습이지만 아름다운 두 처녀와, 마주 앉은 두 소년소녀……

불전(佛殿)에 불(火)을 피우고 산돼지 한 마리를 통채로 굽고있는 이들은,

바로 소일초와 주소아 일행이었다.

재치있는 주소아는 요리에도 일가견있었다.

내장을 긁어내고 솔가지로 배속을 채운 돼지를 슬슬 돌려가며 굽는 품이 여간 솜씨가 아니다.

---꼴깍……꼴깍……

누군가의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소아는 다 굽힌 돼지의 살점을 이리저리 발라내더니,

먼저 비성성들에게 똑같은 양으로 배분해 주었다.

아마도 먹을 것을 잘 챙겨주는 것이 비성성들의 인기를 얻는 비결이 아닐까 싶은데……

[자……이건 두 푼수 언니들……]

사옥상과 사은상 남매에게 한 덩어리의 갈비를 휙 던져 주었다.

그녀들은 이미 혈도가 풀렸지만 감히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옥상은 고마워하면서 당장 입으로 가지고 갔으나,

사은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흥! 좋을 대로……]

주소아는 코웃음을 치면서 돼지의 꼬리를 잘라냈다.

[자……이건 네 것……]

[안돼! 그게 뭐야……]

[이게 돼지꼬린지 알긴 아는구나. 그럼 네가 오늘 한 것도 돼지꼬리보다 많지 않다는 것도 알텐데……]

[안주겠다는 거야?]

[고기를 먹을 값은 해야지……설마 뭔 말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알았어.]

소일초가 번쩍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기 숨어있는 놈들 빨리 나오는게 시체라도 온전히 보전하는 길이야……]

낭랑한 그의 목소리가 대웅전을 메아리치고……

고찰 주변에 널리 울려퍼졌다.

순간,

[으하하하하-------!]

긴 웃음소리를 더날리며 대웅전 건너편의 지붕위에서 검은 인영이 대웅전 앞으로 날아왔다.

[꼬마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군. 모두 나오너라……]

그가 손을 높이 쳐들자 여기저기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대웅전을 포위하고 쏟아져 나왔다.

이때,

은근히 주소아와 소일초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사은상이 사옥상의 손을 잡고 대웅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총순찰님!]

[으하하……두 분 공녀(公女)께서는 더 이상 아무 염려 마십시오. 이 총순찰 독장수사(毒掌秀士)가 왔지 않습니까?]

흑의인들에게 날아가는 그녀들을 주소아도 소일초도 저지하지 않았다.

주소아는 단지 비성성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올라가라고 했을 뿐이다.

[너희들이 내 저녁값이다.]

소일초는 오척도 되지 않는 몸을 당당히 세우며 독장수사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이때 사은상이 소리쳤다.

[조심해요……그가 바로 신행마동이예요……]

그 말에 독장수사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소일초를 깔보는 듯이 말했다.

[나는 무림에 떠도는 소문을 잘 믿지 않는다. 본좌와 일 장을 마주쳐보겠느냐?]

[나는 무림의 허풍장이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어디 본좌의 일 검을 받아보겠느냐?]

소일초는 그의 어조를 흉내 내어 그대로 말했다.

[이놈! 어디 내 일 장을 받아라……]

독장수사는 큰소리로 분노를 터뜨리며 허공에 무수한 장영(掌影)을 만들었다.

비릿한 냄새가 그의 독장에서 가득 공기중으로 스며들고……

그것들은 오장의 거리는 두고 있던 소일초의 가득 에워쌌다.

갑자기 손그림자와 독향기를 뚫고 검은 기운이 치솟아 오르는 순간,

털석-----

손 그림자도……

독향기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불신의 표정을 지은 그대로 독장수사의 몸이 뒤로 무너져 버렸다.

그의 몸에서 남아있는 것은 꼭지가 날아가고 얼굴만 남은 머리와……

팔꿈치에서 잘려져 나간 양팔……

그리고 무릎어림에서 잘려져 버린 두 다리……

그러나, 결정적인 사인(死因)은 위쪽이 날아가 버린 두개골이었다.

독장수사……

삼성무림청의 총순찰을 맡을 정도로 대단했던 악독한 마음과 악독한 무공의 소유자……

독장 이외에도 은밀히 사용하는 암기로 인해 사파무림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소일초의 너무나 강맹한 무공에 아무런 심계도 수단도 사용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독장은 백독불침, 만독불침이라 자부하는 고수들의 목숨마저 어이없게 앗아가곤 했었는데……

사옥상과 사은상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버렸다.

그토록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그녀들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었다.

[모두 한꺼번에 공격해라……]

사은상이 대웅전을 포위한 흑의인들에게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며 사옥상의 손을 잡고 허공으로 솟구쳐 도망쳤다.

이때,

[또 놓아줄 작정이야?]

주소아의 뾰루퉁한 목소리가 들리고,

소일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절대 안되지……]

번쩍------

그의 손에서 일순 맑은 광채가 번쩍이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윽---------!

캑---------!

수정검우가 빛살처럼 빠르게 날면서 흑의인들을 거의 동시에 쓰러트려버렸다.

그리고,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사라지고 있는 사씨 자매의 뒤를 쫓았다.

[정말 무서운 무공이야……특히 독장수사를 죽인 그 검법은 생사보록에 있는 어떤 무공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어……]

주소아는 소일초가 펼쳤던 일초의 검공을 생각하며 감탄했다.

[이랬던가? 아니……이랬던가?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네……]

소일초가 펼친 일초의 검법,

그가 사부인 검마에게서 삼 년동안 갖은 고생을 하면서 익힌 것이다.

이초가 필요없는,

그래서 소일초의 이름과 더욱 잘 맞아떨어지는 검법이라는 것을 주소아는 알리가 없다.

손으로 흉내만이라도 내보려 했지만 그마저 잘 되지 않았다.

 

× × ×

 

소일초는 저녁 값을 톡톡히 치르고 산돼지 고기를 포식했다.

그가 다시 붙잡아온 사씨 자매는 대웅전 한쪽 구석에 곱게 모셔져 있다.

물론, 이제는 혈도가 단단히 집힌 채……

비성성 중의 하나가 가져다 놓은 모포 두장은 소일초와 주소아가 각기 한 장씩 차지하고 누웠다.

배는 불러서 만사가 귀찮은데……

소일초의 머릿속으로는 끝없는 상상이 나래를 펴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포를 돌돌 말고 있는 주소아를 힐끗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구석에서 그냥 맨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는 사씨 자매를 보았다.

(일단 한 숨 늘어지게 자고 색귀사부의 말을 검증(檢證)해 봐야지……)

글쎄……

주소아는 몰라도 사씨 자매가 이 열 살 짜리 꼬마의 음흉한 속을 알기나 하고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을까?

어둠이 가득한 대웅전에는 주소아의 몸에서 나는 낮은 휘파람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데……

 

…………

여전히 낮은 휘파람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대웅전,

소일초의 몸이 살그머니 모포속에서 빠져나와, 누운자세 그대로 둥둥 허공을 가로질렀다.

대웅전 한 켠 구석에 웅크리고 몸을 뉘고 있는 여자 냄새 물씬 풍기는 두 여인은 포로의 몸이 건만,

얼마나 피곤했는지 선연한 굴곡을 드러낸 채 잠자고 있는 중이었다.

(주소아는 한동안 같이 있을 테니까 기회가 계속 있겠지만, 이 냄새나는 여자들은 인질가치만 없어지면 작별이니 더 급하지……)

소일초는 둥둥 떠 있는 상태에서 슬며시 손을 뻗어 사옥상의 가슴을 더듬었다.

도둑질을 사사받았던 소일초의 손이다.

사옥상의 가슴을 흔적도 없이 파고들어가 그녀의 큼직한 유방을 만졌다.

짜릿한 전율과 훔친다는 흥분으로 소일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히히히……이건 작은 어머니 가슴만질 때와는 아주 다르잖아?)

사옥상의 부드러운 살결위로 손을 미끄러져 내려가며 전신을 쓰다듬었다.

순간,

그의 손이 막 그녀의 배꼽을 지나서 밑으로 내려갈 때였다.

[으응……]

사옥상이 낮은 콧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잠이든 상태에서도 자신의 몸을 스물스물 하는 손길을 느끼며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중이었다.

신지(神智)가 조금 부족한 그녀는 어떤 가식이나 윤리관도 존재하지 않아서,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것이었다.

소일초의 은밀한 손에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편안한 자세로 몸을 내맡겼다.

(이 여잔 내 마음에 쏙 드는데……내가 편하게 해주고 있잖아?)

기분이 더욱 좋아지면서 슬금슬금 그녀의 배꼽 밑,

마지막 탐사지 일 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손을 내렸다.

(응? 이거 요대(腰帶)가 가로막고 있잖아? 하는 수 없지……)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유방으로 가서 이번에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슬며시 사옥상의 흰 치마를 걷어 올리며 허벅지를 쓰다듬어 올라갔다.

소일초의 신체 한 부분이 어떤 흥분으로 인해서 경직되었다.

그것은 오줌 누기 전과 비슷한 것같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사옥상의 치마 밑으로 파고들었던 소일초의 손이 두 다리가 나누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장애를 만나고……

얇고 보드라우며 조그마한 마지막 천을 밀치며 손을 들이미는 순간,

[그곳은 안돼……]

사옥상의 나지막한 그러면서도 기대에 찬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움찔하면서……

소일초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는 사옥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기를 꿈꾸는 듯 영롱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거칠어진 그의 손길에 깨어난 것 같았다.

[그곳은 안돼……]

다시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고 소일초의 얼굴이 빨개졌다.

[기분은 아주 좋아……하지만 그곳은 어쩐지 이상해……]

(기분이 좋다고? 나도 이상하면서도 기분이 좋은데……)

그때까지 공중에 떠있던 그의 몸이 사옥상의 몸위로 내려앉았다.

푸근하고 안락한 느낌……

그리고 주체하지 못할 짜릿한 기쁨……

그녀의 얼굴에서는 소일초를 자극하는 향기가 있었다.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소일초의 몸 밑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배꼽에는 지금,

그의 무공만큼이나 나이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소일초의 경직된 물건이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오십근도 되지 않는 그의 몸에서 그것의 무게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모양이다.

소일초는 강렬한 흥분을 느끼면서 색귀가 가르쳐 주었던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녀의 몸 위에서 바지를 내리려 했다.

그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데……

툭툭-----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앗불싸……깨어진 산통……)

[이 꼬마 색마……!]

독이 잔뜩 오른 목소리로 주소아가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모든 흥분이 사그라들어 버리고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는 소일초였다.

(내가 너한테 그런 것도 아닌데……웬 성화야……)

그러나 그의 입에서 그 말은 나오지 못하고 쑥 들어가고 말았다.

사옥상은 단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버렸지만,

그 옆에 누워있는 사은상의 감고 있는 두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기사,

옆에서 공사를 하려는 데야 아무리 둔한 사람도 깨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사은상은 모자라는 동생의 어치구니 없는 치정과 포로가 된 여인의 신세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소일초는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유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옥상은 분명히 기분이 아주 좋다고 했는데……)

[이 색마(色魔)! 나하고 아무래도 결판을 내야겠어……]

주소아는 그의 귀를 당겨서 대웅전 밖으로 나갔다.

휘파람소리가 귀속으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소일초는 주소아의 손에 끌려서 역시 대웅전 못지않게 황폐한 나한당으로 들어갔다.

 

[…………]

[…………]

주소아는 새파랗게 빛을 내면서 소일초를 노려보고 소일초는 찔리는 바가 있어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피했다.

[똑바로 들어둬! 네가 도둑질을 하거나 도박을 하고 술을 먹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어……]

[…………]

[그런데, 내가 한 쪽에서 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항도 하지 못하는 여자를 건드린다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소일초가 화를 내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제길……그럼 너를 건드리란 소리야 뭐야?]

[이게 그래도……]

 

짝------!

 

소일초의 뺨을 갈겨버리는 주소아였다.

[좋다! 어디 한 번 싸워보자. 이 계집애가 봐줬더니 천지를 모르고 설쳐?]

소일초는 펄쩍 뛰면서 뒤로 물러났다.

주소아가 코웃음을 쳤다.

[흥, 검만 쓰지 않는다면 너 따위 색마에게 내가 질줄 알고?]

두 팔을 벌려 몸 앞으로 늘어뜨리며 독특한 자세를 취했다.

[계집애 따위에겐 검을 쓸 필요도 없지…… 자 덤벼……]

[이 색마! 하늘이 얼마나 넓은 지 보여주마……]

주소아의 몸이 두 팔을 벌린 상태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몸이 한 번 씩 도는 순간 마다 하나 씩의 분신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원신(原身)에서 분리된 분신들은 분리되자마자 나한당을 가득 메우면서 소일초를 공격해 왔다.

소일초는 그녀의 기이한 술법에도 불구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미 검마의 진전을 이어서 오직 일초로서 어떤 무공이던 제압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심코 검으로 손이 가다가 멈칫 했다.

검을 쓰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소아의 분신들은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검결을 묶어서 두 손가락을 앞으로 쭉 뻗어냈다.

검마의 일초검공이 손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의 손가락에서 발출된 기운이 환영들을 휘감아 버리자……

놀랍게도 그 많던 환영이 봄 눈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저 색마의 그 검법은 확실히 이상한 것이네……분신들 하나하나에 강기가 주입되어 있는데 소리도 없이 사그라져 버리다니……)

[검을 쓰지 않겠다고 했으면 검법도 쓰지 말아야지……치사하게……]

주소아가 첫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빈정거렸다.

그러나 이미 바닥을 차고 올라 허공 가득히 발그림자를 만들며 소일초를 공격해 오고 있었다.

 

쓔-----슈앙-------!

 

나한당 안의 대기는 무섭게 파동치고,

빈정거림을 받은 소일초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팔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주소아에겐 소일초가 그 이상한 검법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싸워 볼만 하다는 계산이 있었다.

내공이 딸리기는 하지만 초식으로 얼마든지 보완할 수도 있다.

생사보록상의 무공들은 절학이 아닌 것이 없다.

소일초가 아무리 많은 무공을 알아도 생사보록에 있는 무공들은 모를 것이다.

게다가 소일초는 백인장에서는 어떤 도법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주소아는 무방비 상태로 서있는 소일초를 보면서 자기의 승리를 점쳤다.

그녀의 무서운 팔황각(八荒却)이 소일초의 전신 십이 대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할 발끝에서 전해오는 감각이 없어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소일초의 몸을 발이 그냥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일초가 혈기자에게 처음에 배웠던 이환공의 위력이었다.

이 무공은 내공이 상대방 보다 고강하기만 하면,

어떤 피신 무공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혈기자가 천축에서 온 어떤 수행자를 만난 이후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만든 독특한 무공이었다.

그 수행자는 유가술(逾伽術)의 달인 이었는데 손이 다리의 중간을 통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일초는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재빨리 뒤로 빠져 나가려는 주소아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아버렸다.

주소아의 일 장이 다급하게 소일초의 천정혈로 떨어지는데……

[아예 날 죽일 작정이구나……이 못된 계집애……]

머리를 숙여 주소아의 가슴을 받으며 뒤로 넘어뜨렸다.

주소아는 묵직한 충격을 느끼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는데,

소일초는 그녀의 몸위에서 허리를 꼭 잡고 엎드려 씩씩 거리고 있었다.

(이 색마는 도저히 내가 못당할 무공을 지니고 있구……어떻게 하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몸 위에 있는 자기보다 조금 작은 소일초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고모가 이 자식을 잘 돌봐 달라고 했는데 나 보다 무공도 더 고강한 걸……)

그녀의 공격이 시작된 후 부터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며 날카롭게 울리던 휘파람 소리는 다시 나지막해져 있었다.

소일초는 그녀의 몸위에서 다시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다음 기회를 볼 것도 없이 당장 휘파람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조사해 봐야겠어……]

주소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일초가 정말로 그러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상기되어 빨갛게 되었다.

[잠깐!]

[할 말이 있으면 어서 말해……]

[지금 뭐 하려는 거지?]

[옷을 다 벗겨보아야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있을 거잖아……대충 짐작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바보야! 휘파람 소리는 내 피부에서 나는 거야. 이건 특이한 내공을 익혀서 그런 거라고……]

[못 믿겠어. 어떻게 사람피부가 휘파람을 불 수 있어? 직접 봐야겠어.]

소일초는 주소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주소아는 소일초의 손을 꽉 잡았다.

[안돼……!]

[너 나하고 싸워서 이겠어?]

[아니……]

[그럼 나는 소득도 없이 싸운 줄 알아? 언제나 싸움에서 진 쪽은 이긴 쪽이 하자는 대로 하는 해왔어. 이건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되어온 만고의 진리라고……]

[…………]

 

………………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소일초는 휘파람을 불면서 대웅전으로 유유히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풀이 죽은 주소아가 따라 들어와 자기의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사은상은 잠들지 않고 있다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자기들의 신세가 저 어린 색마로 인해서 더욱 처량해 질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웅전에서 그들이 나간 후에도 무공이 폐쇄된 지라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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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一 章

 

        꼬마의 捕虜가 된 두 美女

 

 

 

-장강(長江)!

 

파란만장한 중원의 역사와 함께,

그 흥망성쇠를 같이해 온 대 장강(大長江),

광활한 중원대륙을 남북으로 갈라 놓은 채……

중원의 젖줄기로,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날로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 장강을 장악한 무림의 신흥세력 삼성무림청의……

세력팽창을 위한 무수한 혈겁이 자행되고 있었다.

보이는 곳에서……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소방파들과의 치열한 전쟁이 소선풍이 병상에 누운 후 삼 년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미,

장강 주변의 수백리는 삼성무림청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려서 강북의 청옥검궁,

그리고 강남의 백인장, 이렇게 천하를 삼분하고 있는 세력이 된 그들……

지금,

장강은 그야말로 시산혈하(屍山血河)와 아수라지옥도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삼성무림청의 힘은 강대하고……

무인(武人)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끝없이 저항하는 군소방파들……

 

황혼(黃昏),

금빛의 황혼이 서편 하늘에서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바로 그 황혼 아래,

오오……

피!피!피!

겹으로 쌓여 떠내려 가는 시신(屍身)!

이 피와 시신으로 인해 장강의 수위(水位)는 무려 한 자나 불어난 듯했다.

실로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대참상의 현장,

어느 방파가 또다시 멸문의 참극을 격었나?

바로 이 처참한 황혼의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한 야산(野山),

한 천년노송(千年老松)의 그늘 아래……

한 소년과 소녀가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희디흰 백의에 고아하고 고결한 귀풍이 아득한 대양 너머의 햇살처럼 넘실거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대범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짖궂은 데가 있는 것 같은 깜찍하기 그지없는 소년,

오른쪽 옆구리에는 그의 백의(白衣)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짙은 묵빛의 목탁,

왼쪽에는 날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는 집도 없는 시꺼먼 장검,

이런 모습……

무림 하늘 아래 이런 모습을 지닌 소년은 오직 하나,

소일초……

백인장의 소장주인 소일초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소녀……

소일초보다 몇 살 더 많은 듯하나 맑은 눈동자는 지혜로 가득 차있다.

넋이라도 빼앗겨 버릴 듯 예쁜 얼굴에는 어엿한 기품이 어려있는데……

그 가날픈 허리는 저 황혼의 금빛 노을보다 사람의 눈을 더욱 부시게 했다.

[휘이……휘이이……휘……]

붉은 입술은 벌어지지도 않는데……

그녀의 어느 곳에선가 휘파람소리가 울려나오고……

백옥처럼 흰 그녀의 손에는 큼직한 술병이 들려있었다.

주소아……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소일초와 함께 백인장을 나온 주소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소일초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사람도 무더기로 죽어있으니 이토록 잔인, 처참할 수 있구나……!]

소일초는 아주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속으로 그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어리기는 하지만 무림에 뛰쳐 나왔을 때마다 시체를 보기 예사였고,

직접 협행을 한답시고 살인을 한 적도 있는 그였지만,

이렇듯 처참한 광경을 보자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아직은 그가 세상의 비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 죽은 인물들은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대부분이 본 녹림맹에 소속된 인물들인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주소아가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있어……괜한 아는 척은……]

불퉁한 소일초의 말에 주소아는 피식 웃었다.

[삼성무림청의 힘은 듣는 것 이상으로 엄청날 지도 모르겠는데……]

그녀는 얼마나 강심장인지 그 피가되어 흐르는 강을 보면서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야……내 손에서 삼성무림청은 끝장이 나게 되어있어……]

[어떻게…?]

소일초가 오른쪽 허리에 걸려있는 검은 목탁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면 만사형통이지……]

그는 주소아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받아서 한 모금 들이켰다.

[목탁만 두들기면 금강역사(金剛力士)라도 나타나서 싸워주기라도 하니……]

[나중에 다 알게 돼……너는 구경만 하면 돼.]

술병을 건네주면서 소일초는 그녀의 왼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빨았다.

그러나,

이미 그동안에 그런데 익숙해졌는지 그녀는 궁금하게만 여길 뿐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주소아는 소일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소일초, 그 역시 마다하지 않고 호수처럼 맑은 주소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네 머리통을 한 번 열어봐야 되는데……그 속에 얼마나 황당한 것들이 들었는지……]

[언젠가 네 몸을 샅샅이 조사해 봐야 하는데……그 몸 어디에서 휘파람소리가 나오는지……]

한마디도지지 않는 소일초의 말에,

주소아가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막 후려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잠깐, 주소아……]

소일초의 시선이 재빨리 돌아가 한곳에 고정되었다.

시신(屍身),

장강을 떠내려가고 있는 시신의 위를 밟고……

쑷……슛……슛……슛……

날렵한 인영(인英)하나가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

여인(女人),

날렵한 인영은 이십 세 가량의 성숙한 소녀였다.

백옥(白玉)처럼 희고 투명하며……

눈부실 만큼 흰 빛의 발광체(發光體)를 뿌려내는 피부를 지닌 소녀,

그 피부는 너무 맑고 투명하여 핏줄 하나하나까지 투영되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마저도 물빛이어서……

그녀의 신비로운 피부와 은은하게 투영되는 물빛 옷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속에……

소녀의 용모 또한 천상(天上)의 선녀처럼 아름다우니……

감히 그 어떤 자가 이 소녀를 하계의 인간이라 여기랴?

[휴……아직도 많이 멀었어……]

슈슈……슈슈슈슈……

시체를 이리저리 밟고 다니며 무엇인가를 유심히 살피던 그 소녀는 쉴 새 없이 흥얼거렸고,

간간이 그 속에서 실망에 찬 음성을 흘려내고 있었다.

[이건 아예 동공이 파열되지 않았잖아………]

슈……슈……슈슈……슛……

문득, 한꺼번에 십여 장을 날며 이리저리 시체를 살피던 그 소녀가,

힐끗 소일초와 주소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주소아의 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소일초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가 싶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곧,

생긋……

소녀의 얼굴에 수초(水草)처럼 해맑은 웃음이 피어오르고,

[꼬마…뭘봐…]

그녀는 소일초를 향해 낼름 혀를 내밀었다.

동시에,

번____ 쩍_____

삼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날아 소일초의 면전에 내려서는 것이니……

그 모습은 마치 선녀처럼 천진하고 귀염성이 있었으며 아름다웠다.

[어머……웬 애가 이렇게 귀엽게 생겼니? 너도 아주 예쁜 계집애구나……]

소일초와 주소아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며 바쁘게 재잘거렸다.

그러나, 소일초는 일체 입을 열지 않은 채 소녀를 지켜보기만 했고,

주소아가 한마디 톡 쏘았다.

[그래, 나는 예쁜 계집애다. 이 경박한 계집애야!]

한 순간, 물빛 옷의 소녀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있었다.

[애, 나는 열 아홉 살이야……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돼. 이곳은 지금 위험하니까 내가 집에 데려다 줄께……]

그녀는 친절하게 말했지만 주소아는 조금도 뉘우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집에 가기만 하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걸? 물론 가지 않아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는 물론 소일초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소일초와 그 소녀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렇게 머리가 돌이니? 이 여자가 바로 저 녹림맹의 사람들을 죽인 흉수란 말이야……]

주소아는 소일초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설마?]

[맞아……나는 사옥상(史玉翔)이라고 해……저기 저 사람들은 내가 다 죽였는데……내 혈옥수(血玉手)가 얼마나 강해졌나를 보려고 죽은 사람들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어……]

(뭐……뭣이라고…… ?)

소일초는 분노 이전에 아예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이 사옥상이라는 아름다운 소녀가 저 많은 사람을 해쳤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려니와,

그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저토록 태연히,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소녀,

그녀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맑은 웃음만 가득하니……

이때 사옥상이라는 소녀의 은근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한데 아직은 멀었어……혈옥수가 십이성에 이르면 동공과 뇌가 파열되고 혈맥이 갈라져야 하는데……동공은 아직도 파열되지 않고 있으니……]

이때,

소일초는 주소아와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주소아가 공력을 가득실어 그의 발을 꾹 눌러 밟았다.

[아야……아아……]

사옥상의 얼굴에 화들짝 놀람의 빛이 일었다.

[애, 너 어디 아프니……안됐구나……너처럼 예쁜 아이가……]

그녀의 좀 모자란 것 같은 언행(言行)에 주소아도 눈이 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이 여잔 좀 모자라는 것 같은데, 무공만 강한 모양이군……저 말썽꾸러기처럼……)

[…………]

이때, 사옥상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좋아……이것은 우리 사부님께서 특별히 내게만 준 것인데……불사환혼단(不死還魂丹)이라고 하지……먹으면 만병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이야. 특히 혈맥을 이어주는데 특효가 있지]

사옥상은 품속에서 한 알의 향기(香氣)로운 알약을 꺼내들었다.

소일초는 귀가 번쩍 뛰는 것 같았다.

(혈맥을 이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그런데,

그 알약에 엉켜 한 개의 오색영롱한 명패까지 달려 나오자,

[에이……이것도 가져……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

[우리 언니가 말하기를……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주어야 하는 것이래……]

[…………]

[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애이니……이것을 주어도 되겠지 뭐.]

불쑥!

한 개의 알약과 명패를 내밀자,

소일초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그것들을 받았다.

바로 이때였다.

돌연,

[철부지 사옥상!]

심장까지 얼어붙게 할 차가운 음성이 하늘 저 끝에서 울려왔다.

순간,

[크……큰일났어……우리 무서운 언니인 사은상(史銀翔)이야……]

[……?]

[절대 그것들을 내가 주었다는 것을 비밀로 해야 해……]

화라락……

사옥상은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늘씬한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건 안돼! 너는 여기 남아 있어야 해!]

슉----!

주소아의 손이 벼락처럼 떨쳐지자,

한 줄기 파란 빛이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가 사옥상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턱석-----!

미처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기습을 받은 사옥상의 몸은 추락했고 다시 주소아 앞에 끌려왔다.

사옥상은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언제 아혈이 찍혔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소일초는 단지 주소아를 쳐다 볼 뿐인데,

그녀는 체대(體帶)를 회수하며 사옥상의 몸을 노송의 옆에 밀쳐놓았다.

[째끄만 게……벌써 이쁜 여자만 보면 넋이 빠져 가지고……옛다 무림정벌 여기 있다.]

소일초의 얼굴이 벌개졌다.

[게다가 이건 왜 나이 값도 못하고 아무한테나 꼬리를 쳐? 뭐 제일 예쁜 사람 만나면 주는 거라고?]

[너……]

소일초가 막 반박을 하려고 할 때였다.

돌연,

캬아아욱______!

동시에,

스스스슷……

소일초의 면전에 일자로 날아 내려선 다섯 명의 혈의노파(血衣老婆),

하나같이 차고 싸늘한 눈빛에,

섬뜩한 핏빛 기운을 느끼게 하는 노파들이었다.

그들 피빛 마기의 다섯 노파를 헤아린 소일초의 가슴은 절로 서늘한 한기가 치밀어 오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한데,

[내놔! 두 가지 모두다.]

어디선가 한 가닥 북극한빙(北極寒氷)처럼 차가운 음성이 소일초의 지척에서 터지는 것이 아닌가?

[멍청한 계집애 결국 일을 내고야 마는구나……]

소일초와 주소아의 눈빛에 언뜻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분명,

다섯 명의 노파는 일자로 늘어선 채 돌부처처럼 서 있으나……

소일초와 주소아는 벌써부터 다섯 노파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얼음장처럼 싸늘한 한기가 바로 자신의 지척에서 뻗어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보아도 텅 빈 허공뿐인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풀리는 음성까지 들어야 했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음……무서운 고수가 특이한 내가기공으로 자신의 몸을 투명체(透明體)하게 숨기고 있는 모양이다.)

(음성으로 미루어 보아 젊은 여자인 것 같은데……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바로 사은상(史銀翔)……)

일단,

두 사람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가지라니?]

소일초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불사환혼단과 의정패(依情牌)!]

심장을 얼리는 듯한 차가운 음성이 또다시 소일초의 지척에서 울려나왔다.

(음……의정패라……조금 전 그 옥패를 일컫는 모양인데……이건 필요없지만 이걸 주면 그 약까지 달라고 하겠지?)

소일초는 태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은 모르는 것인데……]

[흥, 사람을 옆에 잡아 놓고도 시치미를 뗄 작정이냐?]

[무슨 사람? 아무도 안보이는데…………]

주소아 역시 뻔뻔스럽게 사옥상을 빤히 보면서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 했다.

[그럴 리 없어……너의 눈이 착각을 일으킨 것일 거야. 네 몸도 착각을 일으켜 보일 것이 보이지 않는 데, 눈은 거꾸로 된 게지……]

보이지 않는 것이 눈이 잘못되어 보이는 것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말이었다.

찰나 소일초는,

푸스스스스……

심장을 얼릴 것 같은 한기가 자신의 몸에 소용돌이쳐 옴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자신의 왼편에서 흘러나오는 한음,

[말로해서는 도저히 안될 녀석이군……사옥상이 네게 준 의정패는 본녀가 지닌 의정패와 서로 교감을 가지는 것이니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이 없을 터……]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다섯 노파는 멀리서 주소아의 솜씨를 목격했는지 신중한 자세로 천년노송 곁에 쓰러져 있는 사옥상을 향해 다가갔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아마 목 위의 물건을 잃어버리게 될 걸?]

주소아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경고를 던졌다.

[…………]

노파들이 냉소를 터뜨리면서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것과 동시에,

스스스……

소일초는 자신의 왼편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서늘한 손의 감촉을 느꼈다.

(음……손……)

투명인간이 된 상태로 소일초의 왼편 가슴을 뒤지고 있는 손은 비록 싸늘하고 차가웠으나,

한 편으로는 매우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전하고 있었다.

주소아의 손에서 다시 파란 빛줄기가 벼락처럼 폭출되고,

소일초의 가슴을 헤집던 손이 왼편 가슴에서 오른편 가슴으로 옮겨지고 있는 순간,

[크악-----!]

[큭---크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노파들의 머리만 허공으로 솟구치며 붉디붉은 선혈을 공중에 뿌렸다.

또한,

소일초의 작고 흰 손이 바람처럼 움직여 가슴편에서 무엇인가를 낚아채는 시늉을 하자,

[헉!]

차가운 비명이 허공에서 울리는 가 싶더니,

스슷……

피처럼 붉은 노을빛 광채를 드리운 아름다운 손(手) 하나가 형체를 나타내는 게 아닌가?

오오, 그리고……

스슷……

팔뚝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스슷……스슷……

몸체와 다리와 눈, 코, 입, 귀가 불쑥불쑥 형체를 드러내는 것이니……

마침내 완전한 한 명의 인영이 소일초의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빛 적의(赤衣)를 입은 소녀,

사옥상과 생김새는 놀라울 정도로 완전히 같았으나 또한 완전히 상이한 기질을 지닌 소녀였다.

피처럼 붉은 적의(赤衣)에……노을빛 붉은 서기를 뿌려내는 붉은 피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붉은 기운만 느끼게 하는 소녀였다.

그 속에 은은히 풀려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寒氣),

그러나 그녀의 옥용은 그 어떤 여인에게도 뒤지지 않을 살인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니……

한데 지금,

싸늘한 한기가 가닥가닥 터지는 아름다운 옥용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다.

지금 그녀의 오른손 맥문(脈門)은 소일초의 작지만 다부진 손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얼음조각을 토해내는 듯한 혈의 소녀의 눈빛이 파릇한 경련을 일으키고……

(이 꼬마도 이처럼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니……어떻게 나 사은상의 무형혈수(無形血手)를 이토록 간단히 제압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은상은 도저히 소일초의 조그만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느끼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더욱 참담한 기분에 젖어갔다.

몸뚱이를 잃은 노파들의 다섯 개의 목이 저만큼 날다 떨어졌다.

사은상의 싸늘한 동공은 더이상 경악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헉……이들은 누구이기에……혈파파(血婆婆)들마저 일 수(一手)에 ……!)

바로 이때였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인가?

사은상은 자신의 맥문을 잡고 있던 소일초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와 더불어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빠른 생각,

(우선……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생각과 동시에,

사은상은 소일초의 손에서 번개처럼 손을 회수했다.

이어,

푸스스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희미하게 화해 허공에 솟구치는 것이니……

실로,

그 빠름과 민첩함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어째 여자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까?]

한 마디 퉁명스러운 목소리,그리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와 함께,

번쩍______ !

한 줄기 흰 빛이 날카로운 섬광을 그렸다 싶은 순간,

사은상은 원래의 그 자리에서 주소아의 손에 맥문이 잡힌 채 경악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지 않는가?

너무도 놀라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사은상의 노을빛 얼굴은 두려움마저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일초를 향한 음성,

[너……너희들은 누구지?]

[신행마동! 그리고 너를 인질로 잡은 주소아!]

말을 하는 주소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신행마동? 인질?]

경악으로 되물어 오는 사은상,

신행마동……

바로 삼성무림청을 정벌해 버리겠다고 큰 소리친 백인장의 악동이 아닌가?

무공은 날 때부터 고강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너는 삼성무림청에서 아주 중요한 신분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지?]

주소아는 비웃듯이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서 이번에는 정말로 긴 휘파람을 입으로 불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도 덩달아 높이 울렸고……

허공에 높이 떠있던 비성성들이 일제히 내려왔다.

사은상은 비성성들의 기괴한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영혼이 한없이 탈수되어가는 충격과 함께 아득히 정신을 잃었다.

소일초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사옥상을 잡은 것도 사은상을 잡은 것도 주소아였으며,

혈파파들을 처치한 것도 주소아였다.

게다가,

비성성들을 불러서 마무리하는 것 까지 그녀가 했다.

백인장에서 부터 순진한 비성성을 여러 가지 물건들과 맛난 음식으로 꼬드긴 주소아는 비성성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었다.

소일초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지금은 네가 나서서 어디 마음대로 설쳐봐라……지금 이 도련님께서는 오직 여인의 신비에 눈뜨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마……)

주소아는 소일초에게서 빼앗듯이 불사환혼단을 받아서 비성성 중의 한 마리에게 편지와 함께 넘겨주었다.

[이 천박한 계집애들은 허공에 띄워 놓으면 아무데도 도망치지 못하겠지?]

그녀는 두 미인포로들 마저 비성성에게 맡겨버렸다.

혈도를 찍히긴 했으나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사옥상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렸다.

그녀들과 비성성들이 허공으로 올라가 버리자 소일초는 입맛을 다셨다.

(옆에 두고 있으면 더 깊이 연구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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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章

 

          신나는 武林出道

 

 

 

백인장,

이곳의 정예 백인도객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신행마동 소일초의 출현과 함께……

그 동안 발뒤꿈치를 들고 장주의 흉수와 소일초를 찾아다니던 그들이,

준동(駿動),

준동의 거대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백인장의 동녁 하늘에 고스란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 힘의 여명은……

소일초와 장주인 도왕 소선풍의 해후가 있었던 그날로부터 열흘 후,

그리고,

정식으로 신행마동 소일초의 무림정벌(武林征伐)을 선언한 칠일 후의 여명이었다.

 

이 아침의 싱그러운 여명에 쌓인 백인장 깊숙한 국화원(菊花園)에는,

사방이 온통 국화의 천국이었다.

화향이 천지를 진동하고,

온갖 국화의 색깔이 다투어 핀 이 국화의 바다……

이 화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듬성듬성 솟아난 잡초를 손수 제거해 가던 백인장 원로 십팔도객의 제일 원로인 동평선생(東平先生),

은은히 흐르는 비범한 기질도 기질이려니와……

절정의 도객답지 않게 지혜로 충만하여 고요로운 눈빛……

돌아온 소장주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이 다 사라져 버렸는가?

그의 한몸에 여유가 충일하여 넘친다.

[봄에는 매화……가을엔 국화…… 이 어찌 꽃 중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한데 돌연,

무심히 국화에 취해 잡초를 제거해 가던 동평선생의 손이 빠르게 허공에 휘저어졌다.

동시에,

어느 곳, 어느 방향에서 날아든지 모를 하나의 비찰이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니……

동평선생은 조용히 그 비찰을 펼쳐 읽었다.

순간,

동평선생의 무처럼 잔잔한 얼굴에 빠른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부로 백인장은 일체 강호활동을 중지함. 단 본인은 제외. 불복자는 처단할 것임. 외부에서 활동하는 백인장의 가족들도 조속히 귀환조치 할 것. 특히 십팔원로는 일체 잔소리하지 말 것. 이상.

신행마동 소일초.>

 

[이런……이런……]

동평선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서찰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이어,

제거해 가던 잡초를 내던지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말썽꾸러기……이제 철 좀 들었나 했더니 고작 며칠 만에 본색을 드러내? 무림에 혼자 나가서 뭘 어쩌겠다고……그리고 나보고 일체 잔소리 말라고?]

여명 아래 그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원로십팔도객의 우두머리이다. 소일초가 날 때부터 손자처럼 귀여워 했던 그였다.

[안될 소리……안될 소리……]

그의 심해처럼 맑은 눈은 떨림 속에 다시 비찰의 내용을 더듬었다.

분명,

비찰의 마지막에 찍힌 것은 패도구룡인(覇刀九龍刃)의 흔적이다.

[이……무슨 얼토당토 않은 짓……]

이어,

동평선생은 국화원의 한곳으로 다급한 음성을 던졌다.

[사호동(四護童)은 즉각 다른 원로들에게 알려라……직접 소장주께 확인할 것이다.……]

동시에,

스스스슷……

짙은 화향이 밀려오듯이 국화밭의 한 편에서 황색(黃色)의 작은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솟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마도 그들이 사호동인 모양이었다.

동평선생도 첩지를 재빨리 품속에 넣고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동시에,

스스………스슷……

사호동보다 더욱 빠르게 허공을 땅처럼 밟고,

순식간에 국화원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정실,

정실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박하면서도 성결한……

그리고도 귀풍에 흠뻑 젖어 있다.

이 정실은 바로 소선풍이 병상에 누운 이후로 조예진이 거처하는 곳이다.

지금,

조예진은 치렁치렁한 소일초의 흑발을 가지런히 빗겨주고 있는 중이었다.

더 없이 자상한 손길과……

더없이 자애로운 눈빛이 하나의 동경(銅鏡)속에 비치고 있다.

한데 문득,

조예진의 따사롭고 자애로운 눈빛에 가득한 염려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래 꼭 혼자 떠나겠단 말이냐?]

[예……저 혼자 그들을 상대하고 싶어요. 작은 어머니……]

소일초의 음성엔 묵직한 의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그의 악동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으나……

지금 내뱉는 소일초의 음성은 옛날과 확연히 틀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즉,

말썽만 부리던 그 음성도 아니었고……

옛날처럼 대소구분 없이 마음내키는 대로 내뱉던 음성도 아니었다.

굳은 의지가 살아 끔틀거리고 있는 당당한 어린 장부(丈夫)의 음성 바로 그것이었다.

검마에게서 받았던 삼 년의 수행은 그를 조금은 진지한 아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순간,

소중히 소일초의 머리를 빗겨가던 조예진의 입에서 가득 염려가 깃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애야…… 지극히 위험할 텐데……]

[…………]

[더구나 지금 삼성무림청은 장강 일대를 장악하고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실정이라……우리 백인성의 힘이 아니라면 막기 힘든 상대야……그런데……]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더욱 혼자 가야하는 것이지요.]

[아……네 뜻을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구나……]

[작은 어머니……나는 소일초가 아닙니까?중원을 지켜야 할 신행마동 소일초입니다.]

[…………]

[당연히.삼성무림청 정도는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야 우리 백인장의 위세도 더욱 높아 질 것입니다.]

[우리 말썽꾸러기가 삼 년 만에 정말 협객이 되어버렸구나……이제 신행마동이 아니라 신행협동(神行俠童)이라고 불러야 겠는걸……]

조예진이 걱정스럽던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좀 어색하고……아무튼 앞으로 최소한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앞에서는 장난 치지 않겠어요. 지난 번에 작은 어머니가 막 울때 얼마나 놀랐다구요……]

[그럼………우리가 없을 때나 밖에서는 여전히 장난치겠다는 말이구나…]

[그건 작은 어머니도 이해해주셔야죠. 나는 아직 어린애니까 당연히……]

[그래! 우리 말썽꾸러기야. 그건 그렇고 원로들이 풀쩍 뛸텐데 어떻게 하지?]

조예진은 백인장 옛터전에서 소일초의 무공이 혈기자로 오해될 만큼 고강했던 것을 직접 격었으므로 혼자 나가겠다는 데 대해서 크게 염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애를 혼자 보내는 안스러움이 조금있을 뿐이었다.

[제가 첩지에 원로들은 찍소리 말라고 했으니 괜찮을 겠죠뭐……]

[맙소사……정말로 그렇게 썼단 말이냐?]

조예진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거기에다 백인장의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고 했죠……]

소일초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조예진은 어쩔 수 없는 말썽꾸러기를 보면서 한숨을 지었다.

[네가 가만있으라고 가만있을 원로들이냐? 벌써 내 귀가 따가운 것 같구나……정중하게 알려도 듣지 않을 원로들인데……]

[어? 정말 그럴까요?]

소일초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그럼, 이러다 원로들이 몰려오면 야단이잖아요.]

조예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쿠, 작은 어머니. 저 이만 갈래요.]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애야! 행장은 갖고가야지……그리고, 소아도 데려가거라……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니까……]

[네! 그렇게 할께요……]

벌써 소일초는 자기 방문 앞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묶지도 않은 머리가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될까?]

조예진은 덤벙대는 소일초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녀석……어쨌거나 커기는 커버렸구나……]

 

× × ×

 

십팔원로도객이 일제히 내전으로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무림활동금지령의 부당성과……

혼자서의 무림행보는 단지 만용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간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언을 하러왔던 잔소리를 하기위해 왔던지 간에,

조예진의 말로 그들은 입도 떼지 못하고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돌아가야만 했다.

 

____ 소장주는 벌써 떠났습니다……

원로들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장주가 돌아온 후 그에게 하십시오. 설마 그 전에 이미 패도구룡인으로 내려진 명(命)를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때는……

소일초는 이미 주소아와 함께 아침 햇살에 머리카락을 빛내며 백인장에서 이백여리 떨어진 곳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허리에는 머리통 만큼이나 큰 검은 목탁이 매달려 있고,

왼쪽에는 집도 없이 걸려있는 날이 빠져 쇠몽둥이에 가까운 시커먼 철검이 걸려있었다.

어린도는 꺼림직해서 아버지의 병상옆에 살그머니 갖다놓았던 것이다.

붉은 띠로 질근 묶은 머리칼은 말꼬리같았다.

[야! 주소아, 네 젊은 할아버지 만나면 내 이야기 잘해줘야 해. 전에는 내가 어려서 장난이 좀 심했었다고……]

주소아는 입을 삐쭉했다.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말은……]

[이 년 먼저 났다고 너무 그러지마. 남자 여자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거야……]

[네가 남자니? 말썽꾸러기 꼬마지……나도 백인장에 있으면서 네 악명을 충분히 들었다고……]

[내가 꼬마라고? 웃기는 말씀. 그리고 나는 내 악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구.]

[뭐?]

[먼저 내가 꼬마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갑자기,

소일초는 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매달려 강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주소아의 안색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그녀의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낮은 휘파람소리도 갑자기 높아졌다.

[어때, 이래도 꼬마라고 할거야?]

주소아는 자기의 배꼽어림에 와닿은 무엇을 느끼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두팔을 돌려서 소일초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홱소리가 나도록 뒤로 집어던져버렸다.

그러나……

소일초는 기분이 좋은지 연방 콧노래를 부르며 가랑입처럼 날아갔다가 그녀의 옆으로 다시 너울너울 날아와 내려섰다.

주소아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서 몸으로 연방 높은 휘파람소리를 냈다.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분노의 표시방법임에 틀림없다.

[내 사부 중의 하나가 색귀였다구. 여자에 관한한 나는 모르는 게 별로 없어……]

주소아는 입을 꼭 다물고 자기 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가 싫은 듯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일초의 말은 분명했다.

이론상이기는 하지만 색귀는 어리지만 당돌한 그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었고,

그것들을 소일초는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적당한 대상을 만나지 못해서 그 지식들이 그의 몸에서 썩고있었지만,

지금, 아름답기 그지없는 주소아가 나타난 이상 그의 장난기와 더불어 그 지식들이 슬슬 몸으로 구현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소아는 이미 열 다섯 살,

총명한 그녀는 이미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일초와 말도 하기 싫었다.

(이 나쁜 놈하고 언제까지 같이 있어야 하나? 확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집이란 물론 백인장이다.

삼 년 동안 지냈으니 자기집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야……이 자식이 자기집이라고 우기면 나는 곤란하지……아무래도 나에게는 고모집일 뿐이니까 내가 밀리지……)

소일초의 작은 어머니인 조예진이 사승(師承)으로 본다면 주소아의 고모가 된다.

그녀는 이미 조예진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주소아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소일초는 소일초대로 그녀의 뒤에 따라걸으면서 신나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색귀사부의 말이 정말인것 같은데……기분이 묘했어. 이히히히……이제 적어도 몇 달은 같이 먹고 자고 할텐데……철저한 실험정신을 발휘해야겠지……)

신행마동 소일초……

그의 생각은 멋대로 가고 있었다.

생각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게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앞서가던 주소아는 그가 뒤에서 이상한 소리로 웃자 더욱 속이 끓었다.

그자리에 딱 멈추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 네가 앞에가, 엉큼한 꼬마같으니……]

[싫다. 네가 앞에 있으니 그대로 가.]

소일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기위해서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흥, 저런 막대먹은 꼬마가 뭐 삼성무림청을 쳐부수고 아버지 복술해? 고모 말도 웃기는 소리지……]

[그러면 내가 넘어갈 줄 알고……잔소리 말고 앞에서 걸어. 누군가 지켜봐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아니겠어?]

그의 무덤덤한 말에 주소아의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휘파람소리는 다시금 높아지고 있었다.

[그 휘파람소리도 어디서 나는지 궁금하고……]

소일초의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소아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정말 나하고 싸워볼래? 조그만 녀석이……]

두 팔을 쫙 벌리며 공격자세를 취하는 그녀를 보면서 소일초는 자기가 너무 심했나 싶었다.

그는 뭐가뭔지도 모르는 철부지로 무엇이 적당한 정도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러나 이내 그도 태도를 바꾸었다.

정말 화가나서 집으로 돌아가버리기라도 하면 좋은날은 다가버린 것이다.

[누나……정말 화난 거야? 난 어린애 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테 그렇게 화내면 어떡해……]

그의 돌변한 태도에 화가 꼭지까지 올라갔던 주소아는 어이가 없었다.

일부러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에게 기대오는 소일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깜직하게 귀여운 모습에 화가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가막혀 하면서도 이미 화는 풀려 그를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다시는 까불지마……]

영악한 소일초는 이미 자기의 수단이 성공한 줄 알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주소아…이렇게 있으니 기분좋은데……]

주소아는 그를 확 밀쳐버리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소일초가 어깨위에 그녀를 들어 올리고는 무중일전의 신법을 펼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이 나쁜 놈……그냥 두나봐라……]

주소아의 외침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흩어져 버리고 소일초는 신나게 달려갔다.

뿌연 안개에 휘감긴 채 한덩어리의 구름처럼 날아가는 그들을 보고 관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일초의 어깨에 얹혀가고 있는 주소아는 이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달려가고 있는 중에 소일초가 그녀를 다시 앞으로 안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우리……그냥 편하게 지내자……우리가 가릴게 뭐 있겠어? 기분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지……]

주소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심각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

[어디가서 아침이나 먹자.]

그리고……

소일초의 귀를 잡아당겨 버렸다.

[아아……귀떨어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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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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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病床 앞에서의 어처구니없는 騷動

 

 

 

당금 무림의 상황(狀況)은 걷잡을 수 없는 삼성무림청의 팽창으로 인해 난세의 격변 속에 휩싸여 있었다.

은밀히 자행되는 고수들의 실종……

그리고 혈겁……

소일초는 그의 작은 어머니의 말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_____삼성무림청!

 

이것은 분명 아버지 도왕 소선풍을 해쳤을 혈기자의 다른 세제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문에,

그들을 상대하여 복수를 하고 삼성무림청이 만드는 난세를 평정키 위해 아들인 신행마동 소일초,

바로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한 순간,

소일초의 아름다운 동공에 안타까운 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시선은 석상처럼 누워 있는 도왕 소선풍을 주시했다.

안타까움과……

후회와 염려와 아픔을 실어 나르는 그 눈빛……

문득,

지금까지 격동하던 무심군자가 진정된 조용한 음성을 흘려냈다.

[백인장의 모든 사람이 장주님의 상세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이때에……]

[…………]

[이처럼 장주님께서 차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알린다면……우리 백인장의 사기는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충천할 것이 분명하오……]

무심군자의 음성에는 지금까지 움추려 있었던 백인장이 날아오를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 어린애 같은 희망이 가득 배어 있었다.

소일초……

나이에 비해 세상을 일찍 부터 돌아다닌 그의 영민한 눈빛에 문득 어떤 의혹이 배어나왔다.

[우리 백인장과 구파일방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갑작스런 소일초의 질문에 무심군자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말했다.

[구파일방의 힘도 엄청나기는 하나……]

[…………]

[그들이 자파의 이익과 명리를 버리고 단결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어려운 사실인 데다가……]

[…………]

[우리 백인장과는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처지이기에 그저 상호 방관만 하고 있는 입장이지요.]

소일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와 친해질 수 있다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겠지요.]

[그야 일를 말이겠습니까만 그들은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서……]

더불어 무심군자의 얼굴에 피어나는 더욱 짙은 의문,

도저히 소일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그런 무심군자를 주시하며 소일초가 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법(方法)은 이제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한 가지 방법뿐이라니요?]

[우리 백인장은 전부터 무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 왔다고 했지요?]

[그렇소이다.]

[아까 봉공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지금 아버지께서 움직이지 못하시는 동안에는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두 봉공은 소일초의 고강한 무공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려는 작정이었는데,

이 철부지 천방지축, 무공만 강한 줄 알았던 소일초가 스스로 하겠다고 하니 눈이 둥그레 질 지경이었다.

조금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처럼 철이 들었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무심군자의 손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소일초의 견정혈을 찍어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수혼도객과 서공화, 조예진이 깜짝 놀랐으나 저지할 틈이 없었다.

무심군자는 삼현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소일초는 무심군자의 행동을 보면서도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심군자의 손이 그의 견정혈을 쳤는가 싶었는데 그 손은 소일초의 어깨를 관통해 버렸다.

조예진의 우수는 어느새 무심군자의 천령개에 닿아있었다.

그녀는 안광을 새파랗게 빛내며 무심군자를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무심군자는 두개골이 깨어질 판이었다.

소일초의 어깨를 관통했던 무심군자의 손은 바닥을 향해 축늘어져 있었고……

무심군자는 경악해 하고 있었다.

소일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예진의 소매를 당겨 옆으로 비키게 한 후 무심군자에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봉공께 제가 죄를 지은 것이 있어요?]

무심군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엇 때문에 저에게 살수를 썼습니까?]

무심군자는 콧웃음을 쳤다.

[혈기대종사(血旗大宗師)! 언제까지 모습을 숨기고 우리를 기만할 작정이오?]

[……?]

무심군자의 말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확 봐뀌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더우기,

조예진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대체 무슨 말씀이지요. 봉공! 내가 혈기자라니 말도 안돼는 소리를……]

[흥, 선배의 무공은 무림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고강하겠지만 행동하는 것은 하류잡배만도 못하구료……]

무심군자는 죽음을 각오했는지 침상에 있는 소선풍을 몸으로 가린채 당당하게 말했다.

소일초는 어떻게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작은 어머니……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러나,

조예진은 파랗게 질린 채로 남편 옆으로 다가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사……사부이신가요?]

[작은 어머니……!]

[당신께서 우리 아이마저 해쳤나요? 애 아버지만으로는 부족해서요?]

아무도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일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예진의 말소리에는 울음이 섞이면서 점점 높아갔다.

[그렇게 제 행복을 다 파괴하고 싶으셨어요? 차라리 저를 일 장에 죽이시면 더 간단 하잖아요?]

그녀는 이제 오히려 소일초에게로 다가갔다.

[저도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 식구가 모두 같은 날 죽도록 지금 당장 죽여주세요.]

무심군자와 서공화, 그리고 수혼도객이 소리치며 그녀를 막았다.

[주모……안됩니다.]

그러나 조예진은 이미 반쯤 실성했다.

두손을 내저어 순식간에 세 사람을 물리치고 소일초를 향해서 울부짖으며 다가갔다.

[우리가 사부에게서 도망쳐 나왔지만……사부께서는 어디 잘 하셨나요? 이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무조건 주살하게 한 사부는 잘 하셨어요?]

벽으로 튕겨져 버린 세 사람은 조예진의 무공이 경공을 펼치는 것만을 보았을 뿐,

이렇게 무공을 펼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무림의 일반 고수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혈기자의 제자의 솜씨!

진정 경악할 만 했다.

무산신의가 침상에 멍하니 누워있는 소선풍을 바라보면서 힘겹게 중얼거렸다.

[끝장이다. 이렇게 되면 장주마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소일초는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다가서는 조예진을 보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쓰러진 무심군자를 바라본 후 그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앙------엉엉엉 ------]

그가 언제 운 적이 있던가?

정말로 태어날 때 운 이후 처음으로 우는 소리였다.

갑작스럽게 그가 울음을 터뜨리자 조예진은 울부짖음을 뚝 멈추었고 사방에는 고요가 가득차 버렸다.

오직 그의 울음소리만이 백인장 옛터의 한 석실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소일초는 작은 어머니와 아기일 적 부터 함께 지냈던 봉공, 서공화 등이 자기를 전혀 다른 사람 취급을 하자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은 어머니가 죽여달라고 울부짖으며 다가들자,

무공이고 뭐고 다 소용없이 어린애 답게 겁이나서 울음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그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 서럽게 울려퍼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와 무심군자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조예진이 진정을 한 후 조심스럽게 울고있는 소일초에게 물었다.

[정말, 우리 아기가 맞는가요?]

그녀의 물음은 조금 이상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일초가 더욱 큰 소리로 울면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으앙------작은 어머니-----엉엉------]

조예진은 그를 품에 안으며 깊은 안도를 했다.

자기가 기른 귀여운 말썽꾸러기가 확실하다는 심증을 얻은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의 사부였다면 본색을 드러냈지 정말 어린아이 처럼 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울먹이는 소일초를 품에 안고 토닥거리며 고개를 돌려 무심군자를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 보며 소리쳤다.

[좌봉공께서는 이리 오셔서 해명해 보도록 하십시오.]

[…………]

[만일, 해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경우, 소장주를 놀라게 하고 이토록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해 엄중히 문책하겠어요.]

조예진이 백인장에 들어온 이후 눈살 한 번 찌푸리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무심군자를 노려보는 그녀의 두눈에서는 파란 광채가 뻗쳐나와 무심군자가 감히 마주볼 수 조차 없었다.

서공화와 수혼도객이 어느새 그를 좌우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무심군자의 음성이 떨렸다.

[정말……소장주란 말씀이십니까?]

[흥,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도 아이처럼 우는 재주가 있겠어요?]

[저는……소장주께서 너무 변한 듯 하여……일단 의심이 들었습니다.]

[…………]

[게다가 혈기자가 반노환동했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소장주로 변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더욱 깊어갔지요……]

[…………]

[……소장주께서 그 전에도 오갑자의 공력을 지니고 계셨지만 지금의 소장주께서는 모든 공력이 깊이 안정되고 갈무리 되어서…… 천고에 보기 더문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세상에 그런 경지에 든 사람이 있다면 그가……바로 누구겠습니까?]

[혈기자……]

수혼도객이 대답했다.

[……그래도 심증 만으로는 안되겠기에 직접 손을 쓰본 것입니다.]

[…………]

[소장주께서는 날때부터 금강신(金剛身)을 가지고 계셨으니까 충격은 받아도 전혀 부상은 입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지요……그런데……]

[그런데……]

조예진이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산신의 서공화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오……맙소사……저 분이 충격을 받지 않으셨는지……빨리 살펴보도록 하셔요.]

그녀는 소일초를 안은채 소선풍의 곁으로 가서 그를 지켜보았다.

서공화는 신중히 그의 상태를 살폈고……

무심군자는 넋이 나간듯 아무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일초마저 울음을 뚝 그쳐 침묵이 석실에 가득한 데,

서공화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늘이 돌보셨습니다. 장주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조예진은 소선풍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소일초를 안고 일어서며,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세요.]

이때,

소일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눈동자가 움직였어요.]

오오……

스스로의 의지로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었던 소선풍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 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큰 눈이 소일초와 조예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초점이……초점이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는 듯 했다.

흐릿하던 그의 눈에서는 강렬한 신광이 뻣쳐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소일초와 조예진, 그리고 무심군자가 벌인 한바탕의 어처구니 없는 소동이 겨우 공력을 모아가던 소선풍에게 자극을 준 것이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귀로는 생생하게 들려오는 말도 아닌 소리들…………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그의 아내와 수하들……

그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가득차 자기도 모르게 강하게 기를 운용했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의 시신경을 다시 연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의 눈 앞에서 무산신의가 손가락을 펴보이며 물었다.

[장주……내 말이 들리시오? 그렇다면 나를 보고 아니면 주모를 봐주시오……]

입모양을 분명하게 하며 하는 서공화였다.

 

× × ×

 

삼현자(三賢者) 중의 하나인 무심군자는 목이 달아날 뻔한 상황에서 소선풍으로 말미암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쉽게 남을 의심하고, 꾀를 부리는 자는 제 꾀에 망하기 쉽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사례였다.

소선풍의 상세는 이제 반 년이면 충분히 쾌유될 것이다.

그러나,

무심군자는 이전에 비해 훨씬 신중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 × ×

 

풍운만변(風雲萬變)의 무림(武林),

당금에 이르러 무림은 더더욱 돌풍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다.

그것은 바로,

저 위대한 정의의 혼을 불태워온 백인장(百刃莊)에서 발해진 하나의 첩지로 부터,

더욱 거세어 지고 있었다.

 

___ 본 신행마동 소일초……정의와 복수의 이름으로 무림정벌을 선언한다……이 후 삼성무림청을 비롯한 사마(邪魔)는 신행마동의 손으로 그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

 

경악,

몇 년 동안 잠잠하여 철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한 백인장의 꼬마 고수가 다시 무림에 풍운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의기소침하여 웅크리고 있던 백인장에 그의 선언은 찬란한 서광이었으며,

안에서만 갈고 닦던 백인장의 움추려 있던 힘이 밖으로 준동하기 시작했고,

충일하여 터지는 정(正)의 소리가 때맞추어 천하 곳곳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

맞부딪치게 되리라.

무림사상 가장 가공할 팽창력을 지닌 삼성무림청과……

수 백 년 내 최강의 문파로 알려져 왔던 힘이 집약된 백인장의 대격돌……

중원의 땅도, 바다도, 하늘도 숨죽여 긴장했다.

백인장의 겁모르는 천방지축 신행마동의 행보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 × ×

 

이상스런 물건들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정실이다.

이곳은 백인장의 수 많은 정실 중 하나였으며……

황촉불이 은은히 타고 있엇다.

한데 돌연,

[…………]

어느 노느라고 지친 아이가 잠들어 있는가?

깊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한 편의 태사의에서 흘러나왔다.

또한 어디서 울려 퍼지는지 알 수 없는 낮은 휘파람 소리……

여기는……신행마동 소일초의 방,

호피로 씌워진 태사의에 깊숙이 묻혀있는 사람은 무림정벌을 선언한 소일초가 분명했다.

한데,

바로 그의 앞에는 자단목탁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한 가지의 물건과 책을 펼쳐보고 있는 한 소녀(少女)가 있었다.

하나의 물건은 손바닥 크기의 만년청옥(萬年靑玉)으로 된 하나의 청옥소도(靑玉小刀)였다.

그 옥검에서는 무어라 형용해 낼 길이 없는 신비한 광채가 서기마냥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한 소녀(少女)……

오오……

그 자단목탁 옆에 앉아 있는 십삼 사 세 가량의 소녀가 지닌 아름다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무수한 비유를 찾고 무수한 형용(形容)을 한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것 앞에는 아무런 비유도……아무런 형용도 못한 채……

그저 숨을 죽이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 소녀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그 어떤 비유를 거부했고……

그 어떤 형용을 불허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에다 눈보다 하얀 백의에 쌓인 그 소녀의 성결함과 고아함은 이 세상을 온통 그 두 가지의 기운으로 표백시켜 버릴 만큼 강렬했다.

한데 이것은 또 무엇인가?

밤하늘 천만 가지 뭇 성좌(星座)를 담아 흘려내는 듯한 그 신비로운 동공은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그리고 그 소녀의 신체 어디에서 인지는 몰라도 쉴 새없이 흘러나오는 낮은 휘파람소리,

마치 그 소녀의 깊은 영혼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했으니……

[휘이휘이……휘이이……]

한 번의 멈춤이나 간격도 없이……

입술을 벌리지도 않는 그 소녀는 휘파람새 처럼 이 낮은 소리를 되풀이해 흘려내는 것이니,

그 소녀에게는 오직 이 휘파람 만 존재하는 듯 싶었다.

[으음……음냐……]

태사의에 앉아서 잠이들었던 소일초,

입을 벌리고 큰 하품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물끄러미 청옥소도와 정신없이 책에 빠져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조예진의 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_______ 애야…… 이 청옥소도는 패도구룡인(覇刀九龍刃)으로써……어린도와 함께 바로 백인장의 장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대(二大) 신물(信物) 중의 하나이다.

어린도는 몸에서 놓을 수도 있지만, 이 패도구룡인은 절대적으로 외부인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린도가 장주가 사용해야 할 병기라면,

이 패도구룡인은 당연히 장주를 대변하는 것…… 그 어떤 자건 백인장의 사람이라면 이 패도구룡인을 대하면 장주를 직접 대하는 것처럼 경복해야 한다.

그리고……이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비밀이지만,

이 구룡은 하나하나가 백인장주의 독문무공인 마도구식(魔刀九式)을 담고 있다고 한다.

네 무공도 이제는 충분히 마도구식을 펼치고 남음이 있으니 틈이나는 데로 비밀을 알아내 익히도록 해라.

이것을 만든 분은 칠백 여 년 전 우리 백인장의 일대기인이었던 신수기장이라는 분으로서……

무공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 이었음에도,

그 당시 장주이셨던 네 선조의 명을 받아 패도구룡인이라는 절세의 신물을 만드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마도구식의 원래 명칭은 패도구식이었으나,

너무나 강맹일변도이고 한 번 발출되면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마는 도법이었으므로 마도(魔刀)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조예진의 말을 생각하고 있던 소일초의 눈에서 빛이 반짝 거렸다.

그리고 그 눈빛은 인간이라 여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새의 미소녀의 숙여진 얼굴로 옮겨졌다.

별 빛 같은 눈망울로……

오직 잔잔한 휘파람소리 만을 쉬임없이 흘려내며 책을 보고 있는 소녀(少女)……

그 소녀를 향한 소일초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또다시……

떠오르는 그의 작은 어머니 조예진의 음성……

 

____ 이 소녀는 삼 년 전 네 아버지께서 엄청난 내상을 입고 돌아오셨을 당시 품에 안고 온 아이로 내 사부의 손녀인 주소아다.

그때 이 아이의 나이는 불과 열 두 살……

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시 피투성이 몸이었고,

당시에는 이 아이 또한 어떤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이 상실된 터라 신분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는데……바로 내가 사부밑에 있을 때 직접 돌보았던 불쌍한 소아(小阿)였던 것이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때 이 애의 체내에는 무려 삼갑자의 내공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외다.

네 내공은 이미 그당시 오갑자였으니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만,

무림를 통틀어 보아도 삼갑자 이상의 무공을 지닌 자는 일백 명 내외일 것이다.

피투성이 이면서도 소아의 몸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나와 혹시 십이 대 고수의 하나인 취풍녀(吹風女)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대 봉공께서 자신들이 만나본 취풍녀는 이십대 여인이었다고 증언을 했다.

그러나,

소아가 취풍녀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소일초는 조예진의 말을 생각하면서 더욱 세밀히 절색의 미소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빛은 영롱히 반짝이고 있으며……

지금 과거의 기억을 상실하고 있기는 했으나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소녀……

(음……이 계집애는 어떻게 해서 입을 벌리지도 않고 휘파람을 부는 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주소아는 그녀를 판히 바라보는 소일초를 느끼고 고개를 들며 생긋 웃어보였다.

주변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기에 소일초는 정신이 아찔했다.

(제길……되게 예쁘군……작은 어머니 만큼 예쁜 것 같은데……참 혹시 머리가 이상해 져서 기억을 상실해 버리면 몸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닐까?)

주소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면서 소일초는 중얼거렸다.

[집을 나서기 전에 꼭 서공화 영감에게 한 번 물어봐야지……]

 

조예진은 주소아가 기억을 되찾기만 하면……

그의 아버지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삼수와의 어떤 갈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허나 해석하게도 그녀는 기억이 상실되어 있으니……

 

지금 주소아가 보고 있는 책은 생사보록(生死寶錄)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소선풍에게 안겨왔을 때 그녀의 품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전에 그녀가 생사보록을 익힌 적이 있는 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주소아는 생사보록을 다시 익히고 있었다.

조예진의 말을 따르자면 그녀의 무공에 대한 자질은 소일초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글 만을 좋아하던 문사였으나, 그녀의 조부는 대기인 혈기자인 것이다.

조부의 혈통 때문인지, 그녀의 엄청난 무공에 대한 안목에 백인장의 모든 사람들이 지난 삼 년 동안 적지 않게 놀랐었다.

조예진은 소일초에게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고,

지은 죄가 많은 그는 마지못해 응락했으나 내심 불만이었다.

(겨우 나보다 두 살 많은 계집애인데……내 말을 듣지 않으면 비성성으로 혼을 내 줘야지……)

그러나……

소일초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순진 무구한 비성성들은 영악한 주소아의 꼬임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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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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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무너져 버린 아버지

 

 

복도,

진홍빛 융단이 그림처럼 덮여있는 복도였다.

그리고, 이 회랑은 어찌나 긴지 마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미로를 연상케 했다.

바로 이 미로처럼 이어진 회랑의 끝에 역대 백인장주들의 집무실이자 폐관실(閉關室)이 위치하고 있었다.

만년온옥으로 새겨진 쌍봉각이 멋들어지게 조화된 문을 들어서면 하나의 실내가 시야에 드러난다.

천정에는 야명주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벽은 당대(當代)의 유명한 화가(畵家)들의 산수화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밟고 지나기가 송구스러운 비단이 깔려있는 실내,

때문에, 실내는 장중하고 무겁고 화려하며 부귀롭다.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이토록 화려한 실내가 더없이 더둡고 침울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니……

그렇다.

이 무거운 분위기는 세 사람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하나의 침상과……

두 개의 호피 의자에 각기 자리를 달리한 세 사람……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

삼십 오륙 세나 되었을까?

붉은 침상은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너무도 희어서 오히려 슬프기까지 한 살결과……

손과 옷과……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을 뒤로단정히 묶은 백건(白巾)과……

도대체 침상의 그에게서 선명한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밀납처럼 희고 창백한 얼굴에 신(神)의 작품처럼 자리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내의 아름다움……

누구든 일단 이 사내를 대하고 나면 그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의 일신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고아한 기품에 압도되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리라……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천정을 우러르며 치켜 떠져 있는 그의 두 눈은……

아무런 인간적(人間的)인 감정이라고는 담고있지 않은 몽롱한 것이 아니가?

마치, 모든 영혼과……

모든 심령은 이미 이 사내의 몸에서 달아나 버린 듯한……

한 마디로,

그의 동공이 힘없이 풀려 그저 의무처럼 천정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조각품을 연상케 했다.

바로 이 침상의 사내를 침울한 안색으로 지켜보고 있는 호피의자의 두 사람,

둘 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인(老人)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푸른 장삼을 입고 있었으나,

그 중의 한 노인(老人),

머리에는 와룡관(臥龍冠)을 썼으며……

심해(深海)처럼 깊고 교요한 눈빛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현기(賢氣)로움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이 노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미심에 박힌 푸른 반점……

허나, 그것이 오히려 고고한 대유학자를 연상케 하며 노인의 기품을 돋보이게 한다.

 

무심군자(無心君子),

 

이 하늘 아래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자 그 누구겠는가?

이 시대의 최고의 삼 현자(賢者) 중의 하나 이며……

천하(天下)에 깔려 있는 대소사(大小事)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

지혜에 관한 한 그 능력을 견줄 사람이 더문 사람이다.

여기에다,

또한 십이 인의 절세고수 중 한사람이기도 한 그의 얼굴에 홍안은 아직도 그를 오십대의 노인으로 보이게 하나,

기실 그의 세수는 백을 훨씬 넘겼다.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노인,

수려한 용모에 도도한 기풍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

중원은 이 사람을 수혼도객(收魂刀客)이라고 일컫는다.

수혼도객……

그가 지닌 호 그대로 한 때 중원 십팔만리를 주유하며 마두들의 혼을 거두어들이고 다녔던 절세적인 도객이다

도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 속에는 천하의 무수한 무학이 담겨져 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혼도객을 일컫기를,

 

____수혼도객의 도는 무서운 것이지만 그의 뇌(腦)속에 든 무학들은 그의 도 보다 더욱 가공하다. 그것들 중 백분지 일만 얻으면…… 능히 천하에 고수로서 입신할 수 있으리니……

 

이 신화적(神話的)인 두 기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세상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까마득한 무지(無知)가 아닌가?

아니,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삼 년전에 가출한 소일초를 잡으려 하던 그 두 노인이었으니……

당시 그들이 했던 말로 보아 백대선생같은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들은 도왕 소선풍의 좌우공봉(左右供奉)이기도 하다.……

지금도 두 사람은,

인간의 감정이라곤 하나도 드리우지 않는 채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내를 향한 채……

질식할 것 같은 침묵과 정적이 잠겨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물흐르듯 흘렀다.

깜깜한 밤하늘의 먹장구름이 걷혔음인가?

화안히 달빛이 창문에 부딪히고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때다.

자박자박……

사박사박……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무서운 분위기가 젖어 있는 실내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예진과 소일초……

그리고 내총관 독고행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수혼도객과 무심군자,

그들은 일제히 조예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구부렸다.

[좌우공봉……!]

[주모께 인사드리오이다.]

조예진도 수심에 찬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피워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두 분 공봉께서는 어서 예를 거두세요……한데 무산신의께서는 안보이시는 군요.]

[아마도 지금 약실에 있을 것이외다.]

허리를 편 두 기인의 눈빛이 소일초의 한몸을 더듬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동공으로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일초가 많이 변한 듯 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자기들을 골탕만 먹이던 그 꼬마가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이때, 소일초가 환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수혼도객과 무심군자를 향해 다가섰다.

[두 분 봉공께 인사드립니다.]

의젓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소일초,

두 기인도 어리둥절하며 소일초를 향해 손을 가볍게 맞잡아 보였다.

[삼가 좌우공봉도 소장주를 뵈오이다.]

소일초가 자기들에게 이처럼 인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는 묘한 대치,

그 침묵을 타고 한 소년과 두 기인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말이 필요없고……

그들에게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다.

소년은 마음으로 다시는 말썽피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내고 있었고,

두 노인은 소일초가 확실히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 대신 환한 미소와 가벼운 미소의 주고 받음으로 모든 것은 흡족한 것이다.

문득 수혼도객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의 백의사내를 가리켰다.

실내의 이 모든 상황을 아예 도외시 한 채 풀린 동공으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는 조각상과 같은 사람을 ……

[장주님이십니다.]

오오……장주라니?

그렇다면 모든 신체기능이 마비된 채 허공만 멀건히 바라복 있는 식물인간과 같은 사람이 바로 도(刀)의 제왕(帝王)인 도왕 소선풍란 말인가?

한데 왜?

이 시대 최고의 도왕(刀王)인 그가 이토록 처참한 상태로 병상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소일초는 아버지의 모습을 쳐다보고 도저히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설마하고 말았다.

하기야, 어찌 선뜻 이러한 사실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햇살처럼 찬란한 신위로 천하를 한눈에 굽어 보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해 왔던 자신의 부친이 아닌가?

소일초는 의혹이 넘치는 눈빛으로 조예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찰랑고여 넘치는 조예진의 눈물을 소일초는 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내는 음성도 들어야 했다.

[애야……너의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으려느냐?]

소일초,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소일초는 그의 뇌리에 감도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음인가?

선 그 자세로 오랫 동안 도왕 소선풍를 바라보고만 있엇다.

[이래서……이래서……아버지가 저를 꾸짖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군요.]

이때, 대답대신 냉엄히 흐르는 조예진의 음성,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무엇하는 것이냐?]

소일초의 작지만 탄탄한 어깨가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소자 소일초……이제야 돌아와 아버님을 뵙습니다.]

하나, 소선풍는 말이 없다.

그저 풀린 동공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지켜보던 무심군자가 침중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소장주!]

[…………]

[장주(莊主)의 신체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소이다.]

[…………]

[온몸의 십육대근혈이 모두 끊기고……삼백육십주맥이 모두 어긋났으며 ……그기다가 인체 십대사혈이 막혀있으니……]

[…………]

[장주께서는 살아 있으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신 완전한 식물인간이실 뿐입니다.]

[…………]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으며……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니……소장주의 인사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실 수 없소이다.]

순간, 소일초의 잔등이 무섭게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부친이 변을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사실로 지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던 그의 마음 속에 뜨겁게 솟아오르는 기이한 충격!

그 충격이 바로 진한 혈육으로 맺어진 감정의 교류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무심군자의 무겁고 조용한 음성이 다시 흘러들었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삼 년 동안 백인장의 수하들이 천하를 뒤지면서 소장주를 찾았던 이유이외다.]

찰나, 격한 감정에 떨고만 있던 소일초의 아름다운 동공에 뽀얀 물기가 서려왔다.

(그래……삼 년 전에 꾼 재수없는 사마귀 꿈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을 지도 몰라……내가 남황에서 사부와 지내고 있을 동안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돼있었던 거야……)

소일초는 뼈 속 깊은 후회 속에,

천천히 손을 들어 소선풍의 차고 파리한 손을 감싸쥐었다.

한데 이순간,

오오……보라……

반짝……

소선풍의 두 눈에 희미한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것은 한 방울, 두 방울 눈물로 맺혀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일초가 움켜 쥔 소선풍의 파리한 손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니……

부정(父情),

이 처참한 지경에도 젊은 도왕의 가슴에는 아들을 향해 흘려 줄 뜨거운 눈물이 남아 있었던가?

뜨여진 채……

두 눈을 스스로 감을 수 도 없는 소선풍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뉘라서 이 도왕의 가슴에 흐르는 처절한 부정을 모르랴?

그는 부르짖고 있으리라.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마음 속의 절규로 울부짖고 있으리라.

 

____ 아들아……

내 아들아……

 

소일초,

어느 새 그의 두 눈에서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부자(父子),

그들은 비록 아무런 말도 주고 받을 수 없으나……

마주 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정과,

그 정으로 흐르는 눈물로 그 어떤 해후(邂逅)보다 뜨거운 해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소일초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소선풍를 부르며,

작고 차가운 손을 들어 올렸다.

도왕 소선풍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이때 한 동안 아름다운 두 부자의 상봉을 감동으로 지켜보고 있던 무심군자가 조용한 음성을 흘려냈다.

[소장주!]

[…………]

[더이상 장주를 격동케 해서는 아니되오. 장주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소이다.]

순간 소일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소선풍를 향해 다시 정중히 일배를 올린 후,

소일초는 조심스럽게 소선풍의 침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무심군자를 향해 무서운 빛을 발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봉공……누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었습니까? 열 배 백 배로 돌려주겠습니다.]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정성스럽게 두 손으로 닦아내리며 조예진이 고개를 저었다.

소일초의 예민한 반응에 무심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 대답하려다가 조예진의 표정을 보고 가만히 있었다.

조예진이 천천히 내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삼 년 전 네가 가출했을 때부터 이야기해야 겠구나……]

[…………]

[당시 네가 어린도를 가지고 나갔을 때 내가 뒤 쫓아 간 걸 기억하겠지?]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창산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그만 돌아오고 말았는데, 너는 그 이유가 궁금했겠지?]

[네……]

조예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는 평소에 제 내력에 대해 의문을 품어 왔겠지요?]

[어찌 저희 늙은이들이 감히……]

[오늘같은 때에 제가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천하제일인 혈기자의 막내제자예요.]

순간 두 노인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경악했다.

혈기자……

혈기자라면 무림의 일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학의 대종사로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되는 불세출의 대기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십여 년 전에 혈기자와 그 제자들이 등천마교를 멸망시켜버렸던 그 혈기대종사의 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참혹한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소일초는 내심 집히는 것이있어 두 봉공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아하! 그래서 혈기자가 작은 어머니를 알고 있었구나……)

무심군자가 경악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주모께서 바로……]

[그래요. 내가 바로 사수(四手)의 하나이고 옛날 등천마교의 무리들을 학살한 장본인 이기도 하지요.]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셔야 합니다.]

조예진은 고개를 돌려 소일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믿을 수 있겠지?]

[네……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래, 과연 네 아버지가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총명하구나.]

[…………]

[나는 너를 쫓아가다가 창산 그곳에서 내 사부의 표기인 혈기(血旗)를 보았단다.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우리 사형제(師兄第)들은 무림에 나올 때, 실은 사부께 남에게 밝히지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도망쳐 나왔단다.]

[…………]

[…………]

[사부는 무서운 분이시지……우리를 단 일 장에 주살하려 하실거야. 그런데……]

…………

[삼 년 전, 우리 백인장을 방문한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나를 한 번 볼 것을 요구했으나,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 빈축만 샀단다.]

[…………]

[멀리서 얼핏 나를 보는 데,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빙긋이 웃더구나……나는 무척 당황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보는 사람인데……]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주모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진 젊은 놈이었겠지……)

[남은 부인된 몸으로 외간남자가 얼굴을 보기 청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었지. 아무튼, 그 사람은……그러고는 네 아버지와 함께 무슨 밀담을 나누고 떠나가 버렸지……]

[…………]

[…………]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내가 아무리 물어도 네 아버지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불안하기 그지없었어……]

[…………]

[혹시 내 행동에 정숙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던가를 곰곰히 되새기며 반성을 했지. 그렇지만 그 사람과 관련된 뚜렷한 어떤 것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단다. 그리고……]

[…………]

[…………]

[며칠 후에 네 아버지는 갑자기 강호에 나갈 일이 있다면서 행장을 차리시더구나……말은 하지 않았지만 찾아왔던 청년과의 밀담 때문인 것 같았지.]

…………

[어딜 가시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단지 걱정말라고만 하셨지……어린도를 가져가지 못해서 좀 아쉬운 듯 했지만 괜찮을 거라면서 그냥 떠나셨다.]

[…………]

[…………]

[그것이 건강하실 때 본 이 분의 마지막 모습이었단다.]

조예진은 모든 화(禍)가 자신으로 말미암은 듯 울먹이며 누워있는 소선풍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부덕(不德)한 탓 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주모……]

[그리고, 네 아버지가 집을 나서신지 정확히 열흘 만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내상(內傷)을 입고 간신히 되돌아온 것이니……]

[…………]

[…………]

[허나 그 때는 이미 네 아버지의 신체기능은 철저히 망가져 있어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단다.]

[그 때 우리 백인장은 초상이 난 것처럼 놀랐지요. 세상에 장주께서 중상을 입으시다니…………]

수혼도객이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즉시, 이 곳으로 옮겨 무산신의로 하여금 치료하게 한 후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추측해 보았단다…………]

[…………]

[…………]

[세상에 네 아버지에게 중상을 입힐 만한 고수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내 사부이신 혈기자라면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분은 네 아버지와는 남이모르는 친분이 있어서……나를 죽이면 죽였지 결코 네 아버지를 상하게 하실 분은 아니었다.]

…………

[내가 단언하건데 그분 이외에는 천하에서 네 아버지와 당당하게 겨루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혼란에 빠져서 여러 가지 억지 추측까지 하게 되었지……]

[…………]

[…………]

[얼마전에 찾아왔던 청년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나 때문에 네 아버지와 그 청년이 다투다가 혹시 그렇게 돼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 그리고……]

[…………]

[…………]

[어쩌면, 내 사형들인 삼수(三手) 중 두 사람이 협공하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은 그 당시로 조금 일리가 있는 것이기도 했지……네 아버지의 상세 중 맥이 가닥가닥 끊어진 것은 대사형의 절맥수(切脈手)의 수법 같기도 했거든……]

[…………!]

[…………!]

조예진은 얼굴에서 눈물을 훔쳤다.

[나는 몇 년 동안 흉수와 너를 찾아서 암암리에 무림을 헤매 다녔지만 전혀 종적을 발견할 수 없어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작은 어머니! 어찌 이 일이 작은 어머니 탓일 수 있겠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셔요………]

[고맙구나 애야, 그런데 어젯밤, 네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분명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단다.]

[제 이야기로요?]

[그래, 네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제가 어제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어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소일초는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우리 백인장을 찾아와 나를 만나보겠다고 했던 그 청년은 바로 내 사부인 혈기자(血旗子) 바로 그분 이셨던 거야……]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분은 이미 일백 서른 정도의 연세이실텐데……]

[일초의 말로는 그분께서 완전히 반로환동하셔서 다시 젊은이가 되셨다는 군요……]

[일시적으로 늙는 것이 고강한 내공으로 인해서 멈추는 경우야 있겠지만, 어떻게 정말로 다시 젊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선의 술을 닦았다면 몰라도……]

무심군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분은 무림사에 독보적인 존재이시지요. 우리가 떠날 당시 무진동에서 무엇인가 연구하고 계셨는데 어쩌면 정말로 신선의 술을 닦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 혈기자란 분은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젊어지셨어요. 나하고 내기도 하고 그랬는 걸요……]

소일초가 조예진의 말을 거들었다.

[애야, 네가 그분과 내기를 했다고 했지?]

[네! 제가 모두다 이겼어요.]

조예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다 이긴 것은 아니란다. 마지막 내기에서 네가 진거야.]

[……?]

[그분은 정말로 그 곳에서 열흘을 기다린 후 네가 나타나지 않자 바로 이 백인장으로 찾아오셨던 거야……]

소일초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한 약속을 네 아버지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지. 네 아버지는 감히 거절할 수가 없으셨을 테고……]

[그럼……아버지께서는 제 대신 사수(四手)와 주소아란 사람을 찾기위해?]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그분이 나를 보려고 했던 이유도 명백해지는 것이지……]

[…………]

[도망친 제자이지만 그리워서 한 번 볼려고 하셨던 거야……]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분은 전부터 나와 네 아버지가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내가 가 보았자 네 아버지 옆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모든 것이 제가 철없이 굴었던 때문인 것 같군요……]

소일초는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조예진이 머리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구나. 애야, 네 말대로라면 사부께서는 너에게 말한 그대로 네 아버지에게도 부탁하셨을 텐데 그런 험한 일을 당할 리는 없었을 거야.]

모든 사람들이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흑막이 깔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

[…………]

[일단 내 사형들의 짓임이 확실한 것 같으니까, 그 과정은 어찌 됐던 간에 그들을 찾아서 생사결단을 내도록 해야겠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녀에게는 집히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길지않은 때부터______

돌연 무림에 신비(神秘)롭기 이를 데 없는 세력이 소리없이 등장했었다.

 

삼성무림청(三聖武林廳)!

 

이것은 피가 그리워 실성하는 극마집단도 아니었고,

정의를 표방하는 단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지닌바 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 그들이 세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을 거듭해 왔다.

불과 출현 수년 만에 장강 일대를 기반으로 거대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의문의 단체인 삼성무림청,

경악!경악!

공포!공포!

그들의 출현에 처음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구대문파의 청옥검궁, 그리고 백인장은 경악해 마지 않았고,

그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강 일대의 군소방파들은 언제 뻗쳐올지 모르는 그들의 힘으로 말미암아 공포에 떨었다.

그들의 성격은 모호하여 정사(正邪)의 구분도 되지 않았다.

백인장과 청옥검궁, 그리고 구대문파가 이루고 있는 정족의 형세를 깨뜨리며,

장강변의 등천마교가 위용을 떨치고 우뚝 서있던 그 자리에 다시 선,

삼성무림청,

이들이야 말로 조예진이 가장 의심하는 곳이었다.

 

[일전에, 내가 삼성무림청에 몰래 잠입해보았지만, 그들의 행사가 워낙 은밀하여 도저히 우두머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삼성무림청 그곳이 아니고서야 무림에 그들이 웅크리고 있을 만한 곳이 없다.]

조예진은 아예 단정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잔잔한 눈빛이 가는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다치게한 그녀의 사형들에 대한 분노가 엄청남을 시사하는 듯이……

이때 무심군자가 길게 호흡을 조정하고 소일초를 향해 몇 마디를 보충했다.

[소장주……!]

[…………]

[우리는 소장주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소이다.]

[…………]

[장주님께서 무림의 십이 대 고수 중의 한 분 이셨고, 이 늙은이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소이다. 적이 누가 됐던지 간에 주모께서 도우고 우리 백인장의 힘이라면 천하에 상대하지 못할 적(敵)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년의 전통을 이어온 백인장의 저력을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백인장이야 말로 무림에서 가장 고수가 많은 곳 아닙니까?]

수혼도객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제 소장주께서 무사히 귀환하셨으니……장주님을 대신해 바깥의 일을 직접 보셔야 합니다.]

[제가요?]

[그렇지요. 소장주께서는 이미 무림에 널리 알려진 고수가 아닙니까? 조사를 좀더 세밀히 한 다음, 삼성무림청이 흉수로 밝혀진다면 깨끗하게 쓸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백인장이 건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장주께서 이렇게 변을 당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두 봉공은 번갈아 가면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문앞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봉공의 말이 옳습니다. 어제 밤부터 장주님의 상세에 호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주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흉수를 처단해 버리는 것이 소장주님의 도리입니다.]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

바로 약실에 갔다던 백인장의 도객아닌 소속인 무산신의 서공화였다.

서공화는 말을 마치자 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주모께서 오셨음에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장주께서도 훤앙해 지셨군요.]

[수고가 많습니다.]

조예진은 남편의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지라 그에게 신중하게 예를 취했다.

서공화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이 상태로 장주께서 점차 회복하기를 계속 하신다면……앞으로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쾌차하심은 물론 본래보다 어쩌면 더욱 무공이 고강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조예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모…… 제가 어제밤에 장주님의 몸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생겨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아마도 장주님께서 신체를 전혀 쓰시지 못하는 중에도 마음으로 새로운 무공을 깨우치신 듯 합니다. 무림사에 유래가 없던 일이지요……]

서공화의 말에 좌우봉공과 서일초 모두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일 년……! 일 년이면 이분께서 다시 건강해 지신다고요?]

조예진은 서공화의 소매를 붙잡고 거듭물었다.

소일초의 어린 얼굴에 굴강한 빛이 떠올랐다.

[일 년……제 손으로 흉수들을 처단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어요. 작은 어머니……]

조예진은 소일초의 말은 한귀로 듣고 흘러버렸다.

남편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데 원수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남편만 있으면 세상이나 원수따위야 몽땅 그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일초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기가 아버지의 어린도를 가지고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혈기자에게 사기도박을 걸지만 않았으도……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자기를 꾸짖을 생각이나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조금도 차도가 없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작은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지 몰랐다.

소일초는 중얼거렸다.

[내가……내가 모두 처단해 버리고 말테다……이제 부터 아버지가 일어나실 그 날까지는 내가 백인장의 장주인 것이다.]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은 아직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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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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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百刃莊의 發源地

 

 

 

황혼(黃昏),

짙은 음영을 드리운 황혼이 불타는 강처럼 대지에 빛을 산란(散亂)시키고 있었다.

스스스!

바로 이 황혼의 어지러움 속에서 싱그러운 초원의 물결이 아득한 대양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대평원, 일망무제의 대평원을 이루고 있는 푸른 초원의 세계, 바로 낙안평원(洛安平原)이다.

이 광활한 수천만평의 낙안평야를 지나서 멀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방을 에워싸듯이 우뚝 솟아이는 산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파양호(播陽湖)변의 여산(麗山)이었다.

이 여산에서 파양호를 바라보며 여산의 한 기슭을 메우듯이 솟아있는 거대한 녹색의 장원(莊園)이 하나 벌려 서있다.

헤아릴 수 없는 고루거각(高樓巨閣)과 대전(大殿), 인공호수(人工湖水)와 정자(亭子)들...

그리고, 그 엄청난 장원을 두르고 은막의 띠처럼 아스라이 둘러져 있는 십장 높이의 흑옥강석(黑玉鋼石)의 성벽(城壁),

이 장원의 웅장함과 장엄함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백인장(百刃莊)>

 

그렇다. 바로 이곳이 지난 삼백년내 강남무림의 패주인 백인장(百刃莊)인 것이다.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중의 남패천(南覇天)이라고도 불리는...

중원의 평화와 정의가 아름다운 향기로 솟아나는 곳...

이곳에서는 백인장과 함께 위대한 도(刀)의 제왕인 한 인간을 기억해야 한다.

 

-도왕(刀王) 소선풍(蘇仙風)!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할 때 그의 걸출한 용모를 극찬하고...

그의 측정할 수 없으리 만큼 높은 도법을 이야기하며... 그의 엄청난 내공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가 이루어 놓은 백인장의 찬란한 영광과 축복을 이야기하며...

중원은 마침내 그를 천하십이대고수(天下十二大高手)중에서 일노(一老) 혈기자를 제외한 제일인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이제 사십오세,

한 자루의 어린보도(魚鱗寶刀)와 눈같이 흰 백의에 백옥요대(白玉腰帶)를 차고 중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인장의 장주인 이 사람, 정파무림은 이 한 사람의 출현으로 무림일천년사를 통해 최고의 성세기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혈기자가 사라진 중원의 새로운 절대자였다.

그러나!

소일초가 삼 년만에 집으로 이상한 괴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백인장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정작 그의 아버지인 도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 * *

 

소일초는 남황을 떠난지 불과 사흘 만에 백인장에 도착했다.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검마와의 사별로 인한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우울한 표정이었다.

비성성들은 까마득한 허공에 새처럼 떠 있었고, 그는 백인장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문 안쪽에서 지키고 있던 젊은 도객이 그의 모습을 알아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 인사를 한 후에 부리나케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금방, 사방에서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 구분없이 우르르 뛰쳐나와 그를 맞았다.

“소장주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일제히 그의 손을 잡거나 껴안기도 했고, 노인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소일초는 묵묵히 고개막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삼년 전 천방지축일 때와는 태도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태도를 본 늙은 도객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소장주님께서도 소문을 듣고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소일초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보니 백인장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조금 이상했다.

자기가 돌아온 것 갖고 이렇게 소란을 피울 백인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아아! 초아야, 네가 돌아왔구나!”

장원 안쪽에서 소일초를 향해 질풍같이 날아오는 녹색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아름다운 옥용을 온통 눈물로 뒤덮은 삼십대초반의 절색 미소부,

바로 소선풍의 둘째 부인이고 소일초의 작은 어머니인 천외비연(天外飛燕) 조예진이었다.

“주모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데,

“흐윽! 무사했구나. 우리 아기!”

조예진은 와락 소일초를 껴안았다.

“삼년만에야 돌아오다니! 우리 말썽꾸러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녀는 이제 자신보다도 반뼘쯤 커진 양아들의 뺨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소일초도 절로 눈시울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잘못했어요. 작은 어머니. 앞으로는 어머니 말씀 잘 들을께요.”

그말을 듣고 그녀는 더욱 힘주어 소일초를 안았다.

“그래, 우리 말썽꾸러기가 이제 철이 다 들었구나.”

그들을 지켜보는 백인장의 남녀노소는 일제히 눈물을 훔쳤다.

생모가 아니고 친아들이 아니지만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백인장에 변고가 발생한 지금에야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감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듣도록 하자꾸나.”

“저...작은 어머니!”

“왜 그러느냐?”

“제가 친구들을 데리고 왔는데 괜찮겠어요?”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소일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괜찮고 말고... 그래 어디에 있느냐? 네 친구들은?”

소일초는 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작은 어머니인 조예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말썽꾸러기소장주가 또 무슨 엉뚱한 일을 꾸몄는가 하면서...

그러나, 하늘에는 까마득히 위에 새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것이 떠 있을 뿐 소일초의 친구로 짐작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예진의 안색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저 이상한 짐승들이 네 친구들이라고...?”

“네...”

소일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예진은 과연 한 눈에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썽을 부리지는 않겠지?”

“네. 다들 제 말을 아주 잘 들어요.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백인장 내에서는 소선풍의 말보다 더 위력이 있는 것이 조예진의 말이었다.

그녀가 허락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그녀는 소일초에게 그 친구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허락해 주었다.

소일초는 즉시 손바닥을 하늘로 쳐들었다.

번쩍-!

손에서는 수정검우가 저녁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이 신호였음인지.

꺄아악!

쐐애애액!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제히 금강하하여 백인장의 마당으로 내려왔다.

백인장의 사람들은 그 비성성들을 보자 놀라 도를 뽑고 경계자세를 취했다.

비성성들도 많은 사람을 보고 겁에 질린 듯 소일초만을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개가 달린 원숭이... 당연히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일초의 눈빛에 겁에 질려 있는 그것들의 모습은 이내 백인장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비성성들도 소일초와 생활한 후에는 사람들의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있었다.

그것들은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있을만한 곳으로 갔고, 소일초는 조예진을 따라서 내당으로 들어갔다.

 

소일초의 옷은 그의 몸이 자라는 바람에 턱없이 작아져 버렸고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조예진은 직접 그의 몸을 씻어 주었다. 어느덧 어른 티가 나는 양아들의 몸을 씻겨주며 조예진은 얼굴을 은은한 홍조로 물들였다.

‘코흘리개였던 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조예진은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으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순진하여 조예진의 마음을 알리 없는 소일초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조예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말꼬리를 돌렸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 우리 아기...”

“남만에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저를 잡으러 왔다가 돌아간 후 곧장...”

소일초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신나게 이야기했다.

혈기자를 만났던 일... 전설적인 전대거마 검마를 사부로 모시고 지냈던 삼 년의 세월 등등...

조예진은 그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참으로 대단하신 분을 사부로 모셨구나. 너도 그분 못지않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꼭 그렇게 될께요.”

소일초는 정말 철이 든 것 같았다.

조예진은 삼 년 전 보다 한 자나 더 자라버린 소일초가 정말 마음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작은 어머니는 왜 아기가 없어요?”

조예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 주석구석을 씻었다.

“여자는 무공이 너무 강한 것도 좋은 것이 못된단다.”

“왜요?”

“여자의 무공이 나이에 맞지 않게, 젊어서 너무 강해지면 오랫동안 미모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아기를 가질 수가 없단다.”

“이상하군요.”

“모든 것이 조물주의 섭리라고 해야겠지. 한 손에 두 물건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란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우수가 배어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소일초가 말했다.

“작은 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내가 잘 모시면 되잖아요.”

“아이쿠, 그래 우리 귀여운 말썽꾸러기야.”

그녀는 소일초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네 무공이 아주 깊어진 것 같은데... 이젠 도망가면 나라해도 못잡겠구나.”

“칫, 앞으론 도망가지 않아요. 사부님께서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 된다고 했다구요.”

 

조예진은 소일초에게 새 옷을 입히다가 한 옆에 놓여있는 어린보도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작은 어머니 왜 그래요?”

“아니다. 일단 쉬고 나서 내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네 방을 깨끗이 치워놓았을 테니까 가서 쉬도록 하렴.”

소일초는 자기 방으로 갔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방은 모든 것이 떠날때 그대로 였다. 아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은 어머니가 손수 청소했을 것이다.

침상에 벌렁 누워 소일초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소일초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생모(生母)인 이씨는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백인장을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말로는 어머니는 친정인 청옥검궁(靑玉劍宮)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때부터 백인장과 청옥검궁이 앙숙이 되었다는 것을 소일초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청옥검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가버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의 작은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 당시 작은 어머니는 정말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의 어머니도 아름다왔지만 작은 어머니는 훨씬 더 아름다왔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일초에게 어머니에 대한 아주 깊은 정이 있지는 않았다.

더욱이 어려서 떠나버려 정들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도 친어머니가 그다지 보고싶다는 생각은 달지 않았다.

남황의 그 밀림 속에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아버지도 친어머니도 아닌 작은 어머니 조예진이었다.

조예진은 아버지에게 시집온 후, 끝없이 말썽을 부리는 자기를 한 번도 꾸짖는 법도 없이 사랑으로 돌봐왔던 것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속을 태운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그녀는 꾸준한 사랑으로 그를 대했다.

아버지 작은 마누라라고 그렇게 놀려도 웃음으로 대하던 그녀였다.

소일초에겐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친어머니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작은어머니인지도 몰랐다.

하녀가 인기척을 하면서 저녁을 가지고 들어왔다.

“작은 어머니는?”

“급한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을 겁니다.”

저녁을 혼자서 먹은 후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아늑함을 느끼며 소일초는 일찍 잠들고 말았다.

그러나, 남황에서 올라온 비성성들은 인간의 문명을 처음 대하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백인장의 이곳저곳을 끽끽대며 밤새 기웃거렸다.

덕분에, 수비를 맡은 무사들은 성가셔서 혼이 났고...

그날 밤 백인장에서 편안하게 잘 잔 사람은 오직 소일초 한 사람 뿐이었다.

 

* * *

 

깊은 밤,

백인장의 깊은 심처에 자리 잡은 하나의 내실(內室)만이 불을 밝히고 있는데, 바닥은 푸른 청석(靑石)이고, 그 위로 눈부신 페르시아의 융단이 깔려져 있다.

내실의 사방엔 검은 빛의 휘장들이 쳐져 있고 실내에는 온갖 약초(藥草)의 향기가 가득하다. 이곳은 바로 백인장의 의약실(醫藥室)이었다.

지금, 차탁을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부인과 백발의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만인을 압도하는 기품을 흘려내는 미소부는 백인장의 여주인인 천외비연 조예진이었다.

조예진, 정숙하면서도 도도한 기품을 지닌 그녀의 옥용은 지금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하영걸인 도왕 소선풍의 아내이며 중원최고의 명문의 안주인인 그녀였으나 그녀의 신상에 관한 것은 일체 신비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기도 했다.

천하 그 누구에게나 물어 보더라도, 그녀의 이름이 다만 조예진이며, 금기서화(琴棋書畵)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녀가 도왕 소선풍의 둘째 부인이라는 사실 외에 더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조예진의 신분내력은 비밀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백발백염백미에 물처럼 잔잔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노인,

평범한 속에 칼날처럼 예리한 비범함을 지니고 있는 이 노인이 바로 무산신의(巫山神醫) 서공화(徐供華)란 인물이었다.

백인장의 일원으로서 도객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며 중원무림 최고의 의술을 지니고 있다는 신의(神醫)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조예진과 서공화!

옥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의 벽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행한 일입니다.”

문득 서공화의 입에서 무겁고 침중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

서공화가 흘려낸 단 일곱마디의 음성, 하지만 그 음성에 보이는 조예진의 반응은 컸다.

냉정하게 수려한 자태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는 있으나... 그녀의 교구는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입이라도 열면 금방이라도 전신이 허물어질 것 같아서인지, 한 마디의 말도 흘려내는 법이 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때, 서공화의 무겁게 침중한 음성이 다시 흘러내렸다.

“장주께서는 지금까지는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만약 범인(凡人)이셨다면 이미 고인이 됐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상태도 도저히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니...”

말을 이어가는 무산신의 서공화의 낯빛이 더욱 침중히 굳어졌다.

조예진은 백인장의 여주인답게 꿋꿋이 자신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물결처럼 떨고 있었고 얼굴은 암담한 절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조예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다면 그동안 더욱 상세가 악화되었음을 이르시는 것인지.!”

“그렇습니다.”

“아...!”

창망한 신음을 터뜨린 조예진의 교구가 허물어질 듯 비틀거렸다.

서공화도 어두운 낯빛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본시 인간의 힘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심한 중상이었소. 내 그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았소이다만... 결국 허사로 그치고 마니...”

서공화의 허탈이 배인 음성의 여파에 밀려 조예진의 매화처럼 냉염한 얼굴에 암담한 절망이 밤꽃처럼 피어났고,

그녀의 섬연한 교구는 화석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유심히 보던 그 청년은 바로 반노환동하신 사부님이었어.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어도... 아니 그분에게 어린보도만 쥐어져 있었어도...’

그때 돌연 서공화의 노안에 의혹이 번져 나왔다.

“한데 기이한 것은 그분의 체내에 있는 알 수 없는 잠경(潛勁)의 정체입니다. 더 이상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는 그 힘은 도저히 연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석상처럼 전신을 굳히고 있던 조예진이 고개를 들었다.

“기이한 잠경이라니요?”

무산신의 서공화는 조예진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음성을 흘려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 전에는 없었던 기운이었소이다. 어쩌면 그 기운이 그분의 병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의께서는 어느쪽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서공화는 탄식을 깊이 토했다.

“길(吉)이 될지 흉(凶)이 될지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오히려 기운이 스스로 몸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늘의 자비가 그분에게 내리기만 바랄 뿐...”

조예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의께서는 이 밤으로 다시 돌아가실 것입니까?”

서공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해질 무렵에 소장주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건강하고 철이 들어서요.”

“오! 소장주께서 돌아오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돌아가는 대로 전하겠습니다.”

조예진은 소일초를 떠올리며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밤길 조심하십시오. 내일 소장주와 함께 그곳으로 찾아가 뵙도록 하지요.”

그녀는 무산신의와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그곳이라! !

과연 백인장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호수(湖水),

시선을 들어 저 편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호수다.

바로 파양호다.

여기서 백인장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이 파양호 안에 거대한 인공부주(人工浮舟)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부주의 중앙에는 암청색으로 우거진 원시림(原始林)이 펼쳐져 있다.

까마득한 시야에 간신히 잡혀오는 신기루같은데 자세히 헤아려 보면 그것은 다분히 인공적(人工的)인 질서를 보이고 있으나……

일견해 보면 자생하여 제멋대로 자라난 자연림(自然林)을 연상케 했다.

한데 그 원시림을 둘러싸고 있는 검푸른 암초와 수초들을 보라.

백여겹,

족히 백여 겹은 되리라.

원시림을 둘러싸며 원경(遠景)을 멀리해 가는 암초와 수초의 기이한 방벽……

거기다가 암초와 수초의 겹을 따라 기이한 회오리를 일으키는 호수의 물살,

쿠우우우……

싸싸싸싸……

부딪쳐 되돌아 가는 물살의 소리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전율스러웠다.

만일 어떤 자가,

저 원시림을 목표로 하여 배를 저어간다면.

그 자는 맹세코 저 암초와 수초의 기이한 물살의 회돌이에 흔적도 없이 목숨을 잃고 말리라!

설사 그 자가 배를 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와 암초와 물살을 간신히 헤쳤다 해도……

부주의 중간 중간에 은밀히 숨겨진 백 팔십 곳의 기관진식(機關陣式)만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기관진식이 일시에 발동한다면 망망한 파양호가 한꺼번에 뒤집히고 말테니까……

 

밤(夜),

달빛도 별빛도 짙은 먹장구름 속에 숨어버린 칠흑 같은 심야,

돌연 이 파양호의 물결을 해치며 부주의 원시림에 접근하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스스……스스슷……

배는 회도는 물살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원시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를 젓는 사공,

수초와 암초와 무수한 기관매복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는 것인가?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노를 저어 가고 있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전형적인 어부(漁夫)의 차림이었으며,

어지럽게 흘러내리는 백발을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있는 칠십 정도의 노인이었다.

또한 어둠 속에서 불꽃같은 안광을 발하는 노인의 몸에선 기이하게도 고기비늘 냄새가 자욱이 뻗어나고 있었으니……

무간어옹(無竿漁翁),

강호인들은 이 노인을 무간어옹이라 부른다.

장강(長江)의 험악한 물살 중에도……

태고 때부터 인간의 숨결을 거부해온 비룡폭류하(飛龍瀑流河),

바위라면 바위를 ……

태산이라면 태산을 ……

일시에 소용돌이 치는 격류로 박살을 내버릴 비룡폭류하의 물살을 유유히 하나의 돛단배로 헤치며,

신선(神仙)처럼 죽간도 없이 천잠사 한 가닥으로 낚시를 즐기고 살았다는 사람……

그리고 십 년 전 백인장이 생긴 때부터 이 파양호로 옮겨와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傳說的)인 인물이기도 한 사람이다.

스스……스스슷……

아무렇게나 노를 저음에도 배는 마치 잘 길들여진 말처럼 정확한 진로로 원시림을 다가간다.

이 속에 무간어옹의 눈빛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오……참으로 수려한 모습……장주님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그렇다.

무간어옹의 시선이 닿고 섰는 곳……

고귀함과 우아함과 성결함 속에……

수심과 우수가 가닥가닥 터져 오르는 조예진과,

그녀의 품에 평화로히 잠이 든 소일초가 안겨 있다.

조예진의 시선은 껌껌한 허공을 향하고 있으나……

그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 뜨릴 것 같은 수심(愁心)이 가득하다.

문득, 소일초의 수려한 얼굴을 헤아리던 무간어옹이 조예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모……참으로 소장주께서 늠늠하시지요.]

이때 망연히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조예진의 서늘한 시선이 내려졌다.

그리고 탄식인 양 흐르는 음성,

[불쌍한 애지요.]

[…………]

탄식,

한 줄기 탄식이 조예진의 붉디붉은 입술 새로 앙금처럼 흐르는가 싶더니……

조용히 백옥(白玉)의 소수(素手)를 들어 잠들어 있는 소일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 아버지가 이 애를 무척 보고 싶어 했지요.]

[…………]

[이 애가 지금까지 피웠던 말썽도……]

[?]

[애 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탓하지 않았답니다.]

조예진의 두 눈에 서린 우수가 더욱 짙어졌다.

순간 무간어옹의 널찍한 등이 무겁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주모……혹시]

[…………]

[소장주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깜깜한 야공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원망하듯 중얼거리는 음성,

[불쌍한 것……]

…………

[어찌 운명은 우리에게 가혹한 것인지……]

무간어옹은 허공을 향해 더욱 수심을 두리운 채 굳어 있는 조예진을 향해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슬퍼보이며……

필요 이상으로 소일초를 가련하게 여기는……

조예진의 행동에 비록 많은 의구심이 있었지만……

어둠은 더욱 어지럽게 쏟아져 내렸고,

출렁……출렁……

뱃전에서 부딪치는 물결소리는 서러운 상심의 강(江)처럼 애닯다.

그 속에 무간어옹은 그저 묵묵히 노를 저어갈 뿐이었다.

 

× × ×

 

원시림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빽빽했다.

무릎까지 빠져드는 늪의 낙엽과……

기기묘묘한 형태로 살아있는 수목과……

아무렇게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정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과연 믿어질까?

그렇다.

그 무질서 속에 질서를 감추고 있는 원시림의 모든 것은 모두 완벽한 진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모이고……

나뉘어지고……연결되어……

이백 팔십여 개의 가공할 대소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진세속에 또 진세……

이 세상에 어떤 자도 누군가의 길 안내가 없이는 이 가공할 진세에 갇혀 생명을 잃고 말리라.

한데 오오……

보라!

그 원시림 속에 솟아 있는 거대한 석조건물을!

원래는 흰 백색의 건물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검푸른 이끼가 잔뜩 드리워 있어 검은 악마의 서식처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백인장(百刃莊)>

 

석조건물의 현판에 천하를 삼킬 듯 휘갈겨져 있는 세 글자,

이곳인가?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절정의 도객만도 일백을 헤아리고……

소속된 자 어느 누구하나 고수 아닌 사람이 없으며……

수 백 년의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절대의 도문(刀門),

바로 백인장 그 본 근거지였단 말인가?

그렇다.

이 부주의 어마어마한 석조건물은 분명 백인장의 선조들이 면면히 이어온 진짜백인장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 어떤 자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일대금역(一大禁域)이며,

백인장에 의한 중원정의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쓔……슈……

슈우우우우……

배는 석조건물을 향해 곧바로 다가가고,

어느 새 눈을 뜬 것인가?

소일초는 호기심과 기대가 꽉 찬 눈빛으로 어둠 속에 움츠리고 있는 거대한 석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인가……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다던 곳이 바로 이곳인가?)

소일초의 몸은 강한 기대감으로 떨기조차 했다.

[작은 어머니! 어머니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요?]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들어서는 자주 오지는 못했지. 장원의 일이 바쁘니까……]

[그런 일은 아버지가 다 하셨잖아요?]

[지금 우리는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일초의 안색이 홱 변했다.

[아버지는 어쩌면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그런 일은 절대없을테니 안심하거라.]

불안해하는 소일초의 머리를 스다듬어주는 조예진,

그리고 안스러운 듯이 소일초를 바라보는 무간어옹……

 

× × ×

 

석전(石殿),

석전의 내부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수 십 명의 장정(壯丁)이 팔을 힘껏 버리고 붙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거대한 대리석기둥 수백 개는 석전을 받치고 있었고……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천정에는 온갖 색(色)의 양명주들이 다투어 빛을 뿌려내고 있다.

뿐인가?

바닥은 어찔어찔 하도록 윤이 나는 운남의 대리석이었고……

사방에 내려진 휘장은 천축산(天竺産)의 비단이었으니……

그 장엄함과 화려함은 실로 형용을 불허했다.

바로 이 석전의 내부에서 소일초는 두 눈을 휘둥그래뜨고 사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데 일순간,

[백인장의 내총관 독고행(獨孤行) 주모와 소장주님을 뵙습니다.]

한 소리 장중한 음성과 함께,

스슷……!

빛처럼 조예진와 소일초의 앞에 나타난 사람,

백발(白髮)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팔십 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한데 모든 것이 흰 것으로만 치장되어 있는 이 사람,

도대체 천상(天上)의 선인인가?

인세(人世)의 속인인가?

신선과 같은 단아한 풍모를 지닌 노인의 모습은 가히 어디에 비겨 볼 데가 없다.

백인장에 내총관이란 직책이 있었던가?

독고행이라는 이 노인은 쓸쓸히 비워져 있는 백인장의 본거지를 관리하고 지켜온 사람이었다.

이 순간 조예진도 같이 노인을 향해 예를 보내고 있었다.

이어 빤히 독고행을 올려다 보고 있는 소일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독고총관을 처음보지?]

조예진의 음성에 소일초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침착하고 의연한 음성,

[오랫동안 이곳에 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총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오……!)

독고행은 비범한 풍도를 뿌려내는 소일초를 바라보며,

내심으로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조용히 소일초를 향해 마주 허리를 구부린 독고행,

[본 총관도 소장주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직접 보게 되어 기뻐군요.]

소일초의 점잖은 말에 조예진이 오히려 놀랐다.

언제나, 자기와 소선풍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하대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던 소일초였기에 지금같은 의젓한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가출했다거나 무슨 말썽피웠다는 그런 소문들 이겠지요?]

소일초의 말에 독고행은 미소를 지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소장주께서 너무 장난이 심하다 해서 걱정을 금치 못했었는데……한낱 그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오늘에야 깨달았소이다.]

독고행의 인자한 얼굴에 서린 그림자 사이로,

언뜻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요?]

[제가 안내를 해드리지요]

독고행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어차피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것이 낫겠지?]

소일초는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하나 이내 그가 그토록 무서운 아버지를 만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힐끗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조예진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하라는 표시를 하면서 눈물을 글성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일초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훨씬 느린 것 같았다.

신행마동이란 별호를 가진 그가 그처럼 느릴 수 도 있다니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그런 소일초를 등을 돌려 봄빛처럼 따사로운 눈길로 쓸어보던 독고행의 시선이 조예진를 향했다.

[훌륭히 키우셨습니다. 주모……]

[별 말씀을…………]

[장주님께서도 무척 만족하실 것입니다.]

순간 조예진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훌륭한 애지요……]

탄식처럼 이 말을 내뱉은 조예진이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분의 상세는 어떠신가요?]

[다행히도……오늘 아침에 들어 약간의 차도가 있는 것 같다는 무산신의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되묻는 조예진의 얼굴에 모처럼 희색이 감돌았다.

[장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다. 어서……]

조예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일초가 걷고 있는 곳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겨갔다.

소일초는 조예진과 독고행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흠칫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내공을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아버지가 상처를? 말도 안돼……)

소선풍의 무공의 고강함은 소일초가 잘알고 있었다.

무림의 그 누가 소선풍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분의 상세라니……?

차도가 좋아지고 있다니?

내총관 독고행,

그 사람은 백인장을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드는 대고수로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해서 무산신의와 아버지가 이곳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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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阿修羅魔劍式! 古今最强의 劍法

 

 

 

어둠에 싸인 고해금마옥(苦海禁魔獄)――!

“이 석실은 무림의 큰 죄인인 노부가 일백오십년을 참회하고 있는 곳이다.”

검마는 소일초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고의 재질을 가졌음에도 정기(正氣)가 부족한 네 녀석…… 앞으로 나와 함께 삼 년 동안 참회로 보내도록 하라! 내가 네 놈의 심성을 바로 잡아놓겠다.”

“히액! 삼……삼 년? 그것도 쇠사슬을 몸에 칭칭감고 말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단지 여기서 노부와 함께 삼년을 지내기만 하면 된다.”

‘흐유! 하여간 악귀사신을 꿈에서 보는 것이 확실히 재수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찍 짐작했어야 하는 것인데……!’

검마의 말에 소일초는 한바탕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소일초는 이내 불안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 할아버지 사실은요.”

“무엇이냐? 그리고 앞으로는 사부라고 불러라.”

무시무시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검마의 음성에 소일초는 오히려 주저하는 듯이 웃음을 흘려냈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실은 저도 무공이 만만치 않걸랑요?”

소일초의 장난기 섞인 음성과 침착하고 조용한 태도에 검마는 어처구니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혹시 내가 검마라는 사실을 잊어먹은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자기 앞에서 무공을 자랑하는 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하나 검마는 이내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나와 한번 겨루고 싶다는 말이냐?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아!”

“예!”

소일초는 큰 소리로 당당하게 대답하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혹시 너는 나와 겨루어본 사람은 모두 땅에 누운채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소일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의 검법은 오직 일초뿐이고, 나는 또한 더이상의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일백 팔십 세에 이른 검마에게도 그 사실은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저 보고 제자가 되라고 하고도 저를 죽일 것인가요?”

“물론 그래선 안되겠지.”

“저에게도 무공을 펼칠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나서 내가 깨끗이 승복하게 되면 앞으로 삼 년 동안 잘 모실께요.”

검마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음……이런 예는 없었지만 하는 수 없지. 네 녀석을 마음으로 부터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될테니까!”

“그럼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할아버지도 검을 뽑아요.”

소일초가 한 걸음 물러서며 등 뒤의 어린보도를 뽑았다.

츠츠츠――!

어린보도에서 새파란 도광이 일어나 어두운 고해금마옥의 내부를 스산하게 비추었다.

마치 고기비늘(魚鱗) 형태로 무지개처럼 번져나가는 삼엄한 도광(刀光)――!

“훌륭한 보도(寶刀)로구나.”

검마가 어린보도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할아버지도 어서 검을 뽑아요!”

소일초는 자기 키만한 어린보도를 꼬나들며 말했다.

“노부의 검은 필요하면 절로 나타나니까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검마는 웃으며 끄덕였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후회하지 말아요!”

쉬이잉!

소일초가 당차게 기합을 지르며 어린보도를 휘둘러 공격해왔다.

그가 펼친 제일초는 며칠 전에 혈기자에게 배운 용형삼도(龍形三刀) 중의 제 삼초인 백룡승천(白龍昇天)이었다.

파츠츠츠! 고오오오!

어린보도에서 엄청난 도기가 뻗어나오며 백룡이 하늘로 올라가듯 검마를 휘감아 왔다.

검마는 깜짝 놀랐다.

이 작은 꼬마가 어떤 기연으로 내공은 깊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절학을 능숙하게 구사해 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쇠사슬에 감겨있던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순간,

쩌러렁! 쉬이잉!

검마의 오른손에서 검은 빛이 일렁이더니 어느새 한 자루의 철검이 나타나 소일초가 일으킨 백룡승천의 초식을 마주 쳐갔다.

따다당――!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마를 덮쳐오던 백룡승천의 도세(刀勢)는 검마의 초식에 부딪히자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뿐만 아니라 검마의 철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옆의 석벽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아이쿠!”

쿠당탕!

어린보도도 방향을 잃고 튕겨져 나갔으며 소일초는 소일초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검마는 검마대로 깜짝 놀랐다.

방금 소일초가 펼친 도법은 그조차도 난생 처음보는 절세적인 도법이었던 것이다.

검마가 감탄을 발했다.

“옛날에 전설적인 도문(刀門)인 백인산장의 도객들에게도 그와같은 도법은 없었다.”

“백인산장의 늙은이 따위가 무어 대단하다고 그래요. 나에게는 모두 꼼짝도 못하는데……”

소일초는 잽싸게 어린보도를 꼬나들고 제 이초를 펼치면서 말했다.

제이초 역시 혈기자가 전수해 준 육풍장(六風掌)의 수법 중 제 육초인 북풍한빙(北風寒氷)을 어린보도로서 펼친 것이었다.

검마 역시 철검을 마주 뻗으면서 말했다.

“네가 전설적인 백인산장(百刃山莊)마저 알고 있단 말이냐?”

북풍한빙의 절초가 어린보도의 끝에서 펼쳐지자 살을 에일듯한 한기가 석실안에 가득차면서 앉아있는 검마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이 흉폭하게 몰려갔다.

그러나, 검마는 역시 검마였다.

고오오오!

그의 손에서 철검이 뻗어 나오자마자 북풍한빙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일초는 눈앞에서 불쑥 떠오르는 철검에 깜짝 놀라 뒤로 미끌어지 듯이 물러나며 피했다.

소일초는 이를 악물었다.

검마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가 알고 있는 절학이라고는 혈기자에게서 훔쳐 배운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악귀사신들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들은 무중일전신법(霧中一電身法)과 도귀(賭鬼)의 수정검우(水晶劍羽)외에는그다지 뛰어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백인산장의 도객들도 소선풍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무공의 요결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오직 육갑자에 이른 공력과 금강불괴지체의 몸뚱이, 그리고 총명한 머리가 그의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소일초는 잇달아 혈기자에게서 배운 수법들을 펼쳐내었다.

검마는 모두 일초에 그 수법들을 풀어버리기는 했지만 갈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초식이나 듣도 보도 못했던 기초(奇招)였고,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창안한 무공인지 절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삼십여초가 지났을 때였다.

돌연 소일초가 크게 외쳤다.

“이것도 한 번 받아보시지!”

그의 손에 들려있던 길다란 어린보도가 허공으로 높이 들려졌다.

검마는 내심 긴장된 표정으로 소일초의 손에서 펼쳐질 절초를 기대했다.

그러나,

피핑! 쐐애액!

뜻밖에도 소일초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면서 그대로 열려진 석문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검마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싸우다가 그렇게 도망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

촤라라락――! 콰아아!

검마가 손에 든 철검을 쭉 뻗자 검신에서 강인한 흡입력이 생겨 문 밖으로 날아가는 소일초의 몸을 휘감았다.

바로 그때,

스팟!

소일초의 왼손에서 무엇인가 반짝했다.

“수정검우(水晶劍羽)!”

검마가 경악하며 외쳤다.

소일초는 허공에 뜬 채 수정검우를 뒤쪽으로 맹렬히 던져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휘이잉!

검마가 선뜻 소매를 젓자 소일초가 발출한 수정검우는 빨리듯 그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어 검마는 다시 철검을 한 번 떨쳤다.

그러자,

“아이쿠!”

콰당탕!

소일초의 날아가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후 검마의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콰쾅――!

뒤이어 굉렬한 소리를 내며 고해금마옥의 육중한 석문은 그대로 닫혀버렸다.

헌데,

“수정검우(水晶劍羽)! 아아! 이것이 백오십 년 만에 노부의 수중에 다시 들려지다니……!”

검마는 웬일인지 깊은 감회에 젖은 채 왼손에 들어온 수정검우를 쓰다듬고 있지를 않은가?

소일초는 검마의 검기에 혈도를 찍혔으나 이내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도 없고 그냥 정신을 잃은 척 가만히 누워있었다.

잠시 후, 검마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너는 정말 이상한 아이로구나. 이 수정검우는 또 어떻게 해서 네 손에 있게 되었느냐?”

“내 사부가 준 것입니다.”

검마가 소일초에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바른대로 말해야 한다. 원래 이 수정검우는 내가 만든 것이니까.”

소일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정검우가 검마가 만든 것이라니……

 

소일초로서는 검마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백인산장에서의 일은 물론이고 악귀사신, 그리고 최근에 만났던 혈기자에 대한 말까지도……

검마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천하의 소일초로서도 고분고분해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말을 다한 소일초는 도망치는 것도 포기하고 풀이 죽어 바닥에 앉아서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검마는 묵상에 들어가 전혀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사실, 도귀(賭鬼)는 검마의 후손이었다.

검마가 남황으로 들어오기 전에 남겼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도귀가 검마의 신물이었던 수정검우를 가지고 있었던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검마는 천지간에서 가장 예리한 만년정모(萬年晶母)를 깎아 수정검우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날이 무딘 철검 한 자루 만으로도 적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마는 몇년을 걸쳐 겨우 만든 수정검우를 임신한 아내에게 주고는 이곳 남황으로 와버렸었다.

검마는 지금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한때 무림에서 검마란 이름을 얻었는데 그의 후손마저 사파의 인물로 악명을 떨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자기가 자행한 살겁에 대한 응보인 것 같았다.

 

* * *

 

그날 이후, 소일초는 검마의 억지제자가 되어 수행을 쌓게 되었다.

그로서는 검마의 검법이 탐이 났으나 검마는 오직 바른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풀풀 뛰어다니고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천성에 맞다고 생각하는 소일초로서는 처음에는 그같은 생활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을 하지만 검마의 곁을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곧잘 갑갑함에 발작도 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는 했다.

하여간 발작에서 다음 발작까지의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은 그가 조용히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불만을 품으면서도 그는 지루하고 따분한 생활에 점차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동안 비성성이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번갈아가면서 매일 과일을 들여주어 그가 배고픈 일은 없었다.

하지만, 검마는 음식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미 긴 세월을 벽곡으로 지내온 것이다.

소일초도 벌써 세 달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동안 그의 마음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없어지고 튼튼해져야 할 것은 튼튼해져 왔다.

침묵과 고요는 참고 견디기만 하면 사람을 가르치는 최고의 스승인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일년이 채워지던 날이었다.

“그동안 잘 참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을 쌓도록 하자.”

소일초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부터 소일초는 검마의 무적검법을 배우게 되었다.

우선 검마는 소일초에게 검을 쥐는 법 부터 가르쳤다.

그리하여 검이 손의 연장(延長)이고 마음으로 움직이는 도구(道具)라는 것이 느껴질 때까지 자신이 사용했던 녹슨 철검을 쥐고 있게 했다.

소일초는 그때부터 철검을 한 시라도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노부의 검법은 검벽신공(劍壁神功)이란 것으로서 분명 단 일초뿐이다. 네 이름 역시 일초(一招)이니 천리(天理)의 오묘함이 노부와 네가 만나게 한 것 같구나.”

검마는 소일초가 전생에서부터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자신의 검법이 진정한 주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검법은 단 일초 뿐이지만 그 일초를 위해서 익혀야 할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검마의 일초검공은 내가검공(內家劍功)의 최정수였다.

이름하여 검벽신공(劍壁神功)――!

무림에서는 아수라마검식(阿修羅魔劍式)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무적검결(無敵劍訣)이 바로 그것이었다.

검벽신공의 초식(招式)은 단 한가지지만 내공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스물 네가지의 요결에 따라서 운용되는 일초검공은 천하의 어떤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절세무적의 검공이다.

소일초는 검벽신공의 스물네 개의 요결을 익혀가면서 일곱 번의 주화입마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섬세하고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공 도중에는 어떠한 잡념도 가질 수 없음은 물론이고 털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과정으로만 말한다면 정통무공이라기 보다는 사공(邪功)에 가까운 것 같은 일초검공이었다.

 

다시 이년여의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피나는 고련끝에 소일초는 마침내 검벽신공의 이십사개의 운용검결(運用劍訣)을 모두 연성해냈다.

이제 초보적이나마 검벽신공, 즉 아수라마검식을 펼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온갖 무학의 원리를 담고있는 검벽신공을 통해서 소일초가 깨달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어떤 무공이든 간단히 그 약점을 찾아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안목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검벽신공이 완성된 후에는 소일초가 동굴밖으로 나와서 비성성들과 노는 때가 많아졌다.

뜨거운 햇살과 뜨거운 바람…… 그곳에는 계절의 분간이라고는 없었다.

푸른 거목의 숲에서 검벽신공을 연습하고 호수위에 뗏목을 띄워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소일초의 체격도 어느덧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 당당한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으니……!

그 와중에도 사부인 검마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쇄해지고 있었다.

유수와도 같은 세월은 어느덧 검마가 약속한 삼년을 후딱 지나간 것이다.

 

“억지로라도 너에게 장안은신술(帳眼隱身術)을 가르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걸리는구나.”

어느날 소일초를 불러앉힌 검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안색은 흡사 썩은 고목(古木)과도 같았다.

이미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이 절세무비의 검마의 몸에 그득히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장안은신술(帳眼隱身術)!

 

그것은 저 진주배교(秦州拜敎)에서 유래한 사술의 일종이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수령하면 어떤 절정고수의 이목이라도 속여넘길 수가 있다.

검마는 소일초에게 만일을 대비하여 그 장안은신술을 가르치려고 했었으나 소일초는 질색을 했다.

무공은 오직 검벽신공만 있으면 될뿐 다른 잡술은 배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것을 다시 떠올리고 검마는 안타까워 했다.

“지금의 네 실력이라면 무림에 나가서도 특별히 신경을 쓸 대상은 없을 것이다만, 혹시나 천년마교(千年魔敎)라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면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그자들은 아주 사악(邪惡)한 조직으로서 백오십년전에는 이 사부마저 납치하려고 기도한 적이 있었단다.”

검마는 감회에 잠기는데 소일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감히 검마를 납치하려 한 자들이 있었단 말인가?

“사부를 납치해요?”

“그렇다. 물론 그자들은 모조리 사부의 손에 죽고 말았지. 하지만 그자들의 마공은 아주 기괴하고도 사이한 것이었단다.”

검마는 천년마교(千年魔敎)란 비밀결사(秘密結社)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일초는 퍼뜩 등천마교(騰天魔敎)를 떠올렸다.

그자들은 자칭 자신들을 마교(魔敎)의 후예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가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 중 백인산장의 작은 주인이라니까 달리 당부할 것은 없다만, 이 한마디는 꼭 기억하도록 해라.”

검마의 안색이 아주 엄숙해졌다.

“네가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의 피는 네 몸을 적시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네 영혼은 이미 피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네 생명은 초개(草芥)처럼 여기더라도 남의 생명은 보배(寶盃)처럼 여겨야만 한다.”

검마는 가볍게 탄식했다.

“언젠가는 네 스스로 깨닫게 되겠지. 내가 죽거든 우광과 함께 화장하도록 해라.”

“사부님!”

소일초가 검마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돌아보니 남은 것은 악업(惡業)이고 남길 것은 씨앗(種)뿐이로구나.”

검마는 잔잔한 음성으로 내뱉은 다음 입을 다물었다.

다급히 그의 손을 잡은 소일초의 손으로 벌써 찬기운이 전해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벽곡을 하면서 시체같은 삶을 영위해 왔기에 죽음과 동시에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검마는 세수(歲數) 일백 팔십 오세로 기나긴 생을 마감했다.

소일초는 사부인 검마의 유해와 다비를 미루어 왔던 소림사의 파계승 우광(宇廣)의 유해를 함께 화장했다.

불법을 깨닫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 쳤던 우광의 몸에서도 사리(舍利)가 나왔고 수 많은 살행과 수 많은 고행과 수 많은 참선을 했던 검마의 몸에서도 여러 개의 사리가 나왔다.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을 때 신행마동 소일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난 삼 년의 세월 동안 검마의 깊은 정과 가르침은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 감고 있었던 쇠사슬을 소일초가 검마의 몸에서 풀어내었을 때 사부인 검마의 몸은 마치 장작개비처럼 가벼웠다.

몸의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은 막혀지지도 않았었다.

그토록 깊던 내공도 흩어지고 혼자서는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할 노인으로 검마는 죽었다.

검마의 마지막 수발을 들면서 소일초는 정말 자기가 이 사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부의 사리와 우광스님의 사리를 각기 나누어 품에 넣은 소일초는 검마의 동굴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뒤에는 열여덟 마리의 비성성(飛猩猩)이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서 있었다.

“가자!”

소일초는 이제 자기의 키보다 훨씬 작아진 어린보도를 어깨에 메고 왼쪽 허리에는 사부의 유품인 닮아서 이가 빠진 철검을 매었다.

오른쪽 허리에는 술병 대신 축융화탄이 가득 든 목탁을 차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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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劍魔의 洞府

 

 

 

흰 그림자들은 두 마리의 흰털을 가진 박쥐원숭이같은 괴물들이었다.

소일초가 앞서 잡은 검은 색 박쥐원숭이 괴물들보다는 훨씬 인간의 모습에 근접해 있었고 나이도 많은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 괴물들은 소일초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단지 그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려 작은 석동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를 따라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소일초는 흥미를 느끼고 괴물들을 묶었던 줄을 놓아 버리고 흰 털의 괴물들 뒤를 따라갔다.

동굴은 아주 깊었고……

침묵과 고요가, 그리고 앞서가는 두 괴물의 숨소리가 긴 메아리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좁은 동굴을 따라, 두 괴물과 한 사람의 아이가 무거운 침묵으로 걷고 있었다.

박쥐와 같은 모양이면서도 학처럼 하얀 날개를 가진 온통 하얀 몸을 가진 두 괴물과 비록 호기심과 장난기가 얼굴을 덮고 있지만 단아하고 고고로운 기풍을 지닌 백의를 입은 소일초,

자박 자박……

무거운 침묵으로 음습한 동굴 통로를 해치던 두 괴물은 이윽고 하나의 석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고해금마옥(苦海禁魔獄)>

 

석문에는 그같은 다섯자의 글이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투박하나 패기와 강렬한 기상이 서린 서체였다.

한데,

――시체(屍體)!

고해금마옥이라 쓰여진 그 석문 앞에는 한구의 시체가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승인(僧人)은 승인이로되 전혀 승인같아 보이지 않는 한구의 시신……!

그 승려는 아주 오래전에 죽은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있는 듯이 생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이 백발(白髮)과 백미가 가슴까지 칭칭 늘어진 노승(老僧).

파계승이었던가?

시신의 허리춤에는 두어 개의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회색의 승포는 얼룩덜룩한 것이 죽기 전에 많은 술을 엎지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함부로 경시할 수 없는 웅장한 기도를 죽은 다음까지 지니고 있는 이 노승은 누구인가?

소일초는 누군가를 만날 거라는 느낌을 가졌지만 죽은 중을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었기에 어리둥절했다.

두 백색 괴물은 멈추어 서서 고해금마옥의 문을 가리키며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중의 시체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일초는 노승의 시체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과연, 노승의 옆에 떨어져 있는 검은색 목탁에는 손톱으로 긁어서 새긴 듯한 글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노납은 소림승으로 제십칠대 장경각주(藏經閣主)인 우광(宇廣)이다.

노납은 나이 칠십에도 깨닫지 못하는 불법에 회의를 느껴 마침내 파계를 하고 말았다. 승인이로되 승인의 법도(法度)에 따라 생활하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주식(主食)처럼 즐기고 사는 파계승이 된 것이다.

주육(酒肉)은 고사하고 살생(殺生)도 마다하지 않으니 소림사에서 어찌 노납을 용납하랴? 마침내 소림사에서는 노납을 입적한 것으로 꾸미고는 노납에게 중원에서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노납은 중원을 떠나 변황을 수 없이 떠돌았지만 늙은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인생의 고해속에 머물러 있었다.

……>

 

글을 남긴 인물은 백여년전의 전설적인 소림신승(少林神僧) 우광선사(宇廣禪師)가 남긴 것이었다.

달마와 육조(六祖) 혜능(慧能)이래의 고수로 알려진 우광선사는 그 무공의 탁월함 뿐만 아니라 주육과 살생을 마다않는 괴승으로도 유명했다.

결국 그 같은 기행이 원인이 되어 소림에서 쫓겨난 그는 변황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해, 우광선사는 우연히 남황(南荒)에 내려왔다가 한명 전설속의 거마(巨魔)의 종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검마(劍魔)!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이름인가?

달리 아수라마존(阿修羅魔尊)이라 불리던 백 육십여년 전의 살인마왕(殺人魔王)!

그는 저 혈기자보다도 한 시대 전에 전무림을 공포로 휩쓸었던 일대거마(一代巨魔)였다.

그가 무림에 활동한 시기는 불과 이년이었지만, 당시 그의 일검을 피한 인물도 일 검에 죽지 않은 인물도 없었다.

만일 그가 계속 무림에 남아있었다면 혈기자가 과연 천하제일인의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시 될 정도였다.

이년……!

그 짧은 시간동안 헤아릴 수도 없는 숱한 무림고수들이 검마의 마검(魔劍)하에서 목숨을 잃고 불귀고혼(不歸孤魂)이 되었었다.

검마의 마검식(魔劍式)에 희생당한 무림명숙들의 시체는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이었다.

검마에 의해 살해 당한 흔적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검마의 마검이 머리를 스치면 스친 상처 부분이 동그랗게 파여 나갔고 가슴과 배를 스치면 그 부분에 동그란 구멍이 뚫리면서 내장이 아주 깨끗한 모습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름하여 아수라마검식(阿修羅魔劍式)――!

그 저주의 검법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하여 누구나 검마를 두려워 했다.

하지만 공포와 전률의 상징이던 검마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어 버리는 바람에 서서히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 살해당한 시체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검마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납은 검마의 종적을 발견했을 때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아수라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오랫동안 삶과 불법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노납은 마지막으로 보살행(菩薩行)을 하고 해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납이 비록 소림칠십이절기 중에서 육십삼종을 익혀 감히 달마조사와 육조 혜능께 비견된다 하나 검마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검마의 아수라마검식(阿修羅魔劍式)은 이미 인간의 검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노납이 아니던가?

노납은 그 길로 화기(火器)의 명가인 축융장(祝融莊)에 숨어들어가 그들 일족 최강의 화기인 축융화탄(祝融火彈)을 훔쳐내어 목탁에 가득 채웠다.

최악의 경우 그것을 터트려 검마와 동귀어진할 각오였다.

하나 노납은 검마의 얼굴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노납이 문 앞에 당도했을 때 검마는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담담히 한 수의 선시(禪時)를 읊었다.

 

――방안에 가득하니 그저 지고 난 매화향(梅花香)이로구나.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도 거울에는 그 얼굴이 남았도다.

 

깜짝 놀라서 노납은 묵상에 잠겼었다.

이미 그는 검을 놓고 세상을 버렸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실 검마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에 대한 복수심으로 세상을 피보라에 잠기게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행위에 회의를 느끼고 중원에서 머나먼 이곳 남만으로 내려와 스스로를 고해금마옥에 가두어버렸던 것이다.

노납은 검마가 던진 시구를 되뇌이다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대도(大道)는 무문(無門)이요 불법(佛法)은 무상(無想)이라는 것이다.

노납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알량한 영웅심으로 이곳 고해금마옥을 찾아왔다가 오히려 노납 자신이 구제를 받은 격이로다!

이제 노납은 비로소 해탈하여 입적하게 되나 다만 노납의 피륙을 추르려 줄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할 뿐이로다.

 

임인년 계축월 파계승 우광 절필.>

 

우광선사의 유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햇수로 추스려 보니 그가 입적한지는 어느덧 팔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여기가 검마라는 사람의 동굴이었구나.”

우광선사가 남긴 글을 읽은 소일초는 목탁을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한데, 중은 시체를 불태운다고 하던가? 밖에 악어를 굽던 나무가지가 남았으니 나도 좋은 일 한 번 해보지……”

몸을 일으킨 소일초는 힐끗 두 마리의 흰 괴물을 보고는 석문을 밀쳤다.

그가 석문을 미는것을 보고서야 두 마리의 괴물은 동굴을 되돌아 나가는 것이었다.

 

* * *

 

철그렁, 철그렁!

싸늘한 쇠사슬의 부딪침 소리와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어울어진 고해금마옥(苦海禁魔獄)의 안쪽.

 

――괴인(怪人)!

 

세상에 이토록 섬뜩한 기운과 참담한 몰골을 지닌 괴인이 존재했던가?

장작개비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에 걸친 적의는 헤어질대로 헤어져 중요부분만 가렸고……

제멋대로 이지러진 괴인의 이목구비는 도대체 어떤 부위에 무엇이 박혀있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츠츠츠!

칼날처럼 예리하고 싸늘한 눈빛만이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나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적발(赤髮)과……

깡마른 몸에 십자(十字)로 비켜 꿰뚫어진 수십 개의 만년철삭(萬年鐵索)!

검푸른 쇠사슬에 비파골(琵琶骨)이든 척수(脊髓)든간에 마구 꿰뚫고 지난 괴인의 몰골은 참으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이 괴인……

그가 바로 전설적인 살인마왕인 아수라마존(阿修羅魔尊) 검마(劍魔)였다.

문득,

번쩍!

죽음같은 침묵을 흘려내던 검마의 두 눈이 벼락불 같은 광망을 일으키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렇다.

저벅저벅……

석실로 들어오고 있는 백의를 입고 키보다 큰 장도를 등 뒤에 짊어진 한 명의 소동,

바로 소일초를 발견한 것이다.

“……”

“……”

두 가닥의 눈빛이 하나로 엉키고 소일초의 영악한 얼굴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아! 정말 무서운 기도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애! 우광이란 중은 검마라는 이 늙은이가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 같다더니 전혀 아니올씨잖아!’

소일초의 눈이 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을 발견했다.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경악이 걷히고 가득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불쌍한 영감이네. 저렇게 쇠사슬로 칭칭 묶여있다니……’

그는 알리가 없었다.

그 쇠사슬은 검마가 스스로를 묶은 것이라는 것을……!

검마는 세상에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서 쇠사슬로 자신의 요혈을 뚫어 묶어놓았던 것이다.

소일초는 겁도 없이 적발의 검마를 향해 다가가 천진하게 물었다.

“영감이 바로 검마야?”

순간, 새파란 안광을 작열시키며 소일초를 노려보던 검마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허허허허…… 검마라! 네가 지금 본좌가 검마냐고 물었느냐?”

“그래…… 본 신행마동께서 영감을 검마라고 불렀어.”

두려움도 없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일초,

찰나,

“크하하하하!”

검마는 돌연 고해금마옥(苦海禁魔獄)을 통째로 허물어 뜨리는 듯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윽!”

그 광소의 엄청난 위력을 견딜 수 없는 듯 소일초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웃지마! 영감! 왜 웃는 거지? 내가 검마인 영감을 검마라고 부른 것이 무어 잘못 된 것이라도 있는가?”

티없이 맑은 동공에 분노한 기색이 가득 실리자 검마는 문득 웃음을 멈추었다.

하나 그는 곧 차갑고 날카로운 일갈을 터뜨렸다.

“네녀석은 누구냐? 엄마품에 있어야 할 녀석이 어떻게 이곳에까지 왔느냐?”

소일초는 검마의 싸늘한 물음에 오히려 장난기어린 웃음을 피워올렸다.

“나는 소일초야, 당금 무림에서 불세출의 악명(惡名), 아차 실수! 악명이 아니고 위명(威名)을 떨치고 있는 신행마동이 바로 나야!”

순간, 검마의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이 사라지며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 불세출의 악명을 떨치는 하하…… 신행마동이라고…… 네가?”

“물론이지. 무림에서 신행마동은 오직 나 소일초 뿐이야.”

검마가 웃음을 멈추고 소일초를 유심히 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이제보니 대단한 꼬마로군, 그 나이에 내공이 이미 육갑자에 달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검마는 산더미 같은 기도(氣道)를 전신에서 폭풍처럼 흘려내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엄청난 기도는 소일초가 여태껏 그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소일초가 일전에 만났던 혈기자 외에 검마에 필적할 만한 고수는 오백년 내에 없었다.

그리고 혈기자는 반로환동한 후에는 기도마저 부드러워져 전혀 위압적이지 않았다.

자연히 지금 검마가 풍기는 압도적인 기도같은 것은 혈기자에게도 없었다.

소일초는 정말 검마가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느정도 위축이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까지와는 전혀 달리 저절로 아버지에게 대하듯이 말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일초는 애써 당당함을 유지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검마 할아버지를 만나보려고 남황까지 내려왔어요!”

물론 거짓말이다.

도대체 검마라는 이름조차도 이곳의 석문 앞에서야 알게 된 그였다.

“나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우광선사 외에는 아무도 모를 텐데?”

“내가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분명히 할아버지를 찾아왔잖아요.”

검마로서는 이 꼬마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의 제자라는 것을 알리가 없다.

소일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까 꿈에 악귀사신을 만나는 꿈을 꾸었더니 이렇게 거짓말 할 일을 만나게 되는 구나.’

“너는 어떻게 이곳을 알았느냐?”

“세상에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라구요.”

득의 만만하게 소일초는 다시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배우지 않고도 안다고? 푸하하하!”

검마는 또 한바탕 소용돌이치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어,

“네 이놈! 지금 감히 노부를 우롱하려고 하는 것이냐?”

웃음을 멈춘 검마는 심장을 뜽어내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로 소일초를 다그쳤다.

그러나, 소일초는 오히려 천진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할아버지! 내가 무엇을 우롱한다는 거지요?”

순간 검마의 차가운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할아버지? 저…… 쥐방울만한 녀석이 또 본좌를……’

비정(非情)과 살륙(殺戮)과 유혈(流血)로 무림을 종횡하다가 남황으로 들어와 고독하게 살아오기만 했던 검마……

그가 언제 이처럼 가까운 혈육의 호칭을 들어 본 적이 그 얼마만인가?

비록 소일초가 거짓으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할 지라도 검마는 그의 호칭에서 심연의 깊이에서 잊혀졌던 어떤 감정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과 달리 검마의 얼굴에는 더욱 새파란 빛이 가공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어려서부터 거짓부리부터 배우다니……! 네가 아무리 본좌를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장차 네녀석으로 인해서 무림이 얼마나 소란스러워질지 모르겠구나.”

“……?”

“예전 같으면 당장 네놈을 죽여야 하겠으나…… 노부와 함께 처절한 수행을 거치도록 해서 네 놈의 심성을 바꾸어 놓겠다.”

“꽥! 수…… 수행이라니요? 무……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이놈! 내가 한때의 광기를 억제치 못해서 저지른 만행을 참회하기 위해서라도 네 녀석을 장차 무림에 복이 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아야겠다.”

검마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소일초는 오히려 환한 미소를 검마에게 던지는 것이니…… 설마 그렇게 될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고 녀석 참……!’

그런 소일초를 새파란 안광을 폭출시키며 바라보던 검마의 눈가로 따스한 정감이 스쳐갔다.

그것은 평생을 살륙과 세상에 대한 증오로 살아온 검마가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감정이었다.

 

――검마!

 

일백육십여 년 전 무림천하를 한자루의 검으로 무자비하게 휩쓸어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일초무적(一招無敵)의 살인마!

비록 그 활동기간이 이 년이란 짧은 시기였지만 천하의 모든 명인, 고수들이 두려워 해 마지않았던 고금제일의 검수(劍手)!

소림의 불세기재로 불리웠던 우광이 동귀어진할 작정으로 축융화탄을 목탁속에 넣고서 찾아 다녔던 공포의 거마(巨魔)!

뿐인가?

당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백인산장의 도객들이 비밀리에 검마를 잡기위해 나섰으나 삼십여명의 도객들이 역시 단 일초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검마의 어마어마함을 더이상 설명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 그가, 그토록 강인함과 피와 잔인(殘忍)으로 점철되었던 그가 냉혹하고 비정한 응어리를 드리운 얼굴에 따스한 기온을 피워내다니!

백 수십여 년의 세월을 처참한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오며 참회를 한 때문인가?

그의 불성이 이미 깊은 경지에 다다랐음인가?

그것도 아니면 인간의 정이 너무 그리워서인가?

이것은 기변 중에도 경악할 기변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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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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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밀림 속에서의 긴 꿈

 

 

 

괴물들은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차렸다.

호수가에서 소일초가 불을 피우고 악어 한 마리를 통째로 굽고 있었다.

어른의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나무에 매여져 있는 악어는 아직도 살아 있는 듯 몸부림 치고 있었다.

옆에는 마른 나무가지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소일초는 입맛을 다시면서 화력을 높이고 있었다.

괴물들도 그에게 혹사를 당한 뒤라 몹시 배가 고팠다.

게다가 아직 살아 있는 악어가죽 굽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군침을 삼키며 악어를 보고 있었다.

지글지글-------

직지글---------

마침내 악어는 축 늘어져 노글노글하게 익어버렸다.

순간 소일초는 손에서 아주 밝은 빛이 반짝 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얇고 날카로운 깃털모양의 수정(水晶)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길이는 약 두치 반 정도,

너비는 한치 못되어 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수정검우(水晶劍羽),

 

바로 도귀(賭鬼)의 수정검우였다.

그의 손에서 다시한번 깃털 모양의 수정이 반짝 하다 사라졌는데,

악어의 살점이 뚝 떨어졌다.

냉큼 받아서 입에 넣고 씹어보니 보기보단 영 맛이 없었다.

[쳇! 이러면 헛수고 한 거잖아……]

고개를 슥 돌려 한 줄로 나란히 누워있는 괴물들을 보았다.

[저 놈들은 수(數)가 많으니까 한 마리 쯤 잡아먹어도 괜찮겠지……]

그가 입에 넣었던 고기를 뱉고 눈빛을 번뜩이며 자기들을 노려보자 괴물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일초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저놈들을 집에까지 끌고 가서 키워야 되는데 눈앞에서 동료가 잡아먹히는 것을 보게되면 자살해버릴 지도 몰라…… 맛이 좀 없더라도 오늘 저녁은 이걸로 때워야겠군……]

그는 조금 전에 악어의 질긴 가죽을 씹었던 것이다.

그것이 맛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석달쯤 굶은 후 일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연해 보이는 곳을 찾아서 살점을 베어먹어 보니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즉시 휴대했던 소금을 꺼내놓고 본격적으로 악어를 파(?)먹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그가 먹는데 열중하는 것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고 팍 늘어졌다.

실컷 먹은 소일초는 괴물들을 힐끗 보고는 엄청나게 굵은 나무둥치 밑으로 가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렸다.

하는 짓에 비하여 잠자는 모습은 여느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

…………

× × ×

 

…………

정뇌(井牢),

 

무림에서 가장 험난한 뇌옥이자 백인장의 금역이다.

수백 년 전,

백인장이 무림에서 암중리에 활동하던 때부터,

무림의 최고 거마(巨魔)들을 가둬온 뇌옥이다.

수직으로 밑으로 파내려간 우물처럼 된 이 뇌옥은 모두 구층(九層)으로 되어있으며,

각 층마다 팔 명 씩의 혼세거마를 가둘 수 있다.

이 곳에 갇히는 마두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무림에 웅크리고 있으므로 무림은 완전한 피의 혈풍에 휩싸이게 할 수 있음은 물론,

무림천지를 사마(邪魔)의 땅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도 이었다.

때문에,

정뇌를 지키는 엄중한 경비는 백인장은 물론 중원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백인장의 최일류 도객들의 온 힘이 기울어져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십여 년 전 도(刀)의 하늘인 백인장(百刃莊)이 무림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후 에는 오히려 정뇌에 잡혀 들어오는 마두의 수가 격감했다.

아마도 백인장 도객들이 무서운 힘이 강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자 사마가 숨을 죽인 때문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백인장의 원로도객들이 정뇌를 관리해 왔는데 각 층 마다 한 사람의 원로가 직접 거처하면서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로 도객들은 모두가 백인장의 전대고수들로 지금은 자기의 지위를 후손에게 물러주고 오직 도법의 연구와 장원 내의 중대한 일에만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인장(百刃莊)에는 백 명(百名)의 도객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을 젊은 도객들과 은퇴한 노도객(老刀客)들도 있기 때문에 실제의 도객 수는 수 백 명이었고,

백인장의 식구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법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백인장의 도객들의 도법은 각기 다른 것이었으니……

백인장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절세의 도법들만 해도 백 가지나 되었던 것이다.

실로, 무림에서 최강문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정뇌……

지금은 불과 십 여 명의 마두들만 갇혀 있는데……

 

× × ×

 

쿠르르르르……

돌연 백인장의 절대금역인 정뇌의 여러 문들 중 하나가 둔중히 열렸다.

동시에,

콰아아아……

뭉타래 기운이 음습하고 사이로우며 마기로움의 구름덩이를 만들어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리고 어디선가로 부터 들려오는 전율의 호곡(乎哭),

[…으흐흐흐흐……]

한꺼번에 매케한 냄새에 실려오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괴성(怪聲),

절규,

울부짖음……

마치 저 십 팔 층 지옥유부(地獄幽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때다.

돌연,

검은 마기와……

소름이 끼치는 울부짖음이 소용돌이 치는 사이를 뚫고,

자박 자박 자박………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화섭자를 손에 들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소리는 그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불과 오 세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일신에는 눈보다 흰 백의를 걸쳤고,

머리에는 두 마리의 학이 허공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듯한 백학건을 늠름하게 쓴 이 소동(小童),

밝고 천진하며……

천상(天上)의 선동(仙童)처럼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고 볼에는 장난기가 가득 배어 있는 듯 했다.

헌데 무슨 일로……

이토록 깨끗하고 고아하며……

그러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어린 아이가 이 음습한 정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적지 않는 어려움을 겪은 듯,

그의 깨끗한 백의가 먼지로 인해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헌데 일순간,

슷……!

이 어린 아이의 앞으로 한 명의 노인이 소리없이 날아내렸다.

단아한 백색장포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인,

마치 그의 몸의 일부인양 자연스럽게 장도(長刀)가 허리에 걸려있는 그의 모습은 기품이 이를 데 없었으며 눈빛은 맑고 고요했다.

거기에다 온화로운 얼굴,

마치 신선을 직접 대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노인이었다.

사실 신선 같은 노인은 날아내렸으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 뜬 채 유령처럼 떠있었다.

노인은 다섯 살 정도의 꼬마가 정뇌에 들어오자 아주 이상한 듯 했다.

번쩍,

그의 맑은 두 눈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작렬했다.

[애야 너는 누구냐?]

[…………]

[누구길래 감히 정뇌에 들어왔단 말이냐? 허참, 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뭘 하기에 어린아이가 이곳까지 오게 한담……]

노인은 혀를 차면서 싸늘하게 목소리를 깔았고 어린 아이는 밝고 천진한, 그러면서도 장난기가 짙은 얼굴을 들었다.

[영감이 원로십팔도객(元老十八刀客) 중 제일 막내 도객인 백승옥도(百勝玉刀)인가?]

비록 장난기가 들어있는 하대(下待)였지만,

조용한 미소에다 행동은 침착하고 유연했다.

백승옥도의 몸이 어이가 없는 듯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소동을 보고는 절로 흠칫 했다.

(이 어린애……오오……저 뛰어난 기품과 아름다움……그리고 천부적인 골격……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노부를 대번에 알아보는 것인가?)

백승옥도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학(鶴)처럼 단아한 기품의 소동을 세심히 살폈다.

(아무튼 간에 이 정뇌에는 기관이 없어서 탈이야……위에서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해서 이 아이를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이녀석! 나는 백승옥도가 맞다마는 너는 누구길래 그처럼 어른도 몰라보고 말을 막 하느냐?]

백승옥도는 어린아이에게 크게 감탄하고 있었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겠다는 듯이 물었다.

순간 백의 소동의 얼굴에 영악한 웃음이 환하게 스쳐지나갔다.

[믿지 못하겠지만……이 정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영감처럼……나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없었지.]

[…………]

[또 나는 내가 누구라고 남들에게 한 번도 말할 필요가 없었지.]

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가던 백의 소동이 돌연 어깨를 흔들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낭랑한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한참 후에야 그쳤다.

백의 소동은 웃느라고 빨갛게 변한 얼굴에서 애써 웃음을 흐트리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백승옥도에게 말했다.

[왜냐하면……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었고…………나에 대해 모른다는 것조차 그것은 내게 큰 죄에 해당되었고……또한 당연히 가혹한 형벌로 이어졌지……]

순간 백승옥도의 깊은 동공에서 가는 파장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너는 ?]

백의소동은 백승옥도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환한 웃음을 빨개진 얼굴에 다시 피워올렸다.

[그렇지.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군. 백인장의 모든 사람은 나를 며칠 전 부터 소일초(蘇一招)라고 부르지. 그 전에는 소태봉이라 불렀고……]

단아한 가운데 듣는 이를 압도하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

백승옥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어 그의 얼굴에 가득히 번져오는 격동의 물결,

그는 그 자세로 소동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정중히 무릎을 낮추고 눈을 마주했다.

[십팔원로 중 백승옥도가 소장주(少莊主)를 뵙겠소.]

소장주……

이 아름답고 천진하며……

환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소동은 바로 백인장의 절대고수인 도왕 소선풍의 일점혈육인 마동(魔童) 소일초였다.

이 순간,

[영감은 너무 겸양을 부리는 군.]

소일초는 하얀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어 백승옥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승옥도는 장주인 소선풍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원로도객인데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어이가 없었으나,

귀여움만 받고자란 철부지의 행동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영감이 이 정뇌에 들어왔을 테니까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

이제 소일초의 말을 듣는 늙은 도객 백승옥도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정뇌에 들어온 후 벌써 칠년의 세월이 흘렀다오. 앞으로 삼년이 지나면 다시 밖으로 나가 소장주를 만나게 되겠지요.]

[내가 태어나던 날 원로들이 옥소도(玉小刀)을 전해 축하해 주었다고 하는 것 같더군.]

소일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 크기의 반투명한 하나의 옥으로 된 소도(小刀)를 백승옥도에게 내밀었다.

그 소도를 받아든 백승옥도,

그의 얼굴에 짙은 감회가 서려왔고,

그는 추억에 잠기듯 소도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랬었지.……소장주의 탄생을 이 늙은이도 정뇌 안에서 소문으로 알게 되었는데…당시 후사가 없어 애태우시던 장주께서 후사를 얻으셨으니……정말 큰 경사였지……]

이때 소일초는 얼굴을 찌푸리며 재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엣취……엣취……]

백승옥도은 황망히 소일초를 부축하려 했으나,

소일초는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이런 재치기쯤은…… 그런데 이 정뇌 안은 너무 환기가 안되는 것 같애. 공기가 나뻐……]

염려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소일초를 부축하려던 백승옥도,

헌데 돌연 백승옥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소……소장주,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소도에 산공산(散功酸)을 바르셨소?]

느닷없는 백승옥도의 음성과 태도,

소일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입술을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왜 나는 아직도 영감이 반응이 없을까 걱정을 했어.]

[소……소장주……!]

백승옥도의 부처처럼 자비롭던 얼굴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허나 소일초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시선을 환한 미소로 백승옥도의 얼굴에 던졌다.

[미안, 미안……그 산공독은 ……만지는 순간 혈맥을 타고 약효가 번진다지? 아마?]

순간 백승옥도의 얼굴이 더욱 참당하게 일그러지고,

급히 그는 내력을 돋구어 삼매진화로 산공독을 태워버렸다.

푸지지직……!

옥소도를 쥔 그의 손에서 연기가 뭉텅 피어오르는 찰나,

[헉……!]

백승옥도은 푸석한 신음성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소일초의 고사리 같은 손이 백승옥도의 마혈(麻穴)을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찍어버린 것이다.

[소……소장주……!]

아득히 정신이 달아나는 속에서도 백승옥도는 두 손을 내저었다.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환히 피어있던 미소와 천진과 장난기가 걷히고,

대신,

이제 조금 안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백인장의 다른 곳은 다 가보았지만 여기는 구경을 못했거든…… 얌전하게 구경만 하고 갈거니까 너무 화내지마. 위 층에 있는 영감들도 지금 똑 같은 신세니까……]

[소……소……]

[위층에는 마음에 드는 마두(魔頭)들이 없었어……여기서 괜찮은 마두를 만나면 잠시 놀다가 갈께……]

마음에 드는 마두라니?

마두와 놀다가 간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일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명만 세상에 빠져나가도 온천하가 피로 잠길 거마들과 놀다 가겠다니!

어쨌거나,

소일초는 완강한 걸음으로 음습한 뇌옥문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백승옥도는 혼절해 가는 영혼을 붙들고 마지막 기력을 다해 두 손을 휘저었다.

[소……장주……위……위험……무서운 일……제……발……]

허나,

소일초는 등을 돌리고 그를 힐끗 보면서 손을 마주 흔들어 주고 가벼운 걸음으로 지하 구층의 뇌옥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어,

소일초의 한개의 문앞에 가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두드렸다.

그런데,

퉁퉁------

그의 손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전혀 뜻 밖에도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그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관을 휙 돌려서 문을 열어보아도 텅빈 곳이었다.

대충 두드려가며 조사해본 결과 그래도 구층의 석실에는 네 명의 죄수가 있었다.

그 정도라면 어느 층 보다 많은 것이다.

위의 팔층 까지는 기껏해야 열 두 명의 마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정뇌의 구층 석실에는 바로 무림에서 기이한 악명을 떨친 바 있는 사마귀(四魔鬼)가 감금되어 있었다.

[안에 있는 놈은 어떤 놈이냐?]

앳되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정뇌안에 길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누가 십 년 동안을…… 이 저주 받을 뇌옥에서 갇혀 지낸 우리를 부르는 건가?]

[우하하하……이 뇌옥에서 그렇게 소리치는 놈이 있다니 대체 어떤 놈이냐……누군냐?]

세 가닥의 종잡을 수 없는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안에 있는 네 놈들의 이름을 물었다.]

소일초가 소리쳐 물었고,

석실 안에서는 당당한 어린애의 목소리에 어리둥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린, 사마귀(四魔鬼)다. 너는 누구냐?]

이 음성은 먼저 들린 세 음성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귀 네 놈이라고? 그럼 너희들은 지옥에서 잡혀왔단 말이냐?]

[와하하하……이곳이 지옥이지 다른 지옥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 꼬마놈아!]

순간,

끝없이 울려퍼지는 웃음과

철컹……컹커덩……

소름이 끼치는 금속성에 불쾌함을 느낀 소일초가 고함을 쳤다.

[시끄럽다. 못된 것들……]

 

시끄럽다……

시끄럽다……

 

소일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어둑어둑해 오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 괴물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함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길 꿈이었군……그 때가 언젠데 꿈을 꿔? 사마귀가 또 잡혀 들어왔나?]

아직 정신이 덜 들었는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때, 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났는데……씨……또 잡혀 들어와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

 

밀림에서는 해가 지는 저녁에도 무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워있는 괴물들 옆으로 가서 발로 툭 찼다.

[일어나! 일어나!]

괴물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설사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두릅모양으로 엮인 데다가 손과 날개가 함께 묶인 상태에서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 씩 잡아 일으키자 괴물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 낮의 악몽이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낮에 그 때,

소일초는 역시 괴물들을 세워놓고 차례대로 박치기를 해서 놈들을 모두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렬로 세워진 괴물들의 뒤에서 줄을 잡고 남은 자락으로 채찍질을 했다.

영특한 괴물들은 그가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짧은 다리로 줄지어 어둠이 깃드는 숲으로 걸어갔다.

거목이 줄지어 있는 사이를 얼마동안 걸어가자 정말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장정 백 명이 손을 맞잡아도 다 두르기 힘들 정도로 굵고 큰 나무 였다.

나이가 몇이나 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적게 잡아도 수 천 년은 됐을 것 같았다.

거목의 밑동 주변에 드러나 있는 뿌리들도 무려 사 오 장의 높이가 되어 보였다.

괴물들은 그 뿌리들이 엉켜있는 사이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 근처에는 흙이 오랜 시간을 두고 갈라지고 붕괴되어 천연의 동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법 괴물다운 곳에 사는데……]

소일초는 어두운 동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내공이 깊어서 어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지라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동굴의 처음 얼마동안은 토굴이었으나 조금 더 들어가자 석굴이었다.

동굴안은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인공의 가미된 흔적마저도 보였다.

과연,

석동의 안쪽에는 사십여 평 정도 되는 넓은 곳이 나왔는데 그곳에는 수십 개의 야명주가 천정에 박혀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누군가가 여기서 살았거나 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괴물들은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추어 섰는데,

소일초는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경각심을 일으켰다.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는 광장의 저 편,

다시 하나의 작은 석동이 있었고 흰 그림자 두 개가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괴물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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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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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返老還童, 神行魔童에게 敗하다.

 

 

 

[좋다. 그러면 어떻게 내기를 할까?]

혈기자는 소일초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일곱 살 짜리 꼬마가 내기를 하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설마 사마귀가 이 꼬마의 사부들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소일초의 눈에서는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사마귀는 탈출의 일념으로 그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서 자신들의 절기를 전수해 주었다.

그렇기에 사마귀의 막내인 도귀(賭鬼)로부터 소일초는 온갖 종류의 도박과 승부를 점치는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지금 형씨 품속에 은전(銀錢)이 네 개 이상이 있으면 내가 진 걸로 하고 네 개가 되지 않으면 내가 이긴 걸로 하면 어때?]

혈기자는 소일초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자기 품속에 은전이 몇 개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무학의 대종사인 그가 언제 자기 품속의 은전이나 헤아려 볼 생각이나 했겠는가?

머리를 숙이고 며칠 동안의 출납상황을 이리저리 점검해 봤다.

소일초는 고심하는 그의 옆에 와서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혈기자는 대충 계산을 해낼 수 있었는데, 세 개인지 네 개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좋다. 두 말 하기 없기다.]

혈기자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자 소일초가 소리쳤다.

[잠깐!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함께 봐야 될 게 아니겠어?]

[물론,그렇지.]

[하지만 형씨의 무공이 너무 고강하니까 어떤 속임수를 쓸 지도 모른단 말이야……]

[…………]

[그러니까 주머니를 열지 말고 손으로 주물러서 몇 개 인지를 돌아가며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좋다. 네가 먼저 확인해 봐라.]

혈기자는 주머니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소일초는 몇 번 주물럭거리다가 혈기자에게 다시 던져주면서 말했다.

[첫 판은 형씨가 이긴 것 같은 데……]

혈기자는 내심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주머니를 받아들자마자 표정이 확 바뀌어져 버렸다.

주머니의 무게가 조금 전과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소일초가 무슨 술수를 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두눈을 똑 바로 떠고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손으로 만져보니 은화는 세 개 밖에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현장을 잡지 못했으니 사기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흥! 내가 졌군, 단 한 번 만 이환공(移環功)의 구결을 들려주겠다. 익히고 못 익히고는 네게 달렸다.]

말을 마치자 마자 혈기자는 몹시 빠른 속도로 구결을 읊었고 소일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마나 기억했지?]

[십중일이(十中一二)!]

[그럼 다시 시작하자. 내기 조건은 먼저와 같다.]

[…………]

[단, 내기의 종류는 내가 정한다.]

[하지만 무공을 겨루거나 누구 나이가 많은가 하는 따위는 절대로 안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들은 날이 훤 하게 밝을 때 까지 무려 열 세 가지의 각기 다른 내기를 했고 그때 마다 번번히 소일초가 이겼다.

소일초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했으면 이긴 후에 혈기자가 임의로 한 가지 무공을 가르쳐 주고,

혈기자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하면 소일초가 이긴 다음에 자기가 원하는 무공을 선택해서 요구했다.

그리하여 소일초는 자기가 원하는 여섯가지의 절학을 배울 수 있었다.

총명한 그는 한 번씩 밖에 그 무공들의 구결을 듣지 않았지만 이미 머리 속에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에 혈기자는 속이 탈대로 다 탔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소일초가 내기의 종류를 지정했다.

[내가 금방 형씨한테서 배운 무공들로 공격하면 형씨는 가만히 앉아서 방어만 하는 거야.]

[…………]

[만약 일어서거나 자리를 옮기게 되면 형씨가 진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긴 걸로 하면 어떻겠어?]

혈기자는 이미 그의 무공을 한 번 보았기 때문에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좋아! 만약 이번에 내가 이기게 되면 너는 내 제자들을 만나서 내 근황을 모두 일러주고 아무 염려말라고 전해줘야 하고 내 손녀와 나를 한 번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아무 염려 말고 이기기나 해. 형씨의 제자가 바로 사수(四手)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그럼 바로 시작 할까?]

혈기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일초는 조금 전에 그에게서 들은 수법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퍼부어 댔다.

그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혈기자도 처음에 깜짝 놀랐다.

(요놈이 일이할 정도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더니 나를 속였구나……)

소일초의 수법들은 점점 능숙해져갔다.

혈기자는 과연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되는 인물인 만큼 꿈적도 않고 그 자리에서 태연하게 다 받아 넘겼다.

열 두 가지의 초식을 번갈아 사용하던 소일초는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열 세 가지 중에서 열 두 가지는 사용했고 나머지 한 가지는 열 흘 후에 와서 사용해 보기로 하지. 만약 열흘 후에 내가 오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패한 것으로 하고……]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홱 돌아서더니 낄낄 대면서 날아가 버렸다.

혈기자는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완전히 골탕만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번이야 말로 내기에서 한 번 이라도 이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흘 동안 앉아있기로 했다.

그놈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승리는 자기 것이다.

이겨 놓기만 하면 여산(廬山)에 있는 백인장으로 찾아가 소일초가 아니면 그의 아비 소선풍에게라도 윽박지르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일 것 같았다.

소선풍이라면 자기 제자들에 뒤지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소일초 보다 나은 것이다.

더우기 자기의 막내제자인 조예진이 소선풍의 작은 마누라니까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반노환동한 천하제일인 혈기자는 무려 십일을 뙤악볕과 소나기를 맞아가며 창산의 이름모를 산곡에서 보내게 되었다.

 

× × ×

 

한편 소일초는 기다란 어린도를 등에 매고 남만의 밀림 속을 헤매 다니고 있었다.

[제길, 되게 덮군.]

그의 손에는 난도질이 된 표범의 가죽이 들려있었다.

아마 가죽 좋은 줄 알고 벗기다가 다 찢어 버린 모양이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빽빽한 밀림 속을 그는 벌써 며칠 째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저 괜찮은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돌아갈 생각으로……

몇 번 인가 사람 같지도 않은 만족(蠻族)을 만났으나 오히려 그를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 버렸다.

커다란 비단뱀도 그를 만나자마자 몸뚱아리가 토막토막 나버렸고 사자(獅子)도 목이 짤린 후 탐스러운 갈퀴를 소일초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의 행로에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무조건 길도 없는 밀림속을 직진(直進)해 나갔다.

독충들이 그의 몸을 무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갑자의 내공을 가진 그는 날 때부터 금강체(金剛體) 였고 만독불침(萬毒不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몇 시간을 똑 바로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흔한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맹수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밀림은 마치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디에도 짐승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숲은 다른 곳 보다 더욱 우거져 있었다.

갑갑함을 느낀 그는 호신강기를 강하게 일으킨 후 그대로 돌진해 버렸다.

[와아아……]

잡목들은 칼에 베인듯 잘려져 나가 버리고 큰나무에 그의 몸이 부딪혔을 때는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 나갔다.

쾅! 우두두둑-----

한데 갑자기 그의 눈 앞이 탁 터이면서 밀림이 끝나고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그러나 전력으로 질주하던 중인지라 멈추지 않고 호수 위를 그대로 날아넘어 건너편에 내려섰다.

역시 그곳에도 숨막힐 듯한 적요가 감돌고 있었지만 나무들은 여태까지 봐 왔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어린 소일초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목들을 바라보았다.

작아 보이는 것도 높이가 삼십 장은 족히 될 것 같았고 큰 나무들은 오십 장 정도 돼 보였다.

밑동도 장정 오십 명은 서로 손을 맞잡아야 될 정도로 굵었다.

그가 감탄을 하면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딱> 소리가 나도록 다물면서 오른 팔을 홱 돌렸다.

순간,

캑-------끄륵-------!

고개를 돌리고 보니 난 생 처음보는 해괴한 동물이 자기의 작은 손에 매달려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동물이 뒤에서 기습하는 것을 소일초가 먼저 알아채고 목을 잡아버렸던 것이다.

꽥------!

소일초는 그 괴물의 너무도 이상한 모습에 기성을 지르며 땅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놈은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검은 털을 가졌는데,

겨드랑이에는 자기 몸 만한 날개를 달려있고 사람을 닮은 얼굴에 손과 발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박쥐와 원숭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 같은 괴상한 동물이었다.

땅에 패대기 쳐졌던 그 괴물은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새,

그놈의 동료들로 보이는 것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괴물들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이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랐던 소일초,

그러나 이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남만까지 온 보람을 이제서야 느끼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검은 괴물들을 오히려 음흉스런 눈초리로 처다보았다.

 

날개 달린 검은 괴물들,

키는 큰 놈도 넉 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등치로 본다면 열 한 두 살 짜리 애들만 했다.

그리고 키에 비해서 유달리 다리가 짧은데 팔은 반데로 길었다.

헤아려 보니 널부러져 있는 놈까지 해서 모두 열여섯이었다.

 

소일초가 천천히 다가서자 오히려 그놈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착각일 뿐이었다.

놈들은 아주 영리했다.

동료중의 하나가 그에게 단번에 당하는 것을 보았는지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차륜전을 펼치려 하는 것 같았다.

끽끽-------

한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자 다른 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날개짓을 했다.

원래 놈들은 이 밀림일대에서 흉폭한 성격과 강한 힘, 그리고 영리한 두뇌로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사자도 그들을 보면 도망가기에 바빴고 열 놈이면 코끼리 마저도 죽여버리는 맹수들이었다.

그들의 날개바람은 무척이나 강해서 주변에 가득 흙먼지가 일었다.

뿌연 먼지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되자,

그 놈들은 날개와 긴 팔을 이용해서 소일초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소일초에게는 단지 신기한 장면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

덤벼드는 놈마다 소일초의 손아귀에 목을 틀어잡혀서 땅에 패대기 쳐지고 말았다.

캑------

끽-----끄윽------

금방 주변에는 밀림의 왕으로 군림하던 괴물들이 일제히 손 발을 허공으로 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하하하하……]

쓰러진 괴물들 사이에서 소일초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품속에서 가늘고 긴 줄을 꺼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괴물들의 손과 날개를 한꺼번에 묶어서 일렬로 죽 눕혔다.

손바닥을 탁탁 턴 다음 제일 앞에 누워있는 괴물의 배위로 풀쩍 뛰어 올라가며 노래를 불렀다.

 

----일 년은 삼백 오십 육일, 봄 여름 가을 겨울,

남자는 배를 타고 여자는 파도친다.

일 년은 열 두 달, 달거리도 열두 번……

 

꽥-------!

꽥-------!

소일초가 노래를 부르며 괴물들의 배에서 배로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 다니자 정신을 잃었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그놈들에게는 이처럼 재수 없는 날은 평생 처음 이었다.

골치덩어리 신행마동에게 걸렸으니 껍질이 벗기지 않으면 조상님 은덕이라고 제사라도 지내야 할 판이었다.

소일초의 무게야 열 살 짜리 아이가 몇 근 이나 나가겠냐 만서도 그의 등에 매어져 있는 어린도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칼 이었다.

어린도 전체가 하나의 만년한철로 돼 있는데 무려 칠십 근이나 되었다.

소일초는 한 놈을 건너 뛰기도 하고 두 놈을 건너뛰기도 하며,

어떨 때는 한 놈을 죽으라고 밟아 대기도 했다.

괴물들은 손과 날개가 동시에 뒤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두려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자기의 배를 밟지 않고 지나가면 안도의 눈빛을 보냈고 여러 번 밟힐라 치면 죽는 소리를 냈다.

소일초의 노래소리에 맞춘 괴물들의 효과음향은 한 동안 계속 되었고,

그놈들은 이제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어떤 놈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비명소리 마저 잘 세어나오지 않았다.

소일초는 신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괴물들은 밟혀 죽을 지경이었다.

괴물들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려 더 이상 신나는 비명이 나오지 않자 소일초는 그 장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제일 끝에서 부터 하나 씩 하나 씩 차례대로 잡아 일으켜 세웠다.

괴물들은 눈초리는 아예 공포에 젖어 있었다.

진짜 괴물 같은 꼬마놈이 또 무슨 짓을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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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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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神行魔童과 반로환동

 

 

 

소일초는 깜깜한 밤 어둠에 잠긴 산속을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키 만큼이나 큰 아버지의 애도(愛刀) 어린도(魚鱗刀)가 꽤나 거추장스러웠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의 작은 마누라는 신통방통하여 어디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날지 몰랐다.

사마귀가 정뇌(井牢) 속에서 창안한 무중일전신법(霧中一電身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서 소일초는 벌써 수백 리를 달려왔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그를 추격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

숲으로도 들어가고 강물위로도 달리고 마침내는 자기도 모르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와 버렸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한 번 띈 이상, 숨이라도 한 번 돌렸다 하면 어느새 냉큼 그의 목덜미는 그녀의 손에 쥐어지곤 했다.

이번에 잡혀서 돌아가면 아버지가 무슨 벌을 줄 지도 모른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인 것이다.

(사마귀의 무공 중에서 이것 하나는 정말 쓸만해……)

그는 암중에 자신의 경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무중일전신법을 배우기 전에는 아무리 잘 도망을 쳐도 그의 작은 어머니 눈에 띄자 마자 잡혀 가곤 했는데……

무중일전신법을 배운 후에는 멈추지만 않으면 신통력이 대단한 그의 작은 어머니도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손가락이라도 닿는 다면 만사는 모두 끝장이다.

오갑자에 이르는 그의 공력도 그녀에게 한번 붙잡히기만 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도저히 힘을 못쓰는 것이었다.

그녀야 말로 천방지축 신행마동인 소일초의 최고 천적(天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소선풍에게도 그녀와 같은 재주는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어린도까지 훔쳐왔으니 아버지는 정말로 날 죽이려고 덤빌지도 몰라……)

아버지의 화난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 마도구식(魔刀九式)을 혼자만 알고 있으랬나?)

그가 이번에 가출한 동기는 백인장의 최고도법인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 주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소선풍은 그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일초가 무공을 배운 것은 백인장의 구십구 도객(刀客)들에게 떼를 써서 얻어 배운 것에다 사마귀의 무공을 더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백인장의 고수들마저도 그를 설설 피하기만 할 뿐 무공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제 밤이었다,

소일초는 잠이 오지 않아 정원의 나무위에 올라가 애꿋은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았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침실 앞에서 한 줄기 백광이 번쩍 이는 것이 보였다.

지붕위로 살며시 올라가서 살펴보니 소선풍이 도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옳지! 저것이 바로 천하제일의 도법이라는 마도구식이구나.)

그는 쾌재를 불렀다.

훔쳐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영 실망이었다.

도무지 그 도법의 원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소선풍은 몇 번이고 거듭 펼쳐보이지만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여태까지 자기가 보았던 것과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도법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도대체 흉내마저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소일초는 어떤 난해한 무공도 한 번 보기만 하면 척척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불가사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살그머니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자고 있는 침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선풍과 그의 작은 어머니는 갑작스런 침입자에 허둥지둥하며 그를 맞았고,

그는 다짜고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도구식(魔刀九式)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한밤중에 한바탕 꾸지람만 듣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심통이 날 대로 났다.

아침에 틈을 보고 있는데 작은 어머니가 어딘가에 잠시 외출한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아버지도 잠시 동안 침실을 비울 것이다.

옳다구나 싶은 그는 즉시 아버지의 침실로 가서 어린도를 가지고 줄행랑 놓아버렸던 것이다.

 

(지독한 우리 아버지……어쩌면 나는 주워온 자식인지도 몰라……친 아들에게 그렇게 인색한 아버지가 세상에 또 있을라구……)

나무들 위로 스치고 날아가며 소일초는 계속 아버지를 원망하고 지금 쫓아오고 있을 작은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는 작은 어머니가 쫓아 오고 있는가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뒤로 휙 집어 던지고 귀를 모았다.

과연 술병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은 어머니가 허공에서 받아들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쳇! 내가 무림의 십이대 고수 중 하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우리 작은 어머니만도 못한데 고수는 무슨 고수……작은 어머니야 말로 일대고수(一大高手)이고 일등고수(一等高手)다 일등고수……)

그의 몸은 큰 나무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 나무에는 어둠속에도 뚜렷이 분간이 되는 붉은 천조각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는 그는 그 천조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그의 작은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분명했다.

소일초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도망칠 만큼 나쁜 악당은 아니었다.

기실, 그와 그녀의 작은 어머니는 사이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려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작은 어머니의 술수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빙 돌았다.

하지만, 그는 어리둥절해 지고 말았다.

갑자기 작은 어머니의 전음이 귀에 들리는데,

그녀는 이미 방향을 바꾸어 왔던 멀리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그녀의 전음은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조금만 놀다가 돌아오너라. 너무 위험한 곳엘랑 가지 말고……]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저 여자는 저렇게 포기하고 갈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이제 아무튼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잠이나 자고 볼 일이다.

(아이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부모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데……내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다 밤에 잠을 잘 자지 않아서 그런지도 몰라……)

주변에는 나무들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가 내려선 곳은 큰 바위가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바위 위로 올라가 편편한 부분을 찾아 척하니 드러누웠을 때였다.

[이상한 놈이군……]

아주 낭낭한 목소리가 그가 누운 바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일초는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껑충 솟아오르며 등 뒤에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어린도를 뽑아 들었다.

[웬 놈이냐?]

어린도의 가늘고 긴 도신(刀身)은 그의 몸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바위 속의 목소리는 조금도 어조를 바꾸지 않고 울려나왔다.

소일초는 바짝 긴장했다.

무림에서 자기보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저 바위 덩어리는 도무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몸이 설설 떨려오기 시작했다.

등골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귀……귀신……이냐?]

[도무지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놈이군……]

바위 속에서는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 없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소일초는 그의 표현대로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귀신에 대해서는 여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큰 용기를 냈다.

[에잇! 내가 이놈의 바위를 베어버려야지……]

그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어린도에 결집시킨 후에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면서 바위를 베어갔다.

어린도가 갑자기 쭉 늘어나면서 도신이 삼장이나 되어버리며 바위에 통째로 부딪혔다.

바로 강기였다.

큰 바위는 소리도 없이 베어져 옆으로 쩍 벌어지는데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나왔다.

[아이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놈이구나……]

갈라진 바위 속에서 흰 그림자가 바위 위로 튀어나왔다.

소일초는 내친 김에 그 그림자를 향해 다시 전력을 다해 어린도로 베어나갔다.

백인장의 백인도객들에게서 배운 절초 중의 한 가지 수법이었다.

삼장으로 늘어난 어린도의 도신이 수백 개의 환영을 만들며 흰 그림자를 베었다.

그림자는 흩어지듯 흐릿해졌고 소일초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제 공격할 만큼 해 보았으니 여차하면 삼십육계인 것이다.

그는 이름처럼 언제나 일초 이상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원래 이름은 소선풍이 지어준 태봉(太峰)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라 자기가 마음대로 일초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 일초를 공격했으니 저 귀신이 죽지 않았다면 자신의 규칙대로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흰 그림자는 다시 뚜렷해지면서 말을 내뱉었다.

[이 수법은 백인장에서 흘러나온 듯 한데……]

소일초는 흰 그림자가 귀신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도로 분명히 베었는데도 죽지 않고 말하다니 귀신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을 향해 덮쳐오지 않으니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도망치는 데야 그야말로 신행마동(神行魔童)인 자신이 아닌가?

흰 그림자는 쪼개진 바위에 턱 걸터앉으며 소일초에게 말했다.

[애야! 이리와 앉거라.]

그러나 소일초는 도망칠 준비만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 녀석!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어……]

흰 그림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형씨. 당신 귀신은 아니겠지? 나 같은 애들은 모두 귀신을 무서워한단 말이야……]

소일초의 주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흰 그림자는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야 이놈에 너같은 놈이야 말로 남들이 귀신같은 꼬마라고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나보고 형씨라니…… 마음에 쏙 드는 놈이군 그래.]

그의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긴 메아리가 온 산속에 울려 퍼졌다.

소일초는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았으나 웃음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길, 웃는 소리 한 번 젠장 맞게 크군……]

그러나 그는 어린도를 등 뒤에 꽂고 쪼개진 바위 중 흰 그림자가 앉지 않은 쪽에 걸터앉았다.

그가 본대로 흰 그림자는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준수한 얼굴의 이십 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서는 은은한 금광(金光)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대체 누가 형씨같은 청년을 길러냈는지 궁금하군!]

소일초는 백의청년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백의청년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릴 말썽꾸러기로군, 백인장 소영감 작품인가?]

[백인장에 영감은 아니지만 영감 못지않게 고리타분한 소씨가 한 분 계시기는 하지, 소선풍이라고……]

소일초는 냉큼 말을 받아 대답했다.

[소선풍? 그는 소영감 아들인데? 그럼 소영감은 언제 죽었지?]

[우리 할아버지를 말하는 모양인데 언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 아직 어린아이니까……그리고 형씨도 우리 할아버지를 알 수 없지. 아직 젊으니까……]

백의청년의 눈에서 금광이 폭사되었다.

그의 무서운 안광에 소일초는 찔끔했다.

[바로 소선풍의 자식이었군, 네 엄마는 조씨(趙氏)지?]

[반 만 맞았어. 아버지는 맞추었지만 어머니는 이씨(李氏)라구……]

백의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같았다.

소일초가 그의 불신에 찬 표정을 보면서 한마디 했다.

[이봐! 내 사부는 거짓말장이지만 나는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이야.]

백의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의 말투가 영 맘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치를 읽었는지 소일초가 다시 한마디 한다.

[내 나이도 겉보기보다는 꽤 많다구. 내가 반말 좀 하기로서니 그렇게 안좋은 얼굴까지 할 건 없잖아.]

백의청년 완전히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 녀석! 대체 몇 살이길래……]

[열살!]

소일초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쳤고 백의청년은 기가 막혀 버렸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허참! 허참……]

[형씨도 나보다 겨우 몇 살 연상인 듯 한데 말투는 완전히 노인네 티를 물씬 풍기는군.]

[너 보기엔 노부가 몇 살로 보이는가?]

소일초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한 열 네살쯤……]

백의청년은 오히려 이제는 그와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지 자꾸 질문을 했다.

[내가 누구인것 같은가?]

[글세…… 무공이 나보다 훨씬 강한 것으니까 이름없는 사람은 아닐 것 같고……]

그는 백의청년의 아래위를 쭉 훑어보았다.

몸에는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사수(四手) 중의 하난가?]

백의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남들이 혈기자라고 하지……]

그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일초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어찌나 웃는지 그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바위 밑으로 굴러 버렸다.

그래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지 한창 웃고 난 뒤에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형씨가 혈기자라고? 형씨가?]

[물론……]

[대체 혈기자의 나이를 알기나 하고 거짓부렁을 하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을 들었으니까 지금쯤 그는 백 살 이백 살 아니 천 살 쯤 됐을 거야……그런데 혈기자라고?]

[네가 지금 몇 살 인데?]

[열살!]

대답하고 보니 소일초 자신도 조금 이상했다.

너무 어른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서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백의청년의 말이 들렸다.

[나는 물론 혈기자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올해로 일백 이십 칠 세지.]

[그런데 어떻게 형씨가 혈기자란 영감이 될 수가 있어?]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소일초가 물었다.

스스로 혈기자라고 밝힌 청년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군.]

[무가(武家)의 자식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그럼…… 형씨가 반로환동했단 말이야?]

혈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 정말로 우리 할아버지도 알겠네?]

소일초는 어느덧 그의 말을 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늙었을 때 가끔 만나던 친구였지. 우린 다들 무학에 정신이 팔려서 혼인이 아주 늦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아들을 낳고 그 후에 내가 아들을 낳았지.]

[형씨하고 우리 할아버지 하고 싸우면 누가 이겼어?]

소일초는 여전히 그를 형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입가에 쓴 웃음을 지으며 혈기자가 말했다.

[소영감의 마도구식은 대단하지. 그 당시에 그의 내공이 오갑자만 됐어도 내가 패했을 거야.]

 

백의청년,

그는 정말로 반로환동한 천하제일인 혈기자였다.

여러 해 전, 그러니까 소일초가 태어나기도 전에 혈기대종사의 겁으로 등천마교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해에 그의 제자들은 혈기자가 연공실로 사용하던 무진동을 파괴해 버렸다.

그 당시 혈기자는 자식과 며느리를 잃은 슬픔과 분노 때문에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있었는데……

그는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었으니 자기가 그 몫까지 다 살아야겠다는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하고 무진동 속으로 들어가 반로환동의 술법을 닦기 시작한 중이었다.

무진동 속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제자들의 소행인지는 모르고 묵묵히 술법만을 닦았다.

당세의 무학대종사로 불리던 그 인지라 과연 얼마의 연구 후에는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서 큰 성과를 볼 수가 있었다.

먼저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고 피부가 다시 부드러워지며 동안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백발과 백염,백미가 뿌리부터 새롭게 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검게 되어버렸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윤기가 있어져 젊은이의 음성이 되어버렸다.

수 년 동안 증진 하자 몸은 완전히 이십 대의 청년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무너진 무진동의 동굴을 뚫고 나오면서 제자들이 성의가 없어서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진동 밖에 세워진 석비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부! 저희 제자들이 느끼건 데 요즘 사부께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비록 사부 밑에서 다년간 무공을 닦았다 하나 아직 사부의 일초을 감당할 수조차 없습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사부가 죽이시면 달게 죽음을 받아야 하지만, 저희들을 죽이는 것이 사부의 참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사부의 일거수 일투족에 불안을 느껴 감히 사부 곁을 떠나고자 의견을 모았습니다. 무진동을 파괴하는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부의 추격을 잠시라도 늦추고자 함입니다. 부디 석송림에서 편안히 여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린 소아(小阿)는 우리가 데려가 잘 키우겠습니다. 우리가 소아를 잘 키우게 사부께서는 절대로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불초한 제자들이 간절히 바랍니다.>

<석송림을 나오지 마십시오. 소아를 훌륭히 키우겠습니다. 혹시 사부께서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신다면 이월(二月) 보름달이 떨때 석송림에서 연기를 올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 제자들이 안심하고 사부를 다시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소아는 우리가 잘 키우겠습니다.

제자일동 >

 

비석을 본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간이 콩만한 놈들. 네가 아무리 정신이 없기로서니 공들여 키운 제 놈들을 죽일까봐 도망을 쳐? 흥 이놈들 좋다. 어디 두고 보자. 나도 이제 네놈들 못지않게 젊은데 내가 네 놈들이 주는 밥만 차려먹을 줄 알고……)

석비는 석송림의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아마도 혈기자가 다른 곳으로 뚫고 나올까 싶어서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혈기자는 비석의 글씨들을 유심히 살폈다.

(요건 셋째 진성(震聲)이 놈 글씨고……이건 큰 놈인 청천(靑川)이……이건 예진(藝珍)이 그년……그리고 요건 성화(成華) 놈……흥! 성화 이놈이 제일 많이 만들어다 세웠구나. 겁장이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

동굴 속에서 반로환동이란 신선의 술법을 닦고 나온 혈기자의 마음은 맑고 깨끗해져 있었다.

이미 예전의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은 깨끗이 사라지고 마치 어린 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요놈들이 감히 소아(小阿)를 가지고 은근히 인질로 삼아? 못된 놈들……)

그러나 비석의 글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불쑥 찾아가면 젊은 놈들이 겁먹고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그렇다고 비석에 적힌 대로 이월 보름을 기다려서 <나 미치지 않았소>하고 광고하는 것도 자존심상 내키지 않았다.

며칠을 어떻게 할까 고심을 하다가 문득 기막힌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석에는 석송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석송림 안이 아닌 절벽 밑의 석옥 이었던 것이다.

석송림을 지나가지 않고 뒤쪽 절벽으로 해서 분지를 나가버린다면 석비의 경고를 어긴 것이 아닐것 같았다.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은 거야? 내가 늙었을 때는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할 계책이지……만약 놈들이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면 무조건 몰랐다고 잡아떼야지……)

그렇게 해서 천하제일인 혈기자는 청년으로 둔갑하여 다시 세상에 나와 버렸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들어도 제자들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러다 그는 십이 고수 중의 사수(四手)가 자기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바람 같아서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멀리 남황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막내인 조예진이 자기의 옛날 친구의 소호연(蘇昊硯)의 아들과 연인이었음을 생각해 내고 백인장에 들르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이곳 창산(蒼山)에서 백인장의 어린 꼬마를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네 내공이 오갑자가 되는 것 같으니 그 영문을 모르겠구나]

[응,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심심하니까 해본 짓 일 거야. 난 날 때부터 그랬어.]

[한데, 무슨 일로 집을 나왔지? 그리고 아까 너를 쫓아 왔던 그 여자는 누구?]

[어? 그것까지 알아? 우리 작은 어머니……]

혈기자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이 났고 소일초는 또다시 불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싶어 투덜대기 시작했다.

[글쎄,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무공을 가르쳐줄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가출했더니 작은 어머니가 잡으러 온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냥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여태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그건 나의 표기를 보았기 때문이지. 그걸 보아도 네 작은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이 틀림없을 거야.]

[누군데?]

[조예진!]

[이름은 맞지만 성은 틀렸는 걸. 누구나 소부인(蘇夫人)이라고 하더라……]

[이 녀석아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거야.]

[정말 세상에 그런 법이 있었나?]

혈기자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짙은 우수가 그의 얼굴에 깔리고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천하의 신행마동도 감히 함부로 떠들 수 없었다.

소일초는 혈기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만 바위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혈기자는 몸도 마음도 다 젊어졌고 무엇 하나 맘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직하나 제자들과 손녀 소아(小阿)는 보고 싶었다.

소일초의 말로 짐작해 보건데 조금 전에 소일초를 쫓아왔다가 부리나케 돌아가버린 여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제자인 조예진이 분명했다.

혈기자로서는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표기를 붙쳐둔 것이 오히려 나쁜 효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으로 번쩍 들었다.

그러자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부터 붉은 빛줄기가 날아와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바로, 그의 독문표기인 혈기(血旗)였다.

그의 혈기가 꽂혀있는 영역 내에서는 무림인이라면 결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에게는 제자들이 자기가 있는 동굴을 무너뜨렸다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자들에게도 큰 악의는 없었고 단지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한 정도 일 뿐이었다.

동굴 따위가 무너져서 혈기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제자들도 자기도 우수운 정도의 일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를 실제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들마저 죽어버린 지금에야 제자들이 친자식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아무튼 중간에서 화해를 성사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야 손녀도 만나고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자기는 젊어져 버렸는데 자기가 아무리 혈기자라고 해도 제자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제자들의 속이 좁은 것 같아 화가 벌컥 치밀었다.

[못된 것들……]

하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소일초가 깜짝 놀라 공중제비를 넘으며 뒤로 날아가 큰 나무 뒤에서 눈을 비비며 쳐다보았다.

과연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는 녀석이었다.

혈기자에게는 순간적으로 소일초를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소일초는 잠이 들깬 표정으로 말했다.

[소일초. 신행마동이 바로 나지.]

혈기자는 소일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절세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가출했다고 했지?]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그 대신 너는 몇 가지 일을 내 대신 해주는 거지……어때?]

혈기자는 소일초가 단번에 응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일초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우리 내기로 결정하자. 내가 지면 형씨 일을 대신 해 주기로 하고 형씨가 지면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

[특히 아까 내 어린도를 맞고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그 무공을 배우고 싶어……]

혈기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린애라서 예의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다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숫제 자기 친구처럼 대하려 한다.

아무리 자기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소일초가 어느새 그의 눈치를 긁었는지 재빠르게 말했다.

[형씨 분명히 반노환동한 혈기자지?]

[…………]

[잘 생각 해보라구. 나는 신행마동(神行魔童), 형씨는 반노환동(返勞還童) 뭐가 어떻게 됐던지 간에 다같은 어린아이 인데 굳이 어른인척 하지 말라구.]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었다.

혈기자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놈은 아예 내놘 놈이니 무시하고 사는 것이 수명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대로 받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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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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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第 一 章

 

      운남(雲南)으로 가는 꼬마

 

 

 

강남은 물빛이 좋다.

봄 날을 즐기는 유객(遊客)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고 있고,

대리로 향해 뻗은 길에는 마차들과 사람들이 번잡한데,

아주 기괴한 꼬마 하나가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소년의 등에는 자기의 키만큼이나 한 장도(長刀)가 매어져 있었고,

옆구리에는 머리통만한 술병이 매달려 있었다.

깔끔한 용모와 단정한 백의로 보아 명가(名家)의 자손이 분명한 듯 한데,

눈에서 반들거리는 장난기는 사람 여럿 골탕 먹일 것만 같았다.

강남의 사월 햇볕은 따갑기 조차 했는데……

따분했던지 타박타박 걸어가던 꼬마 소년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행인들이 쳐다보자 꼬마는 기분이 조금 풀리는지 대로를 가로막고 섰다.

한대의 마차가 달려오다가 길을 막고 있는 꼬마 앞에서 황급히 멈추었다.

[아니 이 녀석이 다치면 어쩌려고……]

마차의 마부는 꼬마를 향해 소리쳤다.

꼬마는 앞으로 한걸음 내딛어서 말의 코를 작은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소일초(蘇一招)라구……자네 멋대로 부르지 마!]

마부는 갑자기 말이 막혔다.

사십이 넘은 자기를 꼬마가 자네라고 부르다니……

[이……이……]

화가 뻗혀서 막 욕이 튀어 나오려는 찰나인데 꼬마의 말이 먼저 그의 입을 막았다.

[이 마차 운남 가는 거지? 그렇지?]

행인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눈이 둥그레져서 이 꼬마 악당의 횡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얼굴마저 벌개지는데 마차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래! 운남 간다! 어쩔래 임마!]

역시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마차의 문을 벌컥 열면서 뛰어나왔다.

스스로 소일초라고 밝힌 꼬마는 마차에서 뛰어나온 꼬마를 보더니 다짜고짜 달려가서 소매를 꽉 잡았다.

그리고 확 잡아채더니 번쩍 들었다가 관도에 던져버렸다.

[도련님!]

[너 이놈!]

마차의 안팎에서 여자와 남자의 소리가 어우러 터져나오고……

흰옷을 입었던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이놈이 기습을 해……?]

마부는 어느새 소일초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옷자락을 터는 백의소년의 옆에는 중년여인이 내려서 있었다.

소일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건방진 녀석……감히 내게 덤벼?]

그때 마부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행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부는 보통사람이 아닌 듯 그의 손에서는 예리한 바람소리가 나며 마치 소일초의 머리를 깨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빡!

 

소리가 나면서 소년은 뒤로 퍽 쓰러져 버렸다.

눈동자를 까뒤집고 입을 짝 벌린 것이 영락없이 죽은 것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살인(殺人)이다. 살인이다!]

마부와 백의소년, 그리고 중년부인은 안색이 확 변했다.

[이……이런, 나는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마부는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빨리 마차에 태워요.]

중년부인이 마부를 향해 소리치며 먼저 소년을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네……네……]

마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쓰러져 있는 소일초를 안아들다가 허리를 휘청했다.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아이쿠……시체가 무겁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었구나. 이 꼬마마저 이렇게 무거운 것 같으니……)

[빨리 달려 의원으로 가요!]

마차 안에 소년의 시체를 들여 놓자마자 중년부인이 또 소리쳤다.

마차는 미친 듯이 달려갔고, 행인들은 술렁거리다가 제각기 걸음을 재촉했다.

소일초의 시체를 태운 마차는 관도를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마차 안에는 한 켠으로 소일초가 눕혀져 있고 다른 쪽에 백의소년과 중년부인이 앉아 있었다.

[유모! 이젠 어떻게 하지?]

백의소년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도련님은 아무걱정 않아도 됩니다.]

중년부인이 말했다.

한데 갑자기 죽은 소일초의 목소리가 백의소년의 귀에 들려왔다.

[아니 나를 죽였으니 너도 곧 죽게 될거야………]

백의 소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유모! 이 놈이 벌써 귀신이 되었나봐? 금방 내귀에다 대고 뭔가 말했어……]

소년의 유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금방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어, <나를 죽였으니 너도 죽게 될거야> 하고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소년의 귀에 소일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란 말이 빠졌군]

[그래 <곧>이란 말이 빠졌군.]

하고 소년은 따라서 말하다가 깜짝 놀랐다.

유모는 소년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시체가 곁에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지요. 그럼 내가 화골산으로 녹여 없애버리도록 하지요.]

그녀는 품에서 작은 옥병을 끄집어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소일초의 몸에 가까이 갔다.

막 그녀가 화골산(化骨酸)을 그의 몸에 부으려 할 때였다.

[왁!]

하고 소리치고 소일초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백의소년은 발을 들어 소일초를 걷어차려 했고,

중년부인의 손에든 화골산은 마차의 앞 벽에 쏟아져 버렸다.

[악독한 계집!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증거까지 인멸(湮滅)하려는 구나!]

소일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죽지 않았구나!]

백의소년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중년부인은 그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코웃음을 치면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소일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차 좀 얻어 타자는 거였지. 앞에 앉은 바보에게 내가 맞기는 왜 맞아?]

[아까 분명히 머리를 맞는 것 같았는데……?]

[내가 살짝 피하면서 입으로 <빡>하고 소리를 질렀지.]

소일초는 입으로 다시 한 번 <빡> 소리를 냈다.

영락없이 그 소리였다.

백의소년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

[그래. 이제 생각해 보니 네 비명소리가 나지 않았어.]

소일초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소일초라고 해. 운남까지 가려고 하는 데 설마 쫓아내지는 않겠지?]

[나는 백소중(白小重)이야. 운임은 조금만 받을게.]

그의 말에 중년부인이 정색을 했다.

[도련님! 저런 불량스런 아이와 함께라니…… 안됩니다.]

소년 백소중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을 뱉었다.

[안되다니……? 그럼 유모가 내리도록 해!]

도저히 어린아이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유모는 찔금하며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일초가 백소중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보였다.

[너도 대단한데…… 최고야!]

 

마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려가고 안에서는 두 명의 괴동(怪童)이 의기투합하여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백소중이 물었다.

[운남에는 뭘 하려 가니?]

[응, 우리 집 글 선생으로 있는 구질구질한 늙은이가 하나 있는데, 그 늙은이가 운남이란 곳에 가면 괴상한 짐승들과 맹수, 그리고 독물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군]

[…………]

[그래서, 아버지한테 불만도 좀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운남에 가서 그것들이나 잡아오려고 도망쳐 나왔지.]

[몰래 집을 나왔다고?]

백소중의 물음에 소일초가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물론. 나같이 어린아이에게 운남까지 가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걱정하실텐데……]

[한 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니까 별로 걱정은 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벌써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가 나를 잡으러 오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네 아버지 작은 마누라가 무섭니?]

[그럼! 제기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를 꼽으라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여자를 꼽을 거라고. 무공도 얼마나 센지 도저히 한 번 눈에 뛰었다 하면 천하의 나도 도망칠 생각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잡혀가고 말지……]

[너보고 때리기도 해?]

[아니……그와는 정반대야 항상 나에게 잘해줘. 게다가 내가 무엇을 해도 꾸짖는 법이 없어.]

[그런데 왜 무섭다는 거지?]

백소중은 점점 더 소일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수법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거든, 나는 매일 장난을 치지 않으면 몸에서 좀이 쑤신다고!]

옆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일초를 지켜보던 중년부인도 그들의 말에 점점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있었다.

[내가 잘하는 장난 중에 불장난이 있어.]

[…………]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작은 찻잔에다 불씨를 담아가지고 소매 속에 숨겼다가 여종들을 만나면 그들의 낡은 치마나 옷자락에 대고 살그머니 불씨를 옮겨 놓아 버리는 거지.]

[그러면……?]

[그들은 치마를 벗어 던지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나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백소중도 못마땅한 듯이 말했고 중년부인은 아예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러면 아버지가 알고 난 후에는 그 여종에게 새 옷을 주거든.]

[아무래도 그건 좀 심한 것 같애. 여종에게 옷을 줄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군]

[좋아! 네 생각도 일리가 있어. 한데 그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 말이야……]

[…………]

[그 여자한테는 아무리 몰래 옷자락에 불을 붙혀도 불씨가 절로 사그라져 버리고 연기하나도 나지 않는단 말야 게다가……]

[잠깐! 너는 어느 집의 자손이지?]

중년의 유모가 소일초의 등에 있는 장도(長刀)에 눈이 닿자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절대 말 못해!]

[네 등에 있는 그 장도는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한데……]

소일초는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흥! 물론 보통이 아니지…… 내가 나오면서 우리 아버지 걸 훔쳐서 나온 거니까!]

유모는 어이가 없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고 백소중은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너 집에서 나올 때 도둑질까지 했구나!]

[원래 가출할 때는 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야 가출효과가 더 큰 거라구……]

그때 마차의 뒤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멈춰라!]

아주 큰 목소리 였다.

순간, 소일초는 욕을 했다.

[제기랄, 저 귀신같은 영감들이 벌써 이곳까지 쫓아 오다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잡힐 수도 있겠어……]

마차는 이내 멈추어 섰고,

뒤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마차의 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마차 앞에는 두 사람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 마차가 그 마차 인 듯하군……]

[내가 물어보도록 하지.]

두 노인은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그 중에서 한 사람이 마부에게 물었다.

[당신이 마차 속에 장도를 맨 꼬마를 태웠소?]

[물어볼 것 뭐 있어. 문을 열어 보면 금방 알 것가지고……]

한 노인은 성미가 급한 듯 마차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마부는 안색이 확변하며 성미급한 노인을 향해 일장을 내리쳤다.

[영감! 물러서!]

마부의 손은 허공에서 많은 그림자를 남기며 문을 여는 노인을 향해 덮쳐갔고 노인은 모른 척 하고 그냥 문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마부의 무수한 손 그림자는 다른 한 노인이 소매를 휘두르자 무산되어 버렸다.

이어 노인의 한 손이 마부의 허리띠를 잡아들고 멀리 휙 던져 버렸다.

덜컹󰠏󰠏󰠏󰠏󰠏󰠏

소리를 내며 마차문은 열렸고,

불안한 기색을 띤 중년의 유모가 백소중을 안은 채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백소중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한 마디 툭 뱉고 문을 닫았다.

[실례했소이다. 사안이 워낙 급하다 보니 결례를 하게 되었소. 우리는 백인장(百刃莊)의 사람들이오.]

두 노인은 몸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부는 황당한 일을 당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의 천정에 매달려 있던 소일초는 그때서야 내려오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조마조마 했네……]

이때 멀리서 노인의 음성인듯한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백대선생(白大先生)에게 백인장의 두 늙은이가 안부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귀신같은 쭈그렁탱이들……]

소일초가 또 욕을 했다.

중년의 유모는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밖에 있는 마부는 원래 백가장(白家莊)의 일급무사였다.

노인을 향해 백가장의 절기인 산수장(散手掌)을 펼쳤음에도 전혀 힘도 쓰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붙잡혀 던져지고 말았다.

게다가 백인장(百刃莊)의 사람들이라니……

천하 무림인 치고 누가 그 위대한 백인장을 모르겠는가?

백 명의 도(刀)의 달인들이 대를 이어서 소속해 있는 곳,

백인장의 사람치고 고수아닌 자 없다 했는데……

게다가 십여 년 전부터는 그 모습을 완전히 세상에 드러내 놓고 있었다.

강북에서는 청옥검궁이 최고의 문파라고 하고 있지만 강남에 웅크리고 있는 백인장이야 말로 진정 고수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주(莊主)인 도왕(刀王) 소선풍(蘇仙風)은 무공이 신화경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도법(刀法) 뿐만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내공(內功)으로 당금 무림에서 은근히 최고수로 부상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백인장(百刃莊)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하나뿐인 아들 신행마동(神行魔童) 소일초(蘇一招)이다.

 

-신행마동 소일초!

 

그는 그의 아버지 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로 불리워 진다.

나이는 올 봄에야 겨우 십 세가 되었지만 칠 세 때 부터 무림에 이름을 떨쳐왔다.

도왕 소선풍과 그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원영련무대법을 펼쳐서 소일초를 낳았기 때문이다.

 

-원영련무대법(元影鍊武大法)!

 

무림사에 유래가 없는 특이한 비법이었다.

소선풍이 창안한 것으로 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대법은 산모(産母)가 이미 절정의 신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태아가 발생한 초기부터 산모는 원영련무대법에 따라 아직 제대로 발현도 하지 않은 태아에게 운기행공을 시키게 된다.

즉 태아는 태중에서 부터 신공을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태아가 자란 삼개월 부터는 매일 그의 아버지가 내공을 주입하여 태아의 신공을 숙달시켜 나가고……

그렇게 하여 육개월이 지나면 태아는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이백 팔십 년에 달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으며 몸은 금강체(金剛體)가 되어 있는 것이다.

태어난 후 하루가 지나면 걸으며 이틀이 지났을 때는 뛰고 달릴 수 있다.

사흘이 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바로 신행마동 소일초, 그가 그 대법이 장본인이었다.

너무도 총명하여 그의 아버지가 나중에는 아예 괴물이라고 쳐다보기조차 싫어 했다는 꼬마다.

지금의 신행마동 소일초는 오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서 신행마동 소일초는 다른 두 명의 절세고수와 더불어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당금 무림의 고수들을 꼽자면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노일녀일소이왕삼현사수(一老一女一少二王三賢四手),

 

일노는 당연히 은거한 천하제일인인 혈기자를 말한다.

그리고 일녀는 취풍녀(吹風女), 일소는 바로 신행마동이다.

이왕(二王)은 신행마동의 아버지인 백인장주 도왕과 청옥검궁주 검왕 이극송(李克宋)을 말하고,

삼현은 백대선생과 혈군자, 그리고 무심군자이다.

사수는 바로 혈기자의 네 제자로 등천마교의 겁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누가 꼽더라도 혈기자가 제일 먼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는 직접 겨루어 보지 않는 한 무공의 우열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다만 도왕 소선풍의 무공이 혈기자 다음일 것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중년의 유모는 이러한 사실을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꼬마가 바로 신행마동 소일초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소중이 소일초에게 말했다.

[네 집이 백인장(百刃莊)이었구나.]

소일초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꺼덕였다.

[네가 바로 신행마동(神行魔童)이고……?]

[응.]

대답한 소일초가 백소중에게 되물었다.

[네 아버지가 백대선생이냐?]

[아니……우리 할아버지…… 그런데 너 정말 그렇게 무공이 강해?]

소일초가 씩 웃었다.

[별것 아니야.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도 못 이기고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한테도 못이기는 걸……]

[…………]

[게다가 난 진짜 절학은 맛도 못봤다구……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자기 도법은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뺀단 말이야……]

[그걸 가르쳐 주고 나면 네 아버지가 너한테 질까봐서 그럴 거야!]

백소중이 틀림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내 불만이 쌓인 거지. 사실 내 사부들은 신법 말고는 쓸만한 무공이 없거든……]

[네 사부도 따로 있어?]

[물론이지 임마! 원래 무공이란 사부한테 배우는 거라고……]

[난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 주던데……그런데 네 사부들도 유명한 사람이야?]

[별로……난 잘 모르겠어. 다들 우리 아버지가 백인장에 잡아다 놓았는 걸 내가 몰래 풀어줘 버렸지……]

[이름이 뭔데……?]

[사마귀(四魔鬼)!]

소일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백소중의 유모가 아연실색을 했다.

 

사마귀(四魔鬼)-!

 

바로 네 사람의 괴인들을 말한다.

그들은 각기 주색투도(酒色偸賭)로 악명을 날렸다.

 

주귀(酒鬼)는 불취(不醉)이고 부진언(不眞言)이었다.

그의 말에 사실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럼에도, 들을 때는 도무지 거짓의 흔적 역시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의 주전신공(酒箭神功)은 술 대결에서 패한 많은 주당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그가 바로 사마귀의 우두머리였다.

 

색귀(色鬼)는 남성경직증환자(男性硬直症患者)였다.

그의 남성(男性)은 언제나 팽만해 있었고 그의 눈은 향상 대상을 찾아 희번덕거렸다.

그는 여성을 언제나 정면에서 마주보지 않는다.

얼굴을 돌린 채 어떤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기에 동조하게 되는 여자는 그의 마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고 대화하는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그에게 빠져 들어가 버리게 된다.

그때 그는 얼굴을 상대편 여인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그스레하고 중후한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는 여인으로 하여금 넋을 놓아버리게 한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면 또한 언제나 팽만해 있는 그의 바지속의 남성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미 여인은 그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다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관계가 맺어지고 나면 매정하게 버려 버린다.

버림받은 여인은 자살하기 일쑤였고 원한을 품은 여인이나 남자는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했다.

그런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색귀가 익힌 무공은 전혀 엉뚱하게도 소림의 대자비수(大慈悲手)였으니……

 

투귀(偸鬼)는 세상에서 가장 대담한 도둑이다.

그가 드나드는 장소에는 분간이 없다.

빈민가의 주방에서 부터 황실의 보고(寶庫)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바닥은 마치 기름을 칠한 듯 매끄러워 어디에서도 매이는 법이 없었고 그의 신형은 연기와 같아서 누구도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도 한 가지 철저한 규칙이 있었으니,

바로 살인과 절도를 동시에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결코 그곳에 있는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한 장소에서 물건을 훔쳤다면 반대로 그곳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또 한 장소에서 물건을 훔칠 수 없었으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는 무림에서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중무신법(重霧身法)을 익혔으며 화산파의 매화지를 훔쳐 배운 후 더욱 발전시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도귀(賭鬼)는 철저한 도박사(賭博士)다.

결코 어떠한 도박에서도 패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정말로 승부를 점칠 수 있는 절묘한 재주가 있었고 그가 손가락을 몇 개만 꼽아보면 승패는 간단하게 추론해 낸다.

그렇기에 그는 큰 도박에서는 언제나 자기의 목을 걸고 상대방의 사지 중 하나를 걸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도박이 끝날 때 까지는 상대방은 결코 도귀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도박에 대하여 불복하는 자는 그의 수정검우(水晶劍羽)에 목숨을 잃고 만다.

도귀……

사마귀의 막내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공은 그들 중 제일 높을 것이라고 추정되어 진다.

그의 무공은 전혀 내력이 알려지지 않았다.

무림사에 어느 누구도 수정검우를 무기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사마귀 중의 신비인(神秘人) 도귀……

 

백소중의 유모는 정말 까무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행마동의 사부가 사마귀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사마귀는 무림의 고수서열에서 열외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정식적인 무공대결을 하는 법이 없기에 누구도 그들을 고수에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도 그들과 함부로 맞서지도 못한다.

무서운 마귀들이기 때문이다.

유모가 떠듬거리며 소일초에게 물었다.

[사마귀가 소대협(蘇大俠)에게 감금되어 있다구요?]

그녀의 어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유모는 귀가 없어? 내가 풀어줬다고 했잖아!]

소일초는 거듭 말하는 것이 귀찮다는 듯이 툭 쏘아붙였다.

[야! 너 아직도 젖 먹어?]

[아니……]

백소중이 눈을 동그랗게 떠고 대답했다.

[그럼 어디다 쓸려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유모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백소중은 아무 말도 못하고 유모를 바라보았다.

유모도 속이 부글부글 끌었지만 상대가 워낙 무서운 십이 고수 중의 하나 인지라 역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유모는 신경쓰지 말고 이야기나 계속해봐……뭘 그런데 자꾸 신경쓰고 그래?]

백소중이 소일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소일초는 얼굴에 무서운 표정을 한번 지으며 유모를 노려본 후 다시 말했다.

[사마귀 사부는 말이야 우리 아버지한테 죄를 지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

[…………]

[그래서 도망 다녔는데 ……너도 보았지 아까 그 두 영감쟁이 말이야. 그 영감들이 천하를 이 잡듯이 뒤져서 붙잡아 왔지. 그런데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이야.]

[…………]

[우리 집에 경계가 가장 심한 곳이 정뇌(井牢)인데 우물처럼 생긴 감옥이지. 그저 밑으로만 파져 있는 곳의 제일 밑에 사마귀가 감금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아홉 개의 칸이 있는데 각 칸 마다 한 사람의 고수가 지키고 있지.]

[그렇게 되면 정말 빠져 나올 방법이 없겠는데……?]

백소중의 말이었다.

[천만에! 더욱 빠져 나오기가 쉽지.]

[어떻게……?]

[내가 사마귀한테 무공을 배운 대가로 가르쳐 줬는데, 그건 뇌옥을 무너뜨려 버리는 거야.]

[…………?]

[뇌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뇌옥에서 지키고 있던 고수들이 먼저 빠져 나가게 되지. 그러면 제일 밑의 뇌옥만 파괴하고 그 고수들의 뒤를 따라서 빠져 나오는 거야. 그 다음 장원을 빠져 나가는 일이지 뇌옥을 나가는 일은 아니니까 내 소관이 아니지……]

백소중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너는 너무 일을 경중(輕重) 없이 처리하는 것 같아……]

소일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봐! 난 아직 어린아이야, 당연히 어린아이는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거라구……]

[말이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참.]

[사마귀가 정뇌에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기는 했어. 아버지한테서 도망가려고 그들은 특이한 신법을 한 가지 창안했더군, 그 이후로 내가 가출할 때 마다 잘 써먹고 있지……]

 

마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렸는데 사방은 어둑어둑 해 오고 있었다.

소일초가 문득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백소중, 고마웠다. 이제 나는 다시 도망쳐야겠어.]

[아까 그 영감들은 가버렸잖아?]

[그 영감들은 별 것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 작은 마누라는 정말 대단하거든, 실은 여기서 내가 노닥거리고 여유를 부린 것도 오늘은 그 여자가 외출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야.]

[…………]

[벌써 돌아와서 나를 잡으러 나섰을 텐데……여긴 우리 집에서 겨우 오백 리 정도 밖에 안되잖아. 이 정도라면 우리 작은 어머니 손바닥 위라고 할 수 있거든.]

[어? 너 이제는 작은 어머니라고 하는 구나.]

[짜식! 나도 스무 번에 한 번쯤은 아버지 작은 마누라 대신에 작은 어머니 라고 불러주기도 하는 효자란 말이야. 그만 갈게.]

그가 막 마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디서 들려오는 지 분간이 되지 않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곁에서 이야기 하듯이 조용히 들려왔다.

[우리 말썽꾸러기…… 거기에 숨어있었구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소일초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어머니! 한 달 만 놀다 갈게요. 절 쫓아오지 마세요……]

소일초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면서 빗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득히 사라져 갔다.

그의 끝말은 이미 먼 곳에서 들려왔다.

마부와 백소중, 그리고 유모는 멍해져 버렸다.

마차는 그대로 달리고 있는데……

마차의 열려진 문 앞에 아주 아름다운 젊은 부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마차가 달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문 앞에서 안에 탄 백소중과 유모를 향해서 인사를 했다.

[우리애가 아직 버릇이 없어서……폐가 많았지요? 언제 백인장에 한번 들려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달칵!

마차 문은 절로 닫혔고 미부(美婦)의 모습은 소일초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유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인장이야 말로 무림의 용담호혈(龍潭虎穴)이구나. 일개 여주인의 무공도 초일류라고 할 만 하니……]

마차는 어둠이 깃드는 관도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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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序 章

 

       天下第一人의 弟子들

 

 

 

천년무림사에 일대 획(劃)을 그을 수 있는 절대무이(絶對無二)의 초고수가 당금에 있었다.

그는 전 무림인에 의해서 서슴없이 천하제일인으로 불리어졌다.

어느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사용하는 무공의 연원조차 아는 자가 전혀 없었다.

 

-혈기천존(血旗天尊)!

 

바로 그였다.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대는 무학의 일대조종(一代祖宗)-!

고금을 통틀어도 그 이름 앞에 설 수 있는 인물은 고사하고 비견될 수 있는 이름조차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절대무적의 경지에 올라선 가장 강하고, 그래서 가장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

그는 인간이기보다는 무신(武神)이마 선인(仙人)으로 취급되었다.

누구도 감히 그의 신성불가침함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천하제일인은 오래 전에 은거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천하무림은 결코 그의 존재를 잊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조용히 칩거하는 이 거인(巨人)을 깨우지 않기 위하여 정사(正邪)가 모두 자중하고 있었다.

혈기천존의 별호에서 보듯이 이 천하제일인을 잘못 건드리면 어느 누구도 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실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혈기천존의 아들 부부가 무림에 나왔다가 일단의 사파무리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등천마교(騰天魔敎)>

 

바로 이들이 범인이었다.

저 전설속의 비밀결사인 마교(魔敎)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광폭한 무리들...!

그들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신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전 무림에 가공할 재앙을 불러들인 등천마교,

그들은 사실 당금의 강호무림을 분할하고 있는 가장 강대한 네개의 세력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

등천마교는 신주사패천중에서도 연원은 가장 일천한 문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오래전부터 전 무림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었다.

등천마교내에는 고수들이 즐비했으며 교주인 등천마황(騰天魔皇) 조천수(趙千壽)는 은연중에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

황산(黃山)의 절곡에서 은거하며 아들 내외를 기다리고 있던 혈기천존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내외를 기다리다 못해 세상에 나선 순간 등천마교의 신화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는 어느 날 새벽,

장강을 끼고 세워져 있던 등천마교의 총단에서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안개가 완전히 걷혀져 유월(六月)의 햇살이 장강 일대를 아름답게 비추었을 때,

한명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단장을 짚고 등천마교의 본단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어도 등천마교만은 깨어날 수 없었다.

등천마교 본단에 있던 모든 인간들은 이미 머리를 보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무림사에 유래가 없는 대살겁(大殺劫)이 바로 천하제일인 혈기천존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교주 등천마황 조천수 이하 등천마교 총단의 이천칠백여 교도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머리가 파열되어 분간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 대살겁에서는 하물며 개와 고양이등의 미물들 마저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천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에 의한 하나 거대문파의 몰살…!

이 어찌 전율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림의 모든 문파들은 행여나 이 전대미문의 살겁의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혼자 손으로 천하사대거파중의 하나인 등천마교를 멸해버린 혈기천존,

그는 그길로 다시 황산 절곡으로 돌아가 산문(山門)을 닫아 걸어버린 것이다.

다만,

혈기천존의 제자들이라고 알려진 네 명의 남녀가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등천마교의 지단(支團)들마저 완전히 쓸어버렸을 뿐이다.

 

-혈기사신재(血旗四神才)!

 

천하제일인의 네제자들!

무려 이만여명에 달하는 등천마교의 교도들이 그들 혈기사신재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대살겁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대살겁에 소요된 겨우 한달 남짓,

그러나 신주사패천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라던 등천마교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등천마교가 사라진 후 혈기사신재도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강호인들은 이 끔찍한 혈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무림은 이를 일컬어 혈기대살겁(血機大殺劫)이라 부르며 전율로 기억했다.

어느 누구도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천하제일인 혈기천존(血旗天尊)의 이름과 함께...!

 

× × ×

 

-황산(黃山)!

 

무릇 황(黃)이란 오행(五行)의 중심이며 중원의 상징 색이 아닌가?

그러기에 황산은 중원의 중심이며 도교(道敎)의 본산(本山)이다.

그 황산의 깊은 곳.

그림과 같은 두 개의 절봉사이에 이만 여 평의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세외선경같은 이 분지에는 들쑥날쑥한 수많은 석순(石筍)들과 천년노송(千年老松)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황산 제일금역인 석송림(石松林)이었다.

석송림이 금역(禁域)으로 화한 것은 이곳에 한명 신인(神人)이 은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빛의 혈기(血旗)를 신표로 삼는 천하제일인이...!

 

오후의 나른 한 햇살이 석송림을 눈부시게 비출 때,

[호호호! 재미있지 아가야?]

문득 옥슬같이 해맑은 웃음 소리가 석송림을 울렸다.

한명 아름다운 소녀가 세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기를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석순(石筍)들의 숲 속을 춤추듯이 걷고 있었다.

열 일곱 살 쯤 되었을까?

전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해맑은 용모의 소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 장단에 맞추어 아기를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였다.

아기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도 까르르 들리고……

소녀의 청초한 웃음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때였다.

[사매, 빨리 오너라. 다들 기다리고 있지를 않느냐?]

어디선지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소녀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미안해요 사형! 지금 가요!]

소녀는 즉시 대답하며 아기를 바짝 가슴에 당겨 안고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화라락!

너울너울 춤추는 나뭇잎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소녀의 자태…!

하강한 선녀의 모습이 저러할까?

오륙십장쯤 날아갔을 때,

문득 십장 높이의 거대한 돌기둥이 소녀의 눈 앞으로 다가오고,

수평으로 날아가던 그녀의 몸이 반쯤 비틀리더니 바람에 휘감기듯 수직으로 솟아올라 거대한 석순위에 올라갔다.

[제가 조금 늦었나요?]

석순(石筍)위에는 세 사람의 신태비범한 젊은 청년들이 먼저와서 앉아 있다가 그녀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왔으니 됐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중앙에 앉아 있던 흑의를 입은 청년이 말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사자(獅子)같이 위맹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한데, 대사형! 지금 사부님께선 어디 계신지요?]

소녀가 말하자 대사형이라 불린 사자얼굴의 청년이 다시 말했다.

[묘시말에 무진동(無塵洞)에 들어가셨다.]

[마침 적당한 때로군.]

소녀의 왼쪽에 앉아 있던 청삼을 입은 영준한 청년이 대사형이란 청년의 말을 받으며 눈을 번뜩였다.

[....!]

[....!]

잠시 네 남녀 사이로 심상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눈빛은 은은한 두려움과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대사형이라 불린 흑의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사제(師弟)부부가 등천마교의 무리에게 변을 당한 이후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셨다.]

[…………]

[사부님은 변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마성(魔性)에 빠지신 게지.]

[지금 무진동(無塵洞)에 들어가 폐관(閉關)하신 것도 보다 살기가 강한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서다. 만일 사부님께서 폐관을 마치고 나오시면 어떤 또 끔찍한 살겁을 자행하실 지 모르는 일이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만 하오]

네 남녀의 심각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마침내 그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했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을 물어 나온 피로 무언가를 맹세하는 혈서(血書)를 썼다.

바야흐로 역천의 모의가 이루어진 것이련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는 그들을 방실거리면서 쳐다보았다.

 

× × ×

 

저녁무렵,

석송림의 안쪽 절벽 밑에는 아담한 석옥이 몇 채 서있다.

제일 좌측의 한 석옥,

직접 손으로 만든 듯한 나무침상과 탁자가 보이고 예의 소녀가 아기를 작은 침상에 눕혔다.

아기는 이미 깊은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다.

소녀의 이름은 조예진(趙藝珍),

그녀는 바로 혈기천존(血旗天尊)의 네 제자인 혈기사신재(血旗四神才)중 막내로서 별호를 천외비연(天外飛燕)이라고 했다.

이곳 석송림은 바로 혈기천존의 은거지인 것이다.

그리고 천외비연 조예진이 낮에 석순 위에서 만났던 청년들이 혈기사신재의 다른 셋이었다.

 

-사면천왕(獅面天王) 위청천(衛靑天)!

-옥기린(玉麒麟) 대성화(代成華)!

-천수마영(千手魔影) 사진성(史震聲)!

 

이들 세 청년과 조예진이란 소녀야말로 단 한달만에 등천마교(騰天魔敎)의 교도 이만여명을 척살하여 전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장본인들이었다.

전대미문의 혈풍을 일으켰던 혈기사신재가 이제 겨우 이십전후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천외비연 조예진,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지난 번에 강호에 나갔을 때 그분을 만나 보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마음 속으로 한 사람을 생각해 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사부님이 변하기는 했어. 대사형의 말처럼 이성을 잃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녀는 낮에 석순위에서 했던 논의를 생각해 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혈기천존은 아들 내외가 등천마교의 무리들에게 살해당한 후에 성격이 많이 변해 버렸다.

직접 등천마교의 본단에서 대살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젊은 네 제자들로 하여금 무려 이만명에 달하는 등천마교의 교도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무진동에 들어가서 또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조예진은 자신의 세사형들의 야심(野心)이 적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당금의 강호에서는 그들 네 사형제들의 무공을 당할 수 있는 인물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사형들은 이번 기회를 빌어서 내심 사부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도 사부가 요즘 들어 더욱 무서워지고 정신도 온전한 것 같지도 않아서 불안했었다.

석송림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녀 역시도 간절했던 것이다.

아무튼 사부 혈기천존 몰래 석송림을 떠날 계책이 그들 네 사형제에 의해서 세워졌고……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사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사부의 어린 손녀, 주소아(周小阿)를 데리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사부의 손길도 피할 수 있을 뿐더러 어린 소아를 마성에 빠진 사부에게 맡겨 놓을 수도 없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사부님은 앞으로 영원히 이 석송림을 나오지 못하실 것이다. 휴…아무리 사부님의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해도 꼭 이렇게 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녀는 죄책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연세때문에 무공이나 줄어들면 아무 염려없이 모실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

혈기천존의 무공은 나이를 몰랐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고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무진동을 파괴한다고 해도 사부님은 이미 금강불괴의 몸이니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고 땅을 뚫고 밖으로 나오시겠지]

그녀는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어둠이 깃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남긴 글을 보신다면 아마도 평생을 이 석송림 밖으로 나오시는 일은 없으시겠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탁자 주위를 돌았다.

[한데……그분이 내가 사부를 배신한 것을 알면 뭐라고 하실까? 나를 용서해 주실까……?]

그분,

과연 그분이 누구이길래,

사부를 떠나기로 작심한 그녀가 사부보다 오히려 그를 더욱 염려한단 말인가?

 

다음날,

콰르릉!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석송림 안쪽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수천관의 화약이 폭발하며 절벽 아래에 자리한 작은 동굴 하나가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절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자욱한 먼지를 뒤로 하고 네 줄기의 인영이 석송림을 빠져 나갔다.

그것이 무림사에 다시 없을 대겁풍의 서막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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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전 7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일초는 와룡강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입니다.

천방지축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요.

복잡한 세태에 지친 일상에 청량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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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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