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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28 [무림일기] 4화 어지러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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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지러운 밤

 

 

 

영락제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 몽고족에 대한 친정(親征)을 감행했었다.

이를 삼리오출(三犁五出)이라 한다.

삼리는 몽고족의 근거지를 세 번 쳐부순 것을 의미하고 오출은 다섯 번 고비사막을 넘은 것을 뜻한다.

다섯 번의 원정은 매번 대상이 바뀌긴 했다.

그래도 몽고족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대한 오이라트(瓦喇, 또는 衛拉)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달단(韃靼)과 함께 몽고족의 양대 세력인 오이라트에는 몇 년 전 토곤(妥爟)이라는 젊은 영걸이 나와서 대원(大元)제국의 재건을 공공연히 주창하고 있다.

이에 영락제는 세 번째 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오십만 대군을 북경 북쪽 팔달령(八達嶺) 근처에 소집하여 열병식을 갖었었다.

열병식은 정오 무렵에 진행되었었다.

그후 자금성으로 돌아오던 영락제의 귀성(歸城) 행렬을 자객들이 습격했을 것이다.

 

(딱히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신비각(神秘閣)의 경호를 받으시는 상태에서는 세상 어떤 자객도 영락폐하의 존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을 테니...)

승상부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요문천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숱한 적이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벼온 영락제다.

그 때문에 신변 경호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수많은 위사들이 영락제 주변에 포진해있다.

특히 암중에서 황제를 지키는 비밀조직 신비각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신비각의 경호를 받는 영락제가 위험해지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신비각은 주원장을 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후 원() 황실이 수집한 숱한 무공비급과 영약들을 신비각에 하사했었다.

덕분에 신비각에 가입한 무림인들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신비각의 실력자들이 몇 명만 세상으로 나가도 단번에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판이다.

(어쩌면 당대의 신비각 각주는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요문천은 신비각과 함께 아버지 요광효를 떠올렸다.

<정난의 변>에서 신비각은 중립을 지켰다.

문관을 우대하고 군부를 홀대한 건문제의 정책이 원래가 무사들인 신비각 구성원들의 반감을 산 때문이다.

신비각이 침묵해준 덕분에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신비각을 전보다 더 중시하였으며 자신의 황사 요광효에게 신비각의 관리를 맡겼었다.

관례에 따라 신비각의 각주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공표되지 않는다.

다만 사대영반(四大領班)이라는 네 명의 기인이 숫자 미상의 신비위사(神秘衛士)들을 직접 지휘한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래도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며 공신인 요광효가 신비각의 각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다.

요문천이 북경의 밤거리를 들썩이게 만드는 소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셨지요 도련님?"

드륵!

요문천의 뒤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키가 육척이 넘는 그 여인이 들어서자 그리 좁지 않은 서재가 꽉 차는 느낌이 든다.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임에도 균형 잡힌 몸매와 이목구비가 깊고 뚜렷하여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요문천의 유모 섭대낭이다.

"놀라긴 뭘..."

요문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유모를 돌아보았다.

섭대낭은 몇 달 전 마흔 살을 넘긴 중년의 나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정심한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內家高手)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색목인의 혈통인 섭대낭은 젊은 시절 강호를 뒤흔들어놓았던 여걸(女傑)이었다.

헌데 어떤 일을 계기로 무림에서 은퇴하고 요문천의 유모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전적으로 기르고 보살펴온 것이 섭대낭이다.

유모라는 이름 그대로 섭대낭은 요문천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서 길렀다.

요문천을 만나기 얼마 전에 섭대낭도 출산을 했었지만 곧 아기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퉁퉁 불어 오른 젖을 요문천에게 물리며 섭대낭은 아기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섭대낭에게 요문천은 단순한 젖아들이 아니다.

낳자마자 잃은 아기의 대신이었다.

자연히 그녀는 요문천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요문천에게 있어서도 섭대낭은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사실상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병약하게 태어난 요문천이다,

섭대낭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던 모양이지?"

요문천은 다시 창밖을 돌아보며 유모에게 물었다.

"저도 아직은 자세한 경과를 듣지는 못했는데... 열병식을 마치고 귀성하시던 영락폐하의 행렬을 일단의 자객들이 습격했다는군요."

다가온 섭대낭은 자연스럽게 요문천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물론 어림없는 시도였겠지?"

요문천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섭대낭의 큼직한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거구에 어울리게 크지만 길고 갸름하여 아름답기도 한 손이다.

"영락폐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으셨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네요. 승상께서도 급히 입궐(入闕)하셨구요."

섭대낭은 사랑스러운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뭘 직접 나서시나? 자객들의 추포(追捕)는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에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

요문천은 혀를 찼다.

도연, 즉 요광효의 나이는 올해 여든 다섯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신도 어려울 노령(老齡)이지만 여전히 정정해서 조정의 중요한 사안에는 대부분 관여해오고 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의 자객이 동원된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일 거예요."

"대규모? 자객이 몇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섭대낭의 이어진 말에 요문천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최소한 오십 명 이상이었다고 해요. 백 명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도 하구요."

"오십 명이 넘는 자객이 북경에 잠입하다니...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요문천도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인 만큼 치안이 아주 엄중하다.

그런 북경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자객이 동시에 잠입한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객들 중 태반은 현장에서 위사들에게 척살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자객들은 생포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자결을 했다네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요문천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걸 보면 아직 잡히지 않은 자객들이 있는 것같고...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오늘 밤 못 돌아오시겠네!"

섭대낭의 품에 안긴 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정하다고는 해도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부친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 규모의 자객들을 동원할 자라면...!"

"금의위와 동창에서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요문천의 말을 섭대낭이 이어 받았다.

"토곤! 토곤 타이시(太師)...!"

요문천은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시, 즉 태사(太師)는 몽고족의 군 사령관의 칭호다.

"징기스칸의 정통 후계자인 푼야스리(木雅失里)를 암살한 후 대칸(大汗)을 자칭하고 있는 그 효웅이 또 사단을 벌렸겠군!"

요문천은 부친으로부터 들은 토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본래 몽고족의 지도자인 대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핏줄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

이를 <징기스칸의 법>이라고 하는 바,

몽고족 내에서 아무리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자라도 황금씨족이 아니면 타이시가 되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헌데 토곤은 징기스칸, 정확히는 쿠빌라이의 마지막 후손인 푼야스리를 살해한 후 스스로 대칸을 자처하고 있다.

물론 오이라트 외의 다른 몽고 부족들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몽고족 내에서는 격심한 내분이 일어난 상태다.

 

"토곤의 짓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번에 그자가 동원한 자객들은 좀 특이하다고 해요."

섭대낭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을 이었다.

"특이하다니 어떤 면이...?"

요문천은 고개를 조금 돌리며 물었다.

"자객들이 몽고족 출신이 아니라 동영(東瀛)의 인자들이었다는 거예요."

섭대낭은 자신의 가슴에 코를 문지르는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인자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동쪽 섬나라의 마귀들이잖아."

섭대낭의 향긋한 살 냄새를 맡던 요문천이 흠칫 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본다.

"맞아요. 잡혀 죽었거나 도망칠 수 없자 망설이지 않고 자살을 한 자객들은 모두 왜국(倭國)의 인간들이었대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아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젖아들의 작은 몸짓, 목소리 한마디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섭대낭이었다.

"동영의 인자들을 고용하다니... 토곤이 제법 머리를 굴렸군!"

섭대낭의 부드러운 입술을 이마에 느끼면서도 요문천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 명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토곤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세력이다.

당연히 오이라트의 도발에 대한 대비는 치밀하다.

그래서 몽고족 출신 자객들이 들키지 않고 대규모로 북경에 잠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몽고족이 아닌 다른 종족의 북경 출입은 비교적 자유스럽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방(異邦)에서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곤은 그것을 노리고 몽고족이 아닌 동영의 인자들을 동원하여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 오늘밤은 저와 함께 주무시도록 해요."

섭대낭이 요문천의 머리를 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 그럴까?"

섭대낭의 말에 요문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 요문천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섭대낭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

섭대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맡아 기르면서 한시도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기를 낳은 직후 잃어버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문천도 그런 섭대낭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라왔다.

진짜 어머니라면 적당한 시기에 아들을 분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헌신만 할 줄 하는 유모인지라 섭대낭은 요문천이 다 큰 후에도 자신의 품에서 밀쳐내지 않았다.

요문천 역시 무슨 요구든 들어주는 섭대낭이 마냥 좋아서 그녀의 치마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문천은 잘 때도 반드시 섭대낭의 품에 안겨야만 잠이 들곤 했다.

장가를 가도 충분할 나이인 요문천이 여전히 유모인 섭대낭과 동침하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들이 떠돌았다.

명문가의 또래들은 이미 다 장가를 갔다.

반면 요문천이 여전히 혼자 몸인 것도 섭대낭의 봉사 덕분에 딱히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하지만 섭대낭과 요문천은 어디까지나 유모와 젖아들의 관계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혹과 달리 요문천과 섭대낭은 늘 동침을 해도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문천과 섭대낭의 순수한 동침도 일 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섭대낭이 거부해서가 아니라 요문천쪽에서 자진하여 혼자 자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성숙한 남자라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핏덩이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섭대낭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문천은 자진해서 섭대낭과 떨어져 자게 되었다.

물론 그 이유를 섭대낭도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기특하기도 해서 그날부터 섭대낭은 요문천을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방을 쓴 지 일 년여만에 섭대낭과 다시 동침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선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요문천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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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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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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