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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六 章

 

           불타는 푸른 숲, 무너지는 계곡

 

 

 

소일초의 그 말에 득도한 고승같은 청년승 도봉의 얼굴마저 무참히 구겨졌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당금 무림의 십이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고, 사문(師門)으로 따지자면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은 눈이 둥그레 졌다.

[너희들 중에 누가 내 사문과 스승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소일초의 목소리는 또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데……

[우라질……네 사문이야 백인장이라는 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끅……]

[젊은 거지! 백인장은 내 집이다. 모르면 아예 입 닥쳐라.]

소일초는 허리에 걸려있는 시꺼먼 철검을 손에 잡았다.

[백 육십년 전,이 철검을 사용하신 분께서 바로 나의 스승이시다. 그 분은 소림사의 기재라 불렸던 우광대사 보다도 배분이 높았으며 천하제일인이라는 혈기자 보다도 배분이 앞선다.]

[…………]

[누가 나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이 있는가? 무림의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사승과 배분이 나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땡초와 거지는 도무지 모른단 말이냐?]

그의 말은 준엄했다.

그른 말 한 마디 없었다.

짝짝짝-------!

[정말 훌륭한 일장연설(一場演說)이었어. 저 중 얼굴표정 좀 봐……]

주소아가 손뼉을 치면서 칭찬한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중인들의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인데……

도봉이 입을 열었다.

[대체 그 스승이라는 분이 누구시오? 우리 소림사와도 관련이 있소?]

[관련? 물론 있지. 자 여기 와서 공손히 받아가라구. 안 그래도 언젠가 소림사에 들르려고 생각했는데 잘됐군.]

소일초는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내 생각이지만, 이건 던져서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야. 공손히 절하고 받으라구.]

도봉이 반신반의 하면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소일초의 앞에 가서 합장을 하면서 주머니를 건네 받았다.

물러서서 주머니를 열어본 도봉은 깜짝 놀랐다.

고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선종의 본산 소림사에서 자란 그도 주머니 속에 있는 것 처럼 굵고 큰 사리(舍利)를 본 적이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사리들이 은은한 서기를 발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것은 어느 분의 사리입니까?]

도봉의 말투가 바뀌었다.

소일초는 빙그레 웃었다.

[우광대사, 전 소림사의 장경각주였던 분. 그분은 큰 깨닳음을 얻으신 후 남황에서 입적하셨지……내가 그분을 화장시켰고. 한데 그분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내 스승님이셨지……]

[그분도 불가에 몸을 담으신 분입니까?]

[장장 일백오십 년을 참선과 고행으로 지내신 분이지……]

사부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소일초의 눈에서 주루루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황녹천이 어떤 재주가 있기에 소림사와 개방을 이처럼 떡 주무르듯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황녹천, 청년승 도봉, 그리고 홍건개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들은 지난 삼 년동안 삼성무림청을 방관만 해 왔는데 어째서 내가 나서자마자 녹림맹을 도와 그들과 싸우겠다고 일제히 나섰을까?]

[그……그건……]

도봉이 말을 더듬으며 황녹천을 바라보았다.

[뻔한 걸 뭘 물어봐……]

주소아가 얼굴을 돌려 황녹천을 쳐다보았다.

[중원제일의 신비인 황녹천은 아무렇게 몸이나 굴리는 계집이야!]

꽝-------!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중원제일의 신비인 녹림맹주 황녹천이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는 계집이라니?

중인들은 가슴이 뻥 뚫린 듯 놀랐고,

황녹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분이 높은 젊은 중놈이나 거지가 아쉬운 게 뭐가 있겠어? 오직 하나밖에……]

도무지 어린계집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같지가 않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사씨 자매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주소아의 신분을 모른다.

단지,

소일초와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신분일 거라는 정도로 짐작할 뿐이었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어? 구파일방이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오직 자기들만 잘났다고 콧대 세우는 그들인데 여자때문에 움직이겠어?]

소일초의 반문이었다.

[가장 나쁜 자들은 원래부터 선한 자들의 탈을 쓰고 있지.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입으로 떠들지 않고 묵묵히 행동하는 고모부같은 사람이야!]

주소아는 말을 빙돌렸다.

[내 말이 완전히 옳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구파일방과 황녹천 사이에 남에게 밝히지 못하는 은밀한 거래가 있겠지……]

[다른 말은 몰라도 이번에는 네 말을 못 믿겠어. 너는 어제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거야.]

소일초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도봉 등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어린애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마. 하지만, 오늘 당신들도 더 이상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해. 어쩌면 다음 공격목표로 구파일방이 될 수 도 있어.]

소일초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자들의 귀에는 더욱 우뢰와 같은 힘을 담고 들려오는 충격을 느낀다.

그런 소일초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적지 않은 수고를 해서 일을 이만큼 꾸몄어. 한데 지금에 와서 당신들이 본인이 하는 일에 관여하려 든다면……또한 그것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곧 내 신념을 깨고 믿음을 깨는 일이 아니겠어?]

순간,

벌컥벌컥……

홍건개가 호로병의 술을 한꺼번에 쏟아넣듯 거칠게 들이켰다.

[제기랄……지금 이 자리에 화산(華山)의 그 놈 주둥아리가 왔어야 말 상대가 되는 것인데……]

벌컥벌컥……

[우라질……이 소화자 술만 먹지 않았어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낼 것인데……빌어먹을……에이 빌어먹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홍건개의 호로병을 감싸며,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별빛은 더욱 영글고 있었다.

쿠르르르……

쿠쿠쿠쿠……

계곡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 치는데……

청년승 도봉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그 신념과 믿음은 신행마동께서만 지닌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그대들은 그대들의 믿음대로 해보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본인의 산통을 다깨뜨리던지 말든지?]

[흥, 황녹천도 무엇으로 구파일방을 구워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구파일방이 녹림맹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군.]

주소아가 쏘듯이 하는 말이다.

[아미타불……좀더 신중한 판단을 바라오……]

[에이……끄윽……제기랄……]

이 순간,

소일초의 묵직한 음성이 달빛을 뚫고 다시 흘러나왔다.

[우스운 일이야……]

[…………]

[근본적으로는 황녹천이 삼성무림청을 멸망시키겠다는 내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문제겠지. 그래서 그들의 주력이 몰려오자 부랴부랴 최후의 수단으로 당신들을 불렀을 테고……]

정확한 추리였다.

[…………]

[그것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어?]

[아미타불………]

[끄윽……빌어먹을……]

소일초의 뼈가 맺힌 말에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의 안면에 가는 분노가 서려났다.

하나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쏟아져 나오는 소일초의 음성,

[너희들은 우선 나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나이 살 몇 더 있다고 감히 나 신행마동을 우습게 대했다.……기회다 싶어서 나를 핍박하려 했다.]

문득,

청년승 도봉의 깊은 동공에 파릇한 분노의 광망이 일었다.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소.]

[억지라…… 언제나 곤란할 때는 모든 것을 억지라고 돌려버리는 것이 소림사의 신공인가?]

그리고 한 순간,

청년승 도봉이 단정짓듯이 음성을 흘려냈다.

[아미타불……분명히 말하겠소만 마동……]

[…………]

[아무 대책 없이 삼성무림청의 삼혈단을 끌어들인 처사는 명백한 잘못이었소.]

[…………]

[그리고 빈승과 홍시주는 오늘밤 구파일방의 힘으로 그들을 녹림맹에서 조용히 물러가도록 할 것이오.]

홍건개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탄식하듯,

[꺼억……끅……더군다나 오늘밤의 격전은 절대……없소……]

[…………!]

[우라질…… 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꼭 피를 흘리겠다는 것이오……우라질……구파일방의 이름때문에 적들은 물러나게 될 것인데……]

순간, 소일초의 눈에서 파르르 불꽃이 분노로 일었다.

[구파일방의 온 건 바로 그 때문이었군.]

소일초는 격분하는 내심에 또 한 바탕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또한,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분노를 토하는 듯한 음성……

[그대들이 나에게 이토록 친절히 충고하는 것도 백인장주인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서 인듯하군……]

소일초는 피가 맺혀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발출 될 듯이 쥐어진 철검,

[좋아……더이상 본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

터질 듯 긴장해 가던 분위기가 소일초의 양보로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

[아미타불……무엇이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은 꼼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시가 지난 다음에는 구파일방의 이름으로 협상을 하든 위엄을 보이든 마음대로 해라.]

음성은 낮고 들릴락 말락 했으나,

소일초의 그 음성엔 그 누구도 거역치 못할 굳강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홍건개와 청년승 도봉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우라질……어쩔 수 없군……좋소……좋아……제기랄……그때가지 기다려 주지……]

 

× × ×

 

 

어둠이 꺼꾸로 부침하는 심야,

드디어 자시였다.

휘이이잉!

밤바람이 미친듯이 푸른 숲의 계곡 사방 질타하고,

솨아아아아……

휘르르르릉……

숲은 성난 파도처럼 미친 듯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바로 이 미친 듯한 자시의 야공(夜空)을 찢어발기며……

똑똑똑------!

마치 뇌성벽력과 같은 목탁소리가 천지를 질타했다.

동시에,

이 목탁음이 신호라도 되는 것인가?

번뻑……번쩍……

막막한 어둠 뿐이던 푸른 계곡의 호로병같은 골짜기 여기저기서 현란한 불꽃이 일어나더니……

꽝--------꽈꽝-------

쿠꽝---------

오오……

엄청난 폭발음이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로 터져 나오고,

그 현란하던 불꽃은 조만간 엄청난 불길로 화해 푸른 계곡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엄청나게 치솟지 않는가?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장엄한 광경을 보라!

혈의인(血衣人),

녹림맹 푸른 계곡을 까마득히 메우며 바람처럼 날아들어 오든 수백 수천 척의 혈의인들,

불의 방벽……

그 충천하여 터지는 화기(火氣),

일시에,

이 거대한 녹림맹은 이 엄청난 화광에 타고 메말라 한줌의 잿가루만 남아날 것 같았다.

한데 일순간,

슛슛슛______ !

혈의인들이 일제히 장력을 격출하여 화염의 완전포위를 뚫고서,

마치 화살이 꽂혀 오듯 녹림맹을 향해 질풍처럼 쇄도해 오는 것이었으니……

만일, 이대로 이 어마어마한 혈의인의 무리가 녹림맹의 본체인 푸른 성에 접근한다면……

이 녹림맹은 그대로 시산혈해로 가득차고 말리라.

그러나,

이런, 염려는 즉시에 사라졌다.

슈_____슛!

꽈꽈꽝_________!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녹림맹의 입구인 호리병 같은 계곡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으아아악------

으아악--------

화르르륵……!

화아아확!

이 푸른 숲의 입구는 참혹한 비명과 무너져 내리는 바위절벽,

그리고 마른 장작에 기름을 부어놓은 것처럼 엄청난 화광을 내뿜고 타기 시작했다.

녹림맹을 향해 화살처럼 달려오던 혈의인들,

그리고 번지는 화광,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시체들……

일시에 녹림맹은 염부의 불꽃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길과……솟아오르는 검은 연기와……

화약냄새와 시신이 타는 노린내……

이 모든 것에 녹림맹의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 쪽의 절벽위에서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일초와 주소아의 아리따운 얼굴에,

씨익!

검은 빛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말,

[됐어……본인은 이제 당신들 모두가 이곳에서 무얼하든지 상관하지 않겠어.]

순간,

흠칫!

그를 향한 수백 쌍의 눈빛이 가는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녹천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은 이미 삼혈단의 몰락을 보고 있는지라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음을 느꼈다.

동시에,

슈슈슛!

그들은 벼락같이 몸을 날려 미리 준비해 둔 연들을 이용하여 푸른 성으로 날아내렸다.

바로 이 순간,

쿠쿠쿵!

계곡이 통째로 뒤집히는 엄청난 진동을 겪는가 싶더니……

오오……

도저히 그 크기를 한눈에 담아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불꽃이 계곡의 입구에서 부터 계곡 절반을 장악하며 치솟지 않은가?

동시에,

우르르릉……

꽈꽝----쿵쿵쿵---------

계곡의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 막히고 수 백 수 천의 혈의인들이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은 다름아닌 삼성무림청의 삼혈단들이었으니……

혈향단-!

붉디붉은 혈의에 흰색 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복면에 그려진 한 송이 붉은 매화(梅花)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더불어……

향기…… 매화의 향기가 가득히 피워오는 듯한 착각이 들고……

그 속에 소름이 끼치는 살기를 피워내는 인물들이었다.

혈살단-!

그들은 혈의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검은 복면에 그려진 아수라상(阿修羅像),

피와 검은 지옥의 음기와……

냉혹비정한 기운을 광휘처럼 피워올리는 자들이었다.

혈혼단-!

이들은 혈의에 얼굴 또한 혈의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혼(魂),

혼을 부르는 저주의 악령들인가?

피리리……피리리리리……

삐리리리……삐리리리리……

그들은 피리가 아닌 기이한 악기를 쉴 새 없이 불어대고 있었는데,

그 악기 소리를 듣는 순간 영혼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은 혈의복면에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마(魔),

바로 이 한 자였다.

수수수수……

슷스스스……

소리없이 밀려들던 이 악령의 피그림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絶頂高手)인 듯 몸놀림이 흐르는 바람처럼 날렵했다.

그러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화약으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당한 후에,

연이어 떨어져 내린 축융화탄으로 말미암아 계곡의 앞부분이 무너지면서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폭발과, 화염……

그 와중에서도 삼혈단의 일부고수들은 살아서 악령처럼 녹림맹으로 돌진했으니……

파츠츠츠____츳츳_____ 츳츳!

쌔애애______액!

충천하는 화광 속에 난무하기 시작하는 검장도권(劍掌刀拳)의 소용돌이!

[크아아악!]

[크_____악!]

비명이 천지(天地)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후리리리_____릭!

시퍼런 살광(殺光)과……

검은 살기(殺氣)와……

핏빛 잔광(殘光)이 엄청나게 소용돌이 치는 속에,

간혹 천지번복의 굉음이 잇달아 터지고,

달빛아래 희미한 어둠은 부르르르 전율을 일으켰다.

거기에다,

하늘로 치솟아 난비(亂飛)하는 무수한 나무들과 불타는 숲……

콰아아아아……쾅……

바람도 불을 만나 더욱 미친듯이 불어대는……

이곳은 녹림맹이 아닌 아수라 광천귀역!

번________쩍!

콰콰콰______쾅!

천지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파공성을 타고,

[으아아아아_________악!]

[크아아아아_________악!]

참담한 비명은 끝없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폭음이 잦아들고 대신 허공에서 까마득히 몰려 내리는 구파일방과 녹림맹의 고수들……

조용하고 은밀한 계곡에 위치해 있던 아름다운 푸른 숲의 푸른 성(城),

이제 이것은 충천하는 화광과……

난비하는 검장도권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 사비팔산(四飛八散)되어 나가 떨어지는 시신(屍身)들 만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아수라 귀역으로 변했을 뿐이다.

한편,

이미 장강의 강변으로 피신한 황녹천과 그 수천 수하(수河),

그리고,

청년승 도봉과 홍건개가 이끄는 대소림의 인물들과 개방의 일천인물들……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에 찬 시선으로 이 처참한 혈전(血戰)에 동참하고 있었다.

문득,

덮쳐드는 혈의인을 향해 일 장을 퍼부으며,

하늘처럼 맑은 시선에 침울한 기운을 피워올리던 청년승 도봉이 중얼거리듯 말을 흘려냈다.

[아미타불……어찌……이런 처참한 살겁을……]

[끄억……컥……일찍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할 손가……우라질……!]

이 순간,

황녹천의 눈빛은 남다르다.

하기야 그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왔던……

그의손에 의해 더욱 키워지고 다듬어진 푸른 성인가?

그것이 황폐하게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는 이 마당에 어찌 만감(萬感)이 교차하지 않으랴?

(아아……본인의 푸른 숲과 푸른 성이 이렇게 …!)

그러나,

황녹천의 참담한 기분이 어찌 죽어가는 수하들을 지켜보는 사은상의 심정에 비길손가?

사은상……

절벽위에서 소일초 등과 함께 이 참혹한 혈전을 지켜보는 그의 두 눈에는 쉬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느새 깨물었던가?

그녀의 파리한 입술에 선혈이 가득하다.

파츠츠……츳츳……츠츠……

[크아아아악!]

무모할 정도로 장렬히(?) 아니면 흉악히(?) 몸을 던진 혈의인하나가 형체도 없이 녹림인들의 손에 찢겨 날아간다.

[으아______악!]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사은상의 몸이 부르르르 떠는가 싶더니,

[쿨룩……쿨룩……]

그녀는 한덩어리의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입술에 저미는 선혈과,

안타까워서……

너무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저 눈물과……

문득, 그런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후휘휘……

희디흰 백의를 바람에 표표히 날리고 있는 천상의 옥동옥녀 같은 두 사람,

소일초와 주소아,

오늘의 참극을 계획한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서운 꼬마들이다.

이때 돌연,

참담함과 눈물로 젖어 있던 사은상의 동공에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회상(回想),

며칠 전, 사옥상과 함께 주소아의 손에 어처구니없이 잡히고, 다시 고찰에서 도망쳤다가 소일초의 저녁값으로 잡혀온 일들이 이 참혹한 순간에 회상의 수증기로 피어오른 것이다.

(그때 옥상이가 저 꼬마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이 되었을 까? ……아니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저 꼬마들은 다른 수단으로 똑 같은 결론을 만들어 냈을 거야………)

지금,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소일초도 사부 구멍뚫린 시신을 화장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소일초,

그의 남만 오지에서의 삼 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비록 다시 돌아갈지 안돌아갈지 기약 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그의 마음은 거목의 숲에 있는 검마의 동굴에 머물곤 할 것이다.

삼 년……

사부와 함께 보냈던 힘겨웠던 세월,

의미도 모르는 참선을 강요당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 몇 날이며 해도 해도 깨우쳐 지지 않는 검마의 독문 무공 일초검공을 반복하며 얼마나 많은 꾸지람과 구박을 맞았던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지리한 생활동안에 친구가 되어주었던 비성성들,

그들이 오늘 삼혈단을 초토화 시킨 주역들이다.

소일초의 두 눈에 굳은 기개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막 돌아와 그의 곁으로 내려서있는 그 비성성들을 주시했다.

한데,

문득, 소일초가 나직한 음성을 흘려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술과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마……]

순간,

십 수 마리의 비성성들이 끽끽 거리며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불꽃, 폭음, 그리고 인간들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늘게 떨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주소아가 소일초에게 술병을 건네 주었다.

[두려우면 멀리가서 놀다가 나중에 우릴 찾아와.]

동시에, 회색동공의 비성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날개를 펴고 올라갔다.

[이제 대충 끝난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싸움이야. 아마도 다시는 이런 처참한 장면을 볼 일이 없겠지……]

[어쩌면 지금이 시작일지도 모르지. 삼성무림청이 삼수가 만든 집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뿌리를 뽑아버리겠어.]

소일초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약속이나 지켜야 겠어.]

주소아가 눈물과 자신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사은상과 사옥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언니들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 보셨듯이 삼성무림청은 우리 손에 멸망하고 말거예요. 아마도 죽은 것 처럼 위장하고 깊이 숨어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건 그 동안의 정리로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 보셔요.]

[…………]

[다음에 다시 우리가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먼저 언니들을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주소아는 손가락을 튕겨서 사은상과 사백상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녀들은 잠시 앉아서 운기행공을 한 다음 원망의 눈초리를 소일초와 주소아에게 보낸 후 몸을 날려 떠나갔다.

[흥, 이제 심심해서 어떡할까? 천하의 색마께서……]

[낄낄낄……네가 밤새 내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히히……]

소일초는 술을 들이키면서 요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쳇, 오늘 밤에는 쥐덫을 설치하던가 해야지 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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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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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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