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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의 비밀

 

 

 

조백하(潮白河)는 북경의 동북방을 휘감고 흐르는 상당히 넓은 강이다.

조백하 북안(北岸)에는 무려 수천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그 폐허는 오십이 년 전까지만 해도 원나라의 황궁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던 장원의 흔적이다.

 

-천독친왕부(千毒親王府)!

 

폐허가 된 장원의 이름이다.

이 장원의 주인은 천독친왕(千毒親王) 갈태독(葛太毒)이란 인물이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말기 최고의 권세가였던 그는 원래 무림인이었다.

일개 낙척한 서생이었던 갈태독은 강남을 여행하던 도중 우연히 한 권의 독경(毒經)을 얻어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이 되었다.

사실 갈태독의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독을 자유자재로 쓰고 치명적인 독공(毒功)을 구사하는 갈태독과 싸울 경우 세상 어떤 고수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갈태독의 이같은 능력은 원나라 황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 황실은 고질적인 내분과 부패, 군벌들의 득세등으로 인해 중원에 대한 통제 능력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에 편승하여 백련교(白蓮敎), 즉 홍건적(紅巾賊)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 몽고족에 의한 중원의 지배를 종식으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위기상황에서도 몽고족 군벌들은 황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또 황제 직속의 군대는 그 질이 형편없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원나라 황실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갈태독을 회유하여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하면서...

탐욕스러운 성격이었던 갈태독은 한족(漢族)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몽고족의 정권인 원나라 황실의 앞잡이가 되어 가공할 혈겁을 일으켰다.

원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던 숱한 한족 출신의 반군들과 이에 동조한 무림의 명숙들이 갈태독이 쓰는 치명적인 독과 끔찍한 독공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갈태독의 활약에 만족한 원나라 황실은 일개 무부(武夫)였던 그에게 천독친왕(千毒親王)이라는 왕작(王爵)을 내렸으며 약속했던 것 이상의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갈태독은 원 황실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인 반군들과 무림인들의 재산까지 가로채 주머니를 채웠다.

그 결과 갈태독은 오래지 않아 천하제일의 거부(巨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재물을 모은 갈태독은 이곳 조백하 북쪽 강변 위에 자신만의 성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천독친왕부다.

그러나 영원할 것같았던 갈태독의 좋은 시절은 너무도 빨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강남에서 몸을 일으킨 풍운아 주원장(朱元璋)이 파죽지세로 중원을 장악한 후 원 제국의 심장부인 북경으로 육박해온 것이다.

갈태독은 원나라 황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주원장의 군세를 저지하려고 했다.

원 황실이 무너지면 갈태독 자신의 부귀영화도 끝이 나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으로 쇄도해온 주원장 군세의 수장은 명장 서달(徐達)이었다.

주원장의 고향 친구이기도 한 서달만 죽이면 주원장의 군세도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에 갈태독은 단기필마로 서달의 군막(軍幕)으로 잠입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서달은 중원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고 전략가다.

그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면 백기(白起), 한신(韓信)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달의 일신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다.

신변에 접근할 수만 있으면 갈태독의 능력으로 서달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헌데 갈태독은 서달의 군막에 돌입한 직후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서달 옆에는 한명의 젊은 검객이 있었다.

약관을 갓 넘긴 그 젊은 검객에게는 갈태독의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젊은 검객의 몸을 뒤덮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의 장막은 갈태독이 구사한 지독한 독과 끔찍한 독공을 너무도 간단히 분쇄해버렸던 것이다.

반면 젊은 검객이 휘두른 검에서 내뻗힌 삼엄한 검기는 여지없이 갈태독의 몸을 갈라버렸다.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은 필사적으로 서달의 군영을 탈출했다.

젊은 검객을 제외한 그 누구도 갈태독이 뿌리는 독을 견디지 못하는 덕분에 갈태독은 사지를 탈출할 수 있었다.

중상을 입은 갈태독은 자신의 거처인 천독친왕부로 숨어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북경을 함락시킨 주원장의 군세가 천독친왕부에도 들이닥쳤다.

그러나 주원장의 막강한 군세도 천독친왕부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갈태독이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막대한 양의 극독을 천독친왕부 일대에 뿌려버린 때문이다.

갈태독이 뿌린 지독한 독은 주원장의 군세를 막아낸 대신 천독친왕부에 거주하던 그의 수하와 일족, 측근들까지 남김없이 몰살시켜버렸다.

또한 천독친왕부의 어디론가 숨어들어간 갈태독 역시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후 오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독친왕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귀역(鬼域)이 되었다.

처음에는 갈태독이 숨겨둔 막대한 재물을 노리고 수많은 인간들이 천독친왕부로 들어가 수색을 하였다.

하지만 갈태독이 뿌려놓은 지독한 극독으로 인해 천독친왕부에 들어갔던 자는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했다.

자연히 천독친왕부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결코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하는 사지(死地)로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인적이 완전하게 끊겨버렸다.

 

***

 

(여긴 천독친왕 갈태독의 저주가 서려있다는 귀역 천독친왕부인데...)

요문천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휘익!

그는 지금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승상부를 빠져나온 철접은 촌각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천독친왕부로 달려왔다.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면서 요문천은 수시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철접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하얘지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하얘서 금방 내린 눈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 되어 있다.

홍옥같이 붉던 입술도 탈색이 되어 옅은 청색을 띠고 있다.

그것은 다량의 피를 흘린 것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철접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창백해져가는 안색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밝고 선명해진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익히는 술법 중에 생명을 태워서 힘을 내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요문천은 곁눈질로 철접의 안색을 살피며 침을 삼켰다.

여자는 한 끼를 굶으면 배로 예뻐지고 병이 깊을수록 미녀가 되어간다는 말이 있다.

생기가 소멸되며 창백해지는 철접의 얼굴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헌데 이 여자는 왜 이 죽음의 귀역으로 달려온 것일까?)

요문천은 주체할 수 없게 철접에게 끌려가는 마음을 다 잡으려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으 스으...

천독친왕부는 전체가 검푸른 안개같은 것에 덮여있다.

그것은 갈태독이 주원장 군세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뿌려놓은 지독한 독들과 그 독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썩으며 만들어낸 독장(毒瘴)이다.

독장이 처음 천독친왕부를 뒤덮었을 무렵에는 한 모금만 마셔도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십이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독장은 많이 옅어지고 독성도 약해졌다.

지금은 지나치게 오랜 시간만 아니라면 천독친왕부 내에 머물러도 죽지는 않는다.

그래도 숱한 사람들이 독장을 마시고 죽어간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천독친왕부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서 기분이 안좋아진다.)

요문천은 철접이 눈치 채지 못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철접의 팔에 안겨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마신 독장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요문천이 억지로 구역질을 참으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휘익!

마침내 철접이 질주를 멈추며 바닥에 내려섰다.

콰당탕! 퍼억!

그러나 바닥에 발을 댄 직후 철접은 무너지듯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요문천도 바닥에 팽개쳐졌다.

어구구...”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요문천은 죽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런 그의 눈에 철접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기력을 모두 소모했구나.)

요문천은 철접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고 서둘러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철접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쉬지 않고 삼십여 리를 달려왔다.

그 바람에 몸속의 모든 기운을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괜잖으십니까?”

요문천은 걱정스럽게 말하며 철접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다.

“...”

하지만 철접은 말없이 요문천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일어섰다.

얼굴은 백짓장같이 하얗고 일어선 두 다리를 금방이라도 다시 무너질 듯이 후들거리고 있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이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철접은 요문천과 마주 서며 오른손을 품속에 넣었다.

요문천의 키는 또래들 보다 작은 편이다.

반면 철접은 육척에서 두 치 남짓만 빠지는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다.

그 때문에 마주 선 철접은 요문천을 내려다보게 된다.

이걸 먹고... 힘들겠지만 너 혼자 힘으로 승상부에 돌아가라.”

철접은 품속에 넣었던 오른손을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기름종이로 싼 환약이 하나 들려져 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환약이다.

이건 혹시...”

요문천은 두 손으로 환약을 받으며 눈을 치떴다.

내가 당주로 있는 이가류의 비전 해독약이다. 그걸 복용하면 천독친왕부를 덮고 있는 이 독장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돌아섰다.

(역시 독장의 해독약이었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기름종이를 벗기고 환약을 입에 넣었다.

동영의 인자들은 독을 쓰는 재주도 탁월하다.

도검을 쓰는 것보다 독을 써서 표적을 죽이는 편이 위험부담은 낮고 성공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독을 잘 쓴다는 것은 해독약도 잘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문천은 환약을 씹어 삼키자마자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맑아지자 비로소 주변 상황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온 곳은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 자리한 정원이었다.

무너지고 불탄 건물 잔해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상당히 넓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제멋대로 자란 정원수들과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다.

요문천이 환약을 먹고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철접은 무게가 없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가는 앞쪽에는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다.

길쭉한 석재들을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우물인데 한쪽 변이 일장 가까이나 되는 상당히 큰 규모의 우물이다.

아마도 천독친왕부가 번성했을 당시에 식수를 해결한 우물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물에는 왜...)

요문천이 의아해할 때 철접은 비틀거리며 우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발을 들어 우물의 턱으로 올라섰다.

(설마...)

요문천이 섬뜩한 느낌에 눈을 치뜰 때였다.

스윽!

우물의 턱으로 올라선 철접의 몸이 우물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위험합니다.”

요문천은 기겁하며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철접은 우물 안쪽으로 사라진 후였다.

(투신을 할 줄이야!)

요문천은 사색이 되어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철접이 우물 안쪽으로 떨어졌음에도 물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른 우물인가?)

요문천은 덜덜 떨며 우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비록 반달이 떠있다고는 해도 한밤중인데다가 우물이 상당히 깊어서 아래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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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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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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