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7. 13:16 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8화 도척제전, 도둑들의 축제
8화
도척제전(盜跖祭典), 도둑들의 축제
“송(宋) 초기의 인물화 대가 고문진(高文進)이 그린 명비별리도(明妃別離圖)의 모사(模寫)가 끝났어요.”
부운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명비(明妃)는 한(漢) 나라 때의 미녀 왕소군(王昭君)를 말한다.
왕소군은 중국 사대미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절세미녀다.
하지만 궁중의 화공(畫工;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초상화는 추녀로 그려졌다.
당시의 황제 원제(元帝)는 왕소군을 추녀로 여겨 흉노의 추장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주었다.
이윽고 호한야선우가 떠나는 날 처음으로 왕소군을 본 원제는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을 주기로 했으니 물릴 수도 없었다.
대신 왕소군을 추녀로 그린 모연수를 처형하여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명비별리도는 왕소군이 중원을 떠나 흉노로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수고했다.”
천불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원본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
천불투는 탁자에 놓여있던 두루마리를 펼쳐서 부운이 그린 그림 옆에 나란히 놓았다.
펼쳐진 두루마리의 그림은 부운이 그린 그림과 완전히 똑같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두루마리의 그림은 낡은 느낌이지만 부운의 그림은 밝게 보인다는 정도였다. 새 종이에 그려진 탓에 생긴 차이였다.
“감쪽같구나. 인물들은 물론이고 왕소군이 타고 있는 말과 주변 풍경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해. 바탕 재질이 다른 것만 빼면 어느 쪽이 진본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게다.”
두 장의 그림을 비교하며 천불투는 감탄했다.
“오래 본 것도 아니고 일별(一瞥), 말 그대로 한번 흘깃 본 그림을 어떻게 똑같이 모사를 한 것이냐?”
천불투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부운에게 물었다.
“이치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본 건 그게 무엇이든 제 머리 속에 완벽한 형태로 각인(刻印)이 되곤 해요. 전 그걸 그냥 다시 종이 위에 풀어내면 되구요.”
부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운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손을 대면 그 내력을 완전히 알 수 있다.
그 능력 덕분에 슬쩍 만진 것만으로도 두루마리 안의 그림을 머릿속에 완전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부운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외조부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천불투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아마도 넌 전설 속의 만천신안(瞞天神眼)을 타고 난 것같다.”
“하늘을 속이는 신의 눈... 거창한 이름의 능력이로군요.”
“만천신안은 도둑들의 영원한 왕 도척께서 지녔었다고 알려진 능력이다. 만천신안 덕분에 도척께서는 누구든 속일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속지 않았다고 한다.”
“도척이 도둑들의 왕이 된 배경에는 만천신안이라는 능력이 있었군요.”
“무엇이든 본 즉시 복제해낼 수 있는 만천신안의 능력은 투도 뿐 아니라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적이 사용하는 무공의 허실을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겠네요. 적의 허점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너의 만천신안은 좀 더 보안을 해야만 한다.”
천불투가 그림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제가 명비별리도를 모사하면서 실수를 한 부분이 있나요?”
“원본에서 잘못 된 부분을 찾아봐라.”
“원본의 잘못 된 부분이라면...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는데...”
부운은 원본 그림을 살펴보며 갸웃 했다.
원본에 어떤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사는 완벽했다.
천불투가 물었다.
“명비별리도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느냐?”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單于;왕, 추장)를 따라 중원을 떠나는... 아!”
부운은 외조부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비로소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알아차렸느냐?”
천불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예!”
부운은 원본을 살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소군을 수종하는 시녀와 하인들뿐만 아니라 흉노의 군사들까지 모두 우는 표정이로군요.”
그림 속의 모든 사람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하녀와 하인들뿐 아니라 말고삐를 잡은 유목민과 뒤따라오는 기병들도 모두 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절세미녀를 얻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흉노의 군사들이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 울상을 하고 있다는 건 이 원본 그림도...”
“물론 위작(僞作;흉내 내어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천불투는 원본을 집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당대의 도수(盜首)인 야유신(夜遊神)이 젊은 시절에 모사한 위작이다. 물론 군사들의 표정을 원본과 다르게 그린 것도 야유신이었고...”
야유신은 오대신투 중 한명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도둑이기도 하다.
부운이 진품으로 알고 있었던 명비별리도는 야유신이 그린 위작이었던 것이다.
“제가 베끼는데 급급해서 그림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놓쳤군요. 그 때문에 원본이 위작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부운은 한숨을 쉬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집어들었다.
“진정한 만천신안은 겉이 아니라 실체와 알맹이까지 알아보는 경지다. 타고난 능력에 안주하지 말고 사물의 이치까지 꿰뚫어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천불투는 두루마리를 둘둘 말면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운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말면서 말했다.
“말해봐라.”
천불투는 두루마리를 완전히 말면서 의자에 앉았다.
부운은 외조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올해 열리는 도척제전에는 참가하지 않으실 생각이신지요?”
-도척제전(盜蹠祭典)!
도둑들의 시조이며 영원한 우상인 도척(盜跖)을 기리는 제사다.
동시에 그 시대 도둑들의 수령, 즉 도수를 뽑는 대회이기도 하다.
도둑들은 매 삼년마다 열리는 도척제전에 자신이 훔친 가장 귀한 물건을 갖고 온다.
도척제전에 참석한 도둑들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물건의 주인이 다음 삼년 간 도수로 인정된다.
도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권위를 인정받아서 도둑들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중재하거나 심판을 내릴 수 있다.
근본 없는 좀도둑이 아닌 이상 도둑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척제전에서 도수로 선발되는 것이다.
“할애비가 왜 도척제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천불투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삼년전과 달리 준비를 하지 않으시는 것같아서...”
부운은 외조부의 눈치를 보며 마주 앉았다.
“할애비도 이제는 늙었다. 젊은 것들과 경쟁한 건 힘에 부치는구나.”
천불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편복귀(蝙蝠鬼)가 대륙전장의 금고에서 왕희지(王羲之)의 서첩(書帖)을 빼내는데 성공했다는 소문도 들리는구나.”
부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편복귀라면 할아버지와 함께 오대신투(五大神偸)에 드는 정체불명의 도둑 아닌지요?”
“지난 십년 사이에 야유신의 아성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해오고 있는 젊은 도둑놈... 그놈이 왕희지가 남긴 몇 권 안되는 서첩 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면 맞설 수단이 사실상 없다.”
(한 달 남짓 밖에 남지 않은 기한 내에 왕희지의 서책보다 귀중한 물건을 손에 넣기는 쉽지 않겠지.)
부운은 비로소 외조부가 도척제전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았다.
동진(東晉) 시대의 서예가이며 시인인 왕희지는 서성(書聖), 즉 서예의 성인으로 불린다.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던 그에 의해서 이전 시대까지는 그저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서예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역대 제왕들은 왕희지를 존경하여 그의 글씨 한자라도 얻으려 혈안이 되었었다.
특히 당태종 이세민은 누구보다 열렬히 왕희지를 추종하였다.
이세민의 영향으로 인해 왕희지의 서체는 이후 모든 서예의 근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세민은 왕희지가 남긴 최고의 작품 난정서(蘭亭序)를 너무도 아껴서 자신의 무덤에 함께 묻으라는 유언을 했다.
이에 구양순(歐陽詢)등 당대의 서예가들이 급히 난정서를 모서(模書)하여 후대에 남겼다.
편복귀가 정말로 왕희지의 친필 서첩을 손에 넣었다면 승부는 끝났다고 봐야한다.
왕희지의 글씨를 이길 수 있는 보물은 역사를 통틀어도 몇 가지 안된다.
소림사의 뿌리인 달마역근경도 그 중 하나다.
천불투가 세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했었던 것은 그저 부운이 익힐만한 내공심법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달마역근경을 훔칠 수만 있다면 도수로 인정받은 데에 무리는 없다.
천불투가 말했다.
“이번은 건너뛰고... 삼년 후에 열리는 차기 도척제전에 부운이 네가 할애비 대신 참가하도록 해라.”
“도척제전에서 우승하면 도수의 상징으로 흑령장(黑靈掌)이란 장갑(掌匣)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운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도척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는 흑령장은 지난 이십여년간 야유신이 독점해왔지.”
천불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운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 흑령장에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신통력(神通力)이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신통력이라...”
천불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도척께서는 늘 흑령장을 늘 손에 끼고 계셨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흑령장의 정확한 쓰임새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흑령장은 어떤 힘에도 훼손되지 않아서 손을 보호해주는 도구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천불투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흑령장이 도둑들의 왕인 도척께서 남기신 유물이다 보니 여러 가지 소문이 생겨났다. 그 소문들 중 하나가 흑령장에 도척의 혼백이 서려 있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것이다.”
부운이 긴장하며 다시 물었다.
“그 소문에 대한 할아버지의 의견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할애비가 알기로는...”
천불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부운은 긴장해서 숨도 크게 못 쉬며 외조부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잠시 끊어졌던 천불투의 말이 이어졌다.
“신통력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흑령장에는 그것을 소유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깃들어 있다.”
(역시!)
부운의 꽉 쥔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곁눈질로 그것을 힐끔 보며 천불투가 말했다.
“역대 도수들 중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이적(異蹟;기이한 행적)을 보인 분들이 계신다. 아마 그 이적들은 흑령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 게다.”
부운이 흥분을 숨기려 애쓰며 물었다.
“만일... 만일 흑령장의 힘을 빌면 어머니의 시력도 회복시킬 수 있을지요?”
천불투는 비로소 부운이 도척제전과 흑령장을 언급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흑령장을 지녔던 역대 도수들의 신변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고...”
(흑령장의 힘을 빌면 어머니가 다시 앞을 보실 수도 있겠구나.)
부운에게는 도척제전에 참가하여 우승해야하는 이유가 생겼다.
(부운이가 도수가 될 결심을 했으니 도둑들의 세계에 한바탕 파란이 일겠구나.)
외손자의 속내를 짐작한 천불투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무슨 일이야 철두오빠?”
분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지금쯤 정칠오빠와 함께 금릉 성내에 있어야하는 거 아니야?”
부운과 천불투가 돌아보니 분이가 옆쪽을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부운이 안에 있냐?”
곧 철두가 헐떡이며 가게 앞에 나타났다.
“있기는 한데... 또 무슨 일 저지른 거야?”
분이가 철두에게 눈을 흘길 때였다.
“첫날인데 벌써 싫증이 난 거냐?”
부운이 가게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니면 또 무슨 말썽이라도 일으킨 거냐?”
“그게 아니고...”
부운의 추궁에 철두는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정칠이 놈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사색이 되어서 널 불러오라고 하더라.”
“그래?”
내뱉는 철두의 말에 부운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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