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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장 속의 미녀

 

 

 

(도련님과 오랜만의 동침이라 어색하겠구나.)

섭대낭도 주책맞게 가슴이 뛰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 훼방꾼이 끼어들었다.

"마님! 죄송합니다."

문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섭대낭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 맞은 표정으로 문쪽을 돌아보았다.

"금의위에서 승상부도 수색을 해야 하니 위사들의 진입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자객들 중 달아난 자의 흔적이 승상부 근처에서 사라졌다면서..."

문밖의 인물이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인물은 승상부의 경비를 책임지는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의 수령인 석호륜(石虎倫)이었다.

"금의위 따위가 감히..."

석호륜의 보고를 받은 섭대낭이 불끈 화를 낸다.

그러자 섭대낭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한다.

요문천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유모이지만 일단 화를 내면 나찰이나 야차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 속하들도 안된다고 했지만 금의위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서..."

문 밖의 석호륜이 아연긴장한 채 더듬거린다.

 

승상부의 주인인 요광효에게는 처()도 첩()도 없다.

비록 영락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환속을 하긴 했지만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는 않은 것이다.

요광효가 환속을 하고도 여전히 승려처럼 사는 걸 보다 못한 영락제는 종종 궁녀들 중 미녀를 골라 하사하곤 했다.

하지만 요광효는 영락제가 보낸 여자들을 일단 받았다가 다른 사내들과 짝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래서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이 승상부의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모라면 하녀나 다름없는 천한 신분이다.

헌데 어쩐 일인지 요광효는 아들의 유모인 섭대낭을 매우 존중한다.

자연스럽게 승상부의 사람들도 섭대낭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승상부에서 섭대낭에게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요광효와 요문천 부자뿐인 것이다.

 

"금의위에서는 어떤 인간이 책임자로 왔는가요?"

섭대낭이 문쪽을 노려보며 물었다.

"금의위의 부통령(副統領) 곽산해(郭山海)가 마님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석호륜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대답했다.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은 한 때 강북 일대를 주름잡던 호걸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부터 섭대낭의 준엄한 기세에 압도당한 석호륜은 섭대낭의 목소리만 들어도 한없이 위축되곤 한다.

"알았어요. 곧 갈 테니 그자를 대청으로 들이세요."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석호륜이 멀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대청에 다녀올 동안 도련님 혼자 계셔야겠어요."

요문천을 돌아보며 말하는 섭대낭의 얼굴은 언제 살기등등했는가 싶게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요문천은 대답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호장무사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밖으로 나가지는 마세요."

섭대낭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요문천의 서재를 떠났다.

(역시 유모밖에 없어.)

닫히는 문을 보며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동대로에서 본 여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대낭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말고 오늘 읽을 계획이었던 책들이나 마저 읽자.)

요문천은 탁자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털썩!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요문천의 귀에 들렸다.

요문천이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은 서재와 연결된 침실쪽이다.

침실 문은 닫혀있는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창문을 닫아놔서 바람이 들이칠 리는 없는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침실 문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이 문을 열고 들어간 침실은 어둑하다.

아직 잠자리에 들 때가 안되어서 불을 켜놓지 않은 때문이다.

침실은 승상부 소부주의 잠자리답게 넓고 화려하다.

침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침대는 기둥과 지붕이 달려있다.

매우 넓어서 대여섯명이 함께 자도 될 크기의 침대다.

벽에는 여러 개의 옷장이 세워져 있으며 한쪽에는 욕실로 통하는 문이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둑한 침실에 전에는 맡아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다.)

요문천은 그 냄새가 누군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비린내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창문들은 모두 닫혀있다.

하지만 누군가 다친 몸으로 침실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호장무사들을 불러야할까?)

두려움으로 머리끝이 쭈뼛거린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호기심에 요문천은 찬찬히 침실 바닥을 살폈다.

곧 요문천은 침실 바닥에 옅은 얼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히 지우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다.

핏자국은 창문으로부터 여러 개의 옷장들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옷장 속에 누군가 숨어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핏자국의 흔적이 이어진 옷장으로 다가갔다.

(아마 영락폐하를 습격했다가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일 것이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의 손은 이미 옷장의 문을 열고 있다.

번쩍!

옷장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섬광이 요문천의 목으로 날아든다.

하지만 눈을 치뜬 요문천은 자신의 목을 그어오는 새파란 칼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옷이 가득 걸린 어둑한 옷장 안쪽에 한명의 여인이 숨어 있다가 짧은 칼을 휘두르고 있다.

옷장 속이 어둑하다.

게다가 몸에 걸친 옷도 피로 물들어 있어 여인의 새하얀 얼굴만이 또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출혈이 심한 탓에 한층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다.

분칠을 한 것같은 그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어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 여자다!)

눈을 치뜬 요문천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진다.

지난밤 한번 본 후로 하루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여인!

그녀의 얼굴이 믿어지지 않게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

 

크르르르!

갑자기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버둥거린다.

"이놈들이 왜 이래?"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인 진준(陳俊)과 여구(呂九)는 갑자기 날뛰는 번견(番犬;경비견)들의 목줄을 잡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번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순찰을 돌던 곳은 다른 저택과 맞닿은 담장 근처였는데

그곳의 관상수와 꽃잎에 핏방울이 점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던 자객이 승상부에 들어왔다!)

진준과 여구의 안색이 와락 굳어졌다.

그와 함께 그들은 반사적으로 호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

 

"절색(絶色)이다!"

 

지난밤에 들었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철접의 귀를 울렸다.

철접은 금의위 위사들이 집요한 추적을 피해 어느 화려한 저택으로 숨어들었었다.

헌데 그 저택의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 내부의 옷장에 몸을 숨긴 직후 누군가 다가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자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 침묵시켜야만 한다.

철접은 옷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병(小柄;일본식 비수)으로 그자의 목을 빠르게 찔러갔다.

바로 그 순간 지난밤에 들었던 <절색(絶色)이다!> 라는 외침이 해빙기에 갈라지는 얼음처럼 쨍하게 철접의 머리 속을 울렸다.

양손으로 옷장의 문을 활짝 연 해맑은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얼굴을 언제 어디서 봤는지가 순간적으로 철접의 뇌리에 떠올랐다.

지난밤 동생 용차랑을 들여보냈던 기루 앞에서 본 젊은 서생이다.

(안돼!)

철접은 찔러가던 소병을 필사적으로 틀었다.

!

간발의 차이로 철접이 내지른 소병의 끝이 서생의 목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비수 끝에 스친 목옆의 살갗이 쩍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생의 얼굴에 피어오른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양손으로 옷장을 연 요문천과 그에게 비수를 내지른 자세인 철접의 몸이 함께 굳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상황이 사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이 여자를 다시 만났다.)

요문천은 목이 베인 상처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갔던 여인이 기적처럼 바로 눈앞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자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철접 역시 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훑으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 보았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사내..

그를 넓디넓은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전율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마치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숨 몇 번 들이키고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삐익! !

돌연 들려온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두 사람을 몽환경(夢幻境)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쪽이다!"

"자객의 흔적이 소부주님의 거처 은천각(恩天閣)쪽으로 이어진다."

"빨리 마님께 알려라!"

컹컹! !

호각소리에 이어 여러 명이 다급히 지르는 고함 소리와 사나운 개의 짖음이 들려왔다.

승상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늘 조용하던 요문천의 거처 일대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여자가 내 거처로 숨어들어온 흔적이 호장무사들에게 발견되었구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장무사들이 자신의 거처로 몰려들며 지르는 고함을 통해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영락제를 습격했던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요문천의 눈에 비로소 여인의 몸 상태가 들어왔다.

철접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마 북경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위장한 채 기다리다가 자금성으로 귀성하던 영락제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철접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탓에 원래는 희던 옷이 피로 물들어 혈의(血衣)로 변해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장의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을 정도였다.

가장 심각한 상처는 왼쪽 가슴에 나있다.

한 자루 금빛으로 번쩍이는 검이 철접의 가슴에 박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가슴이, 그것도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왼쪽 가슴이 검에 관통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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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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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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