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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무너져 버린 아버지

 

 

복도,

진홍빛 융단이 그림처럼 덮여있는 복도였다.

그리고, 이 회랑은 어찌나 긴지 마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미로를 연상케 했다.

바로 이 미로처럼 이어진 회랑의 끝에 역대 백인장주들의 집무실이자 폐관실(閉關室)이 위치하고 있었다.

만년온옥으로 새겨진 쌍봉각이 멋들어지게 조화된 문을 들어서면 하나의 실내가 시야에 드러난다.

천정에는 야명주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벽은 당대(當代)의 유명한 화가(畵家)들의 산수화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밟고 지나기가 송구스러운 비단이 깔려있는 실내,

때문에, 실내는 장중하고 무겁고 화려하며 부귀롭다.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이토록 화려한 실내가 더없이 더둡고 침울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니……

그렇다.

이 무거운 분위기는 세 사람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하나의 침상과……

두 개의 호피 의자에 각기 자리를 달리한 세 사람……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

삼십 오륙 세나 되었을까?

붉은 침상은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너무도 희어서 오히려 슬프기까지 한 살결과……

손과 옷과……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을 뒤로단정히 묶은 백건(白巾)과……

도대체 침상의 그에게서 선명한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밀납처럼 희고 창백한 얼굴에 신(神)의 작품처럼 자리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내의 아름다움……

누구든 일단 이 사내를 대하고 나면 그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의 일신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고아한 기품에 압도되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리라……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천정을 우러르며 치켜 떠져 있는 그의 두 눈은……

아무런 인간적(人間的)인 감정이라고는 담고있지 않은 몽롱한 것이 아니가?

마치, 모든 영혼과……

모든 심령은 이미 이 사내의 몸에서 달아나 버린 듯한……

한 마디로,

그의 동공이 힘없이 풀려 그저 의무처럼 천정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조각품을 연상케 했다.

바로 이 침상의 사내를 침울한 안색으로 지켜보고 있는 호피의자의 두 사람,

둘 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인(老人)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푸른 장삼을 입고 있었으나,

그 중의 한 노인(老人),

머리에는 와룡관(臥龍冠)을 썼으며……

심해(深海)처럼 깊고 교요한 눈빛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현기(賢氣)로움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이 노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미심에 박힌 푸른 반점……

허나, 그것이 오히려 고고한 대유학자를 연상케 하며 노인의 기품을 돋보이게 한다.

 

무심군자(無心君子),

 

이 하늘 아래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자 그 누구겠는가?

이 시대의 최고의 삼 현자(賢者) 중의 하나 이며……

천하(天下)에 깔려 있는 대소사(大小事)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

지혜에 관한 한 그 능력을 견줄 사람이 더문 사람이다.

여기에다,

또한 십이 인의 절세고수 중 한사람이기도 한 그의 얼굴에 홍안은 아직도 그를 오십대의 노인으로 보이게 하나,

기실 그의 세수는 백을 훨씬 넘겼다.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노인,

수려한 용모에 도도한 기풍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

중원은 이 사람을 수혼도객(收魂刀客)이라고 일컫는다.

수혼도객……

그가 지닌 호 그대로 한 때 중원 십팔만리를 주유하며 마두들의 혼을 거두어들이고 다녔던 절세적인 도객이다

도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 속에는 천하의 무수한 무학이 담겨져 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혼도객을 일컫기를,

 

____수혼도객의 도는 무서운 것이지만 그의 뇌(腦)속에 든 무학들은 그의 도 보다 더욱 가공하다. 그것들 중 백분지 일만 얻으면…… 능히 천하에 고수로서 입신할 수 있으리니……

 

이 신화적(神話的)인 두 기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세상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까마득한 무지(無知)가 아닌가?

아니,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삼 년전에 가출한 소일초를 잡으려 하던 그 두 노인이었으니……

당시 그들이 했던 말로 보아 백대선생같은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들은 도왕 소선풍의 좌우공봉(左右供奉)이기도 하다.……

지금도 두 사람은,

인간의 감정이라곤 하나도 드리우지 않는 채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내를 향한 채……

질식할 것 같은 침묵과 정적이 잠겨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물흐르듯 흘렀다.

깜깜한 밤하늘의 먹장구름이 걷혔음인가?

화안히 달빛이 창문에 부딪히고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때다.

자박자박……

사박사박……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무서운 분위기가 젖어 있는 실내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예진과 소일초……

그리고 내총관 독고행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수혼도객과 무심군자,

그들은 일제히 조예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구부렸다.

[좌우공봉……!]

[주모께 인사드리오이다.]

조예진도 수심에 찬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피워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두 분 공봉께서는 어서 예를 거두세요……한데 무산신의께서는 안보이시는 군요.]

[아마도 지금 약실에 있을 것이외다.]

허리를 편 두 기인의 눈빛이 소일초의 한몸을 더듬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동공으로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일초가 많이 변한 듯 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자기들을 골탕만 먹이던 그 꼬마가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이때, 소일초가 환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수혼도객과 무심군자를 향해 다가섰다.

[두 분 봉공께 인사드립니다.]

의젓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소일초,

두 기인도 어리둥절하며 소일초를 향해 손을 가볍게 맞잡아 보였다.

[삼가 좌우공봉도 소장주를 뵈오이다.]

소일초가 자기들에게 이처럼 인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는 묘한 대치,

그 침묵을 타고 한 소년과 두 기인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말이 필요없고……

그들에게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다.

소년은 마음으로 다시는 말썽피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내고 있었고,

두 노인은 소일초가 확실히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 대신 환한 미소와 가벼운 미소의 주고 받음으로 모든 것은 흡족한 것이다.

문득 수혼도객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의 백의사내를 가리켰다.

실내의 이 모든 상황을 아예 도외시 한 채 풀린 동공으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는 조각상과 같은 사람을 ……

[장주님이십니다.]

오오……장주라니?

그렇다면 모든 신체기능이 마비된 채 허공만 멀건히 바라복 있는 식물인간과 같은 사람이 바로 도(刀)의 제왕(帝王)인 도왕 소선풍란 말인가?

한데 왜?

이 시대 최고의 도왕(刀王)인 그가 이토록 처참한 상태로 병상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소일초는 아버지의 모습을 쳐다보고 도저히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설마하고 말았다.

하기야, 어찌 선뜻 이러한 사실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햇살처럼 찬란한 신위로 천하를 한눈에 굽어 보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해 왔던 자신의 부친이 아닌가?

소일초는 의혹이 넘치는 눈빛으로 조예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찰랑고여 넘치는 조예진의 눈물을 소일초는 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내는 음성도 들어야 했다.

[애야……너의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으려느냐?]

소일초,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소일초는 그의 뇌리에 감도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음인가?

선 그 자세로 오랫 동안 도왕 소선풍를 바라보고만 있엇다.

[이래서……이래서……아버지가 저를 꾸짖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군요.]

이때, 대답대신 냉엄히 흐르는 조예진의 음성,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무엇하는 것이냐?]

소일초의 작지만 탄탄한 어깨가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소자 소일초……이제야 돌아와 아버님을 뵙습니다.]

하나, 소선풍는 말이 없다.

그저 풀린 동공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지켜보던 무심군자가 침중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소장주!]

[…………]

[장주(莊主)의 신체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소이다.]

[…………]

[온몸의 십육대근혈이 모두 끊기고……삼백육십주맥이 모두 어긋났으며 ……그기다가 인체 십대사혈이 막혀있으니……]

[…………]

[장주께서는 살아 있으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신 완전한 식물인간이실 뿐입니다.]

[…………]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으며……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니……소장주의 인사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실 수 없소이다.]

순간, 소일초의 잔등이 무섭게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부친이 변을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사실로 지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던 그의 마음 속에 뜨겁게 솟아오르는 기이한 충격!

그 충격이 바로 진한 혈육으로 맺어진 감정의 교류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무심군자의 무겁고 조용한 음성이 다시 흘러들었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삼 년 동안 백인장의 수하들이 천하를 뒤지면서 소장주를 찾았던 이유이외다.]

찰나, 격한 감정에 떨고만 있던 소일초의 아름다운 동공에 뽀얀 물기가 서려왔다.

(그래……삼 년 전에 꾼 재수없는 사마귀 꿈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을 지도 몰라……내가 남황에서 사부와 지내고 있을 동안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돼있었던 거야……)

소일초는 뼈 속 깊은 후회 속에,

천천히 손을 들어 소선풍의 차고 파리한 손을 감싸쥐었다.

한데 이순간,

오오……보라……

반짝……

소선풍의 두 눈에 희미한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것은 한 방울, 두 방울 눈물로 맺혀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일초가 움켜 쥔 소선풍의 파리한 손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니……

부정(父情),

이 처참한 지경에도 젊은 도왕의 가슴에는 아들을 향해 흘려 줄 뜨거운 눈물이 남아 있었던가?

뜨여진 채……

두 눈을 스스로 감을 수 도 없는 소선풍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뉘라서 이 도왕의 가슴에 흐르는 처절한 부정을 모르랴?

그는 부르짖고 있으리라.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마음 속의 절규로 울부짖고 있으리라.

 

____ 아들아……

내 아들아……

 

소일초,

어느 새 그의 두 눈에서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부자(父子),

그들은 비록 아무런 말도 주고 받을 수 없으나……

마주 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정과,

그 정으로 흐르는 눈물로 그 어떤 해후(邂逅)보다 뜨거운 해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소일초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소선풍를 부르며,

작고 차가운 손을 들어 올렸다.

도왕 소선풍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이때 한 동안 아름다운 두 부자의 상봉을 감동으로 지켜보고 있던 무심군자가 조용한 음성을 흘려냈다.

[소장주!]

[…………]

[더이상 장주를 격동케 해서는 아니되오. 장주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소이다.]

순간 소일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소선풍를 향해 다시 정중히 일배를 올린 후,

소일초는 조심스럽게 소선풍의 침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무심군자를 향해 무서운 빛을 발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봉공……누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었습니까? 열 배 백 배로 돌려주겠습니다.]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정성스럽게 두 손으로 닦아내리며 조예진이 고개를 저었다.

소일초의 예민한 반응에 무심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 대답하려다가 조예진의 표정을 보고 가만히 있었다.

조예진이 천천히 내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삼 년 전 네가 가출했을 때부터 이야기해야 겠구나……]

[…………]

[당시 네가 어린도를 가지고 나갔을 때 내가 뒤 쫓아 간 걸 기억하겠지?]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창산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그만 돌아오고 말았는데, 너는 그 이유가 궁금했겠지?]

[네……]

조예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는 평소에 제 내력에 대해 의문을 품어 왔겠지요?]

[어찌 저희 늙은이들이 감히……]

[오늘같은 때에 제가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천하제일인 혈기자의 막내제자예요.]

순간 두 노인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경악했다.

혈기자……

혈기자라면 무림의 일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학의 대종사로 달마와 장삼풍에 비견되는 불세출의 대기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십여 년 전에 혈기자와 그 제자들이 등천마교를 멸망시켜버렸던 그 혈기대종사의 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참혹한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소일초는 내심 집히는 것이있어 두 봉공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아하! 그래서 혈기자가 작은 어머니를 알고 있었구나……)

무심군자가 경악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주모께서 바로……]

[그래요. 내가 바로 사수(四手)의 하나이고 옛날 등천마교의 무리들을 학살한 장본인 이기도 하지요.]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셔야 합니다.]

조예진은 고개를 돌려 소일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믿을 수 있겠지?]

[네……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래, 과연 네 아버지가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총명하구나.]

[…………]

[나는 너를 쫓아가다가 창산 그곳에서 내 사부의 표기인 혈기(血旗)를 보았단다.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우리 사형제(師兄第)들은 무림에 나올 때, 실은 사부께 남에게 밝히지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도망쳐 나왔단다.]

[…………]

[…………]

[사부는 무서운 분이시지……우리를 단 일 장에 주살하려 하실거야. 그런데……]

…………

[삼 년 전, 우리 백인장을 방문한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나를 한 번 볼 것을 요구했으나,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 빈축만 샀단다.]

[…………]

[멀리서 얼핏 나를 보는 데,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빙긋이 웃더구나……나는 무척 당황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보는 사람인데……]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주모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진 젊은 놈이었겠지……)

[남은 부인된 몸으로 외간남자가 얼굴을 보기 청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었지. 아무튼, 그 사람은……그러고는 네 아버지와 함께 무슨 밀담을 나누고 떠나가 버렸지……]

[…………]

[…………]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내가 아무리 물어도 네 아버지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불안하기 그지없었어……]

[…………]

[혹시 내 행동에 정숙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던가를 곰곰히 되새기며 반성을 했지. 그렇지만 그 사람과 관련된 뚜렷한 어떤 것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단다. 그리고……]

[…………]

[…………]

[며칠 후에 네 아버지는 갑자기 강호에 나갈 일이 있다면서 행장을 차리시더구나……말은 하지 않았지만 찾아왔던 청년과의 밀담 때문인 것 같았지.]

…………

[어딜 가시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단지 걱정말라고만 하셨지……어린도를 가져가지 못해서 좀 아쉬운 듯 했지만 괜찮을 거라면서 그냥 떠나셨다.]

[…………]

[…………]

[그것이 건강하실 때 본 이 분의 마지막 모습이었단다.]

조예진은 모든 화(禍)가 자신으로 말미암은 듯 울먹이며 누워있는 소선풍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부덕(不德)한 탓 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주모……]

[그리고, 네 아버지가 집을 나서신지 정확히 열흘 만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내상(內傷)을 입고 간신히 되돌아온 것이니……]

[…………]

[…………]

[허나 그 때는 이미 네 아버지의 신체기능은 철저히 망가져 있어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단다.]

[그 때 우리 백인장은 초상이 난 것처럼 놀랐지요. 세상에 장주께서 중상을 입으시다니…………]

수혼도객이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즉시, 이 곳으로 옮겨 무산신의로 하여금 치료하게 한 후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추측해 보았단다…………]

[…………]

[…………]

[세상에 네 아버지에게 중상을 입힐 만한 고수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내 사부이신 혈기자라면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분은 네 아버지와는 남이모르는 친분이 있어서……나를 죽이면 죽였지 결코 네 아버지를 상하게 하실 분은 아니었다.]

…………

[내가 단언하건데 그분 이외에는 천하에서 네 아버지와 당당하게 겨루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혼란에 빠져서 여러 가지 억지 추측까지 하게 되었지……]

[…………]

[…………]

[얼마전에 찾아왔던 청년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나 때문에 네 아버지와 그 청년이 다투다가 혹시 그렇게 돼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 그리고……]

[…………]

[…………]

[어쩌면, 내 사형들인 삼수(三手) 중 두 사람이 협공하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은 그 당시로 조금 일리가 있는 것이기도 했지……네 아버지의 상세 중 맥이 가닥가닥 끊어진 것은 대사형의 절맥수(切脈手)의 수법 같기도 했거든……]

[…………!]

[…………!]

조예진은 얼굴에서 눈물을 훔쳤다.

[나는 몇 년 동안 흉수와 너를 찾아서 암암리에 무림을 헤매 다녔지만 전혀 종적을 발견할 수 없어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작은 어머니! 어찌 이 일이 작은 어머니 탓일 수 있겠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셔요………]

[고맙구나 애야, 그런데 어젯밤, 네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분명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단다.]

[제 이야기로요?]

[그래, 네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제가 어제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어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소일초는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우리 백인장을 찾아와 나를 만나보겠다고 했던 그 청년은 바로 내 사부인 혈기자(血旗子) 바로 그분 이셨던 거야……]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분은 이미 일백 서른 정도의 연세이실텐데……]

[일초의 말로는 그분께서 완전히 반로환동하셔서 다시 젊은이가 되셨다는 군요……]

[일시적으로 늙는 것이 고강한 내공으로 인해서 멈추는 경우야 있겠지만, 어떻게 정말로 다시 젊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선의 술을 닦았다면 몰라도……]

무심군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분은 무림사에 독보적인 존재이시지요. 우리가 떠날 당시 무진동에서 무엇인가 연구하고 계셨는데 어쩌면 정말로 신선의 술을 닦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 혈기자란 분은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젊어지셨어요. 나하고 내기도 하고 그랬는 걸요……]

소일초가 조예진의 말을 거들었다.

[애야, 네가 그분과 내기를 했다고 했지?]

[네! 제가 모두다 이겼어요.]

조예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다 이긴 것은 아니란다. 마지막 내기에서 네가 진거야.]

[……?]

[그분은 정말로 그 곳에서 열흘을 기다린 후 네가 나타나지 않자 바로 이 백인장으로 찾아오셨던 거야……]

소일초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한 약속을 네 아버지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지. 네 아버지는 감히 거절할 수가 없으셨을 테고……]

[그럼……아버지께서는 제 대신 사수(四手)와 주소아란 사람을 찾기위해?]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그분이 나를 보려고 했던 이유도 명백해지는 것이지……]

[…………]

[도망친 제자이지만 그리워서 한 번 볼려고 하셨던 거야……]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분은 전부터 나와 네 아버지가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내가 가 보았자 네 아버지 옆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모든 것이 제가 철없이 굴었던 때문인 것 같군요……]

소일초는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조예진이 머리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구나. 애야, 네 말대로라면 사부께서는 너에게 말한 그대로 네 아버지에게도 부탁하셨을 텐데 그런 험한 일을 당할 리는 없었을 거야.]

모든 사람들이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흑막이 깔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

[…………]

[일단 내 사형들의 짓임이 확실한 것 같으니까, 그 과정은 어찌 됐던 간에 그들을 찾아서 생사결단을 내도록 해야겠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녀에게는 집히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길지않은 때부터______

돌연 무림에 신비(神秘)롭기 이를 데 없는 세력이 소리없이 등장했었다.

 

삼성무림청(三聖武林廳)!

 

이것은 피가 그리워 실성하는 극마집단도 아니었고,

정의를 표방하는 단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지닌바 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 그들이 세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을 거듭해 왔다.

불과 출현 수년 만에 장강 일대를 기반으로 거대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의문의 단체인 삼성무림청,

경악!경악!

공포!공포!

그들의 출현에 처음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구대문파의 청옥검궁, 그리고 백인장은 경악해 마지 않았고,

그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강 일대의 군소방파들은 언제 뻗쳐올지 모르는 그들의 힘으로 말미암아 공포에 떨었다.

그들의 성격은 모호하여 정사(正邪)의 구분도 되지 않았다.

백인장과 청옥검궁, 그리고 구대문파가 이루고 있는 정족의 형세를 깨뜨리며,

장강변의 등천마교가 위용을 떨치고 우뚝 서있던 그 자리에 다시 선,

삼성무림청,

이들이야 말로 조예진이 가장 의심하는 곳이었다.

 

[일전에, 내가 삼성무림청에 몰래 잠입해보았지만, 그들의 행사가 워낙 은밀하여 도저히 우두머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삼성무림청 그곳이 아니고서야 무림에 그들이 웅크리고 있을 만한 곳이 없다.]

조예진은 아예 단정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잔잔한 눈빛이 가는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다치게한 그녀의 사형들에 대한 분노가 엄청남을 시사하는 듯이……

이때 무심군자가 길게 호흡을 조정하고 소일초를 향해 몇 마디를 보충했다.

[소장주……!]

[…………]

[우리는 소장주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소이다.]

[…………]

[장주님께서 무림의 십이 대 고수 중의 한 분 이셨고, 이 늙은이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소이다. 적이 누가 됐던지 간에 주모께서 도우고 우리 백인장의 힘이라면 천하에 상대하지 못할 적(敵)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년의 전통을 이어온 백인장의 저력을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백인장이야 말로 무림에서 가장 고수가 많은 곳 아닙니까?]

수혼도객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제 소장주께서 무사히 귀환하셨으니……장주님을 대신해 바깥의 일을 직접 보셔야 합니다.]

[제가요?]

[그렇지요. 소장주께서는 이미 무림에 널리 알려진 고수가 아닙니까? 조사를 좀더 세밀히 한 다음, 삼성무림청이 흉수로 밝혀진다면 깨끗하게 쓸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백인장이 건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장주께서 이렇게 변을 당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두 봉공은 번갈아 가면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문앞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봉공의 말이 옳습니다. 어제 밤부터 장주님의 상세에 호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주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흉수를 처단해 버리는 것이 소장주님의 도리입니다.]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

바로 약실에 갔다던 백인장의 도객아닌 소속인 무산신의 서공화였다.

서공화는 말을 마치자 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주모께서 오셨음에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장주께서도 훤앙해 지셨군요.]

[수고가 많습니다.]

조예진은 남편의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지라 그에게 신중하게 예를 취했다.

서공화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이 상태로 장주께서 점차 회복하기를 계속 하신다면……앞으로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쾌차하심은 물론 본래보다 어쩌면 더욱 무공이 고강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조예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모…… 제가 어제밤에 장주님의 몸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생겨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아마도 장주님께서 신체를 전혀 쓰시지 못하는 중에도 마음으로 새로운 무공을 깨우치신 듯 합니다. 무림사에 유래가 없던 일이지요……]

서공화의 말에 좌우봉공과 서일초 모두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일 년……! 일 년이면 이분께서 다시 건강해 지신다고요?]

조예진은 서공화의 소매를 붙잡고 거듭물었다.

소일초의 어린 얼굴에 굴강한 빛이 떠올랐다.

[일 년……제 손으로 흉수들을 처단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어요. 작은 어머니……]

조예진은 소일초의 말은 한귀로 듣고 흘러버렸다.

남편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데 원수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남편만 있으면 세상이나 원수따위야 몽땅 그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일초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기가 아버지의 어린도를 가지고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혈기자에게 사기도박을 걸지만 않았으도……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자기를 꾸짖을 생각이나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조금도 차도가 없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작은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지 몰랐다.

소일초는 중얼거렸다.

[내가……내가 모두 처단해 버리고 말테다……이제 부터 아버지가 일어나실 그 날까지는 내가 백인장의 장주인 것이다.]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무심군자와 수혼도객은 아직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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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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