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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31 [무림일기] 6화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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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만나다!

 

 

 

(끝났다.)

사방에서 호장무사들과 번견들이 몰려들며 내는 소란을 들으며 철접은 체념했다.

(조원(組員)들이 몰살당할 때 함께 죽지 않은 건 중상을 입은 지로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시바타 일행이 지로를 피신시킨 곳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졌다.)

!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철접은 비수를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임무에 실패한 자객이 사로잡힐 경우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가엾은 어머니가 무로마치막부의 관병들에게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고문과 강간을 당하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철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다.

탈출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선택은 단 한가지뿐이다.

어머니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기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

(미안하구나 지로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철접은 겁 많은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수로 자신의 목을 그으려 했다.

그때였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

요문천이 기겁하며 달려들어 철접의 비수를 든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으려고 애쓰며 애원했다.

눈앞의 여자는 잔인무도한 자객이며 감히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대역죄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제 따위는 요문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 온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녀가 자살을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해도 무공에는 문외한인 요문천이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철접은 동영의 양대 인자파벌중 하나인 이가류의 당주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방해하지 마라."

철접은 왼손으로 요문천의 가슴을 쳐서 밀쳐내었고,

!”

콰당탕!

그 바람에 요문천은 옷장 밖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요문천을 밀쳐낸 철접은 다시 오른손에 든 비수로 자기의 목을 그으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 사람 살려!"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요문천이 갑자기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

비수로 목을 그어 자살하려던 철접은 갑작스러운 요문천의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였다.

"자객이다! 자객이 날 죽이려 한다!"

그 사이에도 요문천은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입에 대고 다급하게 외치고 있다.

(내가 자살하려던 것을 말리려던 자가 왜 갑자기...)

의아해하며 요문천을 보던 철접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 치떠졌다.

그녀는 비로소 본 것이다.

요문천이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두눈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구나!)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여자답게 철접은 순간적으로 요문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 요문천은 자신을 인질로 잡으라고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리 닥쳐라!"

요문천의 의도를 깨달은 철접도 짐짓 앙칼지게 고함을 지르며 옷장 밖으로 나섰다.

중상을 입고 시바타등에게 호송되어 간 동생의 안위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이용해야만 한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요문천은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며 철접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일어섰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허튼 짓을 하면 목을 따버리겠다!"

철접도 더욱 크게 목청을 높이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요문천의 울대에 비수를 대었다.

그 직후였다.

"여기다!"

"도망 친 자객이 소부주님의 거처에 숨어있다!"

콰창! 퍼펑!

사방의 창문과 벽이 박살나며 십여명의 무사들이 요문천의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내로 돌입한 무사들의 절반쯤은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이었지만 나머지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다.

단단하게 묶은 포승줄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그 비단 옷의 관인들이 바로 금의위의 위사(衛士)들이다.

개개인이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의 무공을 지닌 금의위 위사들은 그 집요함과 냉혹한 행사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이런...”

... 소부주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실내로 뛰어든 직후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급히 멈춰 섰다.

가슴을 황금색 보검에 관통당한 철접이 왼손으로는 요문천의 어깨를 잡은 채 오른손에 든 비수를 요문천의 울대에 대고 있다.

요문천의 목에는 이미 베어진 상처가 생겨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다.

누가 봐도 요문천이 철접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 이런! 소부주께서 인질로 잡혔다!"

"조심하라! 소부주께서 다치면 안된다!"

방안으로 뛰어들었던 호장무사와 금의위 위사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이 누구인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황사 요광효의 외아들이 아닌가?

요문천은 영락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 요문천의 몸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호장무사들은 물론이고 금의위 위사들 역시 목을 내놔야하는 상황이다.

"소부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하들이 구해드리겠습니다!"

"계집! 그분께 위해를 가하면 사지를 찢어죽이겠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댄 철접이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 그들 앞으로 나온 때문이다.

(이자가 영락제의 황사이며 명나라 조정의 사실상 승상인 요광효의 외아들 요문천이었구나.)

철접도 비로소 요문천의 신분을 알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문천이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승상부의 소부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 소부주님께서 죄인에게 인질로 잡히셨다!”

그 사이에 요문천의 거처 주변으로 몰려들던 수십명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입에서도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창문과 벽을 통해서 철접이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때문이다.

빨리... 빨리 마님께 상황을 보고하라!”

입조(入朝)하신 승상께도 파발을 띄워라!”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 몇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현장을 떠난다.

섭대낭과 요광효에게 변고를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 살려주세요! ... 이 여자는 흉악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벌써 제 목에 상처를 내었다구요."

요문천은 철접에게 떠밀려 부서진 벽쪽으로 다가가며 짐짓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하여간 귀한 집 도련님들이란...!)

(명색이 사내면서 험한 일 좀 당한다고 벌벌 떠는 꼴이라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요문천의 모습에 금의위 위사들은 내심 혀를 찼다.

"길을 열어라!"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서 부서진 벽쪽으로 접근하며 차갑게 외쳤다.

그에 따라 철접 앞쪽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건물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밀려나갔다.

"이 샌님을 살리고 싶다면 날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철접은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바짝 들이댄 채 건물 밖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별 수 없다. 승상각하의 유일한 핏줄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좌우로 물러서며 이를 갈았다.

(됐다!)

앞쪽을 가로 막고 있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무사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며 철접은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잘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녀는 요문천을 앞세운 채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대담한 계집이로군! 감히 대명제국의 심장부에서 이런 분탕질을 벌이다니...>

 

누군가의 장중한 음성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를 천둥처럼 뒤흔들었다.

(그자다!)

순간 철접의 가늘고 긴 눈이 차가운 살의를 뿜어냈다.

만일 살아남는다면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쿠오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에 허공으로부터 한 명의 노인이 마치 산 하나가 통 채로 하강하듯 장중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뒷짐을 짚은 자세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노인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관운장(關雲長;관우)을 연상케 한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려한 금포(錦袍)를 걸친 노인의 등에는 비어있는 검갑(劍匣)이 짊어져 있다.

화악!

이윽고 금포노인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건물 앞의 정원 일대가 강렬한 돌풍을 휩싸인다.

"영반(領班)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뇌()영반님!"

금포노인이 내려서자 금의위 위사들이 아연긴장한 모습으로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인다.

(신비각 사대영반의 서열사위 금검존(金劒尊) 뇌극형(雷極形)!)

바르르!

요문천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철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비각이 무섭긴 무섭구나. 냉혹 비정하기로 소문난 동영의 인자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니...!)

그 떨림을 느낀 요문천은 새삼 신비각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요문천은 지금 자신들 앞에 내려선 금포노인을 잘 알고 있다.

신비각의 사대영반은 정기적으로 승상부를 방문하여 요광효에게 업무보고를 해왔다.

요문천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안면을 텄었다.

금검존 뇌극형은 칠십을 넘긴 나이지만 신비각 사대영반 중에서는 가장 젊다.

비록 나이 때문에 사대영반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긴 해도 금검존이 검법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 세상의 평판이다.

바로 그 금검존 뇌극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내 허락도 없이 당신네 금의위 위사들을 이미 승상부 내에 진입시켰다고?”

섭대낭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통령! 당신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가요?”

대청 안에는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을 비롯하여 십여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숨조차 크게 못 쉬고 있었다.

키가 육척이 넘어 보통 사내들을 압도하는 체격을 지닌 섭대낭의 몸에서 폭풍같은 살기가 터져 나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때문이다.

붉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수초처럼 일어나 흩날리고 벽안(碧眼)에서는 푸른 벼락이 치달린다.

(과연 한 때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벽혈마희(碧血魔姬)답구나.)

섭대낭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금의위 부통령답게 곽산해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무공 역시 신비각 사대영반을 제외하면 황실 내에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산해는 섭대낭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 거녀는 성정(性情)이 불같아서 일단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천살지기(天殺之氣)를 타고 태어난 이런 류의 인간과는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싸움이 붙게 되면 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는 기필코 피를 보는 격렬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땅히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했사오나... 역적의 흔적이 승상부 담장 안으로 이어진지라...”

곽산해는 곁눈질로 섭대낭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닥쳐요! 아무렴 나와 본부의 식솔들이 숨어든 쥐새끼 한 마리 처리 못할 것같았나요?”

곽산해의 변명은 이어진 섭대낭의 분노서린 일갈에 파묻혀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급한 마음에 이 암표범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같구나.)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섭대낭의 분노와 살기를 느끼며 곽산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만에 하나 당신들이 오판을 하여 본부에 난입한 것으로 밝혀지면...”

이를 갈며 곽산해를 노려보던 섭대낭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곽산해의 얼굴도 얼어붙듯이 굳어졌다.

 

<소부주... 자객... 인질...>

 

백여장 쯤 떨어진 곳에서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고함소리들이 섭대낭과 곽산해의 귀로 파고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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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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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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