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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상부 소부주

 

 

 

처음에는 살의(殺意)가 불끈 치밀었다.

누군가 자신의 순결한 몸을 색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는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절색이다!> 라고 외친 한마디에 온전히 감탄만이 깃들어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철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낸 인물을 보았다.

이장(二丈;6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젊은 서생이 눈을 치뜬 채 그녀를 보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채 안되어 보인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원래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

추호의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은 서생이 유복한 가정에서 근심없이 자랐음을 보여준다.

(지로가 잘 자라면 저자처럼 되겠구나.)

그것이 젊은 서생을 보는 순간 느낀 철접의 감상이다.

호기심과 경탄으로 가득한 젊은 서생의 눈이 웃고 있다.

진지하면서도 순수하여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이다.

젊은 서생 뒤에는 벽처럼 보이는 존재가 서있다.

처음에는 남자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여자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육척(六八;180센티)을 훨씬 넘는다.

젊은 서생의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다.

체격 역시 당당해서 철접으로 하여금 남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이가 마흔 살 언저리,

사내를 압도하는 체격을 지녔지만 거녀(巨女)의 얼굴은 추하지 않다.

추하기는커녕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윤곽이 깊고 뚜렷하며 눈동자에는 푸른색이 감돈다.

거녀의 몸에는 아마도 색목인(色目人)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녀의 머리카락도 완전히 검지 않고 붉은 색을 띄고 있다.

(고수로구나.)

철접은 푸른색을 띤 거녀의 눈으로 언뜻 번갯불같은 섬광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미련하게 보이는 거녀의 몸에 측량불가의 심후한 공력이 깃들어있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죽일 수 있을까?)

인자의 본능으로 철접은 자연스럽게 거녀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으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간단히 압살(壓殺) 당할 것이라는 게 철접이 내린 판단이었다.

(중원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고수도 많구나. 일개 호위가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철접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자신들이 척살을 시도할 황제의 주변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소생이 초면에 결례를 했습니다."

젊은 서생이 포권을 하며 말을 건네 철접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불쾌하셨다면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진지한 사과다.

서생이 사과하는 말을 들은 철접은 마음에서 불쾌한 감정을 씻어낸다.

"딱히 결례를 하신 것도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철접은 건조한 어조로 말하다가 시선을 기루쪽으로 돌렸다.

기루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기루로 들어가던 한량들과 그들을 맞이하던 기녀들이 무엇때문인지 놀라고 당황하며 허둥거린다.

이어 그들을 헤집고 한명의 소년이 달려 나온다.

벗겨졌던 상의를 다시 입으며 기루에서 뛰쳐나오는 그 소년은 철접 자신의 동생 용차랑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다.

용차랑의 행색과 표정을 본 철접은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마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녀들이 다짜고짜 용차랑의 옷을 벗기려 들었을 테고,

기겁한 용차랑이 기방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울먹이며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뒤로 늙은 인자 시바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따라 나오고 있다.

"누나!"

기루를 뛰쳐나온 용차랑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철접을 발견하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달려온 용차랑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래. 싫으면 억지로 할 거 없다."

철접은 키가 작아 머리가 자기 어깨쯤에 닿는 어린 동생을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오늘밤에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도록 하자꾸나."

철접은 계집아이처럼 훌쩍이는 동생을 한 팔로 끌어안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며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칫 지금이 소동이 발단이 되어서 내일 있을 거사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가급적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한다.

용차랑을 안고 걸음을 옮기면서 철접은 한 쌍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은 거구의 여인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는 젊은 서생이었다.

 

***

 

요문천(姚聞天)은 승상부(丞相府)의 소부주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 승상(丞相)이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초기에는 송()나라의 관제를 본 따서 정무를 관장하는 승상이 있었고 승상부 역시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홍무제 주원장이 친정(親政)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승상 제도는 폐지되어 버렸었다.

관직에 승상이 없으므로 승상부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승상부가 분명 존재한다.

그리 된 이유는 승상부의 주인이 영락제의 치세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사(皇師) 도연(道衍)!

 

그가 바로 승상부의 주인이다.

도연은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안배가 없었다면 영락제는 여러 번왕(藩王)중 한명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영락제는 도연에게 어떤 공신에게 내린 것보다도 더 큰 상을 내리려고 했다.

문제는 도연이 무소유(無所有)를 본분으로 삼는 승려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속인이 아닌 도연에게 아무리 큰 상을 내려도 의미가 없다.

이에 영락제는 도연에게 속인의 신분으로 은상(恩賞)을 받으라 명하였다.

천자의 명인지라 도연도 어쩔 수 없이 환속하여 요광효(姚廣孝)라는 원래 이름을 쓰게 되었다.

승려의 신분을 버린 도연, 즉 요광효에게 영락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은상을 내렸다.

그중에는 북경 내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가 요광효에게 하사한 그 저택은 처음에는 요부(姚府)로 불렸었다.

하지만 요부라는 이름은 발음상 아름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광효는 실질적인 승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요부는 승상부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승상이라는 관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치하에서 승상부가 존재하게 된 연유였다.

그 승상부의 소부주가 요문천이다.

요문천은 요광효가 환속하기 전에 관계한 어떤 여인의 소생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열여덟 번째 생일을 치룬 요문천의 신분은 여러 왕가의 왕자들을 능가하여 영락제 슬하의 황자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요문천과 그의 아버지 요광효는 겸손한 성품이라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서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존귀한 신분이 요씨부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요문천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하늘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어젯밤, 요문천은 유모(乳母) 섭대낭(葉大娘)과 함께 환락가로 유명한 동대로를 구경하러 갔었다.

섭대낭은 요문천이 글 읽는 것만 좋아할 뿐 여자나 세상 물정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장소인 동대로에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깊은 밤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동대로는 순진한 책벌레 요문천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루들과 짙은 화장 때문에 그림에서 빠져나온 선녀처럼 보이는 기녀들의 고혹한 자태는 소년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요문천은 동대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그 여인의 자태는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호객을 하는 기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문천은 이내 그 여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기녀라면 결코 지닐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자태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었다.

 

"절색(絶色)이다!"

 

그 때문에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입 밖으로 내놓게 되었다.

탄성을 들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돌아보었다.

순간 요문천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직감했다.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방금 전 물에 씻긴 백옥인 듯 깨끗한 얼굴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진다.

특히 가늘고 긴 여인의 두눈은 서늘한 빛을 흘려내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었다.

자신이 여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여인도 대답을 했던 것같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요문천이다.

여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재회를 기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요문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 직후 근처 기루에서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허둥대며 뛰쳐나오더니 여인의 품에 와락 안겼기 때문이다.

여인은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을 안고 달래며 현장을 떠났다.

그 모습에서 요문천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누이가 어린 동생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여인은 요문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여인의 모습은 요문천의 뇌리에서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병에 걸린 것같구나. 상사(相思)라는 불치의 병에...)

요문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눈에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그 신비한 여인의 자태만이 온통 뇌리에 떠돌 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 읽는 것조차 잊었으며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상태로 그 여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 차려라 요문천.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여인에게 홀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요문천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호르륵!

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호각과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어두워지는 북경의 거리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불빛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불과 횃불을 든 사람들이 떼 지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뭐지?)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쓰던 요문천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창밖을 보았다.

"벽돌 하나, 기와 한 장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단 한 놈의 자객도 놓쳐서는 안된다!"

"대역무도한 역적들을 놓치면 모두 칼을 물고 자결할 각오를 해라."

호르륵! 호륵! 삐익!

승상부 근처의 골목에서도 거친 고함과 호령들이 호각소리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온다.

(영락폐하께서 열병식(閱兵式)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행로에 사단이 생겼구나.)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던 요문천은 이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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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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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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