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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후(劍后) 출세(出世)

 

 

 

천목산(天目山)절강성(浙江省) 서북쪽에 자리한 명산이다.

가장 높은 두 봉우리에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이라는 호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의 눈(天目)이라는 지명은 그 특이한 지형에서 유래했다.

천하절경인 천목산은 도교(道敎)의 중요 성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나라 시절에 살았던 도교의 창시자 장도릉(張道陵)이 천목산에서 수도를 하여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무림인들에게도 천목산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다.

무림맹 맹주였던 사자천존이 처음으로 무위(武威)를 드러낸 곳이 천목산인 까닭이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시절 천목산은 라마교(喇嘛敎)의 소굴이었다. 기존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찰과 암자들을 원나라를 등에 업은 라마교가 접수했었다.

라마교 자체는 딱히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교리를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사욕(邪慾)을 채우는 데 악용한 일부 라마승들이 문제였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라마승들이 저지른 음행과 만행은 헤아릴 수도 없다.

원나라가 쓰러지고 명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라마교는 쉽사리 근절되지 않았다.

홍무제 주원장은 자신이 한 때 몸담았던 명교(明敎), 즉 백련교(白蓮敎)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민중의 불만과 시대의 혼란을 먹고 자라는 백련교는 언제 어떻게 발흥할지 모른다.

역대 왕조들 중 백련교의 반란으로 애먹지 않은 왕조가 드물다.

이에 주원장의 우선적인 척결 대상은 백련교가 되었다.

덕분에 다른 종교들은 명나라의 탄압으로부터 비껴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비호를 받던 라마교도 그 덕을 보았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후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라마교는 본색을 드러내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

라마교의 본거지 중 한곳이었던 천목산 일대에서 그들의 횡포는 유독 심했다.

아녀자들을 유린하거나 혹세무민하여 신도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한 소년이 천목산에 들어와 죄악의 온상이었던 라마교의 암자와 사찰들을 일소해버렸다.

불과 열일곱 살이던 소년은 백 곳이 넘는 사찰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암자에서 라마승들을 몰아냈다.

라마승들 중 죽은 자는 없었다. 그저 반신불수가 되거나 무공을 지녔던 자들은 폐인이 되었을 뿐이다.

수백 년 간 이어져 온 라마교의 폐해를 불과 며칠만에 끝장낸 소년의 이름은 초천강이었다.

그렇게 두곽을 드러낸 소년 초천강은 십년이 안되어 정파백도의 맹주로 추대되었었다.

사자천존이란 전설이 시작된 곳이 바로 천목산인 것이다.

 

***

 

천목산 남쪽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험한 계곡이 있다.

계곡의 막다른 곳은 수십 장 높이의 절벽이 가로 막고 있다.

절벽 아래쪽에는 상당히 큰 동굴이 있는데 입구가 집채만한 바위로 막혀있다.

동굴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일남일녀가 서있다. 구척 거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늙은 중과 곱게 늙은 백발의 노파다.

그들은 무림맹 사대장로 중 두명이다.

거구의 노승은 소림사 출신인 혈나한(血羅漢)이다.

혈나한은 성격이 불같아서 죄를 짓는 중생을 보면 불문곡직 때려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그 바람에 원래 법호인 원명(圓命) 대신 혈나한이라는 섬뜩한 별호로 불리고 있다.

곱게 늙은 노파의 별호는 백발신녀(白髮神女).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머리만 검으면 절세미녀로 보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백살을 넘겼다고 하지만 백발신녀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녀가 모든 술법의 종가인 신녀문(神女門)의 후예라고는 하지만 역시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사대장로의 나머지 두 사람은 개방의 태상장로 상취개선(常醉丐仙)과 아미파 장로 금정사태(金頂師太).

오늘로 검후(劍后)의 천일(千日) 폐관수련이 끝나는구려.”

혈나한이 절벽 아래의 동굴을 보며 말했다.

그 동굴은 사자천존과 관련이 있다.

라마교를 일소하기 위해 천목산에 머물 때 사자천존은 그 동굴을 거처로 삼았었다.

덕분에 이름 없는 동굴이지만 무림맹의 인물들에게는 성역 취급을 받아왔다.

백발신녀가 한숨을 쉬었다.

공교롭게도 맹주의 폐관이 끝나는 날에 맞춰서 사달이 났군요.”

혈나한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납은 어쩐지 소주에서 벌어진 그 일이 장차 거대한 폭풍을 야기할 씨앗처럼 느껴지외다.”

인과(因果)가 어떤 경로로 연결되어 중생들의 삶을 뒤흔들지는 부처님만이 아시겠지요.”

신녀께서는 어느덧 이 중보다 불법에 더 정통하시게 되었소이다.”

혈나한의 찬사에 백발신녀는 살짝 웃었다.

과찬의 말씀을... 그저 백년 넘게 산 덕분에 옭아매고 있는 세상의 그물에서 조금 자유스러워진 것뿐이지요.”

모든 술법의 시원(始原)인 신녀문의 전승(傳承)답지 않으신 겸양이시오.”

혈나한이 웃을 때였다.

드드드!

갑자기 절벽에서 강한 진동이 일어났다.

검후가 드디어 출관(出關)하려는 모양이오.”

혈나한은 흥분한 표정으로 동굴을 보았다.

(불과 천일만에 대공(大功)을 이룬 것 같구나.)

백발신녀도 감탄하며 동굴을 볼 때였다.

!

아주 밝은 빛이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집채만한 바위를 절벽을 뚫고 나왔다.

검기(劍氣)!”

혈나한이 흥분해서 외쳤다.

! !

뒤이어 여러 가닥의 밝은 빛들이 바위를 뚫고 나왔다.

서걱! 쩌억!

그 빛들은 종횡으로 움직여서 바위를 격자 형태로 잘라버렸다.

검벽신공(劍壁神功)이오! 검후가 천일폐관 끝에 백자검결(百字劍訣)의 오의를 깨우친 것 같소. 과연 사자천존께서 의발(衣鉢)을 전할만한 인재였소!”

혈나한의 부리부리한 눈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기뻐하는 혈나한과 달리 백발신녀의 새하얀 아미는 살짝 찌푸려졌다.

(검기가 지나치게 패도적으로 느껴진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백발신녀의 눈에는 바위를 격자로 가르고 있는 검기들이 그저 강하기만 한 것으로 보인 것이다.

! 쩌적!

그 사이에도 검기들이 종횡으로 움직여서 격자 형태는 더 작아졌다.

처음에는 격자의 폭과 넓이가 한자 가량이었다.

검기들이 그 격자들을 다시 가르기를 반복하며 주먹 정도로 조밀해졌다.

부욱!

조밀한 격자무늬로 갈라진 바위의 중앙이 불룩해졌다. 안쪽에서 강한 힘이 밀고 나오며 생기는 현상이다.

!

한 순간 불룩해졌던 격자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며 동굴 입구가 형상을 드러냈다.

후두둑! 퍼퍽!

깍두기처럼 썰린 바위의 잔해들이 동굴 입구에 반원형으로 퍼졌다.

허어! 검기를 수평뿐만 아니라 수직으로도 발휘했구먼!”

동굴 앞에 흩어지는 정육면체의 바위 조각들을 보며 혈나한은 감탄했다.

검기가 단순히 밖으로 뿜어지기만 했다면 정육면체가 아니라 긴 막대형이 되어야했다.

동굴 안의 인물은 검기의 방향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혈나한이 감탄할 때 막고 있던 바위가 사라진 동굴 입구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이며 키가 커서 어지간한 사내들만하다.

키는 커도 몸매는 호리호리해서 가냘프게 보인다.

하지만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은 보는 이를 압도당하게 만든다.

유달리 긴 눈매와 칼날 같은 콧대, 얇지만 붉은 입술은 초겨울의 서늘한 아침 공기를 떠올리게 한다.

양손에 칼집과 검을 나눠 든 여인은 검은 색의 낡은 저고리와 치마를 걸치고 있다.

그 수수한 차림도 여인의 독특한 분위기와 미모를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삼단 같은 머리는 대충 묶었는데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탓에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여인의 이름은 대려화(代麗華), 재건되고 있는 무림맹의 신임 맹주다.

아직 젊은 나이, 심지어 여자이면서 무림맹의 맹주로 추대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본래 사자천존은 제자를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은퇴를 했는데 은퇴하기 직전 한 소녀에게 자신의 무공 일부를 전수해주었다.

비록 사자천존이 정식으로 제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무공을 전수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무림맹 인물들은 그 소녀가 자라면 맹주로 섬기자는 암묵적인 합의를 해왔다.

소녀의 이름이 대려화, 무림맹에서 미리 붙여준 별호가 검후였다.

 

검후!”

입이 귀에 걸린 혈나한이 동굴 쪽으로 황소처럼 달려갔다.

백발신녀도 물 흐르듯이 그 뒤를 따라갔다.

장로님!”

흑의여인, 검후 대려화는 보검을 칼집에 꽂으며 노인들에게 목례를 했다.

대공을 이룬 것을 경하하네. 무림맹이 십팔년만에 다시 맹주다운 맹주를 갖게 되었어.”

대려화 앞에 이른 혈나한은 합장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대려화의 성취는 자신들 사대장로에 필적하거나 심지어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오매불망 무림맹의 재건을 꿈꾸던 혈나한으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계집이니 장로님들께서 잘 이끌어주시길 바라겠어요.”

혈나한에게 인사를 한 대려화는 백발신녀를 돌아보았다.

오랫만에 뵈옵니다. 한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백발신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막 출관한 맹주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되는구먼. 삼문육가를 본맹에 재 가입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팔비나타 당천성의 막내딸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고 하네.”

팔비나타의 막내딸이라면 사천일교(四川一嬌) 당아연이란 아이지요?”

대려화의 서늘한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올해 겨우 열 일곱 살 밖에 안된 어린 아이라 걱정이 많다네.”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요?”

상취개선이 직접 수색을 지휘하고 있는 중이라네.”

혈나한이 백발신녀의 말을 이어 받았다.

개방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흉수의 행적이 금릉으로 이어진 것같다고 하는데... 마침 금정사태가 제자인 소심(素心)이와 함께 금릉 근처에 머물고 있어서 도움을 청하는 전서구를 보냈네.”

잘 하셨어요. 본맹을 위한 당문주의 역할을 떠나 한 아이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 저도 금릉으로 가서 돕도록 하겠어요.”

스릉!

대려화는 다시 검을 뽑았다.

혈나한이 말했다.

이 늙은이들도 함께 가서 돕도록 하겠네.”

아니에요. 두 분 장로님은 워낙 저명하셔서 움직이실 경우 천마련의 이목에 포착 될 수밖에 없어요.”

대려화는 검을 발치로 떨구며 말했다.

떨어지던 검은 지면으로부터 한자쯤 되는 높이에서 멈췄다.

일리가 있네. 늙은이들이 동행하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맹주의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겠지.”

백발신녀는 허공에 뜬 대려화의 검을 보며 말했다.

지잉! 화악!

직후 검을 중심으로 강대한 기운이 확 일어났다. 일종의 검기인데 매우 밀도가 높아서 마치 검이 거대해진 것처럼 보였다.

허어 검강(劍罡)까지...!”

단번에 길이 삼장(三丈)에 폭이 다섯 자쯤으로 늘어나는 검을 보며 혈나한은 감탄했다.

검강은 검기가 극한까지 압축되면 형성되는 것으로 강철을 새순처럼 자를 수 있다.

당금 무림에서 검강을 구사할 수 있는 검객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당아연 건은 제게 맡겨주시고 장로님들께서는 무림맹의 현안에 집중해주세요.”

대려화는 거대해진 검에 올라서며 말했다.

그리하겠네.”

조심하게.”

두 노인은 증손녀뻘인 대려화에게 고개를 숙여 복명했다.

거대해진 검의 날 위에 굴진자세로 올라선 대려화는 뒷발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이 기울어지며 검극(劍極;검의 끝부분)이 허공으로 향했다.

연락은 개방을 통해서 하도록 하겠어요.”

대려화는 두 노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투학!

직후 거대한 검은 번개가 치달리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대려화를 태운 거대한 검은 몇 리 밖을 날고 있었다.

허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겠구먼. 서른 살도 안된, 그것도 여자아이가 어검비행(御劍飛行)을 구사할 수 있다니...”

손을 이마에 붙인 혈나한은 어느덧 작은 점이 된 대려화를 보며 감탄했다.

백발신녀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자천존께서 직접 지목한 후계자예요. 십팔 년 만에 저 정도의 성취를 보이는 게 노신으로서는 그리 놀랍지도 않군요.”

신녀의 말이 맞소. 비록 십팔 년 전에는 우릴 실망시켰지만... 결국 우리에게 희망을 남겨주신 것도 전대 맹주이신 그분인 것이오.”

혈나한은 투박한 손을 모아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자질로만 보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제이(第二)의 사자천존인데...)

기꺼워하는 혈나한과 달리 백발신녀의 고운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다만 저 천고기재가 여자라는 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걱정이 되는구나.)

백발신녀는 혈나한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같은 여자인지라 대려화가 여자로서 감당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난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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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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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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