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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맞은 재앙(災殃)

 

 

 

감사합니다 손님! 또 들러주십쇼!”

독천존 서래음은 점소이의 곰살맞은 배웅을 받으며 흥륭객잔을 나섰다.

(만독의종(萬毒義從)의 보고에 의하면 망산쌍독, 그 죽일 놈들은 금릉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가며 독천존은 생각에 잠겼다.

독천존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도 좋아하지 않아서 대처(大處)에는 거의 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천존이 강남, 아니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금릉에 온 것은 망산쌍독을 잡기 위해서였다.

 

도척총림 정도의 결속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독을 쓰는 문파, 독문(毒門)들 사이에도 결사가 존재한다.

만독의종이라는 느슨한 조직이 그것이다.

의종(義從)은 섬기며 따른다는 뜻이다.

독문의 대부분은 만독조종(萬毒祖宗)이란 인물을 시조로 섬긴다.

만독조종의 위업을 기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것이 만독의종이다.

만독의종의 맹주는 대대로 만독동천(萬毒洞天)이란 문파의 문주가 맡아왔다. 만독동천을 세운 인물이 만독조종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만독동천의 당대 문주가 독천존이다.

망산쌍독이 공동문주인 독묘파 역시 만독의종에 속해있다.

한데 망산쌍독은 자신들의 맹주이기도 한 독천존에게 죄를 짓고 도주 중이다.

 

(노부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실혼고(失魂膏)를 훔쳐갔으렸다!)

망산쌍독을 떠올린 독천존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넘실거렸다.

얼굴이 녹색인 노인이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건 괴기스럽기만 하다.

앞쪽에서 오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물살처럼 갈라진다.

독천존으로서는 늘 겪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감히 노부에게 죄를 지은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깨닫게 해주마.)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와중에서도 독천존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망산쌍독이 천둥벌거숭이같은 놈들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무림 칠대고수의 일인이며 만독의종의 맹주인 자신에게 죄를 지을 줄은 몰랐다.

(정황상 그놈들은 한왕 주고후와 선이 닿아있다. 어쩌면 실혼고를 훔친 게 한왕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오싹!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독천존은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 시선을 느끼자 마치 알몸으로 맹수에게 노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똑같다!)

독천존은 전에도 한번 이런 느낌을 경험했었다.

 

사자천존 초천강(楚天綱)-!

지금은 은퇴한 무림맹의 전 맹주를 처음 대면했을 때였다.

독천존은 사자천존이 흘려내는 위압감에 난생 처음 무릎이 꺾일 뻔 했다.

그 정도로 사자천존의 무위(武威)는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사자천존을 만나기 전에 천마련의 련주 철면마존도 보았었다.

철면마존 역시 대단한 위압감의 소유자였지만 독천존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림인들은 사자천존과 철면마존을 호적수라 생각한다.

하지만 독천존이 보기에 철면마존은 사자천존과 대결할 경우 필패(必敗)할 게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자천존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해버렸다.

사자천존의 돌연한 은퇴로 인해 무림맹은 일거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철면마존의 천마련이 어부지리로 무림의 패권을 장악했다.

십오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놈, 사자천존이 노부를 내려다보던 때 느꼈던 위압감과 유사하다!)

독천존은 숨이 콱 막혀서 걸음을 멈추었다.

팔십 평생 단 한번 경험했었던 전율이 다시 한 번 온몸으로 치달렸다.

누군가 우내칠절의 일인이며 독문제일인인 자신을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다!

살펴보는 시선에는 일격에 반드시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결의가 서려있다.

어이쿠!”

아이 참, 갑자기 멈춰서면 어떻게 해요?”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독천존에게 부딪히며 궁시렁 거린다. 인파에 섞여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생긴 소란이다.

독천존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히익!”

... 죄송합니다!”

독천존의 푸른 색 눈에 번개가 흐르는 걸 본 뒤쪽 사람들이 기겁하며 좌우로 갈라진다.

(사라졌다!)

왔던 길을 둘러보던 독천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노부도 늙어서 망령이 든 걸까?)

독천존이 허탈해 할 때였다.

<해냈다!>

누군가의 사념(思念;생각)이 독천존의 머릿속을 울렸다.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면 간혹 다른 사람의 생각이 읽히기도 한다.

방금 전 누군가의 사념이 읽힌 것도 독천존의 내공이 워낙 심후한 결과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독천존은 눈을 부릅뜨며 가던 방향을 홱 돌아보았다. 자신을 노리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은 착각도 망령도 아니었다.

독천존의 푸른 눈이 앞쪽의 모든 인간을 순간적으로 훑었다.

사념이 읽힌 방향은 앞쪽이었다.

모든 인간은 제각각 다른 기운을 흘린다. 목소리나 지문이 모두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내공이나 정신력이 강하면 흘리는 기운도 짙어진다.

물론 다양한 인간의 서로 다른 기운을 구분하려면 내공과 안목이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무림 칠대고수의 일인인 독천존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기운을 읽으려 시도하는 독천존의 눈에는 거리를 오가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저 놈이다!)

독천존의 푸른 눈이 부릅떠졌다.

무채색의 군상들 중 너무도 뚜렷하고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의 소년이다.

화악!

독천존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경이적인 속도로 소년을 덮쳐간 것이다.

“!”

사람들에 섞여 걸어가던 소년이 고개를 조금 돌려 뒤를 돌아본다.

슈욱!

독천존의 팔이 확 길어지며 소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늘어났던 팔이 빨려들 듯 줄어들며 독천존은 소년에게 들이닥쳤다.

!

헌데 소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여긴 손아귀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독천존은 불신에 휩싸여 급정거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노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팔십 평생 헛손질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화악!

전광석화처럼 이동한 독천존이 급정거하면서 강렬한 돌풍이 일어났다.

!”

꺄악!”

멈춰서는 독천존 주변의 사람들이 돌풍에 휘말려 비틀거리거나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 저 늙은이가 언제 여기에...”

히익!”

... 귀신이다!”

공간 이동하듯 나타난 독천존을 본 주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분명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빠져나갔다. 이런 수준의 경신술과 보법은 도둑들의 왕인 야유신 정도만이 구사할 수 있을 텐데...)

독천존은 겁에 질려 물러서거나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녹색 눈썹을 찡그렸다.

(도둑들의 왕 야유신!)

그 직후 독천존의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렸다.

(설마...!)

그는 급히 품속에 손을 넣어 뒤졌다.

(전낭(錢囊) 뿐만 아니라 온갖 극독이 들어있는 살천독낭(殺天毒囊)도 사라졌다!)

폼 속을 뒤지는 손아귀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독천존은 몸서리를 쳤다.

자신은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전낭이야 그렇다 쳐도 살천독낭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

독천존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특히 살천독낭 안에 들어있는 구룡짐독(九龍鴆毒)은 통제에서 벗어날 경우 사방 천리 내의 모든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

삐익!

독천존은 입술을 모아 높고 긴 휘파람을 불었다.

 

***

 

부운은 대로 변 뒤쪽의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골목길은 한산해서 오가는 사람이 없다.

발자국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달리는 부운의 양손에는 크고 작은 주머니가 들려있다. 천으로 만들어진 돈주머니와 상당히 큰 가죽 주머니다.

주머니들은 방금 전까지 독천존 서래음의 품속에 들어 있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한 가죽 주머니가 살천독낭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부운이 알 리 없다.

 

천불투는 한번 본 것을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는 부운의 능력을 만천신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부운의 능력은 도척이 지녔었다는 만천신안 이상이다.

눈빛에 의지를 담아서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손이 닿아있는 상황에서는 물건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

부운이 천불투와의 주사위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능력 덕분이었다. 사발 안에 들어있던 주사위를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숫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부운은 독천존을 따라가며 눈빛으로 위협을 했었다.

절세 고수답게 독천존은 즉각 알아차리고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뒤따라가던 사람들이 독천존과 부딪히는 일이 벌어졌다.

독천존과 몸을 접촉했던 사람들 중에는 물론 부운도 있었다.

몸이 닿는 순간 부운은 경이적인 속도로 손을 써서 독천존의 물건을 턴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부운은 달리면서 오른쪽 어깨를 곁눈질 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투도술을 전력으로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켜버렸다. 과연 독천존이 칠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힌 게 우연이 아니었다.)

푸스스!

부운이 곁눈질하는 오른쪽 어깨의 옷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노독물의 손이 몸에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옷이 독기에 부식되어 부서지고 있다. 삼보면천으로 피하지 못했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부운이 식은땀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삼보면천은 천불투를 오대신투 중 한명으로 만들어준 경이적인 보법이다.

세 걸음만 움직이면 천벌이라도 피할 수 있다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삼보면천 덕분에 부운은 독천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삐익!

부운이 달려온 방향에서 높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 독천존이 날 찾기 위한 수단을 발동한 모양이다.)

부운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

 

삐이익!

독천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높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 뭐야 저 늙은이? 맛이 좀 간 건가?”

어린 애도 아니고 백주대로에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다니... 뭘 하는 거지?”

길가로 물러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독천존을 보고 있었다.

삐익! !

그 사이에도 독천존이 부는 휘파람 소리는 점점 더 높고 급박해졌다.

!”

... 저거...”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오오!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 같은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지자 드러난 구름 같은 것은 엄청난 숫자의 말벌들이었다. 무려 어른 손가락만한 크기의 말벌 수천마리가 구름처럼 내려오는 것이다.

... 말벌이다!”

... 도망쳐!”

히익!”

거리는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주변 가게들은 급히 문을 닫았다.

말벌이 얼마나 사납고 치명적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독천존의 머리 위로 내려오고 놈들은 일반적인 말벌들보다 몇 배 더 크다. 말벌의 다른 이름인 작봉(雀蜂;참새만한 벌)에 잘 어울리는 크기다.

부웅! !

거대한 말벌들은 독천존의 머리 위 삼장쯤에서 고리 형태로 소용돌이치며 대기하고 있었다.

대독금봉(大毒金蜂)! 노부의 물건을 훔쳐간 도둑놈을 찾아라! 지체하면 안된다.”

휘파람 불기를 멈춘 독천존이 손을 저으며 외쳤다.

붕붕!

그러자 말벌들은 마치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 짓을 했다.

화악! 부우웅!

대독금봉이라 불린 말벌들은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구룡짐독에 비하면 망산쌍독이 훔쳐간 실혼고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쏴아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말벌들을 보며 독천존은 이를 부득 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룡짐독을 회수해야만 한다. 자칫하다가는 금릉의 모든 인간이 죽을 수도 있으니...)

독천존은 납덩이를 삼킨 심정이었다.

소매치기 당한 물건의 위험성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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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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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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