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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만나다!

 

 

 

(끝났다.)

사방에서 호장무사들과 번견들이 몰려들며 내는 소란을 들으며 철접은 체념했다.

(조원(組員)들이 몰살당할 때 함께 죽지 않은 건 중상을 입은 지로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시바타 일행이 지로를 피신시킨 곳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졌다.)

!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철접은 비수를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임무에 실패한 자객이 사로잡힐 경우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가엾은 어머니가 무로마치막부의 관병들에게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고문과 강간을 당하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철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다.

탈출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선택은 단 한가지뿐이다.

어머니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기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

(미안하구나 지로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철접은 겁 많은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수로 자신의 목을 그으려 했다.

그때였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

요문천이 기겁하며 달려들어 철접의 비수를 든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으려고 애쓰며 애원했다.

눈앞의 여자는 잔인무도한 자객이며 감히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대역죄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제 따위는 요문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 온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녀가 자살을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해도 무공에는 문외한인 요문천이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철접은 동영의 양대 인자파벌중 하나인 이가류의 당주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방해하지 마라."

철접은 왼손으로 요문천의 가슴을 쳐서 밀쳐내었고,

!”

콰당탕!

그 바람에 요문천은 옷장 밖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요문천을 밀쳐낸 철접은 다시 오른손에 든 비수로 자기의 목을 그으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 사람 살려!"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요문천이 갑자기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

비수로 목을 그어 자살하려던 철접은 갑작스러운 요문천의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였다.

"자객이다! 자객이 날 죽이려 한다!"

그 사이에도 요문천은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입에 대고 다급하게 외치고 있다.

(내가 자살하려던 것을 말리려던 자가 왜 갑자기...)

의아해하며 요문천을 보던 철접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 치떠졌다.

그녀는 비로소 본 것이다.

요문천이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두눈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구나!)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여자답게 철접은 순간적으로 요문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 요문천은 자신을 인질로 잡으라고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리 닥쳐라!"

요문천의 의도를 깨달은 철접도 짐짓 앙칼지게 고함을 지르며 옷장 밖으로 나섰다.

중상을 입고 시바타등에게 호송되어 간 동생의 안위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이용해야만 한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요문천은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며 철접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일어섰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허튼 짓을 하면 목을 따버리겠다!"

철접도 더욱 크게 목청을 높이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요문천의 울대에 비수를 대었다.

그 직후였다.

"여기다!"

"도망 친 자객이 소부주님의 거처에 숨어있다!"

콰창! 퍼펑!

사방의 창문과 벽이 박살나며 십여명의 무사들이 요문천의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내로 돌입한 무사들의 절반쯤은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이었지만 나머지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다.

단단하게 묶은 포승줄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그 비단 옷의 관인들이 바로 금의위의 위사(衛士)들이다.

개개인이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의 무공을 지닌 금의위 위사들은 그 집요함과 냉혹한 행사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이런...”

... 소부주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실내로 뛰어든 직후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급히 멈춰 섰다.

가슴을 황금색 보검에 관통당한 철접이 왼손으로는 요문천의 어깨를 잡은 채 오른손에 든 비수를 요문천의 울대에 대고 있다.

요문천의 목에는 이미 베어진 상처가 생겨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다.

누가 봐도 요문천이 철접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 이런! 소부주께서 인질로 잡혔다!"

"조심하라! 소부주께서 다치면 안된다!"

방안으로 뛰어들었던 호장무사와 금의위 위사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이 누구인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황사 요광효의 외아들이 아닌가?

요문천은 영락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 요문천의 몸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호장무사들은 물론이고 금의위 위사들 역시 목을 내놔야하는 상황이다.

"소부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하들이 구해드리겠습니다!"

"계집! 그분께 위해를 가하면 사지를 찢어죽이겠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댄 철접이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 그들 앞으로 나온 때문이다.

(이자가 영락제의 황사이며 명나라 조정의 사실상 승상인 요광효의 외아들 요문천이었구나.)

철접도 비로소 요문천의 신분을 알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문천이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승상부의 소부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 소부주님께서 죄인에게 인질로 잡히셨다!”

그 사이에 요문천의 거처 주변으로 몰려들던 수십명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입에서도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창문과 벽을 통해서 철접이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때문이다.

빨리... 빨리 마님께 상황을 보고하라!”

입조(入朝)하신 승상께도 파발을 띄워라!”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 몇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현장을 떠난다.

섭대낭과 요광효에게 변고를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 살려주세요! ... 이 여자는 흉악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벌써 제 목에 상처를 내었다구요."

요문천은 철접에게 떠밀려 부서진 벽쪽으로 다가가며 짐짓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하여간 귀한 집 도련님들이란...!)

(명색이 사내면서 험한 일 좀 당한다고 벌벌 떠는 꼴이라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요문천의 모습에 금의위 위사들은 내심 혀를 찼다.

"길을 열어라!"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서 부서진 벽쪽으로 접근하며 차갑게 외쳤다.

그에 따라 철접 앞쪽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건물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밀려나갔다.

"이 샌님을 살리고 싶다면 날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철접은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바짝 들이댄 채 건물 밖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별 수 없다. 승상각하의 유일한 핏줄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좌우로 물러서며 이를 갈았다.

(됐다!)

앞쪽을 가로 막고 있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무사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며 철접은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잘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녀는 요문천을 앞세운 채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대담한 계집이로군! 감히 대명제국의 심장부에서 이런 분탕질을 벌이다니...>

 

누군가의 장중한 음성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를 천둥처럼 뒤흔들었다.

(그자다!)

순간 철접의 가늘고 긴 눈이 차가운 살의를 뿜어냈다.

만일 살아남는다면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쿠오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에 허공으로부터 한 명의 노인이 마치 산 하나가 통 채로 하강하듯 장중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뒷짐을 짚은 자세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노인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관운장(關雲長;관우)을 연상케 한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려한 금포(錦袍)를 걸친 노인의 등에는 비어있는 검갑(劍匣)이 짊어져 있다.

화악!

이윽고 금포노인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건물 앞의 정원 일대가 강렬한 돌풍을 휩싸인다.

"영반(領班)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뇌()영반님!"

금포노인이 내려서자 금의위 위사들이 아연긴장한 모습으로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인다.

(신비각 사대영반의 서열사위 금검존(金劒尊) 뇌극형(雷極形)!)

바르르!

요문천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철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비각이 무섭긴 무섭구나. 냉혹 비정하기로 소문난 동영의 인자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니...!)

그 떨림을 느낀 요문천은 새삼 신비각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요문천은 지금 자신들 앞에 내려선 금포노인을 잘 알고 있다.

신비각의 사대영반은 정기적으로 승상부를 방문하여 요광효에게 업무보고를 해왔다.

요문천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안면을 텄었다.

금검존 뇌극형은 칠십을 넘긴 나이지만 신비각 사대영반 중에서는 가장 젊다.

비록 나이 때문에 사대영반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긴 해도 금검존이 검법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 세상의 평판이다.

바로 그 금검존 뇌극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내 허락도 없이 당신네 금의위 위사들을 이미 승상부 내에 진입시켰다고?”

섭대낭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통령! 당신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가요?”

대청 안에는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을 비롯하여 십여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숨조차 크게 못 쉬고 있었다.

키가 육척이 넘어 보통 사내들을 압도하는 체격을 지닌 섭대낭의 몸에서 폭풍같은 살기가 터져 나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때문이다.

붉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수초처럼 일어나 흩날리고 벽안(碧眼)에서는 푸른 벼락이 치달린다.

(과연 한 때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벽혈마희(碧血魔姬)답구나.)

섭대낭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금의위 부통령답게 곽산해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무공 역시 신비각 사대영반을 제외하면 황실 내에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산해는 섭대낭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 거녀는 성정(性情)이 불같아서 일단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천살지기(天殺之氣)를 타고 태어난 이런 류의 인간과는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싸움이 붙게 되면 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는 기필코 피를 보는 격렬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땅히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했사오나... 역적의 흔적이 승상부 담장 안으로 이어진지라...”

곽산해는 곁눈질로 섭대낭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닥쳐요! 아무렴 나와 본부의 식솔들이 숨어든 쥐새끼 한 마리 처리 못할 것같았나요?”

곽산해의 변명은 이어진 섭대낭의 분노서린 일갈에 파묻혀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급한 마음에 이 암표범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같구나.)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섭대낭의 분노와 살기를 느끼며 곽산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만에 하나 당신들이 오판을 하여 본부에 난입한 것으로 밝혀지면...”

이를 갈며 곽산해를 노려보던 섭대낭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곽산해의 얼굴도 얼어붙듯이 굳어졌다.

 

<소부주... 자객... 인질...>

 

백여장 쯤 떨어진 곳에서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고함소리들이 섭대낭과 곽산해의 귀로 파고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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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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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옷장 속의 미녀

 

 

 

(도련님과 오랜만의 동침이라 어색하겠구나.)

섭대낭도 주책맞게 가슴이 뛰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 훼방꾼이 끼어들었다.

"마님! 죄송합니다."

문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섭대낭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 맞은 표정으로 문쪽을 돌아보았다.

"금의위에서 승상부도 수색을 해야 하니 위사들의 진입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자객들 중 달아난 자의 흔적이 승상부 근처에서 사라졌다면서..."

문밖의 인물이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인물은 승상부의 경비를 책임지는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의 수령인 석호륜(石虎倫)이었다.

"금의위 따위가 감히..."

석호륜의 보고를 받은 섭대낭이 불끈 화를 낸다.

그러자 섭대낭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한다.

요문천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유모이지만 일단 화를 내면 나찰이나 야차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 속하들도 안된다고 했지만 금의위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서..."

문 밖의 석호륜이 아연긴장한 채 더듬거린다.

 

승상부의 주인인 요광효에게는 처()도 첩()도 없다.

비록 영락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환속을 하긴 했지만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는 않은 것이다.

요광효가 환속을 하고도 여전히 승려처럼 사는 걸 보다 못한 영락제는 종종 궁녀들 중 미녀를 골라 하사하곤 했다.

하지만 요광효는 영락제가 보낸 여자들을 일단 받았다가 다른 사내들과 짝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래서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이 승상부의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모라면 하녀나 다름없는 천한 신분이다.

헌데 어쩐 일인지 요광효는 아들의 유모인 섭대낭을 매우 존중한다.

자연스럽게 승상부의 사람들도 섭대낭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승상부에서 섭대낭에게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요광효와 요문천 부자뿐인 것이다.

 

"금의위에서는 어떤 인간이 책임자로 왔는가요?"

섭대낭이 문쪽을 노려보며 물었다.

"금의위의 부통령(副統領) 곽산해(郭山海)가 마님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석호륜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대답했다.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은 한 때 강북 일대를 주름잡던 호걸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부터 섭대낭의 준엄한 기세에 압도당한 석호륜은 섭대낭의 목소리만 들어도 한없이 위축되곤 한다.

"알았어요. 곧 갈 테니 그자를 대청으로 들이세요."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석호륜이 멀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대청에 다녀올 동안 도련님 혼자 계셔야겠어요."

요문천을 돌아보며 말하는 섭대낭의 얼굴은 언제 살기등등했는가 싶게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요문천은 대답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호장무사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밖으로 나가지는 마세요."

섭대낭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요문천의 서재를 떠났다.

(역시 유모밖에 없어.)

닫히는 문을 보며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동대로에서 본 여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대낭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말고 오늘 읽을 계획이었던 책들이나 마저 읽자.)

요문천은 탁자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털썩!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요문천의 귀에 들렸다.

요문천이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은 서재와 연결된 침실쪽이다.

침실 문은 닫혀있는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창문을 닫아놔서 바람이 들이칠 리는 없는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침실 문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이 문을 열고 들어간 침실은 어둑하다.

아직 잠자리에 들 때가 안되어서 불을 켜놓지 않은 때문이다.

침실은 승상부 소부주의 잠자리답게 넓고 화려하다.

침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침대는 기둥과 지붕이 달려있다.

매우 넓어서 대여섯명이 함께 자도 될 크기의 침대다.

벽에는 여러 개의 옷장이 세워져 있으며 한쪽에는 욕실로 통하는 문이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둑한 침실에 전에는 맡아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다.)

요문천은 그 냄새가 누군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비린내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창문들은 모두 닫혀있다.

하지만 누군가 다친 몸으로 침실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호장무사들을 불러야할까?)

두려움으로 머리끝이 쭈뼛거린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호기심에 요문천은 찬찬히 침실 바닥을 살폈다.

곧 요문천은 침실 바닥에 옅은 얼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히 지우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다.

핏자국은 창문으로부터 여러 개의 옷장들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옷장 속에 누군가 숨어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핏자국의 흔적이 이어진 옷장으로 다가갔다.

(아마 영락폐하를 습격했다가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일 것이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의 손은 이미 옷장의 문을 열고 있다.

번쩍!

옷장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섬광이 요문천의 목으로 날아든다.

하지만 눈을 치뜬 요문천은 자신의 목을 그어오는 새파란 칼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옷이 가득 걸린 어둑한 옷장 안쪽에 한명의 여인이 숨어 있다가 짧은 칼을 휘두르고 있다.

옷장 속이 어둑하다.

게다가 몸에 걸친 옷도 피로 물들어 있어 여인의 새하얀 얼굴만이 또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출혈이 심한 탓에 한층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다.

분칠을 한 것같은 그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어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 여자다!)

눈을 치뜬 요문천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진다.

지난밤 한번 본 후로 하루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여인!

그녀의 얼굴이 믿어지지 않게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

 

크르르르!

갑자기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버둥거린다.

"이놈들이 왜 이래?"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인 진준(陳俊)과 여구(呂九)는 갑자기 날뛰는 번견(番犬;경비견)들의 목줄을 잡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번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순찰을 돌던 곳은 다른 저택과 맞닿은 담장 근처였는데

그곳의 관상수와 꽃잎에 핏방울이 점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던 자객이 승상부에 들어왔다!)

진준과 여구의 안색이 와락 굳어졌다.

그와 함께 그들은 반사적으로 호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

 

"절색(絶色)이다!"

 

지난밤에 들었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철접의 귀를 울렸다.

철접은 금의위 위사들이 집요한 추적을 피해 어느 화려한 저택으로 숨어들었었다.

헌데 그 저택의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 내부의 옷장에 몸을 숨긴 직후 누군가 다가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자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 침묵시켜야만 한다.

철접은 옷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병(小柄;일본식 비수)으로 그자의 목을 빠르게 찔러갔다.

바로 그 순간 지난밤에 들었던 <절색(絶色)이다!> 라는 외침이 해빙기에 갈라지는 얼음처럼 쨍하게 철접의 머리 속을 울렸다.

양손으로 옷장의 문을 활짝 연 해맑은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얼굴을 언제 어디서 봤는지가 순간적으로 철접의 뇌리에 떠올랐다.

지난밤 동생 용차랑을 들여보냈던 기루 앞에서 본 젊은 서생이다.

(안돼!)

철접은 찔러가던 소병을 필사적으로 틀었다.

!

간발의 차이로 철접이 내지른 소병의 끝이 서생의 목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비수 끝에 스친 목옆의 살갗이 쩍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생의 얼굴에 피어오른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양손으로 옷장을 연 요문천과 그에게 비수를 내지른 자세인 철접의 몸이 함께 굳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상황이 사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이 여자를 다시 만났다.)

요문천은 목이 베인 상처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갔던 여인이 기적처럼 바로 눈앞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자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철접 역시 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훑으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 보았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사내..

그를 넓디넓은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전율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마치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숨 몇 번 들이키고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삐익! !

돌연 들려온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두 사람을 몽환경(夢幻境)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쪽이다!"

"자객의 흔적이 소부주님의 거처 은천각(恩天閣)쪽으로 이어진다."

"빨리 마님께 알려라!"

컹컹! !

호각소리에 이어 여러 명이 다급히 지르는 고함 소리와 사나운 개의 짖음이 들려왔다.

승상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늘 조용하던 요문천의 거처 일대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여자가 내 거처로 숨어들어온 흔적이 호장무사들에게 발견되었구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장무사들이 자신의 거처로 몰려들며 지르는 고함을 통해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영락제를 습격했던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요문천의 눈에 비로소 여인의 몸 상태가 들어왔다.

철접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마 북경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위장한 채 기다리다가 자금성으로 귀성하던 영락제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철접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탓에 원래는 희던 옷이 피로 물들어 혈의(血衣)로 변해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장의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을 정도였다.

가장 심각한 상처는 왼쪽 가슴에 나있다.

한 자루 금빛으로 번쩍이는 검이 철접의 가슴에 박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가슴이, 그것도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왼쪽 가슴이 검에 관통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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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지러운 밤

 

 

 

영락제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 몽고족에 대한 친정(親征)을 감행했었다.

이를 삼리오출(三犁五出)이라 한다.

삼리는 몽고족의 근거지를 세 번 쳐부순 것을 의미하고 오출은 다섯 번 고비사막을 넘은 것을 뜻한다.

다섯 번의 원정은 매번 대상이 바뀌긴 했다.

그래도 몽고족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대한 오이라트(瓦喇, 또는 衛拉)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달단(韃靼)과 함께 몽고족의 양대 세력인 오이라트에는 몇 년 전 토곤(妥爟)이라는 젊은 영걸이 나와서 대원(大元)제국의 재건을 공공연히 주창하고 있다.

이에 영락제는 세 번째 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오십만 대군을 북경 북쪽 팔달령(八達嶺) 근처에 소집하여 열병식을 갖었었다.

열병식은 정오 무렵에 진행되었었다.

그후 자금성으로 돌아오던 영락제의 귀성(歸城) 행렬을 자객들이 습격했을 것이다.

 

(딱히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신비각(神秘閣)의 경호를 받으시는 상태에서는 세상 어떤 자객도 영락폐하의 존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을 테니...)

승상부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요문천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숱한 적이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벼온 영락제다.

그 때문에 신변 경호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수많은 위사들이 영락제 주변에 포진해있다.

특히 암중에서 황제를 지키는 비밀조직 신비각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신비각의 경호를 받는 영락제가 위험해지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신비각은 주원장을 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후 원() 황실이 수집한 숱한 무공비급과 영약들을 신비각에 하사했었다.

덕분에 신비각에 가입한 무림인들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신비각의 실력자들이 몇 명만 세상으로 나가도 단번에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판이다.

(어쩌면 당대의 신비각 각주는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요문천은 신비각과 함께 아버지 요광효를 떠올렸다.

<정난의 변>에서 신비각은 중립을 지켰다.

문관을 우대하고 군부를 홀대한 건문제의 정책이 원래가 무사들인 신비각 구성원들의 반감을 산 때문이다.

신비각이 침묵해준 덕분에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신비각을 전보다 더 중시하였으며 자신의 황사 요광효에게 신비각의 관리를 맡겼었다.

관례에 따라 신비각의 각주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공표되지 않는다.

다만 사대영반(四大領班)이라는 네 명의 기인이 숫자 미상의 신비위사(神秘衛士)들을 직접 지휘한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래도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며 공신인 요광효가 신비각의 각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다.

요문천이 북경의 밤거리를 들썩이게 만드는 소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셨지요 도련님?"

드륵!

요문천의 뒤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키가 육척이 넘는 그 여인이 들어서자 그리 좁지 않은 서재가 꽉 차는 느낌이 든다.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임에도 균형 잡힌 몸매와 이목구비가 깊고 뚜렷하여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요문천의 유모 섭대낭이다.

"놀라긴 뭘..."

요문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유모를 돌아보았다.

섭대낭은 몇 달 전 마흔 살을 넘긴 중년의 나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정심한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內家高手)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색목인의 혈통인 섭대낭은 젊은 시절 강호를 뒤흔들어놓았던 여걸(女傑)이었다.

헌데 어떤 일을 계기로 무림에서 은퇴하고 요문천의 유모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전적으로 기르고 보살펴온 것이 섭대낭이다.

유모라는 이름 그대로 섭대낭은 요문천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서 길렀다.

요문천을 만나기 얼마 전에 섭대낭도 출산을 했었지만 곧 아기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퉁퉁 불어 오른 젖을 요문천에게 물리며 섭대낭은 아기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섭대낭에게 요문천은 단순한 젖아들이 아니다.

낳자마자 잃은 아기의 대신이었다.

자연히 그녀는 요문천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요문천에게 있어서도 섭대낭은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사실상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병약하게 태어난 요문천이다,

섭대낭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던 모양이지?"

요문천은 다시 창밖을 돌아보며 유모에게 물었다.

"저도 아직은 자세한 경과를 듣지는 못했는데... 열병식을 마치고 귀성하시던 영락폐하의 행렬을 일단의 자객들이 습격했다는군요."

다가온 섭대낭은 자연스럽게 요문천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물론 어림없는 시도였겠지?"

요문천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섭대낭의 큼직한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거구에 어울리게 크지만 길고 갸름하여 아름답기도 한 손이다.

"영락폐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으셨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네요. 승상께서도 급히 입궐(入闕)하셨구요."

섭대낭은 사랑스러운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뭘 직접 나서시나? 자객들의 추포(追捕)는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에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

요문천은 혀를 찼다.

도연, 즉 요광효의 나이는 올해 여든 다섯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신도 어려울 노령(老齡)이지만 여전히 정정해서 조정의 중요한 사안에는 대부분 관여해오고 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의 자객이 동원된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일 거예요."

"대규모? 자객이 몇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섭대낭의 이어진 말에 요문천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최소한 오십 명 이상이었다고 해요. 백 명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도 하구요."

"오십 명이 넘는 자객이 북경에 잠입하다니...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요문천도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인 만큼 치안이 아주 엄중하다.

그런 북경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자객이 동시에 잠입한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객들 중 태반은 현장에서 위사들에게 척살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자객들은 생포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자결을 했다네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요문천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걸 보면 아직 잡히지 않은 자객들이 있는 것같고...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오늘 밤 못 돌아오시겠네!"

섭대낭의 품에 안긴 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정하다고는 해도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부친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 규모의 자객들을 동원할 자라면...!"

"금의위와 동창에서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요문천의 말을 섭대낭이 이어 받았다.

"토곤! 토곤 타이시(太師)...!"

요문천은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시, 즉 태사(太師)는 몽고족의 군 사령관의 칭호다.

"징기스칸의 정통 후계자인 푼야스리(木雅失里)를 암살한 후 대칸(大汗)을 자칭하고 있는 그 효웅이 또 사단을 벌렸겠군!"

요문천은 부친으로부터 들은 토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본래 몽고족의 지도자인 대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핏줄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

이를 <징기스칸의 법>이라고 하는 바,

몽고족 내에서 아무리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자라도 황금씨족이 아니면 타이시가 되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헌데 토곤은 징기스칸, 정확히는 쿠빌라이의 마지막 후손인 푼야스리를 살해한 후 스스로 대칸을 자처하고 있다.

물론 오이라트 외의 다른 몽고 부족들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몽고족 내에서는 격심한 내분이 일어난 상태다.

 

"토곤의 짓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번에 그자가 동원한 자객들은 좀 특이하다고 해요."

섭대낭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을 이었다.

"특이하다니 어떤 면이...?"

요문천은 고개를 조금 돌리며 물었다.

"자객들이 몽고족 출신이 아니라 동영(東瀛)의 인자들이었다는 거예요."

섭대낭은 자신의 가슴에 코를 문지르는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인자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동쪽 섬나라의 마귀들이잖아."

섭대낭의 향긋한 살 냄새를 맡던 요문천이 흠칫 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본다.

"맞아요. 잡혀 죽었거나 도망칠 수 없자 망설이지 않고 자살을 한 자객들은 모두 왜국(倭國)의 인간들이었대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아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젖아들의 작은 몸짓, 목소리 한마디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섭대낭이었다.

"동영의 인자들을 고용하다니... 토곤이 제법 머리를 굴렸군!"

섭대낭의 부드러운 입술을 이마에 느끼면서도 요문천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 명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토곤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세력이다.

당연히 오이라트의 도발에 대한 대비는 치밀하다.

그래서 몽고족 출신 자객들이 들키지 않고 대규모로 북경에 잠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몽고족이 아닌 다른 종족의 북경 출입은 비교적 자유스럽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방(異邦)에서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곤은 그것을 노리고 몽고족이 아닌 동영의 인자들을 동원하여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 오늘밤은 저와 함께 주무시도록 해요."

섭대낭이 요문천의 머리를 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 그럴까?"

섭대낭의 말에 요문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 요문천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섭대낭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

섭대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맡아 기르면서 한시도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기를 낳은 직후 잃어버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문천도 그런 섭대낭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라왔다.

진짜 어머니라면 적당한 시기에 아들을 분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헌신만 할 줄 하는 유모인지라 섭대낭은 요문천이 다 큰 후에도 자신의 품에서 밀쳐내지 않았다.

요문천 역시 무슨 요구든 들어주는 섭대낭이 마냥 좋아서 그녀의 치마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문천은 잘 때도 반드시 섭대낭의 품에 안겨야만 잠이 들곤 했다.

장가를 가도 충분할 나이인 요문천이 여전히 유모인 섭대낭과 동침하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들이 떠돌았다.

명문가의 또래들은 이미 다 장가를 갔다.

반면 요문천이 여전히 혼자 몸인 것도 섭대낭의 봉사 덕분에 딱히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하지만 섭대낭과 요문천은 어디까지나 유모와 젖아들의 관계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혹과 달리 요문천과 섭대낭은 늘 동침을 해도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문천과 섭대낭의 순수한 동침도 일 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섭대낭이 거부해서가 아니라 요문천쪽에서 자진하여 혼자 자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성숙한 남자라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핏덩이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섭대낭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문천은 자진해서 섭대낭과 떨어져 자게 되었다.

물론 그 이유를 섭대낭도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기특하기도 해서 그날부터 섭대낭은 요문천을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방을 쓴 지 일 년여만에 섭대낭과 다시 동침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선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요문천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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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七 章

 

               찬란한 太陽

 

 

 

어느 분이 오셨소?”

뇌옥 안쪽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염무위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대꾸했다.

노부일세!”

이어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형님!”

태상장로님!”

철문 안쪽에 갇혀 있던 백여 명의 인물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이검엽도 염무위를 따라 들어와 그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염무위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육십 세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한 눈에 봐도 그들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홍의와 청의를 입은 백령공 또래의 노인은 특출해보였다.

홍령공(紅靈公)과 청령공(靑靈公),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백 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천외천궁의 진정한 힘은 천존군영대 따위의 젊은 놈팽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노장들이다. 이들의 힘은 천존군영대보다 십() 배는 강한 것이다!)

이검엽은 그들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때 염무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우님들에게 이분 천황성수 이공자를 소개하겠소.”

! 천황성수(天荒聖手)!”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검엽에게 모아졌다.

그리고 이검엽을 본 순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영웅(英雄),

젊은 기협(奇俠)으로 자신들의 난국을 타개해줄 인물,

그의 참() 면목을...

이검엽은 정중히 포권했다.

이검엽이라 하외다. 지도와 편달 있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늙은이들이야 말로 가르침 있으시길 바라오.”

청령공과 홍령공이 중인들을 대표하여 인사를 했다.

! 모두 앉게나.”

염무위의 말에 중인들은 이검엽 주위로 몰려와 앉았다.

그리고 나직하고 비밀스런 대화가 오갔다.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자는 없으리라.

그 사이 중인들의 눈길은 마치 빨려들 듯 이검엽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절대적인 신망(信望)을 담은 채,

 

***

 

그르르... !

석문(石門)이 열리며 들어서는 인물,

이검엽이었다.

작은 뇌옥(牢獄) 안에는 여러 가지 형구(刑具)가 놓여 있고,

송진 횃불 하나가 그을음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뇌옥이라기보다는 형장(刑場)을 연상시키는 곳,

그곳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검엽이 들어선 문의 맞은편 석벽에 전라여인(全裸女人) 한명이 쇠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여인의 나신,

섬세한 곡선이 두드러진 훌륭한 몸매였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몽클한 것 같은 감촉이 시각(視覺)만으로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백옥지신(白玉之身),

특히 그녀는 피부가 백옥처럼 고왔다.

하지만 그 백옥지신은 지금 끔찍한 상흔만이 남아 있었다.

멋대로 휘갈긴 듯한 수많은 채찍 자국,

살갗이 타들어간 인두자국 등,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그녀의 나신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불쌍한...”

이검엽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여인이 꿈틀했다.

이어 그녀는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더러운 놈들! 차라리 죽여다오!”

휴우...”

이검엽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쳐들었다.

스스스...!

그러자 쇠사슬은 모래와 같이 부서져 내리고

여인의 몸은 둥실 떠오라 이검엽의 팔에 안겼다.

... 누구?”

그제야 여인은 흠칫하여 힘겹게 눈을 떴다.

나요 검지(劍芝)!”

이검엽의 나직한 부름,

... 공자님!

여인은 바로 검황종(劍皇宗)의 손녀인 매검지(梅劍芝)였다.

공자님! 공자님! 흑흑...”

그녀는 이검엽의 품에 안긴 채 오열을 거듭했다.

가엾은 것... 섣불리 천외천궁주에게 달려들 것을 걱정했더니...”

이검엽이 다독이자 그녀는 오열과 함께 부르짖었다.

흑흑... 참을 수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검엽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오빠가 누이에게 하듯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라. 검황종 노선배님의 원한은 내가 갚아줄 것이니...”

공자님...!”

매검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

 

심야(深夜),

화려한 전각(殿閣) 한 채가 달빛 아래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커억!”

전각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십여 명의 금의인들이 돌연 쓰러졌다.

------!

!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 직후,

스스스...!

마치 유령처럼 한 명의 백의인이 장내에 나타났다.

이검엽이었다.

금의인들이 쓰러져간 이유는 뻔했다.

이심제기(以心制氣).

그 가공할 무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검엽은 자기 집인 듯 유유히 걸어 전각으로 다가갔다.

(이곳에 금령시위대장인 금령무존(金靈武尊)이라는 자가 머문다고 했겠다!)

스르륵,...

그가 다가서자 전각의 문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누구냣!”

전각 안쪽에서 일성 냉갈이 터져 나왔다.

(역시 범상치 않은 자로군.)

이검엽은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다.

누군가 전각의 깊숙한 내실에 있으면서 입구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것만으로도 그 인물이 지닌 무공의 깊이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검엽은 태연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를 막는 자는 없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겠구나. 경호조차 거부하는 것을 보면...)

하나 둘 쯤이라도 있음직한 호신무사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전각 안,

이검엽은 그곳을 가로질러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화려한 침실,

한 명의 노인(老人)이 침대에서 내려와 이검엽을 맞이했다.

건장한 체구에 대추빛 안색, 수염을 길게 길러 의젓한 풍모를 풍기는 노인이다.

전설 속의 관운장(關雲將)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누군데 감히 본존의 처소에 난입하는가?”

노인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

하지만 노인은 이내 대경실색했다.

이검엽과 마주한 순간 가이 없는 창공(蒼空)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이검엽에게서는 거칠면서도 유연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대해와도 같은 기도가 느껴진다.

노인은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 귀하는 누구신가?”

그는 형용키 어려운 감정을 담은 시선으로 이검엽을 응시했다.

이검엽이 되물었다.

그대가... 금령무존이신가?”

노인, 금령무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한데 귀하는 누구신가?”

이어진 그의 질문에 이검엽은 나직이 대답했다.

천황(天荒)에서 온 사람이오.”

... 그렇다면 천... 천황존신(天荒尊神)이란 말인가?”

금령무존은 부르짖듯 되물었다.

천황에서 온 것은 확실하나 존신(尊神)이란 칭호는 과분하오.”

그러나 그 순간 금령무존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인물이 전설 속의 천황존신(天荒尊神)임을...!

그는 신음하듯 뇌까렸다.

으음... ...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그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전설...

 

중원(中原)이 한 가닥 신음조차 끊이고,

혼돈(混沌)의 혈야(血夜)가 억겁()을 지나려 할때,

돌연 한 줄기 외로운 그림자(孤影)!

천황(天荒)으로부터 오다.

절대금검(絶代金劍)의 광휘!

천세(天世)를 초월(超越)하고...

()을 꺾고 기()를 빼앗겼던 천만군협(千萬群俠)!

하나로 환호하며 우러러 받들다.

절대존명(絶代尊名)!

 

-----천황존신(天荒尊神)------

-----천황존신(天荒尊神)이시여-------

 

어느덧 금령무존은 사색이 되었다.

천황존신의 출현-------

전설은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천외천궁의 종말을 고()함이 아닌가?

그때 이검엽은 나직이 말했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그대를 제거해야겠소!”

------ !

쏴아아...!

순간 무형의 극강한 힘이 금령무존을 휩쓸었다.

...!”

금령무존은 부르르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일신의 공력을 모두 쏟아내어 맞섰다.

금령천강공(金靈天罡功)------!”

콰르릉...!

콰쾅------!

실로 엄청난 힘()이 실린 금광(金光)이 금령무존의 쌍장에서 폭출 되었다.

스스스...!

하지만 금령천강공은 마치 바다에 빠진 모래가루처럼 일시에 스러지고 말았다.

----- !”

동시에 그의 몸이 휘청했다.

분명 그는 멀쩡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내부가 완전히 박살이 나있음을,

그는 자신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 천황존신...! ,... 궁주는... 때를 잘못 타고 났다.”

------ !

말을 맺기도 전에 그의 몸은 고목이 쓰러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

이검엽은 묵묵히 돌아섰다.

무심한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담담하고 고요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곁에는 홍, , 백의 태상장로들이 와 있었다.

아연실색!

그들은 저마다 경악으로 인해 부르르 경련했다.

(금령무존... 궁주 다음가는 고수가 단 일초의 저항도 못해보고...!)

(놀랍다! 딱히 손을 쓰지도 않았거늘 기()로써 금령무존 정도의 고수를 일거에 제거하다니...)

이검엽은 경악에 찬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전각을 나섰다.

그러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궁주만 남았군!”

야공(夜空),

한 줄기 유성(流星)이 길게 꼬리를 그으며 서천(西天)으로 사라졌다.

마치 천예지(天刈芝)가 죽었던 밤처럼,...

 

X X X

 

아침이 되었다.

... !”

눈을 뜨자마자 단목운뢰(丹木雲雷)는 검미를 찌푸렸다.

기이하게도 궁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는 침상에서 일어서며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밖에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금령시위대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또 그 많던 시비들은 또 어디로 간 것인가?

문득 서늘한 봄바람이 그의 옷깃을 스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 혼자란 말인가? 천존군영대... 금령시위대... 전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였다.

그의 눈에 한 명의 청년이 휘적휘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깨끗한 백의(白衣)를 걸친 초탈한 용모,

허리에는 비스듬히 초라한 고검(古劍)을 걸고...

단목운뢰는 흠칫했다.

(묵령신검(墨靈神劍)! 저것이 어떻게...!)

그 사이 청년은 창문에 가까이 다가왔다.

단목운뢰는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탈하구나. 세속을 초월한 인물...!)

그때 청년이 정중히 포권했다.

궁주! 잠시 모시고 싶소이다.”

담담하고 낭랑한 음성,

단목운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했다.

기꺼이 응하리다.”

이어 그는 이내 의복을 단정히 갖춘 후 밖으로 날아 나갔다.

귀공의 성함은?”

그가 묻자 청년은 간단히 대답했다.

이검엽이라 하외다.”

단목운뢰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천황존신(天荒尊神)...!”

이검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과분한 칭호외다.”

그렇지 않소.”

단목운뢰는 고개를 저었다.

전설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귀공을 대하니 믿지 않을 수 없구료.”

이검엽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명호(名號)... 한때 스치는 춘풍같이 허망한 것... 무엇이던 상관이 있겠소이까?”

이윽고 두 사람(兩人)은 나란히 걸었다.

본인을 어디로 인도할 참인가?”

단목운뢰의 물음에 이검엽은 선선히 대답했다.

궁주를 뵙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소이다.”

단목운뢰는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때가 아닌 모양이군.”

체념에서인가?

단목운뢰는 분명 자신의 종말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초연했다.

()과 사()의 개념을 이미 초월한 듯,

이검엽과 단목운뢰,

그들 두 사람은 지금 한결같이 똑같은 심정이었다.

감정의 대립이라든가 살심(殺心) 따위,

그런 것들은 이순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십년지기(十年知己)인 양 그들은 온화한 미소를 지고 받을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묵묵히 걸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드넓은 연무장(鍊武場)이었다.

수천을 헤아리는 천외천궁도들이 연무장을 빽빽이 매운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단목운뢰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의 심리란... 조변모개와 같이 부지없는 것인 것 같소.”

궁주께서는 조금 더 일찍 그것을 깨달으셨어야 했소이다.”

이검엽의 말에 단목운뢰는 공허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그 말이 맞소. 동감하는 바요.”

두 사람은 천외천궁도들의 시선이 집중된 채 높은 대위로 올랐다.

이미 예정된 자신의 종말을 느낀 것일까?

단목운뢰는 허허롭게 웃었다.

허헛... 본인이... 형님을 천주산에서 시해하고 돌아와 보니... 천외신존이 남긴 백팔십(百八十) 개의 점토판 중 마지막 팔백십번째 점토판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소.”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토판에 숨겨진 이치를 궁주께서는 곧 보시게 될 것이외다.

알겠소. 그럼...!”

단목운뢰는 말했다.

천외존극신강(天外尊極神罡)이라는 것이외다. 천외천궁의 일천년(一千年) 정화가 실린 것이오!”

콰르르------- !

쿠르르...!

돌연 천지를 함몰시킬 듯 거창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이검엽을 덮쳤다.

그것은 집채만한 바위라도 돌개바람에 휘말린 지푸라기처럼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스스스...!

하지만 천외존극신강의 힘은 이검엽의 주위에 이르자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검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다.

단목운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 대단하구려! 손도 쓰지 않고 어떻게 천외존극신강의 역도를 흩어버린 것이오?”

이검엽은 무심히 대답했다.

대천황존신강(大天荒尊神罡)이라는 것이었소이다.”

그랬었군.”

단목운뢰는 두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천극굉연대천황(天剋轟然大天荒)마저 보고 싶구려!”

보여 드리리다!”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그는 천천히 절대금검을 뽑았다.

순간 찬란한 금광(金光)이 비무대를 가득 메웠다.

... 절대금검(絶代金劍)!”

단목운뢰는 놀라며 부르짖었다.

위잉-------!

츠츠츠츠...!

그 사이 절대금검은 이검엽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 ------!

------- !

일순 천외천궁 전체가 온통 휘황한 금광으로 뒤덮였다.

! 저럴 수가!”

단목운뢰는 꿈인 듯 정신없이 부르짖었다.

절대금검-------

그 자체가 허공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백 장(百丈)인가?

아니, 이백 장... 오백 장(五百丈)까지...!

아아!

천외천궁 전체가 거대한 절대금검에 짓눌리고 마는 것인가?

아니었다.

파츠츠... 츠츠... ...!

한 순간 그 거대한 검봉(劍峯)은 서서히 내려 꽂히고 있었다.

정확히 단목운뢰를 향해!

붕천극강(崩天剋罡)-------!”

단목운뢰는 사력을 다해 양손을 휘둘렀다.

콰르르릉-------!

꽈꽈------- -----!

태산이라도 허물어뜨릴 듯한 강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디작은 한 인간이 창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돌팔매질에 불과했다.

대자연(大自然)!

대우주(大宇宙)의 크나큰 이치!

그것에 어찌 인간이 대항하랴!

------ !

----- ------ !

거대한 검봉은 드디어 단목운뢰를 관통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거대하던 절대금검의 자취가 삽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장내에 남은 것은 두 자 여섯 치의 절대금검에 관통당해 비틀거리는 단목운뢰였다.

단목운뢰,

()의 종말을 장식하려 함인가?

그는 의미 깊은 한 마디를 남겼다.

... 자연... 을 상대하려 했으니... 나는... 천하제일의... 바보였... !”

푸스스...!

다음 순간 기이한 음향과 함께 단목운뢰의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추악한 생전(生前)의 야심과 함께 영원히 증발해 버린 것인가?

“...!”

“...!”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감히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열 자는 없었다.

휴우...!”

이윽고 이검엽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덩그렇게 남은 절대금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는... 너를 쓰는 일이 없기를...!”

이로써 모든 혈겁()은 종식되었다.

절대금검!

그 휘황한 광휘를 마지막으로...

와아-------!”

비로소 군웅들의 함성이 터졌다.

그들은 천지가 떠나갈 듯 소리 높여 외쳤다.

천황존신-------!”

천황존신이여------!”

천외천궁도들.

그리고 밤을 지새워 달려온 군협들은 환호에 거듭했다.

-------!

! ------!

그때 백, , 홍의 세 태상장로가 분분히 날아와 이검엽 앞에 꿇어 엎드렸다.

노신(老臣), 궁주님을 알현합니다!”

백령공의 손에는 찬연한 금빛 영부가 들려져 있었다.

 

<천궁지존령(天宮至尊令)>

 

하지만 이검엽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염공(苒公)...! 본인은 그것을 받을 수 없소이다.”

그러나 백령공 염무위는 의미있게 미소했다.

궁주께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들을 보십시오!”

염무위가 가리키는 것.

그것은 수많은 천외천궁도들이었다.

궁주님을 알현하옵니다!”

그들은 일제히 이검엽을 향해 대례(大禮)를 올리고 있지 않은가?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천외천궁주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진실로 본인을 난처하게 만드는구료...!”

이검엽은 씁쓸히 웃으며 천궁지존령(天宮至尊令)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천외천궁은 환호했다.

와아-------! 궁주님 만세-------!”

와아-------!”

천외천궁! 영원하라------!”

천황존신(天荒尊神)!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젊은 영웅(英雄)!

그는 천외천궁주로서 군림(君臨)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오빠------!”

상공-------!”

아우님...!”

군웅들 사이에서 여러 줄기의 왜영이 솟구쳣다.

무두가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태극신후.

그녀에게 안긴 자운(紫雲).

그리고 빙후(氷后)와 설미조(雪美藻).

또한,

매검지(梅劍芝).

그녀들은 일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와 이검엽을 둘러쌌다.

------- !”

------!”

끝없이 계속 될듯한 환성, 환성------!

하지만 멀찍이 뒤에 숨어 홀로 눈물을 흘리는 미녀(美女)가 한 명 있었다.

이공자님...!”

그녀는 무너지듯 쓰러져 오열했다.

흐느끼는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

그녀는 바로 단목자혜(丹木紫慧)였다.

 

찬란한 태양(太陽)이 솟는다.

창공(蒼空)을 향해 우뚝 솟은 아미금산(天外神山) 위로 찬란한 양광(陽光)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천황존신(天荒尊神)>

 

그의 이름도 그 태양처럼 영원히 무림사(武林史)에 기록되리라!

 

< 大 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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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쓰러진 劍聖

 

 

 

-개봉(開封),

 

천년고도 개봉부의 북쪽에는 대안산(大安山)이라는 산이 있다.

그다지 큰 산은 아니다.

하지만 개봉부에서 멀지 않고 경관이 수려하여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안산(大安山)의 남쪽 산록

두개의 야트막한 산봉을 에워싸고 거대한 석성(石城)이 있다.

청석(靑石)을 깎아 만든 삼 장 높이의 성벽이 십여 리에 걸쳐 뻗어 있다.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석성(石城).

석성(石城)의 안쪽.

두 산봉 사이의 넓은 분지에는 수백 채의 전각들이 처마를 맞대고 늘어 서 있다.

대해의 파도같이 줄지어 선 전각인 처마들...

곳곳에 벌려진 가산(假山) 정원...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널찍한 연무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로...

자금성의 규모로 방불케하는 웅장한 규모인 석성이다.

 

<천검성(天劍城).>

 

이곳을 천검성이라 부른다...

천검성은 당금의 천하 무림을 쥐고 흔드는 사대거파(四大巨派)의 일문이다.

또한,

동정호(洞庭湖)에 자리한 광양회(廣陽會)와 더불어 천하백도를 이끌어 가는 지주이기도 하다.

당대의 천하제일검파(天下第一劍派)가 천검성인 것이다.

 

---천후검성(天侯劍聖) 나뢰(羅雷).

 

당대 천검성주(天劍聖主).

일검성(一劍聖)으로 불리는 제일검사(第一劍士)가 바로 그다.

패천황룡(覇天皇龍)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강자(强者)...

 

천검성(天劍城)의 후원.

[...!]

뒷짐을 쥐고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이 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백화(百花)가 그 자태를 겨루며 황홀한 화향을 풍겼다.

그러나...

노인은 그 짙은 화향 속에서도 어두운 안색을 짓고 서 있다.

백설같이 흰 장포...

그 백포만큼이나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 아니 노검사(老劍士).

온화해 보이는 안색 뒤로 살을 베는 예기(銳氣)가 서려 있다.

그의 자세는 극히 한가로워 보인다.

하지만 헛점투성이같은 그의 자세에는 사실 바늘만큼의 헛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놀라운 기도(氣道)가 아닐 수 없다.

[...]

문득 노인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흘렀다.

노인의 노안은 어둡게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천지혼(覇天之魂)... 그 거룡(巨龍)이 초토로 쓰러지다니...]

노안이 근심으로 물든다.

[혈풍(血風)이 불고 있음이다. 암운이 가장 먼저 황산을 덮었을 뿐이다. 이제 천하가 걷잡을 수 없는 대혈겁에 빠져들리라.]

노인의 검미가 부르르 떨렸다.

[천검만리어기뢰(天劍萬里馭氣雷)... 그 무상지검(無常之劍)을 완성했으면 천하를 평정할 자신이 있으련만...]

노인의 한숨이 정원의 백화(百花)를 떨게 만든다.

 

---천검만리어기뢰(天劍萬里馭氣雷).

 

천검성(天劍城)에 내려오는 사상최강의 검학(劍學)이다.

()을 날려 천 리 밖의 적을 벤다는...

노인...

그가 누구이기에 천검만리어기뢰의 절기를 입에 올리는가?

그때,

[아버님!]

한 명의 삼십대 장한이 노인의 뒤로 다가와 공손히 시립했다.

[응천(應天)이냐?]

노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앞에는 호형의 장한이 시립하고 있었다.

 

---천검맹룡(天劍猛龍) 나응천(羅應天).

 

천검성의 소성주 되는 인물이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노인,

천후검성(天侯劍聖) 나뢰(羅雷)가 바로 그였다.

천하제일검사(天下第一劍士)라고 불리는 검()의 달인(達人)...

[그래... 황산에는 잘 다녀왔느냐?]

나뢰가 침중하게 물었다.

[! 하오나... 패천신문의... 겁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나응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나뢰와 시선이 마주 치는 것을 피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뢰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다.

[능대협과... 잠룡(潛龍), 능천한이라는 아이의 생사를 확인해 보았느냐?]

나뢰는 나응천에게 물으며 꽃밭사이를 거닐었다.

나응천은 그뒤를 따랐다.

나뢰에게는 나응천과... 느지막이 얻은 나설련이라는 두 남매가 있다.

남매 모두 뛰어나나 특히 딸인 나설련(羅雪蓮)은 뛰어난 재질을 지녔다.

천검미후(天劍美后)라고 불리는 그녀는 천하오대미인(天下五大美人)에 드는 경국지색이다.

[능대협부자는 실종된 상태입니다.]

[실종이라...]

나뢰가 무거운 시선을 하늘에 던졌다.

[그보다... 천하무림이 엄청난 혈겁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응천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패천신문의 겁멸 말고... 또 다른 혈겁이 일었단 말이냐?]

나뢰가 몸을 세우며 노안을 굴렸다.

[그렇습니다. 천해존불(天海尊佛)이 쓰러지고 녹림대제(綠林大帝)와 광양대제(廣陽大帝)가 실종되었습니다!]

[무엇이...]

나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경직되었다.

그가 경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천해존불(天海尊佛).

---광양대제(廣陽大帝).

---녹림대제(綠林大帝).

 

그들이 누구인가?

한 명은 일갑자 이전에 절대무적으로 통하던 불존(佛尊)이 아닌가?

거기다가 광양대제는 당금 백도의 일대지주이며,

녹림대제는 일백만 녹림도를 호령하던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가 아닌가?

한데 그런 그들이 쓰러지고 실종되다니...

천하가 경동하고도 남을 일었다.

[으음...]

나뢰의 안면이 부들부들 떨렸다.

천하제일검사의 그의 심기를 뒤흔들어 놓을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뢰는 신음하며 물었다.

[광양대제와 녹림대제의 실종은 그렇다 치고... 누가 있어 천해존불(天海尊佛) 노선사를 쓰러뜨렸단 말이냐?]

천해존불(天海尊佛).

그는 소림사상 세번째로 강한 인물이다.

소림 일천년사상 천해존불이 능가하지 못한 인물은 단 두 사람뿐이다.

첫째는 소림의 조사인 달마(達磨)이고...

둘째는 소림 십이대 장교이며 달마선사이래 최강이라는 광법대존자(廣法大尊子).

물론,

후일 광법대존자는 천지십병(天地十兵)에 드는 마병(魔兵)에 쓰러졌지만...

달마선사와 광법대존자에 비견되는 천해존불이다.

그가 금강불괴지체를 이룬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천지십병이 아니라면 보통의 신병으로는 상처도 입힐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천하존불을 누가 있어 쓰러뜨렸겠는가?

[천해존불(天海尊佛)... 측근의 인물에게 시해당했다고 합니다.]

나응천이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아주 차갑게 빛났다.

그의 눈에 살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살기를 발하다니...

[측근... 어는 누가 그런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느냐?]

나뢰가 노기를 실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응천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는... 천해존불의 기명제자인 복마신장(伏魔神壯) 상관여륭(上官與隆) 입니다.]

[복마신장(伏魔神壯)!]

나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격동한 나뢰가 흥분으로 한 가닥의 헛점을 드러내었고,

--- --- !

--- 파팟!

천만뜻밖에도,

나응천이 벼락같이 손을 내쳐 그 헛점을 파고 들었다.

[응천... 네가!]

나뢰가 아연하여 경악성을 토했다.

그가 알아차렸을 때는 나응천의 살수가 가슴으로 파고 드는 때였다.

절대절명(絶代絶命)!

그러나 나뢰는 역시 천하제일검사(天下第一劍士).

[--- !]

그의 입에서 노갈이 터지고,

스슥! --- 이잉!

나뢰의 몸이 우측으로 서 너치 흔들렸다.

범인이 상상할 수 없는 민첩한 임기웅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뢰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암습이었기에,

--- !

나응천의 손이 스치며 나뢰의 가슴에서 선혈이 확 일었다.

--- --- !

그사이 나뢰는 오 장 밖으로 물러섰다.

[--- --- !]

콰르르르--- 르릉---!

--- 아악!

일격이 실패한 나응천이 득달같이 나뢰를 휘몰아쳐 왔다.

그런 나응천의 모습에 나뢰의 노안이 무섭게 치떠졌다.

[네놈! 응천이 아니었구나!]

나뢰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으며,

--- --- !

그의 우수에서 천지를 양단하는 막강한 검세가 피어올랐다.

 

---천후신검(天侯神劍),

 

천검성(天劍城)의 제일기보이며,

천병보(天兵譜) 서열 이십일위인 신검이 나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을 들면 나뢰는 무적이다.

--- --- !

[------ !]

나응천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 --- !

나응천이 이마에서 가랑이로 일검양단되어 나뒹굴었다.

쪼개진 그의 얼굴에서 정교한 인피면구가 떨어졌다.

[이놈이 응천이로 변장했다함은 황산에 갔던 응천이 변을 당했다는 얘긴데...!]

나뢰의 안색이 급하게 변했다.

그자신도 암습당하여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으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뢰가 다급해하는 순간,

[--- 아아!]

[크하하하하!]

--- 퍼펑!

--- --- 콰쾅!

[--- 아악!]

[아악... ... 적의 내습이다!]

천검성의 사위에서 수천의 혈의인들이 날아들었다.

그자들은 다짜고짜 천검성도들을 쓰러뜨렸고...

당황한 천검성도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일시에,

천검성 전체가 혈풍에 휘말려 들어갔다.

[으음...!]

나뢰의 안색이 천만 근의 무게로 가라 앉았다.

휘르르르--- 르르!

나뢰는 즉시 싸움이 벌어지는 천검성의 외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허공에 떠오른 직후,

[크크크! 내려가랏!]

--- 이이잉!

허공일각으로부터 막강한 사기(邪氣)가 쏟아져 내렸다.

[!]

나뢰의 신형이 휘청하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 --- 쿠쿵!

그의 배후에서 시뻘건 혈강(血罡)이 노도같이 쏟아졌다.

[천검제뢰(天劍諸雷)!]

--- --- --- !

나뢰의 폭갈이 산악같은 검기와 함께 일어났다.

천지(天地)가 일시에 천후신검(天侯神劍)의 검영(劍影)으로 가득 찼다.

일검성(一劍聖)이란 별호가 결코 와전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위세였다.

--- 르르르--- !

쿠쿠--- !

천후검성이 나뢰의 등뒤로 몰려들던 혈강(血罡)이 산산이 부서졌다.

[누구냣?]

일검을 짓쳐낸 나뢰가 노갈을 쳤다.

스스스스...!

그의 전면으로 한 명의 혈영인(血影人)이 피그림자(血影)에 싸여 나타났다.

그리고,

[크크크...!]

허공에서 골수를 후벼 파내는 듯한 끔찍한 음소가 터졌다.

나뢰는 흠칫하여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콰르르르---!

츠츠--- 츠츠--- !

한 명의 음사하기 이를 데 없는 회포의 노인이 칙칙한 사기(邪氣)를 휘몰며 덮쳐오고 있는 게 보였다.

[... 역천사황(逆天邪皇)!]

나뢰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신음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의 천후신검은 장쾌한 기세로 역천사황을 마주 무찔러 가고 있었다.

--- 르르르르릉!

--- --- !

--- --- !

천후신검의 검강이 불꽃을 튀겼다.

그 순간,

--- --- !

한 줄기 혈영강지(血影)가 낙뢰같이 천후검성이 나뢰의 배심으로 파고 들었다.

--- --- !

[--- !]

피가 확 튀면서 나뢰의 등으로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렸다.

--- !

나뢰의 손에서 천후신검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천검... 만리어기뢰(天劍萬里馭氣雷)를 익혔으면...]

나뢰는 비틀거리며 입으로 피를 토했다.

[크크크... 나가야... 그만 뒈져랏!]

--- 르르릉!

--- --- 콰쾅!

역천사황의 무지막지한 장력이 나뢰의 사지를 짓이겨 버렸다.

--- 우웅!

나뢰는 비명도 못 지르고 피곤죽이 되어 나뒹굴었다.

천하제일검사(天下第一劍士)가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스스스스슥!

[크크...]

역천사황이 음악한 미소를 흘리며 천후신검(天侯神劍)을 집어 들었다.

[크크... 천후신검은 노부가 전리품으로 거두겠다!]

이에 혈영군(血影君)이라는 예의 혈영인이 혈영 속에서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사황! 좋소. 그대신... 나 설련이란 계집은 본군(本君)이 맛을 보겠소!]

[크크... 아쉽지만...!]

스스스슥!

역천사황은 섬칫한 마기를 흘리며 멀리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역천사황을 바라보던 혈영군은 사악하게 내뱉았다.

[크크... 늙어 뒈질 것이 욕심은 많아서... 혈종(血宗)의 지엄한 분부가 아니었다면 내손에 맞아 죽었어야할 노물들...]

혈영군은 이어 천후검성 나뢰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삼존(三尊) 중 불존(佛尊)과 도존(道尊)을 쓰러뜨렸고... 이제 흑룡천신(黑龍天神)과 운무중에 있는 취존개(醉尊)만 제거하면 혈종천하(血宗天下)를 이룰 수 있다.]

스스스스--- !

혈영군은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 --- 아악!]

[으아아--- !]

! ! 콰르르르르--- !

날아가는 그자의 발밑에서는 대혈겁(大血劫)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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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승상부 소부주

 

 

 

처음에는 살의(殺意)가 불끈 치밀었다.

누군가 자신의 순결한 몸을 색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는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절색이다!> 라고 외친 한마디에 온전히 감탄만이 깃들어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철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낸 인물을 보았다.

이장(二丈;6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젊은 서생이 눈을 치뜬 채 그녀를 보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채 안되어 보인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원래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

추호의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은 서생이 유복한 가정에서 근심없이 자랐음을 보여준다.

(지로가 잘 자라면 저자처럼 되겠구나.)

그것이 젊은 서생을 보는 순간 느낀 철접의 감상이다.

호기심과 경탄으로 가득한 젊은 서생의 눈이 웃고 있다.

진지하면서도 순수하여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이다.

젊은 서생 뒤에는 벽처럼 보이는 존재가 서있다.

처음에는 남자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여자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육척(六八;180센티)을 훨씬 넘는다.

젊은 서생의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다.

체격 역시 당당해서 철접으로 하여금 남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이가 마흔 살 언저리,

사내를 압도하는 체격을 지녔지만 거녀(巨女)의 얼굴은 추하지 않다.

추하기는커녕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윤곽이 깊고 뚜렷하며 눈동자에는 푸른색이 감돈다.

거녀의 몸에는 아마도 색목인(色目人)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녀의 머리카락도 완전히 검지 않고 붉은 색을 띄고 있다.

(고수로구나.)

철접은 푸른색을 띤 거녀의 눈으로 언뜻 번갯불같은 섬광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미련하게 보이는 거녀의 몸에 측량불가의 심후한 공력이 깃들어있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죽일 수 있을까?)

인자의 본능으로 철접은 자연스럽게 거녀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으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간단히 압살(壓殺) 당할 것이라는 게 철접이 내린 판단이었다.

(중원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고수도 많구나. 일개 호위가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철접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자신들이 척살을 시도할 황제의 주변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소생이 초면에 결례를 했습니다."

젊은 서생이 포권을 하며 말을 건네 철접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불쾌하셨다면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진지한 사과다.

서생이 사과하는 말을 들은 철접은 마음에서 불쾌한 감정을 씻어낸다.

"딱히 결례를 하신 것도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철접은 건조한 어조로 말하다가 시선을 기루쪽으로 돌렸다.

기루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기루로 들어가던 한량들과 그들을 맞이하던 기녀들이 무엇때문인지 놀라고 당황하며 허둥거린다.

이어 그들을 헤집고 한명의 소년이 달려 나온다.

벗겨졌던 상의를 다시 입으며 기루에서 뛰쳐나오는 그 소년은 철접 자신의 동생 용차랑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다.

용차랑의 행색과 표정을 본 철접은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마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녀들이 다짜고짜 용차랑의 옷을 벗기려 들었을 테고,

기겁한 용차랑이 기방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울먹이며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뒤로 늙은 인자 시바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따라 나오고 있다.

"누나!"

기루를 뛰쳐나온 용차랑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철접을 발견하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달려온 용차랑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래. 싫으면 억지로 할 거 없다."

철접은 키가 작아 머리가 자기 어깨쯤에 닿는 어린 동생을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오늘밤에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도록 하자꾸나."

철접은 계집아이처럼 훌쩍이는 동생을 한 팔로 끌어안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며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칫 지금이 소동이 발단이 되어서 내일 있을 거사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가급적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한다.

용차랑을 안고 걸음을 옮기면서 철접은 한 쌍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은 거구의 여인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는 젊은 서생이었다.

 

***

 

요문천(姚聞天)은 승상부(丞相府)의 소부주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 승상(丞相)이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초기에는 송()나라의 관제를 본 따서 정무를 관장하는 승상이 있었고 승상부 역시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홍무제 주원장이 친정(親政)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승상 제도는 폐지되어 버렸었다.

관직에 승상이 없으므로 승상부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승상부가 분명 존재한다.

그리 된 이유는 승상부의 주인이 영락제의 치세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사(皇師) 도연(道衍)!

 

그가 바로 승상부의 주인이다.

도연은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안배가 없었다면 영락제는 여러 번왕(藩王)중 한명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영락제는 도연에게 어떤 공신에게 내린 것보다도 더 큰 상을 내리려고 했다.

문제는 도연이 무소유(無所有)를 본분으로 삼는 승려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속인이 아닌 도연에게 아무리 큰 상을 내려도 의미가 없다.

이에 영락제는 도연에게 속인의 신분으로 은상(恩賞)을 받으라 명하였다.

천자의 명인지라 도연도 어쩔 수 없이 환속하여 요광효(姚廣孝)라는 원래 이름을 쓰게 되었다.

승려의 신분을 버린 도연, 즉 요광효에게 영락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은상을 내렸다.

그중에는 북경 내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가 요광효에게 하사한 그 저택은 처음에는 요부(姚府)로 불렸었다.

하지만 요부라는 이름은 발음상 아름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광효는 실질적인 승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요부는 승상부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승상이라는 관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치하에서 승상부가 존재하게 된 연유였다.

그 승상부의 소부주가 요문천이다.

요문천은 요광효가 환속하기 전에 관계한 어떤 여인의 소생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열여덟 번째 생일을 치룬 요문천의 신분은 여러 왕가의 왕자들을 능가하여 영락제 슬하의 황자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요문천과 그의 아버지 요광효는 겸손한 성품이라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서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존귀한 신분이 요씨부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요문천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하늘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어젯밤, 요문천은 유모(乳母) 섭대낭(葉大娘)과 함께 환락가로 유명한 동대로를 구경하러 갔었다.

섭대낭은 요문천이 글 읽는 것만 좋아할 뿐 여자나 세상 물정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장소인 동대로에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깊은 밤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동대로는 순진한 책벌레 요문천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루들과 짙은 화장 때문에 그림에서 빠져나온 선녀처럼 보이는 기녀들의 고혹한 자태는 소년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요문천은 동대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그 여인의 자태는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호객을 하는 기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문천은 이내 그 여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기녀라면 결코 지닐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자태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었다.

 

"절색(絶色)이다!"

 

그 때문에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입 밖으로 내놓게 되었다.

탄성을 들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돌아보었다.

순간 요문천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직감했다.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방금 전 물에 씻긴 백옥인 듯 깨끗한 얼굴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진다.

특히 가늘고 긴 여인의 두눈은 서늘한 빛을 흘려내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었다.

자신이 여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여인도 대답을 했던 것같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요문천이다.

여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재회를 기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요문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 직후 근처 기루에서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허둥대며 뛰쳐나오더니 여인의 품에 와락 안겼기 때문이다.

여인은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을 안고 달래며 현장을 떠났다.

그 모습에서 요문천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누이가 어린 동생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여인은 요문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여인의 모습은 요문천의 뇌리에서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병에 걸린 것같구나. 상사(相思)라는 불치의 병에...)

요문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눈에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그 신비한 여인의 자태만이 온통 뇌리에 떠돌 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 읽는 것조차 잊었으며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상태로 그 여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 차려라 요문천.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여인에게 홀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요문천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호르륵!

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호각과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어두워지는 북경의 거리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불빛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불과 횃불을 든 사람들이 떼 지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뭐지?)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쓰던 요문천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창밖을 보았다.

"벽돌 하나, 기와 한 장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단 한 놈의 자객도 놓쳐서는 안된다!"

"대역무도한 역적들을 놓치면 모두 칼을 물고 자결할 각오를 해라."

호르륵! 호륵! 삐익!

승상부 근처의 골목에서도 거친 고함과 호령들이 호각소리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온다.

(영락폐하께서 열병식(閱兵式)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행로에 사단이 생겼구나.)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던 요문천은 이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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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天地十兵秘事

 

 

 

<천하(天下)는 천지십병(天地十兵)이 동시대(同時代)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들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부에 대해 천지십병(天地十兵)의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났었다...>

 

[천지십병(天地十兵) 중 세 가지가...]

능천한의 두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천지십병(天地十兵).

 

하나만 나타나도 천지가 뒤흔들린다는 절세신병들이 아닌가?

하물며 그중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났었음에도 천하가 전혀 알지 못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능천한은 패천자의 글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대는 우주혈종(宇宙血宗)을 기억하리라. 전설 속의 사도대조종(邪道大祖宗)이던 혈종(血宗)의 후예인 우주혈종(宇宙血宗)을 기억하리라!>

 

[우주혈종(宇宙血宗)!]

능천한은 답답한 신음을 토했다.

이백 년 전에 있었던 피()의 역사를 기억해낸 때문이다.

이백 년 전,

천하(天下)가 피()에 잠겼다.

인혈(人血)이 장강(長江)을 메우고 시신이 황야를 뒤덮은 때가 있었다.

 

---크하하하...! 보라! 혈종(血宗)이 제림하였도다! 굴복하지 않으면 구족을 멸하리라!

 

가공스런 혈갈(血喝)이 천지를 뒤흔들고,

중원천하는 혈운(血雲)으로 뒤덮여 한 조각의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혈세천하(血世天下)!

 

()의 역사가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듯이 창창하였다.

이 모든 것이 인 대사종(大邪宗)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주혈종(宇宙血宗)>

 

바로 이 인물이 그 장본인이었다.

그자는 근 이천여 년 전 전설 속의 사도대조종이던 혈종(血宗)의 저주로 부활시킨 인물이었다.

 

---고금오대마종(古今五大魔宗).

 

고금을 통틀어 최강이라는 다섯 마종을 일컫는 말이거니와,

우주혈종(宇宙血宗)은 그 선조 혈종(血宗)이 고금오대마종에 들었다는 이유로 고금오대마종에 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혈종(血宗)이상이었다.

혈종이상일 뿐 아니라 그는 마도와 사도에서는 천마(天魔) 다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우주혈종은 강했다.

()하다는 것이 천하를 위해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우주혈종은 자신의 힘으로 천하무림을 멸절시키려 하였고,

하루에도 수백명의 생명이 그의 손에 죽어갔다.

그러니... 큰일이 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하무림의 뿌리가 완전히 끊겨 버릴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노부가 다시 무림에 나왔다. 노부가 은거한 꼭 삼십 년만의 일이었다...>

 

전대(前代)의 대비사(大秘事)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광란하듯 피를 부르며 날뛰던 우주혈종(宇宙血宗)!

그가 어느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비사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하늘()을 거슬리려하는가?

 

패천자(覇天子)가 폭갈(瀑喝)로 일어나 우주혈종을 찾았다.

천하가 공포 속에 움츠린 위로...

 

---크크... 패천자(覇天子)! 잘 나타났다. 네놈을 쓰러뜨리지 않고는 혈종천하(血宗天下)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마침내!

패천자를 피할 우주혈종(宇宙血宗)이 아니다.

양대절정인(兩大絶頂人)의 격돌은 기련산(祁蓮山) 지옥애(地獄崖)에서 이루어졌다.

경천동지!

경혼읍백!

천지(天地)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리고,

만근의 거석이 조약돌처럼 십여 리 밖으로 날아갔다.

패천자(覇天子)!

그는 당대 무적이던 절정인!

우주혈종(宇宙血宗)!

그는 이천 년 전 이미 사종천하(邪宗天下)로 만들었던 혈종후예(血宗後裔)!

양인의 대결전은 세상의 종말인 듯이 엄청난 것이다.

그들 양인, 그들은 비단 무공으로만 겨룬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천지십병(天地十兵)에 드는 신병(神兵)과 마병(魔兵)이 하나씩 있었다.

 

---패천신륜(覇天神輪).

---혈황탈(血荒奪).

 

패천신륜(覇天神輪)은 사대신병(四大神兵) 중의 하나이며,

혈황탈(血荒奪)!

혈황탈은 혈종(血宗)이 애용했던 절대병기!

그것은 저주의 사대마병(四大魔兵) 중에 드는 마병이 아닌가?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찢어졌다.

가공!

그것은 너무도 가공스런 충돌이었다.

패천신륜의 얘기는 륜영(輪影)을 몰아 천지(天地)를 질타하고,

혈황탈의 가공스런 핏빛 마광은 구천에 이르렀다.

신병(神兵)대 마병(魔兵)의 대결,

그것은 이미 인세(人世)의 그것이 아닌 듯 하였다.

굉음과 경기의 해일이 칠주 칠야로 기련산 전역에 몰아쳤다.

처음에는 백중지세(佰仲之勢)였다.

그러나,

정녕,

우주혈종(宇宙血宗)의 마기는 무서운 것이었으니...

패천자는 우주혈종의 마기에 점차 압도당해가기 시작했다.

분하게도,

패천존후신강(覇天尊吼神罡)이 혈종사령공강(血宗邪靈空罡)을 완벽하게 막지 못하는 것이다.

칠일의 결전 후,

패천자(覇天子)는 점차 위경에 빠졌다.

패천신륜의 륜영(輪影)이 혈황탈의 마기에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패천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한번 허물어지기 시작한 균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였다.

[우주혈종(宇宙血宗)!]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사자후가 터져나와 기련산을 뒤흔들었다.

[!]

[!]

패천자와 우주혈종은 아연하여 물러섰다.

폭갈을 터뜨린 인물의 공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장내에 한 명의 제왕(帝王)의 기도를 지닌 인물이 나타났다.

자의중년인(紫衣中年人)!

빈손의 그 인물은 가히 천신(天神)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걸음 늦어 귀공 혼자 애쓰시게 하였오이다!]

그 인물은 패천자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크크... 네놈은 또 누구냐?]

우주혈종이 자의중년인에게 폭갈을 지르며 혈황탈을 쪼개내었다.

[귀공! 조심하시오!]

패천자가 다급히 외쳤으나,

[!]

자의인은 냉소하며 날아드는 혈황탈을 노려보며 미동도 아니하였다.

 

[...!]

능천한은 눈을 크게 뜨며 패천자의 다음 글을 읽어나갔다.

그곳에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때... 오오! 노부는 보았다. 사대신병(四大神兵)의 으뜸이라는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의 그 웅장한 위용을...!>

 

능천한은 검미를 찌푸렸다.

[분명 그 자의중년인은 빈손이었다고 쓰시지 않았는가? 한데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이 나타났다니...]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

 

사대신병(四大神兵)은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신병(神兵)이다.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

그 진정한 형태를 아는 사람은 전무하다.

그만큼 신비에 싸인 병기인 것이다.

팔황천병(八荒天兵)의 전설만 없었다면,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와 천병일천좌(天兵一天坐)의 수좌(首坐)를 다투었을 절대신병(絶代神兵).

만검지존(萬劍至尊)의 군황신병(君皇神兵)이라 불리는 것이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인 것이다.

 

<천지(天地)가 일시에 천만(千萬) 검영(劍影)으로 가득하도다.

자의인의 일신에서 백장에 이르는 검영(劍影)이 폭풍같이 일어났다.

너무도 장쾌하고 웅장한 위세...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혈황탈의 마기가 얼음조각같이 깨지고 우주혈종은 가슴이 관통 당하여 지옥애(地獄崖)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주혈종(宇宙血宗)은 노부와의 칠주칠야의 접전으로 극히 지친 상태였음을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단 일격에 우주혈종을 격살한 자의인의 신위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것이 진정한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의 위용이었느니라.>

 

[...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 어떤 병기이기에... 우주혈종을 그토록 간단히 쓰러뜨렸단 말인가?]

능천한은 붕목을 깊숙이 빛냈다.

 

우주혈종을 쓰러뜨린 후,

자의중년인은 패천자에게 자신의 명호를 밝혔다.

[소제는 제왕천(帝王天)의 당대천주인 제왕천신(帝王天神)이외다.]

그리고,

제왕천선이라는 그 자의인은 패천자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의 말을 남긴다.

[대혈겁(大血)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소이다. 그것은 당대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에서 일어난 대붕(大鵬)에 의해서만 흩어질 것이니...]

재황천신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글은 여기서 끝이 나있었다.

 

---혈황탈(血荒奪).

---패천신륜(覇天神輪).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

 

천지십병(天地十兵)의 삼병(三兵)이 뒤엉킨 대비사는 이렇게 끝이 난 것이다.

[우주혈종(宇宙血宗)... 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기련산 지옥애에서 패사한 때문이었군!]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사장될 뻔한 이백 년 전의 대비사가 그에 의하여 되살아난 것이다.

[제왕천신(帝王天神)이란 분의 말은 피()의 시작은... 바로 지옥애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데...]

능천한의 검미가 모아졌다.

[지옥애... 우주혈종... 그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는 꿈에도 알지 못하리라.

저주...

그 끔찍한 신기보 서열 삼위의 전설...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이 기련산에 있음을...

그것도 지옥애라는 절지에...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지옥애의 비밀을 풀어보리라!]

능천한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패천신륜을 깊이 간직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패천자의 시신에 정중히 일배를 올렸다.

[대공(大功)을 이루어 이곳을 나가게 되면... 사조님의 존체는 다시 모시겠습니다!]

일배를 한후 능천한은 석실을 물러나왔다.

물러나는 능천한을 바라보는 패천자.

그 청수한 얼굴이 밝아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역경(逆境)과 기우(奇遇)는 잠룡을 더욱 거대한 거룡(巨龍)으로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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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절색(絶色)이다!

 

 

밤이 깊었다.

하지만 북경 외성(外城)의 동쪽에는 불야성이 형성되어 있다.

독특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저마다 내건 형형색색의 등불들이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북경 최대의 환락가다.

동대로(東大路)라 불리는 거리는 금릉(金陵)의 진회하(秦淮河)에 못지않은 규모와 빼어난 미기(美妓)들로 유명하다.

이십일 년 전에 시작되어 십팔 년 전에 끝났던 <정난(靖難)의 변()>의 결과로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帝位)에 오른 영락제는 일단 금릉을 도읍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천도(遷都) 준비를 했으며,

마침내 영락십육년(永樂十六年)에 자신의 권력 근거지인 북경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 이전까지 북경은 연경(燕京), 북평(北平)등으로 불렸었다.

명나라의 수도가 된 덕분에 북경 일대 환락가들 중에서도 최대규모인 동대로는 유래 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늦은 밤임에도 동대로의 넓은 거리는 하룻밤의 쾌락을 찾는 한량, 부호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분칠한 여인들로 가득하다.

이 거리의 여인들은 단 한 종류뿐이다.

좋게 말하면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이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먹고사는 창기(娼妓)들만이 동대로에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사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어느 기루에서 호객(呼客)을 위해 내보낸 기녀일 것이라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아름다운 여인,

하지만 수작을 붙여볼 생각으로 그 여인에게 다가간 순간 사내들은 몸속의 피가 일거에 얼어붙는 듯한 오한(惡寒)을 느껴야만 했다.

훤칠한 몸에 수수한 옷을 걸친 여인의 눈빛은 너무도 깊고 투명하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서늘한 눈빛에 접하는 순간 사내들은 자신의 머릿속이 얼음송곳으로 후벼 파이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어떤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서 멀어졌다.

덕분에 번잡한 동대로에서도 여인이 서있는 나무 그늘 근처는 한산했다.

여인은 철접이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의 그늘에 동화되듯이 서있는 철접은 길 건너편 건물을 보고 있었다.

철접이 보고 있는 건물은 동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루다.

현란한 등이 내 걸린 기루 입구는 하룻밤 인연을 찾는 사내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기녀들로 북적인다.

(시바타는 누구보다 노회(老獪)하니 내 뜻을 알아차리고 잘 처리하는 중일 것이다.)

철접은 웃음소리 낭자한 기루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늙은 인자 시바타와 용차랑을 기루로 들여보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철접이 동대로를 찾아온 이유는 내일의 거사를 앞두고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 경험을 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용차랑에게도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철접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난생 처음 기녀들과 어울려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분방하게 즐기다보면 용차랑은 곯아떨어져서 내일 있을 거사에는 끼지 못할 것이다.

철접의 뜻을 알아차렸을 늙은 인자 시바타는 기녀들을 사주하고 있을 게 확실하다.

술과 여자로 용차랑을 쉴 새없이 공략하여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리라고...

(지로(次郞)에게는 못할 짓을 한 기분이다. 누구보다 순진하고 겁이 많은 그 녀석이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철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시바타의 손에 이끌려 기루로 들어가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송아지같은 표정으로 돌아보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자들은 철이 완전히 들기 전부터 이성을 경험한다.

()에 일찍 눈을 떠야만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도 있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차랑 또래의 소년 인자들이라면 대부분 여자와 동침해본 경험이 있다.

소년 인자들은 첫 경험을 위해 유곽(遊廓)이나 사창가(私娼街)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인자 마을의 나이 든 여자들이 첫 경험을 하게 해준다.

아무래도 매춘부들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다.

소년들로서는 딱히 배울 게 없다.

그에 반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며 소년들이 자라는 것을 봐온 여자들은 성심성의껏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려주게 된다.

여자의 몸이 남자와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기교를 써야 완전하게 정복할 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치는 것이다.

소년들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여자가 상대라면 겁을 먹거나 긴장하지 않고 첫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집안의 나이 든 여자들이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게 해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삼 년 전에 죽은 철접의 첫째 동생 용태랑이 그렇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용태랑은 집안의 어떤 여자를 통해 첫 경험을 한 것같았다.

용태랑은 두 살 위의 누이인 철접을 닮아 결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깔끔하기가 여자들보다 더 한 데다가 더럽거나 추한 것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용태랑이 유곽에 가서 창녀를 사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가류 내의 여자들과 관계를 갖기도 쉽지가 않다.

만에 하나 상대 여자가 용태랑의 아이를 배기라도 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이가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용태랑의 나이는 어느덧 약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장차 이가류를 이어야할 후계자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자를 모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심지어 용태랑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색가(男色家)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이가류 내에 퍼지고 있었다.

이가류의 당주가 될 사내가 남색가라 소문나면 심각한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다.

다른 인자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주인 용사무가 결단을 내렸다.

집안의 여자들 중 한 사람이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되어주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집안 여자라면 용태랑도 결벽증이나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관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대가족인 용씨 집안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오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 여자들 중 사내 경험이 없는 처녀들은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에서 제외 되었다.

남녀관계에 대해 뭘 알아야 용태랑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나이가 많은 여자 역시 배제되었다.

서른 명 남짓 남은 여자들 중 제비뽑기로 결정된 누군가가 용태랑의 첫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 여자가 누군지는 끝내 비밀로 붙여졌다.

용태랑은 집에서 그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동안 철접과 어린 아이들은 잠시 친척 집에 가있었다.

다음 날 철접이 귀가했을 때 용태랑은 더 이상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변함이 없지만 어쩐지 어른의 분위기가 났었다.

집안의 어른들 중 누구도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누구였는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철접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인자 마을의 어른들도 대부분 용태랑의 상대를 눈치 채고 있는 것 같 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여자가 누군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인자들의 삶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인자들에게 인륜도덕은 그리 대단한게 아니다.

이런 분위기인지라 인자 마을의 소년들은 대개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철접이 알기로 용차랑은 여전히 여자를 모른다.

형인 용태랑은 지나치게 결벽한 성격이라 첫 경험이 늦었었다.

반면 용차랑은 이가류 종가의 자손답지 않게 겁이 많고 순진하여 여자들을 무서워했다.

이가류 내의 여자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종가의 막내아들인 용차랑을 유혹하려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도발을 할 기미만 보여도 용차랑은 기겁하며 도망치곤 했다.

계집아이보다도 여린 성품의 소유자인 용차랑에게 여자들은 기승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로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용차랑이 무서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 한명의 여자가 철접이다.

철접 역시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나 나는 용차랑을 동생이 아니라 조카나 아들인 듯이 대해왔다.

 

(내가 직접 지로에게 경험을 시켜주었어야 했을까?)

철접은 조금 아쉽고 후회가 되는 기분이었다.

인자들의 세계에서는 남매가 부부가 되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이다 보니 바깥세상의 인간들과 인연을 맺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낯을 많이 가리고 겁도 많은 용차랑은 어쩌면 철접에게 은밀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가류의 나이 많은 여자들의 유혹과 호의를 뿌리쳐 왔을 테고...

하지만 철접은 어린 동생 용차랑과 도저히 마지막 일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철접은 이가류 내의 일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용차랑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도맡아 키워왔었다.

열두 살이나 어린 동생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전적으로 용씨일족의 장녀인 철접의 몫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과 민망한 짓을 할 용기가 철접에게는 없었다.

(지금까지야 그랬지만 어차피 내일 이맘때면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을 몸뚱이... 지로의 소원을 들어 줄 걸 그랬나?)

철접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조카나 아들같이 키워온 어린 동생이 창녀를 상대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후회의 감정이 밀려든다.

(결국 나는 처녀 귀신이 될 운명이었다.)

철접의 차가운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이가류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철접은 아직 처녀의 몸이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여자로서의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체가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몸뚱이를 아무 사내에게 내맡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접은 서른 살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사내를 모르는 처녀의 몸이다.

물론 처녀로 죽는 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다.

다만 내일이면 죽어서 썩어질 몸뚱이임에도 사랑하는 동생의 소원을 들어줄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바로 그때였다.

"절색(絶色)이다!"

누군가의 탄성이 심란해하는 철접의 귓전을 천둥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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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師祖遺物 覇天神輪을 얻다.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

능천한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괴인(怪人)!

그는 바로 수라천극존이었던 것이다.

육십여 년의 세월을 패천멸절십팔뢰(覇天滅絶十八牢)에서 보내야 했던 비운의 마종(魔宗).

[풍운(風雲)... 한꺼번에 일어난다.]

능천한은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천하가 가공할 풍운에 휘말려 들어감을 알기 때문이다.

[이곳을 빠져 나가려면 묵황굉벽뢰(墨荒宏霹雷)를 익히지 않을 수 없고...]

문득,

중얼거리던 능천한의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었다.

그곳은 방금 전 수라천극존이 묵황굉벽뢰를 내쳤던 곳이었다.

한데,

[빛이 흘러나오다니...]

능천한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묵황굉벽뢰에 맞아서 쩍 갈라진 석벽 틈으로 기이한 광휘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은 새파란 보광(寶光)이었다.

(저 보광에 지독한 날카로움이 흐른다. 무엇이 저런 예기(銳氣)를 흘리는가?)

능천한은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남을 느꼈다.

우르르르---

능천한은 돌 더미를 치우며 석벽이 갈라진 틈으로 다가갔다.

[크읏...!

능천한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만큼 그 새파란 보광에 섞여 흐르는 예기는 지독한 것이었다.

그 빛만으로도 피부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후욱...]

능천한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공력이 얼마만큼이나 늘었는지 시험해보자!]

능천한은 중얼거리며 석벽이 갈라진 틈으로 양손을 끼어 넣었다.

그리고,

[--- !]

힘차게 용을 쓰며 양 석벽을 쪼개내었다.

우드드득---

화강암이 그의 손에서 부서지고,

크크크--- ---

그르르르르---

석벽이 쩍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

[휴우...]

능천한은 얼굴이 다소 상기된 채 손을 떼었다.

석벽이 사람 한 들어갈 정도로 벌어진 것이다.

[적어도 오갑자의 공력을 지니게 되었다. 수라천극존에 또 다른 은혜를 입었군.]

능천한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갈라진 석벽틈으로 들어갔다.

[...]

안으로 들어서던 능천한은 멈칫했다.

그곳은 또 다른 석실(石室)이었다.

석실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다만,

석실 중앙에 묵옥석(墨玉石)으로 깎아 만든 좌대(坐臺)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 좌대 위에는 한 명의 청수한 중년문사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능천한은 한눈에 그 인물이 오래 전에 좌화(坐化)한 시신임을 알아보았다.

(오래 전에 죽었을 텐데 안색이 생시 그대로라니... 금강불괴지경(金剛不壞之境)에 이르렀던 초절정의 고인이었으리라!)

능천한은 염두를 굴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좌대 위의 인물은 일견하여 청수해 보이지만 일신에서 태산의 기도가 흐르고 있었다.

오래 전의 시신에서 그런 기도가 느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후배 능천한, 선인(先人)의 선거(仙居)에 난입함을 사죄드립니다.]

그는 중년인의 시신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

굽혔던 허리를 펴던 능천한의 시선이 중년인의 무릎 위에 머물렀다.

중년인의 무릎 위에는 반쯤 뚜껑이 열린 옥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한데,

그 새파란 광휘는 그 옥함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이기에... 이런 예기를 발하는가?)

능천한은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옥함을 집어들었다.

[!]

옥함을 열던 능천한의 두 눈이 크게 치떠졌다.

--- 이잉---

스스스스스---

옥함이 열리자 웅혼한 진동이 울려 나왔다.

새파란 광망이 별빛같이 쏟아져 나오는 옥함 안,

그곳에는 하나의 륜()이 들어 있었다.

()!

신륜(神輪)!

가히 신륜(神輪)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강륜(鋼輪)이 거기에 있었다.

크기는 직경 한자 반 정도,

둥근 몸체에 청광(靑光)이 한성(寒星)같이 흐르는 네 개의 날()이 톱니바퀴같이 달려 있었다.

()의 두께는 종이짝보다도 얇았다.

그 네 개의 얇디얇은 날()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한망이 쏟아지는 것이다.

[... 신병(神兵)... 신병(神兵)이다!]

능천한은 가슴이 크게 뛰었다.

한눈에 륜()의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것이다.

[어떤 호신강기라도 물 베듯이 하는 신병(神兵)이 틀림없다.]

능천한은 떨리는 손을 륜()으로 가져갔다.

()의 몸체 중앙에는 작은 단추가 하나 있었다.

능천한은 손가락으로 그 단추를 눌러보았다.

--- ---

--- ---

그가 단추를 살짝 누르자 네 개의 날이 소리없이 륜의 몸체 속으로 접혀 들어갔다.

그러자 청망(靑茫)이 가시며 륜은 평범한 원형의 철판으로 변했다.

[훌륭하다.]

능천한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때,

그의 눈에 신륜에 깔린 몇 장의 양피지 조각이 들어갔다.

[...!]

능천한은 신륜을 들어내고 양피지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그 양피지에는 깨알같은 글들이 가득 적혀져 있었다.

능천한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글을 읽어갔다.

 

<패천신륜(覇天神輪)을 인연있는 자에게 남긴다.>

 

[패천신륜(覇天神輪)!]

능천한은 경악과 흥분에 휩싸이며 손에 들린 륜()을 새삼 살펴 보았다.

 

---패천신륜(覇天神輪).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천지십병(天地十兵)!

한 번의 현세(現世) 천하(天下)로 뒤집어 놓는다는...

천병보(天兵譜), 천병일천좌(天兵一天坐)의 절대신병(絶代神兵)!

그중 사대신병(四大神兵)에드는 패도긴병(覇道神兵)이 아닌가?

한번 떨쳐지면,

가공할 륜영(輪影)이 천지를 뒤덮고 부딪는 모든 것을 잘라낸다.

그것이 만년한철이든, 금강불괴지체나 절대호신강기이든 결과는 동일하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다.

그 전설(傳說), 그 신화가 능천한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으음...!]

능천한의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서신을 계속 읽어나갔다.

 

<... 본인은 본래 일개 낙척문사에 불과했다. 한데 팔십 년 전 본인은 황산을 지나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는 산동(山洞)에서 기연을 얻게 되었다.>

 

X X X

 

이백 수십 년 전,

한 명의 낙척서생이 호아산을 지나다가 날이 어두워져 어느 산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낙척문사는 그 산동 안에서 뜻하지 않는 기연을 만나게 되었다.

,

그는 산동(山洞)의 안쪽에 흙으로 발라 감춘 또 다른 석실을 발견하였고,

그 석실에는 한 부의 죽간(竹簡)과 신륜(神輪)을 얻게 된 것이다.

죽간(竹簡)은 춘추 이전 시대에 쓰려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죽간의 앞부분이 썩어나가 죽간의 제목은 알 도리가 없었다.

낙척문사는 그 죽간에 큰 흥미를 느끼고 죽간의 내용을 연구하게 되었다.

결국,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낙척문사는 죽간에서 가공할 절기를 얻어 절대고수로 변신하게 된다.

대공(大功)을 이른 후 낙척문사는 강호(江湖)로 나오게 된다.

 

---나의 실력이란 것이 어느 정도인가?

 

낙척문사는 자신의 실력을 측정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중원 무림을 쥐고 흔드는 일백고수들을 차례로 방문하고 비무를 했다.

헌데 어이없게도,

천하를 떨어 울린다는 일백고수들이 누구하나 낙척문사의 손에서 십초를 버티지를 못했다.

중원무림이 아연하고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낙척문사는 크게 실망을 하고 만다.

중원무림의 실력이라는 것이 나무도 형편없다고 느낀 때문이다.

 

---천하(天下)가 이리도 좁은가?

 

낙척문사는 탄식을 하며 다시 황산으로 돌아와 은거하고 만다.

그것이 그가 무림에 나간 지 꼭 일 년만이었다.

후일(後日)에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낙척문사에게 별호를 붙여 준다.

 

---패천자(覇天子).

 

패천자(覇天子)라고...

원한 것은 아니나 낙척문사는 패천자(覇天子)라는 거창한 별호를 얻게 된 것이다.

[... 이분이 패천자(覇天子) 조사님!]

능천한은 크게 놀랐다.

그의 아버지 패천황룡은 패천자가 자신의 일신절기를 적어 남긴 패천무경(覇天武經)으러 대공(大功)을 이루었다.

따라서,

패천자(覇天子)는 능천한에게 사조(師祖)가 되는 것이다.

[소손 능천한 사조님을 배견합니다!]

능천한은 패천자의 유체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패천자는 패천황룡을 능붕비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인상이나,

그 속에는 대해(大海)가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럽다.

그러나 한번 노하면 천지(天地)가 뒤집어지고 만다.

이것은 어쩌면 능천한에게까지 이어지는 패천일맥(覇天一脈)의 전텅인지도 모른다.

[...!]

능천한은 계속 글을 읽어 나갔다.

 

<... 천수가 다해감을 느끼던 노부에게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그것은 패천신륜(覇天神輪)의 예기(銳氣)가 지나쳐서 천하를 해랄 우려가 있음 때문이었다...>

 

능천한은 미소를 지었다.

[사조께서는 생불(生佛) 같으신 분이셨다.]

그는 패천자를 우러러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패천자의 얼굴에 금방이라도 미소가 감돌 듯이 보였다.

 

<이에, 패천신륜(覇天神輪)과 죽간에 적혀 있던 마지막 절대신초(絶代神招)를 노부와 함께 사장시킬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야 천기를 알게 되었다. 천기는 노부의 후손이 노부와 인연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패천신륜을 남기나니... 부디 하늘의 호생지덕을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명심할지어다.>

 

[사조님의 말씀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능천한은 패천자의 유체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양피지는 아직도 여러 장이 남아있었다.

능천한은 그중 뒤쪽의 서너 장을 먼저 읽어 보았다.

[!]

뒤쪽의 양피지를 읽던 능천한은 절로 탄성을 질렀다.

그곳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강(超强)의 절대 신초 한 가지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패천제육절식(覇天第六絶式).

<만겁패천초극류(覇天超極流).>

 

[패천제육절식(覇天第六絶式)은 오식(五式)이 아니고 육식(六式)이었다!]

능천한의 두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패천대륜오절식(覇天大輪五絶式).>

 

강기로도 륜()으로도 쳐낼 수 없는 천하제일의 패도절기가 이것이다.

그 무적의 오식(五式)에는 다음의 명칭들이 붙어있다.

 

---벽뢰섬(霹雷閃).

---만절환(萬絶幻).

---천중압(天重壓).

---겁멸파황류(滅破荒流).

---폭천혈강류(瀑天血).

 

한데,

놀랍게도 패천오절식 이후의 마지막 일초식이 있었던 것이다.

당금 천하에서는 폭천혈강류(瀑天血)를 받아내는 사람도 없는 실정이다.

하물며,

패천제육절 만겁패천초극류(覇天超極流)의 위력이야 오죽하겠는가?

사실,

패천자(覇天子)도 만겁패천초극류(覇天超極流)를 연마하지 못했다.

다만,

죽간(竹簡)에서 번역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능천한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만겁패천초극류의 구결을 읽어 보았다.

아무리 난해한 기공이라도 한번 보아 그 오묘한 이치를 알아낸다는 능천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천한은 만겁패천초극류의 외형만을 간심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만겁패천초극류는 지극히 현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공이전의 지극히 광대한 이치를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일시지간에 깨우치기는 불가능한 절대신초이다. 두고 두고 음미해 보아야 할 것같다.]

능천한은 만겁패천초극류의 초식을 적은 양피지를 깊게 간수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패천자가 적어 놓은 글에 시선을 보냈다.

[... 런 일이 있었다니...]

갑자기 능천한의 안색이 심하게 흔들렸다.

양피지의 나머지 부분,

그곳에는 상상치 못할 한 가지 전대비사가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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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정전야(出征前夜)

 

 

 

"내일,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죽는다."

너무도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인물은 아직 젊은 여인이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흰 반면 가느다란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목구비는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조각이 살아서 말을 하는 듯하다.

한 쌍의 눈은 가늘고 길다.

그런가 하면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고요하며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어둑한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여인의 눈빛에 동요가 떠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여인의 별호는 테츠노초우, 즉 철접(鐵蝶)이다.

오랜 세월 동영(東瀛;일본)의 밤을 지배해온 인자(忍者)들의 양대 파벌 중 이가류(伊賀)의 당대 당주(堂主)가 그녀다.

 

본래 이가류의 당주는 용사무(龍司戊)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가류는 삼 년 전에 벌어진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내분에 휘말려 멸문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용사무는 장남 용태랑(龍太郞)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가류 인자들은 용사무의 장녀이며 <강철(鋼鐵)의 나비()>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용천파(龍千波)를 자신들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게 되었었다.

 

"황제가 표적인 이상 척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역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철접 용천파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빛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가류 내에서도 엄선한 인자들답게 두려움 따위는 목숨에 대한 미련과 함께 온전히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곳은 동영이 아니라 이역만리 중원이다. 초목개병(草木皆兵)!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철접 용천파의 말에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인 그녀의 말 대로 이곳은 자신들의 고향 동영, 즉 일본(日本)이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주인을 죽이려는 처지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희망일 뿐이다.

"우리가 내일 죽는 대신 우리의 피붙이들은 막북(漠北)의 새로운 터전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고 맡겨진 바의 소임을 완수하기 바란다."

당주인 철접의 훈시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철접이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한다.

사람들도 철접을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을 한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이며 내일 치를 거사에 대한 결의의 표현이다.

절을 하는 여()인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지만 우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철접이 일어나 밀실을 나갔다.

당주가 자리를 뜬 밀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밀실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접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사내들의 짐승같은 신음이 천둥치듯 들려온다.

시노마츠리... <죽음()의 축제()>.

철접 자신은 혐오한다.

하지만 다른 인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는 광란의 축제가 밀실에서 밤새 이어질 것이다.

 

전란(戰亂)이 끊일 날 없는 동영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여자를 품게 해주는 전통이 있다.

여자를 품지 못하고 죽으면 그 미련 때문에 혼백이 성불(成佛)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인자들이 임무에 나서는 것도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인자들 역시 출정전야(出征前夜)에는 원하는 대로 여자를 품을 수 있다.

물론 여자 인자들의 경우는 남자를 구해 안기는 것이 전통이다.

극한의 쾌락에 몸을 맡기고 나면 목숨은 하찮게 느껴지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을 잊은 채 온전히 임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욕정을 해소할 대상을 밖에서 구하여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역만리 중원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상대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자칫 자신들이 내일 치를 막중한 거사가 들통 날 위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자신들끼리 뒤엉켜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남녀 인자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쾌락에 빠져들고 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목숨들이다.

인륜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본능을 채워줄 대상뿐이다.

 

(하늘 아래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다지만 우리네 인자들만큼 비참한 삶이 또 있을까?)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소음을 들으며 철접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자들의 도구가 되어 개처럼 부려지다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이 인자들의 숙명이다.

자신의 아버지 용사무와 오빠 용태랑 역시 권력에 눈이 먼 한 인간의 욕망에 휘둘렸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았었다.

그리고 가엾은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가 당한 처절한 최후를 떠올리면 지금도 슬픔과 분노가 전율이 되어 온몸을 훑고 지나는 철접이었다.

 

삼 년 전, 그녀는 중상을 입은 채 어머니와 함께 막부의 관군들에게 쫓겼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어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철접을 숨겨두고 관군들을 유인해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군들에게 사로잡힌 어머니는 철접이 숨어있는 근처로 끌려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혔으며 마침내 손가락과 발가락이 차례로 잘려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내 딸이 숨어있는 곳은 발설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악에 바친 관군들은 어머니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었다.

어머니는 이미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리고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유린당하며 어머니는 도살장에 끌려와 도축당하는 짐승같이 울부짖었었다.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때마다 부러진 뼈들이 장기를 찌르고 생살을 찢어댄 때문이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하는 어머니와 숨어있는 철접의 시선이 몇 번인가 교차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린당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너무도 다정하여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자 관군들의 만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관군들이 떠난 후에도 철접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다가는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때의 형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처참한 몸뚱이를 남겨두고 철접은 피눈물을 흘리며 현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다른 인간의 도구가 되어 결국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하는 것이 인자의 삶이고 숙명인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다른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내 의지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어머니의 처절한 죽음을 떠올린 철접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며 밀실의 문 앞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여자 인자들의 흐느낌과 남자 인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

 

"...!"

철접의 고요하던 눈동자에 오늘 밤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곳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은신하고 있는, 오십여 년 전에 버려진 황폐한 장원의 입구였다.

"... 미안해 누나."

철접의 평정심을 깨트린 것은 이제 십오륙 세쯤 된 소년이다.

얼굴이 계집아이같이 해맑고 눈이 유달리 커서 겁먹은 사슴을 연상케 하는 그 소년은 바로 철접의 하나뿐인 핏줄 용차랑(龍次郞)이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용차랑의 몸과 의복은 먼지에 덮여있고 땟국물로 얼룩져 있다.

용차랑의 뒤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수천 리 밖 막북(漠北)에 있어야할 어린 동생...

용차랑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을 본 철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절망감을 느꼈다.

유일한 핏줄인 이 아이가 예기치 않게 나타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이가류 종가(宗家)의 후손으로 안전한 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어. 나도 영락제(永樂帝)를 척살하는 살행(殺行)에 참가할 기회를 줬으면 해."

용차랑은 열두 살 위인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철접의 시선은 용차랑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당주님."

여든 살을 바라보는 늙은 인자 시바타(紫田)가 철접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연다.

"도련님께서 혼자라도 북경(北京)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타는 당장 할복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철접은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용차랑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한번 세운 뜻과 고집은 꺽은 적이 없는 아이다.

다시 막북으로 돌아가라거나 내일 있을 거사에서 빠지라고 해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거나 따돌리려고 시도했다가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내일의 거사를 무산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따라와라. 같이 갈 곳이 있다."

철접은 한숨을 쉬며 폐허가 된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용차랑과 늙은 인자 시바타가 눈치를 보며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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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修羅天極尊 --- 修羅天尊經

 

 

 

[크크크... 꼬마야! 정신이 드느냐?]

능천한의 귓전으로 괴팍스러운 음성이 뇌성같이 웅웅거렸다.

(죽지 않았는가? 패천동부(覇天洞府)를 지키지도 못하고... 죄스럽게 살아 있단 말인가?)

주르르...!

한 줄기 눈물이 꼭 닫힌 능천한의 속눈썹 사이에서 흘러 내렸다.

(패천지혼(覇天之魂)의 후예가 되어 자랑스런 전통도 지키지 못하다니... 아버님을 어찌 뵙겠는가?)

능천한의 가슴이 천만 근으로 무거워졌다.

[쯧쯧! 사내녀석이 계집처럼 눈물을 흘리다니...!]

어둠 속에서 괴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잃었으면 찾아내라. 도산검림(刀山劍林)에라도 뛰어들어 기필코 쟁취하라! 받았으면 십 배로 돌려주어라!]

능천한은 입술을 악물고 눈을 떴다.

순간,

--- !

능천한의 두눈에서 뇌전이 일었다.

(역시!)

그 모습을 보며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리고 그 뇌전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능천한은 칠흑같은 어두운 석실에 낮같이 환해보이는 것을 느꼈다.

(내공이... 상상치 못할 정도로 늘었다.)

내공뿐만이 아니었다.

기이한 영감이 쾌활하게 전신을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쌍교가 열리며 심령이 자연과 교감하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만 능천한으로서는 당장에 그같은 변화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

능천한은 깊디깊은 눈빛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예의 괴인이 있었다.

범인이라면 보자마자 까무러칠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의...

그러나...

[...!]

능천한의 시선은 아주 담담했다.

그것은 그의 속에 보이지 않는 태산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 어떤 괴사도 그의 정력(定力)을 흔들지 못하리라.

(역시다. 볼 수록 엄청난 놈이다. 겁이 날 정도로...!)

괴인은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로 불리던 괴인...

능천한의 기도는 그런 괴인을 떨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크크... 이놈! 네놈은 존장을 모실 줄도 모르냐? 하물며 다 죽어가던 네 녀석을 살려 주었거늘...]

괴인이 괴팍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인(魔人)이다. 그럼에도 하찮은 마도(魔徒)들같이 마기가 흐르지 않은 것은 극마지경(極魔之境)에 가까워진 자이기 때문이다.)

능천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중히 포권하여 예를 차렸다.

[선배의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유현한 시선으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이놈 눈빛 봐라!)

능천한의 시선에 접한 괴인은 가슴이 흔들렸다.

능천한의 단순한 눈빛에도 천만 근의 무게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선배님의 존함을 들을 수 있을지요?]

능천한이 정중하게 물었다.

괴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본존이 늙었단 말인가? 네놈같이 방자한 애송이 하나 패줄 마음이 일어나지 않다니...!]

괴인은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일지를 않았다.

육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이 하던 대마두(大魔頭)...

[결례가 되었으면 용서하십시오!]

능천한이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괴인의 눈가에 미소가 중얼거렸다.

(죽었다 깨어나도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괴인은 능천한에게 급격히 기우는 자신을 느꼈다.

인간을 철저히 증오하던 그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변화가 굳을 대로 굳은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흐흣! 노부의 이름을 듣고 싶으면 네 녀석의 이름부터 말해주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

괴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인의 어조에서 괴팍스러움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후배는 능천한이라 합니다!]

능천한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능가(陵家)란 말이냐?]

괴인의 얼굴이 와락 이지러졌다.

우르르르---!

뒤이어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폭발하듯이 일어났다.

그의 모습은 삽시에 지옥에서 뛰쳐나온 아수라같이 변했다.

(나의 추측이 맞겠구나!)

격동하는 괴인을 보며 능천한 두 눈이 착잡한 빛을 발했다.

[으음... 능붕비(陵鵬飛)의 후손이란 말이냐?]

괴인이 칼에 맞은 듯이 신음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후배의 엄친이십니다!]

능천한이 무겁게 말했다.

[으음...!]

괴인이 괴롭게 신음했다.

(하필이면... 육십여 년을 지옥에서 썩게 만든 원수 놈의 자식이라니...)

괴인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갈등, 분노,

그리고 탄식으로.

능천한의 안색도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그도 괴인의 누군인지를 알아낸 것이다.

(아버님이 가둔 대마종(大魔宗)의 손에 구함을 받다니...)

그의 얼굴에 괴로운 빛이 흘렀다.

[...!]

[...!]

침묵.

어둠 속에서 일노일소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선배님께선 바로...!]

능천한이 입을 열자 괴인이 손을 저었다.

[알았으면 되었다.]

[으음...!]

신음하는 능천한을 바라보며 괴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패천멸절십팔뢰(覇天滅絶十八牢)는 실로 지독한 곳이다.]

[...!]

[수백 가지 기관이 중첩되어 있어 일보를 움직이는 사이 열 번은 사선을 넘어야할 정도였다. 그러나, 본존도 마도제일뇌(魔道第一腦)라 불릴만큼 기관지학과 기문둔갑에 능통하다. 단순히 기관만이었다면 본존의 발길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능천한은 묵묵히 괴인의 말을 들었다.

(많이 변했다. 육십여 년을 갇혀 지내면서 마성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능천한의 얼굴에서 그늘이 많이 사라졌다.

[가장 지독한 것은 묵옥강석(墨玉剛石)의 관문이었다!]

괴인은 치를 떨었다.

 

--- 묵옥강석(墨玉剛石).

 

돌이면서 강철보다도 오히려 단단한 묵옥석(墨玉石)을 말한다.

패천멸절십팔뢰는 모두 열 여덟 개의 관문이 있고,

매관문은 두께 삼십 자, 무게 오십만 근의 묵옥강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묵옥강석의 관문은 밖에서는 열 수 있으되 안에서는 절대 열지 못한다.

그 관문은 오로지 안에서 힘으로 부수고만 통과할 수 있다.

[육십 년 전... 본존은 하나의 묵옥강석인 관문을 부수는데 꼬박 오 년을 보내야 했다.]

[...!]

괴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대로라면 아마 세 관문을 부순 뒤 탈진해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본존은 묵옥강석의 관문을 부술 파괴적인 기공(氣功)연 연구하게 되었다.]

괴인의 괴악스런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득의의 미소,

능천한은 한곳 부서진 석벽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커먼 묵옥강석이 모래같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가공하다. 보검으로 흠집도 못내는 삼십자 두께의 묵옥강석이 일격에 부서지다니...)

[크크... 꼬박 일갑자가 걸렸다. 본존은 마침내 사상최강의 파천절기(破天絶技)를 창안할 수 있었다.]

말을 하며 괴인은 우수를 번쩍 들었다.

그의 우수는 먹물에 담근 듯이 시커매져 있었다.

그리고,

--- !

--- 자자작!

괴인의 오른팔 전체에서 먹물을 뿌린 듯이 시커먼 묵강(墨罡)이 쏟아졌다.

--- --- --- !

굉벽(宏霹)!

벽력성이 터지며 오십 자 두께의 석벽이 박살이 났다.

실로 놀라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가공스럽군. 저 기공 앞에서는 어떤 호신강기라도 남아나지를 못하리라. 사상최강이라고 한 말이 헛것이 아니다.)

능천한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크크... 이름하여... 묵황굉벽뢰(墨荒宏霹雷)라는 것이다.]

[묵황굉벽뢰(墨荒宏霹雷)!]

능천한은 입속으로 되뇌었다.

괴인은 말을 이었다.

[두들겨 부수는 데에는 묵황굉벽뢰 이상의 무공이 없다. 너희 능가일문의 패천대륜오절식(覇天大輪絶式)이라도 예외는 아니지!]

[...]

능천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패천일문에는 두 가지 초절정의 무공이 전해 내려온다.

 

---패천존후신강(覇天尊吼神罡),

---패천대륜오절식(覇天大輪絶式).

 

당금 천하무적으로 통하는 패천이대절기가 이것인 것이다.

[그러나... 묵황굉벽뢰에도 약점이 있다. 그것은 너무 강하다는 점이다.]

[...!]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의 말하려는 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영리한 놈!)

괴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묵황굉벽뢰는 강하다. 그만큼 내력의 소모가 크지. 사백 년 이하인 내공으로는 한 번밖에 쳐내지 못하지...]

 

---삼백 년 내공,

 

무려 오갑자에 이르는 공력으로는 한 번밖에 쳐내지 못한다니...

문득,

괴인은 허리춤의 누더기를 더듬었다.

이내 그의 손에 지저분한 양피지 책자가 쥐어졌다.

[옛다! 받아랏!]

괴인은 양피지 비급을 능천한의 앞으로 던졌다.

[...!]

[흐흐...!]

괴인은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애당초 네 녀석의 애비에게 빛을 받으려 했으나 이제 생각을 바꾸었다.]

[...!]

능천한은 말없이 들었다.

[이제 본존은 이곳을 나갈 것이다. 나간 직후 다시 이곳을 무너뜨려 막아버릴 것이고...]

괴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능천한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평생을 갇혀 살기 싫으면 그 비급 안의 묵황굉벽뢰를 익혀야 할 것이다!]

스스스스!

말을 하며 괴인은 둥실 떠올랐다.

[크크... 세상 구경을 하고 싶거나... 본존을 다시 붙잡고 싶으면 백만 근의 돌더미를 깨치고 나와야 할 것이다!]

--- --- !

--- --- ---!

시커먼 강기가 일며 패천동부를 가린 돌더미들이 박살이 났다.

[--- 하하하!]

--- 이잉!

그사이로 괴인은 뇌전이 흐르듯이 빠져 나갔다.

--- --- !

괴인이 빠져 나간 직후,

굉음이 일면서 다시 돌더미들이 부서져 내려 입구를 막아버렸다.

능천한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약한 심보를 지니신 분이군.]

능천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

그는 허리를 굽혀 발앞에 떨어진 낡은 비급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전자체(篆字體)의 칙칙한 비급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라천존경(修羅天尊經)>

 

[역시...!]

능천한은 신음하며 비급의 겉장을 넘겼다.

 

<수라(修羅)는 독존(獨尊)이기를 원한다. 수라천존경(修羅天尊經)의 주인은 곧 수라일문의 당대문주가 된다.

수라존(修羅尊) 절필(絶筆).>

 

수라존(修羅尊)은 천여 년 전의 인물이다.

마종(魔宗)이었으나 정사중도에 섰던 인물...

수라존 이후 수라일문(修羅一門)은 암중에서 수라천존경에 힘을 더해왔다.

수라천존경은 수라존 일인의 진전이 담긴 것이 아니고 십이대를 걸치며 암중의 마웅들이 그 진수를 첨가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능천한의 시선은 수라문 제십이대문주의 서명에 눈길이 머물렀다.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 탁무영(卓武影)>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

수라일마존(修羅一魔尊)의 서명이 거기 있는 것이다.

 

수라천극존!

그는 천 년에 걸친 수라일문의 힘을 믿었고,

그래서 천하에 나와 무림을 발아래 두려고 했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는 듯이 보였다.

마도에는 그의 적수가 없었고,

정파에서도 삼존이 손을 잡기 전에는 자신을 어쩌지 못함을 알았다.

그래서 기고만장한 것인데,

어느 날,

새파란 서생이 그를 찾아왔고,

비무를 청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요놈정도야 했다.

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애송이의 공력이 너무도 무서웠다.

무려 오백 년에 이르는 내공,

상상치 못할...

너무도 가공스러운 공력이었다.

그래도 수라천극존은 한 가닥 자부심을 갖고 그 애송이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애송이의 내공은 갈수록 더 강해졌고,

반면 수라천극존 자신은 파김치가 되어 갔으며,

마침내,

삼주삼야만에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은 무릎을 꿇고 만다.

치욕의 패배!

그리고,

그리고 그 새파란 애송이에 의해 패천동부라는 지옥같은 곳에 갇히고 만다.

그것이 일갑자전의 일이었고...

수라천극존을 패배시키고 가둔 인물은 후일 패천황룡(覇天皇龍)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며, 절대 불가침의 천하주제인(天下主宰人)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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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전 공지>

무림일기는 원스토어, 미스터블루, 리디북스, 판무림등에 연재중인 신작입니다.

연재가 진행중인 작품이라 블로그에 많이는 올리지 못합니다.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이라 블로그에 올리는 데 제약이 있기도 하고...

맛보기 삼아 앞 부분을 일부 올릴 예정입니다.

물론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내용은 수정이 될 것입니다.

연재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와룡강 무협소설

 

               무림일기 -武林日記

 

 

 

 

서장(序章)

 

 

종말(終末)과 시작(始作)

 

 

 

시뻘건 불길이 뱀의 혓바닥처럼 사방에서 넘실거린다.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던 실내는 이미 불길에 삼켜져 용광로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보좌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 엄정(嚴正)한 자태를 추호도 흩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화려한 궁장과 구름같이 틀어 올린 첩지머리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으나 여인은 마치 남의 일인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연왕(燕王)의 왕사(王師) 도연(道衍)!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원한다면 본후(本后)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물네 살에 불과한 젊은 나이지만 여인의 말에는 추상같은 위엄과 태산의 그것같은 무게가 서려 있다.

"만일 거부하거나 사소한 토라도 달 경우 홍무(洪武)폐하로부터 전해진 명조(明朝)의 국새(國璽)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길과 함께 실내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연기 속에서 여인의 눈이 청옥(靑玉)처럼 서늘한 빛을 발한다.

"아미타불! 천한 중이 어찌 감히 존귀하신 황후(皇后)마마의 성지를 거스를 수 있겠소이까?"

도연은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나이 이미 예순 일곱이지만 눈앞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손녀뻘의 어린 여자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진다.

단지 그녀의 신분이 황후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 가냘픈 육신 안에 품고 있는 단호한 결기(決氣)는 도연의 육십칠 년 삶을 되돌아봐도 비견될 대상이 없는 정도였다.

"이 아이를... 세상이 아직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 핏덩이를 지켜주겠다고 신불(神佛)에 대고 맹세하라. 그리하면 본후도 전국의 옥새를 내놓겠다."

여인은 자기 발치에 놓인 상자를 지나가는 눈길로 가리키며 말했다.

뚜껑이 열려있는 상자 안에는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가 뉘어져 있다. 태어난 지 하루 이틀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듯 핏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핏덩이다.

"신불에 기댈 것도 없이 빈승 도연의 명예를 걸고 황자(皇子) 아기씨를 험한 인심(人心)으로부터 지켜드리겠소이다."

"과연 그대가 약속을 지키는지는 혼령(魂靈)이 되어 지켜보겠다."

도연의 다짐을 들은 여인은 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근에 출산을 한 몸인데다가 옷과 머리에 이미 불이 옮겨 붙은 상태임에도 그녀의 운신(運身)에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 막내아들을 서달(徐達)의 막내 딸 서묘금(徐妙錦)에게 보여주면 국새를 내줄 것이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건문제(建文帝)의 황후 마은혜(馬恩慧)는 넘실거리는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마치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듯이...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마황후의 몸은 잠깐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내 도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난(靖難;나라의 위난을 평정함)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연왕 주체(朱棣)의 군세에 금릉(金陵)이 함락 당하던 날 자금성(紫金城)의 깊은 곳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오직 두 명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거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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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巨魔가 준 奇遇

 

 

 

어둠().

지옥(地獄)인 듯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무너진 석실(石室)이다.

 

---패천동부(覇天洞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전통이 잔해로 부서져 내려앉아 있었다.

한쪽 석벽이 강한 힘에 부딪혀 무너져 있다.

한데,

무너진 그 석벽의 안쪽은 또 다른 석실(石室)이 아닌가?

반쯤 무너진 석실...

무너진 돌 더미 사이로 피()가 흐른다.

섬칫한 선혈이다.

돌 더미 사이로 황포청년의 상체가 보였다.

그 청년의 상체는 끔찍하도록 갈라져 선혈이 흐르고 있다.

죽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청년,

능천한이었다.

패천잠룡(覇天潛龍)이라 불리던 일세기재인....

쓰러진 능천한의 위로 죽음보다 더 깊은 적막이 흐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암흑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찰나()같기도 하고...

영겁()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이다.

한데,

--- --- !

문득 석실 후면으로 거창한 울림이 전해왔다.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방금 전의 진동과 굉음이 환상이었다고 비웃는 듯이...

숨을 죽이는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환상이 아니었다.

--- --- !

콰르르르---!

재차 강렬한 굉음과 함께 진동이 일어났다.

처음의 진동보다도 한층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폭발이 일어난 곳이 처음의 그곳보다 가깝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 콰쾅!

--- !

--- --- !

일정한 간격으로 굉음이 반복되었다.

굉음에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우선,

굉음이 일어나는 간격이 점차 멀어진다는 것이다.

첫번째 굉음에서 두번째 굉음이 일어나는 데는 일다경이 채 안 걸렸었다.

그러던 것이,

회수가 거듭함에 따라 굉음 사이의 간격이 길어졌고,

열번째 굉음부터는 아주 현저해졌다.

마침내는 굉음의 간격 사이가 반각 정도로 멀어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예의 굉음이 회수를 거듭함에 따라 급격히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굉음이 일어나는 반원지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을 뜻하리라.

콰콰콰--- !

--- --- !

어느 순간,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것같은 굉음이 진동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르르르르...

반쯤 무너진 석실의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그 직후

[--- 하하하...!]

거창한 웃음소리가 석실의 후면에서 터져 나왔다.

격정과 분노가 뒤엉킨 장소였다.

[크크크... 능붕비(陵鵬飛)! 네놈에게 일갑자 동안이나 갇혀 지냈다니...!]

섬칫한 살기를 품은 장소가 뒤를 이었다.

범인이라면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고 말리라.

그만큼 장소성에는 살기와 분노가 섞여있는 것이다.

[크크... 네놈에게 패하여 갇힌 치욕이 본존(本尊)을 새롭게 탄생하도록 만들었다.]

석실 후면의 괴인은 이를 갈았다.

어떤 처절한 한이 있는가?

쿠르르르르---!

석실이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또 다시 굉음이 일어나려는 것이다.

[크크... 패천멸절십팔뢰(覇天滅絶十八牢)를 나서게 된다면...]

굉음 속에서 예의 괴성이 쩌렁쩌렁 울려나왔다.

[능붕비... 네놈에게 그 혹독한 고독과 치욕을 맛보게 해 주리라.]

괴음(怪音)이 끝나는 순간,

--- --- !

--- --- !

천붕지열(天鵬之裂)!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폭음이 지척에서 터졌다.

[크하하하--- 하하!]

가공할 살기가 담긴 웃음소리...

우르르르--- !

우수수수--- 스스슥!

석실후면의 석벽이 모래같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 !

--- --- 자작!

시커먼 어둠 속에서 전광(電光)같은 두 줄기 빛이 쏟아졌다.

이럴 수가...

그것은 사람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眼光)이 아닌가?

어찌 인간(人間)의 눈에서 이같이 가공스런 안광이 쏟아진단 말인가?

[크크크---!]

스스스스슥---!

괴기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지옥의 입구같이 시커먼 공동에서 일인(一人)이 날아 나왔다.

그 인물(人物).

그는 한 마디로 괴인(怪人)이었다.

시커먼 모발이 상체를 뒤덮고 있으며,

그 사이로 예의 가공스런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괴인의 몸에는 너덜너덜해진 천조각이 걸려 간신히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었다.

[크크크... 드디어... 드디어... 나왔다. 패천멸절십팔뢰의 그 끔찍한 금제를... 이제야 깨트리고...!]

석실로 들어서며 괴인은 격동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과거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어이없이 좌절당하고 일갑자의 긴 세월을 지옥의 암흑 속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문득,

[피비린내 아닌가?]

갑자기 괴인의 두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너무도 오랜만에 신선한 혈향(血香)을 접한 때문인가?

괴인의 눈빛은 섬칫할 정도로 괴이하게 빛났다.

그는 노려보듯이 무너진 돌더미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돌더미 사이로 선혈이 흐르고...

능천한이 반신을 돌더미에 파묻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애송이 놈이 죽어 있군.]

그제야 괴인은 패천동부가 무너져 있음을 깨닫고 안색이 일변했다.

[패천동부(覇天洞府)가 무너지다니... 능붕비 그놈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괴인의 눈에서 뇌전(雷電)이 흘렀다.

그의 입가로 괴소가 흘렀다.

[크크... 누가 있어 애송이를 어찌하겠는가? 본존을 패퇴시킨 오백 년 내공을 지닌 그 놈을...!]

괴인은 괴소를 지으며 능천한에게로 다가갔다.

[아주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수법에 내부가 흔들며 살지는 못하겠군!]

괴인은 아무렇지 않게 능천한을 발로 툭 차보았다.

그때였다.

[!]

갑자기 괴인의 두눈이 찢어져라 치떠졌다.

--- !

그와 함께 그의 두눈에서 가공스런 안광이 흘렀다.

그는 급히 능천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르르르---!

스스스스스!

능천한의 하체를 암석들이 어떤 극강한 힘에 모래로 부서졌다.

스스슥!

그 사이에 능천한의 몸이 둥실 떠올라 괴인의 손에 들어왔다.

[...!]

능천한의 몸을 받아든 괴인의 전신이 격동으로 경련하였다.

[...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나타나다니...!]

괴인의 입에서 실성한 듯한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는 한눈에 능천한의 신맥을 알아본 것이다.

천하고인들의 눈이 불을 켜는 대기재(大奇才)임을...

[--- 하하하---!]

갑자기 괴인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우르르르르---!

--- 이이잉!

그 통에 석실 전체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크크크... 천극대정신맥이라니... 머잖아 천마(天魔)를 능가할 고금제일마종(古今第一魔宗)이 태어나겠구나!]

괴인은 격동에 몸을 떨며 능천한을 석실바닥에 내려놓았다.

능천한은 상체뿐 아니고 하체까지도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혈영군과의 일전에서 다친 건 아니고 무너진 석실에 깔렸던 것이다.

[크크... 죽을 지경의 중상이나... 존극수라기환강(尊極修羅奇環罡)으로 잠력(潛力)을 끌어내어주면 살아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괴인은 능천한을 내려다보며 단좌하고 앉았다.

그의 단좌 모습은 특이했다.

이내,

스스스스스---!

파츠츠츠츠--- !

괴인의 몸 주위로 강기가 고리같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지극히 편협되고 괴퍅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강기였다.

--- 르르르르---!

츠츠츠츠---!

이내 석실 전체가 괴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강기로 뒤덮였다.

--- 스스스스슥!

돌더미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래로 쓰러졌다.

--- 이잉!

뒤이어,

괴인의 쌍수가 능천한의 기해(氣海)와 단전(丹田)을 향했다.

콰르르르르---!

--- 이잉!

거창한 강기의 노도가 능천한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존극수라기환강(尊極修羅奇環罡)은 거침이 없었다.

--- 두둑!

--- --- 파팟!

능천한의 막히고 끊어졌던 심맥이 일사천리로 확 뚫려 나갔다.

삽시에,

갈가리 찢겼던 능천한의 전신심맥이 이어졌다.

그와함께,

--- 록르르르---!

--- --- 우웅!

능천한의 심맥 속에서 엄청난 폭풍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힘은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

이미 예상을 하고 있던 괴인조차 안색이 홱 변할 정도로...

 

인간에게는 잠재력(潛在力)이라는 것이 있다.

범인이라면 일평생 이 잠력이 백분지 일도 쓰지 못한다.

내공심법(內功心法)이라는 것은 실상 이런 인간의 잠력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다.

다만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에서의 차이로 마공(魔功)과 신공(神功)이 구별될 뿐이다.

,

신공(神功)은 지속적으로 끊어지지 않게 그 잠재력을 끌어낸다.

반면 마공은 잠재력을 속성으로 이끌어 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를 위해 편협하고 사이한 방법이 동원되며

마침내는 인성(人性)에 까지 마기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마공(魔功)이 신공(神功)을 능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마공(魔功)은 일정수준에 으르면 그 이상의 진전이 막힌다.

그 때문에 마()에 들어 마()를 뛰어넘는,

,

극마지경(極魔至境)에 드는 마도인(魔道人)이 거의 전무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정종신공(正宗神功)은 두드러진 진척이 보이지 않는 대신,

장기간의 끊임없는 수련이 따르면 보다 수월히 반선지경(半仙之境)에 들 수 있다.

()가 항시 정()에 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수(下手)들은 마()가 강해졌으나,

진정 천하대세를 가름하는 결정의 경지에는 마()의 수가 정()의 그것에 비견되지 못하는 것이다.

 

[... 대단하다! 본존보다 족히 백배는 강한 잠력을 지녔다니...!]

괴인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이라는 절대신맥을 지닌 능천한이다.

그의 일신에 숨겨진 잠재력은 일반인의 그것보다 만배 이상 강하다.

이것이 능천한을 범인(凡人)과 확연히 구별 짓는 것이 된다.

[크크... 잠재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강한 마종(魔宗)이 될 수 있지!]

괴인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쿠르르르르--- 르릉!

괴인이 일으킨 존극수라기환강은 끊임없이 폭풍을 일으켜 나갔다.

--- --- --- !

콰르르--- 르릉!

존극수라기환강에 자극받으며 능천한의 심맥에서는 더욱 강한 잠력이 뭉클뭉클 솟아 나왔다.

그리고,

그 잠력들은 능천한의 심맥을 가득 채우며 폭발을 위해 응축되어갔다.

[... 지독하군... 본존의 사백 년 내공으로도 감당키 어렵다니...!]

능천한의 잠력을 일깨우는 괴인의 전신에서 비오 듯 땀이 쏟아졌다.

그의 마공은 극마지경(極魔之境)에 들어서려는 절정의 마공이다.

그럼에도 그는 능천한의 잠재력을 감당치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다.

[크크... 힘은 드나 마도천마세(魔道天萬歲)를 위하는 일이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괴인은 미소를 띄웠다.

그는 전대에 십만의 인혈로 손을 적셨던 혈마(血魔).

그런 그가 진심으로 흐믓해 하며 미소를 짓는다.

천하가 그 사실을 알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쿠쿠--- --- 쿠쿵!

콰르르르르--- 르릉!

능천한의 내부에 거대한 화산이 꾹꾹 눌리어져 갔다.

그리고,

--- 콰쾅!

--- --- !

능천한의 내부에서 거창한 폭발이 일었다.

[--- !]

괴인이 불에 덴 듯이 능천한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 --- 쿠쿠---!

--- !

십팔경락(十八經絡), 십이중루(十二中樓), 임맥삼십육로(任脈三十六路), 독맥칠십이경(督脈七十二經)...

폭발은 노도를 몰아 거침없이 돌파해나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샹사현관(生死玄關)이라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이 종이짝 찢듯이 무너지며...

그리고...

--- 꾸꿍!

!

천지쌍교(天地雙交)가 대해같이 드넓게 확 터져 나갔다.

()는 누구이며,

자연(自然) 대우주(大宇宙)는 또 무엇인가?

천지(天地)가 심령(心靈) 교감(交感)하다.

...!

보인다!

()는 자연(自然)에 있고... 그 자연 또한 내 안에 있지 않은가?

내가 곧 자연(自然)이고... 자연(自然)이 내가 아닌가?

()!

너무도 큰 길이 대해(大海), 창공(蒼空)으로 광활히 열리다!

!

그것은 초극(超極)의 문()!

비상(非常)의 경지로 드는 관문이 아닌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잠룡(潛龍)의 등에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완전히 자라면 천지를 뒤덮을 거창한 날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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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血荒奪, 나타나다.

 

 

 

<제왕애(帝王崖)>

 

상고(上古),

전설의 신군(神君) 황제(皇帝)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제왕애 후면은 끝을 알 수 없는 절애로서 항시 짙은 운무에 뒤덮여 있다.

 

우르르르르--- !

--- --- 콰쾅!

제왕애(帝王崖)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으로 뒤흔들리고 있다.

츠츠츠츠!

한 명의 백의인이 허공에 둥실 떠있다.

일견하여 매우 청수한 인물이나,

지금,

--- --- !

그의 일신에서는 태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공스런 강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부서지는 경기의 파장이 창공을 뒤흔들며 뇌성으로 일어난다.

 

---패천황룡(覇天皇龍) 능붕비,

 

당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무적이라는 그의 잠자던 신위(神威)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르르르르--- 르릉!

--- --- --- !

[크으... 일갑자 전보다 몇갑절 강해졌다니...]

[... ... !]

[... 과연 황룡(皇龍)이다...]

고통과 경악으로 신음하는 인물들이 있다.

오인(五人)의 인물이 능붕비를 합공하고 있는 것이다.

두 명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들이 능붕비의 좌우측에 벌려 서 있다.

각기 흑의와 회의를 걸힌 노인들,

흑포노인은 지극히 괴팍스럽게 생겼고,

회의노인의 일신에서는 사악함이 줄기줄기 뻗치고 있다.

[쌍황(雙皇)! 다시는 인세(人世)에 나오지 말라고 했거늘...]

--- --- --- !

능붕비의 노성이 폭발한 듯 터지는 강륜()이 무더기로 일어났다.

--- ! --- !

[--- !]

[...]

두 노인은 능붕비의 공세를 맞받고는 입으로 선혈을 토했다.

그들...

과거 쌍황(雙皇)이라고 불리던 인물들이다.

 

---절대마황(絶代魔皇).

---역천사황(逆天邪皇).

 

()로 젖은 이름들을 지닌 전대의 대혈마(大血魔)가 그들이다.

그들은 일갑자 전 패천황룡에게 패할 때보다 두배 더 강해져 있으나...

그들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능붕비!

그의 진정한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능붕비...

그는 모종의 암수를 당하여 일신 공력의 육할밖에 쓰고있지 못하다는 것을...

[패천황룡(覇天皇龍)!]

문득 일성 사자후가 터지고,

--- --- !

능붕비의 전면으로 검붉은 강기의 무더기기가 쏟아졌다.

[철혈무정강(鐵血無情罡)!]

능붕비가 중얼거리며 마주 우수를 쪼개내었다.

--- --- !

그의 손에서 새파란 강기가 안개같이 일었다.

능붕비의 전면,

철혈(鐵血)로 뭉쳐진 듯한 인상의 장한이 우뚝 서 있다.

사자(獅子)의 형상을 한 흑포장한,

그는 오인(五人) 중 최강자(最强者)였다.

 

철혈묵사(鐵血墨獅) 정천학(鄭天壑).

 

철혈회(鐵血會)라는 패도문파를 이끄는 철사자(鐵獅子)가 그다.

지금 그의 무공수준은 중원제일(中原第一)로 불릴 정도였다.

천하는 철혈묵사의 진정한 실력을 반푼밖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 ! --- !

! !

[...]

철판이 부서지는 굉음이 터지고 철혈묵사가 휘청이며 물러났다.

그가 중원제일이면 능붕비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이다.

(흐흠... 사갑자나 넘는 내가 어린아이같이 밀리다니...)

철혈묵사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 앉았다.

그때,

[--- !]

[--- !]

크고 작은 인영이 동시에 능붕비에 짓쳐갔다.

그들은,

벽향이라 불리던 신비여살수(神秘女煞手)와 화려한 금룡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통천금룡제(通天金龍帝)! 월영극살(月影極煞)!]

콰르르르--- 르릉!

--- 이이잉!

능붕비의 입에서 뇌전같은 폭갈이 터지며 해일이 일었다.

--- --- !

[--- !]

[...]

통천금룡제의 월영극살이 허공에서 퉁겨 나갔다.

[... 너무 강하다...]

통천금룡제가 금포에 선혈을 토하며 신음성을 발했다.

능붕비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 강자였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붕비의 안면이 퍼렇게 물들어 가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 무형잔심독(無形殘心毒)에 당하다니...)

능붕비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벽향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떤 자들이기에 저 아이를 십여 년 씩이나 내 옆에 접근시켜 두었는가?)

그때,

[오행파황(五行破荒)!]

철혈묵사의 웅혼한 외침이 능붕비의 상념을 깨었다.

스스스슥!

휘르르르!

그와함께,

철혈묵사 등의 오인이 쾌첩하게 오행의 진세로 벌려섰다.

[오행파황진(五行破荒陣)이라... 잘 되었다. 본인도 그대들과 이 싸움을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으니...]

--- --- 이잉!

파츠츠츠츠...

능붕비의 몸 주위로 새파란 강기가 무지개같이 되어 올랐다.

그리고,

오행의 방위를 벌려선 오인(五人)에게서도 막강한 잠력이 해일같이 일어났다.

우르르르르...

육인의 몸에서 일어난 경기로 제왕애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수지류(水之流)!]

벽향의 입에서 날카로운 교갈이 터졌다.

--- 슈슉!

--- !

벽향의 교구에서 극랭한 기류가 폭포같이 쏟아졌다.

그리고,

[금지파(金之破)!]

[목지령(木之靈)!]

[화지승(火之昇)!]

통천금룡제 역천사황 절대마황의 폭갈이 그 뒤를 이었으며,

--- 이잉!

[토지파황극(土之破荒極)!]

철혈묵사가 대갈하며 몸을 떨쳤다.

--- --- --- !

콰르르르르---

() () () () ()의 다섯가지 강기가 천룡같이 뒤엉켜 백 장을 치솟았다.

[패천존후신강(覇天尊吼神罡)!]

--- --- !

거의 동시에 능붕비의 몸에서 건곤(乾坤)을 일시에 뒤흔드는 가공할 청강(靑罡)이 작열하였다.

--- --- !

--- --- --- --- !

[--- !]

[... !]

제왕애의 일각이 폭발에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 사이에서 오인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

콰르르르!

능붕비도 성하지는 못하여 선혈을 토하며 허공으로 퉁겨졌다.

[... 오백 년... 내공을 지녔다니...]

그 모습을 보며 철혈묵사가 헬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크크크...]

가슴 속을 긁어놓을 듯한 거북살스런 음소가 제왕애를 뒤흔들고,

--- --- !

--- --- 자작!

이럴 수가...

천지(天地)가 일시에 혈광(血光)으로 뒤덮였다.

거대한 혈륜(血輪)이 창천을 북 찢으며 허공으로 튕겨진 능붕비를 비켜갔다.

[... 혈황탈(血荒奪)![

혈광 속에서 능붕비의 경악에 찬 폭갈이 터졌다.

!

혈황탈(血荒奪)!

혈황탈(血荒奪)이라니?

천지십병(天地十兵)!

그중 사대마병(四大魔兵)에 드는 혈황탈이 나타났단 말인가?

[--- 카카!]

[우우--- 우읏! 폭천혈강륜(瀑天血罡輪)!]

--- --- --- !

--- --- 콰쾅!

--- 르르르!

천지함몰!

경천동지!

새파란 청강륜(靑罡輪)이 만상을 뒤덮다.

천지를 무너뜨리며 혈황(血荒)의 마병(魔兵)이 팔극(八極)을 무너뜨리다니...

[--- ---]

[--- !]

철혈묵사들이 피를 토하며 나뭇잎같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그리고,

스스스...

이내 사석이 가라앉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

철혈묵사 등은 눈을 부릅뜨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없었다.

패천황룡(覇天皇龍) 능붕비!

그의 웅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크크크...]

츠츠츠--- !

시뻘건 피그림자에 뒤덮인 한 명의 혈과인(血怪人)만이 그곳에 있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마기를 풍기는...

[혈종(血宗)!]

[대종주(大宗主)!]

철혈묵사 등의 오인(五人)이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

혈종(血宗)!

그자가 혈종(血宗)이란 말인가?

 

[크크... 능붕비... 잘 가라.]

혈인은 제왕애를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아주 웅후하고 형형한 한 쌍의 호목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혈종(血宗)... 마음껏 득의해라. 그대의 모든 공은 구천(九天)이 거두어 갈 것이니...)

호목은 깊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천(九天)?

구천(九天)이라니...

이것은 또 어떤 변수인가?

호목의 주인공...

그의 모습은 사자(獅子)의 모습이 아닌가?

[...!]

[...!]

스스스...

대풍운(大風雲)!

그것의 시작은 제왕애(帝王崖)에서의 대격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대풍운의 식보(式步)였으니...

 

X X X

 

패천동부(覇天洞府),

무너진 패천동부의 앞은 인혈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수십 명의 혈의인들이 갈가리 찢긴 모습으로 죽어 넘어져 있다.

그리고,

그 혈의인들의 시신중앙에 한 명의 거한(巨漢)이 누워 있었다.

구 척의 거구는 마치 거상(巨像)이 쓰러진 형상으로 누워있었다.

그의 등판에는 큼직한 핏빛의 장인이 찍혀 있었다.

그 거한은 거령패왕(巨靈覇王),...

그의 거부(巨斧)는 박살이 나서 나뒹굴고 있었다.

문득,

[...]

죽은 듯이 누워있던 거령패왕의 거구가 꿈틀하였다.

이어,

거령패왕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의 호목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패천신문... 그 위대한... 영화가... 무너지다니...]

거령패왕은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심맥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극악한 중수법에 당한 상태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거령패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너진 패천동부를 바라보았다.

[... 소문주님의 생사를 확인도 못하고... 죽는 불충(不忠)함을... 저지를... 수는 없는데...]

--- !

거령패왕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범인이라면 이미 절명했을 중상이었다.

그러나,

거령패왕은 철골(鐵骨)을 지니고 있어 즉시 절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 가야 한다...]

거령패왕은 비틀거리며 패천동부로 다가갔다.

하나!

!

그의 발이 작은 돌 뿌리에 걸렸고,

--- !

지축을 울리며 거령패왕의 거구가 거목이 쓰러지듯 넘어졌다.

[크으... 가야... 하는데...]

거령패왕은 엉금엉금 기어 패천동부로 다가갔다.

그가 기어 지나간 곳은 시뻘건 선혈로 물들었다.

실로 처절한 충정이었다.

점차,

기어가던 거령패왕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는 처절한 시선으로 무너진 패천동부를 바라보았다.

[... 소문주... 속하... 를 용서...]

--- !

거령패왕의 거구가 다시금 길게 눕고 말았다.

다시 적막이 분지를 뒤덮었다.

스스스...

간간이 부는 산풍만이 혈향(血香)을 몰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반각 후,

[--- !]

스스--- 스슥! 화르르...

창노한 침음성이 들리며 허공에서 시뻘건 홍포의 노인이 날아내렸다.

태양같이 이글거리는 안광,

시뻘건 적발(赤髮).

전신에서 뻗치는 가공스런 화기(火氣).

일견하여 뇌신(雷神)을 연상케 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불덩이같은 호목으로 패천동부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노안에 안타까운 빛이 흐르고 지나갔다.

[으음... 황산잠룡(黃山潛龍)이 천고기재라 하여... 노부의 재간을... 전수해주고 흙에 묻히려 하였는데...]

노인은 깊이 탄식을 했다.

[! 노부 벽력태세(霹靂太歲)의 대에서 벽력일맥이 끝나고 마는가?]

노인은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

벽력태세(霹靂太歲)라니...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그는 이미 일백 년 이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니던가?

일백 년 전,

천하를 남북(南北)으로 나누어 군림하던 두 명의 괴인이 있었다.

그들은 극히 독선적인 성격으로 천하를 전전긍긍케 만들었던 괴인들이다.

 

<남북쌍괴(南北雙怪)>

 

남괴(南怪) 벽력태세(霹靂太歲).

북괴(北怪) 혈음유령종(血陰幽靈宗).

 

바로 이들이다.

벽력태세는 극양기공(極陽奇功)으로 무적이었으며,

혈음유령종은 극음기공과 음유절기로 제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한 것은 백년 그 이전의 시대였다.

천하인들은 남북쌍괴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미 유계(幽界)에 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데,

그 남북쌍괴 중의 벽력태세가 버젓이 살아있지 않은가?

 

[!]

문득 벽력태세의 두눈이 전광(電光)을 쏘아 내었다.

그의 두 눈은 패천동부의 앞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거령패왕을 바라보는 것이다.

--- 스슥!

벽력태세는 일보를 움직여 거령패왕의 옆에 이르렀다.

[!]

벽력태세의 두눈이 휘황하게 빛났다.

[기재(奇才).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에는 비견될 수 없지만... 극양기공(極陽奇功)을 익히는 데는 그 이상이 없는 극강(極强)한 채질이다.]

벽력태세는 격동하여 부르짖으며 거령패왕의 거구를 옆구리에 끼었다.

[으하하하핫! 하늘이 벽력일맥을 버리지는 않으시는도다!]

화르르--- --- !

그의 거구가 선풍같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으핫핫! 반년! 반년이다. 벽력일맥사상 최강의 고수가 태어나리라!]

벽력태세의 득의한 광소가 황산권역을 뒤흔들며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

다시...

분지에는 깊은 적막이 깔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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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崩壞되는 覇天洞府

 

 

 

[...!]

능붕비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안색은 엄숙하게 굳어져 갔다.

[천하(天下)가 광풍(狂風)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천하인은 그것을 모르나 이 애비는 느낄 수 있다!]

[...!]

능천한은 안색을 굳혔다.

그는 경건한 자세로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였다.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이나... 쌍황이 일으켰던 풍운(風雲)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광풍(大狂風)이 불어오고 있다!]

[으음...!]

[풍운(風雲)... 중원(中原)과 변황(邊荒), 양쪽에서 일어난다. 중원의 광풍은 운중(雲中)에 있어 알 수 없고...]

능붕비는 문득 아들을 바라보았다.

[대초원(大草原)에 태양지혼(太陽之魂)이 있음을 아느냐?]

[태양지혼(太陽之魂)! 태양성부(太陽聖府)!]

능천한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태양성제(太陽聖帝)라는 변황사상 최강자(邊荒史上 最强者)의 전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능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황에 거인(巨人)이 난다면 그것은 태양의 후예일 것이고...]

[변황에 거인(巨人)이 나타났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한 명의 거인(巨人)이 변황제파를 수렴하고 있다. 그의 변황무림의 일통이 이미 완성되어 가고 있다.]

[으음...!]

능천한은 침음했다.

(변황의 거인이 변황을 일통한다면 그 칼끝이 중원(中原)을 겨누리라!)

능천한이 생각을 굴리는데 능붕비가 말을 이었다.

[천마혈겁(天魔血劫)... 초유의 대광풍이 일어날 것이다. 변황이나 중원 혈풍을 막아내려면 필히 고금제일존(古今第一尊)이 탄생하여야 한다!]

말을 하며 능붕비는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능붕비의 시선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님은 내가 고금제일존(古今第一尊)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신다!)

능천한의 시선도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그런 아들을 보며 능붕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한아... 네가 있기에 아버지는 걱정을 않는다.)

[...!]

[...!]

다시 적막이 흘렀다.

문득,

사르르르르...!

비단자락 끌리는 소성이 들리고 향긋한 방향(芳香)이 풍겼다.

능천한은 시선을 돌렸다.

한쪽의 월동문(月洞門)으로 한 명의 시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녀...

도저히 시녀로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능천한 정도였다.

시녀의 복장을 하였으나 은은한 품위가 배어 흐르는 미인이었다.

그녀의 교수에는 찻잔이 실린 쟁반이 들려 있었다.

[()를 가져왔습니다!]

시녀는 다소곳이 앉으며 두 부자사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벽향(碧香), 고맙다!]

능붕비가 자애롭게 시녀를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하하... 벽향의 차를 다리는 솜씨는 정말 일품입니다!]

능천한은 밝게 웃으며 찻잔을 집어들었다.

벽향이라 불리는 미시녀가 나타남으로서 정원전체가 한층 따뜻해졌다.

[허허... 오늘도 졌으나 내일은 순순히 지지 않을 것이다!]

능붕비는 껄껄 웃으며 석벽에 걸린 만년한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스스스슥!

우수수...

무형의 강기가 일어 만년한철의 표면을 말끔하게 깎아 내렸다.

바로 능붕비의 이심제기의 공력에 의한 것이었다.

문득,

[...!]

시녀 벽향의 봉목에 이채가 흘렀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실린,

그때, 능붕비는 천천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에 벽향의 봉목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

막 한 모금의 차를 마시던 능붕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마시지 마랏!]

--- 가각!

능붕비가 일갈하며 자신의 찻잔을 박살내었다.

츠츠츠츠--- 츠츳!

--- --- !

그와 동시에, 벽향의 교수가 뇌전(雷電)보다 빠르게 능붕비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너무나 거리가 가까웠으며,

너무나 뜻밖이고 촉막중인 기습이었다.

[벽향(碧香)! 무슨 짓이오!]

막 차를 마시려던 능천한이 아연하여 부르짖었다.

그러나,

--- --- !

--- --- 파팟!

[호호호호---!]

--- --- !

화르르!

굉음이 터지고 벽향이 교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찰나지간에 일어났다.

[아버님!]

능천한이 다급하게 능붕비를 불렀다.

그러나,

[괜찮다!]

쓰러졌어야 마땅할 능붕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죽지 않다니...]

이십 장 밖으로 날아갔던 시녀 벽향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능붕비...

그의 가슴에는 월아(月牙)형의 비수가 품자형으로 꽂혀 있었다.

꽂힌 부위는 치명적인 사혈들...

능붕비가 살아있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

능천한이 분노하여 벽향을 노려보았다.

[벽향(碧香)! 네가 감히 아버님을 시해하려 하다니...]

그때, 능붕비가 가슴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비수가 분명히 능붕비의 가슴에 꽂혔었건만,

능붕비의 가슴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으음... 이미 금강불괴지체를 이루었다니... 실수를 했구나!]

벽향이 싸늘하게 침음했다.

그녀는 더 이상 시녀 벽향이 아니었다.

잔월(殘月)같이 싸늘함을 발하는 한 명의 살수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월아밀살비(月牙密煞匕)! 월영천존(月影天尊)의 후예였느냐?]

능붕비가 묵직하게 벽향에게 물었다.

[월영천존(月影天尊)!]

능천한의 안색이 일변하였다.

 

---월영천존(月影天尊).

 

사백 년 전의 고금제일살수(古今第一煞手)를 말함이다.

완벽한 비밀 속의 전설적인 살수로써,

그가 한번 노리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월아밀살비(月牙密煞匕)는 호신강기파해전문인 월영천존의 독문암기인 것이다.

 

[그것은 알 필요없다!]

--- !

벽향은 냉갈하며 석벽 위로 치솟았다.

[월아밀실비는 돌려주마!]

--- --- !

능붕비의 손에서 월아밀실비가 떠나갔다.

[!]

화르르--- --- !

벽향은 허공에서 비틀하다가 석벽 너머로 사라졌다.

자신의 월아밀실비에 격중당한 것이다.

[천한아!]

능붕비는 침중한 어조로 능천한을 불렀다.

[, 아버님!]

능천한의 대답하며 시립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든다. 너는 즉시 팔걸(八傑)을 대동하고 패천동부(覇天洞府)를 지켜랏!]

[! 아버님은...?]

[벽향을 잡아오겠다!]

화르르르르---!

--- 애액!

능붕비는 창룡(蒼龍)같이 날아올라 벽향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갔다.

능천한은 사라지는 아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웬지 모를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버님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다. 별일은 없으리라.]

스스스슥!

능천한은 급히 정원을 벗어났다.

 

***

 

스스스--- --- 이잉!

화르르르---! --- 애액!

능천한은 여덟 명의 호형장한들을 이끌고 시신봉의 서쪽 신록으로 달리고 있었다.

팔인은 패천신문의 패천위대(覇天衛隊) 소속의 호웅들이었다.

그들은 패천팔걸(覇天八傑)로 불린다.

[문주님을 벽향이 암습했단 말입니까?]

한 명의 거한이 천둥같은 목소리로 외치며 능천한의 뒤를 따랐다.

구 척(九尺)의 거구,

철탑(鐵塔)을 연상케 하는 장한인데 한 손에는 거부(巨斧)를 들고 있었다.

그 거부(巨斧)는 날()의 길이만도 한자반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도끼였다.

 

거령패왕(巨靈覇王),

 

이것이 그의 별호다.

팔걸 중의 첫째이며 장차 능천한의 우비위(右臂衛)가 될 인물이다.

[그렇다네. 암중세력이 우리 패천신문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하네!]

능천한이 앞을 보고 달리며 무겁게 말했다.

그때였다.

[--- !]

[... !]

갑자기 팔걸 중 세 명이 배를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왜 그러는가?]

능천한은 다급히 멈추어섰다.

쓰러진 인물들은 팔걸 중에서도 가장 공력아 낮은 자들이었다.

[... 갑자기 배가...!]

삼인은 고통을 억누르며 억지로 일어섰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은 급격히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중독(中毒)당했다!)

능천한의 검미가 부르르 떨렸다.

수하들이 모종의 극독에 당했음을 알아차린 것이었고,

그와 함께,

그는 능붕비가 정원에서 자신이 벽향의 차()를 마시는 것을 제지했음을 상기했다.

(아버님은 차속에서 독이 있음을 아신 것이다. 이 모두 벽향, 그 계집의 것이다.)

능천한은 거령패왕 등을 돌아보았다.

[모두들 벽향이 주는 음식을 먹었는가?]

그러자,

팔걸 중 일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거령패왕만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낙양에 갔다가 막 돌아오던 길인지라...]

[으음...]

능천한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철저히 당했다. 지금쯤 또 다른 무리들이 본문을 치고 있을 것이다. 본문의 정예들은 중독당하여 힘을 쓰지 못할 것이고...!)

그는 다급해졌다.

(본문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패천동부를 지켜야 하는가?)

재빨리 결정을 내려야했다.

이내, 능천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공력이 높아 아직 독기가 발작하지 않는 사인(四人)을 가리켰다.

[그대들은 이들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해독을 하도록! 단 그대들도 중독된 상태라는 것을 명심해서 적을 발견하더라도 충돌하지 말것!]

[알겠습니다!]

칠걸의 대답을 들으며 능천한은 거령패왕을 돌아보았다.

[거패(巨覇)! 가자!]

[!]

화르르르---!

--- --- 애액!

능천한은 패천동부쪽으로 달려갔다.

패천동부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패천동부(覇天洞府)>

 

이는 패천신문(覇天神門)이 일어난 근원이다.

능붕비는 패천동부에서 패천무경(覇天武經)을 얻어 패천신문을 열었다.

그 때문에,

패천동부(覇天洞府)는 패천신문의 상징적인 근원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능붕비가 패천동부의 중첩된 기관을 이용하여 한 명의 절대마종(絶代魔宗)을 그 안에 가두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 패천동부의 기관을 해제하면 그 절대마종이 탈출하여 천하를 혈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

 

화르르르---!

--- --- !

능천한과 거령패왕은 널찍한 분지로 날아들었다.

그 분지 안에 패천동부가 있는 것이다.

한데,

[웬 놈들이냣!]

거령패왕이 벼락치듯 사자후를 터뜨렸다.

분지 끝에 수십 명의 혈의인(血衣人)들이 빙 둘러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벌써...!)

능천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혈의인들이 빙 둘러선 안쪽,

동부(洞府)가 하나 있는데 입구를 가린 청강석의 석문이 박살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발칙한...!]

--- ! --- 가강!

대노한 능천한의 쌍수에서 벼락치듯이 새파란 강륜()이 쏟아졌다.

[... 막아랏!]

[--- --- !]

대경한 혈의인들이 막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강륜()이 쏟아지며 그자들 중 서너 명이 두 동강나서 나뒹굴었다.

[소문주님! 졸개들은 제게 맡기십시오!]

--- 이잉! 우르르릉!

거령패왕이 벼럭같이 외치며 거부를 휩쓸어 갔다.

--- --- 파팍!

[--- 에엑!]

[--- --- 아악!]

혈의인들이 거령패왕의 거부에 피곤죽이 되어 나뒹굴었다.

[부탁하네!]

--- --- !

능천한은 혈의인들의 머리 위로 날아넘어 동부(洞府)로 날아들었다.

언뜻, 그의 눈에 동부입구에 파인 글씨가 보였다.

 

<패천동부(覇天洞府).>

 

[!]

--- 스슥! 화르르르---

안으로 날아들던 능천한의 신형이 급격히 허공으로 튕겨졌다.

--- --- !

그와 함께,

능천한이 섰던 자리로 벼락같은 혈강()이 떨어져 굉음을 일으켰다.

패천동부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날아드는 능천한을 기습한 것이다.

[--- !]

능천한은 대갈하며 쌍장을 내리쳤다.

--- ! --- 자작!

그의 장심에서 강륜()이 일어 동부(洞府)의 한쪽을 무찔러 갔다.

[크크... 패천잠룡(覇天潛龍)이 네놈이냐?]

--- 츠츠츠츠---!

시뻘건 혈강(血罡)이 능천한을 뒤덮었다.

--- ---!

[--- !]

능천한은 쇠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에 그대로 동부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의 공력이 너무 강한 때문이다.

[흐흐흐...! 후환을 걱정했는데 제 발로 죽으러 왔구나!]

스스스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능천한에게 한 명의 괴인이 다가왔다.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인데 전신이 붉으레한 혈영(血影)으로 덮여 있었다.

[누구냐?]

능천한이 몸을 세우며 일갈했다.

[혈영군(血影君)이라면 알겠느냐?]

그자가 혈영 속에서 음침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능천한의 안면이 부르르 떨었다.

[... 영염제(血影閻帝)의 후인인가?]

능천한이 무겁게 물었다.

 

혈영염제(血影閻帝),

 

오백여 년 전에 있었던 혈마(血魔).

잔혹한 마성을 지닌 그는 수만의 인혈(人血)로 손을 물들였었다.

결국, 전 무림의 분노를 산 그는 무림전체의 추격을 받아 추살되고 말았었다.

[흐흐... 어린 놈이 어는 것도 많다만 이만 죽어 주어야겠다!]

우르르르... 츠츠츠츠...!

혈영군(血影君)이라는 괴인의 몸주위로 칙칙한 혈강()이 일어났다.

(선공(先功)!)

능천한의 두눈이 그와 함께 번뜩였다.

[! 벽뢰섬(霹雷閃)!]

--- ! --- !

능천한의 손에서 뇌전보다는 빠른 강륜()이 쏟아졌다.

[!]

혈영군의 입에서 당황성이 터졌다.

능천한의 공세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천한의 공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만절환(萬絶幻)! 천중압(天重壓)!]

--- --- 쿠쿵!

콰르르--- 크르르---!

만 개의 강륜()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만 근의 무게를 지닌 강륜()이 혈영군의 호산강기를 종이짝 부수듯이 찢어 들어갔다.

[...! 혈영쇄강폭(血影碎)!]

--- --- !

--- 츠츠---! --- !

혈영군이 몸을 흔들자,

가공할 혈강()이 폭죽 터지듯이 쏟아졌다.

--- --- 콰쾅!

만 근의 화약이 일시에 폭발한 듯한 굉음이 터졌다.

--- 르르릉!

[--- !]

그중에서 능천한은 한쪽의 석벽과 함께 무너져 튕겨 나갔다.

혈영군이란 자와 너무도 공력 차이가 심한 때문이다.

--- 르르르---!

--- --- 쿠쿵!

그와 함께 동부의 천정이 쩍쩍 거북 등처럼 갈라졌다.

양인의 격돌을 견디어내지 못한 것이다.

--- 르릉! --- !

천 근의 암반들이 환상같이 무너져 내렸다.

 

패천동부(覇天洞府),

 

패천지혼(覇天之魂)이 일어낫던 패천동부(覇天洞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한 명 천고기재와 함께,

--- 르르르르--- !

--- 콰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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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父- 皇龍, - 潛龍!

 

 

 

黃人居覇龍,

騰天震九州,

巨影蓋天下,

覇魂至千歲.

 

---황산(黃山)에 패룡(覇龍)이 있네.

패룡(覇龍) 한번 날아오르매 구주(九州)가 위진(威震)되고,

그 거영(巨影), 한번 일어 천하(天下)를 덮으리니,

패천(覇天)의 혼()은 천년(千年)을 이르리라---

 

황산(黃山), 안휘(安徽) 남방을 뒤덮고 있는 거악(巨嶽)이다.

중화인(中華人)들이 숭배하는 색()은 황().

그 때문에 황산은 일찍이 황제(皇帝)의 신산(神山)이라 하여 숭앙받아왔다.

일천여 리에 뻗쳐 신역(神域)이 온통 황색일색인 신산,

한데,

 

---황산(黃山)에 패룡(覇龍)이 있네.

 

그 황산에 거룡(巨龍)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가벼이 움직이지는 않으나,

한번 용트림을 하면 천지(天地)가 변색하는 거룡(巨龍)이 있는 것이다.

 

<패천황룡(覇天皇龍) 능붕비(陵鵬飛)>

 

황룡(皇龍)이라 불리는 이 거인(巨人)이 바로 그다.

한소리 일갈로 만마(萬魔)의 혼을 빼놓을 수 있는 천지지간의 단 일인,

그가 처음 무림에 나온 것이 일갑자 전쯤이다.

약관의 나이로 무림에 나온 패천황룡 능붕비.

그는 출도하자마자 가공스런 일을 단신으로 해치웠다.

그것은 독존(獨尊), 쌍황(雙皇)을 패퇴시킨 것이다.

 

독존(獨尊).

---수라천극존(修羅天極尊).

 

그는 고금오대마종(古今五大魔宗)에 드는 천하제일마종(天下第一魔宗)이었다.

독존교(獨尊敎)에 교주이기도 한 그의 발호는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쌍수에 의해 중원이 시신으로 덮이고 황하가 인혈(人血)로 가득 찰 정도였다.

보다 못해 천해존불(天海尊佛)이 그에게 도전장을 내었었다.

그러나, 천하제일고승이라는 천해존불이건만,

칠주칠야의 격전 후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것이 육십여 년 전의 일로,

천해존불을 제지로 물리친 수라천극존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었다.

한데, 그런 수라천극전이 약관의 청년고수에게 삼주삼야의 격전 끝에 패했다.

비록 반초차이로 지긴 했으나...

천하는 경악하고 불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

천하가 좁다고 날뛰고 독존교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패천황룡 능붕비는 연이어 두 명의 절세 효웅들을 격파해 버렸다.

 

쌍황(雙皇).

---절대마황(絶代魔皇).

---역천사황(逆天邪皇).

 

수라천극존의 위명에 눌려 지내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마()와 사()의 종주(宗主)들이다.

그들은 각기 마황궁(魔皇宮)과 사령문(邪靈門)이라는 거파를 수하에 두고 정()과 법()을 유린하였다.

그런 쌍황(雙皇)이 차례로 패천황룡 일인에게 연파 당했다.

물론, 절대마황과 역천사황은 이를 갈며 무림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천하는 아연하는 중에 환호하였다.

패천황룡(覇天皇龍).

그 단 일인에 의해 천하의 풍운이 가셔진 것이다.

천하가 환호하며 받들어 올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패천황룡 능붕비는 모든 환대를 떨쳐 버리고 황산(黃山)에 거구를 감추었다.

그후, 천하에 대분란이 일지 않으면 능붕비의 모습은 천하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있음으로 비로소 천하인은 발을 길게 뻗고 잘 수가 있었으며,

찬란한 무림번영의 공이 그에게 있었다.

천하주재인(天下主宰人),

패천황룡(覇天皇龍).

그 거룡(巨龍)이 황산(黃山)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X X X

 

시신봉(視神峯).

거대한 석탑(石塔)을 보는 듯한 웅자가 황사(黃砂)에 묻혀 있다.

시신봉의 남쪽 산록,

시신봉을 병풍삼아 한 채의 웅장한 장원(莊園)이 있다.

건물이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건물 하나 하나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원의 형체는 흡사 웅크리고 있는 잠룡(潛龍)의 형상이었다.

때는 초춘(初春)이다.

아직 싸늘함이 대기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맑게 내려쬐는 춘광(春光)에는 여름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웅장한 장원은 초춘의 양광 속에 길게 몸을 드리우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

삼 장 높이인 정문의 처마 밑에는 일곱 자 길이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용사비등(龍蛇飛騰)!

웅혼한 필력이 엿보이는 서체로 편액에 글이 적혀 있었다.

 

<패천신문(覇天神門).>

 

패천신문(覇天神門)...!

패천신문이라면...

[하하... 아버님! 어떻습니까?]

낭랑한 청년의 웃음소리가 장원의 후원에서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헛허! 많이 늘었구나!]

중년인의 온화하고 대견스러워하는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장원의 후원(後園),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었다.

정원의 중앙에는 단련한 한 채의 정자가 세워져 있고 정원의 끝에는 높직한 석벽이 있었다.

지금, 한 명의 청수한 중년문사와 영준한 황포청년이 정자에 앉아 있었다.

중년문사의 외모는 극히 초탈했다.

언뜻 보아서는 초야에 묻혀 사는 세외의 은사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중년인에게는 무형의 기도가 있었다.

무공, 그것도 절정무공을 익힌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형의 거창한 기도가 있었다.

그 기도는 그것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가공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중년문사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청년,

그에게는 종잡을 수가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황포청년의 외모는 극히 영준하며 기품이 있었다.

그런 그의 일신에는 어찌보면 허허롭고 어찌 보면 굳강한 기이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것은 청년이 천생(天生)으로 타고난 체질로 생긴 기도(氣道)였다.

청년은 천 세(千歲)에 단 한 번도 난적이 없는 신맥을 지니고 태어났었다.

그로 인해,

청년의 자질은 절로 고금제일(古今第一)이 되고 말았다.

 

[헛허! ()아야! 이번에는 천붕비래(天鵬飛來)니라!]

중년문사가 껄껄 웃으며 정원 끝의 석벽을 바라보았다.

정자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석벽,

그곳에는 넓이 이 장 가량의 철판(鐵板)이 박혀 있었다.

한데, 그 철판에는 종횡의 어지러운 선과 점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보검으로도 흠을 내지 못한다는 만년한철이다.

어떤 예리한 힘이 있어 만년한철판에 자흔을 낸단 말인가?

문득,

--- ! --- 자장!

중년문사의 몸에서 새파란 강륜(罡輪)이 일어났다.

그리고, --- --- !

그 강륜은 그대로 폭사되어 만년한철판에 아주 예리한 선을 그었다.

!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중년문사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그럼에도 강륜이 일어나 만년한철판에 자흔을 긋다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심제기(以心制氣),

---어의극살(馭意剋殺),

 

중년인의 무공경지가 마음으로 천 리 밖의 적을 살상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헛허! 이번의 초식은 어찌 피하겠느냐?]

중년문사가 황포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에게 있어 중년문사는 하늘()같은 아버지다.

그리고, 중년문사에게 있어 청년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을 아들()인 것이다.

청년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자 천한(天漢)이 아버님께 가장 불충한 것은 어떤 경우이온지요!]

청년의 물음에 중년문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네가 이 애비만 못하다면 그것이 가장 큰 불효니라!]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십니다. 천하제일인이신 아버님께 효도해 드리려니 소자는 힘이 듭니다!]

[핫하! 녀석! 엄살을 부리지 마라! 이 애비가 천하제일인이라면 너는 영세제일(永世第一), 고금제일(古今第一)이 되면 될 것이 아니냐?]

중년인이 무릎을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천붕비래의 초식은 지자횡등(地字橫騰)의 수비로 뚫지 못합니다!]

청년은 말을 하며 우수를 들었다.

그의 우수가 일시에 새파란 강기로 뒤덮였다.

그리고,

--- 자장!

새파란 강륜()이 벼럭겉아 쏟아져 만년한철로 쏘아갔다.

--- --- !

불꽃이 튀며 흐릿하나마 한 줄기 자흔이 횡()으로 그어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중년인의 공력에는 미치지 못하나 청년의 내가공력은 이갑자가 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옆구리에 들어난 헛점까지 파고 들어 오히려 아버님의 형세가 급해지셨습니다!]

청년이 겸손하게 말했다.

두 부자는 만년한철에 대고 초식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작년이후로 애비는 네녀석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중년인이 크게 웃었다.

그는 당대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

그의 이름은 능붕비(陵鵬飛)!

패천황룡(覇天皇龍)이라는 별호를 지닌 절대자(絶代者)가 바로 그다.

한데, 절대무적이라는 능붕비이건만 내리 일백 번을 패하게 만든 기재가 있다.

그는 바로...

능붕비 앞에 단좌하고 있는 그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은 능천한(陵天漢)!

바로 패천잠룡(覇天潛龍)이라 불리는 제일기재(第一奇才)가 그다.

[아버님께 불충함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소자는 아버님보다 강해져 보이겠습니다!]

능천한은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패기가 가득했다.

[하하! 네가 이제 이 아비를 능가해야할 것은 단 두 가지이니라!]

능붕비는 아들을 자애롭고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능붕비는 환갑을 지난 후에야 능천한을 얻었다.

그의 모습은 삼십대로 보이나,

실상 그의 나이 팔십이 넘은 것이 이미 몇 년 전의 일이다.

능천한은 늦게 본 아들일뿐더러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과 바꾼 귀한 아들이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운명적으로...

능천한은 이천 년내에 나타난 적이 없는 절세존체(絶世尊體)를 타고 났다.

그러나...

천극대정신맥은 천혜의 존체이기에 그 모체(母體)의 희생을 강요한다.

, 천극대정신맥을 지니고 태어나는 아기는 모체의 모든 정기(精氣)마저도 흡수한 후에야 모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능붕비는 아내에게 쏟을 사랑까지도 아들에게 쏟았다.

능붕비는 아들이 자신을 능가하는 것을 지상의 기쁨으로 아는 인물이다.

그리고, 능천한은 그런 아버지의 고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학문, 천문지리, 기문둔갑, 무공 등 모든면에서 능천한은 아버지의 능붕비의 뛰어 넘었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한번 본 것은 무엇이든 자기것으로 하는 이 절세신맥의 덕으로,...

[그 첫째는 경험이며 그 둘째는 내공(內功)이다!]

능붕비는 자애롭게 말했다.

[경험이든 내공이든 모든 아버님을 능가해 보이겠습니다!]

능천한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붕목(鵬目)이었다.

(아버님은 젊으셨을 때 천지금룡(天地金龍)의 내단(內丹)을 복용하시어 오백 년 내공을 얻으셨다.)

능천한은 내심 중얼거렸다.

능붕비의 내공은 가히 무적이다.

그가 약관의 나이로 수라천극존과 쌍황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도 기연으로 얻은 오백년 공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기연이 없다면...

백 년을 가도 능천한은 능붕비의 내공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점은 두 부자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애비는... 네 공력이 나만큼 강해지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다!]

능붕비의 말에 능천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자부(紫府)에 사람을 보내시오 자부노군(紫府老君)을 청()하신 것이 바로...!]

능천한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능붕비는 웃으면서 말을 막았다.

[너는 너무 영리하다. 한 마디로 열 가지 사실을 알아버리니 말이다.]

능붕비는 미소하며 아들을 바라 보았다.

[당금 무림이 많이 어지러워지고 있는데도 애비가 무림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능붕비의 물음에 능천하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것은... 천하대사를 소자의 손으로 정리도록 하게 하시려 하는 것으로 아옵니다!]

능붕비은 대견스럽게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림에 나와 천하를 질타한 것이 능천한 정도 나이 때였다.

이제...

능붕비는 능천한에게 천하주재인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는 것이다.

[...!]

[...!]

잠시 두 부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는 황룡(皇龍),

아들()은 잠룡(潛龍).

얼마나 웅장하게 자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잠룡(大潛龍)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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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장

 

               무참한 여인들 (2)

 

 

 

“당신... 당신이 어떻게 이런 짓을...”

누군가 만화선자를 굶주린 짐승들에게 던져준 천외천궁주에게 악을 썼다.

지후(地后).

바로 천외천궁주의 부인인 그녀였다.

“이게 다 부인의 헛된 망상이 초래한 결과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소?”

천외천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지후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런 말도 안되는...!”

지후는 딸 단목자혜와 함께 서서 치를 떨었다.

“부인! 고집부리지 말고 날 따라 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천외천궁주가 짐짓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쳐요! 다른 사람은 속일지언정 난 못 속여요!”

지후는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쳤다.

“자진해서 못가겠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구료.”

천외천궁주는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멈춰라-------”

휘르르르...

두 부부 앞으로 한 청년이 내려섰다.

봉두난발에서 풍기는 술냄새.

바로 대천제군이었다.

“지후! 걱정마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그는 사뭇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지후와 단목자혜의 눈에는 실망의 기색이 어렸다.

어떻게 보아도 대천제군은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이다.

대천제군을 본 천외천궁주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네놈이 대천제군이라는 얼간이이더냐?”

“무엇이!”

대천제군은 발끈하여 소리쳤다.

“에잇! 죽어라-----”

위----- 잉!

일순 대천제군의 몸은 성스러운 불광(佛光) 속에 휩싸였다.

“허어! 무아(無我)일맥의 패엽불강(貝葉佛罡)인가?”

천외천궁주는 코웃음치며 즉시 우수를 내밀었다.

콰------ 앙!

강맹한 일장이 그대로 불광을 깨뜨리며 들어가 대천제군을 후려쳤다.

“크------- 윽!”

대천제군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겨우 멈춰서는 대천제군을 향해 천외천궁주는 조소를 흘렸다.

“흐흐흐 네놈이 천황성수를 무림에서 몰아내 주어 본궁주의 수고를 덜어준 댓가로 단번에 죽여주마!”

대천제군은 천황성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더욱 길길이 뛰었다.

“어림없다! 풍운개벽대정신강(風雲開闢大霆神罡)-------”

콰르릉-----

풍운이 변색하는 듯한 극강한 강기가 천외천궁주를 쓸어갔다.

하지만

“삼정(三鼎)의 무공으로는 어림없다!”

냉소하는 천외천궁주의 몸이 서기로운 광휘를 일으켰다.

콰------ 앙!

대천제군이 천외천궁주를 내쳤다싶은 순간,

“크------ 악!”

사방에서 피보라가 날렸다.

대천제군은 박살이 나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부여안고 부르짖었다.

“크..... 내가 이렇게 약하진 않았는... 데!”

쿵-----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뒹군 대천제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과실을 범했다 치더라도 어쨌든 그는 이검엽 이전에는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였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고 만 것이었다.

“으... 으...”

지후는 실망과 낙담이 어우러져 비칠거렸다.

천외천궁주는 의도적으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부인, 이제 그만 궁으로 들어 갑시다!”

“에익!”

지후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천허존신강기를 일으켰다.

콰르릉------!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스스스...!

하지만 그녀가 발휘한 천허존신강기는 천외천궁주의 몸에 닿자 눈 녹듯 스러졌다.

사력을 다했다한들 그녀의 성취는 천외천궁주의 그것에 일할에도 채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흐윽.....!”

직후 지후는 교구를 휘청하며 쓰러졌다.

소리없는 지력이 혼혈을 찍은 것이다.

“으우하하하핫-----!”

천외천궁주는 앙천광소하며 무너지는 지후의 몸을 받아 안았다.

“어머니!”

단목자혜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X X X

 

“흐흐... 부인! 왜 이러시오!”

야밤의 침실,

탄탄한 사내의 동체가 강압적으로 여인을 찍어 눌렀다.

“비켜랏! 네놈이 감히... 아악!”

여인의 발버둥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그녀는 사내의 완력에 간단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후------- 욱!

사내는 입으로 등잔을 불어 껐다.

불빛이 스러진 방안,

창으로 스미는 월광(月光)은 오히려 포근한 빛으로 그들을 비춰 주었다.

“흐흐... 부인!”

사내의 입술이 거칠게 여인을 훑어갔다.

“안... 안돼...!”

여인은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본능(本能),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그녀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허억!”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인의 나신 위에 올랐다.

“아...!”

여인의 팔은 어느새 사내의 목을 휘감아 갔다.

뒤엉켜진 남녀,

“아학!”

마침내 악문 여인의 이빨 사이로 자지러드는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합일(合一),

드디어 그들은 본격적인 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지칠 줄 모르는 듯 거듭거듭 숨가쁘게 율동했다.

“아... 아... 학...!”

여인은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교수는 사내의 등을 마구 쥐어뜯었다.

사내는 마치 굶주린 야수와 같이 끝없이 여체를 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발... 그만...!”

여인은 어느덧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듯, 그자는 지칠 줄 모르고 여체를 농락했다.

 

다시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이 기울고 있었다.

“으헉... 헉...!”

사내의 거친 숨소리는 여전했다.

“으... 음...!”

여인은 거의 실신지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 사이에 새벽의 여명(黎明)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방안의 광경이 훤히 드러났다.

알몸으로 뒤엉킨 채 몸부림치는 남녀...

한데 일순,

“아------ 악!”

사내에게 깔려있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지나친 쾌락으로 혼미해져있던 그녀의 눈에 너무도 끔찍한 얼굴이 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몸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사내는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었다.

“안돼!”

여인은 단말마같은 비명과 함께 사내를 확 밀어내었다.

“억!”

방심하고 있던 사내는 여인에게서 밀려나 나뒹굴었다.

와장창-------!

사내를 밀쳐낸 여인은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발가벗은 채 미친 듯 뛰어나온 여인,

놀랍게도 그녀는 지후(地后)가 아닌가?

사내에게 시달린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나신,

그녀는 처절히 부르짖었다.

“설... 설마... 당신일 줄이야!”

한편 방안에서는 밤새 지후를 유린했던 사내가 황급히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실수했군. 역용이 풀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당황한 사내,

그자는 패도적인 분위기의 중년 사내였다.

바로 천주산에서 형인 백의인을 모살한 청의인이었다.

지후는 남편을 해친 원수에게 짓밟혔던 것이다.

실로 가혹한 운명이었다.

“호호호홋-------”

지후는 발가벗은 채 미친 듯이 웅장한 전각들 사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과 몸을 섞은 지후는 미쳐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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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血壁, 血宗, 血精極魔坑

 

 

 

우르르르르...!

--- --- 우웅!

대지가 몸살을 앓는 듯,

거대한 울림이 망막하게 펼쳐진 산하(山河)를 뒤덮었다.

크크크크...!

크르르르...!

그 거대한 울림에는 분위가 있었다.

천하(天下)를 피()로 씻으려 하는 지옥(地獄)의 마기가...!

우우--- --- 우웅!

울림은...

쩍 갈라져 지옥의 입구같이 보이는 극히 음침한 절곡에서 흘렀다..

깎아지른 듯한 두 개의 석벽이 마주친 절곡 안에서...

절곡 안은 그대로 유계(幽界)였다.

칙칙한 마기...!

습함과 어둠으로 드리운 죽음의 냄새(死香)...!

번뜩이는 귀화(鬼火)!

산더미같이 쌓인 해골(骸骨)...

크크크크크크... 키키...!

지옥의 울림은 그 절벽사이의 절곡에서 울려 나와 대지를 뒤흔들었다.

한데,

!

사람이 있었다.

해골이 아닌 생명을 지닌 사람이 한명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한 명의 인물이 시뻘건 혈벽(血壁) 앞에 오체복지하고 있었다.

괴이하고 섬칫하도록 시뻘건 빛인 석벽(石壁)!

혈벽(血壁)!

혈벽(血壁)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일인이 있었다.

얼굴은 땅에 처박아 모습을 알 수 없는 백의노인이다.

노인의 머리는 백의만큼이나 하얗다.

[...!]

백의노인은 오체복지한 채 절대적인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르르르르르...!

크그그그그그긍,...!

공포스러운 진동!

그 진원지는 백의노인이 꿇어 엎드려 있는 혈벽(血壁) 안쪽이었다.

혈벽(血壁)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무시무시한 마기(魔氣)로 인해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쿠쿠--- --- --- 쿠쿵!

지축이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그와함께,

쿠르르르르--- 르릉!

백여 장 높이의 혈벽(血壁)이 서서히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 !

파츠츠츠--- 츠츠츳!

혈광(血光)!

끔찍한 핏빛 혈광(血光)이 갈라진 혈벽(血壁)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믐날 밤의 모닥불빛같이...!

터져 솟구치는 화산의 용엄같이...!

엄청난 핏빛 혈광이 갈라진 혈벽에서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

죽음()을 부르는 지옥(地獄)의 혈광(血光)!

그것이었다.

츠츠츠...!

우르르르르...!

노도가 쏟아지듯 혈광이 쏟아졌다.

모든 사악(邪惡)함이 깃든 혈광이 폭포같이 흘렀다..

[...!]

혈벽 앞에 오체복지하고 있는 백의노인의 몸이 더욱 쭈그러들었다.

지극한 공포로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그리고 문득,

한소리 웅혼한 일성이 터졌다.

그 목소리는 쩍 갈라지는 혈벽(血壁)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쌍극천효(雙極天梟)! 고개를 들라!]

섬칫함이 배인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섬칫함 외의 어떤 마기(魔氣)도 서려 있지를 않았다.

극마지경(極魔之境)에 든 자가 발한 목소리였을까?

자세히 보면,

혈벽에서 흘러나오는 혈광(血光) 속에는 시뻘건 혈기(血氣)에 싸인 괴인이 둥실 떠 있었다.

혈기에 가려 전혀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고,

다만, 강렬한 핏빛의 안광이 횃불같이 번뜩이고 있었다.

[오오... 혈종(血宗)이시여...!]

쌍극천효(雙極天梟)라 불린 백의노인이 감루를 흘리며 혈인을 우러러 보았다.

혈종(血宗)!

혈종(血宗)이라니...!

혈광 속의 괴인(怪人)!

그가 혈종(血宗)이라는 끔찍한 이름을 가진 자인가?

고개를 들자, 비로소 백의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의노인, 쌍극천효(雙極天梟)!

그자는 육십 전후의 청수한 노인이었다.

모습은 청수하지만 그자의 두 눈은 음침함으로 깊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견하여 지극히 심기가 깊고 간계가 뛰어난 자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혈종(血宗)이시여... 속하는 일갑자를... 혈종의 부르심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해왔습니다.]

쌍극천효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자는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쌍극천효(雙極天梟)! 잘 기다려 주었다. 이제 천하가 혈종(血宗)의 것이 될 것이고, 그대는 혈종의 제일출복이 될 것이다!]

혈벽(血壁)!

그 갈라진 틈으로 흐르는 혈광 속에서 웅혼한 들렸다.

[혈종(血宗)!]

쌍극천효(雙極天梟)는 감격하여 몸을 떨었다.

(... 극마극사지경(極魔極邪之境)에 드셨다. 천하에 혈종(血宗)의 적수가 없으리라!)

다시 혈광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쌍극천효(雙極天梟)! 천하를 제()할 대계(大計)를 말해보라!]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쌍극천효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자의 두 눈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혈종(血宗)께서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은 일황룡(一皇龍)을 쓰러뜨리고 일비부(一秘府)를 얻으셔야 하고 십병(十兵)을 거두시며... 일기재(一奇才)를 얻으시던지 없애셔야 합니다!]

[일황룡(一皇龍), 일비부(一秘府), 십병(十兵), 일기재(一奇才)...]

혈광 속의 인물이 중얼거렸다.

쌍극천효가 영교하게 설명했다.

[일황룡(一皇龍)은 황산(黃山) 패천황룡(覇天皇龍)을 일컬음입니다. 그자는 백 년대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패천자일맥(覇天子一脈)의 후인입니다!]

혈광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패천자일맥(覇天子一脈)이 나타났단 말인가? 혈종(血宗)과 상극(相克)인 패천자일맥이!...]

쌍극천효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으나... 패천황룡은 패천자의 후예입니다!]

혈광 속의 인물,

혈종(血宗)이라 불리는 그자의 목소리에 살기가 흘렀다.

[이백 년 전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 하면 패천황룡(覇天皇龍)을 확실히 없애야겠군!]

쌍극천효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비부(一秘府)는 자부(紫府)를 말함입니다. 지부에는 오절(五絶)이 있고 그 하나 하나가 절세일절(絶世一絶)이므로... 천하를 경륜하심에 있어 반드시 얻으셔야 할 것입니다...!]

[...!]

[십병(十兵)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이고...!]

[그렇다. 본종의 극마지체(極魔之體)도 천지십병(天地十兵) 앞에서는 무력함을 안다!]

[황망스럽습니다!]

쌍극천효가 고개를 조아렸다.

[계속하라! 일기재(一奇才)?]

쌍극천효는 혈종의 말에 즉시 대답하였다.

[황산잠룡(黃山潛龍)이 일기재(一奇才)입니다!]

[...!]

혈벽 속의 혈광이 크게 파동을 일으켰다.

[황산잠룡이라면... 설마 패천황룡(覇天皇龍...!]

[그렇습니다. 일기재는 패천황룡(覇天皇龍)의 독자(獨子)인 패천잠룡(覇天潛龍)을 말함입니다!]

[패천잠룡(覇天潛龍)...!]

[그는 당년에 약관으로서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을 타고난 자였습니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혈종이 혈광에 묻혀 중얼거렸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있다고는 전하나 이천 년 내에 나타나지 않았던 전설의 신맥(神脈)이다.

천지문(天地聞)의 지극히 바르고 큰 기운(大正氣)을 받아 이루어진다는...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이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통천(通天)의 지혜를 지닌다.

그뿐 아니라,

어떤 어려운 기공도 일별함으로써 습득할 수 있으며,

만사(萬邪)와 만마(萬魔)가 그의 안광만으로도 사그라들고 만다.

이것이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인 것이다.

 

[...!]

[...!]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천극대정신맥을 지녔다면... ()과는 공존할 수 없는 자!]

[혈종(血宗)께서는...!]

쌍극천효가 묻자, 혈종의 냉혹한 일성이 혈광 속에서 터졌다.

[죽여라! 무슨 수를 쓰든 확실하게 죽여 없애도록!]

[존명(尊命)!]

쌍극천효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몸을 떨었다.

혈종의 냉혹한 목소리가 혈벽 사이에서 울려 나왔다.

[중원천하가 넓음을 안다. 일황룡, 일비부, 천지십병, 일기재외에도 주목해야할 자들이 있을 터인데...!]

혈종의 말에 쌍극천효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도(魔道)와 사도(邪道)는 혈종(血宗)의 평화에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흑도녹림(黑道綠林)과 정도(正道)에 많은 강자들이 있습니다.]

[계속하라!]

[먼저... 구파일방에... 삼존(三尊)이 있습니다.]

쌍극천효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삼존(三尊)에 대해 설명하였다.

 

<정도삼존(正道三尊)>

 

패천황룡(覇天皇龍)이전 세대에 있어 무적최강으로 알려진 삼인(三人)의 절대고수를 말한다.

이들은 각기 소림(少林), 무당(武當), 개방(丐幇)에서 나왔다.

그 때문에 이들은 불존(佛尊), 도존(道尊), 개존(丐尊)이라고도 불린다.

 

---천해존불(天海尊佛).

 

그는 당대 소림방장인 법정선사(法正禪師)의 사백이 되는 인물이다.

전대 소림사의 장문인기도 한 그는 소림사 역사상 삼대고수(三大高手)에 드는 고승이다.

그의 항마신공(降魔神功)은 능히 만 근의 철괴(鐵塊)를 모래로 만들 정도라 한다.

 

---청허현도존(靑虛玄道尊).

 

무당 최강자이며 전설적인 도문(道門)인 청허문(靑虛門)의 전인,

또한, 전대의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이기도한 고인(高人)이다.

그의 도가기공은 천해천불의 항마절기와 쌍벽을 이루고,

그의 뇌리에는 천하만사(天下萬事)가 담겨져 있다.

 

---취존개(醉尊).

 

개방 역사상 최강자!

천년 개방절예가 그의 일신에 모여 백배 강하게 나타났다.

청허현도존만큼 지혜로운 현자이기도 한 그는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 싫어 하루만에 개방지존이라는 지위를 버렸다.

술과 해학!

이 둘도 벗을 삼아 천하를 떠도는 제일기인(第一奇人)이 그다.

 

이들이 정도삼존(正道三尊)!

구파일방의 성세를 최고고조로 높였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십여 년 전부터 무림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항간에는 그들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정도삼존(正道三尊)외에 정파에서 가장 주목되는 자는 광양대제(廣陽大帝)라는 자입니다!]

쌍극천효가 말을 이었다.

[광양대제(廣陽大帝)...!]

[그자는 삼존과 동배분의 인물이며 또한 삼존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자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자 휘하에 있는 정파제일의 광양회(廣陽會)입니다.]

[...!]

혈종은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쌍극천효는 영교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정도에는 삼존과 일제 외에 일검성(一劍聖), 신주오기(神州五奇)가 있습니다.]

쌍극천효의 눈이 교활한 빛을 띄우고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흘렀다.

[하오나... 일검성과 신주오기는 속하의 손으로도 없앨 수 있는 자들입니다.]

[흑도와 녹림에는 누가 있는가?]

혈종의 혈벽 안에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를 씹는 듯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를 않았다.

쌍극천효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흑도에는 흑룡천신(黑龍天神)이 있고 녹림에는 녹림대제(綠林大帝)가 있습니다.]

[회유할 수 없는 자들인가?]

혈종이 물었다.

[그들은 쌍황(雙皇)만큼 강한 자들입니다. 목숨이 끊일지언정 타인의 수하로 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생각은?]

혈종의 물음에 쌍극천효는 즉시 대답했다.

[역시 척살(剔煞)함이...]

갑자기 혈종이 그의 말을 끊었다.

[척살(剔煞)함은 하책이다.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라니... 그 점을 이용하여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쌍극천효는 등줄기로 식은 땀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혈종(血宗)께서는 노부 못지 않은 심기를 지니신 분이다.)

쌍극천효는 일말의 두려운 감정이 일었다.

심기방면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던 그였다.

한데 혈종의 안목이 자신에 못지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극천효는 그런 내심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혈종의 분부하심,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그는 혈벽을 향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때가 되었다. 혈종오패(血宗五覇)를 잠에서 깨워랏! 일시에 천하는 혈종의 것으로 하리라!]

[혈종(血宗)...!]

쌍극천효가 격동하여 몸을 떨었다.

혈종은 웅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열흘 후! 본종의 현신이 있으리라. 그때까지 혈종오패의 전력을 모아놓아야 한다!]

[혈종! 심려 놓으소서...!]

그그그그그... !

열렸던 혈벽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혈종이시여...!]

그모습을 보며 쌍극천효는 오체복지하여 감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스스스... 츠츠츳!

점차, 칙칙한 혈기도 속으로 사그러져 갔다.

사그러지는 혈기사이로 혈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쌍극천효(雙極天梟)! 그대를 믿는다. 본종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 --- --- !

크르르르르... ...!

혈벽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가랏! 가서 본종의 현신을 기다려라!]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깊은 죽음의 적막의 절곡을 뒤덮었다.

그제야 쌍극천효는 몸을 일으켰다.

[후훗! 천하는 모르리라!]

그는 닫혀진 혈벽을 주시하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보(神奇譜) 제삼서열의 신기(神奇)가 이곳 지옥애(地獄崖)에 있음을...!]

이럴 수가...!

신기보(神奇譜) 제삼신기(第三神奇)라니...!

그것은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의 신기(神奇)가 아닌가!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

 

()와 사()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극마지경(極魔之境)이 거기에 있다는 저주의 지옥마소(地獄魔所)가 아닌가?

그 혈정극마갱이 혈벽(血壁) 안에 있다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닌가?

[흐흐흣! 제일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야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타고 난 재주가 모자람을 알기 때문이다!]

쌍극천효의 두 눈이 극히 음사하게 빛났다.

[흐핫하! 그러나... 반년 후에는 제일은 못되어도 제이(第二)는 되어 있으리라!]

--- --- !

쌍극천효는 크게 웃으며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삽시에 까마득한 절벽을 치솟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그그그그... 그긍!

--- --- 우우우웅!

다시 마()와 피()를 부르는 진동이 지옥애(地獄崖)를 울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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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章 (二)



              神奇之章





<신기보(神奇譜)>


신기보(神奇譜)라는 것이 천병보(天兵譜)와 함께 한다.

천병보(天兵譜)가 병기의 계보라면,

신기보(神奇譜)는 전설(傳說)과 기사(奇事)가 계보다.

무림사 수천 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신기(神奇), 전설(傳說), 기사(奇事)가 창출되었다.

신기보(神奇譜)는 이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무려 삼천종의 신화와 전설이 그 안에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기보(神奇譜)이며...

모든 신기(神奇)에는 서열이 메겨져 있다.

신기보(神奇譜)에는 천세에 잊혀 지지 않는 세 가지 신기(神奇)가 있다.


<삼대신기(三大神奇)>


삼대신기라 불리는 전설을 신기보(神奇譜)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太初), 태극일원(太極一元)이 아직 혼몽 속에 있을 때 아주 크고 혼탁함 만이 오직 가득하더라.

---이는 대혼돈(大混沌)이라 하며 또한 대천황(大天荒)이라 하니라.


---대천황(大天荒)---


전설은 대천황(大天荒)이 있었음을 말한다.

태극(太極), 태허(太虛), 그 이전에 극히 크고 허허(虛虛)로운 대혼돈(大混沌)이 있음을...


---천황(天荒).


만상(萬象)의 그 이견,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지혜가 통하지 않는 대근원이 이것이다.

천황지기(天荒之氣).

만상의 근원인 천황지기(天荒之氣).

그것은 영겁 속에서 만상을 탄생시키며 흩어졌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만상으로 흩어져 간 것이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한가닥의 전설이 인구에 회자하며 전해 내려온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대천황지기(大天荒之氣)가 억겁(億겁)을 넘어 정(精)으로 뭉친 곳이 있다.

---한 모금의 천황지기(天荒之氣)를 취해도 천신(天神)이 될 수 있다.


<대천황연(大天荒衍)>


X X X


---천마(天魔)가 강림하다.

---마기(魔氣) 천지(天地)를 뒤덮어 이백성장에 이르다.

---천지지간에 정(正)이 멸절하고 마영(魔影)만이 가득하도다.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진바 없다.

다만 무림이 막 태동되었을 무렵이었으리라.

그때, 한 명의 대마종(大魔宗)이 있었다.


<천마(天魔)>


완벽한 비밀로 나서 완벽한 비밀로 사라졌던 대마종이 있었다.

이백 년을 천하 위레 군림하고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던 천마지존(天魔至尊)이 있었다.

죽음(死)과 암흑(暗黑)의 신(神).

천마(天魔).

고금오대마종(古今五大魔宗)의 지존(至尊)이며 영원한 마도대조종(魔道大祖宗)이 바로 그다.

그는, 신비 속의 출현만큼이나 신비롭게 인세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한가닥 소문이 떠돌았다.


---천마는 천마총(天魔塚)가 묻혔다는 천마총에 대한 소문이었다.


천하인은 광분하여 천마총을 찾아 헤매였다.

왜?

그것은 천마총에 천마(天魔)의 모든 것이 비장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이(第二)의 천마(天魔).

그것은 곧 천하지존(天下至尊)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것이 신기보 제이신기(第二神奇)이다.


X X X


마(魔)와 사(邪)의 영원한 이상향(理想鄕)이 있다.

사마(邪魔)가 영원히 죽지 않는 곳,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


이 또한 대천황(大天荒)에서 나왔다.


---혼탁하고 무거우며 어두운 기운이 가라앉은 땅(地)이 되리라.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

바로 어둠(暗)과 악(惡)함의 정(精)이 혈기(血氣)로 모이는 곳!

그곳이 바로 사마(邪魔)의 이상향인 혈정극마갱이다.

마령(魔靈)과 사령(邪靈)의 강함을 천만배로 눌려 주며,

영원히 죽지 않는 극마존체(極魔尊體)가 이루어지는 비밀이 혈정(血精)에 있다.


---혈정(血精)의 비밀을 풀어라!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에 들어라. 곧 영세무적(英世無敵)이 되리라!


천세(千歲)에 걸쳐 사마(邪魔)의 추종자들은 광분하여 구주팔황(九州八荒)을 뒤집고 다녔다.

그러나...

없었다!

그 어느 곳에도 혈정극마갱의 혈기(血氣)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마의 핏발선 눈길은 잠기지 않았다.


---찾아라! 항시 정(正)에 눌리어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회천(回天)의 사령지계(邪靈之界)는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에만 있다.


그렇게...

사마지도들의 핏발 선 눈길은 하늘의 끝과 땅의 밑바닥까지 훑고 있다.

과연...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


그 공포와 저주와 동경의 사마지경(邪魔之境)은 있는가?

과연... 있는가?


이것이 신기보(神奇譜) 서열 삼위와 신기(神奇)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풍운(大風雲)의 발원지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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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章 (一)

 

            天兵之章

 

 

 

<천병보(天兵譜)>

 

천병보(天兵譜)라는 책이 있다.

만겁무림(萬겁武林)에는 수천 수만의 병기(兵器)들이 나타났었고,

천병보(天兵譜)는 그중 일천(一千)의 절대명기(絶代名器)들을 적은 기록이다.

즉, 천병보(天兵譜)는 병장기들의 계보인 것이다.

병기의 모양, 종류, 만든 장인과 사용한 명인(名人)들 뿐 아니고,

병기와 얽힌 은원, 기연까지도 그 안에 수록되어 있다.

 

천병보(天兵譜)를 누가 처음 지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다만 천병보의 기록이 이천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졌을 뿐...

천병보의 내용은 무림의 풍운과 더불어 변한다.

구병(舊兵)을 몰아내고 나의 신병(新兵)을 천병일천좌(天兵一千坐)에 올린다!

이것이 무림인들의 지상목표다.

천병보의 서열은 곧 병기주의 서열을 의미하므로,

그러나...

천세의 풍운에도 그 고고함을 잃지 않은 절대신병(絶代神兵)들이 있다.

영광스러운 천병일천좌에서도 최고봉을 지키는 열 개의 신병들...

이를 가리켜 천하는 천지십병(天地十兵)이라 하여 숭앙해왔다.

 

<천지십병(天地十兵)>

 

천병일천좌의 수좌(首坐)에서 서열 제 십좌를 지키는 십종신병(十種神兵)들이다.

---천지십병(天地十兵)!

그것은 무적(無敵)이고,

그것은 초극(초極)이며,

그것을 얻음은 곧 천하(天下)를 얻음이다.

 

천지십병(天地十兵)의 수좌(首坐)!

그 불멸의 영예는 전설(傳說)에 있다.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태극일원(太極一元) 그 이전, 만상(萬象)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대천황(大天荒)의 천황지기(天荒之氣)가 팔십겁(八十겁)을 쌓여 천병(天兵)을 이루다.

---이를 일컬어 팔황천병(八荒天兵)이라 하니라.

 

<팔황천병(八荒天兵)>

 

절대무적(絶代無敵)!

독존최강(毒尊最强)!

하늘(天)을 가르고 천신(天神)이라도 벨 수 있다는 천병지존(天兵至尊)!

형체(形體)도 모른다.

과연 어떤 종류의 병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황천병(八荒天兵)!

그것은 천병일천좌(天兵一千坐)의 수좌(首坐)이며 지존이다.

천하(天下) 위에 있다는 천상천병(天上天兵)!

그것이 팔황천병(八荒天兵)이다.

 

그리고...

천병일천좌의 서열이 위에서 구위까지 신병(神兵)에는 서열이 없다.

같은 시대에 한 번도 함께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도 가공스러운 위력을 지닌 병기들인지라.

그 진정한 위력들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팔대중병(八大重兵)은 다시 사대마병(四大魔兵)과 사대신병(四大神兵)으로 분류된다.

 

<사대마병(四大魔兵)>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

---만독묵린편(萬毒墨鱗鞭).

---혈황탈(血荒奪).

---천향옥잠(天香玉簪).

 

<사대신병(四大神兵)>

 

---천형제황검(天形帝皇劍).

---봉황극락조(鳳凰極樂鳥).

---패천신륜(覇天神輪).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

 

이들이 무(無) 서열로 천병일천좌의 이위에서 구위를 차지하는 신병들이다.

 

---사대마병(四大魔兵).

---사대신병(四大神兵).

 

팔황천병(八荒天兵)의 전설에만 눌릴 뿐,

천세무림에 독존(毒尊) 무적(無敵)으로 군림해온 중병기들이 이것이다.

그중 일병(一兵)만 나타나도,

천하(天下)가 무릎을 꿇는다 전해진다.

 

그리고...

천병일천좌(天兵一天坐)의 제십좌(第十坐)의 병기가 있다.

이름하여,

 

<천극(天戟)>

 

그것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무기다.

극히 평범한... 아니 초라하기까지 한 하나의 극(戟)이 천극(天戟)이라 불린다.

천극(天戟)에 어떤 힘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지수의 병기...

그것이 천극(天戟)이다.

그것을 사용한 인물은 대라천기선(大羅天機仙)이라는 인물이다.

무림최고의 현자(賢者)라 불리는 그의 한 마디가 천극을 천병일천좌의 서열 십위 안에 있게 하였다.

 

--- 때(時)가 오리라. 천극(天戟)이 대광풍(大狂風)을 쓸어버릴 때가 오리라.

 

대라천기선(大羅天機仙)!

천년 후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는 최고의 현자...

그의 말을 천하는 믿는다.

믿기에 천극(天戟)을 천지십병(天地十兵)에 두른 것이다.

 

팔황천병(八荒天兵).

사대마병(四大魔兵).

사대신병(四大神兵).

천극(天戟).

 

<천지십병(天地十兵)>

 

은원은... 십병(十兵)이 동시대에 나타나면서 광풍으로 시작된다.

대영웅(大英雄), 그리고 상상치 못한 대혈마(大血魔)의 부활로 천지가 초유의 혼돈으로 치닫나니...

이것이 천병지장(天兵之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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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전 6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대본소용 무협지입니다.

박스본이란 5-7권의 무협지를 박스 하나에 넣어 만화대본소에 보급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무려 37년 전의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참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구성과 묘사로 범벅이 되어있군요.

강산이 네번 가까이 변하기 전의 유물이라는 점,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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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무, 천룡파황보의 두 작품이 출간되었습니다.

부득불 삭제하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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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동굴 속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는 권완.

서문숙이 벽에 기대 앉아있는데 엄청나게 피를 토해서 앞자락이 완전히 피에 물들었다. 바닥에까지 피가 질척거리고

권완; [노야!] 기겁하며 다가가 앉으며 부축하고

미약하게 숨을 쉬는 서문숙. 죽어가고 있다

권완; (... 죽어가고 있어!)

권완; (배신자들에게 치명상을 입은 위에 난릉왕과 무리를 해가면서 싸운 바람에 속이 완전히 망가졌어!) 급한 대로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아준다.

권완; (그나마 남아있던 생기도 아랫사람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몸을 지탱하는데 써버리셨어!) 눈물이 배어나오고. 그때

서문숙; [... 서쪽 구석에 보면 쥐구멍이 보일 것이다.] 고개 숙인 채 힘없이 말하고. 흠칫 권완

서문숙; [그 속에 손을 넣어 오른 쪽을 더듬으면 손에 잡히는 고리가 있단다. 당겨 주겠느냐?]

권완; [!] 눈물 닦고 일어나고

서쪽의 벽으로 가보니 과연 작은 구멍이 있는데 새까만 쥐가 눈을 반들거리며 고개를 내밀고 있다.

쥐는 권완을 보고는 구멍 속으로 숨어버린다.

권완은 소매를 걷고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고

구멍 속에서 바닥에서 올라와 있는 동그란 고리가 있다.

손가락을 고리에 걸고 잡아당기고. 직후

덜컹! 갑자기 벽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쿠쿠쿠! 권완의 왼쪽 바닥이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앉으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권완; (이런 곳에 기관장치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놀랄 때

서문숙; [그 아이를 데리고... 따라 오너라.]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권완; [노야!] 놀라는데

서문숙은 꼿꼿하게 일어서더니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간다.

권완도 청풍을 두 팔로 안아들고는 서문숙을 따라 내간다.

계단을 내려가자 복도가 나타나고. 하지만 복도는 얼마 안가 막다른 곳에 이른다. 문도 없고. 그냥 돌로 이루어진 벽이다. 벽에는 굵은 나무뿌리들이 흘러내린 촛농처럼 얽혀있다

권완; (막다른 곳인데...!) 둘러볼 때

벽 앞에 서서 무어라 주문을 외우고

스스스! 갑자기 벽을 덮고 있던 나무뿌리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좌우로 비킨다. 나무뿌리들이 비키는 곳에는 작은 문이 있고.

권완; (나무뿌리들이 움직였어! 저것도 술법이겠구나!) 놀라고

서문숙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고 청풍을 안은 권완이 따라들어간다. 그러자

스스스! 나무뿌리들이 다시 움직여서 입구를 가려 버린다.

권완; (확실히 이 은행나무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야!) 침 꼴깍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반구형의 공간. 사방의 벽은 나무뿌리들이 엉켜서 형성되었고 구석에 돌로 만든 침대가 하나, 중앙에는 살아있는 나무뿌리가 형성한 의자와 좌대가 각각 하나씩 있다.

서문숙; [그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와라!] 좌대에 힘겹게 올라가 앉고.

권완; [...!] 고개 숙이고

청풍을 돌침대에 누인다.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청풍

권완; (다시 만나면 그 즉시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다!) 청풍을 내려다보고

권완; (비록 속아서라도 부부가 되기를 약소한 때문일까?) 한숨 쉬며 돌아서고

다시 서문숙 앞으로 가는 권완. 서문숙은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상처를 다스리는 모습

권완; [노야!] 걱정이 되어서 묻고

서문숙;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앉거라!]

권완; [!] 좌대 앞의 의자에 앉고

서문숙; [너는 권씨세가의 무남독녀면서도 아들이 아니면 안 되고 가주가 될 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가법 때문에 술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천천히 눈을 뜨고

권완; [지난밤까지만 해도 전 술법이란 게 옛날이야기 속 신선과 요괴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권완; [하지만 이제는 우화등선(羽化登仙)도 당연히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서문숙; [술법은 어렵지 않다.] 끄덕

서문숙; [무공을 익힘에 있어 기()만 단련하면 무공에 그치나 정()과 혼()까지 단련하면 귀신과 요괴를 부릴 수 있으며 신()마저 단련하면 궁극의 조화를 얻을 수 있다.]

서문숙; [대체로 강호의 무공은 기를 단련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조화경(造化境)에 이르지 못할 뿐이다.]

서문숙;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권완; [술법을 알면 거대한 범선도 간단히 칼로 자르고 죽마(竹馬)를 타고 천공을 비상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헛되이 무공이나 배우는 것인지요?] 난릉왕이 원수함을 토막 내던 장면 떠올리고

권완; [신선의 술()이 있고 부처의 도()가 정말 있다면 세상의 그 많은 도사와 스님들은 어째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문숙; [그것은 진리의 길이 등에 붙어있는 거울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등에 있는 거울을 어떻게 보겠느냐? 어찌 스승 없이 따라갈 수 있는 진정한 도가 있겠느냐?> 등에 붙은 둥근 거울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모습

<먼저 가는 이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느니라.> 일렬로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각자의 등에 둥근 거울이 붙어있고 뒷 사람은 앞 사람의 등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따라간다.

권완; [참된 스승이 많지 않기에 세상에 술법이 흔하지 않다는 말씀이신지요?]

서문숙;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한들 홀로 노력하고 애써봤자 그림자만 쫓으며 상상하다 일생을 그칠 뿐이다.]

서문숙; [하지만 진리의 길은 곧고도 곧아서 참 된 스승이 한 번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켜주면 혼자서도 능히 갈 수 있느니라.]

권완; [그럼 누구든지 참 된 스승을 만나 깨우치기만 하면 귀신을 부리고 요괴도 물리칠 수 있겠군요.]

서문숙; [무릇 사람은 천지 사이에서 태어난 만물의 영장(靈長)이거늘 어찌 귀신과 요괴가 굴복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귀신을 주목하면 귀신이 굴복할 것이요. 요괴를 주목하면 요괴 또한 굴복하느니라.> 도사 차림의 노인이 목검을 들어 가리키며 뭐라 외치고. 그 앞에서 수많은 귀신과 요괴들이 엎드리고 도망치는 모습

서문숙; [혹시라도 귀신과 요괴를 만나게 되면 그 형체와 모습을 한 곳도 빠뜨리지 않고 보거라.] [그리하면 귀신이나 요괴는 두려워 도망치거나 남아서 복종할 것이니라.]

권완; [술법의 요체(要諦)가 바로 보는 것인지요?] 눈 반짝

서문숙; [네가 천하이대재녀(天下二大才女)라는 세상의 평판이 옳구나.] 감탄하고

서문숙; [몇 마디 말로 이치를 깨닫는 능력은 결코 흔하지 않은 것이다.]

권완; [저는 그저 어리고 헛되이 배운 계집아이에 불과합니다!] 고개 숙이고

서문숙; [그렇지 않다.] [돌이켜보면 권가주의 복연(復緣)이 깊고 두터운 이유가 바로 너를 딸로 두었기 때문이니라.]

권완;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온데...]

권완; [정과 혼을 단련하지 않아도 바로 보기만 하면 이매망량(魑魅魍魎)을 굴복시킬 수 있는지요?]

서문숙; [정과 혼을 단련하지 않고서 어찌 귀신과 요괴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웃고

서문숙; [설혹 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진체(眞體)를 알 수 있겠느냐?] [이매망량과 마음이 지어낸 허깨비만을 볼뿐이지.]

서문숙; [게다가 귀신과 요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며 사람은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해를 입게 된다.]

권완; [이제 보니 대원수께서는 제게 술법을 전수하고 계셨군요.] 비로소 깨닫고

권완; [하지만 아직 어리고 어리석기만 한 소녀가 술법은 배워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권완; [또 딸인 제가 술법을 배우는 것은 가법에 어긋난 일이기도 합니다.] 사양하지만

서문숙; [물론 네 아버지는 너를 가르쳐선 안 된다.]

서문숙; [그러나 노부는 더 이상 세가의 가주가 아니니 세가의 법에 얽매일 필요 역시 없다,]

권완; [대원수께서 소녀에게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려는 뜻을 모르겠습니다.] 한숨

서문숙; [인연은 난마(亂麻)같아서 곤궁한 때에 이르면 반드시 새 인연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서문숙; [내가 죽음에 이르러 너를 만났고 너 또한 지금이 곤궁한 때이니 이 말이 옳지 않겠느냐?]

권완; [하지만 소녀는 저 사람에게서 대답을 듣기 전에는 대원수께 아무 것도 답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청풍을 돌아보고

서문숙; [정신을 차린 줄 알고 있다. 일어나라!] 청풍을 보고

청풍; [에구 들켰네!] 머리 긁적이며 일어나고

청풍; [이래서 늙은 생강들은 상대하기가 까다롭다니까!] 궁시렁대며 침대에서 내려서려고 걸터앉는데

그러다가 흠칫 청풍

권완이 바로 앞에 서있다. 양손에는 곤오용봉채를 들고 있고

청풍; [.... 소저!] 억지로 웃는데

! 그런 청풍의 목에 겨눠지는 곤오용봉채중 하나. 눈이 띠용

권완; [마침 두 개입니다. 그대와 나의 피를 섞지 않아도 되도록!] 다른 곤오용봉채로는 자기 목을 겨누며 말하고. 표독한 분위기

권완; [이제 우리 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그대의 말 한마디에 달렸습니다.]

권완; [대답을 들은 후에 그대를 죽이고 나도 죽을 것인지, 그대만 죽이고 나는 살 것인지,] [그도 아니면 나만 죽어서 이승에 한을 품은 원귀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아주 살벌

청풍; (... 장난이 아닌데!) 소름이 오싹

권완; [그대는 나를 모욕했습니다.] [시정의 잡배들이나 함직한 무례한 행동으로 내 정절을 해치고 일생을 수치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들었습니다.] 노려보고

청풍; [... 사과할께!] 비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고

권완; [무어라 해도 나는 그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르르 눈물이 흐르고

두근! 순간 청풍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고

청풍; (아름답고도 가엽다!)

청풍; (내 생각없는 행동이 이토록 가련하고 어여쁜 여자의 일생을 망쳤구나!) 멍해지고

권완; [마땅히 그대를 보는 순간 내 손으로 죽였어야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은 그대에게 거푸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눈물 흘리며 청풍을 내려다보고

권완; [이제 묻겠습니다. 그대는 악인(惡人)입니까?]

청풍; [... 착하다고는 장담 못하는데....!] 눈치 보고

권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공을 익혔는가 묻는 중입니다.]

청풍; [마공?] 뭔 소린가 하고

권완; [지난밤 그대는 인간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무도 어쩔 수 없던 난릉왕의 본체를 간단히 터트려 버렸습니다.]

권완; [하지만 난릉왕을 물리친 그 힘은 무시무시한 마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청풍; [....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청풍; [난릉왕이 내 목을 졸랐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었다는 것만 기억나.]

권완; [그대는 정말 인성을 상실하게 하는 마공을 수련했거나 마신(魔神)을 부르는 술법을 익힌 적이 없나요?]

청풍; [다른 건 몰라도 난 거짓말은 안해! 믿어줘!] 애원하고

권완; [아무래도 나는 그대를 죽일 수 없군요.] ! 서글프게 웃으며 청풍의 목에 대었던 곤오용봉채를 거두고

권완; [그대가 밉기는 하지만 은혜를 베푼 은인이기도 하니 밉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수는 없겠지요.]

권완; [만일 그대가 나쁜 사람이거나 나쁜 무공, 술법을 익혔다면 그대를 죽이고 나도 따라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권완; [이제 그대를 죽일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죽느냐 사느냐만 남았군요.] 곤오용봉채를 목에 좀 더 깊이 찔러 넣는다.

주르르! 목 아래로 곤오용봉채의 끝이 파고 들며 피가 흐르고

청풍; [그러지 마!] 기겁하며 일어서지만

권완; [제 목숨입니다. 그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청풍; [젠장! 내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살 수 있는 건데?] 애원하고.

권완; [그대는 내게 지은 죄를 갚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나요?] 눈 반짝

청풍; [할게! 할게!] [무엇이든지 한다구!] 고개를 연달아 세 번 끄덕.

권완; [좋아요! 그럼 저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평생 한 눈 팔지 않겠다고 맹세하세요!]

청풍; [맹세할게! 일부종사, 아니 일처종사(一妻從事)할게!] + (우히히히! 이런 조건이라면 백번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 뭐!) 내심 웃지만

권완; [말만의 맹세는 믿을 수 없어요!] [손가락을 하나 뜯어내서 제게 증표로 주세요.]

청풍; [?] [손가락을 뜯어달라고? 자르는 것도 아니고?] 띠용

혀를 차는 서문숙

권완; [그 정도의 결의도 바탕이 되지 않는 맹세는 신뢰할 수 없어요!] 단호

청풍; [... 알았어!] 비지땀을 흘리며 왼손 새끼손가락을 움켜잡고

곤오용봉채를 자기 목에 댄 채 유심히 보고 있는 권완

청풍; (생살을 뜯어내는 거니까 엄청 아프겠지?) 겁에 질려 식은 땀

청풍; (하지만 뭐 그동안의 실수도 용서받고 저렇게 예쁜 마누라까지 얻는 대가니까 감수해야지!) 우직! 이를 악물고 새끼 손가락을 확 잡아뜯는다

청풍; [크악!] 왼손 쳐들며 비명을 지르고. 새끼손가락이 뜯겨나간 상처에서 피를 부리며 비명을 지르고

[!] 눈 부릅뜨며 보는 권완

청풍; (으으으! 까무라칠 듯이 아프네!) (... 하지만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그럴 듯하게....!) 눈물 찔끔 거리며 오른손에 든 자기 새끼손가락을 권완에게 내밀고

청풍; [... 받어!] [... 이게 내 마음이야!] 억지로 웃음. 눈물도 나지만

권완;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곤오용봉채를 목에서 떼며 청풍의 앞에 무릎을 꿇고

권완; [그대의 마음을 알았으니 제 나머지 삶은 그대에게 바치겠어요!] 손으로 청풍의 상처 난 왼손을 움켜쥐어 지혈을 해주고

청풍; (으으으! 예쁜 마누라 얻는 건 이렇게도 힘든 일이구나!) 눈물 줄줄. 그때

서문숙; [쯧쯧! 그만들 하고 이리 오너라!] 한숨

돌아보는 청풍과 권완

서문숙; [서둘러라. 우리는 피차 시간이 많지 않다.]

권완; [!] 대답하고 청풍을 부축하여 서문숙 앞으로 가는 권완

서문숙; [손가락을 이리 내라!] 손 내밀고

청풍; [... 여기 있어요!] 울살 지으면서 손가락을 내밀고

서문숙; [진정을 보이기 위해 손가락을 뽑은 것은 장한 일이다.] 청풍의 왼손도 잡고

서문숙; [하지만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뼈와 살을 주신 부모님께 불효하는 일이기도 하다.]

권완; [소녀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 숙이고

서문숙; [우리 사이의 인연이 각별하니 너희들을 불효자로 만들 수야 없지!] 말하며 청풍의 손가락을 잘린 상처에 댄다. 직후

! 손가락이 뽑힌 상처와 잘려진 손가락 상처 단면이 빛이 나더니

츠츠츠! 두 상처 부분이 마치 끈끈이처럼 달라붙는다.

(... 상처가 다시 이어지고 있어!) (술법이구나!) 놀라는 청풍과 권완

치치치! 이윽고 연기가 나며 완전히 원래대로 달라붙는 청풍의 손가락

서문숙; [어떤지 확인해 봐라!] 손을 떼고

청풍; [통증이 좀 남아있긴 한데....!] 손가락을 까딱 거려 보고

청풍; [완전히 달라붙었어요. 움직임에도 무리가 없구요.]

서문숙;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해라.] [뜯겨졌던 살과 근육이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 것이다!]

청풍; [고맙습니다 노야.]

서문숙; [고마워할 것 없다.] [손가락을 붙여준 대가로 너는 노부가 팔십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짐을 대신 짊어져야만 한다!]

청풍; (이 영감이 시작부터 겁을 팍팍 주네!) 침 꼴깍

서문숙; [노부는 오늘밤 달이 뜨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 평생의 술법과 심득을 전하기엔 긴 시간이 못 된다.]

서문숙; [빠듯한 시간이지만 먼저 노부와 이 은행나무 사이의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천장을 뒤덮은 뿌리를 올려다보고

청풍; [시간이 없다면서 기껏 은행나무하고의 인연이나 늘어놓을....!] 말하다가 찔끔

권완이 째려보고 있다.

청풍;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삭 죽어서 서문숙 앞쪽의 좌대에 앉고

서문숙; [물론 기껏해야 은행나무다.] [하지만 조물주가 만든 것 치고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라!]

청풍; [...!] 삭 죽어서 권완의 눈치를 살피고. 이하 서문숙의 회상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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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 깊은 산중.

산중에 자리한 계곡

그 계곡 끝의 약간 높은 비탈 위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있다. 높이는 높지 않고 옆으로 엄청 퍼진 은행나무. 몸통은 장정 수십명이 손은 잡아야 둘러쌀 정도고 옆으로 퍼진 가지들은 수백평의 땅을 뒤덮고 있다. 마치 거대한 버섯이 나있는 것같은 형상의 은행나무다.

은행나무의 잎을 자세히 묘사하여 그 나무가 은행나무임을 보여주고. 은행나무 아래에는 굵은 뿌리가 몇 개인가의 바위를 끌어안고 있고 그 바위들 틈으로 비좁은 동굴 입구가 있는 게 보인다.

동굴 근처의 바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서문숙의 고양이 천년호. 사람들의 모습은 안보인다

동굴 안쪽에 여러 명이 앉고 누워있다. 누워있는 것은 청풍과 사마이극과 차불노. 앉아있는 것은 서문숙과 권완, 권일해와 부도신궁. 다른 사람은 안 보인다. 권완이 상의를 벗은 서문숙의 상처를 천으로 묶어주고 있고 그 앞에 부도신궁과 권일해가 무릎을 꿇고 있다

권완; (... 상처가 너무 심해!) (이 지경이 되고도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게 기적이야!) 마지막으로 천을 묶어주며 손이 떨리고

부도신궁; [원수함의 탑승자 칠백칠십칠명중 육백삼십이명이 전사했습니다.] 울면서 엎드려 보고하고

부도신궁; [게다가 생존자들 중에서도 절반가량은 부상을 입어 전사자가 더 나올 것으로 사료됩니다!]

서문숙; [거룩하신 제왕께 충성하다가 전사한 충신들일세!] 다시 상의를 걸치고

서문숙; [왕들의 왕께서 다시 강림하시면 그들은 영광의 책에 이름이 올라갈 게야!]

부도신궁; [수하들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원통할 따름입니다!] 눈물 뚝뚝 떨구며 울고

서문숙; [홍경! 네가 죽을 곳도 아니었고 죽을 때도 아니었다.] [자책하지 말라!]

부도신궁; [...!] 대답하면서도 울고

부도신궁; [생존자들은 은밀히 흩어져서 비밀총단으로 가도록 지시를 했습니다만...!]

부도신궁; [무엇보다도 원수함이 침몰당한 것이 너무도 큰 손실입니다!] 주먹 불끈 쥔 채 분해하고

권일해; [저 역시 말로만 들었던 난릉왕의 술법이 그토록 강력할 줄은 몰랐습니다.] 한숨 쉬고

권완; [난릉왕은 저 사람에게 죽지 않았는지요?] 구석에 사마이극등과 나란히 누워있는 청풍을 곁눈질하고. 사마이극과 차불노는 온몸이 붕대로 감겨있다.

권일해;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고개 젓고

권완; [하지만 제 눈 앞에서 온몸이 으깨져 흩어졌는데...!] 암흑철수가 물 속에서 치솟아 난릉왕을 움켜쥐던 장면 떠올리고

권일해; [그건 네가 아직 술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리 보았을 뿐이다.] 한숨

권완; (아버님이 술법을 익히고 계셨다는 사실을 딸인 나마저도 모르고 있었다니...!) 당혹해하고

서문숙; [몰랐다고 서운해하지는 말게나 권소저!]

서문숙; [각 가문의 술법은 오직 가주와 그의 후계자만이 연마할 수 있기 때문에 권가주도 미리 말해줄 수 없었을 뿐이야!]

권완; [...!]

서문숙; [술법 중에는 자신의 육신을 다른 장소의 다른 대상으로 치환(置換)할 수 있는 것도 있네.]

서문숙; [이 술법을 펼칠 경우 심력(心力)의 소모가 극심해서 한동안 힘을 잃기는 하지만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필적할만한 수단이 없지!]

권완;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거대한 암흑철수에 움켜 쥐여져서 으깨지는 난릉왕과 말의 몸에서 악령같은 검은 것이 빠져나가던 장면을 떠올리는 권완

권일해; [난릉왕이 비록 타격을 받았다고는 해도 그자의 이목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서문숙; [걱정말게 권가주!]

서문숙; [우리가 이 공손수(公孫樹;은행나무)의 뿌리 밑에 숨어있는 한 난릉왕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걸세.] 주위를 둘러보고. 벽에 구불렁 구불렁 나무뿌리들이 얽혀있다

서문숙; [이 신목(神木)은 하늘의 눈을 속이고 대지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를 숨기는 능력이 대단하다네.] [근처에 인가가 적지 않지만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이런 거목이 있는 줄 모를 정도지.]

권일해; [확실히 신령스러운 나무인 것 같습니다.] 역시 둘러보고

서문숙; [수천년을 살아서 영험함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높이 자라지 못하도록 끝을 잘라준 덕분에 하늘도 이곳에서 신목이 자라는 걸 모르고 있지.]

권일해; [위로 높이 자랐더라면 벽력진군(霹靂眞君;벼락을 다스리는 신)의 칼을 피하지 못했겠지요.] 끄덕

권일해 [헌데 대원수께선 어떻게 이곳에 이런 거목이 있다는 걸 아셨는지요?]

서문숙; [젊었을 때 이곳에서 수련한 적이 있었네.]

권일해; [혹시 신목이 노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피냄새 뿐만 아니라 나무들과 상극인 쇠붙이까지 가져왔으니...!] 조심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칼을 본다

서문숙; [노부도 그 점이 염려스러웠지만 상황이 워낙 급하다 보니 이리로 왔네.]

서문숙; [다행히 신목이 아무런 불평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하는듯하니 영문을 모르겠군.]

권일해; [어쨌거나 난릉왕도 지난밤에 큰 타격을 받았으니 당분간 추적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동굴 입구 쪽을 보고

서문숙; [노부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다시 추적해오는 게 아니네.] 한숨

서문숙; [그의 술법을 깨뜨린 존재가 바로 저 아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까 두렵네.] 누워있는 청풍을 보고

서문숙; [노부 생각으로 장차 난릉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 아이 밖에 없을 걸세.]

권일해; [대원수께서는 저 아이를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서문숙; [제 발로 날 찾아왔다네.] 웃고. 거기까지 말했을 때

[으음!] [으으!] 사마이극과 차불노가 신음하며 정신을 차린다.

권일해와 부도신궁이 다가가 두 사람을 부축하여 일으킨다.

[대원수!] [분합니다!] 서문숙 앞에 무릎을 꿇고 분해 우는 사마이극과 차불노. 권완은 서문숙 옆으로 피해 앉아있다.

서문숙; [(), (), 황보(皇甫) 세 가문이 배신을 하고 남궁(南宮), 울지(蔚之), () 세 가문은 가주가 죽었으니 제가회의는 그 힘을 잃었다.] 엄숙하게

서문숙; [이제 노부는 대원수로서 그대들 세 가문의 가주들에게 마지막 명을 내리겠다.]

[대원수의 명을 기다립니다.] 권일해, 사마이극, 차불노가 포권하며 고개 숙이고

서문숙; [마침내 난릉왕이 야심을 드러내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무림의 풍파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서문숙; [이에 본 원수는 그대들 세 가주에게 명하노니...] [첫째, 전사한 이들의 가문에 그 영광스런 죽음을 알리고 그 자식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라.]

[대원수의 명을 봉행하겠소이다!] 일제히 대답하는 권일해등 삼가주

서문숙; [둘째, 가문을 대표하는 자가 배신을 했을 때는 그 가문 전체의 중지가 없었을 리 없을 터!] [배신자의 가문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말고 피로 씻어라.]

[대원수의 명을 봉행하겠소이다!] 일제히 대답하는 권일해등 삼가주

서문숙; [셋째, 무리에 우두머리가 없어서는 안 되는 법!] [더 이상 사명을 수행할 수 없게 된 노부를 대신할 원수로 권일해를 지명하노라.]

권일해; [대원수!] 깜짝 놀라지만

서문숙; [권일해가 사리사욕을 위해 힘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제가는 한결같은 충성으로 그를 따르라.] 사마이극과 차불노에게

[존명!] [신임 대원수께 충성을 다하겠소이다!] 포권하며 대답하는 사마이극과 차불노

당황하는 권일해. 긴장하는 권완

서문숙; [향후 제가의 모든 일은 권일해에게 일임하노라.] 가슴속에서 붉은 빛이 감도는 철패를 꺼내고

서문숙; [권일해는 원수의 인()을 받으라!] 철패를 권일해에게 내밀고

권일해; [제왕의 미천한 종 권일해, 신명을 바쳐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철패를 받는다.

권완; (십대세가의 주재자가 된다는 것은 곧 천하제일가가 된다는 의미인데...!) 한손으로 철패를 내민 서문숙과 고개 숙인 채 두 손으로 받는 권일해의 모습을 옆에서 보며 생각. 서문숙은 철패를 권일해의 손바닥에 얹어주면서 눈을 감고 다른 손을 입 앞에 세운 채 무어라 주문을 외우고 있다.

권완; (아버지의 오랜 염원이 어렵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구나!) 한숨 쉬고.

그러다가 흠칫하는 권완

슈우! 서문숙의 몸에서 아지랑이같은 힘이 일어나 철패를 주고 받는 손을 통해 권일해의 몸으로 옮겨간다

권완; (저 철패(鐵牌)...!) 놀라고

권완; (단순한 대원수의 상징이 아니야.)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이 철패를 매개로 아버지에게 옮겨가고 있어!) 침 꼴깍.

권완; (술법의 도구라는 법기(法器)나 보패(寶貝)의 일종일까?) 사마이극과 차불노. 부도신궁도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원수의 인이 양수되는 것을 보고 있고. 이윽고

서문숙; [권원수! 그대는 이후로 제왕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 그분께만 복종할 뿐 누구의 명도 받을 필요가 없네.] 눈을 뜨며 손을 철패에서 떼고

서문숙; [제가회의를 이루는 우리 열 가문은 오직 제왕을 모시고 제왕의 존엄을 수호할 뿐이네!] [새로이 제왕을 옹립(擁立)하려는 불순한 자들과 싸우게.]

서문숙; [그들에게 아직도 제왕의 뜻이 우리 십대수호가문(十大守護家門)을 통해 이어짐을 보이도록 하게!]

권일해; [소인 권일해, 제왕의 존엄을 위하여 신명을 다 바칠 것을 천지신명과 제가의 열조들께 맹세합니다.]

서문숙; [이제 그만 떠나시게.]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서문숙; [제장(諸將)들에게 나누어줄 군기(軍旗)와 군명(軍命)을 집행할 부월(斧鉞)은 패인(牌印) 속에 그려진 위치에 보관되어 있네.] 등을 벽에 기댄다.

권일해; [존체보중하시기 바랍니다!] 포권하고. 사마이극과 차불노도 포권하고

이어 동굴을 나가는 세 가주. 동굴 안에는 부도신궁과 권완만이 남고

서문숙; [홍경! 너도 가주들과 함께 떠나라!]

부도신궁;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속하가 노야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울며 애원하지만

서문숙; [네게 우리 가문의 성인 서문(西門)을 쓰도록 허락하마.]

서문숙; [세가로 돌아가 노부의 뜻을 전하고 노부의 장손녀(長孫女)인 유주(柚珠)와 혼인하여 가주의 위를 잇거라.]

부도신궁; [... 노야! 속하가 어찌...!] 당황하고 감격하여 울고

서문숙; [사양하지 말거라!] 옷자락을 찢어서

서문숙; [지금은 전시(戰時), 어리석은 자가 가문을 이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일족이 몰살당할 가능성도 많다.] 찢은 옷자락 위에 손가락을 물어 흘려낸 피로 편지를 쓰는 서문숙.

서문숙; [미욱한 자식보다는 믿음직한 네게 손녀딸을 주어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부도신궁; [노야!] 이마를 바닥에 대고 울고

 

#86>

옆으로 넓게 퍼진 거대한 버섯같은 은행나무의 모습. 해가 제법 높이 돋았다.

동굴 입구에 권일해가 허리에 찬 칼에 손을 대고 위엄있게 서있다. 원수가 된 후 사람이 달라 보이고. 그 뒤에 사마이극과 차불노가 공손하게 서있다. 두 사람 모두 다친 몸이지만 자세를 흩트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고양이, 즉 천년호가 그런 권일해를 보고 있다.

동굴에서 나오는 부도신궁과 권완. 부도신궁의 얼굴에는 눈물 자욱이 나있고.

부도신궁; [못난 홍경이 노야의 큰 은혜를 입어 서문세가를 잇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대원수께서는 홍경을 종처럼 부려주시기 바랍니다!] 포권하고

권일해; [축하드리오 서문가주!] 끄덕이고

이어 권완에게 고개를 돌리는 권일해

권완; [아버님! 불효여식은 오늘 여기서 하직 인사를 올리옵니다!] 권일해에게 절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권일해

권완; [부디 소녀가 살았다 생각마시고 재취(再娶:새 장가를 감)를 하시어 세가의 손이 끊이지 않게 하시옵소서.] 고개 숙이며 울고

권일해; [아비 복에 너는 있어도 재취와 다른 자식은 없구나.] 한숨

권일해; [기필코 네 뜻이 그러하다면 오늘은 그냥 가지만, 천지신명이 무심치 않다면 우리 부녀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돌아서고

이어 엄숙한 얼굴로 걸어간다

권완에게 눈 인사를 하고 권일해를 따라가는 사마이극과 차불노와 부도신궁

권완; (과연 다시 살아서 아버지를 뵈올 수 있을지...!) 눈물 어린 눈으로 멀어지는 권일해의 뒷모습을 보고

야옹! 천년호가 어찌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고

권완; [천년호! 너는 대원수의 수호자이니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니?]

권완을 돌아보는 천년호

그러다가 다시 동굴을 보고

<그 말이 옳다! 이후로 권대원수 곁에 머물며 삿된 것들로부터 그를 지키거라!> 동굴 속에서 서문숙의 음성이 들리고

야옹! 대답하는 천년호. 다음 순간

슈욱! 신기루처럼 변해서 마치 한줄기 무지개처럼 권일해가 사라지는 쪽으로 날아간다.

가다가 돌아보는 권일해. 그 옆으로 유령처럼 나타나는 천년호

권일해가 손을 내밀자 손을 타고 올라와 권일해의 어깨로 올라가는 천년호

천년호를 어깨에 얹고 멀어지는 권일해 일행

권완; (참범(眞虎)이라고도 불리는 영물 천년호가 함께 있으면 난릉왕이라도 가볍게 아버지를 시해할 생각은 못하겠지!) 일어서고

다시 동굴로 들어간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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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해; [난릉왕! 내 딸을 내놔라!] 악을 쓰며 날아오고

난릉왕을 태운 백마가 허공을 선회하며 권일해 쪽으로 돌아선다.

권일해; [크아아!] 두 눈이 백열된 채 맹렬히 돌진하며 칼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 난릉왕의 보검도 하늘 높이 쳐들려진다. 보검에서 강렬한 검기가 일어나 구름에까지 이르고

권일해; (저자의 이번 일격은 피할 수 없다!) (나 권일해! 오늘 이곳에서 생을 마쳐야하겠구나!) 이를 악물며 난릉왕을 향해 칼을 휘둘러간다.

! 난릉왕도 강력한 검기를 일으킨 보검으로 권일해를 내리치려 한다

권완; (안돼!) 물방울에 갇힌 채 절망

권완; (아버님이 돌아가신다!) 차마 못 보고 눈 질끈 감는데

[!] 막 권일해를 치려던 난릉왕의 눈이 부릅

! 갑자기 물속에서 거대하고 시커먼 손이 확 치솟는다. 집채만하다. 바로 암흑철수인데 실제 암흑철수가 아니고 암흑철수에서 뿜어지는 마기다

난릉왕; [이 정도로 강력한 마기(暗黑魔氣)라면...!] 경악하며 피하려 하지만

콰득! 그대로 난릉왕과 말을 움켜잡아 버리는 거대한 검은 손

히히힝! 비명 지르는 말

콰득! 말과 난릉왕을 함께 움켜쥐어 뭉개버리는 거대한 검은 손

난릉왕; [.... 암흑철수(暗黑鐵手)!] 거대한 검은 손에 움켜쥐킨 채 비명 지르고

난릉왕; [암흑철수가 세상에 나왔구나!]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며 외치고. 하지만

콰득! 완전하게 손아귀로 뭉개버리는 검은 손. 직후

! 암흑철수의 수중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난릉왕과 말의 몸이 철갑만 남기고 그대로 폭발한다. 마치 중세의 기사들과 말같다.

크아아아! 악령같은 것이 난릉왕의 몸에서 빠져나가며 악을 쓰고

슈우! 사라지는 악령. 직후

! 권완을 가두고 있었던 물방울이 터져버리며 자유의 몸이 되는 권완.

휘청이며 떨어져서 물 위에 뜬 제법 큰 파편에 올라서고. 직후

스스스! 흐려지는 검은 손. 사라진다

투툭! 첨벙! 그와 함께 난릉왕과 그의 말의 몸에 둘러쳐져 있던 갑옷들이 부서져서 강물에 빠진다. 헌데 시체가 없다

권완; (... 시체가 없어!) (설마 지금까지 허깨비와 싸웠단 말인가?)

완전히 사라지는 거대한 검은 손

권일해; [권아!] 휘릭! 권왼이 선 파편으로 내려서고,

권일해;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냐?] 권완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흥분

권완; [전후를 다 말씀드리자면 기옵니다!] 말하며 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권일해도 흠칫하며 딸의 어깨를 놔주는데

스스! 근처 물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촤아! 이어 반듯하게 누운 자세로 물 위로 솟아오르는 그 그림자는 바로 청풍이다. 기절했다.

권완; [공청풍!] 눈 부릅. 이를 바득 갈고.

권일해; [아는 젊은이냐?] 뒤에서 묻고

권완; [! 이자로 인해서...!] 말하다가 눈 부릅 입을 다문다

오싹! 한기가 돌고

츠츠츠! 청풍의 몸을 휘감고 있는 칙칙한 기운

권완; (... 이토록 지독한 마기라니....!) 부르르 떨고

그러다가 다시 눈을 치뜬다

츠츠츠! 청풍의 오른팔이 시커먼데 마치 비늘로 덮인 것같다. 물론 암흑철수다. 헌데

스스스! 권완이 보고 있는 동안에 암흑철수가 급격히 투명해지고 있다. 그러다가

! 완전히 사라지는 암흑철수

권완; (...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이 사라졌어!)

<네겐 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냐 공청풍!> 권완의 당혹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그녀 주위로 모여든다. 잔해에 올라타는 자도 있고. 부서졌으나 아직 완전히 침몰하지 않은 배에서 나오는 자들도 있고. 모두 놀라서 권일해와 권완 부녀를 보고 있다. 그 중에는 한검호도 있고

그러다가 어딘가를 손짓하며 환호하는 생존자들

부도신궁이 양팔에 사마이극과 차불노를 안고 물속에서 뛰어오른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잔해가 떠도는데. 그 잔해 위에 서문숙이 누워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검호가 원수함 안에서 보았던 그 큰 고양이가 앉아서 서문숙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고양이가 사실은 천년 묵은 호랑이다. 평소에는 고양이처럼 작아져 있다가 분노하면 거대한 호랑이가 된다.

<목숨 빛을 두 개나 졌으니 원한을 갚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졌구나!> 위의 장면 배경으로 권완의 탄식

 

#84>

-상해(上海) 아침,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넓은 포구. 포구에는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있고. 바다로 나가는 화물선,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등등 아침부터 북적댄다

정박해있는 배 중 한 척. 바로 청풍과 권완이 탔던 그 배다. 배에서 사람들과 짐이 부산스럽게 내려지고 있다. 지켜보는 선장

마지막 손님이 내려가고

선원1; [선장님! 화물과 선객이 모두 하선했습니다!] 나이 든 선원이 주변 살피며 말하고

선장; [도선교(渡船橋)를 치우고 주변을 정리하도록!] 끄덕

선장; [갑판 위에 감시도 더 세워라. 기웃거리는 것들이 있으면 곤란하다.] 돌아서고

선원1; [!] 고개 숙이고

선실로 들어가는 선장. 선원1은 남아서 젊은 선원들을 배의 여기저기에 배치시킨다. 선원들은 도선교도 배 안으로 끌어들이고

갑판 아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선장

계단 아래 선실 입구에 선원들이 무기를 들고 서있다가 고개를 숙인다

선장; [혹시 아직 내리지 않은 자가 있는지 둘러봐.] [간혹 쥐새끼처럼 숨어든 것들이 내리지 않아서 뜻하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니까.] 선실로 들어가며 지시

대답하고 여기저기 배 안을 살피는 무사들

선실로 들어서는 선장. 선원1도 따라 들어온다.

등불이 켜진 선실 안에는 나이 든 선원들 서너명이 모여 있다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선실 중앙에는 넓은 탁자. 탁자 위에는 천으로 덮어놓은 사각 진 상자들이 몇 개 놓여있다.

선장; [확인했지?] 따라 들어온 선원1에게

선원1; [! 지금 배 안에는 우리 경신방의 형제들뿐입니다!] 문을 닫고

선장; [좋다. 천을 걷어라!]

상자 옆에 있던 자가 천을 치운다

천을 걷어내자 나타나는 것은 일곱 개의 상자. 그리 크지는 않다. 한 면이 50쎈티쯤 되는 직육면체의 상자들인데 쇠로 만들어진 듯한 재질. 크기도 전부 같고. 다만 상자 위에는 () () () 四 五 六 七 등의 숫자가 차례로 적혀있다. 상자의 한쪽에는 엄지 손가락만한 구멍이 하나씩 뚫려있고

선장; [볼수록 기괴한 물건들이군!] 살핀다

선장; [대체 이 상자들의 용도가 뭘까?] [이어붙인 틈새가 없는 걸로 봐서는 쇳물을 틀에 부어 찍어낸 것 같은데...!] 이리저리 살핀다. 모두들 같이 살펴보고

선원3; [... 노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겁먹은 표정으로 속삭이고

모두들 흘깃 3을 본다. 선장만 상자 살피는데 전념하고

선원3; [이 상자들은 천하칠대고수(天下七大高手)중 한 명인 천동대협(天瞳大俠) 이산굉(李山宏)의 물건인데....!] [함부로 손댄다는 것이 영 께름직합니다.]

선원3; [혹시라도 천동대협이 알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수도......] + 선장; [상방주(上幇主)님의 특명이다.] 상자를 차례로 살피면서 말을 막고

선원들 흠칫

선장; [나라고 천동대협 이산굉의 무서움을 모르겠느냐?] [또 이것들이 그의 물건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고개를 들고

선장; [그러나 상방주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들의 정체를 확인한 후에 넘겨주라고 지시하셨다.] 옆에서 내민 등불을 받아든다

선원1; [상방주님께서도 예의주시하셨다면 예사 물건은 아니겠습니다.]

선원2; [당연하지! 지난 삼십년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천동대협의 것인데 예사로운 물건일 리 없잖느냐?] 등불을 상자에 들이대고 요리 조리 살피고

선원1; [헌데... 천동대협은 왜 표국을 통하지 않고 우리 경신방(鯨神幇)의 배를 이용해서 이것들을 옮겼을까요?]

선장; [천동대협 정도의 거물이 하는 일을 우리같은 하수들이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나?]

선장; [다만 상방주께서 이 물건의 운송을 맡기 위해 적잖은 금은을 뿌렸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선원3; [... 그럼 우리는 확인만 해보고 용화사(龍華寺)에 가져다주면 되는 거겠지요?] 여전히 겁에 질려서

선장; [네놈은 주둥이 좀 닫고 찌그러져 있어!] 돌아보며 버럭 화를 내고

찔끔 선원3

선장; [뱃사람 노릇 한 게 이십 년도 더 되었으면서 여전히 겁이 그렇게 많은 거냐? 못난 놈 같으니...!] 선원3을 흘겨보고

선원3; [... 노대! 소제가 겁이 좀 많기는 하지만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요!] 얼굴이 벌개져서 항변을 하고

선장; [이유? 뭔 이유?] [겁이 많은 데도 이유가 있냐?] 비웃고. 다른 놈들도 비웃고

선원3; [나 난...... 천동대협 이산굉을 직접 본 적이 있소.] 겁에 질려서

[천동대협을 직접 봤어?] [언제 어디서?] 다른 자들 비로소 흠칫.

선원3; [내 고향이 연주탄(嚥州灘)이라는 건 모두들 알거요.] [작년 명절에 동생을 보러 고향에 갔다가 이산굉을 보았소.]

모두들 긴장하고

선원3; [당시 이산굉은 연주탄 일대에서 악명 높던 수적(水賊) 무리 장도채(壯島寨)를 단신으로 쓸어버렸었소.]

<천동대협 이산굉은 채 한 시진이 안되어서 오백명이 넘는 수적들을 때려죽였으며.... 장도채의 채주인 과산삼권(過山三拳) 곡거술(曲巨鉥)은 사로잡아서 쇠줄로 묶어 개처럼 끌고 다녔소.> 강가에 자리한 도적들의 소굴. 문이 박살 나있고 마당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있다. 그 중간에서 얼굴의 다른 곳은 안 보이고 오직 두 눈만이 횃불같이 빛나는 거인이 거대한 쇠몽둥이를 짚고 우뚝 서있고 그 앞에 털북숭이 산죽두목이 엎드려서 애원하고 있다. 이미 심하게 얻어터져서 피투성이. 한쪽 구석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겁에 질려 떨고 있고

<천동대협에게 사로잡힌 곡거술은 네발로 기어서 인근 마을을 모두 돌며 자기의 죄를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소.> 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 기어 다니며 울부짖는 산적 두목. 그자의 목에 매인 쇠사슬을 쥐고 따라가는 거인. 여전히 두 눈만 횃불처럼 빛난다.

<마지막으로 곡거술을 끌고 우리 마을에 도착한 천동대협은 <나 이산굉은 남의 것을 탐하는 자를 가장 미워하고 남을 속여 이득을 얻는 자를 가장 경멸한다. 너는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니 죽어 마땅하다!>라고 외치고는 그자를 때려죽였소.> 쇠 몽둥이를 높이 쳐들어 산적 두목을 때려죽이려는 천동대협의 모습. 공포에 질려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산적 두목. 장소는 어느 마을의 번화가.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다. 그들 중에 선원3도 끼어있다.

[... 과산삼권 곡거술이라면 녹림도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천동대협 이산굉에게 박살난 문파가 한 둘이 아니지!] 선원들 겁에 질리고

선원3; [나도 남을 속이고 남의 물건을 빼앗은 적이 여러 번 있소.]

선원3; [하지만 천동대협을 본 이후로는 감히 나쁜 짓을 할 엄두를 못 내게 되었소.] [그럴려고 할 때마다 천동대협이 생각이 났고, 그의 모습만 떠올려도 간담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이오.]

[자네가 언제인가부터 소심하고 겁이 많아졌다 했더니 천동대협을 본 때문이었군!] 다른 선원 끄덕

선원3; [노대도 이산굉에 대한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오. <천동대협을 부르면 천동대협이 나타난다!>는 말을!] 선장에게

찡그리는 선장

선원1; [... 천동대협 이산굉이 그렇게 무섭게 생겼던가?]

선원3; [천동대협의 천동이 하늘()의 눈()이라는 뜻임은 다들 알 거요.] 둘러보고

[그렇다더군!] 끄덕이는 사람들

선원3; [별호 그대로 천동대협의 눈은 정말로 크고 부리부리했소.]

선원3; [마치 눈에서 벼락이 쏟아지는 것 같았고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것 같았으며, 소문대로 천리 밖을 볼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소.] 말하는 선원 3의 뒤로 이목구비 중에서 오직 빛나는 두 눈만 보이는 거인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선원1; [... 그럼 그가 호위도 없는 우리 경신방에 물건을 맡긴 것도 멀리서 다 볼 수 있기 때문이겠군.]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

[... 노대! 우리 그만 둡시다.] [... 그럽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동대협이 우릴 보고 있을지 모르오!] 다른 놈들도 겁에 질리고

선장; [멍청한 것들!] 버럭 고함

모두들 찔끔.

선장; [네놈들도 알다시피 여기로는 빛 한 줄기 못 들어온다.] [이산굉이 정말 천리 밖에서 보는 재주가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선장; [설령 그가 달려온다 해도 우리에겐 배가 있으니 바다로 나가버리면 된다.] [멀리 조선이나 유구(琉球;오키나와)에 가서 이삼 년 있다가 온다면 무슨 재주로 그가 우리를 죽일 수 있겠느냐?]

[.. 하긴!] 겁에 질렸던 선원들 얼굴이 조금 풀리고.

선장; [경신방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상방주님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겠지?] 눈 부라리고

선원들 움찔

선장;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이산굉이 아니라 바로 상방주님이시다.]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죽게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들 해라.] 코웃음치며 다시 상자 쪽으로 돌아서고

서로 눈치 보는 선원들

선원1; [노대의 말이 옳네.] [미적거릴 것 없이 빨리 보고 용화사에 가져다주자고.] 역시 상자 쪽으로 달려들고

[... 그럽시다!] [빨리 해치웁시다!] 우르르 상자에 달려들어서 하나씩 맡아서 살핀다.

들어서 흔들어 보는 놈,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놈, 송곳을 구멍에 넣어 휘저어보는 놈, 망치로 두들겨 보는 놈 등등

선원1; [노대! 이건 큰 망치로 깨뜨리지 않고는 안을 살펴 볼 수가 없겠소.] 선장을 돌아보고

선원1; [더 이상 우리 재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은데....] 선장도 역시 상자 하나를 붙잡고 귀를 기울이며 통통 두들겨 보고 있는 중이다.

선장; [잔소리 말고 이걸 열어볼 방도나 생각...!] 덜컹! 신경질 내는데 갑자기 선실의 문이 열린다.

선장; [명령할 때까지 문 열지 말란 말 못 들었어?] 버럭 고함치며 돌아보고. 다른 놈들도 고개 돌려 입구 쪽을 보는데

! 열려진 문 밖이 아주 환하다. 마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비추는 것 같은데 그 빛 속에 누군가 우뚝 서있다.

[!] [... 누구냐?] 모두들 눈이 부셔 팔로 눈을 가리며 비틀. 직후

! ! 무언가 빛줄기같은 것들이 방안의 인간들을 휩쓸어버린다

[!] [케엑!]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몸이 토막 나서 죽는 방안의 인간들.

퍼퍽! ! 나뒹구는 자들. 헌데

푸시시시! 그자들의 몸뚱이는 마치 강한 불에 노출된 종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푸스스스!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시체의 살가죽들

스으! 이윽고 빛이 사그라 들고. 방안에는 해골들만 나뒹굴고 있는 게 드러난다. 그리고

백영; [경신방의 상방주 형파(荊把), 그 늙은이가 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천동대협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후후후!] 스으! 빛이 사그라드는 문간에 우뚝 서있는 인물. 서른살 사량의 서생인데 온몸에 하얀 옷을 입었고 머리에도 하얀 띠를 둘러 아주 멋들어지다. 허리춤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전형적인 풍류한량처럼 보인다. 얼굴에도 항상 미소를 띠고. 하지만 이 인물 백영은 십대세가 가주들에 필적하는 실력자다.

백영; [천동대협의 눈이 천리 밖을 볼 뿐 아니라 손이 천리 밖을 휘어잡는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웃으며 부채를 쥔 손을 상자들을 향해서 흔들고

둥실! 떠오르는 상자들

백영; [감히 딴 생각을 품은 대가는 머잖아 치루게 될 것이다 형파!] 웃으며 돌아선다

방 밖의 복도에는 선원들이 토막 나서 죽어있고

백영이 걸음을 옮기는 데 따라서 상자들이 둥둥 떠서 따라간다

 

잠시후. 따각 따각! 마차 한 대가 포구를 떠난다. 마부석에는 여전히 웃고 있는 백영과 죽립을 눌러쓴 마부가 타고 있고. 마차 뒤쪽에는 경신방의 배가 보인다. 하지만 갑판에는 선원들이 보이지 않고

휘장이 조금 들린 마차 안에는 상자들이 쌓여있는 게 보인다

백영; [정오까지는 용화사에 닿아야하네! 서두르게나!]

고개 끄덕이는 마부

마부; [이랴!] 채찍질을 하고

히히힝! 울면서 속도를 내는 말

웃으면서 뒤를 향해 손가락을 퉁기는 백영. 그러자

! 갑자기 폭발이 일면서 경신방의 배가 불길에 휩쌓인다

[! 불이다!] [새벽에 도착한 경신방의 배에서 불이 났다!] 사람들 놀라서 보고

그 불길을 배경으로 웃으며 멀어지는 백영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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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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